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8년 10월 16일 보훈처의 국정 감사 자리, 더불어 민주당 고용진 의원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바 있는 독립 운동가 김태원에 대한 서훈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벽창 의용단을 조직하여 일경 4명을 사살하고 군자금 모집에 앞장섰던 독립 영웅 김태원 선생, 하지만 알고보니 김태원 선생은 동명이인이었다.

 

 

현재 서훈을 받은 사람은 대전의 김태원, 그러나 자료를 조사해 보니 벽창 의용단의 김태원 선생은 평북 의주 출생으로 1926년에 사형을 당하셨던 것이다. 어떻게 돌아가신 분이 1963년에 서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눈뜨고 코베이는 것 같은 일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서훈 과정에서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꾸준히 이와 관련된 우리 사회의 '적폐'를 꾸준히 다루고 있는 ,다큐 시선>이 이번에는 거짓으로 서훈을 받고 독립운동가로 행세하는 건 물론, 비석까지 세워 진실을 호도하고 있는 이 땅의 '가짜 독립운동가'들을 찾았다. 

독립 운동가들께 수여되는 정부의 각종 훈장과 보상금들, 이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 대한 '보답'이다. 하지만 그 '보답'이 왜곡되었다면? 

 

 
비석까지 번듯한 가짜들
고용진 의원이 제기한 가짜 김태원의 문제를 발견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보훈처이다. 매달 선정되는 이 달의 독립 운동가로 선정된 김태원 선생, 그런데 선생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던 중 보훈처는 선생의 기록에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 아들에게 소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들 측에서는 이렇다 할 해명을 내놓지 못했고, 결국 '서훈'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이런 사례가 김태원 선생 한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임시 정부 경무 국장을 지내고 1919년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을 상해로 망명시키려 했던 대동단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분인 김용원 선생, 대전의 한 공원에 선생의 비석이 세워졌다 하여 찾아간 곳, 그런데 비석이 이상했다. 

분명 뒤에는 김용원 선생의 업적이 새겨져 있는데 , 정작 앞에는 이돈직이란 사람이 있는 것이다. 유심히 보지 않으면 마치 이돈직의 비석이고, 뒤의 내용은 그 사람의 업적인가 하고 착각할 수 있는 상황, 더구나 김용원 선생의 업적 가운데 이돈직이 김용원 선생의 스승으로 독립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고 사실과 다른 내용이 씌여있다. 심지어 의병 창의군이었다면 의병 독립운동가의 공적까지 슬쩍 옮겨 써놓았다.

이렇게 김용원 선생의 업적을 헷갈리게 써놓은 비석에 이어, 또 하나의 비석이 등장한다. 제목은 '기미 삼일 독립 기념비', 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거의 역사적 근거가 없는 이돈직 개인의 치적비이다. 다큐 제작진이 문의하자 그때서야 당장 철거하겠다는 관할 구청.

 

 

가짜 독립운동가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현재 국가 보훈처가 추산하고 있는 가짜 독립 운동가는 39명,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는 엉터리, 사이비 독립 운동가의 유래를 광복군에서 찾는다. 일본군에서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장준하 선생이 몸담았던 광복군 제 3지대는 실제 존재했던 부대, 하지만 일본군이었다가 해방 후 떠돌던 이들이 귀국하여 광복군입네 하며 '사이비'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실제 약산 김원봉 수하의 광복군은 4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 포상을 받은 사람은 700여 명에 이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해방 당시에 겨우 13,4 살이던 사람이 김구 선생 도장이 찍힌 종이를 들고 찾아와 김구 비서였다며 서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나이도 나이지만, 대놓고 김구 선생 도장을 들고 다닌다면 당장 잡혀 들어갔을 만큼 급박했던 일제 하,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서훈 과정에서 벌어진 해프닝들이다. 

앞서 이돈직이라는 가짜 독립 운동가의 아들은 내로라 하는 건설 업체 대표, 그리고 가짜 김태원의 아들 역시 전직 공직자였다. 60년대의 초보적이고 원시적인 행정 과정에서 브로커와 보훈처 직원의 커넥션 들이 빈번했고 그 과정에서 마치 돈으로 양반을 사서 행세를 하듯 그렇게 독립 유공자의 서훈을 돈으로 사는 일도 있었을 것이라 추정된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김태원의 경우 취소되기 전까지 보상금으로 받은 금액이 4억 5천만원, 그러나 이 돈은 환수되지 않았다. 국가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35조에 근거하여, 가짜가 밝혀진다 해도 취소와 보상금 반환 요구만 할 뿐 강력한 법적 조치가 없는 것도 이러한 '가짜'의 도발을 조장한다. 즉 설사 가짜로 밝혀져도 손해 볼 게 없다는 심리가 이런 풍조를 부추긴다. 

심지어 후손은 국가에서 서훈을 줘서 받은 건데 이제 와서 취소를 했다며 외려 보훈처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패소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 유족은 대법원까지 갔다. 최종 패소, 대전 공원에 세워진 비석 앞에는 철거 예정 안내문이 세워졌다. 하지만, 제작진이 찾아가보니 안내문은 사라지고 유족은 자신들이 찾아낸 자료라며 다시 한번 서훈 신청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2018년 국정 감사 과정에서 사이비 독립 운동가에 대한 질의를 받은 피우진 보훈처장은 '전수 조사'를 약속했다. 하지만, <다큐 시선> 제작진의 질문에 보훈처는 '조사할 계획'이며, '검증할 예정'이라는 모호한 답을 돌려주었다. 과연, 사이비 독립 운동가들은 밝혀질까? 

by meditator 2019. 5. 17. 15:04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란 스승의 노래가 무색해진 시대이다. '촌지'나, '선물'을 받으면 안된다고 스승의 날 아예 학교를 가지 않도록 하면서 부터였을까. 한편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직업인'으로 선생이란 직업이 '환영'받는 것과 달리, 초등학교에서조차 학생에 의한 선생님에 대한 폭언, 폭설, 심지어 성희롱 등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니 직업인으로서의 처우와 달리, 직업적 만족도는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 형편이다. 선생님이 더 이상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 시대, 그렇다면 이 시대 '선생님'의 자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마련된 ebs특집 다큐 <우리들의 선생님>은 '방황하는 교권'의 시대, 이 시대 스승의 자리를 생각해 본다. 

 

 
1. 괜찮아, 선생님이 있잖아
충남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온통 논과 밭, 그곳에 전교생 60명의 대안학교 한마음 고등학교가 있다. 한 학급 20 명, 김재복 선생님의 역사 수업 시간, 선생님은 칠판 가득 필서를 하시며 열심히 설명하시는데 그 앞의 학생들 모습이 가관이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학생, 열심히 핸드폰 삼매경에 빠진 학생, 제대로 수업을 듣는 학생이 없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누구에게도 야단을 치시지 않는다. 지적하지도 않는다. 한마음 고등학교의 흔한 수업 시간 풍경이다. 

한편 농업과 환경을 담당하시는 장정호 선생님의 오늘 수업은 도랑 정화 활동이다. 장화를 신고 도랑에서 쓰레기를 건져내는 선생님, 하지만 아이들은 태반이 구경할 뿐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낙관적이다. 지난 주에 2명이 선생님과 함께 했는데, 이번 주에는 무려 그 두 배인 4명이 참여했단다. 그리고  아마도 다음 주엔 더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할 거라고.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장정호 선생님 전공은 국어, 하지만 이 학교로 온 후 선생님은 자청해서 당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그 어디든 달려가신다. 

그저 기다려주는 것만이 아니다. 학교에 안온 아이를 틈틈이 전화를 걸어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 챙겨주고, 전 학교에서 왕따로 상처받았던 학생에게는 면박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잘 잤니?,' '밥먹었니?' 하며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다가간다. 그래서일까, 마음을 닫았던 아이들이 조금씩 달라진다. 왕따로 상처받았던 아이가 말을 하고, 웃음을 짓기 시작하고 세상에 다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기존 정규 고등학교에서 적응을 못해서 온 학생들이 많은 한마음 고등학교, 두 선생님 김재복, 장정호 선생님이 온 이후로 아이들이 많이 달라져 간다. 자연 친화적 교육과 현장 교육을 중요시하는 학교의 모토에 따라 아이들은 스스로 농사도 짓고, 동물들을 키우기에 선생님들도 교산지 농분지 구분이 안되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상관이 없으시단다. 아이들이 딸기를 심고 싶다면, 달려가 모종을 사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선생님, 선생님은 말하신다. 이렇게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는 그게 중요하다고. 덕분에 재 못생겼다며 친구들에게 구박받던 아이들은 농부의 꿈을 키우고, 눈밝은 식물과 가축들의 보호자가 되어가며,  부모의 이혼으로 오랫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던 아이가 이젠 자신보다 어려운 친구의 든든한 멘토로 거듭난다. 

 

 

2. 슈퍼맨 아빠와 9남매 
강원도 고성군 흘리 분교, 우리나라 최초로 스키장이 만들어 졌던 마을, 하지만 그 첫 번 째 스키장은 폐장되고 66년된 흘리 분교도 전교생 4명의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제 무려 전교생이 9명에 선생님만 세 분, 그 이유는  3년전 흘리 분교로 전근온 슈퍼맨 이기도 선생님때문이다. 

흘리의 아침, 복도가 왁자지껄하다. 교실 앞 복도에서 롤러브레이드를 타며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들 그렇게 한바탕 놀고 난 아이들은 각자 저 마다의 교실로 들어간다. 이기도 선생님의 3학년 교실, 단 두 명의 학생들, 하지만 이기도 선생님은 선생님만 세 분, 주무관이 없는 이 학교의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이다. 

9명의 학생만 있는 산골 학교, 그래서 아홉 명의 산골 학교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그런 학교를 만들기 위해 선생님의 낮과 밤은 뜨겁다. 전교생이 1인 1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저기 '자전저 품'을 판 선생님, 덕분에 막내의 킥보드까지 아이들은 저마다의 '자가용'을 타고 마을 탐방을 달린다.  철에 맞춰 감자 등을 심고, 교무실에서 부화시킨 병아리들이 뛰어 놀 수 있는 사육장을 아이들과 만들며 한껏 자연 친화적인 수업은 당연하고, 표현력은 풍부하지만 아직 한국어가 어눌한 은지를 위해서는 방과 후 수업은 물론, 조부모님과 함께 사는 은지네 집 가정 방문까지 일반 학교에서는 언감생심의 혜택들이 넘쳐난다. 눈이 오면 눈이 와서, 꽃이 피면 꽃이 피는 자연이 그대로 수업의 미션이 되는 학교가 되도록 '번아웃'이 되도록 달리는 선생님. 덕분에 흘리 분교가 좋아서 찾아든 학생들 덕분에 아홉 명의 식구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신입생 소식이 들리지 않아 걱정스런 선생님은 9명의 학생들과 3명의 선생님들이 총출동한 '흘리 분교 뮤직 비디오'에 기대를 건다. 아이들이 직접 노래 가사를 바꾸고, 콘티로 작성한 자연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흘리로 오세요'라는 뮤직 비디오를 통해 폐교 걱정없는 흘리 분교의 건강한 내일에 선생님의 열정이 담긴다. 

 

 

3. 뜨겁게 , 따뜻하게 
아이들이 수포자와 과포자가 되는 건 언제 쯤일까? 아마도 대략 중학교 시기가 아닐까? 급격하게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수학과 과학들, 하지만 인천 부원중학교 송미정 선생님(51)의 과학 수업 시간에서는 이 '관례'가 통하지 않는다. 암석에 대해 배우는 수업 시간, 아이들이 어려운 건 수업 내용이 아니라, 선생님이 암석을 게임을 풀어낸 게임 방법이다. 게임으로 풀어낸 암석, 덕분에 아이들은 '할리갈리'처럼 암석을 익혀간다. 

'열심히 하자'가 모토인 송미정 선생님, 아이들이 가르쳐주는 것을 따라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수업을 만들기 위해 교사가 된 후 10년이 될 즈음부터 시작된 과학 교사 모임을 과로로 토해가면서도 빠지지않고 개근한다. 선생님의 재밌는 수업은 이렇게 오랜 연구와 토론을 통해, 그리고 선생님의 보물 창고라는 선생님이 만들어 낸 각종 수업 도구를 통해 만들어 졌다. 교과서에 나온 내용이라도 좀 더 재밌고, 신기하고 , 색다른 거를 위해 쉴틈이 없다신다. 

재밌는 수업을 위해 오늘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떳다 홍반장이 되는 송미정 선생님이 인천에 계시다면 당진에는 '엄마'같은 백운자 선생님이 계신다. 십 여년을 넘게 이어오고 있는 아이들의 아침 독서 토론 수업, 이른 시간 아침을 먹고 나오지 않는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은 매일 아침 아이들의 아침을 준비하신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선생님표 수제 샌드위치, 성장기의 아이들에게는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선생님은 매일 아침 아이들의 아침 만들기를 기꺼이 자청하신다. 

어디 아침 뿐일까, 하루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은 가정 형편 때문에 학원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방과후 공부방도 책임지신다. 역시 거기에도 빠지지 않는 선생님표 저녁밥, 오늘의 메뉴는 카레, 그리고 밤 9시까지 홀로 공부하는 아이들과 함께 하다 집이 먼 아이들을 차로 데려다 주시기 까지 하면 선생님의 하루 일과가 마무리된다. 

선생님이 천직이라 생각한 백운자 선생님, 이제는 선생님이 선생님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의 옛 제사 김경래 씨, 초임 교사 월급이 12만원이던 시절, 가정 형편 때문에 진로를 고민하던 경래씨에게 선생님은 월급의 반 정도가 되는 돈을 기꺼이 전해 주시며 일단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격려해주셨다며 덕분에 지금의 자기가 있을 수 있다 감사한다. 그러나 정년을 앞둔 선생님은 그렇게 제자들에게 해줄 사랑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라 불러주는 제자들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백운자 선생님, 하루 종일 뛰고 또 뛰는 열정 파워 우먼 송미정 선생님, 그리고 슈퍼맨 이기도 선생님, 선생님인지 잡부인지, 농부인지, 사감인지, 아빠인지 그 무엇이래도, 우리 아이들이 어제 보다 조금 나은 오늘, 그리고 조금 더 자신을 찾아가는 내일이라면 상관없다는 김재복, 장정호 선생님, 이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조건을 달라도 그 조건에서 선생님이 먼저가 아니라, 학생들이 스스로 보다 재밌고, 보다 즐거운, 그리고 보다 자신의 꿈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아니었을까. 세 편의 다큐에서 선생님들은 다 분주하셨다. 그리고 이미 나이든 어른들임에도 자신들의 입장보다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하려고 하셨고, 작은 약속이라도 지키려 했다. 그리고 정해진 수업과 교과서를 넘어 살아있는 교육을 하기 위해 자신들을 던지셨다. 교권의 위기가 논해지는 2019년 세 편의 다큐는 어쩌면 교원의 자리는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이고 원칙적인 아닐까라고 반문하는 듯하다. 




by meditator 2019. 5. 16. 15:27

지난 1976년 첫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진화의 주체가 인간 개체나 종이 아니라 유전자라는 주장을 하여 센센이셔널한 파급을 일으켰다.  물론 리처드 도킨스는 이후 개체인 인간은 자유 의지와 문명을 통해서 이런 유전자의 독재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의 의견을 보완했다. 그렇다면 2019년 5월 6일 방송된 <장내 세균 혁명>을 리처드 도킨스가 봤으면 어땠을까, 세균을 또 다른 주체로 세우려 하지 않았을까? 

꾸준히 현대인의 건강과 식습관에 대한 건전한 모색을 해오고 있는 <sbs스페셜>이 이번에는 그 시선을 '장내 세균'으로 돌렸다. 

 

 

장트러블이 일상이 된 현대인
63세의 김진숙 씨 잦은 방귀, 트림에 설사를 달고 산다. 56세의 이금씨는 변비와 설사가 교대로 와서 고생 중이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소식이 오면 내려서 화장실을 찾아들어가야 할 정도라 지하철 역마다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훤하다. 38세 강용관씨의 경우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자가용으로 고속도로를 자주 이용하는 그는 혹시나 휴게소를 지나고 나서 신호가 올까봐 휴게소마다 미리 억지로라도 볼일을 보려고 애쓰는 형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와 한 집에 사는 그의 아내 이해일 씨는 그와 같은 음식을 먹고 사는데도 변비로 고생 중이다. 심하게는 2주일 동안 화장실을 못갈 정도로. 

60대에서 부터 30대까지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아마도 현대인들 대다수가 겪는 불편함을 넘어선 고통들일 것이다. 도대체 왜 세대를 막론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장트러블'을 겪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몸, 그 중에서도 장내에만 100조, 많게는 400조의 세균이 산다. 그 종류만도 수 천가지가 넘는 세균, 그 세균들은 서로 견제와 균형을 맞추며 우리의 장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몸에 유익한 균들도 있지만, 반대로 위의 증상에서 보여지듯이 방귀, 트림, 설사, 변비, 심하게는 복통, 궤양 등을 유발하는 유익하지 않은 균들도 있다. 결국 우리의 장은 '세균들의 '왕좌의 게임', 그 전쟁터이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장을 그저 소화 기관이 아닌 면역 기관으로 보고 있다. 

출연자들의 장내 세균을 분석해 봤다. 잦은 방귀와 트림, 설사에 시달리는 김진숙 씨의 경우 이상 발효를 일으키는 퍼미큐티스 균이 많았다. 변비와 설사가 오락가락하는 이금씨의 경우 병원성 균들, 대장균, 그리고 특이하게도 이질균등이 다른 균에 비해 활발했다. 강용관 씨의 경우 매일 밤 야식과 함께 먹는 알코올이 장내 균들 사이의 균형을 무너뜨려 77%가 박테로이스균이 점령한 상태이다. 

 

 

우리 몸의 주인은 세균?
즉 같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도 누구는 설사를 하고, 다른 누구는 변비가 오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장내 세균총이 달라서이다.  하루에 50kg의 대변을 보는 코끼리, 엄마가 큰 일을 보자 아기 코끼리가 달려가 엄마의 똥을 먹는다. 초식 동물의 경우 아직 장내에 미생물군이 미성숙한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똥을 먹음으로써 엄마의 장내 미생물을 '계승'한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무균 상태로 태어나는 아기는 엄마의 산도에 정예부대로 모여있던 락토 바실라스 균 등 유산균 샤워를 시작으로  엄마의 모유를 통해 비피더스 유산균 등을 취하여 장내 미생물총을 형성해간다. 

이렇게 엄마를 통해 건강한 유산균 중심으로 장내 미생물군을 형성한 아기들은 하지만 커가면서 각종 스트레스와 인스턴트 식품, 불균형한 식습관에 음주 등을 통해 장내 세균층이 무너져 간다. 위 60대에서 30대까지의 사례에서 참가자들은 모두 '육식'을 매우 즐기며, 간식으로 '밀가루' 음식을 먹고, 야식으로 인스턴트 음식을 먹는데 술 까지 한 잔 하는 식의 식생활 패턴을 가졌다.

결국 평생 동안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오늘날 나의 장내 세균층이다. 그런데 장내 세균층이 오늘날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현대인이 고질적으로 앓고 있는 '장트러블'때문만이 아니다. 장내 신경은 뇌 시경과 밀접하게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최근 연구 결과가 발표되며, 장내 세균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치매와 장내 세균과의 관계를 연구하고 있는 중이다. 치매가 박테로이스와 연관이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미국 보스턴에서 연구중인 한국인 박사 허준열 교수 부부는 대부분 자폐아들이 위장 장애를 겪고 있는 것에서 착안하여 엄마 쥐의 장내 세균인 절편 섬유상 세균이 새끼의 자폐 증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우울증과 관련하여 주목받고 있는 '세로토닌'의 90% 이상을 장내 세균이 만든다. 그래서 오늘날 학계는 장을 '제 2의 뇌'로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장트러블'을 넘어, 인간의 뇌를 관장하는 장내 세균들, 다큐는 '호모 박테리아누스'라 정의한다. 그렇다면 결국 '장 건강'을 관리하는 건 '장트러블'을 넘어 100세 시대 아이부터 노인까지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것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게 되는 것이다. 

 

  ​​​​​​​

장 건강이 곧 뇌의 건강
그렇다면 장 건강은 어떻게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영양 성분'이 관건이 된다. 즉 우리 몸에 우리가 섭취하는 것에는 사람이 소화할 수 있는 것과 세균이 좋아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먹는 밥을 예로 들면 흰 쌀로 지어진 밥은 사람이 소화시키지만, 현미 밥의 경우 그 껍데기의 식이섬유는 사람이 먹을 수 없는 것, 미생물이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통곡류와 해조류 등이 미생물이 좋아하는 것들로 이런 것들을 많이 섭취해서 장을 건강하게 만들도록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진 미생물들은 대장 점막을 자신의 먹이로 삼고, 그렇게 되면 점막이 약해져 그 틈 사이로 염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큐 초반 12살부터 궤양성 대장염을 앓기 시작하여 19살이 된 환자는 결국 타인의 분변 미생물을 이식하여 자신의 장내 미생물의 균형을 맞추게 된다. 60대부터 30대까지 각종 '장트러블'로 고생하던 사람들도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로바이틱스 등의 유익균을 일주일간 섭취하는 것만으로도 한층 상태가 호전되었다. 

장, 세균을 통해 돌고 돌아 온 길이지만, 결국 다큐가 도달한 곳은 인스턴트와 육식 위주의 편향적 식습관을 가진 오늘날 현대인들이 장은 물론 갖가지 신체적 이상 증상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건강한 장, 건강한 뇌, 건강한 신체를 위해서는 우리 몸은 물론, 우리 몸의 어쩌면 실제적 주인일 수 있는 세균들이 좋아하는 통곡물과 해조류, 그리고 각종 유산균들이 구비된 건강한 식단을 먹어야 한다는 '원칙적'인 증명이다. 

by meditator 2019. 5. 7. 07:00

제주도, 여러분들은 제주도에 왜 가십니까? 아마도 <다큐 시선- 제주가 사라진다>의 리뷰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듯하다. 사람들은 왜 하고많은 대한민국의 여러 관광 명소 중에 비행기를 타고, 배를 타고 바다를 건저 제주에 가는 걸까? 거기에 길이 잘 뚫려 있어서? 잘 발달된 휴양지가 많아서? 들고 나는 공항이 편리해서? 이런 질문들 중에 여러분들이 제주에 가는 이유가 있나요?  

 



아름다운 비자림 숲을 보러 가기 위해 비자림 나무를 자르다. 
제주시 구좌읍, 거기엔 천년의 숲이라 칭해지는 비자나무 숲, 비자림 숲이 있다. 천연 기념물 374호, 수령 500년에서 800년의 비자나무 2800여 그루, 단일 수종으로 세계 최대 규모, 높이 7~ 14m,  직경 50~110cm의 나무들이 지난 3월 잘려나갈 위기에 놓였다.

'나무 자르지 마세요, 우리가 사랑하는 숲이예요'라는 숲 지키미들의 몸을 던지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라 칭해지는 27.3km에 달하는 비자림로 확장 공사를 하기 위해 이 '천년'의 나무들이 잘라나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논란'의 현장이 지금 제주가 앓고 있는 몸살의 현주소다.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를 지나고 싶어, 천년의 나무들을 보고 싶어 제주로 몰려가는데, 정작 제주에서는 그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천년의 나무들이 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비자림로 확장 공사, 그 궁극에는 바로 제주 재 2공항이 있다. 국내선 여객 수송 1위의 현 제주 공항, 하지만 시설 규모로는 국내 7개 공항 중 5위, 공항 시설 능력 과포화 상태, 이에 원희룡 제주 지사를 비롯한 국토부는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일대에 제 2의 제주 공항을 만들기로 발표하였다. 하지만 제주 2공항은 곧 이를 둘러싼 제주 시민들 사이의 찬성과 반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독자봉

정상 동편 전망대에 올라서면
온평, 난산, 수산, 일출봉, 저멀리 우도까지 지척이다. 
언제나 제 자리에 있었고 언제나 제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내 눈 속에 깊이 박아두었다. 
오름 뒤편 공동묘지에 아버지를 묻었다. 
마을 사람들은 독자봉 건너에 저승이 있다는 것을 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맑고 높은 고향 하늘이다  -강원보 


난초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난산리', 이 작고 아담한 마을에는 300여 가구의 사람들이 산다. 난산리를 비롯한 주변 5개 마을은 제주 제 2공항이 들어서면 청사와 활주로로 인한 소음과 분진 피해를 입을 곳들이다. 이 가구 중에 원희룡 지사에게 달걀 세례를 퍼부은 김경배씨가 산다. 평범한 굴삭기 기사였던 그,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곳에서 살아가기 위해 성산일출봉을 닮은 조형물까지 만들어 가며 가꾼 그의 터전, 그저 지금처럼만 사는 것이 꿈인 그는 '공항 건설'과 함께 없어질 마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42일간의 단식을 했다. 그의 부모님 세대들이라고 다를까. 당신들은 돌아가시면 그만이라면서도 공항이 들어서면 나고 자라고 삶의 터전이었던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시름에 절로 한숨이 나오시는 어르신들. 

 

 

공항 아래 용암 동굴, 과연 안전성은? 
제주의 생명인 오름, 대수산봉을 비롯한 10개의  오름들도 제주 2 공항을 비롯한 난개발에 존망의 기로에 놓였다.  오름만이 아니다. 신공항 예정지에는 서궁굴 등 용암 동굴들이 이미 밝혀진 것 외에도 많이 분포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세계 자연 유산으로 권고되고 ,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수산굴은 보존해야 할 곳이지만 신공항이 만들어지면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오름이나 숲 등의 훼손과 다르게 용암 동굴의 문제는 또 다른 면에서 문제가 있다. 문화재적으로도 가치가 있지만, 수많은 비행기가 날고 드는 공항 아래 동굴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안정성과 경제성 면에서도 생각해 볼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지질 파악을 위한 시추 작업을 동반한 정밀 지반 조사를 해야 하지만 어쩐일인지 2003년 문헌에 의거한 채 사업비를 전액 반납, 의혹을 남긴다. 

또한 공역 문제도 걸린다. 군 비행기가 날고드는 군 작전 지역과 맞닿아 있는 성산 지역, 하지만 이에 대해 제주시와 국토부는 이 지역의 군이 해군이라 문제가 되지 않으며, 조정 가능하다며 이해를 구한다. 심지어 최근 들어 '폭설'에 잦아지는 기상 요인은 차치하고, 바람, 강수, 강설량만으로한 모호한 선정 기준, 거기에 타 지역 10년치의 기준으로 성산의 7년치 안개 일수를 퉁쳐버린 기준 등 의혹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심지어 철새 도래지도 주변에 있다. 제주 대표 해안 습지인 하도리, 멸종 위기종인 저어새 2400마리 중 20 여 마리가 해마다 겨울을 나는 곳, 당연히 '버드 스트라이크'가 예상되지만, 비행기는 200m 이상 날기 때문에 괜찮다는 안이한 대처로 비웃음을 사고 있다. 

도대체 하나에서 부터 열 까지 안걸리는게 없는 성산읍, 그런데 왜 이곳이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해 신공항 반대 단체들 역시 의문을 제기한다. 애초에 2012년 용역에서 유력한 예정지로 선정된 곳은 제주도 유일의 평야 지대인 '신도'지역이었다. 사회적, 환경적으로 그나마 가장 유력했던 이곳이 2015년 불현듯 '성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아니 환경 단체를 비롯한 반대하는 편에서는 왜 굳이 '새 공항'을 지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기존 공항 확장을 배제하느냐는 것이다. 

 

 

신공항, 과연 필요한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원희룡 지사는 개인 유투브인 '원더풀 tv'를 통해 2015년 국토부 타당성 용역을 토대로, '기존 공항 확장 대안은 바다 쪽으로 이어지는 활주로의 확장 공사로 인한 해양 환경 파괴 문제 등, 거기에 과밀한 교통 체증 등의 여러 이유를 들어 불가능하다'고 답하고 있다.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양측의 입장, 지난 4월 열린 기본 계획 수립 용역 보고회에서는 비행기의 바다쪽 선행과 대수산봉을 절취하지 않겠다는 국토부의 입장이 발표되었지만 양측의 갈등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심지어 반대측의 거센 질문 세례에 보고회는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종료되었다. 이런 갈등만 벌서 4년째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국내 최대 인원이 들고 난다는 제주 공항, 만약 제주 제 2의 공항이 만들어 진다면 생산 유발 효과 8조 297억원, 부가가치 효과 2조 5510억원, 고용 유발 효과 3만 6040명 등을 낳는다고  한국은행이 발표했다고 한다. 한반도, 중국대륙, 일본 등 주변 인구 1천만 이상 5개 도시, 500만명 이상 13개 도시가 인접한 다양한 문화 콘텐츠가 있는 동북아 요충지로서 예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타당성 조사를 현재 텅텅 비어있는 무안과 양양 공항은 안했을까? 즉, 이러한 수요예측 자체가 '희망'에 근거한 고무줄 결과물 일 수 있다고 반대측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성수기에 잠깐 붐비는 제주 공항을 개선하기 위해 또 하나의 공항을 만드는 것은 마치 명절 때 서울 부산 고속도로가 붐빈다고 고속도로를 하나 더 만드는 것과 같지 않냐는 것이다. 반대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제주 제 2공항의 건설은 그저 공항을 또 하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제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 우려한다.

 

  ​​​​​​​

제주의 미래는?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본질적으로는 지금 '개발 붐'에 있는 제주의 현주소에 대한 고민이다. 쓰레기 배출량이 한계에 이르러 필리핀으로 밀반출하다 돌려받게 되는 해프닝을 겪는가 하면, 무분별한 시설 개발로 하수 처리가 용량을 초과하여 해녀들의 밭인 바닷속 돌이 오염되고 푸석푸석해져 풀조차 점점 줄어드는 등 해양 생태계가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다. 예래 지역 휴양형 주거단지가 4년째 방치되고 있다. 이렇게 제주 곳곳은 '관광 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즉 한정된 자원을 가진 섬이라는 특수한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제주, 과연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개발이 2,30년 후의 제주를 어떤 모습으로 바꾸게 할 지, 개발을 원하는 사람들의 바램대로 더 좋은 시설을 갖춰 더 많은 사람들이 찾는 제주가 될 지, 아니면 과잉 개발로 인해 또 하나의 무안, 양양 공항의 탄생일지, 일출봉과 우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보는 게 제주의 풍광이 아니라, 비행기가 쉴새 없이 드나드는 제주 공항이게 될지, 그도 아니면 사람들이 원한 건 '힐링'인데, 더 이상 '힐링' 할 수 없어진 그저 그렇게 뻔한 우리나라 여러 관광지들 중 하나가 되어버릴 지, 제주 제 2공항 건설 문제는 바로 이런 미래 제주의 밑그림에 대한 갈등이다. 



by meditator 2019. 5. 3. 14:25

지난 3월 최악의 초미세먼지(PM2.5)가 우리나라를 휩쓸었다.  공기로 인해 우리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공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해졌다. 하지만 그런 '공포'만큼이나 그 '원인'을 둘러싼 '갑론을박' 또한 더해만 갔다. 원인을 제공하는 중국에 대한 극심한 불만 만큼이나 그런 중국에 대해 미온적 대처를 하는 정부에 대한 불평도 늘어갔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지금 우리나라의 미세먼지가 80~90년대에 비하면 한층 좋아진 상태란다. 이 뿌연 미세먼지가 가득한 하늘이 좋아졌다니, 이렇게 혼돈스러운 '미세 먼지'의 논란의 진실을 <sbs스페셜>이 조목조목 파헤쳤다. 

 

 

미세먼지, 정말 좋아졌나? 
최근 장재연 아주대 교수의 미세먼지와 관련된 주장이 사회적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장교수의 주장은 산업화가 극에 달했던 80~90년대에 비하면 외려 최근 우리 사회의 미세먼지는 그 정도가 덜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큐는 직접 장교수가 주장했던 과거로 부터 지금까지 통계적 수치를 직접 조사해 봤다. 장교수의 주장이 맞았다. 초미세먼지 농도는 꾸준하게 낮아져 왔다. 고농도 미세먼지도 매해 감소하는 추세이다. 심지어 90년대의 미세 먼지 농도는 지금의 두 배 정도였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점점 더 대기 환경이 나빠진다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사람들이 그저 막연하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 미세먼지 측정소의 지난 4년간의 자료를 데이터화 한 결과, 지난 4년 동안 미세먼지가 극심한 1월에서 3월까지 고농도 미세먼지의 지속 시간이 2015년 12시간에서 2018년 20시간으로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객관적 수치상으로는 미세먼지 양은 줄어들고 있지만, 예전 같으면 오전에 잠시 혼탁하던 하늘이 이제는 하루 종일 뿌옇게 보이니 사람들에겐 당연히 지금이 더 나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세먼지, 정말 중국으로 부터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하루 종일 하늘을 '점거'하는 미세 먼지, 그 원인은 어디로 부터 오는 것일까? 국민 청원에 등장할 정도로 '중국발' 미세먼지일까? 

베이징에 사는 한 시민은 오랫동안 베이징의 하늘을 매일 아침 촬영해 왔다. 그런 그에 따르면 지난 몇 년간 베이징의 하늘은 한결 맑아졌다고 한다. 그러면 수치상으로는 어떨까? 제작진이 직접 베이징에 가서 매일 매일 측정해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중국 당국의 발표와 달리 베이징의 공기 질은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나빴다. 국제 기준치에 근접한다는 발표와 딴판이었다. 그런데 왜 좋다는 결과가 나왔을까? 그건 1년 평균으로 통계를 발표하는 '데이터'의 함정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중국발 스모그의 습격과 함께 우리 사회 '음모론'으로 등장한 것이 중국 정부가 베이징의 공기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곳에 있던 공장들을 우리나라에 좀 더 가까운 산둥성으로 대거 이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베이징에 있던 공장들을 대거 이전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의혹으로 삼았던 산둥성이 아니라, 베이징 외곽에 있는 '허베이성'이 그 대상이었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하늘이 맑아진 대신 허베이성의 하늘은 스모그로 뿌옇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허베이성 사람들에겐 그런 공기의 질보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산업적 활력을 준 공장들이 더 반갑다. 

이렇게 다시 한번 중국으로 부터 오는 미세먼지의 유입이 확실해 졌지만 그 책임 요구는 쉽지 않다. 정진상 교수는 중국인들이 즐겨 터트리는 폭죽으로 부터 중국발 미세 먼지의 성분을 분석하여 미세먼지의 과학적 원인을 규명해 냈지만, 이게 국제적 보상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실제 캐나다로 부터 미국이 국제적 보상을 받은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국제법의 변화에 따라 원인을 제공하는 국가가 그런 원인의 개선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보상을 면해줄 수 있다는 등 보상의 관례나 사례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형편이다. 더구나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미세 먼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이 분야에 과학적인 투자를 집중하고 있고 그와 함께 수치 상에서 성과를 보이고 있어 더더욱 우리나라가 보상을 요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중국만의 문제일까? 
하지만 중국만의 문제일까? 다큐를 연 건 미세먼지 측정기이다. 하루 종일 배달일을 하는 경국씨와 매일 학교를 오가는 학생의 등에 인간의 호흡과 동일하게 공기를 빨아들이는 '미세 먼지 측정기'가 매달렸다. 이들은 하루 12시간씩 이 '미세 먼지 측정기'와 함께 할 것이다. 그린피스와 함께 제작진이 직접 실험에 나선 것이다. 그 결과, 하루 종일 배달일을 하는 경국씨의 경우 그가 하루 종일 매달고 다니는 미세 먼지 측정기의 그래프가 들쭉날쭉하다. 반면, 매일 학교로 오가는 학생의 경우 등하교시 미세먼지 농도가 급격하게 높아진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 덜 심한 날과 상관없이.

즉, 제작진이 매단 미세 먼지 측정기의 수치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측된 미세먼지 농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니고 있는 길, 즉 자동차들이 내뿜고 있는 배기 가스로 인한 미세먼지 농도가 심각하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가 '중국'을 지켜보고 있는 사이, 우리 곁의 자동차와 공장 등에서 뿜어내고 있는 미세먼지에 우리는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장재연 교수가 주장하는 바도 일맥상통한다. 즉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저 미세먼지가 좋아졌다가 아니다.  미세먼지의 정도는 '산업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 사회의 미세먼지 질을 좋게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산업적 결과물'들에 대해 살펴보고 점검하며 이의 개선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는 '미세먼지'를 줄이기 위해 누리고 있는 것을 포기할 용의가 있는가? 라는 근원적 질문이 필요한 시간이다. 

또한 미세먼지를 둘러싼 갈등은 '정책'의 스펙트럼과 효율성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당장 미세먼지가 심한 상황에서 아토피 등 각종 알레르기 성 질환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위해 부모들은 시급하게 각 교실 등에 공기 정화기 설치 등을 요구하지만 이런 부모들의 긴급하고도 즉각적인 요구에 정부나 학교 당국은 '절차' 등의 문제를 내세워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그 '개선의 속도'를 놓고 사회적 갈등이 부추겨지고 있다. 

by meditator 2019. 4. 29. 05:13

똑같은 '치매' 노인이라 하더라도 '도시'와 농촌, 그 환경에 따라 예후가 달라지는 사례가 많다고 한다. 농촌에 사는 분들의 경우,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공동체에서의 삶과 더불어 평생을 일궈온 '일의 현장'에서의 분리되지 않음이 그들의 치매를 중증으로 악화시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면 도시에서 나이듦이란 평생을 종사해온 업으로부터의 '퇴직'이란 이름의 방출에서 부터 '노는 거 말고는 할 일이 없음'이란 삶의 활력소 중 중요한 부분을 잃게 되는데서 오는 '상실감'을 짊어져야 '숙명'을 짊어져야 한다. 바로 그런 '나이듦'의 고민에 대해 '도발적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다. 일찌기 가회동 괴짜 할아버지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해서, <쓸모 인류; 어른의 쓸모에 대해서 묻다>란 책으로 새로운 '인간형'의 조류를 제시했던, 4월 21일 <sbs스페셜- 가회동 집사 빈센트, 쓸모있게 나이들기>의 빈센트 막시밀리안 리가 그 주인공이다. 

 

 

“집을 디자인하고 짓는 데 걸리는 시간이 1~2년이라면 이후 그 집을 유지하는 시간은 50년이 넘어. 디자인하고 짓는 단계에서 잘만 하면 집은 1백 년도 너끈하게 유지할 수 있지. 집을 부수고 다시 짓는 것보다 지을 때 잘 지어서 오래 사는 게 환경을 위한 일이잖아. 뭐든 한 번 설치해서 영원히 사용하면 공해가 없고 말이야. 친환경 물건을 사고 먹고 쓰는 행위보다 더 사회적이고 실질적인 에코 라이프지-  그림 그룹과의 인터뷰 


100년을 살 집을 가꾸는 68세의 청춘
이제 68세의 우리나라로 치면 '한창 노인'이다. 그런데 쉐다 못해 벗겨진 머리를 뒤로 묶어 꽁지 머리로 만들고, 거기에 야구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날마다 다른 색깔의 원색의 옷차림에 컬러플한 고무신을 챙겨신은 그의 몸놀림으로 보자면 350살까지 살 예정인 '한창 청년'이란 그의 말 그대로이다. 

이 '68세 된 청년'의 직업은 '집사'이다. 아내 우노 초이(63)를 모시고 가회동 집을 돌보는 집사, 그의 하루 일과는 아내를 위해 아내가 좋아하는 빵을 굽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달걀, 우유, 물이 1:1:1 비율로 들어간 이른바 '못난이 빵' 팝오버(popover)를 심혈을 기울여 오븐에 구워낸 그는 종을 울려 아내를 깨운다. 맨발의 잠옷 차림으로 홀처럼 뚫린 가회동 집 복도를 걸어나온 아내는 기꺼이 집사 빈센트가 만든 빵의 시식자가 된다. 

가회동 집 바닥에는 그와 아내가 좋아하는 샴페인 브랜드의 꽃인 아네모네와 환대를 뜻하는 파인애플 문양과 '아폴리니아'란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알바니아의 항구 도시 아폴리니아가 멀리 가회동에 와서 집사 빈센트가 만들고 싶은 따뜻한 남쪽 유럽의 도시를 상징하는 집의 이름이 되었다. 

2년 전 미국에서 은퇴한 그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하는 아내가 이곳에서 한국의 사계절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아내와 자신의 친지들의 '소셜 클럽'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집사'의 삶을 자처했다. 그리고 2년 동안 가회동 집을 빌려 지금의 아폴리네아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곳을 그의 손길로 고쳤다. 

"졔 집에 산다는 건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라 주체적 주인으로서 공간을 갖는 거야" -<쓸모인류>


은퇴한 남자가 개조한 집이라 해서 <자연인>에 나오는 그런 투박한 집을 연상하면 오산이다. 겉으로 보면 한옥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견고한 스테인리스 가구에 보랏빛, 핑크색 컬러감이 더해진 이국적 디자인의 모던한 공간, 코넬데 토목 건축과를 졸업한 '공대 출신' 답게 , 하다못해 화분 받침 하나도 cm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 정밀한 설계도를 통해 '안전'과, '기능성', 거기에 경제성과 아름다움까지 다 갖춘 '한번쯤은 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집사 빈센트가 2년에 걸쳐 만들어 낸 곳이다. 

 

 


환경적 삶의 실천자 
보랏빛 마감으로 모던한 화장실, 하지만 살펴보면 물때가 끼지 않게 고려된 높이의 장식장과 인체 공학적으로 가장 볼일을 편하게 볼 수 있는 높이에 마련된 변기에서 부터, 볼일을 보는 맞은 편 문을 열면 만나게 되는 호텔처럼 잘 접힌 휴지 걸이까지, '완벽한 배려'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의 집도 아닌 빌린 집, 하지만 그는 '소유'하지 않지만 누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퇴직', 끝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삶의 마감일 뿐이라 생각한 그는, 아침의 빵굽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아기를 낳는 것 빼고 안하는 것이 없이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밖에서 벌어 쓰는 돈을 '소비'하는 삶을 그 삶에서 누리는 것이 삶의 최선인 양 생각해오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우리 몸의 돈이 '음식'이라던가, 우리 몸을 감싸는 피부가 '집'이니 돌보고 가꿔야 한다던가 심지어 인터넷으로 사면 12000원짜리 화분 받침을 십 여만원을 들여 설계를 하고 발품을 팔아 만드는, 아니 내 집도 아닌 집을 2년에 걸쳐 공을 들여 고쳐 쓰는  그의 삶은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고 살아갈 '자본주의적 삶'과는 질적으로 궤를 달리한다. 

도대체 그 시작은 어디였을까? 아이비리그 출신으로 미국 대기업 항공업체에 입사, 1980년대 미국에서 인종 차별적 대우를 받던 그는 그런 차별에 항의했다가 강제 퇴직을 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 부터 4년 여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해야만 했다. 혼자서 지구와 싸우는 것 같던 그 시절을 견디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을 움직여가는 그 시간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했고, 결국 4년만에 승소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가 생각하는 '재산'은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이 아니라, 배우면서 내 스스로 내 몸으로 체득해 낸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벌어들인 돈보다 그런 밖의 것이 아닌 오랫동안 내 꺼가 될 '백 배가 아니라 천배'나 더 많고 소중한 재산을 가졌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리고 기꺼이 'just do it!'이라 권한다. 

 

  ​​​​​​​

수처작주(隨處作主-서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집사의 삶을 살아가는 그를 도와주는 그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그의 까다로운 레시피때문에 고전하는 동네 정육점 사장님에게 그가 만든 요리를 대접하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고, 그의 견고하고 정밀한 장식장을 마련해준 을지로 뒷골목의 기름밥 장인들에게 '친지'같은 예우를 갖춘다. 그들이 그의 소셜 클럽 아폴리네아의 초대 손님이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 도시에서 나이듦의 고민은 '치매' 이전에 시간과 일과 그리고 돈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자본주의적'으로 늘 내 밖의 무언가를 소비하기를 강제하는 삶의 궤도에 맞춰가야 하는 고민이다. 바로 그런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체제에 대해 집사 빈센트의 삶은 '도발'이고 심지어 '혁명'이다.  내 몸이 , 내 몸을 움직여 쌓인 것이 재산이 되어 가는 새로운 시도, 바로 그런 시도를 빈센트는 'just do it'이라 한다. 그리고 그런 빈센트답게 집사 학교에 대한 도전을 앞두고 있다. 

by meditator 2019. 4. 23. 15:02

아이가 6살 때였나, 이웃에 또래 친구가 이사를 왔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나이'를 까보니, 그 '또래' 친구는 아이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런데 또 이 또래 친구는 2월이 생일이라 이른바 '빠른'으로 아이와 같은 학년에 입학할 처지였다.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했다. 과연 이 두 아이들은 '친구'가 되어야 할까? '형, 동생'이 되어야 할까? 그저 동네 친구 하나 만드는 일인데 당사자의 엄마들은 물론, 그 주변 '아줌마'들까지 심각하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결론은 이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두 아이들은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만약 두 아이가 그 때 형 동생이 되었다면 지금도 친구로 지낼 수 있었을까? 거기엔 '형'뻘인 아이와 엄마의 '혜량'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나이' 등을 둘러싼 호칭과 관계의 문제는 녹록치 않다. sbs스페셜은 바로 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언어'와 '권위'의 문제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한다. 바로 <왜 반말하세요>이다. 

 

 

말로 부터 시작된 관계의 해체 
다큐의 시작은 '도발적'이다. 방송국에 견학온 고등학교 방송반 학생들과 선생님, 그런데 학생들은 흰 머리가 히끗히끗한 마흔 줄의 선생님을 대놓고 '이윤승'이라 부른다. 이름만 부르는 게 아니다. '친구'처럼 편하게 말을 놓는다. 도대체 이 방송반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이윤승 선생님이 이윤승이 되기 까지 '사연'이 있다. 학교 안에서도 군기가 세기로 소문났던 방송반, 후배들은 저만치 선배가 가는 게 보이면 달려가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하고 복창을 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한다. 당연히 방송반의 모든 일들은 그에 따라 '상명하복'. 선생님은 오죽했을까? 새로이 방송반을 맡은 이윤승 선생님은 이런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방송반의 관례를 깨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바로 '내가 먼저 권위를 내려놓는 방식', 그래서 이윤승 선생님은 이윤승이 되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에게 이름을 부르는 학생들이 '나 이거 하기 싫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상황이 좋다고 한다. 

호원이가 된 도련님의 사례도 있다. 이미 sbs <b급 며느리>를 통해 방영된 김진영 씨의 사례다. 결혼을 하기 전부터 친해서 '호원'이라 불렀던 남편의 동생,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댁에서는 편하게 불렀던 시동생에 대해 '도련님'이나 '삼촌'이라는 호칭을 요구하며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는 서먹해졌다. 형수의 여동생들에 대해 남편은 자연스레 이름을 부르는데 왜 남편의 동생에게는 호칭을 불러야 하는 것일까? 주변에서는 그냥 잠깐인데 참으면 된다지만 형수는 이런 호칭에서 부터의 차별이  '여자의 삶'을 어그러뜨리는 게 아닐까 고민이 된다. 

 

 

당신을 당신이라 부르지 못하는 사회
가족에서 부터 사회까지 우리 사회에서 '호칭'으로 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문제는 복잡하다. 그 이유를 전문가는 '너, 당신'이라는 직접적 호칭의 부재에서 찾는다. 207개의 언어 중 '너, 당신'을 직접적으로 부르지 않는 7개의 언어, 그 중 하나가 한국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너와 당신을 부를 수 없기에 새로운 호칭을 찾아야 했고, 그를 위해서 당신은 누군인가를 알기 위한 신상 정보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 

그런 언어의 특수성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다큐는 그 이유를 '상명하복'이 내재화된 우리 사회의 위계 질서에서 찾는다.  5,6살 아이들의 키즈 까페에서도 '너 몇 살이냐'로 시작되는 위계의 파악, 위계가 파악되면 바로 '형', '동생'이 되고, 동생 뻘의 아이에게 당장 '니라고 하지 마라'며 , '형이니 내가 먼저할게'가 자연스러운 우리 사회의 권위적 질서 체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 시작을 조선 시대의 장유유서에서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다큐의 생각은 다르다. 고미숙 고전 인문학자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달리 조선 시대 서당은 나이 차를 두지 않는 '통교육 체제'였음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옛 사람들은 나이에 대해 관대하여 25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서신으로 학문을 논했던 기대승과 이황처럼 나이를 막론하고 우정을 나누는 사례가 흔했다고 전한다. 

오히려 이렇게 상대적으로 나이에 대해 '관대'했던 조선의 전통이 일제 강점기를 통해 오늘날과 같은 '민증부터 까고 보는' 연령별 위계 질서로 고착되었다고 오성철 교수는 지적한다. 모리 아리노리에 의한 천황제 이데올로기가 군국주의 일본의 사상으로 채택되고 일본을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의 사범 학교를 군대식으로 재편했다. 이른바 '사범형 인간'은 상급생을 '신'으로 받들게 하며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퍼뜨렸고, 군대 내 상명하복의 질서를 고스란히 근대 교육 제도화한데서 오늘날의 권위주의적 위계 질서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민주의의 잔재는 오늘날의 위계 질서를 만든 50%의 책임이 있다고 다큐는 부연 설명을 한다. 즉, 식민지의 유산이 절반의 책임이라면 학도 호국단, 국민 교육 헌장 등 일제의 관행을 고스란히 부활시킨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 교육이 오늘날 우리 사회 권위주의적 질서의 또 다른 한 축이라 다큐는 정의내린다. 사회 구조와 맞물려진 언어, 결국 정치적 권위주의가 일상의 권위주의가 되었고,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관행에 대한 성찰로 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이를 위해 제기한 것이 바로 '수평적 사회를 향한 수평적 언어'에 대한 고찰이다. 

 

  ​​​​​​​

일제 식민주의와 독재 정권의 권위주의만의 문제일까? 
단 몇 개월의 차이라도 형, 동생이 되는 우리 사회의 '연령별 수직 구조'에 대한 인식은 예리하다. 더구나 그 원인을 '식민주의와 독재 시대의 권위주의'에서 찾고자 하는 바는 진일보된 신선한  접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획일적일 수도 있다. 다큐에서 사례로 등장한 <대리 사회>의 소설가 김민섭씨의 사례처럼, 대학원생이던 그가 대리 운전 기사가 되자, 당장 '아저씨'에서 부터 '야, 너'로 호칭의 급격한 '전락'에서 보여지듯이, 과연 우리 사회 권위적 호칭의 문제가 '나이'의 장벽만의 문제일까?

다큐는 독일 68세대에 의한 나치 잔재 세력에 대한 일소를 통한 정치적 권위주의 해소 사례를 예로 들었듯이, 최근 우리 사회에서 뒤늦게 대두되고 있는 일제 잔채 청산, 그리고 나아가 독재 잔재 청산에 대한 일련의 흐름에서 '권위주의적 언어'의 문제를 짚어보고자 한다. 하지만, 과연 몇몇 사례로만 제시한 조선시대를 덜 권위적 사회라 예단할 수 있을까? 대리 운전 기사에게, 콜센터 직원에게 다짜고짜 '야'하고 하대하고 보는 그 의식은 외려 조선시대의 반상제도에서 그 기원을 찾는 것이 정확한 것은 아닐까? 또한, 우리 사회의 완고한 가부장적 권위 주의의 기원 역시 조선 시대 유교를 차치하고서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대학원 내에서 교수와 대학원생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불가능한 것이 수평적 언어 관계가 아니기 때문일까? 

다큐를 도발적으로 연 이윤승 선생님 역시 수평적 언어의 관계가 쉽지 않음을 토로한다. 우선 그의 혁명적 관계 시도가 동료 교사들의 불편함에 대한 토로로 고충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아이들과 말을 놓는 건 권위주의적 관계를 탈피하고자 하는 것이지 진짜 친구처럼 막역한 사이가 되고자 하는 건 아닌데 수평적 언어가 때론 관계의 혼돈을 낳기도 한다고 고민을 전한다. 뿐만 아니라 다큐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it기업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에서 붐처럼 일었던 수평적 언어 관행으로서의 '별명' 혹은 '외국 이름' 부르기와 같은 움직임이 상당수의 경우 이름만 '수평'적이며 실제 관계는 수직적인 '웃픈'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다큐가 새로운 움직임으로 제시한 수평적 언어 모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을 묻지 않는 이 모임을 통해, 자신들이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느꼈던 갑갑함을 풀어낸다. 하지만 대표적 권위주의적 집단으로 제시된 해병대 전우회처럼, 우리 사회의 다수, 그 중에서도 남자 중 상당수가 '군대'라는 일정 기간 동안 '상명하복'에 대한 고강도의 훈련을 겪고 그 논리를 내재화하며 지내야 하는 상황에서 탈권위적 사회를 향한 출발점으로서 수평적 언어에 대한 모색은 녹록치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19. 4. 15. 05:26

4월 11일은 임시정부 수립일이다. 임시 정부 100년을 맞이하여 이 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려 했지만 무산됐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임시 정부'에 대한 '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그런데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기리고자 하는 '임시 정부'는 제대로 '조명'되고 있을까? 혹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역사로서의 '임시 정부'는 몇 사람의 역사가 아닐까?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의원이 기억하고 있는 임시 정부를 거쳐간 사람들은 어림잡아도 2000 여 명이나 된다고 한다. 몇몇 사람의 임시정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연 저 2000 여 명 중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선열들은 몇 분이나 될까? 바로 이 '기억되지 않은, 하지만 기억해야 할 독립 운동사, 독립운동가'에 대해 삼일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리즈로 방영되고 있는 <역사의 빛 청년>는 간절하게 문제 제기를 한다. 그래서 시작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겨져 있지 않은 하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한 축이었던 '하와이 독립운동'으로 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5부 <우리가 당신을 기억하려면>에서는 '조명하 의사'를 잊혀진 기억에서 떠올린다. 

 

 

일본 육군 대장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의거 
1928년 5월 14일 일본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대만, 구미노미야 구미요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의 환송식이 있었다. 무개차를 타고 환송 인파들 사이를 서서히 지나가던 구미노미야, 그때 인파 가운데에서 뛰쳐나온 청년 조명하가 단도로 그를 찔렀다.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은 해임이 되었고, 결국 구미노미야는 8개월 뒤 복막염으로 사망하였다. 

1905년 황해도에서 태어난 조명하 의사, 군청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26년 좀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 학교를 다니며 고학을 하던 중 송학선이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하려 했던 금호문 사건, 나석주의 동양 척식회사 폭파 사건 등을 겪으며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자 마음먹었다. 이에 임시정부로 가고자 했던 조 의사, 상해로 가기 위해 대만에 들러 찻집에서 일하던 중 일본 육군 대장이 대만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척살을 결심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내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한스러울 뿐이며 죽어 저승에 가서도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유언을 남기신 채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

<꽃보다 할배>에 출연했던 이순재 배우가 조명하 의사를 기리기 위해 대만을 다시 찾았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줄을 서서 먹는다는 맛집 거리, 우리나라에서 대만을 방문한 사람들이라면 빠짐없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그 거리 맞은 편에 조명하 의사의 유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대만 여행기를 다뤘던 <꽃보다 할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맛집 거리의 맞은 편에는 타이페이 형무소의 벽이 남아있다. 죽은 미군 병사의 기념비가 있어 길가던 외국인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돌아가신 조명하 의사의 기록은 없다. 

 

 

기억되기 위한 조건 
그 이유를 다큐는 찾아간다. 조명하 의사에 대한 기록은 단 두 장의 사진, 의사는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끝머리에 늘 태워라라고 덧붙이셨다. 그래서 남겨지지 않은 기록, 기록으로 남겨져야 기억되는 역사에서 자신을 지워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결의는 역사의 행간 저편으로 흩어지기 십상이었다. '이대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윤봉길 의사의 편지를 받고 윤봉길 의사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안방 천장 위에 숨기고, 피란 길에도 품에서 놓지 않았던 윤봉길 의사의 동생 윤남의 씨가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윤봉길 의사가 있었듯이 '기록의 소실'이 많은 독립 운동가를 오늘의 우리가 기억하기 힘든 첫 번째 이유이다. 

거기에 더해 왜곡된 기억이 독립 운동가들을 역사 저편에 묻는다. 조명하 의사의 의거 뒤 무려 한 달 만에 대만 일일신보는 조명하 의사의 의거를 다뤘다. 하지만 내용은 딴 판이었다. 모르핀 중독자, 세상을 비관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충동적으로 사건을 벌였다는 식이다. 이봉창 열사의 의거를 취업이 어려웠다는 식으로 폄하했던 그 방식이다. 이러한 '의도를 가진 역사의 왜곡'의 여파는 길다. 대만 타이중 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조명하 의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김상호 교수는 오늘날 대만 만 역사 사전에 여전히 일본의 왜곡된 기사 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는 것을 통해 대만에 대한 안정적 통치와 자국의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일본의 저열한 정책을 복기한다. 

 

 

재조명에 성공한 독립 운동가의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우당 이회영 선생이다. 남겨진 사진은 겨우 두 장, 기록도 없이 은밀하게 활동했던 이회영 선생, 그런 이회영 선생에 대한 기록을 부인 이은숙 여사의 수기 <서간도 시종기>가 되살려 냈다. 그리고 이회영 선생을 받들었던 후배 독립 운동가들의 증언도 더해졌다. 

그렇다면 조명하 의사에게는 후손이 없었을까? 아니 후손이 있다. 단지 저 멀리 호주 시드니에 있다. 얼굴도 몰랐던 아버지, '이게 네 아버지의 유골이란다'는 어머님이 보여주신 유골로 만난 아버지를 우리 사회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아들 조혁래씨는 선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1988년 10월 10일 서울대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시달림은 심각했다. 감사 계통 사람들에게 뇌물까지 줘야 했다. 아들이 못나서 아버지를 큰 사람을 못만들어 드렸다는 죄책감만을 짊어진 채 조혁래씨는 눈을 감았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남은 가족들은 이렇게 고생하는데,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이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건가 라는 자괴감을 안고 손자는 조국을 떠났다. 

왜 똑같이 독립 운동을 하셨는데 기억되는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실까? 여기엔 '시대적 변화'라는 외인도 무시할 수 없다.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했다. 윤봉길 의사의 후손은 수교 이전에도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있었던 홍커우 공원에 기념관을 세우고자 했다. 중국 정부는 단호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국교가 정상화되자 윤봉길 의사의 흉상이 세워지고 기념관이 만들어 졌다. 수교 이후 이회영 선생에게는 중국 정부가 발행하는 유공자 증서인 '혁명 열사 증서'가 수여됐다. 가족들도 몰랐는데 중국 정부가 나서서 이회영 선생이 돌아가신 여순 감옥에 안중근,  신채호 선생과 함께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을 만들어 줬다. 반면 동시에 그간 수교 상태에 있었던 대만과 단교 상태가 되어 버렸다.  대만의 입장에서는 우리 나라가 대만을 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조명하 의사는 배신자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된 것이다. 대만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조명하 의사는 주목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니 외국과의 관계만이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이승만과 가까운 사람들만 독립 운동가로 인정받아 국가 유공자가 되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는 '좌익 계역 운동가들'이 주목받았다. 최근 모 정치인의 아버지가 독립 운동을 한 이유로 국가 유공자가 된 사례에서 보여지듯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독립 유공자들의 인정과 등급이 달라져 왔다. 그런 가운데 아나키스트들은 상대적으로 등급이 낮다. 조명하 의사는 그 조차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조명하 의사만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조명하 의사들이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조명하 의사를 대만에 있는 한국 교포들은 해마다 잊지 않고 기린다. 타이페이 한국 학교에는 조명하 의사 흉상이 있다. 매년 추도식을 하고, 조명하 의사를 기리는 글짓기를 하고 그림을 그린다. 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 이제서야 조명하 의사 연구회가 우리나라에서도 만들어 졌다. 손자 조경환씨도 참여했다. 고국에 돌아온 조경환 씨는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의 유지를 뒤늦게라도 받들어 할아버지의 의거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드리라 다짐했다. 

기록이 없어서, 아니면 기록이 왜곡돼서, 기억해줄 후손이 없어서, 혹은 있어도 기억하고 기록하는 과정에서 좌절해서, 그리고 그 기억에 시대와 정권의 변덕스런 흐름이 있어서, 이런 여러 이유로 우리의 수많은 조명하 의사들이 제대로 된 독립 운동가로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임시 정부 100년 임시 공휴일제정 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기록되지 못한 역사를 당당한 우리의 독립 운동사로 소환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 프라임 역사의 빛 청년이 개척하는 길은 반갑고 소중하다. 

by meditator 2019. 4. 11. 05:26

섬, 사월의 바람은 / 수의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들의 울음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중략)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다만/살같을 싸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이하 생략)  -바람의 집, 이종형 

제주도는 전국민적인 관광지이다. 최근에는 '올레' 길이 각광을 받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제주를 찾고 있다. 그런데 제주의 마을 구비구비를 찾아드는 올레 길, 그 마을들, 특히 북제주쪽 마을들의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건 죽은 이들의 명패, 놀러온 관광객들이 밟고 지나서는 그 땅은 70여 년 전 그 마을 사람들의 피로 물든 땅이었다. 

 

 

2018년 10월 18일 휠체어를 타고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평균 연령 90세인 18명의 노인들이 제주 지방 법원에 들어섰다. 수용인 명부가 있을 뿐 이제는 기록조차, 아니 그 당시에도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던 군사 재판을 통해 국방 경비법 위반에서 부터 내란죄까지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뤘던 이들의 재심 재판이 있던 날이었다.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시려 달라'라며 절박한 호소에 대해 재판부는 '공소 기각'으로 답했다. 

세월도 덮을 수 없는 이들의 억울함, 아니 억울함조차 호소하지도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 과연 70여 년 전 제주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ebs 다큐프라임은 생존자 5인의 증언과 제주 4.3 사건 진상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제주 4.3 사건을 '재연'한다. 배우 고두심의 나레이션과 제주도의 방언을 그대로 살려낸 입말의 생생함을 더한 '재연드라마' <바람의 집>을 통해 해방 공간 제주의 비극이 되살아 난다. 

 

 

들끓는 민심, 그리고 한라산 무장대와 서북 청년단 
1947년 이제는 아흔이 넘은 부원휴 옹 등은 당시 중학생이었다. 한 마을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집이 몇 안되던 시절의 중학생, 중학교를 졸업하면 서울로 올라가 출세를 하겠다는 꿈에 부풀던 시절이었다. 3월 1일 여느 때와 같이 학교로 향하던 부언휴 학생은 당시 제주시의 중심이었던 관덕정을 중심으로 '신탁 통치 반대', '미국 과자 반대' 등의 슬로건을 내건 가두 시위 행렬을 목격한다. 시위대열을 지켜보는 것도 잠시 오후 2시 45분 경찰의 발포로 거리는 아비규환으로 변한다. 기마 경찰과 시위대열이 뒤엉키며 발생한 소요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아이를 업은 엄마, 어린 학생 등 6명이 희생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발포라 해명했지만 이는 외려 민심을 들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1947년 3월 10일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에 해당하는 166개 기관 4만 명의 사람들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런 제주도민의 궐기를 남로당의 선동으로 몰고갔다.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서북 청년단이 바다를 건너왔다. '공산주의 박살내고 통일 조국 건설하라'는 과격한 반공주의를 내세운 단체, 북에서 부모와 재산을 잃고 홀홀단신 내려온 이들은 경찰, 경비대 작전에 가담하여 무자비한 '좌익 사냥'에 앞장섰다. 선거를 앞두고 단독 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조속히 정리하고자 하는 정부와 미군정의 의도가 서북 청년단의 횡포와 폭거를 조장했다. 

이렇게 경찰의 가혹한 수색과 탄압이 계속되며 제주도의 좌익 세력은 위기를 느낀다. 이에 한라산에 은신해 있던 무장대는 4.3일 '전국민이여 궐기하라', '단독 선거 결사 반대'를 주장하며 오름에 봉홧불을 올리고 화북면 경찰지서 등 12개 경찰서를 습격하고 경찰과 우익 인사를 공격, 이 과정에서 12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2명이 행방 불명이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전국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전국 평균 투표율 95.5%, 하지만 제주도 전체 투표율은 62.8%, 그 중에서도 북제주는 46.6%로 과반수에 미달, 제주도 세 개의 선거구 중 두 개가 무효화되었다. 전국의 선거구 중 유일하게 5.10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한 지역이 되었다. 단독 선거를 반대한 후폭풍은 거셌다.

 

 

배반의 땅 제주, 가혹한 댓가 
제주도가 공산주의자에 의해 점거되어 조속한 진압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정부와 미군정은 부산, 대구, 여수의 3개 대대 병력을 증파했다. 10월 17일 포고령이 내려졌다. 해안선으로부 부터 5km이상 들어간 중간산 지역의 통행이 금지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소개령이 내려졌다.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잔혹한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11월 중순부터 해가 바뀐 다음 해 2월까지 중간산 마을을 불에 탔고, 남아있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해안에 피신한 주민들 중에도 무장대의 가족이란 이유로, 혹은 무장대를 도왔다고 즉결 처분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섬, 갈곳없는 사람들, 밭고랑에 시체가 수북했고 피가 흥건했다. 이런 포악한 진압 작전으로 인해 주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도망치려 했고, 그럴 수록 작전의 애꿏은 희생자는 늘어만 갔다. 4개월 동안 중간산 지역의 마을 95%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1949년 6월까지 10,761명이 희생되었다. 이들 중 10% 이상이 노약자였다. 2만5천에서 3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의 8분의 1에 해당하는 희생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폭도'로 체포되었다. 

 

 

그렇게 폭도로 체포된 이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장대에 쌀을 조금 준 것 밖에 없다는 호소에도 경찰과 서북 청년단은 전깃줄로 묶어 감전을 시키고, 오물을 먹이며 무장대를 불으라 했다. 포승줄에 묶어 산지축항(제주항)을 통해 육지로 호송되던 이들은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고 증인이나 증거도 없이 내란죄 등의 죄를 물어 징역 1년에서부터 7년의 판결이 내려졌다. 바로 2019년에서야 '공소 기각'이 된 그 판결이다. 

 

 

이제는 아흔이 넘거나 아흔 줄의 조병태, 박내은, 박동수, 부원휴 등 당시를 증인이 된 이들은 70년의 세월 동안 그 '내란'의 족쇄를 지고 살아왔다. 제주도에서 드문 중학생이 되어 뽐내던 소년, 서울로 올라가 출세하겠다던 포부를 지녔던 아이, 심지어 외삼촌이 선거 위원이란 이유만으로 무장대에게 죽임을 당한 가족,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라며 집에서 식구들과 밥을 먹다 자신의 눈 앞에서 형과 형수가 죽임을 당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던 동생, 이 평범했던 제주도민들이 무차별적인 초토화 작전 와중에 가족과 세월을 잃었다. 70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려진 사건번호 2017의 '공소 기각', 그러나 4.3 희생자들은 여전히 '명예 회복'의 길이 이제 첫 삽을 떠졌을 뿐이라며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로써 제주 4.3에 대한 제대로 된 규명이 끝까지 이루어 져야 한다 주장한다. <ebs 다큐 프라임- 바람의 집> 2부작은 민간인 희생자였던 증인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공권력의 폭압과 희생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노력했다. 


by meditator 2019. 4. 5. 13:57

70주년을 맞이한 제주 4.3 추념식에는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가 초대 받았다. 왜 제주에 '화순'의 이야기가 담긴 뮤지컬이? 이에 대해 제주 4.3 추념식 본부는 '화순 광부 학살 사건'으로 기억되는 화순 10월 항쟁이야 말로 4.3 이전의 4.3, 4.3의 시작이라 정의를 내렸다. 왜 '화순 사건'이 4.3의 시작인 것일까? kbs1에서 <특집 다큐 화순 칸데라 1946>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화순에 해방은 어떻게 왔는가?
해방 무렵 전남 화순 지역에는 남한에서 세번 째로 큰 탄광이 있었다. 수 천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터전을 일구며 살던 이 곳에도 해방은 찾아왔다. 일제가 남기고 간 탄광, 노동자들은 '자주 관리' 체계를 통해 나라의 석탄 자원을 원활한 공급을 위해 노력했고, 나아가 노동조합 조직인  '전국 평의회'가 이의 관리를 이어 받았다. 해방된 나라의 노동자가 할 일은 열심히 '생산'하는 것이라는 모토 하에 의기투합한 노동자들, 일제 강점기 2500여 노동자가 한달 기준 7,8000 천 톤 정도를 생산하던 석탄을 1300여 노동자가 13000톤을 초과 생산하는 획기적인 생산 증가의 기적을 일구어 냈다. 

하지만 그 '기적'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10월 일본군 대신 동남아시아에서 실제 전투에 참가했던 보병 부대가 '또 다른 점령군'으로 능주 초등학교에 주둔했다. 왜 '능주'였을가? 능주 치안대가 미처 후퇴하지 못한 채 오합지졸이 된 일본군에 대해 무장 해제한 일 등으로 '미군'은 이 '화순' 지역을 관심 지역, 혹은 위험 지역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앞서 1945년 10월 일본이 남긴 재산, '적산'은 조선 군정청에 귀속되어야 한다고 발표했던 미군, 당연히 '화순 탄광'처럼 우리가 스스로 '관리'에 들어간 공장, 탄광 등에 대해 '불법'으로 여겼다. 1945년 11월 미군은 탄광 접수를 공표했고,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24시간 이내 떠날 것을 요구하는 한편,  임금 투쟁 등을 할 시 5년 이상의 징역형을 살게 될거라 협박하며, 인원 감축을 핑계로 100 여 명을 해고했다. 

이러한 미군의 태도는 당시 미군정청의 책임자로 부임한 하지 장군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당시 남한을 '불만 대면 터질 화약통'이라며 '자신이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의 가장 자리에' 있다는 식의 표현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당연히 노동자와 노동 조합은 반발한다. 해방 후 비로소 우리의 나라, 우리의 공장이라는 '해방 공간'이 하루 아침에 '또 다른 점령군'에게 빼앗기게 생긴 것이다. 이에 1946년 2월 '최저 생활 확보 임금제를 실시하라' 등을 내걸고 싸웠다. 

해방 1주년,  피로 물든 너릿재 
그렇게 싸움을 지속해 나가던 중 1946년 8월 해방 1주년이 다가왔다.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은 광주에서 열리는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너릿재'를 넘어가고자 했다. 탄광 노동자와 아이를 등에 업은 엄마와 아이들까지 1000 명이 '해방'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 광주로 향하는 대열, 미군과 경찰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총검 등으로 이 대역을 저지, 30 여 명이 '머리가 잘리는' 등의 학살을 당하고 500 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런 미군과 경찰의 무차별적 탄압에 맞선 화순 탄광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자신들의 탄광이었던 그곳에 '일본의 앞잡이'였던 이들이 다시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는 그런 '해방 이전'의 상황을 그 누구라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점령'이 되어버린 '해방'을 수긍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거기에 더해 당시의 심각한 식량 사정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더울 불살랐다. 미군은 통치를 시작하며 일제가 하던 '쌀 공출' 제도를 폐지했다.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방식에 맞춰 쌀의 자유 시장화를 위해 1945년 10월 '조선 미곡 자유 판매'를 실시했다. 대혼란이 빚어졌다. 당시 자유 시장 제도에 부응할 수 있었던 건 일제에 협력했던 대지주나, 중급 이상의 지주, 미곡상들 뿐이었다. 거기에 더해 매점매석이 이루어졌다. 몇 개월 만에 쌀값이 두 배 이상 폭등했다. 결국 미군은 다시 공출, 배급제로 회귀했지만 <뮤지컬 화순 칸데라 1946>의 ' 네 홉 주던 걸 세홉으로 줄이다니, 하루도 못버틸 양으로 닷새를 버티라니, 배때지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못살겠어'라는 대사처럼 이번에는 배급량이 문제였다. 

농민이든, 노동자이든 그 누구라도 이런 식이라면 당장 굶어 죽을 것같다는 절박함으로 '쌀을 달라'며 노동조합 탄압을 규탄하며 1946년 10월 다시 광주로 향해 나섰다. 그리고 이런 화순의 10월 항쟁은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고, 그 들불의 최종 귀착지는 제주도였다. 

1946년 11월 4일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했고 화순 탄광 폐쇄령이 떨어졌다. 6일에는 75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11일에 경찰서를 공격하던 노동자들 중 3명이 사망했다. 결국 46년말 화순 탄광을 중심으로 했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군의 노동자들이 산을 향했다. 그들은 화순 주변 지역 산에 '웅거'하여 '화탄 부대'가 되었고, 이들이 바로 빨치산의 시초라 추측된다. 또한 부모를 잃은 아이들도 산으로 가 '소년 부대'가 되었다. 결국 조정래의 대하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의 전면에 드러난 빨치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들의 자본주의를 섣부르게 이식하려 했던  '점령군' 미국이었다. 

 

 

서울대의 정근식 교수는 화순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촛불 항쟁에 비유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을 메웠던 사람들이 과연 모두 좌파였을까? 마찬가지다. 1987년 시청 앞 광장을 메웠던 넥타이 부대는 어떤가? 이런 정부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며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처럼 아마도 1946년 너릿재를 넘던 노동자, 농민과 그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 마음이 아니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사상, 이즘에 앞서 해방된 나라를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 가고 싶었던 마음, 자신들의 권리를 존중받고 싶었던 마음, 먹고 살게 해달라는 생존의 절규가 바로 너릿재 고개를 넘던 대부분의 이들의 마음이 아니었냐는 것이다. 

화순, 그리고 이어진 여순, 그리고 제주 4.3까지 우리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2009년 자신의 큰아버지에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오봉옥 시인이 <붉은 산 검은 피>를 통해 비로소 역사의 행간에 묻혔던 화순 사건이 드러났다. 그러나 오봉옥 시인은 '이적 출간물 출간'으로 인한  '국가 보안법' 실형을 살아야 했다. 이제 4.3 70주년을 경과한 시간, 늦었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라도 좀 더 나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역사의 행간 속에 묻혀져 있던 비극의 역사를 제대로 복기해 내야 할 것이다. 


by meditator 2019. 4. 3. 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