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매달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겐 '이야기 책' 한 권도 만리장성같다. 덕분에 겨우 앞에 몇 장이라도 들여다본 것이 감지덕지한 상황, 어쩐다, 찾아보니 동명의 영화가 있다. 책을 일고 토론해야 할 시간에 함께 본 영화, 나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의 영국 영화는 가끔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민망'함을 배려한 듯 적절한 필터 처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늘 6월이면 '전쟁'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이벤트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전쟁이란 것에 대해 청소년의 시선에서 진지하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던 것같다. (이 영화를 선정한 선생의 일방적인 시각만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맥 소로프의 베스트 셀러가 영화화된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는 맥 소로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맥 소로프는 이 작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녀의 뒤늦은 데뷔작이자, 데뷔와 동시에 그녀를 미국, 독일, 영국의 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청소년 소설의 여왕'으로 등극케 한 작품이다. 그런 화려한 수상 실적과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는 학교 도서실에 구비된 필독 도서이자, 이미 영화화되기 전에 드라마화된 바 있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 셀러이다. 그러기에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이하 하우 아이 리브)>만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맥 소로프의 원작을 읽고 비교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이 두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 첫 번째의 요인은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로 우리에게 알려진 시얼사 로넌이 분한 여주인공 엘리자벳(하지만 그녀는 극구 자신을 데이지라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데이지라 불러주자)의 캐릭터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킨 15살의 데이지는 이제 막 아버지가 사는 미국을 떠나 이모가 사는 영국으로 온 이방인이다. 자신을 가리는 듯한 짙은 화장,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며 목걸이 팔찌가 버거워 보이는 마른 몸매,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녀게 웬만해서는 입에 음식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데이지에게 더 거부감을 주는 건 음식보다 사람인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이들에게 '레이저'를 쏘며 '접근'을 거부한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데이지가 대략 어떤 소녀일 것이라는 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갖가지 병원 치료와 상담으로 아버지 돈 축내기, 아버지의 여자 열 받게 하기, 그리고 이제 새로 태어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의 아이 저주하기.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녀가 얻은 건 '거식증'과 갖가기 알레르기, 자기 혐오 등등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모에게 구원을 요청한 건지, 아니면 이모의 자발적 호응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영국에 와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이제 우리에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는게 더 익숙한 어린 톰 홀랜드가 분한 사촌 동생이다. 보기에도 분명히 열 다섯 그녀보다 어린 사촌 동생이 모는 트럭을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이모네 집. 대책없는 데이지보다 어쩐지 더 대책없어 보이는 곳이다. 이미 데이지가 도착한 공항에서 부터 심상찮은 기색이 역력한 비상시국의 기운, 이모는 마치 그 '비상시국의 전위대'인 양 온통 해외 각국에서 쏟아져오는 전화 통화를 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하느라 아이들을 미처 돌볼 사이가 없고, 그 사이 이모네 아이들은 심하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여튼 그런 대책없는 이모네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사촌 에드워드(조지 맥케이, 얼마전 캡틴 판타스틱의 주인공 보 역을 맡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그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 과정처럼 처음엔 거슬리고, 그 다음엔 다투고,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무려 사촌이랑. 



전쟁에 휩쓸린 열 다섯 살 소녀의 사랑
하지만 이 사촌간의 비정상적 로맨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영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설 속 전쟁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와 적의 경계가 모호한 채 영국의 시설들이 테러를 당하고, 마을들이 점령을 당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막연한' 전쟁이라면, 시각적 장치가 분명해야 할 영화는 그 설정은 세계 제 3차대전이자, 핵전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 '적'이 '우리'와 구분되지 않은 그 누군가이며 내부로 부터 시작된 테러는 핵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휘쓸어 가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테러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하여 내부의 그 적으로부터 시작된 3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학습' 효과를 작품은 철저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도 없이 전쟁에 휩쓸린 데이지와 이모네 아이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집이 징집되고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소개(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족'으로 섞여들기 시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뒤로 하고 각각의 캠프로 떠난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늘 '반항'을 삶의 모토로 살아왔던 데이지는 뜻하지 않게 에드워드의 어린 여동생까지 책임지는 건 물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전쟁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생존'이라는 임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들의 동네 친구가 적에 의해 무참히 사상되는 상황에서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들이 머무는 이곳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침반 등 몇 가지를 챙긴 채 이모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철저히 데이지란 소녀의 성장담에 집중한다. 3차 대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구현한 핵이 터진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자신은 물론, 아홉 살 어린 사촌 동생까지 책임지며 살육과 기아가 점철된 행로를 용감하게 전진하여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되는 서사는 그 어떤 성장 소설보다 극적이다. 반면 소설로 가면 보다 다양한 인물군에 대한 재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는 데이지란 주인공을 위해 생략되거나 왜곡된 이모네 형제들의 캐릭터가 소설의 맛을 더한다. 그저 이모네 아이들이 아니라,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엄마 밑에서 그리고 영국의 자연에서 동물과 교감하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낸 아이들의 면면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청소년 상이다. 영화 속 데이지가 아홉 살 철부지에 대한 보호자란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면, 소설은 오히려 에드워드네 아이들이 가진 남다른 자연적 친화력이 데이지를 변화시키고 그녀를 끌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하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성찰적 서사가 깊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십대들에겐 67년이 된 6.25전쟁 보다는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테러 사건이 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게 미래의 입시와 정해진 삶의 스케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에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멀고, 일상은 쳇바퀴라도 마찬가지의 질풍노도 시기, 자신의 그 모든 푸념을 한참 부모에게 풀어댈 나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살아가야 이유를 모색해 보는 건 어떨지. 

by meditator 2017. 6. 2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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