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우스개처럼 전해지는 해프닝들이 있다. 공시생 학원에 엄마가 전화해서 우리 아이 학원 왔냐든가, 혹은 대학 수강 신청 관련하여 나서는 모성이라던가, 이 '웃기지도 않는' 다 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실화라는 점에서 우리는 실소한다. 실제 대학 학부모 방담 자리에서 우리 아이가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는 하소연을 하는 엄마를 목격하기도 했으니, 아마도 사실일 터이다. 대학에 가서도 여전히 '엄마'의 품에 있어야 하는 아이들, 그러니 초등생의 경우 오죽할까? 부모들의 지시에 따라 방과 후의 시간을 보내는 건 당연지사가 된 지 오래 되었다. 방과 후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난 아이들은 대부분 지쳐 있다. 하루 종일 학교 생활을 했으니 당연, 하지만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도 다시 공부를 해야 하는 이런 삶에 '이견'이 없다. 힘들고 지쳐도 그러려니 한다. 그래서 더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다. 그렇게 '부모'가 '스케줄 짜준'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아이들과 가정의 달 5월에 <원더스 트럭>을 한편 보는 건 어떨까? 아이에게도, 부모에게도 성장과 부모의 자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의 영화다. 




'시궁창'에서 별을 찾아 떠난 아이들
<원더스 트럭>의 주인공은 소년 벤(오크스 페글리 분)과 소녀 로즈(밀리센트 시먼즈 분)이다. 그런데 이 두 소년과 소녀가 살고 있는 시공간이 다르다. 하지만 시공간을 달리 하는 이 소년과 소녀를 잇는 공통점이 있다. 소녀가 물가에 띄워 보낸 종이배에 그녀가 쓴 단어 'help',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 하지만 그들은 그 '도움'을 찾아 스스로 길을 떠난다.  

미네소타 주 호숫가에 사는 소년 벤이 사는 시간은 1977년, 사서인 엄마 엘레인(미셸 윌리암스 분)와 단 둘이 사는 소년은 여전히 늑대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 꿈 속에서 '벤'을 불러 깨워주던 아빠의 목소리, 하지만 현실의 그를 깨워주는 아버지는 없다.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마다 '나중에'라며 말하며 미루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나중이라 말하다 기회를 잃을 지도 모른다며 투박하게 농담을 던지던 벤의 말은 교통사고로 진실이 되어버렸다. 엄마가 그리워 엄마의 방에서 옛날을 추억하던 벤은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아빠가 보낸 카드에서 찾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다 그만 벼락을 맞아 청력을 잃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청력을 잃어버린 벤은 소녀 로즈와 또 하나의 공통점이 생긴다. 1927년 무성 영화와 같은 흑백의 공간 속 소녀 로즈, 그녀는 듣지 못한다. 그리고 듣지 못하는 그녀와 눈조차 마주치기 싫어하는 아버지는 그런 그녀를 세상과도 분리시키려 한다. 그런 '답답한 삶'을 견디지 못한 소녀 로즈는 가정교사의 가르침 대신, 긴 머리를 끊어내며 아버지가 만들어준 새장과도 같은 삶을 뛰쳐 나온다. 소녀가 본 영화 속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듯, '무성영화'의 세상 속에서 살 수 없는 소녀는 '무성 영화'처럼 자신을 가두려는 '아버지'의 세상을 스스로 떨쳐나온다. 



그렇게 1977년과 1927년 흑백과 총천연색으로 색채마저 달리하는 50년의 시공간을 넘어,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과 소녀는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 길을 떠난다. 어머니가 남긴 책 <호기심의 방 원더스 트럭> 속 켄케이드 서점을 찾아 '아버지'의 향방을 찾으려는 소년과 이제는 자리를 잃은 무성 영화 속 주인공인 어머니를 그리워, 여배우인 어머니가 연극 배우로 공연하는 극장을 찾아 온 소녀는 '뉴욕'이라는 공통적 공간으로 향한다. 

순간의 선택이 만들어 낸 기적
길을 떠난 소년과 소녀의 여정은 당연히 순탄하지 않다. 1927년이든, 1977년이든 그 시대의 번화가였던 뉴욕의 번잡한 소음 속에서 여전히 '묵음'의 세계 속에 갇힌 소년과 소녀는 그 '소음'의 세계 속에서 이방인 일수 밖에 없다. 달려오는 마차의 소리는 위기가 되고, 친절한 소년의 한 마디는 무용지물이다. 

소년 자신이 동일시했던 무성 영화 속 흠모했던 주인공인 줄 알았던 여배우는 알고보니 소녀의 어머니 릴리안(줄리안 무어 분)이었다. 하지만 힘들게 자신을 찾아온 딸에 대한 반응은 떠나온 집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 혼자서 위험하게 돌아다니냐며 펄쩍 뛰기만 하는 어머니를 두고, 다시 자연사 박물관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 그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았던 뉴욕에서 친절하게 자신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던 소년을 따라 역시 무작정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한 소년, 그렇게 두 사람의 여정은 시간을 두고 다시 겹친다. 

하지만 박물관에서 두 사람의 여정은 쉽지 않다. 수상스런 그녀를 의심하는 박물관 경비원들의 추격, 잡힐듯이 잡히지 않는 친절했던 소년과의 숨바꼭질,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방을 박물관처럼 꾸몄던 벤과, 역시나 자신의 방을 '디오라마(작은 공간 안에 어떤 대상을 설치해놓고 틈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입체전시)'처럼 꾸몄던 로즈는 시대를 달리한 자연사 박물관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안식'을 느낀다. 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운석에서 시대를 달리하며 조우하는(?) 두 사람, 하지만 영화는 '환타지 같은 기적'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선택의 기적을 선물한다. 



1927년에 스스로 부모가 만들어 놓은 새장 같은 세상에서 한 걸음을 내딛은 소녀는 뉴욕 자연사 박물관에서 오빠를 만나 자신이 살아갈 새로운 세상을 연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공부와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들까지 얻으며 행복하게 살던 소녀는 이제 50여 년의 시간을 보내고, 오빠와 함게 하는 서점에서, 아빠를 찾아 그곳으로 온 손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1927년의 로즈와 1977년의 벤은 그렇게 시간을 뛰어넘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또한 벼락으로 청력을 잃은 상실감에 시달리던 벤은 그 상실감을 공감해줄 동변상련의 동지를 만나게 된다. 로즈가 부모가 만들어 준 새장 같은 집을 뛰쳐나오지 않았다면, 벤이 아버지를 찾아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스스로 세상 속으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용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연'의 기적을 만든 것이다. 

1927년의 무성 영화와도 같은 뉴욕, 그리고 1977년 데이빗 보위의 '스페이스 오디티'와 교향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ost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컬러'의 현란함으로 표현된 뉴욕, 동일한 공간이지만 다른 시간대가 가지는 문화적 느낌을 색채감으로 표현해낸 영화는 그 분리된 공간 속에 스스로 한 발을 내딛은 소년과 소녀의 인연을 1977 실제 벌어진 뉴욕 정전 사태를 배경으로 별빛 속의 조우로 기적처럼 그려낸다. 결국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선택, 그 선택의 중요성을 부각하며 영화는 스스로 빛나는 삶의 아름다움을 매우 '영화적인 형식'으로 풀어낸다. 그러기에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이 시대의 부모, 부모가 정해준 울타리에서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어찌할 줄 모르는 이 시대의 가족에게 한번쯤 봐야 할 필독서 같은 영화이다. 




by meditator 2018. 5. 6. 17:10
영화의 시작과 함께 화면을 가득 채운 건 줄리엣 비노쉬의 풍만한 가슴이 드러난 남녀의 정사이다. 하지만 그 '나신'의 뒤엉킴이 자아내는 '므흣'한 감상에 빠져들기도 전에 우리는 그 '남녀의 정사'가 마치 우리가 밥을 먹고 잠을 자듯 살아가는 일상사의 연장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치 설탕을 넣어야 하는 음식에 잘못들어간 소금으로 인한 식사 자리의 고약함처럼, 그렇게 '정사'를 벌이는 두 남녀의 불협화음은 베드씬의 환상을 고르란히 깨어버리고, 그것이 지극히 평범한 우리네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걸 절감케 한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장황한 언어 뒤의 진실
정사의 매료됨을 깨어버리는 주된 이유는 바로 줄리엣 비노쉬가 분한 이자벨의 만족스럽지 못함 때문이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다는 그녀의 언어는 지금 당신이 전혀 나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처럼 전해지고, 그 역설의 언어는 파트너인 상대방을 더욱 고전케 만든다. 때로는 생수 한 병으로, 혹은 예정된 약속에 대한 간과나 무시에 대한 장황한 설전으로 번지는 두 사람의 대화, 그러나 '언어'는 솔직한 속내에 대한 예의바른 절차일 뿐, 그 '관례'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건 여전히 결혼 반지를 빼지 않는, 아니 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한 남자 빈센트(자비에 보부아 분)와 그런 남자가 야속한 여성 이자벨이다.

그리고 이자벨의 해프닝은 이어진다. 현대 미술관 관장이자 화가인 이자벨, 그녀와 일 관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던 친구인 연극 배우(니콜라스 뒤보셸 분)와 대화 역시 엇물린다.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권태로운 친구는 그 삶의 권태로움을 이자벨을 통해 도피하려 하고, 그 친구의 알듯 말듯한 속내는 이자벨과의 장황한 대화를 통해 결국 하룻밤으로 이어지지만, 끝내 결혼을 파기할 수 없다는 친구와 이자벨은 관계를 이어가지 못한다.

그런 식이다. 그녀는 자신의 갤러리로 가지고 있으며 예술가로서 나름의 입지가 있는 듯하지만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 전 남편과 딸 한 명을 두고 이혼한 그녀, 아직도 그녀 아파트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남편은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열 살 먹은 딸 아이마저 불안스럽게 만드는 그녀의 방황에 짜증을 낸다. 영화 전편에 걸쳐 그녀는 자신의 삶을 채워줄 그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룩스

때론 우연히 여행지에서 충동적으로 만난 남자에게 끌려 함께 지내기도 하지만, 그녀와 계층적 위치가 다른 그가 그녀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매번 거리 생선 가게에서 자신의 별장을 내밀며 그녀의 관심을 구하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그녀가 해법을 찾아나선 '점쟁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그녀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자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 하지만, 그런 그에게 그녀가 구하는 건, 영화 속에 등장하지 않은 남자들의 구애이다.

결국 영화는 '자존'의 이야기였을까? 영화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태양은 스스로 빛을 낸다. 그녀에게 남성적 관심을 보이면서 점쟁이로서 본연의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기 위해 줏어 삼킨 점쟁이(제라르 드 파르디외 분)의 '자신 안에서 스스로 빛을 찾으라'는 그 말이 이 영화의 주제였을까?

당신의 태양은 당신이 빛내라 
이자벨은 '관계'에서 평안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관계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그녀를 만나는 남자들은 푹 파진 티에, 긴 부츠, 짧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짙은 화장을 한 그녀의 섹시한 외양만을 보고, 'enjoy'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정작 그녀가 원하는 건, '결혼'마저 파기하며 그녀와 '영속적'이며, '안정적'인, 그리고 심지어 계층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만족감을 줄 대상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듯 그건 수많은 남자들과의 '편린'과도 같은 관계로 그녀에게 '공허함'을 짙게 만들 뿐이다. 뜻밖에도 은행가든, 연극배우든 결혼을 한 남자들은 그들이 이미 맺은 사회적 관계인 결혼을 깨뜨릴 의지가 없고, 그녀의 마음과 기대는 늘 상대방과 보조를 맞추기가 쉽지 않다.

결국 영화는 '관계'를 통해 '자존'의 완성을 구하려는 그녀를 역설적으로 '자존'의 결핍으로 귀결되게 한다. 이는 흔히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말하는 '자존감'에 대한 질문에 도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건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정의이다. 하지만 '집단성'이 해체된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각자의 삶을 '각자가 책임져야 하는' 주체가 된다. 각자가 나면서 부터 소속된 집단에 의탁해서 그 삶이 해결되고 진행되는 전근대 사회에서, 근대, 현대를 경유하며, 인간은 '삶의 주체성'을 얻은 대신, 그 '주체'의 무게를 고스란히 개인 짊어져야 하는 처지에 이른 것이다. '집단성'을 상실한 개체의 불안마저 자신이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사회이다. 스스로는 빛도 내지 못하는 행성인에게 감히 태양의 정체성을 입힌다.

렛더 선샤인 인ⓒ 씨네 룩스

이자벨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짊어져야 하는 '주체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이혼까지 해서 완벽한 개체로 독립적이다. '남자'로 상징될 뿐 가족도, 친지도 이렇다할 '영속'적인 관계도 없이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의 자존에 달려있다. 심지어 예술가로서 자신의 일조차 그녀를 독립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관계'에 의지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군집적'인 본능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로 상징되는 '소속감'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된다. 이는 이자벨이라는 '헤픈 여자', 혹은 '자존감'이 떨어지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자존감'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겪는 대부분의 딜레마이다. 과연,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자존으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현대의 관계론은 이런 개인의 문제를 영화에서 처럼 '당신 안의 태양을 찾으라'는 식의 '자존감'의 문제로 귀결시킨다. 내가 '레벨업된 완전체'가 되어야 사랑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얼마전만 해도 다수의 문학 작품은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인간' 군상을 그려왔었다. 오늘날의 해석에 따르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러브 스토리>는 얼척없는 해프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47%라는 경이적 시청률을 보이며 화제 속에 종영한 <황금빛 내 인생> 역시 50부가 넘는 대장정의 과정 속에서, 여주인공의 주체적 사랑을 그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드라마는 사랑 조차도 자신의 자존이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주장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이 가진 것을 버리고 시간이 걸려서라도 그녀를 해바라기처럼 기다려 주는 환타지적인 사랑을 그려내는 이 드라마는 오늘날의 입맛에 맞는 현대판 신데렐라 환타지로 대중을 위로했다. 이자벨이 불행하다면 우리의 tv를 장악하고 있는 그런 그녀의 불안한 자존마저 끌어안을 환타지적 대상이 없는 현실이다. 안타깝게도 그녀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만들어줄, 그녀의 모든 불행을 끌어안아줄 수 있는 스펙 좋은 연하남이 없었다.

드라마는 '양수겹장'의 환타지로 자신의 자존감도 챙기고, 관계에서도 성공하는 여주인공을 그리지만, <렛더 선샤인인>은 결국은 쉽지 않은 현대적 인간의 딜레마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자벨은 남자를 통해 '자존'을 구하는 헤픈 여자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 행복의 본능에 도달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태양마저 스스로 작동시켜야 하는 현대인의 딜레마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by meditator 2018. 5. 5. 15:34

그 '일'이 있은 후 홍상수 감독과 관련된 기사는 '가쉽성'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그의 영화에 대해 별무관심이었던 매체들이 그의 '스캔들'에는 유독 열성이었고 성실했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하여 감독은 말을 아꼈다. 여전히 묵묵히 자기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극장에 걸었다. 그 중 하나가 <클레어의 카메라>이다. 하지만 변해진 세상 인심 때문이었을까? 모처럼 혼자 오붓하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만끽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가쉽'으로 자신을 재단했던 세상에 대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입을 열었다. 그 '일'에 대해? 아니, 그 '일'을 다루는 세상 사람들의 '말'과 '태도'에 대해. 


물론 이번에도 영화의 중심에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들은 사랑인지, 바람인지, 모를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로 인해 주변 관계들조차 복잡해 졌다. 더구나, 한국도 아닌 영화를 홍보하러 간 '칸'에서. 



솔직하지 못해서 짤린 전만희 
영화의 축제로 북적이는 칸, 하지만 골목으로 들어서면 한적하다. 그곳 카페에 홀로 오도카니 앉아있는 전만희(김민희 분), 다가온 지인은 바쁜 영화제 기간 중에 영화사 직원으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그녀를 의아해한다. 그런 지인에게 자신이 어제 그 자리에서 대표 남양혜(장미희 분)에게 해고되었다고 전하는 만희. 

홀로 남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해고'를 복기한다. 하루 전날 그 까페의 그 자리에 마주 앉은 남양혜와 전만희, 남양혜는 말을 꺼낸다. 자신이 만희를 고용한 이유에 대해, 솔직하고 진솔한 그녀의 면모가 고용 이유였다고 운을 띄운 남대표, 하지만 언제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했듯, 그녀를 고용했던 그 이유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만희를 해고하는 이유로 돌변한다. 알고보니 솔직하지 않다는 밑도 끝도 없는 '평가'로 단칼에 만희를 해고하는 남대표. 하지만 도무지, 제 아무리 다시 생각해 봐도 그 '솔직하지 않음'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만희는 그간 함께 했던 정으로 사진까지 찍고 헤어졌지만, 고스란히 그녀에게 '상처'로 남는다.

만희에 대한 이유을 알 수 없는 해고는 다음 장면 남대표와 소완수(정진영 분) 감독의 만남을 통해 짚어진다. 단번에 일자리에서 짤려야 할 만큼 솔직하지 않았던 만희의 해고 사유에는 소완수 감독과의 '스캔들'이 있었던 것이다. 술에 취해서라고 변명을 하지만, 결국 남양혜와의 사업 이상의 밀월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의 태도로 보건데, 그와 만희와의 관계는 하룻밤 술로 인한 실수 이상인 듯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건, 그간 흔히 홍상수의 영화에서 늘상 등장해 왔던 남자와 여자의 관계와 그 속내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소완수라는 남자는 예의 홍상수 영화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 남양혜와 사업 이상의 관계를 지니면서, 그녀의 부하 직원인 젊은 만희와 스캔들을 벌인 '찌질한 남자'이다. 심지어 그의 옆자리에 앉은 이방인 클레어에게 수작인지 관심인지 모를 소완수의 행동거지는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다. 



'언어의 폭력'
그런데 홍상수 감독은 늘상 그가 해왔던 그 이야기를 조금 비튼다. 홍상수 영화 속 남자와 여자의 대화들은, 그간 '사랑하고 싶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자고 싶다'의 장황하고도 구차스러운 은유의 난무였다. 그런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그 노골적인 추파는 생략되었다. 대신, 다른 장황한 은유들이 난무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전만희와 남양혜 사이의 대화이다. 결국 이후의 장면으로 보건대, 그간 소완수와의 사업 이상의 파트너 쉽을 가져왔던 남양혜는 소완수와 전만희의 해프닝을 눈치채고 그걸로 전만희를 해고한다. 결국 '사적'인 스캔들로 전만희의 밥줄을 자르는 '갑질'의 횡포를 부린 것이다. 물론 소완수와 밀월 관계를 가져온 남양혜 입장에서 전만희가 기분이 좋을 리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간 자신의 사업체에서 헌신적으로 일하던 전만희를 하루 아침에 해고하는 건 '폭거'다. 그리고 영화는 그 '과정'으로 가장 추상적인 '솔직하지 못하다'는 식의 남양혜의 '언어적 폭력'에 주목한다. 

즉, '사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처리하는 그 공정하지 못한 방식,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속보이는 이유를 포장하는 추상적이고도 도덕적인 평가의 언어들, 그것은 그간 우리 사회가 홍상수 감독의 사생활을 대하는 방식의 '치환'이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남양혜는 자신과의 관계를 정리하려는 소완수 감독에게, 은근 슬쩍 자신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갑'임을 흘린다. 사적인 관계를 정리해도 사업은 잘 해보자는 감독의 말에, 글쎄라며 여지를 흘린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남양혜의 태도에, 소완수는 자신이 던졌던 '관계의 정리'를 '이쁘다'는 말로 얼버무리고, 그런 소완수에게 '남양혜'는 자신을 예전처럼 이뻐해 달라며 여전한 밀월 관계의 지속'을 '요구'한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 속 남녀 관계는 그간 '찌질한 속물 남자와 여자'라는 본능의 관계에서, 남녀의 외피를 쓰지만, '갑을'이라는 권력의 관계로 변화되어 나타난다. 그건, 이후에 우연히 건물 옥상에서 만난 소완수와 만희의 관계에서도 연속적으로 드러난다. 영화 관련 모임이 열리는 건물 옥상, 아직 칸을 떠나지 못한 만희가 정장 느낌의 '직원룩'을 벗어난 핫팬츠 차림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으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영화 홍보를 하다 등장한 소완수, 그는 만희의 옷차림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펼쳐 보인다. 

말이야 왜 그렇게 자신을 헐하게 내던지려는가 라는 만희를 아끼는 듯한 어르신의 훈계지만, 결국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흔히 등장하는 '쉬운 여자론'의 연장일  뿐이다. 아직도 만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어쩌지 못한 소완수으 찌질한 감정의 배설이지만, 그 '배설'이 '감독님'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만희'에게 고스란히 전달될 때 그건 '언어'의 외피를 지닌 '감정의 폭력'이다. 

이렇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여전한 남녀 관계를 가지고, 그 '남녀 관계'를 소비하는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전환된다. 남녀라는 본능적 관계조차도, 그게 영화사 대표와 직원, 영화사 대표와 감독, 나이든 감독과 젊은 홍보사 여직원이라는 사회적 관계로 맞물리게 되면, 그들 사이의 관계는 그저 얽혀진 남녀 사이을 넘어선 '위계'가 되고, 그들 사이의 언어는 '본능'의 포장을 넘어선 '권위'의 억압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다. 즉 이전의 홍상수 감독이 다루었던 언어가 개인적인 '파롤(parole)'에 치중되어 있었다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언어들은 사회적인 랑그(langue)'에 집중한다. 소완수가 클레어가 구사하는 이방의 언어에 무조건적인 감탄과 찬사를 더하며 접근하는 그 '방식'도 예외는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이쁘다 
이렇게 달라진 관계들 사이에서 그녀의 발걸음처럼 통통 튀며 이야기를 환기시키는 건 영화의 제목인 그녀, 이자벨 위페르가 분한 클레어이다. 그녀는 마치 카메라를 든 철학자처럼, 자신의 사진 한 장의 '마법'을 설파한다. 그녀의 카메라를 통해 '솔직하지 못했다'던 만희는 '아름다운 여인'으로, 칸까지 초청받는 명감독이라던 소완수는 '알콜릭'이 의심되는 칠칠맞은 남자로, 도도한 남양혜는 '이상하고 우스운 여성'이라는 '뜻밖의 진실'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그 '진실'은 누군가에게는 '위로'를 누군가에겐 '깨달음'을 준다. 어쩌면 '현학적인 세상의 말'에 현혹되었던 관객에게도. 

<클레어의 카메라>를 여전한 홍상수의 구구절절한 자기 변명으로 볼 지, 그게 아니면 세상에 던진 감독의 일갈로 볼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여전한 해프닝으로 볼 것인지, 그건 '클레어의 카메라' 속 스냅 사진 한 장의 의미와도 같다. 그건 홍상수 감독의 '사적'인 일을 어떻게 '소비'라는가에 대한 , '소비'해왔는가에 대한 각자의 감회에도 잇닿아진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클레어의 카메라>는 홍상수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릴 만한 가치를 준 작품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세상을 맴돌며 하나의 화두에 천착하던 감독이 본의 아니게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내딛은 작품처럼 여겨졌다. 과연 다음엔 그가 세상에 어떤 이야기를 건넬지 궁금하다. 거기에 덧붙여, 김민희만큼, 아니 김민희보다도, 이자벨 위페르보다도 아름다웠던 장미희라는 여배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홍상수 감독의 다음 뮤즈가 궁금하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8. 5. 3. 21:28

sbs에도 단막극이 있었구나 싶다.4월 30일과 5월 1일에 걸쳐 방영된 <엑시트>에 대한 첫 소감이다. 지난 주 종영한 <키스 먼저 할까요?>와 다음 주 첫 선을 보일 <기름진 멜로> 사이의 한 주, 그게 sbs 특집극에 허용된 시간이다. 4회 4.6%, 단막극치고는 나쁘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님 단막극의 한계라고 해야 할까. 허긴 그래도 고전하고 있는 mbc의 주중 미니 시리즈에 비하면 선방했다고 봐야 할까? 하지만 조촐한 시청률과 달리, <엑시트>는 그간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아니 다루기 버거웠던 '가상 현실'을 소재로 하여 sf 장르물이라는 신선한 시도를 선보였다.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4부작, (일반 드라마 분량으로 하면 2부작)의 드라마 <엑시트>를 연 건, 희망, 행복 등의 단어는 찾아볼 수 없는 청년 사채 일수꾼 도강수(최태준 분)의 나날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져오라는 가족 사진을 그는 가져갈 수 없었다. 아버지(우현 분)의 폭력에 못견딘 어머니(남기애 분)가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사라지자 대신 강수를 때렸다. 그에게는 그 시절 '폭력'의 흔적이 흉터로 남겨져 있다. 술로 나날을 보내던 아버지가 자식을 제대로 키웠을 리 만무했다. 결국 강수는 사채 일수꾼이 되어 황태복 사장(박호산 분)의 수하로 살아간다. 그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던 선영(전수진 분)은 황사장의 애인, 도대체 그의 삶에서 '행복'의 기미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 

그렇게 '암울한 삶'을 살던 그의 눈 앞에 '당신....행복해지고 싶나요?' 전단지가 붙어있다. 그 전단지를 들고 찾아가니, 그곳은 '가상 현실'의 과학을 이용하여 '행복'한 삶을 제공해준다는 연구소이다. 그러나 애증인지, 연민이지 그에겐 폭력의 기억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그의 옆에 있는 아버지, 심지어 이제는 건강마저 좋지 않아 그의 짐이 되는 아버지가 행복으로 가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아버지'를 생각해서 돌아온 집에서 그를 맞이하는 건 등돌린 채 그가 사온 '족발'마저 외면하는 아버지이다. 결국 다시 '행복'을 찾아 연구소로 향한 그,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행복해 지기 위한 3억을 요구한다. 결국 모든 것이 '돈'으로 회귀하느냐며 발길을 돌린다. 



그렇게 <엑시트>는 '가상 현실'을 통한 행복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가장 최악의 수를 풀어놓는다. 주사위의 그 어느 수가 나와도 늘 '행복'이랑은 거리가 먼 도강수의 삶, 경제적으로도, 가족도, 심지어 사랑도 그 어느 것하나 그에게 '행복'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현실의 삶 대신 '가상 현실의 행복'을 취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 그렇게 선택에 의한 가상 현실의 개연성을 부풀리던 드라마는 뜬금없이 그 '행복'을 위한 자금 '3억'이 등장하며 의아함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 '의아함'은 과연, 지금 이 진행되는 드라마가 '드라마 속 현실'인지, 아니면, 드라마 속 도강수의 가상 현실'인지 모호한 경계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 모호한 경계는 황태복의 돈을 빼돌린 채 도망치던 강수를 황태복에게 쫓기다, '제발 죽어버려'란 강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골목길에서 튀어나온 차에 황태복이 치이며, 강수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순간, '가상 현실의 행복'이 실감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며 멋들어진 양복에 근사한 사무실, 그보다 더 널찍한 집,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선영과 친절한 아버지, 그리고 한 눈에 그를 알아보는 30년만에 만난 어머니가 그에게 '행복'이란 이런 것이다를 실감케 해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은건가? 
그 '행복'을 선물한 건 아버지였다.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강수는 사경을 헤매고 평생 행복이라고는 느껴보지도 못한 채 삶을 마감할 지도 모를 강수가 불쌍했던 아버지가 강수를 그 연구소의 실험 대상으로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약물에 의한 '행복 회로'를 돌리기 시작한 강수는 이적의 노래 처럼 '말하는 대로', 행복해지는 삶을 만끽하게 된다. 

하지만 가상 현실의 행복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불행하기만 했던 삶, 그래서 비록 연구실 실험대 위에 누워 맛보는 가상의 행복이지만, 그 선택이 개연성이 있었던 강수의 '행복 회로', 하지만 그 '행복'의 부작용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목격한 아버지는 연구소를 찾아가 읍소한다. 자신의 아들이 이렇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그런 아버지의 읍소에 연구소 직원은, 실험에서 나올 수 있는 여부는 결국 '강수의 의지'만이 가능한 것이라 외면당한다. 

하지만 정작 진짜 딜레마는 행복을 만끽하던 가상 현실 속에서 등장한다. 순간 순간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 시달리던 강수, 차츰 지금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의심하게 된다. 그의 말 한 마디에 자신을 쫓던 황태복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걸 상기해낸 강수는, 그의 말 한 마디에 만남과 이별에 순응하는 선영의 태도에 '행복한 상태'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맛보는 이 '행복'이 '인스턴트'임을 자각하게 절망하게 되는데. 

약물을 강화해도 여전히 흔들리는 강수에게 우재희(배해선 분) 박사가 선택한 강수는 '행복'을 멈추는 것, '행복한 상태'에서 깨어난 강수를 기다리는 것 황태복과 그 수하들의 추격과 죽어가는 아버지, 그리고 자신 따위는 아랑곳없는 선영이다. 결국 남은 건 강수의 선택, '개똥밭'보다도 못한 암울한 현실인가, 그게 아니면 언제라도 너의 곁에서 행복하다는 가족들이 있는 가상 현실의 행복인가. 



드라마는 애원하는 가족들을 남긴 채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가상 현실의 EXIT'을 나와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그리워하는 아버지를 찾는 강수의 꽉 닫힌 결말로 마무리된다. '가상 현실'이라는 sf적 설정을 차용했지만, 외려 보다 근원적이며 원론적인 '행복'에의 질문에 도달한다. 즉, 흔히 '행복'이라 하면 경제적이든, 관계에서든 모든 것이 충족되고 만족된 상태라는 사람들의 고정 관념에 드라마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아프고 힘들 망정 지금까지 당신이 살아온 역사, 당신이 부등켜 안고 있는 그 질곡의 삶이 주는 찐득한 그 감정이 진짜 행복은 아닐까 라고. 하지만 드라마가 도달한 명쾌한 결론에 시청자의 손이 선뜻 들어질까? 각자가 헤매이고 있는 현실이 아득할테니 말이다. 외려 불안정한 가상 현실의 행복이 아쉽지 않을까. 

드라마 속 인스턴트 적인 가상 현실이 주는 행복의 맛은 흡사 얼마 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가상 현실 오아시스를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도 슬럼가의 희망없는 청년들은 가상현실의 오아시스에 탐닉했다. 영화가 '가상 현실'을 매개로 청년들의 진취적인 도전에의 용기를 북돋았다면, <엑시트>는 부자 간의 인정이라는 우리네 정서에 천착하여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영화 속 가상 현실이,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유용한 장치였다면 드라마 속 가상 현실은 '부정되어야 할' 문제적 장치이다. 성큼 다가온 '과학의 미래'에 대한 '온도 차'가 분명하다.  

by meditator 2018. 5. 2. 13:14

역대의 마블 영웅들이 한데 모여 절대 악 타노스를 대항한 전쟁을 벌인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이하 인피티니 워)>의 개봉 소식을 듣고 가장 관심이 갔던 건, 이들 걸출한 영웅들의 집합체인 '어벤져스'를 소모하지 않고 제 몫을 다하여 전쟁을 수행할 것인가였다. 아이언맨에서 토르, 헐크,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 등 기존의 어벤져스 팀은 물론, 새로이 합류한 닥터 스트레인지에 블랙 펜서, 스파이더맨, 심지어 <가디언즈 갤럭시> 시리즈의 스타로드, 로켓, 그루트 등까지 이미 한 시리즈를 이끌었던 내노라하는 신진 영웅 그룹까지 이제는 '방만'하다고 할 이들 '히어로'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속담이 절로 생각나는 면면들이다. 다들 얼굴 한번씩만 비춰주고 나면 영화 반이 훌쩍 지나갈 것같고, 그들이 제 각기 활약을 한다치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것만 같은 이 장황한 히어로들의 서사를 과연 <인피니티 워>는 제대로 꿰어낼 것인가, 아마도 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때론 그들의 활약이 아쉬울 망정, 적어도 구슬 서말이 저마다 나동그라져 가지는 않았다는 소감이 들 것이다. 




'나쁜 정의' 타노스
그리고 그들을 '구슬 서말의 보배'로 만든 중심에는 최강 빌런, 절대 악 '타노스(조쉬 브롤린 분)'가 자리한다. 이미 2012년 <어벤져스>를 통해 그 존재를 알렸던 그는 '소문'답게 <토르; 라그나로크>에서 겨우 생존한 '아스가르드'의 우주선을 파괴하면서 '진정한 종말'의 서막을 연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의 황혼', 세계의 종말이 절묘한 '우주'로의 '항해'를 통해 새로운 희망이 되었는가 싶더니, 그것을 압도하는 '타노스의 심판'이 등장해 버린다. 

타노스, 그 이름에서는 '죽음과 파괴의 본능' 타나토스'가 연상된다. 그리고 그 이름답게, 자신의 출신 별 타이탄에서부터 '자원의 고갈, 인구의 과밀'에 대한 해법으로 무차별적인 '인구 절반의 절멸'을 주장한 이래 '행성' 곳곳을 다니며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과격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그의 행보는 이미 예고된 대로 '지구별'을 향하고 있었다. 

'타노스'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적, 철학적 근원을 가진다. 이미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략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인구론을 주장한 바 있는 '멜서스'로 부터 한정된 지구 자원을 압박하는 인구 증가에 대한 해결적 입장들이 등장한 바 있다. 가난한 이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어 인구 증가를 막아야 한다는 멜서스 이래, 나찌의 합목적적 '열등 인자'의 제거를 핑계로 '인종 청소'를 거쳐, 20세기 미국의 '강제적 피임' 사례까지 '역사'는 '의도적이며 합목적적인 인구 조절'의 역사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런 '과밀한 인구의 청소'에 대한 과격한 사상은 <킹스맨1>과 소설과 영화< 인페리노>를 통해 '실행'된 바 있다. 그리고 바로 그 '합목적적 의도'를 가진 '인종 청소'의 정의를 '타노스'가 들고 나온다. <킹스맨>에서 화학 무기 대신 타노스는 우주의 힘을 지닌 '인피니티 스톤'으로, 심지어, 그는 그저 '인피니티 스톤'을 향한 욕망으로만 여겨졌던 그의 행보가,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그녀의 죽음에 '악어의 눈물'이 아닌 눈물을 흘리며 '진정성'을 보이며 그저 파괴의 폭군이 아닌, '나쁜 정의'의 수호자로 영화의 중심에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렇게 '사공이 많은 배'의 대항마로 '확고한 철학과 세계관'을 설정하며, 어김없이 '마블'은 '히어로의 활약' 이전의 '정립된 세계관'이라는 자신의 '장기'를 통해 다시 한번 마블 월드을 확장해 나간다. 

히어로들의 무차별적 연대
그리고 이런 자신만의 분명하고도 심지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한 이유를 지닌 타노스의 광폭한 절멸의 행보에 지구의 위기, 나아가 전 우주의 위기을 막기위한 그 '급박한 목적'만으로, 그리고 멸망을 막아서려는 '순수한 마음'만으로 '히어로'들이 '어벤져스' 군단으로 거듭난다. 

타노스의 합리적, 하지만 그래서 더 위험한 나쁜 정의와, 그에 대항한 '절멸을 막기 위한 열정'의 히어로 군단을 보면 문든, 예전 미드이 한 장면이 떠오른다. 지난 1977년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아들과 딸들>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미드 <eight is enough>는 제목처럼 8명의 아이들 둔 가정의 에피소드를 다룬다. 그 중 한 장면, 1977년이라지만 당시도 '인구 증가'가 심각하게 여겨지는 상황, 인구 증가에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와 피치 못하게 한 엘리베이터를 타게 된 아빠는 그곳에서 학자와 논쟁이 벌어진다. 폭발 직전의 지구에서 '몰상식하게' 아이를 8명이나 낳았다는 학자의 비난에, 아버지는 '현답'으로 그 자리를 모면한다. '아버지의 '현답'이란 다름아닌, '생명'의 강제적 '단종' 대신, 혹시나 미래 자신들의 아이 중 하나가 그 '인구 폭발'에 대한 해법을 가지 '희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란 막연한 긍정이었다. 따지고 보면, 도대체 합리적 이유나, 타당한 설명도 없이, 그저 막연한 '긍정'과 '희망'은 꽤나 설득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8명의 자식을 둔 아버지의 긍정적 세계관'은 언제나 '미국'에서 만들어 지는 다수의 '히어로물'에서 관통한 세계관이기도 한다. 청소년의 영웅 심리도, 자기 가족에 대한 복수심도, 그리고 시대를 거스른 국가적 사명감도 혹은 반항심도, 그리고 신화에서 튀어나오거나, 연구실에서 튀어나온 이종의 영웅도, 심지어 '돈' 앞에서 이합집산하던 떠돌이들마저도 자신들이 기반한 존재의 위기 속에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 하나가 됨은, 서부 영화, 전쟁 영화를 통해 관통되던  51개의 별이 모인 '성조기'로 상징되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위기 앞에서는 하나가 되자는 '아메리카니즘'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 방만한 캐릭터 군단들이, 서로의 이질감을 접어두고 절반의 절멸을 향해 거침없는 행보를 선보이는 타노스에 대항하여, '시간'의 지배하는 영적인 닥터 스트레인지와, 과학을 지배하는 아이언맨이, 아버지와 같은 아이언맨과 아들과 같은 스파이더맨이, 재벌인 아이언맨과 도적떼인 갤럭시 패거리가 그리고 이전 시리즈에서 서로 배척했던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와 토르가, 그 손을 맞잡아 타노스를 대적해 나가는 그 순간, 영화를 보는 관객의 '카타르시스'는 충족된다. 외려, 그들이 마치 거인 골리앗에 대항하여 돌 하나를 든 채 나선 '다윗'처럼 그 '맹목적 열정'만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비록 이번 시리즈에서 그들이 '성공'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8명의 아버지처럼 '희망'을 접지 않는다. 왜? 그들은 '정의'로우니까. 그리고 '인간을 희생하지 않는, 지키려는 정의는 이길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는 긍정적 세계관의 확신이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무엇보다 이들 히어로들의 장황한 '연대'와 '연합'에는 이미 '관객'들에게는 '배경지식'이 된 그들의 '전사'가 있다는 것을. 즉,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압도적 흥행은 마치 영화 속 그들 히어로들의 연대처럼, <토르>, <아이언맨>, <어벤져스>, 그리고 <가디언스 오브 갤럭시> 시리즈을 모두, 혹은 개별의 시리즈로 보았던 '과정'의 질적 확산이다. 이미 그들의 '전사'에 대한 이해가, 비록 영화 속 등장과 함께 죽은 '로키'나, 무엇하나도 해보지 못한 채 스러지는 '윈터 솔져'등을 아쉽지만 용인할 수 있는 것이다. 와탄다의 들판에서 조우한 블랙 팬서와 캡틴 아메리카의 이질성에 이의을 제기하지 않는다. 한때 적이었던 이들의 어색한 만남에 미소마저 지어진다. 

즉 이미 그간의 시리즈를 통해 '마블'의 세계관의 전파가 이미 일정 정도의 수준을 넘어, '필독서'가 되어 기꺼이 관객들이 '타노스'의 침공에 마음을 합쳐 지켜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파죽지세의 관객 증가세가 말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이는 그간 우리의 영화계를 공습했던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그리고 오랜 시간을 거쳐서 빛났던 <스타 워즈>의 콘텐츠적 영향력을 압도한다. 마치 타노스가 하나 하나 끌어모으며 그 힘을 질적으로 승화시킨 인티니티 스톤을 장악한 타노스처럼, 그간 매번 '흥행'을 해왔던 '마블'의 시리즈들이, 그들의 연합군 앞에 우리 관객들을 투항시켜 버린다. 물론 거기엔, 아예 싸울 기세도 없이 손을 들어버린 우리 영화계의 무기력함도 한 몫을 한다. 
by meditator 2018. 5. 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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