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중학교 졸업식이었다. 선생님은 졸업장을 나누어 주면서 반에서 성적이 중간쯤 되는 학생에게 말씀하셨다. '사실 네가 최고야, 성실했고, 선생님이나 친구들에게 착했고, 늘 궃은 학급의 일에 솔선수범했지. 세상에 너같은 사람이 많아져야 하는데', 그 선생님의 찬사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말이 가진 역설 때문이었다. 아들이 다니던 중학교에서 반에서 10등 정도를 하면 대학에 가기 힘들었다. 제 아무리 최선을 다했얻도 우리 사회에서 대학에도 갈 수 없는 정도의 성적을 낸 학생에게 '성실'하다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 학생이 보인 주변 사람들에 대한 착함이라던가, 마다하지 않은 궃은 일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오지랖이라던가, 심지어 '손해보는 짓'이라고 말한다. 결과로 평가하고, 이득을 잘 챙겨야 좋은 사람이 되는 세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착한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건지, 그래서 우리들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렇게 우리가 잊어버리고 산 '사람 사는 법'에 대해 <나의 아저씨>는 깨우쳐 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우리가 묻어 버리고 사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기에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 최고의 환타지일 수도 있다. 


아마도 이 '리뷰'는 객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에 대해 흠씬 마음이 가버려, 콩깍지가 씌워져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아름다워 보이듯, 그런 드라마가 있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내 마음이 너무 깊이 들어가 모든 것이 고와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가 표현한 '아저씨' 세대의 공감 때문에도 그렇다. 그러기에 이 리뷰는 리뷰라기보다는 <나의 아저씨>에 대한 감탄사 같은 것이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여행 대신 할머니의 장례식
동생 기훈(송새벽 분)과 함께 청소 용역업을 하던 형 상훈(박호산 분)은 동생과 어머니 몰래 수익금의 일부를 장판 밑에 숨긴다. 22녀간 다니던 회사에서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아 챙기는 바람에 짤린 그 답게 뒷주머니를 차려는가 했는데, 그 뒷주머니의 소용처가 <나의 아저씨>답다. 동생 기훈이 질색을 하던 말던, 회사를 짤리고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먹고 신용불량자가 되어버린 이 아저씨는 맨날 자신의 삶에 대해 먹고 싸기만 했다며 한탄을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의 삶에 '먹고 싼' 것이 아닌 기억을 만들기로 했다. 바로 그 '다른 기억'을 위해 몰래, 아니 사실은 어머니도 알고, 동생도 알게 모아둔 돈, 그 돈을 상훈은 삼형제가 멋들어진 라이방을 쓰고 검은 슈트를 입고, 멋진 스포츠카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 상훈의 꿈을 보면서, 그랬다. 아,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삼형제의 폼나는(?) 여행이겠구나. 하지만 드라마는 그런 알량한 예측을 집어 던졌다. 물론 삼형제는 검은 라이방을 썼고, 검은 슈트를 입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스위트룸도, 빨간 스포츠카도 없었다. 그들이 입은 건 상복이었고, 그들은 함께 지안이(아이유 분) 할머니를 모시는 납골당행 버스에 올라탔다. 상주라고는 이지안 혼자인 쓸쓸한 상가를 본 상훈은 그 동안 자신이 모은 돈을 털어 상가를 풍성하게 만든다. 동생 동훈이 회사에 짤리게 되자, 너만은 회사에 남아 어머니 돌아가시면 상가를 흥청이게 만들어야 하는데 라며 탄식했던 그의 '로망'을 지안이 할머니 상에서 실현한 것이다. 즐비한 화한, 그가 불러들인 이웃들,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격식을 차린 젯상과 절차들.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모도 잠시, 상훈은 행복해 했다. 

스포츠카를 타고 떠난 바닷가 스위트룸 호텔 여행과 할머니의 장례식, 이 전혀 다른 선택, 바로 여기에 <나의 아저씨>란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함축되어 있다. 박동훈은 그런 사람이었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존재감이 없던 사람. 그래서 회사에서도 자신이 해오던 설계팀에서 밀려 안전진단팀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묵묵히 솔선수범하며 자신의 일을 해오던 사람. 형제 중에 가운데, 늘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내색하지 않고 집안의 궂은 일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사람. 청렴했던 그가 자신의 앞으로 잘못배달되어 온 돈 봉투 앞에서 어머니가 말한 형의 분식집 비용으로 흔들려야 했던 그런 사람. 그래서 야망도 열의도 없어 보여 변호사가 된 아내에게 밀쳐지게 되버린 남편.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공기처럼 꼭 있어야 될 사람이지만, 그 소중함이 당연하게 여겨져 뒤로 밀쳐졌던 사람, <나의 아저씨>는 그런 박동훈을 뜻하지 않게 얽혀진 회사 내 정치와 아내의 불륜이란 사건을 통해 세상 밖으로 길어 올린다. 



가장 불쌍한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행복의 방식 
그렇게 보잘 것없이 하지만 당연하게 흐르던 박동훈의 삶에 빚어진 파열음, 본의 아니게 얽혀진 그 사건으로 인해 박동훈은 졸졸 시냇물처럼 흐르는 그의 삶, 그 바닥을 친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만난 이지안, 그의 말처럼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애라 생각했던 그 아이가, 박동훈을 불쌍하다고 하자, 그의 서러움이 봇물 터지듯 터져온다. 도저히 위로 받을 수 없는 대상에게서 받는 위로의 공감과 서러움이 두 사람을 세상 밖에 던져진 사람의 '연대'로 묶는다. 그리고 그 세상 밖으로 던져진 두 사람의 공감과 연대는 그들처럼 세상 살기 너무 힘들다고, 하지만 세상에서 누구 하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 힘들었던 드라마를 보는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본의 아니게 박동훈 아내 강윤희(이지아 분)와 도준영(김영민 분)의 불륜을 알고, 도준영과 얽히게 된 이지안은 자신에게 잘해준 박동훈을 구하기 위해 이지안이 할 수 있는 불법적 방식을 통해 그를 돕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이지안의 방식은 외려 삼안e&c의 사내 정치와 엇물려 박동훈을, 그리고 그녀를 위기에 빠뜨린다. 

드라마는 삼안 e&c의 사내 정치, 그런 사내 정치를 둘러싼 왕전무와 도준영의 갈등, 도준영과 박동훈 아내의 불륜,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에 자의 반 타의반으로 엮인 이지안, 그리고 그런 이지안을 옭죄이는 이광일(장기용 분) 등 우리 사회의 모든 부도덕한 잡음들을 드라마의 한 궤로 하면서, 그런 부도덕한 사건들을 헤치고 나가는 이지안의 저돌적이면서 맹목적인 사랑과, 그런 이지안의 자기 희생적인 헌신을 보다듬으며 결국 그녀를 부도덕한 웅덩이에게 건져내며, 그 자신도 회생한 박동훈의 미련스럽게 우직한 행보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그런 박동훈의, 그리고 박동훈의 주변 사람들의 선택을 통해, 사람의, 어른됨의 자리를 되집는다. 이제는 무색해 졌지만, 마흔, 중년의 나이를 '미혹'이라 했다.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역설적으로 쉽게 혹해지는 시절, 혹은 요즘 세상은 '키덜트'라 하여,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어른답지 않아도 됨을 허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어느덧 누군가를 아니, 무엇보다 나를 책임져야 하는 나이에 속절없이 도달한 이들은 '이익'과 '셈'이 앞서는 세상 속에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 지 혼란스럽다. 



반갑게 웃으며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하여 
바로 여전히 나이만 들었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잘 모르겠는 어른들을 위해, <나의 아저씨>는 이 시대의 격언을 남긴다. 자신이 애써 모은 돈을 탈탈 털어 몇 번 보지도 않은 이지안의 장례식에 쏟아붓고는 한없이 행복해 하는 박상훈처럼, 세상 젤 불쌍하고 추운 아이를 알아버린 바람에 그 아이를 책임지고자 애쓴 박동훈처럼, 그리고 비록 실수는 했지만 도망치지 않고 책임지려 했던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처럼, 그리고 20년의 애증을 도망치지 않고 답했던 겸덕(박해준 분)처럼, 그리고 기꺼이 '우리 사람'이라며 이지안을 반기고 함께 했던 후계동 사람들처럼. 드라마는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방식에 대해 진득하게 천착하며 나름의 답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아내보다, 형제가 먼저여서 늘 아내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던 사람, 하지만 그는 정작 아내의 불륜을 혼자 끝까지 삼키며 가정을 지키려 했다. 늘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술 마시는게 낙인 세상 별 하잘 것 없어 보였던 상훈, 기훈,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 그들은 세상 외로운 이지안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좋은 곳의 인연들이 되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 그 '인연'의 무게를 '행복'으로 답한다. 살아가며 만났던 인연들을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도 반갑게 인사하며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손을 마주잡을 수 있는, 그 만큼만의 삶이 어쩌면 우리가 이 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복이 아닐까. <나의 아저씨>가 시작할 때 가장 한심했던 사람들이, 드라마의 마지막 좋은 인연이 되어 우리의 삶을 환기시킨다. 혹시 당신 주변에 당신이 하잘 것없다 했던 좋은 인연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요?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의 삶, 주변의 삶부터 잘 챙기세요라며. 

드라마는 끝났지만 여전히 후계동 사람들은 오늘 저녁도 정희네에 모여 술 한 잔을 걸치며 그렇게 훈훈하게 살아갈 것이다. 대표가 된 박동훈도, 가끔은 이지안도, 그리고 어쩌면 이젠 추억이 된 겸덕도, 그리고 드라마를 본 우리도, 최소한 드라마의 여운이 흐려지기 전에 박동훈처럼 사람답게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 고민하고, 좋은 인연에 애쓸 것이다. 

by meditator 2018. 5. 18. 18:22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를 재우려고 자장가를 불러주다, 어릴 적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동요의 고운 가사에 애틋해지고, 아이의 '독서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책을 읽어주다 그 작가의 글과 그림체에 매료되버린다. 레이먼드 브릭스가 그랬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년과 눈사람의 우정을 그린 <눈사람>의 작가로 알려진 레이먼드 브릭스는 <눈사람> 외에도 <산타 할아버지>, <곰> 등의 작품으로 아이들은 물론, 동화책 좀 읽어줬다는 엄마들에게도 친숙한 작가이다. 그 레이먼드 브릭스가 자신의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작화했던 <에델과 어니스트>가 영화화되어 찾아왔다. 마치 옛벗을 만나듯 레이먼드 브릭스의, 아니 레이먼드 브릭스 원작의 로저 메인우드 감독의 <에델과 어니스트>를 만나러 갔다. 




비판적인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c'set la vie'
나와 가까운 사람, 하물며 나를 존재케 해준 부모가 살아온 삶에 대해 '회갑연 상찬'을 넘어선 '조명'이 쉽지 않다. 물론 그 '반대'의 '부정'의 경우도 있지만, '상찬'이던, '부정'이던, 나라는 존재의 감정적 찌거기를 거르고 부모 세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건 언제나 숙제이다. 그런 면에서, <에델과 어니스트>는 여운이 남는다. 극적이라서가 아니라, 마치 한 장, 한 장, 그림책을 넘기며 한 세대의 삶을 조감하는 심정으로, 그래서 결국에는 나 역시도 이 분들처럼 또 이러니 저러니 해도 역사을 뛰어넘지 못한, 한 세대로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라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한다. 

그런데 <에델과 어니스트>에 돌입하기 전에, 레이먼드 브릭스라는 작가에 대해 우선 '배경 지식'을 쌓을 필요가 있을 듯하다. 즉, 그가 자신의 부모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이다. 흔히 소년과 눈사람의 겨울 한 철에만 존재하는 조금은 쓸쓸한 우정에 대한, 그래서 아름다운 동화책의 작가로만 우리는 기억하지만, 그의 작가적 세계는 생각보다 비판적이다.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난 레이먼드 브릭스, 영화 속 그의 부모님들이 전쟁과 자본주의의 급격한 발전을 겪으면서도 그들이 마련한 집에서, 그들이 얻었던 직업을 유지하며 나름 평생을 순탄(?)하게 보냈지만, 정작 레이먼드 브릭스는 그 자신에 대해 다르게 설명한다. '세상에 대해 여러 고민을 해야 했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통해 대체로 난 우울하고 비관적이고 부루퉁해 있다. 언제나 세상 살기 괴롭다고 느껴왔고 나이 들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언제나 뚱해왔고 지금은 더 불만투성이다. 난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게 불만이 많고 뚱한 그를 통해 표현된 세상은 그의 작품을 통해 드러난다. 전래 동요 모음집인 <마더 구스>는 흔히 동요를 낭만적으로 그려내는 대신, 현대적인 배경에 노동 계층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인 해석을, 어린이와 작은 사람의 짧은 3일 간의 만남을 그려낸 <작은 사람>은 보는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육아에서 인간의 만남에 대한 상징적 이해로, <바람이 불 때에>에서는 핵전쟁이라는 세기말적 상황과 그에 대해 순진하리만치 성실한 노부부를 통해 '세계사'와 불가항력인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핵'의 위험성을 절실하게 경고하며 세상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견해를 표출해 왔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 그의 시간이 자신의 부모 세대를 그려낸 <에델과 어니스트>에서도 고스란히 관철된다. 



보수당 지지자 에델과 노동당 지지자 어니스트 부부의 삶 
1920년대 런던의 우유 배달부였던 어니스트는 날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길에 가정부였던 에델과 마주친다. 자신을 보며 씩씩하게 인사하는 청년 어니스트에게 호감이 갔지만, 늘 집주인의 닥달로 그와의 눈맞춤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에델, 하지만 용감히 그녀가 일하던 집의 문을 두드린 어니스트로 인해 그들의 만남은 이어질 수 있었다. 

한참 젊은 두 연인의 만남, 하지만 우유 배달부와 가정부였던 그들의 존재가 그들의 만남과 결혼 마저도 규정한다. 당시 런던의 밤거리를 흥청이게 했던 파티 문화는 그들에게는 '사치'였으며, 결혼을 한 그들을 맞이한 건 흰 천으로 겨우 가림막을 가린 침대 하나 없는 20년 장기 융자의 텅빈 집이었다. 그래도 부부는 각자의 형제를 지난 1차 대전으로 잃은 그들이 살아남아 서로의 짝을 만난 건 다행이며 보장된 어니스트의 직업으로 가정을 꾸릴 수 있어 행복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성실함'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하다 뒤늦게 어니스트를 만나 결혼하게 된 에델은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싶다던 어니스트의 소망과 달리 레이먼드 단 한 명을 낳고 단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금발 머리를 자른다는 사실 만으로도 울음을 터트릴 정도로 아들을 귀히 여겼던 에델이었지만, 2차 대전 발발과 히틀러의 런던 공습은 이 부부로 하여금 소중한 아들을 전쟁을 피해 시골로 떨어뜨려 보내야만 하는 '이별'을 겪도록 만든다. 그들이 조금씩 꾸며 가꾸었던 집은 전쟁의 포화 속에 반공호가 되었고, 결국 전쟁의 참화에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이어져 갔다. 하늘이 맺어준 그들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이렇게 영화는 평범한 한 부부의 일생이라는 날실과 그 날실의 변화를 주도하는 역사적 사건, 자본주의 문명의 발전을 통해 변화해 가는 부부의 삶을 관조적으로 그려낸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은 그들의 일상을 변화시키지만, 그럼에도 우유 배달 조합의 성실한 직원이었던 어니스트와 알뜰한 에델은 전후 영국의 복지와 자본주의 발전의 혜택의 '수혜자'가 되어 '안정된' 삶을 구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저 격동의 세월 속 객체로서 부부를 그려내지만은 않는다. 가정부 계급 출신이지만 인생의 마지막 요양 병원에 병문안 온 장발의 아들에게 빗을 건넬 만큼 깔끔했던 어머니 에델은 우유 배달부인 남편에게 왜 당신이 노동 계급이냐며 반문을 할 정돌 처칠을 비롯한 보수당 정부의 일관된 지지를 보였다. 그녀에게 어니스트와의 결혼 생활은 '노동 계급'에서의 계층 상승을 보장해준 삶이었다. 

그에 반해 늘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아던 남편 어니스트는 최저 임금 결정안에 두 팔 벌려 환호할 정도로 노동 계급의 정체성에 충실했다. 때론 그가 지지했던 정책이 그의 신념을 당혹스럽게 할 지라도. 그래도 그는 자전거에서, 카트, 그리고 자동차를 타고 '은퇴'할 때까지 '해직'의 위험없이 가정을 지킬 수 있었다. 

에델은 '럭비'를 하는 상류층 계급이 다니는 학교에 아들이 입학한 것에 자부심을 가졌고, 아들을 통해 그녀가 소망했던 계층 상승의 꿈을 이루는가 싶었지만, 그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미술 학교를 갔고, 손자를 안겨주는 대신 조현병의 아내와 아이도 없이 살아가야 했다. 부부는 하나뿐인 아들이 갸륵했지만, 그 아들은 금세 커서 부부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건너가 부모를 낯설게 했다. 결국 성실하게 살아내며 침대와 소파를 마련하고, 선물로 받던 석탄 한 줌 대신, 보일러와 텔레비젼의 문명을 겪어낸 부부였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채 병으로 이별을 맞이한다. 젊은 부부의 열의로 가득했던 집은 아들 레이먼드가 얻어온 배의 씨앗이 아름드리 나무가 되도록 그들의 스위트 홈으로 여전했지만, '부부의 인생'은 그 시간을 버텨내지 못한다. 그렇게 한 세대의 삶이 마무리되어간다. 



영화는 레이먼드 브룩스의 부모를 통해 1,2차 대전을 경과하고, 전후의 복지 국가 시대를 살아낸 세대의 삶을 조망한다. 그들은 부부였지만,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한 주관은 달랐고, 그 '주관'과 다르게 국가의 정책과 문명의 발전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냈다. 그런 그들의 '순응적'인 태도 그 어디에서도 레이먼드 브룩스가 느꼈던 우울하고 비관적이었던 정경은 쉬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건 부모 세대와 그 부모 세대에 대해 '비판적'일 수 밖에 없는 '자식 세대'의 간극일 터이다. 

영화를 보면서 감회가 묵직해진 건, 전쟁을 겪으면서 각자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임에도 '부부'라는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낸 그 시간에 대한 다른 공간을 살았던 부모 세대를 둔 자의 회한이다. 우리네 부모들은 에델과 어니스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정치적 입장'이 그들의 생사를 갈랐으며, 그들이 '순응'의 대가로 누렸던 '안정된 삶'을 얻기 위해 처절한 자기 희생과노력을 겯들여야 했다. 이미 '선진국'인 국가의 국민과, '개도국'의 다른 운명이 다른 삶의 길을 걷게 했던 지난 시기에 대한 투영이 <에델과 어니스트>에 대한 감상을 묵직하게 한다. 




by meditator 2018. 5. 18.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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