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5일부터 <드라마 스페셜>은 2013 극본 공모 당선작 4편이 연달아 방영된다. 그 중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유정희 극본, 이응복 연출의 <꿈꾸는 남자>이다. 


'인물들의 치열한 부딪침 속에서 인간의 본성의 처절함을 이야기하겠다'는 취지를 내보인 <꿈꾸는 남자>는 그 치열함의 가운데 서있는 주인공으로 준길(양진우 분)을 내세운다. 준길을 결혼을 앞둔 평범한 제과 회사의 회사원이다. 하지만 평범한 그를 비범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그가 꾸는 꿈이다. 그는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반드시 일어나게 될 '죽음'을 꿈꾼다. 그러나 그런 꿈을 꾼다고 준길이 어떤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남들과 다르지 않은 척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수퍼마켓 여사장 순애(윤세아 분)를 만난 순간 준길은 놀란다. 바로 그녀가 그의 꿈속에서 살해를 당하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잔인하게 살해 당하고 손가락의 반지를 뺏기 위해 손가락마저 잘리는 그녀를 외면하려 했지만 준길은 자꾸만 그녀의 삶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도박하는 남편에게 돈을 빼앗기는 그녀를 돕고, 아이를 보고 싶어하는 그녀를 위해 직접 차를 몰아 시골에 데려다 준다. 꿈 속에 그녀가 살해 당하는 것을 막겠다는 막연한 의도에서 시작된 그의 행동은, 점점 더 순애에게 집착하고, 결국 그녀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청첩장을 돌리는 것만 앞둔 결혼도 깨고, 자신의 전세금을 빼서 그녀의 남편에게 주고 순애를 자유롭게 해주려 한다. 


하지만 그의 전 재산을 그녀 남편에게 주어도 그의 꿈은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흙구덩이 속에서 정신이 든 그녀를 꿈 속의 살인범은 잔인하게 목을 조를 뿐. 
악몽에서 헤어나오기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그녀을 구하기 위해, 그는 마지막 수단을 강구한다. 꿈속의 살인범이라 생각한 그녀의 남편을 그 스스로 먼저 처단하는 것.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경마장에서 실의에 빠져있는 순애의 남편은 순순히 준길의 꾀임에 빠져 약을 먹고, 결국 준길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 남편을 죽이고 그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순애로 부터 남편의 핸드폰으로 걸려 온 전화. 순애는 말한다. 준길과의 사이는 신경쓸 정도가 아니었다고, 다시 함께 시작하자고. 그녀의 다시 시작하자는 목소리에 준길은 분노가 솟구쳐 소리치고 얼떨결에 집어 던진 자신의 짐 속에서 꿈 속의 살인범이 쓴 모자를 확인한다. 꿈 속에서 순애를 죽인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바로 지금처럼 배신감에 치를 떨다 못해 순애를 죽인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준길은 경찰서로 달려간다. 그리고 자신을 가둬달라 애원한다. 자신이 꿈을 실행할 수 없도록. 

준길의 행동을 규정하는 건 두 가지이다. 사랑이라 생각한 그의 집착, 그는 순애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걸고, 남편을 죽이기 까지 한다. 
또 하나 그를 지배하는 건 그의 꿈이다. 그로 하여금 잠 못이루게 만드는, 그를 현실과 꿈의 세계에서 헤매게 만든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서로 얽혀있다. 그는 꿈을 꾸고, 꿈을 꿈에도 꾸지 않은 듯 살아가려 하지만, 꿈 속에 만난 그녀를 만나며, 꿈 속의 결과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버린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가 꿈을 꾸는 이유를 설명치 않는다. 그저 그는 꿈을 꿀 뿐이다. 드라마 내내 그의 행위의 추동 원인은 헷갈린다. 그를 괴롭힌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인지, 마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헷갈리는 것처럼, 준길은 꿈 속에서 본 그녀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 드라마가 내건 반전 역시 그런 선상에서 이어진다. 꿈에서 자유로워 지는 선택 대신, 그는 자신을 영원히 꿈 속에 가두고자 한다. 그것은 동시에 현실에서 허무하게 깨져버린 사랑의 환상 대신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꿈꾸는 남자>에서 사실은 그의 사랑도, 그의 꿈도 그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가장 평범했던 남자 준길은, 비정상적인 꿈과 사랑에 매료(?)되어 자신을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기에 가장 쉽게 빠져드는 욕망과 본성의 지름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같은 연출가의 작품이라서 일까, 작가가 다름에도, <꿈꾸는 남자>에서서는 어딘가 드라마<비밀>의 향기가 난다.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에서 시작되어 치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마무리 되었던 <비밀>처럼, <꿈꾸는 남자>도 자신의 꿈을 쫓아가는 스릴러로 시작하여 유부녀 순애와의 치명적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비밀>도 재벌집 아들과 가난한 여주인공의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드라마의 흔한 요소는, 여주인공의 약혼자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라는 신선한 포장을 거쳐, 매력적인 스토리의 이야기로 변신하였다. <꿈꾸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남편에게 학대당하는 유부녀에 대한 측은지심에서 시작된 중독적 사랑에, 남자의 운명론적인 꿈이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거기에 남자의 마지막 선택이란 반전 데코레이션까지. 하지만 <비밀>도 막상 보고나니 결국은 사랑 이야기였어 하는 싱거움을 버리지 못했듯이, <꿈꾸는 남자>도 약간은 과대포장이 된 듯한 싱거움을 숨길 수는 없다. 그것이 단막극으로서의 앞뒤 뭉턱 자르고 대뜸 꿈부터 꾸고 보는 설정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면 여운의 미인지, 그도 아니면 결국은 뻔한 스토리에, 반전이라기엔 황당한 결론이었는지, 막상 다보고 나면, 신선한 시도이긴 한데, 극본 공모작이라기엔 어쩐지 새로운 이야기같지는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by meditator 2014. 5. 26. 07:32

23일 기자협회와 pd 협회의 제작 거부로 <취재 파일 K> 대신 재방영된 <소문난 삼형제>에서는 강원도 덕실리에 사는 백발의 삼형제가 소개되었다.  그 중 가장 큰 형인 최돈춘 옹은 올해 나이가 무려 103세이지만, 여전히 스스로 농사일을 짓고, 돋보기 없이 신문을 볼 수 있는 노익장을 과시한다. 실제 연구 결과에서도 나타나는데, 똑같은 치매를 앓아도 도시 노인들이 급격하게 생활력을 잃어가는 등 증상의 심화를 겪는 반면, 농촌에서 사는 노인들은 대부분 약간의 기억 상실 등 약한 증상을 겪으며 일상 생활에 큰 지장없이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똑같은 병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증상과 결과를 나타내는 차이를 보여주는 이유를 바로 <소문난 삼형제>의 최돈춘 옹이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삼형제의 맏이로, 아들이 없는 며느리와 함께 사는 집안의 가장으로 삶의 몫을 수행해 나가고 있는 최 옹의 삶이 바로 그것이다. 나이를 잊고 나이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최옹 삶의 비밀을 <EBS다큐 프라임>은 다시 한번 증명해 낸다. 


5월 25일 8시부터 연달아 방영된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 3부작은 이미 20113년에 방영되어 화제가 되었고, 그 결과물이 2014년 책으로 발행된 작품이다. 하지만 5월 19,20,21일에 다시 한번 방영되었고, 그 종합편이 25일 연달아 재방영되었다.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3부작의 학문적 근거가 되는 것은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앨런 랭어 교수의 연구이다. 1979년 7,80대 여덟 명의 노인들을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 이십년 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데리고 간 연구팀은 1959년이 고스란히 재현된 마을로 데려가 생활하게 하고, 그들의 신체 나이와 지능을 50대로 되돌리게 만든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이런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앨런 랭어 교수는 하버드 대학의 종신 교수가 되었고, 그 결과물을 [마음의 시계]라는 책으로 펴내 전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EBS다큐 프라임-황혼의 반란>3부작은 바로 이 앨런 랭어 교수의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를 재현한다. 
자신의 영역에서 그 누구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노인 8명, '노랸 샤스의 사나이'의 주인공 한명숙, 코미디계의 대부 남성남, '오발탄'의 성우 오승룡, 1세대 프로레슬러 천규덕, 한국의 오드리 햅번으로 불리던 하연남, 최초의 상업 사진 작가 김한용씨까지 7,80대의 노인 여덟 명의 시계를 7일 동안 30년전으로 돌리는 실험을 감행한 것이다. 




실험의 내용은 간단하다. 노인들 자신은 1982년에 있으며, 그 시대에 맞게, 즉 그 또래 나이에 맞게 말하고, 생각하며, 스스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은 한명숙씨의 나레이션, '나는 마흔 여덟입니다'를 시작으로 삼십년전으로 돌아간다. 함께 그 시절 인기를 끌었던 <전원일기>를 시청하고, 그 시절의 신문과, 그 시절에 배달되던 우유를 만난다. 당연히 오늘날의 문명의 이기인 휴대전화 같은 건 쓸 수도 없다. 

당연히 노인들은 혼란을 겪는다. 현재 익숙했던 물건들을 쓸 수 없는 것에서 부터, 노년이 되어 늘 누군가에게 의탁해 왔던 삶을 삼십년 전으로 돌린다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이다. 또한 삼십년 전처럼 활동하기 위해, 그 시절의 무대에 다시 서는 등 시도를 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혼자 활동해야 하는가 싶었는데 느닷없이 등장한 자원봉사자들에 노인들의 결심은 흔들리고, 함께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 사이에 고성이 오갈 정도로 의견이 갈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혼돈스러운 시간을 견딘 7일 후 여덟 명의 노인들은 놀라운 결과를 맞이한다. 무엇보다 여덟 명의 노인 중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걸음을 걸을 수 있었고, 기억력이나 인지 능력이 많이 떨어져 보이던 한명숙씨는 겨우 7일 만에 지팡이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되고, 서예를 배우는 등 삶의 의욕을 보이게 되었다. 시간 관념이 희미해졌던 하연남씨는 이제 더 이상 지각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우울증' 등에 시달렸던 노인들은 웃음과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물론, 이런 <황혼의 반란>의 결과가 단지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한명숙씨처럼 오로지 홀로 견뎌야 하던 노년의 삶이 여덟 명이 함께 사는 공동체 라는 삶의 조건과,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젊은 자원 봉사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노년의 외로움을 덜어 주었기 때문에 오는 '플라시보' 효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떤 의학적 시술이나, 건강 제품이 아닌, 오로지 마음의 시계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삶의 긍정성을 되찾는 이 실험은 경이롭다. 실제 7일간의 실험을 통해 여덟 명의 노인들은 신체, 정신 기능 뿐만 아니라, 피부까지 좋아지게 되었다. 우리가 늙는다는 건, 어쩌면 진짜 늙음에 앞서, 나이듦에 포기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될 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이 실험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술이나, 명약이 아니라도, 돈없이도 얼마든지 시간을 거스르는 마법, 그것은 생각 외로 명쾌하다. 마음에 달린 것이다. 
젊은이 한 사람이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해야 하는 노년 인구 과잉의 시대, 건강한 노년의 삶은 노인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전 사회적 문제이기에, 노년의 건강한 삶의 비밀을 주체적 삶의 자세로 풀어낸 <황혼의 반란>은 그래서 더 의미가 깊다. 


by meditator 2014. 5. 26. 06:19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10회 말 마지울의 엄마를 끌고 가 어설프게 갑동이처럼 살인을 저지르려던 박호석(정근 분)은 하무염(윤상현 분)에게 잡히고,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그가 진짜 갑동이가 아니었다는 사실보다도, 오히려 그가 과거 양철곤(성동일 분)의 표적 수사로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직장도 잃고, 자신의 신상이 드러남으로써 더 이상 사회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 피해자라는 사실이었다. 갑동이가 아니었지만, 갑동이라는 의심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갑동이가 되어간 '갑동이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양철곤이 지켜보는 조사실 유리창을 깨며 절규하는 박호석에게 양철곤은 덤덤하게 '사과가 필요하면 해줄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곤 덧붙인다. "근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네 인생이나, 내 인생이나"

11,12회, 아니 그 이전 10회, 11회를 통해 알려진 것은 갑동이 사건의 진척보다, 갑동이라는 사건을 통해 양철곤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가버린 것인가이다. 멀쩡한 대기업 회사원이었던 박호석이 망상증으로 치료 감호소를 전전하고, 사회에 나와서도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만큼 갑동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듯이, 양철곤 역시 자유롭게 사회 속에서 숨을 쉬고 사는 듯하지만, '갑동이'라는 그가 만들어 놓은 감옥에서 자유롭지 못한채 십 여년을 보내고 있다. 
갑동이를 잡는 과정에서 하무염의 아버지를 보고 놀라서 낙상한 딸이 식물인간처럼 스물 다섯의 나이에 숨을 거두기까지 아버지로서 양철곤은 며칠을 딸과 함께 보내지도 못했다. 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책과 원망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딸을 지킬 수 없게 만들고 갑동이에게 헤어날 수 없게 만들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갑동이를 잡기 위해 정직 중에 홀로 기다리던 제방에서 그를 갑동이로 오해하고 달아나던 중년의 여인을 그 역시 갑동이로 오해하고 쫓다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죽인 여인에게 갑동이가 자신의 표식을 남김으로써 양철곤은 졸지에 일곱 번째의 갑동이가 되어 버렸다. 갑동기를 쫓다, 스스로 갑동이가 되어버렸으니, 더더욱 갑동이를 잡기 전에는 갑동이를 놓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사진; 뉴스엔)

그러기에 양철곤은 더 이상 망가지기 전에 갑동이 잡는 일에서 놓여나라고 하무염에게 말한다. 하지만, 하무염 역시 그럴 수 없다. 아버지를 의심해서 유일한 아버지의 무죄 증거였떤 잠바를 태워버린 하무염은 아버지를 의심했던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듯이, 갑동이에게 놓여날 수 없다. 그런 하무염에게 동정을 하다, 이제 사랑을 하게 된 오마리아(김민정 분) 역시 다르지 않다. 그녀는 말한다. 더 이상 도망가지 않겠다고. 양철곤이든, 하무염이든, 오마리아든 모두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기 위해서, 혹은 극복하기 위해서 갑동이를 잡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갑동이는 달랐다. 다른 연쇄 살인범들이 결국 자신의 범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범죄를 거듭하다 잡히고 말았지만, <갑동이>에서 갑동이는 9차를 끝으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다. 갑동이의 카피 캣인 류태오는 자신 역시 자신의 범죄를 더 이상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 들지만, 결국 비행기에서 우발적 범행을 저지름으로써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자신의 본능을 제어하지 못하는 카피 캣을 그려냄으로써, 갑동이가 '갑'이라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이 그를 쫓는 과정에서 생긴 트라우마와 죄의식에 짖눌려 그를 잡기 위해 세월을 팔고 있는데도, 갑동이만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만이 자신의 과거에서 자유롭게, 전혀 다른 얼굴로,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로 드라마는 그리고 있다. 

12회 마지막, 범죄 현장이었던 제방길에 수사반의 차도혁(정인기 분)이 얼굴을 드러낸다. '꼭꼭 숨어라'를 휘파람으로 불며. 그가 진짜 갑동이일지도 모른다는 12회의 엔딩에 시청자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철곤을 비롯하여 극중 인물들이 갑동이에 헤어나오지 못한 채 세월을 파먹는 동안, 오로지 갑동이만이 그 예전 양철곤이 7차의 범죄자가 되어가는 동안 몸을 숨기며 그를 지켜보았듯, 그들의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아니 차도혁이 아닐 수도 있다. 오마리아에게 진범을 인식하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자 안도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갑동이 일 것 같지만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갑동이>는 갑동이가 나올 때까지는 갑동이라 확신할 수 없다. 여전히 <갑동이>는 또 다른 카드를 가지고 있다. 뜻밖에도 '소아성애자'라는 조사 결과가 나온 오마리아의 양아버지 프로파일러 한상훈(강남길 분)도, 가장 인자한 스님의 얼굴을 하지만, 언제나 사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진조(장광 분) 스님도 갑동이일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있다. 

하지만 그 누가 진짜 갑동이가 되었든 <갑동이>에서, 갑동이가 갑이다. 그만이 홀로 갑동이의 사건에서 쏙 빠져 나가 유유자적 또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드라마 <갑동이>는 갑동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에서 갑동이 망상자가 되어 살인까지 저지르려던 박호석처럼, 갑동이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그리고 이제는 갑동이를 잡아야만 거기서 놓여날 수 있는 '미망' 속의 인물들을 그려내는데서 여전히 머물고 있다. 


by meditator 2014. 5. 25. 12:54

5월 24일 방영된 <정도전>에서 정몽주는 임금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가 병중에 있는 동안 정도전을 없애고, 그와 함께 그들이 추진려던 역성 혁명의 싹을 짤라버리려던 정몽주였다. 하지만, 그런 정몽주의 시도가 이성계가 정신이 돌아오자 마자, 정도전의 처형을 미루는 것으로 시작하여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게 되려는 찰라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을 알면서도 정몽주는 무장한 장수들과 군사들이 겹겹이 애워싸고 있는 이성계의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놓을 수 없다. 자신과 정도전 중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칼을 들이미는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눈물로 읍소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왕이 된다고 해서 권세를 누리려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것을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맡기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애닳게 잡은 이성계의 손을 정몽주는 밀어낸다. 그리고 돌아가 정도전을 처형하겠다고 단언한다. 그런 정몽주에게 이성계는 이제 당신과 절연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정몽주에게 연연해하는 아버지를 답답하게 여긴 이방원은 지필묵을 가지고 정도전을 찾아간다.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하지만 정도전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당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고 초조해 하는 이방원에게 정도전은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며, 정몽주를 제거하면 자신들의 혁명은 정당성을 잃게 되는 것이라며 이방원의 청을 물린다. 

그런 아버지와, 정도전의 태도를 우유부단함으로 여긴 이방원은 결단을 내린다. 정몽주를 청해 그 유명한 '이런 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의 하여기를 통해 설득을 하고, 그에 정몽주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의 단심가의 화답을 받고,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선죽교 다리 위에서 죽여버린다. 영문도 모르고 감옥에서 나오던 정도전은 정몽주가 죽은 것을 알고 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한다. 이성계도 마찬가지다.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포효한다. 어떻게든 피를 덜보고, 정당성을 놓치지 않고, 민심을 얻으며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던 정도전과 이성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정도전 정몽주 단심가
(사진; tv데일리)

39회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의 유동근이 정몽주 역의 임호의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모습은, 그 어떤 드라마의 애정씬 못지않게 간절했다. 역대 어느 드라마의 남녀 배우가 이렇게 간절하게 등을 돌린 연인을 향해 진심어린 애원을 했을까 싶다. 하지만, 그런 장면이 <정도전>을 지켜본 시청자들에게는 전혀 오글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계의 진심으로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주군으로 모시고 역성 혁명을 도모하지만, 이미 그 이전에 이성계와 정몽주는 고려의 개혁이라는 뜻을 같이했던 정치적 동지였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도 마찬가지다. 아니 오히려 정치적 은인에 가깝다. 세상이 아직 이성계와 정도전을 알아보기 전부터, 정몽주는 그들을 알아봐주고, 그들의 뜻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정치적 행동을 했던 동지였다. 그런 정몽주였지만, 오랜 정치적 행보의 끝에 이제,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는 궁극의 입장에서 이성계와 정도전, 정몽주는 뜻을 달리한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역사 이야기 속에서 정몽주는 그저 선죽교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고려의 충신일 뿐이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그런 모습이 드러났다. 정적들을 제거하고 승전보를 울리고 돌아온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라는 건의를 한 반면, 같은 글자에서 시작한 정몽주는 전혀 다른 충성 충(忠)자를 새겨 고려라는 테두리를 이성계에게 각인시켰다. 물론 드라마에서 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미 토지 제도를 둘러싼 유학들의 대립에서, 대지주 출신의 이색 등이 토지 제도 개혁을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지주 계급 출신의 정몽주 역시 그런 자신의 출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강직한 유학자였던 그가 유학자로서의 역성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옳고 그르고는 고려의 멸망이, 그리고 조선의 건국으로 증명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성계의 표현대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을 리가 없을 진대, 대들보가 썩어버린 고려를 붙들고 있었던 그의 신념은 우매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결과일 뿐이다. 당대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정몽주의 신념과 행보는 드라마<정도전>을 통해 보면 충분히 그럴만한 설득력을 가진다. 자신이 몸담았떤 시대를 쉽게 지워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정몽주를 통해 우리는 이해하게 된다. 

충신으로서, 혹은 계급적, 사상적 한계를 넘지 못한 사람으로서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그 어떤 한 측면에서 규정짖지 않고, 그 시대를 살아간 한 명의 생생한 캐릭터로서 부각시킨다. 강직한 유학자였지만,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 그 역시 정도전이 그랬듯, 스스로 정치적 모든 수단을 도모하여야만 했던 인물, 그러나 무력을 장악한 이성계 세력에게 자신들이 역부족이라는 것을 절감했던 인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절친이었던 정도전과, 정치적 동지였던 이성계의 간청을 밀어낼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시대를 넘어설 수 없었던 보수주의자 정몽주를 드라마 <정도전>은 살려낸다. 그래서 그저 선죽교의 지워지지 않는 붉은 피로만 기억되었던 고리타분한 역사 속 위인은 고려말 격동기를 자신의 목숨을 다해 신념을 지켜내려 했던 인물로 되살아 났다. 간신 이인임을 권문 세족의 대표이자 정치적 실권자로서의 노회한 이인임으로 살려낸 데 이은, <정도전>의 또 하나의 성과이다. 


by meditator 2014. 5. 25. 02:31

1997년 11월 23일부터 2001년 11월 4일까지, 대한민국의 고도 성장기에 그 시대적 담론에 걸맞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바로 <성공시대>였다. 그로부터 십여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고도 성장을 거듭하던 나라도 아니고, 그 시절처럼 '성공'이 시대적 화두가 되지도, 될 수도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절 성공시대를 거쳤던, 혹은 전설이라 불리울 정도의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되었던 인물들은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mbc에서 새롭게 선보인 <전설의 비밀>은 바로 그 전설이라 불리워졌던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를 다시 한번 불러낸다. 


첫 회 <전설의 비밀>에서 불러낸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198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입단, 가장 많은 커튼 콜을 받은 프리마돈나 강수진과 88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김재엽, 대우 전자 사장으로 탱크주의 광고를 통해 더 잘 알려진 배순훈 씨이다.  mc를 맡은 이성재가 각가 이 세 사람을 찾아가고, 인터뷰와 함께, 이미 전설로 알려진 이후 이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사진; 뉴스엔)

<전설의 비밀>의 제작 방식은 <성공 시대>의 그것과 흡사하다.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성공 시대>가 변창립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에 의해 진행되었다면, <전설의 비밀>은 이성재의 인터뷰라는 방식의 변형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용은 <성공 시대>와 흡사하다. 강수진 편에서 그녀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시절의 활약상, 김재엽 편에서 그의 88올림픽 금메달 수여식, 대우전자 시절의 배순훈 사장의 광고 영상 등 과거의 영상이 소개되고, 역시나 <성공 시대>처럼 김재엽의 중학 시절, 배순훈 사장의 대우 전자 사장 시절이 재연 드라마의 형식으로 삽입된다. 

하지만, <전설의 비밀>은 그저 예전처럼 그들이 어떻게 성공했는가에 촛점을 맞추지 않는다. 강수진의 경우 수투트가르트 발레단 무용수에서 국립 발레단의 단장으로, 김재엽의 경우 국가대표 유도 선수에서 갖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동서울대 경호학 교수로, 이제 70이 넘은 배순훈은 창원 S중공업의 무보수 사장으로 지내는, 전설이 된 이후의 삶에 대해 조명한다. 
각자 보여주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 강수진의 경우, 왜 국립 발레단의 단장을 선택하게 되었는가 라는 결심 과정을 인터뷰하고, 단장이 되었음에도 은퇴를 2016년으로 정한 채 여전히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마흔 후반의 발레리나의 분주한 나날을 보여준다. 
제2의 인생이라도 김재엽은 전혀 다르다. 어린 시절 악동에서 국가 대표 유도 선수가 되기 까지의 우역곡절이 많았듯, 유도 금메달리스트에서 마사회 유도 코치, 그리고 파벌 파동을 겪으며 유도계에서 퇴출당하며 자살의 고비까지 겪은 그가 경호과 교수라는 새로운 인생을 회복하기 까지의 인생역전을 재연해 낸다. 배순훈씨의 경우, 대우 전자가 망한 이후, 김대중 정부의 정보통신부 장관을 거쳐, 국립 현대 미술관 관장, 이제 다시 무보수 사장에 이르기까지 70이란 나이가 무색하게 도전을 멈추지 않는 말 그대로 창조적 인생에 촛점을 맞추고, 거기에 덤으로 젊은이들에게 들려주는,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성공 비법을 찾으라는 멘토링까지 얹는다. 

김재엽 한국유도 파벌논란 언급 전설의 비밀
(사진; tv데일리)

'성공'이 화두가 되었던 시대의 전설이 되었던 이들은 그 이후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순조롭게 프리마돈나로서 화려한 삶을 이어가고, 그 여파를 몰아 국립 발레단 단장까지 되었는가 하면, 죽음의 문턱에 이를 정도로 자신의 꿈이었던 유도는 물론, 그 대신 선택해던 사업조차 철저히 실패를 거듭한 김재엽도 있다. 늘 새로운 도전을 하지만, 개인적 발언이 정부의 입장과 달라 정보통신부 장관직 임명 1년도 안돼 사임을 하고, 그리고 국립 현대 박물관장이 되어서도 국회 청문회 발언과 태도 논란으로 인해 정작 국립 박물관 개관식에 내빈으로 초대 되어야만 하는 풍파를 겪기도 한다. 물론, 제목이 전설이듯이 여전히 그들은 또 하나의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 성공은 90년대가 추구했던 수직적 상승 곡선의 성공과는 느낌이 다르다. 전설이지만, 마치 이제는 거울 앞에선 누님처럼, 전설의 자리에 등극한 이후 각자 저마다의 분야에서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워온 시절이 훈장처럼 드리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전설의 비밀>은 전설의 자리를 지기키 위해, 혹은 전설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노력해온 이들의 성공담으로 2014년판 <성공시대>라 할만하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그 시절 <성공시대>처럼 겉훑기식 성공담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조금 더 21세기에 어울리려면, 예를 들어, 국립 현대 박물관장직을 그저 신선한 도전이 아니라, 낙하산 임명을 슬쩍 짚고 넘어갈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터뷰의 내용으로 삼아 배순훈 사장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았을 것이다. 국정 감사장의 태도 논란을 이제 와 터놓고 이야기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야 또 하나의 성공 시대가 아니라, 고비를 넘겨서도 여전히 탱크처럼 추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의 멘토로서의 진면목을 읽어낼 수 있고, 뻔한 성공담을 넘어선 공감을 얻을 것이다. 

좀 구태의연하면서도, 전설로 여겨지던 이들의 후일담을 보는 면에선 신선했던 <전설의 비밀>은 그래도, 지난 몇 주간 목요일 그 시간을 채웠던 예능 프로그램들에 비하면 한결 충만하다. 타 프로그램과의 시청률 경쟁을 넘어, 좀 더 유의미한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전설의 비밀>은 꽤 유익했으며 타 방송의 예능과의 차별성도 분명했다. 지난 몇주간 mbc 프로그램 중 굳이 한 표를 던져야 한다면, <전설의 비밀>에 한 표를 던지겠다. <성공 시대>전설들의 후일담은 나름 무궁무진할 테니까.


by meditator 2014. 5. 23. 07:59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던가, 더구나 그것이 자기와 다른 이성의 속일 때야 더더욱 알 길이 없으니, 마치 자기와 다른 별에서 온 사람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이성의 속내를 알기 위해 청춘들은 이제 텔레비젼 앞으로 모여든다. 연애 코칭 프로그램 <마녀 사냥>이 인기를 끌자, 우후죽순 그와 비슷한 컨셉의 프로그램 들이 등장하고, 그 중 <로맨스가 더 필요해>가 걸출한 입담을 가진 패널들의 포진으로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지극히 사적인 연애를, 결국은 또 하나의 사적인 잣대로 재단하는 <로맨스가 더 필요해>가 과연 정말 바람직한 연애 코칭 프로그램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5월 21일 방영된 <로맨스가 더 필요해>에서는 역시나 <마녀 사냥>처럼 자신의 연애를 상담하는 시청자의 사례가 등장했다. 7년간 남자 혼자 여자를 짝사랑하다 뒤늦게 사랑의 결실을 맺은 남녀, 하지만 막상 연인이 되어보니, 이 남자 친절하다는 표현을 넘어선 집착이라고 보여지는 행동들이 여자에게는 거슬리기 시작했다. 회식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건 혼자 밤길에 위험해서 그렇다 쳐도, 여자의 sns까지 속속들이 들여다 보며 과거 그녀가 사귀었던 남자들을 샅샅이 조사하는 행태는 과연 이 사람이 정상일까 란 생각이 든다는 것이었다. 

그런 여성의 질문에 대해 패널들은 다양한 의견을 내놓았는데 대체적을 남성 패널과 여성 패널의 의견이 갈린다. 
남성들 중 조세호는 마치 상담 사례를 보낸 여성의 상대방 남성이라도 되는 양 얼굴이 붉어지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그럴 수 밖에 없는 남성의 입장을 대변한다. 봉만대 감독은 한 술 더 떠서 '집착도 사랑이다'라는 정의를 내세우며 그의 집착이 당연히 연애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행동이라 편을 든다. 다른 남성 패널들도, 그 정도는, 혹은 남성의 집착은 있을 수 있는, 혹은 남성에게는 연애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행동이라는 반응이었다.

(사진; 마이데일리)

반면에, 라미란을 비롯한 여성 패널의 의견은 그와 궤를 달리한다. 물론 mc 박지윤은 자신의 사례를 들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경우라는 생각을 피력하면서도, 여성이 불편을 느낄 정도라면 결혼 상대로는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한다. 그에 반해 라미란은 한결 완강하다. 그것은 사랑으로 덮어주기에는 지나친 집착이며,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용인한다면, 결혼을 해서도 그녀는 그의 의견에 무조건 맞춰주고 살아야 하는 처지에 빠질 것이라 단언한다. 

물론 <로맨스가 더 필요해>에서도 이른바 전문가의 의견이 있다. 좋은 연애 연구소 소장 김지윤은 그런 남성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것을 짚고 넘어갔다. 하지만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고, 마치 자신이 그 남성이라도 된 양 목소리를 높이는 조세호 등의 공세에, 전문가의 의견은 힘을 잃는다.

결국 마치 여성편 남성편이 되어 의견이 갈린 듯한 이 사례는 패널들의 투표로 5;5 라는 동률의 결과로 마무리 되었다. 물론 몇 가지 사례의 첨언이 있었지만, 마치 그런 남성의 이상 행동은 위험하다기 보다, 사랑에 못이긴 집착으로, 하지만 좀 지나치긴 하다는 식으로 마무리 되었다. 과연, 이 사례가 여성과 남성의 입장 차이로, 투표로 결정될 그런 사안이었을까?

이렇게 물에 물탄 듯 마무리 된 이 남성의 사례를 바로 한 주 전에 방영된 < 매직 아이>에서는 바로 요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한 사례로 정의내린다. 남녀간의 사이에서 바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지 않는 이러한 '집착'이 때로는 신체적 상해나 심각하게는 살인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을 짚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미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데이트 폭력의 징조로 보여지는 남성의 이상 집착에 대해, <로맨스가 더 필요해>는 안일한 태도로 일관한다. 특히, 남성 패널들은 마치 그런 것이 남자들이라면 한번씩은 겪는 것인 것마냥 당연시하기도 한다. 라미란이 정색을 하고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김지윤이 문제 행동이라 짚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여자들의 하나의 의견처럼만 수렴되는 식이다. 

만약에 <마녀 사냥>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사례에 대한 접근은 흥미 위주로 들어가되, 진단과 처방에 있어서는,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지점을 똑바로 짚었을 듯하다. 성시경이나, 허지웅이 남자라고 해서, 자신들의 습성이나, 과거에 그런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런 남성을 편들지 않을 것이며, 이른바 전문가연 하는 곽정은은 외국의 진짜 전문가와 통계까지 들먹이며 제 아무리 연애라 해도 상대방의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침범하는 행동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마무리를 분명하게 지어주었을 것이다. 

<로맨스가 더 필요해>와 <마녀 사냥>이 비슷한 연애 코칭 프로그램처럼 보여지지만, 그렇다고 <마녀 사냥> 역시 객관적인 연애 코칭을 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지만, <로맨스가 더 필요해>처럼 분명히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 조차, 남성들의 관성이나 관습에 맞춰 두둔하는 식의 관성적 태도를 견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두 프로그램의 차이는 확연해 진다. <로맨스가 더 필요해>는 사안의 객관적인 접근은 물론, 독립적 존재로서의 개인에 근거한 중립적 태도보다는, 이번 사례처럼 집착의 정도가 지나친 경우에는 조세호의 입장이, 시댁과의 관계에서는 박지윤의 경험이, 혹은 감독 봉만대의 시각이그 사안의 객관적 접근을 넘어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것은 엄밀하게 연애 코칭이 아니라, 동네 아줌마의 사적 경험에 근거한 훈수 두기 수준이 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가진 아줌마를 만나면 이런 훈수를, 저 아줌마를 만나면 저런 훈수를 두는 이현령 비현령의 결과가 되고 만다. 

물론 <로맨스가 더 필요해>건, <마녀 사냥>이건, 애초에 패널 개인의 사적 경험에 근거한 누군가의 연애 코칭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이라는 공중의 전파를 이용하는 프로그램인 한에서, 적어도 최소한의 사회적 시각은 견지해야 하지 않을까. 제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찜질방 동네 아줌마 수준이어서는 곤란하다. 아니다. 요즘 동네 찜질방 아줌마들도 라미란씨처럼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그런 남자는 위험하다고. 자신들의 찌질함과, 사회적 문제 행동이 구분되어 지지 않는 지극히 사적인 연애 코칭은, 그래서 더 위험하다. 


by meditator 2014. 5. 22. 08:44

공교롭게도 공영방송 kbs2의 월화 수목 드라마는 복수를 꿈꾸는 남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5월 20일 방영된 <빅맨> 8회,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 두 장의 유전자 검사서를 손에 쥔 강지혁(사실은 김지혁, 강지환 분)은 소미라에게 달려간다. 세상 그 누구도 믿지 못해도 당신만을 믿을 만하다고 했던 소미라가 김지혁에게 전해준 말은 '미안하다'였다. 달려온 김지혁에게 강동석(최다니엘 분)은 말한다. 원래 가진 것이 없었던 당신은 그저 잠시 가졌다가 다시 빼앗겼을 뿐, 원래 잃은 건 없지 않냐고. 하지만, 김지혁은 포효한다. 절대 잃어서는 안될 걸 잃어버렸다고. 왜 나에게 가족이라고 속였냐고. 당신들에게 꼭 되갚아 줄 거라고.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김강우 분)도 마찬가지다. 은행을 다니는 아버지에게 어머니 가게 할 돈 좀 융통할 능력도 없냐며 다그치던 그가 서동하로 인한 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좌절하고 분노한다.

(사진; 뉴스엔)

<빅맨>의 김지혁과 <골든 크로스>의 강도윤은 그저 평범한 사내들이었다. 비록 가진 건 건강한 몸 밖에 없는 김지혁이지만, 한때 몸 담았는 어둠의 세계를 벗어나 시장 사람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려던 사람이었다. 강도윤 역시 마찬가지다. 얼른 검사가 되어 고생하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잘 살아보겠다는 꿈에 부풀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자기 가족의 안위만을 챙기는 재벌가의 이기심이, 상위 1%의 커넥션 안에서 재미 좀 보려던 경제계 관료의 삐뚫어진 행태가 그를, 그의 가족을 희생으로 삼는다. 
누군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그저 평범하게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이나 챙기며 살았을 그들이 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이기적 행위로 말미암아 개인과 가족의 미래를 빼앗기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그저 열심히 노력하는 개인과, 화목한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여실히 증명해 낸다. 

<위험 사회>에서 올리히 벡은 오늘날의 정치는 오늘날의 사회 제도들이 양산해 내는 항시적 위험으로 인한 공포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고 있다. 가장 근자에 우리 사회를 좌절과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세월호에서 부터, 잊을만하면 우리 사회 전체를 혼돈에 빠뜨리고 마는 각종 전염병, 핵 등으로 인한 재해 등이 단지 우연히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근거로 한 근대적 체계의 불가피한 산물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위험 요소들에 무방비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됨으로써, 그런 공포가 사람들을 자각하게 만들고, 21세기의 정치적 시민으로 거듭나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게 <위험 사회>의 정치적 시민의 자각 과정은 <빅맨>과 <골든 크로스>의 분노와 유사하다. 원자화된 개인이나, 전근대적인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온하게 살 수 있을거라는 개인들이, 자신들에게 닥쳐 온 자신들의 힘으로써는 어쩌지 못할 구조화된 제도를 등에 업은 기득권 세력의 이기주의로 말미암아 위험에 빠지게 된다. 당장 그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또 다른 개인들의 이기주의처럼 보이지만, 진실에 다가갈 수록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들을 '소외'시키고 '희생'시키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형태이다. 희생자였던 김지혁이 오히려 재벌 아들 강동석을 대신하여 검찰에 체포되고, 사기범으로 몰리며, 그 과정에서 철저히 검찰과 변호사는 현성 그룹의 편에 서서 진실을 왜곡하는 그 과정이나, 희생된 것은 강도윤의 동생인데 서동하의 측근 들을 통해 오히려 강도윤의 아버지가 범인으로 몰리게 되는 상황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저 '개인'이고, '가족의 일원'이었던 그들은 분노하고, 깨달으면서, 사회적 존재로 자각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진; 뉴스엔)

개인의 분노에서 출발한 <빅맨>과 <골든 크로스>는 그 개인적 분노가 그저 한 개인의 일이 아님을 드라마를 통해 착실히 밝힌다. 재벌 회장가의 자기 아들 심장을 탐하는 이기심이, 경제 기획부 금융 정책 국장의 탐욕이 상위 1%의 전횡과 부도덕의 항시적 산물임을 드러내기 위해 드라마는 골몰한다.  드라마는 많은 회차를 할애해 주인공들의 복수 이전의, 그들을 파멸로 이끈 저들의 부도덕과 전횡을 설명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우리 사회의 불균등한 부가 그저 더 가진 것에서 그치지 않고, 덜 가진 사람들의 일상적 행복조차 짓밟을 수 있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음을 드라마는 밝힌다. 김지혁과 강도윤을 덮친 불운이 그저 그들에게 닥친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든 재해가 사회적 결과물이듯이, 그들에게 닥친 불행 역시 구조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리하여, <위험 사회> 속 개인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공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정치적 개인'으로 떨쳐 일어나야 하는 것처럼, 드라마는 분노로 시작된 주인공들이 그들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는 저들의 실체를 알고, 그들을 정죄하는 과정을 환타지로써 만이 아니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을 위한 각성의 교과서로 사용하고자 한다.모처럼 공영 방송으로서 수신료의 가치를 실천한다. 


by meditator 2014. 5. 21. 10:26

<서울의 달>이 방영된 건 1994년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2014년의 <서울의 달>이라는 부제를 걸고 또 하나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JTBC의 <유나의 거리>, 무려 20여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90년대 그 시절이나, 21세기의 오늘이나 밑바닥 인생들이 사는 삶은 그리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 


서울 어느 하늘 아래 몸 부대끼며 살아가는 밑바닥 인생들의 삶을 질펀하게 그려내는 작가들이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랑>, <내가 사는 이유>, <화려한 시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까지의 노희경 작가는, 가난이라는 단어에 한 발을 담그고 사는 이웃들의 얼크러진 인생을 영상화시키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언제부터인가 노희경 드라마에서 더는 그 밑바닥 인생의 리얼리티는 점점 그 비중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이제 그의 드라마는 화려하거나 세련된 배경의 주택을 배경으로 저들의 이야기를 주로 하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고 작가의 삶도 달라졌으니,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달라진 걸 누가 뭐라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누군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여 가는 중에도 여전히,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천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우리가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김운경이 바로 그 사람이다. 

굳이 예고편에서 <서울의 달>의 홍식과, <유나의 거리>의 유나가 대화를 나누지 않더라도, <유나의 거리>에서 극중 배경이 되는 유나가 사는 다세대 주택이 등장하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예전 흥식이 살던, 아니 언제나 김운경 작가의 작품에 익숙하게 등장하곤 했던 가진 것없는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그 동네가 말이다. 

(TV리포트)

김운경 작가의 세계에서는 늘 집주인이 갑이다. 서울 하늘 아래 겨우 방 한 칸 얻어사는 사람들의 생사 여탈권을 쥔 그들이 김운경의 세계에선 재벌 회장님만큼 유세가 대단하다. <유나의 거리>에서도 다르지 않다. 유나가 세들어 사는 집주인 한만복(이문식 분)과 그의 아내는 이층 방에 세들어 살던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상황에서도 집주인의 이해 관계를 내세우며 그녀가 염치가 없다며 투덜거린다. 이런 식이다. 자신의 집에 세들어 사는 사람들을 자신의 아랫 사람 부리듯하며, 갑으로 행세한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뭐 그리 나아보이지도 않는다. 당장 다른 사람의 호주머니를 슬쩍하는 소매치기들을 소매치기 하는 유나가 드라마의 처음을 이끌듯, <유나의 거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폭 출신에 피눈물도 없어보이는 집주인의 한만복에서 부터, 형사 출신에 하도 돈을 밝혀 걸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봉달호까지 저마다 한 구석에 구린 냄새를 풍기며 그 세계를 이뤄간다. 
물론 구린 냄새만이 그들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냉큼 죽은 여자의 노트북을 챙겼으면서도, 안타까운 죽음을 한 그녀를 위해 향을 피워주고 술을 따라주는 홍계팔처럼 푸근한 사람 냄새 또한 그들의 또 다른 면이다. 일찌기 <서울의 달>에서 제비족 박선생(김용건 분)과 미술 선생(백윤식 분) 그들처럼 말이다.
서울 하늘 아래 발붙이고 살기 위해 눈 앞의 이익을 위해 파렴치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또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김운경이 1990년대에도, 그릭 2014년에도 그려내고자 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이다.

사실 <유나의 거리>는 새롭지 않다. 극중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의 구도는 <서울의 달>의 그것과 흡사하고, 주인공 유나의 설정은 이미 작가가 <도둑의 딸>을 통해 써먹었던 설정이다. 극중 등장 인물들은, 전혀 다른 직업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김운경 작가 전작 들의 그 누군가가 느껴진다. 남자 주인공 김창만에게서는 <서울의 달>의 춘섭이 떠오르고, 유나는 그 시절 홍식같기도 하다. 아니, 창만과 유나의 관계는 <서울의 달>의 홍식과 영숙의 관계가 역전된 듯하다. 어찌보면 자기 복제 같은데, 그 자기 복제를 모처럼 보니, 새삼스레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유나의 거리>의 첫 회를 보면서, 2014년에도 여전한 그 세계가, 아니 여전히 그 세계의 이야기를 뚝심있게 전해주는 김운경 작가가 어쩐지 반갑기도 하면서, 늘 넉넉하고 화려한 드라마 속 인물들에 길들여지다 보니, 새삼, 아직도 저런 세계가 있었지 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조차 느껴진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새삼스레 그려지는 여전히 존재하는 우리 삶의 언저리의 저 이야기들을 과연 상류사회의 에스컬레이팅을 시도하던 사람들의 농염한 사랑 이야기 <밀회>를 즐기던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늘 패밀리 레스토랑을 가던 입맛으로 모처럼 시장통의 순대국을 모처럼 맛보게 되는 그런 기시감이랄까, 부디 모처럼 맛보는 <유나의 거리>가 푸근한 옛맛의 향수를 넘어 이 시대의 소문난 맛집으로 등극하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5. 20. 10:21

우리가 신문 사회면이나, 뉴스를 통해 만나게 되는 어이없는 기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주차' 시비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까지 분쟁을 벌이다, 폭력을 불러오건, 심하면 상해 치사에 이르게 되는 사건들이다. 과연 이런 사건들을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그 흔한 이웃간의 각박함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드라마 스페셜-부정주차>는 바로 그런 주차 문제로 빚어지는 이웃간의 갈등 속에 숨겨진 소시민의 애환을 다룬 모처럼의 수작이다. 


35세의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노정도(온주완 분), 상식적이며 교양있는 변호사처럼 행세하고 다니지만, 시골집 아버지에게 용돈을 부쳐드려야 하는, 이제는 소형차를 몰아야 하는 처지의 월급쟁이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은 거주자 주차 구역에 당당히 차를 댈 권리와, 그런 그의 차를 함께 타고 다니는 여자 지현(장준유 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그가 내세울 유일한 권리인 거주자 주착 구역 그의 자리에 자꾸 차를 대는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그 동네를 힘으로 평정한 택시 회사 사장 안상식(김상호 분)이다. 

남자들에게 차란 무엇일까? 지난 주 수요일 <매직아이>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들에 비해 특히 더 차에 집착하는 이유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남자 객원 mc로 출연한 이적은, 남자들에게 차는 곧 자신들의 상징, 거기서 좀 더 노골적으로는 남근의 상징처럼 여겨진다는 의견을 편다. 그러기에, 남성들은 자신의 차에 어떤 위해가 가해질 경우 마치 자기 자신에 대한 해꼬지라고 한 것처럼, 심지어는 그 이상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런 심리적 근거에 더해서, 최근 빈번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주차 문제나, 아파트 층간 소음의 기저에는 바로 '재산권'의 문제가 있다. 겨우 힘들게 마련한 '나의 차', '나의 집', 바로 개인에게 있어,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를 재산적으로 증며할 유일한 근거인 그것이 위해를 입는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소유한 개인은, 또한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정체성에 위해를 입은 것처럼 분노하게 된다. 


<부정 주차>에서 노정도에게 있어 차도 그런 남성적 자존심이자, 개인의 유일한 재산권의 증거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한때 사시를 준비했지만, 지금의 처지는 겨우 자기 몸 누일 방 한 칸에, 한때 대학 선배였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인 그가, 유일하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증거가 자신의 차를 댈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거주자 주차 구역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자신의 차 대신 남의 차가 떠억하니 자리 잡았을 때, 더구나 그가 그가 사는 동네의 실세라는 이유만으로 법을 마구 무시하는 건 물론, 동네 사람들에게 이젠 은근히 민폐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노정도의 뜻모를 정의감은 분기탱천하게 된다. 그렇다고 그가 적으로 삼는 안만식이 뭐 그렇데 대단한 사람도 아니다. 동네 주민의 주차 구역에 무단 주차를 하며 행세를 하지만 택시 회사 사장이라는 그의 위세도, 결국 마지막에 가서 보여지듯이 사상누각에 불과한 처지일 뿐이다. 알량한 거주자 주차 구역 그 한 자리를 놓고, 그저 조금 더 가진 듯이 보이는 자와, 그것을 사수하려는 자의 밀고 밀리는 한 판, 그건 자본주의 사회 밑바닥 이전투구의 단면일 뿐이다. 낙수 효과는 커녕, 결국 나누어 가질 몫이 애초에 별로 없는 그 한 자리를 두고, 서로가 밀고, 밀리기 싫다며 벌이는 치킨 게임에 불과한 것이다. 

<부정주차>는 불쾌감으로 시작된 노정도의 태도가 지각을 할 지언정 차를 두고 출근하는 집착을 거쳐, 상대방의 차를 부수고, 자신을 쫓는 그와 차량 질주극을 벌이게 되기 까지, 폭주하는 소시민의 상황을 차근차근 따라간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분노에서 시작된 그의 감정이, 동네 주민들을 쑤석거려 안상식을 따돌리려 하거나, 편법을 써서라도 자신의 거주자 주차 구역을 지키려 하다, 그도 안되자 폭력적으로 돌변하여 상대방의 차가 폭발에 이르도록 모종의 조치를 취하고, 자기 분에 못이겨 상대방의 차를 때려부수는 과정을 세밀하게 들여다 본다. 물론 드라마는 희망적으로 끝난다. 그토록 자신이 가진 유일한 차에 집착하던 노정도는 그것으로 인해 결국 상대방의 차를 폭발시키고, 그로 인해 자신도 수갑을 차고 경찰서로 향하는 신세가 되고, 직업까지 잃는 처지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잃어 홀가분하게 다시 사시에 도전하는 희망을 꿈꾸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드라마일뿐, 현실의 소시민들은, 그나마 가진 자신의 것을 잃을 위기에 놓일 때, 드라마 속 노정도처럼 펄펄 날뛰다가,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고, 신문의 사회면에 등장하기가 십상이다. 드라마의 결론은 오히려 모든 것을 잃는 순간 주인공들은 자유로워져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잃는 것에 그리 초연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결국 사회면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우매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부정주차>는 현실의 그것과 궤를 달리하였지만, 그 과정에 이르는 소시민의 번뇌와 갈등, 그리고 치졸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것에는 적나라하다.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이지만 말만 앞설 뿐 실제 그 어떤 보복 능력이 없어, 결국 상대방의 차에 고구마나 끼우는 졸렬한 복수를 감행하는 노정도의 행보를 차근히 따라간다. 또한 절정에 이르는 두 사람의 분노를 동네라는 특성을 살린 절묘한 자동차 추격씬으로 묘미를 더한다. 좁은 골목을 위태롭게 꺾어대는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자동차 추격 장면은, 위기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듯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2014년 들어 선보인 드라마 스페셜들이 의욕에도 불구하고 완성도 면에서 미흡했던 작품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던 것에 비해 모처럼, <부정주차>는 주제 의식과 내용이 합일 된 완성도 높은 작품이었다. 찌질한 노정도 역의 온주완도, 완력으로 동네를 평정한 무대뽀 택시 회사 사장 안만식의 김상호는 물론, 식당 주인 아줌마, 슈퍼 아저씨 등 동네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연기조차 허투루 지나칠 것 없는 조화로운 연기의 앙상블 역시 <부정 주차>의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by meditator 2014. 5. 19. 07:26

<신의 퀴즈>가 시즌4로 돌아왔다. 

우리나라 메디컬 범죄 수사극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신의 퀴즈>는 그 위치를 증명하기라도 한듯, 의기양양하게 시즌4에 돌입했다. 시즌제를 도입하고 있는 드라마 중 가장 앞서나가는 성과이다. 한국 의대 법의관 사무소를 배경으로, 촉탁의로 활약하는 천재 의사 한진우의 희귀병 연구를 기반으로 한 범죄 수사극은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며 시즌4 1회부터 본연의 맛을 증명한다. 

자신의 병으로 인해 전 시즌 내내 자기 분열의 혼돈 속에서 괴로워했던 한진우(류덕환 분)는, 시즌4의 초입 1년간 병원에 누워있는 식물인간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장애인을 납치 감금 폭행하는 범죄가 등장하고, 법의관 사무소 전담 형사로 일하게 된 강경희(윤주희 분)가 그 사건의 담당 형사가 된다. 하지만, 범인의 조력자라 생각해서 잡은 사람은 오히려 자기 딸이 납치되어 범인을 쫓았던 장애인 딸을 둔 아버지였고, 탈출한 장애인들의 진술로 범인은 오히려 밀항을 한 듯 여겨져 수사는 난관에 처한다. 바로 그때, 신의 계시라도 받은 듯, 한진우가 깨어난다. 1년간 정신을 잃고 누워있던 사람이라는 설정이 무색하게, 그는 예의 그 위트넘치는 한진우의 캐릭터로 돌아왔고, 그의 몸 역시 급격하게 회복되어 간다. 1년간 그의 옆에서 한결같이 그를 돌보았던 강경희 형사가 고뇌하는 것을 본 한진우는 강경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있을 곳은 바로 법의학 연구소임을 다짐하고, 사건에 개입한다. 

한진우(류덕환)

언제나 그래왔듯, <신의 퀴즈>의 묘미는 바로, 우리가 듣도보도 못한 희귀명 사례와 사건의 절묘한 결합이다. 형사들의 집중적 수사에도 실마리를 얻지 못하던 수사는 한진우의 참여로 수사폭을 좁힐 수 있었다. 즉, 탈출한 장애인들의 희귀병 사례를 살펴 본 한진우는, 이전에 일상적인 증인 심문으로는 결코 밝혀낼 수 없었던, 세 사람 중 청각이 남다르게 예민한 남성 장애우의 증언을 통해, 사건 현장 근처에서 불꽃 놀이가 있었음을 발견해 냈고, 또 다른 여성 장애우의 알러지 반응을 통해 또한 사건 현장 주변에 메밀이 재배되고 있음을 밝혀낸다. 아직 한진우의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설정되어, 범죄 현장에서의 그의 활약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다시 돌아온 첫 회, 역시나 희귀병 사례를 통한 범죄 수사의 진척은 <신의 퀴즈>시청자만이 누릴 수 있는 메디컬 범죄 수사극의 묘미이다. 

또한 매회 희귀명 사례를 통한 에피소드 외에, 시즌에 시즌을 거듭하는 또 하나의 매듭인, 한진우의 내적 갈등 역시, 1회를 통해 그를 수술했던 사람에 대한 미스터리를 남김으로써, 여전히 한진우 본인의 갈등 요소 역시 잔존해 있음을 보여준다. 

시즌3에서 강경희 대신 안내상이 분한 배태식을 등장시켜 한진우의 병으로 인한 혼돈과, 배태식의 트라우마를 배합시켜, 병으로, 혹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극대화 시키는데 촛점을 맞췄었다. 그에 반해 시즌4는 강경희의 복귀와 함께, 아이돌 출신의 법의학 사무소 연구관 임태경(재경 분)과, 한시우(동해 분)를 등장시킴으로써, 4각 관계의 구도를 형성하여, 한층 말랑말랑한 러브 라인을 형성할 포석을 깐다. 과연 이렇게 한결 부드러워진 <신의 퀴즈>가 과연, 기존의 <신의 퀴즈>호청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 지는 미지수다. 한태경이라는 톡톡 튀지만, 숙명적으로 병에 짓눌린 이중적 모습의 캐릭터가 운명론적으로 이끌었던 드라마의 분위기가 시즌4의 새로운 캐릭터들의 등장으로 부드러워진 분위기로 되는 것이, 신선함이 될지, <신의 퀴즈>의 정체성 상실로 받아들여질지는 결국 사랑이야기조차 <신의 퀴즈>만의 방식으로 풀어낼 제작진의 내공에 달려있다 하겠다. 한진우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희귀병 사례에 기반한 범죄수사극의 특성이, 뻔한 사랑 이야기에 침식 당하지 않길 바란다. 

또한 메디컬 수사극임에도 언제나 사건 해결의 정점에 이르러서는 '신파'로 흐르는 <신의 퀴즈>아니, 한국식 수사극의 맹점 역시 여전히 시즌4에서도 노정되고 있는 점 역시 여전한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시즌4의 첫 회, 제목이 '붉은 눈물'이듯이, 장애인 수사로 이어지던 극은, 붉은 눈물을 흘리는 희귀병을 가진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린다고 손가락질 받는 딸을 보호하고자 딸과 함께 다시는 울지 말자고 약속했다고 했으나, 그것이 딸의 그나마의 감정 소통마저 막는다고 생각한 한진우와 강경희는 왜 딸에게 눈물조차 흘리지 못하게 했냐며 아버지를 다그친다. 극적 장치를 위한 부분이지만, 늘 정의감을 넘어 때로는 오지랖이다 싶게 남의 문제에 감정적으로 개입하는 한진우나 강경희는, 그것이 바로 <신의 퀴즈> 캐릭터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파'를 조장하거나, 감정적 비약으로 느껴져, 늘 <신의 퀴즈>의 한계처럼 느껴져왔다. 시즌4에 있어서도, 여전한 그런 극의 해소는 이제는 어쩌면 그것마저도 홍길동같은 한진우 캐릭터와 함께, <신의 퀴즈>의 클리셰로 받아들여 하는게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때로는 상투적이고, 도식적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메디컬 범죄 수사극으로서의 <신의 퀴즈>는 시즌4에 이를 정도로 한국 범죄 수사극에서 독보적이다. 건투를 빈다. 


by meditator 2014. 5. 19. 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