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도발적이게도 이 영화는 이미 <인비저블 게스트>라는 제목을 통해 관객에게 모든 패를 다 보여주었다는 것을. 하지만, 오리올 파올로 감독이 보여준 그 반전의 패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 한 편의 종주는 필수적이다. 


스릴러 영화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한 시민이 뜻하지 않은 범죄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 비저블 게스트> 역시 그렇게 시작된다. 유망한 젊은 사업가 아드리안(마리오 카사스 분)은 고립된 호텔 방에서 살해당한 내연의 애인과 함께 발견되었다. 동절기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아예 걸쇠를 제거한 창문들, 보조 잠금 장치까지 잠궈진 채 안으로 잠궈진 방,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아드리안과 그의 연인 로라(바바라 레니 분)뿐,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온 경찰은 아드리안을 로라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밀실 범죄의 트릭 속에 갇힌 주인공
에니메이션의 고전이 된 <명탐정 코난>에서 부터 최신 트렌드 추리물 영드 <셜록>까지, 살인 사건이 난 장소가 '밀실'이라 하면, 마치 '게임이 끝났다'는 말처럼 가장 완전 범죄의 필요 조건이 갖추어 진다. 아드리안과 로라가 있던 밀실, 그곳의 살인 사건,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아드리안에게 불리한 증인으로 인한 검찰 소환까지의 3시간이란 제한된 시간을 앞두고 승소 확률 100%의 변호사 버지니아와 아드리안의 숨막히는 '진실 찾기' 게임으로 뻗어나간다. 

승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숨김없는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아드리안을 위한 승소의 계획을 짤 수 있다며 아드리안을 압박하는 은퇴를 앞둔 은발의 여 변호사 버지니아. 그녀의 다그침에 아드리안은 자신이 말려들어가 버린 이 범죄의 트릭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뜻밖의 또 하나의 범죄 아닌 범죄, 각자 아내와 남편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은밀하게 만나 밀회를 즐기고 서둘러 돌아가던 중, 뛰어드는 사슴을 피하느라 핸들을 돌리고 그 과정에서 맞은 편에 오던 차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황급히 사고 차량을 살펴보니 이미 운전자는 숨을 거두고, 그의 사고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아드리안과 로라의 이해 관계는 얽혀 들어간다. 

아드리안은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로라의 제지 때문이었다고. 신고를 하려던 자신을 제지하고, 자신들의 밀회와 사회적 위치를 보존하기 위해 아드리안에게 사고 차량과 운전자의 '수장'을 지시했으며, 이후 그들을 추적해오는 경찰과 협박범에 대한 모든 대응은 오로지 '팜므 파탈'같은 로라의 의도였다고. 

영화는 로라의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뜻밖의 교통 사고와, 그 우연한 사고를 덮기 위해 아드리안과 로라가 벌이는 고군분투(?)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과 존재를 알 수 없는 협박범과, 그리고 아드리안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장시킨 사고 차량 운전자의 시신만이라도 알려달라 애걸하는 그 부모 가리도 씨 등과의 접점을 로라 살해범 아드리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재구성 과정으로 다각도로 접근해 들어간다.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
그 '밀실'에 자신들 두 사람말고 그 누군가가 또 있었다고 주장하는 아드리안, 그 주장만큼 아드리안은 그 일련의 두 사건 사이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그런 아드리안을 제한된 시간과 그가 내뱉는 진술의 헛점을 지적하며, '진실'을 파고든다. 

올해의 기업인 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아드리안, 그는 자신은 그저 로라의 함정에 걸린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야만 너를 도울 수 있다는 버지니아의 압력은 시간이 갈수록 결백했던 아드리안의 진술, 그 이면의 것들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2017 전주 국제 영화제 초청 작품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국내 영화사를 통해 '리메이크'가 결정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바람난 사업가와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는 어찌보면 가장 통속적이며 대중적인 서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한 건의 실종 사건과 또 한 건의 밀실 살인 사건이라는 두 건의 사건과 그 사건과 사건 사이에 벌어진 모든 변수를 놓고 벌이는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듯 추리의 향연을 벌인다. 



진실을 다그치는 변호사, 그 변호사의 다그침을 피해 어떻게든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두 개의 사건 사이를 피해 가보려던 아드리안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검찰의 소환과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는 변호사의 압박 사이에서 자신에게 덜 피해가 가는 변수를 제시해 간다. 그리고 그 변수의 과정은 바로 우리가 이 영화가 제시한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추리'해볼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이다. 똑같은 사건이 '프레임'을 어떤 각도로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한껏 내보인다. 그렇게 변수에 변수를 돌다리를 두드리듯 건너간 변호사와 관객들은 결국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의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영화는  범죄의 늪에 빠진 주인공에게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 대신, '반전'을 선사한다. 

그 '반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복기하도록 만든다. 애초에 자신이 밀실 살인 사건을 목도하고 했던 의심을, 아드리안의 최초 진술에 대한 의혹을, 그리고 애초에 감독이 그 모든 진실을 다 흘뿌려놓았음에도 아드리안의 그 초조한 '평범한 이의 억울한 누명'이라는 결정적 복선 앞에 가장 분명한 의심 대신 자신 역시 갈짓자를 걸었음을, 그리고 바로 이 갈짓자의 걸음이 바로 <인비저블 게스트>의 묘미였음을. 추리 소설의 진짜 묘미는 드러난 진실도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글쓴이와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고 추적해 가는 과정의 매력이다. 사건의 진실 만큼이나, 그 진실을 찾아가는 갈짓자 걸음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밤을 세워 손에 땀을 쥐고 읽은 한 편의 추리 소설과도 같다. 
by meditator 2017. 9. 25. 16:40
'동심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 문학의 한 갈래', 이 정의의 문학이 바로 '동화'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생뚱맞지만, 일본의 에니메이션 <짱구>를 예를 들어보겠다. 아이들을 한참 키우던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 에니메이션 <짱구>를 못보게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인 기억을 가진 부모들이 있을 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번 못보게 하는데 어린이 채널만 틀면 자주 나올 뿐더러,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어른들이 보기엔 종종 '선정적(?)이기 까지한 그 내용을 아이들은 재밌어 했다. 이런 식이다. 어른들이 자라던 시절 가장 즐겨보던 백설공주니, 신데렐라를 이제는 좋은 동화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용어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가치 판단을 제쳐두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되새겨 보면, 굳이 '잔혹 동화'란 범주를 따로 둘 필요가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의붓 딸을 죽이려 했고, 심지어 요리를 해서 먹고자 했다. 그런 왕비에게 주어진 벌은 뜨겁게 달군 무쇠 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주는 것이었으니, 요즘 웬만한 형벌 저리 가라다. 자신의 저주 걸린 발을 스스로 자른 '분홍 신을 신은 소녀'는 어떻고. 그 반대도 있다. 착하게 잘 지내니, 굴러 들어온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기도 한다. 아니 왕자와 결혼을 꿈꾸던 바닷 속 공주는 허망하게 물방울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예전 사람들이 요즘의 사람들에 비해 '속물'이라서 저런 동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것일까? 오늘날 출판물의 형태로 정화된 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던 원형질의 동화가 오래도록 '스테디셀러'였던 의미는 어쩌면 가장 본원적인 '인간의 욕망과 그 가감없는 구현의 결과물을 적나라하게 반영'해 주었다는데 있지 않았을까?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를 부정하는 어른들은 정작 여전히 tv를 통해 변종된 '동화'의 형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들에 매료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 김은숙의 드라마는 바로 저 '동화적 욕망'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 아닐까? 바로 그 가장 '솔직한 인간의 원형'을 통해 '성장의 치유제'가 된 이 시대의 동화 한 편이 찾아왔다. 바로 <몬스터 콜>이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가 들려 준 동화
말기 암에 걸린 엄마와 사는 소년 코너, 그에게 학교는 '폭력'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먄 하루 일과가 끝나는 곳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밤, 그의 방에서 바라보이던 언덕 위의 느릎 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찾아왔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색과 다르게 그에게 '동화'를 들려주겠다는 몬스터,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언제나 동화 속 '이종의 존재'들이 그러하듯, 몬스터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거나, 혹은 비밀의 보화 대신, 소년이 만든 동화를 요구한다.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 째 동화, 우리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계모 왕비와 왕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와 도망을 친 왕자는 그녀를 잃고,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마녀 왕비를 물리치고 왕국의 계승자가 되었단다.
그런데,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치 100년의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가 뜻밖의 식성을 보이듯, 왕좌를 차지하고 훌륭한 성군이 된 왕자의 뒷담화에는 뜻밖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신실한 목사와 그를 시험에 빠뜨리는 마법사같은 약사의 이야기 역시 숨겨진 진실을 가지고 있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우리는 언제 '성장'할까?
어릴 적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단단해 지는 그 언젠가부터, '흥부'가 좀 '바보'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다. 어린 시절 전달된 '이야기의 교훈'들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던 소극적 수용자'들은 조금 커지자,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몬스터'의 힘을 빌어 '사고'를 친 코너는 한결같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저에게 벌을 주지 않나요? 저를 야단치지 않아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복선'이 될 대사이다.

어른들은 코너를 그저 엄마가 아픈 불쌍한 아이로만 '대상화'시킨다. 하지만, 정작 '몬스터'에 의해 결국 드러난 코너의 속내는 그보다 복잡하다.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왕자나, 한밤중 약사를 찾아간 목사처럼. 그리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어른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듯 코너는 그저 엄마를 잃는 것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아이만이 아닌 경계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몬스터의 동화는 그래서 마치 옷의 겉감과 안감처럼 두 개의 전혀 다른 질감의 속살을 가진다.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와, 미처 드러낼 수 없었던 속사정이라는, 그리고 코너는 그 이면의 속살을 가진 이야기들을 발판 삼아, '폭력'으로 밖에 표출 할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용기를 얻는다. 그 '용기'의 관건은 가장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진솔한 모습은 비겁하고 때로는 용렬하며, 심지어 '도덕'이라는 잣대에서는 한참 비켜 선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이다. 소년은 질타하지만, 몬스터는 그가 들려준 동화 속 주인공 그 누구도 힐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속사정을 지니고 살아가는게 인간이라는 듯. 마치 조금은 머리 커져버린 우리가 '놀부전'을 탐닉하게 되듯이 말이다.

소년은 무시하지만 어느 덧,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외면했던 악몽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 숨겨진 용납할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소년에게 '몬스터'는 자기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 콜>은  꼬리에 꼬리를 문 '동화'이다. 소년 앞에 나타난 몬스터, 그 설정 자체가 동화적이지만, 한 술 더 떠서 몬스터는 나타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동화 속에는 또 다른 잔혹 동화가 숨겨져 있고, 그 동화와 잔혹 동화의 과정은 일그러진 욕망으로 표출된 소년의 해프닝과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에게 맞는 걸 넘어서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가던 소년의 파국을 '몬스터'와 '동화'는 욕망의 배출이자, 정화의 동화가 되어, 소년을 이끈다. 할머니가 꽁꽁 잠궈놓았던 엄마의 방에서 만난 스케치들, 그리고 마지막 엄마와 눈을 맞추던 몬스터까지. 영화는 충실하게 또 한편의 동화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우여곡절의 동화를 통해 그저 엄마와의 이별이 싫고, 엄마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제 엄마를 보낼 수 있게 '성장'한다. 그렇게 거대한 성장의 담론은 소년은 슬프지만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라는 성숙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몬스터'라니 정말 괴물 영환줄 알고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부모들은 내내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코너라는 소년의 이야기지만, 오히려 영화는 아직도 tv 속 동화에 위로를 얻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몬스터 동화이다. 자신을 다져넣고 욕망을 거세하며 사는 것이 '어른'이란 여기며 사는 이 시대의 '어른이'들에게, 솔직담론으로서의 <몬스터 콜>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는 어른을 위한 찐한 동화 한 편으로 다가간다.
by meditator 2017. 9. 23. 17:39

언제나 그랬다. 정권이 바뀌면 전리품처럼 야심차게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제도부터 야심차게 뜯어 고치고자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입 제도 3년 예고제도 무색하게 김상곤 교육부 장관을 중심으로 수능 제도 개편안을 밀어부치려 했다. 지금의 복잡한 수시 지원 방안을 간편하게 고치고, 학생부를 투명하게 관리 강화에 방점을 둔 개편안은 당장 올 대학 입시부터 실행을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최근 학생부를 둘러싼 문제 의식의 격화와 함께 학부모들의 반발이라는 여론에 밀려, 수능 제도 개선은 한 해를 유보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런 가운데 9월 18일부터 방영된 다큐 프라임 3부작 <4차 산업 혁명 시대 교육 대혁명>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능 제도 개선 논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인가를 질타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일본의 한 호텔, 투숙객이 호텔에 들어서자 그를 맞이하는 건 공룡 모습을 한 AI 직원이다. 호텔의 수족관에는 AI 물고기가 유영하고, 각 객실 손님의 요구에 맞워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주는 직원 역시 AI다. 심지어 수고했다는 칭찬에 온 몸을 흔들며 반응한다. 

미국으로 카메라의 시선이 옮겨진다.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알라딘, 그곳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처남과 매형은 이제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중이다. 그들이 하는 일을 이젠 AI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드론의 영역은 농약 살포, 배달, 고공 촬영 등 다양하게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고, 수학, 과학 분야의 많은 정보를 저장한 인공 지능 슈퍼 컴퓨터는 이제 의학 분야에서 진단에서 치료법 처치까지 의사의 정확도를 뛰어넘고 있다. 학교라고 다를까, 선생님이 전달해 주는 지식은 이제 AI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다큐는 말한다. 4차 산업 혁명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그 한 가지는 AI로 인해 인간은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며, 상당수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루 8시간을 일하면서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인간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며 불평 불만이 없는 AI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선생님도, 의사도, 물류센터 직원도, 배달도, 농사도 다 AI가 해주는 세상, 인간의 설 자리는 없을까? 그 해결 방법은 뜻밖의 곳에 있다. 영화 <트랜스포머4>에서 사막 경주용 자동차로 등장했던 랠리 파이터. 이 차를 생산하는 건, 3D 프린터, 3D 프린터를 활용하여 하루에 한 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자동차를 만드는 건, 온라인의 전 세계 사람들. 즉, 다큐가 주목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 '인간의 살 길'은 바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한 협업'체계이다. 머리를 맞대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아이디어만이 4차 산업 혁명 시대 인간의 쓸모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건 이제 '교육'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클릭 한번으로 AI를 통해 지식을 전달 받을 수 있는 세상, 선생님의 역할과 의사의 역할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선진국의 발전을 따라하는 것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의 교육에서 '더 많은 지식'은 유효한 것이었지만, 이제 4차 산업 이후 '답이 없는 신세계'가 도래하는 시점에, 기존의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창의적 협업'이란 무엇일까? 하버드 대학에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지 않은 구 시대의 칠판이 교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 토의하고 토론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그 결과 하버드의 두 한국인 대학생은 서로 '이론'과 '실험'의 다른 분야 학생이지만, 그 칠판에서 만나, 새로운 연구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런 식이다, 분야, 전공, 교수, 학생, 이런 기존의 프레임이 이곳에선 그 틀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이게 바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협업'이다. 

이런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세계의 교육 제도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고민하던 일본은 새 시대에 맞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맞추어 IB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2020년까지 객관식 대입 시험 센터를 폐지한다 발표했다. 특정 과목에 연연하지 않고 글로벌 인재 양성에 목적을 두고 쌍방향 소통의 교육 방식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국제 바깔로레아) 교육 방식을 채택했다.

일본의 새 교육 제도와 우리의 수능을 양쪽 학생들의 시험을 통해 비교해 본다. 우리의 수능 문제는 긴 지문과 5지 선다형의 선택 문항이다. 이 시험지를 본 IB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IB 식은 한 시를 제시하고, 이 시의 문학적 해석을 쓰는 식이기 때문이다. 한번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시험, 그에 반해 자신의 서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평가의 여지가 있는 시험.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의 현실이 등장한다. IB 시험을 친 우리 학생의 반응, 객관적 채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수능 시험 제도 하나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학생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서술형의 창의적 시험 제도가 가능할까?



학교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2012년에 설립된 샌프란시스코의 미네르바 스쿨은 캠퍼스와 강의실이 없는 4년제 대학이다. 전세계 7개국의 기숙사를 옮겨다니며 전세계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온라인 토론을 중심으로 한 거꾸로 수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싱가폴의 변화는 대표적인 대학 난양 공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 역시 모든 수업을 동영상으로 미리 예습하고 수업은 학생들의 토론과 토의의 거꾸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프랑스 자동차 회사와의 자율 주행차 협력을 비롯 7000 여개 글로벌 기업과의 산학 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교수의 역할은 지켜보며 조언을 하는 것에 그친다. 세계 11위 대학의 현재이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대는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라는 기존의 분류 대신, 4차 산업 혁명의 새로운 기술력을 습득한 뉴 컬러와의 또 다른 계급적 구분이 사회의 차별을 낳을 것이라 예고한다. 

물론 우리나라라고 해서 그저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지력, 심력, 자기 관리력, 인간 관계력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5차원 수용성 교육이 중교등학교 현장에서 도입되어 '자기 경영서'를 쓰며 자기 주도적 학습 활동을 유도한다. 카이스트에서는 EE CO-OP 인턴십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3,4학년들이 전공 관련 기업에서 6개월간 인턴쉽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5차원 수용성 교육이란 좋은 제도가 입시 제도와 학습 위주의 수업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쳐 무력화도기십상이다. 

전문가는 시험의 변화을 선행적으로, 제도와 학제의 변화가 뛰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일방적 지식 전달의 교육 방식, 교수, 선생의 권위, 그리고 학제의 개편이라는 이 엄청난 변화를 현재의 입시 위주의 교육 방식이 수용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 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느냐, AI에게 직업도 주도권도 빼앗기느냐, 그 기로에 선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생각보다 빨리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다큐는 우려스럽게 우리의 교육 제도를 바라본다. 


by meditator 2017. 9. 21. 16:13

슬슬 '사교육'에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다. '못먹어도 고' 였던 부분에서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는 건, 결국 현재의 '사교육'이 '인풋'한 만큼, '아웃풋'의 효과를 내지 못하지 않나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사교육이 '남는 장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이다. sbs스페셜이 지난 9월 10일에 이어, 17일 방영된 <사교육 딜레마> 1,2부가 출발한 문제 의식이 바로 '사교육의 가성비'이다. 


다큐의 시작은 '통장에서 용난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공감을 얻는 요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통계청 조사 결과 월평균 사교육비 25만 6000원, 하지만 이건 전체적인 평균 수치일 뿐이다. 우리나라 중산층 평균 소득이 450만원으로 산정했을 때, 현실은 이 보다 아이 한 명당 이보다 훨씬 많은 사교육비가 들어가고 있는 현실. 30년을 직장 생활을 한다 했을 때 집값에 과중한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나면 정작 두 부부의 '노후 자금'은? 이란 적자 계산서가 나온다. 





사교육 몰빵의 적자 계산서, 가성비는?
예전이야 집안에서 자식 한 명이 잘 되면 온 집안 식구가 그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물론, 자식 농사를 잘 지으면 부모들이 '벤츠'타는 것이 자명한 결과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교육 시킬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포크레인 두 대'를 사서 하나는 자식에게 굴리게 하고, 또 한 대는 임대를 하는 것이 수익성 측면에서 낫다는 '가성비'가 등장하는 시절, 부모들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7~800명이 정원인 과학 영재 학교를 보내기 위해 초등 5학년때부터 그 100배가 넘는 학생들이 영재고를 지망하여 각종 사교육 레이스를 질주하는 시절, 과학 영재고뿐인가, 사교육의 메카 강남을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 하여, 온 국가의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사교육'의 정글에 내던지고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한껏 하고픈 것을 하며 뛰어놀며 창의력을 키워야 하는 시절'에 '뛰어노는 법을 배우는 학원, 창의력을 키우는 학원'까지 전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부모들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사교육에 매진하는 학부모들은 항변한다. 과학 영재고는 가지 못할 지라도 상위 1%의 교육이 아이에게 더 나은 선택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이 사회에서 더 나은 기회의 안전망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안정망과 기회를 위해 청소년의 시절을 저당잡힌 카이스트 출신의 여행 작가는 '그러면 행복은요?;라고 반문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한 대안으로 다큐가 제시하고 있는 건, 사교육 없이도 '아이 양육'에 성공한 '시크릿'의 공유이다. ㅣ



사교육 없이도 잘 크는 시크릿?
그 '시크릿'의 대안 첫 번째는 충남 아산의 예꽃재 마을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부모들의 생활 공동체 예꽃재 마을. 이곳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이집 저집 이 마당, 저 마당을 뛰어놀며 놀고, 놀고, 또 논다. 초등 4학년 이제 공부에 신경쓸 나이가 되었다는 이웃 학부모의 충고 대신 비록 성적표에는 미흡하다지만 아이 본인이 이해하고 있다면 됐다는, 심지어 굳이 고등학교, 대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는 학부모들의 공동체이다. 

그 다음에는 아빠가 주 교육자로 나선 이상화씨네의 '몰빵 교육법'이다. 큰 아이를 낳고 큰 병을 앓는 바람에 아이들의 교육에 나서게 된 아빠는 이제 그만의 방식으로 큰 아이를 하나 고등학교에 보내고, 작은 아이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 안하는 듯 하면서 아이와 도서관을 놀이터로 삼고, 안하는 듯 하면서 영어, 컴퓨너, 수학 공부를 시키는 아빠의 모든 관심은 웬만한 사교육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마지막 주자는 현대판 맹모 삼천지교이다. 유명 학습지 대표 김준희씨네 부부, 어려서 부터, 스스로 선택을 하게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던 이 부부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오히려 강남 8학군이 아니라, 외딴 강화도 주택으로 집을 옮겨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했다. 

2부의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마도 그런 것일 듯하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줘라.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감을 부여해라.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에 관심을 가지로록 유도하라. 아이들은 아낌없이 주는 만큼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 

물론 현재의 거의 '학대'에 이르른 사교육 몰빵의 현실에서 저건 가장 기본적인 되새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프로그램을 본 학부모들이 그런 다큐의 취지에 공감할 수 있을까?



사교육이 필요없는 시스템이 먼저다. 
외려, 다큐에서 보여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교육의 방식을 바꾸면 대학에 잘 갈 수 있어요로 비춰지지 않을까? 충남 예꽃재 마을에서 실컷 뛰어놀던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이르자, 스스로 대학을 가겠다, 학원을 가겠다며 나선다.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을 가고, 책을 읽던 아이는 4개 국어에 능통하여, 가장 유명하다는 자사고 하나고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 학습지 대표의 네 아이들은 이른바 명문대도 부족하여, 의학 전문 대학원에, 치의학과 대학원 생이다. 

다큐가 제시하고 있는 건,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붐을 이루었던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닐까? 아니 그게 아니면, 단지 이상화씨의 말처럼 '돈을 들여 남에게 시키는 사교육이 아닐뿐이지, 아빠가 거의 컨설턴트 수준으로 1;1 마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교육일 수도 있다. 

이미 교육 시스템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대안 학교나 홈스쿨링이 존재함에도, 왜 '사교육' 범람의 현실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다큐가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사교육'의 '가성비'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 다큐는 이런 시크릿의 방식으로도 아이를 잘 교육 시킬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보여지는 건, 이렇게 해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어요 인데, 그 방식이 '사교육'보다 오히려 시청하는 학부모들에게는 버겁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며 혹은 한 부모 가정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남의 예꽃재 마을은 비록 대도시 아파트보다는 싸겠지만 그림의 떡이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부모가 생이별을 하며 전적으로 교육에 매진하는 이상화씨네의 방식은 이미 우리 나라에서 비일비재한 기러기 가족의 또 다른 양상일 뿐이다. 유명 사교육 업체 대표의 사교육없이 성공적인 자녀 대학 진입기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다. 

1부의 마지막, 평범하게 살아가는 학부모들의 바램은 소박하다. '사교육은 힘들어요, 공교육에서 다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유명 대학을 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다. 경향 신문에 연재된 일본 학부모의 연재기 중 <박철현의 일기일회> 역시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다.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방학 중에 참여해야 할 각종 행사가 많아서, 굳이 비싼 돈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동네 센터가 있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 중 결국 결정적인 건, 일본 사회가 업종과 상관없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인정해 주고 있다는 이른바 '신분상승의 욕구가 없는' 분위기이다. 

당장 추석 연휴, 정부가 내세운 10일 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근 연휴를 이용하여 해외 여행도 가고 그러는 사람들은 대기업이나, 그에 부합되는 위치의 사람들이다. 심지어, 중소기업이나, 그 이하의 직종들은 10일을 다 놀지도 못한다. 월급, 대학생들에게 눈을 낮추라고 하기 전에, 중소기업 직원과 대기업 직원의 월급을 똑같이 해줘보라. 비정규직 직원이라 해도 추석 연휴 페이 걱정없이 다 놀고, 여행 다닐 수 있다면 굳이 왜 애를 써서 아이들을 하루 종일 학원에 가두어 놓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모색없는 사교육 가성비 비교와 시크릿 제안은 결국 또 다른 치맛바람과 다른 버전의 사교육일 뿐이다. 

by meditator 2017. 9. 18. 15:15

젊음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이라지만, 정작 청춘의 시절 자신이 꽃보다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지했던 청춘이 얼마나 있으랴. 오히려 자신이 한창 아름답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주체하지 못한 채 얹혀서 한 시절을 보내곤 하는 것이 청춘의 실상이기가 쉽다. 그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자존감'이란 대명사로 명명한다.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되어버린 자신의 무게는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정의만큼이나 묵직하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지만 늘상 부딪치는 건 그 반대의 현실, 그 현실로 인해 상당수의 청춘들은 '낮은 자존감'을 자신의 고민 중 하나로 꼽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청춘시대2>는 주목한다. 




시즌1의 시절을 함께 보낸 '하메'들, 12부작의 시간만큼 각자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알바를 전전하던 윤진명(한예리 분)은 이제 정규직 사원이 되어, 자신이 겪었던 그 '을'의 시간을 겪는 해임달의 '목격자'가 된다. 어렵게 첫사랑을 얻었던 유은재(지우 분)는 실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투명 유리창처럼 모든 것이 드러나보였던 송지원(박은빈 분)은 그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숨겨진 기억 속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예은, 얄밉도록 똑부러지던 그녀는 시즌1에서 겪은 데이트 폭력의 트라우마와 여전히 고전 중이다. 그리고 강언니가 나가고 대신 선머슴애 같지만 그 누구보다 여린 조은(최아라 분)이 합류했다. 

자신으로부터 발화
시즌1의 발화점이 하메들 그들과 부딪치는 세상이었다면, 시즌2 역시 여전히 그녀들은 세상 속에 있지만, 그 발화점의 시작이 자신으로 부터 비롯된다. 늘 갑질의 대상이었던 윤진명이 정규직 사원이 되어 겪는 세상,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선 신입 사원이지만, 경영 지원팀으로서 그녀는 아이돌 '아스가르드'에게는 회사를 대변하는 '갑'의 존재가 된다. '갑'이지만, '을'의 잔상이 그득한 그녀가 바라보는 '해임달'을 통해, 진명의 또 다른 변화가 움트는 중이다. 시즌 1에서 '당하던' 그녀가, 그녀의 또 다른 버전같은 '해임달'에 자꾸 걸려버리는 모습은, 그러면서도 경영 지원팀으로서의 일에 충실하고자 하는 모습은, '사회'라는 곳에 첫 발을 딛은 그 누군가의 자화상이다. 

알바 한 사람으로서 '을' 개인의 고통에 침몰하고 부유하며 버텼던 윤진명이, 이제 '조직' 화 되어 가는 과정은, 존재감에 대한 또 다른 물음이다. 또 다른 질문은 가장 인간 친화적인 송지원에게서 비롯된다. 휴학을 하고 취준생이 된 그녀는 가장 스스럼없이 예전의 대학 신문사를 드나들지만 그곳이 자신이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진명과는 또 다른 존재의 고독을 맛본다. 졸업반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해피엔딩만을 꿈꾸던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하던 예은에게 대학은 하루 하루 한 시각 한 시각이 자신을 뱉어내는 듯한 세상과의 싸움이다. 은재 역시 지나간 사랑의 그늘과 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신의 키만큼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조은이야 말할 것도 없고. 



7회의 소제목이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제 또 훌쩍 커버린 그녀들이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점을 포착한다. 무리 동물인 인간, 그들은 그 '무리'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지 않음을 절감하며 '자존감'의 바닥을 친다. 
8회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세상의 중심도 아닌데, 심지어 내가 '착한' 사람도 아니었다니! 류적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나르시즘'이 강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미모에 홀려 물에 빠져죽었다는 그 신화의 dna는 모든 이에게 유전되어 아닌 것같지만 알고보면 모두 한 '자뻑'을 해야 '자존'이 된다고 살아가기가 쉽다. 그런데 <청춘 시대2>의 박연선 작가는 그런 '자뻑의 자존감'에 발을 건다. 

바닥으로 부터 시작되는 자존감
8회 <나는 나를 부정한다>에서 순둥이 은재는 가장 편협한 시선에서 예은을 몰아붙인다. 물론 떠나는 예은의 손을 잡은 건 은재이지만, 첫사랑의 상흔은 예은의 또 다른 사랑에 한없이 옹졸해졌다. 예은이라고 다를까. 자신의 트라우마를 기꺼이 감싸주는 하메들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반발한다. 해임달의 1인 시위는 신입 사원 윤진명에게는 그저 해내지 못한 업무로 불편하다. 찾아온 아버지에게 조은은 너그럽지만도, 까칠하지만도 못하다. 그렇게 하메들은 각자 '이기적인'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우리 사회에선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흔히 '칭찬'을 든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한없이 칭찬하고, 잘했다고 해야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라고 <청춘 시대2>는 묻는다. 어린 시절 내가 잠들면 세상도 다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던, 즉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 생각했던 그 착각에서 깨어나오는 것이 '자존감'있는 어른으로서의 첫 발이 아닌가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나를 향한 칭찬이 '환타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는 알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그 얇은 알 껍질이지만, 알 속의 어린 새에게는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이다. 엄마의 산도를 머리를 틀어 나와야 하는 신생아의 출산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듯 '탄생'은 '고통'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더는 '보호되어야 할' 미성년이 아닌, 진정한 성년이 되는 과정은 자신을 세상 속의 '한 존재'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각'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청춘시대2>는 7,8회를 통해 냉정하고 제의한다. 

더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건 더더욱 아니면, 심지어 자신이 어쩌면 그리 좋은 사람이지만은 않다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그런 '모자란'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을 <청춘시대2>는 섬세하게 그려낸다. 내가 중심이고 잘나서 사랑하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라서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그 과정으로서의 '청춘이다. 여전히 이 드라마가 청춘의 교과서이기에 모자람없는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7. 9. 17. 02:57

개봉 5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살인자의 기억법>이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설경구, 김남일의 강렬한 연기에 원신연 감독의 절묘한 연출에 힘입은 바 크지만, 최근 <알쓸신잡>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확인시킨 김영하 작가의 원작이라는 '뒷배'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김영하 작가는 애써 원신연 감독의 연출과 자신의 원작의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이미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베스트 셀러였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은 사람이라면 과연 이 작품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구현이 될 지에 대한 궁금증이 극장으로 향하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같은 소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구분이겠지만, 마치 80년대 운동권이 추억을 90년대 2000년대의 한국 소설이 '후일담'의 형식으로 다루어 한 장르화 되었듯이,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번져나갔던 '기억'에 대한 장르에 속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어패'가 있는 게 세월호 사건은 2014년인데 반해,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 보다 한 해 전인 2013년에 출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치 '선견지명'이라도 되듯이, 작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기억'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펼쳐놓으며 세월호 사건 이후, '망각'이란 사회적 정서에 대응하여 애썼던 일련의 흐름에 마중물인 듯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이코패스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기억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실체를 '폭로'하고야 만다. 애쓰면 애쓸 수록 헷갈리는 자신의 존재, 자신이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 건 알았지만, 결국 시간이 다한 모래 시계처럼, 그의 기억이 다한 곳에서 만난 그의 존재는 원신연 감독이 그려낸 딸을 살려내기 위해 애쓰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을 지닌 아버지 따위도 없이 참담하다. 그저 '살인'의 기회를 얻은 그때 이래로, 죽이고 또 죽여왔던, 한 연쇄 살인범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참담한 목도의 과정을, 김영하 작가는 영화 속 병수가 자신의 흐트러진 기억을 녹음기에 담는 그 장면부터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릴러 영화처럼 구성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일찌기 <주홍 글씨(2004)>, <오빠가 돌아왔다(2010)> 등 김영하의 작품 다수가 영화화 된 것은 한국에서 드문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전작 작가 중 한 사람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늘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베스트 셀러 작가였다는 점이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김영하 작가의 작품의 영화화를 설명하는 건 부족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각색으로 2005년 대종상 각색상 수상처럼, 김영하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소설보다 머릿 속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영상적 서사에 공감한다는 점이 '영화같은 소설'로서의 김영하 를 손꼽을 수 있다는 점이 된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176페이지, 장편 소설이라기엔 짧은 분량이다. 내용 역시 '기억'과 '존재'에 대한 구구절절 작가의 사상 대신, 기억을 잃어가는 병수가 헤집고 다니는 기억의 편린들이 '이미지화'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는 건, 그 어떤 합리화로도 해명할 길없는 존재의 허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가 그토록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그 '기억'의 존재가치를 일찌기 김영하는 설파했다. 흐트러지고 흩어지는 기억의 편린을 잡아 결국 도달한 그 '허무'의 기록을 통해 묻는다. 당신은 기억할 만한 존재인가? 그것은 2013년 허황되고 허무했던 한국 사회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설같은 영화 
그렇게 휘발되고 마는 허무한 존재의 이야기를 영화로 빌어오며 원신연 감독은 그 포문을 뜻밖에도 주연 설경구의 대표작 <오아시스>의 오마주로 연다.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 철교 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나 돌아갈래를 외치던 그 설경구는 이제 기억을 잃은 노인이 되어, 역시나 굴 앞에 서서 당혹스러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당혹'의 근원을 찾아 설경구, 영화 속 병수의 기억의 터널 속으로 들어선다. 

김영하 작가가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을 유지하고자 하듯, 기억의 편린 속을 헤매다, 겨우 추스려 붙잡은 존재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감독 원신연은 뒤집어 버린다.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가 그려낸 서사의 구성은 빌려 왔으되, 원신연의 각색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 한국적 정서에서 가장 익숙한 '아버지'의 역사가 된다. 

역시나 사이코패스지만, 이제 알츠하이머를 앓아 잃어가는 기억을 녹음기에 의존하여 붙들어 두려는 병수, 하지만 그에게는 소설과 다르게 진짜, 딸(?) 은희와 그의 앞에 나타난 태주라는 그와 같은 연쇄 살인범이라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 소설은 그 모든 것을 병수에게 나타난 병증으로 휘발시켜 버리지만, 영화는 그들을 실존으로 끌어들이며 사이코패스 병수의 존재에 부피를 더한다. 



그러기에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 병수를 통해 또 한 편의 아버지의 고군분투기로 귀결된다. 또한 실존하지 않은 누나의 존재를 끌어들여, 사이코패스란 그의 연쇄 범죄 행각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 끝에서 핏빛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의 가족사를 끄집어 내어온다. 

즉, 소설이 알츠하이머가 심해진 병수 앞에 나타난 자신과 같은 연쇄 살인범과 딸 은희의 존재조차 그의 병적 기억의 산물로 만들며, 사이코패스란 존재론를 허무하게 설파했다면, 영화는 그 존재론을 수용하되, 사이코패스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인간 병수의 생애를 덧칠한다. 오히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명징한 한 장면에 집중한 단편 같다면, 원신연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비록 여전한 아버지의 활극이지만, 그 서사로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깊이를 가진 장편 소설과도 같이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앞과 뒤편, 오마주한 <오아시스>의 장면들이 김영하가 소설 속에서 인용했던 숱한 '시간'에 대한 인용구처럼, 병수란 사람이 불가항력으로 맞닿은 시간에의 허무를 설명하며 영화의 문학적 색채를 더한다. 

그 누군가에겐 원작이 말하는 바, 사이코패스조차 무기력한 '기억'과 '시간'의 주제가, 실존의 가족을 가진 병수를 통해 윤색되었다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반대로, 작가가 드러낸 편린의 상념이, 아버지 병수를 통해 '회한의 기억'들로 설득력있게 구현될 거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좋았던 것은 원작의 덕택이든, 모처럼 어설프지 않은, 상투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설경구라는 대체 불가한 배우의 호연, 그리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던 김남길의 존재감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by meditator 2017. 9. 16. 15:27

mbc에 이어 kbs로 이어진 파업의 여파로 <추적 60분>이 연 2주 결방했다. 그 빈 자리에 '어부지리'의 혜택을 입은 건 뜻밖에도 2017 드라마 스페셜이다. 애초 일요일 밤 10시 40분이 정규 편성이었던 <드라마 스페셜>은 평일 수요일 밤 11시 다시 시청자들과 만남을 갖게 되었다. 지난 주 <우리가 계절이라면>에 이어, 이번 주 <만나게 해주오>가 다시 찾아왔다. 




1930년대 경성의 혼인 정보 회사라니
드라마의 배경은 1930년대 경성, 지금의 서울이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하였지만, 그 '식민지배'의 체제 아래, 일본을 통한 서구적 문화가 조선, 그 중에서도 경성을 강타했다. 서구의 문물의 상징인 '백화점'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나날이 새로운 문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두발과, 의상, 언어, 의식에 있어서 그 이전의 젊은 세대와 다른 이른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7 드라마 스페셜 두 번째 작품 <만나게 해주오>는 바로 이런 '모던 보이'가 활보하는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경성의 모던 보이들은 전통의 관습과 풍속 대신, 서양의 문화에 매료되어 '적극적' 실천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실천의 양식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자유 연애'다. 일찌기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그 시절 젊은이들의 고뇌로 등장한 자유 연애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강제된 계약 관계인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상대를 선택하고 사랑에 빠지는 '개인주의적' 삶으로의 도약(?)이었다. <만나게 해주오>는 바로 이런 '자유 연애' 지상주의 경성을 배경으로, 오늘날의 결혼 정보 회사가 당시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으로 드라마를 연다. 

얼룩진 얼굴에 치마 저고리를 입고 결혼 정보 회사를 찾은 수지(조보아 분), 아니 사실은 숙희는 '모던 보이'와의 결혼을 목표로 하는 여성이다. 그 야심찬 목표에 따라 경성 혼인 정보 회사 주최 쌍쌍파티에 난입한 그녀는 막춤을 추며 파티장의 수질(?)을 흐리다 대표 차주오(손호준 분)의 눈에 띤다. 10전 상점 점원인 그녀를 10전 상점 여주인으로 오해한 차주오와 그녀를 아끼는 10전 상점 여주인의 배려로 '모던 걸'로 수지로 변신한 숙희는 차주오의 적극 응원에 힘입어 여러 모던 보이와의 맞선 자리에 나선다. 

1930년대 자유 연애가 부르짖던 그 시대에도 결국 결혼은 '돈과 집안과 외모에 따라 결정된다는 만고불변의 속물주의를 내세운 결혼 정보 회사와 그들의 주선으로 맞선 자리에 나선 수지를 통해 드라마는 당시 '모던 보이'의 실상을 들여다 본다. 와세다 대학이란 허울좋은 간판, 고위직이라는 직위를 이용한 축첩의 시도 등이 매번 '헛물'을 키게 만드는 숙희의 맞선 작전의 실체다. 

결국 맞선 자리의 해프닝으로 총독부까지 끌려가, 정보 회사가 문을 닺게 될 위기에 빠지며 뚜쟁이와 속물 모던 걸이었던 두 사람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저 모던 걸의 결혼 작전이었던 드라마 역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두 청춘의 고달픈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선 수지라고 이름조차 세련되게 바꾼 숙희는 사실 제천 출신의 가난한 아가씨, 아픈 어머니를 경성에 있는 큰 병원에도 데려가지 못한 채 잃은 그녀는 아버지가 강제로 권하는 결혼에 반발하며 스스로 결혼을 통해 성공하고자 경성으로 온 사연이 있다. 그런가 하면, 경성 혼인 정보 회사 대표 차주오는 넉넉한 형편이었지만, 독립군 자금을 대주는 바람에 집안이 온통 빨간 딱지 투성이가 된 집안의 청년으로 아버지가 살아가는 방식에 반발하여 '돈'을 쫓아 혼인 정보 회사를 하는 중이다. 그렇게 알고보면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두 사람은 혼인 정보 회사 대표와 고객이라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며 가까워져 간다. 



뜻밖의 만주행
그렇게 가까워지던 두 사람 사이에 장벽은 뜻밖에도 총독부 공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정복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 100명의 만주행을 결정한다. 총독부 관리에게 이자를 주러 온 주오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혹시나 끌려갈까 주오의 여동생을 강제 결혼시키려 하다 동생의 가출 사건으로 이어진다. 동생의 가출 사건은 두 사람을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지만, 주오는 그 만주행 명단에 숙희가 있음을 알게 된 후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일본인과의 결혼을 서두른다. 그런 주오가 섭섭한 숙희는 그녀의 로망이었던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대신 만주행을 택하게 되는데,

달콤쌉싸름한 연애사였던 드라마는 여성 100인의 만주행 공지문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 냉큼 발을 딛는다. 부푼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하던 숙희는 실상을 알게되지만 강제로 기차에 태워지고, 그녀를 찾아온 주오는 쌍쌍파티를 이용하여 숙희를 구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나 애초에 전형적인 '로코'의 형식을 띠었던 드라마는 위기의 만주행 기차를 주오와 아버지의 화해를 도구로, 만주로 잡혀갈 뻔했던 100명의 조선 여인들의 탈출 작전으로 변모시킨다. 결국 총독부 관리들의 실패와 실수로 만주행은 없었던 일이 되고 주오와 숙희는 행복한 사랑을 이루게 되었다로 끝나게 되는 드라마. 



시대적 고통을 담아내는 진지한 접근이 아쉽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 드라마는 전통적 결혼에 반발하는 여성과 독립 운동을 하는 아버지에 반발하는 청년이라는 시대적 청춘의 고통으로 일제 시대라는 배경의 깊이를 더한다. 거기에 뜻밖에 숙희에게 닥친 만주행은 2017년에도 끝나지 않는 시대적 고통을 절묘하게 극적 긴장의 소재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문제다. 21세기에도 끝나지않는 민족적 고통, 그 일제 시대 여성들의 강제 공출의 문제를 '로코'의 형식을 드라마가 '절정'의 갈등으로 차용한 지점에 대한 고민이다. 드라마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진 숙희를 구하기 위해 주오는 애를 쓰고, 그런 주오를 발견한 총독부 관리는 총을 든다. 그런 그를 주오의 아버지가 가격하고, 주오가 구한 여성들은 총독부 군인들을 함께 물리친다. 

바로 이 지점이 과연 역사적 비극을 '환타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라라는 '로코'의 소모적 갈등 도구로 소비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모호하다. 그런데 그 모호한 지점에서 주오가 자신의 혼인 정보 회사의 쌍쌍 파티를 활용하여 총독부 경무 국장 요시다를 희롱하고,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만주로 갈 처녀들을 구하는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대의 억압적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조악'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의도'는 알겠지만, '안이하고, 편의적'인 구성이라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로베르트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강제 수용소를 '단체 게임'으로 속인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들을 구하지만,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는 현실성에 기대어 울림을 가진다. 과연 , <만나게 해주오>가 숙희의 위기로 등장시킨 만주행 강제 징집은 그 역사적 무게감에 비해 드라마 속 장치로 너무 가볍게 처리되었다는 점이 걸린다. 물론 시대적 비극에 상상력이 짖눌릴 필요는 없다지만, 그래도 그 상상력의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더 비극의 무게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려 애써야 하지 않았을까? 두 주인공의 행복하게 사랑했어요란 결말조차 불편해 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by meditator 2017. 9. 14. 15:54

<응답하라> 시리즈는 드라마계에 새로운 시대극의 조류를 형성하게 했다. 1988, 1984, 1994란 특정 연도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에게는 추억을,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는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과거'라는 추억을 바탕으로 한 '순정'의 코드가 사랑의 진정성을 더하며 '열광'을 불러왔다. 그 이전에 시대극이라고 하면 '사극'이거나, '일제 시대' 혹은 '6.25'를 배경으로 한 협소한 범주를, <응답하라> 시리즈는 확장, 계발하였다. 물론 <응답하라>시리즈가 처음은 아니었다. <tv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kbs에서 꾸준히 방영되었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지만, 중장년층의 향수에 주로 기댄 이들 아침 드라마와 달리, 전 연령대에게 적극적 호응을 얻어 '시대극'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응답하라>의 70년대 확장판 
그리고 9월 11일 방영된 kbs2의 <란제리 소녀 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확장된 시대극의 70년대 버전처럼 찾아왔다. 대구를 배경으로 70년대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한껏 흐드러지게 풀어내며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그때 그 시절로 이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의 정서를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와 갑론을박한 적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란 두 사람은, 드라마 속 1988년이란 배경을 그려낸 제작진에 대해 호와 불호의 의견을 나누었다. 왜 같은 시대를 공유했음에도 그 '추억'에 이견을 보였을까? 그건 아마도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살았어도, 가스 렌지와 석유 풍로로 대변되는 삶의 다른 층위가 가져온 다른 반응일 것이다. 그건 아마 언젠가 2017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 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남 타워 팰리스와, 변두리 반지하방의 경험이란 한 시대, 하나의 지역적 추억으로 뭉뚱그려 그려 낼 수 없는 차별적 층위를 가진다. 그런 시대적 다른 경험의 층위가 내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시대'를 내세운 드라마들은 '시대'를 대변하는, 그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화적 코드'에 집중한다. 새로이 방영된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여학생도 '교련'을 배워야 하던 그 시절의 여고생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 김지영>을 통해 이제 하나의 시대적 코드가 된 82년 김지영 세대, 그 시대의 여성들이 제삿상도 차려줄 수 없어 차별을 당연하게 당하며 자랐던 그 시절에서 한 발 더 과거로 드라마는 발을 담근다. 같은 반의 공부도 잘 하고, 심지어 시도 빼어나게 쓰던 친구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여상'을 가던 시절, 군복을 입지는 않았어도 교련 선생님이던 수학 선생님이던 이제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벌을 받는 게 당연하던 그 시절을 <란제리 소녀 시대> 충실하게 복기해낸다. <란제리 소녀 시대>가 방영되고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처럼 '여자도 교련을 했어?'라는 그 신기한 시절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융성하던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던 대구, 당시에는 흔했던 가내 수공업 수준의 메리야스 공장과 체벌이 시스템처럼 갖춰져 횡행했던 교실을 드라마는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제목의 란제리 답게, 하얀 백런닝과 끈 달린 런닝으로 대별되는 당시 소녀들의 '속옷 로망'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그려내며 시대의 세밀화를 완성해 간다. 여주인공과 같은 이름의 기자 역시 무심하게 드라마를 보던 중 그 '끈달린 런닝'에서 움찔하고야 말았다. 여고 시절, 교복 사이로 드러난 그 두 줄의 끈은 정말로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여성성'의 로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라마 속 '사물'들은 아마도 그 시절을 살아온 그 누군가의 추억 속의 '어떤 것'들을 자극하며 이 드라마 앞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응답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들, 전교 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과 그런 오빠를 흠모하게 되는 여고생 정희(보나 분), 그리고 그런 정희에게 미팅 자리에서 첫 눈에 반해버린 순정파 동문(서정주 분)에,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서울에서 온 혜주(채서진 분), 그리고 그 시절 있음직한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까지, 70년대 시대극의 전형적 요소를 빠짐없이 채워넣었다. 



추억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이런 주인공들의 면면은 이미 아침 드라마 <TV 소설>을 통해 되풀이 반복 학습되다시피한 70년대 인물의 전형적 갈등 구조이다.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 역시 다르지 않다. 첫 회, 교회 오빠 손진과 문학의 밤을 통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그 첫사랑의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먼 도서관까지 손진을 보러 가는 해프닝 과정은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그런 시대극에서는 '클리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뻔한 클리셰의 중복이라 해도 아침 드라마 <TV 소설>이 계속 되풀이 될 수 있듯이, 모처럼 미니 시리즈로 찾아온 70년대의 복기는 70년대스러운 화면과, 그보다 더 70년대의 추억을 끌어오는 음악이란 양수 겹장의 장치로 인해, 추억을 찐하게 자극한다. 그리고 그 '맞춤 양복'처럼 잘빠진 70년대의 추억은 신기한,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로 젊은 세대를 솔깃하게 만든다. 적어도 첫 방송의 <란제리 소녀 시대>는 '추억'의 힘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적인 듯보여진다. 

과연 79년 여름 대구라는 구체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그저 '추억'의 복기만으로 끝날까? 10.26를 코 앞에 둔 79년의 그 여름의 끝에서 어떤 성장통을 보여줄 것인지, 8부작이라는 실험적 형식을 통해 그 주제 의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비록 시청률면에서는 미비했지만 신선한 시도였던 <완벽한 아내>의 홍석구 연출과 윤경아 작가 등 제작진의 그 여정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7. 9. 12. 19:02

공교롭게도 코폴가 가문 모녀의 영화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얼마전 코폴라 감독의 아내인 엘레노어 코폴라가 81세의 감독 데뷔작 <파리로 가는 길>에 이어, 그녀의 딸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엘레노어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이야 데뷔작이고 남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원 아래 배우들을 섭외했다 하여 그렇다 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을 그저 '코폴라'란 가문의 이름 아래 두기엔 소피아 코폴라란 이름의 그늘이 무성하다. 엄마와 딸의 영화, 두 모녀는 모두 '여성'에, 그리고 그들의 숨겨진 혹은 억눌린 이면에 촛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엄마의 <파리로 가는 길>이 보다 로맨틱하고 데뷔작임에도 연륜의 깊이가 담겨있다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여성,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질 수 없는 끈끈한 욕망과 생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담고자 한다. 그리고 칸 영화제는 그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손을 들어, '감독상'을 수여했다. 




2017년판 <매혹당한 사람들> 
<매혹당한 사람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토머스 컬리넌이 1966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이(<The Beguilled>)다. 그리고 이 소설은 1971년 <더티 해리>의 돈 시겔 감독에 의해 클린트 이스트우스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 이미 만들어진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2017년 다시 한번 영화화한다. 

1966년 발표와 함께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받았던 <매혹당한 사람들>은 남북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 남부연합 소속의 버지니아 주 마사 판스워스 신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말이 학교지, 전쟁으로 인해 학생과 교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교장과 또 한 명의 선생님,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학교에 남는 것이 처지가 나은 다섯 명의 소녀,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만이 남아 덩그러니 큰 남부의 저택을 북군의 공격과 남군의 침탈로 부터 지켜가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처지이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이슥한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간 소녀 아멜리아는 숲 속에 부상을 입고 낙오된 북부의 병사 존 맥버니를 발견하고 학교로 부축하여 돌아온다. 전쟁으로인해 고립된 공간에 남겨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 그리고 거기에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한 남성, 이 폐쇄적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편파적인 성비의 만남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빚어낸다. 

그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는,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 주인공에 촛점을 맞추어 그 애증의 서사를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2017년 칸이 감독상을 수여한 소피아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달랐을까?

존 역의 콜린 파렐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지만, 마사 교장 역의 니콜 키드먼, 선생 역의 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학생 엘르 패닝 등으로 가면 남성과 여성의 성비만큼이나, 그 존재감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또한 2003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06년 <마리 앙투와네트>, 2013년 <블링 링>까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여성'에 방점이 찍힌 영화의 주제 의식이 미루어 짐작된다. 



전쟁이란 시간과 공간 속의 여성들
아멜리아가 부상을 입은 존 맥너니를 데리고 온 마사 신학교, 말이 남부 연합이지, 교장 마사는 남부 연합의 군인들이 자신들이 몰래 키우고 있는 소와 밭 작물을 '공출'해 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북군'은 자신들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몬 성경 속 악마와 같은 '적', 그렇게 생존에 몰린 여성들의 공동체에, '적'이나 그녀들과 다른 성인 북군 존이 들이닥친다. 

파편이 박혀 부상이 심한 다리로 인해 그대로 남군에 넘기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 기독교 인도주의 정신을 내세워 존의 부상을 치료해주기로 선생과 학생들은 마음을 모은다. 자신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몰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적'이라는 적개심은, 그러나 방어 불능의 부상자이자, 그녀들과 다른 남성이라는 요소로 인해 잔뜩 동여맸던 교장과 학생들의 적대감과 경계심을 허물어 뜨린다. 물론 그 층위는 각자 다르다.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똘똘 뭉친 교장 마사는 존의 몸을 닥아주며 달아오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곧 냉정한 교장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 오빠보다 무거운 존을 이끌며 학교로 데려온 아멜리아는 그를 자신의 친구라 여긴다. 마사 학교의 이방인, 도시로부터 이곳으로 온 에드위나는 처음부터 이방인인 그에게 별다른 경계심이 없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감정적으로 저항하던 캐롤 등등.

영화는 원작에서 등장하던 여자 흑인 노예의 설정을 없애고, 성애의 전면적인 등장 대신, '교장이 존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식의 뒷담화와 교장과 선생, 학생들간의 묘한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작품을 이끌어 간다. 전쟁 속에서 여성들만의 공간을 지켜가야 한다는 절박감, 방어심이, 자신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무방비한 남성을 통해, 여성성을 회복하고 도발하며 만개하는 과정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자연스레' 그려나간다. 회복 정도에 따라, 괴물과 같은 적이 아니라, 북군이지만 충분히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신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 마사 학교 여성들은 그와의 만찬날 한껏 차려입은 각자의 드레스만큼이나 급격하게 각자의 여성성을 회복해 나간다. 

그러나 애초에 일곱 명의 고립된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라는 불공정한 성비는 '비극'을 잉태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에게 어필하던 그녀들, 그리고 그녀들에 맞추어 그녀들을 대하던 존은 그의 '추방(?)'을 앞둔 어느 날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비극'으로 향한다. 일곱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 가지는 불안하지만 도발적이었던 동거는, 선의였던 의도적이었던 존의 '실족'으로 불행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생존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였던 마사 학교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른다.

영화는 존이 그들을 자신의 편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응, 혹은 적극적으로 유도해가는 마사 교장과 에드위나, 캐롤, 아멜리아 등의 욕망과 의지에 주목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존을 그곳에 머물게 하는 그 순간에서 부터, 마지막 남군 연합에게 존을 양도할 때까지, 그녀들은 욕망의 공모자이자 생존의 조력자로 서로에게 충실한다. 존이라는 한 남성을 두고 경쟁하지만, 한껏 빼어입고 식사 자리에 앉아,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그녀들의 모습은 '위악적 본성'이라기 보다는, 여성성의 가장 자연스런 발로로 소피아 감독은 그려낸다. 하지만 그 여성성이 유약하진 않다. 자신들이 기만당하고 도전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낸다. 전장 속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운명일 뿐이다. 



by meditator 2017. 9. 11. 15:19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바 있다. 그러기에 과연 이 지적인 소설이 어떻게 스크린 위에 구현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뒤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반전'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작가의 전복적 의도 때문이었다. 글의 구성이 곧 소설의 주제 의식이라 말할 수 있었던 그 '역설'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영화를 본 내 처지는 영화 속 토니 웹스터(짐 브로드밴트 분)의 황망함에 비견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도 내가 읽었던 책과 내가 본 영화의 갭 사이에서 잠시 혼돈을 느꼈다. 결국은 같은 반전을 가진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던 두 책과 영화, 그 간극에 토니처럼 역시나 나의 자의적 '해석'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 그 널찍한 행간
영화는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이제는 '빈티지'가 된 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토니의 카메라 상점과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토니의 고즈넉한(?) 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혼한 전처와 홀로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등장시키며, 해체된 가족을 지닌 소통불가의 한 가장이었던 사람을 설명한다. 그런 그에게 도착한 첫사랑 베로니카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 그녀의 유언으로 남겨진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그렇게 토니는 자신에게 전달된 뒤늦은 과거의 편린을 통해 과거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엔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이 무리의 자랑인 양 으쓱거리던 또래 청소년들의 부풀음이 담겨있는 고등학교 시절과,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있다. 평범한 패거리였던 토니와 그 친구들과 달리, 선생님과 대등하게 역사를 논했던 에이드리언(조 알윈 분)은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다. 

영화 속 수업의 한 장면으로 등장한 역사 시간, 소설은 그 시간에 보다 천착한다. E.H.카가 말한 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정의를 놓고, 격돌한다. 에이드리언은 여기서 말한 '과거'에 반기를 든다. 허구의 역사학자 라그랑주를 인용하여,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주장을 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이 기록물에서 건져진 사실들을 기반으로 저술된다 했을 때, 기록물이라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전면적인 대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당사자의 편협된 사상을 문제로 삼았을 때, 역사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도 객관적인 사실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에이드리언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기록하는 그 누군가의 자의적인 역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대주의', 거기에 주인공 에이드리언도 작가 줄리언 반스도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드리언 자신이 그런 상대주의적 기억 속에 박제되어 사라진다. 



빈티지가 되어가는 세대의 반성
영화는 그의 빈티지한 카메라 상점같은 토니의 삶에 집중한다. 평범하지만 치기어렸던 청소년시절, 거기서 만난 반짝이던 별과 같은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6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대학생 시절, 그곳에서 그가 여전히 카메라를 놓지 못한 이유가 된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가족과 운명적인 만남을 나열한다.  홀로 출산을 앞둔 만삭의 딸과 말도 섞기 힘든 노땅이 된 토니에게 전달된 한 통의 소식으로 그는 망각의 그 역사 속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현재의 토니와, 그 전처와 딸과의 관계, 즉 해체된 가족과 그 가족에서 놓여난 가장의 모습에 영화는 촛점을 맞춘다. 그에게 배달된 '과거'는 굳은 살이 베겨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꺼내들게 만들고, 자신을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60년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난 베로니카, 하지만 그녀를 따라서 간 그의 집에서 만난 그녀의 가족들, 영화는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지적인 대화'와 여자 친구의 어머니 그 이상인 분위기의 사라(에밀리 모티머 분)를 통해 청춘의 잔해를 설명한다. 그리고 전해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 그리고 그의 비극적 결말. 

토니의 기억 속 과거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된 사라의 죽음과 그녀가 그에게 전해주려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통해 토니는 자신의 빠뜨렸던 젊은 날의 역사 속 행간을 더듬어, 비겁하고 치졸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목도하고야 만다. 토니의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가는 영화는 '토니'의 '가족 영화'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비겁했던 과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제서나마 가족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가장이라는 '가족 영화'의 전형적 구조를 따라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리고 영화와 소설의 범주가 궤를 달리한다. 소설속 청소년 에이드리언이 역사 선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저 다른 역사적 시각이 아니다. 우리가 이른바 상식이라, 객관이라 말해지는 바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고 그건, '객관'이 된 세대, 그리고 삶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황망한 반전으로 등장했던 에이드리언의 삶은 그리고 그게 제기했던 그 객관에 대한 도전, 그는 삶조차 의도했던 그러지 않았든 그 시대가 객관적으로 예단한 삶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그런 에이드리언의 맞은 편에 토니가 있다. 영화 속 토니, 그는 노땅이 된 고집불통 할아버지, 하지만 그는 60년대에 청춘을 보내 세대의 전형이다. 자유분장한 사고를 하며, 그못지 않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던, 하지만 그는 베로니카의 당당함과, 부유하고 지적인 그녀의 가족들 앞에 위축돠고, 그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비겁했던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그 졸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행간에 지운 채, 자신의 세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줄리언 반스가 토니에게 보낸 과거의 기억은, 그저 토니라는 노인이 아니라, 60년대 세대에게 보낸 회한의 반성문이다. 즉 이제는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라며 저물어 가는 기성 세대, 그 행간의 비겁을  토니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 작가의 시대적 야심은 하지만 영화로 오면, 같은 이야기인데 개인사, 혹은 가족사의 범주로 국한된다. 무엇보다 토니, 베로니카, 그리고 그의 가족, 에이드리언의 이 복잡 미묘한 우정, 애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계급과 사상의 범주를 영화는 '스캔들'의 차원으로 치환시켜 아쉬움을 남긴다. 아버지의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반성을 이야기하지만, 소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같지만 다른 범주와 빛깔의 이야기들이다. 
by meditator 2017. 9. 8.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