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장대한 규모로 찾아왔던 요리를 통한 인류학이 설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찾아들었다. <빵과 서커스>,<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생명의 선물 고기>에 이은 4에서 8편 <요리인류>, <불의 맛>, <모험의 맛 커리>, <영혼의 맛, 빵>, <요리한다 고로 인간이다>, <마지막 한 접시>가 그것이다. 



일찌기 <누들 로드>를 통해 요리 다큐의 신천지를 개척했던 이욱정 pd는 보다 본격적으로 요리에 천착하기 위해 스스로 최고의 요리 학교 프랑스의 르 코르동 블루에서 셰프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그런 요리쟁이로서의 진가를 살려 250일간 20여국을 돌며 세계 각국의 요리 풍습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짚어본다. 또한, 일찌기 <누들 로드>을 통해 방송가의 플리처 상인 피바디 상을 2010년 수상한 그답게, '장문의 지식을 읊어주는' 다큐를 넘어, '재미와 아름다움으로 압도하는 진일보한' 다큐를 선보인다. 

2014년에 선보인 세 편의 <요리 인류>를 통해, 인류사에 등장한 빵과 스파이스, 고기의 전사를 역사적으로 조명하고자 했던 이욱정 피디는, 이제 2015년 선보인 다섯 편의 다큐를 통해, 그 역사의 행간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간다. 


총론에서 각론으로 
4편에서 6편에 이른 <불의 맛>, <모험의 맛 커리>, <영혼의 맛 빵>은 지난 해 선보인 <빵과 서커스>,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 <생명의 선물 고기>에 이은 속편 격이자, 총론에 이은 각론이라 해도 무방하다. 
<불의 맛>을 통해 여러 고기 요리 중 불을 통해.즉 직화구이로 시작된 고기 요리의 역사를 헤집어 본다. 다른 동물들이 불을 보고 도망하는 것과 달리,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이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졸지에 생태계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로 고속 승진하게 된 인류, 그들이 가장 쉽게 불을 통해 요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고기였다. 고기는 불을 통해 요리를 하면 보다 소화가 쉬워질 뿐만 아니라, 맛도 전혀 다른 경지를 이룬다. 이렇게 인간이 가장 먼저 불을 통해 요리를 시작한 방식을 <불의 맛>을 통해 그려가며, 그 구체적 요리 방법으로 '바베큐'의 역사를 짚어본다. 

스파이스 라는 요리계의 혁명을 짚어봤던 <낙원의 향기 스파이스>는 이제 그 스파이스들의조합으로 등장한 '커리'를 규명한다. '커리'이지만 '커리'가 없는 인도에서 시작된 마놀라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이제는 3분 요리의 대명사로 등장한 커리 하지만, 그 세계는 인도 전역의 각 가정에서 요리되는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마놀라라고 설명될 만큼, 마치 우리나라 각 가정의 장맛처럼 오묘한 각 스파이스의 배합에 따라 전혀 다른 풍미를 선보이는 맛의 신세계 커리를 그려낸다. 또한 인도로 부터 시작하여, 중동, 북아프리카, 포르투칼, 중세 유럽, 그리고 일본까지 이어지는 지리상의 확장이자, 발전, 변형인 커리의 역사도 놓치지 않는다. 



<빵과 서커스>를 통해 서구에서 밀이 여러 사람들의 주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전사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던 <요리인류>는 이제 그저 먹거리로서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교감의 도구로서, 빵이 철학적, 인류학적 의미를 짚어본다. 그것은 단지 빵에 담긴 속뜻만이 아니다. 에디오피아의 80cm빵에서부터, 프랑스 전통 빵의 커다란 크기, 모로코의 동네 화덕에서 구어진 빵 등을 통해, 공동의 요리 과정을 통해서 모두가 공유할 수 밖에 없었던 빵의 제작 과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공동의 식사가 된 빵이, 예수의 살로 상징되는 존재가 될 수 있는 인과 관계를 개연성있게 그려낸다.

이렇게 각론으로 들어간 빵, 고기, 스파이스를 그려내면서, <요리 인류>는 그렇다면 그렇게 요리를 발전시킨 과정과 요리하는 인간에 대해 정의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7편<요리한다, 고로 인간이다>와 8편 <마지막 한 접시>이다. 


요리하니 고로 인간이다 
<요리 인류>가 본 인류의 요리 과정은 한 마디로 변화와 발전, 그리고 융합으로 정의되는, 창조;의 과정이다. 그것을 위해, 일본의 정서를 살려 서양 요리계에서 인정을 받은 일본 요리사를 시작으로, 과학으로 요리를 접근해 요리의 신세계를 개척하는 일군의 요리사들까지 새로운 요리의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늘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짚는다. 일찌기, 에디오피아 특산물로 글루텐이 없어서 빵으로 만들 수 없는 곡식을 발효시켜 빵으로 만들어 낸 에디오피아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통해, 인류의 역사 자체가 새로운 요리의 발명이며, 그것은 언제나 발전과 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서라고 정의내린다. 

그렇다면 이렇게 요리를 통해 인간됨을 증명한 인류사에서 <요리 인류>가 기억하고자 하는 음식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는 미국 음식의 대명사가 된 '바베큐'를 통해 다큐가 짚어보고자 하는 것은, 수백도의 열을 견디며 불을 다루었던 미국 흑인 노예들의 숨겨진 역사이며, 바다 건너 일본으로 들어와 스폰지 케익이 카스테라가 되는 과정에서, 죽은 딸의 자식들조차 한껏 거둘 수 있어 행복한 한 가장의 행복이다. 또한 바나나 나무처럼 보이지만 바나나가 열리지 않아 서구의 장식재로나 쓰이는 가짜 바나나 나무 줄기와 뿌리를 짓이겨 며칠의 발효를 거쳐, 빵으로 만들어 내는 기근에 시달린 에디오피아의 아내들의 눈물이 어린 빵이 그것이다. 
8편에서 몸소 바베큐 열기를 체험을 마다하지 않은 이욱정 pd는 말한다. 세계 각국의 진기하고 화려한 요리들은 많지만 가장 요리다운 요리는 맛있고 아름다운 요리가 아니라, 각국의 재래시장이나 서민들의 밥상에서 만날 수 있는 그들의 삶을 반영한 가장 평번한 요리들이라고. 

인류를 인류답게 만든 빵과 고기와 스파이스, 그 총론이 이제, 영혼의 빵과 새로운 조합의 커리와 불맛의 고기로 진화했다. 펄떡거리던 싱싱한 재료들이 장인들의 굳은 손을 통해 선연한 빛깔의 먹음직스런 요리로 재탄생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에디오피아의 오랜 발효를 거친 구멍이 숭숭 뚫린 빵조차 신기한 먹거리로 입맛을 다시게 만든다. 빵을 찍어 먹는 순록의 피가 퐁듀의 녹은 치즈처럼 느껴진다. 사슴의 죽 늘어진 혀가 어쩐지 새로운 요리로 기대된다. 낯선 문화가 이질적이고 생경잔 질감이 아니라, 그저 사람 사는 세상의 당연한 먹거리로 한번쯤 먹어보고 싶은 그것으로 변모된다. 그리고 가짜 바나나 나무 밑둥을 한없이 긁어대는 에디오피아의 아내들이, 통돼지를 요리하기 위해 불에 쩔은 남부인들의 검은 얼굴이 한없이 정겹다. 다큐가 비추듯 일류 요리사의 손과, 그들의 손이 다르지 않고, 화려한 그릇에 진수성찬이, 질박한 그릇에 담긴 누추한 음식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리고, 오래되고, 새로운 것의 낯섬이 사라진다. 그저, 오래오래 이 눈을 현혹하고, 침샘을 자극하는 요리 성찬에 눈을 빼앗기고 싶을 만큼. 벌써 2016년의 새로운 <요리 인류>가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5. 2. 21. 11:59

한번이라도 김제동을 대학 축제 등 실제 그가 mc를 보는 현장에서 본 사람이라면 그가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장'에서 얼마나 펄떡이며 뛰노는 다이내믹한 mc인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tv에서 만난 김제동은 강호동이나 이경규 등 선배 mc들 옆에서 주눅들어, 명언이나 날리거나, 스스로 하는 일이 없다 자책하는 캐릭터일 뿐이다. 그나마 안타깝게도 김제동이 제일 웃긴 경우는 그 자신이 말하듯 울궈먹고 또 울궈 먹어 이제는 그때문에 결혼조차 미뭐야 하지 않나 싶은 노총각 캐릭터로 웃기는 <무한도전>의 경우이다. 더구나 이른바 '정치색'을 띤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섭외 1순위에서 기피 연예인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슬슬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던 김제동이 모처럼 예의 역동적인 그의 기량을 조금이나마 펼쳐보인 프로그램이 등장했다. 2월 20일 파일럿으로 찾아 온 <김제동의 톡투유-걱정말아요, 그대(이하 톡투유)>이다. 


jtbc 에서 여러 신선한 예능을 시도하고 있는 가운데, 그간 방송가에 기피 mc였던 김제동이 단독으로 프로그램을 맡았다. 다시 돌아온 mc김제동, 그게 jtbc인 이유가 있었다. 몇 년 전, 한참 잘 나가던 김제동에게 손석희 사장이 제의를 했단다. <백분 토론>에 나와 달라고, 그런 거 할 줄 모른다고 하는 김제동에게 <백분토론> 400회 특집에 나와서 소감 정도만 말해주면 된다고 간단하게 청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 전날 도착한 방송 원고, 거기에 '이명박 정권에 대한 평가'라고 씌여 있었다고 한다. 여타 제반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그렇게 <백분토론>에까지 등장한 김제동은 특정 정치색이 짙은 연예인이란 이유로 방송가의 기피 인물이 되어, <힐링 캠프>의 보조 mc로 연명하게 되었다. 그러니, 김제동을 그렇게 만든 손석희씨 입장에서는 빚을 갚아야 할 처지가 된 것이고, 이제 jtbc 사장이 된 손석희씨는 김제동의 톡투유를 제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빚쟁이의 입장으로 김제동은 jtbc의 파일럿 예능으로 돌아왔다. 

<김제동의 톡투유>와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은 꽤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각 방송사에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유명한 인사들에서 굴곡있는 삶을 잘 극복해온 사람들이 강사로 등장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청중의 고민을 들어주는 형식의 프로그램들 말이다. 김제동이 보조 mc로 출연하고 있는 <힐링 캠프>에서도 일찌기 인기 철학자 강신주를 비롯하여, 연예 기획사 대표 양현석 등을 데리고 청춘들을 대상으로 한 멘토링 프로그램을 기획해 왔었다. 
첫 선을 보인 <김제동의 톡투유> 역시 인기 만화가 강풀과 인기 강사 최진기가 역시나 한 자리를 차지 하고 등장했다. 



하지만 김제동은 <톡투유>는 여타 멘토링 프로그램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심지어없프로그램의 시작에서 부터, 중간중간, 그리고 말미에 까지 끊임없이 확인한다. 출연한 사람들, 그리고 고민을 토로한 사람들, 그 누구도 딱히 고민이 해소된 것은 없을 것이라고, 없다고, 없지 않냐고. 그런 김제동의 반문에 방청객들은 고개를 끄덕끄덕, 그런데 한 시간여의 방송 시간이 지나고, 스케치북을 올린 사람들의 반응은 즐겁게 함께 웃다가 간다고, 웃다가 울다가 간다고 호평 일색이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 속에 어떤 묘약이 있길래.

김제동은 예를 들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설명하고자 한다.  자신이 버리 쓰레기로 인해 반장 아줌마한테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구나 치러 가자며 공감이 엇나가버린 강풀과 달리, 반장 아줌마네 집 앞에 똥이라도 싸주겠다며 공감을 해주는 코디와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억울함이 풀려 버린 사례를 통해, 그저 이 프로그램이 방청객들의 고민을 함께 들어주는 시간임을 강조한다. 그저 그렇구나 하고 손뼉을 마주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프로그램의 자리를 좁힌다. 

하지만, 그저 함께 공감해 주는 <톡투유>의 시간은 도발적이었다. 첫 시간의 주제를 '연애'로 삼고서는 노래를 하러 나온 요조가 반문한다. '연애' 꼭 해야 하는 것이냐고. 왜 연애를 못하면 덜떨어진 사람 취급을 하냐고. 연애도 선택이라고. 노총각으로 <무한도전>에서 교주노릇을 하던 김제동도 솔직하게 말한다. 외롭지만, 홀로 있는 것이 자유롭다고.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저 그렇게 연애는 선택이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 과학 강의로 정평이 높은 최진기가 연애하기 힘든 시대의 실체를 밝힌다. 일본의 예를 들어, 실제 결혼 적령기의 여성들이 결혼하는 남성들이, 그녀들보다 열 살 이상 많은 경우가 빈번하며, 그런 이유가 바로 경제력에 기인함을 짚는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경우가 곧 한국의 실제가 될 것임을 예언한다. 즉, 청년들이 연애를 못하는 것은 그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연애를 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주지 않는 사회적 조건에 있다며 연애의 사회학을 짚는다. 나아가, 프랑스가 출산 장려책을 위해 미혼모의 아이들을 법의 테두리 안에 포용했듯이,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짚는, 예를 들면 연예 비용을 국가가 대는 것과 같은, 결국은 '복지' 정책이 젊은이들의 연애조차 풍성하게 만들 것이란 결론에 이른다. 
물론 이런 도발적인 분석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강풀이 덧붙인다. 연애라는 것이 그저 사랑의 감정이 아니다. 질투 등 수많은 감정의 교류로, 살아가면서 이렇게 풍부한 감정의 파고를 한번쯤은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이렇게 다양한 입장과 해석이 공존하면서, 이 시대의 연애 담론은 풍성해져 간다. 무엇보다, 나의 문제인 연애가, 우리의, 이 시대의 문제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가, 우리가 되어 가면서, 그저 방청객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저절로 공감이 되어가기 시작한다. 명절이면 자꾸 비교를 하는 손님들, 그리고 부모님들에 대한 이야기에 서로서로, 그건 너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는 다 지 자식만 생각하지, 남의 자식은 생각 안한다는 솔직한 고백에서 부터, 그저 '그러게요'라며 넘어가면 될 것이라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등을  토닥여 주는 식이다. 우리 딸 이쁘다는 말에, 우리 엄마라서 좋다는 말에, 함께 울컥해지기까지, 그렇게, 조금씩 프로그램은 공감의 온도를 높여간다. 

김제동의 장기는 바로 이 지점이다. 별 말을 하지 않는데, 그저 살아오던 이야기를 나누는데, 실제 아무 것도 해결 된 것이 없는데, 한 짐을 내려놓고 가는 가뿐한 느낌이 들게 하는, 어쩐지 뭉클해지는 바로 그것말이다.  일찌기 <야심만만>에서 김제동을 인기에 올려놓은 것은 그가 풀어낸 명언이 아니라, 공감의 지점을 잘 잡은 포인트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소속사에 가장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다는 방송에 한번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연일 매진 사례를 행진하고 있는 <김제동의 토크 콘서트>의 이유 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게 진솔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짚어줄 수 있는, 그리고 그 자신이 자신만만하게 자랑하는, 대본 한 장 없이도 몇 시간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는 mc 김제동의 능력이기도 하다. 

굳이 최근 트렌드가 되고 있는 배우들을 예능으로 불러오지 않아도, 물설고 낯설은 곳으로 떠나지 않아도, 스튜디오에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한 시간여가 즐거울 수 있는 프로그램, 역시 jtbc의 또 한번의 탁월한 선택이다. 부디 <김제동의 톡투유>가 정규 편성이 되어 매주 함께 울고 웃으며 마음의 짐을 함께 나누어 질 수 있기를. 
by meditator 2015. 2. 21. 10:48

최근 <썰전>만이 아니라 여러 프로그램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는 강용석을 보고 있노라면 이 사람이 과연 한때 여당 저격수에, 아나운서들을 대상으로 성적 폄하 발언을 했다가 재판까지 갔던 그 사람이 맞나 싶냐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썰전>의 예능 심판자 코너를 보면 평론가 허지웅나 교수 이윤석에 못지 않게 가장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강용석이요, <수요 시식회>를 보면 음식점의 역사에서 먹거리의 역사까지 그 어떤 분야든지 모르는 것이 없는 박학다식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이는 것이 또한 강용석이니, 이 사람 참 볼수록 매력저이단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런 최근 tv를 통해 비춰지는 강용석과, 과거 정치인 강용석은, 마치 '페이스 오프'처럼 다른 사람이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용석 스스로 2월 19일 <썰전>을 통해 증명한다.


2월 19일 <썰전>은 최근 총리 인준 후보 과정에서 드러난, 이완구 총리의 충청권 맹주론에 대해 짚어본다. 이완구 총리의 총리 후본 인선 과정에서 느닷없이 등장한 충청도 총리론이라는 지역 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그에 대해 또 한 사람의 패널 이철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사람이 총리가 될 수 있을까? 싶게 부동산에서 부터 시작하여, 병역 등 털면 털수록 수많은 의혹이 등장하는 이완구 후부자에 대해 느닷없이 충청도라는 지역 감정을 들쑤셔, 충청 민심을 들쑤시려는 시도에 대해 이철희 소장은 이런 구 시대의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획책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며 분노한다. 
그런 이철희 소장에 대해 강용석이 들고 나온 논리는, 애초에 지역 감정은 문재인 새정치 연합 대표가 시작한 거 아니냐는 식이다. 문재인 대표가 전라도 총리론을 들고 나옴으로써, 총리라는 직위에 지역 감정 프레임을 들쒸웠고, 그에 따라 당연히 이 후보자에게 충청 총리론이 등장할 수 밖에 없다는 투이다. 
사안은 이완구 총리가 총리로써의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 라는 객관적 사실을 놓고 검증하는 것인데, 느닷없이 그 사람이 어느 지역 사람인가 라는 엉뚱한 지역 감정 프레임이 등장하면서, 애초에 객관적 시각을 가지고 검증할 대상의 촛점이 흐려지기 시작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걸 이철희 소장은 문제를 삼고 있는데, 거기에, 강용석은 다시 한번, 그 문제가 된 프레임을 들고 나오면서, 그것이 야당 탓이라는 식으로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애초 본질이 된 문제를 놓치고, 그렇지, 문재인이 그랬지, 이완구는 충청도지 라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다음 사안, 박원순 후보자의 28억이라는 비싼 서울 시장 공관을 둘러싼 문제가 등장했다. 기존에 그에 비해 열 배 정도나 싼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비싼 전세금의 시장 공관을 마련했다는 것에 대해 논의를 한다.
강용석의 논리는 '서민 코스프레'를 하던 박원순 시장인데, 이제 와서 비싼 공관으로 이사한 이유를 알 수 없다며 박원순 시장의 서민 행보는 필요할 때 하는 이현령 비현령이냐는 식이다. 그에 대해 이철희 소장은 의전 상의 이유로 필요하니까 구입을 한 것이고, 서울시가 우리나라 최고의 도시인데, 그 정도를 하는 것으로 무슨 큰 문제가 될 것이며, 총리 공관은 300억이 넘는 돈을 짓는데 그에 비하면 문제가 될 것도 없는데 물고 늘어지냐고 반문한다. 그리고 그 공관을 박원순 시장 개인이 가지는 것도 아니고, 공관으로 유지하다 후임자에게 물려줄 것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하는데 대해, 강용석은 그 동안 살지 않냐고, 3년간 살지 않냐며 반문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이철희 소장이 박원순 시장 개인 사저가 아니라 의전상 필요에 따른 서울 시장 공관이며, 박원순 시장에 비교할 것이 안되게 여당 측 총리나 부산 시장의 공관이 있는데 유독 박원순 시장만 문제 삼냐고 하면, 강용석은 그래도 비싼데 살지 않냐며, 서민이란 말은 코스프레였냐며 토를 단다. 

세상에 제일 싸움이 안되는 게 이쪽은 논리로 대응하는데, 저쪽에서 떼를 쓸때이다. <썰전>을 보노라면 이철희 소장이 객관적 근거에 따라 이성적 판단을 촉구하는 사안에 대해, 강용석 변호사는, 이번 사례처럼, 그래도 충청도 아니냐던가, 그래도 비싼 집에서 살지 않느냐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대응할 때가 있다. 언제나 수많은 자료를 제시하고, 그가 아는 객관적 사실들을 주워 삼기던 사람이, 느닷없이 떼 쓰는 아이마냥 물로 늘어지는 식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때가 이완구 후부자처럼 여당의 첨예한 사안이라던가, 박원순 서울 시장처럼 차기 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일 때가 그런 것이다. 항상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줄줄 주워삼기던 강용석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자신이 저격할 대상이 등장하면, 논리고, 근거고 다 내던지고, 예전에 하던 식으로, 떼를 쓴다. 

강용석이 하는 떼의 문제는 그가 혼자 어리광을 부리는게 아니라는데 있다. 여당에서 시작하여, 종편에서 하루 종일 읊어대는 이른바 '프레임'의 정치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이완구 총리 후보자의 총리 부적격 여러 사안이 등장해도, 그가 그래도 충청도 사람인데 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고 그걸 줄창 강용석처럼 읊어대면, 사람들의 시선은 부적격한 사실 검증에서, 이완구 총리가 어느 편이냐로 옮겨간다. 옳다 그르다라는 이성적 판단보다, 우리 편이냐 아니냐란 편가르기가 인간의 감정을 더 움직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박원순 시장도 마찬가지다. 서민적이라는 이미지로 시장 선거에 당선된 그에게, 귀족 공관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 그 공관의 필요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근거가 핑계처럼 들리고, 서민 코스프레라는 비아냥이 그럴듯해 보이기 시작한다. 총리 후보자가 300억짜리 공관을 짓거나 말거나 서민을 내세운 박원순 시장은 단 돈 10원도 쓰면 아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철희 소장 말대로, 그냥 박원순이 서울 시장 하는게 꼴보기 싫어 지는 것이다. 

강준만의 <감정 독재>의 50여가지 감정 이론을 보면, 결국 결론은 하나다. 인간은 이성적이기보다는, 이성조차도 감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감정적 동물이라는 것이다.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감정과 편의에 따라 쉽게 좌지우지되는 인간의 감정을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이, 바로 '프레임'의 정치다. 제 아무리 객관적인 근거와 이유를 가져도, '지역 감정'이라는 프레임, '서민 코스프레'라는 프레임을 한번 뒤집어 씌우는 순간, 여타의 모든 이성적인 판단 근거는 사라지고, 그거냐 아니냐는 이분법적 영역에 갇히데 되는 것이다. 그리고 <썰전>에서 강용석이 하는 가장 위험한 행동은 내둥 이성적인체 하다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필요할 때면 이성적인 근거는 다 내 팽개치고, 예의 '프레임'의 정치를 끄집어 내서 우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도 충청도 아니냐고, 그래도 비싼데 사는거 아니냐구!

<썰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제반 정치, 사회적 사안에 대해 건강한 보수와 진보의 시각들을 가지고 건전한 논평의 장을 벌이자고 하는 것인데, 정치적 이해가 엇갈리는 사안에 대해 매번 강용석이 이성이고, 건강한 논평이고 나발이고, 예의 자신의 정치적 프레임만 들고 나온다면 어떻게 건강한 논평의 장이 되겠는가 말이다. 그 예전의 여당 저격수랑, 비싼데 산다며 중중거리는 강용석이랑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제 아무리 이철희 소장이 이성적 근거로 대도, 비싼데 사는데 라는 강용석의 한 마디 말이면 전셋값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라서 속상한 사람들은 300억 총리 공관은 잊은 채, 이완구 후보자의 엄청난 부동산 비리도 잊은 채 박원순이 서민 코스프레 한다는 그 불쾌함을 기억한다. 애초에 부자인 놈들은 그렇다 치고, 우리 편인줄 알았던 너마저! 라는 서운함이 앞서는 것이다. 그렇게 기가 막히게, 강용석의 비논리적인 '프레임' 정치는 기가 막히게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파고 들어간다. 

그런데 이렇게 종편에서 하듯이 똑같은 논리로 앵무새처럼 '프레임' 정치를 할 거면, 굳이 건강한 진보와 보수의 썰전이란 타이틀이 왜 필요하겠는가? <썰전>이 건강한 논평의 장이 되려면, 강용석이란 패널을 좀 더 객관적 의견을 건강하게 제시할 수 있는 인물로 교체를 하던가, 강용석이 예의 '프레임'에 갇힌 우기기를 자제해야만 할 것이다. 종편의 앵무새 소리가 듣기 싫어, 그나마 좀 낫겠지 싶어 <썰전>을 틀었는데, 거기서 또 그 논리를 재방송으로 듣는 건 너무 불쾌하다. 제발 새해에는, 건강한 정치 평론을 듣고 싶다. 우기기와, 프레임의 틀을 벗어난.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이철희 소장이 객관적 중심을 지키려고 해도, 불리하면 입다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우기거나, '프레임'의 틀을 들고 나서는, 여전히 제 버릇 개못준 저격수 강용석이어서는 곤란하다. 이건 단지 강용석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나마 단초를 마련해 가는 건전한 정치 평론의 싹을 밟아버리는 행동이다. 이래서는 건강한 담론의 장이 마련될 수 없다. 


by meditator 2015. 2. 20. 11:11

2월 17일 <pd수첩>은 2억명이 넘는 영화 관객을 기록하며(2014년 기준 2억 1506명)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영화 시장의 이면을 들여다 본다. 


그 시작은 최근 다시 멀티플렉스에 상영관을 확보하게 된 영화<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이하 개훔방)>으로 시작한다. 
영화를 본 관객들에 의해 훈훈하고 따뜻한 하지만 현실의 비극을 결코 간과하지 않은 영화로 평가받은 영화<개훔방>은 하지만 그 입소문이 제대로 퍼지기도 전에 멀티 플렉스에서 사라졌다. 이에 영화<개훔방>을 아끼는 관객들은 자비를 털어 영화관을 빌려 이 영화의 단독 상영을 이어갔다. 


좋은 영화가 외면받는 대기업의 스크린 독과점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미처 관객들의 평가를 받기도 전에 다수의 영화가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에 대해 <pd수첩>은 현재 극도에 달하고 있는 영화 산업의 독과점에 촛점을 맞춘다. 2014년 한 해, <명량>, <변호인>, <국제시장> 등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총 11편에 이른다. 하지만, 영화 관계자들은 말한다. 단 한 편의 영화가 천만을 달성하는 동안 수 십편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선택의 기회조차 잃은 채 멀티 플렉스 극장에서 사라져 간다고. cj, 롯데 등 대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멀티 플렉스 체인들은 자사가 배급하고 있는 영화들을 개봉 2주전부터 예매를 하기 시작하고, 가장 관객들이 많이 들 수 있는 시간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며, 심지어 한 영화에 전체 상영 영화의 30% 이상의 상영관을 배정하는 기형적 몰아주기를 함으로써 흥행을 넘어 천만 관객을 이루어 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형적인 독과점 체제에서 대기업의 배급망을 타지 않은 영화는 감히 그 경쟁 대열에 끼기 조차도 힘들며, 설사 끼었다손 치더라도 <개훔방>이나, 유지태 주연의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이하 더 테너)>처럼 불리한 시간대에 배치됨으로써 조기 종영의 사태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이다. 아이와 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 <개훔방>을 조조나 심야 시간대에 배치하는 것은 아예 보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이런 말도 안되는 상황이 대기업 배급이 아닌 영화들에게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나마 <개훔방>의 경우 제작사와 관객들이 힘을 합쳐 이 영화에 대한 여론을 불러 일으켜 다시 멀티 플렉스에 다수의 관을 확보하게 되었지만, <더 테너>의 경우는 멀티 플렉스가 아닌 독립영화관 단 한 곳에서만 상영하여 관객들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고 한다. 실제 4년 여의 제작 기간, 100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더 테너>의 제작사 대표는 개봉 첫 날 불리한 상영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이 영화의 흥행을 포기했다고 밝힌다. 

제작, 배급, 상영까지 수직 계열화된 대기업의 영화 산업
이렇게 대기업들이 자사 배급의 영화를 독점적으로 심지어, 편법을 사용하면서까지 무리를 하면서 상영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pd수첩>은 현재 기획에서 부터 제작, 배급, 상영까지 온전히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착한 대기업의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독과점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기획, 제작, 생산의 전 시스템이 대기업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하나의 체계로 지난 10년간 영화 산업이 자리잡혀 왔고, 최근에 들어서는 영화 <광해>의 경우처럼 천만 관객을 만들기 위해 어거지로 세 달 동안 상영관을 유지하는 등 무리수까지 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실제 일찌감치 멀티 플렉스에서 상영관을 놓친 <개훔방>의 경우 당시 함께 상영되던 <오늘의 연애> 보다도 좌적 점유율이 높았지만, 결국 대기업의 영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밀려나 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개훔방>의 경우만이 아니다. 최근 <쎄시봉>의 경우도 대중들의 반응은 미비하고 좌석 점유율은 낮지만, cj의 배급이란 이유만으로 cgv등에서 많게는 30% 이상의 상영관을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이렇게 영화 산업에서 '갑' 중의 '갑'으로 등장한 대기업의 독과점에 대해 <pd수첩>은 영화 평론가 오상진씨의 입을 빌어, 공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1938년 미국의 '파라마운트 판결'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직계열화된 헐리우드 스튜디오의 독과점이 문제가 되자, 영화 제작 및 극장 소유를 분리하도록 명령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그에 따라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극장을 매각했고, 1980년 규제가 완화된 이후에도, 미국 영화계에서는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pd수첩>은 우리도 이와같은 대기업의 수직 계열화에 따른 영화 산업의 독점 현상을 규제할 법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런 대기업의 영화 산업 독과점은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기업 전횡의 일면이다. 재래 시장 주변에 대기업의 마트가 들어서서 재래 시장을 잠식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상인들의 밥그릇을 빼앗아 가듯이, 대기업의 커피 체인점이나 베이커리가 거리에 하나 둘씩 들어차서 중소 상인들의 터전을 빼앗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pd수첩>에서 인터뷰한 시민들과 같다. 극장을 장악한 영화가 그저 인기가 있어서 그러려니 하고, 극장에서 파는 팝콘이 터무니 없이 비싸도 모처럼 영화 한번 보는건데 하면서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사람들이 재래 시장보다 편한 마트를 가고, 유명한 커피숍에서 시간을 때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이런 영화계의 독과점 현상이 그저 영화 산업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그 모든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란 점까지 짚지 못한 점이다. 



하지만 영화 <개훔방>과 <더 테너>로 시작하여, 스크린 독점, 나아가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대기업의 수직 계열화까지, 천만 영화의 화려함 뒤에 획일화되어가는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해 <pd수첩>은 체계적으로 잘 짚어나간다. 평론가 오상진이 '이젠 인터뷰하기도 지긋지긋하다. 지난 10년 동안 내내 그 문제를 지적해 왔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는  토로와 함께, 이 문제가 10년의 궤적을 지닌 심각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놓치지 않는다. 또한 '파라마운트 판결'을 통해 그 해법까지도 제시하고 있는 점 긍정적이다. 물론 <개훔방>의 재상영이라는 분명한 결과물이 이루어 진 이후에야 뒷북치듯 이 문제를 들여다 보는 것 같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요원해 보이는 그 해법을 위해서, 꾸준한 환기는 절실하다. 
by meditator 2015. 2. 18. 06:43

2월 16일부터 선보이는 <mbc다큐스페셜>은 일본 후지 tv와 공동으로 기획한 '어디서든 살아보기'이다. 그 첫 번째 편으로  우리나라 배우 정은표 가족이 일본 야마가타 현 긴잔 마을에서 일주일 동안 생활하는 모습을 담아냈다.

 

글로벌 자급 자족 프로젝트인 <어디서든 살아보기>는 이를 위해 출연자에게 제공되는 것은 야마가타 현 긴잔 마을까지의 교통비 뿐, 그 이후의 생활은 오로지 가장 정은표와 아내 김하얀, 세 아이 지웅, 하은, 지훤이에게 달려있다. 온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여행간다며 설레였던 가족은 부푼 마음도 잠시, 눈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을 한 집에 도차하자마자 온전히 일주일을 가족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에 망연자실한다. 네 살 배기 막내를 돌보아야 하는 엄마, 그리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 장남 지웅이와, 하은이를 제외하고, 결국 이 다섯 가족의 생계는 이제는 한류 스타로 일본인들에게 까지 알려진 정은표의 몫이다.

 

거리에서 만난 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잠시 한류 스타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정은표는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제작진이 마련한 온갖 허드렛일을 하게 된다. 각종 주류 배달에서 부터, 온천장 청소에 화장실 청소까지, 밤 열시까지 하루를 온전히 노동으로 소모한 가장 정은표가 벌어온 작은 돈에, 엄마 김하얀을 비롯한 온 가족은 눈시울을 적신다. 다음 날 어제 벌어온 돈을 핑계로 일을 나가지 않은 아빠는 토끼 사냥을 나가보지만 허탕, 그 다음 날 역시나 가족과 함께 빙어 낚시를 나가봐도 겨우 낚시꾸들에게 구걸하다시피 얻은 세 마리에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겨우 낚은 한 마리를 보탠 네 마리의 초라한 밥상으로 이 가족의 일본에서 먹고 살기는 참 만만치가 않다.

 

심지어 토끼 사냥을 나가서 허탕 친 아빠가 사들고 온 단무지로 한 끼 식사를 때우는 정은표의 가족을 보면서, 문득 이 프로그램이 '리얼리티 예능'인가?라고 반문하게 된다. 한 시간 남짓의 방영 시간 동안 다큐는 끊임없이 정은표의 각종 알바를 비롯하여, 아이들의 학교 생활, 가족의 밥상까지 많은 것을 보여주고자 고심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보면서 문득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타국에서의 생존기인지, 아니면 다른 문화에서 살아보기인지? 반문하게 된다.

 


                    [MBC 다큐스페셜] 배우 정은표, 온천마을 화장실 청소하며 '생존기' 이미지-1

 

<꽃보다> 시리즈에 이은, <삼시세끼>가 인기를 끌면서 공중파 프로그램에서도 앞다투어 외국으로 나가거나, 오지에 떨구어 생존하게 되는 프로그램들이 만들어 졌다. <어디서든 살아보기> 역시 다큐의 외피를 썼지만, 프로그램의 내용은 공중파 어디선가 보여지던 혹한 리얼리티의 연장선에 놓여진 듯이 보인다. 정작 <꽃보다>시리즈와 <삼시 세끼>가 낯선 곳에서의 여유로운 쉼표에 방점이 찍힌 반면에, 그것을 본딴 다수의 프로그램들은 낯선 곳에서의 미션으로 꾸역꾸역 프로그램을 채우느라 버겁다. 그러다 보니, 여유도 아니고, 그저 낯선 곳에서 힘든 삶의 연속일 뿐이다.

 

정은표의 가족은 가족 모두의 일본 여행이라며 신이 나서 떠났지만, 제작진은 다짜고짜 가족들을 눈 쌓인 일본 외진 마을에 가족을 던져놓고서는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벌어 먹으며 살라고 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던져놓은 것도 아니다. 온천 마을인 이곳에 걸맞게 정은표에게 주어진 각종 알바들은 온천장의 온갖 허드렛일이다. 제작진이 미리 마련해 둔 것이다. 진짜 생존기라면, 당장 말도 통하지 않으면서도 가서 일부터 구하는 것이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은 생략된 채 제작진이 마련한 곳에서 정은표가 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상당 시간은 정은표가 일하는 과정이 세세히 보여진다. 뭔가 어정쩡하다. 생존기라지만, 완벽한 생존기도 아닌, 생존하는 것처럼 보이기라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한 가족이 아주 저렴하게 일본에 일주일간 머무는 게 더 현실적인 여행기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차라리 최소한의 비용으로 장을 보고, 아이들이 잠시나마 일본의 학교에 머무는 시간들이 더 신선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도 곧잘 아이들은 바디 랭귀지로 곧 서로의 신호를 눈치채고 친해지는 그 과정말이다. 심지어 오빠는 일본에 가서도 여전히 짓궂게 구는데, 만난지 얼마 안된 일본의 친구들이 동생 하은이의 역성을 들어주는 모습에 잠시 여행지의 낯섬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단 며칠의 학교 생활에서도 서로 친구가 될 수 있는 아이들을 보며, 정은표의 볼멘 소리가 새삼 다가온다. 어떻게 온 가족 여행인데 어떻게 아빠는 내리 나가서 돈만 버느라 하루도 가족이랑 제대로 보낼 시간이 없느냐는 그 불평이, 애초에 굳이 자급자족 생존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반문으로 들린다.

한 달도 아니고, 단 일주일 외국에서 머물며, 굳이 한 가족의 여행을 아빠는 한국에서 처럼 내내 나가서 돈 버느라 쩔쩔 매고, 엄마는 여전히 아이들 밥 해주고 건사하느라 다 보내 버리는 그런 여행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무엇보다 아쉬웠던 것은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일까, 화장실 변기까지 세세히 보여주는 화면은, 반면에 눈쌓인 야마가타 현을 한번 멀찍이 바라볼 여유조차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겨우 온천 마을을 한번 쭉 비추고는 만 화면은 내내 답답하게 정은표의 일거리에만 집중한다.

여행이 무언가.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일상의 삶조차 되돌아 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인데, 기껏 일주일 여행을 시키면서, 아빠는 여전히 서울에서 처럼 돈 벌고, 아이들은 학교 다니는 그런 시간이, 정말 정은표 가족에게 행복한 일본 여행이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이다. 그까짓 돈이 뭐라고, 일본에서까지 가서 하다못해 허드렛일까지 하며 가족을 벌어먹여야 하는 밥벌이의 고달픔을 연장시키는 것인지, 겨우 일주일 여행에 다시 학교를 가야 하는 아이들은 또 어떻고. 여전히 엄마는 하루 세끼를 해내느라 버겁고. 과연, 이런 것을 자급자족 생존기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 아쉽다. 심지어 온 가족이 빙어 낚시를 가서도 그저 뚫어 놓은 얼음 구멍 주변에만 올말졸망하다. 잠시 카메라 옆으로 스치는 하염없이 펼쳐진 설원은 아랑곳 없다. 그저 빙어 몇 마리 더 낚는가가, 일본이든 강원도 산골짜기이든 상관없이 이 가족의 절대 염원일 뿐이다. 굳이 일본까지 가서 추운데 얘들 고생, 아빠 고생을 해야 하는 것인지, 문득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한 가족이 일본의 산간 온천 마을에 일주일 동안 여행을 가게된다면, 가장 보람찬 시간이 무엇이었을까? 그런 고민이 아쉽다. 그저 '리얼리티'의 시류에 따라, '자급자족'생존기에 애꿏은 정은표네 가족만 고생한 게 아닌지. 딸린 식구가 없으면 저렇게 고생하지 안해도 될텐데 라는 엄마의 짠한 생각은 그저 엄마만의 생각이 아니다.

 

어디서든 살아보기 위해서 우선 그곳에서 먹고 살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먹고 살기 위해 시간만 보내다, 정작 낯선 곳의 풍경 한번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바라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면 낯선 곳에서 살아보는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by meditator 2015. 2. 17. 08:29

2월 16일 10시 <블러드>가 첫 선을 보였다. 케이블이 아니다. 공중파, 그것도 kbs2tv를 통해서이다.

뱀파이어가 영상물에 등장한 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찌기 뱀파이어를 잡는 뱀파이어를 그린 <블레이드>를 시작으로, 뱀파이어와 늑대 인간의 대립을 그린 <언더 월드> 시리즈를 경과하여, 하이틴 로맨스물<트와일라잇>까지 뱀파이어를 주인공으로 한 다종다양한 영화들이 있다. 미드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뱀파이어들이 등장한 <트루 블러드>에서, 역시나 로맨스물로 시즌을 거듭하고 있는 <뱀파이어 다이어리>까지 다양한 시리즈물이 명멸을 거듭하고 있다. 그렇게 바다 건너에서 인기를 끌던 뱀파이어는 2011년 tvn의 <뱀파이어 검사>를 통해 우리 드라마계에까지 그 영역을 넓혀갔다.

 

서구 문화에 있어 뱀파이어는 이질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중세 이후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떠돌던 민담의 주인공이었으며, 브람 스토커가 1887년 발간한 [드라큐라]를 통해 그 캐릭터는 집대성되었다. 그렇게 역사적 전통을 가진 이 캐릭터는 '피'와 그 '피'를 지닌 여성에 대한 갈구로 오히려 많은 여성 독자들을 매료시켰으며, 서양 문화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변주를 통해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렇게 서양의 전통적 캐릭터인 뱀파이어가 우리 영상 문화 속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전통적 이야기를 그대로 본따올 수는 없다. 우리의 민담에는 귀신이나 도깨비는 있을 지언정, 남의 피, 그것도 여성의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의 존재는 들어보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tv로 온 뱀파이어들은, <뱀파이어 검사>에서도 그렇고, 이제 새로이 시작한 <블러드>에서도 그렇고, 뱀파이어의 탄생을, 불치병처럼, 기괴한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처리한다. 그들은 마치 태생이 뱀파이어인 종족과 마찬가지로 자신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감염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뱀파이어가 되었고, 그것은 가족내의 전이로 유전적 요인으로까지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뱀파이어가 된 사람, 그리고 사람들이 편이 갈린다. 드라마 <블러드>에서 주인공 박지상(안재현 분)의 부모로 등장하는 박현서(류수영 분)와 한선영(박주미 분)은 뱀파이어 임에도 자신의 능력을 나쁜 방향으로 쓰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감염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에 반해 다짜고짜 등장하여 박현서를 없애고 한선영과 그의 아들 박지상을 쫓는 이재상(지진희 분)은 아마도 뱀파이어의 능력을 나쁜데 사용할 듯 보여진다. 그러니 박현서를 없앨 밖에.

 

 

 

 

<블러드>의 첫 회는 이렇게 뱀파이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등장하는 박지상의 전사를 비극적이면서도 운명적인 서사로 그려내고자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부모의 감염, 그 유전으로 이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뱀파이어가 된 아이, 아버지의 불행한 죽음, 그리고 어머니와의 도피,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던 주인공은 자라면서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에 갑갑해 하다, 조절되지 않는 '피'의 욕망에 좌절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한없이 모멸감을 느끼던 주인공이 뜻밖의 사건으로 한 소녀를 구하게 되고, 소년은 거기서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구원'의 감정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그와 어머니의 존재를 알게 된 적에 의해 어머니마저 죽음을 맞이하고.......

 

그런데 여기까지 이미 <뱀파이어 검사>를 통해 한번 써먹은 감염이야 한국적 상황에 맞추려니 어쩔수 없다 눈감는다 치지만, 그 이후의 의로운 아버지의 죽음에 이은 어머니의 죽음의 전사는 뻔해도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심지어, 이국의 병원에서 나레이션으로 시작된 전사의 소개는, 박재범 작가의 전작 <굿닥터>의 기시감까지 느껴지니. 전작 <굿닥터>에서도 천재 외과 의사 박시온을 설명하기 위해 장황한 어린 시절을 불러오더니, 이번에도 역시 기괴한 뱀파이어의 설정을 위해 엄마, 아버지까지 희생시킨 전사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굿닥터>에서는 어린 시온이 그렇게 자폐적 증상을 가지게 되기까지의 전사가 그럴 듯했지만, 이번 <블러드>의 어린 시절은 어디선가 본듯한 운명적 상황의 너무 뻔한 조합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한국에서도 뱀파이어가 있을 수 있어 라고 접고 들어간다면, 그에 어울리는 비극적 전사 정도야 역시나 또한 눈감고 넘어가야 해 라며 할 말은 없지만, 과연 공영 방송 kbs에서 월화 미니시리즈로 뱀파이어까지 동원할 개연성은 암만해도 부족해 보인다. 거기에 어머니의 당부와, 단 한번 구한 소녀의 목숨으로, 가장 피를 두려워해야 할 뱀파이어가 의사란 직업을 택하는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이 역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하는 또 한번의 딜레마가 되는 것일까?

 

<블러드>의 기괴한 설정은, 얼마전 종영한 <아이언 맨>을 떠올리게 한다. 멀쩡한 몸에서 돋는 칼날들을 지니게 된 <아이언맨> 하지만, 그 드라마에서 주홍빈의 등에서 돋는 칼은 뱀파이어의 바이러스같은 막연한 환타지가 아니다. 오히려 성장 주도의 건설 입국 시절을 이기적으로 산 어른들에 의해 상처입은 표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은 지난 역사를 반성하고 치유해야 할 상징으로 등장했었다. 하지만, 과연 새롭게 시작한 <블러드>는 과연 어떤 상징과 개연성으로 뱀파이어 의사를 그려낼 것인지. 혹시나 <트와일라잇>처럼 매혹적인 뱀파이어 의사로 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라면, 안이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우려된다. 과연 자폐 3급의 서번트 증후군 외과 의사로 훈훈한 휴머니즘을 그려냈던 전작 <굿닥터>처럼 반전의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 하지만 그러기엔 첫 회는 너무도 뻔했다. 과연 이 뻔한 서사를 넘어, 매력적인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을런지, 그 몫은, 온전히 박재범 작가에게 달렸다

by meditator 2015. 2. 17. 07:11

전세계 영화제를 돌며 한국 영화의 성취를 널리 알리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조용한 성적을 거두며 사라진 영화 <해무>, 조선족 밀항자들의 떼 죽음과 그 사후 처리 과정에서의 잔인함으로 19금 판정을 받았던 이 영화에 대한 반응은 묘하게도 엇갈렸다. 실제 영화에서 보면, 다수의 조선족들이 몰살당하는 장면을 감독은 그 충격파를 우려해 어둡게 스쳐 지나가듯 그린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도, 피가 낭자한 살육의 현장이란 느낌이 들지 않도록 최소화시킨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잔인하다며 그 고통을 호소한 사람들 중에는 보이는 그 장면보다, 그 장면에서 울려퍼지는 음향과 분위기에 더 짖눌리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무>를 보고 그 잔인함에 눌려 영화가 제시하는 내용이고 뭐고 다 생각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던 지인과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를 봤다. 19금에, 영화 마지막 후반부에 생각지도 못한 대규모 인명 살상씬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 괜히 보았다는 평가를 내리면 어떻게 하나 지레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웬걸, 영화를 보고난 지인은 전혀 잔인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단다. 심지어, 영화 클라이막스의 그 부분에서 어떤 경쾌함조차 느꼈다고 하니. 심지어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발렌타인데이에(우리가 영화를 본 날이 발렌타인데이였다) 본 영화에 악당이 발렌타인이었다는 아이러니함까지 지적하는 섬세한 관람평을 남겼다. 



007의 전복? 하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영웅 서사
아빠의 뒤를 이어 새로운 비밀요원으로 탄생하는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은 19금의 액션 오락 영화이다. 이렇게 웃고 즐기자고 보는 영화를 놓고, 엄정한 사회 의식을 주제로 내걸었던 <해무>와 비교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대상을 어떻게 희석해 전달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마비되거나, 예민하게 반응하는가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 여지는 있지 않을까.

<킹스맨;시크릿 에이전트>는 그 영화를 보면 떠올릴 수 밖에 없는 007시리즈를 전복시키는 다수의 코드를 가지고 등장한다. 온 세상을 떠돌며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는 한편 아름다운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데 주저하지 않는 007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여왕의 신하이다. 이름에서 부터 '킹스맨'이라 지칭하는 킹스맨 역시 007과 다르지 않는 영국 황실 직속 비밀 첩보 기관의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한껏 귀족적 풍모를 내세우는 007과 달리, 이제 영화 <킹스맨>에서 주인공이 될 소년(태론 애거튼 분)은 힙합 스타일에, 뒷골목 깡패 의붓 아버지를 가진, 빈곤층의 해병대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한, 뭐 하나 제대로 된 스펙을 가지지 못한 청년이다. 

그의 아버지의 죽음을 두고, 킹스맨의 수장은 귀족 신분만이 참여할 수 있는 이 조직에 해리하트(콜린 퍼스 분)의 무모한 선택이 낳은 필연적 결과인 듯 말한다. 하지만, 그런 수장의 표현에 해리 하트는 그가 있었기에 자신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며 반기를 든다. 그런 해리 하트였기에, 자신의 목숨을 구했던 동지의 아들 애거시가 보낸 구조 요청을 넘어 다시 한번 그를 킹스맨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언제나 그렇듯 조직과 타인의 생명을 위해 헌신하는 킹스맨의 훈련 과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고, 누군가의 모멸을 견디면서, 결국은 가장 사랑하는 대상조차도 희생시킬 마음가짐의 시간이 된다. 물론, 킹스맨 조직이 바라본 선인관을 넘지 못하고, 애거시는 그가 애지중지 키워왔던 개를 쏘지 못하면서 최종 선발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희생하지 못해서 탈락한 애거시는, 그러기에 자신을 그 길로 인도한 해리 하트가 악당 발렌타인(샤무엘 L잭슨)의 농간에 빠져 한껏 피의 향연을 벌인 채 희생당하고마는 과정을 지켜 본 후 그의 복수를 위해 의연하게 히어로의 길로 떨쳐 나선다. 

자신을 킹스맨의 길로 이끈 해리 하트의 죽음, 그 죽음을 보복하기 위해 나선 길이 결국 진정한 킹스맨 요원으로 탄생되는 과정은, 일찌기 신화적 서사에서 등장한 '살부'신화의 전형이다. 아비의 죽음을 딛고, 그 아비의 길을 승화시키는 젊은이, 그렇게,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역시나 영웅의 탄생을 전형적인 신화적 서사를 도용해 이끌어 나간다. 그저 스토리상 히어로가 되는 것만이 아니다. 사투리에 가까운 이상한 영어를 쓰던 애거시가, 마지막 해리 하트와 같은 멋진 신사복을 입고 그가 들던 우산으로 무장한 무기를 들고 멋지게 그가 했듯이, 자신의 어머니를 괴롭히던 악당과 해리 하트가 했듯이, 다시 한번 펍의 문을 닫고, 매너가 운운하면서 판을 벌이는 과정은 얼굴에 멍이 든 어머니 때문에 분에 못이겨 펍을 향해 킹스맨 수장의 차를 타고 질주하던 그 분위기와는 한결 차이가 난다. 그저 아비로 상징되는 그 길을 같이 걷는 것이 아니라, 아비로 상징되는 세상을 자기 것으로 내화한 성숙한 한 청년의 등장이다. 



<킹스맨;시크릿 에이전>가 조롱하고 폄하하는 것들
이렇게 힙합 스타일의 한 청년이 자신의 가족은 물론 세상을 구하는 영웅으로 재 탄생되는 과정을 통해 멋진 신사로 거듭나는 것과 달리, 그와 똑같이 힙합 스타일을 고수하던 악당 발렌타인은 결국 스스로 벌여놓은 문명의 이기로 스스로 징벌을 당하고야 만다. 

007시리즈이 고전적인 악당들은 <킹스맨>으로 오면, 전세계 인을 대상으로 '선민 의식'에 사로잡혀 인구 청소를 하겠다는 야심찬 전략을 내보인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무기는 다름아닌 우리가 가장 일상적으로 의존도가 높은 핸드폰이다. 그의 회사가 제공한 무료 칩이 결국 전세계인의 살상 무기가 된다는 설정은, 가장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은 섬뜩함을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구약 성서의 소돔 시처럼, 그 누구의 손을 빌지 않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상황을 통해 인간 청소를 하겠다는 발상은 기발하면서도 현실의 거울처럼 느껴져 섬뜩하다. 더구나, 자신들이 봉사해야할 국민들을 저버리고,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에 들떠 웃고 떠들다 내장된 칩이 터져 명멸하는 숱한 세계의 지도자들이라니!

영화 <킹스맨>은 이렇게 이 시대의 보편적 이기를 무기로 둔갑시키며, 과잉 인구로 헐떡이는 지구라는 재앙을 악의 목적으로 삼으며 보편적 공감을 얻는 한편, 그런 악의 일소에 젊은 영웅의 등장에의 개연성을 획득해나간다. 개 한 마디로 죽이지 못하던 젊은이가 자신의 아비와 같은 해리 하트의 죽음을 목격하고, 해리 하트는 물론 역시나 싼 핸드폰에 홀려 무료 칩을 받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 손아귀에 놓인 동생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다수의 인명을 살상하는 작전에 돌입한다는 폭력적 개연성말이다. 

하지만 영화가 순조롭게 영웅이 될 주인공의 개연성을 <올드보이>의 오마주를 해가면서 얻어가는 한편, 좀 더 면밀하게 이 영화를 들여다 보면 우리 사회에 여전한 편견, 혹은 편협함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다. 

우선 처음 주인공 애거시가 힙합 스타일에 사투리에 가까운 언어를 쓰며 등장하듯이, 이 영화는 은연 중에 힙합 스타일은 치기어린 것이며, 그에 반해 나중에 그가 착용한 '영국 신사 풍'의 스타일이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어른'이라는 식의 화법말이다.
이 영화에서는 애거시와 같은 스타일을 고집하는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다름아닌 악의 축 발렌타인이다.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허연 힙합 스타일을 고수한다. 또한 그가 해리 하트를 초대해 대접한 음식은 '해피밀'이다. 영화는 소위 힙합으로 대변되는 빈민층의 정서와, 블루 칼라의 음식으로 대변되는 해피밀을 악인으로 설정으로 가져온다. 전 세계인을 죽이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해 가면서도, 막상 눈 앞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발렌타인의 아이러니한 모습등을 통해, 그가 미성숙한 인간임을 한껏 드러낸다. 

어디 스타일뿐인가. 악의 축인 발렌타인이 여전히 흑인이며, 그를 측근에서 보좌하는 최고의 킬러 가젤(소피아 부텔라 분)는 동양인이다. 그에 반해 주인공도, 그를 이끈 해리하트도 전형적인 백인이며, 그들이 주창하는 '매너'가 운운하는 대사는, 결국 해리 하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 영국 귀족 계급의 정신을 대변한다. 마치 '관용'을 내세우면서 한껏 조롱하는 모양새와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영화 클라이막스에 등장하는 폭죽처럼 터지는 수많은 인간들의 머리통들이다. 그들이 다수의 국민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안전만을 구한 채 그곳에서 희희낙락 파티를 벌인 죄과는 엄정하지만, 발렌타인의 도발을 방지하기 위한 영화적 선택으로 숱한 머리통들의 폭죽을 바라보아야 하는 불편함은 어떨지. 더구나, 그것이 폭죽처럼 터지는 순간, 쾌감까지 느끼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라니 말이다. 결국, 그 누구가 되었건, 개 한 마디도 쏘아 죽이지 못하던 청년은, 자신을 멋진 신사의 길로 인도해준 은인의 복수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다수의 사람들을 죽이고도 술잔을 들고 공주의 방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역시나 007과 다르지 않은 살인 기계로 탄생되었다. 하지만 <올드보이>의 비장한 망치씬을 피비린내 한 점 나지 않는 스타일리쉬한 액션씬으로 거듭 재탄생시킨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는 그런 피 냄새를 제거한 채 경쾌한 오락 액션으로 다가올 뿐이다. 

by meditator 2015. 2. 16. 16:27

동인과 서인, 그리고 다시 노론과 소론 등 조선의 파당사는, 그것이 국멸의 원인이라 칭해진 것처럼 우리가 역사를 통해 심지어 도표로 세세히 그려지며 공부할 수 있었다. 오죽하면 탕수육 소스를 부어먹는 방식, 소위 '부먹'이나 '찍먹'이냐를 놓고 조선의 파당을 설명하는 우스개가 회자할 정도로 조선의 정치적 파당사는 명확하다. 


하지만, 정작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그런 파당을 다루는 왕의 자세가 어떠했는지, 그리고 그런 왕의 자세에 따라 정국이 어떻게 격동에 휘말려 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늘 애매모호하거나, 그저 '무능력'이란 단어로 얼버무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파당'이 필요 조건이라면, 결국 그 '파당'을 다루는 왕은 그로 인한 제 역사적 결과물의 '충분 조건'이다. 더구나, 일찌기 삼봉 정도전에 의해 유학자들의 이상적 집단 통치 체제로 이상화된 제도 조선이란 나라에서, 군주인 왕과, 신하들인 유학자들의 갈등과 이합집산이야말로 조선의 정치적 격변을 일으키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였다. 2월 14일 새로 시작된 <징비록>은 바로 이런 조선의 격변,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임진왜란이란 결과물을 선조와 동인, 그리고 서인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물로 그려가고자 한다. 




정치적 정당성이 결여된 군주, 선조

얼마전 종용한 kbs2의 <왕의 얼굴> 역시 <징비록>과 동일한 선조라는 문제적 군주를 다루었다. <왕의 얼굴>이던, 그리고 새로이 시작된 <징비록>이던 모두 중종의 일곱번째 아들 덕흥 대원군의 세째 아들이었던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 군주이란 컴플렉스를 다룬다. 어미가 노예라면 실제 아비가 양반이라 해도 양반이 될 수 없는 적서 차별이 엄격했던 조선이란 국가에서, 군주가 적통이 아니라는 의미는 상상 이상의 부담을 지게 한다. 그래서, <왕의 얼굴>에서 선조(김태우 분)는 그것을 '관상', 즉 왕다운 얼굴에 연연하는 모습으로 그려냈었다. 그에 반해, <징비록>은 1회 명으로 부터 '대명회전'을 받아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기뻐하는 선조의 모습으로 형상화시킨다. 즉, 적통이었던 선대의 왕들도 해내지 못했던 명에 의한 조선 왕조 역사의 훼손을 적통이 아닌 선조가 해냈었다는, 그로 인해 자신의 정통성을 스스로 획득해 내었다는 자부심을 그려내는데 집중을 한다. 그럼으로써 역으로 선조란 인물이 얼마나 적통이 아닌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컴플렉스로 인해 대명회전을 통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해준 명에 대해 얼마나 저자세일 수 있는가를 단번에 설득해 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하가 명에 대해 사은사를 거하게 보내자는 주장에 대해 못마땅해 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자기 중심적인 선조의 면면을 그려낸다. 또한 그런 한편의 주장에 대해, 강직하게 그것은 명이 잘못한 걸 바로 잡으니 사은사 따위는 보낼 필요가 없다는 병조판서 류성룡(김상중 분)의 원칙적 입장과, 그런 모든 것을 어우르면서 명에 대해서는 적당한 사례와, 조선의 명분을 세우는 편의적 입장을 취하는 영의정 이산해(이재용 분)를 드러냄으로써, 전체적으로 실리적 정치 노선을 걷는 '동인'의 성격을 단번에 드러낸다.

그러기에 이런 동인을 정치적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골몰하는 정권에서 소외된 윤두수(임동진 분), 정철(선동혁 분)이 어떤 정치적 행보를 보일 것이 지를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게 만든다.
굳이 구구절절 동인과 서인이 가져온 파당의 역사를 설명하지 않아도, 단 한 건의 정치적 사안을 둘러싼 왕과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신하들의 대립으로, 임진왜란 전 조선의 정치적 정세를 그려낸다. 

그리고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은, 끊임없이 조선에게 국교를 청한 일본이다. 명에 의해 어렵사리 얻은 정통성에 연연하는 왕, 하지만 현실 정치를 담당해야 하기에 실리적 입장을 취하게 되는 동인, 당연히 자신들을 거둘 수 있는 사람은 왕밖에 없기에 왕의 의중에 의탁해야 하기에 무조건 왕의 의견을 따르는 각 정치 세력이 어떤 입장을 취할 것인가는 드라마가 설정한 캐릭터로 인해 손에 잡히듯 명확하게 그려진다. 



16세기 조선에서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16세기 조선의 정치적 상황임에도 2015년 대한민국의 상황이 느껴지는 기시감이다. 
일본의 국교 제의에 왕인 선조는 분노한다. 심지어 국교가 아니라, 그저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자는 제의 보차도 꺼내지 못하게 한다. 명으로 부터 얻은 정당성에 연연하는 그에게, 어렵사리 얻은 결과물을 폄훼하는 그 어떤 조짐조차도 못마땅하다. 그의 말대로 '백성'을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정치적 처지에 연연하는 소인배의 모습 그 자체다. 그런 왕에 대해 당시 실질적으로 정치를 담당했던 동인은, 어떻게든 잠재적 위협 요소인 왜와 통교를 통해 그 사정을 알아보고자 하고, 이런 동인에 반대하는 서인은, 왜와의 통교는 말도 안된다며 왕을 돕는다. 이렇게 정치적으로 뜻을 달한 정체 세력에 따라, 백성들조차 시시때때로 해안 주변을 침탈하는 왜에 대한 입장을 놓고 양분한다.

어디서 많이 보던 정황이 아닌가? 오랜 국교 단절로 인해 도대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왜, 하지만 수시로 벌어지는 해안 지방의 침탈과 대마도 영주의 언급으로 알 수 있는 그 폭력성, 전쟁에의 조짐. 그렇게 조선을 시시때때로 괴롭히는 정치적 정당성조차 불분명한 왜에 대해 조선의 정치 세력은 의견이 갈린다. 폭력적이고 그 실체를 잘 모르니 그들을 잘 알고 잘 다루기 위해서라도 친해두어야 한다는 입장과, 그렇게 폭력적이고 심지어 조선 백성들을 종종 괴롭히는 세력과는 상종조차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극명하게 정치적 포지션에 따라 갈리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풍신수길이란 드라마가 그리듯 폭력적인 하지만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 왜의 정권은, 2015년 대한민국의 잠재적 위협인 '북한'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한, 그런 북한에 대해 '햇볕 정책'을 펼치며 그들을 양지로 끌어들이겠다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비롯한 민주당 세력과, 우리를 괴롭히는 북한과는 상종도 못한다며 실질적으로 '단교'에 가까운 조치를 취한 새누리당을 비롯한 보수적 정치 집단의 행보가 묘하게도 겹친다. 심지어 대국 명의 심기를 거스릴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조차 익숙하다. 드라마는 16세기 임진왜란 전의 풍전등화와도 같은 조선의 정국을 비추는데,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거기서 자꾸 21세기의 대한민국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미 16세기 양분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조선이 선택한 정치적 판단의 결과가 어떤 결과물을 가져왔는지를 알고 있는 21세기의 시청자들은 16세기의 정쟁을 바라보는 입맛이 점점 더 써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역사 드라마의 매력이다. 드라마의 초반 그려내듯이, 피로써 되새김질을 한 <징비록> 임진왜란 7년의 역사는, 그저 16세기의 역사가 아니라, 여전히 열강에 의해 둘러싸이고, 늘 함께 하면서도 그 정체를 알길 없는 북한과의 대치가 항시적으로 위협이 되는 대한민국의 현재를 복기하게 만든다. <징비록>은 그런 역사 드라마의 본분을 충실히 수행하며 서막을 열어간다. 답답하게 전개되어지는 조선의 정황을 보며, 21세기의 교훈을 얻을 일이다. 
by meditator 2015. 2. 15. 10:27

이른바 불타는 금요일, 외로운 맘을 달래기 위해 tv를 켜면, kbs2tv <용감한 가족>을 제외하고는 여기도 남자, 저기도 남자,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게 아니라, tv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쏟아져 나올 뿐만 마치 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아마조네스의 남성판이라도 되듯, 남자들끼리 먹고 마시고, 심지어 가족을 이루고, 마음을 나눈다. 그들은 외롭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삶은 그들 자체로 충만하다.



 

남자, 요리하다

매주 과연 차줌마 차승원이 어떤 요리를 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된 <삼시세끼>에서 변함없이 차승원은 갖가지 요리를 선보인다. 그저 바닷가에 붙어 있던 장식과도 같았던 거북손이 그의 손을 거치면 밥상의 반찬에서 부터 술안주, 심지어 죽으로 갖가지 변신을 거듭한다. 어디 그뿐인가, 갖가지 김치는 당연지사요, 동거인 참바다씨 유해진이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아니, 보통의 주부라도, 그저 마트에서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어묵이 그의 손을 통해 탄생할 정도니, 웬만한 주부라도 그의 앞에선 명함도 못내밀 정도다. 거기에 요리를 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중국팬에서 부터, 매실 액기스 등에서 고수의 향기가 느껴진다. 무엇보다 그가 음식을 해내는 과정 자체가 흥겹다. 요리를 좀 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느낄 것이다. 그저 어떤 음식이던지, 주저하지 않고 뚝딱 만들어 내는 그의 모양새가 마치 고수가 칼을 가리지 않듯, 그저 요리를 잘 하는 것을 넘어 요리 자체에 어떤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tvn의 <삼시 세끼>에 차줌마가 있다면 <나 혼자 산다>의 이태곤의 먹방은 또 다른 묘미가 있다. 좋아하는 옷에 음식 냄새가 밸까봐 집에서 음식을 해먹지 않는 이규한과 달리, 이태곤은 혼자만의 브런치를 즐긴다. 이태곤이 만들어 낸 요리래 봐야, 그저 고추 참치에 날 계란, 김과 깨를 곁들인 것이지만, 생선 맑은 국에 곁들여 초간단 자신만의 브런치를 감탄사를 연발하며 먹는 이태곤의 모습에, tv를 보는 시청자들은 나도 한번 저렇게 해서 먹어봐야지 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남자, 여유를 즐기다.

자신만의 싱글 라이프를 소개하기 위해 <나 혼자 산다>에 나온 이규한은, 자신의 하루를 '패션 피플'의 그것으로 정의내린다. '멋'이라는 것이 여성만의 전유물의 영역을 잊은지 오래된 이제, tv  속 남자 배우는 서슴없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패션'이라 말할 수 있다. 혼자 브런치를 즐기기 위해 나서려고 옷을 몇 차례나 갈아입는 그의 모습이 당당하게 화면 속으로 펼쳐진다. 배우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벗겨내고 돈벌이가 없어 어려운 시절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자신이 쟁여둔 옷을 팔기 시작하면서 시작된 중고 거래가 이젠 친한 친구가 광주에서 옷을 사기 위해 그의 집을 들를 만큼 부업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안입는 옷을 쌓아놓을 이유가 없다고 쿨하게 말하던 그지만, 옷이 팔리자 마자 비싼 가격에 세일을 기다리던 청바지를 사겠다고 전화를 넣는다. 심지어 그가 출연했던 분량의 마지막은 함께 했던 <나 혼자 산다> 출연자들에게 자신의 옷을 천연덕스럽게 강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패션을 즐기는 싱글 라이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도 빼놓을 수 없다. 이탈리아 여행에 성공했던 김광규는 새해를 맞이하여 역시나 중국어 한 마디 할 줄 모르면서 용감하게 홀로 백두산 여행에 도전한다. 그런가 하면 <마녀 사냥>의 네 mc는 데이트 코스의 선 경험을 핑계로 홍콩 행을 감행한다. 남자들만의 여행, 그곳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들 자신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심지어 연인인 양 둘씩 짝을 지어 각자 해보고 싶었던 곳을 거닐고, 회전 관람차까지 탄다. 


남자, 사랑하다.

tv 속 남자들이 사랑을 나눈다. 게이물이 아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통해 등장했던 '브로맨스'가 이젠 예능 속에서 조차 그 지분을 확장해 나간다. 


<마녀 사냥>속 허지웅과 성시경은 서로 두 사람을 두고 사람들이 연상하는 '연인'모드에 왜 그런지 모르겠다면서도, 애틋한 속마음을 표출하는데 여념이 없다. 참 '고맙다'는 속마음을 진솔하게 표출하는 허지웅과, 그런 허지웅을 이해 넘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회전 관람차 속의 두 남자를 두고, 그저 '친구'라는 수식어로만 표현하기엔 어째 간질간질하다. 유세윤과 

이렇게 '브로맨스'로 시작된 남남 캐미들은, <삼시세끼>로 오면 아예 대놓고 '부부'가 되어버린다. 집안 일이며, 음식하기를 즐겨하는 차승원은 차줌마이더니, 아예 '안사람'이 되어버리고, 그런 '안사람'을 꼬드겨 등산을 하고, 바닷 낚시를 즐기는 이름마저 '참바다'인 유해진은 '바깥 사람'이 되어 버린다. '안사람'은 불철주야 '바깥 사람'을 위한 음식을 하느라 분주하고, 그런 '안사람'을 위해 원하는 만큼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바깥 사람'은 흡사 밥벌이를 제대로 못하는 '남편'처럼 면목없어 한다. 

어디 차승원, 유해진뿐인가. 게스트로 등장하여 눌러앉을 기세인 손호준까지 가세하면 아예 한 가족이다. 심지어,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강아지 산체조차도 <삼시 세끼> 농촌 편에서와 달리, 남자다. 시커먼 남자들로 유사 가족을 이뤄 시끌복작한데, 웬걸 제대로 가족 코스프레를 하는 <용감한 가족>보다 훨씬 가족같다. 




tv 속 예능에서 남자들이 득시글거리기 시작한 건, tv 리모컨의 향배가 여성 시청자층에게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그래서 이제 남자들은 시커멓게 토크쇼에서 부터 시작하여 리얼리티까지 그 존재감을 뽐낸다. 

그 속에서 그들은, 이른바 우리 사회가 '남성적'이라고 규정지어 놓은 영역을 자연스레 파괴해 나간다. 스스로 음식을 하고, 혼자 음식점을 찾아가서 먹고, 옷을 즐겨하고, 홀로 혹은 함께 여행을 하고, 남자들만의 가족을 만든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남자가 음식 냄새가 밸까봐 집에서 음식도 안하고, 외출하는데 옷을 서너번 씩이나 갈아입는 걸, '남자답지'못하다고 할 상황이지만, 이젠 '패션 피플'이라는 명칭으로 자연스레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 차승원이 음식에 머리카락이 들어갈까봐 머리 수건을 하고 종종 걸음으로 식재료를 썰고 무치고 볶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한 것이 되지 않았다. 야곰야곰 영역 파괴를 시작한 연예인들에게 더 이상 배우나 가수란 명칭이 무색해졌다. <나 혼자 산다>에서 가장 인기있는 mc 중 한 사람은 평론가 허지웅이요, <삼시세끼를 이끄는 세 남자는 온전히 다 배우들이다. 예능적이지 않은 예능인들이 만들어 가는 '남자들의 신선한 삶'에 사람들은 시선을 빼앗긴다. 


물론 이런 tv 속 남자들의 속내도 만만치 않다. 10년이 넘도록 오르지 않는 원고료가 평론가 허지웅으로 하여금 방송 출연이라는 영역 파괴를 실천하게 만들었고, 더 이상 자신을 불러주지 않는 드라마가 이규한으로 하여금 예능이라는 신천지를 개척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윤종신이 특수한 경우가 아닌 가수들에게 예능은 자신을 알리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장이 되었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자신을 한껏 희화화시켜주는 <라디오 스타>의 갑질(?)에 이제 예능의 기회가 열렸다며 감사하기까지 한다. '밥벌이'의 고달픔은, 시청자들에게는 신선한 예능 늦둥이들의 '러쉬'로 제공된다. 


또한 여성 시청자의 취향을 넘어서, 짝을 이루지 않은 남자들만의 스토리에는 더 이상 결혼이 최선이 아닌 현실의 묘한 모사가 담겨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삶이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혹은 잠정적으로 혹은 여타의 이유로 가족과 함께 할 수 없는 남자들은 혼자만의 삶을 즐기기에 노력한다. 그리고 tv 속 예능은 발빠르게 그런 남자들의 현실을 '예능'으로 승화(?)시킨다. 그런 남자들만으로 넘치는 예능을 보다, 문득, 남자건 여자건 저렇게 굳이 이성과 함께가 아니라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삶도 괜찮겠다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알량한 예능만의 영역일 수도 있다. <삼시 세끼>를 보며 차줌마와 바깥 사람의 정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사람들이 현실의 김조광수 감독의 결혼에는 냉랭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by meditator 2015. 2. 14. 10:05

지난 8일 1000만을 넘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국제 시장>은 여전히 박스 오피스 4위를 유지하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명량>, <아바타> 에 이어 역대 박스 오피스 순위 3위를 기록하는 성취를 이루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사람들은 <국제 시장>을 단순히 그 시절을 추억하기 위해 <국제 시장>을 보러가는 것일까? 영화 <국제 시장>이 흥행을 하면 할 수록, 오히려 <국제 시장>세대 혹은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온 세대들은, 그 영화를 통해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의 결핍감을 위로받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추억은 힘이 세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사람들은 현실의 자존감이 떨어질 때, 과거를 탐닉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시대 <국제 시장>의 흥행은 바로 그 시절을 살아온, 혹은 그런 사고 방식으로 살아온 세대의 자기 회한을 역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 <국제 시장>에 대해, 영화 속 주인공 덕수의 삶은 파란만장했지만 정작 영화 속 덕수란 인물이 제대로 형상화되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절을 살아온 덕수란 인물을 그저 시대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고 그 속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살게 하기 위해 자신을 던진 인물이기에, 그에게 '자아'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어줄성설일 수도 있다. 그렇게 그 시절을 '자신'이란 존재를 버려 둔 채 '생존'을 위해 달려온 세대들은 이제야 뒤늦게 영화를 보며, 자신들의 삶의 정당성을 복기하고자 한다.

 

 

<국제 시장>의 후일담 혹은 말하지 않은 이면의 이야기

이렇게 장황하게 영화 <국제 시장>의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바로 <고맙다 아들아>란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가기 위해서다. 이른 설 특집극으로 편성된, 사실은, 종영한 <왕의 얼굴>이후의 공백기를 메우고자 땜질식으로 편성된 2부작 특집극 <고맙다 아들아>는 제목과 달리, 골치거리 두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목은, <고맙다 아들아>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일반적으로 교육 문제를 둘러싼 아이와 부모의 갈등이 갈등 자체의 해소에 촛점을 맞춘 것과 달리, 바로 그런 갈등의 원인이 된 부모들의 삶, 삶의 자세까지 시야를 확산한다. 그리고 바로  그 확산된 시야 안에는, 사실은 <국제 시장>의 덕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온 또 다른 부모 세대의 삶이 존재한다.

 

극 중 형으로 등장하는 장형산(이대연 분)은 <국제 시장>의 덕수처럼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장남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일용직 노무자, 외판원, 심지어 새우잡이 배 선원을 하며 돈을 번 대신, 동생을 의사로, 아내를 초등학교 교사로 만들었다.

그런 형의 희생으로, 동생인 장형준(최진호 분)는 원치 않았지만 의사가 되었고, 이제는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서울 시내 그의 이름을 내건 정형외과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동생과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형의 학력은 고졸 검정 고시에 방통대로, 5급 사무관을 바라던 그의 소망은, 주민센터 좌천이란 좌절을 안긴다. 자존심이 상한 형은 난생처음 동생에게 어려운 부탁을 했지만 그에 대한 동생의 반응은 냉담하다.

 

자존심이 상한 형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한때 그가 꿈꾸던, 하지만 동생이 대신 이룬  꿈을 아들을 통해 다시 한번 이루고자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아들은 삼수를 하고도 또 의대 입시에 실패하고 만다.

자신처럼 억지로 의대를 보내지 않겠다던 동생이었지만, 그 역시 서울 시내에 번듯한 정형외과를 한다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걸맞는 이른바 '스카이' 행을 요구한다.

 

의대 입시에 3수를 하고도 실패한 장형산의 아들 재우(안재민 분), 재수를 하면서 1년 내내 좋은 성적을 낸 줄 알았더니 그 모든 것이 우등생을 바라는 부모에 대한 '사기'였던 시우(이정신 분), 이렇게 두 사촌 형제는 그들 부모들의 바람대로는 커녕, 그 발끝에도 미치는 못하는 성취를 하고, 심지어 속이기까지 하고 집을 나가 버린다.

 

말도 없이 집을 나선 재우, 그리고 금고의 돈까지 들고 집을 나선 시우, 그렇게 부모들이 원하는 방향에서 엇나가기 시작한 아이들의 일탈은 뜻밖에도 부모들의 해묵은 문제를 끌어 낸다.

 

 

 


 

 

자식의 상처를 만다는 부모들

<고맙다 아들아>는 결국 우리 사회 학력을 향해 치달아 가는 현상들의 근저에 장형산, 장형준과 같은 부모 세대들의 보상 심리가 깔려있다고 짚는다. 즉, 영화 <국제 시장>은 우리 아버지들, 할아버지 세대들의 삶을 그럴 듯하게 그려냈지만, 정작 그 시절을 살아온 부모 세대들은, 그렇게 자신을 던지며 살아온 삶으로 인해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상처를 자식들에게 요구하게되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숱한 교육적 갈등을 유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스펙타클한 화면에 그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려내지만, 정작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은 채 곪아 문드러져 자식 세대까지 상처입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일찌기 <신의 저울>을 위시하여, <즐거운 나의집>, 그리고 <골든 크로스>까지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날카롭게 형상화해왔던 유현미 작가답게, 교육 문제를 둘러싼 가족 간의 갈등 조차도, 그 문제 자체를 넘어 시대적 혜안을 드러낸다. 즉, 현실의 교육 문제를 낳은 것이 결국 부모 세대가 잘못 선택한 삶의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일찌기 생존을 위해, 혹은 성장을 위해 선택된 부모 세대들의 삶의 방식이 비록 드라마에서처럼 입지전적 성공을 이루고, 나라를 잘 살게 만들었을 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을 놓친 부모 세대의 삶이, 여전히 자식들에게 조차, '자신'을 상실한 채 남 보기에 그럴 듯한 삶으로 몰아 붙이고 있다는 것을 단 2부작의 드라마로 그려낸다.

 

설 특집극답게, 날카롭게 자식들의 교육 문제를 넘어 부모 세대의 근원적 문제로까지 지평을 넓히던 드라마는 전형적으로 아들의 사고를 매개로 부모 세대의 '급' 반성과 세대간 형제간 화해로 마무리 짓는다.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이 서로의 손을 잡고 '미안하다', 다 '내 탓이다'라며 기회를 얻지만, 실제 그런 문제에 봉착한 부모와 자식들에게 과연 그런 기회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오히려 급조된 듯한 해피 엔딩을 보며 들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시우는 옥상에 올라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한 자신을 원망했지만, 많은 아이들이 겨우 몇 점의 수능 성적 때문에 여전히 자신을 버리고 삶을 버리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를 가진 아버지들은 '고맙다 아들아'라고 말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 자체만으로 든든한 아들들과 둘레 길을 걷지만, 현실의 아버지와 아들들은, 혹은 형과 동생들은 해묵은 오해를 풀지 못한 채 남보다 못한 사이로 남기 십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역설적 제목 <고맙다 아들아>처럼, 자식들의 문제를 통해 부모들의 삶마저도 반추해볼 수 있는 기회를 준 특집극, 장황한 미니시리즈 못지 않게 여운을 남긴다.

by meditator 2015. 2. 13. 0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