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시청률 4.328%, 여전히 4%를 유지하고 있지만, 2회 4.971% 이후로 '하강 곡선'이다. 홀수 회차에서 이야기를 풀고, 엔딩에 이어 짝수 회차에서 이야기를 추스린다지만, 그런 작법이 통하지 않았는지, 4회차 역시 반응이 신통치 않다. 

2017년 백상 예술 대상 tv부문 대상,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2018 방송 통신 위원회 방송대상, 2017 뉴욕타임즈 국제 tv 드라마 탑 10 등 줄줄이 수상 실적을 나열하지 않아도 <비밀의 숲>은 2017년 최고의 화제작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의 후속작인 <라이프>는 2018년 최고의 기대작이 되었다. 더구나, <비밀의 숲>을 함께 했던 조승우를 비롯하여 유재명, 이규형 등이 합류한다 하니, 그 기대치는 더욱 높아졌다. 




검찰 내의 비리를 하나의 살인사건으로 풀어내기 시작했던 <비밀의 숲>이 그러했듯, 상국대학교 병원장 이보훈(천호진 분)의 죽음으로 시작된 자본주의의 파고를 맞은 병원의 이야기, 그 서막은 기대감을 만족시켰다. 사회부적응자였던 황시목(조승우 분)의 그림자를 눈을 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구승효(조승우 분)가 의사들을 향해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를 떠나서, 오직 환자에 대한 의무를 지키겠노라 선서하신 우리 의사 선생님들께서'라고 서늘하게 말문을 열기 시작하자, 또 한 명의 괴물 캐릭터가  탄생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야기는 좋은데......
그리고 이어진 몇 회, 물론 여전히 조승우의 구승효, 그 존재감은 탁월하다. 조승우 뿐인가? 어쩌면 <비밀의 숲>의 실질적 주인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창준을 맡았던 유재명이 분한 주경문 선생이 '우리는 오늘도 수술장에 들어갑니다. 만분의 일 사고 위험도로 환자를 죽인 의사란 말을 들어도,'라고 담담해서 더 절절하게 말을 마치자, 이재명의 기억 대신 지방대 출신에 수술에 쪄들었지만 사명감만은 놓치지 않은 또 한 명의 캐릭터가 불쑥 들어온다. 

그렇게 비판적 소재의 좋은 이야기, 그 이야기를 풀어내주는 멋진 캐릭터들이 어울렸는데 시청률은 답보상태일까?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한 회, 한 회, <라이프>는 이야기는 훌륭하지만, 어쩐지 그 한 회를 보며 자꾸 시계를 보게 된다. 

우선 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사실 사전 제작에 가까웠다고 하지만 2017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방영된 <비밀의 숲>과 이제 역시나 사전 제작이나 마찬가지인 2018년 8월에 방영 중인 <라이프>의 방영 텀이 짧다. 즉, 준비된 작가로서 이수연 작가가 미리 많은 작업을 했겠지만, <라이프>를 보면서 갸웃해진다. 과연 이수연 작가는 <비밀의 숲>의 검찰 내 이야기만큼, <라이프>의 병원 이야기를 잘 알고 쓰는 것인가? 라고,




아니 이 말은 어패가 있다. 5회 엔딩에 등장한 진주 의료원 이야기부터, 의료 사고 이야기 등 실감나는 병원 현실의 이야기들을 보고 '잘 알고 있느냐'는 질문은 어리석다. 그 보다는 과연, 이  알고 있는 이야기들을 과연 이수연 작가가 얼마나 '소화'해 냈는가라는 질문이 적절할 것이다. <비밀의 숲>이 놀라웠던 건, 검찰 내부의 전문적인 이야기들이 '대중들'이 보기엔 '무람없이, 그리고 드라마적 재미를 가지고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라이프>의 아쉬운 점은, 필요하고 중요한 '지적'과 '비판' 들이 어쩐지 '드라마'적으로 '덜' 승화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종종 등장하는 이른바 일본 드라마 식의 '교훈 나열식'의 대사이다. <라이프>에서 시청자들을 가장 집중시키는 씬은 '강당' 씬이다. 의사들이 모여있고, 거기에 구승효가 등장하여, 서로의 대사로, 서로의 입장들이 치고 받을 때, 즉 서로의 대사 속에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수연 작가의 생각들이 쭉 나열될 때이다. 구승효의 일갈이 그랬고, 주경문의 솔직한 토로가 바로 이 씬에서 나왔다. 그래서 <라이프>를 놓을 수 없어 흥미진진한 것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그렇게 대사로 쭉 나열하지 않고서는 '드라마적으로 풀어내기가 버겁다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매회 반복되다시피 등장하는 '설명체'의 대사들, 폭염의 날씨, 월화 밤 11시 내일의 출근을 위한 잠을 미뤄가면서까지 이 드라마에 집중하는데 자꾸 '인내'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요즘은 '다큐'에도 '재미'와 '각색'이 요구되는 시대이다, <라이프>가 '다큐' 이상의 드라마적 흡인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나열식'의 대사 이상으로 풀어낼 장치가 필요하다. 

조승우, 유재명의 존재감이 낳는 아이러니
그런데 여기서 '강당씬'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진진하다는 건, 역설적으로 그 강당씬을 제외한 다른 장면들이 덜 재밌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작에서도 그랬듯이, 드라마는 기존의 한국 드라마의 양식을 지양한다. 우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자체가 모호하다. 언뜻 보면, '자본'의 수구 구승효와  그에 반하는 환자와 병원을 지키려는 의사들의 대결같지만, 의사들을 입 뻥긋도 못하게 하는 구승효의 '입바른' 소리나, 각 의국, 더 나아가 각자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가진 그들의 대치는 신선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 둘 곳을 잃게 만든다. 

그렇게 마음 둘 곳을 잃은 시청자들을 위해 작가가 마련한 캐릭터가 바로 예진우(이동욱 분)다. 그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이, 그래서 가장 법을 다루는데 엄정할 수 있었듯이, 장애인이 된 동생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진, 그래서 인간의 고통과 아픔에 민감한 인물이다. 황시목과 정 반대의 설정이만 병원이라는 공간에 가장 어울리는, 그래서 병원을 '자본'의 수중에 던져주려 할 때 당연히 '본능'적으로 반발할 수 밖에 없는 인물이다. 수익을 내지 못하는 응급 의료센터의 의사인 그는 병원 자본주의의 희생양이 될 처지이기에 더욱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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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진우는 어쩐지 좀처럼, 구승효를 앞세운 병원 자본주의와 그에 대항하는 세력의 중심에 자리잡지 못한다. 예진우 뿐만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동생 예선우(이규형 분) 등의 에피소드가 번번히 '사족'처럼 여겨진다. 예진우뿐이 아니다. 분명 구승효의 각성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 같은 소아과 이노을(원진아 분)선생이나, 산부인과 오세화(문소리 분) 선생의 에피소드들이 번번히 겉돈다. 5회에서 다짜고짜 총괄 사장실을 찾아가 구승효와 함께 소아과 병동을 '산책'했던 에피소드는 구승효의 '각성'을 도모할 자원으로 쓰여질 터이지만 어쩐지 그간 구승효의 캐릭터의 일관성을 흐트러뜨린 채 상투적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심지어 부원장 김태상(문성근 분)조차도. 그런데 이미 시청자들은 그래서 라며 다음 질문을 던지며 궁금해하고 있는데, 문제는 드라마가 이들 각자에게 사연 한 보따리씩을 채운 채 그들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사연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등장 인물 모두가 사연을 가지고 중요한 드라마는 '피로도'를 급증시키며 산만해진다.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비밀의 숲>을 통해 일가를 이뤄버린 조승우와 유재명의 탓이 크다. 그들이 자신들의 연기로, 그리고 그들이 풀어내는 캐리터가, 자본을 앞세워 병원을 '개악'하려는 구승효와 그에 맞서는 하지만 정작 병원 내에서는 '왕따'와도 같은 주경문이 묵직하게 두 개의 축으로 자리잡았지만, 드라마는 여전히 분주하게 각 등장인물의 출연 분량을 챙겨주며 시청자들의 주의를 흐트린다. 5회 엔딩에서 주경문의 묵직한 선언 이후 캐릭터가 모호한 산부인과 오세화가 그의 곁에 서는 장면처럼 말이다. 

그래서 제작진의 '운명의 묘'가 필요하다. 과연 계속 이렇게 산만하게 모두의 이야기로 갈 것인가, 애초에 하고자 하는 '주제'에 집중하여 이야기와 캐릭터의 가지치기를 할 것인가. 모호한 구승효가 '자본'의 주구가 전면에 나서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지만 어느새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구승효'의 시선으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선과 악의 경계에서 모호한 캐릭터라 함은 이미 <하얀 거탑> 속 장준혁 과장이 있지 않은가?  

<라이프>는 <비밀의 숲>처럼 각자 정체를 알 길 없는 여러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일'을 하다, 하나의 거대한 모순의 파고에 휩쓸려 들며 한 줄기의 흐름으로 만나는 방식을 다시 한번 취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5회를 맞이한 드라마는 그런 따로 또 같이라는 흐름의 축에서 엔진의 흐름이 약하다. 겨우 5회지만 캐릭터들의 질감의 차이가 드라마의 재미를 막는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비밀의 숲>을 추동한 누가 죽였는가?란 강력한 살인 사건의 흡인력이 <라이프>에는 없다. 원장의 죽음은 이미 동력을 잃고 의료 사고 등 작은 에피소드들이 산발적으로 터트려지는 것도 <라이프>의 흥미를 실종시키는 한 요인이다. 


그럼에도...
<라이프>가 제기하는 이야기는 소중하다. '인명'을 다루는 '공공재'인 병원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 것인가? 5회 엔딩에서 주경문 선생의 말처럼, 해마다 몇 십억원 씩의 적자를 내는 '공공재'에 대해 우리는, 우리 사회는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과연 병원은, 의료 사업은 '자본주의'적인 사업일 수 있는가? 이 엄정한 질문의 가치는 드라마를 잘 풀어내는 것과 별개로 의미있다. 부디 이 가치있는 질문들이 '드라마'적으로 승화되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8. 8. 7. 20:14

신문에 실린 서평에서 '캄보디아 여행기'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에겐 '못살고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나라'로 기억되던 나라, 하지만 그 여행기 속 캄보디아는 그런 우리의 선입견이 무색하게,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도시 공화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사라진 것들이 아직 남아있는 곳, 많은 것을 가지지 않았지만, 그 가진 것들을 기꺼이 나누고, 그것으로 행복해 질 수 있는 곳, 그 '캄보디아 여행기'의 지은이는 반문했다. 그래서 문명적으로 발전된 이곳에서 사는 우리는 정말 행복한 것이냐고. 

세계 여행기라 하면 한때는 우리보다 잘 사는 '문명국'의 유람이 당연한 것이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법 잘 살아지면서(?), 그 '여행'과, 여행에 대한 기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가 '발전,' 과 '성장' 속에서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을, 사람들 발길이 많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발견해 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저 영국 드라마 리메이크를 넘어서 한국판 <라이프 온 마스>가 우리에게 전해준 찡한 정서도 그것이 아닐까. 



화성보다 더한 88년 대한민국 
조폭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강력 3반을 향해 달려가다 정신을 차린 한태주(정경호 분)가 돌아온 곳은 2018년, 그를 혼란에 빠뜨렸던 과거의 늪으로 부터 건져진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얼굴엔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퇴원을 한 그가 걸음걸음하는 곳곳에서 왁자지껄한 강력 3반 동료들이 눈에 밟힌다. '현실'로 돌아왔는데 왜 그는 행복하지 않을까?

어쩌면 그 답은 돌아온 그의 방에 있지 않을까? 퇴원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방은 1988년도로 잠시 회귀했던 그의 방과는 천양지차다. 그랬다. 화성처럼 낯선 88년도에 그가 머물던 방은 오래된 나무 프레임에, 유리문, 촌스러운 문양의 장판과 벽지, 가끔은 새어나오는 연탄 보일러, 그리고 로터리 다이얼이 툭 하고 빠지는 흑백 tv에 밍크 담요, 먼지가 켜켜이 눌어붙은 것처럼 오래 돼서 생경했던 곳이다. 이제 '현실'로 돌아온 태주가 퇴원을 해서 돌아온 그의 집은 너무도 멀끔하다. 블랙 톤의 정갈한 인테리어, 그 안을 채운 금속 프레임의 기능적이며 트렌디한 의자며, 전등이며, 부엌 살림 역시 최첨단이다. 그런데, 어쩐지 그곳에 들어선 태주가 낯설다. 마치 그가 88년에 처음 도착해서 낯설었던 것처럼. 

그랬다. 2018년의 태주는 마치 2018년의 그의 방처럼, 사람보다는 과학적 데이터와 증거를 믿었던 사람, 그래서 출세가 빨랐지만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약혼을 했던 연인과의 관계도 이어가지 못한 채 좌천되고, 이별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정서와 신념이 전혀 엊물리지 못하는 88년으로 나동그라졌었다. 




그가 떨어졌던 88년은 이미 <살인의 추억>을 통해 이제는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과학 수사'가 불가능했던 시절, 과학적 성취가 미비해서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법이나 절차보다는 강동철 과장(박성웅 분)의 손아귀가 먼저이고 익숙했던 '인지 수사'와 '강압 수사'가 익숙했던 시절, 당연하게도 한태주는 반발한다. 하지만 그런 그를 88년에 붙잡아 세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람', 그 중에서도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한태주에게 '상실된 기억'이다. 돈을 벌러 사우디로 가서 돌아가신 분, 그래서 내내 고생하셨던 어머니와 그를 '홀로' 남겨둔 '그리운 기억'이다. 88년으로 돌아간 한태주는 그저 그리움으로 남았던  '아버지의 추억' 그 실체에 봉착한다. 

<라이프 온 마스>는 원작의 골격과 사건을 고스란히 쫓아가면서 그것을 88년의 공기와 사건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리고 거기에 한태주의 묻혀진 '트라우마', 아버지를 더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이제는 우리에게 '88년 올림픽이라는 영광'이라는 이름보다는 '야만과 폭압'으로 기억되는 80년대를 불러온다.

아버지의 시대, 그 시대와의 화해
88년으로 돌아온 한태주를 혼란에 빠뜨린 건 크게 두 가지이다. 2018년의 한태주의 능력이었던 '과학'이라는 것을 무색하게 만들었던 '전근대적이며 야만적인' 강동철 계장으로 상징되는 88년식의 수사 방식과,  '아름답게만 추억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실체이다. 

과학적 데이터와 방식에 근거했던 한태주의 능력은 강력 3반의 일원으로 매사에 팀원들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것은 강동철 계장과 이용기 형사(오대환 분)의 주먹구구식, 심지어 증거 조작, 거기에 더한 '폭력적'인 수사 방식이 낳은 피의자의 죽음 등을 통해 극대화된다.  '야만적이며 폭력적이기만' 했던 88년도의 강력 3반, 하지만 본의 아니게 같은 팀이 되어 뛰어다니는 사이, 한태주는 어느덧 그들이 지닌 '인간의 결'에 '포섭'되어 가고, 그들의 '막무가내'식 수사에 한태주의 과학 수사가 '화룡점정'이 되어 절묘한 능력의 강력 3반으로 '버전 업'되어가는 식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 엇물리며 손발 맞추어 가던 88년도의 강력 3반과 2018년의 한태주 사이에서 튀어나온 '한태주 아버지' 한충호. 조폭들의 근거지를 털러 간 나이트 클럽 화장실에서 만난 아버지는 태주의 기억 속 아버지와는 달랐다. 사우디에 돈을 벌러 간 적도 없으며, 여전히 아들을 사랑하는 듯 했지만 그의 사랑은 '허황됐다. 더구나 아버지는 88년도 인성시에 벌어진 연쇄 살인범의 혐의까지 받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그림자를 밟으며, 아버지의 실체를 하나하나 밝아가는 한태주, 그 끝에서 그가 마주한 건 그의 잃어버린 기억 속 아버지의 '비명횡사'이다. 아들을 사랑했지만 '부랑'했던 아버지, 결국 그는 한탕을 위해 도모하다 연쇄 살인범의 '증거 소멸'의 굴레에 걸려 '개죽음'을 당하고 만다. 한태주는 88년으로 돌아와 잊었던 기억의 한 장을 펼쳤지만 그곳에서 만난 건 '얼룩진 역사'.  태주의 아버지는 우리의 기억 속 80년대와 같다. 자식 세대에게 '올림픽'까지 치뤄내어 '발전'했다며 화려하게 팡파레를 울려댔지만, 기실은 양아치같고, 한탕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시대. 성장과 번영의 80년대라는 캐치프레이드 속에 숨겨진 야만과 폭압의 역사.

하지만 드라마는 그 '비극의 폭로'에서 멈추지 않는다. 아버지의 과오 앞에 망연자실한 한태주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또 다른 아버지'이다. 육친의 아버지를 마주하기 위해 던져진 88년도에서 한태주를 맞이한 건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같은, 강동철 계장이다. 서울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한태주를 보란 듯이 '멕이던' 강동철 계장이지만, '츤데레'처럼 한태주를 챙긴다. 절대로 너가 걱정돼서 라는 말은 하지 않지만, 전기구이 통닭에서, 김치국물, 장모님이 싸주신 갈비찜까지 알뜰하게 한태주를 챙긴다. 도망자로 쫓기는 순간에도 아들이 원하던 딱지를 사시 위해 애썼던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이다. 

88년에서 강력 3반과 함께 뛰어다니며 어느덧 풀어져가는 한태주의 모습은 결국 그가 2018년에 보여준 '과학'에의 신봉이 '인간에의 상실'이었음을 반증한다. 그리고 그 '인간에의 상실'에서 핵심은 '아버지의 상실'이었음을. 




드라마는 말한다. 그 시절 아버지는 '질곡'이다. 말이 앞섰으며, 자식을 기만하고 허황됐으며, '돈'을 쫓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는 자식을 아버지의 방식으로 사랑했었다고. 강동철 계장 역시 마찬가지다. 드라마의 후반부 강동철 계장의 선배 형사가 몰래 돈을 받은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되는 사건에서 수기로 적힌 통장에는 강동철 이름도 있었다. 선배 형사가 그랬듯, 아마도 강동철 계장 역시 그 관행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리라. 그가 증거를 조작해서 범인을 만들고, 법이나 절차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식으로 살아왔던 한 방식처럼. 

하지만 동네 양야치였던 아버지가 그럼에도 한태주를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듯이, 강동철 계장이나. 이용기 형사 등 그들에게는 그 과실과 함께 한태주를 '회복' 시켜줄 '인간미'가 있었다. 초반 무조건 강동철 계장과 강력 3반에 반발하던 한태주가 그들과 자신의 과학 수사를 절묘하게 절충시켜 나가듯, <라이프 온 마스>는 그렇게 80년대와의 '화해'를 청한다. '아버지'의 시대와의 화해이다. 그리고 그건 '나'를 번듯하게, 혹은 반듯하게 바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 시대에 대한 위로이기도 하다. 정확하게는 '아버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부도덕한 아버지와 다르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듯 달려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 대한 '토닥거림'이다. 

2018년 현실로 돌아온 한태주는 결국 어쩌면 자신의 머릿속 망상에 불과한 그 '증상'의 시대를 향해 몸을 던진다. 이 '부정'의 몸짓, 그리고 그 '부정'의 몸짓이 향한 '부정한 시대', 드라마는 반문한다. 과연 완벽한 시대가 있겠냐고. 에어컨은 커녕, 그 찌든 여름에 차 유리창을 열어 자연의 바람으로 땀을 식혀야 하는 시대, 시체 검시를 보건소에서 하는 '과학'과는 담을 쌓았던 시대, 여전히 함께 일하는 동료 여순경을 '양'이라 부르며 커피 심부름을 시키는 시대, 촌스러운 패션과 후진 시스템의 시대, 한태주의 '퇴행' 혹은 '망상'은 그 '후짐'에의 복고이다.  하지만 그건 '퇴행'이라기 보다는, 달려가느라 놓친 '인간적 감수성'에 대한 연민이다. 

그러기에 그 '복고'를 그저 망상이라 찍어 누르기엔 '행복'이 걸린다. 드라마는 내내 말한다. 그곳이 어디건, 당신이 웃고 행복하면 되지 않았냐고. 그리고 2018년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말에 가슴이 움직인다.  어쩌면 <라이프 온 마스>의 행복은, <응답하라 1988> 속 가족같던 이웃의 행복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이 막연한 우리에게 '화성'보다 가닿기 쉬운 '행복'이다. 더구나 그곳엔 여전히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와 가족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사족; 그럼에도 80년대는 행복했을까? 개인적으로 80년대 어느 날 강동철 계장 같은 아저씨한테 경찰서에서 다짜고짜 뺨을 한 대 맞았던 기억이 있다. 체감된 폭력과 그려진 폭력의 간극이리라. 마찬가지로, <라이프 온 마스>에서 그려진 추억의 80년대와 살아본 80년대의 간극처럼. 아마도 그 간극을 채우는 건, 드라마에서 처럼 '나에게 특별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 그곳이 사실 꼭 80년대일 필요는 없다. 그곳이 어디든 당신이 정말 행복한 그곳이 당신이 머무를 곳이 아니냐고 드라마는 말한다. 설사 진짜 화성이라도 말이다.  명품 영드를 2018년의 우리를 위로하는 한드로 멋들어지게 만들어 낸 <라이프 온 마스> 제작진에 경의를 표한다. 


이순간을 영원히/아름다운 마음으로/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어어어어어어/하고싶은 이야기/너와 내가 만들어요
우리는 모두다/사랑하는 친구들/어어어어어어/아아아 노래를/사랑의 노래를
미지의 세계를/찾아서 떠나요/사랑의 노래를/멈추지 말아요
언제나 끝이 없어라/알수 없는 질문과 대답/
저 넓은 하늘끝까지/우리들의 사랑을 노래해요
머물곳을 찾아서/낯선곳을 찾아가서
미래를 만드는/우리들의 푸른꿈
                                           -조용필, 미지의 세계 중 

by meditator 2018. 8. 6. 15:43

천년을 두고 이어온 인연, 아니 악연의 대서사였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라 등장한 '쿠키 영상', 지금까지 보아온 영화에 대한 재해석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익숙하다. 그렇다면 지난 1편은 '어머니의 이름으로?', 그렇다. <신과 함께>  1편에 이은, 2편이 '무람없이' 우리의 정서에 깃들여 들어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들 두 편의 영화가 연이어 말하고자 하는 '전통적 의식과 정서'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신과 함께>가 동양권에서 공감대를 얻으며 인기를 끌 수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웅장한 한 편의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온 듯하다. 이렇게 말하면 '조롱'이라고?, 아니다.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전해지는 전설, 설화, 민담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전설의 고향>은 1977년이래 1989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이어진 스테디 셀러였다. 그리고 사라진듯했던 이 시리즈는 1996년부터 해마다 여름이면 찾아오는 반가운 납량 특집이 되었다. 올 여름도 어디 <전설의 고향>같은 드라마 안하나 기다리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 시리즈가 이렇게 꾸준히 끈질기게 사랑받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시리즈의 저력이 입증된다. 

웅장한 전설의 고향? 
<전설의 고향>하면 '귀신'이라 연상되지만, 사실 여기서 방점이 찍혀야 하는 건 '귀신'이 아니라, 죽음이다.  <전설의 고향> 속 많은 이야기들이 '귀신'의 등장조차 불사할 만큼 죽음의 경계조차 허무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사를 흔히 중생(衆生)이라고 한다. 물론 폭넓게는 인간을 포함한 뭇생명 전체를 가르키기도 한다. 이들 '중생'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가 없다니? 서양의 근대 철학을 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반발할 말이지만, 불교에서의 '인간'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천상, 성문, 연각, 보살, 부처의 10가지, 다시 분륜하면 33가지, 거기서 다시 세밀하게 분류되면 3000가지의 세계 중에 '하치'에 속하는 세계이다. 이들은 아직 삶에 초연하지 못하고 자신의 업력, 이른바 '업보'에 휘둘려 '고해'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고해의 시작은 대부분 '탄생', 즉 어미와 아비와의 인연으로 부터 시작된다. 물론 <신과 함께 2-인과 연>에서 보여지듯이 그 보여지는 인연은 거슬러 전생의 업보로 이어지기도 한다.




<신과 함께1-죄와 벌>은 저승 세계의 귀인이 된 형 김자홍(차태현 분)의 저승 재판으로 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김자홍은 어쩌면 떡밥에 불과했다. 그의 재판이 진행되는 곳곳마다 등장하는 악귀인 동생 수홍(김동욱 분)의 억울한 죽음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결국 자홍도, 수홍도 불쌍한 중생이 될 수 밖에 없는 두 형제와 가난한 어미의 슬픈 사연으로 귀결된다. 말 못하는 장애를 가진 그래서 두 아이를 거두기엔 역부족이었던 어미가 없었다면 애닮게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던 자홍의 삶도, 여덟 번의 재수 끝에 사시 1차를 패스했으나 결국 군 의문사한 수홍의 죽음도 그리 서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소방관이라는 직업의 희생 정신도, 군의문사의 억울한 죽음도 '모성'과 그 모성을 거스르지 못한, 아니 않는 두 형제의 '효'라는 전통적 관계의 블랙 홀 속으로 흡수해 버린다. 그리하여 결국 김자홍이라는 인물의 구구절절한 삶도, 김수홍이라는 인물의 선량함도 어머니의 눈물 앞에 곡하는 '신파'의 정서로 휘몰아쳐 버린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때론 귀신으로, 때론 억울한 죽음으로 저승조차 가지 못한 채 구천을 떠돌다 인간 세상의 일이 된 <전설의 고향> 속 서사 구조, 그리고  세계관,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고유의 전설, 설화, 민담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전승'한다. 즉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친숙하고 이물감없는 정서로 이것들이 받아들여진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들의 업
그렇다면 1편에 이어 2편 <인과 연>은 어떨까?  '눈물'로 흥건한 신파로 귀결됐던 1편과 달리, 2편의 서사는 장중하다. '환생'을 소망했던 세 명의 저승 차사, 이제 그들은 한 명만 더 '환생'을 시키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자신들의 환생'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유독 세 명 중 강림(하정우 분)은 자신의 차사 직까지 걸며 1편에서 악귀였던 김수홍의 '환생'에 적극적이다. 




영화는 1편과 마찬가지로 저승에서의 재판 과정과, 그 과정에 기반이 되는 현생의 서사가 엇물리면서 이어진다. 아마도 이번에도 천만을 넘을 것이 당연하게도 예상되는 <신과 함께> 시리즈의 성공적 요인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지점이라면 바로 이 엇물리는 '저승'과 '현생'의 이물감없는 절묘한 콜라보이다. 강림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김수홍의 재판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과정과, 성주신의 훼방을 '거'하고 허춘삼 노인의 목숨을 거두고자 현생으로 간 해원맥(주지훈 분)과 덕춘(김향기 분)의 고전을 면치 못하는 해프닝이 이어진다. 그런 가운데 허춘삼 노인의 생명을 성주신이 원하는 시기까지 '연장'시키는 대신 해원맥과 덕춘은 자신들의 잃어버린 기억을 '딜'을 통해 한 줄기 씩 흘러나오는 과거와, 저승 재판 과정에서 영리한 수홍의 유도 심문을 통해 삐져나오는 강림의 탄식어린 상흔은 관객들로 하여금 '하나의 비극'을 꿰어맞추기에 충분했다.  영화 속 주지훈이 분한 해원맥의 비극적 서사는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지만, 과연 해원맥의 비극에 강림의 인간적인 정서가 드리워져 있지 않다면 그토록 극적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영화는 두 남자의 운명을 씨실과 날실로 드라마틱하게 직조한다. 

분명 천년 전 악연으로 이어진 것이 분명한 이들이 과연 어느 곳, 어느 장소에서 '악연'으로 조우하여 그 인연의 끝을 다하게 할 것인가란 조바심이 관객을 롤러코스터와 같은 저승 재판의 속도감과 함께 몰아친다. 그리고 당연하게 예상했던 비극, 하지만 예상했음에도 여전히 그 세 사람의 물고 물리는 악연은 처절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리했다. <전설의 고향> 속 '비극'으로 마무리 되었던 그 '악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업보'의 결자해지로 향한다. 전설과, 설화와, 민담, 그리고 그것을 관통했던 '불교적 세계관'의 '고갱이'는 바로 '결자해지'에 있다.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자신을 얽어매었던 '인', '연'의 사슬을 스스로 풀어내야만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승격'할 수 있는, 그래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귀신은 구천을 떠돌 수 밖에 없듯이, 천년 전의 악연의 사슬을 풀어내지 못한 세 차사는 내내 천년 동안 환생의 업을 쌓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영화는 설득해 낸다. 


오랜 시간, 인간과 인간의 터전을 지켜보아왔던 성주신은 정의한다. '인간이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상황이 있을 뿐이라고. 이 '현대적인 해석'이 고스란히 '인과 연'의 업의 결자해지로 돌아온다. 그래서, 서로의 악연은 '이해'로,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육친의 죄를 저질렀던 강림의 죄는 49번 째 환생의 사슬을 풀어냄으로써 스스로 풀어낸다. 영화는 우리 장례 의식에 있어 49일간의 이승에서의 돌아봄을 세 저승 차사의 49명의 '환생 업무'로 기막히게 치환해 냄은 물론, 서로의 악연을 넘어선 '인간의 생명 살상'에 대한 대가로서의 '그들이 지난 천년간의 저승 차사'직을 이해시켜낸다. 제 아무리 나쁜 상황이라도 '생명'은 소중한 것이라는 전래의 '인간 중심 주의'에의 환기이다. 



아버지의 업
그런데, 그렇게 장대하게 마무리된 영화는 하지만 '쿠키 영상'을 통해 이 장고한 서사의 각도를 튼다. 이 모든 천년의 서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새롭게 각인되는 것이다. 1편의 <죄와 벌>이 결국 어머니의 눈물 앞에서 용해되었듯이, 2편의 세 차사의 천년에 얽힌 연원과 악연의 끝에서 만난 건 이번에는 아버지이다. 결국, 1편에 이어, 2편, <신과 함께>를 통해 영화는 우리의 많은 인과 연의 근원이 '가족'에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아버지는 달랐다. 어머니와, 1편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은 '눈물'이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눈물'에 그들의 삶을 던졌다. 반면, 2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아버지의 아들로 거듭나기 위해 자신들을 던진다. 그래서 비겁했고, 비열했으며, 심지어 그래서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는데 거침이 없었다, '가부장'의 세계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역사의 속살을 그렇게 영화는 드러낸다. 어머니의 눈물이 화해와 평화로 귀결되었다면, 아버지의 존재는 '갈등'과 경쟁을 부추겼다. 영화는 그렇게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관통하는, 아니 그 용서할 길 없는 피비린내 나는 피의 세계의 가능성은 ' 또 하나의 어머니' 덕춘이 연다.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는 만나고 엇갈리며, 결국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리고 어머니의 '희생'으로 해소된다.

그 방식은 눈물로써 바다를 이룬 1편의 어머니의 세계와는 다르다. 천년의 시간을 들여, 아들이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업보를 풀어내기를 기다려주고, 기꺼이 지원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의 방식은 한편에서 보면, 마치 벼랑 아래로 사자 새끼를 내던져버리는 아비 사자와 같은 서늘함이 있다. 천년을 내내 기억을 잃지않고 고통스러워 하며 49번째의 환생을 향해 묵묵히 걸어왔을 아들을 지켜보는 아버지는 그날, 천년전 그날 자신의 부대를 잃지 않기 위해 기꺼이 큰 아들을 전쟁터의 선봉에 세우지 않았던 그 아비와 그리 다르지 않다.  아비의 세계, 아비의 업, 그리고 아이러니한 아비의 사랑이다. 


by meditator 2018. 8. 4. 17:17

2018년을 상징할 단어들이 여러 개 있겠지만 그 중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소확행' 아닐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등장에는  더는 '성장'이나 '발전' 중심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대한민국 사회가 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대기업 중심의 일자리 정책에 치중했지만 여전히 취업자 중 대기업에 다니는 비율은 3%에 불과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영역 파괴로 양극화만 가속시켰다. 그래서일까?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단순 노무직에 종사하는 청년 층의 비율이 13.2%에 달했다. 작년 동월에 비해 3만 명이나 증가한 추세다. 특히 시간제(아르바이트) 등 1년 이하의 일자리를 선택한 청년들이 작년에 비해 0.2% 증가했다. 이른바 '프리터(free+arbeiter)족과 니트Not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증가 추세임을 반증하는 수치다. 이런 새로운 직업적 선택에 맞물려 등장한 신조어가 '소확행'이다. <다큐 시선>은 이 '신조어'에 걸맞는 삶의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는 젊은이들을 만난다. 




농촌의 개미 부인 송주희
강원도 화천군 오음리 병풍산이 둘러쳐진 길을 바쁘게 자전거로 달려가는 여성이 있다. 송임수 씨네 막내딸 송주희(30)씨,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도 여전히 평생 농사꾼 부모님 앞에서는 '베짱이'가 되고마는 이제 5년차 농사꾼.  하지만 병풍산을 마주하고 늦을까 조바심을 내며 달려가는 이 시간이 그녀는 행복하다.

도시에서 그녀도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 않던 공시 도전 10년차, 자존감은 바닥을 내리쳤었다. 예전의 자신감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녀는 귀향했다. 그리고 5년 이젠 그녀를 개미 부인이라 부르는 베짱이 남편도 있다. 단조로운 농사 일의 활력을 찾고자 춘천으로 기타를 배우러 가서 그곳 학원에서 만난 인디 가수 김윤철(31)씨, 그는 낮에는 아내와 함께 '애플 수박'을 키우느라 비지땀을 흘리고, 밤 시간을 이용해 음악을 만드는 자신을 '파머 송 라이터'라 부른다. 

평생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으시던 어머니는 한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시다 땀을 식혀주는 한 줄기 바람을 ' 우리 엄마가 나 힘들까봐 보내주는 바람'이라며 시원해 하셨다. 이제 어머니의 그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두 부부, 하루하루 달라지는 작물로 인해, '노력한 만큼'의 의미를 깨닫는 삶, 그리고 여전히 인디 가수로, 그리고 동네 노인분들의 한글 강사로, 웃음 강사로 분주한 나날들, 그들은 '바로 지금 여기서' 행복하다. 




지난 2000년 일본의 시오미 나오키 씨는 다니던 통신 회사를 그만두고 21세기의 새로운 생활 양식으로 '반농반x' 연구소를 만들고, 책 <반농반x>를 펴냈다. 지역에 내려가 반은 농사를 짓고, 반은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삶, 그가 주장하는 '반농'은 기본적인 먹거리의 자급자족으로 '소비'로 부터 자유로워짐은 물론, 지역을 근거로 사람들과 연계되기 때문에 대도시에 비해 자신의 역할이 대도시 경쟁 시스템에 비해 한결 부각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어릴 적 동네꼬마였던 송주희 씨가 이제 마을 회관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모아놓고 '선생님'이 되고, 여전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만드는 김윤철 씨는 2018년의 트렌드 '소확행'을 넘어 시오미 나오키가 주장하는 바 21세기의 새로운 대안적 생활 방식의 실현이다. 그리고 이런 21세기형 생활 방식이 도시로 오면 '텃밭 공동체'의 형태가 된다. 




도심의 초보 농부 이아름씨 
고양시 덕양구의 텃밭 공동체 그곳에 이 더운 여름 볕을 마다하지 않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다. 도시 농부 이상린 씨 (51), 기자 이아름 씨(32), 자신이 키운 먹거리로 한 요리를 하겠다는 '팜투 테이블'의 요리사 로이든 킴과 푸른 눈의 그의 아내 에밀리, sns을 통해 의기투합한 이들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이 농장에 모여 '고정적'인 노동을 하고, 수확물을 함께 나눈다. 

그 중 이아름 씨는 아직은 서툴고 그래서 늘 다른 성원들에게 신세를 지는 것같아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는 위축되지 않는다. 이 '공동체'에서는 그런 그녀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10년차, 하지만 '경쟁 논리'로 돌아가는  직장 생활은 하면 할수록 그녀에게 고립감을 주었다. 직장을 그만두던가, 아니면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른 모색이 필요하던 그때, 이아름 씨는 '텃밭 공동체'를 만났다. 

자신이, 그리고 이웃이 키운 작물을 가져와서 만든 한 끼니의 식사, 그저 가지고, 호박이고, 갖가지 풀들이지만,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식물'의 맛을 이제 그녀는 음미할 수 있다. 텃밭 공동체 일을 하며 직장을 그만두는 대신 새로운 일도 찾았다. '도심에서 먹거리가 해결된다면 좀 더 여유롭지 않을까'란 생각으로 시작된 이 공동체의 참여가 이제 그녀에게 '먹거리'의 해결 이상, 그와 관련된 직업으로의 이직까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더는 '직장에서의 고독'에 시달리던 이아름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 행복하고 여유로운 도시 농부가 있다. 




힘들어도 지치지 않으면 그게 행복
행복 지수 전 세계 57위, 선택 지수 139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한국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 대신, '인생의 한 방'을 위해 자신을 던져왔다. 그런데, 그 결과는? 사회적 장벽에 봉착한 젊은이들은 이제 '확실한 한 방' 대신 일상의 소소하 행복이라는 '확실한 처방'을 스스로 찾아냈다. 그 중에 36세의 여행 드로잉 작가 김현길 씨도 있다. 

모두가 바쁘게 걸어가는 도심, 그 가운데 배낭을 메고 여유롭게 걷는 이가 있다. 마을 버스를 타고 서울에서는 이제 몇 남지 않은 옛 도심북정 마을을 찾은 그는 화첩을 꺼내고 샤프로 밑 선을 그리고 수채화로 채색을 하느라 한 나절을 보낸다. 재개발 되지 않은 낡은 도심, 하지만 그의 화첩 속 도심은 푸른 하늘빛과 그 아래 오래된 집들이  '자세히 보아야만 드러나는 작고 하찮은 것들'의 위안이라는 김현길 씨의 표현 딱 그대로 스며져온다. 

블로그의 취미로 시작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책을 출간하고, 이제 드라마의 삽화 작가로도 이름을 날린 그가 처음부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남들처럼 살기를 원하던 부모님의 뜻대로 소프트 웨어를 전공했고, 전자 회사를 4년이나 다녔다. 하지만 더는 그 삶을 계속할 수 없을 때 그는 용기를 냈다. 사람들이 걷지 않은 제주의 길을 걸으며,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막막함'에 대한 위로를 얻었다. 알려지지 않은 제주 동네 풍경을 자신의 그림으로 담아내며,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운 작은 것들의 가치를 그려가고자 다짐을 했다. 그는 말한다. '힘들어서 하면 안되는 게 아니라', '힘들어도 지치지 않을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의 온도를 결정하는 건 내 자신'이라고. 

사회적 발전과 개인적 성장의 삶이 봉쇄된 사회, 그 속에서 등장한 신조어 '소확행'은 '한방을 위해 살아온' 한국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반응이자, 대안이며, 문화적 감수성이 뛰어난 젊은 세대의 선택이라 전문가들은 정의내린다.  '프리터'와 '니트' 족이 더는 남의 나라 상황이 아닌 현실에서 '소유 가치' 대신 '이용 가치'의 확인, '규모의 이익'에서 '작은 것'으로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행복론'의 등장을 <다큐 시선-행복의 온도>는 증명해 보인다. 


by meditator 2018. 8. 3. 14:38

kbs2 주중 미니 시리즈는 고전 중이다. 월화 드라마 <너도 인간이니>는 5~6% 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주중 2,3위에서 오르내리고, 수목 드라마는 2%에서 4%대를 왔다갔다 하며 꼴찌를 맡아놓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두 드라마를 '수치'상으로만 놓고 평가하는 건 아쉽다. 어쩌면 이들 드라마가 시도하고 있는 건, '수치'상으로 당연한 결과다. <너도 인간이니>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로서는 그간 생소했던 '로봇'이 주인공을 맡았으며, <당신의 하우스 헬퍼>는 잘 나가는 멋진 남자 주인공이라는 '환타지'적 요소를 배제한 '집안 일' 해주는 남자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간 '미니 시리즈'를 통해 시도하지 않았던 이들 드라마의 시도에 시청률이 당장 따라주지 않은 건 아쉽지만, 시청률이 따라주지 않더라도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야말로 공영 방송으로서  '수신료'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고 있는 한 방식이 아닐까. 




그런데 <너도 인간이니?>의 획기적인 지점을 그저 '인간'이 아닌 '로봇'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점에 국한해서는 아쉽다. <너도 인간이니?>가 진짜 신선한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로봇'을 통해 '인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 작품의 주제 의식을 지금까지 드라마들과는 다른 서사의 전개를 통해 개연성 있게 설득해 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너도 인간이니?>는 시청률과 무관하게 혁신적인 드라마이다. 

애지중지했던 아들을 빼앗긴 로봇 공학자인 엄마 오로라(김성령 분)는 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똑같이 닮은 인공지능 로봇 '남신' Ⅱ, Ⅲ를 만들었다. 엄마를 찾아왔던 진짜 아들 남신(서강준 분)이 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자, pk그룹의 유일한 상속자인 아들의 위태로운 자리를 지키고자 엄마는 로봇을 아들 대신 고국으로 보내는데.

처음 남신 로봇이 진짜 남신을 대신하여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당연히 이 드라마의 '악역'은 당연히 남신의 사고를 사주했던 서종길 이사(유오성 분)라 생각했다. 물론 서종길 이사는 30회차에 이르는 동안 꾸준히 '악'역의 포지션을 가지고 활약한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의 일관된 악행과는 달리, 매회 주요한 갈등 요소로 로봇 남신과 대립하는 '악역'의 롤을 변주시킨다. 

로봇 빼고 다 '악역'? 
처음 로봇 남신이 인간 남신을 대신했을 때 그를 위기에 빠뜨린 건 이제 그의 '연인'이 된 경호원 출신 강소봉(공승연 분)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고국을 떠난 빌미를 마련하기 위해 공항에서 당시 경호원이었던 강소봉에게 '폭력'을 휘두렀던 인간 남신에게 사과를 받고 싶었던 강소봉은 인간 남신인 척 하는 로봇 남신을 찾아가고, 그런 강소봉을 자신의 정보원으로 두고자 하는 서종길 이사의 '획책'으로 다시 경호원으로 들어온 강소봉은 '로봇' 남신의 존재를 들통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위기'의 발생자였다. 

재벌 3세의 '갑질'과 그에 저항하는 경호원의 갈등은 울면 안아주고, 위기시 인간 구호가 제 1원칙으로 내장되어 있는 로봇 남신의 활약으로 갑과 을의 갈등 대신, 이해와 우정, 나아가 '사랑'의 관계로 승화된다. 이렇게 극 초반 해프닝의 주인공이었떤 여주 캐릭터가 갈등을 넘어 화해와 사랑으로 극복되는 동안 뜻밖에도 로봇 남신의 앞길을 가로막은 건 '엄마'다. 

로봇 공학자 이전에 '엄마'였던 오로라는 아들 대신 pk그룹으로 보냈던 로봇 남신이 아들 이상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며 승승장구하자 아들의 자리에 대한 기우로 로봇 남신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오로지 로봇 남신의 역할을 아들 대신으로만 국한했던 엄마는 로봇 남신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행동을 하자 '수동 모드'를 작동하고, 나아가 아들이 의식을 찾을 경우, '킬 스위치'로 로봇을 제거할 생각까지 한다. 




하지만, '갑과 을'의 자리에서 갈등하던 강소봉이 '로봇'을 통해 감화되고, 심지어 로봇인 남신을 사랑하기에 이른 것처럼, '악역'이 되어 로봇 남신의 목줄을 쥐고 흔들려했던 엄마는 결국 '키운 정'이라는 딜레마에 빠져 '악역'의 끝판 왕으로 등극하지 못한다. 그렇게 엄마가  '연민'의 갈등에 빠지는 동안, 뜻밖에도 다크호스로 등장한 건 pk그룹 회장 남건호(박영규 분), 알고 봤더니 로봇 공학자인 엄마의 연구비를 댔던 그는 자식보다도, 손주보다도 pk 그룹을 더 우선하며 그를 위해서는 친손주 대신 로봇이라도 대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핏줄조차도 이용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런데 역시 회장님이 가장 나쁜 놈인가 했는데,  '냉혈한' 남회장을 능가한 악의 보스가 등장했으니 뜻밖에도 로봇 남신이 그 역할을 대신했던 인간 남신이다. 알고 봤더니 일찌감치 의식이 돌아왔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숨겼던 인간 남신은 자신의 역할을 무난하다 못해 자신 이상으로 잘 해내고 있는 로봇 남신과, 그런 로봇 남신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엄마, 지영훈(이준혁 분) 등으로 인해 갖가지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이렇게 30회차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드라마 속 로봇이 일관된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인간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동안 그를 둘러싼 '인간'들은 각자 자신의 이해 관계로 로봇과 대립하고 갈등한다. 을이었던 강소봉이, 자신의 친아들에 대한 애착을 가진 엄마 오로라가, 자신의 혈육보다 그룹을 더 우선시한 남건호 회장이, 그리고 이제 로봇에게 자신의 자리를, 자신의 사람들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인간 남신이 로봇의 맞은 편에 선다. 

하지만 이들이 '악역'이 되는 건 각자 '인간적'인 이유에서이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자신에게 내장되어 있는 메모리에 따른 원칙과 각종 취합한 정보에 근거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로봇 남신과 달리, 인간들은 각자의 위치, 각자의 입장에 따라, '합리' 따위는 말아먹고, 지극히 감정적이며, 충동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비이성인 판단과 행동을 불사하며 '선량한 로봇' 남신을 위기에 빠드린다. 심지어 단선적인 서종길 이사 조차도 인간 남신과 지영훈처럼, 그렇게 자신의 아들과 서종길을 경쟁시키며 조련하며 이용가치로만 이용했던 남회장에 대한 복수라는 점에서 '악역'롤에 개연성을 더한다. '로봇'이라 낯설고 생소했던 남신은 하지만 매회 각자 인간적인 이유로 그를 괴롭히는 인간들로 인해 어느덧 가장 불쌍한 '연민'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우리는 흔히 '인간적'이란 말을 좋은 개념으로 쓴다. 휴머니즘이란 말은 곧 '선(善)'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너도 인간이니?>는 오히려 우리가 인간적이라 생각하는 그 '개념'을 장착한 로봇을 등장시켜 '인간'에 대해 반문한다. 오히려 인간이란 인간적인 갈등을 하며 끊임없이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라고. <너도 인간이니?> 속 '악역'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인간들은 자신이 처한 '인간적' 상황으로 인해 문제를 발생시킨다. 감정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피해를 자행한다. 하지만 강소봉이 그랬고, 오로라가 그렇듯 그들은 끝까지 '악역'이지 못한다. 자신의 딸 앞에서 약한 아버지의 눈물을 드러내고 마는 서종길마저. 폭주하고 있는 인간 남신조차 그의 한없은 이기적인 행태 안에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단역처럼 등장했던 인간 남신의 고모 남호연(김혜은 분), 오로라 박사의 조력자인 데이빗(최덕문 분)도 각자 자신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인간적 고뇌를 한다. 

<너도 인간이니?>는 이상적이고 이성적인 로봇을 통해 '인간'의 모습에 대해 심층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 누구도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단선적인 캐릭터의 악역 대신 인간적인 갈등으로 끊임없이 갈등을 만들어 내는 인간들을 통해 그리고 그런 인간들과 갈등하는 로봇 남신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통해 드라마는 절묘한 인간 탐구론을 펼쳐낸다. 시청률의 수치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너도 인간이니?>의 가치이다. 

by meditator 2018. 8. 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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