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화를 활용한 설치 디자인 전시회에 다녀왔다. 커튼까지 쳐진 전시관,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 있길래? 하고 첫 발을 들여놓은 순간 흠씬 다가온 숲의 내음, 꽃의 향기. 마치 '그루누이'가 채집한 향기처럼 자연의 냄새를 채집하여 가둬 둔 그 전시회 공간에서 자연에서 '냄새'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달았다. 우리는 살아가며 의식하지 못하지만 '냄새'로 인해 희노애락을 겪는다. 미세 먼지로 가득한 도시가 뿜어내는 매캐한 냄새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그 혼탁한 공기를 타고 오는 향긋한 커피 볶는 냄새에 어느새 마음이 풀리곤 한다. 허기진 배를 달래며 집에 들어섰을 때 반기는 푸근한 김치 찌개 냄새만큼 안온한 행복의 내음이 있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맛은 언제나 '향'과 함께 우리의 머릿 속에 기억된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이 21세기의 문명이 만들어 내는 향과 맛에 기만당하고 있다면? 지난 5월 21, 22일 2회에 걸쳐 방영한 <ebs 다큐 프라임>은 바로 우리를 배신한 '문명의 맛과 향'에 대한 고발이다. 






음식도 중독이 된다. 
키만 190cm가 넘는 박영재씨는 아마도 개그맨 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람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덩치만큼이나 '대식'인 그의 식성이다. 단번에 3개는 끓여야 직성이 풀리는 라면, 하지만 라면이 끝이 아니다. 라면 먹고 앉기가 무섭게 초코바 두 개를 먹어치우더니 그것만으로 부족했던지 초코 아이스크림 한 통을 퍼먹는다. 그가 하루 동안 먹는 칼로리는 대략 6000, 성인 한 사람이 하루 동안 먹을 양을 한 끼마다 먹고 있다. 


박씨만이 아니다. 보기에는 날씬한 민보라 씨는 끼니마다 햄버거로 때운다. 그런데 한 개가 아니다. 무려 서너 개씩. 그것만으로도 포만감이 들지 않아 콜라 등으로 허기를 달랜다. 늦은 밤 귀가한 윤현섭 씨는 피자를 시켜 우선 콜라 부터 한 잔 벌컥벌컥 마신다. 민씨나 윤씨의 경우 햄버거나 콜라를 끊어보려 했지만 식은 땀이 나거나 울렁증이 생기고 신경이 예민해지는 등 부작용을 겪는다. 햄버거를 먹고, 콜라를 마셔야 비로소 스트레스가 풀리는 상태, 중독이다. 



그런데 이들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다. 음식을 대했을 때 중독과 쾌락을 담당하는 뇌의 신경 중추의 혈류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중독,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중독인 줄 인지하지 못하는 이 '음식 중독'에 전세계인의 19.9%이 걸려있다. 더 심각한 건, 예일대가 만든 음식 중독 문진표를 작성한 대학생 103명 중 무려 1/4에 해당하는 26명이 중독 증상을 보이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 맛있어'하다, '다 먹어치워야 해'를 지나, '먹어야 스트레스가 풀려'를 넘어 폭식의 경지에 이르는 '음식 중독', 그런데 대부분 '음식 중독'을 일으키는 건 '가공 식품'들이다. 

영양 전문가 헐먼 박사는 이렇게 중독성이 강한 패스트 푸드가 담배나 약물과 다를 바 없다 경고한다. 식품의 영양소에 등급을 매긴 ANDI 지수 (Aggregate Nutrient Density Index) 그 중 칼로리 당 미량의 영양소인 '파이토 케미컬'의 분포가 늦은 콜라, 흰 빵 등은 '과식'을 부르고, 식욕을 통제하기 힘들도록 한다. 바로 오늘날 '음식 중독'의 주범이다. 



야생 자원학 전문가인 프래드 프로벤자 교수에 따르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을 먹이의 향을 통해 자신에게 필요한 향을 찾아내, 자신이 먹을만한 것을 골라 먹는 능력을 발달시켜 온 '영양 지혜'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의 '과식'과 '비만'은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향의 기만'이다. 발달한 현대의 음식 산업은 향을 통해 음식을 택하는 인간의 기호를 속인다. 과일이 아닌데 과일 향이 나는 하지만 설탕물과 불과한 음료수들처럼 합성향들이 인간의 '영양 지혜'를 뭉개버린다. 가짜 향과 가짜 맛의 유혹에 넘어가 버린 것이다. 가공 식품이 매료시키는 향들은 인간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버린다. 콜라, 아이스크림, 햄버거 등 '인공적으로 합성하거나, 도정 및 정제를 거친 곡류로 만들어진 설탕, 흰 밀가루, 백미 등의 '정제 탄수화물'과 영양없는 향을 결합 시켜 인간의 코와 입을 교란시킨다. 

맛과 향이 왜 중헌디? 
그렇다면 고유의 향은 어떤 것일까? 그것을 찾기 위해 다큐가 찾아간 곳은 '토종 씨앗'을 연구하는 사람들. 지난 10여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600여 종의 토종 씨앗을 모은 변현단 씨, 그가 키운 토종 씨앗으로 토종의 퇴비를 써서 키운 작물들은 비롯 모양이나 수확량은 작지만 맛은 비교 불가이다. 

토종과 다품종 개량종 그건  50% 오렌지 쥬스와도 같다. 오렌지 쥬스 원액에 물을 섞어 희석시킨 50% 쥬스. 우리는 이것도 오렌지 쥬스라 부른다. 하지만 오렌지 100%의 맛과 향에 비교할 것인가. 그렇듯 더 많이, 더 크게를 지향한 농업의 발전이 낳은 건, 맛과 향이 떨어진 '본연의 향미'를 잃은 음식들이다. 



그런데 맛과 향이 뭐길래? 플로리다 주립대학은 토마토 278종을 실험했다. 토마토에는 수 백가지의 맛과 향을 지닌 화학 물질이 있고. 그 중에서 향을 내는 건 30 여종의 화학 물질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바로 이 '향'이 '필수 영양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암을 예방하고 식욕을 억제하며, 건강에 도움을 주는 생리 활성을 가지고 있는 식물성 화학 물질, 파이토 케미컬 성분이 '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향이 좋다는 건, '저는 당신 몸에 좋아요'라는 신호로, 많은 영양분을 품고 있는 건강한 열매라는 것을 연구 결과는 밝힌다. 

그런데 대량 생산을 위한 품종 개량은 바로 이 '파이토 케이컬'의 영양소를 지닌 향을 '희석'시킨다. 희석된 오렌지 쥬스처럼 부피는 늘고, 생산량은 증가하지만 파이토 케미컬과 미네랄이 부족해지고, 그 자리를 수분과 탄수화물이 채워 '영양'의 손실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다큐는 실험을 해본다. 똑같은 포항초, 하지만 농약을 쳐서 하우스에서 한 달 속성 재배를 한 것과 노지에서 겨울을 이겨낸 두 같은 종자의 포항초, 우리도 알다시피 겨울 바람을 이겨낸 포항초가 당도도 높고 향과 맛이 좋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파이토 케미컬 성분의 페놀리그난과 플라노보이드 성분에서 노지의 포항초가 압도적이다. 결국 햄버거와 콜라, 피자, 라면 등을 아무리 먹어도 포만감을 채울 수 없는 건 바로 우리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의 부족 때문이다. 


내 몸이 진짜로 원하는 맛과 향이 바로 다이어트 
그렇게 본연의 향기와 맛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영양소를 알리는 '신호등'과도 같다. 다큐는 1부 <건강을 부르는 향>에 이어, 2부 <중독을 부르는 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영양 지혜'를 다룬다. 우리는 굶주리지 않지만 영양소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큐의 주장이다. 먹방을 넘어 대식 전성 시대에 대한 도전이다. 

제주시 한경면 조수 1리 9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20여 명이나 되는 장수 마을, 이곳의 노인들은 집 한 켠 우영밭(텃밭)에서 자라나는 채소와 감자, 고구마 등으로 밥상을 꾸린다. 쌀이 귀한 그 옛날부터 어르신들의 밥에는 보리 등의 잡곡과 검은 콩이 빠지지 않는다. 결국 자연에서 길러진 신선한 먹거리가 '인간의 건강'을 담보하는 것이다. 감은사 우관 스님은 '자연은 인간의 '공생' 파트너'라 정의한다. 사찰 마당에서 마구 자라나는 제철 풀, 그곳은 자연식 전문가인 스님의 보물 창고이다. 유명 셰프라고 다를까. 일식 요리사 유희영 셰프는 말한다. 좋은 재료에서 훌륭한 요리가 나온다고. 

텃밭을 만들고, 야생 풀이 자라는 자연으로 떠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중독'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서른 무렵 결혼 당시 당신은 당신의 자녀들이 커가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암울한 선고를 들었던 160KG의 안소니 마시엘로는 식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 50이 넘은 지금 아이들과 함께 농구 게임을 즐기는 삶을 누린다. 채식이냐, 대사 증후군에 당뇨, 고혈압 진단을 받은 개그맨 박영재씨는 한 달 정도 '재습관화'의 과정을 통해 음식 중독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다. 우선 샐러드 등으로 배를 채우고, 외식을 하더라도 콩비지 등 패스트푸드가 아닌, 가급적 맛이 진하지 않은 음식으로 끼니를 꾸려간다. 

한 달이 지난 후 박영재 씨는 놀랍게도 50대의 생체 나이를 본연의 서른 중반으로 돌려놓았다. 몸무게도 줄었고. 무엇보다 채소라면 질색하던 그가 '토마토'의 다양한 맛에 눈을 떴다. 2006년 <슈퍼 차지 미 SuperCharge Me>의 주인공인 제나 노우드는 자연 생식으로 건강을 되찾았다. 채식이냐 육식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공 식품을 먹어 무뎌진 내 몸의 감각을 되살려, 온 몸의 세포에 영양이 퍼져나가는 그 느낌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제나는 주장한다. '가짜'로는 만들 수 없는 느낌. 가짜 맛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 내 몸이 원하는 진짜 맛과 향을 찾아내는 '영양 지혜'의 회복. 그것이 진짜 '다이어트'의 비결이다. 

by meditator 2018. 6. 8. 00:40

구악의 상징이었던 전 대통령이 '헌법 재판소'라는 사법적 절차를 통해 '탄핵'이 결정되며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개헌'이 논의 되며, 사법 정의 실현이 '적폐 청산'의 시금석으로 여겨지는 세상, 그런 현실의 반영때문일까.  tvn의 <무법 변호사>, mbc의 <검법남녀>, jtbc의 <미스 함무라비>, kbs2의 <슈츠>, 그리고 얼마전 종영한 sbs의 <스위치-세상을 바꿔라(이하 스위치)> 등, 각 방송사, 각 요일대 별로 '법' 관련 드라마들이 포진되어 있다. 적어도 시청자들은 이들 드라마 중 한 드라마를 매일 만날 확률이 높다. 




범람하는 법 관련 드라마들
물론 '법'을 다룬다고 해서 천편일률적이지는 않다. tvn의 <무법 변호사>는 '법'으로 싸우는 변호사라 주인공인 봉상필(이준기 분)이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드라마를 견인하는 건, 그와 다수의 조폭들의 격투씬이요, 법정에서 정의를 실현하도록 하기 위한 '봉상필'의 '작전'들이다. '법'을 내세우지만, '무법'적 요소가 범람하는 아이러니한 '법' 드라마인 셈이다. 지난 5월 17일 종영한 <스위치>의 경우 '스위치'를 온오프하듯 자유롭게 이 사람 저 사람으로 사칭을 하는 사기꾼이 얼떨결에 검사가 되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무법 변호사>와 같은 변칙 플레이의 궤도에 놓여있다. 미드 원작으로 리메이크 된 kbs2의 <슈츠> 역시 대한민국 최고 로펌의 전설적인 변호사와 함께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가짜'를 변호사로 등장시켜 '법정' 드라마를 변주시킨다. 

반면, 서울 동부지방 법원 부장 판사로 이미 동명의 저서를 펴낸바 있는 문유석 판사가 극본을 쓰고 있는 jtbc의 <미스 함무라비>는 앞서 두 드라마와는 정 반대로 '법원'을 무대로 '판사'들의 교과서와 같은 내용을 현장감있게 그려내고 있다. mbc의 <검법 남녀>는 검사와, 법의관을 파트너쉽 관계로 묶어내고, 검시의 현장과, 그에 뒷받침되는 일선 법 현장을 '메르스 사태', '엄여인 사건' 등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현실감있게 풀어낸다. 

그러나 제 아무리 설정이 다르고, 전개가 다르다 해도 매일 매일 '법' 드라마가 방영되는 현실은 제 아무리 현실을 반영한다 해도 과하다. 그건 곧 그만큼 현재 우리 드라마 계가 '범람하는'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콘텐츠의 빈곤을 스스로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제 아무리 사법적 정의가 중요하다 해도 대한민국 전체 직업군 중에서 '법' 관련 직업군이 차지하는 비율에 비해 드라마 속 전문직으로 등장하는 '법' 관련 직종은 과도하다. 시대적 흐름이라 해도 '엘리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드라마계의 현실이다. 사기꾼이던지, 무법 액션가이던지, 혹은 정의로운 판사던지, 법의관이던지, 결국 그 무대는 '법정'이고, 그 '정의'의 실현은 '법'을 통해 판가름나는 이들 드라마는 '법'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효과가 극대화되는 반면, 역설적으로 그에 대한 '피로도' 역시 증가시킨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제 아무리 이준기가 펄펄 날고, 정재영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메스를 휘두르고, 천재 박형식이 술술 법전을 읊어대도 시청자들의 눈에 그 나물에 그 밥처럼 보이는 '자충수'를 더는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의로운 여성 법관들
그런데, <슈츠>를 제외한 이들 법 관련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있다. 바로 여성 법조인들이다. 지난 1월 15일 사법 연수원 수료식, 수료한 연수생 171명 중 여성이 70명으로 40.9%를 차지한다. 지난 해에 비해 29.4%에 비해 그 증가폭이 현격하다. 그런 현실을 반영한 탓일까. 드라마 속 여주인공들은 '법복'을 입고 활보한다.

또한 이들 '법복'을 입은 여주인공들은 '정의'의 상징이다. 그들은 의로우며, 그 의로움을 실현하는 도구로서 '법'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거침이 없다. 그들이 '자산가'의 자제(검법남녀 은솔 역의 정유미)이거나, 지역 유지 판사의 도움으로 변호사가 된 사진관 집 딸(무법 변호사 하재이 역의 서예지)이거나, 재래 시장통의 친근한 딸(미스 함무라비 박차오름 역의 고아라)이거나 상관없다. 그들은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 약한' 법원을 꿈꾸며, 무한한 EQ를 작동하여 사건에 감정을 이입하며,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마다하지 않는 열혈 '법조인'들이다. 

'권위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않는 '깨시민'의 전형같은 이들은 그런 '정의감'으로 인해 사건의 중심에 거침없이 뛰어든다. 하지만, 그녀들의 무한 EQ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경험은 그들은 때로 그녀들을 직업적 혼돈에 빠뜨린다. 마음이 앞서는 <검법남녀>의 은솔 검사는 그로 인해 '메르스'로 추정되는 검시실에 갇히는가 하면, 사건 현장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한다. <미스 함무라비>의 박차오름은 시장통 사람들의 민원에 귀 기울이다 법원 앞 1인 시위하는 여성의 사건에서 공정성의 잣대를 놓치기도 한다. 어렵사리 공부해 겨우 변호사가 됐지만 법저에서 남편의 학대에 정당방위를 한 여성의 억울한 판결에 분노하여 주먹이 앞서는 바람에 '변호사' 자격에 위기를 겪기도 한다. 



그렇게 '그녀'들은 '법'의 정의로운 실현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 그 실현의 과정에서 고뇌하고 성장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그녀들이 벌인 일들이 그녀들을 민폐로 만들기도 하고, 감정적이며 저돌적인 캐릭터의 한계 속에 가두기도 한다. 분명 드라마 속에서 그녀들은 '법복'을 입은 전문적 직업인들이지만, 그녀들의 캐릭터가 빛나는 상황은 그녀들의 '감정'을 통해서인 경우가 아직은 빈번하다. 외려 법복을 입지 않았지만 <슈츠> 속 홍다함(채정안 분)과 김지나(고성희 분)가 전문성에서는 더 빛을 발한다. 

거기에 그녀들이 '성장'하기 위해 '남성'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맹목적인 정의감에 불타던 <무법 변호사>의 하재이는 봉상필(이준기 분)을 통해 어머니 죽음의 비밀을 알고 그녀가 그토록 존경하던 차문숙 판사, 그리고 그녀가 만든 괴물 기성을 향해 법의 칼날을 겨눌 것이다. <검법남녀>의 감정만 앞서던 은솔에게 때론 배신감을 안기기도 하지만, '법'의 길에서 '바로미터'가 되는건, 그 어느 경우에서도 '법'의 진실을 향해 비켜서지 않는 법의관 백범(정재영 분)이다. 의지과 감성이 앞서는 박차오름이 전문적인 판사로 성숙하기 위해서는 노회한 한세상(성동일 분)의 경험과 선배 임바른(김명수 분)의 배려가 전제된다. 
정의로운 여주인공을 내세웠음에도 여전히 '감성적'인 여성'과 '이성적'인 남성의 구도의 드라마들이 서로 다른 드라마인데도 마치 같은 드라마인양 남여 주인공의 성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되풀이 된다는 점이 아쉽다. 
by meditator 2018. 6. 5. 16:14

<미스트리스>는 2008년에서 2010년까지 영국 BBC One에서 방영된 드라마이다. 이걸 2013년 미국 ABC에서 시즌제 드라마로 리메이크, 현재 시즌4까지 방송 완료되었다. 그리고 2018년 OCN을 통해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6월 3일까지 12부작으로 방영되었다. 현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관능 미스터리 스릴러'를 표방한 이들 드라마는 ABC 드라마의 경우 '미국판 사랑과 전쟁'이라는 입소문을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몰이를 하였다. 그렇다면 12부작으로 완료된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어땠을까?




미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설정의 한국판 
한국판 <미스트리스>의 각 캐릭터 상 설정은 흡사했다. 알리사 밀라노가 연기한 사바나 역, 잘 나가는 변호사이며 남편이 쉐프였던 이 캐릭터는 역시나 전문직 여성이었던 한정원(최희서 분)과 역시나 쉐프인 그녀의 남편 황동석(박병은 분)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들 부부는 미드 원작에서처럼 불임으로 고민 중이며 같은 학교 선생님과 한번의 정사로 아빠를 알 수 없는 아이를 가지게 된 것 역시 동일한 설정이다. 

우리나라 배우 김윤진이 연기했던 정신과 의사 카렌 킴 역할은 한국판 <미스트리스>에서도 역시나 같은 정신과 의사이며, 환자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감정적 혼란을 느낀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결혼을 하지 않고 자유분방한 성관계를 즐기는 부동산 중개업자 조슬린(제이스 맥클리안 분) 캐릭터 역시 비슷한 싱글 라이프를 즐기는 로펌 사무장 캐릭터 도화영(구재이 분)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은 남편이 죽은 이후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아가는 워킹맘 캐릭터이며, 그런 그녀의 앞에 남편의 여자가, 심지어 그의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다는 설정 역시 원작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비슷한 설정, 그리고 원작이 표방한 '관능'이라는 방점에 충실하기 위해 드라마의 초반 선정적인 베드씬을 나열하며 이 리메이크 작도 원작처럼 적나라한 성인들의 속살을 드러내는 이야기임을 가감없이 보여주려 했던 <미스트리스>, 하지만 12부작 한국판 <미스트리스>에서 미드의 흥미진진함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다. 왜? 설정도 비슷하고, 서사도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여성들의 이야기란? 
그건, '여성'들의 이야기를 표방했음에도, 그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고려'가 부족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우선 미드 원작에서 드라마의 중심적 스토리를 이끌고 가는 건 성공한 변호사였던 사바나 캐릭터였다. 이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뜻밖의 외도를 통해 가지게 된 아이, 하지만 그녀는 그 아이를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같은 설정이지만 한국판 <미스트리스>는 어땠을까? 영화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가 무색하게, 드라마<미스트리스>에서 최희서가 분한 한정원은 '전문직' 여성이었지만 학교에서 그녀는 자신만만하지도 당당하지도 않은 채 늘 불안하고 일에 치이고, 학생들에 치이는 심지어 정신과 상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여성이었다. 

우리나라 배우 김윤진이 연기했던 카렌 킴 역의 정신과 의사는 한국판에서도 같은 직업이지만 드라마 내내 신현빈이 연기한 김은수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에 당당한 여성이라기 보다는 불륜이었던 선생님과 그 아들 사이에서 불안에 떨며 직업정 정체성조차 모호한 캐릭터로 보여졌다.

이렇게 원작과 다르게 직업 여성의 주체적인 당당함 대신 그녀를 둘러싼 사건, 사고에 휩쓸려 어쩔줄 모르는 여성의 불안함과 불안정함이 증폭된 캐릭터들도 캐릭터들이지만, 무엇보다 한국판 <미스트리스>가 '여성'이라는 주체성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건, 미드에서 사바나와 카렌 킴이 주도해가는 서사와 달리, 오랜만의 복귀작이 된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이 한국판 <미스트리스> 서사의 중심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은 후 아이와 함께 사는 장세연,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모, 그런데 알고보니 남편의 여자, 죽은 줄알았던 남편의 생환, 그리고 그 주변을 배회하는 역시나 정체가 모호한 딸 아이 유치원의 학부모라는 한상훈(이희준 분). 장세연은 12부작 내내 그녀가 원치 않는 사건에 본의 아니게 얽히며 자신과 딸의 운명조차 파국의 상황까지 휩쓸려 가는 인물이다. 

수동적인 캐릭터 장세연이 극의 중심에 놓여지고, 정작 주체적인 한정원과 김은수가 주변 인물로 변형되며 <미스트리스> 전체가 원치 않는 사건에 휘말려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린 여성들의 양상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결국 절대 악 김영대(오정세 분)의 보험 사기극에 휘말린 여성들의 잔혹사로 귀결되었다.



미스트리스란 단어에는 이율배반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지배권을 가진 여자라는 뜻과 동시에 다른 여자의 남편과 불륜의 관계를 가진 여성이라는 양 극단의 의미이다. 미드 <미스트리스>는 이 이율배반적인 의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들의 삶을 '관능'이라는 성적 코드를 얹어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반면, 한국으로 온 <미스트리스>는 '관능'이라는 코드를 성적 자유분방함이나 주체성이라는 측면보다는 시청자를 위한 눈요기거리로 보여주려 한다. 또한 불륜 등의 관계에서도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위해 고민하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16부의 엔딩에 이르기까지는 안타깝게도 부각되지 않는다. 대학 동창생 4명의 굳건한 우정은 듬직했지만 함께 몰려다니던 그녀들은 사건의 주도적인 해결보다, 늘 또 다른 사건의 함정 속에 빠지기 십상이니 그녀들의 집단적 의지는 희석되어 버리곤 한다. 

그럼에도 빛나는 장면은 있다. 전 남친과의 잠시 모호한 관계에 빠졌던 도화영이, 그와 함께 산성을 오르다, 올라올 때는 너와 함께 였지만, 이제 내려갈 때는 각자 내려가자며 자기 삶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장면이나, 누구의 아이인가 내내 혼돈에 빠져있던 한정원이 남편을 면회한 자리에서 아이의 유전자 검사지를 찢으며 아빠가 누구인가 상관없이 내 아이로 키우겠다는 장면은 내내 운명에 어찌할 줄 모르던 그녀들의 삶에서 반짝인다. 또한 한 남자의 두 아내였던 장세연과 박정심(이상희 분),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각하고, 특히 박정심이 자신을 옭죄고 있던 김영대의 운명적 결박을 풀어내는 장면은 그럼에도 <미스트리스>의 결정적 장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 여성들의 '연대'와 '우정'은 그 표현이 단선적이었지만 <미스트리스>라는 훈훈한 장점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8. 6. 4. 15:21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이지안과 박동훈이 마주친다. 두 사람은 밝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는다. 반갑게. 그리고 잘 지냈노라 서로의 안부를 전한다. 드라마를 함께 완주해왔던 시청자들은 안다. 저 마주 잡은 손이, 그리고 눈으로 묻는 안부가, 그리고 기꺼이 답하는 서로의 안위가 어떤 의미인지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서로가 다리가 되어 이 자리에 '건재'할 수 있었던 그 '곡진'한 감정이 그 짧은 안부를 통해 전해지고,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갈 길을 향한다. 후계동으로 한번 놀러오라는 당부를 더하고, 기꺼이 그 청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모처럼 만나 반가웠던 이지안과 박동훈처럼 <유희열의 스케치북> 400회가 6월 3일 찾아왔다. 400회라 하여 주말의 피로를 견디며 닥본사한 <유희열의 스케치북>, 여전히 후계동처럼 그곳에 있었다. 




400회의 여정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이문세 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에 뒤를 이어 2009년 4월 24일부터 방영한 <유희열의 스케치북(이하 스케치북)>이 400회를 맞이했다. 햇수로만 9년차이다. 

100회를 맞이했던 <스케치북>은 떠들썩했다. 공중파 유일의 정통 음악 프로그램이란 자부심을 한껏 내보이는 4주간의 특집. 국내 정상의 프로듀서들을 한 자리에 모은 1탄 '더 프로듀서', 2탄 자신의 음악적 색깔을 고수하는 뮤지션들의 '더 레이블', 그리고 드라마의 들러리에서 당당하게 음악으로 길어낸 ost의 3탄 '더 드라마', 그리고 기타리스트 함춘호, 베이시스트 신현권, 아코디언의 거장 심성락 씨와 함께 했던 '더 뮤지션' 등을 통해 '가수'를 통해 표현되던 음악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 무대를 빛냈고, 정통 음악 프로그램이라는 자부가 빈 말이 아니었음을 한껏 드러냈다. 

200회, 정통 블루스&컨트리의 김태춘, 진보 하드록의 로맨틱 펀치, 실험적이고도 독창적인 이이언, 블루스계의 싸이 김대중, 작곡자이자 재지한 뮤지션 선우 정아까지, 당대 최고의, 혹은 인기 뮤지션으로 대접받는 '이효리, 윤도현, 장기하, 박정현, 유희열'이 자리를 바꿔 누군가의 '팬'이 되어 무대를 함께 하며, 실력파 뮤지션을 세상에 재조명했다. 



300회, <불후의 명곡>과 <나는 가수다> 등 각종 편곡 프로그램이 성황을 이루는 가운데, <스케치북>은 이런 유행의 트렌드를 역발상으로 활용하여 본연의 정통 프로그램으로서의 자리를 드러낸다. '선택 2015 발라드 대통령' 특집, 대통령 선거의 모양새를 내며, 유희열이 공을 뽑아 출연자를 정하는 방식을 택하지만, 결국은 남들 노래의 재편집이 아닌, 윤종신, 박정현, 거미, 김범수, 백지영, 자이언티까지 '발라드' 계의 내노라하는 가수들의 본연의 매력을 한껏 조명하는 자리를 통해 '음악'의 자리를 묻는다. 

'후계동'같던 400회, 음악의 '아버씨'가 된 유희열
그리고 400회, 이렇게 떠들썩했던 지난 특집에 비하면 400회 <스케치북>은 어쩌면 상대적으로 조촐해보일 지도 모른다. 한 방청객의 말처럼 뒤늦어 버린 인생처럼 너무 늦게 시작하는 <스케치북>을 졸린 눈을 비비며 굳이 지켜낼 성의 대신, 손쉬운 '편집 영상'들이 '닥본사'를 대체한다. 스케치북하면 떠오르던 대명사였던 유희열을 사람들은 이제 <알쓸신잡>이나, <슈가맨>의 mc로 떠올려진다. <스케치북>이 아니라면 볼 수 없었던 기획이나 뮤지션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이 프로그램마저 떠들썩한 아이돌 그룹의 무대가 선점하면서 굳이 그 늦은 시간을 기다릴 이유를 잃었다. 

400회는 그렇게 '희석화'되어가는 <스케치북>의 의미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다. 윤종신, 이적, 아이유, 다이나믹 듀오, 오혁, 십cm, 멜로망스, 오연준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여전히 풍미하고 있는, 그리고 이제 막 풍미하는 뮤지션들의 색다른 조합이야말로 9년 여정의 <스케치북>이 되었다. 

'땡스 투 뮤직'이라는 부제로 시작된 조촐한 무대, 뮤지션 혼자, 혹은 콜라보로 엮어지는 무대, 그리고 언제나처럼 유희열의 썰렁한 농담과도 같은 '역주행 좋니 좋아 상', '내가 니 애비다' 등의 기발한 하지만 적확했던  '땡스 투' 시상을 관통하는 건 이들 뮤지션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데 일조했던 <스케치북>의 '자화자찬'이다. 2017년을 울려 퍼졌던 '좋니'를 다시 불렀던 무대, 멜로랑스라는, 십cm, 오혁, 심지어 아이유라는 신인을 자신있게 소개했던 프로그램, 그리고 여전히 '링거'를 맞은 '다이나믹 듀오'를 '노예'로 부릴 수 있는 존재감이다. 

즉, <스케치북>은 토요일 밤 자정을 넘겨 '쭈그러져' 있는 듯하지만, 여전히 이 프로그램이 길어올렸고, 길어올린 음악들이 이 세상 속에 화려하게 회자되고 있다는 소박하지만 당당한 '자부심'이다. 아버지같은 아저씨 유희열이 있기에 가능한. 



그래서 400회를 맞이한 <스케치북>은 마치 아저씨 세대와 젊은 세대와 정희네에서 한데 어울려 술 한 잔 하며 흔쾌히 '인생'을 나눌 수 있는 후계동과도 같았다. 그곳엔 '아버씨' 유희열이 있었고, 여전히 윤종신과 이적이 있지만, 오혁과 멜로망스, 십cm를 세상으로 인도할 여유가 있고, 이제 오연준이라는 '신인'이 그가 팬이라던 아이유와 함께 평생 잊지 못할 첫 무대를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추억'이 생성 중이다. 우리가 세상사에 지쳤을 때 찾아가고픈 후계동처럼, 그래서 <스케치북>도 오래오래 그곳에서 '음악'의 후계동으로, 아저씨가 되어 버텨 줄 것을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8. 6. 3. 21:08

인도 영화하면 불현듯 화려한 음악이 흐르고 영화 속 인물들이 뛰쳐나와 어울려 군무를 추며 노래를 부르는 '발리우드'가 떠오르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 <바라나시>를 보면 그런 인도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한 나라의 문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인가를 깨닫게 된다. '발리우드'와 <바라나시>라는 영화를 품은 인도는 마치 한 쪽에서 그 물을 떠마시고, 목욕을 하며, 다른 쪽에서 그 물에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갠지스 강'과도 같다. <바라나시>를 통해 그 갠지스 강처럼 유장한 인도 문화의 한 지류를 맛본다. 하지만 그 '누런' 흙탕물의 맛을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건 '인간 보편 존재와 관계'에 대한 물음이다. 




힌두교의 성지 바라나시 
유대교와 기독교 심지어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일생에 한번은 꼭 가봐야 할 성지로 '예루살렘'을 든다. 밤 하늘에 붉게 수놓는 십자가만큼 기독교 문화가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그러기에 성지 예루살렘은 익숙한 곳이다. 하지만, 인도와 힌두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바라나시'는 생소한 지명이다. 갠지스 강이라면 그래도 사회나 지리를 통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하지만. 우타르프라데시, 비하르, 서뱅골에 걸쳐있는 갠지스 평원을 가로질러 남동쪽으로 2,510km를 흐르는 갠지스 강은 힌두교를 믿는 인도인들에게는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다. 그 중에서도 비슈바나타, 산카트모차나 사원 등이 있는 이 2010 km의 강 줄기 가운데에서도 인도인들은 굳이 바라나시를 '예루살렘'처럼 평생에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로망'한다. 매년 100만 명이 넘는 순례자들이 여전히 이곳을 방문한다. 

힌두교를 믿지 않은 일반인들이 보기엔 그저 누런 흙탕물의 냄새나는 강일 뿐이지만, 인도인들은 그 강으로 '순례'를 떠나 그곳에 몸을 담고, 그 물을 떠마시며, 꽃불인 '디아'를 띄워 소원을 빌고, 화장을 하고 그를 띠워 보낸다. 결국은 하나로 흐르는 강물에 어우러지는 삶과 죽음, 이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혼돈', 그러나 인도인의 종교적 소망의 집결체가 바로 '바라나시'이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그렇듯이 인도에서도 이 '종교적 로망'이 예전같지 않다. 영화 <바라나시>에서 아들 라지브(아딜 후세인 분)가 일하는 직장의 사장은 아버지의 순례 길에 동반하려는 라지브가 못마땅하다. 2510km 그 갠지스가 그 갠지스일 텐데 굳이 바라나시일 필요가 있냐고 반문하고, 그 질문에 아들 라지브는 대답을 찾지 못한다. 그저 '아버지'가 가시니 어쩔 수 없다할 뿐. 그런 아들이기에 라지브가 바라보는 바라니시의 갠지스 강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냄새나는 모순 덩어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바로 여전히 바라나시를 종교적 성지로 바라보는 세대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든 세대 간의 간극, 그곳에 영화 <바라나시>가 자리잡는다. 영화 속 70대의 아버지 다야(랄리트 벨 분), 그의 아들이자 딸의 아버지인 끼인 세대의 52세 가장 라지브, 그리고 그의 딸 25살의 수니타(팔로미 고시 분), 이 세 세대의 갈등과 화해가 바라나시라는 공간을 통해 흘러간다. 



아버지의 죽음맞이를 따라온 아들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가장 라지브, 그런데 건강이 좋지 않은 그의 70대 아버지가 바라나시로 순례 여행을 떠나시겠단다. 아니 아버지의 표현대로라면 그곳으로 죽으러 가시겠단다. 힌두교도라면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가보고 싶은 그곳에 대한 로망을 말릴 수는 없지만, 그곳에 건강도 안좋은 아버지가 죽으러 가겠다니, 입장이 난처한 아들 말려보지만 아버지는 완강하다. 결국 혼자라도 길을 떠나겠다는 아버지로 인해 아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죽음에의 순례 여행에 동행자가 된다. 

15일을 예정하고 떠난 바라나시 행, 하지만 택시를 타고 다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바라나시의 골목을 인력거를 타고 내리며 도착한 호텔 샐베이션(영화의 원제), 그곳에는 라지브의 아버지처럼 죽음을 맞이하러 위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동생에게 눈물의 이별까지 하고 온 죽음에의 여행이지만, 막상 호텔 샐베이션에서 맞이한 건 삶의 과정이다. 집안 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은 아들이 만든 식사를 못먹겠다는 아버지, 혼자서 떠나오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손 하나 까닥않고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아버지는 말 그대로 휴가온 여행자이다. 덕분에 아버지는 잠시 건강 상의 위기를 넘기고 오랫동안 그곳에서 죽음을 기다린 할머니를 비롯한 주변 투숙객들이랑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반면 사장의 눈치를 받으며 아버지를 모시고 울며 겨자먹기로 떠나온 아들의 일상은 하루하루가 '고생길'이다. 아버지 음식 봉양에서부터, 낯선 호텔과 바라나시의 생활을 책임지는 한편,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을 통해 이어지는 직장 일은 그를 매순간 '시험'에 들게 만들어 아버지와의 이별을 슬퍼하면서도,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죽음을 기다리는 딜레마에 빠지도록 만든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딸, 그 인연의 '묵티(mukti 구원)'
하지만 그런 일상의 번거로운 잡음을 타고 드러나는 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쉬이 풀어내지 못하는 부자의 애증이다. 작가이자 선생님으로 존경받아왔던 아버지는 이제서야 '문재'가 있었던 아들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치지만, 그런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릴 적부터 유독 자신에게만 엄격했던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이다. 그러기에 아들은 뒤늦은 아버지의 칭찬에 부아를 낸다. 

반면 아들에게 그리 엄격했던 아버지는 정작 그 아들의 딸인 손녀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격려한다. 여전히 딸을 위해서라며 대학을 마치자 마자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를 강제하는 그 아버지의 아들과 달리. 나의 자식이기에 나의 아버지이기에 접어지지 않는 마음들. 이렇게 영화는 죽음의 순례 장소에서 드러나는 세대간의 해묵은, 혹은 현재 진행형의 갈등과 애증을 드러낸다. 

'캥거루'가 되어 주머니에 안경도, 책도 뭐든지 넣고 싶다던 아버지, 이제는 삶이 거추장스러워 죽음의 여정에 올랐지만, 오래전 아들의 재능을 뒤늦게 안타까워하는 아버지가 홀로 죽음을 찾아가는 '코끼리'가 되기까지는 예정된 15일을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들도 마찬가지다. 책임감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왔던 아들은 바라나시라는 본의 아닌 유배의 장소에서 가장과 아들의 존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등한다. 그리고 유보된, 아닌 기약할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이, 이런 이들 각자의 '화두'를 풀어낼 시간이 된다. 

시간이 흐르고, 그 시간을 따라 바라나시의 죽음도 흘러가는 걸 보며, 아버지는 비로소 캥거루였던 자신의 존재를 놓는다. 그리고 비로소 '아버지'와 '아들', 그 본연의 관계로 아들을 품는다. 아버지로서의 욕심을 놓고 아들을 아들로서 받아들인 아버지는 그래서 자신의 자식이지만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을 풀어준다. 그리고 아들도 애증으로만 바라보았던 아버지와의 인연에서 풀려 자신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돌아설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아들 역시 이제는 세속의 틀에서 한결 자유로워져 스쿠터를 타는 딸의 시동을 대신 걸어줄 여유를 찾는다. 

어쩌면 영화는 어느 사회에서나 벌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루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에서 순례의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 몸을 적시고, 다른 곳에서 그 물을 성수라 떠마시며, 그리고 그 물에 죽은 자들이 길을 떠나는 이 기묘한 '성지'의 공간은 '인연'의 번거러움을 덜어내고, 삶과 인연, 그리고 죽음에 대해 돌아볼 여유를 준다. 가족이기에 놓아버릴 수 없었떤 갈등과 애증은 바라나시라는 '죽음'이 전제된 특별한 공간을 통해 '묵티(구원)'에 이른다. 그리고 <바라나시>를 통해 관객들도 그 '인연의 묵티'라는 화두를 짊어지고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8. 6. 1.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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