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적령기의 딸을 둔 언니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딸내미 시집 보낼 걱정을 만날 때마다 한다. 심지어 서른을 넘어서면 결혼 정보 회사에 등록할 테니 알아서하라고 엄포까지 놓았단다. 하지만 웬걸 언니가 목을 매는 그 딸내미는 엄마의 마음이 무색하게 당장 결혼 생각이 없단다. 심지어 사촌 동생이 해주겠다는 소개팅도 단칼에 자른다. 아직 남자 만날 생각이 없단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기고.... 등등등 조카의 눈이 높아서일까? 엄마랑 동생이랑 시간 날때마다 여행 다니고 맛집 찾아다니는 것으로 만족해서일까?  아니 그것보다는 이른바 '결혼 적령기'라는 어른 세대가 만들어 놓은 그 '프레임'에 자신을 꿰어 맞추는 것이 싫어서가 아닐까? 그래서일까? 조카처럼 '비타협적 저항'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젊은이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정하고 '결혼'을 안하겠다고 한다. '비혼주의자'이다. 

 

 

얼마전 동창 모임, 이제는 늙수구레한 나이에 아이들 결혼 얘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결혼 하기 힘든 세상의 이야기가 오가다 요즘 결혼하지 않겠다는 아이들이 화두에 올랐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우리 집 얘기다. 하지만 아이들을 애써 키웠고,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친구는 세상에 태어나서 아이를 기르는 일만큼 가치있고 보람있고, 행복한 일이 없다며 자신은 아이들에게 결혼하고 아이도 낳으라고 하겠다고 한다. 설왕설래하고 헤어져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니 우습다. 우리 아이들의 삶인데, 마치 우리들의 인생인 것 마냥 진지하게 서로의 입장을 내세웠던 것이. 그렇다 어쩌면 우리 사회 '비혼'이 문제가 되는 건 바로 우리처럼 아이들의 삶인데, 그 삶에 우리가 감놔라 배놔라 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빠의 오지랖, 딸의 비혼 선언, 그 세대적 간극
다큐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가장으로서 온갖 고생을 겪으며 번듯하게 삼남매를 키워낸 오현춘 씨(50), 어려운 인생 고비고비에서도 가족을 놓치지 않고 여기까지 온 게 그의 자부심이듯 당연히 '결혼'을 인생의 통과 의례로 여긴다. 그런 그이기에 이제 26살, 결혼 적령기가 된 큰 딸에 대한 고민이 크다. 하지만 웬걸 오화진씨는 그런 아빠의 요구에 '나 결혼 안해'란다. 청천벽력이다. 

화진 씨는 자신은 비혼주의자라 선언한다. 물론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고 자라났지만, 자신이 자라오면서 본 어머니의 삶은 늘 가사 일에서 놓여나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건축 구조사로서 자신의 일에서 경력 단절을 가지고 싶지 않은 화진씨, 어머니가 일궈낸 가정을 꾸려나갈 자신이 없다. 아이는 입양 등으로 생각해 볼 여지가 없지만 남편과 시댁이 그녀의 삶에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은다. 

그런데 그런 화진씨의 생각에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동조한다. 사랑에 빠져서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서두른 결혼, 남편은 이혼이 여사인 세상에 이혼하지 않고 이날까지 살아온 것이 자랑이지만, 화진씨의 어머니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결혼하지 않을 꺼라 '후회'의 념을 꺼낸다. 

 

 
비혼 권하는 사회
'비혼'을 선택한 여성들이 그 이유로 든 건 크게 두 가지, 우리 사회가 경력 단절 여성에게 가하는 부당한 대우를 감수해가며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는 것과, 또 하나, 한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100 명의 인간 관계를 감수해야 하듯,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이 받아들여 할 '시댁' 등의 새로운 인간 관계를 굳이 감당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남자라고 다를까. 분양을 받은 아파트에 개를 몇 마리 더 들여놓을 지언정 여자 사람을 들여놓을 생각은 없다는 남성은, 이제 결혼 적령기를 맞은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고, 그런 결혼식 자리마다 넌 언제 결혼하냐는 친구들의 인사가 번거롭지만, 자신의 입장에서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막상 결혼을 한 친구들, 주변 남성들이 그의 눈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과 아이의 생산이 '애국'의 문제로까지 격화되며 '세대 갈등'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이 즈음, 어른들은 태연하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사람의 도리'라 하지만 젊은이들은 단호하다. 그저 결혼은 삶의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라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삶만을 '정상'으로 만들어 놓은 어른들이 문제라고. 

우리 사회의 결혼 제도는 외적으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결합이라는 개인적인 결합으로 정의내려지지만, 막상 그 과정에 들어서면 결혼은 '집안'과 '집안'의 결합으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결혼은 그저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전혀 새로운 한 집안의 조직원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전혀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2018년의 '현대'를 살지만, 사회의 기본 단위는 여전히 '가정', 심지어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발언권이 고양되었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근간은 공고하다. 그러기에 엄마들은 나는 이렇게 살았지만 너는 이렇게 살 필요가 없다 하고, 딸들은, 아들들은 엄마처럼, 아빠처럼 살 자신이, 아니 살고 싶지 않다고 한다.

거기에 결혼 비용이 '2억'이니 하는 세태에, 한 가정을 이루는 데 드는 '비용'이란 측면에서 젊은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현실은 더더욱 결혼이란 제도를 버겁게 만든다.  제 아무리 독립적으로 살고자 하지만 이미 출발부터 부모에게서 경제적 도움을 받고 시작하는 결혼 생활에서 과연 얼마나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할 수 있을까? 

거기에 더해, 지자체마다 아이를 낳으면 레이스를 벌이듯 아이를 낳으면 돈을 얼마를 주겠다고 하지만, 당장 아이를 낳고, 키우는 엄마들의 하소연은 나아질 길이 없는 사회, 하나는 겨우 낳지만 둘을 낳으면 미친 짓이라는 워킹 맘의 하소연이 울리는 세상에서 과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무모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해마다 줄어드는 건 당연지사가 되는데, 그런 학습 효과를 겪은 젊은이들이 굳이 그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혼, 존중받아야 할 권리 
그러저러한 이유로 결혼을 굳이 선택하지 않겠다는 젊은이들, 그들은 자신의 선택을 삶의 하나의 선택지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결혼을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삶을 '비정상'으로 낮잡아 보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인간의 삶을 동물의 번식과 동일시하며 가임 연령 내의 결혼을 안하기라도 하면 금단의 선이라도 넘은 듯이 여기지 말아달라 한다. 

결국 '비혼주의'는 어른 세대가 일궈오고 가꿔왔던 '가족 신화'에 대한 이의 제기이다. 과연 한국 사회 내에 안전판이자, 유일무이한 보호막이었던 '가족'이란 제도가 오늘날 유효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거기에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정상적이라 쓰고, 가부장적 가족 제도라 읽어지는 그 '가족' 제도에 대한 반기이기도 하다. 결혼을 하면 또 다른 집안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어야 하는 그 공동체적 삶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출산의 숫자만을 고민하는 사회에 대한 젊은이들이 내놓은 답안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획일적 삶'만이 정답이 되어온 대한민국이란 체제에 대한 거부이다. 

그러기에 왜 결혼을 안하냐고 다그치기 이전에, 어른 세대가 만들어 놓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것이 먼저가 될 것이다. 애국 운운하며 결혼은 천부적 권리며 의무이며 행복이라고 해봤자, 개풀 뜯어 먹는 소리 취급만 받을 뿐이다. 

지구 인구가 72억을 넘어서고 있다. 이번 세기 안에 40억이 더 늘어날 것을 전망하고 있다. 과연 지구는 이런 인구를 감당할 수 있을까? 국제 생태발자국 네트워크에 따르면 프랑스 인 정도의 삶을 유지하며 살려면 30억 명이 적정 인구 수준이라 한다. 미국인이 수준 정도는 40억 명,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려면 22억 정도란다. 그렇게 지구 포화, 혹은 폭발이란 측면에서 보면 어쩌면 오늘날 '비혼주의자'들은 인간의 숙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현명한 선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저 '하나 낳아 잘 기르자'와 '셋이라서 행복해요' 사이를 오가는 정책의 변덕이 문제일 뿐. 

by meditator 2018. 12. 24. 13:32

토비 맥과이어아니고서는 스파이더맨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토비는 거미줄을 뽑아 벽을 타는 스파이더맨이기엔 중후해져갔다. 결국 우리가 영화로 만나던 유일한 스파이던맨같았던 토비 맥과이어는 <스파이더맨> 1,2,3 트릴로지 시리즈를 남긴 채 앤드류 가필드의 <어메이징 시리즈>에 바톤을 넘겼고, 다시 앤드류는 <아이언맨2>에 수다쟁이 까메오 소년으로 등장한 톰 홀랜드에게 스파이더맨을 계승시켰다.  그 뒤로 참여 수업 대신 벽을 타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 아저씨의 지도 편달을 받아 어였한 어벤져스 군단의 일원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지구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던졌다. 

 


그렇게 미소년 백인 배우들에 의해 계승되던 <스파이더맨>, 너드라 놀림받기도 하고, 서민형의 히어로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백인 미소년에 의해 승계되었던 스파이더맨의 전통을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는 새롭게 열어젖힌다.  무엇보다 백인 미소년, 미청년에 의한 '독점'되던 젊은 청년 영웅은 그 누구라도 '방사능 피폭된 거미'에게 물린다면, 그리고 기꺼이 그 거미로 부터 받은 힘을 '사회'를 위해 쓰기를 원한다면 스파이더 맨이 될 수 있다고 정의내린다. 그가 흑인 소년이건, 차원을 달리하는 곳의 '스파이더맨 아저씨건 스파이더 소녀건, 느와르 버전 스파이더맨이건, 심지어 스파이더 로봇을 탄 어린이건 말이다. 그렇게 유일한 히어로였던 스파이더맨은 이제 새로운 세계에서 그 누구라도 가능한 다차원의 히어로로 거듭난다.

누구나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스파이더맨이 다른 시리즈, 다른 배우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영화 속 어떤 강력한 악당을 만나도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런 '히어로'의 영원불멸성에 대한 허를 찌르며 시작한다. 


 

경찰인 아버지, 간호사인 어머니를 둔 중산층의 흑인 가정의 아들 '마일스 모랄레스', 입신양명까지는 아니지만 자신들이 살던 동네에서 머물러서는 '성공'을 이루기 힘들 거라 생각한 부모님은 우연히 그에게 떨어진 기숙 사립하교의 취학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정들었던 동네, 정들었던 친구들과 떨어져 우리의 특목고 정도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학교로 전학간 마일스. 당연히 그 학교에서 그는 모래알처럼 섞여들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은 공부보다는 아빠와 견원지간인 삼촌과 함께 그래피티(graffiti)를 즐기는 것이 더 좋은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가난한 백인 가정에서 부모님없이 자란 너드(nerd) 피터 파커를 중산층의, 하지만 여전히 백인 중산층 사립학교에서는 '너드' 취급을 당하는 흑인 청소년 마일스를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그를 둘러싼 두 개의 세계, 한때는 삼촌과 함께 주먹도 좀 써봤지만,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 안정을 위해 경찰관이 된 아버지의 '신분 안정, 혹은 상승'의 세계, 그런 아버지와는 불화하며 벽에 그래피티를 하며 삶을 즐기는 듯한 삼촌의 불안정적이지만 자유로운 세계, 밤에 학교를 빠져나와 삼촌과 지하철을 따라 간 으슥한 폐건물 벽에 한껏 자신의 미적 재능을 뽐내는 마일스는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어 있다. 

그런 마일스가 그곳에서 우연히 방사능 거미에 물리고, 뜻밖의 '스파이더'한 능력에 경악하며 다시 찾은 그곳에서 그는 다시 우연히 스파이더맨의 죽음을 목도한다. '거미줄'이 만능인 양 힘겹더라도 결국은 악당을 물리치던 스파이더맨이었는데 범죄 대부 킹핀의 공격 앞에 무기력하게 숨을 거두고 만다. 


 

죽음을 맞이한 스파이더 맨과, 아직 '스파이더'한 능력을 조정도 못하고,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마일스, 그런 그가 '히어로'의 길을 향한 유일한 연결 고리는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부탁은 언감생심, 킹핀의 하수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은 커녕 벽을 타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던 스파이더맨마저 그의 앞에서 죽음을 맞이한 상황, 그런 혼란스런 고민을 믿고 의논할 삼촌은 행방이 묘연하고, 고민하는 그의 앞에, 킹핀의 실험으로 흐트러뜨려진 평행 우주 속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 맨(?)들이 등장한다. 

학교에서 마주친 동급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다른 차원에서 마일스처럼 가장 친한 친구였던 스파이더맨을 잃고 방황하던 스파이더 그웬, 1930년대 사설 탐정으로 활약하던 버버리 코트를 입고 중절모를 쓴 스파이더 느와르, 아버지가 남기고 간 스파이더 로봇 'sp//dr'을 조종하는 미래에서 온 페니 파커, 돼지인지 스파이더맨인지 헷갈리는 명랑 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스파이더 햄, 거기에 마일스가 살던 곳과 똑같은 평행 세계에서 온 심지어 메리 제인과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한 중년의 배나온 루저가 되어가던 피터 B. 파커, 이들이 벌려진 세계의 틈 사이로 마일스의 세계로 와 '스파이더 군단'이 된다. 

3D 에니메이션으로 구현된 <뉴 유니버스>는 마일스의 현실에 삼촌의 세계인 그래피티한 영역을 더하고, 차원의 분열, 거기에 다시 다른 차원에서 온, 이른바 우리가 말하는 '만화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을 더하는 방식을 2D의 만화적 공간을 옮겨온 듯한 '효과'를 통해 구현해 낸다. 만화 속 효과음이 그래도 'BOOM'하는 글씨로, 효과 음향과 함께 등장하는가 하면, 만화 책처럼 화면을 여러 개의 다층적인 프레임으로 분할하여 다층 세계에서 온 스파이더 군상을 조합해 낸다.  거기에 종종 차원의 분열이 낳는 충격파 등의 다양한 특수 효과를 더하여 3D와 2D를 오가는 듯한 그래서 현실적이지 않은 차원 이동의 상황과 거기에 튀어나온 캐릭터들의 현실감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마블 코믹스의 만화를 보는 것인지, 에니메이션을 보는 것인지 홀려서 두 시간 여를 보내고 나면 어느덧 마일스는 어엿한 스파이더맨이 되어있다. 


 

그간은  백인 청년들이었지만, 이제는 흑인 청소년이라도, 여성이라도, 중년의 아저씨라도, 아직 어린이라도, 심지어 동물이라도 그 누구라도 기꺼이 '책임감'을 가진다면 정의의 수호자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다는 명제를 구현해 내는데 가장 절묘하면서도 화려한 방식이 바로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다. 

여전한 성장 동화 
하고 싶은 것만 하고팠던 소년 마일스는 거미에게 물려, 그리고 죽어가는 스파이더맨의 부탁으로 엉겹결에 영웅의 세계에 발을 들이민다. 하지만 영웅은 커녕, 자기 자신조차 가누지 못하는 이 소년, 그런 그가 마일스 삼촌의 정체, 그리고 역시나 뜻하지 않은 그의 죽음을 마주하고, 다른 차원에서 온 '스파이더'들의 도움을 받아, 마치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을 성장시킨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아이언맨처럼, 특히 다른 차원에서 온 또 한 명의 피터 스파이더 맨의 지도 편달 아래 '스파이더 맨'으로 성장해 나간다. 

에니메이션 <스파이더 맨 뉴 유니버스>는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왔던 스파이더맨의 세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영상적 실험을 채워가는 건 여전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영웅의 자기 정체성 수용 서사이다.  영화 속 피터는 삼촌의 죽음을 통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교훈을 얻어가며 스파이더맨이 되어 잠시 들떴던 자신을 정리하고 책임감있는 영웅으로 거듭났다. 그렇듯 또 다른 차원에서 온 피터의 도움을 받아 흑인 소년 마일스가 스파이더 맨의 정체성을 수용하고, 삼촌의 죽음을 통해 '정의'로운 영웅의 자리를 기꺼이 맡는다. 


 

그리고 이 방식은 그간 헐리우드 영화가 전통적으로 이어온 '청년 진보'와 '어른 보수'의 승계와 계승, 그리고 화해이라는 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 소년 마일스에게 아빠는 그저 고루했던 어른의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일 뿐이었다. 그런 아빠 대신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삼촌, 심지어 그와 취미가 통했던 애런 삼촌의 세계에 경도되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과중하면서도 숨막히는 학교 생활에 지친 마일스이기에. 

하지만 영화는 마일스가 경도되었던 애런 삼촌의 실체를 뜻밖의 존재로 맞닦뜨리게 하면서 그가 경도되었던 자유 분방한 세계의 무책임함을 '회의'하도록 만든다. 반면, 그저 고루하고 가부장적이기만 했던 아버지, 심지어 스파이더맨이 싫다던 그 아버지가 그럼에도 위기의 상황에서 '책임감'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함으로써, 스파이더 맨이 된다는 건 바로 그런 아버지의 세계로의 진입이란 메시지를 담아낸다. 물론, 그저 아들을 성공으로만 밀쳐넣었던 아버지가 마지막 아들의 그래피티를 경찰서 벽에 허용하는 '관용'의 너그러움을 보임으로써 두 세계의 '화해'도 놓치지 않는다. 

화해는 비단 이 세계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다른 평행 세계에서 온 피터 B파커는 자신의 과거, 즉 일만을 위해 달려오다 자신을 잃어버렸던 자신의 과거와 '화해'했고, 죽은 스파이더맨을 대신한 마일스의 본의아닌 교육과 이 세계 붕괴 과정에 대한 책임있는 역할을 통해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일이 가치있다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어른'의 성장을 그려내며 스파이더맨의 후일담까지 곁들인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의 정신과 교류하는 스파이던 로봇의 파괴로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의 세계와 이별을 할 수 있게 된 페니도,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도망쳤던 그웬도 저 세계에서건, 이 세계에서건 스파이더로서의 세상을 구하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가운데 상처받은 마음을 회복하고 성장한다. 각자 자신이 도망쳤던 자기 삶이 던져준 숙제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저마다의 성장을 이루어 낸다. 거기에 킹핀이 분열시킨 차원덕분에 외로운 영웅의 과중한 책임감 대신 동지애를 선사하며 스파이더 어벤져스의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만화책을 보는 듯했다가, 들썩이는 음향에, 현란한 시각적 효과를 곁들여 마치 한 편의 실험적인 뮤직 비디오를 보는 듯했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하지만, 이 화려한 볼거리의 중심에는 지금까지 모든 마블의 영화 속에서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던 고전적인 영웅담의 서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에니메이션이 되었든, 지구의 재벌 철 인간이든, 유전자 변형을 이룬 괴물이든, 몇 십년 동결된 살인 병기이든, 심지어 외계에서 온 신화속 인물이거나, 다차원을 오가는 신비로운 인물이건, 마치 그 모든 영화에 까메로 등장했던 대부 스탠리처럼 다른 소재, 그럼에도 동일한 영웅 신화의 변주, 그 통일성은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에서도 여전히 굳건하다. 

by meditator 2018. 12. 24. 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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