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드라마 마의 시청률 시청률 40%를 넘은 kbs2의 <황금빛 내 인생>은 올 상반기 지상파 vod 1위를 차지하며  여전히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따뜻한 주말 가족극을 표방했지만 이 드라마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은 건 극중 재벌 3세인 최도경(박시후 분)과 흙수저 서지안(신혜선 분)의 '러브 스토리'였다. 소현경 작가는 주체적인 서지안의 삶을 통해 '역신데렐라' 스토리를 추구했다. 재벌 3세인 최도경은 서지안을 만나, '개과천선'하여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당연히 계승받을 그룹의 회장 자리를 걷어찬 채 서지안에게 영향을 받은 '나무 사업'을 맨 몸으로 개척함은 물론, 자신은 물론 아버지, 어머니 등 혈연 중심의 그룹 경영을 일소하여 '재벌 개혁'을 해낸다. 그래서 어쩌면 <황금빛 내 인생>이야말로 진짜 '신데렐라 환타지'일지도 모르겠다. '재벌 3세'가 의식의 변화를 일으켜 재벌가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그 내용만으로도. 그렇다면 현실은 어떨까?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통해 물불가리지 않는 발로 뛰는 취재로 두각을 나타낸 강유미가 이번엔 재벌3세를 탐구하기 위해 나섰다. 




강유미의 탐구기, 그 시작은 세상을 다시 한번 떠들썩하게 만든 한진 가 재벌 3세  조현민 대한항공 전 전무이다. 물컵을 던지고 고성의 폭언을 한 조 전무는 경찰 포토 라인에 서서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과연 그녀는 정말 죄송할까? 다큐의 질문은 바로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돌출되는 재벌 3세를 비롯한 재벌가의 갑질, 그 이유는 무엇일까?

넌 어느 별에서 왔니? - 재벌들의 심리는?
고급 승용차 뒷자석에 시승하고, 조현민처럼 물컵을 던지며 악을 써보던 강유미는 다른 세상을 경험한 듯하다 소회를 밝힌다. 일찌기 개그맨이 되기 위해 손목에 무리가 올 정도로 커피 전문점 알바에서 부터 갖은 알바를 전전했던 그녀에게 8살 나이에 외제차를 타는 퍼스트 클래스라는 걸 자부했던 조현민의 삶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전문가를 찾아나선다. 

심리 연구소 소장 황상민 씨는 이런 재벌 3세들의 '폭언'의 근저에는 오로지 '돈', 가진 것을 통해 구축된 그들의 삶에서 비롯된 '불신'이 자리잡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자기 자신 외에는 가족도, 친지도 믿을 수 없는 삶을 살아온 그들에게는 '타인'에 대한 피해 의식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러기에 자신에게 어떤 '위해(?)를 가한 타인에 대해 '복수'하고 싶은 '욕망'에 불타오른다는 것이다. 

이런 재벌가의 '특별한 피해 의식'에 더하여, '가진 자'들이 가진 '특권 의식'의 무도덕성을 '심리적'으로 분석한다. UCLA의 폴 피프 교수는 100쌍의 사람들에게 동전 던지기 시합을 하도록 한다. 단, 이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부유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로. 그런데 동전 던지기 라는 '하찮은 시합' 과정에서도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례'하며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에 '무지'하며, 심지어 그 '알량한 과정'에서도 물질적 성공을 과시하려 든다는 결과을 도출해 낸다. 




이런 폴 피프 교수의 실험 결과를 제작진은 우리나라에 적용해 보고자 한다. 비싼 차가 불법을 자행하는 경향이 많다는 보고서에 근거하여 강남 교차로에서 불법 유턴하는 차량의 가격을 분석한 것이다. 불법 유턴은 벌칙금 6만원에 벌점이 30점 적립되는 '불법적 행위'이다. 그런데 3시간 동안 교차로에서 불법 유턴을 한 차량은 4800만원 이하 차량보다, 5800만원 이상 대의 차량이 훨씬 많았다. 심지어 천만원 대 이하 가격의 차량은 대부분 법 질서를 충실히 지켰다. 반면, 5천만원에서 7천만원 대 차량의 70% 이상이 '불법'을 자행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규범'을 신경 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경향성, 이런 경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책임을 맡는다면 어떻게 될까? 바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재벌'의 문제가 그 결과가 아닐까. 이른바 '갑질'로 나타나는 재벌들의 행태는 이중적이다, 경찰 포토라인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던 조현민, 조현아 자매는 정작 카메라 가 사라진 법정에서 안하무인의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공적으로는 가장 '품위'있는 듯하지만, '사적'이 되는 순간 '돌변'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이상 심리를 알 수 있는 가장 적나라한 사례 중 하나가 역시나 빈번하게 문제시 되고 있는 운전기사 폭행 사건'이다. 이른바 '리모컨질'이라 통칭되는 이 행태는 이름대신  '야!', '개새끼야'로 불려지며 '달려'라는 지시 하나로 갓길 운행은 물론 빨간 불이라도 달려야 하고, 그 명령을 어겼을 때 돌아오는 구타를 의미한다. 영화 <베테랑>의 모티브가 된 'M&m 최철원 회장의 한 대에 백만원이라는 야구 방망이 폭력이 그 세계에서는 '범사'이다. 




재벌에 '관대한 사회'
<황금빛 내 인생>의 최도경이 서지안과 엮었다는 사실 만으로도 어머니에게 꾸중을 들을 걱정을 하듯이 이들 '가진 자'들은 철저히 그들만의 리그에서 자라난다. 외국인 학교를 나와 아버지가 후원하는 미국 남가주 대학을 다닌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이들과만 관계를 맺고 자란다.   인간의 공동체 의식은 나와 상호작용을 하는 이들을 통해 자라난다.  어려운 반 아이들을 보며 타인에 대한 '이해심'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차단당하는 이들에게 '없는 사람'들은 이해불가의, 아니 애초에 이해할 가치조차 없는 나와 다른 종류의 '인간'이고, 돈을 주고 '명령'을 내리는 대상이 될 뿐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던 그 '돈'은 그들에게 '객관적 판단의 능력'을 앗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재벌'가의 자제란 이유만으로 국민 경제의 책임을 맡긴다는 건, '자살 행위'와도 같다고 박노자 교수는 단언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들 재벌에 대해 어떤가? 안타깝게도 우리의 법은 그들에 대해 오랜 불처벌의 관행을 가져왔다. 이러저러한 법적 조항을 제시하지만 사실상 면제부를 쥐어준다. 
대통령도 감옥에 가지만 재벌들은 이른바 '징3집5'라는 속설처럼 대부분 '집행 유예'의 판정을 받아 유유히 걸어나온다.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 유예 4년을 선고 받은 이재용 삼성 전자 부회장이 대표적인 예이다. 위의 표에서 보여지듯이 전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진 일가 중 그 누구도 감옥에 갈 가능성은 없다.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 최철원 회장은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2심에서 집행 유예로 풀려났다. 반면 야구 방망이로 폭행을 당했던 유호준 씨는 마치 앙갚음이라도 당하듯 업무 방해, 일반 교통 방해 등으로 법적 처벌을 받았다. 조현아의 갑질 대상이 된 박창진 사무장은 온갖 소문에 시달리며 회사를 다니기 위해 오늘도 아침에 정신과 약을 털어넣는다. 

재벌과 같은 동종 범죄의 경제 사범 중 단 44%만이 집행 유예를 받는 반면, 재벌들 72%가 '집행 유예'로 풀려난다. 더구나 그들의 '집행 유예' 사유는 대부분  '사회 공헌'과 '경제 발전에 기여'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석방과 관련하여 그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각종 의혹이 등장했지만, 다큐가 지적하는 건, 판결을 내린 개인이 아니라, '법조계' 전반을 지배하는 '인지 포획'이다. 즉, 재벌이 살아야 한국 경제가 산다, 재벌이 곧 한국 경제라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도그마'가 법 앞에서 그들을 '자유롭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심리를 분석하고, '다른 별'의 사람들이라는 걸 이해하면 뭐하는가.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이해는 외계인보다도 소통 불가한 재벌이라는 먹먹한 현실에 도달할 뿐이다. 다큐는 묻는다. 과연 언니 조현아에 대한 처벌이 강력했다면 연이어 동생 조현민과 그 엄마 이명희 씨의 오만한 '갑질'이 되풀이 되었을까? 재벌들을 알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강유미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재벌'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처벌'이라고. 

by meditator 2018. 7. 31. 15:48

덥다. 더워도 너무 덥다. 예년에 덥다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격'이 다른 더위가 한반도 상공을 밥공기처럼 뒤엎은 '열돔' 현상 때문이라니. '평균 해발 고도가 4500m에 달하는 티벳 고원이 올해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예년보다 더 뜨겁게 달구어 졌고, 이 티벳 고원으로부터의 열기(고기압)가 여름철 우리나라를 달구는 북태평양 고기압과 만나 반구형 지붕처럼 뜨거운  공기를 한반도 상공에 정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만이 아니다. 가까이 일본은 폭우와 폭염의 폭격을 맞아 신음하고, 아프리카의 기온은 50도에 육박하고, 미국, 유럽 등 전세계가 기상 이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런 전세계적인 폭염에 대해 미 항공우주국은 이런 기상 이변이 지구 온난화의 결과물이며 온실 가스 배출이 그 주된 원인이라고 쐐기를 박았다. 




여전히 '지구 온난화'나, '온실 가스'를 귓등으로 흘려 들었던 우리에게 강력 경고라도 하듯 찾아온 올 여름의 '폭염', 말 그대로 '찜통 더위'를 낳은 '지구 온난화'에 대해 일찌기 2006년 엘 고어 전 미국의 부통령은 경고한 바 있다. 그 어떤 전문가 보다 열렬하고 헌신적인 이 '환경 선생님' 엘 고어'의 호소력있는 강의, <불편한 진실>을 통해 '지구 온난화 개론'부터 다시 들춰보자. 

왜 부통령까지 한 엘 고어는 '지구 온난화를 방지 운동'의 전도사가 되었을까? 그의 여섯 살 난 아들은 아버지인 그의 손을 놓고 길 건너 편에 있는 친구를 향해 달려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섰다. 어렵사리 아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가치관'이 달라졌다.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소중한 아이를 잃을 수 있듯이, 소중한 지구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고정관념이 문제다. 무지가 아닌 잘못된 확신에서 문제는 시작된다. 
                                                                                   -마크 트웨인




온난화에 대한 고정 관념
영화의 시작은 바로 사람들이 가진 지구 온난화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가 너무 커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하지만, 칼 세이건은 '대기는 광택제를 바른 공에서 바로 그 공과 광택제 사이의 아주 '얇은 공간'이라며 '취약'하고 '파괴'되기 쉬운 대기를 정의내린다. 

태양열은 지구를 데운 후 다시 대기에 반사되는데, 그 중 일부가 대기에 갇히게 되고, 그것이 생물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온도'로 지구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공해 물질로 지구를 감싼 막이 점점 두터워지면 갇히는 열이 점점 많아지고 당연히 지구는 '더워'진다. 지난 수십년간 인류의 소비 행태가 급격하게 변화되며 대기 중 co2(이산화탄소)가 증가하며 더불어 지구의 온도도 상승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히말라야, 킬리만자로,남미 파타고니아,  북극, 남극 등의 빙하가 사라지며 지구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는 게 어때서?라고 사람들은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인의 40%의 식수원이 되는 빙하가 녹는다는 건 향후 50년 안에 인류가 식수난에 시달리게 된다는 의미이다. 




혹자는 말한다. 중세 시대의 기후 변화처럼 지구 온난화는 지구가 그동안 겪어왔던 기후의 주기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난 시대 지구가 겪었던 기후 변화는 최근 온난화에 비하면 미미한 정도이다. 마치 나이테처럼 새겨진 얼음 속 정보에 따르면 지난 650000년 동안 지구의 co2 농도는 300ppm을 넘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래 그래프에서 보여지듯 최근의 co2 증가량은 이전과 다르게 많고 급격하다.  당연히 co2가 늘어나면 기후는 상승한다. 


가장 더웠던 기록은 올해 우리나라에서 보여지듯 해마다 갱신될 가능성이 크다. 2003년 유럽에서는 더위로 3만5천면이 사망했다. 인도는 50도의 기록을 세웠다. 미국 서부도, 동부도 신기록을 세웠다. 기온 상승은 세계적 추세이다. 

해수의 온도가 올라가면, 그로부터 비롯되는열대성 저기압의 발달해서 만들어지는 폭풍이나 허리케인 역시 빈번해지고 강력해 진다. 지난 2004년 일본에서만 10회의 태풍이 찾아왔다. 440명의 사망자를 내고 뉴올리언즈 시를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그 실례다. 

태풍이나 허리케인만이 아니다. 몸바이는 37인치의 폭우로 물에 잠겼다. 중국은 홍수에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사하라 사막 주변은 가뭄에 시달린다. 세계 최대의 호수였던 채드호는 이제 물에 나갈 수 없는 빈 배들이 쓰러져 있다. 이런 가뭄은 아프리카 인종 분규의 원인이 된다. 해수가 덥혀지며 한쪽에선 구름이 만들어지며 폭우가 쏘아지는데, 다른 쪽 토양에서는 수분이 증발하여 가뭄에 시달린다. 온난화의 역설이다. 





그까잇거 빙하라고?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온난화'로 인한 재앙을 먼 미래의 일로 여긴다. 과연 그럴까? 북극해의 만년빙이 녹아 북극곰이 익사한다. 그린란드의 우드헌트 빙봉이 두 동강났다. 영구 동결층에 세워졌던 건물이 붕괴되고, 천연 가스를 나르던 파이프 라인이 틀어졌다. 지난 40년간 40%의 얼음 두께가 감소했고, 이런 식이라면 50~70년사이 만년빙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얼음은 태양빛의 90%를 반사한다. 북극과 남극 등의 빙하와 얼음이 지구의 적정 온도를 지켜주는 수문장 같은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런데, 빙하가 녹아버리면 태양열은 고스란히 해수면에 흡수되고, 따뜻해진 바닷물은 다시 빙하를 녹이며, 지구의 온도는 더욱 상승되고 갖가지 기상 이변이 발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 된다. 문제는 불연속 시스템을 가진 지구의 기후의 엔진이 '점진적'이지 않고, 극적인 변화를 보일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지구 생물의 순환은 절묘하다. 철새가 알을 깨는 시기는 애벌레가 활동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애벌레가 그보다 일찍 활동한다면 철새의 새끼들은 먹이를 잃는다. 변화된 기후에 따른 외래 동식물의 개체수와 활동 기간이 늘어난다. 모기가 늘고, 나무들을 고사시키는 좀이 많아진다. 전염병을 퍼뜨리는 매개체들의 서식지가 넓어지고, 해수면 온도에 적응하지 못한 산호초는 말라죽고, 그곳에 깃들여 사는 물고기들은 떼죽음을 당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는 생묻들의 멸종 속도를 1000배 가속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 '멸종'에 인간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 남극 대륙에 있는 700피트의 빙붕이 35일 만에 사라졌다. 빙하가 녹아 생기는 담수는 다시 기존 빙하를 침식해 녹이는 악순환을 계속한다. 또한 해수면을 상승시킨다. 남극해의 빙하가 녹으면 태평양 주변의 섬들이 범람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해안가에 모여살아왔다. 해수면의 상승은 수많은 섬들은 물론, 캘리포니아, 샹하이, 네덜란드 등 우리가 아는 많은 해안 도시를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수십만, 수억의 이재민이 발생할 수 있다. 

지난 9.11사태 이후 미국민은 다시는 이런 사태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다짐을 했다. 하지만 테러만이 위협이 되는 건 아니다. 해수면이 지금처럼 급격하게 상승해 간다면, 9.11추모비는 물에 잠겨 사라질 수 있다. 




온난화의 주범?
그렇다면 이런 온난화를 일으키는 원인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 '주범'은 인류이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시기에 10억을 넘은 인구는 급격하게 증가하여 2018년 현재 세계 인구는 76억명이다. 지금으로 부터 4만년에서 1만년 전 문명의 이기를 미처 사용하지 않던 시절 인류의 수는 400만 명, 겨우 부산시민 수준이었다. 포화 상태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각종  석유 채굴 등문명적 수단은 물론, 삼림 방화 같은 비문명적 수단들이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다. 

창이나 총과 같은 기술들은 그 '위해'의 범위가 예측가능했다. 하지만 원자력과 같은 '신기술'은 '예측 불가능'하다.  지구 표면에 가하는 인간의 영향력은 변화되었다. 오늘날 인간이 만들어 낸 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통제 한계를 벗어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미지근하게 데우는 물에 뛰어든 개구리처럼 온난화로 인해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기후 변화에 무감각하다. 

끓는 물처럼 100%가 아니면 믿지 못하는 인간의 속성만이 아니다. 언론은 '온난화를 믿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는 식으로 '온난화'를 단순한 가설로 몰아간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학술지 논문에서 928개를 표본 조사를 한 결과, 단 1명의 학자도 '온난화'를 믿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석유, 자동차 등 온난화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산업들이 퍼부은 막대한 로비 자금은 '정말 심각한 문제인지 불확실하다'는 편견을 유포한다. 




하지만 그렇게 석유, 자동차 산업 산업의 후진적인 의식은 오늘날 자동차 연비에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뒤처진 기술을 결과한다. 높은 연비의 기술이 '첨단'이 되는 세상이다. 지구가 생존하지 않고서야 인류도 존재할 수 없음을 온난화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강변한다. 경제냐 지구냐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가 먼저가 환경이 나중이라는 의식은 이제  시대에 뒤처졌다. 더는 선택이나 정치적 입장의 문제가 아니다. 온난화는  '윤리적이며 도덕적 문제'라고 영화는 결론한다. 

대통령 선거에서 안타깝게 떨어진 엘 고어 대통령은 좌절하여 주저앉는 대신, 대통령이 되서 하려 했떤 환경의 문제를 1천번이 넘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강의를 통해 실현해 나가고자 한다. <불편한 진실>은 그가 했던 1천번의 강의 내용과 같다. 그는 강력하게 말한다. 온난화를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바로 '당신', 우리들 각 개인이라고. 그건 구태의연한 삶의 방식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민주주의가, 인종 문제가, 달 정복을 낳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여성 참정권처럼 그 이전의 시대에선 불가능했던 것들을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 진보'의 결과물로 찬사를 보내듯, 온난화로 부터 비롯된 지구의 문제는 그와 같은 '삶의 방식'과 태도의 '혁명적인 결단과 선택'을 요구한다고 영화는 결론내린다. 그리고 그 개인이 책임져야 할 아래의 내용들은 엔딩 크레딧과 함께 '노래'로 울려 퍼진다. 






지구 온난화를 위해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고효율 가전 제품과 전구를 사용하라.
단열재를 사용하고, 냉난방 기구의 온도계를 조절하라. 
하이브리드 카를 사고, 웬만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타며, 가급적 대중 교통 수단을 이용하라.
재활용 에너지를 사용하고, 정부에게 그린 에너지 사용을 촉구하라. 
나무를 심어라. 많이. 
환경 문제를 주변에 알리고 co2 방출량 규제를 촉구하라. 
온난화 방지 운동에 동참하라.
수입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대체 연료를 애용하라.연비 기준 강화와 배기 가스 규제를 촉구하라.

부모님께 건강한 지구를 물려달라 부탁하라. 
당신이 부모라면 환경 운동에 동참하라. 
그리고 환경을 지키는 정치인에게 투표하라. 
                       -<불편한 진실> 중


by meditator 2018. 7. 29. 01:25

사랑의 유효 기간은 3년이라 했나? 죽고 못살아서 한 이불을 덮은지가 오래 되지 않아, 내가 내 발등을 찍었다 하는게 '사랑'이다. 그런데 50년을 한결같은 사랑이라니? 그게 가능한가? 그런데 가능하다. 왜? 용필 오빠니까.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ocn의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는 1988년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드라마는 그 시대를 실감나게 재연하기 위해 그 시절의 음악을 등장시킨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조용필의 '미지의 세계'이다. '이 순간을 영원히 /아름다운 마음으로 /미래를 만드는 /우리들의 푸른 꿈 /오오오 오오오 '가 울려퍼지는 88년도의 거리를 덥수룩한 머리를 하고 큼직한 점퍼를 입은 형사들이 질주한다. 그렇게 그 시절 대표적인 가수였던 조용필, 어느덧 그가 데뷔 50주년을 맞이했다. 가수 자신도 어색한 듯, '7순이라매~'라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그 시대가 이젠 '추억'이 되었듯, 그 '가수'도 이젠 과거형이 되었을까? 아니 여전히 목놓아 '오빠'를 부르며 그와 함께 나이들어 가는 '건재'한 팬들이 있다. 스타의 존재 이유, '팬들이 존재하는 한 '스타'는 영원한 '현재형'이다. mbc스페셜은 50년이 지나도 영원한 오빠, 조용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시절 우리의 심금을 울리던 '오빠'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부터 시작하여, <창밖의 여자(1979)>, <모나리자(1988)>, <못찾겠다 꾀꼬리(1982)>, <친구여(1983)>, <그대여>, <킬리만자로의 표범>, <Q.(1989)>,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1990)>, <여행을 떠나요(1985)>, <꿈(1991)>, <도시를 떠나서(1994)>, <hello(2013)>까지. 노래의 발표 연도에서도 보여지듯이, 1980년대, 거의 매해마다 조용필은 음반을 발표했고, 그가 발표한 음반 속의 곡들은 그 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받는 곡이 되곤했다. 굳이 조용필의 화려한 수상 기록을 들춰내지 않아도, 80년대와 9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 중에 과연 한번이라도 조용필의 노래에 마음이 적셔지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언젠가 나를 찾아 꽃다발을 전해주던(단발머리) '그 소녀는, '그 많던 어린 날의 꿈을 잊어버려 잃어버린 꿈을 찾아(못찾겠다 꾀꼬리)' , '하이에나처럼 산기슭을 헤매(킬리만자로의 표범)'듯, '화려한 도시를 ,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그 마음을 위로받았다.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라며 우리의 실연을 대신 절규해 주었고, '타버린 그 잿 속에 숨어있는 불씨의 추억라며 지나간 옛사랑을 추억해 주었다.' 그리고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라며 함께 인생을 돌아보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그렇게 인생의 구비구비, 조용필은 그의 '노래'로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을 '위무'했다. 80년대에서 90년대 초반 조용필의 노래는 곧 그 시대의 노래였다. 치열한 경쟁의 도시에서의 삶을 가장 낭만적으로 처절하게 대변한 조용필이었다. 

그리고 조용필의 노래로 위로받고 행복했던 이들은 여전히 '현재형'인 사랑으로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대중문화의 별이 빛날 수 있는 건, 그 별을 바라봐 주는 이들의 존재때문이다. 7순이 넘어도 조용필이 영원한 오빠이자, 스타인 이유는 여전히 그를 별로 빛내주는 팬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큐<고마워요 조용필>은 50주년 스타의 기록을 그 '팬들'의 기록으로 역설한다. 




'오빠'를 빛내준 '팬들
초등학교 5학년 너무도 귀여웠던 오빠의 기억으로 시작된 역사는 사춘기 시절 대책없이 오빠의 집앞에서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기다렸던 애닮은 추억으로 이어진다. 공개 방송에서 오빠의 뺨을 닦아줬던 그 10년도 넘은 손수건은 이제 낡아 냄새도 희미해졌지만, 그리고 그 시절 소녀들은 이젠 아줌마에, 할머니가 되어가지만, 그녀들, 혹은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용필'이 오빠가 있었기에 자신의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입을 모아 말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슬픔도, 아내의 자리, 엄마의 자리, 혹은 고단했던 신입 사원의 자리, 인생의 구비구비에서 막막했을 때 먹먹하게 자신의 가슴으로 흘러 들어와 눈물을 차오르게 했던 조용필의 노래가, 그들을 여전히 비오는 50주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들썩이게 만든다. 

이른바 '덕질'이라며 한갓 감정 소비, 나아가 쓸데없는 경제적 소비로 치부되는 이 '문화적 행위'들, 하지만 50년의 역사를 가진 용필 오빠의 팬부대들의 위용은 이제는 어느덧 50년이 된 '팬'문화의 역사를 실감케 한다. 1969년 클리프 리차드 내한 공연부터 사회를 들썩이게 만들던 팬들의 열렬한 응원은 그 역사가 깊다. 나훈아와 남진을 좋아했던 이들의 길고도 오랜 쟁투심은 유명했으며, 그런 가운데 용필 오빠의 '위대한' 소녀 부대들은 본격적인 팬문화의 '시발점'이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사 다시 부활한 'hot'나, '젝키' 팬들이 '선배님'하고 한 수 배워야 할 내공이지만, 세대별 좋아하는 음악의 간극만큼이나, 그들이 좋아하는 스타와 그 스타를 좋아하는 문화의 역사에 대한 '경의'는 박하다. 69세에 세상을 떠난 데이빗 보위는 경배하지만, 그 시절 우리와 동고동락했던 조용필의 50주년은 간과되었다.  마치 낡은 구 도심을 싹 다 갈아엎고 새 아파트를 세우듯이,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문화만 솔깃하다. 그런 가운데 여전히 모든 팬클럽이 연합으로 50주년 팬미팅을 하고, 그런 가운데 7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짱짱한 콘서트로 화답하는 조용필, 아직도 건재하다. 그저 건강하게 자신들과 함께 오래오래 무대에 있어달라는 팬들. 더 늦기 전에 나도 그 '별'의 콘서트 한번 가보고 싶다. 

by meditator 2018. 7. 24. 14:34

1973년으로 간 형사의 이야기인 영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라이프 온 마스>는 중반부에 들어서며 '귤화위지(회남(淮南)의 귤을 회북(淮北)으로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의 우를 범하던 '리메이크'작의 우려를 씻고, 외려 '청출어람(청색은 남색으로부터 나오지만 남색보다 푸르다)'의 좋은 사례가 되고 있다. 

지난 7회 원작에서 평범한 '인질범' 에피소드는 1988년 대한민국이라는 시공간으로 '타임슬립'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지강헌 인질극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시대의 공기를 소환했다. 수사극답게 그저 조용필과 박남정의 노래나, 선데이 서울 로 대변되던 '응답하라 1988'을 넘어  빈부 격차가 고착되던 1988년의 시대를 정확하게 포착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에 이어 우리에게 '형제 복지원' 으로 기억되는 또 하나의 '과거의 괴물'을 불러온다. 




괴물을 만든 시대, 1988년
2018년 연쇄 살인범을 쫓다 의문의 총격으로 사경을 헤매던 한태주(정경호 분), 그의 무의식 속에서 소환된 1988년에서도 그는 '현재의 연쇄 살인범'을 쫓는데 여념이 없었다. 현재의 연쇄 살인범 김민석의 과거 행적을 찾아 애초에 그의 살인을 봉쇄하려 했지만 찾을 길 없었던 그 존재는 뜻밖에도 아버지의 죽음 이후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어린 태주의 곁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뜻밖에도 김민석을 조우하게 된 건 도봉리의 살인 사건, 죽은 지 오래된 김봉례네집에서 찾은 가족 사진, 그리고 그곳의 김민석, 민석의 행적을 찾아 김봉례의 남편을 찾아간 한태주는 민석이 두 사람의 친 자식이 아니라, 정부의 혜택을 받기 위해 가짜로 '입양'된 아이이며, 그로 인해 오랫동안 '학대'당했던 피해자라는 사실에 맞닦뜨린다. 그리고 김봉례의 범행 수법이 그들이 쫓는 연쇄 살인범의 수법과 동일하다는 걸 알게 되고.  경찰서 내에서 죽은 마약 중독자의 죽음을 통해 범인이 그들 주변에 암약해 있음이 드러나며 김민석의 형 현석(곽정욱 분)이 드디어 전면에 등장한다. 

윤나영(고아성 분)을 납치하며 강력계에 역습을 가하던 현석은 하지만 기억 속 집을 찾아낸 태주로 인해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현석을 찾기 위해 그의 지난 과거 행적을 쫓던 태주와 강력계 형사들은 '범죄'를 만들어 낸 88년의 오욕된 역사를 마주하게 된다. 

월남에서 팔을 잃고 돌아와 술과 자식들 매질로 세월을 보내던 아버지, 그런 무능한 아버지 대신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술집에 나갔지만 병을 얻었던 누나, 좋은 집에서 태어났다면 '의사'라도 될 놈이라던 현석은 '의사' 대신 연탄불로 위장하여 아버지를 죽였다. 벽에 즐비한 상장 대신 '범죄'를 손에 든 그의 변화에는 동생과 함께 외가를 찾아나섰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다짜고짜 그를 '납치'해간 인성시의 '환경 미화 작업'과, 그 배후의 '복지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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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사랑하던 소년, 사이코패스가 되다
현석의 과거 행적 중에 추적이 불가능했던 3년, 그 3년은 동생을 보살피려 했던 소년을 사이코패스로 돌변한 막무가내의 감금과 학대의 세월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전히 우리의 현실 속에서 튀어나오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소환이다. 

1975년 내무부 훈령 410로, 정부는 거리를 배회하는 부랑인들을 영장없이 구금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훈령은 70년대에는 유신 정권의, 그리고 80년대엔 독재 정권의 '유용한 수단'이 되어 '정화'라는 명목으로 죄없는 사람들에게 '영어'의 고통을 강요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1975년부터 1987년까지 부산 형제 복지원에서의 인권 유린 사건. 특히 1988년 국가적 행사인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뤄내기 위해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는 이유로, 주민등록증이 없다는 이유로, 가출 청소년 같다는 이유로 무고한 사람들을 '사회 정화'의 명목으로 막무가내로 잡아들였다. 

드라마는 이 '사회 정화' 작업을 상기시킨다. 현석은 그 '사회 정화'작업으로 표창장을 받은, 하지만 동생을 눈앞에 두고 자신을 무작정 잡아가 가둔 형사를,  복지원에서 자신에게 '변태적 행위'를 한 간호사를, 그리고 그 배후인 '복지원' 원장을, 동생을 학대한 김봉례씨처럼 '보복'하고자 했다. 이제는 새롭지도 않은 수사물의 단골 주범인 '사이코패스'를 <라이프 온 마스>는 1988년이라는 시대의 인물로 재탄생시키며 다시 한번 '유전무죄 무전 유죄'의 시대를 복기한다.  1988년은 자랑스러운 88올림픽의 시대가 아니라, 유전무죄의 범죄들이 연달아 터지던 오욕의 역사였다. 

by meditator 2018. 7. 23. 14:18

'태어나서 가장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고 있는데 엄마라는 경력은 왜 스펙 한 줄 되지 않는 걸까?' 모 드링크제 선전 속 엄마의 한숨 섞인 하소연이다. 이보다 '부모'의 자리에 대해 잘 정리한 말이 있을까? 그런데 이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내는' 이 역할을 우리는 인간의 '본능'이자, '도리'라 '교육'받아 왔다. 정말 본능이고 당연한 도리일까? 그10달을 품고도 자기 앞에 나타난 , 아니 자신의 책임으로 던져진 생명체로 인해 '산후 우울증'을 앓는 엄마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 '본능'과 '도리'가 역방향으로 작동한다면? 아니 외려, 그간 '많이 참고, 일하고, 배우며, 해냈던' 그 설움들이 에너지가 되어 '폭발'한다면? <맘&대드>는 바로 이 '인간의 본능과 도리'라 했던 부모의 내리 사랑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농담'이다. 



부모의 역습
시작은 떠들썩한 미국의 중산층 가정의 아침이다. 십대인 딸은 남친과 통화를 하며 어떻게든 부모의 잔소리와 간섭을 피해서 남친과의 데이트를 즐기려고 모색한다. 그를 위해 엄마의 지갑에서 돈까지 몰래 슬쩍하고. 그런가 하면 아직 철부지 아들 녀석은 아침부터 아버지와 '장난'삼매경.  전형적인 미국의 주택가, 중년의 가장 라이언(니콜라스 케이지 분)네 아침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들의 장난감 트럭에 넘어지고 지나친 아들의 장난에 아버지는 화를 내는 건지, 농을 하는 건지 모를 경계에서 오가고,  딸을 데려다주는 엄마의 진심어린 설득은 결국 엄마 자신의 삶이 없어서라는 처참한 답변만을 얻는다. 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철부지 아들과 10대인 딸을 둔 가정의 평범한 모습이려니. 라이언과 그의 아내만이 아니라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의 일상은 다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능 자격 시험을 치르는 고사장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그저 시험치르는 자식을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다. 하교길의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들 역시 마중이라기엔 울타리에 매달려 아이들을 애타게(?) 부르는 그 절절함이 도를 넘는다. 결국 부모의 그 애타는 절규에 담을 넘은 아이, 그런데 엄마는 아이를 품에 안는 대신, 자동차 키를 거꾸로 세워 가격한다.  그리고 시작된 피의 질주. 부모들이 아이들을 향해 한껏 달겨든다. 그리고 손에 쥐어지는 건 그 무엇이든 그것으로 자신의 아이를 죽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자동차 키도, 삽도, 야구 방망이도, 당연히 부엌칼도, 잘린 맥주병도. 고기다지는 망치가 그리도 잔혹한 살육 도구였던가. 

지지직거리는 tv, 마치 전파 방해처럼 혼선이 되는 채널들의 시그널, 하지만 그 이상 영화는 부모들의 '변심'을 설명치 않는다. 그저 인간에게 '탑재'되어 있는 2세를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이 어떤 이유로 인해 '반대'로 작동하게 되었을 때, 그 '맹목성'이 '폭력성'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tv프로그램 속 전문가의 말이 피튀기는 부모들의 살육전 사이에 스쳐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라이언네의 평범하지만 짜증나는 일상으로 부터 시작된 '부모의 자식의 애증어린 관계는 부모들의 맹목적인 살육전에 대한 충분한 '전제' 조건이 된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는 그 '맹목적'인 사랑이 전복되었을 때 보여지는 '살육전'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맹목적'인 부모의 사랑에 기대어 있는지 설명한다. 




가족을 묻다 
현대 사회의 단위는 '개인'이다. 신분과 계급으로 부터 방출되어 나온 '근대' 이후의 개인은 '의지적 존재'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간다는 '이데올로기'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그런데 그 '개인'은 어디서 만들어 지는 걸까? 바로 그 '개인'의 인큐베이터가 '가족'이다. 묻지도 않고 따지지고 않고 때에 맞추어 아이를 낳고 수모를 참아가며 양육하는 '부모'라는 존재가 '근대' 이후 개인을 품어낸 산실이다. 자유 의지의 개인과, '맹목적'인 도리를 가진 양육체로서의 부모, 이 조합의 아이러니를 <맘&대드>는 묻는다. 

그의 말썽꾸러기 아들처럼 아버지가 어렵사리 장만한 차를 몰고 나가 교통사고를 일으켰던 철부지였던 라이언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되었다. 집안 곳곳에는 지뢰처럼 아들의 장난감이 널부러져 있고, 모처럼 그가 자신의 공간으로 장만한 지하실조차 아내의 냉소에 맞닦뜨린다. 아내라고 다를까. 사춘기 딸과의 진정성어린 대화조차 엄마의 집착 혹은 자존감없는 엄마의 하소연으로 치부되어버리는 아내, 예전 상사의 말에 기대어 직장을 구하고자 하지만 돌아온 건 조롱 아닌 조롱. 중년의 부부는 어느덧 '나'를 잃은 채 '부모'로서의 기능으로 살아가며 지쳐간다. 영화는 바로 이 '선택'이라 생각했지만 어느덧 '굴레'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가족'을 '화두'로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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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붉게 물들였던 살육전은 라이언네 집이라고 예외가 없다. 집안의 행사로 기대되던 여동생의 출산은 피로 물들었고, 겨우 집으로 돌아오던 엄마 역시 그 살육의 전염병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하실로 피신한 아이들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우리가 범죄영화에서 흔히 보던 '드릴'과 '망치', 전기톱, 그리고 가스까지 동원된 엄마, 아빠의 혼신을 다한 작전. 그런데 여기서 반전, 이날은 두 사람의 부모님이 방문하기로 했던 날이었던 것이다. 

무심코 문을 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드는 노익장의 부모님들. 이 세대를 이은  육탄전을 통해, 부모 자식의 '연원'이 그리 간단치 않았음을 반증한다. 누군가의 부모가, 한때는 누군가의 자식이었던, 부모의 '허랑방탕'한 자식이었음을 드러내는 '시간'의 역습이다. 

과연 이 살육의 딜레마에 빠진 공방전에 해법이 있을까? 삼대가 뒤엉켜 피바다를 만들던 라이언네의 살육전은 그럼에도 아이들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아이들에 의해 체포된 라이언과 아내, 두 사람은 애절하게 엄마, 아빠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그건 살육전이 벌어지기 전이나, 처음 아이들을 죽이려 문을 두드릴 때나 똑같은 톤이다. 그런 부모들의 고백을 아이들은 마치 '빨간 모자'를 찾아온 늑대처럼 여긴다. 영화는 밑도 끝도 없이 시작된 부모들의 역습처럼, 엔딩도 다르지 않다. 알고보니 긴 악몽이었다던가, 그 지지직거리던 tv의 소음과 함께 자신들의 범죄를 자각한 부모라던가(자각하면 어쩔텐가 허긴 ), 그 어떤 해결도 없이 이 '어처구니 없던 농담'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던져진 질문, 살의를 부르는 양육, 과연 우리가 이 맹목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가족'은 정말 가치있는 걸까? 개인의 자유를 포기할 만큼 부모됨은 의미가 있는 걸까? 어쩌면 '결혼'이 선택인 시대에 한번쯤은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 

by meditator 2018. 7. 21. 16:18

시청률은 보잘 것 없었다.(1회 1.8%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하지만, 첫 회가 끝나고, '티라미수 케잌'하며 달콤하게 사랑 노래를 부르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의 '법자'(김성철)이 화제가 되었다. 아마도 편의점 알바를 하는 정민(김성철 분)과 그의 눈 앞에 나타난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 권나라(정채연 분)의 풋풋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입혀진 음악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며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리라. 

대놓고 뮤직 드라마는 아니었지만, '소년과 소녀의 풋사랑에 '음악'을 입힌 시도는 kbs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사춘기 메들리(2013)>를 통해 시도된 바 있다. 제이 레빗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 커피소년의 <아메리카노에게>, 불독 멘션의 <좋아요>가 한 폭의 수채화같은 고창의 여름 풍경을 배경으로 삼아 소년 정우(곽동연 분)와 소녀 아영(이세영 분)의 사랑을 타고 흘렀다. 허긴 <응답하라> 시리즈 역시 거기에 그 시대를 대변하는 음악이 없었다면 '신드롬'이 되었겠는가. 그렇게 '청춘'은 언제나 '음악'을 타고 시청자의 감성을 흔들었다. 지난 7월 10일에 이어 17일 kbs2 밤 11시에 방영된 <투 제니>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선다. '뮤직 드라마'를 표방한 이 드라마는 기존의 작곡가의 곡이지만, 극중 '뮤지션'인 정민과 나라의 노래와 연주를 통해 '음악'을 고스란히 드라마에 입혀냈다. 




편의점 알바와 아이돌 연습생의 사운드 오브 뮤직
할 줄 아는 건 음악 밖에 없는 하지만 현실은 '편의점 알바'인 정민의 유일한 관객은 그의 열살 먹은 여동생이다. 그런 오빠를 한심하고 안타깝게 생각한 여동생은 오빠의 음악을 알리기 위해 'sns'를 시작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방구석 '싱어송라이터'를 면치 못하는 정민 앞에 고등하교 시절 첫사랑인 나라가 나타난다. 

소리 없이 다가온/소문처럼 다가온 사람
별처럼 빛났던/너를 보게 됐고/Fall in Love
찬란했던 그 미소/두 눈에 가득했던 파도/난 너를 보면
Tiramisu Cake Tiramisu Cake/마치 넌 Tiramisu Cake  -<티라미수 케잌>


<투 제니>의 1부는  그렇게 '티라미수 케잌'처럼 달콤하게 다시 찾아온 첫사랑 나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돋보였던 나라는 졸업을 하기도 전에 아이돌 연습생으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나라의 '찬란했던 시절'은 그때가 끝이었다. 그녀가 '코코아'라는 그룹으로 데뷔를 했었다는 건 알지만, 이제 더는 그녀를 기억하는 동창들은 없다. 그녀의 첫 앨범을 사서 머리맡에 둔 정민 말고는. 그랬던 그녀가 어깨죽지가 꺽인 새와도 같은 모습으로 정민의 편의점을 찾고,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 아니 그녀의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부담감에 그만 '삑사리'를 내버렸던 학생으로 기억되는 정민은 오랜만에,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를 기억해 주는 동창으로, 그리고 재계약을 위해 소속사에 요구하는 '싱어송라이터'로의 변모를 위한 '기타 선생님'으로 나라의 곁에 자리하게 되고. 그런 정민의 도움으로 나라는 7년이라는 아이돌 연습생의 시절을 접고, 다시 한번 도전을 해보려 한다.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줄게
깜깜하면 등대가 되어줄게
And I know and I know and I know
너 슬픈 거 I know
무거운 짐 내가 들어줄게
하루하루 how do you feel today  -<your song>


1부에 이어진 2부는 정민의 이야기다. 그저 속절없이 시간을 타고 사는 편의점 알바인 줄 알았던 정민,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나라, 아니 전교생 앞에서 '음이탈'을 한 트라우마가 정민이 꾸는 '뮤지션'의 꿈을 막는다. 여동생, 아니 단 한 명의 관객이 아니라면 노래를 할 수 없는 정민, 그렇게 오랜 '불치병' 을 겼는 정민은 하지만 기꺼이 자기 앞에 나타난 첫사랑을 위한 곡을 써서 '헌정'한다. 

정민이 만든 곡으로 싱글 앨범을 약속받은 나라, 그러나 정민의 곡은 나라가 아닌 다른 소속사가 미는 가수에게 돌아가고, 나라는 자신을, 정민을 '이용'하기만 하는 소속사와의 재계약을 접고, 정민과의 인연도 끊은 채 '칩거'한다. 

그래 이제 말해야 해/변하지 않아도 돼/그대로 있어도 돼
이제는 들려줄게/나의 마음을/이 자리에 서서/노래해줄게
너에게 말해야 해/그래 이제 말해야 해/너의 모든 게/지워지기 전에
이제는 들려줄게/나의 노래를/이 자리에 서서/노래해줄게  -<to. jenny>




청춘의 이야기에, 트렌디한 음악, 그리고 실험적인 형식 
2부작의 <투 제니>는 그렇게 '음악'에의 꿈을 꾸지만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그 '꿈'이 가로막힌 '청춘'의 이야기를 날줄로 삼고, 그들의 심정을 고스란히 담아낸 '음악'을 씨줄로 삼아 엮어낸다. 또한 드라마는 기획사라는 기성 사회와 트라우마에 갇힌 청년들의 소통의 세상으로 'sns'를 등장시키며 청춘 담론의 새 가능성을 연다. 거기에 그 풋풋한 청춘의 이야기를 '핸드폰 카메라'로 찍는 실험적 방식을 통해 신선한 접근을 더한다. 

단 한 명이라도 관객이 늘면 노래를 못하고 도망치곤 했던 정민이 나라를 위해 관객들 앞에 서고, 나라를 찾아 피씨방의 사람들 앞에 서는, 그래서 자신도, 나라도 '구제'하는 이 '꿈'의 성장기는 편의점 알바 청년과 아이돌 연습생이 만난 그 순간 충분히 예견할 만한 결말이다. 하지만, 그 어디선가 본듯한 평범한 이야기에 '멜로망스', 최낙타, 샘김, 알고보니 혼수상태' 들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그 청춘의 정서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드라마 스페셜은 아니었지만(예능국 제작), 여전히 녹슬지 않은 kbs 드라마다운 신선한 시도이다. 올드 미디어가 되어가는 tv의 바람직한 청춘들과의 '협연'이다.

by meditator 2018. 7. 18. 05:09

남과 북의 정상이 만나던 날, 평양냉면을 먹으로 간 이들이 많았다. 2018년 '평양 냉면'은 그저 냉면 중에 한 종류가 아니다. '어렵사리 평양으로부터 랭면을 가져 왔습니다.'의 그 '남과 북'의 가교이다. 남북 정상 회담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평양 옥류관에서 평양 냉면을 맛본 이들의 '동정'이 화제가 되었다. 어느덧 시대의 상징이 된 음식, '평양 냉면' 그에 대해 mbc 다큐가 이야기를 풀어낸다. 

평양 냉면, '덜덜이'라고 했단다. 황교익 평론가에 따르면 찰기가 없어 뜨거운 국물에 넣으면 풀어져 버리는 이 '메밀'을 국수로 만들어 먹기 위해 김치 국물 등의 찬 물에 담갔고, 특히 추운 겨울 밤 덜덜 떨면서 먹던 그 '밤참'의 매력 덕분에 '덜덜이'라 불리던 음식, 벼농사가 흔했던 남쪽과 달리, 척박한 밭 농사의 지역에서 흔히 수확할 수 있었던 특산물에서 비롯된 음식, '냉면'이다. 




냉면으로 하나된 민족
냉면 집에 가면 홍해 바다 갈리듯 나뉘는 취향, 함흥과 평양, 비빔과 물이라는 냉면을 마는 방식, 하지만 남과 북의 두 정상이 만나, 그 상징적 음식으로 '옥류관의 평양 냉면이 등장하면서, 이 시대 어느새 냉면의 대명사는 '평양 냉면'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평양 냉면'의 성지로 '옥류관'이 떠올랐다. 꼭 먹어봐야 하는 맛, 먹고 싶은 맛, 옥류관의 평양 냉면을 먹고싶어서라도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하는 맛, 그게 '먹방'의 시대 떠오르는 아이콘 '평양 냉면'이다. 

다큐는 당연히 '성지', '옥류관'으로 부터 시작된다. 냉면 집이라기엔 어마어마한 규모, 1,2층 합쳐서 1,2800㎡, 장충 체육관보다 넓은 옥류관, 이곳에선  한번에 2000 명이 냉면을 먹을 수 있다.  하루에 팔리는 냉면의 양만 만 그릇이 넘는 곳. '육수물이 제일 맛있다'는 평양 냉면, 순 메밀로 만든 사리에, 김치, 무김치, 소, 돼지, 닭고기, 실지단, 달걀 반 알, 잣 세알을 띄운 음식, 꼭 사리에 식초를 쳐서 먹어야 하는 '비법'까지 곁들여지는 김일성의 지시로 1961년 평양 대동강변에 만들어진 '부심' 짱짱한 옥류관의 대표 메뉴이다. 

하지만, 냉면을 그저 '옥류관'에 가두는 건 아쉽다. 다큐는 냉면을 타고 흐르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추적한다.  북한에 옥류관이 있다면, 남한에도 '옥류관' 못지 않은 전통을 자랑하는 '냉면'집들이 많다. 그 중 하나가 1.4 후퇴 당시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실향민 박근성 씨의 '평양 모란봉 냉면집'.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냉면집을 하시던 부모님의 가업을 물려받아, 대전의 피난민들이 많은 숯골에서 냉면을 말아 팔기 시작했다던 그 냉면집이 이제 아들의 대까지 이은 대전의 냉면 맛집이 되었다. 초가집 앞에 가마니를 깔고 앉아 먹던 냉면이 이제 한 해 무 만개, 배추 7천 포기의 소문난 맛집이 될 동안에도 부모님이 하시던 방식 그대로 메밀의 겉 껍질을 살린 거무죽죽한 면발에, 겨울 무로 담근 동치미의 전통은 변하지 않는다. 방송이 나가기 얼마 전 결국 고향을 그리워 한 채 눈을 감고 만 박근성 씨, 박근성 씨처럼 남한의 전통있는 냉면 집은 '실향'의 다른 이름인 경우가 많다.

냉면으로 이어진 '민족'은 한반도에 머물지 않는다. 미국 교포인데도 워낙 냉면을 좋아해 어느 덧 냉면하면 떠오르는 가수가 된 존박과 함께 찾아간 일본 효고현 고베시, 그곳에 옥류관보다도 몇 십년 앞선 1039년에 문을 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냉면집이 있다. 일제 강점기 평양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이주한 장모란 부부, 그들의 자손들이 여전히 '조선'의 국적, 아니 남도, 북도 아닌 무국적인 채 이곳에서 '냉면'의 가업을 잇고 있다. 어릴 적 아버님이 뽑던 전래의 냉면 틀을 기억하는 부부의 자손, 오늘도 평양식 물김치를 담그고, 손반죽으로 냉면을 뽑아내며 숙연한 전통의 맛을 살려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서울에서도 옥류관 평양 냉면을 맛보는 게 가능하다. 고난의 행군 시절 혹독한 북한 사회를 견디지 못했던 옥류관 요리사 윤종철 씨는 딸을 북한에 남겨두고 서울로 내려와 옥류관 시절의 맛을 되살린다. 그에게 냉면은 낯선 서울 땅에서의 안착이자, 두고 온 딸에 대한 다할 수 없는 미안함이다. 

2018년에 되살린 평양 냉면 '팝업 스토어'까지, 다큐는 냉면을 통해 남과 북을 잇고, 민족을 되살린다. 단 250그릇 한정으로 만들어진 옥류관 서울 1호점에 냉면을 먹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의 음식으로 대동단결된 민족이다. 

정말 평양 냉면이 맛있을까? 
그런데, 평양 냉면이 정말 맛있을까? 이 글을 쓰는 이도 그 유명하다던 평양 냉면들을 먹어봤다. 인터넷에 농담처럼 '걸레빤 물'이라는 말도 있듯이, 솔직히 호불호가 갈리는 '밍밍한 맛'이다. 비빔과 물의 취향 차이만큼이나 또 하나의 '취존'이 필요한 분야라는 것이다. 필자는 그 '밍밍한 맛'이 남기는 묘한 여운으로 인해 또 먹고 싶지만, 함께 갔던 이들이 다시 '이름값'을 넘어 '평양 냉면'의 마니아가 될 지는 미지수다. 



심지어 북한 옥류관의 냉면도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2000년대, 2010년대, 2018년에 먹은 옥류관 냉면은 맛이 달랐다고 한다. 순 메밀이라 자부했던 면에는 찰기를 살리기 위해 전분이 더해지고, 심지어 2018년의 옥류관 냉면에는 붉은 다다기까지 제공됐다고 하니, 남한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밍밍한' 평양 냉면이 정작 그곳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결국, 평양 냉면이라는 남한의 우리가 생각하는 '그 냉면의 맛', 혹은 '이상향'이 어쩌면 또 다른 '냉면'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평양 냉면이라 하여, 심심한 물에 담긴 메밀 국수에 길들여지고자 노력할 동안, 정작 본고장 냉면은 세상의 트렌드에 맞춰 간이 진해지고 있으니. 

음식이란 게 시절에 따라, 지역에 따라 변한다. 똑같은 평양 냉면이라도 '대전'의 평양 냉면과 , 고베의 '평양 냉면'이 다르듯이. 애초에 집집마다 긴 밤을 지내기 위해 말아먹던 '덜덜이 ' 국수에 정석이 어디 있으랴. 각 집의 손맛이 다르듯이, 김치 맛이 다를테고, 당연히 재료에 따라 냉면 맛도 달라질 테니. 늘 새로운 시대와 함께 새로운 '음식'들이 트렌드가 된다. 한때는 비빔밥이, 또 한 때는 한식이, 부디 평양 냉면이 그런 호들갑스런 잔칫상에 올려진 품목이 아니길 바란다. 냉면으로 하나된 민족을 확인하는 일은 뜨겁지만, '평양 냉면 제일일세'는 '과찬'이다. 

by meditator 2018. 7. 17. 15:24

남자 주인공의 캐스팅, 그리고 이어진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고의 나이 차, 뜻밖의 연기 논란, 그리고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  등등 <미스터 선샤인>을 둘러싼 논란은 마치 '두더지 잡기'와 같다. 마치 망치로 두드려대는 타이밍을 놓쳤듯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런 '논란'이 무색하게 시청률은 상승세다. 김은숙, 이병헌 이라는 화제성을 엎고 8%를 거뜬히 넘기며 시작하더니, 3회차에 10%를 넘어섰다. (1회 8.852%, 3회 10.082%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기준)




조국으로 부터 버림받은 주인공들
<미스터 선샤인>의 시작은 비감했다. 강화도 김씨 가문에서 노비였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하다 잡혔다. 아비는 멍석말이 매타작으로 목숨을 잃었고, 어미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양반네 며느리의 목에 비녀를 그었다. 그리고 어미의 목숨값으로 던져준 노리개를 들고 유진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어린 유진은 자신을 쫓는 추노꾼들을 따돌리며 밤을 낮삼아, 생감자를 씹으며 길을 이었다. 구사일생 도공의 집에서 만난 미국인을 따라 이 땅을 떠났다. 그것만이 어머니가 남긴 유언을 지키는 길이라 어린 유진은 생각했다. 그리고 낯선 이방의 땅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총을 들었다. 그리고 그 총이 유진초이가 된 그(이병헌 분)를 다시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조국을 '오만원'에 팔겠다는 이완익(김의성 분)을 처단하기 위해 총을 든 의병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배신자가 있었고, 결국 그들은 총을 들어 배신자를 저격하는 대신, 그 총에 목숨을 잃어야만 했다. 동지를 지키기 위해 홀로 남아 적들에게서 시간을 끌던 어미는 자신의 아이를 동지에게 전한다. 아비 역시 어미의 뒤를 이어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아이는 그렇게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어미, 아비 대신 완고한 학자인 할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 하지만 정숙한 여인으로 살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에 목숨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그녀고애신(김태리 분)을 할아버지는 의병의 아들이었으며, 그렇게 살지 않겠다더니 그 자신 역시 의병이 된 장승구(최무성 분)에게 보낸다. 

구동매라고 다를까. 그의 어미, 아비는 백정이었다. 칼을 들어 동물을 잡는 건 그들의 직업이었지만, 돌아오는 건 일반 백성들조차 사람 대접하지 않는 모진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을 잡던 칼 끝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위 세 사람 주인공들은 성별과 연령은 달라도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조선', 혹은 '대한제국'이라는 공동체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이들은 '사람'으로 대접받은 적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원형이라지만, 거기서 주인이 되는 이들에 '노예'와 '여성'은 해당되지 않았다. 조선에 일본이 쳐들어 왔을 때그 일본군을 인도한 이들이 조선의 '백성'이라고 하여, 과연 그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자신의 땅을, 땅에서 나는 소출을 빼앗가 가는 '양반'의 나라와, 자신들에게 쌀을 주는 왜군 사이에서 한 '백성'들의 선택을 어떤 기준의 잣대를 댈 수 있을까? 애초에 '양반'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노비'와, '백정'과,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 바로 거기에서 <미스터 선샤인>의 질문은 시작된다. 지켜주지 않는 국가, 지킬 가치조차 없는 국가, 그 국가의 '구성원', 그들에게 '국가'는 어떤 것일까?



그 질문을 시작하기 위해 드라마는 가장 '낭만적'으로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조선은 비루했고 비겁했으며, 외세 앞에 무력했고 초라했다. 그에 비해 외세는 일본이든, 미국이든 영악했으며, 강력했고, 압도적이었다. 이완익을 저격했던 고애신의 어미와 아비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찾기가 희박하듯 드라마의 곳곳에서 '역사적 사실'의 불충실함과 빈약함, 심지어 왜곡을 만난다. 그 '부실'한 역사를 엮어 드라마가 도달하고자 한 것은 구한말의 역사 속에서 애초에 국가의 성원인 적 없는 세 주인공들의 가장 비극적이고도, 그래서 낭만적인' 캐릭터이다. 마치 배경에 '뽀샤시' 효과를 주어 '나'를 한껏 부풀려 드러낸 '셀카'와도 같다. 

그리고 이는 일찌기 고려의 무신이었으나 나라의 버림을 받아 칼이 꼿힌 채 천년의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도깨비'김신 과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해 비극적 가족사를 감내해야 했던 지은탁의 서사와 잇닿는다. 허구의 역사를 길어 가장 비극적 낭만적으로 길어왔던 <도깨비>의 서사가 이제 가장 극적인 역사의 전환기였던 구한말로 시점을 옮겨 '사랑'과 함께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자각하는 근대적 개인, 그들의 선택 
개인에게 국가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은 '모던'하다. 근대 이전에 '개인'의 존재와 역할, 의식이란 건, '신분'이란 틀 속에서 규정받는 개인들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는 '신분' 속에서 살던 주인공들을 그 '신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가장 극적인 장치를 도입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신분'을 부여한 부모님을 잃었다. 그저 잃은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존재를 규정한 공동체가 그들을 버렸다. 거기서 그들의 첫 번째 자각이 싹튼다. 그저 노비로, 백정으로 순탄하게(?) 살아갔다면 몰랐을 '공동체'의 실체를 뼈저리게 깨달으며 자기 존재의 비감함을 통탄한다. 존재론적 깨달음음 가장 극적으로 그들에게 다가온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이 몸담았던 공동체로 부터 '이반'하거나, 된다. 유진은 살아남기 위해 양반 사회인 조선을 떠나 '미국'이라는 신문명에 자신을 던진다. 구동매 역시 칼잡이였던 자신의 특기를 살려(?) 일본의 무사가 되었다. 고애신은 양반가의 여식이었지만, 어미, 아비의 뜨거운 피를 물려받은 그녀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조신하게 한학이나 배우다 누군가의 '지어미'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거역한다. 아녀자가 무슨 '나라 걱정'이냐는 할아버지의 걱정이 무색하다. '애기씨'라는 존재로 모두에게 인정받는 양반이라는 사회적 신분이 무색하게 그녀가 스승으로 받드는 건 '사냥꾼'의 아비를 둔 포수이고, 바느질 대신 총을 든다. 전근대와 근대의 격동기에 그들은 그렇게 '집단'에서 벗어난 '개인'으로 각자 자신의 운명 앞에 선다. 



조선이라는 신분제 사회에서 '이탈'된 그들은 그래서 '근대적 개인'으로 자각하고 그로부터 '개인'과 '국가'에 대한 질문에의 토양에 던져지게 된다. 그저 양반님네에게 당해는 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라, 버림받음에 대한 '자각', 양반 사회의 일원이 아니라, 무너져 가는 조국에 대한 비감함이 그들을 '자각된 개인'으로 '국가' 앞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지킬 가치조차 없는 '국가'를 지켜야 하는가. 나를 지켜주지도 않는 '국가'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더 나아가 '국가'란 무엇인가? 이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김은숙 작가는 한껏 '드라마틱한' 인물들을 포진시켰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고애신이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선뜻 든 것과 달리, 유진과 구동매는 '자기 코가 석 자'다. 그들의 총과 칼은 자신을 버티기 위한 방패이다. 

하지만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유진과 구동매는 원치 않았지만 자신의 '존재'을 본다. 그리고 그 '자신'을 버렸던, 그래서 돌아올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던 '조국', 그럼에도 그 속에서 득세하는 '적'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총을 든 고애신과 만나며 새로운 질문에 봉착할 예정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고전적이지만, 당대적이다. 우리가 지난 정권에서 던졌던 질문과 일맥상통한다. 4월의 바다에서 비롯된 질문들이 공동체의 존재와 의무에 대한 여러 드라마들을 탄생시켰듯이, <미스터 선샤인> 역시 그 계보에 서있는 '후일담'이다. 단지, 그 질문이 '공동체'의 당위에 대한 의문을 넘어, '나'로 바통이 넘겨졌을 뿐이다. 그러나 언제나 '로맨틱한 사랑' 이야기에 재주가 뛰어났던 김은숙 작가에게는 이 새로운 도전이 시련이 될 수도 있다. 작가가 그려내는 역사는 성기고, 뜻밖에도 호흡은 느리며, 연기는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과연 기 '시련'을 또 한번 '극복'해 낼 것인지, 역시나 김은숙이라는 '신화'는 이번에도 가능할 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 7. 16. 16:29

장미여관의 2013년 곡 <서울살이>는 '만만치가 않네 서울 생활이란게 이래가꼬 언제 집을 사노'란 가사로 시작된다. 이 가사에서 보여지듯 우리가 어느 곳에 터를 잡고 성공적으로 살아냈느냐의 기준이 되는 건 '집'이다. '서울'에 집 한칸 가지는 게 서울 살이의 상징이 되듯. 여전히 '서울'에서 '집'을 가지는 건 '요원'한 일이다. 그런데, 서울을 벗어나면, 아니 같은 서울이라 하더라도 '빈집'이 수두룩하다면? 한 쪽에서 자기 집을 가지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빈집'이 늘어만 가고 있다. 바로 이 '집'의 불균형, '빈집'의 이야기를 7월 12일 ebs다큐 시선 <빈집의 두 얼굴>이 다룬다. 




노후되는 구도심, 늘어나는 빈집들
다큐가 시작되는 곳은 부산 영도구.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닮았다 입소문이 난 흰 여울 문화 마을에도, 아기자기한 벽화가 골목골목 해돋이 마을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진 마을에서 한 블럭만 지나면, 낮에도 인기척을 찾기 힘든 '빈집'들이 즐비한 동네로 들어서게 된다. 

19세기말 우리나라 최초의 조선소가 세어진 이래 '조선소'를 중심으로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이던 곳, 하지만 조선 산업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이곳엔 이제 그저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좌판을 벌인 노인들과 아이들이 없어 이제 곧 문을 닫게 된 교복 상점처럼 조만간 이곳을 떠날 상인들만이 남아있다. 관련 공무원들과 함께 걸어가는 골목골목엔 사람 대신 차지한 고양이들과 쓰레기들이 차지한 빈집들. '공폐가'가 즐비하다. 영도구에만 700여세대가 넘고, 아파트까지 합산하면 1000 채가 넘는다. 2015년 기준으로 부산에만 이런 '빈집'들이 4000여 채에 이른다. 

길 건너에는 고층의 아파트가 지어지는데 바로 길 건너 편에는 밤이 되도 불빛이 밝혀지지 않는 어두컴컴한 동네가 공존하는 곳, 사람들이 모여드는 신도심과, 사람들이 떠나가는 구도심의 부조화, 하지만 이건 비단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집 얻기 힘들다는 서울에도 '해방촌'이 그렇고, 도심을 떠나 전국으로 시선을 돌리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농촌과 중소도시를 중심으로 빠르게 늘어가는 빈집, 2050년에 이르면 전체 가구의 10%에 이를 전망이라니 심각하다. 



영도구의 강정원씨, 한때는 원양 어선을 타던 선원이었지만 배를 타던 중 다리에 마비가 온 후 적절한 치료를 제 때 받지 못해 한 쪽 다리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처지다. 어머니와 함께 살던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다섯 가구가 살던 집에 이제 홀로 남았다.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해 다른 가구들이 남긴 쓰레기와 같은 짐을 치우지도 못하고, 쓰러져 가는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며 한때는 이웃으로 벅적이던 하지만 이제는 수풀이 우거진 빈집 아닌 빈집을 홀로 지키고 있다. 영도구에서 가장 오래된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아흔이 넘은 노인이 관절염이 걸린 다리를 절둑이며 물조차 나오지 않는 공동 화장실을 이용하며 낮에도 어두컴컴한 아파트를 지킨다. 

배에 붙은 해조류와 녹을 닦아내는 '깡깡이'로 아이를 키워냈던, 그래서 깡깡이 마을로 불리던 동네엔 이젠 다 자란 아이들은 떠나고, 늙은 어머니들만 드문드문 빈집을 지키고 있다.젊은이들은 일자리 때문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떠나고, 노인들만 남아 지키던 구도심, 그마저도 노인들이 세상을 떠나면 고양이들의 차지가 되어버리는 집들, 우리 사회의 급격한 노령화는 '공폐가'의 증가율을 급격하게 높인다. 구청 등에서 예산을 들여 정리를 하고는 있지만 한 채에 적게는 몇 천만원에서 많게는 억대를 넘어서는 철거 비용에 늘어나는 빈집의 수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렇다고 낡은 집만 '빈집'이 되는 건 아니다. 창원 시의 경우, 신도시 전체의 규모에 맞먹는 아파트 단지가 지어지고 있지만 거의 단 한 집도 분양이 되지 않았다. 여전히 '건축붐' 시절의 아파트 산업 논리로 우선 짓고 보자는 식의 건설 방식이 또 다른 '빈집'의 이유가 된다. 

빈집의 딜레마 
그러면 당연히 이런 질문이 던져진다. 그 빈집들 놀리지 말고 세를 주거나, 농촌의 경우 귀농하는 도시인들에게 대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바로 여기에 '빈집'의 딜레마가 있다. 사람이 살지 않은 지 오래 되어 쓰레기 더미가 쌓여가고 동네 고양이들의 귀곡성에 이웃 사람들이 밤잠을 설쳐도, 그 '빈집'은 '빈집'이 아니다. 즉, 현재 사는 사람은 없어도 엄연히 소유주가 있는 집들이 많다는 것이다. 때로는 주인조차 찾기 힘든 집들도 있지만, 자손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들은 엄연히 '사유재산'이다. 

그래서 도시의 원룸을 떠나 넓은 곳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어 귀농을 결심한 젊은 부부는 그 많은 '빈집'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안식처'를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빈집이지만 다 소유주가 있던 집들은 막상 '귀농'을 위한 이 젊은 부부에게 매번 '거절'을 했고,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겨우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빈집'이지만 소유주가 있는 집들은 '방치'되었지만, 국가조차 함부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개인의 소유물'이다. 언젠가 돌아올 지도 모른다 '방치'해둔 고향집이 귀농인들에게는 넘볼 수 없는 '남의 집'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소유라는 이유만으로 방치한 채 관리되지 않은 집들, 하지만 그 집에 쌓인 쓰레기와 그 곳에 모여든 고양이들의 동물과, 그들의 분면들과 거기에 몰려든 파리, 모기 등은 그저 '빈집' 이상으로 이웃들에게 '민폐'가 된다. 문제는 그런 '위생상'의 문제점만이 아니다. 부산 영도구에서 벌어졌던 성폭력 전과자였던 김길태가 여중생을 공폐가에 납치하여 범죄를 저지르고 시신을 빈집의 물탱크에 유기한 채 다시 '빈집'들을 돌아다니며 피신했던 사건처럼 이들 '빈집'들이 '범죄'의 '온상'이 될 여지가 크다는 점이다. 즉, '개인의 소유물'이라는 '사적 재산'이 '관리'되지 않았을 때, 그 피해가 고스란히 주변 이웃과 사회에 전가된다는 점에서, 과연 '공폐가'의 소유 문제를 '개인'의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가를 다큐는 <빈집의 두 얼굴>을 통해 묻는다. 

최근 우리 사회에 '화두'가 되고 있는 토지 공개념은 이 경우에도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토지 공개념이란, 토지의 소유, 처분에 대한 권리를 토지의 공적인 특성을 고려하여 공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이 토지 공개념은 우리 사회에서는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적 급등을 막기 위한 정부의 통제를 위한 '사상'으로 대두되고 있지만, 그뿐만 아니라, 공폐가의 경우처럼 개인의 사유 재산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주변과, 사회가 불이익을 받을 때 또한 '공공재'로서의 '토지'의 개념을 고려해 보아야 할 지점이 된다. 실제 외국에서는 빈집이 방치되고 관리되지 않는 것을 막기 위해 각종 제제 법안들이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급격한 노령화에, 사회적 제도들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노령화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서 일본의 '빈집 쇼크'가 남의 일이 아니지만, '집'을 '재산'으로 여기는 우리의 사고 방식이 공폐가의 '황폐화'를 조장한다. 

실제 나주를 비롯한 지방에서는 역사적 유산이 그대로 남아있는 오래된 빈집들을 지자체가 사들여 '문화 마을'로 되살려내는 복원 계획이 현실화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들보, 1930년식의 건축 양식 등, 각 시대 별로 지어진 집들이 그 역사를 고스란히 남긴 채 '문화'의 공간을 탈바꿈한다. 그러자 그곳에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들고, 심지어 서울에서 내려온 젊은 예술가들이 찾아든다.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쓰레기 더미'가 될 빈집이 유적과 문화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8. 7. 14. 00:06
고교 동창생인 여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우리 드라마에서는 낯설지 않은 소재다. 예전 어머님들 세대에서 '여고 동창회'는 살림살이가 기반도 좀 잡고 '다이아 반지'도 끼고, '악어 핸드빽'도 들 수 있을 때쯤 나가는 곳이다. 그 곳에 나가 내가 이제는 이렇게 좀 살만하다며 살아온 역사에 대해 '자존감'을 보상받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나 교복이라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공산품 찍어내는 듯한 획일적인 교육을 받던 그 시절 교실 안에서 동일한 존재로 취급받던 학우들의 후일담은 드라마틱해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드라마에서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서사'는 잊을만 하면 다시 한번 등장하는 '익숙한 소재'이다. 



적인가!
얼마전 종영한 JTBC의 <미스티>는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적나라하게 다룬 드라마였다. 극중 주인공인 고혜란(서은주 분)의 삶에 불현듯 등장한 여고 동창생 서은주(전혜진 분)는 그때도 지금도 고혜란의 발목을 잡는다. 아니 그건 고혜란의 입장에서이다. 그때도 지금도 서은주에게 고혜란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를 낚아채가버리는 '연적'이었을 뿐이다. 드라마는 고등학교 시절 하명우(임태경 분)를 사이에 두고 갈등 관계였던 두 사람을 십 여년의 세월을 넘어 다시 한 남자 이재영(고준 분)을 사이에 두고 조우시켜 드라마적 갈등을 극대화시킨다. 

이렇게 고등학교 시절 동창생의 관계가 시간이 흘러 '연적'의 관계로 증폭시키는 경우는 빈번했다. 2007년 방영된 김수현 작가의 치명적인 멜로 <내 남자의 여자(2007)> 역시 고등학교 동창인 두 여성을 등장시킨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던 이화영(김희애 분)는 미국에서 이혼을 하고 피폐한 모습으로 고국에 돌아와 동창생인 김지수(배종옥 분)에게 의지하다 그녀의 남편을 유혹하게 된다는 서사야 말로 우리 사회에 고정 관념으로 자리 잡은  '여고 동창생'의 애증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같은 해 방영된 <강남 엄마 따라잡기>는 교육열을 소재로 하여 아이의 교육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한 여고 동창생 현민주(하희라 분), 윤수미(임성민 분), 이미경(정선경 분)이 아이들을 내세워 '대리전'을 치열하게 벌인다. 이렇게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의 갈등에서 '관건'이 되는 건 그때는 별볼일 없던, 혹은 나보다 공부도 못하던 아이가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니 나보다 '잘나가고 있더라'에서 발생하는 '시기와 질투이다. 2012년 방영된 <청담동 앨리스>에서 고등학교 시절 얼굴은 이뻤지만 능력은 없던 서윤주(소이현 분)가 청담동 며느리가 되어 '갑질'을 하자 이에 당하던 한세경(문근영 분)이 자신도 청담동에 입성하기 위해 '시계 토끼'를 잡고자 하는 것처럼 말이다. 즉 이들 드라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만큼 우리 사회 속 '여여 갈등'의 전형으로 여고 동창생의 관계를 '전형화'시키면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동지인가.
중년의 여성들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의 관계가 '갈등'의 기폭제로 쓰이는 것과 달리, 그 이후 세대들이 주축이 되는 드라마에서 여고 동창생들은 '갈등'은 있되, 주로 세대의 전형으로 활용된다. 즉, 이는 이전의 드라마들이 여성들간의 관계를 '여여 갈등'의 관계로 풀어가는 반면, 이후의 세대에서 '여성의 적이 여성이 아니라 동지'라는 시각으로 '진화'되어왔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이렇게 이들 드라마의 여고 동창생을 같은 시절을 공유한 같은 세대이다. 같은 시대의 음악과 놀이와 문화를 가진 세대 공감을 바탕으로, 이제 '연대'하여  '현실'의 어려움을 함께 겪어가는 '동지'들이 되었다. 



2014년 JTBC를 통해 방영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39살이 된 여고 동창생 세 명을 전면에 내세운다. 한때는 꿈을 나누던 한반 친구였던 소녀들은 이제 이혼한 싱글맘(윤정완- 유진 분)에, 골드 미스의 대표가 되어버린 노처녀(김선미-김유미 분)에,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전업주부(권지현-최정윤 분)가 되어 동시대 30대의 '리얼 라이프'를 구현한다. 

시한부 드라마 작가 이소혜(김현주 분)와 톱스타 류해성(주상욱 분)의 달콤 애절한 연애담을 그린 JTBC 2016년작 <판타스틱> 역시 여주인공의 인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다. 그 시절의 첫사랑과, 그 시절 그녀의 친구들이었던 여성들이 이제 서른 중반이 되어 다시 만나 그 시절의 사랑과 우정을 되살려 시한부로 인생의 종점에 이른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 2017년 MBC를 통해 방영된 <이십세기 소년소녀> 역시 서른 중반이 된, 하지만 여전히 이십세기의 소녀와 같은 감성을 지닌 여고 동창생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려낸다. 



웹툰 원작인 tvn의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화제성과 시청률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며 순항하는 가운데, 같은 수목 드라마로 또 한편의 웹툰 원작 드라마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웹툰 플랫폼 KTOON에서 호평을 받으며 시즌 3까지 이어지고 있는 <당신의 하우스 헬퍼>가 동명의 드라마로 KBS2를 통해 방영을 시작한 것이다. <김비서가 왜 그럴까>가 동명의 원작 속 인물들을 그대로 살려낸 것과 달리, 남자 하우스 헬퍼라는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오되, 정리가 필요한 여성들의 에피소드에 집중했던 웹툰과 달리 미니 시리즈의 호흡을 살려내기 위해 극중 여성들을 '여고 동창생'의 관계로 묶어낸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판타스틱>, <이십세기 소년소녀>가 서른 중후반의 여성들을 전면에 세운 것과 달리, <당신의 하우스 헬퍼> 속 여고 동창생들은 이제 스물 중반, 바로 우리 사회 가장 살기 힘들다는 88만원 세대의 여성들이다. '온갖 잡다한 일을 시킬 때는 가장 필요한 사람 취급하고, 정작 중요한 일에서는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드라이조차 사치'인 '인턴' 임상아(보나 분)과 친구 약혼식에 반품을 가정하고 명품 옷을 입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현실은 목걸이에 비즈나 꿰며 연명하는 백수 윤상아(고원희 분), 명색이 네일샵 사장이지만 유지비에 알바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자영업자 한소미(서은아 분), 세 명이 주인공들이다. 고등학교 시절 언젠가 함께 살자고 약속하던 '몽돌 삼총사'였지만 갑자기 가정 형편이 어려워진 상아의 오해로 세 사람은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십여년 아버지가 남긴 집을 인턴 형편으로 지키지 못해 세를 놓은 상아의 집에서 세 여고 동창생은 다시 조우하게 되면서 이 시대 이십대 후반 여성들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펼쳐질 예정이다. 
by meditator 2018. 7. 1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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