5월 24일 방영된 <정도전>에서 정몽주는 임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가 병중에 있는 동안 정도전을 없애고, 그와 함께 그들이 추진려던 역성 혁명의 싹을 짤라버리려던 정몽주였다. 하지만, 그런 정몽주의 시도가 이성계가 정신이 돌아오자 마자, 정도전의 처형을 미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려는 찰라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면서도 정몽주는 무장한 장수들과 군사들이 겹겹이 애워싸고 있는 이성계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놓을 수 없다. 자신과 정도전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칼을 들이미는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눈물로 읍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고 해서 권세를 누리려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맡기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애닳게 잡은 이성계의 손을 정몽주는 밀어낸다. 그리고 돌아가 정도전을 처형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런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이제 당신과 절연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몽주에게 연연해하는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긴 이방원은 지필묵을 가지고 정도전을 찾아간다.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하지만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초조해 하는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며, 정몽주를 제거하면 자신들의 혁명은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라며 이방원의 청을 물린다. 

그런 아버지와, 정도전의 태도를 우유부단함으로 여긴 이방원은 결단을 내린다. 정몽주를 청해 그 유명한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기를 통해 설득을 하고, 그에 정몽주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의 단심가의 화답을 받고,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선죽교 다리 위에서 죽여버린다. 영문도 모르고 감옥에서 나오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죽은 것을 알고 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한다.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효한다. 어떻게든 피를 덜보고, 정당성을 놓치지 않고, 민심을 얻으며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던 정도전과 이성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정도전 정몽주 단심가
(사진; tv데일리)

39회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의 유동근이 정몽주 역의 임호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모습은, 그 어떤 드라마의 애정씬 못지않게 간절했다. 역대 어느 드라마의 남녀 배우가 이렇게 간절하게 등을 돌린 연인을 향해 진심어린 애원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정도전>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는 전혀 오글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계의 진심으로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시고 역성 혁명을 도모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이성계와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이라는 뜻을 같이했던 정치적 동지였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은인에 가깝다. 세상이 아직 이성계와 정도전을 알아보기 전부터, 정몽주는 그들을 알아봐주고, 그들의 뜻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정치적 행동을 했던 동지였다. 그런 정몽주였지만, 오랜 정치적 행보의 끝에 이제,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는 궁극의 입장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는 뜻을 달리한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역사 이야기 속에서 정몽주는 그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고려의 충신일 뿐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그런 모습이 드러났다. 정적들을 제거하고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라는 건의를 한 반면, 같은 글자에서 시작한 정몽주는 전혀 다른 충성 충(忠)자를 새겨 고려라는 테두리를 이성계에게 각인시켰다. 물론 드라마에서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토지 제도를 둘러싼 유학들의 대립에서, 대지주 출신의 이색 등이 토지 제도 개혁을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 계급 출신의 정몽주 역시 그런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강직한 유학자였던 그가 유학자로서의 역성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옳고 그르고는 고려의 멸망이, 그리고 조선의 건국으로 증명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표현대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 리가 없을 진대, 대들보가 썩어버린 고려를 붙들고 있었던 그의 신념은 우매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과일 뿐이다. 당대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정몽주의 신념과 행보는 드라마<정도전>을 통해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설득력을 가진다. 자신이 몸담았떤 시대를 쉽게 지워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정몽주를 통해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충신으로서, 혹은 계급적, 사상적 한계를 넘지 못한 사람으로서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그 어떤 한 측면에서 규정짖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한 명의 생생한 캐릭터로서 부각시킨다. 강직한 유학자였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그 역시 정도전이 그랬듯, 스스로 정치적 모든 수단을 도모하여야만 했던 인물, 그러나 무력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에게 자신들이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했던 인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절친이었던 정도전과, 정치적 동지였던 이성계의 간청을 밀어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시대를 넘어설 수 없었던 보수주의자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살려낸다. 그래서 그저 선죽교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피로만 기억되었던 고리타분한 역사 속 위인은 고려말 격동기를 자신의 목숨을 다해 신념을 지켜내려 했던 인물로 되살아 났다. 간신 이인임을 권문 세족의 대표이자 정치적 실권자로서의 노회한 이인임으로 살려낸 데 이은, <정도전>의 또 하나의 성과이다. 


by meditator 2014. 5. 25. 02:31

1997년 11월 23일부터 2001년 11월 4일까지,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기에 그 시대적 담론에 걸맞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바로 <성공시대>였다. 그로부터 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고도 성장을 거듭하던 나라도 아니고, 그 시절처럼 '성공'이 시대적 화두가 되지도, 될 수도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성공시대를 거쳤던, 혹은 전설이라 불리울 정도의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되었던 인물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mbc에서 새롭게 선보인 <전설의 비밀>은 바로 그 전설이라 불리워졌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한번 불러낸다. 


첫 회 <전설의 비밀>에서 불러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 가장 많은 커튼 콜을 받은 프리마돈나 강수진과 88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김재엽, 대우 전자 사장으로 탱크주의 광고를 통해 더 잘 알려진 배순훈 씨이다.  mc를 맡은 이성재가 각가 이 세 사람을 찾아가고, 인터뷰와 함께, 이미 전설로 알려진 이후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뉴스엔)

<전설의 비밀>의 제작 방식은 <성공 시대>의 그것과 흡사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성공 시대>가 변창립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에 의해 진행되었다면, <전설의 비밀>은 이성재의 인터뷰라는 방식의 변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용은 <성공 시대>와 흡사하다. 강수진 편에서 그녀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시절의 활약상, 김재엽 편에서 그의 88올림픽 금메달 수여식, 대우전자 시절의 배순훈 사장의 광고 영상 등 과거의 영상이 소개되고, 역시나 <성공 시대>처럼 김재엽의 중학 시절, 배순훈 사장의 대우 전자 사장 시절이 재연 드라마의 형식으로 삽입된다. 

하지만, <전설의 비밀>은 그저 예전처럼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촛점을 맞추지 않는다. 강수진의 경우 수투트가르트 발레단 무용수에서 국립 발레단의 단장으로, 김재엽의 경우 국가대표 유도 선수에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동서울대 경호학 교수로, 이제 70이 넘은 배순훈은 창원 S중공업의 무보수 사장으로 지내는, 전설이 된 이후의 삶에 대해 조명한다. 
각자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 강수진의 경우, 왜 국립 발레단의 단장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라는 결심 과정을 인터뷰하고, 단장이 되었음에도 은퇴를 2016년으로 정한 채 여전히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흔 후반의 발레리나의 분주한 나날을 보여준다. 
제2의 인생이라도 김재엽은 전혀 다르다. 어린 시절 악동에서 국가 대표 유도 선수가 되기 까지의 우역곡절이 많았듯, 유도 금메달리스트에서 마사회 유도 코치, 그리고 파벌 파동을 겪으며 유도계에서 퇴출당하며 자살의 고비까지 겪은 그가 경호과 교수라는 새로운 인생을 회복하기 까지의 인생역전을 재연해 낸다. 배순훈씨의 경우, 대우 전자가 망한 이후, 김대중 정부의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국립 현대 미술관 관장, 이제 다시 무보수 사장에 이르기까지 70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도전을 멈추지 않는 말 그대로 창조적 인생에 촛점을 맞추고, 거기에 덤으로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성공 비법을 찾으라는 멘토링까지 얹는다. 

김재엽 한국유도 파벌논란 언급 전설의 비밀
(사진; tv데일리)

'성공'이 화두가 되었던 시대의 전설이 되었던 이들은 그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순조롭게 프리마돈나로서 화려한 삶을 이어가고, 그 여파를 몰아 국립 발레단 단장까지 되었는가 하면,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자신의 꿈이었던 유도는 물론, 그 대신 선택해던 사업조차 철저히 실패를 거듭한 김재엽도 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지만, 개인적 발언이 정부의 입장과 달라 정보통신부 장관직 임명 1년도 안돼 사임을 하고, 그리고 국립 현대 박물관장이 되어서도 국회 청문회 발언과 태도 논란으로 인해 정작 국립 박물관 개관식에 내빈으로 초대 되어야만 하는 풍파를 겪기도 한다. 물론, 제목이 전설이듯이 여전히 그들은 또 하나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90년대가 추구했던 수직적 상승 곡선의 성공과는 느낌이 다르다. 전설이지만, 마치 이제는 거울 앞에선 누님처럼, 전설의 자리에 등극한 이후 각자 저마다의 분야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시절이 훈장처럼 드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의 비밀>은 전설의 자리를 지기키 위해, 혹은 전설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온 이들의 성공담으로 2014년판 <성공시대>라 할만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그 시절 <성공시대>처럼 겉훑기식 성공담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21세기에 어울리려면, 예를 들어, 국립 현대 박물관장직을 그저 신선한 도전이 아니라, 낙하산 임명을 슬쩍 짚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터뷰의 내용으로 삼아 배순훈 사장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국정 감사장의 태도 논란을 이제 와 터놓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또 하나의 성공 시대가 아니라, 고비를 넘겨서도 여전히 탱크처럼 추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의 멘토로서의 진면목을 읽어낼 수 있고, 뻔한 성공담을 넘어선 공감을 얻을 것이다. 

좀 구태의연하면서도, 전설로 여겨지던 이들의 후일담을 보는 면에선 신선했던 <전설의 비밀>은 그래도, 지난 몇 주간 목요일 그 시간을 채웠던 예능 프로그램들에 비하면 한결 충만하다. 타 프로그램과의 시청률 경쟁을 넘어, 좀 더 유의미한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설의 비밀>은 꽤 유익했으며 타 방송의 예능과의 차별성도 분명했다. 지난 몇주간 mbc 프로그램 중 굳이 한 표를 던져야 한다면, <전설의 비밀>에 한 표를 던지겠다. <성공 시대>전설들의 후일담은 나름 무궁무진할 테니까.


by meditator 2014. 5. 23. 07:59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던가, 더구나 그것이 자기와 다른 이성의 속일 때야 더더욱 알 길이 없으니, 마치 자기와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이성의 속내를 알기 위해 청춘들은 이제 텔레비젼 앞으로 모여든다. 연애 코칭 프로그램 <마녀 사냥>이 인기를 끌자, 우후죽순 그와 비슷한 컨셉의 프로그램 들이 등장하고, 그 중 <로맨스가 더 필요해>가 걸출한 입담을 가진 패널들의 포진으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연애를, 결국은 또 하나의 사적인 잣대로 재단하는 <로맨스가 더 필요해>가 과연 정말 바람직한 연애 코칭 프로그램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5월 21일 방영된 <로맨스가 더 필요해>에서는 역시나 <마녀 사냥>처럼 자신의 연애를 상담하는 시청자의 사례가 등장했다. 7년간 남자 혼자 여자를 짝사랑하다 뒤늦게 사랑의 결실을 맺은 남녀, 하지만 막상 연인이 되어보니, 이 남자 친절하다는 표현을 넘어선 집착이라고 보여지는 행동들이 여자에게는 거슬리기 시작했다. 회식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건 혼자 밤길에 위험해서 그렇다 쳐도, 여자의 sns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보며 과거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샅샅이 조사하는 행태는 과연 이 사람이 정상일까 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여성의 질문에 대해 패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는데 대체적을 남성 패널과 여성 패널의 의견이 갈린다. 
남성들 중 조세호는 마치 상담 사례를 보낸 여성의 상대방 남성이라도 되는 양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럴 수 밖에 없는 남성의 입장을 대변한다. 봉만대 감독은 한 술 더 떠서 '집착도 사랑이다'라는 정의를 내세우며 그의 집착이 당연히 연애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행동이라 편을 든다. 다른 남성 패널들도, 그 정도는, 혹은 남성의 집착은 있을 수 있는, 혹은 남성에게는 연애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행동이라는 반응이었다.

(사진; 마이데일리)

반면에, 라미란을 비롯한 여성 패널의 의견은 그와 궤를 달리한다. 물론 mc 박지윤은 자신의 사례를 들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경우라는 생각을 피력하면서도, 여성이 불편을 느낄 정도라면 결혼 상대로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한다. 그에 반해 라미란은 한결 완강하다. 그것은 사랑으로 덮어주기에는 지나친 집착이며,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용인한다면, 결혼을 해서도 그녀는 그의 의견에 무조건 맞춰주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라 단언한다. 

물론 <로맨스가 더 필요해>에서도 이른바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 좋은 연애 연구소 소장 김지윤은 그런 남성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다. 하지만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마치 자신이 그 남성이라도 된 양 목소리를 높이는 조세호 등의 공세에, 전문가의 의견은 힘을 잃는다.

결국 마치 여성편 남성편이 되어 의견이 갈린 듯한 이 사례는 패널들의 투표로 5;5 라는 동률의 결과로 마무리 되었다. 물론 몇 가지 사례의 첨언이 있었지만, 마치 그런 남성의 이상 행동은 위험하다기 보다, 사랑에 못이긴 집착으로, 하지만 좀 지나치긴 하다는 식으로 마무리 되었다. 과연, 이 사례가 여성과 남성의 입장 차이로, 투표로 결정될 그런 사안이었을까?

이렇게 물에 물탄 듯 마무리 된 이 남성의 사례를 바로 한 주 전에 방영된 < 매직 아이>에서는 바로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한 사례로 정의내린다. 남녀간의 사이에서 바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지 않는 이러한 '집착'이 때로는 신체적 상해나 심각하게는 살인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짚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징조로 보여지는 남성의 이상 집착에 대해, <로맨스가 더 필요해>는 안일한 태도로 일관한다. 특히, 남성 패널들은 마치 그런 것이 남자들이라면 한번씩은 겪는 것인 것마냥 당연시하기도 한다. 라미란이 정색을 하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김지윤이 문제 행동이라 짚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여자들의 하나의 의견처럼만 수렴되는 식이다. 

만약에 <마녀 사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사례에 대한 접근은 흥미 위주로 들어가되, 진단과 처방에 있어서는,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지점을 똑바로 짚었을 듯하다. 성시경이나, 허지웅이 남자라고 해서, 자신들의 습성이나,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런 남성을 편들지 않을 것이며, 이른바 전문가연 하는 곽정은은 외국의 진짜 전문가와 통계까지 들먹이며 제 아무리 연애라 해도 상대방의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행동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마무리를 분명하게 지어주었을 것이다. 

<로맨스가 더 필요해>와 <마녀 사냥>이 비슷한 연애 코칭 프로그램처럼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마녀 사냥> 역시 객관적인 연애 코칭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지만, <로맨스가 더 필요해>처럼 분명히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 조차, 남성들의 관성이나 관습에 맞춰 두둔하는 식의 관성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두 프로그램의 차이는 확연해 진다. <로맨스가 더 필요해>는 사안의 객관적인 접근은 물론, 독립적 존재로서의 개인에 근거한 중립적 태도보다는, 이번 사례처럼 집착의 정도가 지나친 경우에는 조세호의 입장이, 시댁과의 관계에서는 박지윤의 경험이, 혹은 감독 봉만대의 시각이그 사안의 객관적 접근을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연애 코칭이 아니라, 동네 아줌마의 사적 경험에 근거한 훈수 두기 수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아줌마를 만나면 이런 훈수를, 저 아줌마를 만나면 저런 훈수를 두는 이현령 비현령의 결과가 되고 만다. 

물론 <로맨스가 더 필요해>건, <마녀 사냥>이건, 애초에 패널 개인의 사적 경험에 근거한 누군가의 연애 코칭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라는 공중의 전파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인 한에서, 적어도 최소한의 사회적 시각은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제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찜질방 동네 아줌마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아니다. 요즘 동네 찜질방 아줌마들도 라미란씨처럼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그런 남자는 위험하다고. 자신들의 찌질함과, 사회적 문제 행동이 구분되어 지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연애 코칭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by meditator 2014. 5. 22. 08:44

공교롭게도 공영방송 kbs2의 월화 수목 드라마는 복수를 꿈꾸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5월 20일 방영된 <빅맨> 8회,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두 장의 유전자 검사서를 손에 쥔 강지혁(사실은 김지혁, 강지환 분)은 소미라에게 달려간다.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해도 당신만을 믿을 만하다고 했던 소미라가 김지혁에게 전해준 말은 '미안하다'였다. 달려온 김지혁에게 강동석(최다니엘 분)은 말한다. 원래 가진 것이 없었던 당신은 그저 잠시 가졌다가 다시 빼앗겼을 뿐, 원래 잃은 건 없지 않냐고. 하지만, 김지혁은 포효한다. 절대 잃어서는 안될 걸 잃어버렸다고. 왜 나에게 가족이라고 속였냐고. 당신들에게 꼭 되갚아 줄 거라고.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김강우 분)도 마찬가지다. 은행을 다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 가게 할 돈 좀 융통할 능력도 없냐며 다그치던 그가 서동하로 인한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좌절하고 분노한다.

(사진; 뉴스엔)

<빅맨>의 김지혁과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은 그저 평범한 사내들이었다. 비록 가진 건 건강한 몸 밖에 없는 김지혁이지만, 한때 몸 담았는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시장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려던 사람이었다. 강도윤 역시 마찬가지다. 얼른 검사가 되어 고생하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보겠다는 꿈에 부풀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챙기는 재벌가의 이기심이, 상위 1%의 커넥션 안에서 재미 좀 보려던 경제계 관료의 삐뚫어진 행태가 그를, 그의 가족을 희생으로 삼는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저 평범하게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이나 챙기며 살았을 그들이 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이기적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과 가족의 미래를 빼앗기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개인과, 화목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해 낸다. 

<위험 사회>에서 올리히 벡은 오늘날의 정치는 오늘날의 사회 제도들이 양산해 내는 항시적 위험으로 인한 공포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근자에 우리 사회를 좌절과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세월호에서 부터, 잊을만하면 우리 사회 전체를 혼돈에 빠뜨리고 마는 각종 전염병, 핵 등으로 인한 재해 등이 단지 우연히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근거로 한 근대적 체계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위험 요소들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됨으로써, 그런 공포가 사람들을 자각하게 만들고, 21세기의 정치적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게 <위험 사회>의 정치적 시민의 자각 과정은 <빅맨>과 <골든 크로스>의 분노와 유사하다. 원자화된 개인이나, 전근대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살 수 있을거라는 개인들이, 자신들에게 닥쳐 온 자신들의 힘으로써는 어쩌지 못할 구조화된 제도를 등에 업은 기득권 세력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당장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또 다른 개인들의 이기주의처럼 보이지만, 진실에 다가갈 수록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희생'시키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형태이다. 희생자였던 김지혁이 오히려 재벌 아들 강동석을 대신하여 검찰에 체포되고, 사기범으로 몰리며, 그 과정에서 철저히 검찰과 변호사는 현성 그룹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왜곡하는 그 과정이나, 희생된 것은 강도윤의 동생인데 서동하의 측근 들을 통해 오히려 강도윤의 아버지가 범인으로 몰리게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저 '개인'이고, '가족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분노하고, 깨달으면서,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진; 뉴스엔)

개인의 분노에서 출발한 <빅맨>과 <골든 크로스>는 그 개인적 분노가 그저 한 개인의 일이 아님을 드라마를 통해 착실히 밝힌다. 재벌 회장가의 자기 아들 심장을 탐하는 이기심이,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 국장의 탐욕이 상위 1%의 전횡과 부도덕의 항시적 산물임을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는 골몰한다.  드라마는 많은 회차를 할애해 주인공들의 복수 이전의, 그들을 파멸로 이끈 저들의 부도덕과 전횡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우리 사회의 불균등한 부가 그저 더 가진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덜 가진 사람들의 일상적 행복조차 짓밟을 수 있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음을 드라마는 밝힌다. 김지혁과 강도윤을 덮친 불운이 그저 그들에게 닥친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재해가 사회적 결과물이듯이, 그들에게 닥친 불행 역시 구조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위험 사회> 속 개인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공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 개인'으로 떨쳐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드라마는 분노로 시작된 주인공들이 그들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는 저들의 실체를 알고, 그들을 정죄하는 과정을 환타지로써 만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을 위한 각성의 교과서로 사용하고자 한다.모처럼 공영 방송으로서 수신료의 가치를 실천한다. 


by meditator 2014. 5. 21. 10:26

<서울의 달>이 방영된 건 1994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2014년의 <서울의 달>이라는 부제를 걸고 또 하나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JTBC의 <유나의 거리>, 무려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90년대 그 시절이나, 21세기의 오늘이나 밑바닥 인생들이 사는 삶은 그리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서울 어느 하늘 아래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질펀하게 그려내는 작가들이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랑>, <내가 사는 이유>, <화려한 시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까지의 노희경 작가는, 가난이라는 단어에 한 발을 담그고 사는 이웃들의 얼크러진 인생을 영상화시키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언제부터인가 노희경 드라마에서 더는 그 밑바닥 인생의 리얼리티는 점점 그 비중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제 그의 드라마는 화려하거나 세련된 배경의 주택을 배경으로 저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작가의 삶도 달라졌으니,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라진 걸 누가 뭐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가는 중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천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우리가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김운경이 바로 그 사람이다. 

굳이 예고편에서 <서울의 달>의 홍식과, <유나의 거리>의 유나가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유나의 거리>에서 극중 배경이 되는 유나가 사는 다세대 주택이 등장하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예전 흥식이 살던, 아니 언제나 김운경 작가의 작품에 익숙하게 등장하곤 했던 가진 것없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동네가 말이다. 

(TV리포트)

김운경 작가의 세계에서는 늘 집주인이 갑이다. 서울 하늘 아래 겨우 방 한 칸 얻어사는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그들이 김운경의 세계에선 재벌 회장님만큼 유세가 대단하다. <유나의 거리>에서도 다르지 않다. 유나가 세들어 사는 집주인 한만복(이문식 분)과 그의 아내는 이층 방에 세들어 살던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도 집주인의 이해 관계를 내세우며 그녀가 염치가 없다며 투덜거린다. 이런 식이다.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아랫 사람 부리듯하며, 갑으로 행세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뭐 그리 나아보이지도 않는다. 당장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를 슬쩍하는 소매치기들을 소매치기 하는 유나가 드라마의 처음을 이끌듯, <유나의 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폭 출신에 피눈물도 없어보이는 집주인의 한만복에서 부터, 형사 출신에 하도 돈을 밝혀 걸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봉달호까지 저마다 한 구석에 구린 냄새를 풍기며 그 세계를 이뤄간다. 
물론 구린 냄새만이 그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냉큼 죽은 여자의 노트북을 챙겼으면서도, 안타까운 죽음을 한 그녀를 위해 향을 피워주고 술을 따라주는 홍계팔처럼 푸근한 사람 냄새 또한 그들의 또 다른 면이다. 일찌기 <서울의 달>에서 제비족 박선생(김용건 분)과 미술 선생(백윤식 분) 그들처럼 말이다.
서울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살기 위해 눈 앞의 이익을 위해 파렴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또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김운경이 1990년대에도, 그릭 2014년에도 그려내고자 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이다.

사실 <유나의 거리>는 새롭지 않다. 극중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구도는 <서울의 달>의 그것과 흡사하고, 주인공 유나의 설정은 이미 작가가 <도둑의 딸>을 통해 써먹었던 설정이다. 극중 등장 인물들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김운경 작가 전작 들의 그 누군가가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 김창만에게서는 <서울의 달>의 춘섭이 떠오르고, 유나는 그 시절 홍식같기도 하다. 아니, 창만과 유나의 관계는 <서울의 달>의 홍식과 영숙의 관계가 역전된 듯하다. 어찌보면 자기 복제 같은데, 그 자기 복제를 모처럼 보니, 새삼스레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유나의 거리>의 첫 회를 보면서, 2014년에도 여전한 그 세계가, 아니 여전히 그 세계의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해주는 김운경 작가가 어쩐지 반갑기도 하면서, 늘 넉넉하고 화려한 드라마 속 인물들에 길들여지다 보니, 새삼, 아직도 저런 세계가 있었지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조차 느껴진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삼스레 그려지는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삶의 언저리의 저 이야기들을 과연 상류사회의 에스컬레이팅을 시도하던 사람들의 농염한 사랑 이야기 <밀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던 입맛으로 모처럼 시장통의 순대국을 모처럼 맛보게 되는 그런 기시감이랄까, 부디 모처럼 맛보는 <유나의 거리>가 푸근한 옛맛의 향수를 넘어 이 시대의 소문난 맛집으로 등극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5. 20. 10:21

우리가 신문 사회면이나, 뉴스를 통해 만나게 되는 어이없는 기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주차' 시비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까지 분쟁을 벌이다, 폭력을 불러오건, 심하면 상해 치사에 이르게 되는 사건들이다. 과연 이런 사건들을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그 흔한 이웃간의 각박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드라마 스페셜-부정주차>는 바로 그런 주차 문제로 빚어지는 이웃간의 갈등 속에 숨겨진 소시민의 애환을 다룬 모처럼의 수작이다. 


35세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노정도(온주완 분), 상식적이며 교양있는 변호사처럼 행세하고 다니지만, 시골집 아버지에게 용돈을 부쳐드려야 하는, 이제는 소형차를 몰아야 하는 처지의 월급쟁이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은 거주자 주차 구역에 당당히 차를 댈 권리와, 그런 그의 차를 함께 타고 다니는 여자 지현(장준유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내세울 유일한 권리인 거주자 주착 구역 그의 자리에 자꾸 차를 대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그 동네를 힘으로 평정한 택시 회사 사장 안상식(김상호 분)이다. 

남자들에게 차란 무엇일까? 지난 주 수요일 <매직아이>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특히 더 차에 집착하는 이유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남자 객원 mc로 출연한 이적은, 남자들에게 차는 곧 자신들의 상징, 거기서 좀 더 노골적으로는 남근의 상징처럼 여겨진다는 의견을 편다. 그러기에, 남성들은 자신의 차에 어떤 위해가 가해질 경우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해꼬지라고 한 것처럼, 심지어는 그 이상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근거에 더해서, 최근 빈번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주차 문제나, 아파트 층간 소음의 기저에는 바로 '재산권'의 문제가 있다. 겨우 힘들게 마련한 '나의 차', '나의 집', 바로 개인에게 있어,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를 재산적으로 증며할 유일한 근거인 그것이 위해를 입는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소유한 개인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정체성에 위해를 입은 것처럼 분노하게 된다. 


<부정 주차>에서 노정도에게 있어 차도 그런 남성적 자존심이자, 개인의 유일한 재산권의 증거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한때 사시를 준비했지만, 지금의 처지는 겨우 자기 몸 누일 방 한 칸에, 한때 대학 선배였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인 그가, 유일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증거가 자신의 차를 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거주자 주차 구역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자신의 차 대신 남의 차가 떠억하니 자리 잡았을 때, 더구나 그가 그가 사는 동네의 실세라는 이유만으로 법을 마구 무시하는 건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 이젠 은근히 민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노정도의 뜻모를 정의감은 분기탱천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적으로 삼는 안만식이 뭐 그렇데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동네 주민의 주차 구역에 무단 주차를 하며 행세를 하지만 택시 회사 사장이라는 그의 위세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 보여지듯이 사상누각에 불과한 처지일 뿐이다. 알량한 거주자 주차 구역 그 한 자리를 놓고, 그저 조금 더 가진 듯이 보이는 자와, 그것을 사수하려는 자의 밀고 밀리는 한 판, 그건 자본주의 사회 밑바닥 이전투구의 단면일 뿐이다. 낙수 효과는 커녕, 결국 나누어 가질 몫이 애초에 별로 없는 그 한 자리를 두고, 서로가 밀고, 밀리기 싫다며 벌이는 치킨 게임에 불과한 것이다. 

<부정주차>는 불쾌감으로 시작된 노정도의 태도가 지각을 할 지언정 차를 두고 출근하는 집착을 거쳐, 상대방의 차를 부수고, 자신을 쫓는 그와 차량 질주극을 벌이게 되기 까지, 폭주하는 소시민의 상황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분노에서 시작된 그의 감정이, 동네 주민들을 쑤석거려 안상식을 따돌리려 하거나, 편법을 써서라도 자신의 거주자 주차 구역을 지키려 하다, 그도 안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상대방의 차가 폭발에 이르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자기 분에 못이겨 상대방의 차를 때려부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본다. 물론 드라마는 희망적으로 끝난다. 그토록 자신이 가진 유일한 차에 집착하던 노정도는 그것으로 인해 결국 상대방의 차를 폭발시키고, 그로 인해 자신도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향하는 신세가 되고, 직업까지 잃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 홀가분하게 다시 사시에 도전하는 희망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일뿐, 현실의 소시민들은, 그나마 가진 자신의 것을 잃을 위기에 놓일 때, 드라마 속 노정도처럼 펄펄 날뛰다가,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고,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하기가 십상이다. 드라마의 결론은 오히려 모든 것을 잃는 순간 주인공들은 자유로워져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잃는 것에 그리 초연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결국 사회면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우매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부정주차>는 현실의 그것과 궤를 달리하였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소시민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치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에는 적나라하다.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지만 말만 앞설 뿐 실제 그 어떤 보복 능력이 없어, 결국 상대방의 차에 고구마나 끼우는 졸렬한 복수를 감행하는 노정도의 행보를 차근히 따라간다. 또한 절정에 이르는 두 사람의 분노를 동네라는 특성을 살린 절묘한 자동차 추격씬으로 묘미를 더한다. 좁은 골목을 위태롭게 꺾어대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위기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2014년 들어 선보인 드라마 스페셜들이 의욕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면에서 미흡했던 작품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에 비해 모처럼, <부정주차>는 주제 의식과 내용이 합일 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찌질한 노정도 역의 온주완도, 완력으로 동네를 평정한 무대뽀 택시 회사 사장 안만식의 김상호는 물론, 식당 주인 아줌마, 슈퍼 아저씨 등 동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기조차 허투루 지나칠 것 없는 조화로운 연기의 앙상블 역시 <부정 주차>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by meditator 2014. 5. 19. 07:26

<신의 퀴즈>가 시즌4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메디컬 범죄 수사극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신의 퀴즈>는 그 위치를 증명하기라도 한듯, 의기양양하게 시즌4에 돌입했다. 시즌제를 도입하고 있는 드라마 중 가장 앞서나가는 성과이다. 한국 의대 법의관 사무소를 배경으로, 촉탁의로 활약하는 천재 의사 한진우의 희귀병 연구를 기반으로 한 범죄 수사극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며 시즌4 1회부터 본연의 맛을 증명한다. 

자신의 병으로 인해 전 시즌 내내 자기 분열의 혼돈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진우(류덕환 분)는, 시즌4의 초입 1년간 병원에 누워있는 식물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장애인을 납치 감금 폭행하는 범죄가 등장하고, 법의관 사무소 전담 형사로 일하게 된 강경희(윤주희 분)가 그 사건의 담당 형사가 된다. 하지만, 범인의 조력자라 생각해서 잡은 사람은 오히려 자기 딸이 납치되어 범인을 쫓았던 장애인 딸을 둔 아버지였고, 탈출한 장애인들의 진술로 범인은 오히려 밀항을 한 듯 여겨져 수사는 난관에 처한다. 바로 그때,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한진우가 깨어난다. 1년간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사람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그는 예의 그 위트넘치는 한진우의 캐릭터로 돌아왔고, 그의 몸 역시 급격하게 회복되어 간다. 1년간 그의 옆에서 한결같이 그를 돌보았던 강경희 형사가 고뇌하는 것을 본 한진우는 강경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을 곳은 바로 법의학 연구소임을 다짐하고, 사건에 개입한다. 

한진우(류덕환)

언제나 그래왔듯, <신의 퀴즈>의 묘미는 바로, 우리가 듣도보도 못한 희귀명 사례와 사건의 절묘한 결합이다. 형사들의 집중적 수사에도 실마리를 얻지 못하던 수사는 한진우의 참여로 수사폭을 좁힐 수 있었다. 즉, 탈출한 장애인들의 희귀병 사례를 살펴 본 한진우는, 이전에 일상적인 증인 심문으로는 결코 밝혀낼 수 없었던, 세 사람 중 청각이 남다르게 예민한 남성 장애우의 증언을 통해, 사건 현장 근처에서 불꽃 놀이가 있었음을 발견해 냈고, 또 다른 여성 장애우의 알러지 반응을 통해 또한 사건 현장 주변에 메밀이 재배되고 있음을 밝혀낸다. 아직 한진우의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설정되어, 범죄 현장에서의 그의 활약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시 돌아온 첫 회, 역시나 희귀병 사례를 통한 범죄 수사의 진척은 <신의 퀴즈>시청자만이 누릴 수 있는 메디컬 범죄 수사극의 묘미이다. 

또한 매회 희귀명 사례를 통한 에피소드 외에, 시즌에 시즌을 거듭하는 또 하나의 매듭인, 한진우의 내적 갈등 역시, 1회를 통해 그를 수술했던 사람에 대한 미스터리를 남김으로써, 여전히 한진우 본인의 갈등 요소 역시 잔존해 있음을 보여준다. 

시즌3에서 강경희 대신 안내상이 분한 배태식을 등장시켜 한진우의 병으로 인한 혼돈과, 배태식의 트라우마를 배합시켜, 병으로, 혹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극대화 시키는데 촛점을 맞췄었다. 그에 반해 시즌4는 강경희의 복귀와 함께, 아이돌 출신의 법의학 사무소 연구관 임태경(재경 분)과, 한시우(동해 분)를 등장시킴으로써, 4각 관계의 구도를 형성하여, 한층 말랑말랑한 러브 라인을 형성할 포석을 깐다. 과연 이렇게 한결 부드러워진 <신의 퀴즈>가 과연, 기존의 <신의 퀴즈>호청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미지수다. 한태경이라는 톡톡 튀지만, 숙명적으로 병에 짓눌린 이중적 모습의 캐릭터가 운명론적으로 이끌었던 드라마의 분위기가 시즌4의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되는 것이, 신선함이 될지, <신의 퀴즈>의 정체성 상실로 받아들여질지는 결국 사랑이야기조차 <신의 퀴즈>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제작진의 내공에 달려있다 하겠다. 한진우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희귀병 사례에 기반한 범죄수사극의 특성이, 뻔한 사랑 이야기에 침식 당하지 않길 바란다. 

또한 메디컬 수사극임에도 언제나 사건 해결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신파'로 흐르는 <신의 퀴즈>아니, 한국식 수사극의 맹점 역시 여전히 시즌4에서도 노정되고 있는 점 역시 여전한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시즌4의 첫 회, 제목이 '붉은 눈물'이듯이, 장애인 수사로 이어지던 극은, 붉은 눈물을 흘리는 희귀병을 가진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린다고 손가락질 받는 딸을 보호하고자 딸과 함께 다시는 울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했으나, 그것이 딸의 그나마의 감정 소통마저 막는다고 생각한 한진우와 강경희는 왜 딸에게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게 했냐며 아버지를 다그친다. 극적 장치를 위한 부분이지만, 늘 정의감을 넘어 때로는 오지랖이다 싶게 남의 문제에 감정적으로 개입하는 한진우나 강경희는, 그것이 바로 <신의 퀴즈>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파'를 조장하거나, 감정적 비약으로 느껴져, 늘 <신의 퀴즈>의 한계처럼 느껴져왔다. 시즌4에 있어서도, 여전한 그런 극의 해소는 이제는 어쩌면 그것마저도 홍길동같은 한진우 캐릭터와 함께, <신의 퀴즈>의 클리셰로 받아들여 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때로는 상투적이고, 도식적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메디컬 범죄 수사극으로서의 <신의 퀴즈>는 시즌4에 이를 정도로 한국 범죄 수사극에서 독보적이다. 건투를 빈다. 


by meditator 2014. 5. 19. 06:19

대안적 삶을 예능의 화두로 삼으며 화제를 몰고 시작했지만 결국 동시간대 <세바퀴>에 못미치는 시청률의 벽을 뛰어넘지 못해 시즌 1으로 마무리지어진 남자멤버들의 <인간의 조건>이 시즌 2로 돌아왔다. 


비록 높지않은 시청률이지만 <인간의 조건>을 아끼던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시즌1의 멤버들에 대한 정이 들어, 과연 이들을 능가할 시즌2가 가능하겠는가 라는 회의적인 반론이 나왔던 상황을 참고하기라도 한 듯, 시즌1의 멤버 중 김준호, 김준현, 정태호가 살아남았다. 
정태호로 말하자면 <인간의 조건>의 엄마같은 존재로 <인간의 조건> 1기가 끝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아쉽다고 언급된 멤버로서 그의 생존은 어찌 보면 당여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나머지 멤버 김준호와 김준현으로 가면, 아마도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김준현의 경우, <인간의 조건> 초창기에만 해도 주도적으로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가장 잘 살려낸 멤버였지만, 후반부에 갈수록 미션에 따라 리액션을 넘어선 듯한 짜증을 보이거나, 여유를 지나 게을러보이기도 하는 모습으로 그 성실성에 의심을 살만한 행동을 보였던 바이기 때문이다. 또한 김준호로 말하자면, 이미 <1박2일>이라는 리얼리티 예능이 그의 주력 무대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또 하나의 리얼리티 예능을 한다는 것이 과연 그자신에게나, 프로그램 자체에 도움이 될까 싶은 경우이다. 
하지만,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여 재개되는 시즌2에서, 낯선 인물들과의 시너지를 고려할 때, 기존의 박성호나, 허경환이 낯을 가리고 친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개인적 딜레마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무람없이 프로그램의 질을 담보해낼 수 있는 김준호와 김준현의 선택은 불가피했으리라 보여진다. 또한 김준호는 늘 악역을 자처하며 프로그램의 궂은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며, 김준현은 촌철살인으로 프로그램의 맥을 짚는데 탁월하니, 결국 선택의 자리를 놓고 본다면 불가피한 카드였으리라. 

하여튼 이리저리 따져본 끝에 선택되어진 듯한 김준호, 김준현, 정태호가 시즌2의 선배로서 멘토의 역할을 자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할 멘티로서 선택되어진 것은, kbs의 아나운서 조우종과 힙합 듀오 '다이나믹 듀오'였다. 
기존의 <인간의 조건>이 개그 콘서트를 기반으로 한 인간적 유대에 밑바탕을 두고, 그때그때 적절한 게스트를 섭외하는 것으로 갔었다면, 이제 <인간의 조건> 시즌2는, 그 유대의 폭을 기존 멘티로 국한시키고, 예능에 있어 신선한 인물을 수혈하여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데 주력하고자 하는 듯 보인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예능을 통해 한번도 선보인 적이 없던 '다이나믹 듀오'와, '조우종'이라는 카드는 '예능의 새로운 피를 공급했다는 점에서 주효했다. 더구나 이미 주부들 대상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여 중년층 이상에게 익숙한 조우종과, 젊은 층들에게 열광적 지지를 얻고 있는 '다이나믹 듀오'의 선택은 전세대를 포섭하려는 제작진의 포석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나이든 세대에겐 '다이나믹 듀오'가 낯설고, 젊은 세대에겐 '조우종'이 '뭥미?'일수도 있는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포함한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무엇보다 시즌2의 관건이 되는 것은 과연 이 새로운 세 사람의 멤버가 보여줄 예능적 가능성과 기존 멤버와의 시너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시즌2의 첫 회는 아직 유보적이다. 

새롭게 참여한 멤버 중 조우종은 방송에서 보여진 친숙한 이미지를 넘어선 털털한 노총각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또한 미션에 임하면서 철저한 미션 수행을 위해 결국 포장지가 두려워 빵 한 조각도 입에 넣지 못한 채 '멘붕'에 빠지는 혼란스러운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다이나믹 듀오'의 최자와 개코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인간의 조건>1기 멤버들이 첫 날 생각지도 못한 포장지로 인해 미션 수행에 어려움을 겪은 것과 달리, 최자와 개코는 첫 날 부터 모범생처럼 미션에 철저하게 적응해 나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어 첫날부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미션의 수행 면에서 보자면 새로운 멤버들은 모두 나쁘지 않았지만 과연 한시적 게스트가 아닌 2기의 고정 멤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심심해'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과연 이들을 데리고 2기라는 시간을 채워나갈 '예능적 건더기'가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들의 문제라기 보다는 언제나 그래왔듯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그램을 꾸려나가는 제작진의 문제로 다시 귀결된다. 같은 관찰 예능으로, <꽃보다> 시리즈를 만들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탄생시킨 나영석 제작진의 그것과 <인간의 조건>과의 차별성이 비교가 되는 것이다. <꽃보다 할배>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나영석 피디는 새롭게 예능에 첫 선을 보이는 이서진이라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동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서진이라는 인물의 면면이 고스란히 들어났고, 시청자들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미 예능을 통해 익숙한 인물이었던 이승기를 <꽃보다 누나>에 짐꾼으로 도입하면서, 제작진은 이미 대중에게 익숙한 그의 이미지 외에, 스타가 되었지만, 해외 여행을 함에 있어서는 혼란스러운 스물 몇 살의 청년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즉, 예능에 새로운 인물을 초대할 때는 그 인물에 대해 시청자들이 감정을 이입할 여지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조건>은 늘 투박하다. 아니 핸드폰 없이 살기나, 쓰레기 만들지 않기라는 미션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게스트나, 새로운 멤버에 대해 불친절하다. 이미 그들에 대해 알려진 이미지 외에, 더 나아가는데 있어 단편적이거나, 더 나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도 지레 멈춰버린다. 

5월 17일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송 초반 개코의 집을 방문하여, 짐을 싸고 그와 함께 나온 제작진은 그저 신기한 듯 자신의 차를 자랑하는 개코를 비춰준다. 차량 마크가 흐리게 처리된 영상에서 시청자들은 그저 정말 개코가 자신의 차를 참 사랑하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것은 방송 말미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렇게 자부심이 넘쳤던 차가 알고보니 십 여년이 넘은 오래된 차였던 것이다. 그렇게 개코라는 힙합 가수를 넘어 그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화두를 제작진은 그저 스치듯 짚고 지나쳐 버린다. 방송 초반 자신의 차에 자부심이 넘치는 개코를 그저 '차를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치부해버리고 채널을 돌린 시청자라면 결코 개코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다보고 나면, 저렇게 <인간의 조건>에 어울리는 내용을 저렇게 부실하게 다루나 싶을 정도다. 그 장면은, 개코가 <인간의 조건>에 참 어울리는 연예인이라는 걸 부각시켜주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그걸 그저 여느 아이템 중의 하나로 소비시켜 버린다. 차라리 방송 초반, 오래된 차를 애지중지하면서 아끼는 소박한 인물로서 개코를 좀 더 부각시켰다면, 방송 말미 와이퍼가 고장난 상황이 그저 웃기는 걸 넘어 애특해 졌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가진 착한 예능으로서의 강점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시즌1을 넘어서, 이제 시즌2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면, 그저 새로운 멤버들에게 다시 독한 미션을 던져주는 식을 넘어, 그들의 이야기가 되도록, 그리고 그들이 멘티들과 짧은 시간이나마 '인간적' 유대를 끌어나가도록 장을 풀어놓아야, 진짜 착한 예능으로서 <인간의 조건>의 맛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저 새로운 멤버가 새로운 혼돈에 빠지는 딜레마만이 아니라, 왜 이들이어야 하는 가를 설득하고자 좀 더 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시청자들이 낯선 인물들에 정을 붙이고 <인간의 조건>에 채널을 고정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인물들의 새로운 웃긴 이야기라면 <세바퀴>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점을 잘 살려 2기 <인간의 조건>이 자리잡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5. 18. 12:04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막상 교육 현장을 방문하고 느끼는 가장 현실적인 느낌은 절망감이다. 물론 지역마다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학년이 올라갈 수록,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 일부분의 학생들이 앞에서 강의하시는 선생님의 수업을 듣지만, 그 일부분의 학생을 제외한 상당수의 학생들은 수업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이 스스로 결정한 것이든,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피치못해 소외된 것이든. 시험 시간에는 더 명확해 진다. 시험지를 나눠줌 과 동시에 시험을 포기한 학생들은 신속하게 답을 찍고, 시험지를 접어놓고 엎드린다. 단지 학교마다 그 수가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학교 현장에서 그런 아이들을 만나는 게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 아이들에게 학교란 무엇일까? 그렇다고 수업을 잘 듣는 아이들은 다를까? 아이들에게 묻는다.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온종일을 학교에서 보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교실이란, 선생님이 '꿈', '함께 하는' 등의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정의를 내린 반면, 상당수의 학생들에게 교실은, 총성없는 전쟁터이거나, 지옥같은 시간으로 정의내려진다. 이렇게 너무나 다른 생각의 격차를 가진 선생님과 아이들, 그렇게 넓은 강과도 같은 둘의 사이를 좁히고자 애쓰는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스승의 날 특집으로  kbs1과  ebs는 다큐로 담았다. (ebs 스승의 날 특집 다큐<선생님의 아이들, 아이들의 선생님>(5월 15일 방송), kbs1 스승의 날 기획 <나는 선생님입니다>(5월 15일, 16일 2부작))



<나는 선생님이다>의 1부 대전 탄방중학교의 김정석 국어 선생님은 학창 시절 평범한 모범생이었다. 학교 성적을 보고 아버지가 교사라는 직업을 권했고 선생님도 그런 부모님의 추천에 큰 거부감없이 사대에 진학했다. 사대에 진학했으니 당연히 임용 교시를 보았고, 그렇게 국어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김정석 선생님이 택한 건 국어 교사라는 직업이었다. '담임, 지도, 상담' 등 교사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직무에 대해 선생님은 준비돼지 않았었다. 당연히 자신이 가르치면 아이들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고 맞닦뜨렸던 교육 현장, 자신의 의지와 달리 어긋나는 아이들을 보며, 가르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심한 질책으로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법적 처리까지 가게 된 학생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가진 김정석 선생님은 좀 더 나은 선생님이 되고자 한 달에 두 번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교사 공감 교실에 참여한다. 교과서 적으로 살아왔던 자신이 교과서 밖 아이들을 만나면서, 과연 그들을 교과서로 끌고와야 하는가, 아니면 그들에게 맞추어 주어야 하는가 라는 자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공감 교실에서 만난 박모정 선생님은 자신에 대한 교원 평가에 욕까지 써놓았던 학생들이 2년이 지나 자신의 생일에 케익을 주었을 때, 기쁘고도 불안했다며 눈물을 흘린다. 학생들과 교감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쁘고, 그런 학생들이 또 언제 자신들에게 등을 돌릴까 불안하다는 말에, 그만 김정석 선생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이런 두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그저 세간의 가장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교실 붕괴의 시대 혼란과 고뇌를 가진 한 사람으로서의 선생님이 오롯이 전달된다.

한 해 7만 여명의 아이들이 교실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전체 학생 수의 1%에 해당하는 아이들이다. 그렇다고 교실에 담겨져 있는 학생들이 행복한 건 아니다. 전세계 학생들과의 비교에서 성적은 높지만, 행복 지수는 최하위인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또래 학생들과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 행복감을 쉬이 얻지 못하고 있다. 

앞의 김정석 선생님은 교사 공감 교실을 통해 배운 상담 기법을 학생들에게 활용한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이 그저 친구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친구같으니까 아이들이 그저 친구처럼 여길뿐 말을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친숙함 이상의 신뢰, 우러나오는 권위가 필요하다고 여전히 김정석 선생님은 고민중이다. 

학교는 무너지고, 교실은 붕괴되어 가고 있다지만, 김정석 선생님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과의 소통을 통해 학생들로부터 신뢰를 얻어가고자 노력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각자 선생님들이 처한 환경에서, 각각의 선생님들은 각개전투를 하듯이 아이들과 유대를 쌓아간다. 

중화고의 방승호 교장 선생님은 기적을 만들어 냈다. 삐에로 가면을 쓰고, 호랑이 탈을 쓰고 교문 앞에서 춤을 추며 학생들을 반기고, 언제든지 누구한테 얘기를 해도 받아들여지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교장실 문턱부터 낮춘 방승호 선생님 덕분에 학교 폭력과 핸드폰 분실은 부지기수에, 지각을 밥 먹듯이 하던 중화고는 이제 학교 폭력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고 자퇴아가 돌아오는 학교가 되었다.(<나는 선생님이다>) '교문 앞 스토커'라는 별명이 붙은 용인 흥덕고의 이범희 교장 선생님이 하는 방법도 다르지 않다. 매일 교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 주변을 돌며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학생 주임 선생님 덕에 아이들은 달라졌다.

두 편의 다큐를 보면, 그토록 문제라는 우리의 아이들이 실제 바라는 것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달라진다. 전남 순천의 효산고 안중철 영어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아이들은 'I love you'라고 답을 한다. 그러면 선생님은 묻는다. 'what's your dream?' 이 낯부끄러운 상황이 매일 이 학교 영어 교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선생님은 생일이 되면,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생일시를 써준다. 그저 시가 아니다. 그동안 그 아이와 선생님이 나눴던 메시지를 기반으로 지은 시이다.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른 학생에게 선생님이 10분의 시간을 주고, 10분 동안 밖으로 나갔다 돌아온 학생이 조용히 수업에 임했던 그 기억을 선생님은 최고의 선물이라고 시에 적는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그 무엇도 할 의지가 없이 무기력해서, 오히려 쉽게 어떤 일을 저질러 버리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시를 짓기 시작했다는 선생님에게 아이들은 그저 빈말이 아니라, 정말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학교 밖으로 떠난 아이들을 학교로 불러 세운다. 


아이들이 존중받는 느낌을 받도록 하기 위해 선생님들은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교실 앞에서 아이들을 반기며 힘껏 안아주고, 아이들에게 존댓말을 한다. 모두를 수업에 참여 시키기 위해 다양한 현장 활동을 모색하고, 이를 위해 교사간 협력에 매진한다. (분당 보평중) 한 사람이라도 소외되지 않는 수업을 위해 수준에 따라 모둠을 나누고, 모둠 별 문제지와 교육을 실시한다.(구현고 오영일 수학 선생님) 학생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 교사가 되어 수업에 참여하도록 이끌기도 한다.(용인 소명중) 아예 학교의 방식을 달리하기도 한다. 기숙형 공립 대안학교 태봉고에서 수업은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 지지 않는다. 130여 명의 학생들이 목공을 배우고, 텃밭을 가꾸고, 공동체 회의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결정한다. 양업고의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뛰고, 학생들의 문제를 속속들이 함께 한다. 덕분에 제도권 학교를 포기한 학생들이 이 대안 교육 현장에서 학업을 이어나가고 꿈을 찾을 수 있다. 

태봉고의 공동체 회의 시간 학교 폭력 문제로 대립각을 내세운 학생들은 첫 날도, 둘째 날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웠다. 하지만, 서로의 속내를 모두 드러낸 아이들은, 셋째날 화해했다. 회의 자체가 수업이 되었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소명중 수업 영상에서 선생님은 찾아볼 수 없다.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질의 응답을 받는 것오 학생들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다. 청운 중의 국어 수업 시간, 학생이 선생님을 대신에 칠판에 필서를 한다. 선생님은 자료를 보여줄 때마다 학생들에게 확인한다. 3년째 수업을 맡은 강신혜 선생님은 중증 1급 시각 장애인이다. 

아이들과 소통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신뢰가 쌓이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선생님들은 교실의 주인공은 학생이라는 전제를 놓지 않는다. 그들이 모두 교실의, 수업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오늘도 여러 분의 선생님들은 늦은 밤까지 교무실의 불을 밝힌다. 그분들에게 스승의 날은 더 이상 부끄러운 날이 아니다. 


by meditator 2014. 5. 17. 00:35

2013년 9월에 시작하여 2014년 5월에 이르기까지 장장 120부의 대장정을 마쳤다. 지구에 나타난 의문의 행성 감자별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감자별 2013 QR3>는 감자별이 파괴됨으로써 함께 마무리 되었다. 


<감자별 2013QR3>에서 사라진 것은 감자별만이 아니다. 감자별처럼 불현듯 나타난 의문의 청년 홍혜성, 피치못할 사정으로 노준혁이 되어 살아가던 그도 감자별처럼 사라졌다. 그 누구보다 노수동 일가의 아들같았던 그였지만 자신이 노수동(노주현 분) 일가의 친자가 아니라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노준혁이 자신이 노수동 집안의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 사라지자 노씨 일가는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면서, 친자가 아니라는 노준혁의 고백에 대한 진의를 밝히고자 다시 한번 DNA 검사를 의뢰한다. 그리고 결과는 그의 고백이 진실이었음을 알려주고, 노씨 일가는 준혁을 그리워는 하면서도 더는 그를 찾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피 하나 안섞였어도 함께 한 정을 생각해서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기적 따위는 이루어 지지 않는다. 그리고 감자별도 사라진다. 지구의 파멸 따위도 없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이, 다들 일상을 이어간다. 저마다의 기억과 그리움을 간직한 채.

김병욱 월드를 경험한 사람들은 이번 시트콤에서는 또 누굴 죽일까 기대반 걱정반으로 <감자별 2013QR3>의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우려를 알았는지 다행히 급작스럽게 죽은 사람은 없었다. 

감자별 결말 종영
(사진; TV데일리)

하지만 죽지 않았을 뿐, 거침없이 시리즈의 강유미(박민영 분)나, 신세경(신세경 분)처럼, 노준혁으로 살아가던 홍혜성은 결국 일상에 안착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불현듯 일상을 깨고 들어와 파열음을 일으키고, 그 파열음이 일상의 또 다른 의미를 불러 일으키게 만들던 그들은, 결국 늘 시트콤의 결말과 함께 사라지게 된다. 기적이 없는 우리들의 일상처럼. 외부인에 대해 결국은 배타적인 우리 사회처럼. 마지막회, 노준혁이 그들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에, 그가 그들의 삶에 그려놓은 궤적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를 포기하고 마는 노씨 일가처럼. 우리들은 여전히 그렇게 기적을 만들어 낼 깜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김병욱 월드는 늘 냉정하게 결론짓곤 한다. 삶은 그렇게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하다. 

김병욱 월드의 공식은 지속된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 삶의 부조리와 모순에 천착했던 그의 세계는 <감자별 2013QR3> 내내 일관되게 발휘되어 왔다. 노송(이순재 분)을 비롯하여 노수동, 왕유정(금보라 분), 김선자(오영실 분)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대 한국 사회 어른들의 모순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어른이지만 지극히 속물적이고, 부조리하며, 비논리적인 그래서 전혀 어른답지 않은, 하지만,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그들이기에 미워할 수 없는 나이든 사람들의 그것을 김병욱 월드의 전작들의 그들처럼 답습하였다.

그렇다고 속물스런 어른들의 세계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런 삶에 한 발을 들여놓으려 애쓰는 젊은이들도 있다. <지붕뚫고 하이킥>의 황정음이나, <짧은 다리의 역습>의 백진희처럼, <감자별 2013QR3>의 나진아는 자신들이 튕겨져 나왔던 그 사회 속으로 한 발 들여놓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형제 사이에 한 여자를 둔 미묘한 삼각 관계도 여전했다. 실제 친형제가 아니었기에, 그래서 노준혁으로 살아가야 했던 홍혜성의 존재에 무력감을 제공한 나진아(하연수 분)를 사이에 둔 형제간의 애정 갈등도 여전했다. 단지 그것이 공중파와 케이블의 차이였는지, 이제는 너무 익숙한 김병욱 표 애정구도여서 였는지, 거침없이 시리즈처럼 시청자들의 편을 가른 갈등전을 불러 일으킬만큼 열렬한 호응은 덜했다. 

늘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다른 배우들과 다른 배경을 가지고 되풀이 하는데서 오는 지루함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어쩌면 이젠 그런 이야기조차 너무 뻔한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하는 세상살이의 지루함 때문일까. 웃기고자 하는 시트콤임에도 늘 세상에 대한 날이 벼려져 있던 김병욱 월드는 <감자별 2013QR3>에서도 여전했지만, 어쩐지 그의 비평은 둔중하고 무뎌진 듯했다. 마치 첫 회 지구 종말을 예언하며 무시무시하게 등장했던 감자별이 허무하게 지구 방위대의 폭탄에 의해 파괴되어버리고 사라진 그 결말처럼 말이다. 이것이 김병욱 월드의 위기인지, 여전한 비판에도 무디어져 버린 우리 삶의 모순인지, 선뜻 그 하나를 선택하기가 어렵다. 


by meditator 2014. 5. 16. 08: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