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청사가 있었던 상해로 가서 당시 독립운동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생활 상을 직접 체험해 보는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1부 <독립자금을 벌어라>에서는 출연자 김수로, 박찬호, 강한나, 김동완, 공찬 등이 직접 윤봉길, 백산상회 등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뛰어든 생활전선을 체험해 보았다. 그에 이어 1월 14일 방영된 2부는 <임시정부를 구하라>이다. 왜 임시정부를 구하라였을까? 그 내막과 결국 자신을 던져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구한 윤봉길, 이봉창 두 의사의 행적을 따라가본다. 

 

 

위기에 빠진 임시정부 
1919년 국제적 금융 도시 상해에 첫 임시정부 청사가 세워졌다. 3.1 운동의 열기가 남아있던 시절, 전남 함평의 지주 아들 김철이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왔고, 해외에 세워진 첫 임시 정부이기에 각지에서 독립운동 자금이 답지해왔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이 흐른 1930년대 임시 정부는 이제 집세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일본이 한반도 내 식민지 체제를 갖춰가는 것과 함께 해외로 팽창 정책을 벌이며 만주로 중국으로 그 야욕을 한껏 펼치던 시기였다. 일본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땅을 잃은 농민들은 대다수 만주 등지로 이주를 했다.  지린성 창춘의 만보산(완바오 산)에 일본이 개간을 계약한 땅을 조치하기로 한 우리 농민들, 수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곳의 중국인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실제 사건은 크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경성일보>가 부풀려 보도하는 하는 바람에 전국에 반중국인 정서가 한껏 들쑤셔졌고 중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이 행사하며 다수의 중국인 사상자가 생겨났다. 결국 <동아일보>가 사건을 바로잡으면서 국내의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이는 다시 중국내 반한 감정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만보산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중국내 반한 감정, 중국 전역에서 이루어진 조선인 박해는 상해 임정에 직접적인 타격이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등으로 중국내 일본의 영향력이 커져가면서 청사의 운영자체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운영, 나아가 독립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김구 선생을 비롯한 상해 임시 정부가 생각한 타개책은 이런 분위기를 일신할 수 있는 일본에 대한 강력한 한 방의 타격이었다. 이를 위해 1931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 선생을 비롯한  80여 명의 비밀 요원들이 모여 <한인애국단>을 결성한다. 

<한인애국단>은 첫 의거로 난징을 방문하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우치다 총재 암살을 준비하였지만 방문이 취소되는 바람에 실행하지 못한다. 그에 따라 첫 의거는 이봉창 의사에게 맡겨졌다. 1932년 1월 8일 신년 연병식을 위해 가던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비록 일왕의 암살에는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은 중국 내 팽배해있던 반한 감정을 잠재웠고,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의 활로를 열어주었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그동안 중단되었던 독립자금이 하와이 등 전세계에서 답지하기 시작했고, 중국의 호의적인 협조로 무기를 구하기가 한결 용의해졌다. 이런 이봉창 열사의 의거로 인한 분위기의 반전이 있었기에 그로 부터 1년 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가능할 수 있는 기반이 조성되었다.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따라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에서 출연진은 <한인애국단> 숙소를 '길을 잃을 것같으면 ㄹ 자를 길에 뿌려 찾아오도록 했다는 이화림 선생의 회고록에 따라 찾아본다. 또한 <인민영웅기념탑> 이 세워진 황포탄 부두를 찾아가 '나는 적성(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 애국단의 일원이 되야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였나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이곳을 떠나 일본으로 떠난 이봉창 의사의 행적을 짚어본다. 이곳은 또한  11개월 후 이봉창 의사가 독립에의 결심을 가지고 떠난 것과 달리, 항저우 공원에서 의거 후 체포되어 윤봉길 의사 역시 이곳을 통해 압송되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 노란손수건을 찾아 의거 전 윤봉길 의사의 행적을 따른다. 1930년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한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을 처음 만난 '사대 다관', 4월 27일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안공근 선생의 집터, 이력서와 유서를 남겼던 <중국기독청년회관(YMCA)>, 의거 당일 아침 '농부가 논밭에 나가듯 태연자약했던' 윤봉길 의사가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하고 가지고 있던 돈을 주었던 <김해산의 집> 등을 둘러본다. 또한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상해 <매헌 기념관에 들러> 죽음에 이르러서도 강직했던 윤봉길 의사가  '강보에 싸인 두 병정, 너희가 피가 있고 뼈가 있거든 조선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라'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다시금 아로새겨 본다. 

 

 

막연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남겨졌던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하지만 출연진들이 직접 그곳을 찾아보고, 윤봉길 의사가 담담하게 걸어가셨다던 항저우 공원으로 향한 길을 걸어보는 여정은 그 자체로 한 세기의 간극을 넘어 출연진을 울컥하게 만든다. 거기에 자신이 가졌던 6원의 시계가 더는 필요없으니 2원짜리 김구 선생의 시계와 바꾸셨다던 에피소드,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도시락 폭탄이라 알았지만 사실은 그날 던져진 건 물병 폭탄이었으며 도시락 폭탄은 윤봉길 의사의 자폭용이었다는 예외적 진실, 그리고 무사히 폭탄을 옮기기 위해 바짓가랑이 사이에 숨기고 일본으로 떠났던 이봉창 의사의 행적 등을 우리가 미처 몰랐거나 잘못알았던 사실을 퀴즈를 통해 새롭게 알아간다. 

또한 두 의사 뿐이 아니다. <독립원정대의 하루살이 - 2부 임시정부를 구하라>는육삼정을 찾아 같은 날 윤봉길 의사와 같이 의거를 준비했던 또 다른 열사의 행적도 소개한다. 일찌기 3.1운동부터 독립운동에 매진해오셨던 백정기 열사는 , 같은 시기 김구 선생과 같은 취지로 상해 흑색 테러단을 조직하고 홍커우 공원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장권을 구하지 못해 실패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1933년 일본 공사 암살을 준비하던 중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어 옥사하셨던 우리가 몰랐던 위인이다. 

by meditator 2019. 1. 15. 16:55

<꺼삐딴 리>는 전광용의 1962년작 소설이다. 일제 시대 잠꼬대도 일어로 할 정도로 열성 친일이었던 의사 이인국은 해방이 되자 당연히 친일로 몰린다. 그를 구해준 건 뜻밖에도 진주한 소련군, 대세는 소련이라 생각했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으며 러시아어를 익히고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시키며 친소 노선을 걷는다. 그러다 발발한 6.25로 아내를 잃고 아들조차 소식이 끊기자 청진기 하나를 들고 월남하여 병원을 미군 및 남한의 고위층을 고객으로 맞이한다. 그리고 이제 미국인과 결혼한 딸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서의 성공을 기약하며 비행기에 오른다. '카멜레온'이란 단어에 딱 어울리는 소설의 주인공, 그를 통해 전광용은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기회주의적 인물의 전형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 기회주의적 인물은 소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1월 10일 방영된 <다큐 시선- 우리 곁의 친일 잔재, 2부, 미술, 친일을 그리다> 속의 미술가들 역시 우리 시대의 또 다른 꺼삐딴 리이다. 소설 속 꺼삐딴 리는 일신의 보신에만 급급했지만, 문제는 미술계의 이 꺼삐딴 리들이 바로 우리 현대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라는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 미술계의 딜레마가 되고 있다. 다큐는 이를 추적한다. 

 

   

 
만원짜리 속 세종대왕의 딜레마 
다큐의 시작은 만원 짜리 지폐다. 세종대왕이 그려져 있는 만원 짜리 지폐를 들고 시장으로 간 제작진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많이 쓰는 이 지폐를 '친일 미술가'가 그렸는데 어떻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충격적이다. 화가 난다. 처음 알았다 라며 놀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외려 짜증을 내신다. 그 옛날 밥먹고 살기 위해 친일 안했던 사람이 어딨냐며, 이제 와서 그걸 왈가왈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구. 이미 생존하지도 않는 친일파 미술가들을 이제 와서 들추는게 정말 의미가 없을까?

만원 짜리에 그려져 있는 세종 대왕 영정을 그린 이는 다름 아닌 천재 화가로 알려진 운보 김기창 화백이다. 김 화백이 그린 건 세종 대왕만이 아니다. 신라 문무왕, 무열왕, 을지문덕, 임진왜란의 의병장 조헌 등이 그의 손을 통해 구현되었다. 위인들의 영정을 그린 건 김기창만이 아니다. 우리가 아는 대표적 미술인 이당 김은호 화백, 그 역시 친일 인명 사전에 이름이 올라있는 대표적 친일파로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그의 작품이다. 그런가 하면 월전 장우성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정약용, 강감찬, 김유신, 정몽주 내로라하는 위인을 비롯하여 심지어 유관순, 윤봉길 의사까지 그의 손을 거쳤다. 남산 공원의 백범 김구 동상이나 도산 안창호, 안중근 열사의 동상, 그리고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을 만든이는 김경승, 우리 조각계의 독보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형 화가 김인승과 함께 일제 동아시아 건설에 앞장섰던 이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과연 친일파가 자신의 동상을 만들 줄 아셨다면 돌아가신 백범 김구 선생은 어떻게 하셨을까?

 

 

도대체 입도선매도 아니고 이들 위인들의 영정이 모두 대표적 친일 미술인들의 손에 의해 그려진 사태는 무엇때문일까? 바로 미술계판 국정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표준 영정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위인들을 생각할 때 떠올려지는 대표적 이미지는 박정희 시절 국가에서 정한 표준 영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데 이 표준 영정 97위중 14위를 저 세 사람을 비롯한 친일 미술인들이 그렸다. 아이러니한 건 이들이 왜군과 싸운 장군, 일본에 저항한 독립 투사들까지 그렸다는 사실이다.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은 우리 근대 화단의 대표적인 미술인들이다. 월전 장우성은 문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시서화에 능숙, 한국화의 전통에 기반한 이른바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화의 전형이라 할 <승무>, <귀로> 등이 그의 작품이다. 순종 황제 어진을 그린 이당 김은호는 <성춘향>, <논개> 등 근대기 채색화단의 대표적 인물로 한국 미술을 발전시킨 장본인으로 대접받는다. 이당 김은호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민화풍의 과감한 붓질로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그 명성을 알린 그의 작품 세계는 청년기에서부터 만년 걸레 그림까지 한국 미술계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이 만든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린 대가; '채관보국'
이들 인물들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일제 시대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1931년 일본이 만든 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이하 선전)에서 입선을 하며 등장했다. 이어 16,7,8,9회까지 화려한 수상 경력에 40년 추천 작가로 화려한 이력을 채워나간다. 장우성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32년 입선으로 시작하여 전람회 연속 특선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들 두 사람의 스승이기도 한 이당 김은호 화백은 일찌기 1919년 서화협회 회원이 된 이래 1922년 제 1회 선전에서 입선을 한 이래 30년까지 다섯 차례의 입선과 두 차례의 특선을 거치며 명실상부 조선의 대표적 미술인이 되었다. 
 

   

   

 
이렇게 일본이 자국의 문전(문부성 미술 전람회)을 본뜬 선전을 통해 세상에 이름을 알린 이들이 과연 자신들에게 입신양명의 기회를 준 일본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전시 동원 체제가 되었다. 각종 공출과 수탈이 횡행했으며, 학병 등의 강제 징용과 근로 정신대가 본격화되었다. 이때 일본은 전문가들에게 '직역봉공'을 요구했다. 즉 각자의 직업을 통해 나라에 공험을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미술인들에게 요구된 것이 바로 '채관보국', 그림을 그리는 능력으로 나라를 도우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노골적인 친일 작품이 요구되었다. 

김은호는 일본이 직역봉공을 위해 만든 조직인 조선 미술가 협회 회원으로 친일파 귀족 윤덕영의 처가 만든 애국 부인회가 금붙이 등을 모아 일본에 헌납하는 과정을 그린 <금차봉납도>등 친일적 내용을 그렸다. 그런가 하면 장우성은 일본 호국 불교의 수호신인 부동명왕을 친일 잡지에 그리는가 하면 한국인 최초로 1943년 선전에서 국민 예술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고, 미영 연합군에 대항하는 내용의 <항마>로 일본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만든 '결전미술 전람회'에서 입선을 하였다. 운보 김기창 역시 식산은행 사보 표지로 등장한 1944년작 <총후병사>,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의 친일 혐의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친일 인사가 받은 3.1 문화상 
이 당시 김기창이 그린 작품 중에는 1934년 <소국민>이라는 어린이 잡지에 발표된 <적진육박>이라는 작품이 있다. 남양군도 밀림에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군인을 그린 이 작품,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작품의 구도나 설정이 그로부터 30년후 베트남 파병 국군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적영>과 흡사하여 '자기 표절'논란이 일었다. 
이 '자기 표절'의 30년, 거기엔 바로 일제 시대에 이어 해방 후, 심지어 박정희 시대에 까지 승승장구했던 미술인의 초상이 있다. 

지난 주 일제 하 교육 영역에서 친일에 앞장섰던 대표적 인물들이 해방이 되고 자신들의 친일 행각에 대한 반성없이 기존에 일궈놓은 업적과 명망에 기대어 '입신양명'의 길을 매진했듯이, 이들 미술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해방 이후 운보 김기창은 국립 민속 박물관장을 역임하고, 홍대 교수로 부임하여 우리 미술계의 중추가 된다. 김은호 역시 선전을 그대로 뽄따 만든 '국전'의 추천 작가(1949)를 거쳐 국전의 심사위원이 되었으며 196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월전 장우성은 우리나라 미술계를 이끈 서울대 미술학부 교수가 되었고, 역시나 국전의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이렇게 우리나라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된 이들, 여기서 심각한 건 일제에 자의건 타의건 협조하거나 친일에 앞장섰던 이들이 1960년대 다른 상도 아닌 3.1정신 선양에 기여한 인물에 수여하는  '3.1문화상'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건 바로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폐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금관 문화 훈장, 해방 기념 문화 훈장 등을 받으며 대한민국 미술계 원로로 대접받았다. 

 

  

 

친일 미술인에 대한 평가, 그 딜레마 
과연 이 반성하지 않은 친일에 대해 후대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일본이 망할 줄 몰랐다는 서정주의 고백처럼 팽창 정책을 노골화시켜가던 일본의 식민지민에게 일본의 패망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예술로서 국가에 충성한다는 시대 정신을 가진 이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이들의 친일을 그 시대를 살아냈던 고뇌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은호 의 경우 3.1운동 때 독립 신문을 돌리다 핍박을 당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한 전력을 들어, 또한 월전은 적극적으로 친일에 앞장 선 전람회에 참여하지 않는 등  친일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들이 일제에 협조하여 창작해 낸 산물이 일제 하 대중에게 미친 '이미지의 힘'(조각이나 그림을 통해 전한 사상, 즉 일본 군국주의의 전파)이 너무도 심대하며, 그들이 '친일'을 도모하며 부와 명예를 누리는 동안 '독립 운동'에 헌신한 이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 우리 사회에서 누리지 못한, 심지어 빼앗긴 권리와 혜택에 대한 후손에 대한 교훈적 각성을 위해서라도 그들의 친일은 정죄되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현실은 비판조차 여의치 않다. 이들이 일제 하 자신의 업적과 명예를 해방 후로 이어가며 대한민국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고, 이들이 기른 제자들이 우리 미술계를 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 행적에 대한 제기는 '은덕에 대한 배신'으로 취급되며 불이익을 받기가 십상이다. 정부 역시 친일 작가의 표준 영정 문제에 대해 해지할 근거가 없다며 발을 빼고 있다. 3.1운동 100주년 여전히 우리 안의 '친일'의 뿌리는 깊고, 극복은 쉽지 않다. 






by meditator 2019. 1. 12. 04:41

1월 6일, sbs는 임시 정부 수립 100주년을 특집하는 취지에서 <신년 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 전쟁>을 방영했다. 이 다큐가 주목할 만한 이유는 바로 그 주인공이 의렬단이기 때문이다. 이하 다큐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지만 일제 시대 가장 비타협적이고 강고하게 일제에 저항했던 단체, 하지만 우리는 이 단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단체와 그 단장인 김원봉이 우리 독립 운동사의 접혀진 부분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택한 단체이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에게 김원봉은 '나 밀양 사람이오'하던 대사와 함께 등장한 <암살>의 조승우가 분한 역할로, 그리고 또 다른 영화 <밀정>에서 이병헌이 분한 정채산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다가왔다. 그 영화 속 신출귀몰 바람같던 독립운동의 전설 김원봉, 그리고 그가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을 sbs가 복원한다. 

다큐를 연 건 중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오지 태항산맥 그곳 운두저촌에 남겨진 한글 문구이다. 

왜놈의 상관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조선 말을 운두저촌 주민들은 칠을 더하며 지켜왔다. 왜 이곳 주민들은 조선의용군의 저 문구를 지켜주려 했을까? 심지어 나이든 주민들 중에는 조선 의용군의 우리말 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있다. 도대체 이역만리 이 외진 곳에서 조선 청년들은 무엇을 했던가? 그 의문으로 부터 다큐는 시작된다. 

 

 

김상옥의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그리고 다큐는 1923년 경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이 던져졌다. 일제, 그 중에서도 그 폭압적 권력의 핵심부인 종로 경찰서를 공격하다니. 이 사건의 수사를 맡은 미와 경부는 사건의 용의자로 김상옥을 추정하고 그의 주변 인물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왜 김상옥이었을까? 그는 철물점을 하는 상인이었지만, 사실 물산장려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였다. 거기에 명사수에 비호장군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신출귀몰하다는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1920년 미 의원단이 경성을 방문하고 사이토 총독이 이들을 영접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김상옥은 이곳에 폭탄을 던지고자 했다. 하지만 그만 하루 전 예비 검속에 폭탄 등의 다수를 가진 채 걸려 버린다. 비호 장군답게 검거를 피해 잠적했던 김상옥,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에 당연히 종로 경찰서 사건의 주범으로 추정된 것이다. 

그리고 1월 22일 그가 효자동 민가에 숨어있다는 소식을 접한 일경은 무려 김상옥 한 사람을 잡기 위해 1000 여 명을 동원하여 집중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겨우 총 두 자루, 하지만 명사수였던 그는 무려 3시간 동안 일경과 대치했고 총알이 떨어진 걸 확인하고 동지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결을 택한다. 이는 김장옥이란 이름으로 일경과 대치하다 죽음을 맞이한 김장옥의 영화 <밀정> 속 첫 씬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김상옥의 죽음 이후 무려 2달 동안이나 보도 통제를 하며 수사를 하던 일경은 이 사건에서 '김원봉'이란 인물을 찾아낸다. 바로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던 의렬단의 의거였던 것이다. 

 

 

김원봉과 의렬단 
1919년 11월 상해, 조선의 청년들은 비폭력 투쟁이었던 3.1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광복을 이루기 위해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고자 무력을 수단으로 암살을 정의로 삼아 5개의 적 기관(조선 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등) 파괴와 7악(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 수뇌부,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의 제거를 목표로 하여 결성되었다.

그에 따라 앞서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을 비롯하여,
1920년 부산 경찰서장 폭사 사건,
같은 해 밀양 최수봉의 밀양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
1921년 김익상의 조선 총독부 내 폭탄 폭파 사건,
1922년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의 일본 육군 대장 암살 시도, 
1924년 김지섭 일본 천황궁 앞 폭탄 투척 시도
1924년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의 친일파 정갑주 일가족 사살, 밀정 배정자 암살 시도, 일진회 이용구 회장 부상, 봉천성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1926년 나석주의 동양 척식 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 습격 등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미처 알지 못했던 일제 시대 국내 혹은 국외 무장 투쟁들을 벌여왔다. 

혁혁한 활동을 벌였지만 동시에 김상옥, 나석주의  자결, 김병현의 순국, 김광추, 박희광, 김지섭 등의 체포 등을 겪으며 개인적 테러활동에 한계에 도달하고 독립 운동 내에 불기 시작한 사회주의 물결과 함께 의열단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종적을 감춘 김원봉,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6년 중국 남경의 천녕사에서 였다. 

 

 

조선 의용대와 의용군 
개인적인 투쟁을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승화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의 도움을 받아 1932년 조선 혁명 정치 간부학교가 개교되었다. 또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위해 김원봉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국 혁명 엘리트의 산실인 황포 군관 학교에 입교하였다.

1938년 중일 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조선 의용대가 창설, 이들은 조선 민족 해방과 국제적 동맹으로서 중국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2가지 임무를 내걸고 중일 전쟁에서 선전전, 심리전 등을 비롯한 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하지만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 거기에 좀 더 동포들이 많은 지역으로의 투쟁 거점을 옮기고자 하는 열망에 조선 의용대 상당수가 화북으로 옮겨 1042년 조선의용군으로 호가장 전투 등에서 앞서 운두저촌의 중국인들이 기릴 정도로 혁혁한 활약을 보였고 이들의 활약 덕분에 팽덕회, 주석, 등소평 등 중국 혁명의 주역들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한편 남경에 남아있던 김원봉 등은 1942년 중국 임시 정부에 합류 한국 광복군 제 1지대가 되어 조선 진격의 준비를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한다. 

의의와 한계 
다큐는 1919년에  결성한 의렬단의 궤적을 독립운동사의 관점에서 다룬다. 무엇보다 우리 독립 운동사의 존재하지만 말할 수 없었던 영역을 봉인 해제하고자 했던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굳이 조승우나 이병헌이 아니었더라도 영화 <암살>이나 <밀정>에서 등장한 김원봉, 혹은 김원봉으로 추정된 인물의 존재감은 컸다. 하지만, 그 큰 존재감을 가진 인물을 우리는 드러내어 말할 수 없었던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여전히 아쉽다. 다큐는 의렬단의 존재적 계승을 1935년 해체에도 불구하고, 김원봉에 촛점을 맞추어 조선 의용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 서술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전히 우리 독립 운동사에서 딜레마가 되고 있는 '사회주의 노선'에 대해 다큐는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함구하고 있다. 

과연 의렬단과 아나키즘, 그리고 조선 의용대, 조선 의용군과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노선을 분리하여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 다큐는 스스로 자충수를 두고 만다. 다큐에서는 마치 김원봉이 그의 친구 윤세주에게 부탁하여 조선 의용대의 일보를 화북으로 옮긴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이는 엄밀하게 조선 의용군 내 분파적 결정이었다. 즉 국민당 정부와의 협조적 관계를 선택했던 김원봉과, 물론 우리 주민이 많은 만주로의 이주도 있지만 중국 공산당 내 팔로군으로 귀속한 조선 의용군의 행보는 엄연히 다른 길인 것이다. 이들은 김원봉과 이른바 '연안파'로 나뉘어 졌으며  광복군과 북한의 조선 의용군의 모태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이들은 모두 이후 자진 월북이후 숙청이라는 사건을 겪기도 하였다. 과연 역사를 어디까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역사적 행보에 대한 과욕이 겉훑기식으로 마무리 되었다는 점에서 아쉽다. 

이러한 객관적 사상적 궤적에 대한 사실을 드러낼 자신이 없었다면 차라리, 1920년대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폭력 투쟁의 의렬단만을 충실히 다루었다면 어땠을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실하게 했다면 다큐의 한 시간을 채우고도 넘쳤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렬단의 독립 투쟁>은 의의와 한계를 가진, 어쩌면 일제하 독립 운동사에 대한 방송의 과제를 남긴 시간이 되었다. 


by meditator 2019. 1. 7. 16:44

<다큐 시선>은 삼일운동 100주년,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곁의 친일 잔재 3부작을 마련했다. 1월 3일 방영된 첫 번 째 친일 잔재는  '교육'이다. 

지난 2014년 2월 미쓰비시 근로 정신대 피해자 네 분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에 동참한 반인도적 행위까지 일일이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포함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 계속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재판의 결과 이행을 지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12월 5일 대법원 앞에는  근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 모임 사람들과 함께, 91살의 김정주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중학교에 보내준다 하고 일본의 공장으로 보낸 선생님들 
김정주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무렵 중학교를 보내준다는 담임과 교장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갔다. 놀라운 건 이제 81살 된 여동생 김성주 할머니 마저 언니처럼 동생을 꼬드겨 근로 정신대로 보냈다. 후지코시에 강제 징용된 동생 김정주 할머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장과 기숙사 생활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배가 너무 고파 기숙사의 이름모를 푸른 풀들을 뜯어 먹어야 했던 시간, 지진으로 다리를 다치고 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채 돌아온 고국, 하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은 파탄났다. 

이 두 어린 여학생에게 상급 학교를 미끼로 일본 행을 권했던 건 75년전 순천 남초등학교의 오오가끼 선생님, 근대화된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이제 곧 만주, 중국 등을 손아귀에 넣어 대동아 공영권의 주인이 될 일본 밑에서 식민지인 게 , 2등 국민이라도 하는게 행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벌이는 성전과도 같은 전쟁에 기여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교장은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논리를 설파했을 것이다.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선 민족 교육의 선각자들 
그런데 당시 일본인 선생님만이 그랬던 게 아니다.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은 우리 말과 글을 못쓰게 하고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황국 신민 서사를 강요 하는 등 새로운 식민지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는 전쟁으로 가는 일본의 체제에 식민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의 변화였다. 이어 1943년 교련 등 군사 교육 분야를 도입하는 등 지원병과 학도병에 맞는 교육을 변질시켜 나갔고, '일한 병합'의 취지로 한국, 한국인, 한국 역사, 한국의 문화 모든 것을 '폐멸'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교육, 식민지 정책에 우리의 교육인들이 동조를 넘어 앞장섰다. 

의친왕에게서 하사 받은 땅에 추계 학원을 만든 황신덕은 1937년 중일 전쟁 직후 김활란 등 대표적인 사학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전쟁 지원 단체에 가입하여 근로 정신대를 독려하는 선동을 하고 글을 썼다. 

더 충격적인 건 민족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인촌 김성수의 다른 선택이다. '조선의 징병령 쾌보는 실로 반도 2천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등등 1942년 이후 총독부 기관지를 비롯 여러 신문에 학도병 독려의 글을 쓰는 등 친일에 앞장 선 것이다. 

이화 여전을 세운 김활란, 지금의 서울 음대 전신인 경성 음악 전문 학교를 세운 현제명 등 민족 교육의 대표자들은 일제 말기 얼굴을 바꾸고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 섰다. 

 

 

물론 이들의 변절에 대한 변명도 있다. 황신덕의 경우 1927년까지 근우회를 조직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 섰고, 인촌 김성수의 경우 변절을 한 1930년대 말까지 25,6년간 민족 교육의 거두로 헌신해왔었다는 점이다. 학교와 신문사, 경성 방직을 지키고자 하는 시대적 고육책이었음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변절보다 그 변절을 덮고자 했던 이후의 행동들이다. 친일에 대한 반성과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포에 대한 사죄는 커녕 해방 후 반공주의 정권의 기득권으로  자기 보전에 연연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고대 앞의 거리는 인촌로이고, 대법원 판결로 서훈이 박탈된 현재에도 고려대학교 인촌 기념관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추계 학원에도, 고려대학교에도 여전히 황신덕과 김성수의 동상은 세워져 있다. 

이런 민족 사학의 결과물로 인한 소송과 분쟁도 이어진다. 최근 연극계의 화두는 남산 드라마 센터가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학도병 지원은 물론, 만주 한인 이민 등을 적극 권장했던 대표적 친일파 동랑 유치진, 그 역시 해방후 반공주의 정권과 결탁하여 미군정 귀속 재산을 불하받아 그 자리에 남산 드라마 센터를 지었다. 귀속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어야 한다는 법에 의거 더 이상 유치진 일가의 남산 드라마 센터, 서울 예대 소유는 불가하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역시나 대표적 친일파 민영휘가 만든 휘문고는 상속되며 족벌 사학이 되었고 최근 사학재단 임대 보증금 횡령 사건 등에 휘말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제 하 민족 사학들 중 상당수가  일제 말 자신의 재산과 직위를 보전하기 위해 '친일파'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명목이야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교육을 보전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를 위해 그들은 비행기를 헌납했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심지어 내선일체의 선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그런 과오에 대한 반성과 속죄의 시간은 없었다. 대신 해방 이후 미군과 정권에 유착하여 다시 한번 기득권이 되어 이제 ''족벌 사학'이 되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가는 이 '단죄되지 않고 속죄하지 않은 시간'이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이 되었다. 

일제 시대 교과서 속 식민지 교육 
이렇게 교육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결국은 '변절'로 그들의 선각자적 활동을 얼룩져버리는 동안, 교육이라고 달랐을까. 전남대 일문과 김순전 교수는 식민지 시절 교과서를 번역하여 식민지사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저 두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두 친구가 일본인이고 한국인인 한 달라진다. 수례를 끄는 일본인과 미는 조선인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주도적인 일본인과 수동적인 한국인 상이 은연 중에 교과서 곳곳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 교육은 보다 고등적 암시가 담겨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설명하되 갈등 구조를 더해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라거나, 박혁거세, 석탈해가 일본에서 왔다는 식으로 하여 일본과 한국이 원래 하나 였으며 나뉘어 졌던 것이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내선 일체론', '동화론'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 사학 논쟁 
1925년 자국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만든 일제, 37년 조선사 편수회가 만든 조선사가 편찬된다. 식민지적 관리 방식으로서의 조선 역사이자, 역사적 자료의 독점, 관리 체계 정립을 이룬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의 지방사로,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지배 논리가 관철된 역사로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에 의한 역사, 그 그림자는 생각 외로 길다. 지명으로 압록강은 두 군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랴호허 강의 지류인 압록강(鴨淥江)이 그 둘이다. 고려 역사 속 강동 6주가 있는 곳을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으로 역사 책은 기술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는 이의를 제기한다. 외려 중국의 역사서 등을 조사해 보면 후자의 압록강이 더 맞고, 그에 따르면 고려가 세운 천리장성의 위치도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윤관의 9성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위치가 아닌 '두만강 너머 700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연구소 측은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인하대 연구소 등이 주장하고 있는 건 지금의 역사서들이 일본의 실증사학자 쓰다소키치의 제자인 이병도가 만든 진단학회에 의한 교과서가 가진 식민지 사관의 흔적들을 지우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이병도의 제자들, 그 학파에 의한 한국사관의 점령, 이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학계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 만큼이나 어려운 숙제라 입을 모은다. 
 

 
카톨릭 대 기경량 교수는 일제 시대 펴낸 조선사는 하나의 사료집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식민주의적 흔적은 극복해야 하지만 그 사료집에 불과한 조선사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는 건 또 하나의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라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김세연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 역시 주류는 잘못됐고 비주류는 옳다는 흑백 논리를 경계한다.  과학의 발달에 근거하여 탄소 동위원소 등 고증학적 관점에서 학문적 공론의 장이 펼쳐져야 하며 정치적 목적의 왜곡을 우려한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는 일본이 만든,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만든 역사의 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혹은 각각의 사관에 따라 역사학계는 나뉘어지고 학문적 공론의 장을 통한 진솔한 토론과 합의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교과서 개정 때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by meditator 2019. 1. 5. 04:50

2018년 가계 부채 1500조가 되었다. 한 가구당 7,022만원인 셈이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봤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울리는 대출을 해주겠다는 각종 정보성 알림들, 우리는 어쩌면 24시간 빚의 유혹 속에 놓여있다. 대학에 들어가서 학자금 대출, 결혼을 하며 집 장만을 위한 융자,  그리고 나이가 들어 사업을 하기 위한 대출 등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빚은 우리 삶의 '레버리지(지렛대)'가 되고 있다. 긍정적으로 정의하자면 빚은 소득, 수입이 발생하는 시점과 돈이 필요한 시점 간의 갭을 미래 소득이나 수입을 담보로 미리 당겨서 쓰는 유용한 수단이다. 하지만, 그 '긍정'적 수단의 증가폭이 심상찮다. ebs다큐 프라임은 지난 12월 3일 부터 <부채 사회>, <빚의 역습>, <미래의 빚> 3부작으로 <경제 대기획 빚>에 대해 다루며 급증하는 우리 사회 빚의 현실과 대안에 대해 고민한다. 
 


부채사회
한 가구당 7000만원이 넘는 가계 부채라지만 빚에 대한 각자의 입장과 태도는 각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만화 작가인 허안나씨는 대학 1학년 2학기부터 받았던 학자금 대출을 졸업과 동시에 갚지 않으면 월급에서 원천징수하겠다는 문자를 받고서야 비로소 그 무게를 실감했다. 그리고 '만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담보로 잡고 대출을 갚기 위해 직장을 10여년간 다녀야 했다. 

최춘근-박금순씨 부부는 빚 권하는 사회의 천연기념물 같은 부부이다. '저축 장려 시대'를 살아온 부부는 융자 없이 당시로는 1억 2천만원 짜리 집을 사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그런데 이제 빚없이 살아온 삶에 대해 부부와 자녀의 생각은 '다시 태어나도 빚을 지지 않겠다'부터, '그 돈이었으면 사업적으로 투자를 해서 더 큰 이익을 보았을 텐데', 그리고 '내 돈 대신 할부로 차를 사는게 편하다'까지, '동상이몽'이다.   

그런가 하면 택시 운전 25년차의 김강수 씨에게 '빚'이란 어쩌면 불가능했을 지도 모를 그의 재산 목록 1호 택시와 집을 가지게 해준 고마운 수단이다. 2700만원을 대출 받아 개인 택시를 사고, 그 빚을 3년만에 갚았고, 15년거치 주택 대출은 아직도 한 달에 70만원씩 갚고 있지만, 그 빚이 없었다면 택시를 사고, 집을 가지는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한 술 더 뜨는 경우도 있다. 부동산업자 박정수 씨는 빚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케이스다. 수원에만 150채, 전국적으로는 300여 채, 거기에 아내 소유의 300채를 더하면 600여 채의 아파트를 소유한 그는 자기 돈 18억에 1300억의 빚을 사업의 동력으로 활용한 케이스다. 이렇게 박정수 씨처럼 '사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집을 가지기 위해 월세을 적극활용하는 케이스도 있고, 편의점을 하는 이우성 씨처럼 이율을 활용하기 위해 부채 상환을 미뤄두고 있는 경우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깨를 짖누르는 무거운 짐, 또 누군가에게는 기회, 혹은 삶을 업그레이드 시킬 지렛대, 심지어 사업 수완이 되는 빚, 저마다 각자 다른 이유로 빚을 지는 것이 이상해 지지 않은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빚의 역습
그런데 빚은 참 묘하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는 학생들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경매에 돈을거는데 묘하게도 현금과 카드의 금액이 차이가 5~10% 정도 차이가 났다. 3개월 할부를 염두에 두었다고도 하지만, 사람들은 '외상'일 경우 더 쉽게 돈을 쓰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현금으론 까다롭던 사람들이 분명 자신의 돈이 지불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카드 등 빚의 경우 한결 조건에 있어 너그러워진다. 그리고 물건을 파는 회사들은 이런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다. 요즘 트렌드가 되는 정말 무이자가 아니라, 할부를 할 것을 감안하여 이미 애초의 가격이 높게 책정된다는 '무이자 할부', 하지만 사람들은 그 문구에 쉽게 지갑을 연다. 

이렇게 빚에 너그러운 사람들, 심지어 사람들의 경우 빚을 지고도 무감각하다. 지금 당신의 빚이 얼마입니까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을 사거나 사업을 하기 위해 은행권 등에서 빌린 돈의 금액을 댄다. 하지만 할부로 산 핸드폰, 집안을 온통 채운 가전제품, 마이너스 통장, 심지어 아직 고지서가 날아오지 않은 이번 달 카드 요금에는 무감하다. 자동차는 어떻고. 이렇게 사람들은 빚을 지고서도 빚에 무감해져 간다. 

 

 

그럼에도 무던해 질 수 없는 것이 그 중에서도 주택 대출 등이다. 무리해서라도 빚을 내서 집을 사놓아야 한다는 의식은 1936년 이래 한번도 떨어진 적이 없는 부동산 대한민국을 사는 사람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969 강남 개발 시작, 1977년 반포 2단지, 압구정 현대 아파트로 부터, 여의도 목화 아파트 분양은 45;1의 경쟁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첨만 되면 웃돈이 얹어지고 순식간에 3배로 뛰는, 심지어 한 해 40%가 오르기도 했다는  '신기루'같은 시절에 그 누가 그 한 '몫'에 뛰어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건 IMF때 까지였다. 그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부동산 신기루에 뛰어든 가족의 허망한 역사를 마민지 감독은  <버블 패밀리>를 통해 실감나게 설명한다.  50%의 융자를 받아 집 장사를 했던 마감독의 어머니, 아버지는 IMF 후 금리 인상을 감당하지 못했다.  땅을 사서 집을 지어 건물세를 받자는 부모님, 여전히 그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신다. 

IMF를 지나 2008년 부동산 불패 신화는 다시 한번 이자 폭탄을 맞고 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하우스 푸어', 일산에서 6천만원으로 분양을 받아 그걸 다시 1억 4천에 팔고 하는 식으로 집으로 돈을 좀 만졌던 이동훈 씨, 2008년 당시 10억을 빌려 13억 짜리 집을 샀다. 하지만 부동산 시세가 폭락하여 10억에 그 집을 팔아야만 했고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부동산 버블'이 낳은 결과다. 

이런 '부동산 버블'이 가져온 파산은 우리나라만의 사례가 아니다. KDI 박정호 교수에 따르면 도쿄에는 한때 평당 100억 짜리 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을 넘어 하와이와 미국으로 까지 번져 비행기를 타고 돌아다니며 그럴 듯한 녹지를 사들이는 식의 부동산 열풍이 불었다고 한다. 하지만 91년에서 2005년까지 무려 15년간의 경기 하락 과정에서 오피스는 40%, 주택은 반토막이 되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사들였다는 미시시피 주 경우 카타리나가 강타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최근 역사에서 부동산 버블과 관련하여 전세계적으로 충격적 교훈의 사례가 된 건 뭐니뭐니 해도 미국 서브 프라임 사태이다. 집값의 1%만 내도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구조, 2000년대 초저금리 상황에서 넘치는 유동 자산이 신용도가 취약한 서브 프라임 계층에게 까지 대출이 됐다.  이 대출을 받아 대규모로 집에 투자를 하며 생겨난 부동산 버블, 결국 2004년 이자율이 오르자 결국 원금과 이자 등 집값을 갚지 못해 파산에 이르른다. 그 '파산의 도미노'는 158년 전통의 리먼 브라더스를 비롯한 금융권으로 이어지고, 미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까지 흔들었다. 

고스란히 채무자에게 짊어지는 부담, 하지만 문제는 채무자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채무 불이행은  그 지역의 소비 생활을 위축시키고, 이는 주변 산업 도시의 불황으로 이어지면 부메랑처럼 나라전체에 번져나간다. 즉 부채 디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서브 프라임 사태 이후로 10여 년 캘리포니아 스톡튼 거리에는 여전히 방치된 집들이 남아있고, 상권은 회복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 사태를 겪은 미국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미국 전체의 경기는 좋아졌을 지 몰라도 개인의 고통은 진행중이라고. 

 

 

미래의 빚
그렇다면 빚으로 인한 개인의 고통, 그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지난 10월 27일 서울 청계천에서는 쥬빌리 은행의 10년 이상된 연체 채권 소각 행사가 이루어 졌다. 3개월이 지난 부실 채권은 그 원금의 10%가 안되는 가격으로 추심업체로 넘어가고 그때부터 빚을 갚지 못하는 개인의 지옥같은 고통은 시작된다. 바로 이런 채권, 그 중에서도 10년 이상된 죽은 빚을 탕감해주는 행사. 하지만 빚의 탕감에는 도덕적 논의가 따른다. 

유엔에서는 개도국 등에서 빚을 갚지 못해 노예와 같은 삶을 누리는 일회용 사람들이 있다고 선포했다. 이런 위험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파산'이다. 1962년 법적으로 파산이 명문화되었지만 우리 사회에서 첫 번째 파산자가 등장한 건 IMF 때인 1997년에 이르러서 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파산은 쉽지 않은 결정이다. 법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도덕적 해이, 하지만 빚을 졌어도 아이를 교육시키고 멀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자는 것이 '파산'의 취지이다.

빚을 진 상태와 빚으로 부터 자유로운 심리 상태 사이에 인지적 능력조차 차이가 나는 부담, 다큐는 여기서 역설적으로 빚은 그렇다면 채무자만의 책임인가를 반문한다. 즉, 현재의 신용 평가 제도는 공정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3년전 처음 하는 사업이라 은행권 대출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사업을 시작한 사장님, 다행히 사업은 궤도에 올랐지만, 카드 연체가 없는데도 2년 8개월동안 겨우 신용 등급이 한 등급만이 올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기존의 신용 평가 방식, 지금까지 잘 갚았으니 다음에도 잘 갚을 것이라는 전통적 방식은 주부나 사회 초년생, 신생업체 등 정작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각 지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손길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미국에서 13년전 은퇴한 간판 디자이너 채스 페리씨, 아들과 함께 다시 한번 사업에 도전하고자 했지만 그 역시 신생업체라는 조건이 은행 대출의 발목을 잡았다. 채스 페리 씨에게 희망을 제시한 건 대안 금융이었다. 기존의 은행권이 카드 사용 빈도 수 등 구식 알고리즘에 근거하여 신용 평가를 한 것과 달리, SNS를 통한 홍보 등 사업 활동 내용을 '핀테크(금융과 IT의 융합을 통한 금융서비스 및 산업의 변화)'에 근건하여 새롭게 평가받아 사업 자금을 대출 받은 것이다. 

이런 방식은 어떨까? 미국의 클라크슨 대학교에는 리사 프로그램이 있다. 졸업 후 직장을 찾는 시간으로 6개월 동안 학자금 상환을 유예한 후 취업 후 세금 신고서를 제출하면 그때부터 10년간 갚는 방식이다. 그런데 취업한 학생들은 모두 소득의 6.2%를 갚는다. 즉, 많이 버는 학생은 많이, 적게 버는 학생은 적게, 학자금 상환이지만 그 자체가 졸업생 기부 활동이 되며, 빚에서 새로운 소득이 창출되어, 장학금이 만들어 지는 제도이다. 

이런 방식을 우리의 채무 관계에 적응해 보면 어떨까? 금리나 높건 낮건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는 지금의 방식에 채권자가 그 부담을 나누어 져 금리에 따라 채무 비율이 달라진다면? 모두가 100%는 아니지만 조금 더 만족할 수 있는 방법에 다가가는 건 아닐까? 가계 부채의 부담이 사회적, 국가적 부담이 되고 있는 시대, 과연 그 부담은 온전한 것인가? 신용의 사각 지대에 놓은 사람들을  2금융, 사금융으로 내몰고 있는 제도로 부터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신용 평가 제도는 무엇일까? 다큐는 모두가 만족하는 빚의 가능성을 열어보이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9. 1. 4. 05:36

과연 올 한 해 가장 화제가 된 이슈는 무엇이었을까? 세밑의 sbs스폐셜은 그 주제를 2018년의 시작을 떠들썩하게 시작하여, 귀신처럼 사라져 버린 열풍, 암호 화폐, 비트코인 열풍을 추적한다. 

안하면 바보였다. 누구라도 발 빠르게 시작한 사람은 돈을 만졌다는데, 몇 분 만에 일확천금을 벌었다 하고, 그 돈 번 '인증샷'이 빈번하게 올라왔던, 곧 더 이상 우리가 쓰는 지폐나 카드 대신 새로운 금융 시스템과 화폐 질서가 등장할 것이라던 전망이 등장하고, 혹여 나만 그 빠른 물결에 뒤처져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자조적인 생각을 한 게 엊그제 같았는데, 2018년이 저무는 이즈음 그 열풍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마치 '볼드모트'처럼 게눈 감추듯 사라져 버린 열풍, 그 많던 돈 벌었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큐는 그 '돈 벌었다던'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젊어 투자라는 닉네임을 가진 문주용 씨, 비트코인 데이 트레이더인 그는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낸바 있는 이른바 슈퍼 개미다.  3000만원으로 시작하여 한 때는 2분 만에 4000만원을 벌기도 했던, 그게 아니라도 1억 5천만원을 들여 장비를 갖춰 이른바 '채굴(거래 내용을 암호화한 걸 수많은 수의 조합을 맞춰 풀어 그 보상으로 비트코인을 얻는 방식이 금을 캐는 방식과 유사하다 하여 붙인 이름)'을 해서 순수익이 1억이 넘게 벌었던, 그랬던 그도 연일 계속되는 하락장에 맥을 못춘다. '채굴'을 위해 갖췄던 장비도 전기세를 감당못해 처분했다. 그도 말한다. 정작 수익을 냈다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고. 대신 돈 잃었다는 사람들만 난무한다고. 

일확천금에의 일장춘몽
2009년 1월 처음 등장한 암호 화폐 비트코인, 그로 부터 10년 만에 2000%나 상승했다. 비트코인이 오르자 다른 코인들도 더불어 들썩였다. 하루에 300에서 3000%까지 상승하며 하룻밤에 수억을 벌었다는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인증샷'을 올리자, 대출받아 뛰어든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때 뛰어든 대학생 3인이 있었다. 이성묵, 김동운 등,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 주식 시장과 달리 24시간 장이 열리는 암호 화폐 시장, 쉽게 접근이 가능한 그곳에 젊은 층과 초보 투자자들이 열광했다. 중독성이 강한 그 시장,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않는 그들은 비트 코인을 '내 손안의 카지노'라 정의내린다. 

그 '내 손안의 카지노'에서 일장춘몽을 꾼 사람이 있다. 보험을 해약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어 뛰어든 차형민 씨, 일주일만에 다섯 배를 벌고, 4억 가까이 수익을 냈다. 이게 '로또'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꿈은 2주만에 끝났다. 1억이 759만 원이 되어버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비트코인으로 수억을 주무르던 그는 1억의 손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1억을 잃고 은행에서 독촉전화를 받는 지금에서야 자신이 꾼 게 일장춘몽이었음을 실감한다. 

27살의 김민석 씨는 1년을 뼈빠지게 고생하여 7천만원을 벌고, 그 돈을 1년만에 다 날렸다. 돈만 날린 게 아니다. 삶의 의미도 잃었다. 33살의 나민영 씨는 수익이 생길 때마다 현금화하여 시계니. 차니, 카메라니 '소확행'을 즐겼다. 하지만 잠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초조함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외줄타기'하는 기분이라 호소한다. 

 

 

비트코인이 뭐길래? 
지금까지 거래는 '은행'이라는 기관을 통해서만 이루어져 왔었다. 이런 중앙 집중 기관 없이 시스템에 참여하는 사람들끼리 공동으로 거래 정보를 기록 , 검증, 보관하는 4차 산업 혁명의 핵심인 '분산 장부' 기술을 '블록 체인;이라 하고, 이 블록 체인에 참여하는 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암호 화폐'이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올 한 해 우리나라를 들썩이게 했던 '비트 코인'이다. 

비트코인 열풍에 발맞춰 지난 1월 18일 jtbc 뉴스룸에서는 유시민,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 등을 초빙하여 토론을 벌였고 이 토론 자체가 비트 코인 열풍과 함께 화제가 된 바 있다. 일찌기 유시민 작가는 tvn의 알쓸신잡에서 비트코인 열풍을 17세기 튤립 버블의 21세기 글로벌 버전이라 정의내린바 있다. 실물 경제를 잘 모르는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낸 아이디어에 전 세계 사기꾼들이 다 모여들어 장난을 쳐서 돈을 뺏어먹는 과정에 불과하니 정부가 나서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단정지었다. 

그런 유시민 장관의 의견에 궤를 같이하듯 그로 부터 1년여 12월 15일 정부는 가상 화폐 실명제 추진을 밝히며 시세 조작 자금 세탁 탈세 등 거래 관련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검찰 경찰 금융 당국의 합동 조사를 통해 엄격히 대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홍익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인 홍기훈 씨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믿음에서 시작된 버블에 불과하다며 유시민 작가의 의견에 동조한다. 이리저리 포장하지만 결국 고위험, 고수익의 고변동성 전자 자산에 대한 투기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당연히 도박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런 홍기훈 교수의 의견은 비트 코인 거래를 하는 대형 거래소의 속임수 등의 범법 행위로 증명된 바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 대형 거래소는 승인받지 않은 코인을 상장하고 그걸 자신들이 샀다 팔았다 사는 방식으로 가격을 올려간다. 그 상승세에 투자자들이 몰리면 한번에 팔고 사라지는 '먹튀'를 하고 그 손실은 고스란히 개미 투자자들 몫이 되고 만다. 지금 현재 우리나라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거래소만 100여개가 넘지만 심사나 허가가 없으며, 규제조차도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이른바 '먹튀'는 비일비재하다.

5억만 있으면 만들 수 잇는 거래소, 이렇게 위험 요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 수 있다며 투자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든다. 실패했던 사업을 만회하기 위해 뛰어든 이성규 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부동산의 100배, 1000배를 벌수 있다며 그를 유혹한 건 다른 곳도 아닌 보물섬 인양 해프닝을 벌여 투자금을 모아 '먹튀'했던 신일 그룹이 모태가 된 신일 골드 코인, 얼마되지 않는 투자금에 대번에 감투까지 씌워준 그룹에 이성규씨는 헌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결과 그는 떼인 돈을 어떻게라도 일부라도 받아내기 위해 사라진 코인 업체의 주소를 수소문하여 이리저리 헤매이는 중이다. 이성규씨와 같은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30만원을 출금하는데 50억의 수수료를 떼는 비현실적인 조항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덥석 뛰어드는 사람들에게 가상 화폐 시장의 봉이 김선달들은 활개를 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온라인에서 이루어지는 가상 화폐 사업에 감투를 쓰고 오프 라인에서 투자자를 모으는데 앞장서는 이성규 씨 등처럼 자신들이 피해자인 줄도 모르는 채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

신기술 vs. 사기성 도박
과연 지난 1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튜브에서 암호 화폐 인플루언서(influencer영항력을 주는 개인)로 활약하는 황규호 씨는 현재의 암호 화폐 시장을 피바다라 정의내린다. 하지만 그는 장기적인 기술의 가능성을 믿는다며 자신의 신념을 접지는 않았다.  

신기술에 대한 믿음과 일확천금의 비현실적인 사기성 도박이라는 두 의견이 팽팽한 상황, 1월의 토론에서 유시민 작가에게 완패를 당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았던 정재승 교수, 하지만 그는 지난 12월 29일 중앙일보 칼럼 '4차 산업 혁명은 어떻게 오는가'를 통해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펼친다. 

'내년에 전 세계적으로 블록 체인과 암호 화폐에 기반한 생활 체감형 서비스가 등장할 것이다. 제도적으로 이를 준비하지 않으면 혁신의 열매을 만끽할 기회를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된다. 지금처럼 거래소를 겁박만 하지 말고, 블록 체인 회사들이 혁신에 도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정재승 교수도 국민들이 큰 피해를 보지 않도록 거래를 투명하게 할 수 있는 관리 제도와 규정 등 발빠른 대처가 필요하다는데 이견은 없다.  즉 비트코인 등 비정상적인 가상 퐈혜 광풍은 제어하되, 블록 체인 기술은 암호 화폐 뿐만 아니라, 전세계 경제, 금융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올 중요한 기술이므로 적극적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블록 체인 선구자 박창기 씨 역시 회의적인 의견에 99년에 인터넷 버블이나, 2008년 부동산 버블처럼 2018년의 비트코인 버블은 신기술의 통과 의례라는 입장이다. 과도하게 투자되었다가 거품이 꺼지면 그때 비로소 새로운 금융 제도가 만들어 질 꺼라는 낙관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현실은 기술에 대한 긍정적 접근보다는 일확천금을 노린 맹목적 투자와 그로 인한 피해의 '버블'이다. 이에 중앙일보 고성일 기자는 암호 화폐로 인한 부작용이 계속 되풀이 되는 이유를 '비트 코인'처럼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심리에서 찾는다. 그리고 그 '심리'는 어쩌면 바로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심리이기도 하다. 전후 똑같이 못먹고 못살던 시절, 그 중 누군가는 더 열심히 일해서가 아니라, 더 좋은 줄을 잡아서, 더 좋은 껀수를 잡아서 돈을 벌었다고 생각하는 사회, 부동산 투기를 통해 일궈진 부의 역사, 투자라고 쓰고 투기라고 읽지만, 기꺼이 그 '투기'의 기회를 잡지 못한 게 무능이 되어버린 사회, 그 역사를 보고 배운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는 흙수저를 면치 못할 거 같아서 시작했다는 데이 트레이더의 자조적인 한 마디, 과연 이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돈밝히는 책읽기>와 같은 돈공부, 마음 다스림을 통해 그 광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8. 12. 31. 12:27

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언니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딸내미 시집 보낼 걱정을 만날 때마다 한다. 심지어 서른을 넘어서면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할 테니 알아서하라고 엄포까지 놓았단다. 하지만 웬걸 언니가 목을 매는 그 딸내미는 엄마의 마음이 무색하게 당장 결혼 생각이 없단다. 심지어 사촌 동생이 해주겠다는 소개팅도 단칼에 자른다. 아직 남자 만날 생각이 없단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등등등 조카의 눈이 높아서일까? 엄마랑 동생이랑 시간 날때마다 여행 다니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서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이른바 '결혼 적령기'라는 어른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 '프레임'에 자신을 꿰어 맞추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 그래서일까? 조카처럼 '비타협적 저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정하고 '결혼'을 안하겠다고 한다. '비혼주의자'이다. 

 

 

얼마전 동창 모임, 이제는 늙수구레한 나이에 아이들 결혼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결혼 하기 힘든 세상의 이야기가 오가다 요즘 결혼하지 않겠다는 아이들이 화두에 올랐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우리 집 얘기다. 하지만 아이들을 애써 키웠고,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를 기르는 일만큼 가치있고 보람있고, 행복한 일이 없다며 자신은 아이들에게 결혼하고 아이도 낳으라고 하겠다고 한다. 설왕설래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우습다. 우리 아이들의 삶인데, 마치 우리들의 인생인 것 마냥 진지하게 서로의 입장을 내세웠던 것이. 그렇다 어쩌면 우리 사회 '비혼'이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우리처럼 아이들의 삶인데, 그 삶에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빠의 오지랖, 딸의 비혼 선언, 그 세대적 간극
다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으로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번듯하게 삼남매를 키워낸 오현춘 씨(50), 어려운 인생 고비고비에서도 가족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게 그의 자부심이듯 당연히 '결혼'을 인생의 통과 의례로 여긴다. 그런 그이기에 이제 26살, 결혼 적령기가 된 큰 딸에 대한 고민이 크다. 하지만 웬걸 오화진씨는 그런 아빠의 요구에 '나 결혼 안해'란다. 청천벽력이다. 

화진 씨는 자신은 비혼주의자라 선언한다. 물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라났지만, 자신이 자라오면서 본 어머니의 삶은 늘 가사 일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건축 구조사로서 자신의 일에서 경력 단절을 가지고 싶지 않은 화진씨, 어머니가 일궈낸 가정을 꾸려나갈 자신이 없다. 아이는 입양 등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지만 남편과 시댁이 그녀의 삶에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은다. 

그런데 그런 화진씨의 생각에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동조한다. 사랑에 빠져서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서두른 결혼, 남편은 이혼이 여사인 세상에 이혼하지 않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 자랑이지만, 화진씨의 어머니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결혼하지 않을 꺼라 '후회'의 념을 꺼낸다. 

 

 
비혼 권하는 사회
'비혼'을 선택한 여성들이 그 이유로 든 건 크게 두 가지, 우리 사회가 경력 단절 여성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가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것과, 또 하나,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100 명의 인간 관계를 감수해야 하듯,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이 받아들여 할 '시댁' 등의 새로운 인간 관계를 굳이 감당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남자라고 다를까. 분양을 받은 아파트에 개를 몇 마리 더 들여놓을 지언정 여자 사람을 들여놓을 생각은 없다는 남성은, 이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그런 결혼식 자리마다 넌 언제 결혼하냐는 친구들의 인사가 번거롭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상 결혼을 한 친구들, 주변 남성들이 그의 눈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과 아이의 생산이 '애국'의 문제로까지 격화되며 '세대 갈등'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이 즈음, 어른들은 태연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사람의 도리'라 하지만 젊은이들은 단호하다. 그저 결혼은 삶의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삶만을 '정상'으로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문제라고. 

우리 사회의 결혼 제도는 외적으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개인적인 결합으로 정의내려지지만, 막상 그 과정에 들어서면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결혼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전혀 새로운 한 집안의 조직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2018년의 '현대'를 살지만, 사회의 기본 단위는 여전히 '가정', 심지어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발언권이 고양되었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근간은 공고하다. 그러기에 엄마들은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는 이렇게 살 필요가 없다 하고, 딸들은, 아들들은 엄마처럼, 아빠처럼 살 자신이, 아니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결혼 비용이 '2억'이니 하는 세태에, 한 가정을 이루는 데 드는 '비용'이란 측면에서 젊은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은 더더욱 결혼이란 제도를 버겁게 만든다.  제 아무리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이미 출발부터 부모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고 시작하는 결혼 생활에서 과연 얼마나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 지자체마다 아이를 낳으면 레이스를 벌이듯 아이를 낳으면 돈을 얼마를 주겠다고 하지만, 당장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의 하소연은 나아질 길이 없는 사회, 하나는 겨우 낳지만 둘을 낳으면 미친 짓이라는 워킹 맘의 하소연이 울리는 세상에서 과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무모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해마다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가 되는데, 그런 학습 효과를 겪은 젊은이들이 굳이 그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혼, 존중받아야 할 권리 
그러저러한 이유로 결혼을 굳이 선택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삶의 하나의 선택지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결혼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비정상'으로 낮잡아 보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인간의 삶을 동물의 번식과 동일시하며 가임 연령 내의 결혼을 안하기라도 하면 금단의 선이라도 넘은 듯이 여기지 말아달라 한다. 

결국 '비혼주의'는 어른 세대가 일궈오고 가꿔왔던 '가족 신화'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과연 한국 사회 내에 안전판이자, 유일무이한 보호막이었던 '가족'이란 제도가 오늘날 유효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거기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정상적이라 쓰고, 가부장적 가족 제도라 읽어지는 그 '가족' 제도에 대한 반기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면 또 다른 집안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그 공동체적 삶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출산의 숫자만을 고민하는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이 내놓은 답안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획일적 삶'만이 정답이 되어온 대한민국이란 체제에 대한 거부이다. 

그러기에 왜 결혼을 안하냐고 다그치기 이전에, 어른 세대가 만들어 놓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것이 먼저가 될 것이다. 애국 운운하며 결혼은 천부적 권리며 의무이며 행복이라고 해봤자,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취급만 받을 뿐이다. 

지구 인구가 72억을 넘어서고 있다. 이번 세기 안에 40억이 더 늘어날 것을 전망하고 있다. 과연 지구는 이런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까? 국제 생태발자국 네트워크에 따르면 프랑스 인 정도의 삶을 유지하며 살려면 30억 명이 적정 인구 수준이라 한다. 미국인이 수준 정도는 40억 명,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려면 22억 정도란다. 그렇게 지구 포화, 혹은 폭발이란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오늘날 '비혼주의자'들은 인간의 숙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하나 낳아 잘 기르자'와 '셋이라서 행복해요' 사이를 오가는 정책의 변덕이 문제일 뿐. 

by meditator 2018. 12. 24. 13:32

내가 힘들고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아 비슷한 처지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게 솔직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른바 '동병상련', 저러고도 사는데, 혹은 나와 비슷하다는 연민으로 뜻밖에도 내 삶을 버텨낼 에너지를 얻는다. 얍삽하다고? 아니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온 '인간'이기에 불가피한 감정이라고 하는게 더 맞다.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류적 존재인 우리들은 그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늘 나보다 잘 살고 있다면, 내 삶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 터이니. 그러기에 '성장 시대'를 일궈낸 '부모' 세대는 이미 그들보다 더 잘살기 힘들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확증된 '자식'세대에게 어쩌면 '넘지 못할 산'과도 같은 부담일 뿐이다. '거산'에 막히고 전쟁과도 같은 현실속에서 버둥거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 뜻밖에도 이들이 '공감'을 길어올린 건 '전쟁' 시대를 살아낸 '조부' 세대이다. 12월 9일 방영된 <빛나라! 할머니>는 그 '전후 세대'의 삶을 통해 자기 삶의 당위성을 길어올리고자 하는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역설적 존재론'이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생애
이금순 씨는 올해 82세이시다. 열 여덟에 시집와서 다섯 자녀를 키우시고 또 그 자녀들의 손주까지 보신 일가의 할머니다. 인생의 여든 고개, 그녀가 맞이한 건 '알츠하이머', 모처럼 찾아온 손주에게 정수기에서 나오는 온수따위 믿을 수 없다며 가스렌지에 펄펄 물을 끓여 맛난 커피를 타주고 싶은데 정작 커피가 놓인 자리를 찾지 못하는 처지, 당연히 지나온 삶의 구비구비 쌓였던 사여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그런 이금순씨가 말끝마다 신나게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아싸, 야로~!', 젊어 애청했다던 '여자의 일생'도 기억이 안난다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 구절의 사연이 궁금해 손자 김빛나라 씨가 할머니가 살아온 곳을 더듬는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젖이 부족해 자신의 가슴을 들이받던 아이들에게 보리죽조차 넉넉하게 먹이지 못했던 그 시절이 아픈 할머니, 군에서 제대한 할아버지와 함께 정미소를 운영했다면서도 자식들 배를 곯렸던 시절, 그래도 할머니는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저녁을 나눠먹이던 넉넉한 품을 지니신 분이셨다. 어디 젊은 시절 뿐일까. 여전히 자식들 가까이 사는 지금의 집보다, 이제는 살림살이 하나 없는 예전 집이 더 익숙한 그 동네, 동네 사람들을 보자 할머니의 안색이 빛난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내, '쨍하고 해뜰날', 해마다 봄이면 마을 회관 사람들이랑 다녔던 봄놀이에서 불렀다던 그 노래,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며 할머니는 내년 봄의 봄놀이를 기약하신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손자, 서른 둘, 직장을 다니다 길을 잃어 그 길을 찾아 해외 배낭 여행을 다니던 손자, 여전히 길은 막연한데, 가난하고 고생스런 삶을 버텨오신 할머니를 보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짐해 본다. 

 

 

그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던 할머니의 식혜
여기 할머니의 일생을 더듬어보는 또 다른 손자가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점 개업을 준비하는 손자 정요한 씨, 그는 서점의 색다른 아이템으로 밥알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할머니의 식혜를 떠올린다. 

그 식혜의 비법을 배우기 위해 들른 할머니의 집, 쌀을 불리고 찌고, 엿기름물을 만들고 밥통에 띄우기까지 '시간'의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걸 그 옛날에 밥통도 없이 쌀을 몇 말씩이나 하셨단다. 또 다른 할머니의 장기인 팥 양갱을 배우려는데 가마솥 불피우기부터 젬병이다. 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뭇가지를 잘 정렬하여 불을 피우고 팥을 끓이고 그걸 다시 몇 번에 걸쳐 거르고 한천과 함께 만들어 낸 양갱, 배우긴 배우는데 공이 이만저만 아니여서 요한씨는 연신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자라면서 식혜를 먹고, 양갱을 먹을 때 그저 할머니가 심심풀이로 만드셨는 줄 알았는데 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할아버지를 만나 시할아버지에, 세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층층시하 밥 먹을 새도 없이 살던 그 시절 고모님이 만드신 걸 보고 어깨너머로 만들어 내셨다는 열의는 학교 근처에 가보지도 않고 시집살이 틈틈이 한글을 익히신 향학열로 이어지셨다고. 

그 할머니의 열의와 열정 앞에 서른 셋의 나이에 새로운 길에 선 요한 씨는 새삼 고개가 조아려진다. 그리고 할머니처럼 견디며 버티고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선택한 새 길에서도 어떤 희망이 있지 않을까 각오를 다져본다.

 

 

손때가 묻은 60권의 가계부
허나영 씨에게는 유명 스타와의 기념 사진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홍보일을 하던 시절 정신없이 바빴지만 어느덧 그 속에서 자신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설치 미술'을 하고 있는 어엿한 작가, 그녀의 '미술적 재능'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 '예술적 DNA'는 뜻밖에도 할머니에게서 찾아진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할머니는 고운 무늬가 있는 종이를 모았다가 봉투를 만들어 명절 때 손주들 '세뱃돈' 등을 넣어 주셨다. 지금 봐서도 예술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무니며 만듬새, 그 작품의 주인공은 이제 93이 되신 오영순 할머니시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짜 작품은 이 봉투가 아니라, 할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살아오신 세월과 맞먹는 60권의 가계부이다. 학교 선생님이셨으나 동료 선생님이셨던 남편과 가정을 꾸리시면서 가정주부로 살아오신 시절, 박봉의 선생님 월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고심하며 살아온 그 시절이 고스란히 가계부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가 사들인 물품 목록과 가격만이 아니다. 그 가계부의 비고난에 빽빽이 적어내려간 그 시절의 일기, 사건들, 그 속에 90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난한 살림, 그 속에서도 세상사에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꾸려가느라 '곤란'했지만 애써 견디며 노력했던 할머니의 삶은 작가의 길에 들어선 손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귀감이다. 
​​​​​​​

부쩍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를 조명하는 다큐들이 늘었다. <미운 우리 새끼>와 새로 시작한 <아모르 파티> 등 예능에서 새로이 조명되는 세대와 같은 연장선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얼마전 MBC 스페셜 <엄마와의 인터뷰>, <기막힌 내 인생 누가 알랑가?>와 이제 SBS스페셜 <빛나라! 우리 할머니>는 그저 그 세대에게 조명을 비추는 걸 넘어, 할머니, 어머니라는 가족 내 일원이 아닌 '한 사람', 그것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자기 극복의 표본으로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주목'의 시선에는 바로 현재, 그들만큼 힘들다 느끼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기에 시작은 '할머니', '어머니' 세대이지만 그 다큐의 끝엔 여기가 있다. 전쟁통에, 가난한 시절을 그렇게 버텨낸 것이 '승리'라고 말하는 다큐는 결국, 그러니 우리도 버텨보자, 살아내 보자며 다독인다. '고생'의 연대이다. 

by meditator 2018. 12. 10. 16:18

저출산이 전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다. 하지만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다. 심지어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싸울지언정 나를 위해 아이를 낳는 건 '언어도단'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맞는 말이다. 한참 아이를 낳기에 좋을 건강한 시절엔 진학이다, 취업이다 하느라 아이 낳을 엄두를 못내는 세대, 그리고 막상 아이를 낳으려니 임신이 쉽지 않은 시대, 이 아이러니한 세태에 대해 <다큐 시선- 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가 분석한다. 

왜 비혼주의일까?
33세 한종택씨는 안정된 직장과 함께 집을 옮겼다. 새 침대도 놓고, 전등도 새로 사고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기에 한창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집은 오로지 그만을 위한 공간이다. 이른바 '비혼주의', 그게 결혼에 대한 그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36.3%, 여성의 22.4%만이 결혼해야 한다고 한다. 즉, 결혼 적령기 남성과 여성의 2/3가 결혼은 선택의 문제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곧 '어른'이 된다의 동의어로 사용된다. 남성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또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의식을 '내면화'한 젊은이들에게 그럴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결혼은 '부담'일 뿐이다. 

 

 

이 '부담'을 현실화시켜주는 통계가 있다.  이 통계에 따르면 고소득의 과반수 이상이, 심지어 10분위의 경우 82.5%가 결혼을 하는 반명, 1분위의 경우엔 겨우 6.9%만이 결혼을 했다. 즉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곧 '소득'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통계는 증명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경제 상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공교육만으로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다면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용은 줄어든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교육은 온전히 사교육에 의존한다. 또한 직업이나 주거 역시 결혼의 주된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과연 이런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결혼'을 감행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 젊은이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앞서 한종택씨는 안정된 직장을 가지기 까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미뤄두었단다. 이제 비로소 자신다운 삶을 즐길 수 있는 상황, 그래서 그가 택한 방식이 '비혼주의',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길 바란다. 

무자식 상팔자?
그런가 하면 함께 살아도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관계도 모색된다. 공덕동에 사는 31살의 홍혜은 씨에게는 세 명의 동거인이 있다. 애인과 두 명의 동생, 하지만 이른바 '공덕동 하우스'라는 계간지까지 내는 이 공동체는 '비혼 생활'을 지향한다. 

 

 

자유롭고, 자기 계발을 위한 '비혼'만이 아니라, 더 긴밀하고 건강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비혼'을 주창하는 이들, 우리 사회 많은 가족들의 민낯이 그러하듯 누나 동생 사이라도 서먹서먹했던 혜은과 막내 동생은 이 공동체 속에서 서로 말을 트며 누나와 동생의 권위를 넘어서는데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제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이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를 잘 꾸려 나가며 그 속에서 서로 행복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함께 고심 중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아이가 없다고 해서, 아이를 당장 낳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를 외면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산아 제한의 시절 5남매인 덕에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 9명으로 확대된 온, 오프라인 공덕동 하우스 일원의 아이에게는 조건없는 사랑을 느낀다. 그러나 막상 공동체의 일원으로 아이를 기르는 문제에 있어서는 비용과 시간의 문제를 들어 난감함을 표명한다. '아이'는 좋아도, 아이를 키우기엔 쉽지 않은 사회다. 
이런 젊은 세대의 생각을 반영하듯 결혼해야 한다가 48.1%인 반면, 결혼하지 않아도 같이 살 수 있다는 비율이 56.6%로 결혼해야 한다를 넘어서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영국 등 유럽 각국이 비혼 가정의 자녀를 기꺼이 사회의 일원으로 보호하고 있는 것과 달리, 사회적 인식이나 제도가 미비한 우리 사회에서 비혼 가족의 출산율은 저조하다. 사회는 '아이'를 원하지만, 정작 결혼한 정상 가족의 아이만을 원하는 아이러니가 바로 우리 사회 낮은 출산율의 또 다른 이면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쉽지 않은 결혼 
그렇다면 그 소위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결혼한 정상 가족의 아이'는 어떨까? 
34살의 강종희씨는 오늘도 종종 걸음이다. 동네에서 늦게까지 아이를 맡아주는 어린이집을 겨우 찾았지만 그마저도 늦지 않게 가기 위해서 늘 조바심에 동동거린다. 

엄마를 만난 기쁨도 잠시 이미 해는 져서 어둑어둑한 놀이터에서 아이는 1분만 더를 조른다. 겨우 달래서 들어온 저녁 삼교대 근무를 하느라 부재중인 남편을 대신하여 아이랑 놀아주고 씻겨주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다시 새벽부터 이어지는 하루. 하지만 주변에서 은근히 부담을 주는 둘째는 언감생심이다. 엄마의 출근 시간에 쫓겨 못자고, 먹을 것도 빨리 먹어야 하고, 놀이터에서 실컷 놀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이에게 못할 짓이다 싶다. 아이를 낳으면 시댁에 맡기라는 시부모님의 말씀이 반갑기 보다, 조부모님 품에서 자라는 아이에게 자기가 무슨 엄마 자격이 있을까 싶다. 또한 직장에서는 아이 생각, 집에서는 직장 일 생각을 하며 늘 머릿속이 복잡한 자신의 생활이 답답하다. 

그래도 낳아서 지지고 볶으면 다행일 수도 있다. 29살 김수연 씨는 오늘도 매 끼니 고가의 영양제를 한 움큼 씩 삼킨다. 아이를 갖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도한 두 번의 시술, 그러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몇 번의 기회, 나날이 그녀는 위축되어간다. 국가에서 비용을 보조해준다고 하지만 빛좋은 개살구, 비용조차 만만치 않다.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만 정작 아이는 그녀에게 쉽게 오지 않는다. 

이건 비단 김수연씨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병원 간호사였던 그녀 불규칙한 수면과 식사, 그리고 과로는 그녀의 직장 생활을 정의하는 단어들이었다. 그리고 김수연씨와 같은 조건, 혹은 비슷한 조건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난임'의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임신을 할 수 있는 나이에는 결혼도 안되고 임신은 더더욱 안된다는 사회적 압력을 받으며 우리 사회 출산은 자꾸만 늦어진다. 더구나 난소 기능 검사(AMH)와 같은 조기에 치료가 중요한 난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미처 갖춰져 있지 않다. 결국 정작 아이를 가지고 싶어할 때 아이를 가지지 못하거나 힘든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

'산아'라는 정책의 역사,
70년대 우리 정부에서는 정부 주도의 산아제한 정책을 펼쳤다. 아이를 많이 낳으면 '거지꼴을 못면한다'가 정부의 주요 시책이었다.  '가족 계획 어머니회'를 내세운 임신 중절을 위한 차가 마을에 까지 가서 낙태를 주도했다.  1980년대 출산율이 2.1%였다면 모집단을 통해 집계된 낙태율이 2.1%였다. 즉 국가가 앞장서서 낙태를 조장했다. 이런 정책은 8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한 자녀에게는 의료 보험 혜택과 새마을 유아원 무료 교육과 육아 보조비, 산모 요양비가 주어졌으며 다산 가족에게는 셋째부터 주민세등의 불이익이 주어졌다. 

'산아'에 대한 국가적인 개입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모성은 도구화되었고, 여성은 객체화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고 다를까? 아이를 낳으면 이러저러한 이익을 보장한다는 각 지자체의 홍보성 정책은 과거 정책의 반사판 판박이이다. 여전히 사회와 국가는 여성에게, 엄마에게 매달린다. 우리 사회에서 아이의 출산과 건강, 교육 그 대부분은 여성에게 책임이 전가되어 있다. 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그 경쟁에서 승리하는 아이를 만들어 내는 건 여전히 '엄마'다. 그런데 그런 엄마의 역할을 충족시킨 자식은 1%도 못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바로 '엄마 스트레스'로 가임기의 세대에게 온전히 압박감으로 가중된다는 것이 전문가의 해석이다. 그래서 그걸 미리 거부하면 '비혼'이요, 결혼해서 거부하면 '무자녀'이며, 한번쯤 시도해 봤는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게 바로 '한 자녀'라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줄어든 아이들은 바로 '둘째'이다. 

결국 여전히 19세기와 20세기의 프레임 속에 갇힌 한국 사회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패러다임이 21세기의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미루게 만든다고 다큐는 결론내린다.  아이를 낳으면 뭘 해주겠다 하기 전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인식의 변화와 조건을 만드는 거 이게 바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by meditator 2018. 11. 30. 18:04

창사 특집 대기획으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공정성' 문제를 다뤘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로 부터 시작된 질문은 올해 정규직으로 전환된 비정규직과 관련된 정규직 젊은이들의 분노와, 한 해 44만 명 수능을 치룬 학생 중 3/4가 응시하는 각종 공시와 관련된 '한국형 능력주의'에 다다른다. 그리고 '시험'을 통한 경쟁은 공정한가라는 회의적 물음으로 1부는 끝을 맺는다. 

그리고 다시 11월 18일 이어진 2부는 1부에 이어, '운'과 '능력'에 대한 질문을 이어간다. 그를 위해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는 한국 사회에서 '대박'을 터트린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그런데 그들의 답은 한결같다. '제가 이만큼 성공한 건 운도 중요하지만 노력이 더 중요해요.' 즉,  '운'이 아니라 '노력'이란다.

자기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열심히 한다면 몇 년이 걸릴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아주 큰 규모의 성공은 오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확신해요.
toss 이승건 대표 


심지어 타고난 미모가 없었다면 힘들지 않았겠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쇼핑몰 하늘 대표는 '그 조차도 노력'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다. 반면 거길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입을 모아 '운'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집안 배경'은 본인의 노력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쉽게 '운'인가, '노력'인가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질문, 그 답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를 찾았다. 안드레아 파사다 박사를 비롯한 세 명의 연구진은 컴퓨터 안에 1000 명이 20세에서 60세까지 살아가는 가상 세계를 만든 후 이들의 운명을 시뮬레이션해본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파레토 법칙', 즉 상위 20%가 전체 80%의 부를 소유한다는, 이른바 '운칠기삼'의 속설이 '과학적'임을 증명했다. 이들이 분석한 성공 요소는 평균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 운이 좋으면 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운칠기삼'이 아니다. 이들 학자들이 주장하는 건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운이 없어서 그 능력조차 쓸모없어질 수 있는 '불운의 환경'이다. 즉, '불운을 없애주는' 사회의 역할이다. 

'인간 진화의 사회적 혁신'으로서의 '나눔' 
그 사회의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 제작진은 인도네시아의 라말레라를 찾는다. 화산섬인 람바타 섬 워낙 척박하여 국제 기구로 부터 유일한 생업인 '고래잡이'를 허용받은 이곳에서 남자들은 배를 타고 나가 '작살'로 고개를 잡는다. 아이들의 장래 희망이 작살잡이인 주르비깜인 이 곳, 말린 고래고기가 이들의 주 수입원이다.  작살 하나로 길이 20m의 향유 고래도 잡을 수 있는 작살잡이, 하지만 그가 잡아온 고래는 마을 공동체의 몫이다.

마을 남자들이 배를 타고 돌아오면 몫을 관장하는 마을 어른인 아타몰라가 '공정'하게 몫을 나눈다. 배를 조종한 사람과 배의 소유주에게 머리, 작살잡이에게는 어깨 등 역할과 능력에 따른 분배이다. 하지만 배를 타고나간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다. 참여치 않은 이들도, 심지어 배를 타다 가장을 잃은 가정에도 몫이 돌아간다. 

그것이 가능한 건 이들이 잡은 고래를 그 고래를 잡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바다의 것, 마을 사람 모두의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래 고기가 없으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척박한 환경이 라말레라 사람들로 하여금, '나눔'을 실천하게 했다. 

 

 

진화 학자는 말한다. 수렵 채집 사회에서 '행운'을 나눠, 불운에 맞서는 '나눔'은 엄청난 '사회적 혁신'이었다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몫을 더 주는 '능력주의'는 환경에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 낸 '나눔'이라는 안전판을 통해 더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새뮤얼 보울스에 다르면 인간의 뇌는 '공정함'에 관심을 갇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최후 통첩 게임 등에서 불공정한 처사에 부딪쳤을 때 뇌에서는 뇌섬엽이 강화되면서 마치 썩은 음식을 봤을 때처럼 불쾌감이 강화된다. 즉, 인간의 뇌는 '공정함'에 대해 관심을 갖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진화'의 시기가 수렵 채집의 소규모 사회, 오늘날 규모가 커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이 공정함의 본능이 위협받는다. 

'운'을 만들어 주는 사회 
이탈리아 학자들의 시뮬레이션 실험, 학자들인 그 가상 세계의 1000 명에게 5년마다 분배 시뮬레이션을 실시했다. 미국식 능력주의, 랜덤 방식, 그리고 균등 배분 방식 등이다. 

미국식 능력주의는 어떻게 작동될까?  기업 'YC'의 사례를 살표본다. 대부분 사업을 할 경우 필요한 경제적 도움 등을 '인맥'에 의존하는 현실, 그 한계에 주목한 YC는 기업 활동의 엑셀레이터가 되기로 한다. 즉 성공의 '운'이 되어주기로 한 것이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는 방식으로 '미미박스' 등의 업체가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미국 사회는 위계 조직화돤 한국과 달리 테트리스 게임처럼 각자 자신에 맞는 역할을 찾아내면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의 국가이다. 하지만 실리콘 밸리의 캠핑카 대열과 최근 영화로도 개봉한 LA 라라랜드의 6만여 노숙자 텐트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미국은 '기회'의 땅이지만, 안타깝게도 불운은 온전히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맹점의 그늘이 깊다. 

 

 

실험의 3가지 사례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건 '균등 배분'방식이었다. 즉 자원을 재분배하여 모두에게 기회를 주었을 때 분배는 가장 성공적이었다. 다큐는 이 실험의 성공 사례를 핀란드의 보편 복지에서 찾는다. 

얼마전만 해도 실업 수당 중심의 복지 정책을 펼치던 핀란드는 기본 소득 실험 중이다. 국민 한 명, 한 명의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한 기본 소득, 언론 구조 조정으로 실업 중인 무라자씨는 기본 소득 덕택에 재취업에 시달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고자 했던 책 집필을 시작했다. 기본 소득을 받는 처음 몇 달간은 '공짜' 돈을 즐기기도 했지만 곧 자신의 삶에 필요한 것을 찾게 되었다며 기본 소득의 의미를 짚는다. 

핀란드는 이런 기본 소득 실험과 함께, 국민의 능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무상 교육을 전면 실시한다.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핀란드로 이민온 한국인 부부, 선행 학습의 필요 여부를 학교 측에 묻자, 학교 측은 당당하게 아이를 가르치는 건 '학교의 몫'이라 답했다며 자신들의 선택을 기뻐한다. 물론 이런 무상 교육과 기본 소득을 위해 핀란드 국민들은 30%~ 80%의 세금이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즉,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 지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 기업인 노키아의 몰락 이후 유럽의 병자라 칭해졌던 시절을 지났던 핀란드, 그걸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청년들의 활력 넘치는 도전이었다. 21살의 오토가 대학을 다니며 현재 두 번 째 스타트업에 도전 중이듯이, 핀란드 전역에서 수 천 개의 스타트 업이 열풍처럼 번지고 있다. 그리고 그런 '도전'이 가능한 건 바로 세금을 통한 부의 재분배에 기반한 '무상 교육'과 '기본 소득' 실험이다. 

능력은 누구나 다를 수 있다. 그 각자 다른 '능력'이 성공으로 이르게 되는 데는 '운'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큐는 말한다. 그 '운'을 담당해야 하는 건, '하늘'도 아니고, '금수저'도 아니고, 이제는 '사회'여야 한다고. 적어도 젊은이들이 '능력'을 가지고도 좌절하는 사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2부작 '운인가 성공인가'가 도달한 결론은 결국 '운을 만들어 주는 사회다. 

by meditator 2018. 11. 19. 1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