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이토록 우리 곁에 친근한 단어로 씌여지는 때가 이 시대이다. 더구나, 2014년 4월, 5월, 그리고 6월은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과연 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만 할까? <sbs스페셜>은 <다친 마음의 대물림, 3대를 간다>를 통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의 치유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본다. 


당연히 다큐의 시선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향한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부모님을 걱정했다는 착한 딸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돌아와 책을 사겠다며 남겨둔 기특한 아들을 '수장시켜버렸다는' 장순복, 유성남씨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면 흘리는 대로, 혹은 공황상태이면 공황상태인 대로, 심지어는 죽은 언니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할까봐 울음을 틀어막거나, 형을 따라가고 싶다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차마 맘놓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찾아간 재난 전문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가슴 속에 응어리들은 조금씩 풀어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 우리 사회는 잊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덮친 트라우마는 비단 세월호만이 아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그리고 대구 지하철 참사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뿐, 여전히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신옥자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사고 이후, 하다못해 자동차 헤드라이트까지 끄고 다녀야 하는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면서, 그녀와 그녀 남편의 일상은 피폐해져갔다. 사고 당시 꿈많은 여고생이던 손미영씨는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살 시도와 자해를 되풀이해왔다. 


트라우마는 비단 심리적 기제만이 아니다. 뇌단층 촬영을 통해 보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편도체가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뇌의 손상을 입는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데, 심지어 임신을 하고 있는 엄마가 트라우마를 겪으면, 태어난 아이들 역시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성향을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면서 스트레스에 더 과하게 반응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트라우마의 유전은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3대에 걸쳐 대물림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1년간의  시간을 트라우마의 골든 타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 동안 잘 치유가 된다면, 유전이 될 정도로 무서운 트라우마는 아물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치유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1년후, 혹은 몇년, 심지어는 몇 십년이 지나서도 개인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한 지역에서는 병원 부설 치료 센터를 만들고, 피해자 중 센터장을 뽑아, 지속적으로 911테러 희생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돌보아 왔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활동 등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끼지 결연을 맺어 상실의 아픔을 보다듬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수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벗어나,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sbs스페셜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우리 사회도, 미국 911테러 후속 조치들처럼 사회적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골든 타임 안에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치유의 방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공동체를 통한 유대감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치료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각자의 트라우마를 각자의 가족이 짊어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 수습 과정에서 보여진 정부, 해운사, 해경 등의 대응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그 유족과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까지 챙길 깜냥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책을 세우기 보다, 유족들이 들고 일어날까 경찰부터 붙이는 시스템이, 과연 그들의 트라우마 골든 타임을 지켜줄 수 있을까. 해법이 존재하기에 더 가슴이 답답해지는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4. 6. 2. 06:33

ebs의 다큐 프라임은 5월 26일에서 28일에 걸쳐, 그리고 다시 6월 1일 8시부터 연방으로 3부작 법과 정의 시리즈를 방송하였다.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 <2부;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 >로 나뉘어 방송된 <법과 정의> 3부작은 법학도 출신의 작가 성석제가 그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법과 정의의 역사와, 오랜 화두를 돌아봄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법과 정의'의 의미를 찾아본다. 


3부작으로 진행된 <법과 정의> 시리즈의 진행 방식은 대체적으로 법이 과연 누구의 편인까 혼돈스런, 과연 사회적 분배 문제에서 정의는 실행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공정한 처벌이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구체적인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각각의 시리즈는 법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통해 처음에 그것이 만들어 졌을 때의 본래적 의미를 되돌아 보고, 그것이 실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본다. 고대에서 처음 만들어진 법과 제도들은 하지만 중세까지의 신분제 사회를 거치면서 여전히 편향된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며 지속되어 왔음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거기서 발현된 인권 선언을 통해 드러난 근대 시민 사회가 만들어 낸 법의 정신과 의미가 중요함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근대 시민 사회를 통해 기본적으로 만인의 권리를 인정한 법은 현대 사회를 오면서,새롭게 해석되거나, 그 본연의 의미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가 3부작은 형벌 제도와, 분배 문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주제를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 EBS <다큐프라임-법과 정의> ⓒEBS
(사진;pd 저널)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를 여는 것은 미국 최악의 판결이었던 캐리 벅 판례로 시작한다. 수용시설로 보내진 엄마에게서 태어난 캐리 벅은 입양이 되지만 그 집에서 하녀처럼 부려지던 중 성폭행으로 임신까지 하게 된다. 낳은 딸을 빼앗기고 수용시설에 보내진 캐리 벅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적 관점에 따라, 법의 결정으로 겨우 21살의 나이에 나팔관을 절제하는 불임 수술을 받는다. 이 판결을 통해 <법은 누구의 편인가>는 묻는다. 과연 법은 누구의 편인가? 후에 나찌의 불임 수술의 전례가 된 이 우생학적 관점에서 치뤄진 재판 뒤에 숨겨진 건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치뤄야 하는 비용을 줄이거나, 부담하지 않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숨어있었다. 근거없이 저능아로 판명되어버린 캐리 벅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그 어떤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법의 폭력에 노출되어 버렸다. 즉 신분제 사회를 거쳐 인간은 나면서 부터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주장을 한 프랑스 인권 선언문에 따라 근대 법의 원칙이 만들어 졌지만, 법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2부 <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에서는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온 '무지의 베일'의 원칙에 따른 실험을 실시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빚 6000만원을 경제적 형편이 다른 네 형제자매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다섯 그룹은 각자 자신이 실제 네 형제 자매 중 누군인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무지의 베일) 어머니 빚의 분배를 논한다. 그 결과 다섯 그룹은 물론 금액의 차이는 있지만, 고소득자인 맏이가 많이 내고, 상대적으로 어려운 막내가 덜 내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즉, 결과에 따른 '리스크'를 고려하여 가장 손해보지 않은 결과를 선택한 것이다. 실험 전에 네 자녀들은 쉽게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던 사람들은 합의를 도출해 낸다. 막상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 각자 아쉬워하는 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론을 뒤집지는 않았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의 분배의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벤담의 입장에 따르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결과를 낳고, 때로는 그 소수가 경제적 약자일 수 있다는 것이 20세기의 정의론을 내세운 존 롤스의 입장이다. 즉 존 롤스는 삶의 출발점에서 존재하는, 즉 경제적 부의 정도, 인종, 남녀와 같은 불평등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이 시대의 정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에서 이익이라면 불평등은 승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의론이다. 그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는 얼마전 화제가 되었던 대주 산업 회장의 금고형으로 부터 시작된다. 3일동안 노역은 커녕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감옥에 머무른 대주 산업의 회장은 하루에 5억씩 15억을 탕감받아 사회적 공분을 샀었다. 형벌의 역사를 훑어 본 다큐는 과연 범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형벌은 어느 정도일까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함무라비 법전으로 부터 시작하여, 중세를 거치며 형벌은 피해자가 받은 만큼 응징을 하는 방식이나, 신께 죄의 유무를 묻지 위해 물에 담그거나, 불을 견뎌야 하는 비상식적 과정을 거쳐왔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일찌기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귀족와 평민의 법적 처벌은 언제나 달랐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세계의 법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 도달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여전히 또 다른 사회적 차별인 '유전무죄, 유권무죄'의 판결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이렇게 지극히 아카데빅하고 철학적 관점에서 장구하게 훑어 본 <법과 정의>가 늘 종착점에서 명시하는 것은 우리의 헌법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현실은 저 헌법 조항과는 다르다.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도 않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지만, 현실의 국민들의 행복은 언제나 뒷전이다. 

존 롤스가 21세기에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정의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3부에 걸려 법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 본 <법과 정의> 3부작의 결론은 1부 마지막에 표명된다. 즉 사회적 약자인 캐리 벅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2002년 법원으로 부터 사과 성명서를 얻어내고 '그때나 지금이나 올바르지 않았다'는 판결의 반성이 뒤따른 것처럼.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낼 때에만 비로소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거나, 잊거나하면 결국 정의의 반대 편에 법은 세워지게 된다고 못박는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형태를 띤다고 한다. 눈을 가린 것은 중의적 의미이다. 즉 눈을 가린 채 자신의 앞에서 판결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이해 관계에 따라 불공평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즉 해석 여하에 따라, 혹은 운용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이현령 비현령이 될 수 있는, 법이 반대편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런 참여의 가장 적극적인 방식 중 하나는 '투표'라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6. 2. 05:58

장황하게  갑동이의 카피 캣 류태오가 8차에 이르기까지 연쇄 살인을 하는 과정을 쫓아오며 연쇄 살인 사건으로서의 갑동이 사건과 그에 얽매인 인간 군상들을 세밀화로 그려내던 드라마<갑동이>는 지난 주 12회 마지막 드디어 갑동이(정인기 분)의 얼굴을 밝힘으로써 본 게임에 돌입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갑동이 카피캣으로서 살인을 즐기던 류태오(이준 분)는 7차를 경과하며 사이코패스로서의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류태오가 철썩같이 믿었던 보호감호소의 갑동이가 사실은 갑동이 사건의 피해자로 그 트라우마로 인해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태오는 그런 사람을 갑동이라 따르던 자기 자신에 환멸까지 느끼는 듯하다. 결국 갑동이처럼, 자신도 스스로 살인을 끊고 외국으로 떠나려던 류태오는 결국 비행기 안에서 살인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 하고 송환되어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를 면담하는 오마리아(김민정 분)는 류태오가 갑동이 사건의 카피 캣이 된 이유가, 사이코패스로서 자신의 살인 충동을 스스로 조절한 갑동이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류태오가 결국은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했던 것처럼, 그런 류태오를 보면서, 하무염(윤상현 분)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쩌면 갑동이도 류태오처럼 살인 충동을 어쩌지 못하고 여전히 어디선가 살인을 되풀이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 에돌아 왔던 <갑동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 하무염이 경찰서 게시판에 빼곡히 붙인 실종된 여자들의 사진들처럼, 잡히지 않은 연쇄 살인범음 여전히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범행의 반복이 아니라, 류태오를 두고 그가 사람이기를 바라며 혼란을 느낀 마지율(김지원 분)처럼, 범행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구절절 사이코패스로서 류태오를 설명하고 그의 권태와 환멸을 통해, 역으로 차근차근 갑동이를 설명해 왔다. 

(사진; 뉴스엔)

그리고 이제, 하무염과, 오마리아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형사가 되어 그걸 즐겨왔던 갑동이는 어떻게 니들이 나를 잡겠어 하는 자만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내적 갈등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더구나, 계획적으로 저질렀던 여타 범죄와 달리, 여경 살인 사건이 자신의 오해, 오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갑동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던 세상이 뒤흔들리는 혼란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를 흔들어 놓은 자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류태오가 갑동이의 카피캣으로 연쇄 살인을 저리르며 하무염을 비롯한 경찰을 주무르고 조롱하며 쾌감을 느끼듯, 형사가 된 갑동이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잡지 못해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만든 세계 속의 꼭두각시들을 바라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껴왔던 것이다.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그에게서 권력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피의자의 신분에서 역전하여, 형사라는 '갑'의 신분이 되어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위를 즐기는 차도혁 형사 반장,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매번 재벌가의 돈의 힘을 통해 범죄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는 우리 사회, 권위와 돈의 힘으로 자행되는 사이코패스적 범죄를 짚어본다.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 갑동이를 권위를 가진 형사 반장이라는 직업적 신분으로 전환함으로써, 또한 이제는 하다하다 '부자병'이라는 신종 정신병까지 만들어 내며 법망을 피해가는 류태오를 설정함으로써, 법과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커버'될 수 있는 사이코패스적 행각을 말하고자 한다. 연쇄 살인범을 쫓는 수사극으로 시작하여  결국 에둘러 제작진이 도달하고자 했던 고지는, 바로 법과 돈의 우산 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이면이다.


by meditator 2014. 6. 1. 01:26

훈훈한 가족애를 추구하던 <사남일녀>가 결국 낮은 시청률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종영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새롭게 선보인 것은, 요즘 인기 좋다는 먹방과 리얼 버라이어티를 합체시킨 <7인의 식객>이다.


'단순한 음식 소개가 아닌 한 나라를 이해하는 창으로서의 음식 기행'을 추구한다는 <7인의 식객>은 인류학적 정보를 위해, 수능 인기 세계사 강사 고종훈씨를 섭외,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

하지만 그런 정보성 내용을 제외하고 보면, 제목은 7인이지만, 고정이 아니라는 명목 하에 8명의 출연자를 섭외하고, 그들을 음식 알아 맞추기 게임을 통해 적은 비용으로 직접 발로 뛰며 여행을 하는 배낭 여행 팀과, 가장 화려한 볼거리와 이름난 음식을 먹고 다니는 팀으로 나누어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방식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일찌기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음식 기행을 선보인 바 있으며,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이긴 팀과 진 팀으로 나누어 가장 비싼 여행과 가장 저렴한 여행으로 여행의 극과 극을 다룬 사례는 예능에선 낯설지 않은 컨셉이다. 

(사진; 뉴스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있는 먹방처럼, 여행 전문 케이블 tv가 따로 존재하듯이, 누군가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집을 지키는 시청자들에겐 이미 누군가 했던 익숙한 컨셉일 망정 흥미를 유발한다. 

특히나, 매번 미션이 주어지고, 그 미션을 통과해야 어드벤티지가 주어지는 배낭 여행팀의 행로는 시안 역을 찾아 간식까지 사며 허겁지겁 뛰어가는 그 모습에서 이미 눈길을 사로 잡는다. <정글의 법칙>의 고생담을 작정하고 타깃으로 삼은 듯 고생스런 여행이란 목적이 분명한 배낭 여행팀은 그 팀원의 말처럼, 90분이라는 시간 안에 시안 역에 도착하기 위해 이십 여분을 달려가고, 겨우 기차를 탔는가 싶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 22시간의 기차 여행이 이어진다. 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해서는 또 어떤가. 22시간의 기차 여행을 마치고 땅에 발을 딛었는가 싶었는데,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을 가기 위해 다시 2시간 여 사막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가야한다. 그러고서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면서 특전으로 제공한 것이 온통 모래 언덕뿐인 명사산 여행이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진 <7인의 식객> 첫 번째 여행의 주제는 국수 기행이었다. 실크 로드를 통해 밀이 전파되고, 그 밀이 중국의 요리법이 만나 탄생한 국수에 대해 알기 위해, 여행 팀들은 밀이 전파되어 국수가 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여행을 한다. 

'국수'는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여러 번 다룬 익숙한 주제이다.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우리나라의 국수 문화를 다루었고, 요리 전문 tv 올리브 tv에서도 우리나라와 외국의 국수 문화를 직접 발로 뛰며 전달한 적이 있다. 특히나, <7인의 식객>이 다루고 있는 국수의 전파 과정은 이미 <누들 로드>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7인의 식객>이 지향하고 있는 인류학적 바탕이 깔린 리얼 버라이어티는 당연히 내용 면에서 <누들 로드>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수능 인기 강사까지 초빙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회 <7인의 식객>에서 소개된 내용은 그저 외국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맛본다는 먹방의 의미를 넘어서지는 못한 듯하다. 

서경석 일행이 처음 간 음식점에서 일행들은 당나라 시대의 국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음식을 맛보았지만, 그들을 통해 시청자들이 전달받은 건, 인류학적 탐험 자세라기보다는 외국 여행지에서 타문화의 음식을 맛본 여행객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맵다', 맛있다'라는 그들의 반응으로는 당나라 시대의 음식 문화를 시청자들이 간접 체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국수 만들기 체험 정도가 인류학적 탐험에 어울리는 시도로 보여졌다. 배낭 여행 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배낭 여행이라는 보다 '날 것의 체험'이 그래도 서경석 팀에 비해서는 훨씬 더 진솔한 맛 기행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신성우나, 이영아는 적극적으로 타문화으 음식에 접근하는 태도가 긍정적이었고, 그런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이방의 음식은, 때론 겨드랑이 냄새같을 지언정, 색다른 문화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7인의 식객
(사진; tv데일리)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7인의 식객> 자체가 맛 기행이라는 목적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신성우 팀의 손헌수는 과연 이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멤버라기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행동을 보인다. 신성우의 표현대로, 여행을 가서 만나게 되는 그 지역의 음식은, 바로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는 것이기에,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음식을 먹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더구나, 제목 자체도 <7인의 식객>인 프로그램에서 입이 짧아, 이방의 향취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고, 고추장을 더하는 손헌수가 과연 <7인의 식객>에 어울리는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손헌수의 입짦음에 짜증이 난 것도 잠깐, 첫 회 <7인의 식객>은 맛 기행이라는 취지를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의 사건을 벌인다. 미션 성공으로 주어진 명사산 기행에서, 타조를 타고 모래 언덕 투어를 떠난 일행이 그만 모래 폭풍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작진이 머무는 곳의 의자와 식탁이 나뒹굴고, 서서 있기가 힘들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모래 폭풍 속에 신성우 팀은 오로지 낙타에 의지한 채 버려진다. 굳이 '버려졌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을 따라가던 카메라 팀이 그들을 놓쳤고, 제작진은 일찌감치 목적지에 먼저 와있는 상황에서, 신성우를 비롯한 세 명의 팀원이 모래 폭풍 사이에 갇혀버린 것이다. 제작진은 경찰이 와서 신속하게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그 과정, 제작진과 떨어져서, 제작진이 헐레벌떡 그들을 찾으러 가는 과정을, 리얼 버라이어티의 일환인 양 상세하게 프로그램 말미에 보여준다. 

그런데, 요즘처럼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되풀이 되는 상황에서, 제작진의 케어를 받지 못한 채 모래 폭풍에 사라진 출연진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건, 목숨을 걸고 리얼 버라이어티를 해야 하는가 싶은 분노이다. 물론 다음 회 예고를 보면, 출연진들은 무사히 그 모래 폭풍을 빠져나온 듯하다. 하지만, 충분히 사막의 모래 폭풍이 예견된 상황에서, 그 어떤 대안도 없이, 제작진마저 손을 놓은 상황에서 출연진만을 떨어뜨려 놓은 것은 '방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 아무리 <정글의 법칙>의 날 것을 타겟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7인의 식객> 첫 회의 모래 폭풍 해프닝은, 그런 수준을 넘어, 안전 불감증처럼 보여졌다. 이미 연예인의 해외 여행 프로그램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는 바, 제 아무리 리얼 버라이어티지만, 제작진마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건, 무신경과 준비 부족으로만 보여지는 것이다. 

덕분에 배낭 여행의 긴박감도, 뱀을 목에 두르고 춤까지 선보인 김유정의 고군분투을 입힌 호사스런 여행의 맛도 함께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프로그램을 이어간다면, 원래의 취지는 살리되, 출연진의 위험을 담보로 한 흥미끌기는 지양하기를 바란다. 맛있는 외국의 먹거리를 먹으러 목숨 걸고 갈 일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4. 5. 31. 06:37

5월 29일에 방영된 <썰전>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늘 어떤 화두가 등장할 때마다 무지막지한 자료를 들이대며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느라 열심이던 강용석이 kbs 파업이라는 주제에 대해 시쿤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신문에서는 그걸 다루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말했다. 김구라가 무슨 신문을 보냐고 물어보니, 조선일보란다. 이철희 소장이 따끔하게 묻는다. 그럼 <썰전>이 방영되는 jtbc뉴스도 안보냐고, 그러자 강용석은 동업자 정신에 입각하여 시청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어떻게 kbs 파업을 이끌어 가는 노조 위원장이 직접 출연하기까지 했는데 모를 수가 있냐는 힐난에 강용석은 답을 피한다. 하지만 김구라와 이철희가 꺼내는 파업과 관련된 이야기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피력하는 걸로 봐서 강용석은 kbs 파업 사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모르고 싶었을뿐. kbs가 파업을 하게 된 계기처럼, 세월호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사장이 나서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것을 지시한 것처럼, 강용석의 세계에서, 그런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거였다. 심지어, 그는 변호사의 법리적 근거를 들이대며, 길환영 사장의 보도권 개입을 적법한 처사였다며 우기면서 정부 측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강용석은 다른 때와 달리 김구라나 이철희 소장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돌린다. 

<썰전>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출연자 이철희 소장은 [한겨레 신문]에 개재한 자신의 칼럼에서,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예를 든다. 실제 김성일은 그 자신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이었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면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사실을 은폐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일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략적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을 개진하는 것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바로 그 사례를 29일의 <썰전>에서 강용석은 직접 증명하고 있다.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굳굳하게 kbs파업의 정당성을 폄하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치부하느라 애쓴다.

그래도 눈이라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드라마로 오면 그들은 보다 뻔뻔해 진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신문 지상을 통해 어디선가 접했던 경제계, 법조계 인물들의 잔향을 그대로 드리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들을 연기하는 극중 배우들의 입을 통해 등장하는 논리는 바로 우리 사회 그들이 사는 세상의 논리이다. 

(사진; osen)

자신의 딸 서이레(이시영 분)가 강도윤의 동생과 아버지를 죽이셨냐고 물었을 때, 서동하(정보석 분)는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아왔다고. 계속되는 추궁에, 기껏 서동하가 인정한 건, 강도윤의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사실만이다. 자신이 이런 일을 겪게 된 건, 마이클 장(엄기준 분)이 한민 은행을 집어 삼키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곤 마이클을 찾아가 당신이 한민 은행을 무리하게 집어 삼키려 해서 이런 사단이 난 거라며 추궁을 하며 내가 죽으면 당신도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협박을 한다. 딸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듯 고백도 해보고, 마이클을 협박도 해보고, 심지어 무릎을 끓고 강도윤에게 애걸복걸도 하지만 딱히 시원한 결론을 얻지 못했던 서동하는 마지막 카드로 장인을 찾아간다. 그리곤 서동하가 모아놓은 골든 크로스 멤버들 앞에서 한민 은행 매각은 그 어떤 법적 하자가 없었다며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말한다. 
강도윤에게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하다 그가 돌아서 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미소까지 지어보이는 경지에 이르른 서동하는 카멜레온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듯하다. 
강도윤 앞에서까지 자신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오히려 니 동생을 사랑했을 뿐이라며 읍소하는 서동하에게 강도윤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이면 그럴 수 없단 말로 그를 정의내린다. 
하지만, 서동하는 한 치의 후회도 없다. 반성은 커녕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고 호시탐탐 강도윤을 없앨 궁리만 한다. 오히려 그의 측근인 박희서(김규철 분)는 아버지를 기소하려는 서이레를 다그친다. 온실 속에서 자란 네가 아버지의 세상을 아냐고, 자식을 버린 어미가 자식이 싫어서였겠냐고,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 굶어 죽일 거 같으니 눈물을 머금고 유기한 것이라며, 자신과 서동하의 행보를 대변한다. 사실을 밝혀서 무얼 할 거냐고, 무엇이 달라질 거냐고 당당하게 다그친다. 

<골든 크로스>속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국가나, 그 속에 사는 개인들 따위는 아랑곳않고, 그들이 벌이는 온갖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각들이 우리가 조우한 사회적 사건들의 데쟈뷰라서 더 섬뜩하다. 한민 은행이란 낯선 드라마 속 은행이 매각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경제 관료와 외국 기업의 앞잡이가 벌이는 행각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들을 복기하게 해준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악을 덮기 위해 다시 악을 되풀이하는 서동하와, 그것을 돕는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가 소름끼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사고방식들이다. 여전히 자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지르는 짓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유의미한 해결 방식이라고 논리적으로 무장한 그들의 생각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변의 논리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협잡이,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미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버렸다는 논리처럼, 그들만의 논리로 주변을 설득하려 드는 것이다.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성심성의를 다해 진실처럼 되풀이하는 서동하의 입장을 듣노라면, 순진한 누군가는 그의 말에 감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치 눈물만으로 악어를 오해하듯이 말이다. 지역과 시장을 돌며 친근한 미소를 띠며 노동에 휘어지고 갈라진 손을 덥석  잡아주는 정치인들에게 감동하는 순진한 서민들처럼 말이다. 요즘 드라마들의 악의 축은 종종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지 못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기적 감정에만 충실한 '소시오패스'라는 사회 병리학적 증상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골든 크로스> 속 그들을 보면, 그건 개인의 심리학적 증상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집단적 정신적 증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적 소시오패스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정신심리학적 진단명이다. 


by meditator 2014. 5. 30. 09:24

수요일 밤 예능의 후발 주자로 서러움을 겪던 <오마이 베이비>가 드디어 수요일 밤의 강자 <라디오 스타>를 이겼다. 역시나 귀여운 아기들을 당해낼 자가 없는가 보다. 하지만 동시간대 1위의 기쁨도 잠시, 또 하나의 육아 예능으로 자신감을 얻은 <오마이 베이비>는 주말 저녁으로 자리를 옮겨 진검승부를 벌일 예정이다. <오마이 베이비>까지 주말로 자리를 옮기면, mbc의 <아빠 어디가>, kbs2의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이어 방송사마다 육아 예능으로 주말 예능의 승부를 겨루는 셈이 된다. 


<오마이 베이비>가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건사고로 말미암아 허겁지겁 종료된 수요일 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태생부터 이미 선발주자가 된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쓰고 시작되었다. 그런 낙인을 피하기 위해 <오마이 베이비>가 내건 차별화된 전략은 세대별, 연령별 다양한 관찰 육아 예능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임현식과 같은 할아버지의 육아, 고은아 등 이모의 육아, 유태웅네 아들 삼형제 육아처럼 다양한 출연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이은의 귀족 육아와 같은 구설수를 불러일으키는 차별화된 육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말 예능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오마이 베이비>의 출연진은 처음 <오마이 베이비>가 내걸었던 다양한 세대, 연령의 육아라는 애초의 의도는 많이 무색해 졌다. 강레오-박선주 부부의 딸 에이미, 김정민-루미코 부부의 늦둥이 담율이, 손준호-김소현 부부의 주안이, 리키 김-류승주 부부의 태오, 태린이까지, 네 쌍의 부부의 아이들을 보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가장 반응이 좋은 연령대의 아이들만 모아놓은 느낌이다. 즉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귀여운 아이들로 주말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역력하다. 

더구나,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방식도 타 육아 예능이랑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성격이 좀 더 강한 <아빠 어디가>에, 채시라의 나레이션이 엄마의 시선이라는 강점으로 작용하는 <슈퍼맨이 어디가>와 나레이션의 역할을 자막이 대신하는 <오마이 베이비>는 세부적인 방식에서는 차이가 날 지 몰라도, 결국 궁극적으로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한 시간여를 때우는 방식에서는 큰 차별성을 두기가 힘든 것이다. 굳이 들자면,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평소 육아에 참여도가 적은 아빠들의 참여라는 이벤트성이 강하다면, <오마이 베이비>는 부부 모두가 출연함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관찰 예능으로서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아빠의 관점에서의 육아, 그래서 서툰 그 과정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한다면, <오마이 베이비>는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공감에 더 방점을 찍고, 그걸 프로그램의 주된 재미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육아 과정을 보는 재미가, 신생가 출생률 최하위의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인 육아의 재미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아이들을 보는 건 좋지만, 과연 <오마이 베이비>를 보면 나도 아이를 키우고 싶다로 이어질까. 부정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출연하고 있는 혹은, 과거에 출연했던 아이들의 가정을 보면, 귀족적 육아로 문제가 되었던 이은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 하나, 둘인 집안이 온통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뒤덮여 있다. 자그마한 장난감이 지천에 널린 것은 물론, 미끄럼틀에, 실제 탈 수 있는 자동차, 아이가 혼자 움직이기에 충분한 영역을 둘러싼 플라스틱 장벽에 침대에, 과연 저 또래 아이들이 실제 얼마나 가지고 놀까 싶은 것들로 아이의 주변은 넘쳐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아이와 아이의 장난감을 담을 집이 무조건 어느 정도 이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 육아 서적에서 보자면, 어린 시절 너무 많은 장난감은 물론 연령별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쉬운 싫증과 심하게는 낭비벽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 실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제 아무리 좋은 장난감이라도 아이들은 쉽게 싫증을 내고, 오히려 엄마의 주방 기구에 더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과연 저 텔레비젼 프로그램 속 지천으로 쌓인 장난감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그렇게 산더미같은 장난감, 동화 속 세상같은 아이의 환경, 그리고 언제나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가정 환경은 오히려 그걸 보는 젊은 세대로 하여금 육아를 두렵게 만드는, 그래서 그저 텔레비젼 프로그램으로만 육아를 즐기는 '회피'를 조장하는 건 아닐까 노파심이 생긴다. 즉, <오마이 베이비>든 다른 육아 프로그램이든,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육아와는 거리감이 있는 또 하나의 '육아 환타지'를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뉴스엔)

또한 '관찰'예능으로서의 시각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아이들을 관찰한다지만,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자막으로 그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해석한다. 28일 <오마이 베이비>에서 태린이가 놀이터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자, 태오는 달려오는 누나의 남자 친구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제목이 '누난 내 여자니까'이듯이, 프로그램은 누나를 사수하기 위한 태오와, 그런 태오를 제끼고 함께 놀려는 태린이와 태린이 남자 친구의 삼각 관계를 만들기에 골몰한다. 이제 겨우 서너 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어른들 '남녀 관계'와 같은 시각을 조성하기에 골몰하는 건, 비단 <오마이 베이비>만이 아닌 모든 육아 예능의 공통점이다. 즉, 그저 자라나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등장하는 아이들의 행동, 말 하나하나에 예능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늘 침소봉대요, 왜곡이 뒤따르는 결과이다. 마치 아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노는데, 엄마들끼리 니 여자친구니, 남자 친구니 하며 호들갑을 떠는 방식을 육아 예능은 여전히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도한 지난 주 강레오 네 에이미의 식사 습관이나, 매번 밥 먹이기 실랑이를 벌이는 김소현네 주안이처럼 생각해 봐야 할 육아 방식을 그저 한 가족의 개성처럼 비판없이 고스란히 전달하기도 한다. 

물론 장점도 있다. 특히 <오마이 베이비>의 경우, 미국에서 태어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가진 리키김과 류승주의 육아 방식은 기존 우리나라 부모들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떠먹여 주려는 과잉 보호와 대비되어 지켜보며 배우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매주 한 시간 넘게 아이들의 일상만으로 '때우는' 육아 예능에서 그런 장점은 쉽게 희석되고, 아이들과 함께 어딘가를 떠나고 방문하는 이벤트가 그 자리를 채워가기가 십상이다. 벌써 아이를 데리고 꽃집을 찾아다니는 강레오네 가족처럼. 하지만 세상은 넓고 아기들은 여전히 많다고, 시청자들이 싫증을 느낄만 하면, 또 다른 귀여운 아기들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아마도 그것이 주말로 진검 승불의 카드를 내민 <오마이 베이비>의 배짱일 것이다. 귀여운 아이가 누군가의 집에서 탄생되는 한 육아 예능의 해는 쉽게 저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날 해에 감사함을 느끼기 어렵듯이, 이제 방송사마다 주말을 채우는 육아 예능은 그만큼 쉽게 권태로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높아진다. 


by meditator 2014. 5. 29. 10:21

이제 4회까지 방영된 <유나의 거리>에는 핏빛 복수와 혈투도, 재벌가의 음모와 파멸도 없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노라면 등골이 서늘해 진다. 그 누구도 쉽게 피해가거나,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5월 27일 방영된 <유나의 거리>에는 두 노인의 삶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이른바 '도끼'라고 불리는 왕년의 주먹 장노인(정종준 분)이 자신이 세들어 사는 한만복(이문식 분)의 콜라텍에서 영업세를 받아내려던 조폭 망치의 병실을 찾아 그를 위협하는 장면이 보여진다. 왕년의 주먹이지만, 이제는 이빨빠진 호랑이처럼 정부에서 주는 노인보조금을 받아 연명하며, 한때 자신의 똘마니였던 한만복에게도 뒷방 늙은이 대접을 받던 도끼는 망치를 무너뜨림으로써 모처럼 그의 위신을 찾는다. 다리마저 불편한 그에게 사람이 죽어나간 이층방을 강요하던 한만복은 그가 모처럼 밥값을 했다며 그를 데리고 가 틀니를 해주고, 도배를 해주는 등 대접을 해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여전히 그는 자기 자식과 부인조차도 외면한, 한만복의 문간방에 집세도 내지 않고 의탁하는 처지일 뿐이다. 1회부터, 개밥의 도토리같은 그의 처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었기에 3,4회의 그의 활약은 오히려 '봄날의 목련'처럼 삶의 페이소스를 더할 뿐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이 있다. 4회를 이르도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채 결국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마는 유나의 아버지(임현식 분)이다. 딸과 함께 놀이 공원에 놀러가서, 사람들이 불꽃놀이에 눈을 빼앗긴 틈을 타서 지갑을 슬쩍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불꽃놀이보다 더 감탄하며 첫 소매치기에 입문하게 된 딸, 그래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옥을 들락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소매치기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소매치기가 된 딸에게 죽기 전의 마지막 유언으로 스스로 잘라낸 자신의 손을 보여준 채 세상을 떠난다. 


유나의 거리 3회
(사진; tv데일리)

비록 4회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나의 거리> 속 삶은 징하다. 
그 흔하디 흔한 조폭들이 역시도 이 드라마에도 등장하지만, <유나의 거리> 속 조폭들은 삶으로의 조폭이다. '이화룡'을 형님으로 모셨던 도끼는, 큰형님으로 모셔지지만 말뿐, 그의 장황한 연설에 아랑곳않고 젊은 조폭들은 고기를 뜯는다. 그를 모셔갔던 한만복은 그를 주책이라며 힐난한다. 잠시 잠깐 망치를제압하며 큰 형님으로서 위용을 뽐내 보지만, 그뿐, 문간방 생활보호대상자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똘마니였던 한만복은 이제 조폭을 배경일뿐 침대 옆에 애지중지 모셔놓은 금고 속 통장이 그의 의지처이다. 이젠 동네 조폭들이 영업세를 뜯으러 와도, 자존심을 내세워봐도, 딱히 내세울 것 없는 그저 '왕년'의 조폭이다. 
어디 조폭뿐인가. 대를 이어 소매치기를 하는 유나의 업계도 만만치 않다. 왕년의 소매치기였다가 경찰과 결혼한 박양순(오나라 분)은 자신들의 노래방에서 없어진 손님의 지갑으로 인해 오해를 받는 처지이다. 유나와 자리 다툼을 하는 동료 소매치기들은, 소매치기를 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이젠 불경기라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며 불평을 해댄다. 그리고 그런 삶의 미래는, 바로 4회 마지막, 기필코 감옥을 나갈거라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치료한번 받지도 못한 채, 돈을 꾸어 감옥을 찾아온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유나 아버지의 모습이다. 

삶은 조폭이건, 소매치기이건 변함없이 흘러가고, 그 속에서 그들은 쉽게 놓여나질 못한다. 왕년의 멋진 형님은 이제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고, 전설의 소매치기는 초라하게 감옥에서 눈을 감는다. 생활은 그들을 밀어 붙이고, 그들은 직업으로 깜냥도 되지 못한 그것으로 인해 삶에 치여버린 모습으로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자식들은, 알면서도 배운 도둑질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그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다음 회의 예고에서도 보여지지만, 아버지가 손가락을 자르는 유지를 남겼지만, 여전히 유나는 '소매치기'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실하고 착한 청년 창만(이희준 분)은 본의 아니게, 자꾸 그 세계로 한 발씩 들여놓게 된다. 삶의 골짜기는 깊다. 

4회 감옥에서 나온 유나를 거둬 준 미선(서유정 분)은 그녀가 자신의 뒷배를 봐주는 사장과 저녁을 먹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는다. 유나도 밀리지 않는다. 두 여자는 길거리에서 육박전을 벌인다. 겨우 창만의 저지로 떼어 놓여진 두 사람, 왜 싸웠냐는 이웃집 여자의 질문에, 미선은 대답한다. 그냥 누군가를 때리고 싶었다고. 자신의 삶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그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풀어내 보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얼굴의 상처와 관계의 후회만 남을 뿐. 당장 유나는 갈 곳도 없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처지이다. 

그렇다고, <유나의 거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삶의 비정함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끼 큰 형님이 행차하실 때마다 깔리는 '대부'의 ost처럼, 드라마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비극도, 운명도 그저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며 덤덤하게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더,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깊어진다. 


by meditator 2014. 5. 28. 09:53

5월 25일부터 <드라마 스페셜>은 2013 극본 공모 당선작 4편이 연달아 방영된다. 그 중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유정희 극본, 이응복 연출의 <꿈꾸는 남자>이다. 


'인물들의 치열한 부딪침 속에서 인간의 본성의 처절함을 이야기하겠다'는 취지를 내보인 <꿈꾸는 남자>는 그 치열함의 가운데 서있는 주인공으로 준길(양진우 분)을 내세운다. 준길을 결혼을 앞둔 평범한 제과 회사의 회사원이다. 하지만 평범한 그를 비범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가 꾸는 꿈이다. 그는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게 될 '죽음'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꾼다고 준길이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척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수퍼마켓 여사장 순애(윤세아 분)를 만난 순간 준길은 놀란다. 바로 그녀가 그의 꿈속에서 살해를 당하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잔인하게 살해 당하고 손가락의 반지를 뺏기 위해 손가락마저 잘리는 그녀를 외면하려 했지만 준길은 자꾸만 그녀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도박하는 남편에게 돈을 빼앗기는 그녀를 돕고, 아이를 보고 싶어하는 그녀를 위해 직접 차를 몰아 시골에 데려다 준다. 꿈 속에 그녀가 살해 당하는 것을 막겠다는 막연한 의도에서 시작된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순애에게 집착하고, 결국 그녀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청첩장을 돌리는 것만 앞둔 결혼도 깨고, 자신의 전세금을 빼서 그녀의 남편에게 주고 순애를 자유롭게 해주려 한다. 


하지만 그의 전 재산을 그녀 남편에게 주어도 그의 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흙구덩이 속에서 정신이 든 그녀를 꿈 속의 살인범은 잔인하게 목을 조를 뿐. 
악몽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을 구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다. 꿈속의 살인범이라 생각한 그녀의 남편을 그 스스로 먼저 처단하는 것.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경마장에서 실의에 빠져있는 순애의 남편은 순순히 준길의 꾀임에 빠져 약을 먹고, 결국 준길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 남편을 죽이고 그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순애로 부터 남편의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 순애는 말한다. 준길과의 사이는 신경쓸 정도가 아니었다고, 다시 함께 시작하자고. 그녀의 다시 시작하자는 목소리에 준길은 분노가 솟구쳐 소리치고 얼떨결에 집어 던진 자신의 짐 속에서 꿈 속의 살인범이 쓴 모자를 확인한다. 꿈 속에서 순애를 죽인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바로 지금처럼 배신감에 치를 떨다 못해 순애를 죽인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준길은 경찰서로 달려간다. 그리고 자신을 가둬달라 애원한다. 자신이 꿈을 실행할 수 없도록. 

준길의 행동을 규정하는 건 두 가지이다. 사랑이라 생각한 그의 집착, 그는 순애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남편을 죽이기 까지 한다. 
또 하나 그를 지배하는 건 그의 꿈이다. 그로 하여금 잠 못이루게 만드는, 그를 현실과 꿈의 세계에서 헤매게 만든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얽혀있다. 그는 꿈을 꾸고, 꿈을 꿈에도 꾸지 않은 듯 살아가려 하지만, 꿈 속에 만난 그녀를 만나며, 꿈 속의 결과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버린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가 꿈을 꾸는 이유를 설명치 않는다. 그저 그는 꿈을 꿀 뿐이다. 드라마 내내 그의 행위의 추동 원인은 헷갈린다. 그를 괴롭힌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마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헷갈리는 것처럼, 준길은 꿈 속에서 본 그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드라마가 내건 반전 역시 그런 선상에서 이어진다. 꿈에서 자유로워 지는 선택 대신, 그는 자신을 영원히 꿈 속에 가두고자 한다. 그것은 동시에 현실에서 허무하게 깨져버린 사랑의 환상 대신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꿈꾸는 남자>에서 사실은 그의 사랑도, 그의 꿈도 그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가장 평범했던 남자 준길은, 비정상적인 꿈과 사랑에 매료(?)되어 자신을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장 쉽게 빠져드는 욕망과 본성의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연출가의 작품이라서 일까, 작가가 다름에도, <꿈꾸는 남자>에서서는 어딘가 드라마<비밀>의 향기가 난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어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던 <비밀>처럼, <꿈꾸는 남자>도 자신의 꿈을 쫓아가는 스릴러로 시작하여 유부녀 순애와의 치명적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비밀>도 재벌집 아들과 가난한 여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드라마의 흔한 요소는, 여주인공의 약혼자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라는 신선한 포장을 거쳐, 매력적인 스토리의 이야기로 변신하였다. <꿈꾸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유부녀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중독적 사랑에, 남자의 운명론적인 꿈이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남자의 마지막 선택이란 반전 데코레이션까지. 하지만 <비밀>도 막상 보고나니 결국은 사랑 이야기였어 하는 싱거움을 버리지 못했듯이, <꿈꾸는 남자>도 약간은 과대포장이 된 듯한 싱거움을 숨길 수는 없다. 그것이 단막극으로서의 앞뒤 뭉턱 자르고 대뜸 꿈부터 꾸고 보는 설정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여운의 미인지, 그도 아니면 결국은 뻔한 스토리에, 반전이라기엔 황당한 결론이었는지, 막상 다보고 나면, 신선한 시도이긴 한데, 극본 공모작이라기엔 어쩐지 새로운 이야기같지는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by meditator 2014. 5. 26. 07:32

23일 기자협회와 pd 협회의 제작 거부로 <취재 파일 K> 대신 재방영된 <소문난 삼형제>에서는 강원도 덕실리에 사는 백발의 삼형제가 소개되었다.  그 중 가장 큰 형인 최돈춘 옹은 올해 나이가 무려 103세이지만, 여전히 스스로 농사일을 짓고, 돋보기 없이 신문을 볼 수 있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실제 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나는데, 똑같은 치매를 앓아도 도시 노인들이 급격하게 생활력을 잃어가는 등 증상의 심화를 겪는 반면, 농촌에서 사는 노인들은 대부분 약간의 기억 상실 등 약한 증상을 겪으며 일상 생활에 큰 지장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병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증상과 결과를 나타내는 차이를 보여주는 이유를 바로 <소문난 삼형제>의 최돈춘 옹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삼형제의 맏이로, 아들이 없는 며느리와 함께 사는 집안의 가장으로 삶의 몫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최 옹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나이를 잊고 나이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최옹 삶의 비밀을 <EBS다큐 프라임>은 다시 한번 증명해 낸다. 


5월 25일 8시부터 연달아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 3부작은 이미 20113년에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고, 그 결과물이 2014년 책으로 발행된 작품이다. 하지만 5월 19,20,21일에 다시 한번 방영되었고, 그 종합편이 25일 연달아 재방영되었다.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3부작의 학문적 근거가 되는 것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앨런 랭어 교수의 연구이다. 1979년 7,80대 여덟 명의 노인들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이십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데리고 간 연구팀은 1959년이 고스란히 재현된 마을로 데려가 생활하게 하고, 그들의 신체 나이와 지능을 50대로 되돌리게 만든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앨런 랭어 교수는 하버드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고, 그 결과물을 [마음의 시계]라는 책으로 펴내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3부작은 바로 이 앨런 랭어 교수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를 재현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노인 8명, '노랸 샤스의 사나이'의 주인공 한명숙, 코미디계의 대부 남성남, '오발탄'의 성우 오승룡, 1세대 프로레슬러 천규덕, 한국의 오드리 햅번으로 불리던 하연남, 최초의 상업 사진 작가 김한용씨까지 7,80대의 노인 여덟 명의 시계를 7일 동안 30년전으로 돌리는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실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노인들 자신은 1982년에 있으며, 그 시대에 맞게, 즉 그 또래 나이에 맞게 말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한명숙씨의 나레이션, '나는 마흔 여덟입니다'를 시작으로 삼십년전으로 돌아간다. 함께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전원일기>를 시청하고, 그 시절의 신문과, 그 시절에 배달되던 우유를 만난다. 당연히 오늘날의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 같은 건 쓸 수도 없다. 

당연히 노인들은 혼란을 겪는다. 현재 익숙했던 물건들을 쓸 수 없는 것에서 부터, 노년이 되어 늘 누군가에게 의탁해 왔던 삶을 삼십년 전으로 돌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또한 삼십년 전처럼 활동하기 위해, 그 시절의 무대에 다시 서는 등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혼자 활동해야 하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자원봉사자들에 노인들의 결심은 흔들리고, 함께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혼돈스러운 시간을 견딘 7일 후 여덟 명의 노인들은 놀라운 결과를 맞이한다. 무엇보다 여덟 명의 노인 중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걸음을 걸을 수 있었고,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져 보이던 한명숙씨는 겨우 7일 만에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되고, 서예를 배우는 등 삶의 의욕을 보이게 되었다. 시간 관념이 희미해졌던 하연남씨는 이제 더 이상 지각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울증' 등에 시달렸던 노인들은 웃음과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물론, 이런 <황혼의 반란>의 결과가 단지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명숙씨처럼 오로지 홀로 견뎌야 하던 노년의 삶이 여덟 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 라는 삶의 조건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젊은 자원 봉사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년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오는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의학적 시술이나, 건강 제품이 아닌, 오로지 마음의 시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삶의 긍정성을 되찾는 이 실험은 경이롭다. 실제 7일간의 실험을 통해 여덟 명의 노인들은 신체, 정신 기능 뿐만 아니라, 피부까지 좋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늙는다는 건, 어쩌면 진짜 늙음에 앞서, 나이듦에 포기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될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 실험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술이나, 명약이 아니라도, 돈없이도 얼마든지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 그것은 생각 외로 명쾌하다. 마음에 달린 것이다. 
젊은이 한 사람이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해야 하는 노년 인구 과잉의 시대, 건강한 노년의 삶은 노인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 문제이기에, 노년의 건강한 삶의 비밀을 주체적 삶의 자세로 풀어낸 <황혼의 반란>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by meditator 2014. 5. 26. 06:19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10회 말 마지울의 엄마를 끌고 가 어설프게 갑동이처럼 살인을 저지르려던 박호석(정근 분)은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잡히고,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그가 과거 양철곤(성동일 분)의 표적 수사로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직장도 잃고, 자신의 신상이 드러남으로써 더 이상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갑동이가 아니었지만,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갑동이가 되어간 '갑동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양철곤이 지켜보는 조사실 유리창을 깨며 절규하는 박호석에게 양철곤은 덤덤하게 '사과가 필요하면 해줄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곤 덧붙인다.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11,12회, 아니 그 이전 10회, 11회를 통해 알려진 것은 갑동이 사건의 진척보다, 갑동이라는 사건을 통해 양철곤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가버린 것인가이다. 멀쩡한 대기업 회사원이었던 박호석이 망상증으로 치료 감호소를 전전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만큼 갑동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양철곤 역시 자유롭게 사회 속에서 숨을 쉬고 사는 듯하지만, '갑동이'라는 그가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한채 십 여년을 보내고 있다. 
갑동이를 잡는 과정에서 하무염의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낙상한 딸이 식물인간처럼 스물 다섯의 나이에 숨을 거두기까지 아버지로서 양철곤은 며칠을 딸과 함께 보내지도 못했다.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원망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딸을 지킬 수 없게 만들고 갑동이에게 헤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갑동이를 잡기 위해 정직 중에 홀로 기다리던 제방에서 그를 갑동이로 오해하고 달아나던 중년의 여인을 그 역시 갑동이로 오해하고 쫓다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죽인 여인에게 갑동이가 자신의 표식을 남김으로써 양철곤은 졸지에 일곱 번째의 갑동이가 되어 버렸다. 갑동기를 쫓다, 스스로 갑동이가 되어버렸으니, 더더욱 갑동이를 잡기 전에는 갑동이를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진; 뉴스엔)

그러기에 양철곤은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갑동이 잡는 일에서 놓여나라고 하무염에게 말한다. 하지만, 하무염 역시 그럴 수 없다. 아버지를 의심해서 유일한 아버지의 무죄 증거였떤 잠바를 태워버린 하무염은 아버지를 의심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듯이, 갑동이에게 놓여날 수 없다. 그런 하무염에게 동정을 하다, 이제 사랑을 하게 된 오마리아(김민정 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녀는 말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고. 양철곤이든, 하무염이든, 오마리아든 모두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서 갑동이를 잡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갑동이는 달랐다. 다른 연쇄 살인범들이 결국 자신의 범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범죄를 거듭하다 잡히고 말았지만, <갑동이>에서 갑동이는 9차를 끝으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다. 갑동이의 카피 캣인 류태오는 자신 역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들지만, 결국 비행기에서 우발적 범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카피 캣을 그려냄으로써, 갑동이가 '갑'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이 그를 쫓는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와 죄의식에 짖눌려 그를 잡기 위해 세월을 팔고 있는데도, 갑동이만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만이 자신의 과거에서 자유롭게, 전혀 다른 얼굴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로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12회 마지막, 범죄 현장이었던 제방길에 수사반의 차도혁(정인기 분)이 얼굴을 드러낸다. '꼭꼭 숨어라'를 휘파람으로 불며. 그가 진짜 갑동이일지도 모른다는 12회의 엔딩에 시청자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철곤을 비롯하여 극중 인물들이 갑동이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세월을 파먹는 동안, 오로지 갑동이만이 그 예전 양철곤이 7차의 범죄자가 되어가는 동안 몸을 숨기며 그를 지켜보았듯, 그들의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 차도혁이 아닐 수도 있다. 오마리아에게 진범을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안도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갑동이 일 것 같지만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갑동이>는 갑동이가 나올 때까지는 갑동이라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갑동이>는 또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다. 뜻밖에도 '소아성애자'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오마리아의 양아버지 프로파일러 한상훈(강남길 분)도, 가장 인자한 스님의 얼굴을 하지만, 언제나 사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진조(장광 분) 스님도 갑동이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하지만 그 누가 진짜 갑동이가 되었든 <갑동이>에서, 갑동이가 갑이다. 그만이 홀로 갑동이의 사건에서 쏙 빠져 나가 유유자적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라마 <갑동이>는 갑동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에서 갑동이 망상자가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려던 박호석처럼, 갑동이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그리고 이제는 갑동이를 잡아야만 거기서 놓여날 수 있는 '미망' 속의 인물들을 그려내는데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by meditator 2014. 5. 25.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