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킨 근대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이다. '의지'와 상관없는 관례 결혼으로'사랑'의 존재를 무용하게 했던 전근대의 종식은 연애 지상주의, 사랑 지상주의 시대의 도래였다. 그러기에 이 시대 고달픈 삶에 짖눌린 젊은이들이 '결혼'과 '연애'를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시대의 재앙이 된다. 그렇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시대의 대표적 정서가 된 '사랑', 하지만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칭송받는 사랑은 그것을 수호하는 신이 변덕스럽고 심술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듯이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감정으로 사람들을 혼돈에 빠져들게 하고, 그 이타의 감정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잔인한 형벌도 다가온다. 많은 철학자들은 '사해동포주의'로 사랑의 승화를 외치지만, 대부분 비극은 '너와 나', 혹은 '우리'라는 협소한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렇게 장황하게 '사랑학 개론'을 줏어 올린 것은 9월 3일 첫 방송을 탄 2017드라마 스페셜의 스타트를 연 작품이 바로 <우리가 계절이라면> 때문이다. 대문을 나란히 한 이웃집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다시피 한 해림(채수빈 분)과 기석(장동윤 분)의 '학교물'의 외형을 띠고 진행된다. 전교 1,2등을 나란히 하며 자전거를 함께 타며 학교 생활을 하는 두 사람. 이제 청소년기의 통과 의례처럼 첫사랑의 홍역을 앓게 된다. 방과 방 사이를 줄로 이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인 두 사람. 이제 기석은 수행 평가 과제로 친구들이 장난스레 쓴 해림과의 첫키쓰를 중대 과제로 여길만한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찌기 <겨울 연가> 이래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담타기에 이어, 담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 동경(진영 분)은 순탄할 것만 같던 소꼽친구의 첫사랑 전선에 균열을 가져온다. 

우연히 아빠의 핸드폰을 통해 아빠의 외도를 직감한 해림은 아빠의 뒤를 쫓고 그곳에서 동경을 만나게 된다. 결국 외도에 대한 추적은 오해로 드러나고, 해림과 동경은 동병상련 아닌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벽을 조금씩 허물게 되고, 반면 해림과의 첫 키쓰에 집착한 기석은 자꾸 해림과의 관계에서 엇박자를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오누이같은 관계의 성장통은, 엄마의 생일날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물의 엇갈린 행방으로 전혀 다른 질감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아빠가 해림의 오해를 받으며 어렵사리 구한 악보, 해림은 그게 당연히 엄마의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 새로온 젊은 여선생, 눈물가득 추궁하는 해림에게 아빠는 그런게 아니라면서도, 그냥 주고 싶었고, 좋았다며 사랑의 불가역성에 손을 들고 만다. 

아빠를 한껏 원망해야 할 해림, 하지만, 해림 역시 자유롭지 않다. 당연히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아와 준 기석의 첫 번째 고백을 들어줘야 할 처지, 하지만 정작 해림 역시 새로온 전학생 동경에게 마음을 흔들리고 만 것이다. 



사랑의 아포리즘, 그러나 
뻔한 사랑의 성장통같았던 이야기는 아빠의 외도 아닌 외도(?)를 통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변모한다. 뻔한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라는 속된 경구 대신, 여전히 가정에 성실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른 아빠를 등장시켜, 해림의 뜻하지 않은 두근거림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설명'을 통한 '사랑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했던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헷갈리는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구르리 그린 달빛>의 조연출답게 청량한 젊음을 서정적으로 한껏 분위기로 자아냈지만, 과연 목적한 바가 해림과 기석의 성장통인지, 아니면 사랑의 불가역성에 대한 담론인지, 정작 '절정'의 순간에 머뭇거린다. 아빠의 불가역적인 사랑도, 해림 앞에 등장한 동경의 존재로 '단막극'이란 핑계를 대기에는 '소모적'으로 사용한 드라마는, 성장통 그 자체를 '도구'로 삼아, 청춘의 한 시절을 그저 시각화시키는데 천착하고만 만듯한 결과에 이른다. 아름다운 화면만으로 사랑의 불가역성을 설득하기엔 화면은 너무 단편적 나열이었고, 그렇다고 그게 아닌 그저 성장통을 그려내고 싶다기엔 너무 뻔했다. 아니 뻔하다고 하기에도 불친절했다. 가슴 떨림, 그저 좋아함의 감정은 그저 한 컷처럼 지나치기엔 너무 묵직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한 계절이 지나고, 동경은 스리슬쩍 사라져 버리고, 이제 청소년의 터널을 지나버린 해림과 기석은 우정인 듯 사랑인 듯 기차역에서 해림이 원하던 포옹을 하며 끝이 아닌 이별을 하지만, 지난 과정에서 해림과 기석의 감정을 충분히 설득해 내지 못한 드라마는 그 엔딩조차 눈물로 포장된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장식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도발적이라도 아빠와 해림의 불유쾌하지만 불가피했던 감정에 좀 더 솔직하게 파고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스치듯 지나쳐버린 기석의 잔인한 목격 장면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구르미 그린 달빛>처럼 시청률이 필요한 미니 시리즈도 아니고, 비록 '멜로의 법칙'을 내세웠지만 '실험작'으로서의 단막극에 대한 기대를 부푼 채 맞이한 첫 번째 2017 드라마 스페셜의 작품치고는,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좀 안이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매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단막극 시리즈가 가진 한계를 손쉬운 '멜로의 전략'으로 통과해 보려는 야심이었을까? 

그러기에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다시 원점에서 단막극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과연 매년 없는 편성을 쪼개어 단막극이 방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뻔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화면에 담아,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일까? <다큐 3일>을 뒤로 제친 채 끼어든 시리즈라면, <다큐 3일>의 목소리를 제칠만한 특별한 존재감을 기대해 보는 건 무리일까?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도 해줄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던 드라마 스페셜이 '멜로의 법칙'으로 돌아와, 단막극의 생존을 위한 '연성화'가 아닐까란 우려가 드는 가운데, 첫 작품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그 고민의 깊이를 더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멜로는 어찌보면 '근대'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치명적 상흔이다. 그 상흔을 내세워, 심지어 법칙이란 말까지 등장시켰다면 그래도 최소한 드라마 스페셜이라면, 좀 더 치명적인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저 녹록하게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한 잔이 아니라. 

by meditator 2017. 9. 4. 19:38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명불허전>은 조선시대 침술의 대가로 알려져있는 허임이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환타지물이다. 국중 허임은 혜민서 의원 생활 10년만에 허준의 도움으로 겨우 왕의 편두통을 치료할 기회를 얻었지만 손을 떠는 바람에 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던 그가 의문의 인물이 쏜 화살을 맞는데, 뜻밖에도 그가 눈을 뜬 곳은 한양, 아니 2017년의 서울 청계천 한복판이었다. 이렇게 타임슬립 드라마 <명불허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선 시대의 의원 허임이 대한민국 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상황을 황망해 하던 허임, 하지만 그는 곧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애쓰는 대신, 이곳 서울에서 의원으로 떳떳하게 자리잡기를 원한다. 임금을 치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에서 그랬듯이 이곳에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에돌고 에돌아 9월 3일 방영된 <명불허전> 8회는 그 '속없어 보이던 속물' 허임(김남길 분) 선생의 실체를 비로소 드러냈다.


 

왜 허임은 노비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애꿏게도 조선에서 허임의 뒤를 쫓던 건 관군만이 아니었다. 병조참판의 노비 두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니 관군은 허임을 잡으려 했지만 두칠은 허임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그가 잡혀 의금부로 가자, 자기가 죽일 기회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고, 그를 죽이러 불속을 뛰어들었었다. 

그 사연의 시작은 밤이슬을 맞고 양반가의 비밀 치료를 다니던 허임의 행보에서 비롯된다. 혜민서를 찾아 자신을 치료하라 호통치던 병조참판을 거절했던 허임은 그날 밤이 깊자 병조 참판의 집을 찾는다. 높은 분을 백성들이 치료받는 혜민서에서 모실 수 없어 그랬다며 사정을 말한 허임은 병조참판의 신뢰를 얻고 돌아가는데, 그의 발목을 노비 두칠이 잡는다.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신의 어미에게 침을 한번이라도 시술해주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병조 참판 정도의 집안 노비가 왜 허임의 발목을 잡고 침 시술을 간청했을까? 이는 조선 시대의 의료 체계를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 달랐다. 왕실이나 관료들은 '내의원'을 통해, 일반 백성들은 '혜민서'에서, 그리고 전염병 치료나 빈민 구제 기관인 '활인서'가 있었다. <성종 실록>에 기록된 노비는 대략 35만명, 인구 대비 공노비가 10%, 사노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으니, 조선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위에서 보여지듯이 조선 시대 의료 기관 중에 '노비'를 치료하는 의료 기관은 없었다.

<명불허전>의 주인공 허임이 의원이 된 계기만 봐도 당시 노비 등 하층민들의 의료 실상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극중에서도 드러나지만 관노의 아들인 허임은 집안이 가난해 어머니 박씨가 병에 걸렸을 때 의원을 부를 수 없었다. 당시 의료 행위는 허준처럼 약을 쓰는 방법과 허임처럼 침을 통하여 고치는 방법이 있었는데, 약의 경우 약재가 비싸, 서민들이 경우 침을 놓는 방법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가난한 백성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허임 역시 어머니의 침 시술비를 갚을 수 없어 의원 집에서 일을 해주며 눈썰미로 침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 그가 의원이 된 계기였다고 역사는 밝힌다. 그러기에 성주 지방의 선비 이문건의 <묵재 일기>에서도 드러나듯서민들은 먼 의료 체계 대신 손쉬운 무당, 점쟁이, 승려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조차 먼 의료 체계, 그 중에서도 노비는 더욱 극악한 상황이었다. 극중 허임은 발목을 잡고 매달리는 두칠 형제의 청을 외면하고 병조 참판의 집을 떠난다. 충분히 돈만 밝히는 속물 의원이란 것이 의심되는 상황, 8회까지 <명불허전>은 '입신양명'을 노리며 2017년 서울에서도 야심을 숨기지 않는 허임에 대한 '오해'로 드라마의 주된 갈등을 이끌어 간다. 



노비에게 침통을 연 허임, 그가 택한 죽음의 길 
하지만, 8회 드디어 왜 허임이 두칠 형제의 간청을 거부했는지 드러난다. 덕술이 의금부 앞에서 허임을 자기 손을 없앨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에 발을 구르고 있었을 때, 그의 동료가 찾아온다. 그리고 밤이 이슥한 시간, 병조 참판의 특별 조치로 허임의 하루 방면이 허락되었다면서 덕술이 그를 찾아온다. 두칠을 따르는 대신 의문을 제기하는 허임 앞에 두칠이 통곡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의 형을 살려달라고. 

동생 바보였지만, 양반집 노비를 하기엔 조금 모자랐던 형, 병조참판 첩의 심부름 과정에서 동생에게 주려고 곳감 하나를 슬쩍한 것이 들통이 나 매타작을 맞고 죽음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형을 살려달라는 두칠, 그런 두칠에게 허임은 자신의 시술 행위가 형의 목숨은 물론, 덕술조차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경고한다. 하지만 눈물로 매달리는 두칠, 결국 허임은 침통을 연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겨우 복수로 가득찼던 두칠 형의 배를 꺼지게 만들며 그의 숨을 고르게 하는 찰라, 두칠의 방문이 열리고 병조 참판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허락없는 허임의 시침 행위에 분노하며 두칠 형의 목숨을 멍석말이로 거둔다. 결국 형은 맞아죽고야 만다. 

그랬다. 허임은 그 장면을 지켜보는 동막개의 눈물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고 남몰래 노비들을 치료하러 다니던 의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로운 의료 행위는 결국 동막개 어머니의 목숨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두칠 형제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을 돌렸던 건, 그들의 어머니에게 침을 놓는 순간, 두칠 형제의 목숨조차 위험해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극중 조선으로 타임 슬립한 최연경(김아중 분)은 양반댁 아가씨로 위장해 거리를 걷던 중 천민 꼬마랑 부딪친다. 그러자 천민 꼬마와 그의 아비는 죽을 죄를 지었다며 바닥에 고개를 쳐박는다. 허임 역시 걸출한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혜민서에서 10년을 썩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분제 사회' 조선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드라마는 이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두칠 형제와 그 어머니의 비극을 통해 신분제 사회의 비극 에 방점을 찍는다. 

조선 시대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을 소유한 국가든, 개인이든 그들의 재산이었다. 양도, 매매, 상속의 대상이었다. 즉, 허임의 의료 행위는 병조참판의 사적 소유 재산을 허락도 없이 '건드린' 것이었다. 의무만이 있는 천민 중의 천민인 노비, <경국대전> 등은 여러가지로 노비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만, <노비구가장조> 등에 따른 현실은 달랐다. <명불허전> 8회에서도 드러나듯이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허임은 그가 제 아무리 빼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관노 출신이라는 신분의 제약, 그리고 그가 몸담은 신분제 사회 조선이라는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 없었다. <명불허전> 8회는 속물 의원 허임의 실체(?)를 드러내며 신분제 사회 속 모순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그 고발을 통해 허임이 왜 그토록 2017년 서울에서 떳떳하게 의원 생활을 하기를 갈망했는지, 설득해 낸다. 흔히 신분제 사극에서 자신의 신분적 한계에 고민하는 방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치료하고 싶어도 치료할 수 없는 의원의 고뇌를 극적으로 그려내며 중반을 넘어선 극에 '화력'을 더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다. 그를 스카웃한 신혜 한방 병원의 원장 마성태(김명곤 분)는 그를 vip 병동 전담 의사로 이용하고자 한다. 즉 신분제 사회 조선의 모순이 싫어 이곳에 안착하려는 허임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신분제 벽에 봉착할 예정이다. 이렇게 <명불허전>은 그저 속물 의원 허임의 타임슬립기인듯 코믹한 외피를 벗어내던지고, 조선과 2017 대한민국 다른 듯 어쩌면 같은 신분제 사회의 모순에 맞부닥치는 의원 허임을 통해 '참의술'의 길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런 코믹과 진지한 주제 의식을 오가는 <명불허전>을 설득해 내고 있는 건 김남길이다
당찬 최연경의 김아중 역시 매력적이지만, 속물 허임에서 병자 앞에서 한없이 진지한 의원 허임, 그리고 병조 참판 앞에서 눈물로 읍소하며 자신이 한낯 양반네의 개새끼임을 고백하는 관노 출신 허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건 바로 김남길이다. 배우가 인상깊은 연기의 캐릭터로 불리는 것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랫동안 그는 김남길 대신 비담으로 불리웠었다. 이제 그에게는 한동안 '비담'대신 허임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을 듯하다. 


by meditator 2017. 9. 4. 14:30

갑자기 하늘이 높아진 계절에 딱 맞춤한 영화다 싶다. 가을은 그저 높아진 하늘과 서늘한 온도만이 오는 게 아니라, 그 낮아진 기온과 함께 외로움, 쓸쓸함도 함께 온다고 어느 분이 말했던가. 그렇게 아직은 한낯의 볕이 저항을 하지만 계절의 서늘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무는 해와 함께 고꾸라져 버리는 환절기, 아마도 <더 테이블>은 이런 계절의 정서를 함께 하기엔 딱인 영화일 듯 싶다. 




주목하다
<더 테이블>속 시선은 지켜보다라고 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 보다는 주목하다라는 조금더 목적의식적인 술어가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한 까페를 주목한다. 서울 어느 골목 한 켠의 까페, 그리 세련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오래된 상들리에와 그 오래된 상들리에만큼 시간의 흔적이 묻은 테이블이 있는, 그래서 찾는 이도 그리 많지 않은 까페, 그곳의 테이블에 물컵에 담긴 흰 꽃 몇 송이가 올려지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손님들을 주목한다. 오전 11시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예전의 연인 유진(정유민 분)과 창석(정준원 분), 오후 두 시반 두 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사이에 둔 채 신경전을 벌이는 경진(정은채 분)과 민호(전성우 분),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라떼를 사이에 둔 채 사업인지 연민인지 모를 은희(한예리 분)와 숙자(감혜옥 분), 저녁 아홉 시 커피와 홍차를 사이에 두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찍을 뻔한 혜경(임수정 분)과 운철(연우진 분)

하룻동안 이 네 커플의 만남은 우리 사회 인간 군상의 단면을 충분히 보여준다.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속물과 찌라시의 주인공이 된 남녀가 빚어내는 불협화음, 그리고 그 간극의 서늘함. 관계보다 감정이 앞서는 이 시대 연인들의 뒤늦은 사랑 만들기의 어깃장과 그 어깃장의 끝에서야 어렵게 시작된 사랑, 진심조차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진심을 길어내는 사기 공모자 커플, 그리고 그 흔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신파의 2017년 자본주의 버전까지. 하룻동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이들의 사연은 그 하나로 영화가 되고 서사가 됨직한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미시사
하지만, <더 테이블>에서 그런 네 커플의 사연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보면, 그들의 사연보다, 그 사연을 오가는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고 가는 그들의 감정과 정서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혜경은 홍차를 시킨다. 홍차가 우려지는 티포트, 맑은 물 속에 붉은 빛깔의 차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영화는 집요하게 지켜본다. 이런 식이다. 영화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만나는 두 인물의 감정, 정서를 마치 홍차가 우려내어지는 그 순간을 주목하듯 한 치의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관객은 '이해'를 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되는 인생사의 그 한 장면, 주인공들의 속내를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찌라시의 주인공이건, 혹은 이제는 과거의 연애사보다 동료들에게 자랑할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한 속물이 됐을 지라도, 미친 짓을 바래는 미친 년이 되었을지라도, '사기'를 직업으로 하다 덜컥 사랑에 발목잡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던 가락으로 결혼조차 이루려 하고, 그 결혼에 '역지사지'로 엮어들어가더라도, 풋사랑에 안달을 하더라도, 세상사 얼마든지 비난과 구설수와 심지어 욕설의 대상이 될 그 사연들이 그 테이블 위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고 간다. 

문득 궤를 달리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종관 감독이 홍상수 감독처럼 오래도록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의 '미시사'랄까? 늘 무언가 구체적인 꺼리를 가지고 선명한 주제 의식을 전달해야 하는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생소하다. 그래서 소중하다. 서사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이런 영화를 종종 휴식처럼 만나 이해받고 싶다. 오래도록 우리 시대의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by meditator 2017. 9. 1. 21:49

14%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화려하게 종영한 <죽어야 사는 남자> 후속으로 '하지원'을 앞세운 <병원선>이 찾아왔다. 1회 10.6%, 2회 12.4%의 동시간대 1위 순조로운 출발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지원'이 주인공 불패 신화가 다시 한번 시작된 것일까? 


[TV성적표] <병원선> 드디어 출항! 허탈한 죽음은 이제 그만 이미지-3



하지원의 건재
<병원선>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믿고보는 배우'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는 캔디형 캐릭터에 가장 맞춤형인 하지원은 '생존의 신호음'을 제외하고는 눈물을 사치고 여기는 소녀 가장 외과 의사 송은재 캐릭터로 다시 한번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연기에 도전한다. 그리고 <병원선>이란 드라마를 극 초반부터 가장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가는 건, 이러니 저러니해도 하지원이다. 종종 그런 하지원조차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병원 용어가 생경하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극적인 상황에서 '제가 그 수술합니다'라고 당차게 외칠 때, 심지어 도끼를 내려 칠때조차 그 대사와 행위에 믿음이 가도록 하는 건 역시 하지원 때문이다. 

<병원선>은 심하게 하지원에게 의존한다. 여주인공 하지원을 제외하고는, 남자 주인공이라지만 어쩐지 그와 같이 병원선에 트러블 메이커로 등극한 이서원, 김인식과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강민혁은, 이 드라마가 이른바 '역하렘물'이라지만, 그 꽃이될 남자들의 존재감은 하지원 한 명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해 보인다. 드라마는 회차마다 내과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인 그들의 사연을 풀어놓을 예정인 듯하지만, 그 사연은 그저 양념처럼 여겨질 뿐이다. 남자 캐릭터들뿐만이 아니다. 하지원에 맞서 그녀의 발목을 걸고 들어설 조연 캐릭터들의 비중 역시 그다지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그녀가 근무했던 병원의 외과 과장도, 이제 새로이 그녀를 응급실에서 맞이하려다 내치는 종합 병원장도 하지원의 존재감에는 한참 못미친다. 

그런 면에서 <병원선>은 본의인지, 혹은 본의 아니게인지, 결국 '하지원'의 드라마가 된다. 물론 <태양의 후예> 등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의사로 나와 '휴머니즘'을 실현했지만, 그 누구도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송혜교 분)에 비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지원이 분한 송은재로 치면 이전 남자 배우들이 의사로 분해 드라마를 끌고 가던 의학 드라마의 형식을 띤다. <명불허전>에서 최연경으로 분한 김아중과 비슷하지만, <병원선>엔 김남길만큼 원맨쇼를 벌이며 여주인공을 보완해줄 그 누군가가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 수없는 건 비단 극중에서만이 아니다. 

 하지원, 차화연 죽음에 ‘자책’··· 강민혁에 이어 병원선 탑승 완료! 이미지-2


촌스러워 보게 되는 드라마?
하지만 단지 <병원선>이 하지원으로 인해서만 시청률이 잘 나올까?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 중 '촌스럽다'는 반응이 상당수가 있었다. 파업의 여파때문인지 연출이나 편집, 화면,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올드'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의 배경이 2017년이지만 마치 70년대의 어느 시절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료 사각지대인 섬을 돌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하는 병원선. 실제 병원선에 비해서 심지어 수술실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설정으로 한결 조촐하게 설정된 병원선의 세트하며, 70년대 낙도 봉사 활동의 어느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시감조차 주는 컨셉이다. 
올드한 장치만이 아니다. 실제 드라마의 내용도 이제는 도시에는 가볍게 여기는 맹장 수술이 응급 상황이 되는 설정에서 부터, 단 한 순간의 외면으로 어머니를 잃게되는 사연까지 21세기의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드라마의 주요 에피소드로 등장하여 '휴머니즘의 인술'의 도구로 작동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사극'은 아니지만, '시대극'처럼 시청자들을 향수처럼 이끌며 끌어앉힌다. '안되도 되게 하는' 응급 상황과, 그 속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이야기들은 '의학 드라마'의 본령으로 시청자들을 솔깃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세련된 맛이라고는 없는 투박한 연출과 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서사가 오히려 시청자들을 끌어당긴다. 21세기에 안락한 아파트에서 느긋하게 리모컨을 쥐고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들에겐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게 이겨왔던 그 시절의 정서가 지배적일 지도 모르기에. 어쩌면 <병원선>의 이 방식은 서투름이 아니라, 의도된 촌스러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죽어야 사는 남자>가 여전히 가장 호소력있는 '가족애'를 주제로 내건데 이어, <병원선>이 도시의 성장주의에서 탈락한 여의사를 내세워 다시 한번 가장 근원적인 '휴머니즘 인술'을 내세워 시청자들을 이끄는 이 전략은 이제 중장년층이 대세가 된 공중파 tv에서 어쩌면 가장 영리한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21세기의 시대를 살지만, 7,80년대를 살아왔던 그 세대에게 <병원선>은 그럼에도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정서를 복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발한 설정의 <맨홀>과 역시나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 <다시 만난 세계>가 고전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병원선>의 전략 성공 여부를 예단하기엔 이르다. 상대작인 <맨홀>이나 <다만세>가 공정한 경쟁작이라기엔 완성도면이나 연기면에서 너무 수준 미달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분간 안정적인 시청률 호조세를 보일 <병원선>의 진검 승부는 이종석, 수지를 앞세운 트렌디한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방영과 함께 이루어질 전망이다. 


by meditator 2017. 9. 1. 14:45

<비밀의 숲>, <터널>, <쌈마이웨이>, <품위있는 그녀>, <죽어야 사는 남자> 이들 드라마들은 최근 '화제'의 드라마들이다. 그리고 화제의 드라마들답게 시청률면에서도 동시간대 1위를 거뜬히 낚아챈 드라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드라마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입봉의 신인이거나, 입봉작이 아니더라도 드라마화한 작품이 몇 개 되지 않은 '신인'이라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공중파, 케이블, 종편을 넘나들며 새로운 작가군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이들 신진 작가군의 활약은 그저 '신인'이라는 점에만 방점을 찍어서는 아깝다. 신인다운 패기와 신선한 기획과 서사, 그리고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구성으로 이들 드라마에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점이 진짜 놀라운 점이다. 이렇게 드라마의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장르물의 약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타임 슬립을 통해 풀어낸 구성으로 방송 초반 <시그널>과 비교되던 <터널>은 극이 중반을 넘어서며 더 이상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터널>이라는 드라마 자체만으로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구었으면, 과거에서 온 형사와 현재에서 그의 과거 인연으로 얽힌 인물들과의 공조 수사만으로, 그리고 과거에서 부터 현재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는 연쇄 살인마의 귀추에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범죄의 종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계에서 장르물은 희귀했다. 그러기에 2011 <싸인> 이래 장르물의 김은희는 독보적이었다. 늘 '장르물'이 작품이 등장하면 과연 김은희의 작품을 넘어설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김은희 작가를 불러내기엔 장르물이 너무 잦아졌다. 거의 2년에 한번씩 작품을 선보이는 김은희 작가를 '학수고대'하지 않아도 장르물 애청자들의 마음을 쏙 빼앗을 장르물들이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신인 그룹'의 작품들이다. 

신인 작가 그룹에 의한 드라마계 지형도의 변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바로 드라마 장르의 변화이다. 위의 검찰청을 '숲'으로 상징하고 그 속에서 직업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낸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는 한국 장르물을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단 한 작품만에 구축했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복수'를 매개로한 정의 실현이 한국 장르 드라마의 일반적 양상이었던 그 '한계'를 단 한 개의 사건으로 16부을 뚝심있게 이끌어간 <비밀의 숲>은 그 흔한 '미드'와의 비교에서도 우리의 어깨를 우쭐하게 할 만큼 주제 의식과 구성에 있어 시청자들의 자부심을 한껏 만족시켰다. 

<비밀의 숲>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터널>역시 과거와 현재의 인연이 바탕이 되었지만, 형사라는 직업군의 책임 의식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면서도, 장르물 특유의 묵직한 정서를 대중적 호흡으로 적절하게 순화시킨 <터널>은 ocn 드라마로는 드물게 6%를 넘는 성취를 이루었다. (6.490% 16회,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가입 가구 기준) 동시간대 1위는 아니었지만, 화제성에 힘입어 시즌2를 예약한 kbs2의 <추리의 여왕>은 '추리'를 전문가만큼 잘 하는 동네 아줌마와 열혈 형사 콤비의 신선한 조합으로 사건을 해결해 가며 묵직한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풀어나가면 <추리의 여왕>만의 정서를 구축한다. <피고인(sbs)>의 최수진, 최창환 작가나, <피고인(mbc)>의 김수은 작가 역시 공모전 출신으로 장르물로 작가 입문의 시작을 열었다. 



기존의 장르라도 이들이 쓰면 다르다. 
그러나 이런 장르물만이 있는 건 아니다. 최근 종영한 <품위있는 그녀>는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화제성으로 인기를 몰았다. 대성 펄프라는 가상의 재벌가를 중심으로 상류 사회와 그 주변의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며 인기를 모은 <품위있는 그녀>는 주말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스란히 수용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그것을 '부조리극'으로 승화시키며 퀄리티있는 드라마로 호평을 받았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이 드라마를 저술한 백미경의 작가의 경우 죽음을 사이에 둔 연상연하 남녀의 순애보 넘치는 사랑 이야기 <강구 이야기(2014)>가 20여년만에 만난 톱스타와 작가의 우여곡절 사랑 이야기 <사랑하는 은동아(2016)>로 업그레이드 되더니, 천하장사 여성과 재벌남의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힘센 여자 도봉순(2017)>의 변주를 통해, <품위있는 그녀>에 이르렀다. 순애보 러브 스토리에서 막장 스릴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장편 드라마로는 불과 3작품에 이르를 동안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작품을 이기는 기묘한 역전극을 벌이고 있는 백미경 작가의 다음 작품은 예측 불허라서 더 기대가 된다. 



청춘물도 이들이 쓰면 다르다. 이미 <백희가 돌아왔다>로 단막극으로서는 드물게 인기를 끌었던 임상춘 작가의 <쌈 마이웨이>는 재벌가 없이, 88만원 세대의 현실감넘치는 사랑 이야기로 공감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죽어야 사는 남자>의 김선희 작가는 헤어진 모녀 상봉이라는 '가족 드라마'를 기상천회한 코믹물로 업그레이드 시켜 땜빵 드라마의 승리를 거머쥐었고, <자체 발광 오피스>의 정회현 작가는 '오피스'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도전했다. 

장르도 신선했지만, 그간 시간에 쫓기는 촬영 일정으로 완성도에 있어 문제 제기가 되왔던 고질적 문제점들에 있어서도 진일보한 성과를 보였다. 한 여름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겨울옷, 하지만 결코 그 설정과 의상이 답답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서늘한 분위기로 압도했던 <비밀의 숲>과 <품위있는 그녀>는 작품성만 보장된다면, 굳이 시의성있는 피드백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전 제작'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22부작의 <죽어야 사는 남자>가 보인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16부작, 20부작의 관성에 대한 반문이 되었다. 

이렇게 신진 작가군의 등장과 그들의 신선한 작품에 의한 드라마계의 수혈은 시청자들에게는 뻔하지 않은을 넘은 올드 미디어로서 tv의 가능성을 다방면에 걸쳐 열었다. 미드 등을 통해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며 젊은 층들에게도 호응을 얻으며 노령화된 시청층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여전히 스타 작가의 아성은 공고하지만, 이들 신진 그룹의 활약으로 좀 더 다양하고 재밌는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었다. 
by meditator 2017. 8. 29. 16:42

고백컨대, 그랬다. 글을 쓰는 기자도. 청춘시대의 조은 역에 최아라라는 키가 훤칠한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했을 때, 심지어 이 캐릭터가 선머슴애처럼 짧은 쇼트 머리에, 검은 색으로 아래 위를 도배한 옷을 입고 등장했을 때, 아하 저 친구는 이 드라마에서 '레즈비언'의 캐릭터로 '소모'되지 않을까, 연상했었다. 그리고 2회를 보고, 내 '얼토당토'않은 선입견에 정곡을 찌른 박연선 작가 앞에 새삼 부끄러웠다. 바로 이 '안일한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에 대해 새로 시작한 <청춘시대2>는 문을 열었다. 




이른바 '연선내'의 징후
동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실감나고 공감가게 그렸던 <청춘 시대1>을 보고, 드라마의 대본집대신 당시 따끈따끈했던 박연선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여름, 어디선가 시쳬가>를 찾아 읽었다. 드라마와 소설, 장르는 달랐지만, 2016년 청춘의 이야기를 '당대성'을 살려 구현해내 칭송을 받았던 <청춘시대>처럼,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무시무시한 제목과 달리, 어쩌면 <청춘 시대>보다 더 '당대성'을 살린 청춘들의 이야기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청춘 시대>가 벨 에포크라는 대학가 셰어하우스를 배경으로 했다면, <여름, 어디선가 시쳬가>는 이제는 쇄락한 첩첩산중 마을 두왕리를 배경으로 한다. 

<청춘시대2>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이토록 장황하게 박연선 작가의 <청춘시대1>과 그녀의 소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에 대해 구구절절 풀어놓는 건 박연선 작가의 '스타일'와 '주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막장 드라마를 보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운 죽음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할머니 홍간난 여사네 집에 떨어진 백수 강무순의 뜻하지 않는 보물찾기 대작전으로 부터이다. 그러나 보물을 찾아나선 강무순이 건드리게 되는건 15년전 온 마을 사람들이 최장수 노인 백수 잔치로 마을이 비었을 때 이 동네 소녀들 4명이 한 날 한 시에 사라진 사건, 그때부터 드라마는  본격 미스테리 스릴러로 장르를 변경한다. 즉,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할머니 집에 떨어진 손녀의 엉뚱한 보물 지도 해프닝을 '과거'로 번져 사라진 4 소녀들의 비밀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처럼 독자를 끌어간다. <청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박연선 작가는 '셰어 하우스'라던가, 가장 일상적인 공간, 거기에 모인 청춘들을 통해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괴상한 이야기 속으로 시청자 혹은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하지만 죽음이나 귀신조차도 무색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보면, 그곳에선 거기 사는 사람들의 가장 진솔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편의적 편견은 배제를 낳는다
그랬기에 <청춘 시대2>의 시작은 셰어 하우스답게 헤어짐과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벨 에포크에 등장한 최아라. 하지만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쉽게 말조차 붙이기 힘들고, 송지원의 너스레나 농담까지도 '반사'라도 하듯 무안함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녀의 등장은 <청춘 시대> 그 서막에서 저마다 쉽게 정가지 않을 것처럼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면면을 회상케 만든다. 그런데 그저 싸기지 없거나 비밀에 잔뜩 쌓였던 시즌1의 등장 인물들을 넘어 최아라는, 그의 행위나 태도, 심지어 방문객을 통해 혹시나 그녀가 '레즈?'라는 의심을 유도하고야 만다. 

조은을 제외하고 신입 주제에 자신들에게 만만하게 굴지 않아 전전긍긍했던 윤진명(한예리 분), 정예은(한승연 분), 송지원(박은빈 분), 유은재(지우 분)는 '쿨을 넘어선 조은의 태도를 '남성성'으로 오해하고 지레 그녀를 혹시? 라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의심이 가기 시작하자 그녀의 모든 태도는 그 의심하는 내용에 딱딱 들어맞기 시작한다. 최아라가 감기약을 사들고 안 열려지는 은재의 방을 억지로 열고 은재를 쫓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시즌 1에서 각자 청춘의 통과 의례를 혹독하게 겪었던 네 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그런 경험에서 배운 깨달음따위는 흘려버리고, 자신들의 앞에 등장한 이질적인 한 인물에 대해 쉽게 '편견'의 색안경을 끼어버린다. 타인이 저어하는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 지나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은재가 이제 가장 쉽게 조은의 편견에 거침없는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정작 말로는 공정한 잣대를 운운하면서도 하우스 메이트들의 편견을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윤진명에 이르기 까지 손쉽게 조은을 그녀의 예상되는 성적 정체성으로 '따' 시켜버리는 그녀들의 속단은 근거없이 확신에 차있다. 

의심이 곧 배제로 이어지는 <청춘 시대 2>의 서막은 그래서 가장 동 시대적인 출발이 된다. '혐오 사회'라고 칭해지는 이 시대에서 그 편견과 혐오의 시작이 저리도 어이없이 그저 자신들이 가졌던 편견을 바탕으로 손쉽게 이루어지며, 그 편견의 결과가 불편으로, 그리고 배제에 대한 고려로 이어지는 과정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혐오의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말은 달리 하지만, 네 명의 하우스 메이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인지적 능력이 무색하게 조은이 '레즈'라는 편견에, 그리고 그런 자신들과 다른 성적 정체성에 거침없이 불편해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낳고,그 것은 결국 한 여름 거리의 질주로 마무리된다. 알고보니 그저 키 큰애라서 늘 오해받고 불편했던 조은, 그저 키크고, 남성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하우스 메이트들에게 받은 그 편견과 그로 인해 벌어질 뻔한 결과는 어처구니없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편견과 혐오의 과정을 까발린다. 

물론 여전히 조은을 바라보는 친구 안예지(신세휘 분)의 모호한 눈빛으로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의심'은 또 다른 갈래롤 펼쳐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2회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레즈건, 게이건 혹은 성적 정체성이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타인을 쉽계 예단하고, 그들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는데 편의적인가 하는 지점이다. 하우스 메이트 한 명의 등장이란 에피소드 만으로 우리 사회에 현재 만연한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그 결과로서의 배제의 '기제'를 드라마는 대번에 설파해 낸다. 그렇게 박연선 작가는 자신의 장기를 뽐내며 가장 묵직한 주제 의식을 가장 평범한 일상을 통해 그래서 가장 설득력있게 풀어내며 <청춘시대2>에 대한 기대를 2회만에 업그레이드 시켜낸다. 
by meditator 2017. 8. 27. 04:00

도발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이제 종영한 수목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이하 죽사남)>가 수목 드라마 대전에서 거둔 성과는. 22회 기준 12. 8(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라는 이제 이 정도면 공중파에서는 중박이라고 치는 시청률을 전제로 하지만, 시청률 이상 '공중파 미니 시리즈'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문제 제기의 기회를 '도발'했다. 



'근본이 없는'이 아닌 근본이 제대로 있었던 죽사남
마지막 회, 딸을 찾고 가족을 이루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룬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최민수 분)은 자신의 친지들을 이끌고 전세 비행기를 동원하여 보두안티아 공화국을 향해 떠난다. 신이 나서 비행기에서 원맨쇼를 벌이던 백작, 하지만 기상 변화에 흔들리던 비행기는 끝내 엔진에 불이 붙고 뜻하지 않은 곳에 불시착을 한다. 뻘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살아남은 백작과 그 가족, 친지들, 그들을 맞이한 건 괴수의 음성같은 효과음이 들리는 무인도로 추정되는 섬이다. 



내내 가족드라마인 줄 알고 '화목한 해피엔딩'을 꿈꾸던 시청자는 종영을 10분 남겨놓고 나타난 백작의 또 다른 아들 때문에 아버지에게 '죽빵을 날리는' 존속 상해의 현장을 목격한 것도 모자라, 어떻게 전재산을 날릴 뻔했던 해프닝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딸과 함께 헐리웃 생활을 즐기는가 싶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인도 행으로 마무리짓는 드라마에 '어이상실'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되돌아 보면, 이게 과연 어이상실할 일인가 싶다. 애초에 가상의 보두아티아 공화국에서 나타난 석유 재벌 바람둥이 아빠란 이 '희귀한' 설정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바람난 남편을 아내 바보로 개과천선을 시키는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안되는 것이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 전형적인 악녀의 딸 코스프레라는 막장 가족극의 소재와, 남편의 바람, 그리고 헤어진 친딸 찾기, 심지어 치매 등 한국 드라마에서 그간 전형적으로 등장했던 소재를 차용했지만, <죽사남>은 이중 어떤 클리셰에도 천착하지 않고 단 1분의 진지함을 넘기지 못하는 코믹하고 엉뚱한 서사로 드라마를 반전에 반전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장소가 '헌팅'을 위한 클럽이었다는 기가 막힌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코믹한 반전들만을 가지고 <죽사남>을 평가하면 아쉽다. 오히려, 진짜 이 드라마의 매력은 동시간대 드라마들이 어설픈 사랑 놀음에 16부작 혹은 32부작의 이야기를 늘이고 있는 동안, 짤막한(?) 24부의 쾌속 정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들어갔다. 

클럽에서 만난 아빠와 딸이 서로의 존재를 알기 전에 '인간적' 교감을 나누고, 딸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서로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보다듬고, 가족으로서의 교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죽사남>은 그 어떤 가족 드라마보다 정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내조의 여왕>, <파스타>의 고동선 피디 특유의 섬세한 정서의 교감이 때론 어수선할 수 있는 '코믹' 드라마의 정조를 따스하게 감싸며 드라마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던 점이 무엇보다 <죽사남>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족 드라마이면서, 그 풀어가는 서사에 있어서는 기존 드라마들이 의존했던 진부한 설정 방식에 단 한번도 기대지 않았던 김선희 작가의 뚝심있는 전개는 한류에 의존하여 어설픈 소재와 연기, 혹은 작가의 명망에 기대어 안일한 소재와 더 안일한 연기로 매 회를 인공호흡하는 타 미니 시리즈와의 차별점을 더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우리 사회 가족을 여전히 이상향으로 그려내지만, 드라마는 결코 '가족'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딸의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그 특유의 '유아독존' 스타일을 버리지 못했고, 심지어 바람둥이 기질조차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남편의 불륜은 곧 이혼이 되어버린 드라마의 공식에서 응징과 개과천선이라는 모색은 수긍은 둘째치고라도 신선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갑인 '부'의 문제에 있어서도 '환타지'를 버리진 못했지만, 사람을 그에 굴복시키지 않고자 노력한다. 무엇보다 '악인'의 처리에 있어서조차 '인간적'인 기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심지어 중동 진출 일꾼이었던 장달구, 현 알리 백장의 과거을 추적하는 '국정원' 직원을 통해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졌던 산업 일꾼의 역사까지 헤아리는 내공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지만, 그 다루는 방식은 '인간 친화'적이었던 <죽사남>의 패기넘치는 도전은 최근 부진을 겪고 있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만든다. 

최민수, 그리고 신성록, 강예원의 절묘한 삼각 편대 
또한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문제점에 대한 <죽사남>의 가장 큰 도발 중 하나는 다름아닌 <죽사남>의 출연진이다. 최민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란 단언을 하게 만든, 거의 원맨쇼에 가까웠던 그의 보두아티아 백작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그런 최민수의 연기만이 있었다면 <죽사남>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드라마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최민수의 무대를 충실하게 받쳐준, 아니 사실은 최민수가 앞서나가서 그렇지, 그 연기의 내공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다 싶었던 강호림의 신성록과 딸 이지영의 강예원의 연기 역시 이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공신이다. 가짜 딸 이지영의 이소연과 비서 앞달라의 조태관은 눈이 즐거운 감초로서 드라마를 넘기게 했다. 갈수록 그의 몸짓 각도가 커져만 가던 최민수와 그걸 흥겹게 받아쳐준 신성록과 강예원의 연기는 마치 '변검'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가장 감동적인 가족애의 현장으로 시청자를 이물감없이 이끌며 드라마의 수목 1등이 되도록 하는데 헌신한다. 



이 처럼 드라마는 그간 그의 연기 내공이 무색하게 주인공 아버지로서 소모적으로 소비되던 한때 잘 나갔던 배우 최민수에게 새로운 대표작을 제공했다. 최민수에게 대표작이 <모래 시계(1995)> 만이 아니라, <사랑이 뭐길래(1991)>와 영화 <미스터 맘마(1992)>와 <결혼 이야기(1992)>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죽사남>, 무엇보다 '왕년'의 배우가 아닌 현역의 최민수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함께 한류 스타가, 젊은 청춘 스타가 아니라도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 배우들의 조합이라면 거뜬히 주중 미니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신성록, 강예원 불패 신화로 증명해냈다. 이런 <죽사남>의 선전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최근 부진의 늪에 시달리는 공중파 드라마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7. 8. 25. 02:24

1980년 8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첫 유세 장소로 선택한 곳은 민주당의 텃밭이라고 알려진 미시시피주 네쇼파 카운티였다. 1964년 흑인 인권 운동가 세 명이 kkk단에 의해 살해된 이래 민주당을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이곳에서 레이건은 복지연금을 받으며 캐딜락을 모는 시카고의 여성을 언급하며 복지 문제를 인종 갈등으로 국면 전환을 시켜 남부 지역에서의 지지를 끌어모았다. 당시 대통령 후보 레이건의 연설을 통해 사람들은 당연히 복지 무임승차한 여성을 흑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백인이었다. 하지만 레이건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화려하고 유머러스하며 신뢰할 만한 언변에 진실에대한 눈을 가리고 말았다.


레이건 쇼 ⓒ ebs
뛰어난 배우 레이건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재선에 성공한 역대 가장 나이가 많았던 대통령, 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우리 대통령만큼이나 익숙했던 그는, 무능과 존경이라는 양 극단의 평가를 받지만,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호감도가 높은 대통령이다. eidf 개막식의 자리를 빛내준 파쵸 벨레즈 감독은 바로 이 대통령 레이건의 시대를 <레이건 쇼>라는 제목의 영화로 작품상 경쟁 작품의 대열에 올랐다.

다큐는 레이건 시대가 저물어 가는 1988년 이제 곧 대통령 직을 마무리할 레이건과의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인터뷰어는 질문한다. 당신이 배우였던 것이 대통령 직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 '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라고 답한다. 바로 이 레이건이 한 답이 파쵸 벨레즈 감독의 <레이건 쇼>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레이건 취임 후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미국은 핵전쟁 위기가 높어져 갔고 그런 위기에 대통령 레이건은 불을 지폈다. 다큐가 주목하는 건 레이건의 정치 행위 방식이다. '한번도 정치가가 되본 적이 없다'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대통령 레이건의 행보는 그 이전의 역대 다섯 정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상 자료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대통령이 된 첫 해에만 무려 7번의 국정 연설을 한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은 tv 쇼의 세트장으로 삼았고, 다큐는 컷 소리와 함께 국민을 향애 유려한 언변을 펼치는 대통령 레이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담는다.

그토록 수많은 영상을 통해 국민들을 매료시킨 대통령, 그 저변의 자질은 그가 '배우' 출신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스스로 배우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배역의 소화만이 아니라, 각본까지 해야 하는 대통령 직의 어려움을 토로할 정도로, 좋은 대통령으로 보이는 연출의 과정에 전혀 스스럼이 없었던 대통령.
비록 '조연'으로 배우로서 헐리웃 역사 에서 그 존재감은 돋보이지 않았지만, 훤칠한 키에, 듬직한 체구, 호남형의 인상을 지닌 이 배우는 헐리웃 영화에서 매번 성격좋고, 이상적인 영웅상을 맡아왔었다. 그리고 그 '배우'로서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대통령의 이미지에 치환시켰다.

레이건 쇼 ⓒ ebs
미디어프렌들리한 정치, 
차기 대통령에 나올 후보들이 일찍이 방송을 타면서 이미지 쇄신을 노리는 시절,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인의 이미지 메이킹이 그의 정치적 입장만큼이나 중요해진 시절에 레이건의 미디어 프렌들리는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재임 기간 내내 1/3은 정책 구상을 하는 둥하다가, 2/3는 홍보와 행사에 치중했던 대통령 레이건은 2017년에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바로 '정치'에 있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선례를 남긴 사람이 바로 레이건이라는 점에 다큐는 주목한다.

미디어프렌들리한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는 시절, 하지만 레이건은 그 질문의 시작이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대통령이다. 그의 재임 기간 내내 그에게는 그가 정말 행정부의 수반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다녔다. 미디어를 통해 유머러스한 모습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결단력 넘치는 영웅의 모습을 견지했던 그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참모 의존적이며, 심지어 실제 대통령이 영부인이 아니냐는 의문이 나올 정도의 반문이 따라 다닌 인물이고, 그 의문에 그는 이란 인질 석방  종종 자신의 정책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실언'이나 '허언'으로 증명을 해냈다.

행정부의 수반답지 못한 무지보다 더 심각한 건, 그의 맹목적인 카우보이식의 안보관이었다. 1983년 역시나 tv를 통해 중계된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 진영 시민들이 맘놓고 살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를 앞세워 '스타워즈'란 그럴 듯한 허울좋은 명목 하에, 전략 방위 계획을 발주했던 것이다. 소련의 미사일이 닻기 전 격추할 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하지만, 언제나 방아쇠를 담길 수 있는 무력 행사에 레이건은 거침없었고, 그런 영웅적 행보에 국민들은 열광했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레이건 쇼 ⓒ ebs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미디어 프렌들리 대통령의 발목을 건 건, 그보다 더 미디어 프렌들리한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쵸프란 사실이다. 미소의 국제적인 긴장이 세계적 화두였던 시절, 54세의 레이건보다 더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고르바쵸프의 등장은 정책보다 이미지로 정치를 해온 레이건에겐 가장 큰 위기를 불러왔다. '도베랴이 노 프로베라이(신뢰하되 검증하라)'는 소련어 한 마디 외에 이렇다할 이미지적 각인을 불러오지 못한 미국은 전세계인이 그토록 원하는 핵무기 동결 나아가 폐기까지를 내세운 도발적인 고르바쵸프의 제안에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규정했던 레이건의 냉전적 이미지는 자중지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노령의 나이에도 재선에 성공했지만 '처음 4년간 히트작만 내다 줄곧 실패작만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는 여전히 기자들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유머의 너스레를 떨지만 그 약발은 잦아져갔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대중적 호감도와 별개로 능력있는 대통령의 순위에서 레이건을 찾아보긴 힘들다.  제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을 해도 결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가 한 일로 결정된다는 것을 다큐는 냉정하게 지켜본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을 행위 예술가로 평가하듯, tv에서 먼저 성공해야 대선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는 미디어 정치의 나쁜 선례로서 다큐는 그의 행보를 반면교사의 선례로 삼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7. 8. 23. 23:25

도시 농업'은 우리 사회에서도 더는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귀농' 만큼이나,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건 이 시대 삶의 대안적 담론으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러기에 8월 21일 eidf의 첫 째날 ebs를 통해 방영된 <도시 농부 프로젝트>은 그저 또 하나의 실용적 해외 도시 농업 다큐인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본 <도시 농부 프로젝트>에서는  이 영화의 원제 wild plants가 그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한다 싶게, 식물의 철학, 아니 식물을 빌어 인간의 대안적 삶을 모색해보는 삶의 화두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의 부제는 transform변화이다. 우리 시대의 변화란 기존의 것을 부수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큐가 말하는 변화는 전혀 다르다. 



실용적인 농업 다큐에 대한 기대는 오프닝에서 부터 머쓱해진다.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부터 시작된 서정적인 영상, 그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간다. 마치 '없음'을 상징하는 듯한 겨울을 이제 더는 사람이 머물지 않는 앙상한 폐건물이 대신하고, 그렇게 다큐는 디트로이트란 공간을 설명해 들어간다. 

폐건물더미에서 건져낸 삶과 죽음의 철학 
그리고 다음, 앤드류 캠퓨가 폐허가 된 집기들 사이에서 땅을 판다. 그러면서 '자기 마당의 쓰레기들에서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 같이 일을 하는 청소년 말릭에게 말을 건넨다. 그 쓰레기들에서 생애 주기를 느끼고 삶과 죽음을 끝이 아니라, 변화로 느껴보라고. 그 흙을 대하는 과정은 종교와도 같다고. 앤드류의 잠언과도 같은 말에 청년 말릭은 래퍼처럼 답한다. 쓰레기에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를 하려하면 할 수 있지만,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지까지는 어쩐지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이 동문서답같은 앤드류와 말릭의 대화가 바로 이 다큐가 던진 질문의 시작이다. 삶의 문화에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거기서 생략된 질문, 죽음 이후, 심지어 죽음 조차도 거창하고 장식적인 형식 속에서 휩쓸려 들어가버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을 잃었다고 다큐는 원주민 노인 마일로 예롱우헤어의 입을 빌어 말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농업'의 의미, 도시 농업, 텃밭 가꾸기는 '자연 친화적'인 삶의 방식으로 존중받는다. 또한 기업화된 식량 생산의 사이클에 대한 대안적 방식의 모색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런데 다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네바의 혁신적 노동조합 자르댕 드 코카뉴에는 젊은 청년들이 여럿 모여 텃밭을 일군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잡초를 뽑는 이들, 심지어 밤에 꿈에 나올 정도라고 서로 농담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고된 노동을 선택한 이들에게 텃밭 가꾸기는 식량을 얻는 것 이상이다. '상업적 활동'이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과 연계하여,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 그들에게 이 일은 도시에서 원자화되었던 삶을 벗어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요, 하늘과 생명과 나를 연결하는 과정이 된다. 그 풍성한 활동으로서의 농업은 끝나지 않는 삶의 사이클로서의 자각을 이들에게 일깨운다. 그들에게 식물은 그저 농사의 대상이 아니라, 느리게 사는 삶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다. 여리게만 보이지만 식물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쉬지 않는 존재로 이들은 이런 식물에게서 종교와도 같은 영감을 얻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제네바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식물적인 삶(?)은 정치적인 자기 표현이기도 하다. 익명성의 세상에서 협동심을 키우고, 생산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히는, 이 세상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거스르는 정치적인 '저항'이다. 

이런 과정을 마일로 노인은 '노래'라 칭한다.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 내 피부는 흙과 같고, 내 숨결은 바람이 되며, 내 피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 우리 인간도 하나의 식물로써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그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안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라코타 어로 노래를 부르는 노인, 그 노랫말은 우리의 할 일은 '창조'를 거듭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식물과 동지가 되어 
그 '창조'의 의미를 오랜 시간을 걸려 실천하는 이가 있다. 바로 제네바의 모리스 마기이다. 늦은 밤 제네바의 거리, 이제 노년에 이른 한 사람이 거리를 헤맨다. 가로등만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공간, 그곳에 모리스는 땅을 파고 무언가를 심는다. 모리스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식물의 씨앗, 키 별로 네 종류로 나뉘어진 씨앗들은 거리의 척박한 땅에서도, 심지어 콘크리트 틈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선구 식물들이다. 

선구식물을 자신의 정치적 동지라 부르는 모리스. 사향 엉컹퀴와 같은 이들 식물에게서 삭막한 취리히를 10년안에 숲이 우거진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모리스는 동지애를 느낀다. 척박한 땅과의 싸움을 통해 선구 식물들은 그 보다 순한 다른 식물들도 자랄 수 있는 토양의 개선을 이뤄낸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구 하나 시키는 사람없이 홀로 취리히의 거리에 거미줄같은 식물의 지도를 만들어낸 모리스의 행보와 일치한다. 



동지애는 또 다른 도시 디트로이트의 앤드류 부부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처럼 농사를 지었던 할머니 세대의 삶을 이해하게 된 앤드류의 아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이후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졌던 그녀는 식물의 사이클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닌, 거름으로서 새로운 순환의 시작이라는 새로운 차원에의 이해를 열게 된다. 우리가 버린 것에서 다시 무언가를 돌려받는 과정, 생명이 끝난 것 같던 계절 뒤의 새로운 생명의 잉태, 결국 그 과정은 우리 인간의 죽음 이후의 과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연다. 끝이 아닌 휴지기, 다시 새로운 생명을 위한 헌신. 그리하여, 삶의 단계는 서로 차별성없이 하나의 순환으로 이해되고, 살아가고 나이들어 가고 변하는 것에 기꺼이 순응하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란 등을 둘러싼 해프닝은 결국 우리 사회가 살아가고 있는 담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늘 과잉된 생산물을 '소비'하는 주체로서만 자신을 증명하는 세상, 그러나 우리에게 물건으로 행복감을 주는 이 사회를,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그 인간의 수 배, 수십 배, 혹은 수 백배의 동물 등의 잔혹사와 불행을 깔고 앉은 사회라 단언한다. 그리고 그 단언의 재앙을 '계란'이라는 가장 익숙한 소비물품을 통해 확인한다. 그런 현실에대해, <도시 농업 프로젝트>는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식물을 통해 벌어지는 대순환의 사이클에 대한 진득한 천착을 통해 삶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저 숲에 들어가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배움을 얻는 아이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는 두렵지 않은 부부, 그리고 땀 흘려 일하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된 젊은이들. 그들을 통해 얻는 건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철학이다. 

by meditator 2017. 8. 22. 16:51

그랬다. 주인공은 맥베스였지만, 막상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맥베스는 그냥 귀가 얇은 조절장애를 가진 남자처럼 여겨진다. 3명의 마녀와 아내, 예언을 빌어 그를 충동하는 마녀도 마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인 맥베스의 욕망에 엔진을 달고, 연료를 들이붓는 역할의 아내를 빼놓고서는 이 작품의 악행은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운명에 휘말린 맥베스를 인간적으로 나약한 인간으로 여기는 반면,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를 최종 보스마냥 악행의 주체 세력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남편의 왕좌를 지키려하더니 결국 죄책감에 미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버리는 걸로 셰익스피어는 그린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결말과 상관없이 '레이디 맥베스'는 욕망의 화신, 그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게 욕망에 주도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여성의 대명사가 된 그녀는 19세기라는 영국을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등장한다. 


아니, 개봉한 영화 <레이디 맥베스> 이전에 역시나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그 언어적 시원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영화적 설정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러시아 전역을 유랑하다 만난 봉건적 러시아 사회 내 인간 군상들의 실화로 비롯된다. 70살의 시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마을 광장에서 처형된 젊은 여성, 시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귀에 끓는 납을 부은 이 엽기적인 실화가 이 영화를 잉태했다. 



시아버지를 죽인 젊은 며느리의 도발 
도대체 왜 젊은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죽여야 했을까? 거기엔 아직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전근대 사회 속의 여성의 존재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이 가진 권력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야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도 있고, 역사 속 다수의 여왕들이 있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의 존재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남편이 속한 사회적 계층의 이름표에 의해 여성들의 존재가 값이 매겨졌다는 것이 맞겠다. 

그리하여 <레이디 맥베스>는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해 보이는 10의 소녀티가 벗어지지 않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전에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치 않는다. 이 결혼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지주 집안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다음 장면이 보여주듯 거의 아버지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남편과의 자식 생산.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젊은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첫 날 밤 증명한다.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는 며느리, 할 일이라고는 몸을 옥죄는 옷을 입고 앉아서 조는 거 말고는 할 일이라고는 없는 꽃다운 나이의 그녀, 집안 광산에 생긴 사고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주 집안 며느리로 하인들 단속에 나섰던 그녀의 눈에 자신을 거스른 한 명에 오히려 매료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씨받이로 들인 젊은 며느리가 불능인 남편 대신 젊은 하인과 바람나는 설정, 이는 '열녀문의 비밀' 식으로 <전설의 고향> 등을 비롯한 다수의 전래 괴담의 단솔 소재였었다. 이들 역시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에 근거한 전래 설화였었다. 양반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의 전통과 혈연적 승계를 위해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원작의 러시아, 영화의 배경 영국 등 세계 그 어느 곳이든 아직 여성을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어느 곳에서나 쉬이 만날 수 있는 '괴담'들이다. 

영화 속 캐서린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시민 혁명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갖춰져 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과 시골 마을 지주의 아내이자 딸인 캐서린에게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작황도 좋지 않은 밭과 돈 몇 푼에 사온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지주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요한다. 



열녀문의 희생 대신, 권력의 화신이 된 
그 '괴담'들의 주인공들은 끓는 납을 시아버지 귀에 부어 살인을 저질렀지만, 결국 광장에서 처형되거나 열녀문의 희생자로 전해진다. 그런데 21세기에 재연된 레이디 맥베스의 여주인공 캐서린은 괴담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녀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시작은 욕망이다. 불구인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을 요구하고 절도있는 예절을 요구하는 시아버지, 그런 숨막히는 집안 분위기의 틈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욕망의 일탈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에스컬레이션을 타고 연인과의 밀애를 위한 수단들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가는 것으로 나아간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일탈은 곧 부도덕이란 낙인과 함께 가장 엄격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성의 혈연에 의해 계승되는 사회에서, 그 혈연의 승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여성의 순결성이야말로 그 제도를 가능케 해주는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은 중요치 않는다. 영화는 바로 그런 배제된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운다. 19세기의 <마담 보봐리>의 성적인 일탈이 곧 사회적으로 억눌린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듯, <레이디 맥베스> 역시 캐서린의 욕망을 직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담 보봐리>를 비롯하여, 그리고 원작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숱한 우리네의 열녀문이란 허상 속에 스러져간 여성 잔혹사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사랑이란 멍에를 짚어지고 스러져 간 것과 달리, 캐서린은 자신의 욕망을 지켜내기 위해 '남성'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쟁탈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대산, 그 욕망의 대상조차도 자신이 쟁탈한 권력을 위해 거침없이 제물로 삼는 과정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뜻한다. 비록 그 권력이 그 커다란 집안에 그녀 혼자 오도카니 남겨진 것이라 해도.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만나는 가장 본능적인 과정은, 역사를 통해 제도화된다. 하지만 그 제도는 사회의 주도권이 남성에 의해 편제되는 과정에서 여성 존재 자체는 물론, 여성의 성도 소외되고 만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그 소외된 여성의 성과 욕망에 대한 직시에서 부터 문제를 바라본다. 삿된 욕망이 아니라, 팔려온 소녀의 정당한 자기 욕망이 왜곡되어졌을 때,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의 표현 과정에 대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그녀의 부당한 대우는 '권력'을 가진 남성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작용으로 캐서린은 자신의 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다. 늘 그 욕망의 끝에서 파멸하고야 마는 여성들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사랑조차도 권력 앞에 희생하고마는 새로운 권력 주체 캐서린의 존재는 낯설지만, 이제는 던져봐야 할 질문이 된다. 

물론 영화는 쉽게 캐서린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돈에 팔려왔지만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거뜬히 채찍을 손에 들었던 백인 여성 지주가 된 캐서린은 비록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마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는 '을'이 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마차에 짐짝처럼 실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하녀와 하인의 존재에 이르면 인종과 계급의 모순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아니 그러기에 어쩌면 레이디 맥베스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 그리고 사회라는 그 체계 자체에 대한 깊은 질문의 시작이 될 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7. 8. 19. 1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