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시선>은 삼일운동 100주년, 임시 정부 10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 곁의 친일 잔재 3부작을 마련했다. 1월 3일 방영된 첫 번 째 친일 잔재는  '교육'이다. 

지난 2014년 2월 미쓰비시 근로 정신대 피해자 네 분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부는 “한일청구권 협정에 불법적인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 수행에 동참한 반인도적 행위까지 일일이 개인의 의사를 묻지 않고 포함할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미쓰비시는 이에 불복 계속 항소와 상고를 거듭하며 재판의 결과 이행을 지행시키고 있는 중이다. 12월 5일 대법원 앞에는  근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 모임 사람들과 함께, 91살의 김정주 할머니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다. 
 

 
중학교에 보내준다 하고 일본의 공장으로 보낸 선생님들 
김정주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무렵 중학교를 보내준다는 담임과 교장의 꼬임에 넘어가 일본으로 갔다. 놀라운 건 이제 81살 된 여동생 김성주 할머니 마저 언니처럼 동생을 꼬드겨 근로 정신대로 보냈다. 후지코시에 강제 징용된 동생 김정주 할머니 높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공장과 기숙사 생활은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배가 너무 고파 기숙사의 이름모를 푸른 풀들을 뜯어 먹어야 했던 시간, 지진으로 다리를 다치고 기계에 손가락을 잃은 채 돌아온 고국, 하지만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은 파탄났다. 

이 두 어린 여학생에게 상급 학교를 미끼로 일본 행을 권했던 건 75년전 순천 남초등학교의 오오가끼 선생님, 근대화된 일본을 배워야 한다. 이제 곧 만주, 중국 등을 손아귀에 넣어 대동아 공영권의 주인이 될 일본 밑에서 식민지인 게 , 2등 국민이라도 하는게 행운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벌이는 성전과도 같은 전쟁에 기여를 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은, 교장은 학생들을 죽음의 길로 내모는 논리를 설파했을 것이다.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선 민족 교육의 선각자들 
그런데 당시 일본인 선생님만이 그랬던 게 아니다. 1938년 3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은 우리 말과 글을 못쓰게 하고 일본에 충성하겠다는 황국 신민 서사를 강요 하는 등 새로운 식민지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는 전쟁으로 가는 일본의 체제에 식민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정책의 변화였다. 이어 1943년 교련 등 군사 교육 분야를 도입하는 등 지원병과 학도병에 맞는 교육을 변질시켜 나갔고, '일한 병합'의 취지로 한국, 한국인, 한국 역사, 한국의 문화 모든 것을 '폐멸'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일본의 교육, 식민지 정책에 우리의 교육인들이 동조를 넘어 앞장섰다. 

의친왕에게서 하사 받은 땅에 추계 학원을 만든 황신덕은 1937년 중일 전쟁 직후 김활란 등 대표적인 사학 재단 관계자들과 함께 전쟁 지원 단체에 가입하여 근로 정신대를 독려하는 선동을 하고 글을 썼다. 

더 충격적인 건 민족 사학의 거두로 알려진 인촌 김성수의 다른 선택이다. '조선의 징병령 쾌보는 실로 반도 2천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 등등 1942년 이후 총독부 기관지를 비롯 여러 신문에 학도병 독려의 글을 쓰는 등 친일에 앞장 선 것이다. 

이화 여전을 세운 김활란, 지금의 서울 음대 전신인 경성 음악 전문 학교를 세운 현제명 등 민족 교육의 대표자들은 일제 말기 얼굴을 바꾸고 일제의 동원령에 앞장 섰다. 

 

 

물론 이들의 변절에 대한 변명도 있다. 황신덕의 경우 1927년까지 근우회를 조직하고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 섰고, 인촌 김성수의 경우 변절을 한 1930년대 말까지 25,6년간 민족 교육의 거두로 헌신해왔었다는 점이다. 학교와 신문사, 경성 방직을 지키고자 하는 시대적 고육책이었음을 고려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변절보다 그 변절을 덮고자 했던 이후의 행동들이다. 친일에 대한 반성과 자신들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동포에 대한 사죄는 커녕 해방 후 반공주의 정권의 기득권으로  자기 보전에 연연했다는 점이다. 여전히 고대 앞의 거리는 인촌로이고, 대법원 판결로 서훈이 박탈된 현재에도 고려대학교 인촌 기념관에는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들어가 있지 않다. 추계 학원에도, 고려대학교에도 여전히 황신덕과 김성수의 동상은 세워져 있다. 

이런 민족 사학의 결과물로 인한 소송과 분쟁도 이어진다. 최근 연극계의 화두는 남산 드라마 센터가 누구의 것이냐는 것이다. 학도병 지원은 물론, 만주 한인 이민 등을 적극 권장했던 대표적 친일파 동랑 유치진, 그 역시 해방후 반공주의 정권과 결탁하여 미군정 귀속 재산을 불하받아 그 자리에 남산 드라마 센터를 지었다. 귀속 재산은 국가에 환수되어야 한다는 법에 의거 더 이상 유치진 일가의 남산 드라마 센터, 서울 예대 소유는 불가하다는 반발이 일고 있다. 역시나 대표적 친일파 민영휘가 만든 휘문고는 상속되며 족벌 사학이 되었고 최근 사학재단 임대 보증금 횡령 사건 등에 휘말려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이처럼 일제 하 민족 사학들 중 상당수가  일제 말 자신의 재산과 직위를 보전하기 위해 '친일파'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명목이야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교육을 보전하기 위해서라지만, 그를 위해 그들은 비행기를 헌납했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앞장섰다. 심지어 내선일체의 선동자가 되었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었을 때, 그런 과오에 대한 반성과 속죄의 시간은 없었다. 대신 해방 이후 미군과 정권에 유착하여 다시 한번 기득권이 되어 이제 ''족벌 사학'이 되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사회의 기득권이 되어가는 이 '단죄되지 않고 속죄하지 않은 시간'이 이것이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이 되었다. 

일제 시대 교과서 속 식민지 교육 
이렇게 교육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결국은 '변절'로 그들의 선각자적 활동을 얼룩져버리는 동안, 교육이라고 달랐을까. 전남대 일문과 김순전 교수는 식민지 시절 교과서를 번역하여 식민지사의 내막을 파헤치고자 한다. 

그저 두 친구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그 두 친구가 일본인이고 한국인인 한 달라진다. 수례를 끄는 일본인과 미는 조선인이라는 식이다. 이처럼 주도적인 일본인과 수동적인 한국인 상이 은연 중에 교과서 곳곳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역사 교육은 보다 고등적 암시가 담겨있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설명하되 갈등 구조를 더해 한계를 드러내는 식이라거나, 박혁거세, 석탈해가 일본에서 왔다는 식으로 하여 일본과 한국이 원래 하나 였으며 나뉘어 졌던 것이 합쳐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내선 일체론', '동화론'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식민 사학 논쟁 
1925년 자국 역사학자들 중심으로 조선사 편수회를 만든 일제, 37년 조선사 편수회가 만든 조선사가 편찬된다. 식민지적 관리 방식으로서의 조선 역사이자, 역사적 자료의 독점, 관리 체계 정립을 이룬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일본의 지방사로,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들의 지배 논리가 관철된 역사로 새롭게 정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제에 의한 역사, 그 그림자는 생각 외로 길다. 지명으로 압록강은 두 군데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 북한과 중국의 국경인 압록강(鴨綠江)과, 랴호허 강의 지류인 압록강(鴨淥江)이 그 둘이다. 고려 역사 속 강동 6주가 있는 곳을 우리가 알고 있는 압록강으로 역사 책은 기술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는 이의를 제기한다. 외려 중국의 역사서 등을 조사해 보면 후자의 압록강이 더 맞고, 그에 따르면 고려가 세운 천리장성의 위치도 한참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윤관의 9성도 마찬가지로 지금의 위치가 아닌 '두만강 너머 700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올라가야 한다고 연구소 측은 주장하고 있다. 

결국 인하대 연구소 등이 주장하고 있는 건 지금의 역사서들이 일본의 실증사학자 쓰다소키치의 제자인 이병도가 만든 진단학회에 의한 교과서가 가진 식민지 사관의 흔적들을 지우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서울대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이병도의 제자들, 그 학파에 의한 한국사관의 점령, 이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학계는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변화 만큼이나 어려운 숙제라 입을 모은다. 
 

 
카톨릭 대 기경량 교수는 일제 시대 펴낸 조선사는 하나의 사료집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식민주의적 흔적은 극복해야 하지만 그 사료집에 불과한 조선사에 대해 무조건 배척하는 건 또 하나의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이라 비판한다. 그런가 하면 김세연 동북아 역사 왜곡 대책 특별위원 역시 주류는 잘못됐고 비주류는 옳다는 흑백 논리를 경계한다.  과학의 발달에 근거하여 탄소 동위원소 등 고증학적 관점에서 학문적 공론의 장이 펼쳐져야 하며 정치적 목적의 왜곡을 우려한다. 

이렇듯 아직도 우리 역사 학계는 일본이 만든, 혹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만든 역사의 긴 그림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혹은 각각의 사관에 따라 역사학계는 나뉘어지고 학문적 공론의 장을 통한 진솔한 토론과 합의는 쉬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교과서 개정 때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낸다. 

by meditator 2019. 1. 5. 04: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