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힘들고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아 비슷한 처지나,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게 솔직한 '인지상정'일 것이다. 이른바 '동병상련', 저러고도 사는데, 혹은 나와 비슷하다는 연민으로 뜻밖에도 내 삶을 버텨낼 에너지를 얻는다. 얍삽하다고? 아니 '사회적 존재'로 태어나고 살아온 '인간'이기에 불가피한 감정이라고 하는게 더 맞다.

늘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류적 존재인 우리들은 그 함께 살아가는 '누군가'가 늘 나보다 잘 살고 있다면, 내 삶의 가치를 '인정'받기 힘들 터이니. 그러기에 '성장 시대'를 일궈낸 '부모' 세대는 이미 그들보다 더 잘살기 힘들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확증된 '자식'세대에게 어쩌면 '넘지 못할 산'과도 같은 부담일 뿐이다. '거산'에 막히고 전쟁과도 같은 현실속에서 버둥거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 뜻밖에도 이들이 '공감'을 길어올린 건 '전쟁' 시대를 살아낸 '조부' 세대이다. 12월 9일 방영된 <빛나라! 할머니>는 그 '전후 세대'의 삶을 통해 자기 삶의 당위성을 길어올리고자 하는 이 시대 젊은 세대의 '역설적 존재론'이다.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할머니의 생애
이금순 씨는 올해 82세이시다. 열 여덟에 시집와서 다섯 자녀를 키우시고 또 그 자녀들의 손주까지 보신 일가의 할머니다. 인생의 여든 고개, 그녀가 맞이한 건 '알츠하이머', 모처럼 찾아온 손주에게 정수기에서 나오는 온수따위 믿을 수 없다며 가스렌지에 펄펄 물을 끓여 맛난 커피를 타주고 싶은데 정작 커피가 놓인 자리를 찾지 못하는 처지, 당연히 지나온 삶의 구비구비 쌓였던 사여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그런 이금순씨가 말끝마다 신나게 부르는 노래의 한 구절, '쨍하고 해뜰날 돌아온단다. 아싸, 야로~!', 젊어 애청했다던 '여자의 일생'도 기억이 안난다는 할머니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이 구절의 사연이 궁금해 손자 김빛나라 씨가 할머니가 살아온 곳을 더듬는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여전히 젖이 부족해 자신의 가슴을 들이받던 아이들에게 보리죽조차 넉넉하게 먹이지 못했던 그 시절이 아픈 할머니, 군에서 제대한 할아버지와 함께 정미소를 운영했다면서도 자식들 배를 곯렸던 시절, 그래도 할머니는 찾아온 동네 사람들에게 저녁을 나눠먹이던 넉넉한 품을 지니신 분이셨다. 어디 젊은 시절 뿐일까. 여전히 자식들 가까이 사는 지금의 집보다, 이제는 살림살이 하나 없는 예전 집이 더 익숙한 그 동네, 동네 사람들을 보자 할머니의 안색이 빛난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내, '쨍하고 해뜰날', 해마다 봄이면 마을 회관 사람들이랑 다녔던 봄놀이에서 불렀다던 그 노래, 그 노래를 함께 부르며 할머니는 내년 봄의 봄놀이를 기약하신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삶을 따라가다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손자, 서른 둘, 직장을 다니다 길을 잃어 그 길을 찾아 해외 배낭 여행을 다니던 손자, 여전히 길은 막연한데, 가난하고 고생스런 삶을 버텨오신 할머니를 보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짐해 본다. 

 

 

그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던 할머니의 식혜
여기 할머니의 일생을 더듬어보는 또 다른 손자가 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서점 개업을 준비하는 손자 정요한 씨, 그는 서점의 색다른 아이템으로 밥알이 탱탱하게 살아있는 할머니의 식혜를 떠올린다. 

그 식혜의 비법을 배우기 위해 들른 할머니의 집, 쌀을 불리고 찌고, 엿기름물을 만들고 밥통에 띄우기까지 '시간'의 공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걸 그 옛날에 밥통도 없이 쌀을 몇 말씩이나 하셨단다. 또 다른 할머니의 장기인 팥 양갱을 배우려는데 가마솥 불피우기부터 젬병이다. 할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나뭇가지를 잘 정렬하여 불을 피우고 팥을 끓이고 그걸 다시 몇 번에 걸쳐 거르고 한천과 함께 만들어 낸 양갱, 배우긴 배우는데 공이 이만저만 아니여서 요한씨는 연신 놀라는 중이다. 

그런데 놀라운 건 자라면서 식혜를 먹고, 양갱을 먹을 때 그저 할머니가 심심풀이로 만드셨는 줄 알았는데 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할아버지를 만나 시할아버지에, 세 분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층층시하 밥 먹을 새도 없이 살던 그 시절 고모님이 만드신 걸 보고 어깨너머로 만들어 내셨다는 열의는 학교 근처에 가보지도 않고 시집살이 틈틈이 한글을 익히신 향학열로 이어지셨다고. 

그 할머니의 열의와 열정 앞에 서른 셋의 나이에 새로운 길에 선 요한 씨는 새삼 고개가 조아려진다. 그리고 할머니처럼 견디며 버티고 그 속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걸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선택한 새 길에서도 어떤 희망이 있지 않을까 각오를 다져본다.

 

 

손때가 묻은 60권의 가계부
허나영 씨에게는 유명 스타와의 기념 사진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 홍보일을 하던 시절 정신없이 바빴지만 어느덧 그 속에서 자신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설치 미술'을 하고 있는 어엿한 작가, 그녀의 '미술적 재능'은 어디로 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 '예술적 DNA'는 뜻밖에도 할머니에게서 찾아진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할머니는 고운 무늬가 있는 종이를 모았다가 봉투를 만들어 명절 때 손주들 '세뱃돈' 등을 넣어 주셨다. 지금 봐서도 예술작품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무니며 만듬새, 그 작품의 주인공은 이제 93이 되신 오영순 할머니시다. 

하지만 할머니의 진짜 작품은 이 봉투가 아니라, 할머니가 '가정'을 꾸리고 살아오신 세월과 맞먹는 60권의 가계부이다. 학교 선생님이셨으나 동료 선생님이셨던 남편과 가정을 꾸리시면서 가정주부로 살아오신 시절, 박봉의 선생님 월급으로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고심하며 살아온 그 시절이 고스란히 가계부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저 할머니가 사들인 물품 목록과 가격만이 아니다. 그 가계부의 비고난에 빽빽이 적어내려간 그 시절의 일기, 사건들, 그 속에 90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난한 살림, 그 속에서도 세상사에 관심을 놓지 않으면서도 가족을 꾸려가느라 '곤란'했지만 애써 견디며 노력했던 할머니의 삶은 작가의 길에 들어선 손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귀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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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를 조명하는 다큐들이 늘었다. <미운 우리 새끼>와 새로 시작한 <아모르 파티> 등 예능에서 새로이 조명되는 세대와 같은 연장선상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얼마전 MBC 스페셜 <엄마와의 인터뷰>, <기막힌 내 인생 누가 알랑가?>와 이제 SBS스페셜 <빛나라! 우리 할머니>는 그저 그 세대에게 조명을 비추는 걸 넘어, 할머니, 어머니라는 가족 내 일원이 아닌 '한 사람', 그것도 어려운 시절을 살아낸 자기 극복의 표본으로 주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주목'의 시선에는 바로 현재, 그들만큼 힘들다 느끼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있다. 그러기에 시작은 '할머니', '어머니' 세대이지만 그 다큐의 끝엔 여기가 있다. 전쟁통에, 가난한 시절을 그렇게 버텨낸 것이 '승리'라고 말하는 다큐는 결국, 그러니 우리도 버텨보자, 살아내 보자며 다독인다. '고생'의 연대이다. 

by meditator 2018. 12. 10. 16:18

ocn에서 처음으로 편성한 수목 밤 11시, 그 첫 테이프를 끊은 <손 theguest>는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했다'는 말을 증명했다. 1.575%(닐슨 코리아 전국 케이블 기준)로 시작했던 드라마, 하지만 드라마에 잠시 출연했던 배우의 sns에 궁금증의 댓글이 달리고, 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드라마 중 악의 절대 세력을 상징했던 '박일도'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고, 심지어 그 정체가 밝혀졌음에도 외려 드라마의 긴장감이 더해지며 끝까지 시청자들을 흡인시키며 주인공 세 사람 '김동욱, 김재욱, 정은채'에 대한 열화와 같은 지지와 함께 4.073%로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엑소시즘'을 내건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종영 전부터 예고가 되었던 같은 방송사의 주말 <프리스트>로 이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열기가 식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제 5회를 경과하고 있는 <프리스트> 기대와 달리 1,2%대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같은 주제 드라마의 연속 방송이 주는 피로감?
아마도 편성을 하는 입장에서는 <손the guset>로 불붙은 '엑소시즘'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관심'은 이미 첫 회를 보는 과정에서 무너지기 시작해 버렸다. 

<손the guest>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건 어느 한 요소때문만이 아니다. 연기, 연출, 심지어 조명에 이르기까지 '엑소시즘'의 분위기와 긴장감을 한껏 불러일으켜 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드라마 장르에서 생소했던 '엑소시즘'이란 낯선 주제가 거부감없이 수용될 수 있었다. 반면 <프리스트>는 바로 그 대척점의 지점에서 드라마를 시작한다. 

드라마는 '남부 카톨릭 병원'이 배경이 된다. 긴박한 응급실, 그곳에 여주인공 함은호(정유미 분)가 있다. 때로는 병원 시스템이 요구하는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도 환자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정의감'이 앞서는 의사, 어린 꼬마 환자 우주,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응급수술에 돌입하지만 안타깝게도 목숨을 살려내지 못한다. 하지만 고개를 조아린 채 환자의 가족 앞에 선 것도 잠시, 꼬마의 심전도 그래프가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기적처럼 살아난 환자, 심지어 생명의 기로를 오가던 그 상처는 기적처럼 회복이 빠르다. 그리고 병원 장례식장에서 쓰레기를 주워먹는 등 '구마'된 상태로 돌아다니던 우주와 젊은 구마 사제 오수민(연우진 분)이 마주치게 되고, 오수민은 결국 꼬마의 몸에 들어간 악령을 구마하기 위해 소년을 납치하여 이제는 쓰지 않는 오래된 폐병원 건물로 가 구마 의식을 한다. 

 

 

이렇게 1회에서 '구마'에 이르기까지의 장황한 과정에서 드라마는 두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고자 한다. 양 손을 다 쓸 정도로 능력자이며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는 융통성이 만랩이던 여주인공 함은호는 정작 이상 증세를 보이는 환자를 두고 '악령' 운운하는 사제 오수민과 필요 이상의 실랑이를 벌이며 사건의 진행을 막는다. 그런가 하면 아직 '구마'를 할 만큼 경험과 능력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오수민은 스승이자 또 다른 구마 사제인 문신부의 허락도 없이 대뜸 우주의 구마를 시도한다. 막는 의사와 열혈 젊은 사제의 실랑이 속에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소년 속의 악령의 존재, 하지만 그 '악령'을 만나기 까지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많은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1회를 본 시청자들은 당연히 <프리스트(신부)>란 제목과 달리 이 드라마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즉, 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의학 드라마'인가, 아니면 사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엑소시즘 드라마인가 이다. 물론 드라마는 이 둘을 합친 '메디컬 엑소시즘'이라 하지만 정작 본 시청자들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란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이제 5회에 이른 드라마는 계속 남부 카톨릭 병원을 배경으로 환자에 이어 전문의, 간호 조무사 등 이 병원과 관련된 사람들이 악령에 씌임으로써 배경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이른바 드라마가 내걸고 있는 메디컬 엑소시즘이라는 콜라보 장르의 의미는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 

 

 

신부의 키스?
그렇게 '메디컬'도 '엑소시즘'도 어정쩡하게 시작된 드라마,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미 1회에서 부터 '구마' 의식에 걸림돌 역할을 하던 여주인공은 이후 조력자가 되었지만, 정작 엑소시즘의  과정에서 매번 중요한 계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이렇다할 존재감이 드러나지 않는다. 함은호는 착하고 헌신적이지만 그냥 그럴 뿐이다.

그런데 4회에서는 '최면 과정'에서 젊은 신부 오수민과 함은호의 '과거'와 관련된 사연이 복선으로 등장하며 '키쓰'까지 하며 외려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논란'은 '신부의 키스'가 아니라 결국 4회에 이르기까지 시청자들에게 조력자임에도 매력적인 캐릭터도 다가서지 못한 함은호나 오수민의 캐릭터에 기인한 바가 클 것이다. 심지어 이제 6회를 앞두고 그녀 주변에서 벌어지던 사건들이 그녀를 가르키고 있으면서 신부와의 키스 이상 '사연'이 등장할 예정이지만 그다지 구미를 당기지 못하는 게 <프리스트>의 안타까운 지점이다. 길영이 형이라고 까지 불리며 든든하게 드라마의 한 축이 되었던 <손the guest>의 강길영을 그리워한 이전 드라마의 호청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거기다 이제 5회차에 이른 드라마에서 어쩌면 가장 큰 의문은 정작 드라마에서 이렇다할 비중있는 활약을 하지 않음에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문기선(박용우 분)을 차치하고 왜 모든 '구마 의식'의 중심에 아직 이렇다할 경험이 부족해 보이는 오수민이 있는지 의문이다. 심지어 오수민은 비롯한 634레지아라고 하는 '구마' 레지스탕스를 만들고 그 대표인 듯한 문기선이지만, 늘 사건의 중심, 그리고 구마의 중심에는 어설퍼보이는, 그래서 최면 속에서 어머니의 환영에 고통받는 오수민을 내세워야 하는가 라는 '합리적 질문'에 드라마는 이렇다할 타당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즉, 선배 구마 사제의 갈등과 죽음을 목격하고, 그럼에도 자신의 형을 찾아서, 그리고 그 형을 죽음에 이르게 한 박일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구마하려고 했던 <손theguest> 최윤(김재욱 분)에게 마음이 가닿았던 시청자들에게 오수민은 어설프고, 문기선은 무게만 잡는 그런 존재로 다가온다. 무엇보다 엑소시즘 드라마에 관심을 가진 시청자들이 흥미을 가질 만한 구마 과정이나 의식에 대한 긴장감을 드라마가 제대로 유지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희생자들을 전면에 내세워 박일도의 정체를 따라가던 <손the guest>처럼 아직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악령과의 '악연'을 가진 이들이 '레지스탕스'처럼 조직을 만들어 구마 의식을 진행한다는 점에서 <프리스트>는 동일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윤화평과 최윤, 강길영이 가졌던 처연하고도 비극적인 악령과의 악연은 <프리스트>에서 어쩐지 실감나지 않는다. 캐릭터에 대한 공감이 얕으니 그들의 비극적 사연조차 그저 한 에피소드처럼 스쳐지나가 버린다. 

물론 섣부르게 예단 할 것은 아니다. 아동 학대의 희생양이었던 우주, 그에 이어 번아웃 증세를 보이던 견습의, 그리고 이제 직업적으로 소외된 간호 조무사의 악령들림을 통해 병원이란 배경 속 캐릭터들을 활용해 나가고 있다. 또한, 최면과 폴터가이스트 현상 등 다양한 악령과 구마 의식의 사례가 등장하고 있다. 거기에 구마 레지스탕스의 사연과 활약도 기대해 볼 만하다. 안타깝게도 초반에 시선을 잡지 못하고 캐릭터의 어설픔으로 인해 관심을 놓쳤지만 오수민과 함은호, 그리고 문기선 등의 관계에서  매회 풀어놓는 사연의 곡진함은 유장하다. 부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풀어내 '창대'한 결말에 이를 수 있도록 <프리스트>의 건투를 빈다. 

by meditator 2018. 12. 9. 17:34

'해와 하늘 빛이 서러워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라는 천상병 시인의 문둥이란 시로 시작되었다. 아니, 그 시의 한 구절, '애기 하나 먹고'처럼 드라마는 '아이'의 희생에 대한 사건을 '시'로 수식하여 시작되었다. 

 

 

죽음과 시, 그리고 아이
시작은 아이의 죽음이다. 남편과 아이, 그리고 이제 곧 세상으로 올 둘째 아이를 가진 세상 부러울 것 없었던 아동 상담사 차우경, 그렇게 햇살같았던 그녀의 일상은 우연히 그녀 앞에 뛰어든 어린 소년으로 인해 어둠이 깔린다. 그렇게 우경에게 벌어진 우발적 사고와 함께 시작된 강력반에 배당된 의문의 사고들, 아동학대 치사 공범이 차에서 불에 탄 채 발견되고, 그 범인은 스스로 '자해'하여 자신의 목숨을 끊고, 아내와 딸을 학대하던 남자는 차에서 역시 스스로 연탄불을 펴서 자살을 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방기된 채 상담센터에서 아이를 기르던 젊은 엄마 역시 '썩어서 허물어진 살 그 죄에 무게'라는 붉은 페인트 낙서에 둘러싸여 미이라가 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미이라가 된 젊은 엄마를 발견한 계기로, 거기에 알고보니 강력반 형사 강지헌(이이경 분)의 전연인이 차우경 남편의 내연녀였던 인연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사건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두 사람의 행보는 겹쳐진다. 그저 의아심만으로 사건에 접근해 들어가던 지헌에게 우경은 젊은 엄마 시체의 발견에서 부터, 개장수인 그 전 남편의 집 수색, 보육원에 버려진 아이의 발견 등등 적극적인 활약을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개별적인 사건들 사이에 '아이', 그것도 친부모로부터 방기되고 학대당한 아이가 있음을 밝혀낸다. 

 

 

개장수로부터 학대당하던 떠돌이 소녀 출신의 엄마는 상담 센터에 숨어 아이를 키우지만 거의 방기하다시피한다. 그리고 아이의 눈 앞에서 그 '누군가'에 의해 천식 호흡기를 빼앗긴 채 죽어 '죄의 무게'의 대가를 치룬다. 아내를 때려 탄 보험금으로 노름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 아이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던 아빠에게는 아내가 사간 연탄불이 배달되었다. '자살'이나 '의문사'로 처리될 죽음의 속에 숨겨졌던 '붉은 울음'이 강지헌의 추궁으로 드러나며, '학대된 아이'가 매개된 사건에게 '배후'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천식 기침에 숨이 넘어가던 엄마의 호흡기를 치운 사람도 붉은 울음일까? 과연 붉은 울음은 누구일까? 

미친 여자 차우경, 그녀는 누구일까? 
드라마의 시작은 '아이'에게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차우경이었다. 자신의 차로 뛰어든 소년으로 인해 일상이 무너질 정도로 고통받던 그녀, 남편이 떠나갔을 때 결국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아이를 죽인 죄의 대가라 감내하려 했던 우경, 아이를 구하기 위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으스스한 낡은 창고도, 위험해 보이던 개장수의 집도 마다하지 않던 우경, 그녀의 '정의'에 시청자는 함께 시선을 맞추어 <붉은 달 푸른 해>의 서사를 따라갔다. 

 

 

그런데, 동시에 그런 우경으로 인해 혼돈스럽다. 그녀의 차에 뛰어든 건 초록원피스를 입은 대여섯살 정도의 여자 아이일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보다 훌쩍 더 큰 남자아이였던 그 순간부터, 시시때때로 그녀의 눈앞에 등장하는 그 '초록옷의 여자 아이'는 우경만큼 시청자들을 혼돈으로 빠뜨렸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 우경은 그 '아이'가 이끄는 대로 사건의 현장에 뛰어들어 두 아이를 구했다. 미이라가 됐던 젊은 엄마의 딸과, 그녀의 차에 치어죽어간 소년의 동생, 모두 초록옷 소녀를 찾아 헤맸던 행로의 끝에서 만난 학대받고 방기된 아이들이다. 

과연 초록옷 소녀는 누구일까? 여전히 초록옷 소녀가 보이냐는 지헌의 질문에 우경은 이제 더 이상 그 아이로 인해 혼란스럽지 않다 한다. 그 아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을 구할 수 있던 우경, 하지만 그뿐일까? 남편의 외도로 인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채 부엌에서 칼을 들고 뛰쳐갈뻔 했을 때도, 그리고 이제 자신이 치어 죽인 아이를 '돈'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는 채 외면하는 엄마를 차로 밀어버릴 뻔한 순간에서도 우경을 저지하고 위로한 이는 '초록옷 소녀'였다. 

그리고 12회 마지막 초록옷 소녀의 몽타주를 작성하던 우경에게 떠오르는 과거의 한 장면, 그 속에서 누군가에게 떠밀려 쓰러지던 그 '초록옷 소녀'. 그리고 그 순간 경찰서의 강지헌에게 떠오른 가장 유력한 사건의 배후, 붉은 울음, 그리고 차우경이다. 즉 1회에서 부터 12회까지 헌신적으로 사건을 이끌어 오던 우경은 동시에 늘 사건의 현장, 혹은 사건의 연결고리가 되어 등장했던 것이다. 심지어, 미이라가 된 젊은 엄마를 발견하기까지. 과연 우경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그건 마치 우경이 치어 죽였지만, 그 소년에 애닮아하며 그 동생을 구한 그 정황과도 유사하다. 그 사건은 우경에 대한 또 다른 상징일까?

 

 

거기에 더해진 의미심장한 관계, 바로 우경과 우경의 새엄마(나영희 분), 그리고 뜻모를 미소를 지은 듯한 여동생(오혜원 분)이다. 우경의 자매를 살갑게 보살펴 주는 듯하지만 한 순간 얼음장처럼 돌변하는 새엄마, 그 앞에서 죄지은 아이처럼 쩔쩔매는 우경, 과연 이 세 모녀의 과거에는 어떤 사건이 있을까가 우경의 존재에 대한 키가 된다. 

그리고 그 키에 대한 힌트는 뜻밖에도 우경이 자신의 아이에게 읽어주는 동화에서 등장한다. 다섯 살 딸에게 밤마다 읽어주는 동화, 첫 날 읽어주던 동화는 아기 돼지 삼형제, 다음 날 읽어주던 건 <붉은 달 푸른 해>라는 제목의 '해와달' 이야기이다. 그리고 우경의 구연을 통해, 해석을 통해 풀이된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형제'와 '오누이'가 있고, 그들에게 '선한 부모'인 척 다가가는 '늑대'와 '호랑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경의 기억 속에 등장한 초록옷 소녀는 학대당한 우경인가, 아니면 우경이 알고보니 가해자인가. 아니면 그저 우경이 쫓고있는 아동 학대 사건들의 상징인가. 드라마는 맞춰지지 않은 퍼즐 조각들을 뿌려대며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학대당한 아이의 사건들로 풀어가던 <붉은 달 푸른 해>는 이제 12화를 기점으로 초록옷 아이의 망상에 시달리던 주인공 우경에게로 다가선다. 그녀의 말처럼 '선의에 의한 악행'일까? 아니면 어릴 적 사고로 인한 이중 인격의 발현일까? 아니면 그저 어떤 사건으로 인한 피해 의식이 이제 그녀를 아동 학대의 지킴이로 만들었을 뿐일까? 아동 학대 사건의 씨실 사이로 구비구비 엮어진 차우경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니 사실 차우경만이 아니다. 그녀를 비롯한 등장 인물 모두가 다 의문스러운 <붉은 달 푸른 해>는 시청률은 꼴찌지만 보고 뜯고 추리하는 재미는 '대박'이다. 

by meditator 2018. 12. 7. 15:08

'드라마 왕국의 부활'을 내세웠던 mbc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포진한 마지막 작품은 바로 수목 미니시리즈 <나쁜 형사>이다. 2016년 <피리부는 사나이> 이후 2년만에 드라마로 돌아온 신하균을 주인공 나쁜 형사인 우태석 역으로 내세운 이 드라마는 영드 매니아들 사이에서 이미 입소문이 자자했던 <루터>의 '리메이크' 작이다. 

 

 

또 한 편의 영드 리메이크가 왔다.
올 한 해 그간 우리나라에서 스테디 셀러가 되다시피 했던 '일드(일본 드라마-)'나 미드(미국 드라마)의 리메이크 작들이 <하늘에서 내린 일억개의 별>이나 <미스트리스>의 경우에서 보여지듯 부진했다. 그런 <라이프 온 마스(2018.6~8)>가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에서 성공하며 범람하는 제작 편수와 상대적으로 고질적 콘텐츠 고갈에 시달리는 드라마 시장에 '영드'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 <셜록> 신드롬에서 보여지듯이 이미 우리에게 '영국 드라마'는 낯선 것이 아니다. 거기에 이미 다수의 영드들이 미드로 '번안'되고 있듯이, 그 작품성과 대중성의 면에서 '영드'는 이미 세계적인 호응을 얻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2018을 마무리하는 mbc 수목 드라마로 영드 <루터>가 등장했다. <셜록>, <라이프 온 마스> 등을 통해서 보여지듯이 '영국 추리, 혹은 수사 드라마'는 독특한 설정과 서사 구성으로 이미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제 시즌 4를 마친 <루터>역시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터>를? 아니나 다를까, 공중파 10시에 하는 미니 시리즈임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리메이크 작 <나쁜 형사>는 19금의 딱지를 달고 방영을 시작했다. 15세가 보기에는 잔인해서? 아니 그건 태생적으로 19금의 캐릭터를 품은 한국으로 온 루터, 우태석 형사 때문이다. 

 마블의 '토르' 시리즈에서 아스가르드의 문지기인 해임달 역할로 우리에게 얼굴을 알린 이드리아스 엘바가 분한 루터는 영국의 강력범죄 수사관이다. 범죄자 심리 파악에 능하고 거기에 뛰어난 관찰력으로 사건 해결 능력이 뛰어난 수사관이지만, 형식과 절차를 무시하고 때로는 '정의'의 이름으로 나쁜 수단과 방법을 마다하지 않고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바람에 늘 감사의 대상이 되는 골치덩어리이다. 

바로 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 구현'을 하는 이 캐릭터가 그간 늘 '법'의 테두리 내에서 '악', 심지어 권력의 비호를 받는 '거악' 앞에서 자괴감을 느끼며 무릎을 끓어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던 우리 수사드라마 풍토에 신선한 인물 우태석으로 돌아왔다. 

 

 

신하균 맞춤의 우태석 표 나쁜 정의
우태석, 전국 강력 범죄 검거율 1위, 넥타이까지 갖춰 맨 딱 떨어지는 슈트에 멋들어지는 중년의 형사지만, '죄지은 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죄값을 치르게 한다'는 그의 신조로 인해 늘 그의 수사 방식은 윗선을 좌불안석에 떨게 만들며 '감사'와 '감봉'의 처지에 그를 놓이게 만들고, 그런 그가 불안하다며 아내는 '이혼' 서류를 내민 형편이다. 

'잘 할게, 처갓댁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할게'라는 그의 읍소에 아내는 반문한다. '과연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걸 놔두고 달려올 수 있겠는가'라고, 그리고 이혼하기 싫으면 '형사'를 그만두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아내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어린 아이를 놔둔 채 사라진 젊은 엄마의 실종 사건을 쫓는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초보 순경 시절 그를 좌절케 만들었던 검사 장형민(김건우 분)과 조우한다. 

그가 잡은 아이 납치범을 강압 수사라며 구속 영장을 발부해 주지 않은 검사, 하지만 단지 그 사건 이상 우태석을 오늘의 '걸어다니는 시한 폭탄'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장검사다. 

실종된 여고생을 찾아 풀숲을 수색하던 그날, 밤 늦은 시각 그곳을 배회하던 또 다른 여고생에게서 그는 사건의 단서를 발견한다. 자신에게도 너같은 동생이 있으니 보호해주겠다며 약속을 했던 그, 하지만 그런 그날의 약속은 처참한 사고 현장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이제 우태석은 그날의 사건 현장의 목격자와 같은 어린 아이를 아무 것도 모른다며 보호하는 대신, 장형민에게 '미끼'를 던진다. 

피해자의 치아를 날로 뽑아대며 쾌감을 느끼며, 그 고문 현장의 증거를 깔끔히 인멸하는 그의 용의주도한 범죄 방식을 역으로 이용하여 사건 현장을 조작하는 듯한 인상을 줘 장형민을 사건 현장으로 불러들인 우태석, 그리고 대부분의 사건 수사 드라마가 그러하듯 음산하고 위험한 공장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던 두 사람은 앞서 장형민이 구속 영장을 발부해 주지 않은 그 사건에서 처럼 난간을 사이에 대치하게 된다. 

난간에 매달린 장형민, 그런데 우태석은 앞서 사건보다 한 술 더 뜬다. 양 손으로 매달린 장형민의 손을 구두로 짓밟고 결국 그는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아마도 장형민의 손을 잡아 '법의 심판대로 갔다면 검사였던 그의 신분으로 '법망'을 유유히 피해갈 수도 있을 지도 모를 상황, 우태석은 그런 번거로운 절차 대신 이미 10년전에 죽었어야 했다며, 그랬다면 아이 엄마도 죽지 않았을거라며 스스로 '심판자'가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이 드라마가 19금인 이유가 된다. 

 

 

'법'의 절차 대신, 스스로 '심판자'가 된 우태석, 그런데 놀랍게도 이 '나쁜 형사'에 시청자는 동시간대 1위, 7.1, 8.3%의 시청률로 답했다. 물론 거기엔 영드 <루터>의 이드리아스 엘바 저리가라 할 모처럼 돌아온 '나쁜 정의'의 캐릭터에 안성맞춤인 돌아온 '하균신'의 존재감이 크다. 그리고 드라마 왕국 부활의 기치를 내걸을 만한  그동안 어디 있었어?라고 할만한 연출과 극본, 음향, 조명 등의 절묘한 조합이 거들고 있다. <라이프 온 마스>에서 이미 판가름났듯 제 아무리 명작도 '탱자'가 될 수 있는 '리메이크' 시장에서 <나쁜 형사>가 된 <루터>는 손색이 없었다. 19금이란 한계가 무색하게 첫 회에 19금의 정당성을 선포한 스피디한 수사와 캐릭터 소개는 색다른 수사 드라마를 기대한 시청자의 시선을 잡았다. 그리고 거기엔 무엇보다 그간 '법'의 테두리 내에서 고전했던 수사 드라마에 갑갑함을 느끼던 시청자의 니즈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이다. 

첫 술은 배불렀다. <셜록>이 소시오패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정신적 편력에 기반한 사건 수사를 배치해 나가듯,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루터>는 스스로 '나쁜 정의'를 자처하며 사이코패스와 공조수사를 펼치는 형사의 정신적 방황과 고뇌가 심도깊게 펼쳐지는 사색적인 작품이다. 과연 이런 무게감있는 작품을 <나쁜 형사>가 우리 현실에 맞게 연출자의 말처럼 한국판 '다크 히어로'로 승화시켜낼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 12. 4. 15:11

스페인의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이곳에 유진우(현빈 분)가 온 이유는 '관광'이 아니다. 간밤에 온 한 통의 전화, AR, augmented reality,  즉 증강 현실 게임의 개발자라는 사람의 전화 한 통에 그는 '밤드리' 이곳 그라나다로 날라왔다. 그리고 그 AR 게임의 유입 도구가 된 '렌즈'와 '인이어'를 끼자, 관광지 그라나다가 달라진다. 

 

 

광장에 우뚝 서있던 검을 든 무사의 동상이 뛰어내린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진우를 향해 달려든다. 무방비의 상태에서 진우는 당연히 일격을 당하고. 다음 순간 '치명적 상처를 입었다'는 문구와 함께 레벨 1의 첫 번째 게임에서 그는 로그아웃당하고 만다. 그렇게 시작된 게임, 그라나다의 한 광장을 배경으로, 거리의 맥주집 화장실에서 찾은 녹슨 철검으로 진우의 되풀이되는 도전이 지속된다. 매번 '로그인'을 할때마다 진우의 전투 능력은 일취월장하지만 역시 버겁다. 거리의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무사에게 치명적 상처를 입혀 분수대에 나자빠뜨린 진우. 드디어 레벨 1의 단계를 도약한 그는 환호작약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거리 까페 시민들에게 그는 그저 혼자 미쳐 날뛰는 제 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 이게 바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1회의 내용이다. 

 

   

 

송재정 작가의 거침없는 도전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영역은 어디까지 일까? 이 '화두'는 곧 작가 송재정의 화두인 듯하다. MADE BY 송재정의 드라마들은 곧 우리나라 드라마의 개척지가 되어왔다. 2006년에서 2007년까지 지금까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순재'네 집의 아웅다웅 기록기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그 이름을 알린 송재정 작가는 2008년 알만한 사람들만 아는 문제작 <크크섬의 비밀>로 돌아왔다. 세상에 서해안 낙도에 떨어진 직장인 10명의 무인도 표류기라니. 미드 <로스트>에서 볼 수 있는 설정이 코믹 시트콤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독보적 영역'으로 하지만 대중적 호응을 얻는데는 실패했던 송재정 작가는 역시나 알만한 사람들은 '힐링'작이라 손꼽는 표민수 피디와의 <커피 하우스>를 경과하여, <인현왕후의 남자>를 통해 우리가 몸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선 숙종 때의 선비 김붕도는 장희빈에 밀려 폐위된 인현왕후의 복위에 힘쓰던 중 뜻밖에 '타임슬립'을 하며 2012년의 드라마 <신장희빈>에서 인현왕후 역을 맡은 최희진(유인나 분)와 조우하게 되며 운명적인 사건과 사랑에 휩쓸리게 된다. 

이처럼, 송재정의 드라마에서 남자는 휩쓸린다. 그가 머물던 세상에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신비로운' 비과학적 동인에 따라 자신이 머물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게 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결국 '표절'로 귀결된 <나인>에서 신비의 향 9개를 얻어 20년전의 과거로 돌아간 박선우(이진욱 분)이 그러했고, 2016년 서울이라는 같은 공간인 듯 하지만 사실은 웹툰은 배경으로 한 실재와 가상 세계를 오가던 강철(이종석 분)이 그러하다(W 공간 이동의 시작은 웹툰 매니아였던  여주인공 오연주(한효주 분)이지만)그리고 이제 그라나다라는 실제적 공감을 배경으로 증강현실 게임 속으로 뛰어든 유진우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 송재정 작가는 과거와 현재, 웹툰을 배경으로 한 가상 세계와 현실, 그리고 이제 현실과 증강 현실로 드라마의 소재적 영역에 도전해왔다. 그러기에 현빈이 분한 유진우가 그라나다의 길거리에서 거리의 동상을 상대로 칼싸움을 하는 황당한 설정은 낯설지만, 송재정의 세계를 함께 해왔던 시청자들에게는 그리 새로울 것도 낯설것도 없는 것이며 그저 송 작가의 또 다른 도전이 반가울 뿐이다. 

하지만 송재정 작가의 도전이 그저 뜬금없는 것만은 아니다. 2012년 <인현왕후의 남자>가 방영될 당시 공중파인 SBS에서 같은 타임 슬립 소재의 <옥탑방 왕세자>가 방영되었듯 당시 '타임 슬립'은 드라마적으로 가장 '트렌디'한 소재였고, 안타까운 결론을 맺었지만 <나인>은 그 '타임 슬립물'에 있어서 최고봉으로 인정받았었다. 

또한 '웹툰'을 배경으로 한 서울의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오가는 <W> 역시 콘텐츠로서 '웹툰'의 활황에 힘입어 평소 드라마를 보지 않던 젊은 층조차 기꺼이 '닥본사'의 대열에 합류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내노라하는 배우들, 심지어 외국 유명 배우들까지 RPG 게임의 모델로 하는 광고라 TV 광고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게임 전국 시대'에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보는 이의 '이물감'을 쉬이 잦아들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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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과 로코의 양수겸장 
거기에 더해 송재정 작가의 작품은 '소재'는 파격적이지만, 그 '파격'을 풀어가는 서사의 구비구비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양식을 담아낸다. 조선에서 온 선비지만 2012년 서울에서 '킹카'를 넘어 키다리 아저씨같던 <인현왕후의 남자>가 그러했고, 죽음의 앞에서 아버지와 형,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향을 피우던 <나인>이 그러했다. JN글로벌 공동 대표에 방송국 W를 소유한 사격 국가 대표 출신의 웹툰 속 젊은 재벌 강철이라고 다를까. 만화 속 여주인공이 되어버린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던진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다르지 않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유진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그 유진우로 등장한 현빈에게서 우리는 2010년 방영된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의 기시감이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여주인공 정희주(박신혜 분)가 운영하는 보니끄 호스텔의 낡고 미비한 서비스에 울화통이 터진 유진우가 정희주를 향해 분노를 폭발할 때 예의 김주원이 '타임슬립'을 한듯 하다. 그렇게 현빈이 가장 잘 해내는 싸가지 재벌의 캐릭터로, 그러나 정희주의 동생이 게임 개발자인 것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180도 돌변하여 그녀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려는 설정은 익숙한 '로코'의 향기를 느끼게 한다. 거기에 게임 속 캐릭터로 등장한 정희주의 변모는 당연히 증강 현실처럼 시청자들을 드라마 속으로 흡인시킨다. 

물론 그 '익숙한 로코'의 여정은 증강현실 게임 속을 헤매이는 듯한 1년 뒤 유진우의 설정과 함께 '고난'의 여정이 될 것임을 예측시킨다. 거기에 그의 오랜 친우였다 이제는 전처의 남편이 되어 거침없이 그를 향해 칼을 뽑는 또 다른 유저이자, 경쟁자인 차형석(박훈 분)의 존재는 '갈등'의 계기로서 흥미진진하다. 

이제 2회를 마무리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과연 드라마 속으로 들어온 증강 현실 게임을 제대로 구현해 냈는가 여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하지만 현빈, 박신혜라는 스타 캐스팅을 차치하고서라도 '증강 현실 게임'이라는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동시간대 1위(닐슨 코리아 케이블 기준)라는 성과는 그간 우리 시청자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운 소재에 대한 갈증이 깊었는가를 보여주는 한 반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송재정 작가는 이번에도 변함없이 답해주고 있다. 

by meditator 2018. 12. 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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