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회, 건물 옥상에서 거리를 바라보며 서정후(지창욱 분)는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높은 곳에서 이렇게 세상을 내려다 보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 이제야 싸워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자를 도망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싸울 것이다.' 채영신(박민영 분)도 다르지 않다. 그녀 역시,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겠다고 한다.

그저 돈을 많이 벌어 남태평양에 있는 섬 하나를 사서 편안하게 살겠다던 서정후는 채영신과 함께 도망가는 대신, 이곳에서,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는 길을 택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그들을 괴롭히는 '어르신'이란 상징되는 삿된 세력과 마주 서 싸우는 것이다.

 

 

 

 

 

송지나 작가의 화두

돌아온 <모래 시계>의 작가라는 화려한 수식어로 시작한 송지나 작가의 <힐러>, 송지나 작가는, 그 수식어가 그녀에게 얹은 부담감을 저버리지 않고, <모래 시계>로 시작된 우리 시대의 비극을, 그 세대가, 그리고 그 이후의 세대가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화두로 삼았다.

 

<모래 시계>에서 사회적 정의에 눈밝은 젊은이로 등장했던 배우 박상원이 <힐러>에서 자신의 개인적 입신양명을 위해, 친구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심지어 그것을 이용하는 변절자로 등장한 것처럼, 80년대를 이끌었던 세대의 명멸을 진득하게 주시했다.

또한, 김문식의 동생, 김문호로 대표되는, 그 이후의 세대가, 서정후의 말처럼, 생각만 가득한, 하지만 막상 현실에 있어서는 주춤거리는 존재였음을 놓치지 않는다.

특히나, 최근 젊은 세대들이, 각자 자신만의 실존적 문제에 빠져, 사회적 문제에 중지를 모을 수 없음을 작가는 고민의 중심에 둔 듯하다.

이렇게 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를 구성하는, 여러 세대가 2015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작가는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80년대 이후의 세대만이 아니다. 이른바 어르신(최종원)으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악의 실체를 고발한다.

80년, 총칼로 무장한채 명확하게 드러난 악은 이후, '자본'의 이름으로, 자신을 무장한 채, 산업 현장으로 시작해서, 정관계, 언론까지, 그 마수를 샅샅이 펼친다. 김문식을 힘으로 협박하고, 그의 친구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자신들의 비리를 덮고 확장하기 위한 정치 자금 현장을 무마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사과 박스에 담은 검은 돈을 퍼나르면서, 멀쩡한 다리를 무너뜨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 스러져간 기업들을 잠식하며, 어르신으로 상징되는 세력들을 힘을 키워나간다. 드라마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처럼, 그 과정에서, 거추장스러운 사람들을 편의적인 방식으로 제거하며,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한 마을의 생명조차 실험대상으로 삼는, 탈국가적  만행을 저지른다. 한 편에서 기영재(오광록 분)같은 인물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김문호와 같이 대중적 인물은 성과 관련된 스캔들로 제거하고자 하는 '통치방식'의 세련됨을 구가한다. 심지어 한 마을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민영화'라는 국가 자본에까지 문어발을 확장하는 것을 마다치 않는다.

 

무기력해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건

그렇다면 이렇게 전지전능해져 가는 어르신에 대해 무기력해진 우리들은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그에 대해 송지나 작가가 내세운 해법은, 세대간의 '연대'이다.

변절한 김문호가 있는 반면 여전히 가슴 한 구석에, 그 시절의 열정을 잃지 않고 사는, 어른들이 앞장서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감옥에서 나온 기영재가 언젠가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서정후를 힐러로 훈련시켰듯이 말이다. 김문식의 사랑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자유 언론'의 일원 최명희(도지원 분)도, '돈'만 아는 해커가 아니라, 자신이 지켜내지 못한 공적 권력에 대한 회한을 가진 조민자(김미경 분)가 그들이다.

이렇게 여전히 밝은 눈을 가진 어른들과 함께, 어른이 되어가는 김문호의 세대가, 그들이 가진 기득권을 넘어서면, 서정후와, 채영신같은 젊은 세대들도 그들의 손을 맞잡고 싸울 수 있을 것이라 송지나 작가는 20부를 통해 강변한다.

 

특히나 그저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 등으로 외로움에 사무쳐 살던 그래서 돈이나 벌자고 하던 서정후, 버려진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기자라는 막연한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채영신, 그들은 뜻밖에 마주친 개인사의 이면에 고민하고 고뇌한다. 이렇게 돈이던 명예던, 각자의 실존적 이상을 향해 치닫던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이 마주친 고민들이 어쩌면 각각 역사적, 사회적 근원을 가진 것들이라는 것을, 서정후와 채영신을 사연을 통해 작가는 풀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의 개인사의 이면을 고민하다, 사회적 부조리에 닿는 것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들 역시, 실존적 틀을 넘어, 사회적 프레임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가졌으면 하는 소원을 드라마를 빌어 말한다.

그리고 그들을 옥죄어 오는 현실적 어려움의 그 근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눈밝은 어른들과 함께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 회, 어르신의 비리를 만천하에 폭로할 증거를 가지고 공항에 도착한 연구원을 마중하러, 나란히 어깨를 겯고 공항을 걷는, 서정후, 채영신, 그리고 김문호, 조민자의 모습이 바로 송지나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연대'의 현실태이다.

또한 그렇게 그런 그들과 함께 뜻을 함께 하게 된 썸데이의 장병세(박원상 분), 형사 윤동원(조한철 분) 등의 존재에서, 세상은 암울하고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만, 싸우고자 한다면, 여전히 함께 할 누군가가 존재함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힐러의 성취, 그리고

이렇게 힐러라는 액션 어드밴춰물의 주인공같은 존재를 등장하여 대중의 구미를 당긴 드라마 <힐러>는 여전히 시대적 고민을 놓치지 않은 송지나 작가의 야심작이다. 그러기에, 드러나는 스토리 너머, 숱한 상징들이 드라마를 채우고, 그 행간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물론 약점도 있다. 동시간대 타 방송사의 <펀치>가, 통수에 통수를 거듭하며 권력의 명멸을 세심하게 다루고 있는 것에 반해, 상징적 화두로 가득찬 힐러는 상징은 풍부하지만, 그 상징을 풀어내는 장치들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세련된 권력으로 성장한 어르신의 해법은 종종 오비서와 배상수 집단의 폭력적 방식을 통해 안이하게 전개되는 것이다. 어르신이 장악한 사법, 경찰들의 권력은 쟁쟁하지마 정작 해결 방식들은 뻔하달까? 마지막 회, 고성철이 가지고 온 동영상 속 어르신의 비리 장면을 증명해 줄 연구원의 폭로와 그를 둘러싼 접점은 흥미로웠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단순해 드라마적 재미가 반감되었다.

 

거기에, 언제나 그렇듯, 송지나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운명적인 사랑이, 과연, 세대간 연대를 지향하는 이 드라마의 균형점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짚어볼 지점이다. 서정후와 채영신의 사랑은 극적이고, 갸륵하지만, 때로는 그들의 운명을 잊을 만큼, 농후하기도 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흐트러 트린 지점이 있었던 점이 옥의 티라며 티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여한이 없다'는 송지나 작가의 소감처럼, <모래 시계>로 시작하여, 여전히 시대적, 역사적 혜안을 놓치지 않은 작가는 <힐러>를 통해 이 시대 우리가 고민하고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흔들림없이 그려내었다. 여전히 시대적 책임감을 놓치지 않은 제대로 된 어른으로 최선을 고민한 20부의 과정에 감사를 드린다.

by meditator 2015. 2. 11. 06:21

'그들이 사는 세상'의 표민수 pd가 모처럼 돌아왔다. 이번엔 공중파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연애 담론에 일가견이 있는 tvn을 통해서이다. 그가 가지고 돌아온 작품은 <이웃집 꽃미남>으로 이미 작품화된 바 있는 웹툰 작가 유현숙 작가의 동명 웹툰이다. 원작의 청순 가련했던 여주인공을 당당한 국가 대표 수영 선수로 둔갑시킨 작가는 <꽃미남 라면가게>, <직장의 신>의 윤난중작가이다.

표민수 피디와 윤난중 작가 콤비는, 세상에 둘도 없는 강호구(최우식)의 조건없는 사랑을 통해, 사랑조차도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에서, 아날로그한 진솔한 사랑을 그리겠다는 포부를 펼친다.

 

제작진의 포부에 걸맞게 2월 9일 방영된 첫 방송에서, 김밥까지 싸들고 데이트에 설레이던 강호구는, 6개월의 해외 연수도 모자라 애인인 오빠의 등장으로, 진짜 오빠 같은 오빠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반복해서, 이 시대의 '썸'이라 칭해지는, '내꺼 인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사랑의 가벼움을 논한다. 그리고 그런 '썸'타는 세태 속에서, 호구는 친구와 여동생, 심지어 어머니의 지청구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계산하지 않는 가슴을 울리는 사랑을 고민한다. 그리고, 그렇게 순수한 사랑을 갈망하는 그의 앞에,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좋아했던 스포츠 여신 도도희가 나타난다.

 

첫 선을 보인 <호구의 사랑>은 이름부터 강호구인 인물의 '호구스러운' 성격을 그려내기에 애쓴다. 애인이라 생각하는 여자가 눈 앞에서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가는데도, 상상만 할뿐 가지고 있는 김밥까지 주려고 하는 남자, 첫사랑 도도희를 만났지만, 말 한 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는 호구같은 남자를 묘사하며, 그런 그의 거절하지 못하는 성정을 '착하다'로 정의내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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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이미 웹툰에서 그려지고 있듯이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조차도 거둬주어야 하는 '호구'적 설정이 예정되어 있기에 불가피한 전략이겠다. 하지만, 막상 첫 선을 보인 강호구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착하다 라기 보다는, '답답하다'라는 감성이 우선한다. '썸'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과연 순수한 것인지, 눈치가 없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물론 고등학교 동창의 보험 가입 강권조차 결국 거절하지 못하고 나서서 들어주는 이 남자 호구가, 드라마의 마지막 도도희와 바다행을 감행하는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 그만큼 도도희를 좋아하는구나 라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거기까지 이르기까지, 호구는 정말 말 그대로, 호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호구의 캐릭터를 통해, 그것이 계산적인 사랑이 범람하는 이 시대에, 아날로그적인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고자 한다지만, 어쩐지 강호구는 불온하다. 마치 그의 지고지순함은, 70년대 한 남성을 바라보며 온갖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지고지순한 여주인공의 전복된 캐릭터인 듯하다. 데이트하던 여성이 화장실에 간 동안, 그 앞에서 그녀의 핸드백을 들고 순순히 기다리는 남성, 그리고 이어 그녀 대신 핸드백을 들고 데이트에 임하는 남성, 이 시대의 여성들이 데이트 대상으로 요구하는 남성의 온순한 매너들이, 강호구라는 인물을 통해 극대화된 느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드라마 속 호구를 비롯한 호구의 친구들은 호구의 여동생에게 사랑학 강의를 들어야 할 만큼 사랑에 무지하다. 마치 <마녀 사냥>에서 처럼, 남자들은 여자를 모르고, 여자들은 그녀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는 그들은 늘 예습하지 않고 칠판 앞에 선 수학 시간의 둔재들처럼, 남의 다리만 긁는 식이다. 드라마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그려내려 하지만, 그 속에서 그려진 남성상은, 이 시대가 편견을 가지고 규정하는 사랑에 무지한 남자애들일 뿐이다.

 

더구나 웹툰에서 청순가련하던 여주인공은, 이름조차도 도도희, 국가 대표 수영선수요, 그녀의 뛰어난 미모로 일찌기 여신으로 칭송받는, 거기에 성격조차 거칠 것없는 캐릭터이다.  이렇게 전통적으로 여성과 남성에게 요구되는 성적 역할이 전복된 듯한 두 주인공 캐릭터를 통해, 그려내고자 하는 <호구의 사랑>이 과연, 21세기의 순수한 사랑으로 도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도달한 사랑은 사랑조차도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에,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까? 그게 아니라, 오늘날 젊은이들의 사랑론에 고착되어 등장하는 수동적 순수남의 환타지를 강화시키는 것은 아닐지. 특히나 젊은 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tvn의 드라마이기에, 첫 회를 선보인 <호구의 사랑>에 노파심이 앞선다.

by meditator 2015. 2. 10. 06:01

일요일 밤 9시 40분으로 안착한 < 발칙한 사물이야기 다빈치 노트(이하 다빈치 노트)>는 우리 주변의 친근한 물건을 매개로 인문학적 사고의 지평을 열어보이는 프로그램이다. 

2월 8일 세번 째를 맞이한 <다빈치노트>가 꺼내 든 사물은, 2014 뉴욕 타임즈가 올해 최고의 발몀품 중 하나로 선정한 '셀카봉'이다. 기괴한 물건으로 등장하여, 한국인들의 특이한 기호 상품을 넘어, 이제는 전세계인의 애장품으로 등극한 셀카봉을 통해, sns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사고를 훑어 본다. 

이름하야, '셀카봉', 그리고 그 셀카봉을 초빙한 <다빈치 노트>의 소제목이 '21세기 나르시시즘, 욕망을 기록하다'인 것처럼, 셀카봉은 나 자신을 욕망하는 최고의 발명품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다빈치 노트>는 장하익 교수의 의견을 빌어, 나르시시즘이 결코 인간만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을 비롯하여, 심지어 돌고래까지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애를 가진 동물이라는 증언을 통해, 사회적 동물 고유의 본능임을 짚고 넘어간다. 



이렇게 고유한 본능이 인간에게 와서 발전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자화상, 나르시스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빠지듯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램브란트를 비롯한 다수의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고, 장장 8시간의 촬영 시간이 걸린 최초의 사진 촬영에서도 인간은 끈질기게 자신의 모습을 남겼다. 직접적인 셀카의 원조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모아서라도 들 수 있는 카메라의 등장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을 찍는 셀카봉의 유래를 통해, 발명품의 흥망성쇠에 필요한 트렌드의 필요성을 나눈다. 

이렇게 역사적 흔적을 통해 셀카봉에 이르른 자기 확인에의 열정은 하지만, 그저 나르시시즘으로의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굳이 혼자서도 찍을 수 있는 핸드폰 카메라임에도, 그것을 확장하여, 셀카봉에 이르른 이유는 오히려, 나르시시즘의 정극단에 존재한다. 자기애조찯도,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공유'의 욕심,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가 있는 장소에 대한 확인조차도 인정받고 싶은 '타자 지향'이 심지어 1000 명이 넘는 사람들마저, 한 앵글안에 넣을 수 있는 셀카봉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연 재해의 현장, 혹은 익스트림한 상황에서도 셀카봉을 들이대는 정서에는, 자신의 생존을 타인을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굳건한 '집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저 몇 십의 무리를 넘어, 평균 150 명 정도의 인력 풀을 관리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증명할 수 있는 셀카봉이야 말로, 가장 사회적인 발명품이라며, 그 사회적 의미를 짚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애와, 공유의 공동 협조 체제의 산물인, 셀카봉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화제가 되기 시작한 이면에는 슬픈 대한민국 현대인의 자화상이 있다. sns를 즐기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주로 애용하는 셀카봉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 여성 중 가장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뜻밖의 통계때문이다. 가장 많은 셀카 사진을 올린 광주 한 여성의 사례를 통해, 이 시대 대중들이 소모하는, 혹은 선호하는 이미지라는 것이, 연예인을 닮은 듯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난 것이 아닌,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연예인스러운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하를 서슴지 않는 현대인,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현실태를 여러 여성들의 입을 통해 증명한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의 닮은 모습을 절묘한 셀카의 각도와 포샵을 통해 재연해 내고 있는 동시대의 여성들의 고뇌를, 오히려, 자신을 한껏 드러낸 셀카 이벤트와, 전시를 통해,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보인다. 



sns의 셀카봉 인류를 '호모 작대기쿠스'라 정의내린, <다빈치 노트>는 그렇다고, 이 현생 인류를 자기애에 탐닉하는 방식으로 '시뮬라크르'을 넘어서지 못하는 세대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베스트 셀러의 저자로 더 유명한 광고인 박웅현이, 자신이 글을 쓰는 마음의 근저에 역시나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음을 시임함으로써, 현대인의 욕망의 보편성에 진솔하게 다가가고자 한다. 또한, 그 나르시시즘의 욕망이, 그저 우물 안의 자기 만족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집단을 어울러야 하는 인간의 불가피한 결과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물론, 그 자기애가 한편에서 자기를 간과한, '타자 지향' 매몰의 한계를 지닐 지언정, 자신을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열정의 건강함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으로 지적한다. 

<다빈치 노트>가 제시하는 인문학은 일상의 사물에서 시작하듯이, 거창하고 유식한 체 하는 인문학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도, 사상도 결국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평범한 사물로 귀결될 수 있는 소박한 인문 정신이다. 개그 프로그램보다도 재밌고, 다큐 못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는, 아!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깔깔 대며 웃다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그 시간에, 내 주변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은 넓어지는 시간, 바로 그것이, 발칙한 사물 이야기 다빈치 노트의 기록이다. 
by meditator 2015. 2. 9. 13:19

국제 언론 감시단체 프리덤 하우스가 2014년 발표한 '세계 언론 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작년보다 네 계단이나 하락한 세계 68위이다. 총 23개 항목을 평가해 0점에서 부터 100점 까지 언론 자유가 보장될 수록 낮은 점수를 받게되는 이 보고서가 선정한 1위위 국가는? 바로 10점으로 동률 1위가 된 네덜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언론 자유가 가장 잘 보장된 국가들의 예능 프로그램은 어떨까? 그 해답을 찾아, sbs스페셜이 떠났다. 2월 8일 방영된 <sbs스페셜-쇼에게 세상을 묻다>에서는 방송인 박재민이 직접 세계 곳곳을 찾아다니며 그 곳의 쇼에 참가하며, tv쇼에 담긴 사회적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좀 벗으면 어때? 공영방송에서 나체쇼를?!
박재민이 처음 찾은 나라는 네덜란드, 그곳에서 그는 공영방송에서 10년째 방영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조정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던 그는 차마 계속 바라보지 못한 채 얼굴을 돌리고 만다. 도대체 방송 중에 무슨 일이?

'누드'를 주제로 한 방송에서, 실제 얼굴만 가린 채 나체를 한 남성들이 스튜디오로 들어서, 자신의 성적 고민을 토로한다. 또한 전직 누드 모델로 국회의원까지 된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그렇게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또 다른 스튜디오의 한 편에선 누드 모델을 모델로 삼아 누드화가 그려지고 있는 중이다. '누드'만이 아니다. 실제 이 방송에서는 '섹스'와 '마약'조차 금기의 대상이 아니다. 방송에 참가한 박재민은, 보드카을 앞에 두고 한 진실게임에서 마약과, 섹스와 관련된 질문에 당황하지만, 오히려 당당하게 보드카를 들이키는 건 '이런 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전직 누드 모델 국회의원이다. 

과연 '막장'도 아닌, 볼장 다 볼 거 같은 이 예능 프로그램이 어떻게 가능할까? 심지어, 네덜란드의 방송 제한 연령은 16세이다. 이 방송을 몇 살 부터 볼 수 있겠냐는 질문에, 거리의 부모들은, 성에 관심을 가질 12,3세면 가능하지 않겠냐고 여유롭게 대답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방송 게시판이 다운이 되고도 남을, 아니 애초에 19금이라도 방송 불가 판정을 받고도 남을 이런 예능이 가능한 사회적 배경은 무엇일까?

거리의 부모는 말한다. 어차피 보고 싶으면 보지 말라고 해도 찾아볼 것, 차라리 까놓고 설명해 주는게 낫다고. 프로듀서 마야 브라운 역시, 섹스와 마약의 좋고 나쁜 점을 제공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취지라고 주장한다. 실제 네덜란드에서는 성인이 된 사람이라면 마약을 할 수 있는 까페까지도 존재한다. 

이렇게 섹스와 마약까지도 허용하는 네덜란드의 정서는 바로, '관용'이라는 국가적 가치관에 근거한다. 일찌기 스페인과의 오랜 식민지 전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고, 그 과정에서 구교의 스페인의 종교적 억압에 대응한, 사상과 종교의 자유를 선포한 '베스트 팔렌' 조약이 네덜란드 국가 성립의 근간이 되었다. 이렇게 사상과 종교의 자유는 현대에 이르르면서 '섹스'와 '마약' 등에까지 개인의 책임을 전제로 한 무제한적인 '자유'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최근 프랑스의 언론인 테러와 관련하여, 프랑스가 내세운 '톨레랑스'즉 관용의 정신이 가진 이면의 계급, 민족 차별 논란과 달리, 네덜란드에서는 영국 여왕조차도 나체 원주민에 합성하는 것을 주저치 않는다. 그 이면에는, 바닷물 범람에 대비하여, 민족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전국민이 합심해야 하는 상시적 위기의 역사가 존재한다. 국가적 재난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허용이 되는 네덜란드 식 '관용' 정신의 출발점이다. 이런 국민적 정서에서, 나체 해변에서 온 몸을 드러낸 남녀의 만남이 가감없이 전해지고, 누드의 몸으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밤 10시 메인 시간대에 방영될 수 있는 것이다. 



느리게, 느리게, 134시간 기네스 기록을 보유한 노르웨이의 슬로우 tv
느리고 심심하면 곧 바로 리모컨을 찾게 되는 우리의 정서와 달리, 노르웨이의 tv쇼는 광고 한번 없이 최대 6박7일간의 생방송을 한다. 그렇다고 그게 특별한 내용도 아니다. 그저 노르웨이 전역을 다니는 크루즈 여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방송 화면은 10분 이상에 걸쳐 한가롭게 풀을 뜯으며 걸어가는 젖소 한 마리를 비춘다. 

이런 슬로우 tv의 시초는 기차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차 여행 과정에 비친 풍경을 고스란히 24시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도 방송이 되겠어?라는 의문과 달리, 노르웨이의 시민들 다수가 그 시간 동안 타 방송사의 오디션 프로그램 대신 이것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착안한 제작진이 다음에 기획한 것이 바로, 기차에 이은 크루즈 여행이었다. 

처음 한가롭게 노르웨이 연안을 비추던 tv화면에 어느 땐가부터 노르웨이의 국기를 든 시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느리게 가는 여객선의 항로를 예측한 시민들이 앞서 그곳에서 배를 기다리며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이어, 연안에서 배를 기다리는 대신, 각종 요트를 타고 배를 따라잡으며 각종 이벤트가 벌어지기 시작했고, 심지어 여왕까지 거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결국 느리게 시작한 크루즈 여행은, 노르웨이 국민 중 320만영이 시청한, 점유율 40%의 대박을 쳤다. 

박재민이 참여한 슬로우 tv는 전국의 합창단이 2박3일에 걸쳐 총 900여 곡의 찬송가를 부르는 이벤트이다. 박재민은 전통있는 교회 남성 합창단에서 솔로로 출발을 함께 하고 , 노르웨이 한 마을 합창단의 일원이 되어 피날레를 장식한다. 그가 함께 한 마을 합창단, 밤이 긴 노르웨이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합창단을 만들어 노래 부르기를 즐겼다고 한다. 2박 3일의 합창 이벤트는 바로 그런 노르웨이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 합창 이벤트에 참가한 사람들 중에는 교도소 재소자도 있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교도소, 우리에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 섬이 고스란히 교도소인 이곳, 재소자는 아담한 오두막에서 한국에서 온 tv를 보며, 각종 생활 편의 기구를 놓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긴다. 하루 종일 노동에 종사한 그는, 거기에 합당한 댓가를 받아, 원하는 물건을 사서, 생활할 수 있다. 그가 재소자라는 건, 가족과 떨어져 이곳에서 생활한다는 제약 뿐이다. 재소자의 사회적 구금보다도, 언젠가 그가 돌아가 사회의 일원으로의 복귀를 우선시 하는 노르웨이 행형 제도가 낳은 산물이다. 

더구나 재소자들은, 합창 이벤트에 참여하기 위해, 단 한 명의 여성 간수와 함께 마을을 찾는다. 그곳 사람들은 전혀 꺼리낌없이 그들을 반긴다. 죄수들과 함께 합창단을 만드는 건, 그들에게 늘상 있어왔던 일이다. 재소자의 경우만이 아니다. 합창단 역시 it업계 종사자에서부터, 의사, 농부, 노동자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농부와 노동자가 낮은 소득에 30%의 세금을 내는 대신, 의사가 그들보다 높은 소득을 가지고 40% 이상의 세금을 냄으로써, 사회적 불평등을 세금을 통한 평등으로 개선한 노르웨이의 사회적 제도가 합창단의 숨겨진 배경이다. 슬로우 tv는 그런 노르웨이의 전통과 정서를 담고자 한다. 죄를 지었건, 짓지 않았건, 혹은 더 가졌건, 덜 가졌건 모두 노르웨이의 일원으로 소리를 모아 함께 노래하고, 생활할 수 있는 나라에서 가능한 예능, 슬로우 tv다. 



총성이 오고가는 전쟁의 와중에도 쇼는 계속된다?
언론 자유가 거의 완전하게 보장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의 예능이 있는 반면, 언론의 자유는 커녕, 언제 전쟁이 벌어질 지 모르는 중동 지역에서도, 쇼는 계속된다.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 공습을 발표한 그날, 중동의 파리 레바논에서는 우리나라의 '슈스케'와 같은 스타 탄생 프로그램인 슈퍼 아카데미가 한참 준비중이었다. 

중동 지역 전역을 대상으로, 10년 째 방영중인, 유럽에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유러비전 송 컨테스트'가 있다면, 중동 지역에는 아랍인들을 대상으로 한 '슈퍼 아카데미'의 전통이 있다. 이 슈퍼 아카데미는, 아랍 지역은 물론 이슬람 권에 있는 북아프리카 국가들 출신의 17명의 참가자들이 노래로 승부를 펼친다. 수니파 국가이건, 시아파의 국가이건, 심지어 국가에서 금지를 해도 몰래, 그리고, 이스라엘의 억압을 받고 있는 팔레이스탄에서조차 이 슈퍼 아카데미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이슬람권의 문화적 유대를 강화한다. 

이라크 출신의 수니파 여성이 '이라크 침공'을 잊지 않은 사람들 덕에 2007년 우승을 거머쥐었고, 자신을 드러내며 노래를 통해 표현하는 이 프로그램 덕에, 쿠웨이트에서는 여성 참정권이 인정되기도 하였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2014ㅕ년 우승자는, 팔레스타인 독립을 향한 그의 호소력있는 소감 덕분에 전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저 예능 프로그램을 넘어, 사회적 자각의 분출구로 작동하고 있는 슈퍼 아카데미는 여전히 중동 전역의 인기 프로그램으로 진행 중이다. 

이렇게 언론 자유의 1위 국가에서 그 국가적 정신인 '관용'과 '평등'을 담보로 한 예능, 그리고 그 정반대편에, 억압과 전쟁 위기 속에서, 자유를 부르짖는 중동의 예능, 극과 극의 예능을 보면서, 자연스레 되돌아 보게 되는건,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예능이다. 과연, 외국인에 비춰진, 한국의 예능은, 대한민국의 어떤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세계의 다양한 쇼 프로그램을 찾아나선 여정, 결국, 그 귀결은, 우리 예능의 본질을 묻는 것으로 귀결된다. 

by meditator 2015. 2. 9. 10:32

2월 7일 저녁 8시 30분부터 새롭게 선보인 jtbc의 새 예능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한참 인기몰이 중인 <비정상 회담>의 스핀오프(spin-0ff)와 같은 프로그램이다. <비정상회담>에 출연중인 mc유세윤을 비롯하여, 외국인 패널 장위안, 기욤 패트리, 알베르토 몬디, 줄리안 퀸타르트, 타일러 라쉬 등의 다섯 외국인들이 친구가 되어, 각 나라의 친구의 집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이다. 


7일에 방영된 첫 번째 편은 지도에도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 중국 안산에 위치한 장위안의 집을 찾아 떠나는 우여곡절의 여정을 보여주었다. 중국인이라는 자신감하나를 내세웠지만, 막상 한국인인 우리도 내가 사는 지역을 벗어나면 말이 통한다는 장점 외에는 역시나 이방인임에는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중국인 장위안에게도 똑같이 벌어지고, 그 하나만을 믿고, 중국인 친구가 있다는 자부심으로 시작된 여행을 첫 단추부터 여행지의 친구들을 당황하케 만든 게 새롭게 시작한 <내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재미있는 설정이다. 거기에 실제 중국인이지만 자신이 사는 지역을 떠나보지 않은 장위안보다, 이탈리아인이지만 중국에서 생활하고, 중국 여행을 많이 한 알베르토가 중국 여행에 대해 더 많이 아는 뜻밖의 상황이, 그래서 장위안을 중심으로 뭉친 친구들과, 알베르토를 믿고 뭉친 친구들 사이에 막상막하의 대결이 흥미진진해지는 지점이, 역시나 이 프로그램의 생각 외의 복선으로 등장한다. 

이렇게, 최근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jtbc의 예능은, 이미 jtbc를 통해 일정 정도의 성공을 담보한 인물들, 내용들을 재활용함으로써, 새로운 예능이 담보할 불투명함을 극복해 나가고 있다. 


우선 가장 돋보이고 있는 것은 인물의 재활용이다. 
<비정상회담>에서 인기를 끌었던 장위안 등 다섯 인물들을 고스란히 주인공 삼아 기획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는 물론, 최근 새롭게 선보이고 있는 예능에서 활약하고 있는 인물들은 이미 타 프로그램에서 눈도장을 찍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강용석이다. <썰전>을 통해 '고소'로만 각인된 이미지를 어느 정도 리메이킹한 강용석을 그의 아들들을 내세워 <유자식 상팔자>의 mc로 등장시켜, 야욕에 불탄 정치인을 그저 자식을 키우는 평범한 아버지 상으로 재탄생시켰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역시나 <썰전>에서 촌철살인의 한 마디로 공신력을 얻은 평론가 허지웅을 그의 쿨한 이미지를 내세워 뜻밖에도 19금 연애 코칭 프로그램인 <마녀 사냥>에 등장시켜, 젊은 여성들의 아이돌 스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런 허지웅의 인기는, 그 여세를 몰아,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의 게스트를 넘어, 신해철의 부재로 자중지난을 겪고 있는 <속사정 쌀롱>의 구세주로 등원시켜 프로그램의 안착에 큰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미 <속사정 쌀롱>에 합류한 진중권과 허지웅,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 혹은 냉철한 호흡이, 여느 토크쇼와 다른 지평을 열여가고자 하는 <속사정 쌀롱>의 색채를 강화시켰다. 

<마녀사냥>의 인기를 힘입어, 이제는 종종 로맨틱한 드라마의 까메오로까지 진출한 허지웅만이 아니다. 역시나 연애 고수로 같은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성시경 역시, 예의 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 <비정상 회담>의 mc로 나선데 이어, 연애 능력자의 컨셉을 유지하는 <나홀로 연애>까지 섭렵하도록 만들었다. 여러 연배의 남성 연예인 들 중, 독보적인 연애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그의 컨셉은, 어설퍼 보일 수 있는 <나홀로 연애>의 바로미터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를 통해 진솔함 예능감을 선보인 강남이 어눌한 한국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속사정 쌀롱>에 합류하면서 예능의 전성기를 열어간 것 역시 다르지 않다. 
강남 만이 아니다. 새로운 학교를 갈 때마다 새로운 게스트의 공급이 필요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역시, 허지웅을 비롯하여, <비정상회담>의 외국인 게스트들의 여러 패널들이 등장하여, 심심하던 학교 예능의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마녀 사냥>에 뒤늦게 합류한 유세윤 역시, 뒤이어 <비정상회담>에 이어,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까지, 음주 운전으로 인한 잠정적 휴식 이후, jtbc를 통해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중이다. 


인물들만이 아니다. 
프로그램의 설정 역시 앞서 성공한 프로그램의 그것들을 재활용하고 있다. 공중파에서 tvn의 성공적 컨셉인, 연예인들의 해외 여행기나, 오지 생활기, 그리고, 직장인의 애환을 전혀 꺼리낌없이 본딴 프로그램들을 내세우면서, 모방작의 오명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전하고 있는 반면, jtbc는 이미 어느 정도 신뢰를 얻고 있는 자사의 프로그램을 조금 변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미 언급된 바, <비정상 회담>의 스핀 오프 격으로 재탄생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외에도, 1월 31일 선보인 <나홀로 연애중> 역시, <마녀사냥>의 연애 코칭을 버전 업시킨 프로그램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마녀 사냥>에서 남의 연애를 상담하던 연예인들이, 이제 직접 연애의 현장에 뛰어들어, vcr 속의 가상 연인을 상대로, 각자 자신만의 연애 담론을 펼쳐가며,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것이, <나홀로 연애중>의 관전 포인트이다. 

프로그램의 전체 내용을 통째로 변주시켜 재활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분 부분 활용하는 경우도 종종 등장한다. 심리 토크쇼라는 주제를 내세우고, 프로그램의 안착을 위해 조금씩 변화를 계속 가져가고 있는 <속사정 쌀롱>의 경우, <썰전>에서 이 주의 포토제닉을 통해, 그 주에 화제가 된 사건, 인물들에 대해 정치 평론을 하고 있는 것을 인용하여, 이 주의 말을 통해 한 주간 화제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심리를 분석하는 시간을 가진다던가, <마녀 사냥>의 사연을 본따서, 역시나 '속사정 쌀롱 사연'을 통해 우리 곁의 심리로 '심리학'의 심리를 우리 곁의 '심리'로 끌어다 앉히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공중파가 어설프게 케이블에서 화제가 된 인물들을 재활용하거나, 모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면서도 인물의 이미지를 그저 삽입하는데 그치거나, 생뚱맞은 아류로 변질되는 것에 비해, jtbc의 경우, 성인용 멘트에는 <마녀 사냥> 고유의 초록색 기운을 등장시키듯, jtbc 고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연결하면서, 그 정서를 유지하고, 친밀감을 확대시켜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공중파의 새 예능이 번번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외면받고 있는 시점에서, 이러한 확장이 지금까지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안착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을 담보해 주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우려의 점도 있다. 끊임없이 변화되고 있는 연예계 트렌드에서, 한 인물에 대한, 혹은 한 컨셉에 대한 대중의 변덕이 과연 어느 정도 유지될 수 있을 가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혹여나 한 컨셉, 한 인물에 대한 대중의 싫증이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니라, jtbc의 여러 프로그렘에 대한 권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도 정겨워 보이지만, 그것이 어느 시점에서는, 어디를 봐도 뻔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성공 전략의 숨겨진 이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jtbc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신선한 충격파가 무뎌져 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 지점은 놓쳐서는 안될 함정이다. 


by meditator 2015. 2. 8. 11:20

언제부터인가 <마녀 사냥>은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금을 내세워, 금기시 되어있던 연예의 속사정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마녀 사냥>은 그 존재만으로도 파격적이었지만, 2013년 8월에 시작하여 1년을 훌쩍 넘긴 <마녀 사냥>의 연예 코칭은 이제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녀 사냥>의 이슈는, 프로그램 자체의 연예 코칭보다, 게스트가 누가 나와, 게스트와 mc간에 어떤 해프닝이 일어났는가가 화제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한고은과 허지웅의 '썸씽'이 그것이며, 연애 고수 mc들을 넘어서는 최화정의 존재가 그것이다.

 

그렇게 정체기에 들어선 <마녀 사냥>이 2015년 연중 기획으로, 홍콩을 떠나갔다. '홍콩', 왜 하필 홍콩인가?라는 이유를 들기 위해, 과거 mc였던 샘 해밍턴 질문을 복기하고, 거기에 대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는, 그래서 결국 더 구차해지는, 하지만, 이른바 '음담패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홍콩'의 상징성을 부각하는 장소로서의 홍콩행을 각인시켰다. <마녀 사냥>다운 여행이다.

 

홍콩의 상징성을 넘어, 연인들의 여행지로 유명한 홍콩에서, 네 mc들은 미리 맛보는 연예 코스로서의 홍콩행을 부각시킨다. 연인들이 함께 하면 좋을 거리를 걸어보고, 둘씩 짝을 지어, 연인들이 해볼만한 것들을 해보고, 홍콩에서만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아 다니고, 카니발 중인 곳에 가서, 대관람차와, 고공 놀이기구를 타본다. <마녀 사냥>답게 홍콩 한 노천 까페에 앉아 그간 타인의 연예 코칭 대신, 각자의 연애 스타일에 대해 탐색해 보기도 한다.

 

홍콩에서 뮤직 비디오를 찍기도 한 성시경의 능숙한 에티듀드, 즐기는 여행지로 자주 찾는 유세윤의 자유로움, 그리고 중년이 되도록 홍콩을 처음 가보는 신동엽의 설레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이번 특집을 살린 것은, 예능인으로서 거듭나고 있는 허지웅의 면면이다. 이미 jtbc의 황태자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jtbc의 각 예능에서의 두각을 나타내고 있지만, 홍콩 특집에서, 허지웅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그저 심심하고 뻔한 여행 예능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 경제

 

본의 아니게, 허지웅은 홍콩행 출발지에서 부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완벽주의적인 그의 면모와 다르게 여권을 놓고 와서, 유세윤이 분량을 부러워 할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또한 그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찾는 여행지 중 하나인 홍콩이, 영화 평론가였던 그의 직업으로 말미암아, <중경삼림>과 <해피투게더> 등 대표적 홍콩 영화의 ost가 어색하지 않은 추억의 장소로 거듭났다.

어디 그뿐인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른 호텔에서는, 이런 건 편집할 거야 라며 위세도 당당하게 팬티 바람으로 활보하고, 웃통을 벗어제끼는 노출씬까지 마다하지 않는 눈요기꺼리도 제공해 주었고, 그의 페이스북에서나 조우했던 '허세 가득한' 셀카를 어느 연예인못지 않게 연출해 내었다.

무엇보다, 화룡점정은, 예능의 꽃인 고공 놀이기구 타기이다. 흔히 겁이 많은 여성 연예인의 전유물인 고소 공포증이 뜻밖에도 허지웅의 것이 되어, 다른 세 mc들의 회유와 협박으로, 'pd가만 안둬'등의 방언이 난무하는 가학적 즐거움을 선사했다.

허당에, 노출에, 절규에, 이른바 예능에서 보여줄 수 있는 갖가지 캐릭터를 단 한 회만에, 특집답게 허지웅 개인이 고스란히 전해준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면, 그저 <마녀 사냥>은 홍콩 여행을 간 평범한 여행 예능이 되었을 것이다. 여전히 야외 버라이어티에 어색한 신동엽,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 든지 예능적 재미를 선하하기 위해 쉴새없이 고군분투하고, 성시경, 유세윤이 예능에서 갈고 닦은 내공으로, 제작진이 내걸은 연인들의 홍콩 여행 코스프레를 충실히 하는 한편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마녀 사냥>의 정체성을 깊게 한 것은, 뜻밖에도 연인 코스프레를 하며 탄 대관람차에서의 진솔한 허지웅의 이야기들이었다.

 

가장 쿨할 것 같은 캐릭터를 가진 허지웅이, 가장 진솔하게, 선배 mc 신동엽에게 판을 깔아주어서 감사하다고 전하고, 나이가 들면서, 신동엽처럼 후배들을 위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어른의 존재가 새삼스럽게 존경스럽다고 했을 때, <마녀 사냥>의 홍콩행은 그저 즐기고 먹는 여행에서, 함께 오랜 시간을 나누었던 벗들의 MT같은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낯선 MT장소에서, 밤이 이슥해서, 촛불을 켜고, 혹은 한 잔 술을 나누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속 이야기를 나누듯, 단 15분의 연인을 위한, 공중에서 흔들거리며 홍콩의 전경을 즐기는 대관람차에서 허지웅은 진솔하게 풀어낸다.

 

허지웅이란 캐릭터는 다수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심지어 최근에는 드라마의 단골 까메오까지 진출하고 있지만, <속사정 쌀롱>의 윤종신의 '아슬아슬하다'는 표현처럼, 언제라도 이 '속물적'인 혹은 '위선적'인 TV를 탈출해 도망칠 거 같은 경계인의 이미지를 전한다. 그래서 항상 그 누구보다도 거리를 두고, 쿨하게 전달하는 그의 발언들이, 그에 대한 극도의 호불호를 낳기도 한다. 그런 허지웅이, 나이가 들면서,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논하고, 서슴없이 신동엽과 성시경과, 유세윤이 좋다고 말할 때, 그 진솔함의 깊이는 색다른 감동을 전한다.

 

덕분에, 그저 이제 조금씩 낡아져 가던 <마녀 사냥>이란 프로그램이, 허지웅이 먼저 자신을 허물고, 그의 허물어짐에, 신동엽이 응답하고 어우러지면서, 그저 남의 연애사에 간섭하는 MC들이 아니라, 사람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면서, 함께 오래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기대고 싶은 벗들이 있는 곳으로 오래오래 남아주기를 바래게 된다. 절묘하고도 탁월한 연중 기획이다.

by meditator 2015. 2. 7. 06:22

23회, 광해(서인국 분)를 폐서인 시키고자 하는 선조에게 광해가 일갈한다.

"아버님은 평생, 왕의 얼굴에 매달리셨습니다. 하지만, 군주가 진정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군주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백성들의 얼굴입니다"

광해의 이 단호한 왕의 얼굴에 대한 정의가, 바로 드라마<왕의 얼굴>이 끈질기게 추구하고자 한 주제 의식이다.

 

그리고, 그 주제 의식에 걸맞게, 선조(이성재 분)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왕이 된 광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간 백성들의 등골을 휘게 만들었던, 방납의 폐해를 없애고자 대동법을 실시한 것이다. 객주 장수태(고인범 분)의 단적인 예처럼, 산골에 부과된 전복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공물을 내기 위해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장수태와 같은 상인의 전횡과, 관료들의 이권을 견뎌내야 했는데, 이렇게 가장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방납을, 토지 소유에 근거하여, 각 얼마를 정하는 대동법으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광해가 방납의 폐해를 들고 나오자, 그를 지지했던 대북파의 거두 이산해(안석환 분)는 만류한다. 조선이 세워진 이래 모든 왕들이 그 폐단을 없애고자 하였으나, 그 어떤 왕도 성공치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 이산해의 저지에, 광해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는, 바로 공과 같은 대신들이, 방납의 이권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냐고. 그러면서, 각자 소유한 토지에 근거하여, 공평하게 쌀로 세를 대신 부과하는 대동법을 실시하겠다고 밝힌다.

 

내가 왕이다  서인국이 왕의 얼굴에서 광해를 맡아 훌륭하게 소화했다. /KBS2 왕의 얼굴 방송 캡처

the fact

 

드라마의 한 장면이지만, 보는 시청자들은 이 장면에서, 우리가 사는 현재가 고스란히 짚어진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이른바, 증세 논란이 그것이다. 즉, 복지 국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결국 증세를 해야 하는데, 과연 그 대상이 누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갑론을박 각 입장별로 의견이 갈리는 것이다. 연초가 되자마자 급락한 대통령의 지지율의 상당 부분이, 유리 지갑이라 일컬어지는 월급쟁이들의 연말 정산의 달콤한 즐거움을 앗아갔던 탓이 큰데, 거기서 사람들이 반발하는 이유는, 바로, 정작 돈을 내야 하는 부자들에게는, 각종 혜택을 주면서, 정작 만만한 사람들에게 다시 세금을 뜯어 가고 있다는 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결국, 날이 갈수록,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 지고 있고,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21세기 자본론]의 피케티의 주장처럼, 부유세만이 해결책인데, 그 해결책은 외면한 채, 엄한 담뱃세 등으로, 서민의 등골을 다시 빼먹는다 생각하니, 사람들의 마음이 다 얼어붙어 버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드라마 <왕의 얼굴>은 이른바 불운의 왕세자 광해를 통해, 진정한 리더가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를 찾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마지막 회 보란듯이, 광해는 가진 땅에 근거해 세를 부과하는, 이른바 부자 증세의 효과가 드러내는  대동법을 통해, 이 시대의 리더가 추구할 해법을 제시한다.

 

단 한번도 거역할 수 없었던 아비 선조에게, 백성의 얼굴을 일갈하고, 왕이 되자마자,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밝은 얼굴을 살폈던 광해, 그가, 그렇게 백성을 진심으로 생각하는 리더에 도달하기 위해, 거쳐왔던 길은 험란했다.

그 자신이 적통이 아니기에, 늘 왕의 자격이 부족하다 생각했던 아비 선조의, 노회한 정략에 휘말려, 적통도 아니고, 심지어 장자도 아닌 처지에, 혹여나 왕의 자리를 넘볼까 시험의 대상이 되고, 밀려드는 왜군 앞에 먹잇감처럼 왕세자가 되었던 광해, 하지만, 그는 오히려 아비의 시험에 들어 폐서인이 되어 궁밖에 내처지고, 홀로 한양에 남아 왕가의 대표자로서 백성을 돌보며, 진정한 리더로서 성숙해 간다. 그래서, 마지막, 평생을 나라를 좀먹은 선조가 나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 있냐며, 왕의 자격에 타고난 신분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반문하는 김도치에게 당당하게, 그것은, 권력과 재물이 아니라, 책임이라며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드라마 <왕의 얼굴>은 최근 학계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개혁 군주로서의 광해군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거기에,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한 거울로서, 진정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로서의 광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인조 반정을 통해 비운의 왕이 되고만 광해의 운명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배우듯, 폐륜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왕이 되자마자 실시했던 진정 백성을 위한 대동법 등의 개혁적 정책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드라마의 여운으로 남긴다. 그것을 위해, 인목 대비는,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화신이 되었고, 이산해 등의 관료들은 가렴주구에 물든 권신 세력으로 묘사되었다. 이렇게 왕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개혁적 정책과, 정통성을 승인하지 않는 무리들이 결국 광해를 왕좌에서 밀어냈을 것이라는 것을, 23회의 여정 속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드라마는 광해라는 인물을 구현해 낸다.

 

그리고 이렇게 백성을 생각하는 리더로 재탄생되는 광해의 맞은 편에, 평생, 왕의 얼굴을 가지고 싶었지만, 정작 왕의 얼굴에 집착만 했을 뿐, 전란이 나자마자 자기 한 몸 살고자 내빼기 바빴던, 심지어 자신의 왕좌를 지키기 위해 피붙이조차 의심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편협한 인간 선조를 대비시킨다. 또한, 자신의 가족을 국가에 의해 잃고, 타고난 운명을 거부하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하지만, 결국은 그것이 개인의 야욕으로 귀결되고만 김도치란 또 다른 인물을 대비시킨다. 이렇게 왕이고, 왕이 되고자 했고, 결국 왕이 된 세 인물들의 행적을 통해, 올바른 리더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물론, 이렇게 반면교사로 삼을 만한 좋은 주제 의식에도 불구하고 사극으로서 <왕의 얼굴>이 가진 아쉬운 점은 남는다.

무엇보다, 굳이 '관상'이라는 소재를 들어 왕의 얼굴에 천착함으로써,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어렵사리 에둘러 돌아와야만 했다. 선조를 왕의 관상에 집착하는 인물로 그려낼 것이 아니라, 담백하게 정통성을 지니지 못해 의심과, 변덕으로 자신의 보위를 유지하는 불완전한 인간으로 그려냈었다면 좀 더 드라마적 개연성이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관상'이란 픽션을 끌어 들임으로써, 광해라는 캐릭터가 뜬금없이 관상감의 과거를 보게 만든다거나, 결국 김개시가 되는 가희를 그려내는데 있어 역사적 사실을 비껴가는 묘사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게 된 것이다. 심지어, 광해군대에 이르러서까지 그 권세를 유지했던 김개시를 선조를 독살하고, 광해의 곁에서 물러나는 순정의 주인공으로 만듦으로써 왜곡의 수순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사극 <왕의 얼굴>의 옥에 티이다.

 

또한,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로 거듭나는 리더로 구현하기 위해, 광해라는 인물을 지나치게 도덕적인 히어로로 그려낸 것 역시 아쉬운 점이다. 불가피하든 어쨌든 결국, 자신의 형을 비롯하여, 인목왕후, 영창대군, 그리고 결국 자신의 동지와도 같던 허균까지 죽음으로 몬 군주가 광해일진대, 폐주로서의 그를 새롭게 모색하는 것이, 정반대로 영웅으로 미화하는 경지에 이른 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흑백 논리적인 비약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차라리, 깨닫고 고뇌하는 인간 광해였다면, 조금 더 현실감있는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5. 2. 6. 06:12

예를 들자면 그렇다. 

감자란 그저 우리가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먹거리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그 속에 감자 농사 흉작으로 인한 아일랜드의 기근으로 인한 참상과, 오늘날 아메리카를 이루어 낸 이민의 역사가 드러난다. 그저 몇 알 뿌리는 것만으로도 음식의 풍미를 달리만드는 후추의 역사를 훑어보면, 육식을 탐한 서양인의 식탁을 위한 인도 항로의 개발을 위한 각 유럽 국가의 해양 도전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해양 도전은 신대륙의 발견과, 곧 신대륙 원주민의 잔혹사로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접하는 먹거리들의 이면을 들추면, 그것을 소비한 인간의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저 더 맛있는 먹거리에 집중하다 보니, 우리 식탁에 올라온 그것들의 전사를 쉽게 간과한다. 

명동영양센터주소.jpg

그저, 맛있는 먹거리를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려니 했던 <수요 미식회>는 3회 복고 치킨에 이르르면서, 프로그램의 영역을 '역사'로 확장한다. 야심만만하게, <라디오 스타>를 겨냥한 시도가, 그저 식언이 아닌, 프로그램의 깊이가 느껴진다. 그저 요즘 우리가 쉽게 접하는 다수의 프랜차이즈 치킨이 아니, 굳이 '복고'라는 명칭을 치킨 앞에 붙인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수요 미식회>에서는 몇몇의 맛집을 소개한다. 하지만 복고 치킨의 맛집 소개는, 그저, 예전 방식의 치킨을 소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치킨을 통한 서민 먹거리의 전사를 훑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 시작은, 이제는 한국 소개 책자에도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다는 명동의 치킨집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저 명동의 치킨집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저 전기 구이 통닭에 불과한 그 치킨 집이 당대에 가장 땅값이 비싸다는 명동에 3층 건물을 세우고, 그곳의 통닭을 들고 가는 것만으로도 마치 '루이비통' 가방이라도 든 듯이 으스댈 수 있었는지의 그 세월을 그려낸다. 
닭 한 마리를 먹는 것이 하루치 일당을 소비하는 것에 맞먹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올라간 닭에 대한 추억은, 시장통에 닭장을 두고, 손님이 주문하면 바로 닭을 잡아 대령하던 재래 시장의 닭집에 대한 추억을 훑고, 학창 시절 소풍이라도 가면 선생님께 대접할 가장 큰 접대가 통닭이던 그 시절의 치킨을 되살린다. 닭이 귀해, 그저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닭도리탕이나, 백숙이 가끔 밥상 위에 오르던 시절의 치킨은 어린 김유석에게 눈물나게 먹고 싶은 특식이었던 그 시절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미식회'답게 맛에 대한 평가도 놓치지 않는다. 20대의 박용인이 젊은 사람들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자, 황교익 평론가는 역시나 냉정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양념과 기름으로 범벅이 된 현재의 치킨이 사실은 얼마나 밋밋하고 맛이 없는 음식인가를 알기 위해서 한번쯤은 가볼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삭한 외양과, 그 속에 밋밋한 살 맛으로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은, 미군 부대 앞에서, 미국의 식문화를 가장 앞장서서 받아들인 의정부 치킨집으로 옮겨가면, 드디어 기름과 본격적인 치킨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저 우리가 치킨이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반죽 여하에 따라, 기름에 따라, 혹은 기름을 튀기는 용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음식으로 재탄생될 수 있는가를 소개된 치킨집을 통해 알 수 있게 한다. 

치킨 한 마리가 가장의 권위를 세워주던 시절을 지나, 미군 부대 앞에, 미국식을 흉내낸 치킨집을 넘어, 이제 치킨은, 70년대 문인들의 문학적 산실의 역할까지 맡게 된다. 반포동의 치킨집을 소개하기 위해,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 졸지에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으로 변형되었고, 실제 그 집에 즐겨 들렀던 김현 시인의 영전에 바치는 황동규 시인의 시가 읊어졌다.

대설날-고 김현에게
(전략)
오늘 양평으로 네 잠들어 있는 곳에 가/찬 소주 대신/가슴에 품고 온 인간 체온의 청주 한 잔 땅에 붓노니/ 그 땅이 네 무덤이건/ 우리가 자주 들린 반포 치킨이건/ 그냥 지나쳐 버린 어슬어슬 산천이건 
(후략)

겨우 치킨 한 마리 따위를 소개하기 위해, 당대의 최고 문인의 시가 감히 동원되는 것이 하등 이상하지 않은 시간이다. 오히려, 그저 치킨이 아니라, 출연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입맛이란, 맛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왔던 추억의 그것의 다른 명칭이라듯이, 치킨을 통해, 근대화의 역사 속에, 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기에, 김유석이 '내 스탈이야'라고 고집하는 의정부의 치킨 집과, 20대의 박용인이 고집하는 학교 앞 분식집의 맛을 재현한 신사동의 치킨집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이, 살아온 세대와 추억이 다름의 결과도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또한 거기서 더 나아가 굿굿하게 치킨은 맛이 없다를 주장하는 황교익 평론가의 원칙론과, 그러기에, 거기에 우리 고유의 양념을 곁들여 세계인이 반하는 또 하나의 한류를 만들어 내는 음식 문화를 주장하는 홍신애 요리 연구가의 주장에 고개가 제각가 끄덕여 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지난 시간 '칼국수'를 통해, 서민의 고단한 삶과, 정치인의 이합집산의 교차로에 있던 칼국수라는 가장 싼 음식이기도, 혹은 귀한 별미일 수도 있는 음식을 들여다 보더니, 이제 '복고 치킨'을 통해, 우리의 음식 문화사의 한 면을 건들여 본다. 가보지 않은 맛집이나 알아볼까 궁금해 들여다 본 프로그램에서, 뜻밖에 잊었던 추억과, 세대 별로 달라진 치킨의 세태까지 엿보게 된다. 맛있는 탐식을 넘어, 문화가 된, 먹거리를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by meditator 2015. 2. 5. 05:33

제2의 모래시계라는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월화 공중파 3사 드라마 중 송지나 작가의 <힐러>는 제일 후속작 <빛나거나 미치거나>에도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하는 중이다. 이제 종영 단 2회를 남겨두고, 80년대에 얽힌 과거사가 모두 밝혀지고, 김문호(유지태 분)는, 썸데이를 통해, 그 진실을 폭로하였건만, 어쩐지 막상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맥이 뚝뚝 끊긴다. 분명 심각하고 진지한 것인데, 그 심각함의 톤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이렇게, 80년대의 악연이 풀어지는 가운데,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두 남녀가 있다. 자신의 아버지 서준석(지일주 분)이 사랑하게 된 채영신(박민영 분)의 아버지 오길한(오종혁 분)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된 서정후(지창욱 분)는 괴로워한다. 역시나 자신은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인물이라 자책한다. 하지만, 김문호의 도움으로, 그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살인자도 비겁한 사람도 아니었다는 진실에 조금씩 다가간다. 역시나 그저 버림받은 줄로만 알았던 채영신 역시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서정후처럼 한때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도 하지만, 역시나 사랑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극복한다. 
그런데, 바로 이 로미오와 줄리엣 커플이 문제다. 
극 초반, <힐러>라는 작품명답게, 스파이처럼 동분서주 신출귀몰하던 서정후는, 자신이 힐러라는 걸 채영신이 알게 되고, 그녀와의 사랑이 결실을 맺자, 힐러로서의 삶을 포기한다. 대신, 채영신 지킴이로써, 그녀의 곁에 머물고자 한다. 

80년대 부모들의 얽힌 인연이 낳은 서정후와, 채영신의 슬픈 운명,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분명, 그 사랑이 역사성까지 지니며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만나기 시작하면서, 드라마는, 역사적 명제를 풀어가고 있는 극의 사명을 잊은 채 종종 '로맨틱'물이 아닌가 싶게 전혀 다른 드라마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사부의 죽음을 맞이하고 사부가 만들어 준 아지트에 칩거한 서정후, 힐러를 찾아간 영신, 거기까지는 구원의 여인으로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아지트에서 두 사람이 벌이는 애정 행각은, 극의 흐름을 끊은 채 마치 무릉도원에 간 사람들처럼, 세상에 없는 행복한 애정씬을 보인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심각한 사명을 띠고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도 거침이 없다. 심지어, 2월 3일 자 방영 분에서는, 어르신의 집에서 잠이 든 서정후를 찾아 다짜고짜 어르신의 집으로 뛰쳐 들어간 영신이, 졸고 있는 정후를 자기 무릎에 뉜 채 한 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거기가 어딘가, 목숨이 촌각을 다툴 수 있는 사지인데, 거기서 한가롭게 잠에 취한 서정후를 무릎에 눕히고, 영신은 애정에 겨운 대화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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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송지나 작가는, 심각한 역사적 이슈를 드라마로 풀어내는 무게감을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로 완화시키고자 하는 듯하다. 하지만, 최근 진행되고 있는 <힐러>에서, 서정후, 채영신의 사랑 이야기는 그런 완충적 역할을 넘어서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문해볼 정도가 되고 있다.
마치 드라마는 '미드' 등에서 , 전형적으로는 <007> 시리즈에서 흔히 보이듯, 적나라한 남녀의 애정씬을 염두에 둔 듯, 두 사람의 애정씬을 소모하고자 하지만, 그것이, 흔히 '미드'의 소모적 눈요기씬이라기엔, 지금 <힐러>라는 드라마에서 서정후와 채영신의 애정씬은, 부모 세대의 비극으로 인한 극적인 사랑의 운명을 넘어서, 극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실제, 2월 3일 18회, 드라마는, 과거, 서정후의 부 서준석과, 채영신의 부 오길한이 함께 정치자금이 오가는 현장을 취재하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오길한이 어떻게 희생되었는지, 그것을 보고, 서준석은 그것을 알리는 과정에서 어떻게 희생되었는지을 밝혔다. 서정후와 채영신을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었던 비극의 전사가 18부에 이르러서야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전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 과정의 목격자, 김문식이, 처음엔 잡혀가서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말을 바꾸기 시작하면서, 결국은, 그것을 자신의 입신양명에 이용하기 위해 적극적이 되는 과정을 차근차근 그려 냈었다. 오늘날 서울 시장 후보로 나와서, 80년대 자신이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며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된 김문식의 전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그의 동생 김문호는, 그런 형의 이면을, 그리고 형의 비겁으로, 억울한 죽음이 된 형의 친구들, 그리고 그의 또 다른 형들의 죽음을, 게릴라 형식으로, 썸데이를 통해 드러낸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 사건들이, 드라마에서는, 서정후와 채영신의 사랑 이야기에 눌려 조역처럼 작용한다. 마치, 그런 과거의 사건들은 두 사람의 애정을 가렸던 한 점 구름처럼만 여겨진다. 

그리고 <힐러>의 진짜 딜레마는 이것이다. 송지나 작가는, 80년대 이 땅을 뒤덥은 비극적 역사와, 거기에 임했던 다양한 군상의 인물들의 역사를 통해, 그들, 그들의 동생, 그리고 그들의 아들, 딸 등을 통해, 해결되지 않은 역사가 오늘에 있어서도 어떤 질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가를 풀어내고자 하는데, 정작 드라마는, 방점을 어디에 찍을 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가 내세운 주인공은, 20대의 젊은 남녀들이고, 그리고 그들이야 말로, 어른들 세대의 질곡을 해결할 세대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그것을 풀어내는데, 젊다보니 사랑도 해야 하고, 뭐 그런 처지다. 그렇게 젊은 세대를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정작, 지금 과거의 질곡을 풀어내기 위해, 메이저 방송사의 앵커직마저 때려치우고 나와서, 찌라시 언론이었던 썸데이를 통해, 형들이 하던 방송으로 21세기판 해적 방송을 하는 김문호의 도전은 항상 한 켠으로 밀려나곤 한다. 정작, 드라마가 벌이는 싸움은, 거대 언론의 수구가 된 형 김문식과, 그런 형에 대해, 또 다른 방식의 언론을 통해, 실현 가능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김문호의 게릴라전인데, 그런 주된 싸움의 방식이, 주인공이 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의 들러리가 되는 느낌이 드라마를 보다 보면 종종 들곤 한다. 차라리, 김문호가 주인공이 되어, 싸우고, 두 남녀 주인공이 거기에 양념처럼 버무려진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다면 좀 더 극의 주제가 살아날 텐데, 번연히 드라마는, 갈 길을 헤맨다. 

거기에 덧붙여, 이른바 '어르신'이라는 상징적 악의 존재도 피상적이다. 어르신(최종원 분)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80년대도 그렇고, 21세기가 된 현재에도 그렇고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어르신으로 존재하는, 그 정체가 불분명하다. 권력의 파워가 몇 번을 명멸하는 과정에서, 여전히 피상적인 '어르신'으로 대한민국의 권력을 규정하는 것 역시 <힐러>의 딜레마이다. 18회, 드디어 썸데이에 대한 검찰 , 세무, 심지어 썸데이 대표 부인이 하는 치킨집에 대한 세금 폭탄 등의 구체적인 제제가 등장하지만, 그 이전에는 맘에 들지 않으면 없애 버리는 원천적인 응징이 드라마의 주를 이루었다. 현대 세계의 시스템화된 악에 대해 드라마는 피상적으로 밖에 그려내지 못한다, 그러니, 결국, 다시 18회 마지막, 영신 앞에 등장한 해결사 킬러로 극의 돌파구를 해결하려 든다. 이제 세상은 킬러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한 사람 정도는 없앨 수 있는 조직화된 악의 시스템을 갖춘 세상에서, 여전히 <힐러>는 그 예전의 원초적 해결 방식으로,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고자 한다. 역사를 논하고자 하면서, 정작 역사의 변화에 대해 둔감하다고나 할까. 이런 점들이, 드라마 <힐러>를 어딘가 붕 뜬 사회 고발극으로 만들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에서 부터 이어진 대한민국의 비리 권력의 역사, 그리고, 거기에 끊임없이 도전해온, 그리고 지금도 도전 가능한 언론의 기능, 그리고,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시도하고자 한 송지나 작가의 열정이 무색해 지지는 않는다. 부디, 마지막까지 그 본진을 잃지 않고, 훌륭한 마무리를 해주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5. 2. 4. 11:11

마지막으로 김준(이수혁 분)을 찾아간 장희태(엄태웅 분)는 '고맙다'고 말한다. 

그저 '아내'와 어머니'로만 바라보았던, 자기 꺼였던 사람들을, 김준으로 인해, 한 여자, 한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일리있는 사랑>의 주제가 단적으로 표현된 장면이다. 

희수(최여진 분)가 죽은 후, 희수의 빈 침대에 누워 본 일리(이시영 분) 역시, 나즈막하게 말한다. 나도 희수 언니와 다르지 않구나, 지난 7년간 숨만 쉬고 살고 있었구나 라고 말한다. 
흔히들 말하듯 결혼이 사랑의 감옥이라 표현되듯이, 김일리는, 장희태의 아내로 산 7년 동안 그녀 김일리를 죽이며 살아왔다는 것을 7년이 지난 후, 김준을 사랑하고 나서야, 그리고 그 사랑의 댓가를 혹독하게 치루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걸, 장희태는 너무 미안해서 그저 사랑이라고 치부해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일리 역시 김준을 만나 그 마지막 날, 역시나 김준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장희태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다 저마다 '일리'가 있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일리있는 사랑>이 사랑을 일리있게 만들기 위해 희태의 어머니에게는 '치매'라는 천형을 선사했고, 장희태와 일리에게 죽음의 문턱에까지 갈 뻔한 위기를 주었다. 결국,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빠졌던 남자에게 빠지는 해프닝을 벌이고, 각 상대방이 죽음으로 세상을  떠날 위기에, 그리고 가족 중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고서야, 일리의 사랑은 일리있는 사랑이 되었고, 부부는 성숙해 질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리있는 사랑'은 실현불가능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엑스포츠 뉴스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이란 상투적인 주례사 이후, 아니,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하지 못해도, 심지어 요즘은, 연애를 하기만 해도, '내꺼'라는 소유욕이 발동하여, 데이트 폭력이란 단어마저 상용화되고, 내 껀데 하면서 칼부림이 심심치않게 뉴스 시간을 차지하는 세상에, <일리있는 사랑>의 주장은 허무맹랑하기까지 하다. 백 번을 양보해도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게도 된다. 

하지만, <일리있는 사랑>은 우리가 딛고 사는 그 단단한 고정 관념의 껍질을 톡톡톡톡 부숴버린다. 아주 단단한 껍질이, 아주 미세한 송곳으로 구멍이 뚫리듯, <일리있는 사랑>의 나직한 수사들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결혼이라는 제도로 우리가 치부하고 있는 것들의 속내가 얄궃게 드러난다. 

'안드로'라는 별명이 어울렸던 소녀 일리가, 지켜주고 싶은 남자 희태를 만나, 7년을 아내로 살면서 잃어버린 것들, 바람둥이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오랜 시간 병석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은 딸을 여전한 마음으로 거두는, 하지만 며느리에게는 깐깐하기 이를데 없는 시어머니가 한때는 멋진 남자에 가슴 설레하던 꽃다운 처녀였다는 사실을,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산다는 평범한 명제 뒤에 숨겨진, 한 여성의 좋게 말해 개성의 상실, 실제로는 자아의 상실을, 현재의 결혼이라는 제도는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쉽게 용인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드라마는 증언한다. 
그리고 그것을 남자들은, 그저 미안한 마음 한 켠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지그시 짖눌러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극단적인 불륜이란 방식을 통해, 아내와, 어머니가, 실은 여전히 피가 펄떡 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어렵게 드라마는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역설적인 증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매'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통해, 부부의 화해에 이르렀지만, 쉽게 아내의 어깨에 올라가지 못하는 희태의 손처럼, 드라마를 보았던 사람들에게 '공감'의 수순을 밟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싶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한, 내 꺼라는 벽은 숭숭 구멍이 뚫려도 견고하다고 치부되니까. 

<일리있는 사랑>의 화법은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다르게 보고자 한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희수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것을, 가방을 메고 소풍을 떠난 것으로 묘사한다. 마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던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이라는 표현에 버금가는 설정이다. 7년을 병석에 누운 희수와, 그 희수를 돌보는 일리가, 정신적으로 교감을 나누는 설정도 독특하다. 결국, 드라마는, 두 사람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두 사람의 정신적 교감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 교감이 있었기에, 일리의 7년간 숨만 쉬고 살았구나 라는 토로가 가슴에 다가온다. 마찬가지로, 한 마리의 펄떡이는 고등어를 바다로 돌려보내주는 여린 희태이기에, 아내의 불륜에 어쩌지 못하면서도, 결국 인지상정으로 돌아볼 수 있는 인간 희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리있는 사랑>은 유의미했다. 
모두가 그렇다고 믿는 구멍 뚫린 결혼이란 제도 속에 몸담고 사는 세상에서, 뻔히 그렇다고 믿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기에, 그 예전, <연애시대>에서 이혼한 동진(감우성 분)과 은호(손예진 분)가 오래도록 서로에게 '자기 꺼'라는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채, 도너츠 집에서 종종 만나, 서로를 탐색하고 연구했듯이, 이혼 후의 결혼 후일담으로 가기 전에, <일리있는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일리의 봄날 같은 사랑을 통해, 일리와 희태의 결혼을 짚어보고자 하였다. 두 사람을 칭칭 감았던 붉은 실을 결국은 하나씩 매듭을 풀어, 결국은 서로의 몸에 감았던 실을 풀어 버렸던 동진과, 은호와 달리, 일리와 희태는, 풀어냈던 실을 다른 색깔의 실로 다시 감기 시작했다. 


길 건너의 일리를 보고, 오랜만에 시선도 못마주치고 고개를 돌리는 희태처럼, 우리가 살면서, 가증스런 신혼 코스프레가 아니라, 진정으로, 서로에게 다시 가슴 설레이는 기회를 살면서 얼마나 다시 가질 수 있겠는가, 그저, 동거인으로, 애 엄마로서, 애 아버지로서, 한 가족으로 익숙해지거나, 그걸 못견디면 헤어지기 전에, 아마도 그건, 일리도, 희태도, '내꺼'라는 소유욕의 현신, 결혼 제도를 넘어, 불륜이라는 세간의 잣대를 넘어,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시간의 선물을 받은 것이리라. 
그러니, '미친 놈', 미친 년'이라 치부하기 전에, 우리는 누군가를 내꺼 아닌 존재로 얼마나 이해하고 사는지, 찬찬히 생각부터 해볼 일이다. 


by meditator 2015. 2. 4. 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