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이준기 주연의 <조선 총잡이>가 첫 선을 보였다. 

지극히 '서부영화적'인 제목, 총잡이를 내세웠는데, 정작 드라마의 배경이 된 것은 고종 친정 3년 시기, 개화와 수구의 세력이 첨예하게 맞붙는 시기이다.  아직 조선 군대의 무기는 구식 무기인 칼과 활이요, 느닷없이 등장한 총에 대해, 무위소 부관은 신미년에 미국의 양요에서 첫 선을 보인 무기, 화승총이 아닌 총에 대해 조선에서 당할 무기는 없다 고개를 젓는 그런 때이다. 


신식 무기의 대명사인 총인데, 그래서 당연히 개화 세력의 대변자가 되어야 할 총구는 아이러니하게도 개화 세력의 대표자들을 향한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저잣거리에서 개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저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나라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이라는 연설을 하던 개화파의 거두 현암(남명렬 분)을 쓰러뜨린다. 그리고 현암을 지켜보던 박진한은 칼을 휘두르고, 활시위를당기며 처격을 했던 총잡이를 쫓는다. 
현암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종(이민우 분)은 분노한다. 자신이 친정 체제 이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던, 그리고 그를 위해 불러들이려 했던 개화 세력이 하나 둘 쓰러지는 것이, 곧 자신의 개화 노력에 대한 제지라고 느낀 고종은 구식 무기를 쓰는 별장 박진한(최재성 분)으로 하여금 자신을 도와 개화를 실현한 마지막 인물 오경(김정한 분)을 지켜 줄 것을 부탁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개항 시기의 역사적 대립각 중 하나는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 별기군의 대립,  칼 vs 총, 결국 '임오 군란'으로 귀결된 신구 세력과 그 상징적 무기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그런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고정 관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발상을 한다. 개화를 추구하려는 고종, 하지만 아직 그의 손에 쥐어진 무기는 구식 군대의 칼과 활, 정작 그의 개화를 제지하려는 수구 세력들이 개화 세력을 암살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총!
결국 이를 통해, 개화와 수구, 총과 칼이라는 우리의 역사적 고정 관념을 뒤엎으며, 무기란 결국,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즉, 이는, 조선 제일 검, 하지만 이제 개화를 추구하는 고종의 오른 팔이 되어, 수구 세력의 제거 대상이 된 박진한의 아들이자, 그 역시 총구 앞에서 결코 주눅들지 않으며 칼을 뽑아 덤비는 무예에 능한 박윤강(이준기 분)이 총잡이가 될 수 있는 드라마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1회는, 개화 세력과 그를 불안하게 여기는, 하지만 절대적 힘의 우위를 자랑하는 수구 세력의 대립과 각각의 인물들을 설명하는데 진력한다. 조선 제일검 박진한과 하지만 그의 아들임에도 기생집 한량으로 세월을 보내는 박윤강,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현암의 제자가 될 만큼 개화적 의식이 뚜렷한 정수인(남상미 분), 그런 수인을 돕는 보부단 수장의 딸 최혜원(전혜빈 분)과 그 주변 인물들의 역학 관계를 설명하기에 진력한다.


그런데, 비록 드라마는 고종 시대, 칼과 총이 맞부닦치는 역사적 격변기를 대상으로 삼지만, 극의 얼개는 그리 낯설지 않다. 개혁을 하려던 왕의 최측근으로 왕을 돕는데 앞장서다, 정치적 기득권 세력의 눈 밖에 난 아버지, 아마도 결국 그 아버지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사는 아버지를 심드렁하게 여기던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고, 아버지의 복수이자, 아버지가 완수하지 못한 신념을 위해 떨쳐 나서는데, 여기에 신념에 찬 여주인공이 합류한다. 이미 <공주의 남자> 등의 사극을 통해 익숙해진 얼개이다. 작가진은 드라마스페셜을 통해 입봉한 신인작가들이지만, 김정민 피디가 바로 <공주의 남자>의 연출자이다. 
덕분에 드라마는, 드라마로서는 생소한 칼과 총의 대결에, 개화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정작 전개의 방식은 어디선가 본듯 익숙하다.
그리고 그 익숙함은 낯선 배경, '총잡이'라는 낯선 이야기를 들고 나온 <조선 총잡이>의 생경함을 보완해주는 안전 장치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를 뻔해보이게 만드는 위협 요소이기도 하다. 
부디 <조선 총잡이>가 뻔한 '복수'를 매개로 한 사극을 넘어, 격동의 개화기를 제대로 담는 한편의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6. 26. 09:03

6.25가 일어난 지 64주년이 된 날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월호 사건에, 전방 GOP총기 난사 사건에 우리의 아이들을 차마 문 밖에 내놓기가 무서운 현실의 전쟁과도 같은 삶을 견뎌내느라, 64년전의 6.25가 무색하다. 

그렇게 전쟁과도 현실 속에 조용히 6.25 64주년이 다가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몇 가지 특집 프로그램이 마련되었다. 과연 64년이 지난 전쟁을 이즈음에 우리는 어떻게 되새겨야 할까? <다큐 공감>은 그에 대해, '마지막 전사자'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비극을 되새기고자 한다. 

<다큐 공감>이 주목한 것은, 바로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상이 완결된 바로 그날의 전사자들이다. 국립 현충원에는 1953년 7월 27일 전사라고 새겨진 세 구의 묘비가 있다. 왜? 하필, 정전의 그날 이들은 함께 죽임을 당했을까? 다큐는 그 비밀을 알기 위해 이들의 사연을 추적해 나간다. 

정전의 그날 전사한 사람들, 이것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다. 박상연 작가와 장훈 감독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2011년의 영화 <고지전>이 아직 기억 속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휴전 협정 막바지 전략적 요충지 '애록고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벌이는 북과 남의 사투, 그 속에서 평범한 청년들이, 지옥의 전사로 변모하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던 영화가 바로 <고지전>이다.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청년 장교 신일영(이제훈 분)이 인상 깊었던 영화는, 자신의 소대가 모두 전멸되는 상황에서 살아남아, 몰핀으로 연명하며, 죽음으로 향해 치달아 갔던 꽃같은 청년의 안타까움을 적나라하게 토로한다. 


그리고 이제, 다큐는 바로 그, 역사 속의 신일영들을 찾아 나선다. 
기록 속에 남겨진 주소 하나만을 들고 찾아나선 역사의 기억들, 거기서 제작진은 뜻밖의 역사를 만난다. 일사후퇴전까지 국군의 전사자가 100만 명, 하지만, 정전 협상이 시작된 후 2년 2개월 동안의 전사자 300만 명, 그 엄청난 전사의 비밀이 밝혀진다. 

<다큐 공감>이 찾아나선 전사자, 그들은 이미 딸을 둔 28살의 가장도 있고, 동생이 먼저 군대에 간 나이든 형도 있었다. 즉, 전쟁 초기만 해도 적정 연령대의 젊은이들만이 징집 대상이었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절대적으로 모자르는 군인을 보충하기 위해, 징집 연령은 점점 높아져, 결국 가솔을 이룬 가장까지 전쟁터로 내몰고 갈 정도인 29살까지 연령이 늦추어 졌다. 이들은 전쟁 초만해도 전쟁에 나설 나이가 아닌 나이에 뒤늦게 전쟁에 합류해, 전사자가 되었다. 

전쟁이란 자체가 애초에 그것이 내걸은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결국 무수한 인명의 살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귀결되지만, 특히나 정전 협상 과정의 '땅따먹기'식 고지 사수 작전은, 그 어떤 합리적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맹목적 학살의 현장이다. 

그 작전에 참가했다 생존한 주인공들은 말한다. 우리가 보면서 섬찟했던 영화 <고지전>이 얘들 장난이라고. 그곳에 배치 받아 고지에 다가갈 수록 시체의 냄새로 인해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던, 땅을 밟을 때마다 피가 울컥울컥 솟아나왔던, 끝도 없이 밀려드는 중공군에 총격조차 무색하다 못해 무서워진, 포탄의 세례로 고지가 사라졌던 그곳에서, 뒤늦게 전쟁에 '끌려간'젊은이들은, 화력 발전소의 사수라른 명분, 혹은, 좀 더 유리한 전선의 확보라는 서류상의 결론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정전 협정이 발휘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 


다큐는 덤덤하게, 주소지를 들고, 전사자들의 흔적을 찾고, 그들의 가족의 증언을 듣고, 이제는 80이 넘은 생존자의 기억을 더듬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명분없는 전쟁 속에서, 사라진 꽃같은 젊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충분히 드러난다. 과장된 추도사와, 결기 가득한 각오가 없이도, 그저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엄정함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바로 <다큐 공감>이 시선을 돌린 '마지막 전사자'가 그것이다. 64년이 흐른, 전쟁을 기억하는 제대로 된 추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6. 25. 15:49

월드컵 기간 동안 브라질 특집으로 마련되었던 <sns원정대 일단 띄워>가 6월 23일 5회로 마무리 되었다. 

약간의 돈과 sns가 가능한 핸드폰만을 매개로 숙소에서부터, 여행지 정보, 심지어 미션까지 해결해야 하는 <sns원정대 일단 띄워>가 결국 마지막 오만석의 브라질 축구 영웅 카푸와의 만남까지 이루어 내며 성공적인 마무리를 완수해 냈다. 

말이 성공이지 오만석과 카푸와의 만남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 진 것이다. 출발 전 브라질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을 적어 낸 것 중에서, 브라질 축구 선수와의 만남이 미션으로 주어진 오만석은 그것을 위해 줄기차게 sns에 자신의 희망 사항을 알렸다. 하지만, 넓고 넓은 브라질에서, 그것도 미리 만남을 예약하지 않은 채 무작정 브라질 축구 선수를 만난다는 것은 모래 속 바늘 찾기만큼 어려운 과제였다. 마지막 회 다른 멤버들이 순조롭게 미션을 마무리 한 것과 달리 브라질 축구 영웅을 만나기 위해 축구 협회도 방문하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실시간 축구 해설 프로그램까지 출연했던 오만석이지만, 출발 단 몇 시간을 앞 둔 상황에서도 만남은 기약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sns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던 그에게 월드컵 3회 본선, 그것도 결승 진출의 영광을 기록했던 축구 영웅 카푸가 손을 내밀었다. 

social network service의 약자인 sns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또 다르게 하나의 세상을 이룬 것은 이미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빠르게 많은 소식을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과 신선한 문화와의 교류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큼, 쏟아지는 정보의 공해, 혹은 왜곡된 소식, 심지어는 그로 인한 피해까지, sns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sns원정대 일단 띄워>는 그렇게 이제는 장점과 단점이 혼미된 채 우리 곁의 일상으로 자리잡아 가는 sns의 본향을 텔레비젼이란 매체를 통해 확인하게 해준다. 

(사진; 뉴스엔)

그렇다면 <sns원정대 일단 띄워>를 통해 새롭게 확인하게 된 sns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바로 가상의 공간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결국 세계 그 어느 곳이라도 서로를 이어줄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는 점이다. 
다짜고짜 핸드폰 하나만을 쥐어 준 채 브라질로 던져버린 일행을 구해 준 건, 한국에 호의적인, 그래서 기꺼이 자신의 집을 제공해 줄 의향을 가진 브라질 사람의 후한 인심이었다. 거기서 부터 시작된 작은 기적은 15박 17일 동안, 오만석, 김민준, 정진운, 서현진, 오상진, 박규리 등이, 상파울루, 리오데자네이루, 이과수 폭포, 파라치 등의 여행을 가능케 했고, 그곳에서 현지의 음식을 맛보고, 진귀한 분홍 돌고래를 만나며, 현지 교포와의 식사, 현지 팬과의 팬미팅을 가능케 해주었다. 

이게 가능할까? 라며 sns를 통해 자신의 긴급한 필요를 올린 멤버들은 언제나 수많은 답을 얻었고, 그 어떤 여행 지침서보다 친절한 안내와, 관심을 얻을 수 있었다. 덕분에 오상진은 수많은 현지인들에게 고기 파티를 열 수 있었고, 카라의 박규리는 공연도 해본 적이 없는 브라질에서 소박하나마 단독 팬 미팅을 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졌던 오만석의 소망, 브라질 축구 선수와의 만남을 가능케 해주었다.

덕분에,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진 일행들의 좌충우돌 브라질 체험기는, 결국 그 무엇보다 여행의 성과를 '친절한 브라질 사람'이라고 손꼽을 수 있었던 것처럼, sns를 통해 기꺼이 도와준 브라질 사람과, 우리 교포, 혹은 sns의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밀도 높은 여행기가 되었다. 덕분에, 그 어떤 월드컵 특집보다, 월드컵으로 인해 혼란한 사회적 상황에서 부터, 오직 브라질만이 제공할 수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에, 브라질 사람들의 푸근한 인심과 활달한 정서까지, 브라질을 제대로 맛보고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남게 되었다. 꼭 월드컵 특집이 아니더라도, 또어느 생소한 지역에 던져져, sns라는 밧줄의 도움을 얻어가며 날 것으로서의 여행을 즐기는 그 모습이 기대되는 프로그램이다. 


by meditator 2014. 6. 24. 10:29

6월 23일 kbs2의 새로운 월화 드라마 <트로트의 연인>이 시작되었다. 

<동안 미녀(2011)>, <구미호; 여우누이전(2010)>의 작가 오선형과 <솔약국집 아들들(2009)>,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의 이재상 피디에다,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응답하라 1994>의 히로인 정은지와, <올드 미스 다이어리(2004)>,와 <인형 왕후의 남자(2011)>의 지현우, 그리고 얼마 전 <별에서 온 그대(2013)>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신성록이 합류한 작품이다. 

작가의 전작 <동안 미녀>를 본 사람이라면, <트로트의 연인> 1회를 시청하는 동안, 어렵지 않게 기시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가정 형편(특히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둘째치고, 그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사고뭉치 가족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도 결코 주저앉지 않으려는 여주인공. 전작 <동안 미녀>가 회사에 취직을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주민등록증을 빌려야 하는 처지를 극의 주된 딜레마로 삼았다면, <트로트의 연인>은 신용불량자가 된 채, 어린 동생만을 남기고 행방불명된 아버지로 인해 졸지에 가장이 된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사회적으로 공감할 만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여주인공의 처지가 다른 듯 비슷하다. 

그런 여주인공의 주변에 등장하는 두 남자 주인공의 구도 역시 마찬가지다. 해프닝으로 인해 여주인공과 엮이게 되는 여주인공과 비슷한 처지의 남자 주인공, 그리고 다시 거기에 엮이는 백마탄 왕자인 듯 하지만, 어딘가 비어보이는 서브남 캐릭터, 그것을 위해 <트로트의 연인>이 준비한 것은 음악성이 뛰어난 아티스트이지만 안하무인의 행보로 몰락한 가수 장준현(지현우 분)과, 장준현의 소속사 사장아들이지만, 도벽인지, 건망증인지 모를 야릇한 습벽을 가진 조근우(신성록 분)을 등장시킨다. 

하지만 무엇보다 <트로트의 연인> 1회를 통해, <동안 미녀>를 가장 떠올리게 하는 그것은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해 보낸 1회의 전개 방식이다. 다짜고짜 마라톤 지망생에서 하루 아침에 스포츠 센터 직원으로, 다시 또 실직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해 내는 방식이나, 최고의 스타에서 스캔들로 몰락한 가수 장준현을 설명하는 방식의 '익숙함' 혹은 '진부함'이다.
 
마라톤 지망생에서, 스포트 센터 직원으로, 이제 다시 실직자가 되어가는 최춘희(징은지 분)의 몰락은 88만원 세대, 혹은 우리 사회 신용 불량자의 자녀들의 전형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도, 최춘희는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기운내!라며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는다. <동안 미녀>의 이소영(장나라 분)도 언제나 그랬었다.  

그렇게 의젓한 여주인공에 비해, 남자 주인공의 등장은 한없이 천박하다. 자기 자신의 음악성만을 믿고 스타 의식이 하늘을 찌르고, 그로 인해 세상이 온통 스타인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 믿는 장준현의 행보는 당연히 무리수의 반복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최춘희는 스타 장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도덕적 원칙을 견지한다. 성숙한 여주인공에 철딱서니 없는 남자 주인공의 익숙함이라니. 

(사진; 뉴스엔)

이렇게 두 주인공의 만남과 거기서 빚어지는 해프닝은 대뜸 최춘희를 보고, '니가 감히!' 식으로 대하며, 어디 그 더러운 얼굴을 들이대!라며 무시하는 장준현과, 그런 장준현에 아랑곳않는 전형적인 스타와 똑부러진 여자의 상황을 되풀이한다. 거기에, 스타이지만 안하무인인 장준현의 행보와, 자기 중심이 있는 여자의 해프닝은 어디선가 본듯 익숙하고,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이른바 '웃픈' 상황의 연속이다. 악연으로 맺어진 두 사람이, 벼랑 끝 인생에서 만나 티격태격 성공도 잡고, 사랑을 이루게 될 그 상황이 불을 보듯 뻔하게 연상된다.  

그렇게 <동안 미녀>의 익숙한 전개 방식을 되풀이 하는 <트로트의 연인>은 거기에 토핑으로, <드라마 스페셜> 어느 작품에선가 보았던 듯한, 뮤지컬의 한 장면과도 같은 주인공 최춘희의 '저 푸른 초원 위에'의 상상 속 공연 장면과, 장준현의 환상이 얹혀진다. 만화적 상상력이자, 이른바 '병맛' 코드이다. 구수한 트로트가 기성 세대의 눈길을 위한 낚시밥이라면, 이른바 '병맛'의 설정들은 젊은 세대를 위한 유인 코드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뒤섞여 버리니, 그 누구도 딱히 <트로트의 연인>에 집중하기 어렵다.

그래서, <트로트의 연인>은 시청자들에게 인내를 혹은 선택을 요한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 뻔한 설정과 스토리의 전개, 그것을 진행시키기 위해, 제 아무리 스타라지만 여주인공에게 '더러운 얼굴'이라 정제되지 않은 무리수의 설정과 전개, 그리고 뜬금없이 등장하는 상상과 환상의 경계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수한 트로트를 불러제끼는 최춘희의 인생사를 들여다 보기 위해, 개과천선하는 장준현의 와신상담을 위해 견뎌내야 하는 건지, 또 다른 선택을 위해 리모컨을 들어야 하는 건지 갈등하게 만든다. 

장준현의 지현우는 이미 <메리대구 공방전>을 통해 찌질한 캐릭터를 선보인 적이 있지만, 어제나 그렇듯, 그런 남자 주인공의 찌질함은 시청자들에게 호불호의 기로에 서게 만든다. 과연 1회 장준현의 캐릭터는 확실한 캐릭터의 안착인지, 혹은 과도한 캐릭터의 향연으로 인한 외면이 될 지는 미지수다. 

그런 갈등에 불을 붓는 건, 여주인공 최춘희 역의 정은지다. <응답하라 1994>에서 그녀를 돋보이게 만든 건 그녀의 걸진 사투리였다. 하지만, 이제 공중파의 주인공이 된 그녀는, 그녀를 매력적으로 돋보이게 만든 사투리를 버리는 모험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때문일까 대사를 치는 그녀에게서 자꾸만 어색함과 머뭇거림이 느껴진다. 표정은 자연스럽고, 대사가 길어지면 쫀득해지는 것과 달리, 새로운 대사를 시작할 때마다, 본인 스스로 표준말을 써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보는 사람에게 전해져 온다. 

아마도 <트로트의 연인>은 <동안 미녀>처럼 결국은 여주인공 최춘희의 꿋꿋한 성공 이야기와 따스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걸 참고 바라보기에, 1회의 전개는 모든 것이 어쩐지 뻔하고 어설프다. 부디 이 난국을 헤치고 <동안 미녀>처럼 순항하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6. 24. 09:16

40부작 <끝없는 사랑>이 시작되었다. 

드라마의 시작은 비장하다. 부산에서 고기잡을 하며 두 형제를 키우던 아버지 한갑수(맹상훈 분), 하지만 그의 작은 아들 한광철(정경호 분)과 서인애(황정음 분)가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 용의자들을 피신시켜 주는 바람에 비극의 타겟이 된다. 한때 안기부에서 일했지만,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껴 고기잡이 배 선장이 된 한갑수, 사건을 추적하여 찾아온 악연 박영태(정웅인 분)를 만나게 되고,자신의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에게 한 협박으로 인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갑수가 죽은 후 큰 아들 한광훈(류수영 분)은 강제 징집을 당하게 되고, 잡혀가던 서인애를 구하려고 애쓰던 작은 아들 한광철은 차에 치인 채 바다로 실종되고 만다. 서인애 역시 미성년자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물고문 등 갖은 고문 끝에 감옥에 갇혀 버리고 만다. 대통령이 되고 싶던 한광훈과, 미국이라는 꿈의 나라를 선망하던 소녀의 희망은 시대의 아픔 속에 갈갈이 찢겨 나간다.

극중 주인공들을 파멸로 이끌어 들이는 사건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80년대 초의 대표저 반정부 사건이다. 80년대 광주 사태라는 전대 미문의 사건을 미국이 사주했다 하여, 젊은 대학생 등 지식인들이 미문화원을 찾아가 시위하고, 상징적 징벌의 의미로 '방화'를 시도했던 사건이다. 바로 그렇게 우리가 신문 지상에서 만났던 80년대의 역사적 사건이, <끝없는 사랑>의 배경이 된다. 어느 틈에, 아니 벌써 80년대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만큼 시간이 흐른 것이다. 
드라마에서 악역인 박영태가 자신의 반지를 돌리며 전화를 거는 방안에 걸려있는 대통령의 사진은 전두환이다. 그리고 한갑수와 박영태가 만나게 된 인연은 바로 그들이 함께 안전기획부 라는 정부의 정보 시설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이다. 바로 그 인연의 기억 때문에, 즉 박영태에 대한 한갑수의 기억때문에 한갑수는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한갑수의 아들을 처리하는 방식은, 반정부적 희식을 지닌 대학생들을 처리했던 방식을 유명한 '강제 징집'이요, 그가 배치받은 전방 부대의 억압적 훈련 방식은, 그 강제 징집 받은 학생들이 '의문사'로 이어졌던 비극의 역사들이다. 
드라마 속 미국은 방화 사건의 대상이자, 주인공 서인애가 자신의 복수를 위해 꿈을 꾸는 드림월드의 양면성을, 즉, 80년대 우리가 겪었던 미국의 이중적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극중 인애가 의지하는 파란 눈의 신부님의 모습도, 이미 우리가 80년대의 역사에서 마주쳤던 인물의 가상 캐릭터이다. 
이 시대를 살던 우리 중 누군가가 겪고, 살아왔던 시기 80년대가 어느 틈에, 드라마의 '소재'가 될 만큼 80년대는 역사적 존재가 되었다.

(사진; 오마이뉴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극중 등장하는 80년대의 그것들이 낯설지 않다. 정보부의 벽을 장식하는 대통령의 얼굴, 그 앞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권력의 그림자, 그의 비리를 알아서 죽임을 당하는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해 꿈을 향해 달려가던 젊은이들이 빠져드는 운몀의 구렁텅이, 벽에 걸린 대통령의 사진이 전두환이 아니라, 박정희라도 그리 다르지 않은 것같은 역사이다.
즉 우리의 근대사는, 결국 80년대이든, 70년대 이든, 막상 이렇게 드라마화 되고 보니, '독재'가 내재화 되었던 억압적 모습에 있어서는 양자라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끝없는 사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은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야망의 세월(1990년)>을 필두로 해서 , 70년대의 억압적 역사를 배경으로 했던 작품들과 <끝없는 사랑>은 그리 달라보이지 않아 보인다. 시대적 사건 혹은 시대적 아픔으로 인해 '부재'하게 된 부모님 세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자식 세대,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결국은 '복수'를 하고, '성공'을 성취하는,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가,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던 것이, 단지 배경을 좀 더 현재에 가까운 80년대로 바꾸었을 뿐이다. 극중 한광훈과 한광철은 공부를 잘 하는 아버지의 촉망받는 엘리트 형과, 그런 형과 달리 말썽만 피우는, 하지만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진국인 동생이라는 전형적인 우리나라 드라마의 구도를 고스란히 이어간다. 더구나, 형이나 동생이나 비극적 운명에 빠져,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는 건 또 어떻고, 그런데 그 여자가, 형을 사랑하고, 그것이 형과 동생의 애증과,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한다는 점 역시 우리가 익히 보던 드라마들과 다르지 않다. 

그런 면에서, <끝없는 사랑>의 80년대는 무척이나 고유한 듯하면서 동시에, 무척이나 진부하다. 박영태의 사무실에 걸린 대통령 사진을 전두환에서 박정희로 바꾸어도 그리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이는 <끝없는 사랑>의 클리셰는, 조성모의 애절한 ost의 회고적 분위기와 함께,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경험했던 그 드라마들을 복기하게 만든다. 과연 이 드라마의 80년대가 이제는 역사성을 띤 그 시대를 유의미적으로 회고하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만들어져 왔던 입지전적 성공 스토리와 그를 둘러싼 운명의 장난를 다룬 드라마의 그럴 듯한 배경으로 소비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by meditator 2014. 6. 23. 08:52

공소 시효가 지나버린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었던 <갑동이>가 마무리 되었다. 현실에서도 영화에서도 결국 잡을 수 없었던 연쇄 살인 사건이 드라마<갑동이>에서는 해결되었다. 형사가 되어 연쇄 살인범의 낙인을 피했던 갑동이(정인기 분)도 잡혔고, 갑동이를 흠모했던 카피캣 갑동이(이준 분)는 죽었다. 그리고 갑동이로 인해 마음의 짐에 짖눌렸던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것을 풀어내었다. 


처음 '반갑다, 갑동이'로 공소시효가 지난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갈 때만 해도, <갑동이>는 연쇄 살인범을 다룬 서스펜스 스릴러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20회로 마무리된 지금, 오히려 <갑동이>는 범죄물이나, 공포물이기 보다는 '심리물'에 가까운 드라마가가 아니었나 싶다. 

극중 웹툰 작가로 나온 마지울(김지원 분)이 연쇄 살인범을 그려낸 웹툰의 제목이 '짐슴의 길'이었다. 마치 그 웹툰의 제목처럼, 드라마 <갑동이>는 20회에 이르는 동안, 류태오라는 갑동이의 카피캣의 연쇄 살인을 재현해 내면서, 그리고, 갑동이와, 갑동이 카피캣,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얼크러짐을 통해, 우리 사회 연쇄 살인범이 선택한(?) 혹은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짐슴의 길'을 밝히고자 하였다. 

초중반 갑동이의 카피캣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 연쇄 살인을 재현해 낼 때만 해도, 드라마는 그저 파렴치한 연쇄 살인범을 그려내는데 치중하는 듯했다. 하지만, 갑동이 카피캣 류태오에 대한 하무염(윤상현 분), 오마리아(김민정 분), 마지울의 애증으로 극이 혼란스러워 지면서, 거기에 더해, 진짜 갑동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작 갑동이를 자신의 인생을 걸고 추적하던 형사 양철곤(성동일 분)이 피치못할 사정으로 갑동이가 되고, 정작 가장 신뢰를 받던 수사반 반장이던 차도혁이 진짜 갑동이임이 밝혀지고, 그의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갑동이>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저 누가 옳다 그르다라는 식의 사지선다 형 답을 구할 수 없게 오묘해 졌고, 그 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심오한 고뇌를 자아냈다. 

(사진; osen)

사법부조차 정신병의 트릭을 통해 피해가려던 갑동이를, 정작 무수한 인명을 살상한 사이코패스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명이라는, 류태오를 통한 힌트로 여죄를 밝혀내 공소시효를 무색하게 만든 하무염, 그래서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은 법원의 심판대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형이 구형되었지만, 최근 들어 사형대에 올라간 사람이 없어진 대한민국에서, 사형의 의미는 무색하다. 아니, 그가 저지른 무수한 살인과 피해자,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비해, 법의 처벌은 하염없이 가볍게 느껴질 뿐이다. 정작, 처벌은 감옥에 갇혀 매일 밤 꾸는 악몽이 대신한다. 그런 악몽조차 피해가고 싶은 갑동이는 하무염에게 영원한 안식을 요구한다. 

류태오가 갑동이의 카피캣을 자처한 이유는 바로 연쇄 살인범이었던 갑동이가 스스로 자신의 살인을 멈추었던 '위대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지울이 그린 웹툰의 제목이 '짐승의 길'이었던 것처럼 류태오도, 갑동이도 멈출 수 없었다. 외국으로 피해가던 류태오는 어쩌지 못한 욕망을 주체못해 스튜어디스를 충동적으로 살해했고, 멈추었다, 그래서 공소시효를 피해갔다 여겨졌던 갑동이는 단지 세상의 눈을 피했을 뿐이었다. 

바로 드라마는 여기에 방점을 찍는다. 사이코패스와 인간이 갈리는 길, 짐승과 인간이 달라지는 길, 거기에 주목한다. 
죄의 댓가를 받아 감옥에 갇힌 갑동이는 악몽조차 못견디어 영원한 안식을 꾀하고, 류태오의 죽음을 사주한다. 멈추기를 갈망했던 류태오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에 대한 사죄나 죄과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했던 류태오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오마리아에게 자신과 함께 외국으로 가달라고 요구했으며, 사형대에 오르는 대신, 자신의 재산을 도모해 법의 그물망을 피하고자 한다. 
결국 <갑동이>가 말하고자 하는 사이코패스, 짐승의 정의가, 진짜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의 선택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고 그런 짐승의 반대편에 인간이 있다.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 줄 알면서도, 그런 사람들에 대해 연민을 감출 수 없었던 하무염, 마지울, 그리고 사이코패스일 망정 그를 이용했다는 죄책감에 혼돈스러웠던 오마리아, 그리고, 결국 자신이 피치못했건 어떻건 한 사람의 갑동이였음을 시인한 양철곤, 그를 가르쳤다는 이유만으로 갑동이를 자처한 한상훈(강남길 분)의 선택이 바로 인간의 그것이다. 또한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사명감 역시 빠질 수 없다. 그렇게 지리하도록 갑동이와, 갑동이 카피캣을 두고 주변 사람들이 겪는 혼돈과 갈등, 자책을 통해 그것이 바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마음이, 우리 사회를 사이코패스로부터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 길이라고 <갑동이>는 어렵게 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이코패스라는 범죄자만이 아니라, 사회 속에 존재하는 사람으로써, 인간다운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를 드라마 <갑동이>는 말하고자 한다.

물론, 짐승의 길 혹은 사이코패스와 인간의 길을 장황하게 설명하고자, 지그재그 발걸음을 내딛는 동안, 아쉬운 점도 있다. 왜 그가 사이코패스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인간과 사이코패스의 경계에 서있는 그 애매모호한 짐승을 설명하기 위해, 때로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을 옹호한다는 느낌이 들만큼 갑동이와 특히나 갑동이의 카피캣에 천착했다. 마지막, 류태오가 거두어진 절을 방문한 세 사람 하무염, 오마리아, 마지울의 행보는, 그들의 인간다움을 내보인 것지만, 그렇게 갑동이를 통해 연민을 표현하는 방식을 그려낸 이 드라마의 갑갑한 점이기도 하다. 즉, 갑동이가 왜 짐승인가, 그리고 그렇지 않은 인간이 왜 인간인가를 그려내기 위해 양 자가 평행선을 달리는 동안, 오마리아를 제외한 갑동이의 희생자들은 방기된 면이 강하다. 이 두 사람이, 두 부류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하고자 천착하는 동안, 그에게 희생된 무순한 사람들, 그가 저지른 범죄의 부피는 얇아졌다. 갑동이와 갑동이의 카피캣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에 놓여있는 갈등에 집중하면서,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사연과 고통과 고뇌는 상대적으로 희박해 진점, 그것이 <갑동이>가 남긴 아쉬움이다. 


by meditator 2014. 6. 22. 14:18

카메라가 밖으로 옮겨지고, 스튜디오와 거리가 연결된다. 스튜디오의 네 명의 mc들이 화면에 비춰지면, 젊은이들은 환호작약하며 달려간다. 그리고 서로서로 앞다투어 자신의 연애사를 털어놓고, 고민을 나눈다. 


<마녀 사냥>의 이원생중계 현장에서 보이는 젊은이들의 반응을 보면, <마녀 사냥>이라는 프로가 얼마나 요즘 젊은이들에게 '공신력있고'(?), 인기있는 프로그램인가를 알 수 있다. 분명이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젊은이들은 전혀 꺼리낌없이 자신의 속사정을 털어놓고,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한다. 물론 이는 다른 각도에서의 해석도 가능하다. 얼마나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연애사를 의논할 곳이 없으면, 저렇게 예능 프로그램에다가 자신의 속사정을 의논할까 싶은 것이기도 하다. 가장 사적인 삶에 대해 기존의 사고는 무너지고, 그 어떤 가르침이나, 지침도 주지 않는 사회에서, <마녀 사냥>의 19금토크는, 젊은이들에게 갈증을 달래주는 샘물과도 같다는 느낌을, 스튜디오와 현장이 연결된 이원생중계 코너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마녀 사냥>은 자신들은 전혀 연애 코칭 프로그램이 아니며, 연애사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프로라고 표방함에도 불구하고, 어느 틈에 젊은이들 연애사의 트렌드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런 <마녀사냥>에서 출연자들이 언제나 거쳐가야 하는 통과 의례가 있다. 바로, '당신의 낮과 밤은 어떠십니까?'라는 취지의 질문이다. 물론 질문은 이런 식이 아니다. 신동엽은 장황하게 묻는다. 낮저밤이, 낮이밤이, 낮저밤저, 낮이밤저 냐는 식으로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고, 출연자는 이걸 피해갈 수 없다. 심지어, 이 낮 어쩌고, 밤 어쩌고가 다른 프로그램까지 침입하고 있는 중이다. 

마녀사냥 은정 낮이밤져
(사진; tv데일리)

19금 토크를 하는 <마녀 사냥>에서 일단 자신의 연애 스타일을 까놓고 시작하겠다는 이 낮과 밤의 연애 방식에 대한 통과 의례는 많은 함의를 담고 있다. 

우선은, 낮과 밤의 연애를 구분함으로써, 거기에, 이미 19금의 연애사의 전제를 깐다. 출연자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이미 당신은 그 정도 단계의 연애는 해보았겠지요 라는 것이다. 초창기 그 질문에 대해 출연자가 말을 돌리면, mc들은 무슨 내숭이냐는 듯이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이제 <마녀 사냥>에 출연하는 출연자들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하며 당당하게 응수하기 시작하고, 그 다음엔, 그들이 선택하는 연애 스타일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여성 출연자가, 낮이밤이를 선택한다면, mc를 비롯한 패널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반대로, 남자가, 낮저밤저를 택한다면, 아니~ 하는 식의 반응이 우선적으로 튀어나온다. 가장 정석적인 답이라면, 20일 방송에서, 티아라의 은정처럼, 밤에는 남자에게 자신감을 주고 싶어, 남자가 리드하는 밤을 원한다면, 반응이, 상당히 그럴싸하다는 수긍으로 귀결된다. 여성이 지면 어쩐지 당연하고, 이기면 어딘가 드세게 보는 그 분위기를 숨길 수 없다. 물론, 이민기처럼, 낮에 하는 연애의 정체성에 대해 반문하여, 오히려 mc진을 당혹스럽게 만들며 한 수 더 나아갈 수도 있지만, 남자가 지면 시선은 애매해 진다. 보기에 질 것 같은 남자가 자기는 아니라면, 은근히 예상 외라며 대단하게 취급하는 식이다. 

누군가의 연애사의 스타일을 속시원하게 털어놓는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밝히는 것은 무어라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걸, 이기고 지는 연애의 권력 관계로 귀결시켜야 하는가 라는 점, 그것이 <마녀 사냥>의 통과 의례가 되어야 하는가는 이즈음에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라고 본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이기고, 지는 것인지 그것의 정의조차 애초에 미묘한 것이 아닐까. 아니,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자신의 연애 스타일을 우선은 까발려야 한다는 그 지점부터, 한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애초에 이런 문제 제기 자체가, 사적 연애를 공론화 시켜야 하는 마녀 사냥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당당한 성인으로서의 평등한 연애를 추구한다면서, 애초에 당신의 연애 권력 관계는 어떠십니까 라는 질문은 그 자체로 '딜레마'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마녀 사냥>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자유롭고 당당한 성인의 성숙한 연애라는 목적은 있으되, 매번 등장하는 사연에 대한 반응은 지극히 1차원적이거나, 성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여성이 글래머라면 일단 접고 들어가고, 남성이 키가 180 이상이라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 프로그램 자체가, 사안에 따라, 지극히 쿨한 연애의 중계자가 되기도, 혹은, 지극히 속물적인 성적 시야에 한정되어 있는 줄타기를 하는 듯한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초창기에는 쿨한 시각을 견지하던 허지웅이나, 성시경이 회를 거듭하면서, 프로그램에 동화되어, 그 '솔직함'을 넘어선 '성적 편견'에 사로잡힌 모습을 빈번하게 내보이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마녀 사냥>의 딜레마인 것이다.  20일 방송에서, 자신의 조카가 등장하자, 난색을 표하는 성시경의 모습은, 누군가의 연애가 어쩌면 흥미꺼리 이상이 되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때로는 솔직함이, 걸러지지 않는 편견의 노출이 되기도 한다. 여전히 젊은 층의 열광적 지지를 얻고 있는 <마녀 사냥>, 지금의 솔직함에 대한 자기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by meditator 2014. 6. 21. 05:59

6월 19일 9회를 맞이한 <방자전>이 리뉴얼을 감행했다. 그간 mc를 맡아왔던 박미선과 함께, 김완성, 김태원이 물러남과 대신 노사연, 서인영이 합류했고, <근대가요사 방자전>이라는 간판을, 주병진의 방자전으로 바꾸어 달았다. 


무엇보다 이 변화의 핵심에는 주병진이 있다. 
첫 포문을 연 <근대 가요사 방자전>에서 주병진은 메인 mc 자리에 앉아있었지만, 그의 모양새는 그저 얼굴 마담같은 거였다. 진행은 거의 박미선이 도맡다시피 했고, 진행의 흐름에도 합류하지 못하고, 토크의 내용에도 제대로 끼지 못한 주병진은 마치 <해피 투게더>의 눈치없는 박명수같은 신세였다.  그리고 이제 9회를 맞이한 <방자전>이 이름마저 주병진의 <방자전>으로 갈아치웠다는 사실은, 8회를 걸치며 둔탁해 졌던 mc 주병진의 예능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고, 프로그램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서는, 능수능란한,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박미선에 의한 진행보다는, 주병진이라는 색깔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한때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통해 주병진과 함께 찰떡 호흡을 자랑했던 노사연을 보조 mc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보다 그 의도가 분명해 진다. 나머지 보조 mc의 잔류와 교체 역시, 주병진이라는 메인 mc로의 집중에 보다 적합한 인물인가의 잣대로 결정된 듯이 보인다. 

새로워진 그녀들과 함께하는 주병진의 방자전! 6월 19일(목) 저녁 8시 50분 방송!

그리고 그런 제작진의 의도가 틀리지 않았음을 주병진의 <방자전>은 증명한다. '자기 주도적'인mc로서의 칼라가 분명한 주병진은, 이제 온전히 프로그램이 그에게 집중되자, 한결 더 자신감을 얻었고, 그의 오랜 벗 노사연이 합류함으로써 한결 자연스러운 진행을 보인다. 항상 박미선보다 연장자이면서도, 이제는 관록의 mc가 된 박미선에 비해 공백기를 가져 이래저래 나잇값을 못해보이던 모습이, 노사연과 함께 하자, 오랜 벗과 함께 하는 편안함, 자유스러움으로 분위기조차 달라보인다. 

그렇게 mc진의 교체를 통해 주병진이라는 요소에 '선택'을 했다면, 프로그램의 내용면에서는 '집중'을 취했다.
그간 '영감 대 영감(young 感)을 통해 mc들이 활동했을 당시의 과거와 오늘날의 문물 등 다양한 주제를 비교하던 토크가, '오만방자전'이란 코너로 리뉴얼되면서, 과거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mc들이 요즘 사람들이 아니라서 어설프게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서 이도 저도 아닌 토크가 되었던 부분을 지양한 것이다. 특히나 공백기를 가졌던 주병진에게 이런 변화는, 그의 진행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변화의 첫 회, 노사연의 출격과 함께, 가장 노사연이 잘 할 수 있는 '추억의 오만 가지 먹거리'를 변화의 충격파를 최소화했다. 과거의 먹거리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진부한 주제이면서도, 하고 또 해도 침이 고이는 재미난 주제이기도 하다. 애초에 추억팔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게 과거에 집중한 코너는, 어설프게 과거와 현재의 비교보다 프로그램의 재미를 살렸다. 또한 젊은 세대로서 서인영이 합류하면서, 그저 어른들이 젊은 세대를 아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세대가 직접 합류하여 그들의 시각을 보여주고, 그러면서 동시에 가수라는 동일한 직종으로서의 공감대를 나누며, 신구 세대의 시너지를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변화된 <방자전>에서 가장 돋보였던 것은, '전설 in가요'이다. 그간 '내 귀에 명곡'을 통해 '근대 가요'의 면면을 살펴보던 <방자전>은 하지만 단 8회만에, 소재의 고갈에 도달했고, 그런 내용의 장벽을, 전설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으로 돌파하고자 한다. 그래서 첫 회, 전설이라는 이름에 가장 걸맞는 '송골매'가 초청되었다. 
배철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DJ로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지만, DJ가 아닌 송골매의 리더로서, 구창모와 함께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보조 MC들의 추천을 통해, 모처럼 들어보는 송골매의 음악과, 그 음악이 발표될 당시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이미 알던 것임에도, 혹은 지금에 와서도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것들이어서 좋았다. 아니, 모처럼 송골매의 두 사람 구창모와 배철수가 한 자리에 앉아 지난 일을 이야기하고,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두 다 사랑하리', '세상만사 등그들의 음악을 다시 한번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추억'의 값을 다한 시간이었다. 말 그래도 '근대 가요' 버전 고품격 음악 방송이었다. 물론 구창모나 배철수가 이른바 고품격 음악 방송을 표방한 <라디오 스타>에 나갈 수도 있겠다. 하지만, 거기에 나간다 한들, 6월 19일의 <방자전>의 이야기들을 되풀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과 동시대를 건넜던 주병진을 비롯하여 노사연, 정원관, 변진섭이 있기에 가능한 추억의 시간이었다. 송골매와 함께 '찐한' 추억을 나누면서 시작된 <방자전>의 '전설 IN 가요', 순탄한 리뉴얼의 출발이었다. 


by meditator 2014. 6. 20. 07:10

결국, 서동하(정보석 분)는 감옥으로 갔다. 금융위원장은 한민 은행 불법 매각 사실을 시인했고, 마이클 장 역시 구속을 면치 못했다. 강도윤(김강우 분)이 밝혔던 대로, 서동하 뒤에서 그 모든 것들을 조정했던 경제 실세들의 모임, 골든 크로스도 사법의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한민은행은 복구되었고, 직원들에게 돌아간 주식은 강주완기금이 되었다. 


마지막 회, 다시 한번 강도윤과 서동하가 대치한다. 서동하는 일갈한다. 나는 네가 강도윤이던, 테리영이던 상관이 없었다고, 네가 강도윤을 버리고, 테리영이 되는 그 기간 동안 충분히 너는 '돈의 세계'를 맛보았을 테니 자신을 이해하고, 그 세계에 젖어들었을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리영으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텐데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강도윤이 어리석다고 한다. 
그런 서동하의 지적을 강도윤은 거부하지 않는다. 서동하로 인해 총격을 입고 땅속에 묻혀 죽어가던 강도윤이 테리영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오로지 '돈'을 위해 자신을 버렸던 시간이었으며, 그만큼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부'의 유혹도 컸다고 시인한다. 하지만, 쾌락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와 누웠을 때 자신의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결코 테리영으로 주저앉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강도윤은 자신의 동생과 아버지를 죽인 서동하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 검사보로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복수를 향해 치달렸고, 강도윤으로서 그를 도왔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그 자신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상황을 넘어, 자신을 버리고 테리영이란 금융계의 실세로 거듭나면서도 결국 복수를 포기 하지 않았다. 자신이 당했던 것처럼, 서동하를 땅에 묻어 버리려고도 했지만, 대신, 내 가족의 원수를 갚은 인적 복수를 넘어, 자신의 아버지와 동생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서동하라는 경제계의 실세와 그의 뒷배를 봐주던 골든 크로스를 붕괴시킴으로써, 보다 내 혈육에 대한 사적 복수는 물론, 대승적인 사회적 복수도 완수했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홍사라까지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강도윤은 '정의'를 실현했다. 

물론 강도윤의 복수가 '찰지지'는 않았다. 검사보 강도윤으로서의 폭로가 골든 크로스라는 장벽에 갇혀 외로운 독백으로 사라졌다면, 이제 서동하의 인사 청문회에 불려 나올 만큼의 위치가 된 테리영의 폭로는 너무도 순탄했다. 물론 강도윤이던 시절에 비해 보다 풍성해진(동영상과 전 한민 은행장 등의 증인들) 그의 폭로 하나만으로, <개과천선>에서 차영우 펌의 농간에 놀아나던, 금융위원장은 한민은행 불법 매각을 시인했고, 법원은 순순히 서동하와 그의 조력자 박희서(김규철 분), 마이클 장, 골든 크로스에 대한 수사를 진행시켰다. 비슷한 상황인데, <개과천선>에서 벽에 부딪쳤던 그 장애가, <골든 크로스>는 마지막 회라는 이유만으로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런 명쾌한 혹은 환타지같은 결말이 <골든 크로스>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폄하하지는 않는다. 강도윤이게 굳이 살 생각이 없지 라며 총을 겨누던 마이클 장의 말처럼, 마치 이순신 장군의 명언처럼,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을 던진 강도윤의 복수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길은 있고, 언제라도 정의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골든 크로스>는 20부의 시간을 걸려 어렵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자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박희서와 함께 밀항을 하려다 잡히고 만 서동하는, 강도윤에 의해 잡혀 가는 도중 끊임없이 박희서와 설전을 벌인다. 하지만 설전이라고 하기가 무색하게,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세상 모르고 날뛰다 걸린 철부지 어린 아이들 같다.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던 좌장과, 그의 조력자 최고 로펌의 대표, 그들이 보인 모습은, 한 마디로 유치하다. 애초에 마음에 두었던 젊은 여자 강도윤의 동생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에 분노에 차서 날뛰며 골프채를 휘두르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가장 고상한 척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협잡을 마다하지 않고, 그러다 이익이 갈리면 서로 뒷통수를 치지 못해 안달하고, 서동하가 노출되자, 도마뱀꼬리처럼 그를 자르려고 했던 서동하의 장인이자, 골든 크로스의 대표 김재갑 전 부총리(이호재 분)의 모습도, 그리 어른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홍사라가 지적한 대로, 머리가 좀 똑똑해서 행시에 붙어 가죽 의자에 앉으니 세상이 다 자기 맘대로 돌아갈 것 같았던 서동하는 매번, '감히 니들이' 하며 강도윤과 그의 가족을 깔보다가, 막상 강도윤이 테리영이 되어 나타나자 답삭 꼬리를 내린다. 다시 강도윤으로 돌아온 테리영이 이제 자신을 그 예전 자신이 강도윤에게 했던 것처럼 죽이려고 하자, 무릎을 끓고 싹싹 빈다. 살려만 달라고, 그러면 나라를 위해 멸사봉공하겠다고. 

아마도 <골든 크로스>의 가장 큰 성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정의이기도 하지만, 20회 동안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은 서동하와 그 일족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것에 있기도 하다. 말끝마다 '피플'을 들먹이는 박희서처럼, 상위 1%의 자신들을 제외한 다수를 그저, 보통 명사 피플로 퉁치며, 자신들의 밥그릇을 위한 도구나 희생양으로만 쓸 줄 아는, 멸사봉공과 애국심을 논하지만, 사실 그런 마음따위는 한 톨도 없이, 어린 아이처럼, 내 것밖에 모르는 '얘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상위 1%라는 것을 <골든 크로스>는 명징하게 밝힌다. 그런 이기적인 욕심들에 의해,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이 좌지우지되고, 다수의 사람들의 밥그릇이 들었다 놨다 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강도윤의 복수는 늘 벽에 부딪치고 좌절했지만, 시청자들은 그 과정을 통해 이 나라 상위 1%의 실상을 거듭 학습할 수 있었다. 

장르 드라마로서의 한계에 봉착하여 그리 높은 시청률의 성취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피플'을 유행어로 만들며, 골든 크로스 폐인을 양산했던 이 드라마는, 몇 %의 시청률로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시대 장르물의 시금석이 되었다. 시청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사회면에서 벌어졌던 실제 금융 사고의 이면을 유추해 낼 수 있었고, 이른바 '지도층'이라는 상위 1%의 실상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짓밟히지 않기 위해 포기하지 않아야 할 그 무엇에 대한 자각도 명료하게 해주었다. 

주인공 김강우는, 2009년 <남자 이야기> 이후 오랜만에 대표작을 리뉴얼 할 수 있게 되었고, 정보석은, 미운데 어쩐지 '웃픈' 근자에 보기 드문 절대악을 탁월하게 그려냄으로써, <자이언트>의 조필연을 잊게 만들었다. 물론  아쉬운 점도 남는다. 강도윤 역의 김강우와, 서동하 역의 정보석이 발군의 존재감을 발휘하는 가운데, 마이클 장 등 그외 주변 인물에 대한 캐릭터로서의 풀이 과정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특히나, 서이레나, 홍사라 등 여성 캐릭터는, 주체적 인물로 정립되기 보다는, 누구의 딸, 누구의 조력자 혹은 사랑하는 사람으로만 설정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4. 6. 20. 06:07

프랑스의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는 '걸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도발적 언급을 한다. 즉, 전폭기 조종석에 딸린 스크린을 통해 일종의 전자 오락 형태로 제시된 전쟁 상황은, 고전적 전쟁의 참혹함을 간단히 증발시켜 버린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의 고도화된 사회적 문화적 기제들은, 그 당사자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을 거세시켜버린 채 문서 상의 문구나, 혹은 기계의 장치로 대체시켜 버린다. 그래서 모든 현실은, 그저 편리한 절차나, 과정, 프로그램으로 상치되어, 그 속에서 '인간'은 증발되어 버린다. 그래서, 다시 역설적으로, 그 어떤 무기도 장착하지 않은 사무실 안의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다루고, 숫자 놀음을 하는  '화이트 칼라'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원 권력자가 되어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당뇨 합병증으로 알츠하이머를 앓은 김석주의 아버지(최일화 분)는 눈 앞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을 닮은 듯한 김석주(김명민 분)에게 속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한다. 너무나 영민하여 오만해 질까, 남들이 다 칭찬만 하는 아들에게 지레 더 엄격해야만 했던 아버지, 하지만, 그 아들에게 법원 건물의 재료가 되는 돌 석자를 이름에 넣어, 돌로 지어진 건물처럼 오래도록 강건하게 살아갈 인물이 되기를 바랬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진심을 알고, 김석주는 오열한다. 아버지 앞에서 당당하게 서로 생각이 다른 것뿐이라고 말했던 자신의 오만을 절절하게 깨달으면서. '엘리트'의 눈을 잃고, '인간'의 눈을 회복한 김석주는, 그간 자신이 변호했던 여러 사건의 피해자들을 목도하면서, 자신의 다른 생각이 가지는 엄청난 파급 효과, 그 오만의 실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전투기 조종석에서 게임을 하던 전투기 조종사가 폐허가 된 전쟁터에 던져지듯, 김석주는 자신이 투하한 변호의 피폐함을 마음의 눈으로목도하고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한다. 

(사진; OSEN)

12회에 이르기까지, 사고로 인한 기억상실을 통해 변호사로서 부도덕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 보게 되었던 김석주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차영우 로펌을 사직한다. 거대 기업들의 비자금을 주무르던 변호사 김석주의 사직으로 그의 주 고객들이었던 그룹, 은행들은 당황한다. 하지만, 차영우는 그런 클라이언트들을 진정시키며, 여전히 차영우 펌이 고객들의 의뢰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김석주의 다음 카드를 준비시킨다. 

김석주의 다음 카드, 즉 포스트 김석주로 선택된 것은, 서울지법 판사 전지원(진이한 분)이다. 지검장보다는 학계에 뜻을 두었다는 전지원을, 선배 판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카드로 활용하고자 한다. 전지원 만이 아니다. 차영우는 전투기 조종사가 게임을 하듯, 법원의 조직도를 놓고, 이리저리 인사권을 재단한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안다. <개과천선>이라는 드라마 속 차영우 펌으로 등장하는 가상의 변호사 집단이, 그간 드라마 속 기업들이 실제 기업들을 상징하듯, 실제 우리 사회에서 내로라 하는 로펌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차영우가 쥐락펴락하는 법원의 인사들이, 그가 입막음하는 관료들이, 그가 무자비하게 댓가를 치루게 하는 중소기업가들이 다 우리 사회의 실존인물이요, 실재의 사건들이라는 것을. 아마도 우리 사회의 사회 경제면을 차지했던 수많은 사건들이 차영우같은 사람들의 온기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농락당했음을 <개과천선>은 설명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차영우도, 전지원도 게임을 하듯 폭탄을 투하하는 전투기 조종사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인사가, 돈으로 매수하는 인물 들이 벌이는 사건의 속내에 관심이 없다. 차영우가 전지원이 자신의 로펌을 올 가능성에, 그의 승부사 기질을 들듯이, 그저 그들은, 게임을 하듯, 자신들이 개입한 사건에서 이기고, 그 성취의 댓가로 많은 돈을 벌면 그뿐이다.

그들의 논리는 엄정하고 화려하다. 가처분 취소 소송에서 김석주와 만난 전지원, 소송 대리인으로 나선 김석주가 재판부에 호소하는 것은 과도한 이자로 인해 부도 위기에 빠진 기업들의 형편이다. 그런 김석주의 호소에 맞대응하는 전지원의 논리는 약속 이행이라는 지극히 원칙적이고, 상식적인 논리이다. 당신이 계약을 했으니 약속을 지키라는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사진; TV리포트)

그들은 종잇장을 통해 익힌 엄정한 원칙, 이론 들로 자신을 무장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관철을 위해 자신들의 인맥을 동원한다. 양심적인 판사인 듯했던 전지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기기 위한 승부수를 마련하기 위해 선배 판사들을 움직인다. 자신들이 책을 통해 배운 형이상학적 논리에 위배되지 않는 승부를 위해, 주변의 도움을 받을 뿐이다. 화이트 칼라들의 지식과, 힘이 무기가 되어, 누군가의 편을 들고, 그들의 편에 서서 누군가를 짓밟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신들이 배우고 안 원칙을 실천할 뿐이라 여긴다. 바다에 퍼진 석유에 검게 찌든 물고기를 들고 몰려와 항의를 해도, 항의를 하다하다 건물에서 몸을 던져도, 그것은 그저, 해결해야 할 부수적 사건 사고에 불과하다. 한 나라의 국부가 해외에 넘어가도, 기업이 수많은 피해자를 내며 자기 이익만 챙겨도, 은행이 부조리한 계약으로 억울한 손해를 입혀도, '종이'로 부터 비롯된 논리와 원칙에 따라, 그들은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사실 법원 인사를 농락하는, 중소기업 대표의 세무 조사를 지시하는  차영우의 눈빛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진압하는 독재자의 그것과 다름없지만, 세련된 로펌 속 그의 말투는 지극히 온화하고 사무적이며 냉정하기 그지없다. '인간'이 거세된 로펌 속 이겨야 할 사건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알게 된 시청자들은 차영우의 권력이 더 소름끼치게 무섭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은 차가운 권력의 무자비함이란 상상 그 이상일 테니까. 천하의 망나니같던 김석주는 어쩌면 새발의 피일 뿐, 진짜 실세는 바로 차영우로 대표되는 공고한 법적 권위와 재량과 능력을 가진 저들이다. 아득함마저 느껴지는 13회이다. 그 예전 6.25 때 B29의 공습 앞에 무기력했던 피난민의 마음이 이랬을까.


by meditator 2014. 6. 19. 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