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전후 세대의 문학은 '아들들의 이야기'였다. 황순원, 이문열, 황석영 등 '백정'이었던 아버지, 혹은 '사상범'이었던 아버지, 혹은 부역자였던 아버지 등,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존재했지만 부재해버린, 현실적인 도움보다는 부담이 되었던, 자신의 존재를 규정지었던 아버지의 존재를, 그 아버지의 시대를 발버둥치며 극복하려 노력했던 아들들의 지난한 서사의 기록물들이다. 아니 굳이 전후 세대의 문학만이 그러겠는가. 일찌기 '오이디푸스'가 그러했고, 더 거슬러 제우스로부터 모든 '영웅'들은 '아버지'를 극복하고 나서야 그들의 존재를 온전히 증명해 낼 수 있었다. 오늘날은 어떨까? 그 시절 종잇장을 넘기며 아버지와 아들의 애증에 몰두하던 사람들은 대신 tv리모컨을 쥔다. 그리고 tv 속 드라마들은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 미니 시리즈를 막론하고 '세대간의 전쟁'을 진행 중이다. 그 시절 '문학'의 역할을 이제 tv 등의 대중 매체가 이어받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첨예한 총성이 울리는 곳은 '장르물', 지난 6월 9일 시작한 ocn의 <라이프 온 마스>도 예외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tv 속 인기 드라마의 메뉴였던 역사극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신 그 자리를 대신하여 '현대사'의 장르들이 등장하고 있다. kbs1의 아침 드라마의 단골 메뉴였던 6.25 동란 이후의 시대극은 이제 좀 더 현대로 그 영역을 확장하여, <응답하라> 시리즈를 필두로 또 하나의 역사극의 장르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응답하라> 시리즈 혹은 그와 유사한 현대사의 시점을 다룬 드라마들은 '사극'으로 정의내린 이유는 바로 이 드라마들의 기본적 존재 요건이 '고증'에 있다는 점이다. 일찌기 <응답하라> 시리즈를 필두로 이들 드라마들을 보며 시청자들의 흥미를 이끄는 가장 첫 번째 요소가 그 시대를 얼마나 그럴 듯하게 재현해 내고 있는가 라는 점에서 이들 드라마들을 '사극'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무리가 없다 보는 것이다. 



화성처럼 낯선 쌍팔년도 
그렇게 <라이프 온 마스>도 1988년을 소환한다. 시즌 2까지 이어갔던 영국 드라마 원작에서 주인공이 1970년대로 갔듯이, 교통사고를 당한 한태주(정경호 분)는 30년을 거슬러 88올림픽이 개최됐던 그 해로 떨어진다. 일찌기 영화 <살인의 추억(2003)>을 시작으로 최근 <응답하라 1988>, <시그널(2016)><터널(2017)>,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2017)> 등까지 매해 우리는 1980년대를 '드라마'로 소환해 왔으니 이젠 박남정, 소방차, 나미 등의 음악이 거리에 울려퍼지고, 펑퍼짐한 실루엣의 잠바와 통 넓은 바지를 입은 아저씨들, 그리고 원색의 의상을 입은 아가씨와, 뽀글뽀글 파마 머리의 아줌마들이, 그리고 그들이 깃들어 살던 2018년의 우리가 보기엔 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골도 아니었던 그 시대가 더는 낯설지 않다. 

<살인의 추억>, <터널>, <시그널>, 그리고 <라이프 온 마스>까지 모두가 80년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야기의 결은 다르다. 하지만, 심지어 장르물이 아니었던 <응답하라 1988>,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까지 이들 드라마들이 일관되게 '표현'해 내고자 하는 바는 바로 '야만의 시대'라는 점이다. 1960년대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서고 유신으로 이어지는 개발 독재가 79년 김재규의 총성으로 종식되고, 그 짧았던 '봄'은 곧 무참한 살육의 계절로 이어지고, 다시 '독재'의 시대가 연장되었던 시대, 경제적으로는 급격한 자본주의적 발전을 축약해 냈지만, 사회적으로는 '전근대적 가부장적 구조가 길게 드리워져 있던 시대, 여전히 '남자'의 권력이 기세 등등했던 그 시대를 드라마들은 '야만'으로 정의내린다. 

그러기에 그 시절 여성들의 '자존'이 무시당하고, 그 시대를 대표하는 범죄가 '여성들을 성적 대상화시킨' 성범죄라는 사실은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그런 면에서 <라이프 온 마스(이하 라온마)> 역시 그러한 시대적 해석의 궤를 함께 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아버지'의 이야기를 좀 더 진득하게 펼쳐간다. 

30년전 과거로 떨어진(?) 한태주, 졸지에 그는 서울서 부임한 인성시 서부 경찰서 반장이 된다. 2018년의 형사였던 그가 dna 검사가 뭔지도 모르는 인성시 경찰서에서 동료 형사들과 함께 '복고'적 방식으로 수사를 하며 벌이게 되는 해프닝이 극의 주요 흐름이다. 그런 가운데, 종종 그를 괴롭히는 '한태주씨 정신 차리세요'라는 병상의 목소리들, 그는 지금 자신이 몸담은 이 '과거'가 혹시 그의 뇌내 망상이 아닌지 혼란스러워 한다. 그렇게 혼란스럽고 종종 그래서 정신까지 잃는 그의 앞에 등장한 그의 가족, 수사반장을 즐겨보며 형사가 되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그와 미용실을 하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어머니, 그리고 사우디에 돈벌러 간 줄 알았지만 룸싸롱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룸펜 아버지가 다시 아니 그곳에 살고 있었다. 

6회 반환점을 향해가는 <라온마>는 그의 기억 속에 죽은 사람으로 기억되었던 아버지를 소환하며, 주인공 한태주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려 낸다. 인성시 골목에서 죽어간 무능력해서 가족과 이별한 아버지의 죽음과, 그 죽음을 제대로 슬퍼하지도 못하는 소년의 사연을 통해, 드라마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야기한다. 한태주의 기억 속에는 '영웅'으로 아로새겨져 있는 아버지, 하지만 30년의 세월을 거슬러 인성시로 간 성인 태주가 만난 아버지는 그 어린 시절 기억의 영웅이 아니다. 



그 시절 아버지, 그 뒷모습
이 '아버지'에 대한 드라마의 정의는 의미 심장하다. 발전의 대한민국이 기억하는 80년대는 '찬란한 영광의 시대'이지만, 이제 역사의 돋보기로 들여다 본 그 시절은 드라마 속에서 처럼 수사라는 이름으로 다짜고짜 용의자를 때리고 부터 보는 '폭력'이 상습화된 시대였던 것이다. 마치 영웅이었던 아버지가 알고보니 거짓말만 뻔드르르했던 백수였던 것처럼. 

하지만 <라온마>는 그저 그 아버지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2018년의 수사관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용의자를 폭력적으로 겁박하고, 심지어 범인으로 몰기 위해 증거 조작을 서슴치 않는 서부 경찰서 강력계 계장 강동철(박성웅 분)은 현대의 한태주와 사사건건 갈등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 무대뽀의 수사 방식은 시대적으로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라는 비극을 낳았지만, 일선의 경찰서에서는 그 수사 방식이 정반대로 '과학'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시대의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되기도 하는 아이러니를 드라마는 보여준다. 가장 '야만적'이지만, 동시에 '전근대적인 인간미'라는 아이러니의 결을 드라마는 다루며, '아버지'의 시대에 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드라마 속 아버지는 이제야 등장했지만, 사실 <라온마>에서 '아버지'의 세대를 상징하는 건  강동철이다. 온세상의 편법을 다 가져다 쓸 거 같은 꼼수에, 다짜고짜 손부터 올라가는 이 우격다짐의 형사 계장은, 그러나 한태주를 알뜰살뜰 챙겨주고, 이제 막 경찰로서 성장해 가는 윤나영(고아성 분)의 구겨졌던 존재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준다. 집을 나가 변사체로 발견되어 슬퍼할 겨를도 없었지만, 떨어져 있는 아들을 위해 개막전 표를 준비했던 아버지, 그리고 룸싸롱 잔심부름꾼으로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주방을 털고 사탕을 주머니에 쑤셔넣던 아버지들, 그리고 강동철 계장처럼, 드라마는 선과 악 그 어느 한 경계로 나눌 수 없는 80년대를 살아냈던 생동감있는, 그래서 아이러니한 모순적 존재였던 그 시절 아버지를 불러온다. 그리고 그걸 '아버지의 뒷모습'으로, 가장의 뒷모습으로,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아냈던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내고자 애쓴다. 
by meditator 2018. 6. 25. 16:27
순례'의 사전적 정의는 '신앙 행위의 일환으로 종교 상의 성지나 영장을 찾아다니는 여행'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산티아고나 인도를 '종교적' 의미로만 '순례'하지 않는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과정, 길을 걷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은 '순례'의 의미를 찾는다. 어쩌면 묵묵히 걸어가야 할 우리네 삶 자체가 '순례'일지도. 지난 2017년 kbs대기획으로 방영된 UHD <순례 4부작>은 바로 이런 '순례'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담고자 했다. 인도 북부 라다크의 '패드 아트라'의 9개월, PCT(pacific crest trail) 6개월 등 총 450여일, 12,000km이상의 여정을 최첨단 4k 카메라를 통해 UHD 영화처럼 구현한 화면 속에 길 위에 선 인간의 오롯한 숙명을 압도적인 자연에 대비하여 풀어낸다. 이러한 영상과 서사의 획기적이면서도 인문학적 깊이가 돋보인 시도는 국내적으로 2018년 방송대상, 백상 예술상, 카톨릭 매스컨 대상, 해외에서는 뉴욕 페스티벌 TV&필름 상, 아시아 태평양 방송개발 기구(AIBD) 월드 TV 상 등을 받으며 극찬을 받았다. 



안녕, 나의 소년 시절이여- 살아있는 날들이 곧 '순례' 
다큐를 연 건 영하 30도 해발 5200M 희말라야 산맥 질룽카포 산을 넘는 200여 명의 승려 무리이다. 티벳 불교의 한 종파 드루크 파 승려들은 수행의 일환으로 희말라야 산맥의 여정에 나선다. 원주민들조차 고산 병에 시달리는 높은 산악지대를 자신의 짐을 진 채 묵묵히 걸어가는 승려의 무리, 조금 나은 평원이라도 나올라치면 온몸으로 던져 오체투지로 길을 지나야 하는 그 고행에 결국 가장 어린 16살 '쏘남 왕모'는 정신을 잃는다. 

종교 순례로 시작하지만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종교'가 아니다. '종교적 순례'길을 선택한 겨우 16살 소녀의 삶이다. 7개월전 소녀는 라다크 산악 지대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의 맏딸이었다. 보리 농사와 양을 키워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빠뜻한 집안, 그 집안의 큰 딸인 '왕모'는 일찍이 7살 때 도회로 나가 가정부 살이를 해야했다. 가정부 일을 하면 학교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주인, 결국 왕모는 집으로 돌아와 또래보다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다니고 있다. 왕모의 바로 아래 동생을 입을 덜기 위해 어린 시절 불교에 받쳐졌고, 그 아래 동생은 왕모처럼 가정부 일을 해야 하는 형편, 집에 돌아와 있다지만 밤중에 양을 훔쳐가는 늑대를 지키기 위해 왕모를 노숙을 해야 한다. 

잡지 속 화려한 스타들을 흠모하던 친구의 뜻밖의 선택처럼, 그리고 입 하나 덜기 위해 부처님에 귀의했던 동생처럼, 결국 '왕모'도 가난한 집안에선 불가능한 엔지니어의 꿈을 접고 가난한 산골 마을을 떠나 승려가 되어 세상으로 나가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의 시작이 된 곳이 바로 '인내만이 요구되는 가혹한 순례길', 소녀는 말한다. '안녕, 나의 소년 시절이여, 저는 이제 하나의 여행을 끝내고, 또 하나의 새로운 여행을 떠납니다.'



신의 눈물- 힘들어도 함께 가는 '순례'
희말라야의 소녀 스님에게서 바톤을 이어받은 건 지구 반대편 역시나 해발 5200m 안데스 산맥의 콜케푼쿠 산을 오르는 68세의 노인 우아만 노인이다. 이제는 자동차로 반나절이면 도달하는 이곳, 다큐 제작진의 청을 받아 이제는 그저 '게임'처럼 축제를 즐기는 청년들에게 '코이요리티 축제' 본연의 의미를 되살려주기 위해 노인은 길을 나선다. 

안데스 산맥 해발 4500m 만년설이 뒤덮힌 시나카라 계곡, 200여년 전 그곳에 가난한 목동으로 '현현'하신 예수를 기리고, 한 해 동안 지은 죄를 만년설에 씻어내기 위해 잉카인들이 그곳에 모인다. 이제는 기후 변화로 쌓였던 눈이 점점 녹아내린 계곡, 형형색색의 깃발을 들고 지역적 특색을 살린 복장과 춤을 추며 모여든 사람들로 순식간에 떠들썩한 마을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저마다 소원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들고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긴 행렬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수와 만년설 계곡의 만남, 거기엔 잉카의 슬픈 생존의 역사가 전해진다. 일찌기 태양신을 믿고 산신을 숭배하던 잉카인들, 그러나 500여 년전 잉카의 땅에 온 스페인들은 강제로 잉카의 왕을 카톨릭으로 개종한 후 처형했다. 스페인의 치하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잉카인들은 잉카의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예수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서 산신으로 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던 잉카의 축제는 '예수'도 함께 하게 되었고, 그 축제의 현장은 우리네 마당놀이처럼 잉카의 왕에게서, 스페인 인들로, 그리고 지주로 수백년 동안 주인만 바뀌던 대농장, 탄광에서 채찍을 맞으며 '수탈'당하던 잉카인들의 슬픈 가난의 '해학적 승화'로 채워진다. 잉카의 순례는 곧 그들의 함께 버텨왔던 생존의 여정이다. 



집으로 가는 길- 인생이란 '순례'
그래도 '종교'라는 형식을 가졌던 1부와 2부와 달리, 3부 <집으로 가는 길>이야 말로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인생 그 자체가 곧 '순례'의 본원적 의미에 가장 가닿는다. 세네갈의 레트바 호수, 장미 호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지만, 실은 염도 90% 이상 플랑크톤 외엔 그 어떤 생명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호수이다. 하지만 이 '죽음의 호수'는 주변 국가에서 온 이주 노동자 500여 명에게는 '생업'의 장이기도 하다.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도 거른 채 물 속에서 소금을 건져내며 사는 이들 중에 지난 58살의 이주 노동자 '우리쌈바'가 있다. 

고향을 떠나온 지 16년 그의 '오롯한 소망'은 고향 기니로 돌아가 아버지처럼 농사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땅이 없어 떠나온 땅, 그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땅을 사려면 2백만 세파, 우리 돈으로 2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가 하루 온종일 일해서 버는 돈은 겨우 900세파(약 8000원), 그 조차도 그의 소금을 사서 이웃 나라에 열 배 정도의 폭리를 취해 파는 중간 상인이 떼어먹기 일쑤다. 

빈 통조림 깡통에 채워지지 않는 돈만이 그의 발목을 잡는 건 아니다. 소금 호수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수술을 해야할 정도로 눈에 이상이 생겼지만, 그는 자신의 몸보다 돌봐야 할 가족이 더 많은 가장이다. 일손이 필요해 거둔 두 명의 아내, 첫 번 째 아내에게서 난 자식이 일곱, 두 번 째 아내 사이에서 난 자식이 여섯, 심지어 두번 째 아내는 만삭이다. 이웃 나라에 돈을 벌겠다고 떠난 아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했고, 아이를 낳기 위해 집을 떠나온 딸은 집에 돌아갈 비용이 없어 이곳에 1년 째 머무르는 처지다. 첫 번째 아내는 물론, 만삭의 두 번 째 아내마저 하루 800원 벌이의 소금 나르는 일을 하며 가사를 돕지만 '우라쌈바'의 형편은 쉬이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희망이 보이지도 않는 현실, 우리쌈바는 걸어서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평생의 소원이 소금지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라는 아내는 그래도 형편이 나은 세네갈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전망이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선택지가 보이지도 않는 이 '이주 노동자'에겐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고행이요,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터벅터벅 호수를 향해 걸어가는 길은 진창 속에서 구르고 뒹굴어도 포기하지 않는 쇠똥구리의 일생과 다르지 않은 '삶의 순례'다. 



4300km 한 걸음씩 나에게로- 인생을 배우는 학교로서의 '순례'
1,2,3부가 불가피한 선택과 생존, 그리고 인생 그 자체로서 순례를 정의했다면, 4부에서 순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삶의 대안, 치유로서의 '순례'를 더한다. 미국 서부 지역, 멕시코 국경에서 부터, 거슬러 캐나다 국경지역까지 4279km, 매년 4~5월 시작하여, 폭설이 쏟아지기 전 10월까지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나'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 '순례'를 떠난다. 

크로아티아의 방송국 엔지니어로 일하는 39살의 니콜라 역시 그 길에 나섰다. 먼 타국의 낯선 행로, 일찌기 20대의 시절, 종교를 통해 자신을 찾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던 그는 마흔을 앞둔 나이에 홀로 다시 길에 섰다. 그리고 그가 선 길에는 그처럼 자연에 자신을 '오체투지'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30여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미뤄뒀던 소망이었기에 70넘어 늦은 퇴직과 함께 나선 이도, 걸을 수 있는 여력이 있을 때라 생각해서 기꺼이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온 60대도, 걷기 조차 힘들었던 릴랑바레 증후군에서 겨우 몸을 추스린 20대도 그 길 위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은 자신 뿐이다. 따로 또 같이, 걸어가는 길에서 미처 한 구간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서로의 무사를 기원하는 동지가 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물조차 구하기 힘들고, 단 이틀 만에 등산화가 구멍이 나버리는 폭염과, 폭우가 오가는 요세미티 국립 공원, 모하비 사막,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의 극한의 자연 속을 하루 13km씩 강행군으로 몰아쳐도 겨우 16%만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여정은 그들을 한없이 극한으로 몰아친다. 

모든 것이 다 구해지고 가능한 도시를 떠나, 20kg이 넘는 짐을 지고 배고픔과 피곤과 싸우며 걸어가노라면 가장 기본적인 필요 외에 모든 것은 기꺼이 버릴 수 있게 되고, 그 극단의 상황 속에서 걷는 이들은 자연을 마주하며 '작은 입자로 흩어져 존재하는 신의 작은 조각'과 만나게 되고, 결국 자신에게 도달하게 된다. '국경없는 의사회'로 콩고 내전 지역에서 활동하다 마음의 상처를 얻었던 30대의 간호사는 비로소 그곳에서 잃은 동료와 자신을 도망치듯 두고 온 그러나 도망칠 수 없었던 콩코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오직 자연만이 존재하는 그 '순수한 경지' 속에 자신을 돌아보고 비로소 자신을 인정하게 되는 치유의 시간, 마지막 한 구간을 앞두고 결국 내리는 눈 앞에 여정을 완주하지 못했다 해도, '자신'을 찾은 이들에게는 '실패'가 아니다. 그곳에서 인생을 배운 이들은 다시 용기를 내어 떠나기 위해 집으로 향한다. 


인간이 두 손을 땅에서 떼고 두 다리로 걷는 순간, 인간은 드디어 인간다워 졌다. 그의 자유로워진 두 손은 많은 것을 만들어 냈으며, 두 다리로 지탱하는 뇌는 동물들과 다른 사고를 하기 시작했다.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준 '걸음',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그 본연의 '인간다움'을 잊은 채 살아가는데, kbs 대기획 <UHD 순례 4부작>은 바로 그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UHD 화면의 아름다움과 대비되는 혹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두 다리로 굳건히 버텨내는 인간의 고된 삶, 거기에 바로 우리 인간의 존재론이 있다. 

by meditator 2018. 6. 2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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