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회를 남긴 <빅맨>, 강동석(최다니엘 분)이 내세운 탄원서철 사이에 강동석이 한 이면 계약서를 끼워넣어 역전을 노렸지만 결국 검사는 현성 유통 직원들이 내세운 법정 관리인 김지혁(강지환 분)에게 사기 전과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강동석의 손을 들어주었다. 실망하고 나선 김지혁과 구덕규(권해효 분)등에게 현성의 직원들이 다가온다. 김지혁은 자신이 모자라서 죄송하다고 말을 하고, 그런 김지혁에게 노조원들은 반문한다. 왜 사장님이 죄송하냐고, 함께 하자고 한 건 우리인데, 라며 김지혁을 독려한다. 그러자 김지혁은 다시 심기일전하여 함께 좀 더 열심히 해보자고 하고, 직원들과 화이팅을 외치며 부등켜 안는다. 멀리서 그런 김지혁과 현성 직원들을 지켜보던 법정 관리를 다룬 검사, 다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가 직원들이 이전에 내세운 탄원서를 읽어보고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부도가 나서 법정 관리가 이루어진 회사에 가장 필요한 건 직원들이 원하는 사장이라며 김지혁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빅맨>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12회에 이른 지금까지 한결같다. 노조원 중 한 사람의 배신이 알려진 후 과연 그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로 골머리를 썪힐 때, 김지혁은 말한다. 우리가 가진 것은 사람 밖에 없다고, 그런 우리가 사람마저 잃으면 무엇을 가지고 저들을 상대하겠냐고. 이것이 바로 1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진행되어 온 <빅맨>의 '휴머니즘'이다. 

시장 바닥의 양아치 김지혁이 우연히 강동석의 꼭두각시로 현성 유통의 사장 자리에 앉았다가 진짜 기적을 일구고, 이제 다시 현성 유통의 법정 관리인으로 돌아오기까지, 김지혁의 일관된 노선은 '사람'이다, 즉 그가 주장하듯, '사람만이 희망이다' 
현성 유통에 어렵게 공급된 우유를 사먹은 사람이 식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걱정한 것은 그 사람의 안위였다. 그런 그의 방식이, 대기업들의 보이콧으로 비워진 현성 유통의 매대를 순진우유로 채울 수 있었다. 바로 현성 유통 직원의 떡고물로 인해 하청에서 떨어져 나갈 뻔하던 순진 우유를 살려준 것이 김지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장이 되었던 현성의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 것은 그가 가족처럼 여기던 시장 사람들이었고, 그의 진심이 그를 무시하던 직원 구덕규와, 최유재(김지훈 분)를 돌려세웠고, 그가 사장으로 보인 성의에 노조원들이 돌아섰다. 제 아무릭 급해도 '리베이트' 대신, 사장의 초심과 진심에 호소하는 김지혁의 방식이, 현성 유통의 법정 관리인으로 그를 만들었다. 

(사진; 메트로)

<빅맨>은 착한 드라마이다. 결국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믿어야 할 것은 너와 나의 진심이요, 우리가 힘을 합쳐야 저들을 물리칠 수 있다는 순수하고 곧은 의지를 일관되게 내세운다. 그런데 어쩐지, 그런 <빅맨>의 휴머니즘이 싱겁다. 분명이 옳은 말이고, 올바른 방향인데, 너무 세상이 세속적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 오히려 그런 빅맨의 순진 혹은 순수함은 어쩌면 바로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고민일 수도 있겠다. 과연 정말 김지혁처럼 가진 것 하나 없이 순수한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회사를 살리고 싶은 직원과 노조원들이, 또한 김지혁을 믿고 자신의 상권을 내준 시장 사람들이 온갖 권모 술수는 물론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이 사회의 '갑'들을 대항해 내세울 무기가 결국 누군가의 '감성'에 호소하는 휴머니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 사실 <빅맨> 속 주장들은 다양하다. 대기업 상권과 시장 상권과의 충돌 속에서 시장 상인들의 생존권에 주목하고, 대기업 유통망에 짖눌린 중소 기업들의 하소연이 들리는 듯하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동자들도 제대로 일한 댓가를 받고, 대접을 받고 싶다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다양한 우리 사회의 문제를 건들면서도, 그 해법이 늘 김지혁의 인간적 설득과, 누군가의 감성적 결단이라는 식이 되어버리니, 이젠 어떤 이야기가 등장해도, 또 그렇게 해결하려니 한다. 

<빅맨> 속 등장인물들은 결국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김지혁이 내건 사람 냄새에 홀려 사람다운 일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 순간 김지혁이 설득하려고 나섰던 그들이 자신의 불리함을 넘어서는 결단을 하지 않는다면 12회에 이를 동안 김지혁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빅맨>의 이야기 구조는, 이 드라마가 가진 착한 인간에 대한 절대 신뢰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러기에 때로는 늘 한결같이 김지혁의 휴머니즘에 동참하는 그들이 어쩐지 '꿈'같기만 하다. 어디 사람이 모질고 싶어 모질어 지는 것인가, 세상이 사람이 모질게 만드는 것일진대, 드라마<빅맨> 속 길은 마치 모범생의 모범답안같이 예외가 없다. 그러기에 모범 답안을 벗어난 모범생이 무기력하듯, 인간에의 호소를 벗어난, 김지혁과 동료들의 행보는 그래서 때로는 허무해 보이며, <빅맨>을 보는 시청자들에게 깊은 고민을 던진다. 

재벌의 외아들 강동석(최다니엘 분)이 조화수(장항선 분)의 표현대로 '강아지 새끼'처럼 자신의 이익을 향해 모든 것을 수단화시키며 내달리듯, 애초에 시장판 양아치가 대기업의 사장이 된다는 설정 자체에서부터 <빅맨>이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들은 '환타지'이다. 그리고 그 환타지는 가장 이상적인 휴머니즘에 입각해, 모두가 힘을 모아 조금 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힘을 모아 잘 해보자 라는 말로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런 회의가, 착한 드라마<빅맨>을 보다보면 자꾸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복수' 드라마에 맛들인 시청자가 보기엔,<빅맨>은 순수 무공해 천연재료로만 만들어진 건강한 음식과도 같지만, 어쩐지 그게 재료도 구하기 힘들고, 만들기는 더더욱 어렵고, 맛도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드니, 세상의 떼가 묻은 자신을 탓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을'들의 속시원한 해법이 '인간적 호소' 외에는 마땅치 않는 우리 사회의 한계를 고민해야 하는 것인지, <빅맨>은 명쾌한데, 어렵다. 


by meditator 2014. 6. 4. 05:15

제 67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 공식 초청작 <끝까지 간다>와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 초청작 <표적>에는 칸 영화제 초청작이라는 공통점 외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영화 초장부터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액션의 진수를 보이는 이들 두 영화에서 중반에 서늘한 분위기를 풍기며 등장하는 형사 두 명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표적>의 송반장 역의 유준상과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형사 역의 조진웅이다.


광역 수사대의 송반장으로 등장하는 유준상은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듯이, 표적이란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 베일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심지어 영화 속 그가 등장해서, 정영주(김성령 분)가 수사하는 백여훈 사건을 가져갈 때까지, 그저 일련의 수사적 관행처럼 보여질 뿐이다. 유준상이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었던 숱한 선량한 캐릭터들처럼 영화 속 송반장도 어떤 컬러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경찰처럼 보여졌던 것이다. 하지만, 이태훈의 눈 앞에서 그들을 쫓던 킬러들이 사실은 형사였다는 게 알려진 순간 송반장의 총구는 당겨지고, 지금까지 그 어떤 영화에서도 쉽게 만나지 못했던 기상천외한 악인의 등장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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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간다>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시작부터 주인공 고건수의 사고부터 보여준다. 경찰서를 덮친 감찰반, 자신의 책상 속에 숨겨진 비밀 장부, 그 열쇠를 가지고 어머니 장례식장으로부터 경찰서를 향해 빗길 속을 달려가던 고건수, 길 한 가운데 있는 강아지를 피하며 가족과 통화를 하며 잠시 잠깐 한 눈을 팔던 그는 그만 사람을 치고 만다. 당황한 끝에 고건수는 사망자를 차에 숨기고, 다시 감찰관의 눈을 피해 그를 어머니와 함께 장례치뤄 버린다. 하지만 사건은 거기서 부터 시작이다. 그에게 걸려온 의문의 전화, 상대방은 그가 저지른 모든 범죄를 줄줄이 다  꿰고 있다. 심지어 죽은 자를 어디에 묻어버린 것까지. 고건수 역시 자신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을 쫓아가려고 하지만, 놓치고 장면이 바뀌어, 고건수에게 전화를 걸던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등장한다. 하얀 경찰복을 입은 우람한 체격의 박창민. <끝까지 간다> 역시 중반 부 이후 재미를 견인하는 주된 장치 중 하나는, 바로 박창민이 그저 고건수의 목격자가 아니라, 고건수가 재수없이 걸려든 거대한 악의 음모의 주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다.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의 악의 축은 형사들이다. 그들은 직업만 형사일 뿐, 아니 오히려 형사라는 직책은 그들이 저지르는 비리의 배경의 한 요소로,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폭력조직 우두머리 못지 않는 절대적 악의 권능을 뿜어낸다. 
광역 수사대의 반장으로 백여훈 사건을 맡지만, 실제 그의 목적은 백여훈을 없애고, 자신이 결탁한 아니 실제 자신과 자신의 팀이 저지른 사건을 덮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광역 수사대와 그들을 대표하는 반장이지만, 실제 그들이 하는 일은 청부 살해를 비롯한 돈이 되는 그 모든 일이다. 영화는 오히려 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광역수사대 반장 백여훈을 상대로,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정체모를 백여훈의 대결로 귀결된다.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 역시 마찬가지다. 마약업자와 결탁한 그는 압수한 마약을 빼돌려 자신만의 마약 제국을 건설한다. 자신의 뜻을 거스른 자는 심장에 총구가 새겨진 교통사고 사망자로부터 고건수까지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영화는 덜 나쁜 형사대 더 나쁜 형사의 대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영화 속 형사가 절대 악으로 강력한 포스를 뿜어내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영화만이 아니다. 드라마 속 형사들도 만만치 않다. <갑동이>에서 갑동이를  십 여년을 그토록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형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골든 크로스>에서 강도윤의 아버지가 대책없이 자기 딸의 살인범이 되어버린 과정에는 바로 권력의 손을 잡은 강력계 형사 곽대수가 있다. 그들은 정의의 편인양 등장해서, 법의 수호자인양 거들먹거리면서, 자신이 모시는 사람들을 위해,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고 그런 봉사의 핵심에는 바로 '돈'이 있다. 법률로 보장된직업적 소명은 아랑곳없이, 허울이 되고, 그들은 자신이 지닌 알량한 '권력'에 의지해 타인을 억압하고, 심지어 목숨을 빼앗고, 자신의 이익을 챙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반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갑동이가 형사가 된 것이 기막힌 반전이라며 무릎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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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 업자와 손을 잡고, 마약을 빼돌리며, 업자들에게 돈을 상납받는 형사들 캐릭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다수의 사건 사고를 통해 그런 비리를 익히 알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로 상징되는 법과 정의를 지키는 권력의 비리와 부도덕에 우리 사회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 사회 법과 정의가, 약자들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사실을 무기력하게 인정한 우리들은, 그런 사실이 극단적으로 캐릭터화되어 등장하는 영화와 드라마속 형사들이 익숙하다. 우리 사회 관권의 파렴치하고 이기적인 속성에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다. <갑동이> 속 연쇄 살인범 갑동이가 형사 반장이 되는 과정은, 결국 이 사회의 많은 범죄들이 가진 권력적 성격을 상징하는 것처럼. 

그래서, 영화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액션이 중심이된 오락적 성격의 영화임에도, 그들이 영화 마지막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법망을 피해 악을 저지르던 조폭을 무찌르는 액션 쾌감과는 또 다른, 타락한 권력이 정죄되는 '정의'의 심판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표적>의 백여훈이 바란 것은, 이역만리 외국에서 자신의 목숨을 팔아 번 돈으로 동생과 함께 치킨 집이나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소박한 소망을 손반장은 자신의 편의에 의해 짓밟는다. 비록 고건수는 비리나 저지르고 자신이 친 시체를 숨기는 찌질한 형사이지만, 딸과 함께 살아보려는 소시민의 표상처럼 영화에서 그려진다. 그래서 그렇게 소박한 소망을 가진 보통 사람과, 소시민에의해, 그들보다 부도덕하며 그들보다 권력을 잘 이용해 먹는 악의 축들이 무너졌을 때 묘하게도 관객들은 억눌렸던 감정의 해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적>과 <끝까지 간다> 속 악인들은 개인일 뿐이다. 그들의 비리는, 영화 속 이들 개인의 비리처럼만 표상화된다. 그래서 그들의 제거로 어떤 여운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신문에서 만나는 다수의 사건에서, 말단의 그 누군가를 제거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부도덕이 끊어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도마뱀의 꼬리처럼 바라볼 뿐이다. <골든 크로스> 곽대수는 거대 로펌 변호사 박희수의 하수인일 뿐이다. 그리고 박희수의 뒤에는 경제 정책 국장 서동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우리나라 상위 1% 골든 크로스가 있다. 하지만 액션 오락 영화로서, <표적>과 <끝까지 간다>는 명쾌한 영화 미학을 위해, 감히 그것을 언급하지 조차 않는다. 어찌보면 하수인과 애먼 보통 사람과의 대리전이다. 죽도록 싸우는 강도윤과 곽대수의 결론을 골든 크로스의 지령을 받은 어깨들이 기다리고 있듯이, 본 게임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채 한바탕 한풀이로 마무리된다.


by meditator 2014. 6. 3. 15:07

가정의 달 특집 <휴먼 다큐 사랑>4부작 시리즈가 마지막회 <말괄량이 샴 쌍둥이>를 끝으로 종영되었다. 이 따뜻한 다큐를 보기 위해서는 내년 가정의 달까지,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만약에 내년에도 한다면) '휴먼'과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제목에서부터도 알 수 있듯이 언제나 그래왔듯 4부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가장 가치있고 소중한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휴먼 다큐 사랑> 마지막 회<말괄량이 샴쌍둥이>는 캐나다 브리티시 버논에 거주하는 머리가 붙어 태어난 샴 쌍둥이 크리스타, 타티아나 호건 자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의 오늘이 있게 만든 특별한 엄마와 엄마같은 할머니 '나나맘'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제는 건강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샴쌍둥이 크리스타와 타티아나의 출발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뱃속에 있는 쌍둥이가 머리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의사는 엄마 펠리시아 호건에게 낙태를 권유했다. 하지만, 스물 한 살의 나이에 이미 두 아이의 엄마인,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엄마는 그런 의사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고 벤쿠버에서 다른 샴쌍둥이가 태어나 잘 자라고 있다는 건 알게 된 아빠는 아이의 순조로운 출산을 위해 엄마와 함께 벤쿠버로 향한다.

2006년 10월 벤쿠버의 한 주립 병원에서 혹시나 있을 지도 모른 사태에 대비해 17명의 의사들이 포진하고 있는 가운데 쌍둥이 크리스타와 타티아나는 무사히 세상으로 나왔다. 생존율 20%의 장벽을 뚫고 세상에 나왔다고 이들의 성장이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의사들이 샴쌍둥이의 성장을 비관적으로 보고 이 아이들이 걷지도 기지도 못할 거라고 했지만, 현재 이들은 웃으며 뛰어다니고, 벽도 타고, 함께 목마도 타며 즐겁게 지내고 있다. 

물론 하나의 뇌를 공유한 타티아나와 크리스타의 삶이 다른 아이들과 같지는 않다. 함께 맛을 느끼고, 함께 시각을 공유하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보폭과 속도를 조절하는 마술같은 신체적 특징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즐겁게 뛰어노는 이들 말괄량이가 평생 변기에 앞으로 앉을 수 없듯이, 편중된 뇌때문에 보다 빨리 뛰는 심장을 조절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밀과 보리 알레르기나, 소아 당뇨처럼 지병을 평생 가져가야 하고, 함께 걸어야 하는 신체적 특징때문에 발 중 어느 한쪽은 깨금발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휴먼 다큐 사랑>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신체적 장애가 어쩌면 살아가는데 그다지 큰 장애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된다. 엄마와 할머니의 신뢰에 찬 사랑, 그리고 그런 엄마를 지지하는 할아버지를 신념이 보는 시청자들의 눈을 새롭게 뜨도록 만든다. 
이미 뱃속에 있을 때부터 끊임없이 회의적인 이야기를 하는 의사들의 이야기에 엄마 크리스티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출생에 세상은 회의적이었지만, 엄마는 오히려 반대로 말한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 가족들은 각자의 삶만이 있었지만, 이제 샴 쌍둥이 덕분에 좀 더 가까워지고 가족으로서의 역할을 좀 더 원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샴쌍둥이 덕에 짊어지고, 나누어야 하는 시간을, 엄마는 가까워짐과, 역할을 원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또한 쌍둥이의 늦은 성장에 대해서도 엄마의 생각은 다르다. 동생이 태어나도록 걷지도 기지도 못했지만, 쌍둥이는 동생이 태어나고 기고 성장하는 것을 보고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여전히 도움이 필요하지만 조금씩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다고 말한다.

(사진; 뉴스엔)

시리즈가 언제나 그래왔듯 <휴먼 다큐 사랑>의 부분부분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시울은 적셔져 가는 미묘한 감동을 주었지만, 가장 우리나라 시청자들에게 뜨끔하면서도 감동적인 부분은 엄마 크리스티나의 한 마디이다. 낮은 생존율처럼, 성장의 후일을 명확하게 기약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엄마는 말한다. 타티아나, 크리스타 두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함께 하는 그 순간순간 함께 행복하면 그뿐이라고. 초등학교 2학년인 이제야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를 연결할 수 있는 쌍둥이 자매를 보며 할머니는 그들이 많이 배울 수 있는 미래를 기대한다. 여전히 어른들은 그 아이들은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 말은 우리를 망치처럼 내려친다. 건강하고 멀쩡하게 태어나는 아이,순조롭게 잘 성장해 주는 아이, 그리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란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기에. 그저 지금 우리와 함께 웃으며 지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했던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휴먼 다큐 사랑; 말괄량이 샴 쌍둥이>가 그려내고 있지 않지만, 샴 쌍둥이 자매 크리스타와 타티아나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캐나다라는 나라가 있다. 나라에서 지어주는 임대 주택에서 생활하는 외가와 부모님들을 가진 샴 쌍둥이, 과연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태어날 때부터 온갖 의료적 도움이 필요하고, 이만큼 성장할 때까지 의학적 보조가 늘 함께 해야 하는 이 아이들이 우리나라 사회에서 저렇게 성장할 수 있을까?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의료적 비용을 사회가 부담해 주는 캐나다 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큐에서 나오는 출산 과정의 비용, 그리고 자라면서 했던 수술과,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먹어야 하는 약과 주사의 비용은 모두 공짜다. 다 나라가 부담하는 것이다. 

다큐를 보는 내내 의아했다. 공공 임대 주택에 사는 엄마와 할머니는 온전히 육아에만 매진하고 있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가였다면 어땠을까. 다섯 아이들의 밥값을 벌기 위해 아빠는 물론 엄마까지 나가서 벌어야 할 상황이다. 느긋하게 아이들을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빨래를 돌리는 상황을 공공 임대 주택에 사는 부모들이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 펠리시아는 그게 가능하다. 

2011년 4월 8일 <오마이 뉴스> 해외 복지 리포트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캐나다에서는 아이들의 의료 비용이 나라 부담이다. 심지어, 아이를 낳으면 한 아이당 보조 양육 수당을 459달러 씩을 받는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18세가 될 때까지 캐나다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경제적 수준에 따라 아동 복지 수당을 제공한다. 
엄마 크리스티나가 나가서 당장 아이들 밥값과 병원비를 벌 필요 없이, 당당하게 장애를 가진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온전히 다섯 아이들의 육아에 집중하며 그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배경에는 아이를 무상으로 키울 수 있는 캐나다의 의료 복지 제도가 있다. 어쩌면 샴 쌍둥이를 가져도, 그들을 낳고 키울 수 있는 용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캐나다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인 것이다. 

<휴먼 다큐 사랑> 시리즈는 그저 감동만이 아니라 힘이 있다. 사랑의 힘이다. 
크리스타와 타티아나는 비록 사지는 멀쩡하다지만 한 눈에 보기에도 함께 걷기도 버거워 보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하루에 네 번씩 주사를 맞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그저 보통 아이들처럼 때론 장난도 치고, 형제들과 웃고 울고 밝게 생활하는 이 자매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행복한 삶에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 명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면 또 다른 하나는 휴지를 자르며 기다려 주고, 자연스레 옷을 추켜주고, 따스하게 손을 맞잡아 주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우정과 같은 두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부럽단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더구나 아이들에게 크게 바라는 것 없이, 그들과 함께 지금 함께 행복한 것만으로도 삶의 목적을 이룬 듯한 엄마와 할머니를 보면서, 우리가 살면서 잊어서는 안될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따뜻하면서도 밝게 나레이션을 해낸 박유천의 마지막 한 마디, '이백 오십만 분의 일 확률로 태어난 희귀한 샴 쌍둥이 타티아나와 크리스타, 세상 그 누구보다 힘든 조건 속에서도 이 아이들은 서로에 기대어, 서로를 아끼며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론 감당하기 힘든 삶의 무게가 짓누를 때 이 미소를 떠올려 보세요. 언제나 우리의 마지막 해답은 사랑입니다'처럼.


by meditator 2014. 6. 3. 09:43

'트라우마'라는 심리학적 용어가 이토록 우리 곁에 친근한 단어로 씌여지는 때가 이 시대이다. 더구나, 2014년 4월, 5월, 그리고 6월은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남겼다. 과연 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만 할까? <sbs스페셜>은 <다친 마음의 대물림, 3대를 간다>를 통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트라우마의 치유 방식에 대해 고민해 본다. 


당연히 다큐의 시선은 세월호 유족들에게 향한다.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부모님을 걱정했다는 착한 딸과,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돌아와 책을 사겠다며 남겨둔 기특한 아들을 '수장시켜버렸다는' 장순복, 유성남씨의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면 흘리는 대로, 혹은 공황상태이면 공황상태인 대로, 심지어는 죽은 언니가 좋은 곳에 가지 못할까봐 울음을 틀어막거나, 형을 따라가고 싶다며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차마 맘놓고 슬퍼하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찾아간 재난 전문가가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가슴 속에 응어리들은 조금씩 풀어져 나온다. 

하지만 우리, 우리 사회는 잊고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를 덮친 트라우마는 비단 세월호만이 아니었다.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도,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그리고 대구 지하철 참사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뿐, 여전히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살아남은 신옥자씨는 평범한 가정주부였지만 사고 이후, 하다못해 자동차 헤드라이트까지 끄고 다녀야 하는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면서, 그녀와 그녀 남편의 일상은 피폐해져갔다. 사고 당시 꿈많은 여고생이던 손미영씨는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살 시도와 자해를 되풀이해왔다. 


트라우마는 비단 심리적 기제만이 아니다. 뇌단층 촬영을 통해 보면,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편도체가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뇌의 손상을 입는다. 트라우마를 겪으면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데, 심지어 임신을 하고 있는 엄마가 트라우마를 겪으면, 태어난 아이들 역시 스트레스 호르몬이 과다하게 분비되는 성향을 유전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면서 스트레스에 더 과하게 반응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런 트라우마의 유전은 손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3대에 걸쳐 대물림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1년간의  시간을 트라우마의 골든 타임이라고 하는데 그 시간 동안 잘 치유가 된다면, 유전이 될 정도로 무서운 트라우마는 아물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때 치유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1년후, 혹은 몇년, 심지어는 몇 십년이 지나서도 개인의 삶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911테러 이후 다수의 사람들을 희생한 한 지역에서는 병원 부설 치료 센터를 만들고, 피해자 중 센터장을 뽑아, 지속적으로 911테러 희생자와 유족들의 상처를 돌보아 왔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는 활동 등을 통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가족 중 누군가를 잃은 사람들끼지 결연을 맺어 상실의 아픔을 보다듬을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다수의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벗어나,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sbs스페셜이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하다. 우리 사회도, 미국 911테러 후속 조치들처럼 사회적 사건으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골든 타임 안에 치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치유의 방식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공동체를 통한 유대감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치료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십수년이 지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피해자들이 여전히 각자의 트라우마를 각자의 가족이 짊어진 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세월호 사건 수습 과정에서 보여진 정부, 해운사, 해경 등의 대응을 보면서, 과연, 우리 사회가, 그 유족과 생존자들의 트라우마까지 챙길 깜냥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책을 세우기 보다, 유족들이 들고 일어날까 경찰부터 붙이는 시스템이, 과연 그들의 트라우마 골든 타임을 지켜줄 수 있을까. 해법이 존재하기에 더 가슴이 답답해지는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4. 6. 2. 06:33

ebs의 다큐 프라임은 5월 26일에서 28일에 걸쳐, 그리고 다시 6월 1일 8시부터 연방으로 3부작 법과 정의 시리즈를 방송하였다.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 <2부;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 >로 나뉘어 방송된 <법과 정의> 3부작은 법학도 출신의 작가 성석제가 그 답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방식으로, 법과 정의의 역사와, 오랜 화두를 돌아봄으로써,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법과 정의'의 의미를 찾아본다. 


3부작으로 진행된 <법과 정의> 시리즈의 진행 방식은 대체적으로 법이 과연 누구의 편인까 혼돈스런, 과연 사회적 분배 문제에서 정의는 실행될 수 있을까? 그리고 과연 공정한 처벌이란 무엇인가와 관련된 구체적인 질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각각의 시리즈는 법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바빌로니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를 통해 처음에 그것이 만들어 졌을 때의 본래적 의미를 되돌아 보고, 그것이 실제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살펴본다. 고대에서 처음 만들어진 법과 제도들은 하지만 중세까지의 신분제 사회를 거치면서 여전히 편향된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며 지속되어 왔음을 알려준다. 그러기에, 프랑스 대혁명, 그리고 거기서 발현된 인권 선언을 통해 드러난 근대 시민 사회가 만들어 낸 법의 정신과 의미가 중요함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근대 시민 사회를 통해 기본적으로 만인의 권리를 인정한 법은 현대 사회를 오면서,새롭게 해석되거나, 그 본연의 의미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을 각가 3부작은 형벌 제도와, 분배 문제, 정의의 실현이라는 주제를 통해 짚어보고자 한다. 

▲ EBS <다큐프라임-법과 정의> ⓒEBS
(사진;pd 저널)

1부 <법은 누구의 편인가>를 여는 것은 미국 최악의 판결이었던 캐리 벅 판례로 시작한다. 수용시설로 보내진 엄마에게서 태어난 캐리 벅은 입양이 되지만 그 집에서 하녀처럼 부려지던 중 성폭행으로 임신까지 하게 된다. 낳은 딸을 빼앗기고 수용시설에 보내진 캐리 벅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적 관점에 따라, 법의 결정으로 겨우 21살의 나이에 나팔관을 절제하는 불임 수술을 받는다. 이 판결을 통해 <법은 누구의 편인가>는 묻는다. 과연 법은 누구의 편인가? 후에 나찌의 불임 수술의 전례가 된 이 우생학적 관점에서 치뤄진 재판 뒤에 숨겨진 건 국가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치뤄야 하는 비용을 줄이거나, 부담하지 않기 위한 경제적 동기가 숨어있었다. 근거없이 저능아로 판명되어버린 캐리 벅은 스물 한 살의 나이에 그 어떤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법의 폭력에 노출되어 버렸다. 즉 신분제 사회를 거쳐 인간은 나면서 부터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주장을 한 프랑스 인권 선언문에 따라 근대 법의 원칙이 만들어 졌지만, 법은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도구로 쓰여질 수 있는 것이다. 

2부 <정의의 오랜 문제, 어떻게 나눌까>에서는 존 롤스의 정의론에 나온 '무지의 베일'의 원칙에 따른 실험을 실시한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빚 6000만원을 경제적 형편이 다른 네 형제자매가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다섯 그룹은 각자 자신이 실제 네 형제 자매 중 누군인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무지의 베일) 어머니 빚의 분배를 논한다. 그 결과 다섯 그룹은 물론 금액의 차이는 있지만, 고소득자인 맏이가 많이 내고, 상대적으로 어려운 막내가 덜 내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즉, 결과에 따른 '리스크'를 고려하여 가장 손해보지 않은 결과를 선택한 것이다. 실험 전에 네 자녀들은 쉽게 합의를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없던 사람들은 합의를 도출해 낸다. 막상 자신이 누군지 알게 되었을 때 각자 아쉬워하는 면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결론을 뒤집지는 않았다.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벤담의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최선의 분배의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벤담의 입장에 따르면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결과를 낳고, 때로는 그 소수가 경제적 약자일 수 있다는 것이 20세기의 정의론을 내세운 존 롤스의 입장이다. 즉 존 롤스는 삶의 출발점에서 존재하는, 즉 경제적 부의 정도, 인종, 남녀와 같은 불평등의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이 시대의 정의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에서 이익이라면 불평등은 승복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정의론이다. 그

3부 <죄와 벌-인간을 처벌하는 어려움에 관하여>는 얼마전 화제가 되었던 대주 산업 회장의 금고형으로 부터 시작된다. 3일동안 노역은 커녕 별다른 일을 하지 않은 채 감옥에 머무른 대주 산업의 회장은 하루에 5억씩 15억을 탕감받아 사회적 공분을 샀었다. 형벌의 역사를 훑어 본 다큐는 과연 범죄의 크기에 비례하는 형벌은 어느 정도일까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물론 함무라비 법전으로 부터 시작하여, 중세를 거치며 형벌은 피해자가 받은 만큼 응징을 하는 방식이나, 신께 죄의 유무를 묻지 위해 물에 담그거나, 불을 견뎌야 하는 비상식적 과정을 거쳐왔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일찌기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명시되어 있듯이, 귀족와 평민의 법적 처벌은 언제나 달랐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전세계의 법은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에 도달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여전히 또 다른 사회적 차별인 '유전무죄, 유권무죄'의 판결에 대한 고민을 던져준다. 

이렇게 지극히 아카데빅하고 철학적 관점에서 장구하게 훑어 본 <법과 정의>가 늘 종착점에서 명시하는 것은 우리의 헌법 조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하지만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현실은 저 헌법 조항과는 다르다.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도 않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지만, 현실의 국민들의 행복은 언제나 뒷전이다. 

존 롤스가 21세기에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정의가 만들어 져야 한다고 주장하듯이, 3부에 걸려 법과 정의의 문제를 살펴 본 <법과 정의> 3부작의 결론은 1부 마지막에 표명된다. 즉 사회적 약자인 캐리 벅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다수의 사람들이 노력한 결과 2002년 법원으로 부터 사과 성명서를 얻어내고 '그때나 지금이나 올바르지 않았다'는 판결의 반성이 뒤따른 것처럼. 시민들이 제 목소리를 낼 때에만 비로소 정의는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거나, 잊거나하면 결국 정의의 반대 편에 법은 세워지게 된다고 못박는다.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린 형태를 띤다고 한다. 눈을 가린 것은 중의적 의미이다. 즉 눈을 가린 채 자신의 앞에서 판결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라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겠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정반대로 이해 관계에 따라 불공평한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즉 해석 여하에 따라, 혹은 운용하는 자의 의지에 따라 이현령 비현령이 될 수 있는, 법이 반대편이 아닌 정의의 편에 서도록 하기 위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은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고, 그런 참여의 가장 적극적인 방식 중 하나는 '투표'라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4. 6. 2. 05:58

장황하게  갑동이의 카피 캣 류태오가 8차에 이르기까지 연쇄 살인을 하는 과정을 쫓아오며 연쇄 살인 사건으로서의 갑동이 사건과 그에 얽매인 인간 군상들을 세밀화로 그려내던 드라마<갑동이>는 지난 주 12회 마지막 드디어 갑동이(정인기 분)의 얼굴을 밝힘으로써 본 게임에 돌입했다. 


갑동이를 쫓는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갑동이 카피캣으로서 살인을 즐기던 류태오(이준 분)는 7차를 경과하며 사이코패스로서의 자신의 삶에 권태를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류태오가 철썩같이 믿었던 보호감호소의 갑동이가 사실은 갑동이 사건의 피해자로 그 트라우마로 인해 갑동이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류태오는 그런 사람을 갑동이라 따르던 자기 자신에 환멸까지 느끼는 듯하다. 결국 갑동이처럼, 자신도 스스로 살인을 끊고 외국으로 떠나려던 류태오는 결국 비행기 안에서 살인 충동을 견디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 하고 송환되어 철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그런 그를 면담하는 오마리아(김민정 분)는 류태오가 갑동이 사건의 카피 캣이 된 이유가, 사이코패스로서 자신의 살인 충동을 스스로 조절한 갑동이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류태오가 결국은 자신의 살인 충동을 어찌하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되풀이했던 것처럼, 그런 류태오를 보면서, 하무염(윤상현 분)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어쩌면 갑동이도 류태오처럼 살인 충동을 어쩌지 못하고 여전히 어디선가 살인을 되풀이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

결국 에돌아 왔던 <갑동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드러나지 않을 뿐, 하무염이 경찰서 게시판에 빼곡히 붙인 실종된 여자들의 사진들처럼, 잡히지 않은 연쇄 살인범음 여전히 음지에서 암약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범행의 반복이 아니라, 류태오를 두고 그가 사람이기를 바라며 혼란을 느낀 마지율(김지원 분)처럼, 범행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구절절 사이코패스로서 류태오를 설명하고 그의 권태와 환멸을 통해, 역으로 차근차근 갑동이를 설명해 왔다. 

(사진; 뉴스엔)

그리고 이제, 하무염과, 오마리아가 사건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형사가 되어 그걸 즐겨왔던 갑동이는 어떻게 니들이 나를 잡겠어 하는 자만심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내적 갈등의 회오리에 빠져든다. 더구나, 계획적으로 저질렀던 여타 범죄와 달리, 여경 살인 사건이 자신의 오해, 오판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갑동이는,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르던 세상이 뒤흔들리는 혼란과 더불어, 그렇게 자기를 흔들어 놓은 자들에 대해 분노하게 된다. 류태오가 갑동이의 카피캣으로 연쇄 살인을 저리르며 하무염을 비롯한 경찰을 주무르고 조롱하며 쾌감을 느끼듯, 형사가 된 갑동이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잡지 못해 피폐해져 가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만든 세계 속의 꼭두각시들을 바라보는 듯한 즐거움을 느껴왔던 것이다. 자신이 만든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즐거움을 느끼는 사이코패스, 그에게서 권력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렇게 피의자의 신분에서 역전하여, 형사라는 '갑'의 신분이 되어 자신을 쫓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권위를 즐기는 차도혁 형사 반장, 그리고 살인을 저지르고도 매번 재벌가의 돈의 힘을 통해 범죄자의 신분에서 벗어나는 류태오를 통해, <갑동이>는 우리 사회, 권위와 돈의 힘으로 자행되는 사이코패스적 범죄를 짚어본다. 
드라마는 연쇄 살인범 갑동이를 권위를 가진 형사 반장이라는 직업적 신분으로 전환함으로써, 또한 이제는 하다하다 '부자병'이라는 신종 정신병까지 만들어 내며 법망을 피해가는 류태오를 설정함으로써, 법과 돈의 힘으로 얼마든지 '커버'될 수 있는 사이코패스적 행각을 말하고자 한다. 연쇄 살인범을 쫓는 수사극으로 시작하여  결국 에둘러 제작진이 도달하고자 했던 고지는, 바로 법과 돈의 우산 속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이면이다.


by meditator 2014. 6. 1. 01:26

훈훈한 가족애를 추구하던 <사남일녀>가 결국 낮은 시청률의 장벽을 넘지 못하고 종영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새롭게 선보인 것은, 요즘 인기 좋다는 먹방과 리얼 버라이어티를 합체시킨 <7인의 식객>이다.


'단순한 음식 소개가 아닌 한 나라를 이해하는 창으로서의 음식 기행'을 추구한다는 <7인의 식객>은 인류학적 정보를 위해, 수능 인기 세계사 강사 고종훈씨를 섭외, 각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한다.

하지만 그런 정보성 내용을 제외하고 보면, 제목은 7인이지만, 고정이 아니라는 명목 하에 8명의 출연자를 섭외하고, 그들을 음식 알아 맞추기 게임을 통해 적은 비용으로 직접 발로 뛰며 여행을 하는 배낭 여행 팀과, 가장 화려한 볼거리와 이름난 음식을 먹고 다니는 팀으로 나누어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방식은 어디선가 본 듯하다. 일찌기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도 이와 비슷한 음식 기행을 선보인 바 있으며,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이긴 팀과 진 팀으로 나누어 가장 비싼 여행과 가장 저렴한 여행으로 여행의 극과 극을 다룬 사례는 예능에선 낯설지 않은 컨셉이다. 

(사진; 뉴스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기가 있는 먹방처럼, 여행 전문 케이블 tv가 따로 존재하듯이, 누군가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그 자체로 여행을 떠나지 못하고 집을 지키는 시청자들에겐 이미 누군가 했던 익숙한 컨셉일 망정 흥미를 유발한다. 

특히나, 매번 미션이 주어지고, 그 미션을 통과해야 어드벤티지가 주어지는 배낭 여행팀의 행로는 시안 역을 찾아 간식까지 사며 허겁지겁 뛰어가는 그 모습에서 이미 눈길을 사로 잡는다. <정글의 법칙>의 고생담을 작정하고 타깃으로 삼은 듯 고생스런 여행이란 목적이 분명한 배낭 여행팀은 그 팀원의 말처럼, 90분이라는 시간 안에 시안 역에 도착하기 위해 이십 여분을 달려가고, 겨우 기차를 탔는가 싶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을 배경으로 한 22시간의 기차 여행이 이어진다. 여행의 종착지에 도착해서는 또 어떤가. 22시간의 기차 여행을 마치고 땅에 발을 딛었는가 싶었는데, 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을 가기 위해 다시 2시간 여 사막길을 따라 차를 타고 가야한다. 그러고서는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면서 특전으로 제공한 것이 온통 모래 언덕뿐인 명사산 여행이었다. 

두 팀으로 나뉘어진 <7인의 식객> 첫 번째 여행의 주제는 국수 기행이었다. 실크 로드를 통해 밀이 전파되고, 그 밀이 중국의 요리법이 만나 탄생한 국수에 대해 알기 위해, 여행 팀들은 밀이 전파되어 국수가 된 그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여행을 한다. 

'국수'는 이미 다큐멘터리를 통해 여러 번 다룬 익숙한 주제이다.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우리나라의 국수 문화를 다루었고, 요리 전문 tv 올리브 tv에서도 우리나라와 외국의 국수 문화를 직접 발로 뛰며 전달한 적이 있다. 특히나, <7인의 식객>이 다루고 있는 국수의 전파 과정은 이미 <누들 로드>를 통해 상세하게 소개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7인의 식객>이 지향하고 있는 인류학적 바탕이 깔린 리얼 버라이어티는 당연히 내용 면에서 <누들 로드>와 비교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수능 인기 강사까지 초빙했음에도 불구하고, 첫 회 <7인의 식객>에서 소개된 내용은 그저 외국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맛본다는 먹방의 의미를 넘어서지는 못한 듯하다. 

서경석 일행이 처음 간 음식점에서 일행들은 당나라 시대의 국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음식을 맛보았지만, 그들을 통해 시청자들이 전달받은 건, 인류학적 탐험 자세라기보다는 외국 여행지에서 타문화의 음식을 맛본 여행객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맵다', 맛있다'라는 그들의 반응으로는 당나라 시대의 음식 문화를 시청자들이 간접 체험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국수 만들기 체험 정도가 인류학적 탐험에 어울리는 시도로 보여졌다. 배낭 여행 쪽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배낭 여행이라는 보다 '날 것의 체험'이 그래도 서경석 팀에 비해서는 훨씬 더 진솔한 맛 기행의 느낌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신성우나, 이영아는 적극적으로 타문화으 음식에 접근하는 태도가 긍정적이었고, 그런 그들을 통해 전달되는 이방의 음식은, 때론 겨드랑이 냄새같을 지언정, 색다른 문화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7인의 식객
(사진; tv데일리)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7인의 식객> 자체가 맛 기행이라는 목적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신성우 팀의 손헌수는 과연 이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멤버라기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행동을 보인다. 신성우의 표현대로, 여행을 가서 만나게 되는 그 지역의 음식은, 바로 그 지역 사람들의 문화를 체험해 보는 것이기에,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음식을 먹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더구나, 제목 자체도 <7인의 식객>인 프로그램에서 입이 짧아, 이방의 향취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고, 고추장을 더하는 손헌수가 과연 <7인의 식객>에 어울리는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손헌수의 입짦음에 짜증이 난 것도 잠깐, 첫 회 <7인의 식객>은 맛 기행이라는 취지를 깡그리 잊어버릴 정도의 사건을 벌인다. 미션 성공으로 주어진 명사산 기행에서, 타조를 타고 모래 언덕 투어를 떠난 일행이 그만 모래 폭풍 속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제작진이 머무는 곳의 의자와 식탁이 나뒹굴고, 서서 있기가 힘들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모래 폭풍 속에 신성우 팀은 오로지 낙타에 의지한 채 버려진다. 굳이 '버려졌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들을 따라가던 카메라 팀이 그들을 놓쳤고, 제작진은 일찌감치 목적지에 먼저 와있는 상황에서, 신성우를 비롯한 세 명의 팀원이 모래 폭풍 사이에 갇혀버린 것이다. 제작진은 경찰이 와서 신속하게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그 과정, 제작진과 떨어져서, 제작진이 헐레벌떡 그들을 찾으러 가는 과정을, 리얼 버라이어티의 일환인 양 상세하게 프로그램 말미에 보여준다. 

그런데, 요즘처럼 사건, 사고가 빈번하게 되풀이 되는 상황에서, 제작진의 케어를 받지 못한 채 모래 폭풍에 사라진 출연진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건, 목숨을 걸고 리얼 버라이어티를 해야 하는가 싶은 분노이다. 물론 다음 회 예고를 보면, 출연진들은 무사히 그 모래 폭풍을 빠져나온 듯하다. 하지만, 충분히 사막의 모래 폭풍이 예견된 상황에서, 그 어떤 대안도 없이, 제작진마저 손을 놓은 상황에서 출연진만을 떨어뜨려 놓은 것은 '방기'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제 아무리 <정글의 법칙>의 날 것을 타겟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7인의 식객> 첫 회의 모래 폭풍 해프닝은, 그런 수준을 넘어, 안전 불감증처럼 보여졌다. 이미 연예인의 해외 여행 프로그램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례도 있는 바, 제 아무리 리얼 버라이어티지만, 제작진마저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는 건, 무신경과 준비 부족으로만 보여지는 것이다. 

덕분에 배낭 여행의 긴박감도, 뱀을 목에 두르고 춤까지 선보인 김유정의 고군분투을 입힌 호사스런 여행의 맛도 함께 모래 폭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프로그램을 이어간다면, 원래의 취지는 살리되, 출연진의 위험을 담보로 한 흥미끌기는 지양하기를 바란다. 맛있는 외국의 먹거리를 먹으러 목숨 걸고 갈 일은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4. 5. 31. 06:37

5월 29일에 방영된 <썰전>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벌어졌다.

늘 어떤 화두가 등장할 때마다 무지막지한 자료를 들이대며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느라 열심이던 강용석이 kbs 파업이라는 주제에 대해 시쿤둥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신문에서는 그걸 다루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말했다. 김구라가 무슨 신문을 보냐고 물어보니, 조선일보란다. 이철희 소장이 따끔하게 묻는다. 그럼 <썰전>이 방영되는 jtbc뉴스도 안보냐고, 그러자 강용석은 동업자 정신에 입각하여 시청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어떻게 kbs 파업을 이끌어 가는 노조 위원장이 직접 출연하기까지 했는데 모를 수가 있냐는 힐난에 강용석은 답을 피한다. 하지만 김구라와 이철희가 꺼내는 파업과 관련된 이야기마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피력하는 걸로 봐서 강용석은 kbs 파업 사태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모르고 싶었을뿐. kbs가 파업을 하게 된 계기처럼, 세월호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를 사장이 나서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것을 지시한 것처럼, 강용석의 세계에서, 그런 민감한 사회적 이슈들은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싶은 거였다. 심지어, 그는 변호사의 법리적 근거를 들이대며, 길환영 사장의 보도권 개입을 적법한 처사였다며 우기면서 정부 측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강용석은 다른 때와 달리 김구라나 이철희 소장의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한 채 시선을 돌린다. 

<썰전>을 보고 있노라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람들이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지? 라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한다. 출연자 이철희 소장은 [한겨레 신문]에 개재한 자신의 칼럼에서, 임진왜란을 앞두고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예를 든다. 실제 김성일은 그 자신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이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분명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이었기에, 그 사실을 인정하면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워 사실을 은폐하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것은 비단 조선시대의 일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자신의 정략적 입장에 따라 전혀 다른 생각을 개진하는 것이 되풀이 되고 있다고 개탄하고 있다. 바로 그 사례를 29일의 <썰전>에서 강용석은 직접 증명하고 있다. 상대방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굳굳하게 kbs파업의 정당성을 폄하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치부하느라 애쓴다.

그래도 눈이라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까. 드라마로 오면 그들은 보다 뻔뻔해 진다.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가 신문 지상을 통해 어디선가 접했던 경제계, 법조계 인물들의 잔향을 그대로 드리운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그들을 연기하는 극중 배우들의 입을 통해 등장하는 논리는 바로 우리 사회 그들이 사는 세상의 논리이다. 

(사진; osen)

자신의 딸 서이레(이시영 분)가 강도윤의 동생과 아버지를 죽이셨냐고 물었을 때, 서동하(정보석 분)는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없이 살아왔다고. 계속되는 추궁에, 기껏 서동하가 인정한 건, 강도윤의 동생을 사랑했었다는 사실만이다. 자신이 이런 일을 겪게 된 건, 마이클 장(엄기준 분)이 한민 은행을 집어 삼키려는 음모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오히려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곤 마이클을 찾아가 당신이 한민 은행을 무리하게 집어 삼키려 해서 이런 사단이 난 거라며 추궁을 하며 내가 죽으면 당신도 함께 무너질 것이라고 협박을 한다. 딸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듯 고백도 해보고, 마이클을 협박도 해보고, 심지어 무릎을 끓고 강도윤에게 애걸복걸도 하지만 딱히 시원한 결론을 얻지 못했던 서동하는 마지막 카드로 장인을 찾아간다. 그리곤 서동하가 모아놓은 골든 크로스 멤버들 앞에서 한민 은행 매각은 그 어떤 법적 하자가 없었다며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당당하게 말한다. 
강도윤에게 눈물까지 흘리며 애원하다 그가 돌아서 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냉정한 미소까지 지어보이는 경지에 이르른 서동하는 카멜레온보다 오히려 한 수 위인듯하다. 
강도윤 앞에서까지 자신은 결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며 오히려 니 동생을 사랑했을 뿐이라며 읍소하는 서동하에게 강도윤은 사람이 아니라고, 사람이면 그럴 수 없단 말로 그를 정의내린다. 
하지만, 서동하는 한 치의 후회도 없다. 반성은 커녕 감히 자신을 건드렸다고 호시탐탐 강도윤을 없앨 궁리만 한다. 오히려 그의 측근인 박희서(김규철 분)는 아버지를 기소하려는 서이레를 다그친다. 온실 속에서 자란 네가 아버지의 세상을 아냐고, 자식을 버린 어미가 자식이 싫어서였겠냐고, 자신이 데리고 있으면 굶어 죽일 거 같으니 눈물을 머금고 유기한 것이라며, 자신과 서동하의 행보를 대변한다. 사실을 밝혀서 무얼 할 거냐고, 무엇이 달라질 거냐고 당당하게 다그친다. 

<골든 크로스>속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국가나, 그 속에 사는 개인들 따위는 아랑곳않고, 그들이 벌이는 온갖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행각들이 우리가 조우한 사회적 사건들의 데쟈뷰라서 더 섬뜩하다. 한민 은행이란 낯선 드라마 속 은행이 매각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경제 관료와 외국 기업의 앞잡이가 벌이는 행각은, 우리로 하여금 과거의 사건들을 복기하게 해준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악을 덮기 위해 다시 악을 되풀이하는 서동하와, 그것을 돕는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우리가 소름끼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사고방식들이다. 여전히 자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저지르는 짓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에서 가장 합리적이며 유의미한 해결 방식이라고 논리적으로 무장한 그들의 생각이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박변의 논리처럼, 자신들이 저지른 협잡이, 현재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미가 자식을 살리기 위해 버렸다는 논리처럼, 그들만의 논리로 주변을 설득하려 드는 것이다. 눈빛 하나 바뀌지 않고 성심성의를 다해 진실처럼 되풀이하는 서동하의 입장을 듣노라면, 순진한 누군가는 그의 말에 감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마치 눈물만으로 악어를 오해하듯이 말이다. 지역과 시장을 돌며 친근한 미소를 띠며 노동에 휘어지고 갈라진 손을 덥석  잡아주는 정치인들에게 감동하는 순진한 서민들처럼 말이다. 요즘 드라마들의 악의 축은 종종 타인에게 공감을 느끼지 못하며 오로지 자신의 이기적 감정에만 충실한 '소시오패스'라는 사회 병리학적 증상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골든 크로스> 속 그들을 보면, 그건 개인의 심리학적 증상이 아니라, 이 사회의 집단적 정신적 증상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집단적 소시오패스들, 그것이 바로 그들이 사는 세상의 정신심리학적 진단명이다. 


by meditator 2014. 5. 30. 09:24

수요일 밤 예능의 후발 주자로 서러움을 겪던 <오마이 베이비>가 드디어 수요일 밤의 강자 <라디오 스타>를 이겼다. 역시나 귀여운 아기들을 당해낼 자가 없는가 보다. 하지만 동시간대 1위의 기쁨도 잠시, 또 하나의 육아 예능으로 자신감을 얻은 <오마이 베이비>는 주말 저녁으로 자리를 옮겨 진검승부를 벌일 예정이다. <오마이 베이비>까지 주말로 자리를 옮기면, mbc의 <아빠 어디가>, kbs2의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이어 방송사마다 육아 예능으로 주말 예능의 승부를 겨루는 셈이 된다. 


<오마이 베이비>가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사건사고로 말미암아 허겁지겁 종료된 수요일 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태생부터 이미 선발주자가 된 <아빠 어디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류작이라는 오명을 쓰고 시작되었다. 그런 낙인을 피하기 위해 <오마이 베이비>가 내건 차별화된 전략은 세대별, 연령별 다양한 관찰 육아 예능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임현식과 같은 할아버지의 육아, 고은아 등 이모의 육아, 유태웅네 아들 삼형제 육아처럼 다양한 출연진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이은의 귀족 육아와 같은 구설수를 불러일으키는 차별화된 육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주말 예능으로 자리를 옮기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오마이 베이비>의 출연진은 처음 <오마이 베이비>가 내걸었던 다양한 세대, 연령의 육아라는 애초의 의도는 많이 무색해 졌다. 강레오-박선주 부부의 딸 에이미, 김정민-루미코 부부의 늦둥이 담율이, 손준호-김소현 부부의 주안이, 리키 김-류승주 부부의 태오, 태린이까지, 네 쌍의 부부의 아이들을 보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도 가장 반응이 좋은 연령대의 아이들만 모아놓은 느낌이다. 즉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귀여운 아이들로 주말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역력하다. 

더구나, 프로그램을 진행시키는 방식도 타 육아 예능이랑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성격이 좀 더 강한 <아빠 어디가>에, 채시라의 나레이션이 엄마의 시선이라는 강점으로 작용하는 <슈퍼맨이 어디가>와 나레이션의 역할을 자막이 대신하는 <오마이 베이비>는 세부적인 방식에서는 차이가 날 지 몰라도, 결국 궁극적으로 귀여운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한 시간여를 때우는 방식에서는 큰 차별성을 두기가 힘든 것이다. 굳이 들자면,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평소 육아에 참여도가 적은 아빠들의 참여라는 이벤트성이 강하다면, <오마이 베이비>는 부부 모두가 출연함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관찰 예능으로서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가 아빠의 관점에서의 육아, 그래서 서툰 그 과정에서 오는 재미를 추구한다면, <오마이 베이비>는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과정을 지켜보며 느끼는 공감에 더 방점을 찍고, 그걸 프로그램의 주된 재미로 삼는다. 

하지만 과연 육아 과정을 보는 재미가, 신생가 출생률 최하위의 우리나라에서 실질적인 육아의 재미로 이어질 지는 미지수다. 아이들을 보는 건 좋지만, 과연 <오마이 베이비>를 보면 나도 아이를 키우고 싶다로 이어질까. 부정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출연하고 있는 혹은, 과거에 출연했던 아이들의 가정을 보면, 귀족적 육아로 문제가 되었던 이은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 하나, 둘인 집안이 온통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뒤덮여 있다. 자그마한 장난감이 지천에 널린 것은 물론, 미끄럼틀에, 실제 탈 수 있는 자동차, 아이가 혼자 움직이기에 충분한 영역을 둘러싼 플라스틱 장벽에 침대에, 과연 저 또래 아이들이 실제 얼마나 가지고 놀까 싶은 것들로 아이의 주변은 넘쳐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아이와 아이의 장난감을 담을 집이 무조건 어느 정도 이상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실제 육아 서적에서 보자면, 어린 시절 너무 많은 장난감은 물론 연령별 지능 발달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사물에 대한 쉬운 싫증과 심하게는 낭비벽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 실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제 아무리 좋은 장난감이라도 아이들은 쉽게 싫증을 내고, 오히려 엄마의 주방 기구에 더 관심을 쏟는 경우가 많은 걸 보면, 과연 저 텔레비젼 프로그램 속 지천으로 쌓인 장난감에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더구나, 그렇게 산더미같은 장난감, 동화 속 세상같은 아이의 환경, 그리고 언제나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세계, 그리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가정 환경은 오히려 그걸 보는 젊은 세대로 하여금 육아를 두렵게 만드는, 그래서 그저 텔레비젼 프로그램으로만 육아를 즐기는 '회피'를 조장하는 건 아닐까 노파심이 생긴다. 즉, <오마이 베이비>든 다른 육아 프로그램이든, 그 어떤 것이든 현실의 육아와는 거리감이 있는 또 하나의 '육아 환타지'를 조성하고 있는 중이다. 

(사진; 뉴스엔)

또한 '관찰'예능으로서의 시각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아이들을 관찰한다지만,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자막으로 그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해석한다. 28일 <오마이 베이비>에서 태린이가 놀이터에서 남자 친구를 만나자, 태오는 달려오는 누나의 남자 친구를 날카롭게 바라본다. 제목이 '누난 내 여자니까'이듯이, 프로그램은 누나를 사수하기 위한 태오와, 그런 태오를 제끼고 함께 놀려는 태린이와 태린이 남자 친구의 삼각 관계를 만들기에 골몰한다. 이제 겨우 서너 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어른들 '남녀 관계'와 같은 시각을 조성하기에 골몰하는 건, 비단 <오마이 베이비>만이 아닌 모든 육아 예능의 공통점이다. 즉, 그저 자라나는 과정 중에 자연스레 등장하는 아이들의 행동, 말 하나하나에 예능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늘 침소봉대요, 왜곡이 뒤따르는 결과이다. 마치 아이들은 아무 생각없이 노는데, 엄마들끼리 니 여자친구니, 남자 친구니 하며 호들갑을 떠는 방식을 육아 예능은 여전히 되풀이 하고 있는 것이다. 도한 지난 주 강레오 네 에이미의 식사 습관이나, 매번 밥 먹이기 실랑이를 벌이는 김소현네 주안이처럼 생각해 봐야 할 육아 방식을 그저 한 가족의 개성처럼 비판없이 고스란히 전달하기도 한다. 

물론 장점도 있다. 특히 <오마이 베이비>의 경우, 미국에서 태어나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가진 리키김과 류승주의 육아 방식은 기존 우리나라 부모들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떠먹여 주려는 과잉 보호와 대비되어 지켜보며 배우는 지점이 있다. 하지만, 매주 한 시간 넘게 아이들의 일상만으로 '때우는' 육아 예능에서 그런 장점은 쉽게 희석되고, 아이들과 함께 어딘가를 떠나고 방문하는 이벤트가 그 자리를 채워가기가 십상이다. 벌써 아이를 데리고 꽃집을 찾아다니는 강레오네 가족처럼. 하지만 세상은 넓고 아기들은 여전히 많다고, 시청자들이 싫증을 느낄만 하면, 또 다른 귀여운 아기들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아마도 그것이 주말로 진검 승불의 카드를 내민 <오마이 베이비>의 배짱일 것이다. 귀여운 아이가 누군가의 집에서 탄생되는 한 육아 예능의 해는 쉽게 저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름날 해에 감사함을 느끼기 어렵듯이, 이제 방송사마다 주말을 채우는 육아 예능은 그만큼 쉽게 권태로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도 높아진다. 


by meditator 2014. 5. 29. 10:21

이제 4회까지 방영된 <유나의 거리>에는 핏빛 복수와 혈투도, 재벌가의 음모와 파멸도 없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노라면 등골이 서늘해 진다. 그 누구도 쉽게 피해가거나,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5월 27일 방영된 <유나의 거리>에는 두 노인의 삶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이른바 '도끼'라고 불리는 왕년의 주먹 장노인(정종준 분)이 자신이 세들어 사는 한만복(이문식 분)의 콜라텍에서 영업세를 받아내려던 조폭 망치의 병실을 찾아 그를 위협하는 장면이 보여진다. 왕년의 주먹이지만, 이제는 이빨빠진 호랑이처럼 정부에서 주는 노인보조금을 받아 연명하며, 한때 자신의 똘마니였던 한만복에게도 뒷방 늙은이 대접을 받던 도끼는 망치를 무너뜨림으로써 모처럼 그의 위신을 찾는다. 다리마저 불편한 그에게 사람이 죽어나간 이층방을 강요하던 한만복은 그가 모처럼 밥값을 했다며 그를 데리고 가 틀니를 해주고, 도배를 해주는 등 대접을 해준다. 하지만 그뿐이다. 여전히 그는 자기 자식과 부인조차도 외면한, 한만복의 문간방에 집세도 내지 않고 의탁하는 처지일 뿐이다. 1회부터, 개밥의 도토리같은 그의 처지가 도드라지게 부각되었기에 3,4회의 그의 활약은 오히려 '봄날의 목련'처럼 삶의 페이소스를 더할 뿐이다.

또 한 사람의 노인이 있다. 4회를 이르도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 채 결국 거기서 숨을 거두고 마는 유나의 아버지(임현식 분)이다. 딸과 함께 놀이 공원에 놀러가서, 사람들이 불꽃놀이에 눈을 빼앗긴 틈을 타서 지갑을 슬쩍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불꽃놀이보다 더 감탄하며 첫 소매치기에 입문하게 된 딸, 그래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감옥을 들락거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소매치기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소매치기가 된 딸에게 죽기 전의 마지막 유언으로 스스로 잘라낸 자신의 손을 보여준 채 세상을 떠난다. 


유나의 거리 3회
(사진; tv데일리)

비록 4회밖에 되지 않았지만, <유나의 거리> 속 삶은 징하다. 
그 흔하디 흔한 조폭들이 역시도 이 드라마에도 등장하지만, <유나의 거리> 속 조폭들은 삶으로의 조폭이다. '이화룡'을 형님으로 모셨던 도끼는, 큰형님으로 모셔지지만 말뿐, 그의 장황한 연설에 아랑곳않고 젊은 조폭들은 고기를 뜯는다. 그를 모셔갔던 한만복은 그를 주책이라며 힐난한다. 잠시 잠깐 망치를제압하며 큰 형님으로서 위용을 뽐내 보지만, 그뿐, 문간방 생활보호대상자 그의 삶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의 똘마니였던 한만복은 이제 조폭을 배경일뿐 침대 옆에 애지중지 모셔놓은 금고 속 통장이 그의 의지처이다. 이젠 동네 조폭들이 영업세를 뜯으러 와도, 자존심을 내세워봐도, 딱히 내세울 것 없는 그저 '왕년'의 조폭이다. 
어디 조폭뿐인가. 대를 이어 소매치기를 하는 유나의 업계도 만만치 않다. 왕년의 소매치기였다가 경찰과 결혼한 박양순(오나라 분)은 자신들의 노래방에서 없어진 손님의 지갑으로 인해 오해를 받는 처지이다. 유나와 자리 다툼을 하는 동료 소매치기들은, 소매치기를 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고, 이젠 불경기라 밥 먹고 살기도 힘들다며 불평을 해댄다. 그리고 그런 삶의 미래는, 바로 4회 마지막, 기필코 감옥을 나갈거라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치료한번 받지도 못한 채, 돈을 꾸어 감옥을 찾아온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유나 아버지의 모습이다. 

삶은 조폭이건, 소매치기이건 변함없이 흘러가고, 그 속에서 그들은 쉽게 놓여나질 못한다. 왕년의 멋진 형님은 이제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고, 전설의 소매치기는 초라하게 감옥에서 눈을 감는다. 생활은 그들을 밀어 붙이고, 그들은 직업으로 깜냥도 되지 못한 그것으로 인해 삶에 치여버린 모습으로 남는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자식들은, 알면서도 배운 도둑질에서 헤어나지 못하거나, 그 늪 속에 빠져들어간다. 다음 회의 예고에서도 보여지지만, 아버지가 손가락을 자르는 유지를 남겼지만, 여전히 유나는 '소매치기'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성실하고 착한 청년 창만(이희준 분)은 본의 아니게, 자꾸 그 세계로 한 발씩 들여놓게 된다. 삶의 골짜기는 깊다. 

4회 감옥에서 나온 유나를 거둬 준 미선(서유정 분)은 그녀가 자신의 뒷배를 봐주는 사장과 저녁을 먹었다는 이유로 그녀의 머리채를 잡는다. 유나도 밀리지 않는다. 두 여자는 길거리에서 육박전을 벌인다. 겨우 창만의 저지로 떼어 놓여진 두 사람, 왜 싸웠냐는 이웃집 여자의 질문에, 미선은 대답한다. 그냥 누군가를 때리고 싶었다고. 자신의 삶에서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그 누군가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풀어내 보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얼굴의 상처와 관계의 후회만 남을 뿐. 당장 유나는 갈 곳도 없고,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처지이다. 

그렇다고, <유나의 거리>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삶의 비정함을 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도끼 큰 형님이 행차하실 때마다 깔리는 '대부'의 ost처럼, 드라마는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비극도, 운명도 그저 피해갈 수 없는 우리 삶의 한 부분이라며 덤덤하게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더,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서늘해지고, 마음이 깊어진다. 


by meditator 2014. 5. 28. 09: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