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맞이하여 '예언가'들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이전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문어, '파울'이 자연사한 이후, 연달아 4 경기의 승패를 맞춘 러시아 박물관에서 사는 청각 장애 고양이의 활약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그 외에서도 중국의 길고양이, 일본의 문어 등 세계 각국에서 '점쟁이'로 활약하는 동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이들 '생물'에 도전장을 내민 '무생물'이 있다. 바로 '인공지능'이다. 16강전이 진행되는 초반, 독일의 도르트 문트, 뮌헨 공대, 벨기에 겐트 대학 연구팀이 AI(인공 지능)을 활용해 10만번의 시뮬레이션을 한 결과가 정확하게 일치하자 동물들을 앞지른 AI의 활약이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가장 예외적인 스포츠답게 AI조차 독일의 탈락과 우리의 우승을 예측해내지는 못했었다. 여전히 '고양이만도 못한 AI일까'


그러나 미래학자 레이커즈 와일은 'AI가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larity)이 도래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소프트뱅크 손정의 사장은 대략 2045년 경으로 예측한다. 특이점이 오면 로봇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뛰어넘는다. 그러면 과거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멸종시켰듯이(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중)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일이 벌어질까? 생전의 스티븐 호킹 박사는 경고했다. '특이점이후 AI가 지구를 지배하려 할 것이므로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바로 이 '인공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특이점(Singuality), 인간이 AI를 통제할 수 없는 순간이 '드라마'로 들어왔다. 지난 7월 9,10일에 걸쳐 방영된 <너도 인간이니?> 17회에서 20회차이다. 

특이점에 도달한 AI 남신
남편을 잃고 아들마저 시아버지인 PK그룹 남건호(박영규 분)에게 빼앗긴 천재 과학자 오로라 박사는 아들의 모습을 꼭 닮은 AI 남신을 만들었다. 아들이 자라는 과정에 맞춰 업그레이드 된 남신, 드디어 성년이 된 아들의 모습을 닮은 아니 꼭 같은 남신Ⅲ를 완성했다. 그러던 중 엄마를 찾아 왔다 교통사고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 남신이 의식을 잃고, 엄마는 아들의 역할을 AI남신에게 맡긴다. 몇 번의 해프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엄마와 남신의 최측근이었던 지영훈(이준혁 분)의 지시를 따라 남신의 역할을 수행하던 AI 남신, 하지만 그의 앞에 경호원 강소봉(공승연 분)이 등장하면서 AI남신은 자꾸만 '통제'를 벗어난다. 

통제를 벗어나는 남신을 다시 지시의 규율 안에 가두기 위해 엄마가 선택한 건 '수동 모드', 엄마를 사랑했던(?) AI 남신은 기꺼이 엄마의 선택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기꺼이 선택했던 수동모드는 결혼식 당일 납치당한 강소봉 앞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연구실에 있는 인공 지능 차를 원격 조정하는 건 물론, 결혼식장을 박차고 뛰어나가 강소봉을 구해내기 위해 괴력으로 납치 차량을 멈추는가 하면, 블랙박스 영상을 확보하기 위해 오토바이 질주를 마다하지 않은다. 그런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오로라 박사에게 이젠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이 모든 일을 사주한 서종길(유오성 분) 이사를 만나 자신이 확보했을 증거를 빌미로 '협박'까지 한다. 

그저 집안의 전기 시스템이나 깔짝거리며 청소 로봇과 친구 삼고, 자신이 검색한 데이터에 기초로 곤란한 결혼 계약을 피하기 위해 강소봉에게 키쓰를 할 때만 해도 그저 좀 능력있는 AI인줄 알았던 그러나 여전히 엄마와 지영훈에게 순종적이던 AI 남신Ⅲ가 이제 그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특이점'의 지점에 이른 것이다. 



인간의 지배를 받던 AI가 그 '지배'의 시스템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심지어 인간이 예측할 수 있는 지점을 벗어나는 이 상황은 물론 극 초반부터 예고된 바 있다. 화염에 휩싸인 클럽에서 자신의 정체가 들킬 상황을 넘어 사람들을 구한다던가, 자율 주행 자동차 시험 주행에서 위험(?)을 무릎쓰고 차의 난동을 막아선다던가 등등, 하지만 이건 애초에 AI 남신에게 주입된 인명 구조의 원칙이라던가, 엄마의 위로를 위해 울면 안아준다던가 등등의 기본 시스템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엄마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아들 AI 남신인 강소봉을 만나며 마치 인간 남자가 여성을 만나며 변화하듯 감정이 없어 느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행동들을 하며, 이제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엄마마저 거스르며 독자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이 장면은 인류의 미래의 화두인 '로봇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그 특이점'의 '위기이다. 

그저 '로코'의 뻔한 캐릭터가 아닌 
하지만 <너도 인간이니?>는 이 인간의 위기를 '전형적인 로코'의 설정으로 넘긴다. 엄마는 '천재 과학자'라는 정체성이 무색하게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AI 남신을 불편해 한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AI의 월권이 자기 아들의 자리를 위협할까 하는 '두려움'이다. 더구나 아들의 치료 조차 위기에 빠진 상황, 그런 엄마의 인간적인 우려로 인해 자신이 만들어 낸 AI의 '킬스위치'를 만지작거린다. 

즉, 과학적 담론과 위기에 대한 고민이어야 할 이 상황을 드라마는 전형적인 '로코'의 '관계적 위기'로 치환한다. 로봇이 인간을 뛰어넘는가라는 화두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AI와, 그 AI를 사랑한 여주인공과 AI에게 친구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게 된 지영훈, 그 맞은 편에 질시하는 '인간 엄마'의 감정적 대응을 포진시키며 '관계'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차라리 과학자로서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AI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면 어땠을까? 세상이 로봇의 진화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작 AI를 만들어 낸 당사자 엄마와 아빠라는 데이빗의 반응은 단순하다. 

<로봇이 아니야> , <너도 인간이니?> 등 '로봇'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드라마들이 트렌드에 맞춰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은 AI가 현실이 된 세태를 반영하여 드라마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활용'의 방식에 있어 지극히 '로코적 설정'의 수준에서 머무르며 '소재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AI인 자신을 '활용'하는 대상을 넘어 '인정'해주는 강소봉에 대해 '시스템 에러'를 일으킨 AI 남신Ⅲ가 그 이후 보인 기능성 로봇의 경지를 넘어선 활약은 그저 '설레는 로코 남주'의 캐릭을 넘어서, 좀 더 진지하게 '고민'의 대상이 되어야 할 문제다. 



<너도 인간이니?>는 '도구적 존재'인 AI의 캐릭터를 극적으로 구현하며 AI를 극중 가장 감정이입되는 캐릭터로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 인간적 형체를 지닌 그를 모두 '이용'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로 자처했던 데이빗(최덕문 분)마저도 알고보니 남건호의 하수인이었듯이. 하지만, 최근 AI의 연구에서 가장 고민 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AI의 '도덕성' 문제이듯이,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기에 이른 AI 남신은 그저 불쌍한 로봇을 넘어, 통제를 벗어난 그가 보이는 실천적 능력들이 '딜레마'의 대상인 것이다. 그저 '뻔한 로코의 공식에 따라'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미를 '뿜뿜'하는 캐릭터로의 단선적 전개는 외려 <너도 인간이니?>라는 드라마의 설정을 스스로 한정시키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부디 가장 '감성적인 AI' 남신이라는 캐릭터를 그저 착한 남자의 캐릭터로 소모하지 않고, AI가 가진 딜레마를 극적으로 잘 활용하여 시청률과 상관없이 AI란 소재가 잘 소화된 드라마로 남아주길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8. 7. 11. 15:56

나의 어머니는 종종 당신의 어머님과 아버님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리고 형제들도. 그분들과 함께 한 시절은 어머니의 삶에서 아주 오래 전, 하지만 어제인 듯 그 분들과 함께 지낸 시간을 기억해 낸다. '치매'는 아니지만, 그 순간마다 어머니는 지금의 80이 넘은 할머니가 아니라, 그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그늘에서 살던 딸이 된 듯하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를 난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지금의 외로움에 대한 '반작용'인 듯해서 '도대체 언젯적인데'라며 짜증을 내기도 한다. 지금의 시절을 기꺼이 살아내지 못하는 노인네에 대한 아쉬움이 앞서는 거다. 아마 노인분들과 가까이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리라. 바로 그 '복잡함'에 대해 '이해'를 구하는 다큐가 있다. 바로 7월 8일 방영된 <sbs스페셜- 미스터리한 나의 어머니 황정례>이다. 




오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것은 정작 잊지 못하는 짐처럼 무겁게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 이종민, <망각은 저주인가? 축복인가?> 中


전북대학교 이종민 교수는 매일 촌에서 출퇴근을 한다. 그가 현재 사는 곳은 그의 늙으신 어머님이 사시는 곳이다. 여러 형제 중 막내, 하지만 어머니 황정례씨가 치매 판정을 받자, 그는 기꺼이 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다. 형수님도, 아내도 아니고, 주 이틀 형의 도움을 받으며. '치매' 걸린 어머님 그래도 자식이 낫지 않겠냐고. 그래서 자신이 살던 본가를 놔두고 어머니가 사시는 집 옆에 새로이 머물 곳을 지었다. 언제나처럼 끼니 때가 되면 밥을 하고 상이 차려진다. 단지 예전에 어머니가 하시던 것을 이젠 막내 아들인 이종민 교수가 할 뿐, 어머니의 공간, 어머니의 삶에 아들이 들어 앉았다. 

콩새가 된 어머니 
그의 어머니 황정례 씨는 올해 아흔 두 살이다. 하지만 누가 물어보면 그만 자신의 연세를 잊은 채 일흔 여덟이라 답하신다. 늘 도돌이표처럼 되돌아 가는 시간, 그 일흔 여덟에는 무엇이 있을까? '치매'에 걸린 어머니는 '현재'의 시간 대신 어머니가 머물고 싶은 시간 속으로 어머니의 기억을 끌고 간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는 '파란 대문'을 훔쳐간 도둑놈이 있고, 분홍 모시 치마를 입고 옛사랑을 만난 새댁이 있다. 다큐는 '치매'을 빌어, 어머니의 사라져가는 역사를 복기한다. 

어머니 황정례 씨는 말끝마다 자신이 이제는 그만 '콩새'가 됐다고 말씀하신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콩새는 '밥새'의 반댓말, 이제 더는 밥도 할 줄 몰라 아들이 밥을 해야 하는 처지를 어머니는 그러게 빗대어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런 '콩새' 어머니가 아들이 차를 타고 출근하자마자 바뻐지신다. 뒤주에서 쌀을 잔뜩 꺼내 언제 무기력하게 앉아계셨냐는 듯 썩썩 씻어 밥솥에 밥을 안치신다. 거기까지는 일사천리였던 밥하기, 그런데 노련한 밥새 황정례 씨의 발목을 첨단의 전기 밥솥이 잡는다. 이리 저리 눌러봐도 좀처럼 '취사' 코스로 가지 않는 밥솥, 설사 취사 코스로 간다 하더라도 예전 가마솥밥을 하던 기억을 가진 어머님은 전기 밥솥이 빠른 취사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 결국 한 솥 가득 설어버린 밥, 도저히 사람이 먹을 수 없어 기르는 개 차지. 하지만 개조차 맨날 쌓이는 설은 밥을 외면해 버린다. 

물론 어머니의 이 위험한 도발을 막기 위해 뒤주에 자물쇠를 채워도 보았다. 하지만 '열중'을 넘어 집착을 보인 어머니가 병이 나시겠다 싶어 결국 뒤주에 채운 자물쇠를 버렸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집을 떠나자마다 매번 밥과의 전쟁을 벌이신다. 평생 그렇게 밥을 하며 살아왔던 일상의 기억 속을 헤집어 내신다. 



어머니의, 아니 황정례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치매'는 노령화되어 가는 사회의 가장 큰 부담 중 하나다. '기억'을 잃어가는 걸 떠나서, 많은 후유증들이 노인 본인은 물론, 부양 가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매'의 케어에 따라 예후에 많은 차이가 있다는 걸 연구는 밝힌다. 삶의 근거지를 잃은 도시의 치매 노인들이 증상이 심각하게 악화되는 사례가 많은 반면, 시골에서 자신의 삶의 테두리을 벗어나지 않은 노인들의 경우 약간의 기억 상실 정도로 '치매'를 약하게 앓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큐의 황정례 씨는 자신의 나이도 매번 기억하지 못하고, 아들이 없는 사이 대책없이 설은 밥을 해대지만, 일상을 벗어나지 않은 황정례 씨의 치매는 그저 '일상의 해프닝'으로 침잠된다. 대신 아들은 그리 오랜 시간이 남지 않은 어머니의 '미스터리한 역사'를 기록하고자 한다. 

어머니는 매번 마루 끝에 앉아 대문 참을 노려본다. 그러시며 당신이 애지중지하시는 파란 대문을 도둑놈이 훔쳐갔다며 끌탕을 하신다. '파란 대문을 훔쳐간 도둑놈'을 추적했다. 장본인은 '파랗다'라고도 할 수 없는 낡은 철대문을 멀끔한 나무 대문으로 바꿔달은 사람,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살림을 합치면서 아들이 바꿔 달은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겐 그 '새 대문으로의 교환'이 그저 '도둑질'로 기억될 뿐이다. 아들은 헤아려 본다. 아마도 그 '교환'이 '도둑질'이 된 착각의 기억 속에는 어머니가 살아낸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 있으리라고.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을 차곡차곡 모아 파란 철대문을 다셨던 그 '살림을 일구던 찬란한 시절'의 기억을 아마도 어머니는 '도둑맞았다'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라고. 

그렇게 다큐는 어머니 황정례 씨의 치매의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다 보니 지금껏 아버지와 단란하게 일가를 꾸리며 살았다고 자식들이 기억한 어머니의 입에서 '공방'이란 단어다 툭 튀어 나온다. 열 여덟 친정 아버지의 대번의 결정으로 산골 마을로 시집을 오게 된 어머니. 새댁이 된 어머니는 남편을 거부하였다. 첫사랑을 물어도 그런 건 없다 하시던 어머님이 이미자의 '섬마을 선생님'을 읇조리며 술술 흘러나온 이야기, 어머니의 물동이를 기꺼이 날라주던 동갑내기 동네 총각과 당연히 결혼하리라 생각했던 어머니에게 얼굴 한번 보지도 못한 산골 마을 남정네와의 결혼은 청천벽력이었고, 그건 남편을 거부하는 몇 년의 세월로 이어졌다. 시집까지 찾아왔던 그 동갑내기 첫사랑을 다시 만나던 날 입었던 옷까지 기억하는 어머니의 묘한 기억력. 그렇게 어머니의 치매는 어머니를 '어머니'로 살아낸 시절 이전의 꽃다운 황정례의 역사를 소환한다. 

아들이 찾아가보니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축에 속했다던 집도, 주정뱅이 아버지도, 이제 어머니의 기억에선 그럴 듯한 장사치에, 번듯했던 집에 대한 기억으로 왜곡되었지만, 어머니에게 그 시절은 누군가의 아내, 엄마 이전의 꿈같던 시절이다. 초등학교도 못나와 아버지에 비해 배움이 짧았다고 자식들에게 기억되었던 분이 아니라, 어릴 적 서당에서 천자문은 물론, 고문진보까지 떼시고 시집을 와서 동네 여성들에게 글자를 가르쳐줄 정도로 열정이 넘치던 분이 계신다. 지금도 한자 책으로 하루 종일 소일을 하실 정도로, 아들을 대학 교수를 만들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배움의 열정을 가진 황정례라는 '인물'의 재발견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열 여덞이란 나이를 안타깝게 읊조리시듯, 그 꽃다운 시절에 가난한 집안의 입을 줄이고자 산골 마을로 시집이 보내졌다. 그리고 결국 '공방'의 시절을 넘어 일곱 자식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가 되었다. 그리고 매번 어머니가 자신의 나이를 일흔 여덟이라 말씀하시는 그 시절에 남편을 먼저 보냈다. 미웠다지만, 그래도 남편보다 오래 사는 자신이 면구스러워 매번 아흔 두살의 나이를 일흔 여덟로 착각하시는 어머니. 황정례 씨만이 아니라, 많은 '치매 노인'들의 얼토당토한 기억 속에는 이렇게 장구한 개인의 역사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치매 어머니의 기억 속을 더듬는 아들 이종민 교수의 <미스터리한 나의 어머니 황정례>를 통해 다큐는 '치매'를, 노년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8. 7. 9. 15:45

우리의 현대사는 곧 '부정(否定)'의 역사이다. 아비들이 저질러 놓은 '역사적 과오'들을 부정하며 딛고, 극복하는 것이 언제나 '자식'들의 가장 큰 과제였었다.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 6.25, 5.16, 80년 광주 사태 등등은 곧, '부정'의 과제가 되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자식'들에게 아비들은 언제나 '오욕'의 대상이었고,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암초'였으며, 자신들에게 '무거운 짐'만을 남겨준 '부채'들이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에게 '아비'들은 언제나 소통불가해한'꼰대'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88만원 세대에, 오포, 구포 세대인 젊은이들은 꿈조차 꾸기 힘든 세상에서, 어줍잖게 '포기하지 말라'고 훈계를 하는 아비들에게 냉소를 보낸다. 그렇게 여전히 '화해'하기 힘든 부모와 자식 세대의 시대, 거기에 이젠 '노장'이 되어가는 이준익 감독이 조심스럽게 '이해'와 '화해'를 청한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 꿈조차 버거운 젊은이 
쇼미더머니 6년 개근의 무명 래퍼 a.k.a  심뻑(박정민 분), 하지만 그의 일상을 채우는 건 편의점에, 발렛 파킹 알바다. 그 틈틈이 좁은 공간에서 랩 만들기에 여념없지만, 래퍼로서 세상의 문은 그에게 쉽게 열리지 않는다. 6년째 또 왔냐며 익숙하게 그래서 멋쩍게 그를 만드는 공개 오디션 현장에서 그는 여전히 날선 랩을 날리며 예선을 통과하는데, 정작 3차 예선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 건 고향, 그리고 아버지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두 작품이 있다. 하나는 1920~3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토마스 울프의 1940년 작품과 또 하나는 1986년 출간된 이문열 작가의 작품이다. 두 작품은 모두, 극중 인물을 빌어 작가들이 떠나온 고향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고향은 두 작가 개인의 고향이라기 보다는 '장엄한 낙조조차 이제는 영원한 어둠 속으로 침몰하'는 과거를 뜻한다. 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떠나 이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젊은이에게 '추억'이 된 고향은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고향을 떠나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서울 출신이라 살아온 래퍼 심뻑, 아니 학수를 '아버지'의 와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불러들인 그곳에는 래퍼 심뻑이 아닌 학수가 잊고싶은, 그래서 애써 지우려했던 '역사'가 있다. 



누구든지 고향에 돌아갔을 때, 그걸 대하면 "아,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구나" 싶은 사물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십 리 밖에서도 보이는 고향의 가장 높은 봉우리일 수도 있고, 협곡의 거친 암벽 또는 동구 밖 노송일 수도 있다. 그리워하던 이들의 무심한 얼굴, 지서 뒤 미류나무 위의 까치집이나 솔잎 때는 연기의 매캐한 내음일 수도.

- 이문열의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中



'폐항, 오로지 기억될 것이라고는 '노을'밖에 없는' 그곳은 고통의 기억이다. 지역을 주름잡던 양아치였던 아버지는 어깨들 사이에서는 '형님' 대접을 받았을지는 몰라도, 학수에겐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간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되는 '부재'와 '부채'의 대상이었다. 어머니의 '미워하지 말라'던 유언조차 지킬 수 없게 만드는, '인간 말종'이 아버지였으며,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부정만이 그가 그 고통의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공교롭게도 <변산>의 이준익 감독과 얼마전 개봉한 <버닝>의 이창동 감독은 2018년의 청춘을 '고향'으로 불러들인다. 두 감독이 그려낸 청춘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시는 고향에 가지 않겠다던 이들이었다. 그곳은 '어머니'를 상실한 곳이고, '아버지'을 '부정'하게 만든 곳이다. 하지만 부정하고 상실한 청춘은 고향을 떠나와 잘 살지 못한다. 그들은 이제 현실에 짖눌려 '꿈'조차 모호하다. 두 거장이자, 노장이 된 감독들의 눈에 비친 이 시대의 청춘은 현실에 짖눌려 꿈조차 버거운 이들이다. 그런 동시대의 청춘에 대해 두 감독이 던진 해법은 그들을 '고향'으로 불러들이는 것이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늙은 양아치가 던진 화두
상실된 '어머니'와 달리, 그곳엔 아직 '아버지'가 있다. 한번도 제대로 아버지다운 적이 없었던 사람, 심지어 '부재'했을 때 가장 행복감을 주었던 사람, 그런 그 사람이 많이 아프단다. 학수는 어머니의 장례식에 조차 콧배기도 비추지 않았던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프다던 아버지는 병실에서도 그 '가오'를 놓지 않은 채 꾸역꾸역 쌈밥을 먹고 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무대의 순간조차 망쳐버린 인간, 아니 길지 않은 내 인생 내내 내 발목을 잡은 물귀신, 군대에 간다고 고향을 떠나온 내내 학수는 그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왔다. 

그런데 아버지때문에 버린 그 고향에 다시 소환되어 돌아가니, 마치 어제인듯 그 시절이 '재연'된다. 관계도, 상처도, 추억도. 그곳엔 어린 시절 동네를 주름잡던 '짱'이었던 학수가 있고, 고등학교 시절 풋 사랑이 있고, 그리고 빛나던 문재와 그 '상실'의 아픔이 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것들은 마치 '그대로 멈춰라'했던 것처럼 다시 그의 삶으로 들어와 그를 흔들어 놓고, 학수는 '아버지'때문에, 그리고 '고향'의 관계들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스펙쌓기'에 시달리며 88만원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대, 결혼도, 사랑도, 집도, 꿈도 포기해야 하는 세대, 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젊은 세대는 안다. 그들이 '고도 성장'을 꿈꾸며, 무한 경쟁으로 세상을 몰아넣은 '아버지' 세대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능력'과 '실력'을 제일로 치는 사회를 만들어 놓은 아버지 세대로 인해, 그 휴유증을 옴팍 뒤집어 쓴 자신들은 '저성장'의 시대를 미래에 대한 기약도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아버지 세대는 영화 속 동네 좀 주무르던 '늙은 양아치'와 같다. 한때 좀 날리면 뭐하나, 제 멋에 겨워 살아놓고, 자식을 위해서는 해놓은 거 하나 없이, 여전히 큰 소리만 떵떵치며, 고스란히 부끄러움만을 남겨준 것을. 심지어 이제 병실에 누워있는 신세. 

그런데 감독은 되묻는다. 그런 아버지를, 고향을 너는 잊지 못하지 않았냐고. 어찌됐든 '부정'조차 결국 네 삶의 일부분 아니겠냐고. 그러니 그저 지워지지 않는 걸 애써 지우려 하지도 말고, 덮여지지 않는 걸 우격다짐으로 가리지도 말고, 꼭꼭 씹어 먹으라고. 차라리 아버지의 빰을 한 대 갈길 지언정,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척 하지 말라고. 풋사랑이었던 선미(김고은 분)의 첫사랑이 학수를 강제 소환하는 것으로 완성되듯이. 아버지같다는 말 한마디에 만사를 제쳐놓고 돌아올 고향이라면, 그 고향을, 아버지를 꼭꼭 씹어 삼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그래서 홍대를 주름잡고(?), 쇼미더머니를 향해 도전장을 날리던 최신 콘텐츠의 래퍼를 후진 기억의 고향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단절'의 트라우마 대신, 흐드러진 한 판 추억의 굿을 펼쳐보인다. 



결국 느티나무 울창한 옛마을은, 장미꽃처럼 화사했던 시절은,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고, 고향은 언제나 새롭게, 새로이 만들어 지는 것이니까. 
                                        - 토마스 울프,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중


토마스 울프에게도, 이문열에게도 고향은 결국은 떠나온 젊은이가 다시 돌아갈 수 없던 상실과 단절의 시간이었다. 젊은이는 그렇게 아버지의 공간을, 시간을 떠나와, 그 상실을 껴안은 채 자신의 삶을 다시 써나간다. 그게 인생이라, 장엄한 낙조조차 기릴 수 없는 것이 역사라 두 작가들은 말한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그 손을 놓지 못한다. 노을을 가난해서 가진 게 없는 곳의 유일한 사실의 흔적이 아니라, '마니아'가 될만한 '충만'의 대상이다. 지는 순간조차,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아직 이곳에 아버지가 있으니, 그래서 그 아버지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여전히 '아버지'로 남고 싶다. 나처럼 살지 말라고,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말하면서까지, 아들에게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노을이 펼쳐지는 한 아직 하루가 끝난 건 아니라고.  기꺼이 뺨을 대줄테니, 외면하지 말고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아픔조차 잘 소화시키고 가라는 아버지 세대의 '노파심'이다. 

외롭고 고달픈 랩으로 시작하여, 떠들썩한 뮤지컬의 난장으로 마무리지은 <변산>은 2018년의 젊음을 '고향'으로 소환한다. 변산이라는 시골 동네에서 펼쳐지는 에피소드들은 젊은이들이지만, 그들의 짦은 생 속에 또 하나의 역사를 논한다.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지 않다며 버둥댔지만 그들은 그들도 어느 틈에 자신만의 역사를 지닌 어른이 되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그러니 더는 아이처럼 응석부리지 말고, 도망치지도 말고, 아버지와 다른 어른으로 잘 살길 바란다고 당부한다. 

by meditator 2018. 7. 6. 16:53

오늘 당신의 하루는 어땠나요? 이 노래 가사 같은 한 마디가 플라스틱과 함께 하는 당신의 일상을 묻는 것이라면?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샴푸로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며 하루를 여는 당신, 물은 건강을 위해 생수를 마시고, 점심 식사 후엔 졸음을 쫓는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다시 오후를 버티며, 퇴근 후엔 마트에 들러 삼겹살 포장육에, 비닐 봉지에 든 마늘과 상추를 사서 푸짐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시원한 캔 맥주 한 잔과 함께 그 날의 피로를 풀어내며 하루를 마감하는,일찌기 조선 시대 어느 부인네가 반짇고리 속의 물품들을 자신의 벗이라 칭했듯, 2018년 우리의 가장 친근한 '벗'은 어느 틈에 '플라스틱'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벗'인 줄 알았던 플라스틱이 알고보니 '소리없는 암살자'였다면? 




폐기되는데 400년? 
7월 1일 방영된 < sbs스페셜- 식탁 위로 돌아온 미세 플라스틱> 과도한 사용으로 이제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있는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는 미세 플라스틱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더운 여름 대표적인 아이스 커피 한 잔, 이 커피를 마시는데 얼마나 걸릴까? 평균 1인당 이런 1회용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는 시간은 20여분, 그런데 이들 플라스틱 제품이 만들어지는데 걸리는 건 대부분 1분, 그런데 비해 1회용 컵이 지구에서 사라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20~50년, 플라스틱 빨대는 200년, 비닐 포장재는 200~400년, 페트병은 450년 정도가 걸린다. 

1회용 플라스틱 용품 소비에 익숙해진 우리들, 한 해 소비되는 빨대는 5억개, 1년 동안 1회용 컵을 한 개인이 사용하는 수량은 평균 257개다, 한국인의 1인당 연간 포장용 플라스틱 소비는 세계 2위, 플라스틱 원료 소비량은 132톤으로 세계 1위다. 지난 66년동안 63억톤의 플라스틱을 세계는 써왔다. 그렇다면 이렇게 쉽게 만들어내고, 마구 써대며, 반면 폐기에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면? 결국 지구 전체가 '플라스틱 폐기물'로 범람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건, 지구의 마지막 정수장이라는 '바다 속 플라스틱 오염'이다. 

영덕에서 온몸이 붉은 색으로 변한 채 죽은 바다 거북이 발견되었다. 수령 30년 정도로 추정되는 바다 거북의 내장에서 발견된 건 플라스틱 비닐 봉지, 비닐 전단지, 비닐 끈 등 쓰레기 들. 바다 생물들에게 플라스틱 쓰레기들은 죽음의 덫이다. 바다 거북만이 아니다. 놀래미, 아귀 등 익숙하게 우리 밥상에 오르는 생선들의 몸속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고 있다. 해조류는 어떨까? 담치를 실험용 비이커에 넣고 미세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물을 담았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물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끗해져 있다. 그 모든 오염물을 담치가 흠입한 것이다. 



미세 플라스틱이란 5mm이하의 플라스틱을 말한다. 처음부터 미세 플라스틱으로 제조된 것들도 있고, 플라스틱 제품이 쓰레기로 버려지는 과정에서 부서지면서 생성되기도 한다. 이제는 너무도 쉽게 눈에 띄는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생활 쓰레기들, 그리고 양식 등에 사용되는 스티로폼이 해양 생물 및 바다의 주오염원이 되고 있다. 한국 해양 과학 기술원 연구에 따르면 세계 각국에 비해 우리 나라는 10배나 많이 해양이 오염되어 있으며 모래 사장이나 갯펄 역시 일본이나 러시아에 비해 월등히 높은 오염도를 보이고 있다. (일본 976n/ , 러시아 293n/ , 우리나라 평균 3.936n/ )

플라스틱 사회
문제는 이런 해양 오염이 결국 우리의 식탁 위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종 먹거리는 물론, 우리가 안심하고 사먹는 생수까지 미세 플라스틱에 오염되고 있다. 물 그 자체, 대기, 용기등으로 인해 전세계 생수의 93%가 오염되었다는 보고가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10개의 생수 중 4 종에서 폴리스틸렌, 폴리카보네이트가 발견되었다. 수돗물은 다를까, 국내 정수장 10곳 중 3곳에서 역시나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 

먹고 마시는 것만이 아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플라스틱'을 벗어날 수 없는 플라스틱 사회에서 살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 아이들이 공부하는 교실에서 만지고 닿는 거의 모든 것은 플라스틱이다. 환경 호르몬의 일종인 프탈레이트가 아이들이 사용하는 리듬악깅, 사인펜, 리코더, 미니 가방에서 기준치를 한참 초과하여 검출되고 있다. (리듬악기 174.4배 초과, 사인펜 174배 초과, 리코터 232.6배 초과, 미니 가방 96.7배 초과)



해양 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바다를 오염시킨 미세 플라스틱은 '역주행'을 거듭하여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 자리에 있는 인간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미세 플라스틱은 그저 플라스틱보다 한층 더 위험하다. 태양이나 자외선, 파도 등으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표면적이 증가한다. 그리고 이 증가된 표면적은 바다 속에 부유하는 독성 물질의 흡착을 한결 더 쉽게 하는 것이다. 대부분 위장 기관을 통해 밖으로 배출되지만 더 나노로 쪼개진 플라스틱은 세포벽을 통과하여 몸에 머물게 되는데, 물고기의 간세포에 흡착된 미세플라스틱은 종양을 유발한다고 연구는 밝히고 있다. 

사인펜, 악기 등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제품에서 검출되는 프탈레이트는 발달 자체를 저하시키며, 자폐, 지적 장애 등의 심각한 장애의 원인으로 추측된다. 전문가는 최근 늘어가는 아동 신경계 질환이 방어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미친 미세 플라스틱에서 그 원인을 추측한다. 



일본에서 지난 1968년 단 몇 달 동안 식용유를 만드는 과정에서 폴리염화비페닐(PCB)이 흘러들어간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가네미 지방 1만 4000여 명이 피부 질환 등의 이상을 호소했다. 여기서 문제는 당사자들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후 이 지역에서는 피부가 검은 아이가 태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아이들은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내내 피부, 신장 , 위 등의 질환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이들의 자녀까지 이들처럼 검은 피부의 아이로 휴유증을 고스란히 안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3대에 걸친 비극이야말로 우리가 무심히 쓰고 버리는 미세 플라스틱이 낳은 재앙을 경고하는 시금석이다.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60년전에 금지를 해도 지금까지 그 휴유증이 대를 이어 나타나고 있는데, 지금 금지한다고 해도 반감기가 긴 이 '플라스틱의 난'에 대해 우리는 너무 무방비한 것이 아니냐고. 환경 운동가들이 예측하는 2050년의 바다는 물 반 쓰레기 반이다. 플라스틱 지구, 플라스틱 사회의 재앙이 분명해진 세상, 그러나 오늘도 점심 시간 거리의 횡단보도는 저마다 1회용 컵을 든 사람들로 가득 찬다. 
by meditator 2018. 7. 2. 16:16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대한민국은 2018년의 시점에서 보면 마치 '화성'처럼 낯설다. 우리가 살아낸 시절임에도 저랬나 싶게 낯설기도 하고, 촌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늘 '현재 진행형'이라 여겨진 시간을 되돌아 보게 한다. 


지금은 어떻게 저렇게 입을 수가 있지 라고 여겨지는 아저씨들의 펑퍼짐한 패션, 나름 멋지다고 한 그 촌스럽기 그지 없는 뽀글머리 파마, 그리고 서슴없이 한 공간에서 일하는 동료 여직원에게 '양'이라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성적 농담을 실실 웃으며 흘리는 '젠더적 무지', 그리고 '범죄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치면 다짜고짜 손부터 올라가는 '일상적이었던 폭력'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었던 현상들이 그 시절에는 '일상'이며 '보편'이었던 시대였던 것이다. <라이프 온 마스>는 2018년의 관점에서 보면 '화성'처럼 낯선 80년대의 공기를 잘 담아내고 있다. 



7화는 그런 '화성같은 80년대'에서도 영화 <홀리데이> 등으로 재연되며 또렷하게 각인된 '지강헌 인질극'을 다시 한번 불러온다. 한 주택가에서 벌어진 탈주범들의 인질극, 그 과정에 강동철(ㅂㅏㄱ성웅 분) 계장 휘하 강력반 형사들이 '수사'에 참여하게 되는데, 탈주 과정 중 다친 죄수의 치료를 위해 '의사'를 요구하고 그 과정에서 '간호사'인 척 윤순경(고아성 분)이 그 집에 들어간데 이어, 공명심에 눈이 먼 김과장이 경찰 기동대와 함께 무분별한 진압 작전을 개시하자,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강동철과 한태주(정경호 분)가 잠입한다. 하지만 잠입이 무색하게 탈주범들의 인질이 되고, 이렇게 주인공들을 사건의 한 가운데 던져 넣음으로써 '지강헌 탈주극'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라면 한 박스를 훔쳤는데 감옥에서 10년?
당시 죄수가 호송 중에 탈주를 하여 주택가에서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였다는 사실은 지금도 그렇겠지만 사회적으로 '충격'이 컸다. 80년대 이후 무력에 의거하여 집권한 정권답게, 사회의 불안을 안정시키고, 시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지킨다는 '슬로건'을 앞세웠다. 그런 가운데 '죄수'들의 '탈주'라는 건, 그리고 그들이 일반 시민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건, 그토록 전 정권이 내세웠던 '국민들의 안녕'에 이 정권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강헌이 연상되는 극중 이강헌(주석태 분) 등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저 라면 한 박스를, 돈 500만원을 훔쳤다는 이유로, 법으로 정한 형량 외에 '보호 감호소'에서 십 여년을 썩어야 하는데 반해, 70억이 넘는 권력형 비리를 저지른 대통령의 친동생이 풀려나는 상황에 대해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등장한 '보호 감호제', 이 제도야 말로 80년대 군사 정권이 저지른 야만적 폭력의 제도화를 상징하는 제도이다. 



1980년 제정된 사회 보호법, 이는 죄를 범한 자에 한하여 재범의 위험이 있고, 특수한 교육 개선 및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자에 대하여 보호 처분을 시행할 수 있다는 조치이다. 사회를 보호하고, 범죄자의 개선과 사회 복귀를 위한다는 이 제도는 1981년 삼청 교육대에서 순화 교육을 마친 2400여 명이 청송 교도소 등에 수용되며 현실화되었다. 이 초법적 범죄자 수용 조치는 이 후 세 차례의 헌재 등의 '합헌'결정이 이루어졌음에도 천주교 인권 위원회 등에서 '인권 침해'와 관련하여 끊임없이 이의가 제기되었고, 2003년에는 청송 보호 감호소 재소자 600여 명이 이와 관련하여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범들을 이 제도를 악용하여 영구적으로 사회에 격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악법'으로의 활용도가 높은 제도였다. 그리고 <라온마>의 지강헌은 자신들의 탈주 이유 중 하나를 이 '인권 침해'의 보호감호법을 들고 나온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렇게 법이 있어도 초법적 조치에 의해 감옥에서 십 여년을 썪어야 하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의 맞은 편에, 드라마에서 등장한 '70억의 전경환'이 있다. 대통령의 동생으로 그 후광으로 새마을 본부 중앙본부장 자리에 올랐던 전경환은 1988년 공금 76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그 시대 무려 대통령의 동생인데도 '구속'을 시켜야 했을 정도면 그가 저지른 '권력형 비리'가 어느 정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 하지만 그는 다음 해 겨우 징역 7년에 벌금 22억원을 받았을 뿐이다. 라면 한 박스에 십 년, 돈 500에 15년에 비해, 76억원을 해먹으면 7년의 '유전무죄, 무전 유죄'



드라마 속에서 환기된 '유전무죄, 무전 유죄'라는 말이 당시 사회를 뒤흔들고, 오래도록 사람들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은 건, 바로 그 80년대가 2018년 이제는 '계급'으로 고착화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넘어설 수 없는 벽이 고착화되고 실감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시대라는 점이다. 강남의 고급진 아파트, 고액의 과외을 통한 고학력, 호화 자동차와 명품들, 그리고 '재벌'이라는 경제적 권력과 '권력형 비리'는 이전의 유신 권력과 다른 결을 가진, 자본주의화한 권력의 현실을 일반 시민들에게 절감케 해주는 시간들이었다. 화성과 같은 80년대의 공기를 소환한 <라온마>에서 터져나온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마치 2018년에 도도하게 흐르는 고도로 계급화된 자본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을 열어준 물길의 '수원'과도 같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시간, 최근 거리의 패션가에서 그 시절 여성들이 입었던 알록달록한 무늬의 스커트가 등장했다. 화장도 다시 그 시절처럼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입술은 빨갛게 대비의 색감을 소환한다. 물론 패션의 소환과 다르게, 이제는 그 시절 윤순경을 대하는 '남성'들의 태도를 보고 입을 모아 '미투'라 할 정도로 '젠더적 감수성'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반면 그 시절 죽어가던 지강헌의 편지를 통해 세상에 회자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이 시대의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돈이 없어 포기하는게 익숙해진 시절, 지난 2014년 법무부는 2005년 결국 사라진 보호감호제의 변종인 보호수용제를 도입하고자 발표했다. 과연 '화성'처럼 낯선 80년대에서 우리는 얼마나 멀어졌을까. 


by meditator 2018. 7. 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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