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가에 의한, 현대가의, 현대가를 위한 현대 축구 협회, 지난 26년간 축구 협회의 '견제받지 않은 권력'인 '현대'가의 연이은 협회장 연임에 대해 축구에 조금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그 새로울 것도 없는, 하지만 쉽게 변하지 않은 권력에 <추적 60분>이 칼날을 겨눴다. 


 




지난 2017년 카타르 전에 패한 슈틸리케 감독이 경질됐다. 그리고 곧 20세 이하 대표팀 감독이었던 신태용 감독이 선임됐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석연치않은 사건이 터졌다. 2002년 월드컵의 주역이었던 히딩크 감독이 은퇴를 앞두고 무보수라도 한국의 대표팀을 맡아 자신의 감독 생활에 유종의 미를 남기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지난10월 국정감사 자리에 나온 축구 협회 노재호 사무국장은 러시아에서 이 소식을 전해듣고 황급히 sns를 통해 김호곤 기술위원장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고 증언했다. 히딩크 전감독과 김호곤 기술위원장, 그리고 축구 협회 사이의 진실 게임을 둘러싼 잡음들. 결국 김호곤 기술위원장은 사퇴했지만, 결국 대표팀 감독은 히딩크가 아닌 신태용 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선수 선발과 '트릭 발언'(포지션에 맞지 않은 선수 선발과 관련된 신태용 감독의 전술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신태용감독은 트릭이었다고 답했다) 대변되는 전술 부재 논란. 


 




감독들의 무덤이 된 대표팀 
하지만 축구 협회에서 감독 경질과 새 감독 선임의 논란은 새로운 사건도 아니다. 히딩크 감독 이후 10명의 감독이 대표팀을 거쳐갔다. 평균 1년 6개월 정도만 감독직을 맡은 것이다.  일반 국민들은 히딩크만큼 실력을 보여주지 못한 감독을 자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문가들의 입장은 다르다. 협회가 자신들의 책임을 덮고, 가리기 위해 감독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책임만이 아니다. 1994년 당시 미국 월드컵을 이끌었던 김호 감독은 선수 선발과 기용에 있어서 김독의 자율성이 침해되었으며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건 '경질'이라며 협회의 감독 권한 침범을 증언한다. 
또한 2011년 레바논 전에 패한 후 조광래 감독은 하루 아침에 감독 직을 잃었다. 당시의 정황은 조광래 감독의 경질이 경기의 패배보다는 당시 협회장 선거를 둘러싼 파벌에서 조광래 감독이 협회 내 야권에 해당하는 인사와 가깝다는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히딩크 감독을 제치고 대표팀 감독이 된 신태용 감독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월드컵 기간 내내 논란이 되었던 선수 기용, 전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그 자리에 중국 리그에서 아시아권 선수들에 대한 이해 부족, 부진 등의 이유로 경질된 벤투 감독이 선임됐다. 이번에도 그 과정에 대해 협회는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그래서 어느덧 대한민국 대표팀은 '감독들의 무덤'이라 칭해진다고 다큐는 말한다. 

'우리의 축구 수준이 여기까지라고 저는 판단내려지고요. 
우리가 더 잘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에게 능력을 키우라고 얘기할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한국 축구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지금 보이는 것만 바꿔서 내보낼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어두운 것을 털어내고
벽을 깨고 앞으로 나가기를 원하느냐가 더 중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
                                              박지성



파벌을 둘러싼 감독 선임과 경질, 이른바 모 대학 동문 중심의 선수 기용 등에 대해서는 이미 축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일반인들 조차 기정 사실로 치부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오죽하면 지난 월드컵 경기를 관전한 각 방송사의 지난 2002 월드컵에 참여했던 선수 출신의 해설가(박지성, 안정환, 이영표 등)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축협의 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런 후배들의 엄정한 요구에 대해 축구협회 이사가 된 홍명보 전 감독은 '경기를 얕게 해석'했으며, 후배들이 선수들을 가르쳐본 경험이 없다'고 폄하하며 축협에 대한 비판을 일축했다. 


 





왜 현대는 축협을 놓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고질병이 된 축협의 문제 그 실마리를 다큐는 2013년 정몽준 회장에 이어 대한 축구 협회장이 된 현대 산업 개발 회장으로 부터 풀어가고자 한다. 
다큐는 질문한다. 도대체 왜 현대가는 26년 동안 축협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한 해 천억원의 예산을 가진 축구 협회, 지난 2013년  축구 협회장 선거 과정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억원의 돈이 오간다는 소문 끝에 정몽규 회장이 당선되었다. 당선된 정몽규 회장의 첫 사업은 시급한 사안이 아니라는 반대를 불식하고 '축협 회관 리모델링'이었다. 

당연히 협회 사람들은 새로이 당선된 현대 산업 계발 회장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급작스런 이사 등 번거로운 리모델링 과정을 거치고 돌아온 후 알게된 사실은 십 몇 억이 든 리모델링 사업이 올곧이 협회 예산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심각한 건 이 과정에 현대 산업 개발 계열사가 참여했으며 특히 동생 정유경 씨의 실질적 송유주로 짐작되는 업체가 인테리어를 맡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업체는 <추적 60분>이 추적해 들어가자 홈피의 사진을 지우는 등 황급하게 소규모 행사를 했을 뿐이라 발뺌을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년도에 비해 26배나 많은 54억의 현금 수익을 챙기는 '특혜성 공사'를 한 것으로 다큐는 짚는다.

이뿐이 아니다.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시기에 만들어진 B스포츠 마케팅 업체는 현대 산하 금강 기획 출신들이 주축으로 만들어진 마케팅 업체로 협회의 마케팅 업무를 독점해왔다.  
다큐 제작진의 질문에 경쟁 입찰에 따른 공정한 참여였다고 답했지만, 이 업체보다 서너배나 돈을 많이 쓴 타 업체조차 입찰 과정에서 튕겨져 나가는, '협회에 대해 잘 아는'이라는 모호한 선정 방식에 대해 전문가는 전형적인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라 단정한다. 하지만, 이른바 오랫동안 현대, 현대 산하 기업에 몸을 담아온  '현대맨'에의한 회사는 이른바 친인척 등 특수 관계인이 아니기에 '법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절묘한  수법이기에 '법적 처벌'조차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이다. 

역대 축구 협회 임원에 대해 전수 조사를 한 다큐 제작진, 191명의 역대 협회 임원 중 현대에서 일한 사람은 53명에 달했다. 더구나 2017년 조중연 전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은 단란주점, 안마시술소 등에서 법인 카드를 쓴 공금 유용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는 등 임원들의 도덕적 해이는 극에 달한 상태다. 심지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도 비리 임직원 중 6명이 여전히 축구 협회 임원등으로 재직하는 등 '협회 카르텔'은 공고했다. 현대 맨들이 장악되었다는 조직과, 그 조직에 의한 현대 계열사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 다큐는 협회에 투자한 현대의 돈보다, 협회로 인해 얻은 현대가의 이익이 훨씬 크지 않겠는가 라고 반문한다. 

1000억원의 규모를 3000억원의 규모로 확장시키겠다는 슬로건으로 전폭적 지지를 얻어 당선한 정몽규 회장, 하지만 대표팀을 제외한 한국 축구의 현실은 초라하다, 대표팀의 베이스가 되어야 할 유소년 축구, 하지만 지원은 커녕, 고교 축구 연맹전은 학부모들의 품앗이로 진행된다. 지원이 부족한 프로 축구는 수익성이 나날이 떨어지며 고전 중이다.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 우리의 축구 행정을 잘 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구 협회는 국민들의 것일까? 아니면 현대의 또 다른 계열사 중 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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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축구협회여야 할까? 
물론 축구 협회는 사단법인이다. 재벌이라는 금권에 기반한 스폰서의 경제적 지원에 의한 단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렇게 제기되는 의혹에 대해 공개해야 할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큐는 이의를 제기한다. 축구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없다면, 국가대표 팀의 경기라도 있을라치면 거리를 붉게 물들이는 국민적 호응이 없다면 축구 협회의 존립이 가능하겠는가라고. 

재벌 기업의 사재를 털었다지만, 공적 기금이 들어갔음은 물론, 국민의 세금으로 만든 각종 시설 등을 사용하고 있는 축구 협회는 '공공재'로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또한 지난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이끈 덕에 국민적 호응을 얻어 대선 후보까지 나섰던 정몽준 후보의 사례에서도 보여지듯이 그저 재벌 회장과 달리, 축협 회장이라는 '왕관'의 무게로 인해 얻는 이익은 경제적 수치 그 이상이라 다큐는 단언한다. 

이미 준정부적인 조직으로 거대화된 축구 협회, 그럼에도 여전히 '현대'라는 개별 기업에 의해 장악된 조직, 국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은 공적 역할에 걸맞은 책임과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다큐는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조직이 스스로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정부의 법적 개입조차 필요하다 덧붙인다.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우리 축구인들이 힘을 합쳐서 
희생을 감내하고서라도 뭔가를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4년마다  매번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지성










9월 5일 <추적 60분>에서 현대에 의한 축구 협회에 대한 비판적인 방송이 방영되자, 6일 협회는 반박문을 발표했다. 그 반박문은 다음과 같다. 

<추적60분> 방송에 대한 대한축구협회 반박문

 
1. 대한축구협회가 희생양을 위해 대표팀 감독 경질만 되풀이한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과 다릅니다. 최근 몇년전부터 대한축구협회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철저히 신뢰하고 최대한 임기를 보장하고 있습니다. 감독 선임 기구도 새로 정비하고 선임 절차를 철저히 준수하고 있으며, 최상의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2. 축구회관 인테리어 공사를 현대산업개발 관련 회사가 시행했다는 주장에 대해
 
2013년 시행한 축구회관 인테리어 공사는 입찰을 통해 정상적으로 시공사를 선정했으며, 현대산업개발 관련 회사가 아닙니다. 정몽규 회장의 여동생이 지분을 가진 모 회사는 이 시공사에 납품을 한 여러 회사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3. 대한축구협회가 ‘현대가’의 특정 마케팅 대행사와 유착했다는 주장에 대해
 
2015년까지 대한축구협회 마케팅 대행사는 독점이 아니라 여러 회사가 자유롭게 참여할수 있었습니다. 방송에서 의혹이 제기된 모 회사는 오랜 경험과 실적으로 협회와의 거래가 상대적으로 많았을 뿐이며, 현대와 직접적인 관계도 없습니다.  2015년말 실시한 통합 마케팅 대행사 선정 역시 공정한 절차에 따라 능력과 실적을 겸비한 회사를 선정한 것이므로 유착이라 할 수 없습니다. 
 
4. ‘현대가’가 막대한 이익을 위해 대한축구협회를 장기집권한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과 다릅니다. 막대한 이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현대 관련 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로, 성인팀만 4개(울산현대, 전북현대, 부산아이파크, 인천현대제철)이며, 초등부터 대학까지 합치면 총 18개의 남녀 축구팀이 있습니다. 최근 5년간 18개팀의 운영비로 투입된 금액만 총 3,900억원입니다. 현대 관련 기업이 지난 2010년부터 7년동안 K리그의 타이틀 스폰서로 참여하면서 낸 후원금이 200억이 넘습니다. 또한 현대자동차가 FIFA, 현대중공업이 AFC의 후원사로 참여해 한국 축구의 국제적 위상도 높인바 있습니다.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시 정몽규 회장이 당선을 위해 금품을 제공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최근 선거에는 100명 이상의 선거인단이 참여하기 때문에 압력을 넣거나 불법 로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대한축구협회장의 임기를 3회로 제한한 것은 FIFA나 AFC의 방식을 참고한 것입니다. 국내 다른 종목 단체의 회장은 기본으로 2회를 연임할 수 있고, 대한체육회 승인을 받으면 추가로 얼마든지 연임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축구협회가 정한 3회 임기 제한이 오히려 회장의 임기를 제한한 것입니다.
 
5. 대한축구협회는 유소년 지원에 관심없고 대표팀 성적에만 치중한다는 주장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에서 나오는 주장입니다. 학원 축구 리그제 정착, 동호인 축구 디비전 제도 도입, 골든 에이지 훈련, 8 대 8 도입 등 유소년과 아마추어 축구 발전을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습니다. 2018년 한해 유소년 축구에 투입되는 비용만 144억원입니다. 열악한 환경의 유소년 축구 사정은 잘 알고 있으나,  특정 팀과 지도자, 선수 개인을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6. 법인카드를 사적으로 사용한 임직원의 징계를 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6~7년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협회 징계위원회에 상정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검찰 수사 발표가 안되고 있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수사 결과가 나오는대로 필요한 조치를 즉각적으로 시행할 예정입니다. 2013년부터 클린카드 실명제 등 회계 시스템을 도입해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가능성을 원천 차단했습니다.




by meditator 2018. 9. 6. 16:09

결핵은 결핵균(미코 박테리움)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이다. 기원전 7천년 경 석기 시대 화석에서 발견됐을 정도로 인류와 함께 해온 질병이며 가장 많이 인류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이기도 하다. 결핵 환자에게서 나온 미세한 침방울 혹은 비말핵(기침이나 재채기를 하면 결핵균이 들어있는 입자가 공기 중으로 나와 수분이 적어지면서 날아다니기 쉬운 형태로 된 것)에 의해 감염된다. 하지만 감염된다고 해서 모두 결핵에 걸리는 건 아니다. 대개 접촉자의 30%가 감염이 되며, 그 중 10%가 결핵 환자가 되며 나머지 90%는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  발병하는 사람들의 경우 감염 내 1~2년내 발병하고, 나머지는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저하되는 때에 발병하게 된다. 그러기에 결핵의 발병에는 면역력이 약화되는 조건, 즉 영양의 부족 등의 상황이 주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북한의 경우, 생활고로 인해 영양 상태의 부족으로 인해 결핵 감염율이 높다. 인구 10만명 당 결핵 환자가 550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이런 통계 조차도 정확하지 않다. 심각한 건 기존의 결핵 약에 내성이 생겨 치료가 어려운 슈퍼 결핵, 다제내성 결핵 (Multi Drug Resistant Tuberculosis, MDR-TB)환자가 6000 여명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9월 3일 방송의 날 특집으로 방영된 mbc스페셜은 이 '다제내성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6개월에 한번씩 북한을 방문하는 유진벨 재단의 여정을 그린다. 




주적 미국과 남한, 그리고 북한이 함께 하는 
이 여정을 함께 한 사람들은 각별하다. 우선 이 다큐는 북한 출신의 외조부모를 둔 석해인 감독의 <out of breath>의 한국어 판이다. 봉사단과 함께 2년에 걸쳐 북한을 방문하여 완성된 다큐는 이미 일본에서도 방영되었고, 조만간 영국에서도 방영될 예정이다. 오로지 외조부모들이 북한 출신이라지만 북한을 떠난 이후로 단 한번도 다시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했던 분들의, 그래서 북한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던 '이방인' 석감독의 눈으로 본 북한, 그리고 봉사의 여정은 그래서 담담하고 객관적이다. 

그녀의 눈에 비친 북한은 그녀가 보았던 1950년대 남한의 풍경과도 같다. 민둥산 비포장 도로, 그곳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함경도 시골 마을, 그곳에 북한의 결핵 요양원이 있다. 하지만 말이 요양원이지. 수용 시설에 가까웠다. 겨우 일반 결핵 환자들을 위한 약이 있을 뿐 다제내성 환자들에 대한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곳이다. 그나마 약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마치 경제 금수 조치를 당한 쿠바에 1960년대 클래식 카가 활보하듯, 말이 뢴트겐이지, 작동되는 자체가 기적이라 할 폴란드에서 1950년대 제작된 기계가 환자들의 x선 촬영을 담당하고 있다. 

그곳에서 북한 사람들이 주적이라 여기는 미국인이 유창하게 북한 사람들에게 '동무'라며 자신들의 방문에 대해 소개를 한다. 스티브 린튼 박사,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자손, 그는 성경을 손에 들고 온 할아버지처럼, 성경 대신 결핵 약을 바리바리 싣고 북한 함경도 골짜기를 찾았다. 세계 보건 기구(WHO) 에서 다제내성 결핵 치료 지침서를 작성한 전문가이자 세계적인 결핵 전문의 한국계 미국인 승권준 박사도 함께 한다. 말이 결핵 약이지, 봉사단의 북한 행을 일행은 '외계와의 조우'에 빗댄다. '아무 것도 없다'란 전제 하에 그곳에서 봉사를 펼칠 '모든 것'을 준비해 가야 하는 여정. 그곳엔 숨쉬기 조차 힘들어 하면서도 기꺼이 쉽지 않은 치료에 합류하고자 하는 환자들이 있다. 




봉사단이 아니면 불가능한 치료, 그러나 쉽지 않은 
키 169 센티, 하지만 몸무게는 46kg에 불과한 김태성 씨, 그는 묻는 말에 대답하기조차 숨차한다. 휠체어에 실려온 젊은 청년은 잠시 몸무게를 재기 위해 홀로 서는 것조차 쉽지 않다. 먼길을 아내가 끄는 리어카에 실려온 중년의 환자도 있다. 그들은 모두 '포기된' 사람들이었다. 심각한 건 환자를 건사하다 주변의 가족들이 감염되어 아빠와 어린 딸, 엄마와 어린 아들이 함께 찾아오는 사례이다. 마치 권정생의 동화 <몽실언니>에서 어머니 북촌 댁의 폐결핵을 전쟁 통에 끼니조차 챙기기 힘들던 몽실 언니의 동생 난남이가 이어받듯이 말이다. 그래서 승권준 박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옮기는 결핵이 가장 치료하기 힘들고 어려운 질병이라 정의한다. 그렇게 갖가지 증상과 상태로 모인 기존의 결핵 약으로는 치료가 더 이상 불가능한 다제내성 결핵 환자들. 그들에겐  진단을 위한 객담 조사조차 버겁다. 

봉사단은 그들과 함께 한 북한의 결핵 전문가, 그리고 현지의 의료진과 함께 환자들의 실태와 상태 조사에서부터 시작한다. 전기조차 여의치 않은 요양원의 처지로 인해 발전기까지 구비해야 하는 진료 과정, 그 과정과정은 늘 예기치 않은 변수와의 실랑이이다. 하지만, 그 변수들을 극복해 내며 봉사단이 애를 쓰는 건 바로, 북한 내에서는 약조차 구할 수 없는 다제내성 환자들에 대한 치료와 교육이다. 

봉사단이 약을 가져가지만, 약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이미 기존의 결핵 약으로 치료가 되지 않는 다제내성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약은 '치료'만큼 '독성'도 강하다.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고, 청력을 잃을 수도 있고, 신부전의 부작용이 생기기도 한다. 약 자체를 먹는 것이 힘들다. 그래서 환자들이 그 어려운 투약 과정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드는 '정신 무장'도 방문단의 주요한 일정이다. 하지만, 6개월에 한번씩이라는 짧은, 그리고 가끔씩의 여정은 '6개월 후에 만나요'라는 기약할 수 없는 인사를 남겨야 하는 안타까운 여정이다. 




6개월, 하지만 기약할 수 없는 
이 봉사단의 여정이 기약할 수 없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그 중 전제가 되는 건, 바로 언제나 요동치는 한반도의 정세이다. 그저 북한의 치료받지 못한 결핵 환자들을 돕고자 하는 이 인도주의적인 여정은 언제나 남북한의 정치 정세게 가장 민감한 영향을 받는다.  '무슨 충돌이 있더라도 환자는 같이 살리자.' 그래서  '성숙된 인도주의 정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스티브 박사는 강변한다. 

그리고 그 다음은 6개월에 한번이라는 이 상시적이지않은 인도주의적 봉사가 북한의 환자들에 대한 지속적인 보살핌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6개월 후에 꼭 봤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그곳을 떠나는 봉사단을 그 말이 얼마나 기약할 수 없는 단어인 줄 안다. 분명 차도가 있고 열의가 있던 환자였지만, 봉사단이 6개월 후에 그곳을 찾았을 때 그 환자가 유명을 달리하거나, 더는 양의 효험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요양원을 떠나는 사람들은 두 부류이다. 더는 이곳에서 조차 치료의 기대를 할 수 없어, 혹은 스스로 치료를 포기하여 떠나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는가 하면, 어려운 치료 과정을 거뜬히 이겨내고 건강인으로 다시 사회에 복귀하는 경우이다. 그들은 모두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종이학 목걸이를 걸고 그곳을 떠난다. 몇 번의 방문에서 정이 든 봉사단은 완치가 못되어 떠나는 이들에겐 포기하지 말라는 간곡한 인사와, 건강해서 떠나는 이들에겐 앞날의 행복을 기원하며 그간의 정을 다한다. 

다시 돌아온 남한, 봉사단을 다시 분주하게 자신들의 인도주의적 봉사를 위한 도움을 요청하고,  북한의 환자들을 위한 약과 의료 기기를 준비하고 그들의 방문에 맞춰 서둘러 보내고자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료기기조차 '방북'이 쉽지 않은 상황, 인도주의적 봉사의 여정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현재 북한의 결핵은 해마다 4,5천명 규모로 발생하는 상황, 공식적으로 집계된 환자 수는 11만 명 하지만, 이 공식 집계는 비공식적 집계의 10%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해마다 2백만 명 가량이 결핵으로 사망하고, 그 중 상당수가 어린이와 청소년이다.

어린 시절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면 크리스마스 씰이라는 기념 우표를 샀던 기억이 있다. 그 크리스마시 씰을 처음 발행한 사람은 1928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결핵 요양소를 세운 캐나다의 선교사 셔우드 홀이다. 그렇게 남한의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선교사들처럼, 그들의 후예들은 여전히 북한의 결핵 퇴치와 치료에 힘쓰고 있다. 유진 벨 재단의 스티븐 역시 그런 사람이고, 그의 활동은 그의 선인들의 활동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우리나라에 와서 결핵 퇴치에 앞장섰던 선교사들에 대한 감사함을 가지듯, 이제 북한 결핵 봉사에 대해서도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너그러운 아량과 베품을 나눌 때가 아닐까. 

by meditator 2018. 9. 4. 04:16

인생의 1/3에 해당하는 시간을 보내는 잠, 길지도 않은 인생에 머리를 바닥에 붙이고 자는 그 시간이 너무도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아마도 인생의 어떤 시기에서 이런 생각을 안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큐에 나온 고 3 수험생은 계산한다. 하루에 한 시간, 그게 24일이 모이면 하루, 그 시간 동안 내가 자고, 내가 자는 시간 그 누군가가 깨어서 공부를 한다는게 두렵다고. 이른바 그 예전 시절 4당5락이라 말하던 '입시 괴담'의 2018년 버전이리라. 

그런데 입시만 끝나면 실컷 잠을 잘 수 있다던 '로망'은 이 시대에 불가능한 꿈이 되었다. oecd 회원국 중 수면 시간 우리나라는 평균 7시간 49분으로 꼴찌, 그런데 이 평균 수면 시간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든 생각은 '세상에 7시간이나 잔다고?'가 아닐까? 직장인들 10명 중 8명이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 내일의 더 나은 삶을 위해 학교에서, 직장에서 잠을 포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균 7시간조차 꿈의 수면시간 처럼 보이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게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이 이어지며 이제는 잠을 자는 시간조차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잠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막상 잠을 자려 해도 '숙면'을 취하는 게 쉽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다시 쓰는 불면 일기>를 기획한 작가 최성우씨, 그는 늘 졸음에 시달린다. 하지만 해야할 일은 그를 '포근한 잠자리' 대신, 자판 위의 끄덕이는 졸음으로 대신하게 하고, 정작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쉽게 들지 않고, 잠을 자도 개운치 않다. 

잠보다 무서운 수면 장애 
이렇게 '잠'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직장인 오지용씨는 늘 졸립다. 운전 중에도 졸음과의 전쟁을 벌이는 그, 하루 7시간 정도 자는데도 그는 졸립다. 숙면을 취하기 위해 운동까지 하지만, 그의 '수면'과의 전쟁은 쉬이 나아지지 않는다.
늘 졸리기야 방송국 피디만한 사람이 있을까? 오학준 피디는 자타공인 잠보다. 하지만, 그의 일상은 미래를 위해 잠을 강탈해야 하는 처지, 겨우 밤을 새워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자신이 즐겨하는 게임을 위해 잠을 양보한다. 그래서 일까, 그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우려할 정도로 현격한 기억력 감퇴에 시달린다. 
5번째 수능을 준비하고 있는 조하영씨는 겨우 잠자리에 들어서도 불면의 밤을 보낸다. 잠을 줄여 공부에 보탠 시간은 그녀에게 수능 성적으로 보상을 해왔었다. 그게 습관이 되어버린 이제, 잠은 그녀에게서 멀리멀리 달아났다. 




자신의 삶에서 '잠'을 빼앗아 자신의 꿈을 위해 썼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건 작건 수면 부족에서 부터, '수면 장애'에까지 잠과 관련된 각종 스트레스와 질환에  시달린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대한민국에서 잠과 관련된 산업의 시장이 2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잠(sleep)과 경제(economics)의 합성어인 슬리포노믹스(sleeponomics)가 등장했다. 잠이 부족한 직장인들을 위한 수면 카페가 등장하고, 숙면을 위한 각종 상품이 불티나게 팔린다. 목침 하나 궤면 달콤한 낮잠에 빠져들던 옛사람들의 여유는 저리 가고, 침대는 과학에 이어, 베개의 과학까지 우리의 지갑을 열도록 만든다. 

이렇게 다큐는 부족한 잠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부터, 그 잠을 줄이도록 강요된 사회에서 결국 수면 장애까지 앓게 된 현대인들의 사정을 사례별로 다룬다. 그렇다면 이제 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게된 현대인들에 대한 해법은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시대가 현대인들의 부족한 잠을 해결해 줄 수 없듯이, 다큐의 처방은 또 다른 '침대의 과학'으로 귀결된다. 

과학이 숙면을 인도하리라? 
다큐는 등장했던 사람들을 수면 검사실로 인도한다. 수면 다원 검사를 통해 다양한 수면의 내용을 들여다 본다. 너무도 잠을 잘자서 활동명조차도 슬리피가 된 가수 슬리피, 검사 결과 그는 잠을 잘 자는 게 아니었다. 심한 코콜이로 인한 수면 무호흡증, 그리고 부정맥, 그것들이 그를 자도 자도 또 잠을 자도록 만들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수면 장애를 보이던 출연자들은 대부분 검사 과정에서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 길었다. 또한 수면 과정 중 깨어나는 각성도 빈번했다. 반면 하루 4시간만 자도 20시간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던 이른바 나폴레옹 수면법의 김쌍규 씨는 입면도 쉬웠으며, 수면 도중 깨는 각성도 없이 깔끔하게 수면의 사이클에 몰입했다. 

사람이 잠을 자는 과정은 총 4단계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그 중 1, 2 단계는 주변의 소음에 무뎌지면서 잠에 빠져드는 단계, 대부분 수면 장애에서 잠이 드는데 힘이 들어 하는 사람들은 이 과정에 문제가 있다. 다음 3단계는 깊은 잠에 빠져드는 단계, 이 과정에서 몸과 뇌가 휴식을 취하며 손상된 세포가 복귀가 되고, 노폐물들을 배출하여 새로운 활동을 할 수 있는 몸의 상태를 이루는 단계이다. 이 단계가 순조롭게 되지 않았을 때 면역성이 저하되어 당뇨와 같은 성인병이나 각종 암, 감염 등에 취약해질 수 있다고 한다. 잠을 자는 도중 자꾸 깨는 경우, 이 3단계의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게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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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는 김쌍규 씨와 같은 깔끔한 입면과 각성없는 잠의 이상적 상태를 위해 '과학'을 제시한다. 우선 슬리피나 직장인 오지용씨의 경우에서 처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수면 무호흡증의 사례를 살펴보고, 작가 최성우 씨 사례의 이갈이 치료법도 소개한다. 더불어 암막 커튼과 가습기, 안락하고 적절한 침구들의 환경을 제시한다. 결국, 슬리포노믹스의 범주이다. 

과연 자본 2조원의 슬리포노믹스는 우리를 수면 장애에서 구할 수 있을까. 밤샘 작업이 필요한 방송국의 작업 환경, 다섯 번째 도전해야 하는 수능, 그리고 남보다 한 시간 더 자는 게 불안으로 이어지는 고3의 시간, 4시간 자면 개운하다는 사장님 앞에서 조금 더 자는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처럼 고개를 수그려야 하는 회사 생활, 과연 이런 현실의 스트레스가 암막 커튼과 푸근한 잠자리가 구원해 줄 수 있을까? 혹 그 무엇도 해결해 줄 수 없는 현대인을 위한 당의정같은 플라시보 해법이 아니었을까. 

by meditator 2018. 9. 3. 16:14

지난 29일 소상공인들은 광화문 광장에 모여 '최저 임금 제도 개선 국민 촉구 대회'를 열었다. 소상공인 총궐기의 날로 정한 이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백여 업종, 지역별 소상공인 3만 여명(경찰 측 추산 1만 5000 명)들은 최근 결정된 최저 임금제 결정과 관련 소상공인들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며, 최저 임금 차등 적용 등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소상공인들의 입장을 강력하게 밝히며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소득 주도 성장'을 내세운 정부는 그에 맞춰 '최저 임금제'를 인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저 임금제'의 인상은 낮은 알바 시급 등에 의존하여 근근히 영업을 해온 자영업자들에게 타격을 주게 되었다고 소상공인들은 주장한다.  결국 이들이 '생존 보장'을 외치며 거리에 나서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올 한 해 폐업하는 자영업자는 1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전년보다 10% 뛰어 역대 최대치인 87.9%를 기록했다. 2년도 안돼 폐업하는 사례가 늘고, 10곳 중 4곳이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자영업자의 폐업 속출은 '최저 임금제'때문만일까? 지난 8월 30일 방영한 <다큐 시선- 당신의 음식값, 만족하십니까>는 최저 임금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상공인의 딜레마를 설득한다. 




560만 자영업자들이 빠진 블랙홀
족발집을 6년 째 운영하는 석희철씨는 요즘 하루에도 12번 씩 가게를 접을까 고민한다. 그만이 아니다. 석씨 가게 주변에 2~30년 정도 자영업을 하던 분들도 입을 모아 '이런 경기는 없었다'라고 혀를 내두른다고 전한다. 작년부터 내리막길이던 가게 운뎡은 이제 반토막이 났다. 두 솥 가득 끓여대던 족발은 이제 겨우 한 솥, 그 마저도 최근엔 하루 2만원치기 장사, 아니 그보다도 못할 때도 있다. 최저 임금제를 떠나, 장사가 안되니 인건비가 감당이 안돼서 알바는 주말에만 쓴다. 불금, 불토가 없어진지 오래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면 돈이 된다던 자영업의 장점은 이제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몸을 움직여 돈을 벌던 기쁨을 누린 지가 언젠지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프렌차이즈는 좀 나을까? 
피자 브랜드를 운영하는 최은자씨와 함께 매장을 운영하던 남편은 매장을 아내에게 맡긴 채 다른 일을 찾아 나섰다. 대출까지 받아 운영비를 마련하는 상황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도대체 자영업자들을 블랙홀에 빠뜨린 원인은 무엇일까? 어느 한 가지가 아니다. 물론 소상공인들을 거리로 내몬 최저 임금제도 있다. 하지만, 나날이 치솟는 임대료, 올해와 같은 폭염에는 청전부지로 치솟는 채소값처럼 감당할 수 없는 자재 구입비, 그리고 프렌차이즈의 경우 가맹비, 거기에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배달 앱으로 인한 비용 들이 몸을 움직인 만큼 돈을 벌던 자영업자들의 이익을 찢어발겨 나누어 가져간다. 다큐는 우리가 음식값으로 지불하는 비용 속에 숨겨져 있는 '알수 없는 비용', 그 중에서도 최근 활성화되고 있는 배달 앱 시장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배달의 화려한 리바이벌, 배달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배달을 시작한 된 구한말이다. 상상이 되는가, 거리에 해장국과 설렁탕이 배달되는 풍경이. 그 설렁탕 그릇을 대체한 건, 짜장면의 철가방이다. 하지만, 테이크 아웃의 경제성이 등장하면서 '배달'은 주춤하는가 싶었다. 그랬는데, 최근 1인 가구의 확산과, 배달 앱의 활성화와 함께, '딜리버리', 배달 산업이 다시금 활성화되고 있다. 

어느 덧 한 해 15조원에 육박한 배달 앱 시장. 배달 앱을 띄우고 화면에 클릭 한번만 하면 내 집 앞까지 먹고 싶은 걸 배달해 주는 이 '편리한 신기술'이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을,  자영업자들에겐 더 많은 이득을 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 '신기술'의 앱은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을 줬을 지는 몰라도, 자영업자에게는 '비용의 파이' 그 지분을 더 쪼개버렸다. 

앱에 자신의 가게를 올리는데 필요한 수수료, 매달 나가는 회비, 거기에 요구되는 '박리'에, 배달로 인한 매출 감소는 자영업자들에게는 결국 '영업 이익의 감소라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배달로 인해 많이 팔게 되었는데 손해가 나다니. 거기엔 '배달앱'이라는 중간 마진 과정이 고스란히 자영업자의 부담으로 얹혀지는 시스템의 문제가 있다. 

최근 배달앱 활성화와 함께 부흥된 배달 시장은 예전의 배달 중심 시장과는 질을 달리한다. 중국집마다 고용된 철가방은 옛일이 되었다. 더 이상 배달원을 각 업소가 고용할 수 없는 고비용 인건비 시장에서 이젠 배달은 배달 전문업체의 일이 되었다. 즉 신종 직업군으로서 어플 노동자, 배달 라이더들이 등장한 것이다. 

10년째 프랜차이즈 치킨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박세창씨. 프랜차이즈 업체에 내는 수수료가 15%이다. 인건비를 빼고 나면 마진이 거의 없다. 그런데 최근 배달앱이 활성화되면서 운영 비용이 추가되었다. 예전처럼 전단지를 돌려서 직접 가게에 주문을 하던 시절이 지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배달앱이 고약하다. 배달앱에 자신의 가게를 올리기 위해 경매비를 내고 입찰을 해야 한다. 인기 지역의 경우 50만원에 육박한다. 2011년에 본격화된 배달앱은 메이저 3사의 독과점 사업이 되었다. 그 중 가장 잘 나가는 1위 업체는 경쟁 입찰 방식을 취하고, 나머지 업체들도 수수료를 받는다. 결국 돈 놓고 돈 먹기가 되는 현상, 영세 사업자에게 그 비용은 언감생심이 되고, 정작 정보를 통해 편리함을 얻고자 했던 소비자에게는 왜곡된 정보를 전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심리 상, 최초 로딩된 7개 업체 중 하나를 선택하기가 십상인 앱, 결국 더 많은 돈을 들여 홍보하거나, 이 시장에서도 방치되는 게 자영업자들의 숙명이 되었다. 

변화된 산업 구조, 뒤따르지 못하는 제도적 보호 
하지만, 너도 나도 배달앱을 켜는 세상에서 이 시장을 외면하는 건 쉽지 않다. 프랜차이즈 사업의 경우 애초에 계약 당시 설정된 마진율은 고정적이다. 그런데 배달앱 등 시장 상황이 변화하면서 운영 비용이 추가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김종진 한국 노동사회 연구원 부소장은 지난 30여년 간 우리 사회의 산업 구조가 IT 정보 기술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산업 구조의 중심이 서비스 산업으로 이동했다고 정리한다. 개인 사업자인 자영업자들이 산업 구조의 중심이 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2차 산업 구조에 기반한 법제도는 근로 기준법, 최저 임금제, 산재 비용 등에서 이런 산업 구조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최근의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다 짚었다. 즉, 자영업자들이 가장 활성화된 산업의 중심인데도 전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산업 구조 환경에서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영업자들만이 아니다. 바로 그들의 손발이 되어 배달을 하는 배달 앱 노동자들 역시 법의 사각 지대에 놓여있다. 

하루 종일 진수성찬을 배달해주다 오후 다섯시가 되어서 첫 끼를 때우는 이용훈씨. 그는 이제 4년차 배달 대행 라이더이다. 배달 대행업체 소속, 1.5km 미만의 배달지에는 건당 3000원에 배달을 대행해주는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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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배달은 '위험'과의 동침이다. 같은 지역에서 배달을 하는 30여 명의 배달원들, 그들은 콜이 오면 그걸 잡아서 배달을 하는 시스템으로 인해 주행 중에도 늘 스마트폰을 켜고 콜을 잡아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위험은 그것만이 아니다. 40 분이내 배달을 마쳐야 하는 앱배달의 '덕목'은 당연히 교통 법규를 지킬 수 없게 만든다. '빠른 시간 안에 목표달성'이라는 대한민국의 신조가 가장 극적으로 실현되는 직종 배달 라이더, 그는 한 시간안에 7개의 콜을 수행해 내며 2.8000원을 번다.

평균 근속 6개월, 근로 계약서는 없다. 1년에 두 세번 사고가 나는게 일상화되는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감수하고 산재 보험을 드는 배달 대행업체는 없다. 사고가 나면 업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청약 철회', 배달 사고가 날 경우, 앱, 자영업자, 배달 대행업체로 나뉘어진 책임 소재는 종종 그 책임이 배달 라이더들에게 뒤집어 씌워진다. 

앱에 의한 배달은 통신 판매법에 의거한다. 하지만 결제는 전자 상거래 법에 속한다. 이런 식이다. 배달 앱의 등장, 그 수족이 되는 배달 대행업체와 배달 라이더들, 그리고 그로 인해 운영 비용의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이 플랫폼에 기댈 수 밖에 없는 자영업자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심화되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손실 증가는 이런 변화된 산업 구조와 그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의 문제에 기인한 바가 크다. 이미 수직화된 산업 구조로 독과점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는 배달앱 사업체 들에 대한 경제적 법적 장치의 미흡한 가운데, 이미 기존 프랜차이즈 본사와의 불공정한 계약 관계에 놓인 자영업자들은 다시 한번 이 새로운 플랫폼 기반 사업에서 '을'이 되어 이익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안그래도 저성장으로 인해 소비가 위축되는 상황에서 이익의 파이는 원자재, 가맹점비, 배달앱, 카드 수수료, 건물 임대료, 인건비 등으로 쪼개어 지니 자영업자들이 망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영업자 만이 아니다. 한때는 청소년들의 주된 알바였던 배달 라이더가 이젠 30대 가장들의 일터가 되어간다. 새로운 산업 구조에서 등장한 이 신종 노동자들은 하지만 여전히 '알바' 수준으로 법적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결국 사회, 산업은 변하는데, 자본은 그에 맞춰 발빠르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데, 법과 제도는 그를 쫓아가지 못한 채 개인인 자영업자들과 배달 라이더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지우고 있는 것이, 바로 광화문 광장으로 나선 소상공인들의 뒷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최저 임금제'를 어찌한다고 해서 폐업율을 줄이기는 쉽지 않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한 무인 주문기, 중국에서 활성화된 스맛폰 결제 시스템 등 온라인과 오프 라인이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산업 환경에 맞는 제도적, 법적 환경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by meditator 2018. 9. 1. 16:16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부분을 , 부품을 생산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으로 만들어진 조립품 같은 것.
우리는 지구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서로를 조립하고 있다
                                             -     김중혁, 메이드 인 공장

자본주의 사회는 '물화'의 세계이다. 모든 인간은 '사물'을 통해 관계맺고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가 고도화되어가면서 그 '물화'의 체계가 변화되어지고 심화되어졌을 뿐, 여전히 우리 관계 맺음의 근간에는 '사물'이 있다. 하지만, 거기서 본질은 그 '사물'과 '사물'로 맺어지는 체계의 핵심이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찌기 맑스 선생은 이 '물화된 세계'인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일갈했다. 지난 27일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가장 흔한 사물인 '운동화'를 통해, 그 속에 소외되어 있던  '인간의 세계'를 한껏 드러낸다. 





사물의 이야기, 곧 인간의 이야기 
'사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시도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일찌기 1986년 일본의 공장을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와 함께 견학하여 당시 일본의 산업을 생생하게 그려낸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뜨는 나라의 공장>이 그러했고, 2014년 한겨레 신문을 통해 써내려간 칼럼을 출간한 김중혁 작가의 < 메이드 인 공장> 역시 공장이란 공간을 통해 사람과 시대와 공간을 복기해내었다.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철학적 메시지를 건져내는데 탁월한 알랭 드 보통은 <일의 기쁨과 슬픔>을 통해 '일', 즉 노동의 현장의 생생함을 삶의 철학으로 설파한 바 있다. 물건이 드나드는 항구에서 시작된 '화물선 관찰하기'로 부터 시작되는 그의 시선은, 이내 물류로, 그리고 그 물류의 흐름을 타고 퍼져나가는 통조림,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지나치던 그 통조림의 라벨이며, 그리고 간과되기 쉬운 사무의 자잘한 업무들, 회계, 창업 등등, 말 그대로 '일'의 전반적인 영역에 세심한 관찰과 촌철살인의 혜안을 내보인 바 있다. 거친 바다에서 잡힌 펄떡이던 참치가 어떻게 '사람들의 손'을 통해 통조림 캔으로 변신하게 되는가, 그 과정에 채곡채곡 쌓인 '직업'의 여정은 새삼 그 결결이 쌓인 사람들의 행보에 전율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ebs  다큐 프라임 - 내 운동화는 몇 명인가>는 tv로 온 알랭 드 보통 판 <일의 기쁨과 슬픔>과도 같다. 우리가 매장에서 자신의 개성과 패션을 따라 선택하는 운동화 속에 담겨진 사람들, 그들의 일이 한 시간 여의 다큐를 통해 묵직하게 전달되어져 온다. 




내 운동화는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시작은 마치 남태평양의 참치 잡이처럼, 운동화의 원료가 생산(?)되는 말레이지아 열대 우림으로부터이다. 

마이딘 빈 안실, 67세, 255mm의 신발을 신는 그는 말레이시아 뚜아란  숲에서 운동화 밑창의 원재료인 고무를 채취한다. 18세가 영국 식민지가 된 이래 독립 이후까지 말레이지아의 주요 산업이 된 고무 채취 산업의 종사자이다. 허리에 모기향을 매고, 고무 나무에 칼집을 내서 고무액을 채취하는 작업을 1분에 다섯 그루, 그와 같은 일꾼들이 하루에 500그루 분량을 채취한다. kg당 만원을 받는 오로지 손으로만 해야 하는 작업, 70~80 링긴, 하루 20만원 정도의 벌이, 젊은 시절 한때는 도시에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지만 6명의 자녀와 12명의 손주를 키워낸 이 일이 혹시라도 고무 신발을 신은 관광객이라도 마주치면 반가움이 앞설 정도로 이젠 '자부심'이 되었다. 

마이딘이 채취한 고무는 모아져서 화학 약품으로 세척하여 불순물을 제거하고 얇고 부드러운 고무로 만드는 과정은 195명의 말레이시아원주민이 주축이 된 사바의 가공 공장에서 이루어진다. 그 가운데 카트리나 빈티 와시(45)가 있다. 일찌기 중학교를 마치자 마자 인도네이사인 남편과 결혼한 후 좀 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사바 지역까지 온 그녀가 주로 하는 일은 35kg 단위로 만들어진 고무 블록을 포장하는 일,  대부분의 원주민이 그렇듯이 농사일과 공장 일을 병행하는 그녀와 남편의 맞벌이는 '자식 교육'에 집중되어 있다.  지금보다 더 성공한 '고무 공장 홍보' 일과 같은 사무직으로 전향을 꿈꾸는 그녀에게 '고무'는 풍족한 삶의 근원이다. 

다른 이의 삶과 얽혀있는 한 사람의 삶, 
말레이시아에서 채취되어 1차 가공된 고무는 멀리 슬로바키아까지 여행을 떠난다. 슬로바키아 파르티잔스케는 1930년대 후반 신발 공장이 생기며 형성된 도시, 그곳에 도착한 고무는 본격적으로 운동화로의 변신을 시작한다. 

요제프 샤레이와 얀 쿠노하는 10대 후반부터  이 공장에서만 48년, 40여년을 일했다. 퇴직을 했었지만 다시 공장으로 돌아온 두 사람, 여전히 기계의 소음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거대한 롤러로 고무를 펴서 신발에 맞춰 재단하고 운동화 갑피에 얹는 일. 1939년에 만들어진 공장 1년에 4백만 컬레를 생산하며 만 오천명의 노동자가 북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슬로바키아의 올림픽 영웅 요제프가 이 공장에서 만들어진 운동화를 신고 트랙을 내달리던 88년, 그 시절을 정점으로 더는 공장의 기계는, 공장의 공정은 새로워지지 않았다.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사양산업이 되어가는 운동화 산업. 퇴직했던 요제프나 얀이 다시 돌아와서 일해야 될 정도로 일손이 귀해진 공장, 이들은 자신들이 나이먹어가듯, 자신들의 시대가 이 낡은 공장과 함께 저물어 가는 걸 실감하며 슬퍼한다.
신발과 함께 경력 30년 그녀의 손에서 운동화 패션이 완성되는 갑피 제작에 종사하는 마리아 아담 초바(57)에게 역시 공장은 나의 집, 그녀의 인생이다.



가장 일상적인 운동화를 전해주는 가장 일상과 먼 삶을 사는 사람들 
저물어가도 여전히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운동화는 슬로바키아의 공장에서 탄생하여, 비로소 운동화로서 첫 여정을 떠난다. 슬로바키아에서 독일 함부르크로, 그리고 다시 항구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해 싱가폴과 홍콩을 지나, 부산까지 9800컬레의 동료들과 함께 컨테이너 박스 안에 담겨 5주간의 여행에 몸을 싣는다. 

그 여정에는 이제 갓 신혼의 일등 항해사 35세의 한국인 권태수씨와, 12년 경력의 갑판원 36살 미얀마 인 묘 코 코우 씨가 함께 한다. 선실에서 화물을 관리하고 선체를 정비하는 일을 '사무'하는 항해사와, 직접 몸을 움직여 컨테이너를 고정하고 청소하는 갑판원의 '협업'을 통해, 그들이 모르는 컨테이너 속의 신발들은 안전하게 부산에 도착하여 거리를 누빌 수 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는 1억 8000만 컬레의 신발을 수입했다. 말레이시아, 슬로바키아, 무심코 신은 내 컨버스 운동화 한 컬레가 그리 오래 여행의 산물이었다니, 그리고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였던 말레이시아의 고무 채취 인부와 가공 공장의 아줌마 노동자, 그리고 운동화가 평생의 열정이라는 슬로바키아의 노익장 노동자, 그리고 컨테이너 선의 한국인 항해사와 미얀마인 갑판원 등이 내가 신는 운동화 한 컬레에 담겨 있다. 아니 함부르크 항에서 컨테이너 선을 옮긴 부두 노역 노동자와, 함부르크까지 옮긴 트럭 운전수와, 말레이시아에서 바다 건너 슬로바키아까지 옮긴 선원들은 또 어떻고, 물류만이 아니다. 고무로부터 시작했지만, 운동화 갑피가 되는 천과 가죽의 원료로 부터 시작되면 또 얼마나 수많은 사람이 더해져야 하는 건지, 내게 운동화를 건넸던 그 가게의 아르바이트 생 또한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세상은, 세상 사람들은  내 운동화 한 컬레를 통해 서로 이어지고 있다. 운동화는 그저 운동화가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며 '열정'이요, 삶이다. 일찌기 어느 시인이 니가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며 연탄재 함부로 발길질 하지 말라 하셨는데, 이젠 뜨거워졌던 연탄재 때문이 아니라, 운동화가, 그 운동화에 담긴 연탄만큼 활활 타올랐던 수많은 삶이 무거워 함부로 발길질을 못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18. 8. 29. 16:24

eidf 페스티벌 경쟁 부문에는 세계 각국에서 출품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포진되어 있다. 그 중에서 <마지 도리스>와 <모리야마 씨>는 한 사람의 삶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한 사람은 그저 일인이 아니다. 그 '개인'을 통해 '사회'와 '문화'를 바라본다. 우리가 아는 세상 너머에 여전히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향유하고 지키고자 하는, 혹은 즐기고자 하는 '문화'를 통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지평은 넓혀져 간다. 




74살에도 건재한 순록지기이자, 예술가 마지 도리스 
어릴 적 읽었던 북유럽 동화책에서 '라플란드'는 하얀 자작나무가 자라고 오로라가 빛나는 신비한 북극의 땅이었다. 순록과 눈썰매가 있어야 그곳에 갈 수 있는. 동화 속에서 만난 그곳이 실존이라기 보다는 환타지였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스웨덴의 1/4을 차지하는 노르웨이와 핀란드와 국경을 마주한 이곳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가 쉽겠는가. 하물며 그곳에 일찌기 석기시대부터 순록을 키우며 살던 원주민 사미족이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마지 도리스>는 바로 그 라플란드의 원주민 사미족의 대표적 예술가이다. 1970년대부터 사미족의 전통적 공간인 라플란드의 정서가 담뿍 담긴 목공예, 그림 등으로, 연극으로 예술 활동을 해오던 마지,  2017년의 겨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웨덴 북부 파렌자르카에서 사는 그녀에겐 그녀의 예술 활동만큼이나 겨울을 맞이하여 그녀의 농장으로 내려온 순록을 키우는 일이 중요하다. 

그녀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거의 다섯 시간을 걸려 이끼를 씻고 분류하여 순록에게 먹이는 일이다. 혹시나 솔잎이 섞이면 배탈이라도 날까 섬세하게 비벼대는 손길의 분류, 하지만 나누고 씻고 나누어주는 일상이 매일 매일 오다시피한 한 걸음 떼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 하는 눈 속에서는 큰 일이 된다. 하지만 이 쉽지 않은 일을 마지는 지난 20여년간 해왔다. 그녀의 부모님이, 또 그 부모님이 해왔던 전통대로. 봄이 되어 순록이 산으로 떠나면 2주 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할 만큼, 순록은 그녀의 가장 최측근이 되었다. 순록을 떠나보내고 나서야 젊은 시절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마지. 

다큐는 찌글찌글한 주름으로 뒤덮인 얼굴이 무색하게 긴 장화와 두터운 옷을 입고, 묵묵히 지붕에 올라 삽으로 눈을 치우고, 눈 속을 뚜벅뚜벅 걸어 순록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는 마지의 일상을 통해 전통적 삶을 끈질기게 지켜내는 강인한 한 사람을 그려낸다. 오로지 눈과 순록과 광활한 북극의 하늘만이 채우는 그 곳에서 알바를 하러 온 아프가니스탄인의 물음처럼 '외로운' 일상을 이어나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엄숙'하다. 그리고 그 엄숙함의 행간을 채우는 건, 촉박한 전시회의 일정에 맞춘 예술 작업, 음악들. 순록의 형상을 한 목공들, 그리고 라플란드의 자연을 닮은 그림은 그 자체로 마지의 삶이다. 

일찌기 파리, 캐나다 전 세계를 돌며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유롭게 살던 젊은 날, 그리고 기나 긴 칩거, 이제 다시 그녀는 라플란드의 언어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탄광과 모피를 위해 침략당했던 땅, 갱도에서 신음했던 동포들의 역사를 호소하며 자신들의 전통과 언어의 공존을 호소한다. 74살의 나이에 순록을 돌보고 예술 활동을 이어가는 게 쉽지않다지만 다음 겨울 순록과의 해후를 기대하는 여전히 꿋꿋한 라플란드의 대표적 예술가, 마지의 일상을 통해 라플란드가 빛난다. 

내게 집은 보다 사적인 공간이며 의미있는 곳이며 
완벽하지 않은 곳이고 최신 유행을 따라가려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곳이며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아등바등대지 않는 곳이다. 
집은 무엇보다 자신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줄리 포인터 애담스, <와비사비 라이프> 



노이즈뮤직처럼 편안함은 상대적- 모리야마 씨가 만든 도시의 숲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이제 더는 모리야마 씨에게 '집'은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허물었다. 그리고 그곳에 숲을 만들었다. 그리고 숲 사이에 하얀 블럭이 점점이 박혔다. 층고에 따라 확장된 정육면체, 그곳에 뚫린 창문, 창문에 펄럭이는 하얀 커튼, 그리고 하얀 건물과 파아란 하늘은 커튼을 이웃하여 혼연일체가 된다. 가장 직선적인 공간이 가장 자연친화적인 듯 느껴진다. 아마도 거기엔 '집' 대신 그저 나무 사이의 '공간(큐브)'이 있기 때문일 듯.

모리야마 씨의 집은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니시자와 류에가 지은 모리야마 하우스는 그렇게 동경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건축물이다. 하지만, 그 집은 만든 건 니시자와 류에이지만, 모리야마 하우스에 '문화적 향취'를 더한 건 바로 모리야마 자신이다. 마치 오래전 옛집의 마당처럼 나무 아래에 마련된 대야에 물을 받아 세수를 하고, 이 '공간과 저 공간을 옮겨다니며 대청 마루처럼 건물 창 밖으로 발을 늘어뜨리기도 하고, 창문에 거의 머리가 나오다시피 드러눕기도 하고, 하늘이 보이는 창가 소파에 다리를 걸치기도 하면서 가장 편한 자세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독서'를 하는 일상, 그리고 그만의 비밀 공간인 지하 음악실을 찾아 경청하는 음악이 된 소음들(노이즈 뮤직), 

이탈리아에서 온 감독 일라 베카와 루이즈 르모안은 일본의 대표적 노이즈 뮤지션인 오모토 요시히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전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 독특한 인물이 궁금해져 그와 일주일을 보내고, 그 시간은 작품이 되었다. 창문 여닫는 소리, 별 거 아닌 잡음들이 모여 하나의 음악이 되듯, 모리야마 씨는 '편안함은 상대적'이라 한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그대로 그의 공간 속을 관통한다. 열 개의 큐브 중 그가 사용하는 네 개를 제외한 나머지 공간들은 대여되었고, 대여된 건 그저 직육면체의 하얀 벽과 창문들 뿐, 그 안의 공간은 소유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세계로 존중된다. 하지만, 그들은 나무 사이, 건물 사이 틈인듯, 마당인듯, 골목길인 듯한 공간에서 종종 만나 이방인과 조우하고, 어울려 술잔을 기울이고, 빛나는 불꽃을 태운다. 

감독이 찾아가기 일주일 전 세상을 떠났다는 모리야마 씨의 애완견, 그 애완견은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다. 그곳을 지키는 작은 조각상, 그 조각상의 의미를 묻자, 모리야마 씨는 짧은 영어로 난감해 하며 설명한다. 예수와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종교가 없으니, 그건 이 물병이랑 다르지 않다고. 모리야마 씨의 이 짧은 설명은, 마치 소음이 모여 음악이 된 노이즈 음악처럼, 그저 하얀 큐브에 불과한 공간이 나무 사이에 자리 잡아, 그곳에 사람이 깃들여 살며 따로 또 같이 삶의 공동체를 형성해 가는 집이 아닌 집이 된 공간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곳에 깃들여 유유자적 음악과 책으로 공간을 채우는 최근 트렌드로 대두된  '빠름에서 느림으로', '홀로에서 함께로', 그리고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변화시키는 '와비사비'적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와비 사비 (Wabi-sabi, わび・さび)일본의 문화적 전통 미의식,미적관념의 하나이다. 투박하고 조용한 상태를 가리킨다.)






by meditator 2018. 8. 23. 20:57

 아버지에게 딸이란? 그런 속담이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이라고. 아들 딸 차별이 아니라, 아들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단 말은 하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딸은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존재다. 그렇게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면'? 아버지를 잃고 거리로 나선 소녀가 있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 '희망'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이집트 소녀 아말이다. 아말은 아버지의 바램대로 '희망'찬 삶을 살았을까?

2010년 튀니지에서 일어난 시위를 계기로 '아랍 민중들은 독재 정권에 대항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 '아랍의 봄'이라 명명된 이 민주화 운동은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우리에게는 피라미드의 나라로만 막연하게 알려진 관광국, 하지만 국민의 40% 이상이 빈곤선 아래의 삶을 유지하는 빈부 격차가 심한 나라, 그곳에서는 이미 2008년 야권 지도자들과 노조를 중심으로 시민 불복종과 파업으로 시발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잃고 거리로 나선 소녀 
그리고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한 청년 칼리드 사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 사람들은 무바라크 정권의 인권 유린 행위에 항거하여 전국적인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평화적 시위를 주장하며 시위대는 행진을 했지만 진압 과정에서 다수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제 막 십대에 들어선 소녀 아말의 아버지 역시 목숨을 잃었다. 경찰이었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시위에서 진압하던 경찰들의 맞은 편에 섰다. 그리고 이제 소녀 아말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거리로 나선다. 

다큐는 혁명 당시 14살이던 아말을 그녀가 19살 성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 2011년부터 2016년까지 쫓는다. 14살의 소녀 아말은 사라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정부에 대한 분노로 승화시키며 거리로 나선다. 짧은 머리, 후드 차림의 소녀는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거리를 지킨다. 

그리고 그렇게 거리에 선 아말의 현재 사이에 간간이 아버지가 찍었던 어린 시절 아말의, 이제 막 앉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티없이 밝기만 했던 화목했던 가정의 딸 아말과 그 가족의 특별한 날 찍었던 홈 비디오를 끼워 넣으며, '민주화 운동'이 아말의 가정에, 아말에게 가져온 비극을 대비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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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그리고 여자 
상대적으로 개방적이라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에서 '소녀'인 아말이 거리의 투사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늦은 밤 함께 시위를 벌이던 동료들은 그녀에게 더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라 타이른다. 반발하는 아말, 나도 너희랑 똑같은 동지인데, 왜 나만 돌아가라고 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너가 여자이니까.' 

그 동지의 대답은 아말은 좌절시킨다. 하지만, 또래로 보이는 남자들과 축구를 하며 밝게 웃으면서도, 때로는 그들이 자신을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지 않고, 아니 남자처럼 대했을 때, 역시 아말은 혼란스럽다. 그러면서도 늘 아말은 당당하게 자신은 여자이지만 너희와 똑같은 동지라 주장한다. 

14살, 15살, 16살, 거리의 투사로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아말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녀의 첫사랑이었던 동지는 2013년 군부 쿠데타 과정에서 아버지처럼 사라졌다. 아말은 진압하는 경찰들에게 머리채를 질질 끌려다녔다. 그리고 혼돈의 과정은 그녀의 팔목에 몇 개의 상흔을 남긴다. 

거리에서 그녀가 목격한 진실에 의거, 선거를 통한 덜 나쁜 사람을 뽑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선택적 정의에 분노하던 아말,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에게는 선거권이 없다. 그저 편의적 선택을 하는 엄마와의 설전 뿐. 그리고 동지이자 새로운 연인이 된 친구는 그녀를 '여성'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려고 하는데. 

1981년부터 장기 집권했던 무바라크 대통령을 시민들의 힘으로 권좌에서 내몰 때만 해도 이집트에는 민주화의 서광이 비춰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14살 소녀 아말이 19살 성인의 문턱에 들어서기 까지, 이집트는 선거를 통해 집권했던 이슬람 형제단 소속의 무르시 대통령이 전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종교독재'를 하다 결국 1년 여 만에 군부에게 감금당하고 만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압델 파타 엘 시시 장군,  2014년 시위도중 잡힌 사람들에게 무더기 사형 선고를 비롯하여, 자신을 비판한 앵커 추방 및 길거리에서 시민 인터뷰한 기자 체포 등의 언론 탄압 등으로 민주화 세력을 짓밟는 한편,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하여 2018년 현재까지 정권을 연장하고 있다. 아랍의 봄은 이게 끝이 안보이는 겨울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거리로 나섰던 소녀 아말은 어떻게 되었을까? 엄마와의 설전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던 소녀는, 여자라 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던 당찬 소녀는 이제 히잡을 곱게 쓰고, 대학 시험 준비를 하는 소년가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거리로 나서 '공부'라는 것과 담쌓고 지냈던 시간, 약학을 공부하고 싶던 소녀는 대신, 판사인 엄마,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법학을 전공하고자 한다. 너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가던 그 경찰이 되는게 괜찮겠느냐는 친구의 질문, 그 질문은 아말에게 숙제로 남는다. 스스로 체제의 일부분이 되어 가는가, 아니면 그 체제의 내부에서 새로운 흐름이 될 것인가. 낙오자가 될 것인가. 실패한 혁명, 아버지와 연인, 사랑하는 이를 잃어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소녀는 이제 다시 출발점에 섰다. 

by meditator 2018. 8. 21. 17:56

지난 4월 16일 대통령 직속 교육 위원회는 2020년 대입 제도 개편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다. 이에 '공론화 위원회'가 구성되고, 위원장에 전 김영란 대법관을 위촉했다. 또한 대입 제도 개편 특별 위원회와 공론화 위원회를 구성하고, 절차에 따라 공론화 과정을 거쳐 8월 3일 대입 제도 개편 공론화 위원회 결과를 발표하고, 7일  특위의 교육제도 개편 권고안을 결정했다. 네 달 여의 교육 공론화 과정, 이 과정은 무엇을 남겼을까? 8월 16일 <다큐 시선>이 이 '공론화'에 대해 알아본다.




평범한 시민들의 숙의를 통한 교육 개혁 공론화 
충북 제천에 사는 귀농 12년차 김은중(67) 씨는 옥수수를 모두 따서 팔 것과 보관해 놓을 것을 분류하는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여름날 하루가 한 달 같은 농부의 시간, 하지만 김은중 씨는 그 소중한 시간 중 2박3일을 교육 공론화 숙의 토론을 위해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이미 자식들의 교육을 다 시킨 나이지만 국가 백년 대계 교육의 공론화 과정에 기꺼이 참여를 결정했다. 전화가 걸려올 당시 피씨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만학의 간호학도 김원희 씨(26) 역시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모두 전화 상담원에게 자신들처럼 교육에 무관심한 일반 시민도 그런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렇게 19세 이상 성, 연령, 지역 등 마치 우리 전국민의 분포도를 축약해 놓은 듯한 2000명이 1차 설문을 통해 뽑혔다. 그리고 그들 중 대입 전형에 대한 태도나 책임감 등을 인터뷰하여 최종 400 여명이 공론화의 주역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전국에서 뽑힌 우리 국민의 표본 집단을 통해 하고자 하는 공론화란 무엇일까? 전 대법관이었던 김영란 위원장은 이런 일반인들의 교육 공론화 과정을 재판에 빗댄다. 기업 소송, 하지만 판사는 기업의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양쪽의 의견을 잘 들어보고, 그와 관련된 자료와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취합한 판사는 재판의 결정을 내린다. 그렇듯, 김영란 판사는 공론회 과정에 모인 일반인들에게 '교육 대계의 판사가 되어보심이 어떻겠느냐 권한다. 




공론화란?
그렇다면 이 일반인들이 모여 하는 공론화는 무엇일까? 지난 촛불 혁명 과정에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그간의 '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표명했다. 또한 촛불을 들며 국민이 직접 행동하고 바꿔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에 따라 정책 과정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하는 '직접 민주주의 적 방식'에 대한 긍정적 모색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시작은 신고리 5.6호기 재가동 문제에서 국민의 뜻을 모아 결정을 내린 공론화 과정이다. 

'공론화'는 말 그대로 함께 모여 의논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논의 과정을 통해 '합리적 해법'을 모색해 내는 것이다. 이른바 관심있는 이들 끼리 모여 하는 '공청회'와도 다르고,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막연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전화 여론 조사'와도 다르다. 국가 교육 특위에서 전문가와 각계 각층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4 가지 공론화 의제를 선정하는 것으로 공론화의 여정은 시작된다. 



이 의제들에 대해 각 지역별 국민 대토론회를 통해 알리고, 미래 세대 토론회를 통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한다. 또한 tv 토론회는 보다 광범위한 국민들의 이해를 도모한다.  그 다음에 본격적으로 시민들로 구성된 공론화 위원회의 '숙의 과정'을 1, 2차 숙의 과정을 거친다. 

김원중, 김원희 씨는 공론화위원에 선정된 후 보다 내실있는 토론과 결정을 위해 마치 수험생처럼 보내준 자료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공부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e러닝의 진도가 꼼꼼히 체크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체크 때문이 아니더라도 국가의 중요한 교육 정책에 대한 책임이 공론화 의원들을 '가열찬 학습'에 매진토록 한다. 그저 공부만이 아니다, 신문 기사도 보고, 전문가들의 의견이 어떤 것이 있는가 찾아보기도 한다. 박경희 씨(54)는 입시 교육을 거친 혹은 그 과정에 있는 자녀들과의 대화가 늘었다. 

그렇게 비록 짧은 2주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을 통해 공론화의 의제들을 숙지한 전국의 위원들이 한 곳에 모인다. 두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 공론화 숙의 과정, 모인 시민들은  먹고 자는 시간 외에 토론, 또 토론을 하며 '숙의(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하고 중지를 모은다. 평등하게 모인 이들은 그 누구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비독재성), 숙의 과정을 거듭한다. 




그렇게 4개월 여의 장정, 드디어 8월 3일 공론화 숙의 과정의 결과가 발표되었다.'제시된 의제 1과 2가 각각 1,2위로 결과가 나타났고, 양자 간에 통계적 유의미한 차이는 없다할 만큼 절대 다수가 지지한 안은 없었다. ' 

수능 위주 전형 45% 선발이라는 결과에 대해 대학들은 특별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반면, 여론은 엇갈렸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내놓은 '절대 평가 공약이 후퇴했다'는 반발이 이는 반면, 시민이 참여한 직접 민주주의 과정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평가가 엇물렸다. 200억을 들인 개편안이라지만 결국 또 문제 풀이 수업의 되풀이라는 보잘 것없었다는 의견과 시민성과 전문성이 조화를 이루었다는 의견이 대립됐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결과보다, 애초에 국민들 의견과 상관없이 런치 세트 고르듯 사지선다 4가지 개편안을 제시한 것에서 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즉, 어떤 걸 공론화에 붙일 지에 대한 사전 공감대가 부족했다는 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과연, 대입 제도가 공론화라는 과정에 적합했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었다. 마치 서울 시가 미세 먼지 문제와 관련하여 3000 명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미세 먼지가 심한 기간에 대중 교통 무료라는 극약 처방을 내놓았지만 차가운 여론에 시달렸던 선례에 빗대어졌다. 

그렇다면 뽀족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대입 제도 개선에 대한 공론화 과정은 실패한 것일까? 이미 서구에서는 몇 십년, 혹은 몇 백년의 시행 착오를 거쳐 자리잡은 직접 민주주의적 과정을 우리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즉, 우리 사회에 '정치적 문화'로서는 생소한 공론화에 대한 보다 너그러운 이해가 있어야, 아직 설은 이 제도의 정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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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술에 배부르랴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이런 '공론화'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적 과정은 끊임없이 시도되고, 나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서울 광진구 중곡동에 자리잡은 병원, 오래되고 열악했으며 거기로 뛰쳐나오는 정신 질환자들을 수용했던 이 병원은 동네 주민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당연히 '이전'이 요구되던 상황, 지역 주민들은 섣부른 결정 대신 2009년부터 1년 여의 공론화 과정을 거쳐 이 낡고 오래된 병원을 재건축하여 지역의 랜드마크로 거듭나도록 했다.  끊임없이 회의를 거듭하고, 연구하고, 내 주장과 함께 타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려 애썼던 '20여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365일의 여정'은 이제 병원 내의 역사적 기록으로, 그리고 주민의 자부심으로 남겨졌다. 

성동구에 있는 도선 고등학교의 학생 자치 실험은 이제 타 학교의 탐방 대상이 될 정도다. 교표, 교복은 물론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가사를 짓고 직접 녹음까지 한 교가까지 학교 내 학생들의 많은 활동 들이 학생들의 결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심사숙고하고, 공론화 과정을 통하여 조금 느리더라도 맞춰가며 합의점을 찾아내는 이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이라 학교는 자랑한다. 

유럽 식의 참여적 의사 결정 방법에는 시나리오 워크숍, 합의 회의, 시민 배심원제, 공론 조사, 시민 회의, 원탁 회의 등 다양한 숙의 민주주의적 방식이 있다. 그 중에서 이제 우리는 '공론화'라는 과정을 경험했을 뿐.  공론화의 결과가 아쉽다지만, 막상 전국 토론회에서 그토록 저마다 전문가라 자부하던 시민들의 참여는 저조했다. 물론 전국 토론회 과정 자체가 학생, 학부모 당사자들의 참여 접근성에 대한 배려도 낮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짧은 시간의 학습을 거쳐 공론화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교육 무관심자'에서 적극적인 주체자로 거듭났다. 결과를 차치한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개개인으로 보자면 이보다 더 성공적인 '직접 민주주의의 성과'는 없다. 이제 첫 걸음을 뗀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서의 '공론화', 그 무효성을 주장하기 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과정과 제도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할 때다. 




by meditator 2018. 8. 17. 20:03

2018년 광복절 ebs의 다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했다. 그 문을 연 건 시간을 거슬러 1920년대의 중국 길림성 봉오동이다. 일제 하 독립군을 길러내는 독립군 기지하면, 이회영의 신흥 무관학교가 자리했던 서간도, 러시아 연해주의 최재형이 중심이 된 지역이 대표적으로 꼽아진다. 이에 ebs는 한,중, 일, 러 4개국 취재를 통해,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를 가능케 했던 봉오동 신한촌에 자리잡았던 봉오동 독립군 기지를 방송 최초로 공개한다. 또한, 이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간도 제 1 거부라 불리웠던 최진동, 최운산, 최치홍 삼 형제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소개한다. 






간도 최씨 삼형제의 바톤을 이어 받은 건, 일제 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 등 숨기고 싶은 일제의 만행을 평생에 걸쳐 집요하게 취재한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의 일대기이다. (일본의 역사적 만행과 치부 드러낸 일본인, 그가 남긴 한마디 [TV리뷰] < EBS 광복절 특집다큐 > 하야시 에이다이의 끝나지 않은 기록, 김진수)

그리고 광복절 당일, ebs 광복절 특집은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3.1운동 100주년을 향한 거대한 여정 <역사의 빛 청년>, 그 첫 발을 <하와이 애국단을 찾아서>로 내딛는다. 1년 여의 여정을 이끈 이는 다름 아닌, 꽃할배로 돌아온 이순재 선생이다. 광복을 맞이하던 해 12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던 광경을 기억하던 아이는 이제 8순의 노인이 되어 역사의 빛이 되었던 청년들의 역사를 설파한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마련한 하와이 노동자들의 피땀어린 돈 
그렇게 이순재 선생과 함께 떠난 하와이, 그곳은 서핑과 아름다운 자연의 휴양지가 아니라, 사람 키보다 굵고 거친 사탕수수만이 빼곡이 차라던 고난의 역사가 서려진 땅이다. 1903년, 1월 13일 102명의 한국인이 처음 하와이 호눌룰루에 도착했다. 고국을 떠난지 한 달, 저 마다의 사연이야 있겠지만, 결국 저물어 가는 조선이 그 막막한 태평양을 넘어 자신의 신민을 이 낯선 이방의 땅으로 몰았다. 새벽 4시 반에서부터 꼬박 12시간, 그렇게 하루 70센트를 받으며 보낸 노동의 시간, 그리고 당연히 피부 색이 다른 이들에게 돌아온 편견, 차별, 그리고 고난, 그렇게 호눌룰루에 도착한 한국인들은 30 여곳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일을 했다. 

그렇게 그곳에서 먹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버거웠을 것이 분명했을 사람들, 그런데 그 이역만리 타국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그 먼 곳으로까지 보내버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허리춤을 더 졸라맸다. '하와이 애국단', 이 바로 그들이다. 이순재 선생과 취재진은 1923년 결성되어 독립 운동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대표였던 임성우 선생, 현도명 선생 외에 훈장은 커녕 조명된 적이 없는 애국단의 나머지 단원들의 행적을 밝히고자 하와이로 떠났다. 

오하우섬 와이우아 올리브 거리 1907년에 세워진 교회가 있다. 하와이에 이민온 동포들은 39개의 교회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 중 올리브 연합 교회에 이민의 역사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이순재 선생과 동갑인 김창완 노목사는 자식들이 팔고 떠난 집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이민의 기록을 모았다. 그리고 그 누렇게 낡은 기록들 속에, 숨겨진 역사, 비밀 단체였던 하와이 애국단의 은밀한 도모의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그렇게 낡은 영수증과 종이 쪽지 갈피에서 찾아낸 기록에 증거를 더한 건, 한국 독립 운동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이다. 상해의 임시 정부, 하지만 말이 '정부'지 독립을 위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처지를 김구 선생은 '거지 소굴'이라 표현한다. 쓰레기 통을 뒤져  배추 뿌리로 연명하는 처지, 김구 선생은 독립 운동은 커녕, 생존조차 위협받는 처지에 해외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임성우 선생 등이 편지를 보낸다.  '생색낼 일을 하고 싶은데 자금이 필요하다면 주선하겠다'는 반가운 답신이었다. 그리고 도착한 하와이 동포들의 독립 자금, 여전히 행색은 거지꼴이었지만, 이 해외 동포의 자금은 생존에 급급했던 임시 정부의 전술적 변화, 그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 하와이로부터 온 1000 달러, 그 돈으로 임정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쾌거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준비한다. 폭탄이 되고, 의거의 준비 자금이 된 이 1000 달러는 어떻게 마련된 돈이었을까?

당시 하와이 교포들의 생활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생활이었다, 김창완 노목사가 찾아낸 대한 독립 의연금 영수증에 써있는 금액 10원, 그 돈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의 한 달 월급 15달러의 반 이상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노목사는 감탄한다. '이 돈을 보내고 그 분들은 뭘 먹고 살았나'라고.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딸은 기억한다. 어머님이 가족들도 좀 생각하라고 아버지한테 내던 짜증섞인 하소연을. 

하지만 그렇게 먹을 것조차 아껴가며 모은 돈을 고국으로 보낸 동포들의 이름이나 존재를 찾을 길이 없다. 현도명 선생의 막내 따님의 기억을 쫓아 찾아낸 한 분, 영호 아버지, 그 분을 다큐 제작진은 김예준씨라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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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색했던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 
혹시나 해서 찾아낸 김예준 씨의 아들 영호 씨, 하지만 아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 미군 기지 세탁소 일을 하셨던 김예준 씨, 엄격하고, 인색하기 이를 데 없었던 분, 침대 메트리스 밑에 돈을 모으셨지만 자식들은 어려서 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게 만들었던 분, 그래서 돌아가신 후 무덤조차 찾게 되지 않았던 냉정한 기억만 남긴 아버지. 

하지만 그렇게 자식에게 기억된 아버지는 사실 한인 애국단에서 독립 운동 자금을 관리하셨던 분이었다. 자식들을 어린 나이에 돈을 벌게 만들면서도 침대 메트리스 밑에 숨겨두었던 그 돈은 바다를 건너 임정의 독립 운동 자금이 되었다.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늙은 아들은 뒤늦게 아버지의 숨겨진 역사를 알고 헤매어 아버지의 무덤을 찾은 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비록 늦은 소식이지만 자식들에게 전하며, 그저 인색한 아버지가 아닌 자랑스러운 독립 운동가 아버지를 기린다. 

그런데 왜 당시 하와이의 독립 운동가들은 빛바랜 추억으로만 기억되어야 할까? 거기엔 하와이까지도 미친 일본의 영향력이 있다. 영사관 직원이 밀정이 되어 살피어 단체 계보까지 만들던 상황에서 당연히 임정의 독립 자금 지원은 비밀 활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슬픈 독립 운동의 역사가 있다. 당시 하와이 사회에는 교육, 문화 운동에 주력하자는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는 박용만이 중심이 된 국민회의 갈등이 첨예화되었던 시절이었다. 그 중에서도 미국 내 독립 운동에서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컸던 시절, 그러기에 국민회 계열의 한인 애국단 사람들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그분들의 활동이 해방 후에 알려지지 않은 데는 조국으로 돌아가 대통령이 된 이승만과, 그 수하들의 횡포도 있다. 심지어 해방 후 고국에 돌아가고 싶었던 이분들에게 비자조차 내주지 않을 정도의. 

1997년에서야 한인 애국단 임성우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현도명 선생은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2018년에 찾아간 다큐를 통해서 겨우 김예준 선생님의 존재가 밝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한인 애국단 여덟 분 중 나머지 분들의 '존재'는 그림자에 쌓여있다. 

by meditator 2018. 8. 16. 16:02

73번째 광복절이다. 여느 해와 다르게 각 방송사 별로 풍성한 광복절 특집이 마련되었다. 그 중에서도 kbs는 공영방송답게 다양한 특집을 마련했다.  14일 <시사 기획창- 전쟁 범죄>는 1942년 이래 일본군 1105명의 783건 심문보고서를 바탕으로 위안소가 일본군에 의해 주도적으로 설치 운영되고, 위안부가 강제 모집된 실태를 밝힌다. 15일 광복절 기념식이 끝난 오전 11시에는 <특집 다큐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이 방영되며, 이어 이어 15일 오후 7시 30분 역시 <특집 다큐 -그곳에 여성이 있었다>에서는 여성 양반 부녀자층에서 유행했던 '내방가사'를 통해 여성 독립 운동가의 삶을 조명한다.

그 중에서 <독립 운동을 한 의사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입신양명'의 상징이었던 '의사(醫師)'가  되었지만 일본 제국주의라는 시대적 숙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여 '의사(義士)'된 선열들의 삶을 그려낸다. 




사천의 나창헌, 연변에 박서양, 몽골의 이태준, 하얼빈의 김중화, 북경 이자해, 장가구 김현국 등 1945년까지 '독립 운동'에 참여했던 '의사'들은 156명에 이른다. 그 중에서 포상을 받은 사람은 불과 67명, 아직 89명이 '포상'조차 받지 못한 상태다. kbs1의 <독립운동을 한 의사들>은 독립 운동의 숨은 주역,  '전문직 종사자 의사'로써 독립 운동에 참여한 그들을 '환기'시킨다. 

요즘도 sky하면 다들 한수 접어주는데, 일제 시대 경성 의전이나, 세브란스 의전이라면 어땠을까? 남한이 아니라, 남과 북을 합쳐, 심지어 연해주, 북간도까지 국내외, 해외에서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가던 곳이었을 곳이었으니 그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컸을까? 영화 <동주>에서도 간도에서 연세 의전 문학부에 가는 두 청년을 그곳 친지들이 얼마나 감개무량해 하며 축하해 주었던가. 하물며 여전히 당시에는 '신학문'이었던 '의술'을 공부하겠다고 간 청년들에게 거는 '입신 양명'의 기대는 얼마나 컸을까? 하지만 시대는 그들에게 그저 '환자'를 고치는 '의술'만을 편하게 펼치도록 만들지 않았다. 

몽골에서도 뜨거웠던 독립에의 의지, 이태준
청년 이태준은 1907년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했다. 그가 입학했던 1907년은 군대 해산이 있던 시기, 즉 나라의 운명이 바뀌어 가던 시기였다. 그리고 2년 뒤, 위태로운 나라의 운명에 전세계적으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안중근 의사가 하얼삔에서 '의거'를 일으키셨다. 그 격동의 시절 의대생인 이태준의 운명은 옥고의 후유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안창호 선생을 만나며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안창호 선생이 위태로운 국운에 고뇌하는 젊은 의학도를 알아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의형제였던 세브란스 의전 1회 선배였던 김필순 선생을 소개하셨을 테고, 최남선이 만든 청년 학우회에 기꺼이 입회하게 하셨을 것이다.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비밀 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신민회는 국권 회복운동을 벌이던 중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더는 국내에서는 활동하기 힘들게 된 신민회의 인사들이 대거 망명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은 이태준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신민회 활동을 한 혐의를 받게 되고, 그 역시 '망명'의 길에 나서게 된 것이다. 

단동을 경과하여, 당시 신해 혁명을 통해 근대적 공화 정부를 세운 중국에서 가장 '혁명'의 열기가 뜨거웠던 남경으로 옮겨간 이태준 선생, 그곳에서 해외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취직하여 힘겨운 망명 생활을 보내셨다. 그리고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 3인 중 한 분으로 파견되셨던 김규식 선생과 몽골에 '독립'에 대비할 '무관학교'를 만들기로 뜻을 모아 몽골로 향했다. 

장래가 촉망됐던 세브란스 의전 학생은 1914년 말도 설고, 땅도 설은 몽골의 후레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가 시도하고자 했던 무관학교는 자금과 현지 사정으로 무산되고 만다. 그래서 동의지국이라는 병원을 개업하여 마지막 몽골 왕이었던 복드 칸의 어의로 활약하며 공을 세운 외국인들에게 주는 에르테닌 오치르 훈장을 수여받는가 하면, 몽골 현지에 2차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승전탑 앞에 이태준 기념 공원이 있을 정도로, '극락 세계의 여래불'같은 존재로 현지인들에게 '의술'을 펼쳤다. 

하지만, 그 낯선 몽골에서도 이태준 선생은 독립에의 의지를 꺽지 않으셨다.  의사를 하면서 번 돈으로 김규식 선생에세 2000원의 여비를 제공 하는 등, 독립 운동을 하는 인사들에게 숙소와 교통편, 자금원으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또한 영화 <암살> 속 속사포 캐릭터의 본 인물로 추측되는 당신의 운전사였던 폭파 전문가 마자르를 소개하는 등 김원본 선생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약하였다. 

한인 사회당의 비밀 당원이 되어, 당시 그 어려운 자금 사정을 위해 레닌이 희사했던 자금의 유입을 위해 애썼다. 1차로 12만불의 금괴를 2400km의 먼 거리를 안전하게 수송해낸 선생은, 다시 8만 루불을 김립 선생에게 전하고, 다시 4만 루불을 전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중 일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몽골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들에게 발각되어 가솔들과 함께 살해당하고 만다. 그게 1921년 선생의 나이 불과 38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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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보스톡에 번쩍, 상해에 번쩍, 곽병규 선생
그렇게 이태준 선생이 먼 몽골에서 유명을 달리하셨던 것과 달리, 곽병규 선생은 천수를 누리셨지만, 정작 선생의 독립 운동에 대해서는 그의 가족들에게 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평양 숭실중을 나와 이태준 선생에 이어 3회에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한 선생은 역시나 독립 운동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 이태준 선생이 몽골로 떠났다면, 청년 곽병규의 이름을 발견하게 되는 건 블라디보스톡이다. 

블라디보스톡에는 당시 만명 정도의 한인들이 모여 '신한촌'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이곳에 살던 한인들과 유학생들을 모아 조국에 '문화 공연'을 하러 오게 되었는데, 이 해삼위 음악단장이 바로 곽병규였다. 의사가 음악 단장? 

당시 이러한 '조국 방문 문화 행사'는 그저 '공연'이 아니었다. 고국에 살 수 없어 먼 이방의 땅에서 살아가는 동포 학생들의 공연은, 삼일 운동 이후 그 어떠한 정치적 행사를 불허한 일제 하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유일하게 함께 모일 수 있는 '집회'였다. 그래서 일제는 이 집회를 불을 켜고 감시했으며, 그런 감시의 눈길을 피해가며 해외 동포들과 고국의 국민들은 '공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어우러져 눈물을 흘리고 '한 민족으로서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유선영 지음, <식민지 트라우마> 중에서)

곽병규 선생의 활약은 말 그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1920년 상해, 대한 적십자사 의사로, 그리고 임정의 외부 활동이었던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곽병규는 1927년 사리원에서 경산 병원과 유치원을 개업했고, 사리원 신간회 회장으로 그 사건으로 체포당한다. 그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은 선생은 1930년대 서울로 근거지를 옮긴다. 의술은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봉사라는 신념 덕분에 의사의 자녀들이라도 어렵게 살아야 했다고 아버지를 추억하는 딸, '불의의 악을 극복하고 전진하라'는 아버님의 숨겨졌던 유지는 뒤늦게 아버님의 활동을 알게 된 딸의 노력으로  2011년에야 비로소 국가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환자를 치료하던 손에 들려진 폭탄, 나창헌 
여기 또 한 명의 의사가 있다. 아니 의사이기보다 열사인 한 분 나창헌 선생이다.  경성의전에 2학년 24살에 에  3.1운동을 겪은 선생은 당일 1차 시위에 참여한 후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연행되고 만다. 미결수로 서대문 감옥에 갇혀 갖가지 심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입원하게 된 선생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탈출, 대동단에 가입하여 의친왕 이강 망명 작전에서 '경호'의 임무를 맡게 된다. 

하지만 정보를 미리 알게 된 일제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 작전, 선생은 포기하지 않고 제 2의 3.1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준비하고 1919년 11월 8일 종로 경찰서 앞에서 200 여 명의 동지 및 군중들과 '독립 만세'운동의 거사를 일으킨다. 일제는 선생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지만, 그런 일제를 피해 상해로 망명, 결석 재판은 나창헌 선생에게 3년 형을 구형했다. 비록 재판은 피했지만, 험란했던 망명 과정, 선생의 부인은 망명 과정에서 발톱이 몽땅 빠졌었다 고통의 기록을 남긴다. 

상해에서 독일 병원에서 의술을 다시 배운 선생은 세움 병원을 세워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임정의 재정을 돕는 한편, 임시 정부 의정원에서 두루 요직을 맡으며 활약한다. 하지만 점점 더 독립의 가능성이 멀어져만 가고, 임정의 상황이 어려워지자 선생은 온건한 투쟁 방식 대신, 일제에 직접적 손실은 물론, 민족의 자긍심들 독려하기 위해 암살, 파괴 등 투쟁 방식의 변화를 꾀한다. 직접 폭탄을 제조하시는가 하면, 1926년 상해 일본 영사관 폭파 사건에 주모자로 참여한다. 하지만 그 사건은 더는 선생을 상해에 머무를 수 없게 만들고, 다시 중경으로 발길을 돌린 선생은 그곳에서 만현 의원을 개업하여 독립 운동을 돕던 도중 약관 40세의 나이에 위암에 걸려 순국하시고 만다. 

의사인 열사들의 운동은 '전문직 종사자'로서의 특수성을 가진다.  한 곳에서 병원을 개업한다는 직업적 한계를 의사들은 '자금 지원'과 '인적 교류의 통로, 혹은 교두보'로서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한편, 블라디보스톡에서, 상해에서, 중경에서, 몽골에서 지역을 막론하고 독립의 기치를 드높였다. 의사라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의사건 그 누구건 독립 앞에서는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세 분 선생의 행적은 기록한다. 하지만, 2011년에야 비로소 딸에 의해 알려진 곽병규 선생, 우리보다 몽골 사람들이 더 기억하는 이태준 선생, 그리고 1993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환국하시고 57년만에 건국훈장을 받게 되신 나창헌 선생처럼, 그분들의 업적과 그에 대한 국가와 역사의 보답은 여전히 미비하다. 그런 미비한 기억을 광복절 특집 다큐를 통해 환기시킨다. 



by meditator 2018. 8. 15.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