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 모 드링크제 선전 속 엄마의 한숨 섞인 하소연이다. 이보다 '부모'의 자리에 대해 잘 정리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는' 이 역할을 우리는 인간의 '본능'이자, '도리'라 '교육'받아 왔다. 정말 본능이고 당연한 도리일까? 그10달을 품고도 자기 앞에 나타난 , 아니 자신의 책임으로 던져진 생명체로 인해 '산후 우울증'을 앓는 엄마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본능'과 '도리'가 역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아니 외려, 그간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냈던' 그 설움들이 에너지가 되어 '폭발'한다면? <맘&대드>는 바로 이 '인간의 본능과 도리'라 했던 부모의 내리 사랑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다. 



부모의 역습
시작은 떠들썩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의 아침이다. 십대인 딸은 남친과 통화를 하며 어떻게든 부모의 잔소리와 간섭을 피해서 남친과의 데이트를 즐기려고 모색한다. 그를 위해 엄마의 지갑에서 돈까지 몰래 슬쩍하고. 그런가 하면 아직 철부지 아들 녀석은 아침부터 아버지와 '장난'삼매경.  전형적인 미국의 주택가, 중년의 가장 라이언(니콜라스 케이지 분)네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들의 장난감 트럭에 넘어지고 지나친 아들의 장난에 아버지는 화를 내는 건지, 농을 하는 건지 모를 경계에서 오가고,  딸을 데려다주는 엄마의 진심어린 설득은 결국 엄마 자신의 삶이 없어서라는 처참한 답변만을 얻는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철부지 아들과 10대인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모습이려니. 라이언과 그의 아내만이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은 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능 자격 시험을 치르는 고사장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저 시험치르는 자식을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다. 하교길의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 역시 마중이라기엔 울타리에 매달려 아이들을 애타게(?) 부르는 그 절절함이 도를 넘는다. 결국 부모의 그 애타는 절규에 담을 넘은 아이, 그런데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자동차 키를 거꾸로 세워 가격한다.  그리고 시작된 피의 질주. 부모들이 아이들을 향해 한껏 달겨든다.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건 그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자동차 키도, 삽도, 야구 방망이도, 당연히 부엌칼도, 잘린 맥주병도. 고기다지는 망치가 그리도 잔혹한 살육 도구였던가. 

지지직거리는 tv, 마치 전파 방해처럼 혼선이 되는 채널들의 시그널, 하지만 그 이상 영화는 부모들의 '변심'을 설명치 않는다. 그저 인간에게 '탑재'되어 있는 2세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반대'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그 '맹목성'이 '폭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tv프로그램 속 전문가의 말이 피튀기는 부모들의 살육전 사이에 스쳐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라이언네의 평범하지만 짜증나는 일상으로 부터 시작된 '부모의 자식의 애증어린 관계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살육전에 대한 충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 '맹목적'인 사랑이 전복되었을 때 보여지는 '살육전'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맹목적'인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있는지 설명한다. 




가족을 묻다 
현대 사회의 단위는 '개인'이다. 신분과 계급으로 부터 방출되어 나온 '근대' 이후의 개인은 '의지적 존재'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간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그 '개인'은 어디서 만들어 지는 걸까? 바로 그 '개인'의 인큐베이터가 '가족'이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고 않고 때에 맞추어 아이를 낳고 수모를 참아가며 양육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근대' 이후 개인을 품어낸 산실이다. 자유 의지의 개인과, '맹목적'인 도리를 가진 양육체로서의 부모, 이 조합의 아이러니를 <맘&대드>는 묻는다. 

그의 말썽꾸러기 아들처럼 아버지가 어렵사리 장만한 차를 몰고 나가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철부지였던 라이언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었다. 집안 곳곳에는 지뢰처럼 아들의 장난감이 널부러져 있고, 모처럼 그가 자신의 공간으로 장만한 지하실조차 아내의 냉소에 맞닦뜨린다. 아내라고 다를까. 사춘기 딸과의 진정성어린 대화조차 엄마의 집착 혹은 자존감없는 엄마의 하소연으로 치부되어버리는 아내, 예전 상사의 말에 기대어 직장을 구하고자 하지만 돌아온 건 조롱 아닌 조롱. 중년의 부부는 어느덧 '나'를 잃은 채 '부모'로서의 기능으로 살아가며 지쳐간다. 영화는 바로 이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굴레'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가족'을 '화두'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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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살육전은 라이언네 집이라고 예외가 없다. 집안의 행사로 기대되던 여동생의 출산은 피로 물들었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 역시 그 살육의 전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실로 피신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우리가 범죄영화에서 흔히 보던 '드릴'과 '망치', 전기톱, 그리고 가스까지 동원된 엄마, 아빠의 혼신을 다한 작전. 그런데 여기서 반전, 이날은 두 사람의 부모님이 방문하기로 했던 날이었던 것이다. 

무심코 문을 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노익장의 부모님들. 이 세대를 이은  육탄전을 통해, 부모 자식의 '연원'이 그리 간단치 않았음을 반증한다. 누군가의 부모가, 한때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부모의 '허랑방탕'한 자식이었음을 드러내는 '시간'의 역습이다. 

과연 이 살육의 딜레마에 빠진 공방전에 해법이 있을까? 삼대가 뒤엉켜 피바다를 만들던 라이언네의 살육전은 그럼에도 아이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아이들에 의해 체포된 라이언과 아내, 두 사람은 애절하게 엄마, 아빠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건 살육전이 벌어지기 전이나, 처음 아이들을 죽이려 문을 두드릴 때나 똑같은 톤이다. 그런 부모들의 고백을 아이들은 마치 '빨간 모자'를 찾아온 늑대처럼 여긴다. 영화는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부모들의 역습처럼, 엔딩도 다르지 않다. 알고보니 긴 악몽이었다던가, 그 지지직거리던 tv의 소음과 함께 자신들의 범죄를 자각한 부모라던가(자각하면 어쩔텐가 허긴 ), 그 어떤 해결도 없이 이 '어처구니 없던 농담'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던져진 질문, 살의를 부르는 양육, 과연 우리가 이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가족'은 정말 가치있는 걸까? 개인의 자유를 포기할 만큼 부모됨은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쩌면 '결혼'이 선택인 시대에 한번쯤은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8. 7. 21. 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