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을 관람한 관객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오갔다. 과연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두고. 하지만 그 누가 주인공이라고 선뜻 결론내릴 수 없는 영화. 장준환 감독은 바로 그렇게 그 누구도 주인공이 아닌 게 아니라, 바로 그 시대를 살았던 '민주 시민 모두가 만들어 낸 6.10 항쟁의 역사를 영화 <1987>에 담아냈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단순 사고로 묻힐 뻔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을 세상으로 전한 '비둘기', 배우 유해진이 분한 한재동씨의 이야기 <1987, 그날의 비둘기>를 tbs가 6. 10 항쟁 31주년 기념으로 방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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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과도 같았던 진실의 폭로, 이어진 6.10항쟁 
이 다큐는 지난 1월 14일로 박종철 고문 치사 31주기에 맞춰 <뉴스 타파>가 1월 19일 방영했던 프로그램이다. 지난 해를 뜨겁게 달구었던 <1987>의 상영 덕분이었을까. 올 초 31주기 박종철 열사 31주기 추모식이 열린 모란공원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제야 조금씩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감회를 피력하는 박종철 열사의 형님, 그리고,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선 이부영 씨.

1987년 1월 14일 22살의 박종철 씨는 가파른 나선 계단으로 끌려 올라간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걸어서 되돌아 나올 수 없었다. 조사 과정에서 과도한 물고문으로 목숨을 잃은 대학생, 우리를 분노하게 했던 그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단순 사고로 묻힐 뻔했던 사건. 그러나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경관 2명이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고, 감옥 안에서는 그들 외에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더 있었으며, 이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 동아일보 기자 이부영 씨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바깥 세상에 전하기로 결심한 이부영 씨는 그와 12,3년 동안 지기이자, 동지였던 교도관 한재동씨에게 볼펜과 종이를 청해 그 사실을 낱낱이 기록하고, 그에게 바깥 세상으로 전할 것을 부탁한다. '걸리면 우리도 죽을 수도 있다'는 비장한 각오로 전한 이 쪽지는 비둘기가 된 한재동 씨를 통해 세상에 '폭로'되었고. 전국은 들불처럼 번지는 시위로 화답했다. 이어진 독재 정권의 항복 선언과 직선제 개헌. 그 시절을 이부영 씨는 '그 진실이 밝혀지기 까지 많은 사람들이 시계 속 톱니 바퀴처럼 자신들의 역할을 해냈기에 가능했던', '신의 오묘한 손길'이 닿은 '기적같은 사건'이라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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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교도관 한재동이기에 가능했던 비둘기 
그리고 그 '기적'이 가능케 했던 비둘기 한재동 씨, 당시 젊은 교도관이었던 그도 30여년의 세월을 건너 칠순의 노인이 되었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을 건너 그 시절의 일을 그에 대해 한재동씨는 '공권력이 사람을 죽인 있어서는 안되는 사건이라며,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그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며 '민주화에 보탬이 될 수 있어'외려 '행운'이었다 겸손하게 물러선다.

하지만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만으로 학생이 고문으로 죽어나가던 시절, 그 소식을 몰래 전하는 것이 직업적 규정의 위반은 물론, 그 사실이 알려지면 전한 당사자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던 시절 용기를 낸다는 건 그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민주적 교도관'으로 투쟁해 왔던 그의 순탄치 않은 이력에서 비롯된다.

고등학교 이후 처음으로 '단체 관람'으로 <1987>을 봤다며 자랑스레 전하는 한재동 씨의 동료들, 이제는 다들 한재동 씨처럼 70줄의 노인이 되었지만 그들은 한때 뜻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다. 한재동씨가 바로 '역사적 전환점'을 만들어 낸 비둘기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30년 동안 함구했던 이들, 한재동 씨의 헌신은 그래서 뒤늦게서야 알려져 2007년에서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의 감사패를 받을 수 있었다.

왜 그들은 '함구'해야 했을까? 동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물론 한재동 씨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비둘기 역할을 한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 보다 한재동 씨 일생의 큰 투쟁은 그가 교도관으로 정년 퇴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교도관으로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버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고.

그 '보통' 일이 아니었던 한재동 씨의 교도관 일이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지키는 일을 하는 교도관이 무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반문할 수 있겠다. 얼마전 인기 리에 방영된 <슬기로운 감빵 생활>에 등장한 그런 인간적인 교도관? 실제 감옥을 다녀온 다수의 민주 인사들 중에는 교도관을 벗으로 삼은 이들이 있다. 감옥에 갇힌 이와, 그들을 지키는 이의 '우정'이라니. 바로 그곳에 민주 교도관 한재동 씨의 자리가 있다.

'비둘기'로서의 운명을 '하늘이 준 뜻이다', '이게 내 팔자자' 그리고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다'라고 받아들였던 한재동 씨의 선택은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 한재동 씨는 퇴직할 때까지 평생 교도관으로 살았지만 교도관으로서의 그의 여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교도소내 인권 개선에 앞장 서는 바람에 지방으로 전출되기도 했고, 시국 사범, 정치범, 양심수와 친근한 관계를 맺고 이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애쓰고, 나아가 교도관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 조합을 만드는데 앞장 서다 인사 조치를 당해 파면에 이은 구속까지 당한 '전력'이 '비둘기'의 숙명을 가능케 한 것이다.

적극적인 동료들의 도움으로 1979년 징계에 이은 파면 조치가 1981년 10월 대법원까지 가서야 취소되고 복직 후 첫 부임지였던 곳이 바로 당시 시국사범들이 많았던 영등포 교도소. 동료들은 한재동씨의 복직이 영등포 교도소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은 미제 사건이 되었을 지도 모르다며 그 '우연의 기적'을 회고한다. 하지만 그 '한재동 씨의 결단'을 교도관으로서의 직업적 소명을 지키기 위해 애썼던 한재동 씨를 위해 동료들은 지난 30년 동안 함구했었다.

몰래 편지를 밖으로 나르는 일, 분명 공무원으로서의 신분에 어긋나는 행동, 그러나 동료들은 '더 고매한 이상이었던 민주화'를 위한 일이었다며, 한재동 씨와의 민주적 유대 의식을 피력한다. 한재동 씨 역시 독재 정권 시대의 '정부'가 아닌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위한 일이라는 신념에 따라 '양심과 소신'을 가지고 결정한 일이라며 직업적 딜레마에 대해 정의내린다.

영화 <1987> 속 한 씬의 인물에 불과한 한재동 씨, 그리고 그 영화에 등장했던 수많은 주인공 아닌 주인공들, 그들이 그 영화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1987년 6.10 항쟁의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건, 민주화를 위해 애썼던 그들의 삶이 있기에 가능했다. 직선제 개헌, 미완의 혁명, 그 이후로도 이어진 전진과 후퇴의 여정, 그 가운데에서도 한재동 씨와 같은 포기하지 않는 '민주 시민'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한다.
by meditator 2018. 6. 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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