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7일 <라디오 스타>에는 송승헌이 모처럼 예능 나들이를 했다. 제목도 거기에 어울리게 송승헌과 줄줄이 사탕, 영화 <인간 중독>에 출연한 배우 송승헌은 그간 부진했던 영화 흥행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듯, 함께 영화를 한 감독, 배우들과 함께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후 처음으로 예능 출연을 감행했다.


송승헌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하기도 전에 수많은 기사가 그의 <라디오 스타> 출연을 기사화했든 그의 예능 출연은 그 자체로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방송 말미, 송승헌의 출연을 계기로 권상우 등 많은 스타들이 출연의 물꼬가 터질 것이라는 mc의 언급에, 송승헌은 씁쓸하게 오히려 반대일 것 같은데요 라고 대답한다. 

모처럼의 예능 출연에 대해 작정하기라도 한듯 송승헌은 <라디오 스타>를 통해 그간 베일 속에 가려진 자신의 모습과 속내를 전하는데 결코 주저함이 없었다. '욱'한다는 조여정의 평가에 거부치 않고 자신이 욱하는 경우를 세세하게 설명했으며, 데뷔의 계기에서 부터, 첫 작품에서의 발연기, 연기 대상 논란에 대해 속시원히 털어 놓았다. 그리고 짖궃은 mc들의 요구에, 당시 시트콤에서 했던 '배트맨' 개그도 마다치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의 등장에서, mc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더 그의 '잘생김' 이상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약 <라디오 스타>를 본 누군가가, 송승헌이 이렇게 잘 생긴 배우였던가 라며 감탄하고, 그의 영화<인간 중독>를 보러 간다면, 그의 <라디오 스타> 출연은 성공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신비주의를 내걸었던 배우 송승헌의 모처럼의 예능 출연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어쩐지 5월 7일의 <라디오 스타>는 그닥 흡족하지 않아 보인다. 마치 송승헌이 보여줄 수 있는 정도의 비밀을, 예의를 갖춰 '아, 이런 비밀이 있었어요' 하는 느낌?, 그러기에, 그의 잘생김을 뛰어넘은 토크의 묘미는 어쩐지 형식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에 대한 질문들은 다양했지만, 그 질문들이 꿰어져 인간 송승헌에 대한 이해나, 색다른 매력을 찾아내기에 <라디오 스타>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인간적인 매력은, 조여정이 송승헌 대 온주완을 놓고, 온주완을 선택했듯이, 온주완의 편이 더 강했다. 영호남을 평정했다는 그의 여심 섭력 필살기와, 그의 가족 이야기는, 온주완이라는 인물에 입체성을 더해주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등장과 더불어, 언제까지나 기대주라던 온주완에 대한 평가는, 단지 그가 배우가 되지 않았으면 제비가 됐을 정도로 여자를 잘 안다는 것 이상, 배우 온주완에 대한 깊이를 더해주지는 않았다. 

(사진; 뉴스엔)

또 다른 출연자 감독 김대우와, 배우 조여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것은 게스트의 문제라기보다는, 언제부터인가 정체되어 있는 <라디오 스타>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의 문제로 부터 기인하는 듯하다. 

초창기 <라디오 스타>는 정말 정신없었다. 도대체 대본은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질문은 중구난방이었으며, 그 질문의 내용도 꼿히는 대로, 그저 한 방향으로 흐르다, 시간이 되면 끝 하는 식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정신산란한 <라디오 스타>에는 어쩐지 인간 냄새가 났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미숙하면 미숙한대로, 무장해제당한 채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스타들의 훈훈함이 드러났었다. 

하지만 이제 수요일 밤의 예능 강자가 된 <라디오 스타>에는 그 예전의 <라디오 스타>가 가졌던 인간미가 덜해졌다. 쟁쟁한 작가진들에 의해, 출연자들이 혀를 내두르는, 예를 들어, 송승헌과 권상우가 클럽에서 누가 더 잘 생겼냐 물어봤다는 식의 고급 정보들이 출연자들의 무장해제를 돕긴 하지만, 그뿐 그 이상의 출연자에 천착하여 그의 매력을 들여다 보는 여유를 잊었다. 
질문은 날카롭게 던져지지만, 그 질문들을 하는 mc들의 자세는 어쩐지 고답적이고, 형식적이다. 이승환 편과 송승헌 편에서 그 분위기가 차이가 나듯, 특히나, mc 중 누군가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런 증세는 심해져, 애써 출연자에 천착하기 보다. 그저 묻고 답하는 식의 문답쇼 형식을 넘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그저 웃기는 꺼리, 화제가 될 만한 꺼리 하나 잡고 늘어지는 식이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얻어 걸린 것이 송승헌 편에서는 송승헌의 잘생김이요, 온주완의 여자 꼬시는 능력인 것이다. 그리고 그저 그뿐, 그 이상 출연자에 대해 mc들이 예전 처럼 진지하게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지 않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어딘가 겉훑기 식의 토크쇼가 되어 가는 것이다. 덕분에, 송승헌은 모처럼 각오을 다지고 예능 출연을 했지만, <라디오 스타>를 통해 그가 보여준 것은, 그저 잘생긴 송승헌일 뿐이다. 

굳이 <라디오 스타>에게까지 지금과 같은 시기에 걸맞은 자세와 힐링 같은 걸 요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라디오스타>에서만 느끼던 인간 냄새마저도 점점 옅어지는 건, 어쩐지 안타까운 일이다. 


by meditator 2014. 5. 8. 05:59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면 빠지지 않고 여러가지 특집이 마련되곤 한다. 올해는 부처님이 오셔도 구제하기 힘든 재난과, 연휴의 끝자락이라는 분위기에 휩쓸려서 인지 다른 해보다 조용히 부처님이 다녀가신 듯하다. 그런 와중에도 <다큐 공감>은 부처님 오신 날 특집에 맞춰, 각국의 불교 문화 발전에 따라 달라진 수행 음식에 대한 다큐를 마련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이 모인 벌판에서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리를 그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기적이, 그리고 최후의 만찬에서 함께 나눈 포도주가 기독교의 상징 음식이 되듯, 불교 역시 불교를 만든 석가모니가 먹었던 음식에서부터 불교의 음식이 시작된다. 이런 불교라는 종교 아래 서로 다른 음식 문화를 <다큐 공감>은 1부, 탁발, 2부, 발우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 본다. 


2005년전 인도 보드가야에서 6년간의 고행 후 보리수 아래 몸을 누인 석가모니에게 수자타가 공양한 유미죽이 바로 그 불교 수행 음식의 시작이다. 
하지만 불교의 음식들은 불교가 전파되는 방향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변화된다. 
인도에서 남쪽 방향으로 전래된 불교는 남방 불교가 되어 '수행'에 중점을 둔 불교로 발전한다. '수행'이 중요한 남방 불교에서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음식을 얻는 '탁발'의 과정이 수행의 한 과정으로 중시된다. 
물론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다. 스리랑카에서는 특별한 날 신자가 직접 음식을 만들어 절로 향하는 식의 탁발을 한다면, 스리랑카나, 미얀마에서는 스님들이 직접 신자의 집을 찾는다. 
이렇게 신자들이 주는 음식을 수행의 과정으로 먹는 것이기에 스님들은 신자들이 주는 그 어떤 음식도 거부치 않는다. 당연히 그 음식에는 고기도, 마늘도 들어가 있다. 남방 불교에서 음식은 육신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 수양을 위한 하나의 과정이며, 그 과정 중에 신도들이 주는 음식 중 고기를 먹는 건 살생으로 치지 않는다. 아니, 고기든, 채소이든 그 어떤 것이든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기에,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단 생각이랄까. 

이렇게 신도들의 음식을 직접 얻어 먹어야 하는 '탁발'의 과정이 수행의 중심이 된 남방 불교와 달리, 중국 쪽으로 전파된 대승 불교는 '계율'을 중시하면서, 공양 과정의 형식에도 중요성을 부여한다. 
또한 중국 역사에서 등장한 '폐불 운동' 등으로 인해 탁발이 여의치 않았던 중국의 상황은 스스로 농사를 지어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 '선농일치'방식을 통해, 절내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는 발우의 형식을 띠어간다. 또한 달마 대사 이후 참선 수행에 집중한 선불교는 스스로의 믿음을 통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음식을 먹는 공양 과정도 그 일환으로 중요시 여겨지게 되었다. 
탁발이 돌아다니며 신자들이 주는 음식을 무엇이든 먹는 과정 자체에 방점이 찍혔기에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면,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먹기 시작한 중국 불교의 발우는 음식을 통해 불교 정신을 살리고자 육식과 오신채(부추, 대파, 마늘, 양파 등 향이 강한 양념)를 금하는 형식을 중요시 한다. 또한 자연 속에 한 몸이 된다는 취지 하에, 최소한의 양념으로 재료 그대로 조리하는 방식으로 자연 그대로의 맛을 살리는 사찰 음식의 전통을 만들어 나간다. 

중국의 불교가 이후 맥이 끊긴 것과 달리, 8세기 유학승 법랑을 통해 한반도로 도입된 선불교는, 선종의 정신전 본령으로 그 전통의 중심에 서있다.
또한 그에 걸맞게 선불교에서 이어져온 육식과 오신채를 금하고 채식을 하는 사찰 음식의 전통 역시 보다 가다듬어 발전시켰다. 그에 따라 발우는 모든 사람이 한 자리에서 똑같이 나누는 평등 정신의 실현이자, 절제와 욕심을 버리는 과정이 되어, 자신의 삶 속에서 필요한 최소한의 양을 스스로 취하고, 먹는 과정에서도 음식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빚을 남기지 않고 남은 공덕을 돌린다는 취지의 불교 정신에 맞는 형식적 틀을 갖추기에 이른다. 
또한 스님들의 기혈을 보하는 쌀가루, 겨울에 난 제철 동백, 그 동백의 찬기를 보하는 들깨 등으로 만든 음식처럼, 적절한 계절 음식은 물론, 음식이 곧 약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또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불을 때고, 식재료를 오랜 시간에 걸쳐 준비하는 그 과정 자체가 곧 수행의 과정으로, 나를 내려놓고, 오히려 그를 통해 마음을 들여다 보고 살찌우는 수행의 일환으로 승화된다. 

이렇게 <다큐 공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아왔던 불교 음식의 전통 조차도, 불교가 국가별, 지역별로 전파되어 가며 발전되고, 변화되어진 결과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살생을 금한다는 육식 금지의 정신 자체도, 그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차원으로 넓혀지면, 채소 역시 생명의 상징이 되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남방 불교의 탁발 수행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열어준다. 그저 형식적인 부처님 오신 날의 특집이 아니라, 이제 우리 사회의, 혹은 또 다른 나라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는 불교를 문화적, 그 중에서도 먹거리를 통해 들여다 본 문화의 다양성을 살펴본 가치있는 시간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4. 5. 7. 00:29

세월호 사건이 있은 이후로 중지되었던 예능과 함께 휴방했던 <힐링 캠프>가 돌아왔다.

돌아온 <힐링 캠프>의 주인공은 90년대 틴틴 파이브로 이름을 날렸지만, 이젠 시각 장애인으로 우리에게 더 친숙해진 이동우이다. 

결혼 한지 불과 100일 만에 망막색소 변성증이란 진단을 받고 급격하게 시력을 잃은 이동우가 그가 지나왔던 과정을 때로는 차오르는 눈물에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만 씩씩하게 전한다. 

언제나 누구나 뜻하지 않은 고통을 맞닦뜨린 사람이라면 그렇듯이, 이동우도 결혼이라는 인륜지대사를 겪으며 행복한 것도 잠시, 망막색소 변성증이라는 난치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면 혼란에 빠져들었다 한다. 그 병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병은 급격하게 진행되었으며, 거기데 업친데 덥친 격으로 임신을 한 아내는 뇌종양의 판정까지 받아 신혼 부부의 행복은 불행의 나날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다가올 불행이 너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의 눈을 멀게 하려고 마음을 먹기까지 했던 이동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의 소식을 기사로 전해들은 것처럼 그 누구보다도 씩씩하게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병을 거부하고, 혼돈스러워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시간을 넘기고, 이제는 철인 삼각 경기에 출전하고, 재즈 가수로 이름을 날리며, 연극까지 출연하는 등 장애 이전보다 더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사진; 뉴스엔)

하지만 <힐링 캠프>를 통해 전해들은 그의 이야기는, 지금의 밝은 그가 되기까지, 그도 고통을 받아든 그 누구나처럼 힘든 시간을 겪어 왔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결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져 이혼이란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 여겨졌던, 그리고 그 고비를 넘기고 아이가 태어났지만 아이의 아빠로서 무능력했던 자신을 자책하던 시간들 밝은 목소리 중간중간 말문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수 있게 된다. 

간사하게도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을 전해들으면 같은 사람이기에, 그의 고통이 마음 깊이 전해져서 함께 아프면서도, 동시에 안도하게 된다. 아, 나만 아픈 것이 아니구나 하는, 미안하게도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얍삽한 안도만이 아니다. 그런 동병상련을 넘어 진짜 위로가 되는 것은, <힐링 캠프>의 이동우처럼, 그 고통을 겪는 누군가가, 그것을 의연하게 넘기며 오히려 그 전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 나에게 다가온 이 고통도 언젠간 저렇게 넘어가게 되는거구나 라는 진짜 안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고통을 넘어 그 전보다 나은 깨달음과 나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에게 온 이 고통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라는 희망을 걸게 된다. 

바로 그런 고통의 카타르시스를 <힐링 캠프>의 이동우는 잘 전달해 준다. 
눈이 멀기 전까지는 오로지 연예인 이동우를 중심으로 움직이던 세상 속에서만 살던 젊은이가, 결혼을 하고 뜻하지 않는 실명을 하고, 그러면서 아빠가 되고, 다시 생활인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그것이상, 그런 고통을 보다 나은 삶으로 승화키며 가는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린 딸에게 눈먼 아빠가 해줄 수 있는 그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시도했던 트라이애슬론 최종 도착 지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성취가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올 수 있었던 동인이 자신이 잘 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곁을 지켜준 많은 사람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저 인간 승리의 장애인을 넘어선 삶의 승화를 얻어낸 모습이기에 더 감동적인 것이다. 고통이 그저 고통이 아니라, 때론 삶의 더 큰 가치를 얻어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시각 장애인으로서의 당당함도 위로가 된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다니기 위해 하얀 지팡이에 벨을 달게 되었다는, 자칭 에디슨이라는 그의 평가는, 그 이면에, 세상 사람들의 편협한 불편함때문에 점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장애인들의 현실을 오히려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게 된다. 장애가 죄냐 라는 그의 항변은, 우리가 무심결에 젖어든 우리의 편견을 일깨워준다. 
그건 시각 장애인만이 아니다. 오히려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도, 이 사회 속에서 늘 부족하다 하여 웅크리고 사는 많은 사람들에게, 눈이 먼 이동우가 세상 밖으로 나오라 독려해 주는 듯했다.

이동우가 포크로 자신의 눈을 찌르고 싶었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이 정말 힘든 것은,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유한 것임에도, 아니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에도, 그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여전히 자신의 딸을 5분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소망을 잃지 않는 이동우지만, 자신이 가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최선을 다한 모습으로 더 나은 삶을 성취하는 것으로 그를 보는 사람에게 위로를 전한다. 오랜만에 돌아 온 <힐링 캠프>는 모처럼 프로그램 본연의 '힐링'에 충실했다. 


by meditator 2014. 5. 6. 03:19

<기황후>의 뒤를 잇는 <트라이앵글>의 서막이 열렸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트라이앵글>은 형제이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장동수(이범수 분), 장동철(김재중 분), 장동우(임시완 분) 형제의 비극을 다룬다. 그들은 한 부모님 아래서 태어난 형제이지만, 서로를 알지 못한 채, 형만 장동수란 이름을 유지할 뿐, 두 동생은, 허영달과 윤양하 란 이름을 가지고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단지 형사인 형이, 2전 2패의 실패를 거듭하고도 건설 재벌 고복태를 잡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는 걸로 봐서, 이 형제의 비극사에 그가 개입하고 있음이 짐작된다.

어린 시절 헤어진 형제의 비극을 다룬 드라마는 우리 드라마에서는 익숙한 이야기이다. 전작 <기황후>의 장영철 작가의 히트작이, 바로 <트라이앵글>의 형 이범수가 출연한 <자이언트>(2010년)였으며, 최완규라는 이름을 알린 계기가 그 유명한 <야망의 전설>(1998년)에서부터, 2008년 <에덴의 동쪽>까지 우리 드라마에서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소재가 바로 서로 운명을 달리한 형제들의 이야기였다. 아니 형제들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빛과 그림자>(2011년), <태양을 삼켜라>(2009년) 등 남자들의 뒤바뀐 운명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 최완규의 전매 특허와도 같은 이야기 장르이다. 

 포토 보기

지금까지 우리 드라마 속에서 그렇게 운명의 장난으로 서로의 인생 행보가 달라진 형제들은 누구는 재벌로, 누군가는 그 정반대의 조폭으로 살아가는 처지가 되어 나타난다. <트라이앵글>도 역시 다르지 않다. 장씨 가문의 세 형제 중 막내인 장동우는 재벌집 아드님이 되었다. 그에 반해 둘째인 허영달로 살아가는 장동철은 도박의 도시 사북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양아치 중의 상양아치로 살아간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라마들이 운명의 비극에 몸을 맡긴 슬픈 운명을 한껏 극단적 삶의 행태로 비교하는 것과 달리, <트라이앵글> 첫 회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만, 그들을 덮친 비극에 희생물이 된 세 형제의 모습을 병렬시킴으로써, 그들이 형제라는 걸, 그리고 그들이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라는 걸 설명한다. 

맏형 장동수는 광역수사대의 형제 반장이지만, 검찰반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수사 도중 피의자를 마구 패는 건 다반사, 출동 현장에서 폭력을 과도하게 행사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등 그의 폭력적 성향으로 인해 충동 조절장애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사게 된다. 
그에 반해 둘째 허영달이 되어 살아가는 장동철은 양아치 그 자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옷을 벗고, 깽판을 치는 건 예사, 겨우 그렇게 해서 돈이 생긴다 치면, 그 돈을 들고 당장 카지노로, 그게 안되면 불법 도박장이라도 가야 직성이 풀리는 막장 인생이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 목적이 이루어 지면 그것을 제로로 만들기 위해 매진하는 듯한 그의 아슬아슬한 행보는 그의 형의 충동조절 장애와 묘하게 닮았다. 
막내라고 상황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경치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다. 양도 먹지 않으려면 정신과 의사를 찾을 필요가 없다는 힐문이나 당하는 처지이다. 

개발과 발전과 경쟁의 논리를 내재화 한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정신병리학적 각종 장애와, 정신적 질병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회적 현상을 발빠르게 포착하고, <트라이앵글>은 비극적 운명에 쌓인 형제의 모습을 정신병리학적 장애를 가진 인물로 설명해 낸다. 신선한 접근 방식이자, 비극의 현대적 설명 방식이다. 누가 더 부를 많이 가지고, 가지지 못한 가 이상의,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현재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로, 형제의 불행을 단적으로 그려낸다. 

(사진; tv리포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 운명을 겪는 개인의 운명에 촛점을 맞추는, 그리고 그 비극적 정서를 낭만주의적으로 극대화 하고, 거기서 빚어지는 인간 관계의 파열음으로 드라마를 추동시키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전형적인 스토리, 가족사의 슬픈 운명에 기대어 가고 있는 방식이 달라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런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를 시대에 맞게 달리 포장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첫 회, 양아치의 극단적 캐릭터를 보여준 허영달의 모습은, 곧 그가 세 형제 중 가장 낮은 사회적 위치를 점한 만큼, 세 형제 중 가장 비극적 운명을 담당할 것이라는 복선처럼 보인다. 더구나 예고편을 보니, 양아치 형과 재벌 동생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얽힐 운명인 듯하니, 이 정도면 벌써 형제애와 사랑의 복잡한 그림이 그려진다. 
첫 회 시작부터 장동수의 충동 조절 장애를 빌미로 화끈하게 벌어진 클럽에서의 격투씬, 허영달의 도박장씬은, 신선한 캐릭터로 승부하는 듯 보이지만, 결국 <트라이앵글>의 정체성을 보여준 방식이다. 여전히 그런 도박과 폭력과, 가족애라는 구태의연한 정서가, 우리나라 드라마계에서 시청률 보증 수표라 믿는 최완규, 유철용 콤비의 도박 한 판이 벌어졌다. 그 도박에 뒷돈을 대줄 것인가는 이 시대 시청자들의 몫이다. 


by meditator 2014. 5. 6. 02:20

sbs스페셜은 4월 27일과 5월 4일 2회에 걸쳐 2부작 <하얀 블랙홀>을 방영했다. 

<하얀 블랙홀>은 그간 sbs스페셜이 방영했던 다큐와 달리,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의 대원의 히말라야의 촐라체 등정을 재연 드라마의 형식을 빌어 소개했다. 

박정헌, 최강식 대원은 2004년 12월 4일 당시 서른 다섯과 스물 다섯의 나이로, 수직 빙벽으로 악명이 자자한 히말라야의 촐라체의 등정 길에 오른다. 
두 사람의 도전은 그 자체로도 남달랐다. 그간 대부분 우리나라의 산악 원정대가 누가 더 높이 올라가나라는 목표를 두고, 다수의 인원과, 안내원, 그리고 산소통 등의 장비를 갖춘 등반대라는 방식을 구가했다면,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은 온전히 '인간의 힘'으로만 촐라체를 정복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베이스 캠프를 지켜주는 단 한 사람의 지킴이만을 놔둔 채, 산소통도 없이, 최소한의 장비를 가지고, 최단 기일 1박2일을 목표로 하는 '알파인 등정'방식으로 촐라체 빙벽을 도전한다. 


이런 두 사람의 도전에 대해 그것을 한편의 소설 [촐라체]를 통해 복원하였던 박범신은 말한다.
 '촐라체 빙벽은 불과 6440m에 불과하다. 이런 도전은, 그 자체로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관성에 반기를 시도로서 의미가 깊다. 개발 독재 이래로, 우리 사회가 젖어든 성과 중심 주의를 벗어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고, 그 성취를 통해 성취의 기쁨을 이루고자 했던 두 사람의 시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하지만 도전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던 촐라체의 등정은 두 사람의 인생을 전혀 다른 길로 인도하고 만다.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겨울의 촐라체는 하루종일 햇빛이 들지 않은 차갑다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추위를 느끼게 했고, 덕분에 1박2일이라는 야무진 목표를 가지고, 단촐한 짐을 가지고 빙벽을 올랐던 두 사람은, 추위와 배고픔, 탈진과 싸우는 상황에 맞닦뜨리고 만다. 겨우 겨우 며칠 만에 정상오른 기쁨도 잠시, 하산을 하던 중 나이 어린 최강식 대원은 끝을 알 수 없는 크레바스에 추락하고 만다. 다행히 두 사람을 이어준 밧줄 덕분에 최강식은 크레바스 골짜기로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 과정에서 박정헌은 갈비뼈가 부러지는, 최강식은 양쪽 다리가 탈골되고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만다. 최강식을 끌어올릴 수 업는 박정헌, 스스로 올라올 수 없는 최강식, 그런 상태에서 최강식은 자신과 연결된 줄을 끊으라고 절규하지만, 정신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몇 번이고 줄을 끊는 환상에 시달리던 박정헌은 결국 줄을 끊지 못한다. 다행히, 등반길에 필요없다 생각한 장비의 도움으로 최강식이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두 사람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촐라체를 탈출한다. 
같이 죽고자 했던 박정헌, 자신을 버리고 살아가라던 최강식의 희생 정신이 결국 두 사람을 모두 죽음의 히말라야에서 살아오게 만든 힘이 되었다. 

하지만, <하얀 블랙홀>은 거기서 종료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인생의 블랙홀은 거기서 시작되었다. 
최단 시간 등반을 목표로 했던 두 사람의 등정 방식으로 인해, 그리고 부상으로 인해 자신의 몸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던 생환의 과정에서 버려야 했던 짐들 덕분에, 두 사람은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그 과정에서 얻은 동상으로, 두 손의 손가락과 발가락들을 잘라버려야 했다. 촐라체의 등정은 짧았지만, 그 등정의 흔적은 영원토록 두 사람의 몸에 낙인처럼 남고 말았다.

<하얀 블랙홀> 2부는 크레바스에서 살아 내려오기 까지, 그리고 겨우 목숨을 건지고 10 여년이 지나 다시 촐라체를 만나러 가기 까지의 과정을 담는다. 
줄을 끊고 싶었지만 끊을 수 없었던, 그래서 그 줄에 의지해 함께 살아왔지만, 박정헌이 '원죄'라고 말했던 그 산을 데리고 간, 그리고 크레바스에 빠졌던 그 기억들이 같은 고통을 나눈 두 사람을 멀게 만든 그 상처의 시간들을 들여다 본다. 자신이 함께 가자고 했기에, 그리고 자신이 크레바스에 빠졌기때문에 자신으로 인해 상대방이 그런 상태가 되었다는 자책감, 하지만, 그런 상대방을 배려해야 하기엔, '피아니스트에게 손가락과도 '같은 등반가의 손가락을 잃은 두 사람은 산에서의 고통만큼 아니 오히려 그 이상의 끝나지 않는 절망의 시간을 건넌다. 하지만, 결국 촐라체에서 후배의 목숨줄을 끊어버리지 못한 선배처럼, 그리고 그 선배를 찾아 온몸으로 구르며 산을 내려온 후배처럼, 그리고 오두막에서 다시 만나 서로의 체온을 확인하고, 그 상대방의 체온 덕분에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던 그 시간의 경험이 두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박정헌은 비록 다시 등반을 할 수는 없었지만, 패러 글라이딩 등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탐험의 길을 멈추지 않았고, 최강식은 선배가 살려준 목숨을 결코 허투루 보낼 수 없다는 다짐으로 학교 체육 선생님이 되었다. 결국 촐라체에서 서로를 살렸던 끈이 사회에서 장애인이 된 그들을 다시 살려낸 것이다. 

박범신은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소설로까지 형상화시킨 이유를 '우리가 잃어버린 유대'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우리 사회 자체가 히말라야 8000 m 14좌 등반의 경쟁처럼 그렇게 살아간다고, 그래서 두 사람의 촐라체 등반처럼, 자신이 맞는 목표를 찾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자세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놓지 않았던 믿음과 희망의 끈이,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그래도 두 사람은 비록 두 손의 손가락들과 발가락들을 잃었지만 살아돌아왔다. 하지만, 정작 지금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로 인해 회복될 수 없는 고통에 빠져있다. 그런 때, <하얀 블랙홀>의 두 사람의 결코 놓지 않았던 끈의 메시지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한 어른들의 행태로 인해 좌절한 지금의 우리 사회에 더 아프게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삶의 원칙과 목적들을 <하얀 블랙홀>은 나즉히 일깨워준다. 박정헌, 최강식 두 사람의 촐라체는 그들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등반의 상처들이다. 그렇듯, 우리는 우리 사회가 안고 가야 할 촐라체를 얻었다. 그들은 그럼에도 두 사람의 놓지 않은 끈으로 희망을 길러 올렸지만,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시간의 촐라체는 무엇으로 회복해 가야 할까. <하얀 블랙홀>이 그 방향을 밝혀준다. 살아남은 자의 과제이다. 


by meditator 2014. 5. 5. 02:15

5월 3일 방영된 <인간의 조건>,여성 멤버들은 팀별로 나뉘어 밀가루, 설탕, 흰쌀, 그리고 고기를 끊는 미션을 수행하였다. 그 중에서 게스트로 참여한 김민경은 멤버들의 권유에, 자신이 참여했던 고기 외에 다른 것들도 끊어 보기로 하였다. 먹을 것이 거의 없게 된 김민경을 위해 멤버들은 지난 회 현미밥 도시락을 정성들여 싸주었고, 그래도 걱정이 된 김숙은, 쌈밥 다이어트를 하겠다는 김민경을 위해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은 장을 찾아나선다. 밀가루가 들어있지 않는 보리를 발효시켜 만든 고추장에, 쌈장으로 적합한 콩알이 살아있는 된장에, 먹고싶다던 미역국을 끓이는데 꼭 필요한 조선 간장까지 구해 아지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이 먹고 싶다던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준비해온 김숙의 정성에 급기야 김민경은 눈물을 보이고 만다. 


김민경의 눈물에 정작 당황한 것은 김숙이었다. '네가 한 말을 기억해서 미안해'라고 농담처럼 덧붙일 만큼. 나중에 돌아온 멤버들은 혹시나 미션이 너무 힘들어 김민경이 운 것일까봐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정작 김민경의 운 이유를 듣고, 멤버들은 그것이 비단 김숙의 정성때문만이 아니라, 그간 젖어 살아온 먹거리들을 끊은 데서 나타난 우울증 증상의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다. 즉 밀가루와, 설탕, 흰쌀이 주는 달콤한 충족감, 그리고 고기를 먹고 힘을 내던 그 에너지가 상실된 시간들이, 멤버들을 그저 헛헛하게 만드는 걸 넘어, 욕구불만의 우울증 증상까지 이르게 만들었던 것이다. 

단지, 먹고픈 걸 하루 이틀 먹지 못했다는 이유 만으로, 무작정 짜증이 나고, 기운이 떨어지고, 심지어 말하기 조차 싫어지는 금단 증상은, 마치 니코틴이나, 알콜의 금단 증상 못지 않게, 멤버들의 활기를 떨어뜨린다.  그간 이들이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밀가루, 설탕, 흰쌀의 성분에서 비롯된 당과, 고기에서 얻어지는 육식에의 침범당하며 살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tv리포트)

가장 미련스러운 질문이지만,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하지만, 인스턴트 식품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먹거리의 공해가 심해지고 있는 요즈음, 우리는 거기에, 하나의 질문을 더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사는가?

그저 며칠 단 것을 먹지 않았다고 우울해지고,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기운이 떨어지는 <인간의 조건> 여성 멤버들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거울이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몸은 신석기 시대의 유전적 형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석기 시대 인간은 사냥에 아직 동물을 가축화하지 못했거나, 가축화 했어도 육식을 즐길 수준은 아니었다. 사냥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고기는 맛도 못볼 시대의 사람들이다. 농사를 지었다고 하지만, 실제 신석기 시대 생산량은 오히려 구석기 시대 채집 상태보다도 인간의 영양 상태를 뒤로 가게 할 정도로 넉넉치 않았다고 하니, 그 당시 인간의 몸에 들어오는 당으로 전환 가능한 탄수화물이 얼마나 미미한 양이었는지는 새삼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유전 형질을 가진 몸으로, 인간은 이제 넘쳐나는 당분과, 육식에 치여, 중독의 상태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인간의 조건>은 증명한다. 

또한 그 반대의 증명도 한다. 그런 고통스러운 금단의 시간을 넘어, 멤버들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마음껏 먹는데도 배가 들어가고, 몸이 편안해 지기 시작했으며, 여태 맛보지 못한 쾌변을 즐기게 되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앞서 중독의 증거와 정반대이다. 그간 우리가 오로지 '맛'을 즐기기 위해, 혹은 시간에 쫓고 때우던 음식들이, 얼마나 우리 몸에 반하는 것들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과자와 빵을 통해 얻던 당분들을, 현미밥이나, 올리고당을 통해서도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지혜도 얻었다. 아니 싱싱한 딸기 한 알이 주는 달콤함 만으로도 갈등은 해소되었다. 고기가 아니면 만족스럽지 않던 식단은, 콩고기를 발견하고, 생선과 버섯류를 통해서도 상쇄할 수 있음을 알아낸다.

그리고 처음엔 난감해 하던 멤버들은 조금씩 이 미션이 정말 자신들, 그리고 늘 군것질 거리를 달고 살거나, 극단적 다이어트를 통해서만이 살을 깍아내야만 했던 여자들에게 필요한 미션이었음을 깨닫고, 보다 적극적으로 변해간다. 단지 <인간의 조건> 멤버들만이 아니다. 그것을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우리 식생활의 오염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본다. 고기가 아니라도, 흰쌀이나, 밀가루, 설탕이 아니라도, 우리 몸을 건강하게 만들며 살아갈 수 있는 먹거리의 방향을 찾아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이 좋은 점은, 각각의 미션을 통해, 고통의 시간도, 그리고 새로운 대안의 시간도 그 과정을 통해 대리 체험하며, 스스로의 삶에 가능성을 열어가게 한다는 점에 있다. 


by meditator 2014. 5. 4. 02:31

꽃할배 스페인 편이 마무리되었다. 

처음 프랑스 여행에서 그랬듯이, 장도를 떠난 할배들은 여전한 현역에의 일정 때문에, 처음엔 박근형 할배가, 그리고 다음엔 이순재, 백일섭 할배가 먼저 떠나고, 마지막으로 신구 할배가 남아 홀로 포루투갈 일정을 보내는 것으로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스페인의 풍광은 아름다웠고, 그곳의 유적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기차를 11시간씩 타고, 짐꾼 서진이 하루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할배들 스스로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등의 여정에, 생각 외로 추웠던 스페인의 날씨는 할배들의 여행을 고단하게만 만들었다.
마지막 날,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를 보고 호텔로 돌아온 할배들은, 여행지의 마지막 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고 소회를 나눈다. 협찬을 받았던 옷 속에 함께 집어넣어 보냈던 지갑으로 시작된 상념은 쉬이 사그라 들지 않았다. 그 정도의 건망증이야, 젊은 사람들에게도 비일비재한 일이건만, 유독 여행지의 마지막 날의 감회 때문인지, 할배들은 정신줄이 오락가락한다며 자신들을 책망한다. 그런 자책의 감정은, 너무 늦은 여행으로 이어진다. 그저 여행은 젊을 때 가야하는 거라고 이순재 할배가 말문을 트자, 신구 할배도 그래야 한다며, 젊어야 설레임도 있고, 그것이 열정으로 이어지는 거라며 맞장구친다. 

네 할배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지점들, 자신들은 젊어서 결코 이렇게 여행다닐 여유가 없었던 삶을 살아왔다는 그 시절들이, 이제 뒤늦게 온 여행에서 할배들의 또 다른 회한으로 이어진다. 너무 늦게 온 여행, 어쩌면 이제 다시는 올 수 없을 지도 모를 마지막 여행, 늘 할배들의 여행의 소감은 좋았지만, 젊어서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이라는 회한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꽃보다 할배>는 그런 할배들의 회한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전히 어느 젊은 사람 못지 않게 현역으로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할배들은, 나이가 무색하게, 젊은 사람들의 열정이 무색하게 여행지에서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관했음을 보여준다. 
밤마다 약을 한 움큼씩 먹으면서도, 생각지도 못한 찬 날씨에 감기에 걸려 안색이 창백해 졌으면서도 할배들은 여행의 일정을 늦추지 않았다. 행여 자신들의 몸 상태로 인해 여정에 차질이 생길까, 늘 괜찮다는 말로 자신의 컨디션을 방어한다. 그런 할배들의 모습은, 그들이 왜 여전히 현역인지를 보여주는 프로의 그것이며, 또한 저물어 가는 자신의 생을 반짝하게 빛내는 <꽃보다 할배>라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현이었다. 이순재 할배는 말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어떻게 허투루 시간을 보낼 수 있냐고, 그리고 그 말 그대로, 할배들은 직진하고, 스페인의 아름다운 풍광을, 고고한 역사의 현장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꽃보다 할배 이순재 신구
(사진; tv데일리)

애초에 그 누구보다도 리스본 행을 원했지만, 다른 할배들의 일정으로 인해 취소할 수 밖에 없던 일정이, 단독의 여행으로 되살려지자 당장 오케이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던 신구 할배의 모습에서, 마지막 날 이순재 할배와 나누던 회한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강풍이 불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리스본의 거리를 마다않고 거닐던, 그리고 포르투칼의 서쪽 땅끝 바다를 보며 유럽 대륙을 모조리 휩쓸며 내려온 듯한 감회를 밝히던 그 모습에서, 열정이 도드라져 보일 뿐이었다. 

할배들의 첫 여행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이슈가 되던 시기를 지나, 이제 세 번째 여행이 막을 내렸다. 국가적 슬픔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던 시즌 3는 이렇게 여전한 할배들의 열정과, 그리고 그 속에 숨길 수 없는 나이듦의 서글픔을 담고 조용히 막을 내린다. 

최근 노년의 삶에 대한 연극을 하고 있는 이순재 할배는 연극과 관련된 인터뷰에서 홀로 된 늙으막의 노인들을 사회가 나서서 짝이라도 지어줘야 한다며, 노년의 외로움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인터뷰를 했다. 우리는 할배들 앞에 꽃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그들을 아름답게 미화시키지만, 마지막 인터뷰에서 박근형 할배는 말한다. 이런 여행이 자신들에게 남긴 것은, 세상이 자신들을 밀쳐버리지 않은 것 같아, 쓸모없는 사람이라 치부하지 않은 것이라며 감사하단 말을 덧붙인다. 우리가 소비하는 노년과, 그들 자신이 느끼는 노년의 간극이 선명하다. 

꽃할배의 여행이 여느 사람들의 여행기와 다른 것은, 해가 지기 전 가장 화사한 저녁 놀의 아름다움처럼, 그분들의 열정이 아름답지만, 그것이 유한할 것이라는 그 한시적 경계의 분명함에서 느껴지는 어떤 안타까움이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그저 여행지의 풍광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풍광조차도 인간의 유한한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그래서 그 속에 담긴 인간사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깊게 되돌아 보게 되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여전히 <꽃보다 할배>는 그저 한갓 예능이 아니다. 


by meditator 2014. 5. 3. 00:31

일반적으로 드라마의 액션씬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싸움박질하기에 충분히 넓은 공간, 주인공을 둘러싸고, 주인공을 상대할 적, 혹은 적들이 주인공과 대치하고, 싸움이 시작되면, 카메라는 주인공의 거친 몸짓을 가장 미학적으로 아름답게 뽑아내기 위하여, 때론 스피디하게, 혹은 때론 느리게 호흡을 조절해가며, 주인공과 상대방의 싸움을 멋있게 그려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종영한 <쓰리데이즈>는, 이런 전형적인 액션씬을 뛰어넘은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액션씬하면 암만해도 기억에 떠오르는 건 드라마보다는 영화다. 많고 많은 빼어난 액션씬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영화의 액션씬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영화 <도둑들>에서, 김윤석이, 부산의 허름한 아파트 벽을 타잔처럼 타고 다니며 벌였던 총격씬이 떠오른다. 그 장면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바로 그 아파트라는 현실적 공간을 가장 절묘하게 활용했던 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액션씬이라면 흔히 떠오르는 부둣가, 낡은 공장터 그런 전형적인 장소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공간이 아파트와, 그 아파트에 붙어있는 에어컨 박스들, 그리고 낡은 아파트에 늘어져 있는 전선줄들이 액션의 도구로서 제 몫을 해내고, 그것을 지형지물로, 때로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이리저리 아파트 벽을 옮겨다니며 총격을 벌이는 액션 장면에서, 한국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만 가능한 현실적 액션을 보여주었단 생각이 든다. 

이렇게 영화 <도둑들>의 액션씬처럼, <쓰리데이즈>의 액션씬 역시 영화 못지 않게 공간의 활용에서 진일보한 성취를 보인다. 
4회 대통령 암살범으로 오해를 받고 쫓기던 한태경은 대통령을 찾아 탄 기차에서 역시나 대통령을 찾아 기차에 탄 동료 경호관들과 마주치게 된다. 동료들을 노려보는 것도 잠시, '미안하다'라는 말을 남긴 것과 동시에, 한태경은 기차 통로라는 협소한 공간을 배경으로 양쪽에서 자신을 옭죄어 오는 동료 경호관들과 대결을 벌인다. 이 장면의 묘미는, 분명 여러 명의 경호관들이 한태경을 잡기 위해 몰려들었음에도, 기차 객실 통로라는 공간이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정도로 좁기 때문에, 마치 줄을 서서 차례로 기다리는 듯이 한태경과 양쪽에서 차례로 대결을 벌이는 묘미에 있다. 게임처럼, 한 사람이 쓰러지면, 다른 쪽의 한 사람이, 그 사람이 쓰러지면, 양쪽에서 함께, 그리고 한태경은 그런 유리한, 하지만, 협소한 공간이라는 기차 통로를 양쪽의 좌석까지 이용하며 다수의 경호관과 액션의 합을 보인다. 이 장면의 묘미는, 같은 경호관 신분으로, 상위 1%의 경호관 한태경이지만, 결국은 떼로 몰려드는 경호관 동료들에게 제압당하는 현실성에 있다. 주인공이기에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경호관과 경호관들의 싸움에서 결국은 지고마는, 주인공의 현실적 모습이 이 장면의 액션에 현실감을 더해준다. 

(사진; 한국일보)

<쓰리데이즈>는 요즘 드라마로는 비교적 짧은 16임에도 불구하고, 액션씬으로는 드라마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차량을 활용하여 조그만 승용차가 자신보다 배나 더 큰 트럭을 단번에 전복시키는 2억이 들었다는 카 체이싱은 <쓰리데이즈>가 자신만만하게 내보인 볼거리였다. 진짜 대통령 암살범 함봉수와 한태경의 최후의 몸의 담판이 벌어진 장소는 뜻밖에도 함봉수의 총격을 받고 앰블런스가 쑤셔박힌 책방이었다. 거기서 함봉수와 한태경은 책이 꼽혀진 책장을 사이에 두고, 총과 몸을 이용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어디 그뿐인가, 박보원을 향해 총구를 겨눈 킬러를 향해 몸을 던진 한태경은 킬러와 함께 2층 높이의 유리창을 부수면서 아래로 나동그라지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총을 사이에 둔 혈투를 벌인다. 액션의 장소도 다양하다. 엘리베이터 안이라는 협소한 공간, 병원 복도, 폭발한 자동차 앞, 자동차 안, 모텔 복도, 모니터실 그리고 16부 갤러리까지 다양한 공간이 액션의 배경으로 활용되었다. 
다양한 공간이 활용되는 만큼, 그 공간을 살린 지형지물들이 액션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 역시 <쓰리데이즈>의 묘미였다. 때로는 부서진 자동차 유리가, 복도의 문이, 그리고 손에 유일하게 남겨진 핸드폰이, 벽에 걸린 액자가 한태경의 무기가 되었고, <쓰리데이즈> 액션의 진가를 살려냈다. 

<쓰리데이즈> 액션씬의 특징은 그저 다양한 장소, 다양한 소도구의 활용에만 있지 않다. 결코 단 한번도 전형적인 액션씬의 클리셰인 슬로우 모션없이 자칫 눈 한번이라도 깜짝 해버리면 지나칠 정도의 빠른 호흡으로, 액션씬의 강도를 전달한 것 또한 <쓰리데이즈> 액션의 묘미이다. 
또한 그런 급박한 호흡 속에, 싸움을 벌이는 한태경의 감정 또한 고스란히 전달시켜주는 특징을 가진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이 보인 액션적 성취라고 하면, 짜인 합으로서의 액션이 아니라, 싸움박질의 날 것 그대로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달되기 때문이다. 고독한 스파이라는 면에서 <본 시리즈>에 비교되었지만, 그것과 다른 차별성을 <본시리즈>가 가진 고도의 짜여진 액션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는 그 파열음에 집중한데서 <베를린>의 묘미를 찾을 수 있다면, <쓰리데이즈>의 액션씬은 바로 <베를린>의 그것에 필적할 만하다 하겠다. 

자신이 처한 절박한 위치와 분노를 고스란히 그의 액션에서 표출한 하정우처럼, 한태경의 액션에선 그의 감정이 느껴진다. 자신이 존경했던 함봉수와의 대결에서, 서로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었기에, 단 한 방의 가격으로 상대방을 절멸시킬 수도 있지만, 치명적인 급소를 피하면서, 상대방을 이 싸움에서 밀어내고 싶어하는 안타까움이 그들의 액션의 합에 담겨있다. 그렇게 경호실장과의 싸움에서 머뭇거리던 한태경이 상대가 킬러가 되면 달라진다. 봐주지 않는다. 막상막하였던 경호실장과 달리, 킬러는 한태경의 발차기, 혹은 단호한 가격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 심지어 상황에 따라, 액션에 분노가 실린다. 그래도 경호관이기에 적들을 제압하거나, 기절한다는 목적 하에 언제나 절제하던 한태경이지만, 윤보원을 차량 폭파로 죽이려고 했던 킬러를 향한 그의 주먹엔 절제란 없다. 그저 선배였던 황윤재가 자신과 한태경을 빼돌린 윤보원의 경찰차 안에서 한태경에서 총까지 들이대며 분노했던 모습은, 이후 그가 함봉수의 조력자라는 것이 밝혀지며 그의 절박함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16회 갤러리에서 두 명의 킬러들에게 밀리던 한태경은 문 뒤에 누워있는 동료 경호관들을 발견하고, 마치 게임에서 파워업을 하듯, 분노의 액션을 보인다. 배우 박유천의 거친 호흡, 단말마적인 비명, 그리고 단호한 얼굴 표정에서 느껴지는 정서들은 고스란히 액션의 감정이 되어 전달된다. 

<쓰리데이즈>의 액션은 이야기와 이야기 중간에 끼어든 장르물의 묘미, 혹은 장식과도 같은 것이지만, 그런 형식적 틀을 넘어, 액션을 통해 감정을 분출하고, 호소하는 묘한 효과를 낳는다. 드라마의 액션씬이라면 언제나 그러려니 하고 봤던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집중하며 액션의 호흡과, 거기에 담긴 분노에 빠져들게 만든다. 드라마의 종속적 요소로서의 액션이 대등하게, 드라마의 흐름에 간여하며 제 몫을 다함으로써, <쓰리데이즈>의 긴박한 호흡에 추진력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4. 5. 2. 17:15

목요일 밤 mbc가 야심차게 준비한 두번 째 파일럿 프로그램 <별바라기>가 방영되었다. 

스타와 팬의 단체 팬미팅이란 컨셉을 내세운 별바라기는 그에 걸맞게 세대별 스타들과 그들의 팬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가장 감동적인 스타 바라기를 한 팬에게 주는 해외 여행권을 놓고, 각 스타의 팬들이 자신들의 경험담을 나누었다. 

각 세대별, 혹은 장르별 구색을 맞추기 위해 90년대 개그맨으로서는 드물게 팬클럽을 가졌던 이휘재를 비롯하여, 전설의 아이돌 은지원과 현역 아이돌 인피니트, 배우 유인영, 가수이자 탈렌트인 손진영등이 스타로 출연했고, 그들의 사연많은 팬들이 등장해, 9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이휘재의 소중한 기록들을 소개하고, 산후 우울증의 위기를 넘기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생기를 되찾게 해준 아이돌 인피니트에 감사를 전했으며, 돌싱이 된 은지원을 꼬집을 만큼 세월을 함께 한 과거 젝스키스의 아이돌이 그 시절 팬문화를 회고하였다. 또한 자신의 작업에 영감을 준 뮤즈가 되준 유인영에게 세상에 한 벌 밖에 없는 옷을 만들어 준 디자이너와, 함께 집을 짓고 살자며 땅까지 주려고 한 아낌없는 부모님같은 손진영 팬의 사연도 등장했다. 

해외 여행권은 자살 위기까지 맞았던 하지만 텔레비젼에 나온 활기찬 아이돌로 인해 삶의 의미를 찾은 주부에게 돌아갔지만, 이제는 쌍둥이 아빠로 대중에게 각인되었지만, 꽃미남이라는 호칭이 무색치 않게 전성기를 누렸던 이휘재의 역사도, 응답하라 1994만큼 흥미진진하던 전설의 HOT와 젝스키스의 팬대결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아직은 연예인이 서툰 손진영에게 향수까지 챙겨주는 따스한 팬 이야기는 훈훈함 그 자체였다. 

(사진; 스포츠 서울)

하지만, 무엇이 어떻든 별바라기라는 제목에서부터, 그리고 합동 팬미팅이라는 프로그램의 의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별바라기>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구조는 한결같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그저 서로 다른 이야기일 뿐이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같지만, 벌써 첫 회에, 몇 순배를 돌자, 동어반복 처럼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제 아무리 대중문화의 팬클럽 문화가 트렌드가 되었다 한들, 매주 목요일마다 찾아가는 정기적인 프로그램으로 하기에는 버겁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안녕하세요> 한 회 특집 정도면 적당할 내용을 가지고 굳이 이 시기에, 정규 프로그램으로 까지 해야 할 타당성을 찾기 힘들달까?

무엇보다 과연 이 프로그램이 강호동이란 MC가 의기양양하게 들고나올 만한 컨셉의 프로그램인가도 의심스럽다. 1회의 진행으로만 보면, 오히려 솔직히 강호동보다, 게스트로 나온 이휘재가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있어 훨씬 자연스러워 보인다. 심지어, 첫 방인데도 불구하고, 패널로 등장했던 김영철, 권오중, 소유 등의 존재감은 몇 마디 멘트에 그쳤다. 의욕적으로 들고나온 토크쇼이지만, 컨셉의 한계도 분명했고, 함께 하는 패널들의 활용도도 의문스러웠으며, 굳이 이 프로그램이 강호동이어야 하는 이유 조차도 분명하게 하지 못한 이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과연 목요일 밤의 아성을 지키고 있는 <해피 투게더>를 이겨낼 수 있을까 싶다. 

<별바라기>가 성공치 못한다면, 강호동의 위기설은 쉽게 진화되지 않을 듯 싶다. 하지만, 오히려 <별바라기> 1회를 놓고 본다면, 강호동은 스스로 자신의 위기를 부추키고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든다. 같은 파일럿 프로그램임에도 유재석의 <나는 남자다>는 진짜 트렌드가 되고 있는 남자들의 속사정을 들춰보는 이야기를 컨셉으로 잡았었다. 실제 프로그램의 내용은 평이한 편이었지만 그것을 맛깔나게 살려냄으로써 역시 유재석이다 라는 평가을 재삼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별바라기>는 지금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프로그램도 아니었고, 강호동이어서, 혹은 강호동이어야 하는 이유를 확인시켜 주지 못했다. 여전히 강호동은 당대 최고의 MC로서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내고 있지 못하는게 아닌가라는 의심만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또한 아쉬운 것은, 같은 Smc&C에 소속되어 있지만, 신동엽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있어서 같은 소속사의 인맥을 드러내놓고 활용하지 않고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춘 패널들과 함께 하는데 반해, 번번히 강호동의 프로그램에는 자신의 소속사의 잔상이 크게 드리워진다. <별바라기>에도 함께 하는 신동과, 첫 번째 게스트로 등장한 인피니트가 그들이다. 물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하는 걸 뭐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과연 강호동의 행보에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강호동 자신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예전 <달빛 프린스>에서 초창기 함께 했던 같은 소속사의 최강 창민이나 민호가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사라지고, 오히려 <우리 동네 예체능>에서 다양한 게스트의 활용과 함께 강호동이 살아났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패널들과 강호동의 진행 방식이 과연 <별바라기>라는 신선한 파일럿 프로그램에 적합한가, 그저 <스타킹>의 다른 버전같은 건 아닌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스타를 사랑하는 별바라기 1기 모집에 들어감으로써 스타에 관심이 많은 다수의 아이돌 팬들의 관심을 끌 수는 있겠지만, 아이돌들이 주로 출연하는 음악 쇼프로그램의 낮은 시청률만을 봐도, 이제 이들만으로 대중문화의 트렌드가 되겠다는 시도는 그다지 시의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두 번에 걸친 목요일 밤의 파일럿, 하지만 두 프로그램 모두 새롭게 등장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그 프로그램을 이끄는 mc 누군가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그것을 기획하는 mbc예능국의 안목부터 점검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목요일 밤, 세상 어디선가의 희한한 이야기, 스타의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할 이야기가 없을까? 


by meditator 2014. 5. 2. 03:04

16부작의 <쓰리데이즈>가 마무리되었다.

김도진을 향해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갔던 이동휘 대통령, 하지만 차에 실린 폭탄은 김도진만을 산화시킨 채 이동휘 대통령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를 구하려 총을 맞은 채 달려간 한태경도 간발의 차이로 함께 살아남았다. 

김은희 작가의 전작 <싸인>에서처럼, 이동휘 대통령이 김도진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면, 혹은 이동휘 대통령을 구하고 대신 한태경이 죽었다면, <쓰리데이즈>는 진실을 향한 묵직한 메시지만 남긴 드라마로 끝맺었을 것이다. 하지만, <쓰리데이즈>는 둔중한 운명론 대신에, 희망을 택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이동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말한다.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겠다고. 그의 이 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양진리가 위기에 빠지고 홀로 돌아온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청와대로 가시라고, 하지만 이동휘는 거절한다. 김도진이 대통령의 목숨을 놓고 딜을 할 때, 다시 한태경은 대통령을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동휘는 말한다. 사람 목숨은 다 똑같다고. 대통령의 목숨과 국민의 목숨이 다르지 않다고. 대통령은 국민이 있어야 존재하는 거라고. 그리고 그 말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은 홀로 폭탄이 실린 차를 몰고 김도진에게 간다. 한태경도 마찬가지다. 사라진 대통령을 찾기 위해 차를 몰고 질주하다, 폭탄이 실린 듯한 주민들이 탄 트럭을 몰고, 대통령의 뜻을 기억하며 차를 돌린다. 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경호관이지만, 대통령의 목숨만큼, 그의 뜻이, 그리고 국민이 있어야 대통령도 존재할 수 있다는 대통령의 의중을 기억하며 양진리 주민들의 목숨을 구한다. 

(사진; osen)


역사는 늘 승자의 이야기를 하고, 그 승리를 거머쥔 영웅의 이야기에 골몰한다. 하지만, 정작 역사의 현장을 가득 채운 것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에서 그려낸, 그 강고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고, 또 기어올라가던 그 사람들처럼. 실제 역사를 이룬 것은, 그 작전을 지시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 현장에 있었던 수많은 이름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쓰리데이즈>는 진짜 이 사회의, 이 권력의 주인이 누군인가를 밝힌다. 

그리고, 세상에 지친 그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쓰리데이즈>는 첫 회부터, 16회에 이르기까지, 많은 출연자들이 나온다. 그런데, 다른 드라마에서 그저 스쳐지나가는 많은 단역, 조역들이 그저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간과되어 지는 반면에, 이상하게도 이 드라마에서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눈에 들어온다. 마치 애초에 제작진이 그럴 의도인 양, 한 장면, 한 장면에서 등장했던 그 어느 인물 하나, 하나의 연기가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15회 김도진의 수하들의 총격에 스러져가는 경호관들이 안타까웠던 것은, 그 시간까지 진행되어 온 드라마의 흐름 속에서, 그들이 어느새 또 한 사람의 주인공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치 애초에,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이 대통령이 말한, 국민, 그들인 것처럼. 그래서 비로소, 16부에 이르러, 왜 이 드라마가 대통령을 지키는 음지의 직업인 경호관을 주인공으로 했는지 이해가 된다. 바로,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직분을 위해 충실히 살아가는 그 사람 각각이,그들의 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16부 마지막 취조실 씬에서 감동이 더해진다. 김도진의 수하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운다. 돈을 위해서, 혹은 애국을 한다는 아이러니한 신념을, 혹은 그래봐야, 언제나 세상은 힘있는 자본이 지배한다는 논리를. 그건 그들이 새삼 부언하지 않아도,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맞닦뜨린 세상의 지배 논리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쓰리데이즈>는 그들을 취조하는 검찰관의 입을 빌어 말한다. 설사 세상이 그렇다 해도, 자신이, 그리고 자신이 다하지 못하면 그 누군가가, 그것을 대항해 싸워가겠다고. 그리고, 이동휘가 살아있어서, 한태경이 살아있어서 고마운 마음과 함께, 어디선가 세상의 불의를 향해 싸우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1%의 그들이 있음에 내가 서있는 자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비록 1%라도 세상을 위해 싸워보겠다는 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그 어느때보다도 마음이 든든해 진다.

<쓰리데이즈>는 전무후무한 드라마였다. 한 눈 팔지 않고, 소신있게 포기하지 않는 1%가 세상을 바꿔나가겠다는 주제를 한 치의 흔들림없이 전하고자 노력했고, 거기에 도달했다. 드라마의 경직된 공기를 바꾸고자 쓰이는 그 흔한 말랑말랑한 대사, 웃기는 말 한 마디없이, 1회 대통령의 암살 시도에서 부터, 서로 다른 자신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달했다.  거친 액션씬조차,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고뇌와 분노의 장치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쓰리데이즈>는 보여준다. 이동휘란 대통령을, 그의 지지율 10%로 설명할 수 없듯이, 그저 몇 %의 시청률로 이 드라마를 평가하기에 <쓰리데이즈>가 전해준 메시지는 2014년의 우리 삶의 시금석이자, 위로이다.




그래서 <쓰리데이즈>를 함께 해준 배우들이 대단하고 고맙다. 단 한 장면, 한 마디의 대사만으로도 이동휘라는 고립무원의 대통령의 진심을 전해준 손현주씨는 물론, 이십대의 젊은 배우임에도 흔한 러브씬하나 없이 묵직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드라마를 선택하여, 한태경이라는 캐릭터에 생기와 열정을 살려내 준 박유천이란 배우가 고맙다.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분장을 포기한 채, 남자 주인공보다도 적은 의상으로, 고군분투하여 기존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 여성 캐릭터를 실현해준 소이현, 박하선 배우도 감사한다. 

<쓰리데이즈>란 드라마의 16부작을 이동휘, 한태경이라는 양대 산맥의 줄기가 버티어 갔다면, 그 산맥의 거목이 된 것은, 장현성이 분한 함봉수 실장, 윤제문의 비서실장, 그리고 안길강의 김상희 비서실장의 신념이었다. 그들이 자기 자리에서 겪는 혼돈과 고뇌와 결심들이, 우리 삶의 구체적 문제로 다가오며 <쓰리데이즈>의 신념을 생생히 우리들에게 제기했다. 그들만이 아니다.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서슴지않고 자신의 목숨을 던졌던 경호관들처럼 16부를 채워갔던 수많은 조연, 단역들의 흐트러지지 않는 진심들이, <쓰리데이즈>라는 숲을 채워갔다. 물론, 거기에는, 그런 그들의 진심을 돋보이게 해준 최원영을 비롯한 악역들의 호연도 빠질 수 없다. 

그저 실종된 대통령을 찾아가는 흔한 장르물인가 싶었는데, 우리 시대의 정의를 향한 신념에 대한 담론이 된 <쓰리데이즈>의 여정은 달달한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익숙치 않은 과정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 고된 여정의 끝에 이 드라마는 그 어떤 드라마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진실한 위로를 전한다. 고맙다. 


by meditator 2014. 5. 2. 0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