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밤 9시 40분으로 안착한 < 발칙한 사물이야기 다빈치 노트(이하 다빈치 노트)>는 우리 주변의 친근한 물건을 매개로 인문학적 사고의 지평을 열어보이는 프로그램이다. 

2월 8일 세번 째를 맞이한 <다빈치노트>가 꺼내 든 사물은, 2014 뉴욕 타임즈가 올해 최고의 발몀품 중 하나로 선정한 '셀카봉'이다. 기괴한 물건으로 등장하여, 한국인들의 특이한 기호 상품을 넘어, 이제는 전세계인의 애장품으로 등극한 셀카봉을 통해, sns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사고를 훑어 본다. 

이름하야, '셀카봉', 그리고 그 셀카봉을 초빙한 <다빈치 노트>의 소제목이 '21세기 나르시시즘, 욕망을 기록하다'인 것처럼, 셀카봉은 나 자신을 욕망하는 최고의 발명품으로 칭송받는다. 하지만, <다빈치 노트>는 장하익 교수의 의견을 빌어, 나르시시즘이 결코 인간만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을 비롯하여, 심지어 돌고래까지도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애를 가진 동물이라는 증언을 통해, 사회적 동물 고유의 본능임을 짚고 넘어간다. 



이렇게 고유한 본능이 인간에게 와서 발전된 형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자화상, 나르시스가 호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빠지듯이,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램브란트를 비롯한 다수의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고, 장장 8시간의 촬영 시간이 걸린 최초의 사진 촬영에서도 인간은 끈질기게 자신의 모습을 남겼다. 직접적인 셀카의 원조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힘을 모아서라도 들 수 있는 카메라의 등장이 필요했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서 자신을 찍는 셀카봉의 유래를 통해, 발명품의 흥망성쇠에 필요한 트렌드의 필요성을 나눈다. 

이렇게 역사적 흔적을 통해 셀카봉에 이르른 자기 확인에의 열정은 하지만, 그저 나르시시즘으로의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오히려 굳이 혼자서도 찍을 수 있는 핸드폰 카메라임에도, 그것을 확장하여, 셀카봉에 이르른 이유는 오히려, 나르시시즘의 정극단에 존재한다. 자기애조찯도, 누군가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공유'의 욕심,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가 있는 장소에 대한 확인조차도 인정받고 싶은 '타자 지향'이 심지어 1000 명이 넘는 사람들마저, 한 앵글안에 넣을 수 있는 셀카봉을 탄생시켰다는 것이다. 심지어, 생명이 경각에 달린 자연 재해의 현장, 혹은 익스트림한 상황에서도 셀카봉을 들이대는 정서에는, 자신의 생존을 타인을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굳건한 '집단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저 몇 십의 무리를 넘어, 평균 150 명 정도의 인력 풀을 관리해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널리 증명할 수 있는 셀카봉이야 말로, 가장 사회적인 발명품이라며, 그 사회적 의미를 짚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애와, 공유의 공동 협조 체제의 산물인, 셀카봉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화제가 되기 시작한 이면에는 슬픈 대한민국 현대인의 자화상이 있다. sns를 즐기는 사람들, 그 중에서도 여성들이 주로 애용하는 셀카봉이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 여성 중 가장 자존감이 떨어진다는 뜻밖의 통계때문이다. 가장 많은 셀카 사진을 올린 광주 한 여성의 사례를 통해, 이 시대 대중들이 소모하는, 혹은 선호하는 이미지라는 것이, 연예인을 닮은 듯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우러난 것이 아닌,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답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연예인스러운 이미지를 모방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하를 서슴지 않는 현대인, 그 중에서도 여성들의 현실태를 여러 여성들의 입을 통해 증명한다. 

그러나, 이렇게 누군가의 닮은 모습을 절묘한 셀카의 각도와 포샵을 통해 재연해 내고 있는 동시대의 여성들의 고뇌를, 오히려, 자신을 한껏 드러낸 셀카 이벤트와, 전시를 통해,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보인다. 



sns의 셀카봉 인류를 '호모 작대기쿠스'라 정의내린, <다빈치 노트>는 그렇다고, 이 현생 인류를 자기애에 탐닉하는 방식으로 '시뮬라크르'을 넘어서지 못하는 세대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베스트 셀러의 저자로 더 유명한 광고인 박웅현이, 자신이 글을 쓰는 마음의 근저에 역시나 자신을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욕구가 자리잡고 있음을 시임함으로써, 현대인의 욕망의 보편성에 진솔하게 다가가고자 한다. 또한, 그 나르시시즘의 욕망이, 그저 우물 안의 자기 만족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집단을 어울러야 하는 인간의 불가피한 결과물임을 간과하지 않는다. 물론, 그 자기애가 한편에서 자기를 간과한, '타자 지향' 매몰의 한계를 지닐 지언정, 자신을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열정의 건강함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으로 지적한다. 

<다빈치 노트>가 제시하는 인문학은 일상의 사물에서 시작하듯이, 거창하고 유식한 체 하는 인문학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도, 사상도 결국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평범한 사물로 귀결될 수 있는 소박한 인문 정신이다. 개그 프로그램보다도 재밌고, 다큐 못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는, 아! 하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깔깔 대며 웃다보면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 그 시간에, 내 주변을 바라보는 눈은 조금은 넓어지는 시간, 바로 그것이, 발칙한 사물 이야기 다빈치 노트의 기록이다. 
by meditator 2015. 2. 9. 1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