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의 sbs 버전으로, 유재석과 김구라의 신선한 조합으로 관심을 끌었던 <동상이몽>은 하지만, 매회 출연자의 사연과, 그 사연에 대한 패널들의 조언이 논란이 되며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7월 10일 새롭게 돌아온 <동상이몽>은 어색한 조합이었던 유재석 & 김구라의 조합의 유혹을 물리치고, 김구라와 서장훈이라는 익숙한 조합에, 김숙을 얹어 돌아왔다. 또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던 일반인 참가자 대신, 최근 '트렌드'가 되고 있는 유명인들의 개인사 엿보기의 또 다른 버전인 '너는 내운명' 유명인사 커플의 일상사 관찰 예능으로 궤도를 수정했다. 그 시즌2의 첫 번 째 출연자 중 한 명은 놀랍게도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이재명 성남 시장'이다. 



이재명 성남 시장의 반전 부부 생활
지난 2월 대선이 아직 마무리되지도 않은 시점, 자신에게 출연 섭외가 왔다며, 이미 자신이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 것을 알았던 것 아니냐고 이재명 시장은 푸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런 오랜 출연 모색이 무색하게, 이재명 성남 시장의 동상이몽은 이제는 돌싱이 된 김구라와 서장훈이 이런 것까지 보여주냐며 볼멘 비명이 절로 터져나온 침실씬부터였다. 

나름 아내를 위해 많은 것을 노력한다는 시장님 남편과, 그런 남편을 위해 늘 준비된 삶을 사느라 어느새 식사 준비에서 부터, 옷차림, 모니터까지 일인다역을 하느라 걸음걸이도 총총, 밥도 후다닥 먹는 게 일상이 되어버린 희생적 아내 김혜경씨의 일상은 26년이라는 함께 살아온 시간이 무색하게 정겹다. 

물론 아버지와 자식들에게 상을 주고, 홀로 옆에서 바가지에 밥을 떠넣으시던 어머니의 시대를 살아온 이재명 시장은 여전히 그릇 하나 부엌에 들어다 주는 것도 어색할 만큼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간이 배밖으로 나온' 남편이다. 하지만 '시장', 그리고 한때는 대통령 후보였던 그를 잠자리에서 깨우는 것에서 부터 시작하여, 식사, 옷차림, 정치 일정까지 보살피며, 짬짬이 스킨쉽을 마다하지 않는 이 부부의 모습은 아내라는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 덕일까? 프로그램 방영 시간부터 검색어에 등장한 이재명이란 이름 석자는 하루가 지나서도 쉬이 내려오려 하지 않는다.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지난 대통령 선거 운동 기간, 이재명 성남 시장은 후발 주자임에도 열렬한 지지자들을 모으며 선방했다. 그의 주장은 명징했고, 그 주장은 젊은 층들을 기반으로 하여 굳건한 지지층들을 결집했다. 하지만, 그 주장의 명징함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노동자 출신에 가장 친노동적인, 그래서 반기업적인 이 정치인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을까. 이재명 성남 시장의 지지층은 좀처럼 확산 속도를 내지 못했다. 아마도 그 지지층 확산에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선거 기간 중 그의 가족과 관련하여 시중에 유포된 각종 불미스러운 사건들이었고, 그 과정에서 보여진 이재명 시장의 '감정적인 태도'였을 것이다. 그로 인해 이재명 시장은 토론 등에서 가장 명쾌하고 해박한 주장을 펼쳤음에도 '정서 조절 장애' 등의 불미스러운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심리학자의 대통령 후보 중 가장 안정적인 심리적 기제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는 이미 유포된 '편견'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래서 였을까.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이재명 시장이 첫 발을 내딛은 정치 행보는 뜻밖에도 예능 <동상이몽2>의 출연이었다. 그리고 그 출연은 최소한 첫 회를 봐서는 매우 성공적인 듯 보여진다. 프로그램 속 이재명 성남 시장은 '분노 조절 장애자'는 커녕, 매우 스윗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전통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종종 귀엽기까지한 26차 남편으로 등장했다. 토론이나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의 주장에 한 치의 양보도 없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아내가 뿌려주는 향수에 팔을 너펄거리며 한 바퀴 돌며 뽀뽀까지 빼먹지 않는 '애완견' 같은 모습이었다. 관찰 카메라 앞에서는 물론 그 동영상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내내 미소를 잃지 않는 이재명 시장의 모습은 넉넉했다. 선거 기간 동안 내리 그를 괴롭히던 그 '강고한 편견'이 프로그램 한 시간만에 스르르 허물어졌다. 

정치인들의 미디어 프렌들리가 우려되는 건
선거가 마무리 되고, 선거에 참여했던 유수한 후보들은 저마다의 행보를 시작했다. 그 중에서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sbs스페셜의 <꼴찌 심상정이 남긴 것>을 통해 '러블리한 심상정'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바른 정당 유승민 전대표 역시 <냄비 받침>에 출연하여 선거 후일담을 비롯하여 소탈한 모습을 공개하며 좋은 이미지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제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이재명 시장은 부부가 관찰 예능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이런 정치인들의 발빠른 행보는, 아마도 지난 대선 기간을 통해 선거에 있어, 정치인에 있어 '이미지 메이킹'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이미 그 전 선거에서 후보로 등장했던 문재인 대통령이 선점했던 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이란 대중에게 각인된 이미지에 대한 한계에 부딪쳤고, 대중 연설 열 차례보다, 유포된 '가짜 뉴스' 하나의 전파 속도와 그로 인한 이미지 붕괴가 선거에 더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실제 주장도 중요하지만, 그 주장의 전달 방식이 후보자 각자의 표 이합집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 증명된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였을까, 차기 대선 주자로 예정되어 있는 세 사람은 발빠르게 자신들의 이미지를 변화 혹은 쇄신시키고자 발빠르게 움직이고 그런 그들의 전략은 일정 정도 유효한 듯 보인다. 



그러기에, 더 우려가 된다. 새롭게 차기 대선을 준비하는 대통령 후보들에게 가장 중요한 전략이, '미디어' 전략이라는 사실이. 즉, 우리 사회에서 대형 기획사 등이 자사의 연예인들을 '이미지 메이킹' 전략으로 포장하듯, 이제 우리는 '대통령 선거' 조차 '미디어전'으로 치뤄야 하는 것이 명실상부해지는 것같아서. 아니 이미 명실상부한 것을 체감시키는 것같아서. <동상이몽2>에 출연한 이재명 시장이 자신은 보다 자상한 남편인데 제작진이 자신의 자상한 면을 '악마의 편집'을 통해 없애버렸다며 우스개로 말한 장면은 그러기에 중요하다. 

사람들이 '사실', 혹은 '진실'이라 믿는 '미디어'는 편집된 진실이다. 관찰 카메라를 통해 수집된 수많은 사실 중 제작진의 의도에 따라 보여주고 싶은 사실만이 가려 방송된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중에게 전달되는 정치인의 이미지는 그러기에 '방송'이라는 '권력' 혹은 '유착된 권력'을 통해 가공될 소지가 더욱 다분해 진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동상이몽2>의 이재명 편은 분명 그간 이재명 시장의 억울한 이미지를 풀어주는 시간이었지만, 그러기에 정치인들의 빈번한 방송 출연에 대한 우려를 쌓는 시간이 된다. 무엇보다, '호모 헌드레드 시대, 그럼에도 너는 내 운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보여준 시간들은, 제작진이 말하듯, 혼밥과 싱글족들의 시대에 '염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청와대에 들어간 문재인 대통령, 김정숙 여사를 비롯하여, <꼴찌, 심상정이 남긴 것>의 심상정네 가족은 물론, 유승민 전대표도, 그리고 이제 이재명 시장까지도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화목하고, 행복한 부부이다. 아내는 정치인 남편을 위해, 혹은 남편과 자식들 역시 정치인 아내를 위해 당연히 헌신적이고, 그 아낌없는 헌신 위에 가정은 공고한 위상을 뽐낸다.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시장의 발목을 붙잡았던 건 그의 불우한 가족사였다. 그리고 이제 <동상이몽2>을 통해 증명한 건, 그 불우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안온하고 행복한 가정이다. 미디어를 통해 유포되는 이 '행복한 가정'주의, 과연 이런 '주의' 아래에서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가 전직 대통령이 아니고서는 '싱글 대통령'이나 심지어 돌싱 대통령이 등장할 수 있을까? 

by meditator 2017. 7. 11. 14:18

과로사'라는 말이 이젠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생소한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7월 8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싶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과로 자살'을 조명한다. 과로가 심해서 자살을 한다고? 그러면 열에 아홉은 이렇게 말하기 쉽다. '그만두면 돼지, 뭐하러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냐'고. 하지만 프로그램은 답한다. 과로사의 한 영역으로서 '과로 자살'을 인정해야 한다고. 




인간 무한 요금제, 과로 자살을 부르다. 
명문 카이스트를 나와 대기업인 삼성중공업의 과장인 이창헌씨는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결혼 한 지 일년여, 두 달된 딸내미를 둔 가장의 결정이라기엔 너무도 참혹하다. 자상한 가장이었던 남편의 죽음을, 성실한 직장인이었던 아들의 죽음을 수긍할 수 없어 가족은 회사에 항의를 하지만 '개인적 결정'인 자살 앞에 대기업인 회사나, 직장 상사들은 냉담하다. 

하지만 삼십대의 젊은 나이에도 체력이 딸려 간호사였던 아내가 수액을 놔줘야 할 만큼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던 그의 일상, 심지어 연구직 출신이지만 사업부로 보직이 변경되어 희망 퇴직의 위협에 하루하루를 보내던 그의 마지막 선택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의 입장대로 이런 선택이 이창헌씨만이 선택이었다면 '개인적 결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 입사 1년만에 꺼리는 베트남 지사에 홀로 배치되어 새벽까지 업무를 보던 젊은 사원이나, 실적이 날 때까지 근무하는 '크런치 모드'의 와중에 지난 해 한 해에만 4명이 자살한 잘 나간다는 게임 업계, 2013년부터 지금까지 사망자 70여명 중 돌연사 15명에, 자살 15명의 집배원등, 밥먹듯하는 야근과 과중한 업무 사이에서 결국 '자살'을 선택하는 직장인들이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업계를 막론하고 '비일비재'한 일이라는데 <그것이 알고싶다>의 문제 의식이 있다.

똑같이 주는 월급, 한도 끝도 없이 부려먹는 직장인의 현실을 '인간 무제한 요금제'라 스스로 자조하는 현실, 특히 1961년 생긴 근로시간 특례 제도 법은 통신, 의료, 광고, 운수 등 집배원을 포함한 26개 업종의 경우 사업자가 근로자와 합의만 되면 법정 근로 시간과 상관없이 초과 근무를 시킬 수 있는 법적 현실 속에 설사 이곳을 떠난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없다는 절망감과 과로로 인한 판단력 상실, 우울증 등이 극단적 결정으로 오늘의 직장인들을 이끈다.

 

과연 이렇게 인간을 마지막까지 몰아붙이며 일을 시키는 관행과 적폐에 대한 대안은 없을까? <그것이 알고싶다>가 제시한 것은 대형 광고 회사 덴츠에서 하루 20시간씩 일을 하다 '자살'을 한 다카하시 미츠리로 부터 시작된 문제 의식이 <과로사 방지법>(2014)으로 이어진 일본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그렇게 <그것이 알고싶다>가 '법'을 통해 최악의 노동 현실을 돌파하려 했다면, 다음 날 방영된 <sbs스페셜- 회사를 바꾼 괴짜 사장>은 사용자의 의식 혹은 태세 전환으로서의 '일터 민주주의'를 제시한다. 

일터 민주주의의 선두주자, 괴짜 사장님들
프랜차이즈 업주의 갑질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법정 구속까지 가는 요즈음 그 정반대의 '사장님'들을 <sbs스페셜>이 다룬다. 그 첫 번째 인물은 직원에 의해 '사장' 자리에서 쫓져나 동거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오늘은 북유럽으로, 어제는 중국으로 다니는 여행사 사장님 신창연 대표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불황의 여행 업계에서 해마다 뛰는 매출 실적을 자랑하는 회사의 사장님이었던 신창연 대표, 직원들을 위한 갖가지 복지 제도를 마련하다, 2013년 80%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사장 자리를 내놓겠다는 과욕을 부렸고, 단 한 명이 부족해 사장 자리에서 짤리는 처지가 되었다. 처음 투표의 결과를 받아들고 잠시 '멘붕'에 빠지기도 했다는 그였지만, 곧 진정한 회사 내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놓았고, 그 이후 그의 삶은 180도 바뀌었고, 지금은 세계를 오가며 자유롭게 살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사주'가 사라진 회사는 성장을 거듭했고, 그의 후임 사장 역시 지금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 영업 본부장으로 현직을 이어나가는 등, 자리가 아닌 일로써 '사장' 자리와 '사장'이 없어도 자율적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는 기업 문화를 정착시켜냈다. 



신창연 대표만 괴짜가 아니다. 한때 몇 개의 요식업소를 운영하던 '갑'이었던 사장님은 이제 수유동 작은 일식당의 '해피님'이 되어있다. 커다란 식당 대신 사람 몇 명만 들어가도 꽉 차는 작은 식당, 수많은 직원 대신 이 식당이 열던 그 시절부터 함께 하던 직원 대신 사람들, 그리고 화장실 청소부터 온갖 허드렛일은 '해피님'이 도맡아 하고, 식당의 대소사는 모두 직원 회의를 거쳐 결정되는 이곳은 '해피님'이 원하던 진짜 일터이다. 이곳엔 알바 대신, 이익금을 나눠받는 직원이 있고, 언젠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는 직원 대신, 이곳에서 뼈를 묻을 각오가 되어있는 주인들이 있다. 

한 술 더 떠서 일주일에 4일만 근무하는 직장도 있다. 돈을 주면 무제한으로 부려먹는 것이 관행이 된 대한민국에서 불금을 회사 대신 가정에서 맞이하는 직장, 오후 6시만 되면 뒤도 안돌아 보고 모든 직원이 회사를 비우는 직장, 그래서 아내의 말을 듣고, 남편의 인도로 사내 커플이 증가하는 직장,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주 4일 근무한 이래 이 회사의 실적이 비약적 발전을 해낸 직장 역시 그 결단은 사장님으로부터 이다. 밤 거리를 빛내는 건물의 불빛, 그 불빛을 보고 직장인들은 '상사의 눈치로 인한 불가피한 태업'이라고 자조한다. 즉 그 시간까지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근대적 업무 관행으로 인해 할 일이 없어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관행이 늦은 퇴근과 '그로 인한 피로의 축적, 업무 효율의 저하를 낳는다고 것을 회사원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창의성'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화두가 되고 있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에서 과연 우리의 전근대적 업무 관행이 우리 산업을 계속 승승장구하게 할 것인지, 다큐가 찾아간 미국 it 업계 신생 기업의 자유로운 사내 문화가 제시하고 있는 바가 크다. 



결국 <회사를 바꾼 괴짜 사장>이 내세운 것은 '갑'의 변화이다. 프로그램의 마지막 30년동안 이끌었던 회사를 퇴임하는 회장님, 퇴임하는 회장님이라는 우리 사회에서는 이율배반으로 들리는 이 정의를 실천하는 회장님을 통해, 회사는 새로운 전통을 일궈나간다. <그것이 알고싶다>가 말하고자 한 것도 그것이다. 법과 제도가 있더라도,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유용하고자' 마음 먹는다면, 인간을 돈을 주면 무제한 부리는 대상으로 간주한다면, '과로사와 과로 자살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과로사처럼 과로 자살 역시 '산재'로 인정하는 사회적 경각심도 필요하지만, 일을 하다하다 자신이 도피할 곳은 죽음 밖에 없다는 절박한 상황으로 몰고가는 '과로 사회', 그 자체에 대한 법적 방지와 인식의 제고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능성'의 하나로써 <sbs스페셜>의 괴짜 사장님들이 제시된다. 
by meditator 2017. 7. 10. 15:44

교양이라기엔 너무 재밌고, 예능이라기엔 그 내용이 범상치 않다. 바로 <알쓸신잡>, <어쩌다 어른>, <수업을 바꿔라> 등  tvn의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아직은 어른이고 싶지 않은 어른이들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로 시작하여, 이제는 '한다하는 인문학자나 강사'라면 한번쯤은 거쳐가야 할, 그래서 구글x의 모가댓이 등장하고, 조만간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마저 출연이 예정된 <어쩌다 어른>은 대놓고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강연'이라는 포맷은 kbs1의 <명견만리> 등 tv 프로그램에서는 새삼 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다 어른>을 보고 있노라면 예능을 보듯 부담스럽지 않게 강연의 내용에 빠져든다. 그건 아마도 '설민석', 최진기, 심용환, 이동진, 김태훈, 허진석, 유수진, 윤홍균, 서천석' 등 당대의 명강사와 유명 작가, 인문학자들이 총망라된 이른바, '네임드'한 강연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쌍방향 인문학이 자아내는 재미 
다이어트 비법에서부터, 역사, 독서, 교육, 경제, 심리까지 이 시대의 사람들이 '교양'으로 목말라 하는 내용을 <어쩌다 어른>은 적확하게 짚어내어 '강연'으로 만들어 낸다. 구 시대의 적폐로 고민할 때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세상 살아가는 어려움에 빠져있을 때 '마음 공부'나 '자존감 수업'을, 그리고 새 정부에 즈음하여 '헌법'을 통해 본 대한민국의 정체성 공부처럼, 시의적절한 주제들이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또한 '인문학적' 내용을 보다 시의성을 살리기 위해 '화병 치유 요법으로서의 글쓰기'라거나, 역사 한끼로서의 '식문화사'와 같은 식으로 보다 경량화된 '인문학'으로 접근성을 높인다. 거기에 그 '적절한 주제'와 합쳐진 mc 김상중과 연예인, 혹은 준 연예인 패널들의 공감어린 '방청' 관행도 빠질 수 없다. 즉, '강연'이라는 것이 다수를 상대로 한 획일적 방향의 교육 방식인 단점을 mc와 연예인 패널들의 적극적 참여로 마치 쌍방향의 교감을 전제로 한 '예능'적 공감을 더하여 지루하지 않은 강연 프로그램으로 재탄생되어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중이다. 

물론 tvn이 '인문학'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건 <어쩌다 어른>이 처음은 아니다. 매주 수요일 <곽승준의 쿨까당>과 목요일 일찌기 천주교, 불교, 기독교의 인물들을 한 자리에 모아 파격적인 토크쇼를 시작한 <콜라보 토크쇼 빨간 의자>를 빼놓으면 섭하다. 

하지만 최근 tvn 인문학의 정점을 찍고 있는 건, 아마 자타공인 <알쓸신잡>, 나영석이 가면 길이 된다라는 말을 실현이라도 하듯, 이미 <삼시 세끼> 등을 통해 예능의 새로운, 그리고 독보적인 트렌드를 만들어 가고 있는 나영석 피디의 새로운 예능으로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이 등장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이란 프로그램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미 2권 세트로 나온 <정재승 진중권의 크로스>란 책으로 부터 시작해보다. 요즘 개봉한 바 있는 트랜스포머로 부터 로또, 심지어 배우 고현정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인문학자 진중권과 과학자 정재승이 각자의 시각에서 접근해 들어가는 이 책의 확장판이 바로 <알쓸신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 대상이 트렌디한 주제를 넘어, 우리 나라 방방곡곡으로 '지리적' 확장성을 가지고, 거기에 유시민, 황교익, 김영하, 유희열, 정재승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전문가 저리 가라할 입담인지, 수다인지, 수다를 빙자한 강연인지 모를 모임을 이어가는 중이다. 

신계몽주의 예능의 정점
<어쩌다 어른>에 이어 <알쓸신잡> 역시 관건은 나영석 예능의 전매특허인 '편안함'과 쉬운 접근성이다. 우리나라 당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각 분야에서 내노라하는 인물들이지만, 그들이 통영이니, 강릉이니 우리나라의 지역을 아재들 '유람'하듯 둘러보고, 거기서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수다'를 떠는 이 시간은 어쩌니 보고 있으면 '편안한데 유익한' 예능의 기가 막힌 콜라보를 보여준다. 

결국 <어쩌다 어른>이나, <알쓸신잡>등의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바는 '가르치는 것'이다. 이른바 '인문학 열풍'에 대한 tv 콘텐츠의 적극적 수용인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하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거기엔 새 정부, 혹은 그 새 정부를 잉태한 촛불 광장을 추동한 '시대적 변화'에 대한 '배경 지식 제고'의 필요성이 있다. 촛불로 전 정권의 수뇌부가 '구속'되었을 때, 그걸 '유신 시대'의 종말이라고 정의내렸다. 그렇다면 유신 시대는 그저 정치체제의 문제였을까?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생각과 구 시대적인 사고의 충돌이 빈번하게 이루어 지고 있듯이, 우리는 비록 현재 정치 체제로서의 유신 시대를 '거'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전체 곳곳에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구시대적 사고 방식들과 그 관습들로 인해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또한 산업 사회를 거쳐 정보 산업 혁명 시대를 이끌어 가겠다는 주도적 의식은 그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개념'에 대한 갈망을 끓어오르게 한다. 또한 산업 사회의 경제적 인간으로 개별화된 인간 소외에 대한 고민 역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복잡적인 필요가 우리 사회에 '인문학적 열풍'을 끓어오르게 했다. 대학교의 '인문학과'는 비록 취업 전쟁에서 무기력하지만, 인문학은 구 시대를 정리하고, 새 시대를 준비할, 혹은 현재 사회의 문제들의 해결 키로서 '만능 해결사'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어쩌다 어른>과 <알쓸신잡>을 통해 등장하는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의 각 담론은 유신 시대 혹은 구 시대 강단에서 다루어지던 그 담론이 아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듯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우리의 새로운 사고 방식에 대한 '계도'로서의 갖가지 인문학적 지식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새로운 시대를 선도할 '계몽주의적' 입장에 서있기에, 새 시대의 '어용 지식인'이 되겠다 자처한 유시민을 필두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강사와 각 분야의 인문학자들이 앞다투어 '계몽'적 지식을 들고 하지만, 그것을 보다 '유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현재 tvn의 각종 프로그램들인 것이다. 

노골적으로 인문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 <어쩌다 어른>이나, <알쓸신잡>과는 분야가 다르다 하지만, <수업을 바꿔라> 역시 큰 궤도에서는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북유럽 교육' 이민에 대한 바람까지 불듯, 더 이상 현재의 대한민국 교육 체제가 새로운 시대에 경쟁력은 물론, 자라나는 아이들의 행복마저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절감 속에서, 새로운 교육에 대한 모색으로서의 '선진' 교육 과정에 대한 '답사' 프로그램으로서 <수업을 바꿔라>는 예능화된 교육 계몽주의의 또 다른 모습이다. 
by meditator 2017. 7. 8. 17:18

'그럼 그렇지', '어쩔 수가 없어',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일에 대해 이 말만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을까? '냄비 근성'이니, '속물 근성'이니 하는 갖은 수식어들이 결국은 우리를 '그럼 그런' 속성으로 귀결시키는 결론에 우리는 거부감없이 동조하고, 스스럼없이 인용한다. 이렇게 우리를, 우리 민족을 편의적으로 예단하는 우리의 '관성'에 대해, EBS 강의에서 도올 김용옥은 '식민지'적 경험의 부작용, 혹은 6.25와 같은 동족 상잔 전쟁의 소산이라 지적한 바 있다. 이런 문제 의식은 도올에서 그치지 않는다. 얼마전 출간된 <식민지 트라우마>에서 유선영 씨는 '피식민지 민족은 힘의 격차가 불러온 폭력적 사태들에 직면해 열등감, 히스테리와 공격성, 수치와 죄의식 등에 휘둘리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가 아니었다면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이 감정, 정신의 상흔들이 민족의 심연에 그리고 역사의 심연에 켜켜이 쌓여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역사적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사실 우리는 이렇게나 자부심을 가질만한 민족이라는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동주>와 <박열>의 이준익 감독이다. 


2015년에 이어, 이제 2017년 이준익 감독이 들고 온 인물들은 식민지 일제하를 살아갔던 청춘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준익은 이제는 많이 마모되고 상흔으로 인해 자기 방어 기제만이 강화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한국인', 그 아름다운 인간형의 원형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동주>로 시작된 일제 하 젊은이들의 사상과 실천 
시작은 <동주>였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윤동주 시인의 이야기다. 하지만 흑백의 차분한 톤으로 영화가 나즈막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은 조국을 일제에 잃고 간도로 이주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거기서 자란 청춘들의 삶에서 부터이다. 고향을 잃고 떠난 사람들,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들은 '고향'을 만들어 '이웃'끼리 정을 나누며 살아간다. 일제에 의해 짓밟은 본래의 고향보다 더 고향같은 곳, 하지만 그곳에서 젊은이들은 조국을 잊지 않는다. 그 시대에도 열렬한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그들을 창씨 개명을 피해 일본으로 보내지만, 거기서 그들은 '입신양명' 대신, 시대를 온 몸으로 앓아낸 시인으로, 자신을 내던진 독립 운동가로 성장해 나간다. 

'동주를 만나러 갔는데 몽규를 만나고 왔다'는 평처럼, 영화 <동주>는 그 시대를 '시'로 앓던 동주란 순수 문학 청년못지 않게, 동주만큼 '문학'을 사랑했지만, 조국을 위해 기꺼이 '문학'도 자기 자신도 내던졌던 순수한 송몽규를 조우하게 된다. 영화의 행간을 통해 그가 무장 독립 운동에 뜻을 두었고,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었지만, 우리가 지난 역사 수업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그 '사상'적 수혜가 영화를 보면 무람없이 송몽규란 인물을 통해 설득되어진다. '사상'이 먼저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청춘의 삶과, 그 선택과 실천으로서의 사상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시대를 순수하게 아파했고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을 돌아보며 아파했던 그 청춘들을 통해 우리은 일제 시대 사상 운동을 했던 젊은이들에 대한 무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과 나의 일신상의 이득을 넘어 시대를 아파하고 고뇌하며 거기에 자신을 기꺼이 던지는 이타적인 한국인의 원형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원형은  이제 2017년 <박열>을 통해 조금 더 인식의 폭을 넓히게 된다. 

2017년의 죽비같은 <박열>
<동주>를 통해 서로 다른 방식이었지만 시대를 고스란히 자신을 던져 아파했던 순수의 결정체같던 동주와 몽규를 발견했다면, 이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시대를 호탕하게 살아냈던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 천왕제의 정부가 위기에 빠지자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방식으로 일제는 그 책임을 한국인에게 몰아 관동 대학살은 방조했고, 그것도 모자라 '불령사'를 조직해 항일 운동을 하던 박열 등을 '대역모 사건'의 배후로 조작하고자 한다. 

일제에 의해 설계된 사건의 프레임으로 보면 분명 '피해자'이고 '희생자'가 되어야 할 박열은 하지만, 오히려 자신을 옥죄어 오는 일제의 법망을 기가 막히게 이용하여 '자신만의 프로파간다'로서 황태자 암살 사건을 활용한다. 

조작된 사건을 기꺼이 자신이 했다며 재판 과정을 오히려 이용하기 시작한 박열, 그는 '가장 말을 안듣는', 그리고 가장 버릇없는' 조선인으로 단식 투쟁 등의 갖가지 수단을 활용하며 일제를 당황케 하며 끝까지 재판을 통해 자신의 강고한 의지를 천명해 나간다. 

그런 박열의 모습은 널리 알려지지 안았을 뿐이지, 학생 운동 과정에서 '재판정'을 역시나 자신의 생각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장으로, 감옥을 '투쟁'의 장으로, 조서나 항소 이유서를 시대를 대변하는 사상서로 만들었던 학생 운동의 전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운동을 했던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회자했던 그 '영웅적 모습'을 이제 '박열'이라는 걸출한 한 인물을 통해 영화는 복기해 낸다. 일제의 조작과 회유, 그리고 폭력적 탄압에도 굴종하기는 커녕, 그것을 기꺼이 자신의 의지와 사상을 널릴 알릴 수 있는 기회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일본의 압제하에서 고통받는 조국의 민중들에게 '희망'을 심어주는 '투쟁'의 장으로 삼았던 박열과 그의 아나키즘은 '을'로서의 삶에 지쳐가는 2017년의 우리에게는 동주와 몽규의 순수함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속시원한 인간형이다. 

역시나 동주를 보러 갔다가, 몽규를 보고 왔듯이, 박열을 보러 갔다가, 가네코 후미코를 보고 왔다는 평이 나오듯,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가 보이는 동지애적 사랑, 평등한 관계, 그리고 자신들을 겁박하는 제도와 권력에 대한 열렬한 저항 의지로 표현되는 두 사람의 '아나키즘'은 , '독립'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넘어 제도화되고 규격화된 삶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에겐 '죽비'와 같은 신선한 충격이다. 

그렇게 그간 우리가 편향된 역사 교육을 통해 '편견'으로 바라보았던 일제하 사회주의는 몽규를 통해, 아나키즘은 박열을 통해 그 시대 청춘들이 살아가는 한 방식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다가왔다. 가장 순수한 독립 의지에 대한 표현으로, 혹은 철저한 일제에 의한 그 모든 제도와 권력에 의한 거부로 그들이 선택했던 사상과 실천 방식들을, 이제 우리는 몽규와 박열이라는 인간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냄비같던', 더 심하게는 '엽전'이라 폄하했던 우리가, 잊고 있던 우리들의 순수하고 호탕한 원형을 숙제처럼 받아든다. 

by meditator 2017. 7. 5. 18:31

7월 2일 방영한 <sbs스페셜-성선제의 달콤한 인생>은 지난 4월 14일 방영한 <나의 빛나는 흑역사>의 스핀오프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나의 빛나는 흑역사>를 통해 여러 사람들의 '실패'의 전사를 훑어보았던 프로그램은 그 중 특히나 이목을 끌었던 성선제 씨의 이야기로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실패주의자 성선제
이제 성선제 씨는 기업에 강의를 다닌다. 그가 하는 강의의 주제는 '나만큼 실패해 본 사람 있는가?'이다. 지금까지 아홉 번 실패를 하고, 그는 지금까지 실패를 밑거름삼아 성공할 일만 남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열 번 째 실패를 할 지도 모를(?) 그가 잘 나가는 기업이 한참 열의를 가지고 일을 하는 직원들을 상대로 '실패'를 강의한다. 왜?

방영 과정에서 * 처리를 했지만, 그 시그널과 로고만 봐도 피자를 먹어봤던 사람이라면 다 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피자 브랜드의 첫 한국 지사장이었다. 서른의 성선제씨는. 하루 일과가 지나고 집에 지폐 세는 기계를 놔두고 돈을 세어야만 하루 매출을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을 긁어모았다던 그, 방송에 나가 100억 정도라 웃으며 말을 하던 것이 그 시절의 그였다. 





그렇게 한국에 첫 발을 내딛은 피자가 선풍적 인기를 모으자, 본사에서는 그 대신 본사 직영으로 그 브랜드를 넘기도록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비록 얼마간 보상을 받았지만 하루 아침에 자신이 애써 일구던 사업을 송두리째 넘겨야 했던 그는, 보란듯이 해외 유명 브랜드의 덕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또 다시 성공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단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당시 한국에서는 역시나 드문 로스팅 기법의 치킨, 케니 로저스란 해외 유명 가수를 내세웠지만 모험이었다. 그 모험의 발목을 잡은 건, 뜻밖에도 국가의 경제 상황, IMF는 빚을 얻어 사업을 시작한 그를 다시 실패의 늪으로 몰았다. 그렇게 다시 두 번째의 실패를 하고 자신이 살던 궁궐같은 집을 헐값에 넘기고, 높은 빌딩에 올라 죽을까도 해보다, 온 몸이 성한 데가 없을 정도로 각종 암에 병에 수술을 몇 번씩 하고, 그렇게 이제 일흔 줄이 되었다. 

예전 우리 소설에 '아버지'란 존재의 단골 캐릭터, 이른바 사업을 한답시고 땅 팔고, 집 팔고 가산을 탕진하고, 집안을 거덜내던 그 '아버지'를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심지어 일흔 줄 지금도 여전히 사업을 한다고 얼마전 역시나 해외 브랜드 덕을 볼까싶어 넓은 건물을 얻어 시작했다 망한 컵케이크를 아직도 붙들고 있다.

그렇게 사업하다 다 말아먹은 아버지 성선제씨가 왜 기업에 강의를 나갈 정도가 되었을까? 실패도 하다보니 이골이 나서? 이제는 마음을 비웠다 했지만 예전에 자신들이 살던 동네에 간 일흔의 성선제씨 부부는 결국 눈시울을 적시고 만다. 남들이 쉽게 말하는 아홉 번의 실패가 그리 쉽게 아무는 것이 아니다. 

최근 <미운 우리 새끼>를 통해 화제가 된 이상민 씨가 7월 2일 다큐의 나레이션을 맡았다. 이상민 씨도 아직 나이가 성선제씨만큼 안되서 그렇지, 실패의 경력으로 치면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상민과 성선제, 이 두 사람, 묘하게도 닮았다. <미운 우리 새끼>를 통해 이상민에 대해 사람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가 과거에 벌였던 일들을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다. 성선제씨 역시 집기들을 다 놔두고 이제는 월세를 내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좋아서 그를 다시 조명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 아름다운 꿈, 그리고 여전히 현재형인 삶
지난 4월 14일 <나의 빛나는 흑역사>에서 어쩌면 진짜 짚어야 했지만, 미처 짚지 못했던 지점을 이상민 나레이션의 <성선제의 달콤한 인생>을 통해 다큐는 제대로 짚고자 하는 것이다. 다년간의 투병과 수술로 인해 옷이 남아도는 마른 몸으로 그는 여전히 상호도 없는 개장하지 않은 점포를 지키며 날마다 컵케이크와 씨름한다. 보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데 이건 아니라고 다 만든 컵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쑤셔 넣는다. 그가 요식업에 종사한 이래, 그의 좌우명은'나 자신이 먹을 만한가'였고, 아홉 번의 실패를 겪었어도 그런 그의 좌우명은 변하지 않았다. 그저 새 사업을 하는 게 아니라, 아홉 번의 실패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초심,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려는 도전, 그 순간 성선제씨는 아홉 번의 실패자가 아니라, 다시 새로운 꿈을 꾸는 희망에 찬 도전자이다.

아홉 번이나 실패를 한 남편, 그런 남편의 열 번 째 사업에서 컵 케이크 셔틀을 담당한 건 그의 늙은 아내와, 그 부부만큼 오래된 자가용이다. 부자였던 이 아니라, 잠깐 부자였던 시절을 스쳤다고 말하는 의연한 아내는 아홉 번이나 실패를 한 남편을 입만 열면 거짓말이라며 퉁수를 주지만, 여전히 형형한 그의 눈빛에대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는다. 아내는 말한다. 수술을 하고 투병을 하고 그러고 퇴원을 하면 다시 일터로 가서 자신의 일과 씨름하는 남편, 성선제씨는 그렇게 살아왔다고. 기업의 강연이 있는 날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준비하는 늙은 남편을 저 사람이, 저 사람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면 자랑스러워 한다. 

그렇다. <나의 빛나는 흑역사>가 빼먹은 것이 그거다. 문제는 '실패'가 아니라, '실패, 그럼에도 불구하고'이다. 성선제 씨는 말한다. 꿈을 꿔라, 하지만 당신이 꿈을 꾸는 건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는 말한다. 그렇다고 꿈을 접어두고 그냥 살아가기엔 인생은 너무 길다고. 그런 그의 생각대로, 그는 일흔이 된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과 탐구를 멈추지 않는다. '예전에 내가~'라며 시간을 보내는 또래의 친구들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성선제 씨, 그가 멋있는 건,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아서이다. 그가 대기업의 직장인들에게 당당하게 실패를 말할 수 있는 건, 실패 끝에 성공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실패를 했지만, 그 실패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아서이다. 이상민 나레이터가 요즘 세상에 다시 조명을 받는 것 역시 그것이다. 여전히 많은 빚이 있지만,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무언가를 한다는 것. 그리고 역시 열 번 째 실패를 앞두고 있을 지도 모를 성선제 씨가 당당한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7. 7. 3. 14:11

자신의 방을 뒤진 영은수(신혜선) 검사의 팔목을 나꿔챈 서동재(이준혁 분)의 팔을 황시목(조승우 분)가 잡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의 뒤에서 다가오는 그 누군가의 존재감에 움찔한다. 곧이어 복도의 각 방을 열고 우르르 쏟아져 나온 검사 무리들, 조폭처럼 양 쪽으로 늘어서 그의 앞에 허리를 굽히고, 그들 앞에 이제 막 검사장이 된 이창준(유재명 분)이 우뚝 선다. 





<응답하라 1988>의 아버지, 검사가 되다, 그 첫 번째 <비밀의 숲> 유재명
<비밀의 숲> 이 장면은 상징적이다. 끝내 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황시목 앞에 이제 검사장이 된 이창준의 존재감과 검사 조직의 생리를 단번에 설명해 주고 있다. 그 좁은 검찰청 복도 앞에 우르르 늘어서서 고개를 조아리는 검사들과, 끝내 황시목조차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는 이창준, 그 장면에서 만큼은 주인공이 황시목이 아니라, 이창준이라 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유재명이 연기하는 이창준은 회를 거듭할 수록 그의 존재감을 뻗쳐간다. 그저 첫 회 자신에게 상납하는 여성으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부패 검사일 것만 같았던 그가 오히려 회를 거듭할 수록 모호해 진다. '모든 것은 밥 한 끼에서 시작되었다'라는 말로 시작된 그의 묵직한 나레이션과, 그가 찢어 발겨 버린 지갑, 그리고 황시목과 서동재를, 그리고 자신의 장인과 아내마저 의심치않는 그의 눈길에서 선과 악, 그 어느 편으로 쉽게 재단할 수 없는 한낯 도청 소재지도 아닌 도시에서 태어나 재벌의 사위가 되고 이제 검사장으로 만족하지 않을 '야심만만한' 개천의 용이 된 한 인물의 복잡한 속내를 헤아려 보게 된다. 

그렇게 회를 거듭할 수록 '공직자는 너무 더러워도 너무 깨끗할 필요도 없다'며 두터워져가는 이창준의 존재감은 <비밀의 숲>이란 드라마의 안개를 더욱 짙게 만들고, 그래서 이 드라마를 즐겨 보는 이들로 하여금 황시목 못지 않게 이창준이란 존재의 매력을 만끽하도록 만든다. 그러고 보니 <응답하라 1988>에서 학주(학생 주임)이었던 그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았다. 그저 어느 학교에서 한 명씩은 있을 법하던 괴팍한 학생 주임으로, 그리고 동룡이 아빠로 시작되었던 그의 스치듯한 존재감은 드라마가 마무리 될 즈음 어느 틈엔가 골목 아빠들 멤버의 고정 1인으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비밀의 숲> 이창준에 대한 재발견으로 그에 대한 관심은 거슬러 <해수탕 여인(2014)>을 비롯 <살아남은 자(2016)>까지 그가 이전에 출연했던 작품까지 이어지도록 만든다. 





<응답하라 1988>의 아버지, 검사가 되다, 그 두 번 째, <파수꾼>의 최무성
아이러니하게도 똑같은 검사인데 유재명과 전혀 반대의 의미에서 새롭게 보아지는 인물도 있다. 바로 mbc 월화 드라마 <파수꾼>에서 검찰 총장 후보 하마평에 오르내리며 국회 청문회를 앞둔 서울 지검장 윤승로 역의 최무성이다. 서울 법대 수석 출신에 '나라'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하찮은 인간들의 희생쯤은 가볍게 즈려밟고 이제 검찰 총장을 앞둔 그, '파수꾼'들의 도전에도 자신의 인맥과 노회한 처세술, 그리고 그가 지난 시절 살아왔던 협박과 술수로 끄덕없이 버티는 윤승로야 말로 이 시대 '괴물'의 표본이다. 

그런 윤승로가 <응답하라 1988>에서 부성애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던 바로 순둥이 택이 아빠였다니! 이것이야말로 반전 중의 반전이다. 처음 순둥이 택이 아빠가 tv에 등장했던 건 <청담동 살아요(2011)>의 기러기 아빠 최무성 역이었다. 일반인이 아닐까 싶었던 그의 등장은 연기인지, 그의 본모습인지 헷갈렸던 그 두루뭉수리한 존재감과 달리, 이 작품에서 그의 모습은 조금씩 자신의 지분을 찾았던 것. 하지만 여기서 또 반전은 그렇게 <청담동 살아요>에서 일반인처럼 등장했던 그가 <세븐 데이즈>, <베스트 셀러>, <악마를 보았다>에서 '악마'같은 악역이었다는 건 또 하나의 반전이다. 아니, 그보다는 오히려 최무성이 연희단 거리패 출신의 도쿄 비쥬얼 아트 스쿨 영상학부 연출 전공에 <사람을 찾습니다>, <청소부> 등 다수의 연극을 연출한 사람이라는 것이 더 반전이라면 반전일 것이다. 

그렇게 '신출귀몰'하다는 표현이 걸맞는 최무성이기 때문일까? <비밀의 숲>의 늘씬한 유재명과 달리, 한 덩치하는 최무성이 '서울 지검장'의 자리에 앉아,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떠보며, 그들의 쓰임새를 이리저리 재단하고, 그러면서도 맹목적인 부성애로 '사이코패스'인 자신의 아들 범죄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모습은 <파수꾼>이란 드라마의 핵심 코드이다, 중심이다. 최무성이 연기하는 윤승로의 으뭉한 노회함이 이 시대 또 다른 '악'의 변주로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이다. 




<내부자들>의 재벌 회장님, 이번엔 검찰청장으로 <수상한 파트너>의 김홍파 
이제 그의 악역은 너무도 익숙하다. <내부자들>의 오회장, <384 기동대>의 방필규 회장, 그리고 이제 <수상한 파트너>의 선호지방 검찰 청장 장무영,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는 높지 않지만 무시무시하고 비수가 되어 상대방의 가슴에 박힌다. 악역으로서 그는 '클리셰'같지만 여전히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런 김홍파 배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적인지 동지인지 모를 염석진을 두고 고뇌하는 <밀정>의 김구가 있고, 낭만적인 의료진의 울타리가 되주었던 <낭만 닥터 김사부>의 돌담병원장 여운영도 그의 몫이다.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집에서는 다정한 가장이나, 밖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발버둥치는(월간 조선 인터뷰)' 이 시대의 또 다른 가장의 모습을 그의 '악역'을 통해 표현해 내고 있다. <수상한 파트너>의 선호 지방 검찰청장으로 분한 김홍파 배우는 비명횡사의 죽음으로 아들을 잃고 그 원한을 은봉희(남지현 분)에게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쏟아붓는 맹목적 부정을 그려낸다. 그렇게 아버지로서 맹목적인 모습은 선호 지방 검찰청의 대표로서의 권위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제 드라마의 종반, 그가 그 자리에 오기까지 덮었던, 아니 스스로 조작했던 노지욱-은봉이 부친과 관련된 사건에서 '이 시대 가장'의 그늘을 대변한 '주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낼 예정이다. 

'20대는 투쟁, 30대는 전쟁, 40대는 깨달음의 시간'이었다는 이 오랜 내공의 배우는 극단 목화 출신의 연극 현장에서 20년의 경륜을 쌓았다. 자신이 연기한 배역이라면 그가 쉬는 호흡부터 연구한다는 이 노배우의 '악역'은 그래서 언제나 극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드라마를 이끈다. 


김홍파, 최무성, 유재명, '신인'이라기엔 배우 각자가 살아온 삶의 이력이 길고도 굵은 이 배우들이 연기하는 '검사장'급인사들은 김홍파 배우의 말대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아버지 상이다. 그들은 때론 출세를 위해, 혹은 나라를 위해 '불법'에 동조했고, 앞장섰으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짓밟고, 가정을 파괴하며, 오늘날 남들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는 '일그러진 영웅'이 되었다. '밥 한끼'로 부터, 혹은 한 번의 눈 감음, 혹은 한 번의 동조가 오늘날 '기성 세대'라 말하는 '부도덕한 아버지'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제 드라마 속 그들에겐 젊은 검사들의 '도전'과 '처벌'만이 남았다. 하지만 비록 그들의 앞길엔 '처벌'만이 드리워졌을 지라도, 그와 별개로 이들 '신선한' 악역의 진기명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의 연기는 갈수록 더 보고싶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중이다. 

by meditator 2017. 7. 2. 16:38

GMO(Genetically Modified Organism


) 유전자 변형 식품으로 일반적으로 생산량 증대 또는 유통 가공 상의 편의를 위해 유전 공학 기술을 기존의 육종 방법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형질이나 유전자를 지니도록 개발한 농산물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 제초제에 강한 작물을 만들기 위해 제초제에 강한 바이러스를 식물의 유전자에 결합시키는 식이다. 국내에서는 2001년부터 콩, 옥수수, 감자 등에 '유전자 변형 농산물 표시제'를 실시하고 있다. 특정 작물을 인위적으로 변형 GMO에 대한 논의는 좀처럼 결론을 보지 못하고 있다. 


<모든 생명은 GMO다>라는 책을 펴낸 최낙언 박사의 경우 'GMO가 위험하지 않다'고 하며, 맛칼럼니스트 황교익 씨의 경우 '과학적으로 GMO 논쟁이 부질없으며 이에 반대를 하면 할 수록 우리 농민들이 피해를 보고 자금력, 기술력이 준비된 대기업들이 이들을 본다'며 논쟁 자체를 부질없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GMO는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것'이란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선입견'에 기름을 부을 또 한 편의 다큐가 등장했다. 6월 25일 방영된 <SBS스페셜- 밥상 디톡스- 무엇을 먹을 것인가?>가 그것이다. 


아이들의 발달 장애, 그 원인은?
다큐의 시작은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 주변의 한 가정이다. 미국에서 두 번 째로 큰 오렌지와 레몬 농장이 있는 캘리포니아 툴레어 카운티, 이상하게도 이 농장 주변 마을에는 'ADHD', 자폐증 등 발달 장애를 겪고 있는 아이들이 다른 곳에 비해 유독 많다. 그 이유를 UC데이비드 마인드 연구소를 '유기계 살충제'에서 찾는다. 오렌지와 레몬 농장, 대규모로 키워지는 과실수들의 해충을 방제하기 위해 '살충제'들은 '차량'을 이용하여 거의 '비'처럼 뿌려진다. 그리고 그런 농장의 자녀들에게서 더 많은 발달 장애가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의 발병이 특정 지역에 한정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농장과 상관없는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의 모발 검사를 한 결과, 놀랍게도 아이들의 머리칼에서 살충제 등이 성분이 여러 종 발견되었다. 왜? 근처에 농장도 없는데. 바로 아이들이 먹는 음식물에 '잔존'해 있는 살충제 잔류 농약 등의 성분이 고스란히 아이들 몸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그 살충제  등의 잔류 농약 성분은 알레르기 증상을 비롯하여, 앞서 캘리포니아 농장의 경우처럼 각종 발달 장애, 심지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농약만이 문제일까? 



16살인 제이콥은 학교를 가지 않는다. 학교는 물론, 외출도 쉽지 않다. 밖에 나가서 무언가를 먹으며 발진, 구토, 발작, 그리고 기억 장애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랜 검사 끝에 의사는 그 원인을 '옥수수'에서 찾았다. 옥수수가 왜? 오늘날 미국에서 키우는 대부분의 옥수수는 이 글의 서두에서 문제 제기된 GMO  옥수수이다. 우리나라는 GMO 방식으로 키우는 옥수수를 허용치 않고 있다. 그러면 다행일까? 그저 옥수수를 먹지 않기만 하면 되는데 왜 제이콥은 학교에 가지 않을까? 문제는 이 GMO옥수수의 사용처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옥수수 자체로 만든 음식은 물론, 옥수수에서 추출한 과당으로 들어간 각종 시럽, 기름 등등,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옥수수가 가장 많이 쓰이는 곳은 '사료'다. 곡물 사료를 먹고 자란 동물들로 만들어진 각종 고기류, 육가공품, 아니, 여기서 끝이 아니다. 화장품, 의약품까지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옥수수'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정도로 옥수수의 활약은 무궁무진하다. 이 '무궁무진'한 활약을 위해 대량의 옥수수가 필요하고, 그러니 'GMO'를 통해 안정적으로 대량 생산을 하는 것이 오늘날 '곡물 자본주의'의 순리가 되는 것이다. 

밥상 디톡스가 기적을 만들다 
설마 옥수수? 하지만 제이콥의 어머니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각종 인스턴트 식품과, 가공 식품들로 도배된 외부와의 '연'을 끊고, 옥수수와의 접촉 면을 제거하자, 놀랍게도 제이콥의 증세는 호전되기 시작했다. 제이콥만이 아니다. 완화는 될 지언정, 치유는 불가능하다 생각되는 자폐의 경우도 변화가 왔다. 세살 때 자폐 판정을 받고, 8살까지 말을 하지 못하던 스티븐도 농약업는 유기농 식재료로 밥상을 변화시키자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밥상을 바꾸고 2년 뒤 스티븐은 자폐 완치 판정을 받고 이제는 우수한 학생이 되었다. 심한 알레르기로 거리에서 '괴물' 소리를 듣던 남은영 씨 역시 밥상을 바꾸고 나서부터 놀랍게도 알레르기가 완화되기 시작했다. 

SBS의 이런 '밥상 디톡스'는 어쩌면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월과 3월에 걸쳐 방영된 <바디 버든> 2부작에서 이미 우리,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들의 자궁에서 벌어지는 각종 질병들이 음식 등을 통해 우리 몸에 축적된 '독'에 의해 그렇다는 것을 주장한 바 있다. 그리고 그 치료의 방법으로 '유기농 식단'과 각종 발암 물질이 발생하는 그릇, 옷, 생리대 등의 격리였었다. 
이제 6월 25일 방영한 <밥상 디톡스>는 그 일상의 독성에 대한 문제 제기의 일환에서 '밥상'에 보다 촛점을 맞춘다. 그리고 각종 잔류 농약들과 GMO농산물들이 우리 아이들의 몸에 일으키고 있는 변화를 그 증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밥상 디톡스'는 쉽지 않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우리 나라에서 최근 가장 '인기있는', 거의 대표적인 음식 칼럼니스트 조차 GMO에 대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단언'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금 독성 물질로서 잔류 농약이나 GMO 제품을 환기 시키는 것은 또 한번의 '소란'일 수도 있는 것이다. 거기에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다큐 속 제이콥이 결국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세상으로 부터 자신을 격리했듯이,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에서 잔류 농약과 GMO 제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란 어쩌면 환타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쓴다. 유기농 제품, 무농약 제품은 물론,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마트에서 사온 채소 등을 베이킹 소다, 식초, 혹은 적절한 야채 세제를 이용하여 씻고 먹인다. 하지만, 그 조차도 여의치 않다. 우선 유기농 제품과 무농약 제품의 경우 매장이 많지 않거나, 그런 제품의 경우 우리가 마트에서 쉽게 사먹는 제품에 비해 값이 비싸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거나 바쁜 서민들에게 접근성이 떨어진다. 베이킹 소다, 식초, 야채 전용 세제 역시 수용성 잔류 농약은 제거되지만 지용성 농약의 경우는 불가능하다. 다큐를 통한 '밥상 디톡스'의 문제 제기는 건강하다. 하지만 그 '건강한 문제 제기'가 사회적 공론이 되기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소비'는 너무 지천이고, 경각심은 짧다. 
by meditator 2017. 6. 26. 14:59

중학교 2학년 아이들과 매달 책 한 권을 읽기로 했다. 하지만 시험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음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주말에도 학원에 가는 아이들에겐 '이야기 책' 한 권도 만리장성같다. 덕분에 겨우 앞에 몇 장이라도 들여다본 것이 감지덕지한 상황, 어쩐다, 찾아보니 동명의 영화가 있다. 책을 일고 토론해야 할 시간에 함께 본 영화, 나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의 영국 영화는 가끔 '민망'하기도 했지만, 그런 '민망'함을 배려한 듯 적절한 필터 처리가 되었고, 무엇보다 늘 6월이면 '전쟁'이라는 것을 의무적으로 이벤트하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에게 우리 시대의 전쟁이란 것에 대해 청소년의 시선에서 진지하게 접근해 볼 수 있는 적절한 기회였던 것같다. (이 영화를 선정한 선생의 일방적인 시각만은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다)





맥 소로프의 베스트 셀러가 영화화된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 >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는 맥 소로프가 쓴 동명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맥 소로프는 이 작품 <내가 사는 이유>가 그녀의 뒤늦은 데뷔작이자, 데뷔와 동시에 그녀를 미국, 독일, 영국의 상을 수상하게 만들고 '청소년 소설의 여왕'으로 등극케 한 작품이다. 그런 화려한 수상 실적과 함께 미국과 영국에서는 학교 도서실에 구비된 필독 도서이자, 이미 영화화되기 전에 드라마화된 바 있는 청소년 소설계의 베스트 셀러이다. 그러기에 영화 <하우 아이 리브; 내가 사는 이유(이하 하우 아이 리브)>만을 보는 것도 좋겠지만 좀 더 재미있게 영화를 즐기고 싶다면 맥 소로프의 원작을 읽고 비교해 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 소설, 영화를 막론하고 이 두 작품을 매력적으로 만든 첫 번째의 요인은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브루클린의 에일리스로 우리에게 알려진 시얼사 로넌이 분한 여주인공 엘리자벳(하지만 그녀는 극구 자신을 데이지라 불러달라고 한다.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는 데이지라 불러주자)의 캐릭터이다.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헤드셋을 끼고 세상과 자신을 '분리'시킨 15살의 데이지는 이제 막 아버지가 사는 미국을 떠나 이모가 사는 영국으로 온 이방인이다. 자신을 가리는 듯한 짙은 화장, 주렁주렁 매달린 귀걸이며 목걸이 팔찌가 버거워 보이는 마른 몸매, 그런데 무엇보다 이상한 건 그녀게 웬만해서는 입에 음식을 대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데이지에게 더 거부감을 주는 건 음식보다 사람인 듯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모든 이들에게 '레이저'를 쏘며 '접근'을 거부한다. 

이런 소개만으로도 데이지가 대략 어떤 소녀일 것이라는 게 감지된다. 지금까지 그녀가 살아온 이유는 갖가지 병원 치료와 상담으로 아버지 돈 축내기, 아버지의 여자 열 받게 하기, 그리고 이제 새로 태어날 아버지와 그 여자 사이의 아이 저주하기. 그리고 그 부산물로 그녀가 얻은 건 '거식증'과 갖가기 알레르기, 자기 혐오 등등이다. 결국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이모에게 구원을 요청한 건지, 아니면 이모의 자발적 호응이었는지 이제 그녀는 영국에 와있다. 

그런데 그런 그녀를 맞이한 건 뜻밖에도 이제 우리에겐 스파이더 맨이라 하는게 더 익숙한 어린 톰 홀랜드가 분한 사촌 동생이다. 보기에도 분명히 열 다섯 그녀보다 어린 사촌 동생이 모는 트럭을 타고 구비구비 찾아간 이모네 집. 대책없는 데이지보다 어쩐지 더 대책없어 보이는 곳이다. 이미 데이지가 도착한 공항에서 부터 심상찮은 기색이 역력한 비상시국의 기운, 이모는 마치 그 '비상시국의 전위대'인 양 온통 해외 각국에서 쏟아져오는 전화 통화를 하고 국제 회의에 참여하느라 아이들을 미처 돌볼 사이가 없고, 그 사이 이모네 아이들은 심하게 자유롭게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하여튼 그런 대책없는 이모네 식구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 사촌 에드워드(조지 맥케이, 얼마전 캡틴 판타스틱의 주인공 보 역을 맡았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그가 '로맨스 소설'의 전형적 과정처럼 처음엔 거슬리고, 그 다음엔 다투고, 결국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무려 사촌이랑. 



전쟁에 휩쓸린 열 다섯 살 소녀의 사랑
하지만 이 사촌간의 비정상적 로맨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채 내리기도 전에 영화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소설 속 전쟁이 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채, 우리와 적의 경계가 모호한 채 영국의 시설들이 테러를 당하고, 마을들이 점령을 당하고 전투가 벌어지는 '막연한' 전쟁이라면, 시각적 장치가 분명해야 할 영화는 그 설정은 세계 제 3차대전이자, 핵전쟁으로 명확하게 설정한다. 무엇보다, 이 전쟁이 무서운 것은 그 '적'이 '우리'와 구분되지 않은 그 누군가이며 내부로 부터 시작된 테러는 핵으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휘쓸어 가고 사람들의 삶은 거기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테러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기초로 하여 내부의 그 적으로부터 시작된 3차 대전이라는 '전쟁'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전쟁이 나면 저렇게 될 것이라는 '학습' 효과를 작품은 철저하게 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보호자도 없이 전쟁에 휩쓸린 데이지와 이모네 아이들. 그들은 그들이 사는 집이 징집되고 여자와 남자로 나뉘어 '소개(적의 공습이나 화재 따위에 대비하여 한곳에 집중된 주민이나 시설물을 분산시킴'된다. 이제 막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리고 이제 막 사람에 대한 경계를 풀고 '가족'으로 섞여들기 시작한 아이들, 그 아이들은 '꼭 다시 만나자, 이곳에서'란 기약할 수 없는 약속을 뒤로 하고 각각의 캠프로 떠난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는 커녕, 자신을 낳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으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애정 결핍으로 늘 '반항'을 삶의 모토로 살아왔던 데이지는 뜻하지 않게 에드워드의 어린 여동생까지 책임지는 건 물론,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않는 전쟁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생존'이라는 임무까지 짊어지게 된다. 그들의 동네 친구가 적에 의해 무참히 사상되는 상황에서 데이지는 더 이상 자신들이 머무는 이곳이 전쟁에서 자신들을 지켜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나침반 등 몇 가지를 챙긴 채 이모네 집이 있는 곳으로 향한다. 

영화는 철저히 데이지란 소녀의 성장담에 집중한다. 3차 대전의 상황을 극적으로 구현한 핵이 터진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아 자신은 물론, 아홉 살 어린 사촌 동생까지 책임지며 살육과 기아가 점철된 행로를 용감하게 전진하여 결국 '사랑'을 쟁취하고,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되는 서사는 그 어떤 성장 소설보다 극적이다. 반면 소설로 가면 보다 다양한 인물군에 대한 재미가 더해진다. 영화에서는 데이지란 주인공을 위해 생략되거나 왜곡된 이모네 형제들의 캐릭터가 소설의 맛을 더한다. 그저 이모네 아이들이 아니라, 진보적 의식을 가진 엄마 밑에서 그리고 영국의 자연에서 동물과 교감하게 스스로 자생력을 키워낸 아이들의 면면은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청소년 상이다. 영화 속 데이지가 아홉 살 철부지에 대한 보호자란 극적인 변화를 강조하였다면, 소설은 오히려 에드워드네 아이들이 가진 남다른 자연적 친화력이 데이지를 변화시키고 그녀를 끌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톡톡히 하며, 전쟁의 참혹함에 대한 성찰적 서사가 깊다. 

어쩌면 이제 우리의 십대들에겐 67년이 된 6.25전쟁 보다는 날마다 신문을 장식하는 테러 사건이 더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적절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에겐 자신들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내는 게 미래의 입시와 정해진 삶의 스케줄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현실에서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쟁은 멀고, 일상은 쳇바퀴라도 마찬가지의 질풍노도 시기, 자신의 그 모든 푸념을 한참 부모에게 풀어댈 나이, 아이와 함께 이 영화를 보며, 진지하게 살아가야 이유를 모색해 보는 건 어떨지. 

by meditator 2017. 6. 23. 15:17

시작은 고양이의 시선과 그 시선이 향한 곳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서 뜻하지 않은 강간을 당하고 만 미셸(이자벨 위페르 분)이 등장한다. 하지만 피해자 미셸은 자신을 피가 흐르는 자신을 돌보는 대신에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떨어져 깨진 그릇을 먼저 치운다. 그리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조용히 목욕으로 흔적을 지운다.




그녀가 강간을 당했다.
한 여인의 강간 사건, 하지만 영화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한때는 출판사를 경영했지만 시대적 트렌드에 맞춰 게임 회사 ceo가 된 여자, 그런 사회적 지위가 그녀로 하여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덮게 만들었을까? 명망이 치뤄야 할, 그러기에 어쩌면 더 깊숙한 상처가 될 수 있을 것같다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미셸을 따라가는데 뜻밖에도 패스트 푸드 점에서 그녀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그녀에게 자신이 먹고 난 음식물 쓰레기를 쏟아 붓는다. 하지만 미셸은 그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 반응한다. 

'강간 사건'으로 시작된 영화는 미셸이라는 인물의 가족사를 들추며 '인간 존재의 그 모호함'에 대한 질문으로 번져간다. 피해자였던 미셸은 그와는 반대로 게임 속 피해자인 여성에게 '오르가즘'의 절정을 보다 '자극적'으로 드러낼 것을 요구한다. 이웃에 이사온 잘 생긴 남의 남편을훔쳐보며 '자위'를 즐기는가 하면,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과는 '성적 파트너쉽'을 유지해왔다. 그러면서 아들의 여자 친구에게 무조건 적대적이고, 이혼한 남편의 여친에게 집적거린다. 자신의 강간 사실을 친지들에게 당당하게 밝히면서도 경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패스트푸드 점의 봉변은 알고보니 한 마을 가족과, 동물들을 몰살하다시피 한 그의 아버지의 범죄와 그의 조력자로 봉인된 10살 시절 사이코패스 딸이었던 미셸의 과거로 연결된다. 그 사건 가해자의 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이제 아버지가 30년만에 가석방 신청을 하자 다시 '과거'로 끌려들어가는 그녀, 하지만 이제 자신이 어렵게 일궈온 현실의 성취를 그것으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쉽게 그녀의 편이 될 수 없는 그녀 
'편'이라는 개념이 익숙한 우리에게,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한때는 사이코패스 조력자였을 지도 모르며, 이제 그 과거로 부터 떨어져 나온 현재에서 게임의 판매에 눈이 벌개 성의 상품화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녀 자신의 '성적' 태도 역시 그다지 '도덕적'이어 보이지 않는 그 '이율배반적'인 행동들이 미셸의 '강간'을 희석화시킨다. 그녀를 '피해자'의 편에 세워 두둔하자니, 미셸이 보이는 행태들 역시 '돌맞을 짓', 딜레마다. 

<엘르>는 노장 폴 베호벤 감독의 16번 째 영화이다. 그의 작품이 늘 '폭력'과 '섹스'라는 화두를 피하지 않고 '직진'해왔듯이 <엘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그가 등장시킨 주인공은 <포스맨(1983)>이래, <원초적 본능(1992)>, <블랙북(2006)>, <트릭(2012)>의 그의 전작 속 주인공들 처럼 쉽게 '우리'라 얼싸안기 쉽지 않은, 도덕적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이다. 그녀 자신이 이미 어린 시절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 모호한 사건의 트라우마를 가진 존재, 그리고 이제 그 '과거'를 애써 지운 채 '냉혈한' 처럼 사업에 매진하며 그녀 스스로 도덕적이라 말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 벌어진 범죄. 심지어 그 범죄자는 알고보니 그녀 자신이 '유혹'한 대상이며, 위기의 상황에서 종종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꺼이 제공했던 인물. 과연 이런 부도덕한 대상과의 관계에서 부조리한 삶을 살아왔던 그녀는, 그런 그녀를 보는 관객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결국 이러게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서로 엇물리며 얽힌 사건들을 통해 폴 베호벤 감독은 부조리한 인간 세상에서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그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어머니가 그 속셈과 결말이 뻔해보이는 재혼을 선택했을 때, 어머니를 죽이겠단 장담처럼 결국 동일한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모녀라는 형식적 경계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않으려는 그녀를 도발이라도 하듯, 끝까지 재혼이라는 해프닝을 벌이며 그녀의 '부담'이었던 어머니, 하지만 그 어머니의 병실에서 조차 자신에게 딸로써 끝까지 한 치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냉정했다 힐난했던 어머니와의 관계를 되새기는 대신 원망과 tv에 집중했던 그녀는 이별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어머니를 보내다. 장례식조차 그녀의 식대로. 



엘르를 통해 드러난 부조리한 가족사 혹은 인간사 
하지만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바램대로는 아니지만, 그토록 어머니가 원했던 아버지를 찾아간다. 30년만의 가석방에 실패한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마치 그녀가 자신에게 침을 뱉으로 올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스스로 생을 버린다. 어머니를 잃고, 그리고 아버지를 잃고 그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웃집 남자 앞에서 사실은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을 지도 모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았을 때처럼. 하지만 표정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지만 더는 '자위'로 혹은 '불륜'으로, 심지어 '도발'이나, '위악'으로 자신을 달래던 미셸의 삶을 지속하지는 않는다.

어머니의 유골을 되는대로 뿌렸지만, 그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은, 이제 미셸 자신의 삶에 뜻하지 않은 '이정표'가 된다. 돈으로 남편을 산다 퍼부었지만, 결국 반추해보니 남자가 그리워 절친의 남친을, 이웃집 남편을, 그리고 강간범과의 정사를 허용했던 그녀의 삶 역시 그녀가 그리도 '거역'해왔던 부모 세대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 이후 비로소 그녀는 '과거'로 부터 자유로워진 대신, 어느덧 어머니가 되어 자식의 세대까지 책임져야 할 위치가 '아들의 욕'과 함께 절실하게 다가온다. 

언뜻 보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대로 무표정하게 도발해 가는 미셸, 그러나 자신을 채워왔던 그 '부조리한 관계'들을 하나둘씩 정리해 간다. 게임 성공 축하 파티에서 절친에게 그녀 남편의 섹스 파트너가 자기였음을 고백하는 방식으로. 

과거 아버지 사건 이후, 자신을 세상 속에 10살 짜리 사이코패스로 던져준 이래 미셸은 '법'의 도움을 거부했다. 그들은 늘 자신의 진실에 귀기울여 준 대신, 자신들의 편의 대로 그녀를 요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경찰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가 부른 건, '법의 도움'이 아니라, 어쩌면 30년만에 '법'에 대한 복수이자, 또 다른 결자해지일 지도.  진실 대신 '이슈'를 원한 법에게 가장 적절한 먹이를 공급하며. 

아버지 때처럼 똑같이 머리가 일그러져서 죽어나간 그녀의 강간범, 그는 그녀를 '사랑'으로 기억하고 싶었지만, 미셸은 그의 '강간'을 용인할 수 없다.  자신이 친구 앞에 불륜을 고백하듯, 그런, 하지만 보다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의 '범죄'를 '처단'한다. '법'의 도움 없이 살아온 그녀만의 '재판'이요, '판결'이며, 범법자의 처리이고,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법의 도움을 빈, 당시 그녀를 기만했던 법을 '기만'한 복수이다. 열 살 사이코패스로 세상에 던져서 그 누구의 도움없이, 그러나 세상 속에 번듯하게 한 자리 차지하며 견뎌냈던 미셸 식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부조리한 현대사의 '극단적 상징'이기도 하다. 

그리고 30년전 아버지와 그녀가 그 사건으로 내내 꽁꽁 묶여있듯이 이제 그녀는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아들을 그렇게 자신의 곁에 묶는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젖'을 양보했던, 그래서 늘 '가정'을 그리워하던 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선물'하며 남보다도 못한 모자 관계를 청산한다. 얼굴 색이 다른 아기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며느리, 그리고 번듯한 차와 그럴듯한 직업적 전망, 그리고 미셸의 커다란 집, 그리고 이제 피를 나눈 어머니와 아들은 그에 더해 '피의 공모자'로 거듭난다. 무위도식하며 어머니의 재산에 기대어 철부지였던 아들이 받아든 '가장'이라는 혹은 '아버지'라는 선물의 댓가는 10살 시절 그녀가 그랬듯이 가혹하다. 10살 무렵 미셸은 아버지가 저지른 종교라는 이름의 범죄 공모자가 되었고, 이제 아들은 미셸이 재단한 성범죄의 공모자가 되었다. 이제 그는 '가혹한 가족사'의 승계자로 '죄책감'을 짊어지고, 그렇게 미셸 일가의 잔혹한 역사는 계승된다. 

by meditator 2017. 6. 22. 18:23



남자들은 일찌기 길을 떠났다. 아재들은 뭉쳐서, 혹은 따로 또같이, '욜로'니, '싱글 라이프'니, '오지 여행'이니 주어진 돈을 가지고든, 아니면 벌어서든, 때론 묻고 따지지도 않고 패키지로든 갖가지 명목을 갖춰 떠났었다. 리모컨의 향배를 쥐고 있는 것이 여성들이기에 그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tv 예능은 '남자들' 판이었다. 혼자도 떠나고, 홀로도 떠나고 이젠 더 떠날 사람이 없을까 싶은데, <싱글 와이프>가 등장했다. 아내들이 나선다. 이젠 우리들 차례라고. 그렇게 6월 21일 아내들이 길을 떠난다. 




아내들 휴가를 떠나다
결혼 후 가사와 육아에 매진하느라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린 아내들, 그녀들에게 남편들이 '방송을 빙자해서', 휴가를 주는 것으로 프로그램은 시작된다. 아니 그 전에 아내들의 이야기가, 왜 아내들에게 '휴가'가 주어져야 하는지 '당위성'의 인터뷰가 먼저다.

남희석의 잘 나가는 치과 의사 아내로 유명한 이경민, 하지만 서울대 출신의 그 돈 잘 번다는 직업 여성이자 아내, 그리고 엄마인 이경민의 삶은 어쩐지 측은하다. 일찌기 우수한 학생으로 열심히 공부를 했던 그 학창 시절처럼, 이경민씨는 대학을 졸업하면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단다. 더구나 기복있는 연예계 생활을 하던 남편 덕에 '가장'의 무게까지 짊어진 그녀는 둘째를 낳는 그 날 저녁까지 일을 하고 낳은 후에도 몸조리라는 걸 해볼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마흔이 될 무렵 지하철에서 쓰러진 후, '고갈'된 에너지에 눈물을 달고 살았지만 출근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는 남편에게 싫은 소리 한번 없이 그 세월을 그런 거려니 하고 살아왔다. 

남희석이라는 남편의 이름을 지우고, 치과 의사라는 전문 직업인을 지워버린 이경민 씨의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대다수 일을 하고 가정을 꾸려가는 여성들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힘들고 지치지만 자신이 아니면 안될 것같은 가정과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놓칠 수 없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오늘도 삶에 자신을 밀어넣는. 오늘의 젊은 여성들 중 상당수가 결혼을 미루거나 기꺼이 비혼을 선택하는 세태에는 결국 여전히 우리 어머니 세대와 다르다지만 다르지 않은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여성들의 '잔혹사'가 전제가 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여행 프로그램인가 했던 <싱글 와이프>는 그렇게 아내로, 엄마로 살아오느라 자신을 돌볼 사이가 없던 이경민 씨를 비롯한 장채희, 전혜진, 정재은 씨의 인터뷰를 통해, 여행의 당위, 아니 엄마와 아내로 어쩌면 이제 '번아웃'이 된 그녀들의 '휴식'에 대한 공감으로 프로그램을 펼쳐나간다. 



그렇게 당위를 설득한 그녀들의 여행은 그래도 명색이 남편들이 보내주는 것으로 구색을 맞춘다. 아내에게 휴가를 주기 위해 짐을 싸주는 남편들, 그 '구색'의 장면은 하지만 뜻밖에도 아내를 홀로 보내는 남편들의 '강짜섞인' 노심초사도 빠질 수 없지만, 결정적인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늘 '아내의 수발'에 익숙한 남편들, 그러나 정작 아내의 여행 가방을 싸주려 하자, 아내의 물건, 그리고 아내의 라이프 스타일, 결국 아내의 삶에 대한 '무지'로 귀결된다. 동반자라며 살아오지만, 정작 아내의 휴가 짐조차 꾸리는데 쩔쩔 매는 남편들, 그들은 토를 달 것도 없이 '한국 남자들'이다. 

아내들의  '일탈기' 아니, 그녀들의 '인간성 회복기'
그렇게 무엇을 싸놨는지조차 모르는 무게만 잔뜩 나가는 가방을 들고, 길을 떠나는 그녀들, 그런데 떠나는 그 순간까지 자신의 부재를 걱정하고, 울먹이는 아이를 챙기던 아내들이, 집을 나선 순간부터 표정이 달라진다. 집에서는 볼 수 없던 표정의 아내, 5분 단위로 일정을 체크하던 아내는 이경민씨는 아이의 1교시가 끝날 무렵 맥주 한 캔을 비웠고, 아침 8시 아이를 깨우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집안 일로 하루가 지던 전혜진 씨는 '비글'같은 쾌활함을 발산한다. 

<싱글 라이프>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며 선언한다. 그저 남편들이 보내주는 아내들의 여행에서 머무르지 않고 일주일에 하루, 아내도, 엄마도 아닌 자기 자신 본연의 삶을 주는 '아내day'를 지향한다고. 그리고 이런 프로그램의 목적은 아내와 엄마의 삶에 여유가 없던 그녀들이 가족을 벗어난 그 짧은 여행에서 보여준 밝은 미소와 웃음만으로 설득력을 얻는다.

<싱글 와이프>는 <미운 우리 새끼>의 또 다른 버전과도 같은 프로그램이다. 장가를 못간, 아니 이제 어쩌면 갈 수 없을 지도 모를 아니 지긋한 노총각 아들들의 싱글 라이프를 그들의 어머니가 지켜보며, 깨달음과 발견, 심지어 경이와 경악을 오가며 '예능적 재미'를 뽑아내던 그 방식을 고스란히 끌어온다. 아내와 엄마로서 주어진 삶에 틀에 맞춰 가던 그녀들이 그 '규격화된 삶'의 틀에서 벗어낫을 때 느끼는 해방감, 일탈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들을 보며 노총각들의 어머니들이 느끼는 놀라움과 깨달음의 몫은 스튜디오에 남겨진 남편들의 몫이다. 그들은 아내들의 짐을 싸서 여행을 보냈지만 그녀들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저 프로그램 당일 아내의 '내가 너무 미친x같을 거란' 걱정을 등에 짊어지고 그 어머니들처럼 '내 꺼'인 줄 알았던 그녀들이 사실은 '내 꺼'라기엔 너무도 자유로울 수 있는 한 사람의 영혼이라는 깨닫고 놀랄 시간만이 남을 뿐.



첫 방송의 <싱글 라이프>는 이미 너무도 알려져 더 무엇을 보여줄 것이 있을까 싶은 모범생 이경민 씨의 반전 여행으로 부터 시작하여, 다소곳하고 순정의 여성상으로 기억되는 전혜진 씨의 익스트림 휴가를 넘어 이미 <라디오 스타>를 통해 방송 출연 전부터 유명세를 탔던 정재은 씨의 '블록버스터'급 일본 여행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그래도 어쩌면 그저 아내들의 일탈 여행으로 마무리 될 뻔한 여행은 그저 비행기 타고 지하철 갈아타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흥건하게 만든 정재은 씨의 일본 도착기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출발 전부터 핸드폰 밧데리의 사용법조차 몰라 남편을 한숨쉬게 했던 정재은 씨, 그 남편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 도착에서 부터 숙소에 이르기까지 '사고'의 연발이다. 남편이 가르쳐 준 핸드폰의 번역기는 일찌기 '안드로메다'행이고, 익숙한 우리 말로 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길을 묻는다. 지하철을 한번에 제대로 타는 일도 없다. 거기에 남편이 싸준 가방은 어찌나 무겁고, 가는 길 곳곳에 계단은 그리 많은지. 하지만 그저 눈물겨운 일본 도착기를 감동 스토리로 만든 건 정재은 씨 본인이다. 

결국 도착과 함께 눈물이 터져버리고야 만 정재은 씨, 보는 사람들이야 당연히 너무 고생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니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그 순간, 순간 기적처럼 자신을 도와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동이었다. 남편의 타박에도, 길을 잘못 가르쳐준 일행에게도 늘 웃음과 긍정을 발사하던 그녀가 보여준 반전 매력, 그것이 <싱글 라이프>를 그저 아내들의 일탈기 이상 매력적인 인간 탐사기로 기대를 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7. 6. 22. 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