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주년이다. 그 어느 해보다도 '광복'이란 의미가 다가오는 올해의 광복절, 하지만 그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도 그 흔한 광복절 특집 드라마 하나 없이 영화 <암살>의 재방이 면피를 하고, 한류 뮤직뱅크로 축하를 하는 시절이 되었다. 72년이 지난 광복은 이제 그런 것일까? 세계 역사상 식민지의 기간 내내 독립 운동이 멈추지 않았던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는데, 과연 그 자부심을 현재의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그 미완의 과제에 성실하게 답한 건 그래도 다큐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음악을 통해,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이 쓰던 암호를 통해 독립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 ebs의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와 kbs의 <독립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는 주목할 만하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우리는 한국 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를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 <압록강 행진곡> 박영만 작사, 한유한 작곡

방송을 통해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이 노래가 나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국 광복군가였다는 이 노래는 7,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회자되던 노래이기도 하였다. 정말 우렁차게 이 노래를 부르면 당장이라도 압록강을 넘어 백두산을 넘을 만큼 열정이 차오르게 했던 노래, '노래'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세월을 건너 후손이던 대학생들의 가슴마처 차오르게 했던 이 노래를 만든 주인공에 대해서는 정작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 작업을 ebs 광복절 특집 다큐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가 <1부 망국의 노래, 깊이 생각>, <2부 중원에서 별이되다>로 다루었다. 

다큐는 이제는 기록에서조차 희미해진 그 노래를 오늘날의 노래로 되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진행된다. 우리 항일 가요의 시작은 1914년 민족 정신을 담은 최신 창가집을 그 시작으로 본다. 광성 중학교에서 발행된 이 창가집은 발행 1년만에 그 일제에 의해 압수, 그 내용이 남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독립 운동의 역사 그 갈피갈피에 음악은 함께 했다. 1908년 만주로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옮긴 민족 운동 세력이 명동 학교를 설립하고 영국 국가의 곡을 차용하여 '아무런 일 겁낼 것없구나 정신은 자유요 의기가 용감한' 교가를 만들었다. 이런 민족의 의분이 담긴 교가는 1899년 약관 21세의 안창호 선생은 평안남도에 최초의 사립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우며 '쾌하다, 장검을 비껴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요동 만주에 크게 활동하던 동명왕의 칼이 방불하구나'란 '격검가'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저기 정순이 쉬던데/ 피던 꽃 떨어지고 
뻐국 색도 울고가니/ 지났구나 봄철이   - <저기 정순이 쉬는데>, 동해 수부 작사, 외국곡

의기가 넘치는 곡만 있는건 아니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처참하게 처결당한 정순이란 여학생의 소식을 전한 미국의 민족 신문 <신한일보>는 정순의 슬픈 사연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킨 <저기 정순이 쉬는데>를 발표했다. 당시 음악들을 보면 '항일 의식' 고취를 중요시해 가사는 우리의 손으로 짓는 반면, 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외곡곡을 차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렇게 다큐는 당시 곡들의 특징과 함께, 동해수부나, 한유한 등 그 곡을 만든 이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또한 그런 독립 운동 시기의 음악을 꾸준히 연구해온 작년에 돌아가신 후 올해에 이르러서야 <항일음악 330곡집>을 펴낸 노동은 교수를 비롯,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평생을 역시나 일제 하 음악 발굴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한 황선열 교사 등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다큐를 통해 소개된 항일 음악들의 의의는 무엇일까? 일찌기 격검가를 비롯, 최근 우리의 애국가 역시 안창호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의 합작품이 아닐까 라고 추정되는 20여곡의 음악을 남기신 안창호 선생은 일찌기 음악이 정서와 감흥을 울려 독립 운동의 투쟁심을 끌어내는 건 물론, 치료 효과조차 갖는다'고 주장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이제 역사가 된 항일 음악, 그에 대해 황선열 선생은 손으로 씌여 입으로 향유된 한국 문학의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 장르라 정의내린다. 그 잊혀졌던 장르로서의 항일 문학, 그 복원으로서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어떤 분이 얼마나 독립 운동의 주요한 역할을 하셨는가는 독립운동사의 행간마다 만나게 되는 그분의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여곡의 작사가로 항일 음악사에서 이름을 남기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존함은 kbs1에서 방영된 광복절 특집 다큐<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1932년 서대문 형무소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셨다. 만주와 미국으로 오랜 외국 생활을 하셨던 안창호 선생, 그러기에 조국 독립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나누던 대화에 익숙치 않으셨다. 그런 안창호 선생에게 옆 방의 김정련 선생이 감옥에서의 대화를 전수하고자 나서셨는데, 그게 바로 이 다큐가 첫 번째로 소개한 타벽 통보법이다. 자음과 모음, 숫자 등을 주먹, 손가락, 손바닥을 이용하여 벽과 벽을 통해 전달하는 이 방식은 '내일 오후 두시 만세 시위'라는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 23번의 타벽이 필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에서 이 타벽 통보법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실제 안창호 선생에게 타벽 통보법을 전달하려가 걸릴 뻔한 김정련 선생은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 쓰고 미친 척을 하며 암호를 지켜냈지만, 독방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렇게 일제 하 감옥에서의 눈물겨운 에피소드를 통해 다큐는 비밀 병기 암호에 대한 기록을 연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암호 연구에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음을 다큐는 지적한다. 성공한 작전의 암호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즉 작전의 성공은 곧 암호의 비밀 보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니 암호 연구는 결구 실패한 작전, 기사 등을 통해 알려진 흔적을 통해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30년대 호서 은행 불법 금융 사기 사건. 일제는 암호 문서를 단서로 이 사기 사건을 발각하고 1만 7천원을 회수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호서 은행은 지금의 충남 예산에 있던 당시 예당 평야를 배경으로 한 충남의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미곡상 최석영이 서류를 위조하여 여러 은행에서 불법으로 대출을 받은 사건이지만, 그 뒤에는 고향 예산에서 독립 운동자금을 모으려고 했던 독립운동가 신현상이 있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신현상 외 5인을 체포하였던 것.

결국 비밀 병기로서의 암호는, 다른 한편에서 일제와의 피말리는 정보전의 양상으로 진행된을 다큐는 보여준다. 중국 텐진 화평구 일본 조계지의 정실은호 일본 은행이 대낮에 금고가 털린 사건, 이 사건에서 활약을 한건 암호 닭다리라 칭해졌던 권총이었다. 또한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이 고국에 보낸 서신에 등장한 새우젓, 골뱅이젓은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접촉할 사람들의 별명, 그렇게 당시 사람들은 친일파는 모이를 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빈다 하여 꿩이라 하거나, 밀정을 여우라는 식으로 빗대어 말하는 은어를 흔히 사용하곤 했음을 당시를 연구했던 연구자들의 입을 빌어 밝힌다. 



하지만 이런 은어는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간된 후 보다 체계화되어갔다. 일본 외무성에 남겨진 자료중 가장 오래된 1919년 2월 28일 자료를 통해 본 독립운동의 암호는 자음과 모음을 숫자로 표시하는 식으로 변화해 갔고, 3.1만세 운동 이후 보다 고도화되어갔다. 일본의 감시와 검거가 치열해지는 만큼 암호 체계는 서신용, 전보용으로 분화되고,  자리수가 두 자리, 세 자리로 보다 해독할 수 없는 복잡한 체계로 변화되어갔음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그 변화의 주기도 점점 짧아져 가는 것도 한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독립 운동이 다양한 계열로 분화되어가는 그 양상은 암호에도 반영되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일제에 혼돈을 준 지점이라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유격대원들, 일제의 공격을 대비하기 나선 어린 학생들이 방어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잇닿은 산봉오리에서 새오리, 나무통 두드리기, 깃발, 봉화 등 다양한 수단과 방식도 멀리 연길 구룡마을 현장에서 전한다. 

실패한 작전을 통해 유추해본 비밀 병기 암호는, 그 암호 자체로 한편의 첩보 영화 소개 프로그램처럼 흥미진진했다. 또한 해방의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선열들의 치열한 결과물로써 암호만큼 명확한 증거인 것도 없을 것이라는 걸 다큐는 여실하게 보여준다. 

노래와 암호, 이 전혀 다른 상징 체계, 하지만 그 극과 극의 메시지가 두 개의 다큐를 통해 항일과 광복에의 염원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역사 행간 속에서는 읽어낼 수 없었던 생생하고 치열한 독립의 현장으로 다큐는 우리를 인도한다.  
by meditator 2017. 8. 16. 15:59

올 여름 느지막이 극장을 찾아온 납량 특집 영화들과 달리 tv에는 이렇다할 '공포'를 다룬 작품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포물'이 보고 싶은 시청자들이라면 굳이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죽은 어머니를 빙의한 딸이 어머니의 옷을 입고 온 집안을 휘젖고 다니거나, 비오는 날 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산 사람이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협박하는 드라마라면 이 무더운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주말 드라마의 진화는 이제 가족극의 형식을 호러와 스릴러의 영역까지 진화하기에 이른다. 바로 jtbc의 <품위있는 여자>와 sbs의 <언니는 살아있다>가 그것이다. 




재벌가 부조리극으로서의 주말 드라마
점찍고 돌아와 복수를 한다는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화끈한 복수의 방식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김순옥 작가는 <내딸 금사월(2015)>과 <왔다 장보리(2014)>에 이어 2회 연속 주말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로 돌아왔다.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악녀에 의존한 엉성한 구조로 질타받았던 전작에 대한 평가로 절치부심했다는 듯 고속도로 다중 충돌 사고로 시작된 드라마는 민들레(장서희 분), 강하리(김주현 분), 김은향(오윤아 분), 양달희(다솜 분)의 악연을 한 쾌에 조장한다. 그 그 배후로 공룡그룹 구필모(손창민 분) 회장의 딸 구세경(손여은 분)과 아들의 친모 이계화(양정아 분)를 얽혀들게 만든다. 한날 한 시에 일어난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사람들과 그 사건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만들어 낸 이들의 한 판 복수극은 공룡그룹이라는 재벌가를 중심으로 때론 스릴러로, 때론 블랙코미디로, 심지어 때로는 호러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엎치락뒤치락하는 50부의 레이스를 벌인다. 

<사랑하는 은동아>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힘쎈 여자 도봉순>으로 인기 작가가 된 백미경 작가가 들고 온 작품은 뜻밖에도 전작의 장르와는 전혀 다른 <품위있는 여자>이다. <언니는 살아있다>의 시작이 다중충돌 교통사고였다면, <품위있는 여자>는 주인공 격인 박복자(김선아 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재벌가 대성펄프에 간병인으로 등장하여 숟가락을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마다할 수 없다는 안태동 회장의 아내 자리까지 등극하여 상류 사회 진입에 성공한 미스터리한 인물 박복자, 그녀를 중심으로 안태동 회장의 자녀들과, 자녀들 중 특히 그녀를 그 자리에 있게 해준 둘째 며느리 우아진(김희선 분)과의 갈등, 그리고 우아진이 몸담은 상류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며 '부조리극'이자 '스릴러'으로서의 이 드라마의 묘미를 한껏 살려나가는 중이다. 

두 드라마는 공히 재벌가, 혹은 준재벌가를 배경으로 삼은 전형적인 주말 가족극의 형태를 띤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주말 드라마에는 '가족'이 주인공이 되었고, 또한 그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재벌'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품위있는 그녀>와 <언니는 살아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전통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회장님이, 그가 이룬 부가 결국은 이들 드라마가 벌이는 모든 갈등의 근원이 된다. <언니가 살아있다>의 양달희는 자신의 신분 세탁을 위해 사고 현장에서 도망치며, 구세경은 그룹 내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설기찬(이지훈 분)의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심지어 그를 없애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애꿏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회장의 아이를 낳은 이계화는 '미쓰리' 취급을 받는 자신의 수모를 자기 아들의 재벌가 승계로 보상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품위있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대성 펄프의 부를 통해 상류 사회로 진입하고자 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박복자와 그런 그녀가 자신들이 물려받을 부를 훼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자식들이 벌이게 되는 갈등 역시 대성 펄프와 그것의 현신인 회장님과의 관계로 현실화된다. 대성 펄프만이 아니다. 우아진이 만나는 상류 사회 속 각 집안의 갈등은 결국 경제적 주도권과 그것을 가부장으로 승인받은 오늘날 한국 사회 가족의 문제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여여 갈등'으로 드러나는 이들 드라마의 주된 갈등은 이전의 재벌가의 권력 승계와 관련된 재벌가의 드라마를 가족극의 형태로 질적 전환을 이뤄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재벌이라는 이중적 권위 속에서의 '아비규환'이 된다. 



특히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와, <언니는 살아있다>의 이계화가 극중 악의 최종 보스로 극중 모든 인물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극중 인물들이 아버지라던가, 시아버지라던가 혈연적 관계로 재벌가와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단 한 방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완벽한 타인이다. 그런 타인들이 그저 자신들의 욕망 만으로 재벌가에 진입하여 여성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런 욕망은 이계화의 경우 재벌 회장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정당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한 채 가정부 취급을 받는다거나, 박복자처럼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자리와 상관없이 그녀를 배척하고 하는 갖가지 장치를 주변인들이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배쳑하는 주변인들때문에, 아니 끓어오르는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그녀들의 상승 욕구는 결국 여러 부작용을 안고 스스로 자중지난에 빠지고 만다. 

도발적인 하지만 순수하리만치 정확한 박복자와 이계화의 욕망, 그 대상이 되는 재벌가의 회장님들은 적극적인 그 욕망에 대해 무기력하다. 반신불수였던 안태동 회장은 심지어 그녀의 실체를 알고나서도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박복자의 진심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가 하면 구필모 회장은 민들레와 이계화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딸 구세경의 비리에 눈뜬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재벌이라는 부권을 가운데 놓고, 욕망하는 여성들의 매치를 통해 그 부권과 부를 흔들며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그들이 흔드는 그 반동이 커질수록, 시청자들의 흥미와 시청률은 따라 상승한다. 무기력한 가부장제와 부도덕한 부에 대한 조롱은 이런 식으로 드라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그에 대한 열렬한 반응으로 시청자들은 화답한다. 



부도덕한 욕망의 결과는? 
물론 과정은 그렇지만 두 드라마의 결론은 다를 듯하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실소와 썩소라는 두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낳을 것이다. 어쨋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신의 능력만으로 상류 사회에 진입하려던 그 욕망은 2017년에도 실패할 것이다. 재벌가의 며느리로서 안락함을 누리던 우아진이 재벌가를 나와, 이제 재벌가를 상대로 돈을 벌며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고 하는 것처럼, 돈이 전부가 아닌 삶의 주제 의식으로 <품위있는 여자>는 돈이 전부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하듯, 돈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박복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할 것이다. 대성 펄프는 물론 극중에서 나름 상류 사회연했던 사람들이 쌓은 부의 성채는 공허한 허깨비로 남아 씁쓰레하지만 돈이 전부가 아닌 삶에 대한 위로를 주제 의식으로 남길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아진도, 박복자도 두 주인공은 사회적 신분 상승에서는 멀어졌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쾌감'과 현실적 결과의 괴리다. 



그에 반해, 늘 오락가락하던 구필모 회장이 드디어 이계화의 정체를 알아차린 <언니는 살아있다>는 부도덕한 승계자 이계화 모자를 처리하고, 부조리한 방식으로 부를 재편하려 했던 구세경을 제거하며,  잃어버린 아들 설기찬을 만나는 등의 과정을 통해 건강한 재벌가이자 가부장적 구조로 재편될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던 설정들의 납치, 불륜. 살인 등 드라마에서 보여질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다 동원했던 드라마는 그럼에도 결국 착한 사람들은 부의 은총마저 받으며 행복해지고, 어긋난 욕망으로 계층 상승의 에스컬레이션을 꿈꾸던 이들은 처분될 것이다. 

올 여름의 더위만큼이나 브라운관을 갖가지 범죄와 욕망으로 달구었던 이들 드라마가 보여준 건, 결국 '가족'과 '부'라는 이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보이는 '막장'의 현실이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어느 집의 이야기다라는 소문이 회자되는 그 이야기들의 현실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가족'과 그 '가족'을 지탱하는 부의 성채가 이루어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스릴러적 장치, 그 현실성말이다. 

by meditator 2017. 8. 15. 16:55

시간을 건너뛰는 '타임 슬립'은 이제 드라마에서는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단물이 거의 나올 것도 없는 소재다. 하지만, 그 '시간'의 환타지는 얼마전 <너의 이름은> 흥행에서도 보여지듯이 또 여전히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대중적 공감대를 배가시킬 '마법'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시기 두 편의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두 편 찾아왔다. kbs2의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이하 맨홀)>과 tvn의 <명불허전>이 그것이다. 


시작은 두 드라마 모두 미미했다. 수목 공중파 3사 드라마에서 부진했던 전작 <7일의 왕비>의 후속작이란 부담때문이었을까? 첫 회를 방영한 <맨홀>은 3.1%(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했다. <명불허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도 화려한 <비밀의 숲>의 후광은 순식간에 사라진듯, 2.715%(닐슨 코리아 케이블 전국 기준)로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숫자로 보면 2%나 3%나 라고 보여지지만 공중파의 3%와 케이블의 2%는 사실 하늘과 땅의 차이다(2%대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은 케이블 시청률 1위다). 하지만 두 드라마가 더욱 간격을 넓힌 건, 이어진 2회이다. <맨홀>이 2회 2.8%로 kbs2의 10년 내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것과 달리, <명불허전>은 2회 3.995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앞날에 서광을 스스로 펼친다. 무엇이 이 '타임슬립' 두 드라마의 궤적을 달리하도록 만들었을까?




대략난감의 고난을 타임슬립으로 
왜 타임 슬립을 해야할까? 그건 아마도 '환타지'임에도 시간을 거스르는 개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 요건이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맨홀>과 <명불허전> 두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대략 난감 현실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명불허전>의 주인공 허임(김남길 분). 그는 그에게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줄을 서는 혜민서의 뛰어난 침술을 가진 의원이다. 하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밖의 환자들을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는 혜민서를 찾은 민초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신의가 아니라, 천출로 인한 만년 참봉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고관들의 비밀 진료를 통해 얻은 부로 보상받으려는 '속물'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편두통에 시달리는 왕에게 침으로 시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에 나타난 뜻밖의 침통을 들고 어전으로 달려간 그의 손이 떨렸다. 혜민서의 신의에서 하루 아침에 어심을 거스르는 죄인이 된 그, 쫓기던 그는 그만 화살을 맞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그가 눈을 뜬건 2017년 청계천 한복판이다. 

<맨홀>의 봉필(김재중 분)이라고 해서 나을 게 없다. 하음 봉씨 집안의 3대 독자라고 하나, 공시생 2년차에 동네 대표 백수 그의 부재에 부모님은 안부조차 궁금해 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같은 산부인과 병동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28년째 짝사랑을 해오던 수진(유이 분)가 겨우 만난 지 3개월된 남자와 결혼을 한다니. 봉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 앞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술의 기운을 빌려 진심을 토로해 보려 하지만, 보여지는 건 그저 '진상', 그런 그를 외계의 기운을 받은 '맨홀'이 집어 삼켜 버린다. 맨홀을 토해낸 그가 도착한 곳은 수진과 그의 인연이 꼬이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타임슬립 고난기? 하지만 그 극과 극의 차이를 낳은 건 개연성. 
얼핏 보면 2%나 3%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숫자 같지만 공중파와 케이블이라는 매체의 차이로 극과 극의 결과가 된 <맨홀>과 <명불허전>, 하지만 더 심각한 건 <맨홀>이 2회만에 자체 최저 시청률을 찍었음에도 앞으로 그다지 시청률 회복의 기미는 커녕, 더 낮아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것과 달리, 단 한 회만에 1%대의 상승률을 보인 <명불허전>은 의학 드라마 불패의 신화까지 얹은 채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이다. 

똑같이 난처한 처지에 빠진 남자 주인공인데 무엇이 두 드라마의 희비를 엇갈리게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극중 초반 많은 비중을 가지고 활약을 보이는 남자 주인공 캐릭터의 개연성과 연기력이 아닐까 싶다. 




이미 허준이라는 조선의 걸출한 명의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같은 '허씨 집안'인가 싶은 허임의 등장에 솔깃해진다. 심지어 극 초반, 이 허임이란 자가 허준못지 않은 명의같아 보이니 더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불허전>은 반전으로 천출의 만년 참봉이란 새로운 설정을 들이민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 거기서 제 아무리 침술이 뛰어난다 한들, 신분제의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허임은, 대체적으로 신분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그 벽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비탄의 세월을 보내는 것과 달리, 그런 자신의 처지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재 축적에 몰두한다. 

신분제의 처지에 절망하는 대신 고위층 상대로 의술을 팔아먹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신선하지만, 또한 이전 사극과는 다른, 현대적인 그 속물 캐릭터로 인해 그의 타임 슬립 이후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 바탕이 된다. 무엇보다, 그의 이중적 속물 캐릭터가 그런 이면의 모습으로 인한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내며, 어전 침술의 해프닝에 대한 개연성을 뒷받침하게 되는 것이다. 뜻밖에 그에게 나타난 신비의 침통, 마치 하늘이 내린 그 침통은 진정한 의술의 길에서 비껴간 그에게 벌을 주듯이 '타임 슬립'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스른 이곳에서 만난, 과거와 똑같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소녀, 그 소녀로 인해 인술은 천술 대신, 재물 축적의 기회로 삼았던 속물 의원에겐 새로운 개과천선의 기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걸 1,2회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설득한다. 

그에 반해 일본 드라마 <프로포즈 대작전>의 갖가지 설정을 고스라히 빼다박은 듯한 <맨홀>의 문제점은 바로 그 드라마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 주이공의 캐릭터와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덜커덕거리기 시작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9포 세대라며 취업이 안되면, 설사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결혼은 사치가 된 세상에서 동네 대표 백수 봉필의 캐릭터는 너무나 유유자적이다. 공시생 3년만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다큐 속 주인공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취업이 하늘에 별따기인 세상에서 '자존감'의 무너짐을 청춘의 댓가로 알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28년을 짝사랑했다고 그녀의 결혼 앞으로 돌진하는 봉필의 패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또한 패기 잃은 설득력을 설득해 내는 방식도 매번 화를 내는 건지, 진심을 말하는 건지 모를 악다구니와, 술의 힘을 빌린 진상이라니, 그 조차도 그렇다 치더라도, 시간의 힘을 빌린 그의 타임 슬립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봉필이며,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변화하는 여주인공의 설정은 이해를 불가하게 한다. 아니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가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건,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선, 혹은 28년 짝사랑 앞에 선 여주인공의 비주체적 설정이다. 2007년의 일본 드라마를 2017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고민도 없이 베끼듯 들여놓은 설정에서 여자 주인공은 비중을 말하기 전에 너무도 극중 설정에서 '대상화'되어 있다는 점이 굳이 당찬 <명불허전>의 최연경(김아중 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상 남자 주인공과 함께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두 번 째 패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 시대착오적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주인공들의 연기로 호흡기를 달고 기사회생하는 드라마가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맨홀>에서의 김재중과 유이의 연기는 주인공으로 극을 끌고 가기에는 너무도 안이하다. 특히 극중 80%의 활약을 보이는 김재중의 경우, 감독의 디렉션이 있었는가가 의심스러울 만큼 그의 소란스러운 연기와 소통안되는 대사 처리로 인해 지레 채널을 돌리게 만든다. 후에 이 드라마의 패인에서 남자 주인공의 책임을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그에 반해 김남길이 연기하는 허임은 절묘하다. 사실 극중 진상짓이라고 하면 봉필에 못지 않다. 심지어 음식을 앞에 두고 침까지 질질 흘린다. 하지만 그런 진상짓조차 순간 순간 진지해지는 의원으로서의 그의 연기와 절묘하게 합을 이뤄가며 속물 의원의 타임 슬립기를 그저 가볍지만은 않게 무게 중심을 잡는다. 거기에 이제 김아중이 선택한 작품이라면 믿고 보게 만든 김아중의 작품 선택과, 그 선택이 아쉽지 않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역시 <명불허전>을 믿고 다음 회를 기다리도록 만든다. 



사실 두 남자 주인공의 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잘 되는 집은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되고, 안되는 집은 지푸라기 하나도 핑계가 되듯이, <명불허전>의 과하지 않은 연출과 신선한 스토리, 하물며 기가 막힌 배경 음악까지 아직은 섣부르지만 2회에 이르러서까지 이 드라마의 앞날을 밝게 해준다. 그런 반면 <맨홀>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 한류 스타를 앞세운 안이한 외화 벌이 드라마의 기획을 다시 한번 질타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이 드라마의 작가가 기대주였던 <텐>의 작가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움을 남긴다. 설사 이 드라마가 국내에서 최저의 기록을 세우고, 해외 판매에서 호조를 보인다 한들, 과연 이런 식의 영업 방식이 안그래도 위기를 맞이한 한류에 도움이 될까?
by meditator 2017. 8. 14. 16:20

'베짱이', '생기가 다빠진 죽은 생선' 이건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퇴근 후 자신들의 모습이다. 퇴근 후에 하는 가장 많은 일이 tv 시청, 인터넷, 그리고 술이기가 십상인, 그러다 내일을 위해 '자자'는 삶. 문제는 없지만 답도 없는 직장 생활, 하지만, 그 직장 생활보다 어쩌면 더 답이 없는 퇴근 후의 삶, 그게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삶이 아닐까? 그런 쳇바퀴같은 대한민국 직장 문화에 2017 새로운 핫 키워드가 등장했다. 바로 워너벨, work & life balenced가 그것이다. 




60;40? 아니 40; 60? 퇴근 후의 삶
그 시작은 오밤중에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로 부터 시작된다. 동호회나 직장인들이 아닌 달리기가 좋아서 만난 사람들의 '야밤 런닝', 그들은 각자의 직업을 가졌지만, 이렇게 밤을 달린다. 너무 힘들어 다음 번에는 안나가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또 다음 대회를 준비하게 되는, 좋아서 달리다보니, 이젠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대회까지 참여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직장 생활 60%, 러닝 40%라고 하고 싶지만, 종종 그 균형 비율이 헷깔리는 사람들은 그저 달리며 조금씩 자신의 기록이 단축되는 그 '단순한 즐거움'에 퇴근 이후의 시간을 헌납한다. 

8월 10일 mbc스페셜이 주목한 2030 세대의 새로운 트렌드 워너벨의 현장에는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취미라고 내세우는 등산, 축구, 종교 활동의 경지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에서 보호대를 찬 발목을 치켜세우며 턴을 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31살 항공사 사무직인 손인하 씨가 선택한 워너벨은 '발레'이다. 아마츄어 발레단의 일원으로 그녀는 이제 곧 공연을 앞두고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학병원 응급실 경력 간호사 16년차 김효선 씨는 간호사 파이터로 방송을 탈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격투기에 빠져있다. 다이어트로 시작한 격투기는 이제 당당하게 그녀를 프로 무대에 세웠고, 휴가조차 태국에 가서 무에타이를 배울 정도로 자신의 '취미'에 빠져있다. 
그 '취미'를 위해 300만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주말마다 바다를 건너는 이도 있다. 대학병원 원무팀장 유주형씨는 50세의 최고령 해녀학교 학생이다. 1000km의 통학 거리를 마다않고 제주도 한림읍 앞바다 물로 달려가는 그는 이제는 퇴직 후 제 2의 인생으로 '물질'을 고려 중일 정도다. 

성공 신화가 깨어진 대한민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이렇게 저마다 각양각색의 '퇴근 후'의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삶의 변화가 트렌드로 등장한 2017. 그 저변엔 이제 더 이상 '성공 신화'를 쓸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가 있다. 자신의 욕구를 짖누르며 일에 매달려가며 평생 직장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 선배 직장인들의 삶이었다면, 더 이상 평생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서의 성공 대신, '나'의 행복을 모색하고자 노력하는 직장인들, 그런 고민에서 바로 특별한 존재 이유로서의 사생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저마다 다르다. 유주형씨와 같이 해녀 학교를 다니는 정규환씨. 43살의 그는 해녀 학교의 열혈 학생이다. 이제는 제주도에 와서 때로는 현재의 자신이 삶이 허하다고 까지 느낄 정도는 그는 한때 서울의 잘 나가는 병원의 소아 외과 의사였다. 퇴근을 하고 집 앞에 주차를 하는 순간 다시 호출을 받아 병원으로 돌아가는 식의 삶을 되풀이 하던 그,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라도 보며 산다고 했지만 정작 조금씩 '번아웃 증후훈'을 보이며 '활화산'이 되어가던 그에게 '버킷리스트'로서 해녀가 되고팠던 아내가 이곳을 권유했다. 그리고 아내와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이곳 제주로 내려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위치를 가졌지만, 그것을 행복이라 느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이제 해녀학교 상군으로, 퇴근이 보장된 제주에서의 의사 생활로 삶의 행복을 '만족'할 줄 아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녀 학교의 이주혜씨, 이른바 '애기군'으로 아직 잠수조차 못하는 초급생에 불과한 처지다. 지금은 잠수가 안되서 쩔쩔매는 그녀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역사 선생님을 꿈꾸는 임용 고시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시험을 준비하면 준비할 수록 길을 잃었던 그녀가 퇴근이 보장된 유통업계의 일을 하며, 해녀 학교 일원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통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워너벨의 등장은 지금까지 '일'과 삶이라는 균형추가 '일중독'이라는 쪽으로만 기울어진 불균형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다. 원해서 간 직장이라 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삶이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 혹은 '호구지책'이 나의 욕구를 우선할 수 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한 취업 포탈 사이트의 조사 결과, 20대 청년 층 89.7%가 '취미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는 것이 행복하다'는 현실에서 '직장'을 뛰쳐나오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균형추'의 모색이 워너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때론 이 워너벨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 함께 학원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서 만난 친구 구은혜, 조유진씨는 회사원과 선생님이라는 직업 대신 이젠 스타트업 기업을 이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이란 '취미'를 배송하는 일, 매월 다른 취미를 개발하여, 쳇바퀴같은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활력을 제공한다. 이번 달 그녀들이 고안한 취미는 집에서도 바캉스 기분을 낼 수 있는 냉족욕기. 어느날 직장 의자에서 녹아내릴 것같았던 그 순간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된 이 엉뚱한 사업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회사라는 공간에만 가둘 수 없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욕구를 '즉자적'으로 반응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물론 늘 워너벨이 이상적일 수는 없다. 워너벨을 지향하여 퇴근이 보장된 직장을 얻었던 손인하씨는 막상 퇴근 후 지쳐 쓰러지기가 일쑤였다고 고백한다.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고 직장인 10명 중 8명이 퇴근 후 '번아웃 현상'을 경험하는 현실. 현실은 일과 삶의 조화이지만,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55.5%가 상사 눈치를 안보는 퇴근을 원하는 갑갑한 환경이 현실이기도 하다. 또, 최저 임금이 내년 올해보다 16.4% 늘어나 7530원이 되었지만 이는 oecd 32개 회원국 중 15위 수준, 경제적 조건 역시 워너벨의 균형을 저해한다. 

하지만 늦깍이 해남이 된 유주형씨의 말대로 한번 뿐인 인생은 이제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모품이 되기 싫은 사람에겐 절실한 화두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화두의 해법 중 하나가 '워너벨'이다. 


by meditator 2017. 8. 11. 18:05

<파리로 가는 길>을 보러 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나이때문일까? 중장년층의 여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극장을 채운다. 영화 속 여주인공 앤(다이안 레인 분)의 프렌치 로드를 자신들이 떠나기라도 하는 듯 어딘가 설레임을 담뿍 담은 표정들, 과연 엔딩 크렛딧이 올라가고 이분들이 원했던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셨을까?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不惑),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아셨다는데(知天命),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오십이란 '갱년기'라는 신체적 증상만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막막한 시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막막한 시절에 <파리로 가는 길> 여주인공 앤이 서있다. 



아내라는 이름표로 살아가는 앤의 뜻하지 않은 일탈
미국 나이로 쉰 두 살. 앤은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 분)의 아내다. 그녀를 소개하는데 마이클의 아내라는 이름표가 가장 앞선 건, 현재 그녀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을 따라 영화의 도시 칸으로 휴가를 온 부부. 한때는 의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손을 놓고, 애지중지하던 딸도 다 커서 그녀의 품을 떠났다. 휴가라고 칸에 왔지만, 바쁜 남편은 업무상 스케줄로 바쁘고, 그녀는 호텔에서 시켜먹은 식사조차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 하지만 샌드위치를 두 개나 시켰다고 잔소리를 하던 남편은 정작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물건 하나 제대로 찾을 줄 모르는 사람, 거기에 그녀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 앤만이 아니라, 오십 줄에 들어선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대다수 여성들의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업차 바쁜 남편이라도 그래도 함께 칸에 온 그 여행조차도 남편의 바쁜 영화 제작 스케줄을 허락치 않는다. 문제가 생겨 당장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하는 부부,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앤의 귀 통증은 그녀의 비행을 허용치 않고, 거기서 등장한 남편의 사업 파트너 자크(아르노 비야르 분)가 그녀에게 자동차를 이용한 파리 행을 제안한다. 

그런데 7시간이면 도착할 것같던 파리 행, 공항 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아픈 그녀를 위한 약에서 부터 딸기 등등을 구하느라 차를 멈추던 자크는, 이제 앤과 길을 떠나자 작정을 한듯, 샛길로 빠진다. 하지만 그런 자크의 곁눈질에 이미 남편으로부터 프랑스 남자의 방탕함을 경고받은 바 있는 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대 미국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 그녀를 재촉한다. 

영화는 그렇게 바쁜 남편 마이클을 제외한 그의 아내 앤과 그의 사업 파트너 자크의 동상이몽을 주된 갈등으로 제시한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여전히 그 나이에도 독신의 삶을 즐기는 남자, 미국식 시간 관념이 내재화된 사람과, 지금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그것을 위해,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들, 혹은 사람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허용할 수 있는 프랑스 식 삶을 대비시킨다. 또한 부유한 남편을 가졌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자신이 없는, 하지만 그 무엇을 해야할 이유조차 없는 사람과, 지금 현재 이곳에서의 삶과 즐거움이 곧 인생이라고 믿는,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업 일정과 자금에 쫓기는 사람의 만남이다. 

자크는 길을 떠나자 마자 마주친 생 빅트와르 산을 세잔의 명화를 통해 그녀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전히 귀는 아프고, 남편의 잔소리에, 파리로 갈 여정만이 가득하고, 이 프랑스인 남자도 부담스럽다. 그런 그녀가 자크의 도발적인 프로방스, 가르동 강, 리옹으로의 여정을 통해 변해간다. 빅트와르 산을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자크와 함께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재현하며 마을을 열고, 리옹의 자수 박물관과 베즐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으로 기꺼이 에돌아 가기를 원하기에 이른다. 



로맨스를 넘은 질문들 
자크는 이 여정에서 그녀에게 '손끝하나 안 대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영화 속 그가 보인 행보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그것이다. 여자가 원하는 장미로 차를 채우고, 여행지의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녀를 유혹하고,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간지른다. 하지만, <파리로의 여행>을 그저 오십 줄 자크와 앤의 연애 이야기로 보면 아쉽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십줄, 자신의 존재에 길을 잃은 앤에게 자크는 그녀 앞에 얼마든지 열려있는 새로운 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도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자크는 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첫 눈에 이 여자가 이뻐라고 하는 그 남성적 본능이 아니라, 마이클의 사업적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그녀를 보아오며, 오십이 되도 여전히 매력적인 앤에 대한 '헌사'이다.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물건을 찾아주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소모하지만, 자크에게 그녀는 늘상 카메라를 달고 살며, 그 카메라를 통해 섬세한 지점을 포착해낼 줄 알고, 그것을 통해 전체를 연상케 만드는 능력자이다. 이제 남편의 도구와, 자식에게마저 지켜볼것만 남겨진 그녀가 자크를 통해, 그와의 여행을 통해 오십 줄에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인 것이다. 

귀가 아프던 그녀는 어느 틈에 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들조차 자크의 도발적 행보와 그 행보에서 그녀가 보이는 긴장감에 어느덧 그녀의 그 '스트레스성 증후군'을 놓아버린다. <파리로 가는 길>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뻔히 스트레스성 질병인 게 보이는 앤과 함께 여행을 하며, 그녀가 자크의 담배처럼 자신의 초콜릿 중독을 털어놓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오랜 아픔을 고백하기까지, '프랑스 로드'의 여유와 낭만이 주는 일탈을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짝짝이 양말을 줬다고 모로코에서도 양말을 찾는 남편과 그녀가 쥐어준 짝짝이 양말을 기꺼이 신어주는 남자, 이 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마지막 자크가 보내준 장미 초콜릿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천명의 시절,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갈 것이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록 함께 여행하며 유혹해주는 멋진 남자는 없지만,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by meditator 2017. 8. 10. 14:51

청춘 스타의 요람이라 여겨지는 <학교> 시리즈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전통의 명문 <학교>가 무색하게 8회를 맞이한 <학교 2017>의 중간 성적표는 시원찮다. 아직도 첫 회 5.9%가 최고 시청률이며, 야곰야곰 오른다 해도 4%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8회 4.7%) 


새로운 스타 탄생인가 했지만, 이미 각종 예능과 광고를 통해 이미지가 소진된 라은호 역의 김세정의 연기가 극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질타를 받았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기에 앞서 학교 시리즌데 과연 작가가 학교를 다녀본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로 현재의 학교 현실과 괴리된 해프닝으로 점철된 초반의 설정들이 이 시리즈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8회를 맞이한 <학교 2017>은 초반의 우려와 달리, 원래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본 궤도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과장된 연기, 혹은 만화같은 해프닝을 넘어서 현재 학교 현실의 문제점을 드라마 속에 담아내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생기부란 이름의 계급 사회 보고서 
사립 금도고등학교, 점심 시간 배고파 달려온 학생들에게 성적 순으로 밥을 먹을 것을 종용하는, 성적 지상주의의 학교, 그리고 사립학교답게, 이 사립 학교의 운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돈 있는 아이들의 원만한 학교 생활과 진학 지도에 매진하는 학교. 이런 학교의 현실을 단 하나로 증명하는 건, 현재 대학 입시 시스템에서 '생기부', 생활기록부라는 미명 하에, 학생들의 학창 시절의 기록을 일일이 나열하여, 입시에서 유불리한 증거 자료로 작동하는 이 서류가, 오늘날 대학 입시에서 학생들의 목을 조여온다. 

그 '생기부' 지옥도의 현실은 전교 1등 송대휘(장동윤 분)에게조차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고, 이미 1등이 정해진 수학 경시 대회의 시험지를 훔치기 위해 교무실에 잠입케 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든다. 전교 1등조차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스펙이 필요한 오늘날 입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생기부는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기록하지만, 그 기록의 대부분은 학교 생활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딴 교내, 교외 각종 수상 실적으로 채워지고, 학내 실적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위주로 재편된다는 것이 이미 현재의 입시 현실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돈과, 돈에 뒷받침된 정보로 선점된 교외의 수상 실적은 결국 오늘날 생기부가 빈익빈 부익부의 대한민국 계급 사회의 보고서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지난 5월 ebs 다큐 프라임 <대학 입시의 진실> 6부작을 통해 통렬하게 지적된 바 있다) 

그러기에 가난해서 오로지 공부 밖에 할 수 없는 송대휘는 공부를 잘함에도 불구하고 생기부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고, 더구나 사립학교인 금도고에서 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현태운(김정현 분)의 1등이 따논 당상으로 사전 모의된 상황에서, 공부만이 유일한 동앗줄이던 대휘는 불법과 학칙의 경계를 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드라마는 공부만 잘해서도 대학을 갈 수 없는 오늘날 대학 입시, 아니 철저하게 금권 계급 사회가 되어버린 현실을 담는다. 그리고 거기에 7회에서 8회에 걸쳐 등장한 유빛나(지헤라 분)와 서보라(한보배 분)의 음악실 난투극을 통해 그 금권사회의 아이러니에 색을 더한다. 학교 운영위원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빛나의 집안, 그런 상황에서 빛나는 안하무인 격으로 자신이 없어진 볼펜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보라의 필통을 뒤엎고, 이는 두 아이의 난투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빛나의 엄마는 변호사를 동원하여 학교 폭력 위원회를 열어 보라의 응징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이미 1학년 때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선생님의 묵살로 억울한 징계를 당한바 있던 보라는 가해자로써의 처분을 감수하려 하고. 결국 학생을 폭력의 위험으로 부터 구해줘야 할 학교 폭력 위원회라는 제도조차 가진 자들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가는 과정을 드라마는 에피소드로 더한다. 








생기부 지옥도를 살아가는 아이들
x라는 어설픈 히어로 해프닝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차근차근 회를 거듭하며 오늘날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며 받는 고통의 현실로 한 발 한 발 차근차근 발을 디뎌나간다. 오죽하면 어설픈 교육 개혁 대신, 그냥 성적대로 한 줄로 대학을 가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현실은 송대휘의 절박함으로, 체벌은 없어졌지만, 벌점이 체벌보다 더 가혹한 낙인이 되는 현실은 라은호와 보라의 아득함으로 드라마는 현실을 담는다. 덕분에 아이들은 꿈을 꾸는 대신 꿈을 이루기 위해 교무실을 침범하고, 가진 자의 순서대로 배열된 학교 사회에서 운수 회사 딸로 자신을 코스프레하는 홍남주(설인아 분)처럼 부의 그늘에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이제 절반의 궤도를 넘어가는 드라마는 그 억압적 현실 속에 신음하던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교무실에 들어가 시험지를 훔쳤던 대휘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대신 막아서는 은호와 태운으로 인해 비로소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인과, 그에 따른 처벌은 뜻밖에도 늘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느라 숨가빴던 대휘가 모처럼 한숨을 돌리는 안식으로 돌려받는다. 홍남주의 위선은 뜻밖에도 거리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전혀 스스럼없이 대하는 라은호의 당당함에서 무너진다. 

서울대를 향한 가파른 사다리에 몸을 맡긴 전교 1등 송대휘의 사연도, 자신의 가난함을 부잣집의 그늘에 숨긴 홍남주의 위선은 새로울 것 없는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들이 '생기부' 지옥도와 만나 현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 해결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률과 상관없이 여전히 <학교>는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려내는 그 전통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항 중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여전히 많다. 보라의 학폭위 사건에서 무기력해 책임감을 절감했던 선생님이나 전담 경찰관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희희낙락 애정 전선에 몰입하는 상황은 마치 여러 편의 단편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듯 극의 통일성을 해친다. 또한 신인들의 어설픔이나, 과잉된 감정과  틀에 박힌 중견 배우들의 연기가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초반의 난맥을 헤치고, 여전히 2017년 청소년 드라마로서 <학교 2017>의 미덕은 유효하다. 




by meditator 2017. 8. 9. 15:49

아름다운 절벽으로 둘러싸인 일본 후쿠이현 시카이시 도진보 절벽, 하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목적은 두 가지로 갈린다. 그 아름다운 명소를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로 택한 사람들, 도진보 절벽은 '자살 절벽'으로 이름이 높다. 그런데 그 자살 절벽 주변에서 부지런히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있다. 13년 째 이곳에서 순찰을 빼먹지 않는 시게 유키오 씨 등의 사람들은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것. 오늘도 20대 여성의 목숨을 구한다. 


이 도진보 절벽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방송을 탄 바 있다. 2013년 9월 <ebs 다큐 프라임-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즉 2013년을 기준으로 8년째 자살율이 1위인 우리의 현실을 다루었던 다큐이다. 



억눌린 감정, 가짜 감정으로 
당시 다큐에서 한 해 평균 17명의 자살 장소로 선택되었던 도진보 절벽, 이 절벽의 이야기로 <mbc스페셜-당신의 행복을 앗아가는 가짜 감정 중독(이하 가짜 감정 중독)>은 시작된다. 그렇게 자살의 대표적 예로 등장했던 도진보, 하지만 <가짜 감정 중독>은 자살을 해야하는 그 이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일본인들은 자살을 선택했는가? 서양과 달리, 불교와 유교 문화권의 동양에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기 보다는 숨겨야 하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가망(がまん) 문화는 일본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참으라고 강요한다. 그 결과 자신의 감정을 숨기다 못한 일본인들은 도진보를 찾는다. 

그렇다면 일본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의 감정 문제를 들여다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선 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 5년차 정신과 의사 임재영씨가 거리로 나섰다. 자신의 병원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이미 상담만으론 치료가 어려운 상태였음을 절감하게 된 그는 약물을 쓰기 이전의 상태에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리 상담을 자처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자는 평생 3번 울어야 한다'라던가, '여자의 목소리가 담을 넣어선 안된다'는 전통적 감정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쉬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된 감정의 '쿨함' 역시 또 다른 감정의 통제 기제가 된다. 

일본이나 우리 나라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지 못하는 문화, 그로 인한 극단적 선택의 문제는 이미 새로운 문제 제기가 아니다. 하지만 8월 3일 다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까 감정 중독'을 주목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은 그 자기 강제된 감정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슬픔을 화로 표현하는 사람, 화를 내어야 하는데 우는 사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가짜 감정에 중독된 상태'라고 다큐는 진단한다.

 

슬픔을 화로, 두려움을 무감정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진단의 증명을 위해 두 사례자가 등장한다. 
4살과 6살을 둔 엄마 정인수 씨(34), 그녀의 가정은 조용할 날이 없다. 엄마는 그 어느 곳이든 울컥울컥 화를 내고, 그 화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쏟아진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정신을 차린 엄마는 후회하지만, 결국 쳇바퀴돌듯 그 '화풀이'를 되풀이한다.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라면 공감할 이 장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그래고 정인수씨는 화라도 내지만 오현정(28)에게로 가면 더 심각하다. <비밀의 숲> 황시목처럼 외과 수술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감정이 없다. 매사에 무표정하다. 

정인수 씨는 상담을 시작하자마다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적어본 감정 노트를 채운 단어는 지친다. 외롭다. 힘들다 이다. 자신의 감정을 채워본 물병만을 봐도 눈물을 터트리는 그녀. 이른바 '독박 육아' 속에서 그녀는 마모되어 가고, 그 마모된 자아는 '화'라는 가짜 감정을 통해서만 폭발해 왔던 것이다. 기꺼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들에게는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는 인색했던 그 저변엔 엄마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상실감으로까지 뿌리가 드리워진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던 오현정 씨의 경우에는 주변으로 부터의 상흔의 결과다. 그래서 늘 관계에 두려움을 가지고 주춤거리던 그녀는 어느 새 마음을 닫고, 그 부작용은 몸으로 왔다. 하지만 울컥하지만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던 그녀가, 병을 가득 채운 자신의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독박 육아에 지친 엄마에게 '화'라는 감정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너무 외롭고 슬펐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닫아건 마음은 사실 그 누군가의 관심이 그리운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한 사람들, 놀랍게도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두 사례자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상담을 하고,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읽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90일간의 중독 치유 프로젝트, 놀랍게도 사례자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똑같은 사람인데, 화가 잔뜩 나있던 얼굴에 밝아졌고, 무표정했던 얼굴에 생기가 돈다. 화장법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관상'이 변한다. 



아이와 함께 친구집에 놀러간 정인수 씨, 아이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잔뜩 찡이 났다. 아이와 함께 조용한 곳을 찾은 엄마, 아이는 지금까지 하던대로 엄마를 때리며 투정을 부린다. 그때 엄마 정인수씨가 말한다.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 테니 말해봐 라고. 그런데 그 엄마의 말이 마법처럼 울며 떼쓰던 아이의 울음을 잦아들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 결국 엄마의 품에서 감정을 토해내며 풀어진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더 놀라운 건 매사에 화를 내던 정인수 씨다. 그저 화를 참았는가 싶던 정인수 씨가 아이의 서러움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준다. 정인수씨는 화를 잘 내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작은 슬픔에도 마음이 아픈 너무도 마음이 여린 엄마였던 것이다. 이게 정인수 씨가 찾은 진짜 감정이다. 

오현정 씨 마찬가지다. 늘 상처받을까 무표정에 자신을 숨겼던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흔히 '화'를 잘 내는, 혹은 항상 화가 나있다는 오늘날 한국 사회, 어쩌면 한국 사회의 '화' 역시 삶의 고난과 고통을 방어하는 가짜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다큐는 말하고 있다. 
by meditator 2017. 8. 4. 02:43

위안부'와 관련된 망언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한때 그녀의 책이 베스트 셀러 순위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시오노 나나미다. 그녀의 <로마인 이야기> 정도는 읽어줘야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 대중적 역사가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호소력높은' 작가여왔다. 그런 그녀의 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있다. 


1459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오스만 제국의 10만 군대가 몰아닥쳤다. 새벽 1시 시작된 총공세는 날이 밝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인류 역사의 중세가 마무리 되던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 역사적 장면을 시오노 나나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베트 2세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못지않게, 그 역사의 한 획에 참여한 병사, 즉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총공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예군답게 갖가지 도구와 수단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철옹의 성벽을 거스르는 건 사람들이다. 철옹의 성벽을 무너뜨린건 결국 '인간의 목숨'이었다. 7000 명 남짓한 방어군을 공격하는 10만 대군, 결국 역사에 기록되는 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라는 역사 속에는 목숨을 던져 성벽을 올랐던 사람들과, 또 그 성벽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수성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던져진 인간들
영화가 시작하면 아직 앳된 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라고 해도 크게 범주에 벗어나지 않을 몇몇 군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총성, 젊은, 아니 어린 군인들은 허겁지겁 뛰기 시작하고, 그들이 골목을 돌 때마다, 지형지물을 피해 몸을 숨길 때마다 그들은 스러져간다. 결국 마지막 아군의 진지를 가까스로 넘은 채 목숨을 구한 이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총성은 따라오고, 그를 구한 진지의 군인들도 쓰러져 간다. 그 진지를 지나 겨우 도달한 해변, 엄호해줄 그 무엇도 없는 겨울 해변에 수를 가늠하기 조차 힘든 군인들이 '구출'에 생명을 내맡기고 있다. 그곳이 이제 유럽 대륙에서 밀리고 밀린 영국군의 마지막 배수진, 덩케르크이다. 

원래 배수진의 뜻이라면 자신들을 몰아친 상대로 물을 등지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는 것이지만, 영화 속 <덩케르크>의 군인들은 이제 다가올 독일군의 총공세를 피해 본국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지막 동앗줄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2차대전은 화려한 연합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승리의 역사 속, 한  장면 10만 군인들의 생명이 몸을 가릴 곳 하나 없이 생존을 갈구하는 덩케르크 해변에서 '전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호할 지형지물하나 없는 해변, 그래서 그들을 공격하는 독일군 비행기의 포격을 그저 몸으로 받아내, 운좋게 살아나면 다시 줄을 지어 탈출을 도모해야 하는 곳에서 미덕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러기에 가까스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한 토미가 죽은 영국군의 옷을 입은 깁슨과 죽어가는 병사를 의무병인채 함께 들고 구출선을 향해 달리는 모습에 반감은 커녕 절박한 응원에 동참하게 된다. 그 절망의 생존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물로 뛰어드는 병사의 막막함에 공감하듯이. 

이런 덩케르크의 생존기는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떠올리도록 한다. 이제는 중견을 넘어 노년이 되고, 혹은 돌아가시기 하신 한 작가들, 박완서, 이문열, 이문구,등 전쟁을 겪고, 그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가들의 글에서는 <덩케르크>의 토미, 깁슨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수난기가 빠짐없이 등장했고, 그 생존의 수난기는 전쟁 세대를 상징하는 세대적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의 전세대가 경험했던 그 역사 속에 무기력하게 던져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성'이라 정의내린다. 덩케르크 해변에 뒤늦게 도착한 토미, 10만이 넘는 패잔병과, 하지만 영국 본국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3만의 인원 사이의 엄청난 현실적 갭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토미를 몇 번이나 도와주웠던 깁슨이 결국 마지막 성공의 순간에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영국군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다음 차례는 토미 너 라며 울부짖듯 질타하는 그 동료 병사의 생존이 곧 정의라는 잔혹한 단호함이, 어쩌면 거대한 역사 속 인간 생존의 진솔한 목소리이겠다. 



이런 역사와 그 속에 던져진 인간에 대한 놀란 감독의 직관이 보다 긍정적으로 발현한 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에서 였으며, 늘 역사적 숙명과 그 사이에 낀 자아의 고민은 그의 히어로 물의 주된 주제여왔다. 그리고 이런 놀란 감독의 생각은 뜻밖에도 최근 작년 우리나라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통해서 인문학적 정의에 도달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단언한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인류가 자랑스레 펼쳐온 문화를 '정신적 기생충'이라 명명한다. 그 기생충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인간의 희생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전파한다. 이 인간을 도구화 한 정의에 불쾌하지만, 그 승리의 2차 대전 전장에서, 덩케르크 해변에 줄을 지어 생명을 도모하는 숱한 인간의 대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탄식과 함께 유발 하라리의 정의가 떠올려진다. 거기엔 2차 대전의 승리 기록에 씌여있는 그 정의의 이데올로기란 없다. 그저 역사란 전장 속에 던져진 숱한 생명들이 있을 뿐.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전진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도모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알렉스의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살아돌아온 그 자체가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구르고 뜯기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해도 '생존'의 승리자가 되어 기록을 남겼던 전쟁 후 소설가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동지애 그 이상, 인간을 빛낸 존재들
하지만 감독은 그저 역사의 전파체 '밈'으로서의 도구적 존재 인간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역사는 문명은 그들을 그렇게 수단화하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거기서 빛난다. 그들이 그런 역사라는 전장에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도모하여 빛나지만, 또한, 그 생명의 도모를 넘어선, 존재 이상의 모습으로 빛난다. 

겨우 도망쳐 나온 해변에서 구출의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한 토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깁슨의 몇 번의 동료애가 그랬고, 영국 해협의 거친 파도를 작은 배 하나로 넘으며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자국의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도슨(마크 라이언스 분)을 비롯한  평범한 영국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무사귀환 대신, 해변의 병사들을 마지막까지 엄호한 유일했던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 분)가, 병사들을 보내고 뒤에 남은 볼튼(케네스 브래너 분)이 그랬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았지만, 해변의 병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을 사수했던 엄호병들이 그랬을 것이다. 

<군함도>와 함께 개봉하는 <덩케르크>의 개봉 초반, 영국의 국뽕 영화란 평가처럼, 이들의 '헌신', '희생'이 조국을 위한 애국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류적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의에서 그 본질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정의 또한  인간의 류적 존재의 생존을 위한 단위로서의 '이타적 본능'으로 귀결되는가 싶기도 한다. <덩케르크>에서 토미 등의 생존기가 빚은 공감의 눈물을, 파리어 등의 존재를 초월하는 행동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앞질러 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이타적 감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싶다. 그리고 그 '이타적 감성' 행위에 대한 감동이 곧 어쩌면 생존을 넘어선 인간의 진짜 '생존' 모듈이 아닌가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뭐 구구절절 이론을 들었지만, 결국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는 감동은 생존을 넘어선다. 



그랬다. 늘, 놀란 감독은, 시간을 다룬 새로운 영화다 해서 보러갔는데, 존재의 형식에 대한 철학적 화두를 받아들었고, 히어로 물을 보러갔는데 사회적 존재와 자아의 문제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잘 빠진 전쟁 영화(총 소리 하나에서 부터 전쟁을 실감나게 해주었다)라 해서 보러갔는데,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영화로 인문학하기, 이게 바로 덩케르크를 만든 놀란의 진짜 직업인가 보다. 구구절절 우리 영화는 어떤데라고 말하기 조차 구차하다. 그저 당대에 이런 감독과 함께 인간과 역사를 고민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by meditator 2017. 8. 3. 18:16

공교로웠다. 얼마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엄지 척하는 인증 사진으로 '물의'를 빚었던 손혜원 더불어 민주당 국회의원이 8월 1일 <냄비 받침>에 등장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 '공교로운 시기'를 허심탄회한 인터뷰를 통해 운영의 묘를 살렸다. 출연 당사자에게는 공개 사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력하고픈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명색이 '스타의 사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던 그 어정쩡한 콘셉트를 이제 예능판 <썰전>으로 자리잡아가는 정치 예능 토크쇼로서의 새 장을 안착시켰다.


 

손혜원 vs. 나경원 
일단 8월 1일의 <냄비 받침>은 손혜원과 나경원이라는 두 국회의원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앉힌 제작진에 가장 큰 점수를 주어야 하겠다. 

한 자리에서 밥도 먹기 힘들다는 초선 의원과 다선 의원의 독대, 하지만 연륜으로 보면 이미 60줄을 넘은 건 물론, 사회적으로도 '참이슬', 처음처럼' 등 '브랜드 디자이너'로 한 획을 그은 손혜원 의원과, 소장 판사로써의 재직 경험 외에, 일찌기 국회로 들어와 여당의 각종 직책을 맡아가며 모범생 국회의원으로 잔뼈가 굵은 나경원 의원의 조합은 한 그릇에 담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인선 사실조차 신문을 보고 알았다지만 김정숙 여사의 고등학교 동창에, 더불어 민주당 당명 선정 과정에서, 이번 대선까지 '브랜드 디자이너'로서의 그 역할을 톡톡히 드러낸 나경원 의원이 평가한 여권 실세와, 정치 입문 시절부터  '근황'조차도 뉴스꺼리가 되어 온 '실세'였던 나경원 의원의 조합은, 현재의 정치권에서 가장 어울리는 만남이다. 

그랬기에 연륜과 사회적 경험이 풍부하지만 내일이 없는 초선 손혜원 의원과, 연륜으로 치면 몇 년이 밀리지만, 정치적 연륜에 있어서는 손혜원 의원의 그 어떤 행보에도 '훈수꺼리'가 있는 다선 의원 나경원 의원의 노회함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적폐 청산을 내세운 여당의 전투적 초선과 투쟁적으로 여당의 발목을 잡는 것이 사명이지만, 정작 내일을 고민하는 야당의 다선의 중후함은 그 자체로 현재 여당과 야당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여성 국회의원이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져 '여혐' 발언을 했다간 같은 당 남자 의원이라도 뼈를 못추릴 것이라며 달라진 시대를 선언하는 손혜원 의원과 여당 대표 추미애 의원조차도 접근성에서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그간의 정치 생활 동안 체험한 유리 천장을 토로하는 나경원 의원에게서는 슬로건으로서의 여성주의와 현실에서의 한계를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해를 넘어선 이해 
흥미로운 예능적 조합을 넘어 <냄비 받침>이 의미가 있었던 건, 그간 손혜원, 나경원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오해'를 넘어선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시간이었다. 

우선 김군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의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문제가 되었던 손혜원 의원, 그 일에 대해 다른 사안에 있어서는 매사에 자신이 넘쳤던 손혜원 의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무조건 '사과'를 했다. 자신이 순간 경계가 풀렸었다며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에 대한 반성과 어려움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날의 상황을 설명했다. 김군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빈소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급하게 요청을 했는데, 그 요청에 100 명이 넘는 분들이 와주셨다고. 그 분들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상주처럼 분주했던 손의원. 이제는 지역구에 가면 아이돌급 인기인답게 내내 사진 한 장 찍다는 부탁을 받고, 내내 거절하던 손의원이. 늦은 밤 장례 일정을 마무리하고 너무 미안한 맘에 한 장 찍은 사진이 그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사과는 사과대로, 하지만, 그 사과와는 별개로 그 날의 설명을 담담하게 한 손의원의 해명은, 분명 적적치 못한 행동이지만 아직 정치인 초년생의 그 해프닝을 이해할 터전을 만든다. 그런 손의원이기에, 그의 '닥치세요'라는 그 유명한 발언에, '오죽하면 그랬겠어요'라는 해명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어쩌면 8월 1일의 <냄비 받침>에서 오해를 넘어선 이해의 이득을 더 많이 본건 나경원 의원일지도 모르겠다. 늘상 '해'가 드는 곳에만 있는 '공주'같은 미모의 정치인, 심지어 표정 변화가 없어 '얼음 공주'란 별명까지 얻은 연륜의, 하지만 어쩐지 인간미가 없어보였던 이 정치인의 또 다른 면을 <냄비 받침>은 들춰낸다. 

사람들은 늘 '실세'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 누구의 세력이었던 적이 없던, '공주'라 하지만 '무수리'처럼 늘상 여당의 어려운 뒷설거지를 마다하지 않으며, 때론 패전장으로 잠시 정치의 무대를 멀리한 적도 있었던, 하지만 여전히 그의 근황이 뉴스꺼리가 되는 성실하고 진득한 직업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 다른 당에, 한 자리 하기도 힘든 초선과 다선이지만,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경원 의원을 지켜보게 되었다는 손의원의 말처럼, 불통의 아이콘, 독불장군 노땅의 상징이 된 야당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보수적 신념에 따라, 하지만 '당명'에서부터 진솔하게 터놓고 고민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신선'했다. 

물론 이런 나경원 의원의 모습을 오랜 정치적 경험을 통과한 세련된 자기 포장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런 식의 평가는 반대당인 손의원의 진솔한 자기 표현 역시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당연히 예능이라는 '프레임'은 편집을 통해 제작진이 의도한 '사실'들을 선별적으로 전해주는 방식이다. 그건 '미디어'가 가지는 본질이다. 마치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면서도 그 이름이 '참이슬'이라 하니, 이슬을 마신 듯 청량감을 맛본다고 느낌을 받듯이. 



예능판 <썰전>의 가능성을 잘 살려내길
하지만, 소주를 참이슬로 위로하듯, <냄비 받침>이 제시한 정치 예능은 '포장'을 넘어선 '정치적 마타도어'를 비껴간 그래도 진솔한 정치적 비젼들이다. 막말 선봉대가 아니라, 오죽하면 닥쳐가 아닌 그래도 존댓말인 닥치세요를 한 정치인의 모색과, 자기 당 의원들이 반말에 삿대질을 하는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 없이 질끈 외면하고픈 정치인의 고뇌를 통해, 그래도 서로 최소한의 기본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한 '의도성'말이다. 

설사 그것이 각자 자신의 한껏 치장된 정치적 수식어라 하더라도, 다음 국회의원을 위해 달리지 않고 이 정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계 적페 청산을 위해 한껏 타오르겠다는 초선 의원의 포부도,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내일이 없는 야당에서, 그래도 열심히 보수의 가능성을 지펴보겠다는 그 초라하지만 성실한 의도는, 이데올로기와 수식어를 제한 현실 정치의 이성적인 '전선'이다. 세상이 하나의 명쾌한 색깔로 정리되면 좋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대치된 전선'의 현실에서 마주친 '이성적인 모색'과 이해가능한 호감의 자리로서 <냄비받침> 손혜원-나경원 편은 유효하다. 

그리고 이런 예능판 <썰전>으로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해 가는 <냄비 받침>의 성과이기도 하다. 이경규라는 '중용'의 미학을 통달한 mc의 균형추 아래, 여,야라는 현실의 가장 두 극단을 모아놓고, 각 정치인들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내공은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연다. 다행히도 어설픈 아이돌 탐구 생활의 끼얹음이 없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더욱 빛난다. 어설픈 책 출간이나, 냄비받침이라는 어긋난 네이밍이야 민망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자리잡아가는 예능판 썰전의 기획을 잘 살려내길 바란다. 

그런데, 손혜원 의원의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지?라는 의아함처럼 이렇게 나와서 이성적으로 자기 생각을 풀어낸 정치인이 얼마나 있으려나 싶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아니 뭐 꼭 정치인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푸드 칼렄니스트 황교식 씨 등의 '사회적 자폐' 논란처럼, 우리 사회 함께 모여 생각을 나눌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겠다. 연예인의 신변잡기가 아니라도. 부디 이런 모처럼의 모색을 잘 살려내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7. 8. 2. 14:23

다큐가 시작되자 등장한 것은 한 마리의 병아리, 아니 달걀, 이제 막 그 속에서 검은 병아리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 정지된 화면 안에서 달걀 한 알이 갓 태어난 병아리로 변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고투다. 이렇게 <sbs스페셜- 알을 깨다>는 정말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병아리를 통해 마흔까지의 직장인의 삶을 거하고, 이제 철부지 50대에 도달한 미즈노 마사유키의 삶을 상징한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미즈노 마사유키, 그 인생의 황금기
흔히 오십 줄에 든 사람들에게 당신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냐고 질문하면 꽃다운 20대 청춘 시절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아직 세상 그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았던 그 시절,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었던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여기 그런 일반적인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 바로 미즈노 마사유키, 그는 말한다. 50, 이제부터가 황금기의 시작이라고. 그런데 전북 김제에 자리잡은 그의 집, 그 집에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살펴보노라면, 그런 그의 장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도 남들처럼 살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에서 컴퓨터로 설계일을 하며 살던 그, 좋은 아파트, 좋은 차, 그리고 가족들의 풍족한 생활, 그런 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 걸릴 일을 삼, 사일에 해치우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 어느 날 문득 창 밖을 보니 보도의 틈 위에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살던 시절, 그 봄의 전령을 보고 미즈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렇게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가? 라고. 

어린 시절 미즈노는 풀과 벌레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어른이 된 미즈노는, 그 어린 시절의 꿈을 잊었다. 대개의 어른들이라면,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런 거지하고 넘어갔으련만, 미즈노는 달랐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아내의 고향 전북 김제로 다섯 아이를 끌고 갔다. 그리고 이제 아내가 일을 나간 집에서 그는 기르고 싶던 머리도 기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며, 온 동네 버려진 물건을 집어다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아홉살 딸내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지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그가 만든 네온이 은은하게 빛나는 바에서 재즈를 들으며 막걸리 한 잔에 치즈을 입에 넣을 때.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
집 앞 30년된 나무와, 100년된 나무 사이에 층층이 건들건들 매어달린 나무집, 4년 동안 지은 이 나무집이 그가 보낸 '철부지 세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이 나무집만일까? 다큐는 직장인 미즈노가 철부지 50살 소년이 된 그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와 그의 자녀들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다큐가 시작하자 마자 미즈노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오늘 탄생한 검은 병아리 한 마리'는 BJ가 꿈인 막내 딸의 첫 방송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야무지게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제치는 아빠의 손을 빌어 집까지 만들어 줬는데, '러브 하우스' 하모니가 끝나기도 전에, 막내딸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어미 고양이가 단박에 나꿔채버렸다. 허겁지겁 고양이의 입을 벌려 구출 작전을 시도해 보지만 오늘 태어난 생명에게 새끼를 난 어미 고양이의 허기진 입은 가혹했다. 

죽은 병아리를 손 위에 놓고 망연자실해 하는 아홉 살 난 딸에게 아빠 미즈노는 담담하게 말한다. 새끼를 네 마리나 낳은 어미 고양이는 배가 고팠을 것이라고. 우리가 방심했다고. 하지만 네가 어떤 결론을 내릴 지는 너의 몫이라고. 흔히 이런 상황에서 부모들이 하는 귀여운 병아리를 죽인 고양이가 나쁘다던가 하는 선입견에서 아빠 미즈노는 한발 물러선다. 

미즈노네 집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있는 미즈노네 아침, 하지만 아무도 학교 가라, 아침 먹어라 독촉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저마다 알아서 때가 되면 일어나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학교로 간다. 엄마 역시 자신의 출근 준비에 바쁘다. 사진과에 다니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즈노는 말한다. 부모로써 그 짐을 조금 덜어주곤 싶지만, 그러나 딸의 인생은 딸의 것, 그런 아빠, 엄마가 지킨 경계선에서 미즈노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물어 스스로 답을 얻는다. 

아홉살 난 딸은 병아리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미 아홉 살이지만 병아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이해한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은 스스로 새로운 자신을 향한 길을 찾아 아버지의 도움없이 라오스로 떠났다. 마흔 살 창 밖의 민들레를 보고 전북 김제로 향하기 까지 2년 아마도 미즈노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그와 딸들의 관계를 통해 짚어보게 된다. 풍족한 삶 대신, 때로는 득도한 스님처럼, 때로는 소년처럼 꿈꾸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찾아서 즐기는 그의 삶은 마치 잠시 도원에 든 나무꾼의 일장춘몽과도 같다. 

하지만 미즈노는 말한다. '마흔까지 가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일벌레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보니, 가족은 행복할 지 모르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선후를 바꿨다. 그러고 나니 나도 행복하고, 가족도 또한 행복해 졌다' 이건 미즈노가 도달한 결론이고, 다큐는 보는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병아리가 깨고 나온 알 껍질을 들고, 미즈노는 말한다. 알은 병아리를 보호해주지만, 그러나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 알은 장애라고. 그렇게 어렵사리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하지만 태어난 첫날 고양이에게 물려죽었다. 다큐는 그럴 듯한 미즈노의 트리집과 그 자녀들의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 각자의 삶을 버거워 하며 이겨내는 알을 깨는 과정은 복선처럼 깔려있다. 병아리의 죽음이 아홉살 소녀에게 화두가 되듯, 저마다 삶의 화두를 붙잡고 가야한다는 것을 철부지 50세 소년은 초연하게 웃으며 받아들인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SBS스페셜> 버전같았던 <알을 깨다>는 하지만, 가족, 사회와 괴리된 채 자연을 벗삼던 자연인들과 다르다. 50살 철부지라며 스스로 하염없이 선한 웃음을 날리는 아버지에게, 스무 살이 넘는 딸은 영원토록 철들지 않기를 소원한다. 아홉 살 딸에게는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자, 경계를 넘지않는 든든한 멘토이다. 이제 남편 대신 돈을 벌러가는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행보에 신중한 남편이 믿음직스럽다. 나무 위에 지은 꿈의 공장같은 트리 하우스는 그저 미즈노의 자기 만족을 넘어, 새로운 일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퇴사하겠습니다>, <성신제의 달콤한 인생>, <회사를 바꾼 괴짜 사장>에 이은 <알을 깨다>는 욜로 라이프(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주제로 꿰어질 수 있다. 이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사회, 인간성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쟁 사회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창되고 있는 욜로 라이프, 그 범주 안에서 다큐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미즈노의 즐거운 인생 역시 이 시대의 또 한 편의 새로운 선택지로 제시된다.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은 병아리를 들고 황망해 하는 딸에게 네가 고민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듯, sbs 스페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 당신이 살아갈 한번 뿐인 삶을 누리는 이런 방식도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당신의 선택이라고. 


by meditator 2017. 7. 31.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