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결혼기념일을 지냈다. 어느덧 내가 싱글로 살아온 시간보다 누군가와 '부부'로 살아낸 시간이 길어졌다. 생각해 보면 '경이로운(?)' 일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과 '동거'하며 함께 삶을 누려간다는 것이. 그런데 문제는(?) 수명이 길어진 시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또 살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얹혀진다. 그래서 1990년대 등장하기 시작한 게 황혼 이혼이다. 자녀가 성장한 이후 부부가 각자의 삶을 찾기 위한 '이혼', 하지만 몇 십년 지속해온 결혼이라는 관계의 형태를 '파괴'하는 이 결정에는 많은 부담이 따랐다. 더구나, '가족'이라는 제도가 사회의 근간이 되어 개인의 삶을 지탱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래서 등장한 것이 '졸혼'. 2004년 일본의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의 책 <졸혼을 권함>에서 등장한 이 단어는 유행처럼 번져 2016,7년에는 한국 사회의 '트렌드'가 되었다. 


그 '트렌드'에 따라 여러 다큐가 '졸혼'에 대해 다뤘고, 연예인 등 유명인사가 당당하게 자신의 졸업을 고백하고, 예능으로 도입되어 '별거나 별거냐(2017)'등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 2018년 5월 27일 <sbs스페셜>에서 다시 '졸혼'을 다룬다. 바로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한 졸혼 연습>이다. 유행처럼 휩쓸고간 2017년이 지나서 뒷북일까? 하지만, <sbs스페셜>이 다루고 있는 '졸혼'은 작년 붐처럼 유행했던 '졸혼'과는 또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 



차광수 강수미 부부의 졸혼 연습 
<sbs스페셜>은 OECD 이혼율 1위의 현실을 수용하여 준비없이 맞이하는 '이혼' 현실에 대해 <이혼 연습- 이혼을 꿈꾸는 당신에게>를 통해 '가상 이혼 프로젝트'를 실시한 바 있다. 당시 배우 이재은 부부 등은 다큐에서 마련한 방식으로 이혼 생활을 미리 접해보고 서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제 2018년에 찾아온 <졸혼 연습>은 바로 이 <이혼 연습>의 방식을 그대로 차용한다. 하지만 위자료, 재산 분할 등의 현실적인 문제로 묵직해졌던 <이혼 연습>과 달리, 결혼이라는 제도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 않은 '졸혼'답게, 결혼의 종료 연습은 한 편의 달콤쌉싸르한 로멘틱 코미디와도 같다. 

여기 남들에겐 한 쌍의 원앙으로 대접받는 부부가 있다. 바로 연기자 차광수 씨 부부다. 결혼 생활 23년차, 남편에게 10첩 반상을 차려 대접하는 아내, 1년에 한번씩 해외 여행을 데리고 가겠다는 약속을 어긴 적이 없다는 남편, 이들은 남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 잘 나가던 거문고 연주자의 꿈도 접고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90점 짜리 아내라 평가해오던 강수미씨는 자신의 삶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남편의 아내, 한 아이의 엄마,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이제서라도 자신을 찾고 싶은 강수미 씨 남편에게 당당하게 '졸혼'을 청한다. 

자기의 삶을 되찾고 싶다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가진 배우자의 졸혼 요구에 배신감과 허탈함에 빠진 것도 잠시, '자유'라는 또 다른 카드가 차광수씨에게 손을 내민다. 결국 차광수 씨는 독립된 인격체로서 서로를 인정하고, 각자의 삶은 인정하는 '졸혼' 계약서를 쓰고 '가출'한다.

다큐는 각자 홀로 살아보는 '졸혼' 연습의 혼란스러움과 시행 착오와 함께, 실제 '졸혼'의 커플을 등장시켜 시청자들에게 '졸혼'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힌다. 자신의 삶을 모색하던 아내가 찾은 사람은 임지수씨.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그녀는 하던 사업을 정리한 후, 평범한 아내의 삶 대신 산속으로 들어가 홀로 황무지를 아름다운 정원으로 일구어 냈다. 하지만 자유로운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는 강수미씨에게 임지수 씨는 여전히 고운 외모와 달리,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을 보여준다. '졸혼'이라던가, '자신의 삶에 대한 로망'은 그렇게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천착과 책임이 뒤따른다는 증거이다. 임지수 씨의 손을 본 강수미 씨의 생각도 복잡해 진다. 막연히 남편의 시중을 들지 않아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졸혼', 그러나 생각보다 무료하다고 생각했던 남편이 없는 삶, 거기엔 홀로 살아갈 삶에 대한 책임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졸혼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휴혼은 어떨까?
남편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의 청소와 빨래에 대해 잔소리로 일관했던 남편, 그러나 막상 집을 나와 살아보니 그 별 거 아니라던 일상의 삶이 버겁다. 그 역시 '졸혼' 선배를 찾아나선다. 파주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 중인 이안수 씨, 그의 아내는 그와 떨어져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해왔으며 최근에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자전거 여행에 이어 필리핀 어학 연수 중이란다. 평범한 직장 생활에 만족하지 못했던 이안수 씨가 먼저 훌쩍 떠나면서 시작된 부부의 이별, 서로 각자의 삶을 인정하며 존중해 주는 삶은 더더욱 부부간의 정과 사랑을 돈독하게 해주었다고 자부한다. 

'졸혼'의 선배를 찾아본 차광수-강수미 부부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을 하던 강수미 씨는 평소 좋아하던 베이킹을 시도해 본다. 막상 만들어 본 첫 번째 작품, 그 빵을 먹으며 강수미 씨가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은 남편이다. 결국 부부는 '졸혼'대신 잠시의 휴혼을 마치고 다기 한 집에 살기로 한다. 따로 또 같이 삶은 새로운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아내 없는 일상을 차광수 씨는 상상할 수 없었다 토로한다. 하지만 잠시 떨어져 살았던 시간은 부부를 변화시킨다. 손도 까딱않던 남편은 이제 아내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떨어진 시간 동안 소중한 서로의 존재가 일상의 시간마저 변화시킨다. 이에 부부는 준비되지 않은 졸혼 대신 부부가 서로를 마주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휴혼을 제안한다. 



다큐가 보여준 건, '졸혼' 조차도 사실상 여의치 않은 우리 사회 부부의 또 다른 대안이다. 이혼이 '위자료', '재산 분할'이라는 경제적 부담과 가정의 파탄이라는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면, 졸혼 역시 차광수 씨 부부에게서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독립적 생활에 대한 쉽지 않은 여건의 함정이 따른다. 차광수 씨나, 예능 <별거가 별거냐>에서 여유롭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집을 나섰지만, 과연 배우자에게 여유롭게 어렵게 마련한 집을 양보할 수 있는 부부가 얼마나 될까?  또한 너무 오래 살아서 번거롭고 지겹지만 막상 결혼을 '졸업'할 용기 역시 쉽지 않다. 그러기에 2018년 <SBS스페셜>은 졸혼에서 다시 한 발 물러서 '휴혼'을 제의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가정'을 벗어던지는 건 쉽지 않다. 


by meditator 2018. 5. 28. 15:00

GMO(유전자 변형 농산물)와 관련된 논란은 2008년 식용 GMO(콩, 옥수수)의 본격 수입이 시작된 이래 그 역사가 길며 쉬이 종결되지 않고 있다. 식량난으로부터 인류의 구원자라는 의견과 결국 인간과 자연 모두를 멸종에 이르게 하는 죽음의 밥상이라는 양 자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해 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2017년 기준 연간 228만 2천톤, 그 중 옥수수 123만 9천 톤, 대두 104만 3천 톤, 어느덧 우리는 세계 1위의 식용 GMO 수입국이 되었다. 




높아지고 있는 GMO 경고의 목소리 
하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유전자 조작 농산물과 관련된 경고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지난 해 서울 환경 영화제에서 제레미 세이퍼트 가족의 GMO 가족 여행기 <GMO OMG>가 상영된 바 있다. 인류가 유전자 조작을 시작한 지 어언 20년, 우리의 식탁에서 '일상'이 되어가고 있는 GMO, 그 실상을 알기 위해 제레미 세이퍼트 감독은 아이들과 함께 긴 여정에 올랐다. 마트에 들러 원료의 성분을 묻고, 쓰레기통을 뒤지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미국의 실생활에 GMO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가족은 찾아나선다. 



GMO와 관련하여 몬산토를 대표로 하는 다국적 기업이 주장하는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세계적인 기아의 가장 유효한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GMO 농산물의 생산성이 그렇게 좋을까? 놀랍게도 유기농 재배와 30 여년간 비교한 결과 그리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해충과 잡초에 강한 GMO 농작물이 해충과 잡초에 강한 내성을 키워 슈처 잡초가 등장했다. 결국 또 다른 농약을 살포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2007년 < KBS 환경 스페셜 위험한 연금술 유전자 조작 식품>을 통해서도 방영된 바 있다. 영화 속 가족이 발견한 쓰레기통 속 엄청난 음식들척럼 우리 사회 '기아 문제'는 절대적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생산되는 음식의 1/3이 버려지고 있는 불균등한 배분의 문제라고 반대론자들은 주장한다.

세계 3대 GMO콩 생산지인 아르헨티나 마을 차코에서는 그 재배 과정에서 대량 살포된 글리포세이트로 인해 주민들이 각종 암과 이상 질명에 시달렸고, 신생아의 30%가 기형아로 죽어갔다. 결국 WHO(세계 보건 기구)는 이를 2등A급 발암 물질로 지정했다. 이 글리포세이트는 GMO 다국적 기업인 몬산토사의 GMO 전용 농약 '라운드 업'의 주성분이다. 

하지만 농약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계의 환경 단체들이 우려하는 건 바로 '유전자 조작' 그 자체이다. 일부에서 병해에 강한 농산물을 키워냈던 품종 개량에 비유하지만, 유전자 조작은 '냉해에 강한 딸기를 만들기 위해 심해에 살아 추위에 강한 넙치의 유전자를 이식하듯', 종의 경계를 넘어선 실험이며, 이 20여년의 역사 밖에 되지 않은 유전자 조작의 식품의 장기간의 섭취에 따른 안전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이다. 

연어의 경우 더 많은 알을 낳도록 하기 위해 성장 호르몬 분비를 제거하여 36배나 큰 슈퍼 연어를 탄생시켰지만, 이 슈퍼 연어는 기형어가 많이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들 연어를 물에 풀어놓았을 경우 불과 5세대 만에 일반 물고기의 수를 초월했다. 그러나 이들 슈퍼 연어는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는 겨우가 적어, 40세대만에 멸종되고 만다. 그러기에 환경 운동가인 류외향씨는 '식량이 아니라 생물 무기'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GMO식품이 상업화된지 20년, 콩, 옥수수 등의 유전자 변형 농산물과 함유 식품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환경과 건강, 식량 주권 및 무역 등 다방면에서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이에, 지난 19일 세계 몬산토 시민 반대의 날에 한살림 등 시민 단체들은 'GMO를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매년 5월 세째 주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이 집회는 올해로 6번째를 맞이한 세계 시민들의 뜻을 모은 행동이다. 또한 지난 3월 12일 한국 YWCA, 경실련 소비자 정의 센터 등 57개 소비자, 농민, 학부모 단체들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GMO 완전 표시제 국민 청원'을 시작했다. 불과 한달 사이 21만명의 사람들이 청원에 참여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뉴스 타파 목격자들>이 'GMO를 먹지 않을 권리'로 담아내고 있다. 

왜 GMO를 표시해야 하나? 
왜 GMO 표시에 학부모와 소비자 단체들은 나섰을까? 그 시작을 다큐는 NON GMO 급식을 하는 학교에서 찾는다. 경기 광명의 광명 북고등학교. 이 학교는 학교 급식에서 GMO 음식을 퇴출 시켰다. 우리밀 튀김 가루, NON GMO 기름인 유채유를 쓰고 있다. 아이들을 믿고 맡길 수 있다는 학부모들, 급식이 제일 맛있다는 학생들, 하지만 그렇다고 이 NON GMO 급식이 완전하지 않다. 왜냐하면 가공 식품에서의 GMO를 완벽하제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묵들의 제품이 만들어 지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GMO 농산물로 만들어 지는 기름에 대해 학교 급식은 무방비하다. 왜냐하면 이들 식품이 원재료의 GMO 여부를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표에서 보여지듯이 수입된 GMO 콩과 옥수수는 각기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의 형태로 분해되어 간장, 식용유, 전분 등의 원료로 씌여진다. 그리고 이런 재료들은 우리가 무심코 먹고 있는 각종 식품들, 심지어 아이들이 즐겨먹는 과자나, 믹스 커피 등에까지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17뇬 식품 의약품 안전처는 '고도의 정제 과정 등으로 유전자 변형 DNA 또는 유전자 변형 단백질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검사 불능인 당류, 유지류 등은 유전자 변형 식품임을 표시하지 아니할 수 있다'고 '고시하고 있다. .

이에 학부모, 농민을 비롯한 소비자 단체들은 이에 '내가 먹은 식품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즉 알권리와 먹을 권리로서 'GMO 완전 표시제'를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불과 한 달 만에 청와대 청원에서 21만 명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보여지듯이 대중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이에 국회의원 윤소하, 김현권 의원은 ' 유전자 변형 식품 표시 대상을 '제조 가공 후에 유전자 변형 DNA, 또는 유전자 변형 단백질이 남아있는 유전자 변형 식품 등에 한정한다는 조항을 삭제하고, 유전자 변형 물질을 원재료로 사용했을 경우에는 예외없이 식품에 이를 표시하도록 할 것'에 대한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법안은 2016년 이래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정부의 방패막이 역할 GMO 협의체 
이런 학부모, 농민, 소비자들의 주장에 대해 정부, 그 중에서도 식품 의약품 안전처는 GMO 표시 제도 검토 협의회를 전문가 4명, 소비자 단체 8명, 식품 산업계 8명으로 구성하여 논의를 하고자 했다. 하지만, 협의과정의 내용의 비공개 등 운영 과정의 문제는 물론, 소비자를 대표해야 할 소비자 단체 대표의 대표성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CJ, 대상 등 식품 산업계 전원 반대와 소비자 대표 3인 마저 반대한 이 협의체의 결론은 안타깝게도 GMO 정책과 관련된 정부에 대한 비판의 방패막이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 식품 산업 협회는 GMO 성분 표시와 관련하여 과학적인 검증 방법이 없다거나, 시스템이 갖춰 지지 않았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고 있지만, 정작 이와 관련한 홍보 영상까지 만들어 배포하는 등 앞뒤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렇다면 외국의 사례는 어떨까? 미국을 제외한 유럽의 경우는 GMO 완전 표시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가까운 대만의 경우 GMO 완전 표시제는 물론, 학교 급식에서 GMO를 완전 퇴출 시켰다고 GMO 반대 행동은 밝히고 있다. 



GMO 완전 표시와 관련하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 중 가장 큰 불안감은 바로 '가격'의 문제다. 과연 GMO 관련 수입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얼마나 가격이 오르게 될까. NON GMO 원료를 사용할 경우, 식품 산업 비용은 1.28~2.35%의 인상 분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월 식품비 지출 50만원을 기준으로 했을 때, 월 8250원에서 18000원 추가로 지출하게 되는 것이다. 식용유 1,8리터를 기준으로 했을 때 4000원의 가격이 5000원으로 인상될 것이다. 학교 급식의 경우 한 끼 3000으로 놓고, 끼니 당 111월 한 달 2220원의 비용이 더 들어간다. 이상의 사례로 미루어 봤을 때 GMO 완전 표시제 이후 시장에서 GMO 원재료가 퇴출된다 해도 '가격'의 문제는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을 <뉴스 타파>는 내놓고 있다. 

청와대는 국민 청원에 대해 GMO 표시 제도 검토 협의체 재구성을 할 것과 제도 개선 방안 마련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다큐는 덧붙인다. '새로 구성할 위원들의 선정 방법과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고. 

그럼에도 여전히 GMO 전면 배제와 관련한 서민의 가격 부담은 피할 수 없는 문제로 남는다. 또한 '선택'의 문제가 되었을 때 빚어지는 '상대적 박탈감'의 문제도 피할 수 없다. 이와 더불어 황교익, 김봉구 씨등은 '신토불이'의 위험론을 제기하며 소비자의 알권리는 맞지만, 그 인식이 너무 이분화되어있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단백질이 녹는 고온을 이용한 가공 식품에 사용되는 GMO 원료의 유해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는 주장도 덧붙인다. 또한 무엇보다 푸드 패디즘(FOOD FADDISM; 먹거리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 하는 것)의 과열을 우려하며, 당장이 아니라 GMO에 대한 인식의 제고와 '유전자 가위 기술'(기존 GMO 방식을 개선한 나쁜 유전자를 빼내는 기술) 등의 과학 발전의 긍정성은 GMO로 인한 악영향을 충분히 제고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도 한편에서는 여전하다. 그럼에도 '소비자의 알 권리, 내가 먹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의 문제는 '삶의 질'과 관련하여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가 될 수 밖에 없다. 



by meditator 2018. 5. 27. 01:39

지난 2017년 6월 미국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에서 탈퇴를 해버렸다. 영화 속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교황과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를 만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정치적 실천'을 도모했지만, 미국인들은 대통령으로 트럼프를 선택했고,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보란듯이 '지구 온난화' 문제를 묵살한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 대선을 앞두고 '정의로운 실천'을 요구했던 이 영화는 휴지통으로 들어가야 하나? 아니 그러기에 외려 이 영화의 가치는,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실해 진다. 우리가 어느 '화창한 날에 맞이할 대홍수'가 여전히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그의 대중성과 영향력에 기대어 
영화의 시작은 미국의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다.(이하 레오)  영화는 일개 배우인 레오가 환경운동의 전문가라는 걸 비웃는 한 tv 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런 비아냥에 대해 비록 레오가 학자들만큼 많이 알지는 못하고, 정치인들처럼 어떤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스무 살 때 고어 대통령을 만나 지구 온난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이래 꾸준히 이 문제에 대해 천착해 왔음을 보여준다. 아니 역설적으로 우리에게도 가장 친숙한 배우 레오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한 개인이 가진 지국 온난화에 대한 여정이기에 <비포 더 플러드>는 더 설득력을 지닌다. 

영화는 그에게 아카데미 상 남우 주연상을 선사했던 영화<레버넌트>로 부터 시작된다. 혹한의 날씨에 야생을 견디며 삶을 일구어 나가는 인물을 그려내는 이 영화의 배경은 19세기 아메리카 대륙이다. 그에 걸맞는 영화 배경을 찾아 캐나다로 간 촬영진은 영화에 걸맞지 않게 눈이 다 녹아버린 상황에 고심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어 2014년 유엔 환경대사가 된 레오, 그는 이후 2년 여의 여정으로 지구 온난화의 현장을 직접 찾아든다. 

지구 온난화라는 용어가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말이라 생각할 만큼 무지했던 젊은 레오, 지구의 에어컨인 북극, 하지만 급속도로 녹아가는 그곳에서 2040년만 되도 항해가 가능할 지도 모르는 증언들과 마주하며 소박했던 그의 생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지구의 날을 기점으로 지구 온난화를 알리는데 앞장서기 시작한다. 

타락한 행성, 수익의 유혹 
그런 그와 함께 찾아본 지구 온난화의 현장, 그 첫 지역은 그가 사는 미국의 플로지다 지역이다. '화창한 날의 홍수', 그 이상한 단어의 조합이 현실이 되고 있는 곳, 상승된 해수면은 플로지다의 취약 지역를 상시적으로 '홍수'로 몰아넣는다. 이를 위해 플로리다 시는 도로를 들어 올리고, 물을 빼는 전기 펌프를 작동시키는 중이라는데, 하지만 2011년 공화당의 주지사는 취임 이후 이 다급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기후 변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한다. '로비'와 '산업'이 얽혀있는 지구 온난화의 현실, 97%의 과학자가 지구 온난화에 동의해도, 지구는 오히려 냉각되고 있다는 등, 전례없는 온난화는 거짓이라는 등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는 현실, 과학 논쟁이 아니라 화석 연료 사업자와 기업체의 스폰을 받는 언론의 이간질에 대중이 '미혹'되는 현실은 결국 '지구 온난화'가 '환경'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라는 걸 레오는, 다큐는 분명하게 짚는다. 



지구 온난화에 대한 문제 의식의 역사는 생각보다 깊다. 1958년 미국의 한 tv 과학 프로그램은 이미 당시에 과학계가 기후 변화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큐는 묻는다. 그 당시에 그런 지구에 닥친 문제점을 인지하고 실천을 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라고. 하지만 현실은 단기적인 화석 연료 수익의 유혹이 세상을 장악한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인식 대신 사회적 신용도가 높은 몇몇 유명 인사들이 스폰을 받고 방송을 통해 인간이 기후를 바꿀 수 없다는 등의 말을 흘린다. 의회도 장악되었다. 기후 온난화에 대한 법안은 번번히 저지된다. 이것이 미국의 현실이다. 

중국은 다를까? 지금까지는 미국이 세계 제 1의 오염국가였다. 하지만 이제 그 지위를 중국이 이어받았다. 중국에서 대기 오염은 가장 첨예한 사회 문제가 되었다. 시민들을 대거 거리의 시위로 불러들이는 건 바로 '대기'의 문제이다. 학자들은 전국 오염도를 데이터 베이스화 했고, 이런 '정보'는 곧 '시민'의 목소리로 이어졌다. 덕분에 정부의 녹색 성장 정책으로 추동했고,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풍력, 태양력 발전을 시도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세계 제 3위의 탄소 배출 국가 인도의 문제는 복잡하다. 하지만 인도인 중 7억 명이 전기와 불빛 없이 생활을 하고 있다. 단 30%의 가정만이 전기를 사용하고, 상당수의 국민들이 여전히 소똥 케이크를 활용하여 요리를 하고 있다. 인도의 국가적 과제는 개발과 빈민 구제이다. 온국민에게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목표요, 감당할 수 있는 전기 요금때문이라도 석탄 사용은 불가피하다. 

이런 인도의 에너지 담당 장관에서 레오는 태양 에너지를 권유한다. 장관은 반문한다. 그런 미국이 태양 에너지를 쓰지 그러냐고. 미국의 에너지 소비는 중국의 10배, 인도의 3.5배이다. 문제는 미국인의 생활 스타일이 전세계 국민의 로망이라는 것이다. 즉 세계인의 롤모델이 되어버린 미국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즉 미국식 생활 방식과 소비 습관이 달라지지 않고서는 '지구 온난화'에 대한 논의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고통받는 지구의 약한 고리들
하지만 이렇게 미국 등의 부유한 나라가 펑펑 써댄 화석 에너지로 인해 정작 고통을 받는 건 세계의 약한 고리인 약소국들이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계절에 안맞는 폭우가 내려 갓 농사를 지은 농작물들이 썩어들어간다. 1년의 작황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태평양의 낙원 키리바시에서는 홍수로 사람들이 쓰는 식수로 쓰는 연못에 바닷물이 유입되고 있다. 조만간 팔라우 섬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해안의 생태계도 위협받고 있다. 세계 인구 중 10억 명의 사람들이 산호초 어장에서 먹고 살고 있다. 하지만 바닷물 내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산호초는 점점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미래의 바다는 어쩌면 지금의 바다가 아닐 수도 있다. 문제는 산호초의 파괴는 그곳에 깃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의 굶주림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열대 우림도 마찬가지다. 이산화탄소의 저장 창고인 열대 우림, 하지만 값싼 팜유의 생산을 위해 고의적으로 불을 놓아 열대 우림은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중이다. 팜유 산업의 팽창은 열대 우림의 80%를 파괴했고, 코뿔소, 코끼리, 오랑우탄 등의 동물은 '난민'이 되었다. 아니 이들 동물은 불로 죽어간 다수의 동물에 비하면 '운좋은 생존자'이다. <레버런트>의 눈쌓은 풍경을 위해 영하 제작진은 지구의 반바퀴를 돌아 아르헨티나까지 5000km의 여정을 달렸다. 눈을 본다는 게 기이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지난 12억년동안 지구는 안정적이었다. 지구인은 지구 온난화가 가져올 변화에 대해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의 지구 온난화로 약 4도 정도의 상승이 예상되는 미래의 지구는 우리가 살아본 적이 없는 지구이다. 언론에서는 외려 지구가 냉각되어가고 있다고 떠들지만, 지구 온난화가 당장 폭염을 가져오는 건 아니다. 외려 일시적으로 유럽의 경우처럼 '한파'를 불러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의 온도가 2도만 올라가도 산호초는 절멸될 것이다. 기후 변화의 티핑 포인트이다. 파리 기후 협약은 그래서 지구 온도 변화를 2도, 1.5도 내로 제한하기 노력할 것을 협상했다. 지구 밖에서 본 지구의 대기는 양파 껍질처럼 얇아 보인다고 한다. 이 얄팍한 껍질,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이다. 



늦었다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노력들 
이 양파껍질처럼 얄팍한 대기의 지구, 그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온난화에 대한 대비는 이미 늦은 걸까? 전기차로 이름을 날린 일론 머스크는 '기가 팩토리'를 통해 '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서 '배터리'는 개도국의 발전소를 대신할 수 있는 용량의 전기를 내장한 어마어마한 환경 발명품이다. 즉, 우리가 유선 전화에서 무선 전화로의 패러다임이 변화하듯, 기가 팩토리의 배터리가 상용화되면 더 이상 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석탄을 태울 필요가 없게 된다. 현대 과학의 발전이 새로운 지구 온난화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낸 것이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자기 개인의 노력으로 전세계에 기가 팩토리를 세울 수는 없다고 하소연한다. 결국 각국의, 세계 정치권의 자구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한 예로 '탄소세'의 도임이다. 대기 중 배출되는 탄소, 즉 그 탄소를 배출하는 모든 행위와 사업에 대해 세금을 부과하는 '경제적 방식'이 요구된다. 이산화탄소에 세금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면, 불과 몇 십년전 '담배에 세금을?'하며 고개를 갸웃대던 상황을 연상해 보면 된다. 

계몽적 방식의 사회적 책임감 호소보다. '탄소세'와 같은 직접적인 경제적 방식이 급격해지는 위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가 정부나, 정치권의 몫만은 아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소고기 대신 닭고기를 먹는 식사 습관만 바꿔도 온난화의 가속화를 막을 수 있다. 지구 상 생산되는 곡물의 70%가 소의 먹이이다. 또한 소가 배출하는 메탄은 강력한 온실 가스의 주범이다. 반면 닭은 그런 소가 지구 온난화에 끼치는 악영향에 1/10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뿐이다. 그래서일까 레오는 채식주의를 선언했다. 이는 결국 지구 온난화에 대한 우리의 실천은 우리의 생활 방식으로 이어짐을 뜻한다. 탄소세와 같은 세금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탄소에 대한 세금은 세금의 증가가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다른 피해를 줄여 '세금의 이동으로 홍보되어야 한다. 눈 앞의 이익이 아니라, 취향이 아니라, 거시적 차원의 변화가 우리의 알수 없는 미래로 부터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도 정치권도 대중의 생각이, 삶이 변화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의견을 바꿀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적 계몽의 설득력있고 유효한 수단으로 <비포 더 플러드>의 의의는 크다. 



by meditator 2018. 5. 22. 02:36

사실 이 리뷰를 쓰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럽다. 글쓴 이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게 리뷰를 적었는데, 칸에서 황금빛 상이라도 타면, 나의 생각이 편협하거나 옹졸했다는 반증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세계성이 곧 지금 이곳을 사는 우리의 생각과 맞물릴 수만은 없다는 뻔뻔함으로, 이 글을 계속하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의 2018년작 영화 <버닝>은 이 시대를 사는 청춘의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승화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의 <헛간을 태우다>를 모티브로 하여 상징적 대사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산자'로 살아가야 하는 청춘의 슬픈 운명을 각인시킨다. 또한 영화 속 주인공 해미가 로망으로 여겼던 아프리카의 북소리를 연상케 하는 베이스의 퉁퉁 튕기는 모그(mowg)의 ost는 '파주'라는 지역적 공간을 젊음이 방황하는 세계 그 어느 곳으로 그 정서를 확장한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정작 이곳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은, 아니 청춘의 당대성에 매몰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그 '상징성'이나 '존재론'이 분명하게 다가올 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대의 청춘들이 너무나 상징적이고 수려해서 우리의 문학적 언어에 귀기울이기 힘들 듯, <버닝>은 그렇게 대중과 교감하기 힘든 '순수 문학'으로 남겨질 가능성이 크다. 



<버닝>, 그리고 <초록 물고기>
영화의 런닝 타임이 흐른 지 어언 한 시간 여,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지금 이창동 감독이 이 만연체로 표현하고 있는 2018년을 살아가는 종수(유아인 분)와 해미(전종서 분)의 삶에 동시대 청춘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문득 이창동 감독을 문제적 감독으로 떠오르게 만든 작품 <초록 물고기>가 떠올랐다. 

느와르의 형식을 띤 영화 <초록 물고기>는 <버닝>과 유사한 관계 구성을 보인다.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한 청년 막동(한석규 분), 그는 우연히 만난 여인 미애(심혜진 분)을 만나게 되고, 그녀로 인해 그녀가 일하는 나이트 클럽을 중심으로 암약하는 암흑가의 보스 배태곤(문성근 분)과 조우하게 된다. 미애를 소유하고자 하는 배태곤과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막동, 이들의 엇갈린 삼각 관계는 결국 청부 살인의 비극적 결말로 끝맺는다. 

1997년 그 시대의 부도덕한 부의 상징이었던 암흑가의 보스, 그는 시간이 흘러 2018년에 직업조차 모호한 유한남 벤(스티븐 연 분)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1997년에도, 2018년에도 여전히 직업도 마땅치 않은, 심지어 사랑하는 여자를 지켜내지 못하는 변변찮은 청춘의 모습은 이제는 50대가 된 한석규에서 서른 즈음의 유아인으로 변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여전히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남자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성적인 희생양으로 대상화되는 여성의 존재도 대동소이하다. 

16만명으로 흥행 성적만 놓고 보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초록 물고기>는 1997년 올해의 좋은 영화로 선정되며, 평단과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통해 한석규는 그 시대의 젊음을 대표하는 배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시간이 흘렀지만, 이창동 감독의 다음 작품 <박하 사탕>의 영호와 함께 막동은 그 시대를 대변하는 젊은이라는 점에서 대중은 공감한다.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들였지만 세상 물정을 몰랐던 그, 여전히 일산이라는 지역을 배경으로 한 가족 공동체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그는, 배태곤으로 상징되는 '물신'의 세상에 무지했고, 그래서 그의 시도는 그의 생명을 담보한 무모한 실패로 되돌려 졌다. <초록 물고기>를 보지 못한 사람조차도 피흘리며 형에게 전화를 걸다 죽어가는 막동의 모습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그리고 이십 여년, 군대를 제대하고 나이트 클럽에서 일 자리라고 구하려던 청년은 윌리엄 포크너에 자기 동일시는 하는 알바생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여자는 역시나 온 몸을 드러내고 홍보를 하는 알바생이다. 나이트 클럽 일에 청부 살인도 마다하지 않고 어떻게든 살아보려던 청년은 글을 쓰고 싶지만 무엇을 써야겠는지도 모르는, 알바로 돈을 벌고 싶지만 세상의 강제를 견뎌내지 못하는 무기력하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한 청년이 되었다. 그가 사랑한 해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그녀가 사랑한 아프리카만큼이나 그녀의 삶 역시 모호하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이 그렇다. 1997년에 그리도 구체적으로 손에 잡혔던 청춘은 2018년이 되서 무기력하고 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알바를 하기 위해 갔던 종수가 군대식 호명에 가타부타 말도 없이 자리를 뜨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모호한 건 감독 자신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여에 걸쳐 장황하게 감독은 젊음을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하려 할 수록 그 젊음은 추상적이었고, 그 '추상'은 동시대의 실존과 어쩐지 '괴리'가 되는 느낌. 크로키로 그려내야 할 대상을 추상적 터치의 정물화로 그려낸 그런 느낌을 <버닝> 속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받는다. 그러기에 <초록 물고기>속 막동에게는 공감했지만, <버닝>의 종수는 2018년에 살지만, 어쩐지 이 시대의 젊은이라기엔 막연하다. 과연 종수가 자기 동일시 했던 윌리엄 포크너, 그 추상적이고 모호한 존재에 공감하는 젊음이 얼마나 될까? 감독은 이 시대의 젊음을 그리려 했지만, 정작 그 젊음들은 이창동 감독이 그려낸 젊은이에 공감할까? 

<버닝> 그리고 <파주>
파주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기력한 젊음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나의 아저씨>를 통해 여운깊은 연기를 보여준 이선균 주연의 2009년작 <파주>를 떠올리게 한다. 그곳에도 의문에 쌓인 한 여인의 죽음이 있고, 무엇인가 하기 위해 파주를 찾았지만 무기력했던 한 남자 중식이 있다. 

박찬옥 감독의 2009년작 <파주>에서 파주는 이제 막 신도시 건설의 끝자락에서 파괴되어 가는 농촌을 그려낸다. 그곳에서 불륜의 관계로 엇물리는 세 남녀의 사랑은 결국 철거민 점거 농성장에서 '결자해지'의 연을 가지게 된다. 영화 <파주>는 흔들리는 청춘과 농촌에서 도시로의 변화되어가는 그 지점에서 해체된 관계를 통해 지역과 동시대의 청춘의 관계를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렇게 2009년에도 이미 도시로 진입되어 가던 파주는 하지만, 이제 늘 일산이라는 변두리를 통해 한국사의 그늘을 담아왔던 이창동 감독에 의해, 발전되어 가는 일산에 밀린 폐비닐하우스가 즐비한 쇄락한 농촌의 정경으로 다시금 찾아온다. 쇄락한 농촌, 그곳에서 폐쇄된 관계 속의 부자는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 속에 방치된 인간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이 시대의 청춘은 <초록 물고기>에서 어떻게든 자본주의 사회에 진입하려 안간힘을 쓰던 이도 아니요, <파주>에서 이제 막 도시로 진입되어 농촌처럼, 자본주의 사회 그늘에서 그 그림자를 직시하려 고군분투하던 이도 아니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본 2018년의 청춘은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는 한층 더 발전했지만, 그 시대의 발전에 방치된 채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들이다. 

영화의 제목 <버닝> '태우다'는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흔히 인터넷 상에서 열렬히 어떤 대상에 빠져있는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종수는 하던 알바도 놔둔 채, 문창과를 나와 하려던 창작 작업조차 딜레마에 빠진 지리멸렬한 상태다. 뜻밖에도 그런 그가 우연히 만난 고향의 옛 여자 친구에게, 그리고 그녀와 함께 나타난 그녀를 소유한 듯한 의문의 남자에게 빠져듦으로써 자신의 무의미한 삶을 반증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성'은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주제'를 매개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버닝> 역시 마찬가지다. 종수는 빠져들지만 벤은 빠져들지 못하는 그 '여성'이, 무기력했던 종수를 전사로 깨어나게 한다. 영화의 마지막 그의 선택은 폭발적이지만, 동시에 종수란 존재를 증명하기엔, 또한 그의 행동이 벤이라는 대상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들에 대한 정죄로 보기엔 우발적으로 다가온다. 또한 단말마적 그의 버닝이 무기력했던 그의 존재와의 연관성에서 우연히 나타났던 벤만큼이나 피상적이다. 



<버닝>, 그리고 <리턴>
<초록 물고기>라는 작품을 오래도록 회자되도록 만든 건, 막동이란 청춘을 더욱 안타깝게 조폭 보스 배태곤의 존재다. 자신의 손아귀에 쥘 수 없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거침없이 제거해 버리는 이 존재의 무참한 악이 그 맞은 편에 있는 선량한 막동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버닝>에서 그 역할을 하는 건 스티븐 연이 분한 벤이다. 그는 직업조차 알 수 없지만, 강남의 빌라에 살며,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대마초를 스스럼없이 피우고, 폐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를 가진, 이 시대 '부도덕, 혹은 탈도덕의 상징'. 그런데 어쩐지 벤으로 그려진 이 '악의 축'이 새삼스럽지 않다. 파괴적이지도 않다. 

얼마전 종영한 sbs의 <리턴>에서 벤 저리 가라할 재벌가 혹은 유력 명문가 자제들의 도덕적 아노미가 '진수성찬'으로 나열되었기 때문이다. 아니 <리턴>을 들 것도 없다. 최근 몇 년 사이 tv 드라마, 그리고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이 영화 <베테랑>에서 연기했던 조태오를 대표로 하여 빈번하게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연장'이다. 그런 면에서 <버닝>은 우리 사회에서는 새롭지 않은 부도덕한 가진 자와, 그 가진 자에 의해 농락당하는 여자와, 그녀를 사랑했던 순진한 남성의 삼각 관계의 재연이라는 점에서 '서사'적 신선함을 접고 들어간다. 



<버닝>, 그리고 <시>
하지만 서사의 신선함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의 빼어남으로 얼마든지 상충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사회에서 끊임없이 부도덕한 가진 자들을 악의 축으로 한 작품들이 계속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창동 감독은 어쩌면 뻔한 이 사회의 부조리한 관계를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과 청춘의 고뇌를 잘 구현해 냈을까?

그 지점에서 이창동 감독의 전작 <시>가 떠오른다. 노인의 처지에 버텨내기 힘든 일을 하면서도 손주를 키워가는 할머니 미자(윤정희 분)가 시를 배우게 느끼게 되는 '세상에 대한 자각'이 뜻밖에도 마주하게 된 현실을 영화는 담담하게, 그래서 더 처연하게 승화시켰다. 할머니의 현실, 손주의 상황은 구체적이었기에, 할머니가 만난 시를 통해 깨달은 자각의 세계는 더욱 처절했다. '안다', '깨닫다', '보다'라는 '인문학적 사고'가 만난 '자각'과 '책임'의 묵직함을 이보다 더 절묘하게 설명해 낼 수 있었을까. 

한 소도시에서 벌어진 청소년들의 부도덕한 사건으로 비롯된 할머니의 슬픈 결말은 할머니가 처한 상황의 구체성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그러기에 2018년 <버닝>으로 돌아온 이창동 감독이 어쩐지 아쉽다.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통해 표현해 내고자 했던 상징을 이해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독이 그려낸 그 상징이 미자 할머니가 살았던 그 현실에 가닿았던 <시>와 달리, 2018년의 청춘의 현실에서는 막연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문학적'인 우리 문학이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쉬이 회자되지 않는 것처럼 상징으로 점철된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낯설지 않은 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치정극은 그 집요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쉬이 다가서지지 않는다. <시>의 상징이 대중과 잇닿지 못해 안타까웠다면, <버닝>의 상징은 대중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여겨진다. 서른의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이지만, 마치 저기 90년대나, 80년대에서 시간 여행을 온 여행자 같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들이 하루키처럼 사는 건 아니다. 본의 아니게 전투에 떠밀려온 몇 포의 젊은이들에게 종수의 전쟁은 사치스럽게 여겨질 수도 있다. 



by meditator 2018. 5. 20. 02:23

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선생님은 졸업장을 나누어 주면서 반에서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네가 최고야, 성실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착했고, 늘 궃은 학급의 일에 솔선수범했지. 세상에 너같은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 선생님의 찬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말이 가진 역설 때문이었다.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반에서 10등 정도를 하면 대학에 가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최선을 다했얻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도 갈 수 없는 정도의 성적을 낸 학생에게 '성실'하다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학생이 보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함이라던가, 마다하지 않은 궃은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지랖이라던가, 심지어 '손해보는 짓'이라고 말한다. 결과로 평가하고, 이득을 잘 챙겨야 좋은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건지, 그래서 우리들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렇게 우리가 잊어버리고 산 '사람 사는 법'에 대해 <나의 아저씨>는 깨우쳐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가 묻어 버리고 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기에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 최고의 환타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리뷰'는 객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 대해 흠씬 마음이 가버려, 콩깍지가 씌워져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름다워 보이듯,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내 마음이 너무 깊이 들어가 모든 것이 고와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가 표현한 '아저씨' 세대의 공감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기에 이 리뷰는 리뷰라기보다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감탄사 같은 것이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여행 대신 할머니의 장례식
동생 기훈(송새벽 분)과 함께 청소 용역업을 하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동생과 어머니 몰래 수익금의 일부를 장판 밑에 숨긴다. 22녀간 다니던 회사에서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짤린 그 답게 뒷주머니를 차려는가 했는데, 그 뒷주머니의 소용처가 <나의 아저씨>답다. 동생 기훈이 질색을 하던 말던, 회사를 짤리고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이 아저씨는 맨날 자신의 삶에 대해 먹고 싸기만 했다며 한탄을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먹고 싼' 것이 아닌 기억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그 '다른 기억'을 위해 몰래, 아니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동생도 알게 모아둔 돈, 그 돈을 상훈은 삼형제가 멋들어진 라이방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고,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 상훈의 꿈을 보면서, 그랬다. 아,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삼형제의 폼나는(?) 여행이겠구나.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알량한 예측을 집어 던졌다. 물론 삼형제는 검은 라이방을 썼고, 검은 슈트를 입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스위트룸도, 빨간 스포츠카도 없었다. 그들이 입은 건 상복이었고, 그들은 함께 지안이(아이유 분) 할머니를 모시는 납골당행 버스에 올라탔다. 상주라고는 이지안 혼자인 쓸쓸한 상가를 본 상훈은 그 동안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상가를 풍성하게 만든다. 동생 동훈이 회사에 짤리게 되자, 너만은 회사에 남아 어머니 돌아가시면 상가를 흥청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라며 탄식했던 그의 '로망'을 지안이 할머니 상에서 실현한 것이다. 즐비한 화한, 그가 불러들인 이웃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격식을 차린 젯상과 절차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모도 잠시, 상훈은 행복해 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바닷가 스위트룸 호텔 여행과 할머니의 장례식, 이 전혀 다른 선택, 바로 여기에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박동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존재감이 없던 사람. 그래서 회사에서도 자신이 해오던 설계팀에서 밀려 안전진단팀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묵묵히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일을 해오던 사람. 형제 중에 가운데,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내색하지 않고 집안의 궂은 일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사람. 청렴했던 그가 자신의 앞으로 잘못배달되어 온 돈 봉투 앞에서 어머니가 말한 형의 분식집 비용으로 흔들려야 했던 그런 사람. 그래서 야망도 열의도 없어 보여 변호사가 된 아내에게 밀쳐지게 되버린 남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공기처럼 꼭 있어야 될 사람이지만, 그 소중함이 당연하게 여겨져 뒤로 밀쳐졌던 사람, <나의 아저씨>는 그런 박동훈을 뜻하지 않게 얽혀진 회사 내 정치와 아내의 불륜이란 사건을 통해 세상 밖으로 길어 올린다. 



가장 불쌍한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방식 
그렇게 보잘 것없이 하지만 당연하게 흐르던 박동훈의 삶에 빚어진 파열음, 본의 아니게 얽혀진 그 사건으로 인해 박동훈은 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의 삶, 그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만난 이지안, 그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애라 생각했던 그 아이가, 박동훈을 불쌍하다고 하자, 그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온다.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받는 위로의 공감과 서러움이 두 사람을 세상 밖에 던져진 사람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고 그 세상 밖으로 던져진 두 사람의 공감과 연대는 그들처럼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누구 하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드라마를 보는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본의 아니게 박동훈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와 도준영(김영민 분)의 불륜을 알고, 도준영과 얽히게 된 이지안은 자신에게 잘해준 박동훈을 구하기 위해 이지안이 할 수 있는 불법적 방식을 통해 그를 돕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이지안의 방식은 외려 삼안e&c의 사내 정치와 엇물려 박동훈을, 그리고 그녀를 위기에 빠뜨린다. 

드라마는 삼안 e&c의 사내 정치, 그런 사내 정치를 둘러싼 왕전무와 도준영의 갈등, 도준영과 박동훈 아내의 불륜,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자의 반 타의반으로 엮인 이지안, 그리고 그런 이지안을 옭죄이는 이광일(장기용 분)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도덕한 잡음들을 드라마의 한 궤로 하면서, 그런 부도덕한 사건들을 헤치고 나가는 이지안의 저돌적이면서 맹목적인 사랑과, 그런 이지안의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보다듬으며 결국 그녀를 부도덕한 웅덩이에게 건져내며, 그 자신도 회생한 박동훈의 미련스럽게 우직한 행보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박동훈의, 그리고 박동훈의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통해, 사람의, 어른됨의 자리를 되집는다. 이제는 무색해 졌지만, 마흔, 중년의 나이를 '미혹'이라 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역설적으로 쉽게 혹해지는 시절, 혹은 요즘 세상은 '키덜트'라 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른답지 않아도 됨을 허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어느덧 누군가를 아니, 무엇보다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속절없이 도달한 이들은 '이익'과 '셈'이 앞서는 세상 속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혼란스럽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바로 여전히 나이만 들었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는 어른들을 위해,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의 격언을 남긴다. 자신이 애써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몇 번 보지도 않은 이지안의 장례식에 쏟아붓고는 한없이 행복해 하는 박상훈처럼, 세상 젤 불쌍하고 추운 아이를 알아버린 바람에 그 아이를 책임지고자 애쓴 박동훈처럼, 그리고 비록 실수는 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려 했던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처럼, 그리고 20년의 애증을 도망치지 않고 답했던 겸덕(박해준 분)처럼, 그리고 기꺼이 '우리 사람'이라며 이지안을 반기고 함께 했던 후계동 사람들처럼. 드라마는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방식에 대해 진득하게 천착하며 나름의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아내보다, 형제가 먼저여서 늘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던 사람, 하지만 그는 정작 아내의 불륜을 혼자 끝까지 삼키며 가정을 지키려 했다. 늘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 마시는게 낙인 세상 별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상훈, 기훈,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 그들은 세상 외로운 이지안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좋은 곳의 인연들이 되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 그 '인연'의 무게를 '행복'으로 답한다. 살아가며 만났던 인연들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며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그 만큼만의 삶이 어쩌면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할 때 가장 한심했던 사람들이, 드라마의 마지막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킨다. 혹시 당신 주변에 당신이 하잘 것없다 했던 좋은 인연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의 삶, 주변의 삶부터 잘 챙기세요라며. 

드라마는 끝났지만 여전히 후계동 사람들은 오늘 저녁도 정희네에 모여 술 한 잔을 걸치며 그렇게 훈훈하게 살아갈 것이다. 대표가 된 박동훈도, 가끔은 이지안도, 그리고 어쩌면 이젠 추억이 된 겸덕도, 그리고 드라마를 본 우리도, 최소한 드라마의 여운이 흐려지기 전에 박동훈처럼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인연에 애쓸 것이다. 

by meditator 2018. 5. 18. 18:22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러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동요의 고운 가사에 애틋해지고, 아이의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을 읽어주다 그 작가의 글과 그림체에 매료되버린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년과 눈사람의 우정을 그린 <눈사람>의 작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외에도 <산타 할아버지>, <곰> 등의 작품으로 아이들은 물론, 동화책 좀 읽어줬다는 엄마들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그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신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작화했던 <에델과 어니스트>가 영화화되어 찾아왔다. 마치 옛벗을 만나듯 레이먼드 브릭스의, 아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로저 메인우드 감독의 <에델과 어니스트>를 만나러 갔다. 




비판적인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c'set la vie'
나와 가까운 사람, 하물며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가 살아온 삶에 대해 '회갑연 상찬'을 넘어선 '조명'이 쉽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부정'의 경우도 있지만, '상찬'이던, '부정'이던, 나라는 존재의 감정적 찌거기를 거르고 부모 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언제나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에델과 어니스트>는 여운이 남는다.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마치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며 한 세대의 삶을 조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 역시도 이 분들처럼 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사을 뛰어넘지 못한, 한 세대로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그런데 <에델과 어니스트>에 돌입하기 전에, 레이먼드 브릭스라는 작가에 대해 우선 '배경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의 부모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흔히 소년과 눈사람의 겨울 한 철에만 존재하는 조금은 쓸쓸한 우정에 대한,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책의 작가로만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의 작가적 세계는 생각보다 비판적이다.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브릭스, 영화 속 그의 부모님들이 전쟁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련한 집에서, 그들이 얻었던 직업을 유지하며 나름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지만, 정작 레이먼드 브릭스는 그 자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한다. '세상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통해 대체로 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부루퉁해 있다. 언제나 세상 살기 괴롭다고 느껴왔고 나이 들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언제나 뚱해왔고 지금은 더 불만투성이다.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불만이 많고 뚱한 그를 통해 표현된 세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전래 동요 모음집인 <마더 구스>는 흔히 동요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현대적인 배경에 노동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인 해석을, 어린이와 작은 사람의 짧은 3일 간의 만남을 그려낸 <작은 사람>은 보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육아에서 인간의 만남에 대한 상징적 이해로,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상황과 그에 대해 순진하리만치 성실한 노부부를 통해 '세계사'와 불가항력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경고하며 세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그의 시간이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려낸 <에델과 어니스트>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보수당 지지자 에델과 노동당 지지자 어니스트 부부의 삶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였던 어니스트는 날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가정부였던 에델과 마주친다. 자신을 보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청년 어니스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늘 집주인의 닥달로 그와의 눈맞춤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에델, 하지만 용감히 그녀가 일하던 집의 문을 두드린 어니스트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이어질 수 있었다. 

한참 젊은 두 연인의 만남, 하지만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였던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만남과 결혼 마저도 규정한다. 당시 런던의 밤거리를 흥청이게 했던 파티 문화는 그들에게는 '사치'였으며, 결혼을 한 그들을 맞이한 건 흰 천으로 겨우 가림막을 가린 침대 하나 없는 20년 장기 융자의 텅빈 집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각자의 형제를 지난 1차 대전으로 잃은 그들이 살아남아 서로의 짝을 만난 건 다행이며 보장된 어니스트의 직업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다 뒤늦게 어니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 에델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던 어니스트의 소망과 달리 레이먼드 단 한 명을 낳고 단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 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들을 귀히 여겼던 에델이었지만, 2차 대전 발발과 히틀러의 런던 공습은 이 부부로 하여금 소중한 아들을 전쟁을 피해 시골로 떨어뜨려 보내야만 하는 '이별'을 겪도록 만든다. 그들이 조금씩 꾸며 가꾸었던 집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반공호가 되었고, 결국 전쟁의 참화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져 갔다. 하늘이 맺어준 그들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이렇게 영화는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이라는 날실과 그 날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사적 사건,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통해 변화해 가는 부부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우유 배달 조합의 성실한 직원이었던 어니스트와 알뜰한 에델은 전후 영국의 복지와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격동의 세월 속 객체로서 부부를 그려내지만은 않는다. 가정부 계급 출신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요양 병원에 병문안 온 장발의 아들에게 빗을 건넬 만큼 깔끔했던 어머니 에델은 우유 배달부인 남편에게 왜 당신이 노동 계급이냐며 반문을 할 정돌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 정부의 일관된 지지를 보였다. 그녀에게 어니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노동 계급'에서의 계층 상승을 보장해준 삶이었다. 

그에 반해 늘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아던 남편 어니스트는 최저 임금 결정안에 두 팔 벌려 환호할 정도로 노동 계급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때론 그가 지지했던 정책이 그의 신념을 당혹스럽게 할 지라도. 그래도 그는 자전거에서, 카트,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은퇴'할 때까지 '해직'의 위험없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에델은 '럭비'를 하는 상류층 계급이 다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아들을 통해 그녀가 소망했던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지만, 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술 학교를 갔고, 손자를 안겨주는 대신 조현병의 아내와 아이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갸륵했지만, 그 아들은 금세 커서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 부모를 낯설게 했다. 결국 성실하게 살아내며 침대와 소파를 마련하고, 선물로 받던 석탄 한 줌 대신, 보일러와 텔레비젼의 문명을 겪어낸 부부였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병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젊은 부부의 열의로 가득했던 집은 아들 레이먼드가 얻어온 배의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그들의 스위트 홈으로 여전했지만, '부부의 인생'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세대의 삶이 마무리되어간다. 



영화는 레이먼드 브룩스의 부모를 통해 1,2차 대전을 경과하고, 전후의 복지 국가 시대를 살아낸 세대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은 달랐고, 그 '주관'과 다르게 국가의 정책과 문명의 발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들의 '순응적'인 태도 그 어디에서도 레이먼드 브룩스가 느꼈던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정경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부모 세대와 그 부모 세대에 대해 '비판적'일 수 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간극일 터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회가 묵직해진 건, 전쟁을 겪으면서 각자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부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낸 그 시간에 대한 다른 공간을 살았던 부모 세대를 둔 자의 회한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에델과 어니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으며, 그들이 '순응'의 대가로 누렸던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처절한 자기 희생과노력을 겯들여야 했다. 이미 '선진국'인 국가의 국민과, '개도국'의 다른 운명이 다른 삶의 길을 걷게 했던 지난 시기에 대한 투영이 <에델과 어니스트>에 대한 감상을 묵직하게 한다. 




by meditator 2018. 5. 18. 04:24

결혼을 하자 시어머님이 말씀하셨다. 그저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젊은 나는 그런 시어머니의 말씀을 콧등으로 넘기며 '아이를 낳자마다 맡기고 제 일을 찾을 거예요', 하지만 정작 아이를 낳자, 난 시어머니의 말씀대로 아이를 키웠다.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분이, 곳이 없을 뿐더러, '엄마가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그 '지상 명제'를 이겨낼 만큼 '내 일'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아이도 키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지금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 고민을 했던 시절에서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 그런데, 그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도록 여전히 '엄마'들의 고민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더 '가중'되었다. 그러니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다. 5월 13일 방영된, <sbs 스페셜 - 앵그리 맘>의 이야기다.


맘고리즘에 갇힌 엄마들 
알고리즘이란 문제 해결을 위한 절차, 단계, 혹은 그를 위한 프로그램을 뜻한다. 그런데, 이 알고리즘의 변형어인 '맘고리즘'은 문제 해결을 커녕, 거기에 빠져 들어가면 헤어나올 길이 없다. 바로 이 땅의 '엄마'들 이야기다. 



다큐의 시작은 sbs 시사 교양국의 한 여성 피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피디는 sbs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여성? 아니다, 시사 교양국의 여성? 역시 아니다. 이 여성 피디가 독보적인 이유는, 피디인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독보적이 되었다. 세상에, '아이 낳기를 권하는 세상'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는 게 신기원이 되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지만, 정시 퇴근은 남의 나라 이야기, 야근과 밤샘을 밥 먹듯이 하는 이른바 '언론계의 명예직'이라 일컬어 지는 여성 피디가 아이까지 낳은 건, 용감무쌍함을 넘어선 행동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여성 피디만이 아니다. 이 시대 여성들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 그 자체가 '이른바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것이다. 흔히 아이를 가진 엄마들이 힘들다 하면, 이미 출산을 경험한 선배들의 따끔한 조언이 있다.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한 거라고. 뒤로 자빠질 듯한 태산같은 배와, 퉁퉁 부은 다리로 변비에, 메스꺼움 등등으로 밤잠을 설쳐도, 그 시절이 편했다는 건 아이를 낳는 순간 모든 엄마들이 절감하기 시작한다. 직장을 가졌던 엄마들이 온전히 떠맡아 하는 독박 육아, 제 아무리 부부가 나누어 지고 싶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 그 와중에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친정 어머니, 시어머니, 돌보미 등등을 전전하는 수난이 시작된다. 그렇다고 잠시 직장을 쉬고 아이를 키우면? 돌아갈 직장의 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저 새 생명이 오시는 경이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아기와의 전쟁, 하지만 자신의 일을 하던 엄마들은, 그 버거운 전쟁에 '업친 데 덥친 격'의 미래를 떠안게 된다. 



2018년 육아를 하는 엄마들의 힘겨운 일생은 위의 그림 한 장으로 설명된다.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일 수 밖에 도망갈 수도, 도망쳐서도 안되는 '엄마'의 일생은 출산→육아→직장→부모에게 돌봄 위탁→퇴사→경력단절→자녀 결혼→손자 출산→황혼 육아… 끝나지 않는 육아와의 전쟁이 된다. 50여 명의 부모들과의 인터뷰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시작하여 고비고비마다 '엄마'란 이유만으로 '소모'되고, '탈진'되는, 그리고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일에서 '방출'되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우리 시대 엄마들이 '화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누적시킨다. 

126조원의 저출산 대책 비용은 어디로? 
엄마들은 반문한다. 정부는 지난 12년 동안 저출산 대책으로 126조원을 쏟아 부었는데, 도대체 그 '돈'이 어디로 갔느냐고. 도대체 저출산 대책으로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기에 '엄마'들은 여전히 '맘고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하냐고. 차라리 허경영이 말했듯이 출산 장려금으로 3000 만원씩이라도 나눠 받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그래서 다큐는 찾아봤다. 지난 12년간의 저출산 중앙 예산과 지자체 예산을 샅샅이 살펴봤다. 저출산과 관련된 '법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저출산' 법안의 실질적 내용이 무엇이야 하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저출산 홍보라는 것이 지자체 기관장들의 자기 홍보 영상이기 십상이다. 또 저출산 취지의 홍보 가요제라는데, 차마 그 영상을 마저 보기 힘들 정도로 낯뜨거운 '아이를 낳자'는 단순한 슬로건 개사 수준이었다. 그래도 시늉이라도 하면 다행이랄까. 현장에서 '저출산 대책 비용'은 생일 맞이 직원 청장과의 간담회, 오카리나 교실, 흡연 음주 예방 사업, 템플 스테이 여가 문화 지원 사업, 말 그대로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갖다 붙이면 저출산 대책으로 '비용'을 잡아 먹었다. 지자체 직원은 솔직히 토로한다. 중앙에서는 '저출산' 관련 예산을 집행하라 하고, 지자체에서는 당장 시행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적당하게 취지를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고. 결국 그 126억이 지난 12년간 이런 식으로 '공중 분해'되었던 것이다.

엄마들이 나섰다, 정치하는 엄마들
그래서 엄마들이 나섰다. 더는 '엄마'를 위하는 척을 하는 정치를 믿을 수 없다며 '엄마들의 목소리'를 직접 실천에 옮기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 시작은 전직 국회의원 장하나 씨이다. 국회의원 시절 아이를 출산했던 장하나 씨는 아이를 낳고도 그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낼 수 없었더, 그래서 결국 국회의원 직을 사퇴했던 자신의 뼈아픈 경험을 일간지에 칼럼으로 실었다. 그리고 이 칼럼에 공감했던 엄마들이 모였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니 하나같이 모두 자신들과 다르지 않았던 것을 깨달은 엄마들은 이제 더는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이 사회에서 밀쳐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했다. 그리고 그 '각오'의 실천으로 비영리 단체인 '정치하는 엄마들'을 만들었다. 



엄마들이 정치를 한다고?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 가능성을 다큐는 뉴질랜드 국회에서 찾아보았다. 아이를 낳고 국회에서 당당하게 수유를 하고, 아이를 안고 국회 연단에 서는 엄마 국회의원 프라임, 그게 현 뉴질랜드 국회의 모습이다. 어디 그뿐인가. 최연소 여성 수상으로 당선된 재신더 아더는 기쁘게 임신 소식을 알렸고, 자신이 아이의 출산과 함께 6개월간의 출산 휴가를 가지게 될 것이라 공표했다. 뉴질랜드라고 첨부터 그랬겠는가. 하지만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심각해지자 사회가 바뀐 것이다. 국회의장이 솔선수범하여 동료 의원의 아이를 안고 의장석에 앉았고, 아이를 가진 엄마 국회의원들이 국회에 당당하게 아이와 함께 등원했다. 

결국 다큐가 말한다. 우리 사회 질기디 질긴 '맘고리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지난 촛불 정국에 다같이 입을 모아 말했듯이, 정치가 바뀌지 않으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여성, 그리고 '엄마'들의 문제에도 마찬가지라고. 그래서 '당사자'인 엄마들이 나섰다. 우리가 스스로 '정치'를 바꾸겠다고. 


by meditator 2018. 5. 14. 15:39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 '욕망'의 사전적 정의다. 그런데 이 '간절함'에 대해 사회와 역사는 늘 '양 극단'의 입장을 취해 왔다. 그 중 하나는 심리적 쾌락주의자인 '홉스(Thomas Hobbes)'의 주장으로, 모든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은 자기 쾌락과 자기 보존의 목적을 지향하며, 인간의 심리적 동인은 '쾌락에의 욕망'이며, 그 대상이 곧 인간에게는 '선'이라 정의한다. 그러기엔 그런 인간의 욕망에 대한 긍정을 기초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체제가 형성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 주장한다. 그에 반해,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za)는 불교에서처럼 인간의 욕망은 '굴레(bondage)'로 보았다. 그러기에 인간의 행복은 이 굴레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통제하여 '체제 내적' 혹은 '사회 내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욕망'은 이 두 가지 의견 중 어느 입장을 취하고 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욕망에 대해. 


공교롭게도 시기적으로는 순차가 있지만, 네 명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드라마들이 있다. 바로, 5월 12일 시작한 sbs의 <시크릿 마더>와 이제 6회차에 접어든 <미스트리스>가 그 주인공들이다. 이들은 비록 연배는 조금 다르지만 30대, 40대 우리 시대를 사는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워 그들의 '욕망'을 드라마적 갈등의 계기로 삼는다. 과연, 이들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여성의 욕망'은 '홉스'적일까? 아니면 '스피노자' 적일까? 이들을 통해 우리 시대가 바라보고 있는 여성, 그리고 욕망은 또 어떤 것일까? 



엄마들의 욕망; <시크릿 마더> 
sbs 주말극으로 첫 선을 보인 <시크릿 마더>, 그 시작은 '강남', 그곳에서 '아이'의 교육을 통해 자신의 열정을 풀어가는 네 명의 엄마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42세의 전직 의사인 김윤진(송윤아 분), 40세 강혜경(서영희 분), 42세 명화숙(김재화 분), 36세 송지애(오연아 분)가 그들이다. 같은 명문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를 둔 '강남'엄마인 이들의 하루 스케줄을 아이를 따라 움직이며, 아이들의 보다 좋은 교육 정보와 그 실천이 이들 네 엄마 모임의 근간을 이룬다. 

이렇게 네 명의 열혈 교육 맘을 앞세운 <시크릿 마더>를 보고 있자면, 2013년 방영된 kbs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 <그녀들의 완벽한 하루>(4부작)이 연상된다.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닌 명문 유치원을 배경으로 모여든 역시나 네 명의 교육 맘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이 드라마는 하지만, 가장 '명문'이라는 이 '유치원'에 모여든 '명문'이지 않은 엄마들의 비밀이 폭로되며, 아이를 통해 계층 상승의 대리전을 치루는 여성들의 '욕망'을 낱낱이 해부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첫 회 연방으로 4부작을 방영한 드라마는 같은 그룹이지만 성적에서 늘 뒤처지는 아이를 위해, 솔선수범하던 엄마 김윤진이, 더 나은 성적을 위해 '입시 대리모'라는 신종 직종의 여성을 들이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이혼, 별거, 그리고 과거까지, 그럴듯한 강남 엄마의 속살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포문'을 연다. 남 보기엔 '현모양처'이지만, 그들 각자의 속내로 들어가면, 아이를 위해 직장까지 그만두었지만 딸을 잃어버린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전직 정신과 의사에서부터, 지방대 출신이라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위장 이혼까지 감행하고, 남들의 이목때문에 별거 중인 남편을 출퇴근시키는 등,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각자의 문제'를 '아이의 교육'을 통해 해소하고, 자신을 증명해 내고자 한다. 결국 그들 각자의 욕망이 또 다른 '문제'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30대 여성들의 욕망; <미스트리스> 
<시크릿 마더>가 40대 여성의 욕망을 '엄마'라는 사회적 존재를 통해 풀어가고자 한다면, 미드 원작이 있는 <미스트리스>는 여성 그 '욕망'을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다. 30대 중반, 그 연배의 여성은 '무엇을 욕망하는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드라마는 '그녀들의 욕망'을 전면에 드러내는데 꺼리낌이 없다. 그리고 드라마는 마치 30대 여성의 '욕망'에 있어 '관건'이 '성'이라는 듯이, 그녀들의 '성', 혹은 남녀 관계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고자 한다. 극의 중심에 놓여 있는 건 한가인이 분한 장세연이지만, 정작 <미스트리스>란 드라마의 '농염한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건, 김은수(신현빈 분), 한정원(최희서 분), 도화영(구재이 분)의 성적 욕망이다. 

'성적 욕망'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미혹'에 빠진다는 점에서는 장세연도 그리 다르지 않다. 2년전 바다에서 실종된 남편, 그러나 뜬금없이 걸려온 남편으로 연상되는 전화, 그런 혼란스러운 가운데 아이의 유치원 학부형으로 한상훈(이희준 분)이 접근해 오며 그녀를 흔든다. 30대 그녀들이 흔들리는 건, 남편의 유무, 결혼의 유무와 관련이 없다. 아이를 낳기 위한 섹스에 골몰하는 한정원 부부의 관계는 외려, 이 시대의 결혼이라는게 얼마나 위태로운 관계인가를 방증할 뿐이다. 선생님과의 불륜에 빠졌던 김은수나, 결혼한 전남친과의 묘한 비지니스적 관계에 흘러들어가는 도화영이라고 다르지 않다. 결혼이란 제도의 안에 있건, 바깥에 있건 그녀들은 우리 사회를 공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이 제도와 얽혀들며 그녀들의 욕망을 복잡하게 만든다.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를 통해 전면에 내세운 여성들의 욕망은 극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즉, 욕망은 그녀들로 하여금 위태로운 갈등으로 그녀들을 유도하는 '유인제'의 역할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드라마는 욕망을 다루지만, 즉 언뜻 보면 '욕망'에 대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듯하지만, 그로 인한 '갈등'에 천착하여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통제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던 욕망'을 대상으로 한다. 또한 40대 여성은 '모성'의 존재이며, 30 여성이 '결혼'이라는 제도와 피치 못하게 엮인다는 점에서 '당대'적인 한계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또한 '강남'이라는 지역적 특성을 더하여, 엄마가 된 여성들의 '아이를 통한 대리 성취욕' 역시 긍정적이진 않다. 그렇다고 <미스트리스> 속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 역시 불온하거나 불안하다. 

또한, 이들 드라마는 이런 그녀들의 '욕망'이 한편에서 그녀들을 '갈등'으로 이끌어가는 유도제로 작동하는 동시에, 또한 시청자들을 손쉽게 흡인시키는 '도구'로도 작동한다.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미스트리스>는 극 초반 끊임없어 남녀의 정사 장면을 내세우며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눈요기' 혹은 '선정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미스트리스>가 1%에도 못미치는 시청률로 고전하고 있는 점은, 이 시대의 시청자들이 내용성없는 눈요기에 냉정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이며, '내용성'없는 욕망의 전시 역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시크릿 마더>나, <미스트리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이야기'이다. 강남 엄마들의 지칠줄 모르는 교육열을 내세운 <시크릿 마더>는 김윤진의 집에 들인 입시 대리모를 통해, 김윤진의 숨겨진 과거와 트라우마를 드러내며 '미스터리'한 장르로 본격적인 이야기를 펼친다. 매회 이렇다할 내용보다 여주인공들의 '욕망'에 집중했던 <미스트리스>도 이제 6회에 들어서며 보험조사원이었던 한상훈의 실체가 드러나고, 김은수, 한정원, 도화영 역시 미스터리한 사건의 중심에 놓여지며 극의 전개가 본격화 되었다. 결국 드러난 욕망을 통해, 그 속에 숨겨진 그녀들의 진짜 사연, 혹은 진솔한 '욕망'에 접근하고자 한다. 과연 이 욕망이라는 '통과 의례'를 통해 우리 시대 3,40대 여주인공이 도달할 곳은 어딘지, 그들 통해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이 시대 여성들의 속내는 무엇인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by meditator 2018. 5. 13. 18:52
孟子曰(맹자왈)  人皆有不仁人之心(인개유불인인지심)
惻隱之心(측은지심)은 人皆有之(인개유지)하며
惻隱之心(측은지심)은 仁也(인야)요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라면 사람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그 측은지심이 인의 시작이다.

중학교 때였을까? 아니면 고등학교 때였을까? 학교 윤리 수업 시간에 배웠던 맹자의 성선설, 그 기초가 되는 문장이다. 맹자는 그 예를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아이로 들었다. 엉금엉금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아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순간 가슴이 철렁내려앉으면서 측은한 마음이 엄습할 것이요, 구하려 달려갈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은 그 아이가 어느 집안 아이라는 헤아림이 앞서 부모와 좋은 인연을 맺으려는 마음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마음도 아니고, 구하지 못했다 욕먹을까봐 달려간 것이 아닌, 이해득실이 앞선 마음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어쩌지 못한 마음이 앞서서 달려간 것이며, 바로 여기에 인간의 본성, 인, 착함의 근원이 있다고 하였다. 



뒤늦게 배우는 맹자의 측은지심 
시시하다고 생각했었다. 동양 최고의 사상가라는 맹자가 '인'을, 착함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것도 그렇고, 우물에 빠진 아이 구하는게 인이라니, 그 별 거 아닌 마음이 별 거 아닌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사는 시간만큼, 살아온 세상만큼 그 '시시한 생각'이 참 별나라의 일만큼이나 '인간'에게는 '난망'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학창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시시한' 인에 대한 해석을 드라마에서 발견하게 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나의 아저씨>에서. 

상무 후보 인터뷰 과정에서 등장한 '이지안', 깨끗한 이력서, 특기가 달리기인 이 '인간'을 뽑은 것에 대해 윤상무(정재성 분)는 혹독하게 꼬집는다. '스펙'이 차고 넘치는 세상, 딸랑 그 한 줄에 뽑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고. 그 질문은 이지안도 했었다. 왜 자기를 뽑았냐고. 그때 박동훈(이선균 분)은 달리기로 부터 '내력'을 끄집어 냈었다. 그리고 이제 윤상무의 다그침에 박동훈은 '스펙'좋은 인간들의 '부력'(浮力)을 들어 이지안의 '내력'을 다시 한번 증명해 낸다. 그런데 새삼스레, 그 '달리기'에서 내력을 떠올린 박동훈의 혜안에서 '측은지심'이 떠올랐다. 너도 나도 줄줄이 '스펙'을 자신 앞에 훈장처럼 다는 세상에, 달리기 말고는 칸을 채울 수도 없는 이지안에게서 박동훈은 일찌기 '측은지심' 즉, 그 무엇도 내세울 것 없는 우물가에 던져인 아이에 대한 연민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하기 전부터, '아저씨'와 '아가씨'가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억측에 시달렸던 드라마는 꿋꿋하게 14회차에 이르기까지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인간에의 연민'이라는 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설득을 해왔다. 그리고 그 시작은 드라마에서 그려지지 않았지만, 이력서에 딸랑 '달리기'라고 밖에 쓸 수 없는 한 파견직 사원에 대한 박동훈의 '연민'으로 부터 시작되었을 듯하다. 그리고 그의 오지랖은 틀리지 않아, 이지안은 역시나 '측은지심'이 아니고서는 돌아보아 지지 않을 '인간'이었다. 소녀 가장도 아니고 '손녀 가장', 몇 줌의 커피 믹스로 버텨내는 부모가 남긴 빛을 갚아내야 하는 일상, 그리고 낙인과도 같은 범죄의 내역. 

그리고 그 '측은지심'이 아니고서는 '돌아보아지지 않을' 인간을, 그 역시 이제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처지'에 놓인 박동훈이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기 시작한다. 그 누구도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등 두드려 줄 사람이 없어, 스스로 스스로 홀로 다독이며 견뎌왔던 박동훈이 눈밝게 발견해 냈다. 그리고 그 박동훈을 역시나 '같은 마음'으로 이지안이 '공감'했고. 그들은 '남자'와 '여자'였고, '아저씨'와 '아가씨'였지만, 그런 사회적 존재 이전의 '인간'으로 서로를 '측은지심'을 가지고 '공감'하고 '동지'가 되었다. 상무가 된 박동훈이, 그 어떤 축하를 받아도 그의 눈 한 구석이 비어보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 그건 마치 어려서부터 유일한 친구였던 겸덕(박해준 분)이 친구들 사이에서 '언금'의 존재가 되어왔던 그 시절과도 같다. 결국은 그들의 부재에서 오는 외로움에 눈물이 핑 돈 얼굴을 숨기기 위해 밖으로 홀로 나서야 했던 그런 사이가 되었다. 



<나의 아저씨>; 연민의 서정시 
<나의 아저씨>를 채우는 건 온통 '연민'이다. 동생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된 박동훈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미처 동훈의 집에 발조차 들이지 못한다. 내 동생을 두고 바람을 핀 제수씨한데 악다구니를 하는 대신, 그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찾아온 동생을 눈물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 끝에서 자신이 못나서 제수씨를 고생만 시켰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홀로 삭이려 했던 동생이 불쌍하다며 눈물을 쏟는 상훈, 그의 부질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나의 아저씨>를 채우는 정서다. '형제들끼리의 참치 회식'을 핑계대지만 가게 밖으로 나와서 고개를 잔뜩 빼고 박씨 형제를 기다리는 동네 친구들의 하염없는 우려와 기다림의 마음이다. <나의 아저씨>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변변찮다. 형도, 동생도, 주변 사람들도 괜찮아서 돌아봐져지는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 접어주어야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래서 그들에게 마음이 간다. 드라마는 오늘을 다루고 있는데, 우리는 마치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의 이야기처럼 드라마에서 '향수'를 느낀다.

그렇게 우리는 이제 그게 낯선 세상에 살게 되었다. <나의 아저씨>에 대한 '오독'은 '연민'이 낯설어진 세상의 반증이다. 우물가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기를 봐도, 주변을 살피고, 혹시나 나의 연민어린 행동이 오해를 받을까 저어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저씨가 아가씨에게 연민의 마음을 보이면 그 저의를 헤집고, 그게 어떤 마음일까 가늠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윤상무가 이지안의 숨겨진 기록을 뒤짚어 그 '전과'를 헤집듯이, 그 '연민'의 갈피를 헤집어 그 속에 혹여라도 한 방울 튕겨진 '남자', 혹은 '여자'의 마음을 들추어 내려 하는 데 익숙해졌다. 아니, 인간의 연민이 그냥 낯설어졌다. 경험해 보지 않은 이 '정서'에 다들 이 감정이 무엇일까 의문 부호를 가지고 14부의 여정을 쫓아왔다. 

그런 세상에 대해 박동훈의 일갈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당신도, 나도 누구도 그럴 수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범죄'가 아닌, '정당 방위'에 대해 '법'이 보호하고자 '흔적'조차 지워 버렸는데, 그것을 끄집어 내서 다시 한번 이지안을 '재판'하려는 세상에 대한 그의 높은 목소리는, 기역자를 놓고, 굳이 낯이라 우기고 싶은, '연민'이 상실되어, '인간됨'이 멸종되어 가는 세상에 대한 일갈의 다름아니다. 그저 곧이 곧대로 보이는 대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버거운 세상을 저마다 헤쳐 나가야 하는 '인간에의 연민', 그 이해의 마음에 대해 드라마는 간곡하게 전한다. 

하지만 결국 이지안의 말처럼, 사람들은 무슨 보물찾기의 보물이라도 발견한 양, 이지안의 숨겨진 사연을 듣고 웅성거린다. '이해' 보다는 '곡해'가 쉬운 세상, 여전히 박동훈은 '멸종 위기의 동물'처럼 홀로, 이제 4번 이상 잘해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이지안을 향해 '질주'할 것이다. 그의 질주가 부디 그만의 이해받지 못할 외로운 레이스가 되지 않기를, 우리가 잃어버린 연민이 아름답게 번져가기를. 부디 '그들이 뿌린 연민'의 대가가 처절하지 않기를. 이제 마지막 2회를 남긴 드라마에 대한 소망이다. 
by meditator 2018. 5. 11. 14:46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이라면 '미디어'와의 전쟁은 세계 1,2차 대전 저리 가라 할 통과 의례의 진통이다. 70년대의 엄마들은 돈만 생기면 만화방으로 달려가는 아이들때문에 골머리를 썩혔고, 8,90년대의 엄마들은 tv 속으로 빨려들어갈 듯한 아이들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으며, 2000년대 이후엔 외출한 엄마의 가방 속에서 마우스며, 심지어 컴퓨터 자판이 들어있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더랬는데, 요즘 엄마들에겐 그 대상이 '스마트폰'이 되었단다. 앞으론 요즘 한참 tv에서 외국어도 알아서 익힌다고 현혹시키는 AI가 되려나. 5월 6일 방영된 <SBS스페셜-스마트폰 전쟁 내 아이를 위한 스마트폰 사용설명서>는 바로 그 요즘 엄마들의 고민거리인 스마트폰 전쟁을 다룬다. 




친절한 베이비시터 스마트폰 
식당에 가면 이젠 익숙한 풍경이 있다. 자녀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식당에서 아이가 '부잡스럽게' 하지 않도록 익숙하게 스마트폰을 꺼낸다. 아이 앞에 켜진 스마트폰의 동영상, 그리고 그 속으로 빨려들듯 집중하는 아이들, 덕분에 부모들은 아이에게 음식을 먹이는 것도 편하고, 부부는 물론 함께 온 일행과의 식사 자리도 원활해 진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놀이방에서 데리고 온 아이, 놀아달라 보채지만 할 일이 태산같은 엄마는 그 '칭얼거림'을 달래기 위해 '스마트폰'의 도움을 얻는다. 오랫동안 차를 타고 이동할 때도 이보다 더 좋은 도우미가 없다. 이렇게 요즘 아이를 키우는 부부들에게 '스마트폰'은 어느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베이비 시터'가 되었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스마트폰 
그런데, 그 '편하기만 한' 도우미가 어느새 내 아이의 영혼마저 빼앗아 가버렸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절대 '스마트폰' 따위에 의지하지 않겠단 각오가 무색하게 '일과 육아'에 치인 엄마의 '편의적 수단'으로 야곰야곰 자리를 차지하던 스마트폰이었는데 이젠 아이는 '엄마'와 눈을 맞추는 대신 스마트폰만을 하겠다고 떼를 쓴다. 

스마트폰 사용이 시작된 지 10년, IT 강국 답게 초등학생 스마트폰 사용 비율 역시 세계 1위다. 서울 지역 초등학생 가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72%가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현대 해상) 그리고 이런 일상화된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은 이제 갖가지 문제점으로 우리의 가정을 위협하고 있는 중이다. 

현대 해상에 따르면 보행 중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비율은 41%로 이는 작년과 비교하여 15%나 증가한 수치다. 당연히 그로 인한 각종 사고가 발생하며, 그 중 대부분은 자동차와의 충돌인 경우이다. 하지만 다큐에서도 등장하듯 엄마와의 약속이 무색하게, 아빠의 잔소리 따위, 아이들은 집에서나 외출시 그 어느 곳에서도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 있다면 거기에 정신이 빼앗긴다. 거실 벽을 가득 채운 책이 무색하게 집에 들어온 아이는 늦은 시간까지 스마트폰과 시간을 보낸다. 학교 선생님은 쉬는 시간 불조차 켜지 않은 교실에서 모든 학생들이 말 한 마디 없이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고 있는 광경을 보면 무섭기 까지 하다고 토로한다. 

물론 뒤늦게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준 걸 후회하는 부모들은 달래도 보고, 윽박질러도 보고, 갖은 수단을 다 써보지만 여의치 않다. 이건 학교 선생님들조차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각종 사이트에서 횡행하는 '급식체'를 쓰며,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조롱하는 아이들과의 대화는 벽에 부딪치기가 십상이다. 

겨우 2,3살 밖에 안된 아이가 자유자재로 스마트폰의 각종 기능을 섭렵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이트를 찾아 들어갈 때만해도 '스마트 영재'가 아닌가 반색을 하던 부모들은 이제 '스마트폰'에 영혼마저 빼앗긴 아이들이 걱정스럽다.

당연하다. 전문가는 말한다. 아이들에게 이유식을 시작할 때 거의 간이 되지 않는 음식부터 시작하듯, '자극'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책이라던가, 장난감을 통한 '자극'에 길들여지기도 전에 스마트폰을 쥔 아이들은 '아주 간이 센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음식에 길들여져 버리는 것과도 같은 상태가 된 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극은 '뇌'의 일정 부분만 발달시키기에 아동 발달에 있어 적정한 단계를 왜곡시킬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다큐는 그 예로 이른바 '마시멜로 실험'이라 알려진 실험을 '스마트폰'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행한다. 아이의 눈 앞에 맛있는 초코 과자를 두고, 만약 선생님이 다시 올 때가지 기다리면 이 과자 두 개를 다 먹을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건다. 물론 기다릴 수 없다면 언제라도 벨을 울릴 수 있고, 그때는 과자를 두 개가 아니라 한 개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아이들에게는 어떤 결과가 나올까. 발달 단계에 따라 미래의 댓가를 예측하고 기대하며 인내하는 능력을 측정하는 이 실험에서 '스마트폰 자극'에 많이 노출된 아이들의 경우 또래 아이들보다 낮은 '인내의 결과'를 낳았다. 기다리는 대신, 벨을 눌러 당장의 과자를 취득하고자 한 것이다. 

적정한 발달과 함께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성'과 관련된 무방비한 자극이다. 스마트폰의 활용에 능숙한 아이들은 인터넷 세상에 지뢰처럼 숨겨진 각종 음란 동영상을 능숙하게 찾아낸다. 심지어 선생님 앞에서 자랑스레 부모님이 걸어놓은 '잠금 장치'를 풀었다며 말할 정도로. 이렇게 '위험 부담'조차 없는 음란물에 대한 용이한 접근은 아이들의 성 의식에 심각한 왜곡을 낳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은 어른들의 문제, 쉽지 않은 해법 
그렇다면 어른들보다 이미 훨씬 능숙하며 심각한 중독 상태를 보이고 있는 어린 스마트폰 유저들에 대한 해법은 없는 것일까? 프랑스에는 올 가을부터 모든 초 중등 교육 기관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법을 시행한다고 하는 걸 보면 '어린 유저'들에 대한 고민은 전세계적인 고민거리임에 틀림없다. 우리 나라에서도 뜻있는 엄마들을 중심으로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아이들의 스마트폰 구입 및 사용을 제한하는 법을 만들어 달라는 의견이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헌법에서 '인권'이 우선되는 한에서 '인권'의 제한이 될 수 있는 법의 발의는 쉽지 않다고 이 법의 발의에 앞선 국회의원은 토로한다.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지만, 사회적 해법 조차 마땅치 않은 이 '중독'에 대해 다큐는 보여준다. 스마트폰이 중독인 가정, 하지만 아이들이 스마트폰을 많이 써서 하소연하는 부모들 역시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에 할애하고 있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엄마랑 실랑이를 벌인 아이, 모처럼 쉬는 날 엄마는 '**팡'을 하면서 좀 쉬게 놔두라며 아이을 밀쳐낸다고. 왜 스마트폰을 하냐는 질문에 아이는 답한다. 외로워서 라고. 스마트폰 세상이 없으면 왕따가 되는 아이들의 세상, 엄마가 일하러 나간 사이, 그 헛헛함을 달래줄 동영상, 다큐는 말한다. 엄마보다 좋은 스마트폰은 없다고. 하지만 아이가 엄마를 찾을 때 그곳에 없었던 엄마를 '친절한 베이비 시터' 스마트폰이 대신 한 거라고. 긴 밤 홀로 남겨진 아이를 위로하는 게 스마트폰 밖에 없는 사회이다. 결국 아이들의 문제라 했지만, 다큐가 증명한 건, 어른들, 어른들 세상의 문제다. 

어린 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주지 않으면 되지만, 젊은 엄마들의 하소연처럼, 우리네 젊은 부모들은 너무 바쁘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돈도 벌어야 하고, 해야 할 집안 일도 많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해결의 끝은 쉬이 잡히지 않는다. 다큐는 아이의 주도적인 해결을 유도하라고 하지만, 이미 '너무도 의존적'인 스마트폰 유저들과의 '지각어린 타협'은 쉽지 않아 보인다. 


by meditator 2018. 5. 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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