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현란하고 신선한 액션신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은 채, 그 사람의 시각에서 맞닦뜨려지는 살육에 가까운 대결 장면은 분명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씬임에 분명하지만, 그 시선을 달리하며 '감탄'과 '경외심'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동시에, 도대체 무슨 사연이길래 홀로 저 무모한 도전을 감행한 것일까란 의문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그 의문은 쉬이 풀려지지 않는다. 거의 '자살 테러'에 가까운 살육을 벌였던 주인공은, 알고보니 여자였고, 그녀는 그 살육의 마지막 거구의 상대방을 쓰러뜨리고 그를 이용해 그 건물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오지만, 그녀를 기다린 건 포위망을 좁힌 경찰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녀의 생사 여탈권을 가진 '십자가'로 자신을 위장한 국가기관은 그녀에게 생명과 봉사를 딜한다. 그리고 그녀는 애초에 살육의 현장에 자신을 내던진 채 들어갔던 그 마음 그대로 자신을 내던지지만, 뜻밖의 생명이 그녀를 구한다. 악녀의 주인공 숙희(김옥빈 분)은 그렇게 삶을 유지한다. 



대단한 볼거리, 그러나 알고보면 비극적 순애보? 
영화 속 액션씬은 대단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살육의 현장에 뛰어든 주인공의 시선을 시점으로 벌어지는 액션씬에서, 그리고 이후 국가기관의 훈련 과정과 테스트 과정에서 숙희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그것을 숙희의 '무림 고수' 수준의 액션 스킬의 개연성으로 설득해 낸다. 독방에 갇힌 그녀의 마취는 중상과의 훈련과정에서 보인 잠수 능력으로, 역시나 훈련 과정에서부터 적과의 대결 과정에서 단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준비된 킬러로서의 자세는 역시나 중상(신하균 분)으로부터의 배움이다. 영화는 그렇게 숙희의 존재를 그녀의 과거로 설명하고, 그 과거는 동시에 그녀의 아픔이자, 사랑이요, 파국에 대한 복선으로 작동한다. 결혼식에서 단 한 방의 주저함이 있기 전까지 한번도 혼돈스러워하거나, 주저하지 않았던 킬러 숙희의 모습은 <악녀>라는 영화의 볼거리와 캐릭터의 개연성을 설명한다. 영화의 외연은 액션이지만, 실제 영화를 끌어가는건 숙희라는 여성의 비극적 순애보이다. 그게 단지 아버지, 중상, 딸, 현수로 대상이 바뀔 뿐. 

하지만 그 현란한 도입부와 국가기관을 통해 다시 삶을 건진 그녀의 활약(?), 그리고 끝내 그녀를 이용한 순애보적 사랑과 결혼, 그리고 마지막 그 현란한 도입부의 개연성이 된 중상과의 관계와 파국은 결국 '씁쓰레한 뒷맛'을 남기고 만다. 

결국 순진한 연변 처녀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복수극'에 자신을 내던졌고, 그녀의 복수극은 다시 사랑하는 이의 복수로 이어졌으며, 그 복수에 내던져진 그 생명은 '모성'을 통해 거두어 졌고, 그 '모성'은 다시 '순애보적 사랑'으로 막연한 '행복'에의 기대로 연명하고, 그 모든 것은 '그녀'를 이용하기만 한 국가기관과 중상에 대한 자기 파멸로 끝을 맺는다. 혹자는 이것을 순진했던 한 소녀의 비극사라 칭할 지 모르겠지만, 그곳에 과연 '숙희'는 '존재'할까?



숙희라는 인간은 없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살육의 기계가 된 여성, 그리고 그 '살육'의 훈련자였던, 심지어 알고보니 그 대상이었던 이를 사랑해서 '복수'에 자신을 내던진 여성, 그리고 '어머니'란 이름으로 생존하고, 또 다시 사랑의 이름으로 파멸에 이른 그녀를, '비극적 사랑'에 희생되었다 말할 수 있겠지만, 영화 속 '숙희'는 그저 '복수'나 '모성'의 이름으로만 불리워졌을 뿐,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 혹은 그 누군가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대상적 존재 외에, 인간 '숙희로서 사고하고 판단하고 자각하고 반성하지 않는다. 마치 이전 세대 우리가 여성들을 누군가의 딸, 아내, 어머니의 이름으로만 불러왔던 것처럼. '킬러'로서 살아간 '사람' 숙희는 없다. 

그런 면에서 첫 장면의 도입은 이 영화 속 '대상적 존재'로서의 그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첫 장면은 낯선데 익숙하다. 싸움을 주제로 한 게임에서 흔하게 접했던 장면이다. 게임 속 살육의 현장에서, 게임이기에 그 상대방을 죽이고 피를 내는 것에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감각하다. 숙희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그 숱한 사람들을 죽여버렸다는데 일말의 후회를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는 이 앞에서 자신이 그가 사랑할 만한 그런 순결한 인물이 아니라는 자기 연민 외에는. 하지만 그 연민의 유효치 역시 현수의 순애보를 넘어서지 못한다. 마치 미션 수행을 마친 캐릭터가 생명을 다하듯 자신을 접었던 그녀는 아이를 통해, 새로운 사랑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하지만, 거기엔 자신이 해왔던 '킬러'로서의 삶에 대한 반추는 미흡하다. 자신의 사랑마저 이용했던 국가 기관에 대해서도, 그리고 중광에 대한 '자각' 이후에 보인 그녀의 대응 역시 '즉자'적일 뿐이다. 그녀의 삶이 '복수'로 점철되었던 것처럼. 

숙희만이 아니다. 언뜻 매력적이지만 역시나 국가 기관의 수동적 수행자 역할을 넘어서지 못한 권숙(김서형 분)이나, 단선적 캐릭터로 소모적으로 쓰여진 김선(조은지 분)과 민주(손은지 분) 역시 안타깝다. 영화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만, 정작 여성의 캐릭터는 '편편'한 반면, 남성들은 '사고'하는 복잡한 속내를 지닌 중층적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런 면에서 의심스럽다. '연변'이라는 이 사회에서 '이방인'이자, 종종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 지역성이 숙희라는 전근대적 여성상을 설명하는 도구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감히 그렇게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대상적 존재로서의 여성 캐릭터를 끌어낼 수 없으니,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 

하지만 그 '순진한 연변 처녀'에 대한 편견조차 지극히 편협하다. 순진한 연변 처녀가 끝까지 중상을 의심하지 못한 채 이용당한 것과 달리, 연변 주먹이었던 중상은 그런 순진한 숙희를 자신의 죽음으로 위장해 버리는 '고도'의 작전을 펼치더니, 세련된 대한민국의 어둠의 세력으로 승승장구하느라 딸조차 거뜬히 제거하는 '자존적 범죄자'로 그려내는 걸 보면, '연변'이라는 지역적 출신에 대한 편견조차 '여성'과 '남성'의 경우 그 결론이 다르다는데 다시 한번 이 영화가 '여성'에 대해 얼마나 안이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반증한다. 

그런 면에서 <악녀>는 오히려 또 한편의 전근대적인 여성 잔혹사에 가깝다. '자신'을 돌아보기도 전에 마치 '삼종지도'의 현대판처럼,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그리고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 했던 여성의 비극사이다. 차라리 진정한 '악녀'이고, 자기 파멸이라면 좀 더 자신을 악으로 만든 이들에 대한, 중상은 물론, 역시나 중상과 다를 바 없이 이용만 한 국가 기관에 대한 '처절한 응징'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복수'를 매개로 했지만 살인 기계가 되어버린 자신에 대한 그녀만의 '입장'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끝까지 숙희는 배신당한 사랑으로 몸부림치다 끝난다. 

by meditator 2017. 6. 1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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