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박수근, 19세기와 20세기, 두 사람이 머물던 시대와, 그들의 화풍은 달라도 두 사람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인물들이다. 두 사람의 작품은 여전히 가장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전해지며, 두 사람과 관련된 전시회는 문전 성시를 이룬다. 두 사람은 생존하던 시절, 동시대인들에게 조명받지 못했고, 그로 인해 궁핍의 극한을 경험했다는 점에선 또한 공통점을 이룬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생전의 불우한 삶은 그들의 사후 작품의 예술적 경지를 고고하게 만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여전히 두 사람을 사랑하고 추앙하지만, 그들은 몰랐고, 모른다. 


제 아무리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궁핍으로 죽음에 이른 두 예술가의 생애와 화려한 부활은 매번 그래서 두 예술가에 대한 상념을 더하게 한다. 그리고 그 상념은 이제는 먼 과거의 고인이 된 인물에 대한 경의의 현재성을 부추기는데, 박수근에게는, 이제는 박수근만큼이나 우리의 기억에 남을 사람이 된 고 박완서 작가가 길어올린 <나목>이 있다. 그저 푸근한 그림을 그렸던 잘 팔리는 화가였던 박수근은 박완서를 통해 6.25라는 상흔을 온몸으로 겪어낸 예술가이자, 가장의 모습으로 재탄생되었다. 



고흐라고 다를까, 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른 그의 기행에서 부터, 권총 자살로 마무리된 굴곡지고 극적인 인생사는 수많은 소설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그의 삶이 소재가 됨은 물론, 그와 그의 동생이 나눈 편지글은 회자되었고, 그의 작품과 인생에 대한 동서양의 숱한 해설서들이 등장했다. 거기에 또 무엇을 보탤 게 있을까 싶었는데, 그 장고한 고흐에 대한 경의의 행렬에 화룡점정이 등장했다. 무려 10년의 기간, 전 세계에서 선발된 107명의 화가들이 스크린에 재현한 제목 그대로 <러빙 빈센트>가 그 주인공이다. 

107명의 예술가가 재현해낸 예술가 고흐
고흐가 잠시 머물렀던 아를, 그곳의 젊은 청년 아르망, 그는 우체국장이었던 아버지의 번거로운 부탁을 받고 고흐의 편지를 전하기 위해 가족을 찾아 떠난다. 청년 아르망에게 고흐나 아버지는 그저 인생에서 저만치 밀려난 주정뱅이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탁아니 부탁으로 길을 떠난 아르망, 그 원치않는 행보에서 그는 의도치 않게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히는 추적자가 되고 만다. 

영화는 고흐에게 아니 고희의 가족에게 전할 편지를 가지고 한참을 주저하는 아를의 아르망을 그린다. 주인공은 고흐인데, 하지만 아직 떠나지도 않은 아르망이지만 전혀 갈증이 나지 않는다.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아를의 별의 빛나는 밤>을 비롯하여, 고흐가 그린 명화들이 화면에서 살아움직이기 시작하니까. 



동시대의 예술가들과 전혀 다른 붓터치로 오늘날 현대 미술의 단초가 되었지만, 동시대인들에겐 인정받을 수 없었던 고흐의 그 생동감넘치는 화면은 그대로 유화 에니메이션이 되어 살아난다. 정확하게 '살아난다'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듯, 고흐가 그려낸 그 터치 그대로 당시의 아를이 재현된 화면은, 고흐의 화풍이 왜 '모던'한가를 증명해 낸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그 색색이 결을 이루어 채워진 스크린은 그대로 고흐의 전시회가 되고, 그가 그려놓은 풍경은 고스란히 당시의 아를과 오베르를 생동감있게 재현한다. 

유화 에니메니션과 미스터리 스릴러의 조합으로 살려낸 인간 고흐 
하지만 <러빙 빈센트>의 가치를 그저 화면에 채워넣은 고흐의 작품이라고만 하면 일면적이다. 오히려 그렇게 펄펄 살아 움직이는 고흐의 그림을 바탕으로,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건, 광인이거나, 기인이거나, 천재이거나 등등 '위인'으로 기억된 한 예술가의 진솔한 생애다. 

그 생애의 결을 살려내기 위해 독특하게도 영화는 '미스테리 스릴러'의 형태를 취한다. 유화 에니메이션과 고흐 죽음의 진상을 밝히는 스릴러의 이 어색한 조합은 오히려 '전시회'가 될 뻔한 영화를 역동적으로 살려낸다. 우체국장인 아버지가 마땅치 않지만 사실은 그 자신이 아직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청년 아르망이, 타의에 의해, 그리고 결국은 자의로 죽은 고흐를 살려내는 그 행보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서사를 이루며 영화의 맛을 살려낸다.

 

동생 테오를 찾아가 편지를 전하려던 애초의 의도가 테오의 죽음으로 인해 좌절되고, 그의 마지막 정착지였던 오베르로 행보를 옮긴 아르망. 그곳에서 그는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봉착한다. 심신이 미약한 소년을 괴롭히는 동네 부호 청년들과 거침없이 맞짱을 뜨는 청년 아르망은 석연치 않은 고흐의 죽음에 파고들며 오베르에서 고흐 주변인물인, 폴 가세 박사와 그의 딸, 여관집 딸 아들린, 뱃사공들을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나 고흐의 죽음,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미스터리 형식을 취했던 영화의 종착점에서 만나게 되는 건, 목사였던 아버지의 가업을 잇는데 실패한 선교사도, 자신의 귀를 자른 광인도 아닌, 오히려 뒤늦게 그림을 시작했지만 8년의 시간 동안 약 8000 점이라는 숫자로 남겨진 한 예술가의 열정이다. 또한 세상과 불의한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어떻게든 세상과 화합하고 소통하고자 애썼던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살아생전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린 가난해서 어쩌면 스스로 죽음을 자처할 수 밖에 없었던 불우한 예술가의 생애이다. 죽음을 통해 길어낸 고흐의 삶, 그 어떤 연대기나 위인전보다, 그의 작품이 배경이 되어 그려진 이 작품은 인간 고흐, 예술가 고흐를 생생하게 살려낸다. 
by meditator 2017. 11. 30. 04:27

<전체 관람가>에서 이명세 감독의 별칭은 '명스나이퍼'다. 앞서 작품을 선보였던 감독들에게 동료 감독들이나 mc들이 '주례사비평' 급은 아니더라도 서로 계속 얼굴을 맞대고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야 하기에 웬만하면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에 비해 이명세 감독은 날카로운 촌철살인의 한 마디를 남기거나, 평가를 유보하는 등 냉정한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자신의 작품을 방영할 시간이 다가오면 주변에선 그래서 말수가 점점 적어진다고 우스개를 했지만, <전체 관람가>에 참여한 대부분의 젊은(?) 감독들에 비해 연배나 활동 시기도 한참 '선배'인 이명세 감독의 고민은 시간이 흐를 수록 깊어보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노장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10년만에 어렵게 만든 영화, 그리고 단편 영화로 치면 학생 때 작품 이후로 어언 40년만에 만든 단편 영화, 하지만 젊은 갇목들은 입을 모은다. 연세가 무색하게 가장 열정적으로, 가장 감각적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그저 나이가 많아서 노장이 아니라, 앞서 살아간 사람의 용기를 그렇게 이명세 감독은 설득하고, 그 노장 감독의 활약에 젊은 감독들은 눈시울을 적신다. 

명스나이퍼였던 이명세 감독이 앞서 작품을 한 감독들에게 한 질문들은 일관됐다. 한 달 여의 촉박한 시간, 제작비가 넉넉치 않아 짧은 촬영 회차로 인해 전전긍긍하는 젊은 감독들에게 그럼에도, 작품이 완성도가 있는가? 단편이라는 형식 안에 어울리는 작품인가? 그렇게 이명세 감독의 날카로운 질문은 앞선 감독들의 선감상 후리플로 남겨진 과제처럼 이명세 감독의 작품이 그 해답을 줄 차례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설명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셨다
                                              - 홍승혁 촬영감독

왜 노장은 돌아왔을까? 
우리 영화계에서 이명세 감독을 스타일리스트라 부른다. '서사'보다, 화면의 색감, 구도 등등에 방점이 찍힌 그의 전작들이 남긴 수식어다. 하지만, 영화 <스파이>에서 중도 하차한 후 더 이상 스타일리스트 이명세의 작품을 더는 볼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상업 영화가 주류가 된 영화계는 대중들을 쉽게 유인할 수 있는 '드라마' 위주의 영화를 선호했고, 그 가운데에서 이미지를 통해 소통하고자 하는 이명세 감독의 자리를 없었다. 

그런 이명세 감독이 10여년의 기다림 끝에, <전체 관람가>라는 콜라보 예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연배에, 그 경력에 위신을 운운할만도 하건만 기꺼이 한참 후배들과 자리를 나란히 하여 '동료'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명세 감독은 그저 기회가 없어서 이 자리에 왔을까? 이명세 감독은 말한다. 비록 10년만의 기회이지만, 자신은 영화에 대한 여전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드라마'로 대체되고 있는 영화에 대해, 이미지, 움직임이 결합된 이미지로서의 영화를 설파하기 위해 기꺼이 후배들과 한 자리에 있게 되었다고. 

그리고 덧붙인다. 자본에 의해 침식된 영화계에서 단편이야말로 마지막 남은 영화의 자리, 혹은 영화의 본령이 될 수 있기에, 기꺼이 참여한다고. 이런 이명세 감독의 출사표는 그의 작품을 감상한 후,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생각케 만들었다는, 한편의 시와 같다는 평가로 이어지며 바로 그런 이명세 감독의 의도가 성공적으로 관철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런 이명세 감독이 작품과 메이킹 과정을 통해 설파한 여전한 그의 주장은, 여느 서바이벌 예능처럼 낙오자들을 모아놓은 리얼 버라이어티로서의 구차한 형색을 지녔던 <전체 관람가>의 프레임을 변화시킨다. 이미 앞서 박광현 감독의 <거미맨>이나,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를 통해 '예능'이나, 투자받지 못한 감독들의 생존기를 넘어서, '자본'을 넘어선 모험과 도발을 시도했던바 있는 <전체 관람가>는 이제 이명세 감독에 이르러, 그 본래의 '단편 영화 활성화'의 의도를 제대로 관철해 낸다. 투자 받지 못해 장편으로 할 수 없었던, 혹은 흥행이 안될 거 같아 할 수 없었던 긴 이야기를 줄인 짧은 이야기가 아니라, 말 그대로 '한 편의 시'로서 단편 영화의 본질을 <그대없인 못살아>가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것이다. 

이미지로 설득한 '데이트 폭력' 아니 '사랑의 본질'
스완의 심장은 질투로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조금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사랑스럽던/ 그녀의 눈을 파내고 싶었다.  -마르셸 푸르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셸 프로스트의 저 짧은 문구로 시작된 영화는 바로 이명세 감독이 선택한 주제 '데이트 폭력'을 대번에 설명해 낸다. 그리고 영화는 보는 이들을 마치 6,70년대의 흑백 영화와 같은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커다란 캐리어를 힘겹게 끌고가는 여자, 한 눈에 봐도 누군가에게 맞은 듯한 그녀의 멍든 얼굴. 쫓기듯 구멍난 스타킹, 그리고 여자의 힘으로 끌고가기엔 버거운 캐리어, 그 상황에서 굳이 구구절절 덧붙이지 않아도 시청자들은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힘겹게 끌고가던 캐리어를 방치하려다 친절한 행인들에 의해 돌려받은 여자는 웃는건지, 우는건지 모를 표정으로 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다 놓치고, 그 순간 어떤 친절한 남자가 몸을 날려 그 캐리어를 구하며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도 잠깐, 열려진 틈으로 캐리어의 내용물을 보게 된 남자는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고, 그 남자를 여자는 사생결단으로 쫓아간다. 

이 영화의 화룡점정은 바로 이 쫓고 쫓기고, 결국은 친절이 파멸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다. 영화배우 대신 현대 무용가 김설진을 '남자'로 캐스팅한 <그대없인 못살아>는 이미 강렬한 이미지의 배우 유인영과 함께 그와 그녀의 추격전을 이명세 감독의 전편 영화에서 트레이드마크처럼 차용된 그림자 액션을 스스로 오마주하는가 하면, 폐 회전 목마를 이명세 감독의 조감독 출신의 감독들이 수동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조명만으로 현실과 꿈을 오가는 몽환적 상황을 연출해 낸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 속의 꿈인가/ 꿈 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 
                                                       - 영화 '개그맨' 중에서 이명세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그림자 액션이나, 일찌기 영화의 시원이 된 에드워즈 마이브리지의 '달리는 말'의 창조적 오마주인 회전 목마에서 빛으로 조명된 사랑과 폭력의 설정이 그저, '미장센'이라는 말을 넘어, 이 영화가 내세운 주제 '데이트 폭력'을 넘어, 영화 마지막 자막 R.M 릴케의 시 '사랑은 너에게 어떻게 왔던가'처럼 남자와 여자의 사랑, 그 본질에 대한 질문을 남긴다. 즉 이명세 감독이 보여주고자 하는 '이미지'가 곧 영화가 되는 순간이다. 

메이킹의 과정에서부터 눈물을 훔치던 감독들은 결국 영화 감상 후 기립 박수를 기꺼이 보낸다. 혹자에게는 1도 이해가 되지 않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움직이는 그림'으로서의, 이해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으로서의 영화의 본령에 대한 질문과, 주어진 주제에 대한 철학적 화답을 한 이명세 감독의 영화는 그 자체로서 '영화'의 길에 대한 '멘토'로 자리매김한다. 

평소 장편을 찍을 때 배우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촬영하기로 소무난 이명세 감독, 하지만 적은 예산 짧은 시간에 군말을 덧붙이는 대신, 짧은 시간에 찍기 위해서 연습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작업으로서의 영화론을 피력한다. 나이가 들어 노장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시대와 젊은이들을 앞선 열정과 혜안의 연륜으로 설득한 '선배'의 자리를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내며, 이명세 감독은 레전드가 된다. 

by meditator 2017. 11. 27. 14:24

그간 신원호 피디 앞에 붙었던 수식어였던 '응답하라'라는 수식어는 이제 그 주체가 분명한 새로운 수식어로 개명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건 '응답하라'에 이은, '감빵' 생활이 아니라, '응답하라'라는 시간과 공간이란 영역을 통해서만 빛날 줄 알았던, 신원호표 휴머니즘이다.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공중파의 여러 드라마로 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간 '추억'을 밑거름으로 삼은 '응답하라'브렌드, 하지만 이번에는 또 어떤 시대로 갈까하고 궁금해 했던 호청자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신원호 피디가 들고 나온 공간은 가장 인간적이지 않은 '감빵', 교도소다. 



추억 대신 극한의 감옥? 
여동생에게 성폭행을 시도한 범죄자를 트로피로 가격하여, 정당방위를 넘어선 과잉 방어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은 야구 선수 김제혁. 그는한국시리즈 2년 연속 MVP, 골든글러브 3연패, 세이브왕, 방어율왕을 차지한 넥센히어로즈 특급 마무리투수. 대한민국 세이브 기록을 죄다 보유한 괴물 클로저이며 미국행을 앞둔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존재, 하지만 법정 구속이 된 그는 하루 아침에 '감빵'행을 하게 되는 처지에 놓인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한 구치소, 하지만 그 짧은 기간을 보낸, 1,2회를 통해 그 공간에서 김제혁은 그의 감빵 동료 법자의 말처럼 볼 거 못볼거를 다 보게 된다. 

입소 과정, 항문 검사라는 뜻밖의 수치스러운 과정에 국민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야구 선수의 비밀스러운 부위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든 교도관들을 여유롭게 내쳐주며 그의 호감을 얻은 조주임(성동일 분), 하지만 같은 방 갈매기와의 육박전을 눈감아주는 조건으로 제혁에게 돈 3000만원을 요구한다. 

이번에도 역시 성동일과 함께! 라면서 그간 '응답하라'의 아버지로 그 역할을 이어왔던 성동일을 <슬기로운 감빵 생활>은 극 초반 그 캐릭터와 흡사한 너그럽고 넉넉한 조주임의 캐릭터로 등장시키며 시청자들의 긴장을 풀어낸다. 하지만, 그 긴장은 곧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제혁에게 징벌방을 가는 대신 돈 3000을 요구하는 그의 돌변한 태도로 인해 배신감으로 급전환된다. 바로 이 지점이,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하 감빵 생활)>이 그간 시리즈로 이어왔던 응답하라의 그 '추억'처럼 호락호락한 시리즈가 아니라는 확실한 각인을 주는 장면이다. 더 이상 '추억'을 반찬 삼아 옹기종기 '남편 찾기'의 로망을 이루지는 않겠다는 선언문이다. 



그렇게 '응답하라'의 상징적 인물 성동일의 캐릭터로 반전과 환기를 주며 여기는 더 이상 추억의 그곳이 아니라며 마침표를 찍은 드라마, 하지만 '추억'은 없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그 '인간의 냄새'가 났다. 

극한의 장소에서 펼친 진검승부
이쯤에서 되돌아 보자. 과연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유가 과연 '추억'과 추억에 기반한 음악 등의 문화적 장치들 때문만이었을까? 오히려, 신원호 피디는 <슬기로운 감빵 생활>을 통해 그간 자신이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대중과 '손쉽게' 교감했던 그 장치들을 제거한 채 그간 정말 자신이 해왔던, 그리고 여전히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감빵'이라는 극한의 무대를 통해 '진검승부'를 펼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진검승부'는 1회 도대체 왜 낯선 박해수를 주인공 김제혁으로 했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 국민 투수라지만 감빵 동료들조차 '어리버리'하고 늦다며 평가를 내린 그 인물로부터 비롯된다. 1회의 초반 눈길를 사로잡은 건 상습 마약 복용으로 정신을 못차리는 재벌 2세로 등장한 <비밀의 숲>에서 반전의 주인공이었던 윤과장 역할의 이규형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건, 허허실실 조주임이었고, 그리고 막판에 김제혁을 안타깝게 찾아다닌 팬인줄 알았는데 오랜 친구 준호(정경호 분)였다. 

이 늦된 캐릭터, 하지만 그 인물 설명에서도 드러나듯 교통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는데, 좌절 대신 할 게 이것밖에 없다며 묵묵히 치료받고 재기를 해낸 역전의 인물처럼, 1회를 넘어 2회에 이르러 김제혁은 그 '인간미'을 증명해 나간다. 감빵 안에서 부당하게 힘을 행사하는 갈매기를 제압하고, 조주임의 3천만원 대신 밥자 어머니의 수술을 전화 한 통화로 부탁하는 등 그의 친구 교도관 준호의 말처럼 '오지랖'을 부리기 시작한다. 

신원호 피디의 말대로 '사소한 인간미'일 수도 있고, 교도관 준호의 말대로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도 있는 김제혁의 그 '인간미', 그런데 익숙하다. 수학 여행비가 없어 쩔쩔매는 아랫집 덕선네 처지를 모른 척 하다 슬쩍 남겨놓은 윗집 아줌마 미란의 여비처럼,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다수의 시청자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그 '인간적인 정서'의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21세기의 혹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녹여주었던 지난 20세기의 '인간미'가, 극한의 감빵 속 김제혁을 통해 슬그머니 등장하며 <감빵 생활>은 마치 눈을 맞은 상록수처럼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 콩 한쪽도 나누어 먹던 그 이웃, 혹은 친구들의 훈훈한 덕담이 있었기에 <응답하라> 시리즈가 빛났듯이, 가장 '인간적'일 수 없는 극한의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피디의 말대로, 검사나 형사 등 어떤 '직위'를 가지지 못한 죄수, 그럼에도 여전히 '성선설'의 주체인 김제혁을 통해 의지적 '휴머니즘'을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풀어가고자 하는 <감빵 생활>은 신원호 피디의 세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빛낸다. 

물론 준호와 제혁의 청소년 시절의 전사로 부터 시작된 준호와 제혁과 그리고 지호(정수정 분)의 '인연'은 '응답하라'의 외전과 같은 기시감을 준다. 하지만, 그 '기시감'이 <감빵 생활>의 정서를 지배하기에 구치소, 그리고 그에 이은 진짜 교도소 생활의 현실은 극한적이다. 이번엔 어느 시대일까? 하는 당연한 기대를 뒤엎고, 가장 자신이 해오던 시리즈와 반대의 상황에 '출사표'를 던진 것만으로 이미 이 작품의, 그리고 신원포 피디의 의의는 대단하다. 그리고 그럼에도 오히려 그래서 그 속에서 빛나는 신원호가 그리고자 하는 '인간적 세계'의 지향점을 고수하는 점은 그래서 또 기대가 된다. 새로워서 빛나고, 여전해서 더욱 가치있는 <감빵 생활>의 선전를 응원한다. 
by meditator 2017. 11. 24. 14:20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명구가 무색해진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잊혀진 독서의 계절을 뜻밖에도 부추키는 건,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며 정현종의 시 '방문객'으로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다. 그러나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문학적'으로 만드는 건 작품 속 곳곳에서 인용되는 독서의 욕구를 부추기는 문학 작품들때문만은 아니다. 어쩌면 이 시대의 문학이 무색하게도, 문학이 해야할 작품을 통해 자신을 투영하고 직시하며 반성할 수 있는 '문학적 역할'을 드라마가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문학'보다 더 '문학적'이다. 




사람이 온다, 그의 19호실과 함께 
계약 결혼을 통해 낯선 두 이방인이었던 남세희(이민기 분)와 윤지호(정소민 분)가 '사랑'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을 드라마는 정현종의 '방문객'으로 알렸다. 그저 월세 세입자가 필요했고, 몸 뉘일 방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한 공간에서 살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의적 이유로 성큼성큼 서로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만 되도, 정현종의 '방문객'은 그저 사랑의 문학적 수사로 그칠 수 있었다. 가랑비에 옷적듯이, 그러나 때론 옷과 가방을 집어 던진 채 그 사람을 지키기 위해 소중한 돈 대신 비싼 오토바이를 부수는 걸 감수하고, '갈음'이란 표현에 섭섭하고 상처주고 싶어하며 가까워지던 두 사람은 결국 진짜 '키쓰'를 통해 사랑의 통과 의례를 겪어간다. 그리고 사랑하며 그 사람의 세계에 성큼성큼 발을 들이니 거기엔 남세희의 집에 마주한 두 사람의 방처럼, 이십 여년, 혹은 삼십 팔년을 웅크리고 살아왔던 각자의 19호 실에 맞닦뜨리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들 해왔다. 이 이상한 수학 공식에는 홀로 맞서기 힘든 세상을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하나가 되어 함께 헤쳐나간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부부의 하나됨이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이 이 사회의 '가족주의', 때로는 '전체주의'의 바탕이 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2017년의 젊은이들은 사회 경제적 이유로 그런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런 사회 경제적 이유를 넘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라 정의 내려진 그 명제에 대해 새로운 이견을 제시한다. 



그 이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건 바로 연애 7년차, 아니 전 연인인 양호랑(김가은 분)과 심원석(김민석 분)커플에게서이다. 한 통장에 미래의 꿈을 부으며 원석의 자수성가와, 그를 통한 성공적 결혼과 안락한 가정을 꿈꾸던 호랑-원석 커플은 7년차에 이르러서도 앱 개발에 성공하지 못해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원석의 사회 경제적 처지로 인해 흔들린다. 호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선배 회사에까지 들어갔지만, 호랑이 원하는 결혼까지 하려면 5년을 더 기다려 달라는 원석의 요구에 호랑은 절망한다. 그리고 결국, 원석은 자신이 호랑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하고 호랑은 원석의 집에서 짐을 뺀다. 

너와 내가 구분되지 않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뜨그려져온 두 사람, 하지만 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의 이해는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물음표라는 원석과 결혼이라는 골문을 향해 모든 과정을 감수했던 호랑의 이해 관계는 결국 매번 어긋나고 만다. 원석이 자신의 꿈을 포기해도 쉽사리 합의에 도달할 수 없는 이 커플은 결국 7년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각자 자신을 직시하기에 이르른다. 

19호실에서 나와 사랑의 광장에서 
호랑, 원석 커플의 파경은 결국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연애와 결혼이 그 옛날 단칸방에 함께라는 이유로 행복하던 그 시절의 결혼이 이 시대에 유효하지 않다는 걸 증명한다. 그건 시대가 달라져서도, 사회가 달라져서도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달라져서인 것이다. 즉, 이 시대의 결혼은 분명 남과 여의 결합이지만, 그 남과 여는 각자의 삶과 주관이 분명한 개인들의 결합이라 드라마는 말한다. 

그래서 우수지(이솜 분)가 너무 좋아 그녀가 쏘아대는 화살마저도 내가 맞고 그녀가 조금 편해졌으면 하는 마상구(박병은 분)는 사랑하는 그녀에게 '우리가 함께하면 다 해결될 거야'라는 고백 대신, 세상에 상처받고 자신의 19호실에 갇혀있는 수지가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싸우기를 독려하고, 자신이 그 응원군이 기꺼이 될 꺼라 말한다. 분명 '함께'이지만, 두루뭉수리한 집단이 아니라, 각자 자신의 삶의 주체로써 서있는 개인으로서의 '결합'을 전제한 고백이다.

 

드라마 속 전직(?) 드라마 작가인 지호는 바로 이런 자신들의 처지를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를 통해 빗대어 설명한다. 가사 노동에 지친 한 여성이 자신만의 '공간'을 얻기 위해 기꺼이 '불륜'의 오해조차 감내한다는 이 파격적인 이야기는 이 시대 자신의 삶을 올곧이 살아내는 개인들의 현실을 절묘하게 상징해 낸다. 

자신의 집에 집착하는 세희, 자신이 머물 방이 필요했던 지호가 그 자신들의 '공간'이 필요해 전 시대의 유산이라 할 '결혼 제도'를 이용하는 장치는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그런데 이제 그 공간을 공유한 그들은 서로로 인해 마음 속의 공간이 생겨,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로코'의 형식을 띠지만 21세기의 실존을 적나라하게 담보해 내고 있기에 그 '로코'의 과정조차 녹록치 않다. 

'사랑하다보면,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사랑의 세계에서 공간은 늘 광장처럼 드넓다.'

그 흔한 삼각 관계의 등장, 12년전 세희와 동거를 하고, 아이까지 가졌던 고정민(이청하 분)의 대두는 남세희와 윤지호의 사랑 전선에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긴장을 통해 오히려 그간 두 사람 각자의 19호실의 방문을 열어젖힌다. 방문객이란 시집 속에 갈피처럼 끼워넣은 고정민의 영원히 사랑같은 건 하지 말라던 그 명제에서 세희는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으며, 지호는 그간 묻어두었던 작가의 꿈을, 아니 작가를 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을 꺼내들기 시작했다. 

이제 2회차를 남은 드라마는 그래서 뜻밖에도 '함께'하기 위해 각자 해결해야할 과제에 주인공들이 무거워진다. 그 각자 자신의 방 속에 묵혀둔 그 짐 보따리를 풀어내고 나서야, 이들은 자신의 19호실을 나와, 함께 할 '공간'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각자의 '자존'과 '실존'이 우선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사랑'과 '결혼'이다. 
by meditator 2017. 11. 22. 14:25

19일 개봉된 <전체관람가>의 다섯 번째 작품 <보금자리>는 임필성이라 쓰고 전도연이라 읽어도 무방할 만큼 화제성에서 감독의 명망을 압도한다. 그러나 전도연마저 압도하는 건, '설마 저게 사실이야?'라는 반문이 이어지는 <보금자리>가 다루고 있는 가정의 모습이다. 


하지만 반문이 안타깝게도 사실이다. 2010년 4월 세 자녀 아파트 특별 분양 제도를 악용하여 아이를 입양하고 되팔아 시세 차익을 챙긴 일당이 구속됐다. 이미 2008년에 이와 같은 사례가 무더기 적발된 바 있다. 국내 입양의 경우 보호 시설에 있는 아동일 경우 부모의 동의 없어도 입양이 가능하며 그 대가로 금전이 오가더라도 처벌할 법이 없는 실정이라,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는 사안이 되었다. 



전도연이 설득해낸 가족의 이기심 
임필성 감독은 바로 이 공공연한 위법 사례에 착안하여 자신이 선택한 '하우스 푸어'의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왜 전도연이었을까? 임필성 감독의 영화 <보금자리> 상연이 끝나고 mc와 감독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전도연이 등장한 순간, 영화는 올곧이 그녀의 관점에서 흘러가기 시작했다고. 즉 아파트 분양을 위해 편법으로 아이를 입양한다는 부정적 설정조차, 임신한 주부 전도연이 엄마로, 아내로 등장한 순간, 이야기는 관점을 달리한다. 영화 데뷔 20주년을 기념하여 독립 영화 진흥을 돕고자 기꺼이 참여한 전도연의 취지는 그 어느 때보다 배우 전도연의 존재감을 빛낸다. 

그녀가 입양한 탁이를 바라보는 불안한 눈빛, 위태로운 태도는 고스란히 <보금자리>를 보는 관객들의 감정으로 전이되어, 이 '가정'을 지키려는 자와, 혹시나 모를 가정의 안정을 위태롭게 할 외부자의 경계선이 분명하게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나약한 이방인인 한 소년은 순식간에 호러와 스릴러의 주인공으로 돌변하여 전도연이 아내와 엄마로 분한 가정을 위협하는 강력한 요소가 된다. 영화를 마친 후 우스개로 그저 칼을 좋아하고 잡채를 좋아했으며 욕을 좀 할 줄 알고, 문도 좀 딸 줄 아는 그저 평범한 아이였을 지도 모를 소년 탁이는, 하지만 15분이라는 시간이 마치 150분이라도 되는 듯 그 어떤 영화보다 위태로이 가정을 위협했다. 

'가정'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의 작품은 대부분, 가정을 지키려는 자와 그런 가정의 평화와 안녕을 위협하는 자로 대치된다. 하지만 그 익숙한 소재는 시대와 설정에 따라 다양한 궤적을 가지고 가정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만든다. 지난 2010년 전도연의 다른 작품인 <하녀>에서나, 그 작품의 원작인 김기영 감독의 여러 작품들에서 돌출되는 가정의 비극들은 결국 가정의 안녕이라는 그 지상 명제의 위협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파탄의 주범이 '이방인'이라면, 하지만 영화를 끝나고 되돌아 보게 되는 건 결국 그 '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이기심'과 그로 인한 '폭력' 이다. <보금자리>에서도 남편과 아내는 기꺼이 '아파트'를 위해 '위법'인 입양 사기에 주동자와 동조자가 된다. 그저 평범한 아이 하나를 키우고 또 다른 아이를 가진 부부가 '집'을 위해 다른 아이를 악의적으로 이용하는 파렴치범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들 부부는 그들에게 할당된 아이를 탐탁치않게 여기기까지 한다. 결국 잠시 이용하고 '파양'할 것이면서.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도 잠시의 껄끄러움을 차치하고 곧 그런 부부, 특히 전도연이 분한 아내의 방어적인 태도에 공감하고 동참하게 된다는 지점이 바로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공중파 드라마로 온 가족의 이기심
이렇게 노골적으로 가정을, 그리고 가정의 경제적 안위를 위해 위법과 탈법을 오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기심을 폭로한 설정은 공중파 드라마로 가면 보다 교묘하고 유연해진다. 매주 신기록을 세우며 드라마의 설정 하나하나가 검색어가 되는 <황금빛 내인생>은 바로 이런 '가족의 이기심'을 구체적으로 해부해 나간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양미정(김혜옥 분)의 이기심으로 자신의 딸과 재벌가 노명희(나영희 분)의 딸이 바뀌고 이 사실이 폭로되며 양미정이 집안이 파탄이 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저 양미정이 저지른 범죄 뿐일까? 이제 드라마는 양미정이 은석이를 지수로 만들 당시 노명희의 사연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과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눈 앞에서 딸을 보고도 줄행랑치게 만들었을까? 또한 이제 와 자식을 바꾼 것이 문제가 된 양미정은 그때도 자식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은석의 친부모를 찾지 않은 것 역시 또 다른 이기심의 발현이다. 

하지만 이것만일까? 노명희는 자신의 딸이 양미정의 집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점령군처럼 양미정의 집을 찾아가 온갖 수모를 주며 딸을 되찾아 온다. 물론 양미정의 놓친 자식에 대한 이기심으로 비롯되었지만, 20여년 동안 자신의 딸을 키워준 '은인'이 졸지에, 딸을 빼앗아간 파렴치범이 되는 순간이다. 

그렇게 수모를 당하던 양미정의 순간 어깃장으로 바뀌어 노명희의 집으로 들어간 지안(신혜선 분)은 어떻게든 노명희의 집 가풍에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제, 사실을 알게된 지수(서은수 분)가 스스로 찾아간 노명희의 집에서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밥상머리 예절에서 부터 시작하여 매사에 지수는 어깃장이다. 정식으로 지수를 환영한다는 가족 정찬에서 주르륵 늘어서있는 일하는 사람들과 차려입은 가족들의 정장과 깍뜻한 예정을 비웃으며 라면을 청해 먹는 지수의 독불장군식 행동은 시청들들을 갑론을박의 토론장으로 빠뜨린다. 

<황금빛 내인생>은 매번 이런 식으로 '가족', 혹은 '가정'이라는 틀을 기준으로 안녕과 안위를 토론대 위에 놓고, 편가르기를 유도한다. 매회 급박하게 전개되는 사건은 그 사건만큼이나 시청자의 호불호를 갈리며 입장을 나뉘게 한다. 누군가는 밥상 머리 예절도 못배운 지수가 못마땅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예전에 지안이 쩔쩔매던 상황을 떠올리며 지수의 그런 도발이 속시원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엔 노명희가 수호하는 배타적인 가족이 전제되어 있다. 

<보금자리>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파트를 얻기 위해 불법 입양까지 감행하는 가족에 감정을 이입하는가, 아니면 그 집안에 이방인으로 들어온 탁이에게 시선을 주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가 되듯이, <황금빛 내인생> 역시 양미정의 가족과 노명희의 가족을 어떤 시선에서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입장에 서게 된다. 




이기심에 빠지게 만드는 배경은?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평범한 가족'이 집을 얻기 위해 위법을 감행하게 만드는 배경이다. 마찬가지로, <황금빛 내인생>에서 자고로 '검은 머리 짐승 거둔 복은 없다'는 옛 속담을 증명하듯 20년을 가족처럼 살아온 양미정의 집안에 점령군처럼 나타난 노명희의 부로 증명되는 '황금'의 위력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족'이라 칭하는 그 존재의 역사를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인가를 놓고 여전히 학자들은 의견을 모으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보금자리>나, <황금빛 내인생>이 논하고 있는 가족은 하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 자녀들이라는 '핵가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핵가족은 산업사회 사회가 탄생시킨 가족의 형태다. 산업 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그 노동을 보존하고 보호하는 어머니와, 그녀의 보호 아래 자라나는 가족들이라는 핵가족의 형태다. 하지만, 이제 이 가족은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위태롭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집값에 가족이 머물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평범한 가족이 불법을 넘나든다. 비록 불의의 사고로 인한 입양이지만 20년을 한결같이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황금'을 지닌 부 앞에서 초라하게 갈갈이 찢게 진다. 가족만일까,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황금빛 내인생>의 소현경 작가의 노회함은 <보금자리>에서 임필성 감독이 직설적으로 논한, 시청률보다도 시청자들의 그 손바닥뒤집듯한 '가족 이기주의'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가족'이라 손가락질 할 것도 아니다. 행동대장은 가족의 이기심이지만, 그 이기심의 배후엔,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와 어느 틈에 부가 족벌이 된 세상이 있는 것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 황금빛 사회 속에서 가족은 지키려 하면 할 수록 갈가리 찢겨 나간다는 점이다. 
by meditator 2017. 11. 20. 16:01

극중 지호의 나레이션은 말한다.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의 해피엔딩은 키쓰로 마무리된다고. 하지만 진짜 사랑 이야기는 키쓰 이후부터 시작된다고. 그리고 그 나레이션답게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키쓰로 해피엔딩이 아니라 키쓰로 시작된 '진짜 사랑'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가고자 한다. 


모쏠 지호, 육체적 욕망에 눈뜨다. 
일반적인 로맨틱 멜로의 드라마에서 '환타지'로 이어가는 사랑이라면 훈훈한 남녀의 라고 쓰고, 15금에 어울리는 연애로 연결되리라. 하지만 늘 예상 밖의 서사를 이어가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두 사람의 첫 키쓰를 모쏠에 달팽이가 부러운 작가 지망생 지호(정소민 분)가 앞으로도 키쓰 따위는 해볼 수 없을 것같아 다짜고짜 버스 정류장에서 자신에게 솔직한 덕담을 해주었던 세희(이민기 분)의 입술에 박치기를 한 것으로 도발하는 것으로 관계의 서막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키쓰, 그리고 사실상 진짜 키쓰를 그런 지호의 키쓰가 사실은 키쓰가 아니라 일방적 입맞춤이었으며 진짜 키쓰는 이런 것이라며 세희의 도발로, 그리고 이어진 두 사람의 네버엔딩일 거 같은 키쓰신으로, 그리고 일방에서 쌍방으로의 관계 전환으로 극적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하 이번 생)>는 거기서 한 발 더 '어른'의 연애로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키쓰를 통해 모쏠 처음으로 연애에 입문하게 된 지호는, 키쓰 이후 진전된 스킨쉽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며 혼돈스러워 한다. 자신도 모르게 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며 혼잣말을 하고는 '쓰레기'라 머리를 흔들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키쓰의 후유증에 정신을 못차린다. 심지어 귀걸이 착용 과정에서 낯선 여자의 손길에 얼굴이 붉어질 정도다. 

여중, 여고를 나와 작가가 되기 위해 정진하느라 연애에 한 눈 팔 사이가 없던 모쏠의 이 흥미로운 설정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성적 자유가 판치는 세상이라 하지만 상당수의 여성들이 tv의 동화적인 설정으로 연애를 배우고, 엄마의 지휘 아래 관계를 설정해 가는 세상에서, 키쓰 이후 자신에게서 용솟음치는 본능을 쓰레기나 변태로 취급하는 장면은 그래서 현실적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제 막 사랑을 하게 된 상대방을 향해 끊임없이 바래지는 욕망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이번 생>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지호는 고양이를 찾아 세희의 방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시집에서 지난 사랑의 아픈 흔적을 발견한다. 흔한 사랑 이야기라면 그걸 오해와 질투의 복선으로 사용하겠지만, 비록 모쏠이지만 '어른'인 지호는 생각해 보니 자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자신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세희의 아픔을 기꺼이 이해하는 것으로 그 '발견'을 풀어낸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찾아온 욕망도, 다짜고짜 19금의 도발 대신, 주저함과 갈망의 밸런스로 드라마는 풀어간다. 키쓰를 더 해도 될까요? 라고 묻는 세희의 배려와 함께. '변태'가 아닌 자연스런 어른 연애의 한 과정으로. 


2017 여성들, 그 욕망의 향배는?
드라마는 그렇게 이제 모쏠 탈출을 눈 앞에 둔 지호와 함께 수지, 호랑, 세 여성의 욕망을 충실하게 그려낸다. 그간 세 친구 중 가장 자유분방했던 수지는, 그 자유분방함의 이면의 숨겨진 그녀의 사회적 욕구를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맞춤 브래지어 사업에 그 어느 때보다도 흥미를 보이면서도 어렵게 들어간 연봉 높은 직장에 대한 연연함과 비혼주의는  우리 시대 젊은 여성의 또 다른 현실태이다. 

호랑은 다를까? 인간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가장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호랑의 모성적 갈망이다. 안락한 환경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고 싶다는 그 욕망이야말로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유지시켜온 본원적 기능이다. 단지 사회적 자아가 보다 부각되는 사회에서 안타깝게도 하랑의 욕망은 '전근대적 대접'을 받게 되지만 엄연히 '취집' 역시 여전히 우리 사회 여성들의 선택지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녀의 욕구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단지 안타까운 건, 그 욕망의 방점과 발화점이 자신이 아닌 '상대방의 조건'에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런 각자의 욕망을 가진 그녀들이 2017년이란 구체적인 현실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드라마 속 각자의 상황을 다르게 빚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며, 일도 잃고, 갈 곳도 없이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은 터널 속을 헤매게 되었던 지호는, 뜻밖에도 집세도 깍아주는 집주인을 만나, 방도 얻고, 이제 마음의 공간도 함께 공유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정말 다행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직장도 확실한 안정된 경제적 지위의 남성과 사랑을 시작하게 된 행운을 얻어서이다. 여전히 그녀의 직업은 알바이지만, 2년 계약 결혼의 위상은 어쩌면 달라질 지도 모른다. 

반면 어려움에 봉착한 지호를 위로하던 친구들의 현실은 오히려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계약 연애에,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수지는 모처럼 두 눈이 반짝이는 일을 찾았지만, 현실은 그녀에게 꿈을 도발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모텔을 전전하는 연애는 그녀를 비혼주의자로 만들고. 

더 어려운 건 호랑이다. 서른 줄 7년의 연애, 자수성가한 사업가를 꿈꾸며 만난 연하 남친은 아직도 이십줄에, 자수성가의 꿈은 여전히 옥탑방에 머문다. 사랑을 한다지만,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호랑이 원하는 모성 욕구는 벽에 부딪치고 만다. 앱 개발이라는 일확천금의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그녀를 위해 포기한 꿈과 새로운 직장은 여전히 원하는 가정을 꾸리기엔 미흡하다. 새마을 운동 하던 시대를 지나 산업 역군의 시대에 가진 것 없이도 결혼하고 아이낳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이전 세대는 상상할 수 없는, 2017년 가진 것없는 젊은이들의 욕망과 꿈은 이렇게 옥탑방에서 좌절된다. 

by meditator 2017. 11. 15. 17:38

5회를 맞이하여 네 번째 단편영화 제작기에 돌입한 <전체 관람가>는 '단편 영화' 활성화를 위한 영화 감독들의 외도라는 취지를 넘어 매회 새로운 기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장윤철 감독이 실사 영화와 게임의 콜라보를 하는가 하면, 에로 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봉만대 감독이 가족영화를 찍고, 이원석 감독이 노래방 뮤지컬이라는 신장르를 열었다. 그리고 이제 네 번째 영화의 주인공 박광현 감독은 헐리우드에서 2000억이 든다는 히어로 액션 블록버스터를 15분짜리 단편 영화에 담는다. 


3000만원이라 불가능해서, 가능해진 블록버스터 품앗이
3000만원 초저예산의 단편 영화와 블록버스터라는 이 모순의 조합, 영화는 산업이다라는 것이 우리 사회 대체적인 담론이 된 현실에서, 애초에 액션물을 하고자 했지만 제작비로 인해 '노래방 뮤지컬'이라는 신장르로 급선회한 이원석 감독처럼 주어진 제작비는 영화 자체를 규정한다. 그런데 박광현감독은 애초에 '3000만원이 판타지다'라며, 과감하게 그 '돈'으로 제한된 제작 환경을 뛰어넘어 버린다. 3000만원의 한도 내에서라는 현실적 조건을 '구걸'과 '협조'로 대응하며 17년간 하고자 했지만 '투자'라는 벽에 막혀 이루지 못했던 박광현 감독의 로망을 단편 영화라는 틀에 과감히 담아내 버린 것이다. 



감독은 말한다. 아마도 장편이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하지만 단편 영화 활성화의 취지와, 단 3일의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들이, <웰컴 투 동막골(2005)>, <조작된 도시(2017)>를 함께 했던 스탭들과 유명 디자이너, 심지어 밥차까지 십시일반 '노력과 자본'의 동원을 해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가능한 제작비가 꿈을 실현시킬 품앗이의 기반이 된 것이다. 덕분에, 박광현 감독은 제작 지원을 받은 엑스트라 100명과, 제작비 3000만원으로 세팅한 현장 외에, 단편 영화에서 무려 카메라 3대의 지원과, 의상, 미술, 제작 과정의 모든 사람들의 도움과, 밥차 등등의 '구걸'을 통해 15분짜리 단편 블록버스터를 완성했다. 







영웅이 못생겼다면?
그러나 12일 방영된 박광현 감독의 <거미맨>을 그저 제작비를 넘어선 품앗이라는 지점의 신기록으로만 기억해서는 아쉽다. 오히려, 거기서 진짜 로망은 일찌기 90년대 장준환 감독의 <방구맨>, 김곡, 김선 감독의 <드릴 소녀>와 같은 기발한 상상력의 계보에 놓여있지만, 결코 투자받을 수 없는 비운의 b급 히어로물의 구현과, 그보다 더 투자받기 힘든 '불편할 정도의 직관적 현실 묘사가 투영된' 뚝심있는 현실 반영이야말로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다. 

외모 지상주의를 자신의 주제로 선택한 박광현 감독은 대작 <스파이더맨>의 패러디에 기반한 오늘의 '적나라한 투영'이다. 실제 항문에서 거미줄이 분사되는 거미가 히어로물 주인공이 되어 손에서 거미줄이 발사되는 <스파이더맨>과 달리, 그래서 박광현 감독의 히어로 <거미맨>은 항문에서 거미줄이 나온다. 또한 늘씬한 몸매의 히어로대신, 늘씬하고 잘 생긴 건 악당에게 양보하고, 배나오고 팔다리 가는, 심지어 가면을 벗었는데 대머리가 땀에 가닥가닥 절어있는 얼굴은 '시나노'급의 현실 아저씨 영웅이 등장한다. 심지어 그가 초능력자가 되는 과정도 어린 시절 동네 또래들에게 집단 이지매를 당하는 과정에서이다. 

젊음의 성소 '클럽', 그곳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자신의 잘생김만을 믿고 못생긴 여성 파트너를 발차기로 날려버리며 '클럽의 수질 관리'를 탓하는 악당의 등장. 그 소란에 불만을 표출하던 과객과 클럽의 주인은 가면을 벗은 그의 멀끔한 외모에 '비난'을 '감탄'으로 대신한다. 그리고 그에게 신체적 학대를 당하던 여성의 못생김에 오히려 '악당'을 응원하기에 이르는데. 그때 암전과 함께 하늘에서 등장한 황금빛 거미, 

하지만 현실은 항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미줄에 의존해 궁색하게 내려오는 것도 모자라, '주관적 액션'에서는 헐리우드 히어로물의 멋짐을 한껏 발산하지만, 현실은 그를 악당으로 오인한 경찰들과의 아저씨들 동네 떼싸움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궁색한 영웅, 거기에 그만 가면까지 벗겨지는데. 

영화의 정점은 가면이 벗겨졌어도 여전히 '정의'를 수호하려는 거미맨과 악당과의 1;1 대결장면, 클럽에 모인 사람들은 분명 악당이 보인 나쁜 행동들의 목격자였음에도, 그의 잘생김에 매료되어 악당을 응원한다. 그가 거미맨을 쳐박을 때마다 클럽에 울려퍼지는 환호성.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 초라하고, 거기에 영웅연했지만 악당에게 무참하게 짓밟혀 더 불쌍해진 거미맨 앞에, 그의 이름 '수호'를 부르며 나타난 첫사랑. 영화가 끝난 후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 '엄청난 뚝심'답게 박광현 감독은 3000만원의 환타지로서의 단편이 가진 기회에 타협하지 않고 굳건한 주제로 마지막을 장식하여, '내 얘기같아 슬프다'는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묵직한 환타지 영웅물을 탄생시킨다. 





<거미맨>은, 박광현 감독은 묻는다. 늘 이겨야만 혹은 '우생학적 적자'만 주목받는 세상에서, 영웅은 무엇일까?를 묻는다. 의도는 가졌지만 성공해내지 못하는 영웅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며, 제작비의 신화를 넘어선 '외모 지상주의' 세상에 화두를 남긴다. <거미맨>은 겨우 15분인데, 마치 한 시간을 넘는 장편 영화을 본듯한 감상의 무게를 남긴다. 굳이 이명세 감독이 지적한 '단편 영화의 폼에 장편 영화를 끼워넣은 듯한 한계'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5분을 통해 보여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도전과 주제 의식이 <전체 관람가>의 도전을 무한하게 확장했기 때문이리라. 적은 제작비, 제한된 제작 환경이 아니라, 한국의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편이 단편이기에 풀어내어질 수 있었던 박광현 감독의 <거미맨>은 단편의 위상을 새롭게 부상시킨다. 



by meditator 2017. 11. 13. 16:05

50부작의 대장정을 시작했던 <황금빛 내인생>이 이제 절반의 반환점을 눈앞에 두고 회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kbs2 주말 드라마의 아성을 공고히 하고 있다. (21회 32.3%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드라마 시작 초반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박시후와 관련된 잡음이 무색하게 한 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빠르고 예측 불허의 전개는 역시 소현경! 이라는 감탄사를 절로 나오게 한다. 오히려 시청자들은 작가의 또 다른 화제작 <내딸 서영이>의 기록을 과연 <황금빛 시청률>이 언제 깰 것인지를 관전 포인트로 삼고 있을 정도다.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은석, 아니 지안
그간 가슴졸이며 벌여놨던 서태수(천호진 분)-양미정(김혜옥 분)의 가짜 딸 사기 사건은 20회를 기점으로 들통나고, 은석이었던 지안(신혜선 분)은 거리로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당연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란 기대와 달리, 찜질방과 거리를 전전하던 은석이 아닌 지안은 가족들과 함께 놀러왔던 바닷가에서 홀로 추억에 잠기다 결국 숲속에서 약병을 입 속에 털어넣는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이 걷잡을 수 없어져 버린 '친딸 사기 사건'의 시작은 단순했다. 오래도록 딸을 찾았지만 그때마다 사기꾼들에게 농락만 당했던 재벌가 최재성(전노민 분)-노명희(나영희 분) 부부, 그래서 이제는 은석이라는 이름조차 집안에서 생소해질 즈음. 그들에게 친딸의 생존 소식이 바로 그 딸을 유괴했던 당사자들로부터 도착했다. 그리고 그 유괴범들을 닥달해 찾아간 서태수-양미정의 집, 다짜고짜 들이닥쳐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딸을 내놓으라는 노명희에게 양미정은 순간 진실을 바꿔버리고 만다. 

남편의 사업 실패 이후 늘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왔던 가족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재벌가의 잃어버린 딸이었던 지수가 가족들의 사랑 아래 부족함없이 자라온 반면, 쌍둥이지만 언니였던 지안은 그녀가 도전한 세상에서 상처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갖은 허드렛일은 다하면서 정규직이 되고자 했던 해성 어패럴은 그녀 대신 낙하산인 그녀의 친구를 선택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도경과의 악연은 그녀에게 차 수리비 명목의 수모를 안긴다. 더는 버틸 수 없다며 좌절하는 딸 지안을 지켜봤던 엄마 양미정은 도도한 노명희의 요구에 순간 다른 선택을 한다. 

<황금빛 내인생>은 그렇게 엄마 양미정, 그리고 딸 지안의 궁핍으로 부터 비롯된 뒤틀린 선택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물신주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극 초반 양미정의 선택에 이은, 그녀의 앞에서 아버지가 차마 진실을 꺼낼 수조차 없게 만든 지안의 선택은 결국 진실이 밝혀졌지만 당신의 딸을 괴롭히겠다는 노명희의 선전 포고, 돌아오지 않는, 그리고 돌아갈 수 없는 딸, 그리고 자살이라는 결론을 통해 일단락된다. 

엄마와 딸의 '물신주의적 욕망'의 행보,
숟가락의 빛깔로 구분되는 세상, 우리는 쉽게 자신이 타고난 숟가락이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는 '운명론적 사고'에 매몰된다. 바로 이 오늘날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 '운명론적 사고'에 소현격 작가는 마치 복권처럼, 하지만 사실은 '도발적인' 음모를 통해 그 욕망을 점검한다. 

엄마 양미정은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자식을 위해서라고 다짐한다. 자신의 딸이 죽고 으슥한 인가에서 어린 지수를 만났을 때, 그냥 두면 죽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딸처럼 끌어안았던 그 '이기적 모성'은 변함없이 이제 다시 그냥 두면 스스로 고사될 것같은 딸 지안을 위해 거짓말을 해버린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을 위해 기꺼이 딸을 키운 대가로 음식점을 받는다. 남편의 사업 실패 이후 경제적으로 쪼달리던 양미정의 모성은 그 해결책으로 기꺼이 '돈'을 선택한다. 

딸 지안도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사실은 재벌집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녀는 대번에 태세를 전환한다. 말리는 아빠도, 동생도 아랑곳없이, 그간 세상과의 싸움에서 너무 지쳤던 그녀는 선뜻 재벌가의 딸이라는 자리를 받아든다. 

그러나 그 덜컥 받아든 '황금'은 그녀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금수저가 된 지안의 하루하루는 금수저로서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인정 투쟁'의 시간이 되었다. 밖에서 고달팠지만 돌아오면 따수웠던 가정 대신, 형제도, 부모도 피보다 진한 '재벌가'라는 위계 속에서 자신을 버텨내기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마치 작가가 88만원 세대에게 당신들이 원하는 그 '수저'의 삶도 만만치 않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재벌가로 들어간 지안의 하루하루는 고달프다. 소현경 작가는 흔히 주말 드라마들이 빠지기 쉬운 흙수저 집안의 가족주의 vs. 금수저 집안의 이기주의라는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절묘하게 지안이 무엇을 탐했고, 외면했는가를 그녀의 선택 이후의 과정을 통해 통렬하게 짚어낸다. 

그리고 이제 진실이 밝혀지며 양미정, 지안 모녀는 외적으로는 자신들이 저지른 사태에 대한 감당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며, 동시에 자신들이 따른 '물신주의적 선택'이 낳은 생각지도 못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자식을 위해서라며 자신을 합리화했던 모정의 선택은, 큰 아들의 외면은 물론, 편의적으로 행복을 위한 선택이라던 두 쌍둥이 딸 중 그 누구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결국 '가족'을 잃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또한 자신만을 생각하며 재벌가로 들어갔던 지안은 자신이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그간의 과정에서 보인 자신의 걷잡을 수 없는 선택에 대해 깊은 회한에 빠지고, 그 결과 법적 처벌 이전에 자기 스스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극단적 선택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게, <황금빛 인생>을 위해 선택했던 엄마와 딸의 이기적 선택은 가장 처절한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드라마의 한 장을 마무리한다. 흙수저의 어긋난 로또는 이렇게 자기 반성과 회한으로 종결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흙수저의 도발과 그 '처리'의 과정에 집중했던 드라마는 또 다른 수저, 금수저 집안의 반성과 회한이라는 2막을 열고자 한다. 그 2막의 시작은 그래도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도 사랑으로 보다듬어졌던 지수의 도발적 재벌가 행으로 열어진다. 


 

by meditator 2017. 11. 12. 18:40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미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수의 열연으로 <미옥>이어야 할 이유를 설득함과 동시에, 김혜수의 캐릭터가 가진 태생적 한계로 인해 <미옥>이라서 동시에 치명적인 약점을 안게 된 영화인 듯 싶다. 


모성적 수동성으로 소모되는 여성
<미옥>은 지난 6월에 개봉한 <악녀>에 뒤이어 다시 한번 여성 캐릭터를 원톱으로 내세운 느와르 액션 스릴러 영화의 계보에 놓여있다. 두 영화 모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19금이라는 장르 영화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악녀>가 현란한 살상씬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의 존재를 증며하려 였다면, <미옥>은 언더보스 나현정의 주도 아래 호텔의 cctv 아래에서 벌어지는 범죄 조직이 배후가 된 '성접대'의 적나라한 행위들을 전면에 내세우며 자신을 드러낸다. <악녀>에 홀로 건물 몇 층에 포진해 있는 양아치 무리들을 피칠겁을 하며 홀로 싸워내며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숙희(김옥빈 분)가 있다면, <미옥>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화면으로 벌어지는 그 '성의 항연'을 지휘하는 마스터로서의 미옥, 아니 나현정이 있다. 캐릭터의 활약상 그 양상은 다르지만, 영화는 그렇게 여주인공의 대단한 능력을 전면에 드러내며 존재감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은 결국 영화의 중반 이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상황을 주도해가던 능력이 무색하게 자신에게 닥친 '모성성'의 한계로 인해 스스로 무너져 내리고 만다. 킬러로 거듭난 숙희가 자신의 목숨 대신 선택한 아이와의 안온한 삶을 위해 타인의 목숨을 거두어 살며 '사랑하는 이와의 가정'을 꿈꾸듯이, 나현정 역시 자신이 잉태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어 조직을 살리고, 그 조직의 언더보스로 성장해, 이제 범죄 조직에서 재계 유력 기업으로의 마지막 관문만을 남긴 상태이다. 하지만, 범죄 조직의 성공적인 전향은 언제나 그렇듯 성공적일 수가 없다. 정작 누수는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부터 시작되어, '어머니'로서의 그녀를 도발하고 '어머니'로서 그녀를 파멸과 최후로 이끈다. 

아마도 <악녀>도 그렇고, <미옥>도 영화의 만듬새나, 배우의 열연보다 더 '폄하'되는 이유에는 그 도발적인 등장의 여주인공들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허무하게 '수동적'으로 반응하고 끌려들어가고 파멸에 이르른다는 점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본질은 어쩌면 '모성'보다는 '수동성'에 더 방점이 찍혀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이 모성이거나, 사랑을 한다는 것이 시대가 달라졌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는 아니다. '낙태가 허용되는 세상'이라고 해서 모든 여성이 모성이기를 거부할 것이라는 편견처럼. 오히려 문제는 '사랑'을 하고, '어머니'가 된 여성이, 그 상황에 '주체'가 되지 못한 채, 끌려들어가 '휘발'되어 버린다는 점이 본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애초에, 여성을 전면에 내세웠으면서도, 여성이 느와르, 혹은 액션 스릴러의 주인공이 되는 것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만든 이의 편견이, 멋들어지게 여성으로 부터 시작된 영화를, 여성의 운명적 비극으로 막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원초적 의심을 갖게 만든다. 

충돌하는 세 욕망의 치킨 게임
그런 면에서 더욱 <미옥>은 아쉽다. 김회장이라는 보스가 있지만 실직적 '언더 보스'로서 범죄 조직을 재계 유력 기업으로 '성접대'를 매개로 '전향'을 조직적으로 이끌어내는 보스 나현정을 그렇게 밖에 소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애초에 자신의 아이로 인해 보스에 절대 충성을 바치는 조직의 2인자라는 캐릭터도 그렇지만, 보스의 유고 이후 오로지 자신의 아이만을 위해 치달리는 모성으로서의 그 향배가, 캐릭터의 입지를 축소시킨다. 



그럼에도 <미옥>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각자 자신의 욕망이 구체적인 세 인물들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치킨 게임이다. 도대체 왜 이선균이 조폭을? 했지만, 왜 이선균이어야 했는지가 설명되는 이선균이 분한 상훈의 비극적 순애보라 쓰고 '소유욕'이라 해석되는 사랑. 그런 이선균의 사랑을 도발한 이희준이 분한 최대식의 폭력적인 자기 보신욕, 그리고 이런 이들의 욕망이 도화선이 된 나현정이 된 미옥의 '안락한 전향욕구'라 쓰고 위장된 모성이라 읽일 수 있는 이 세 욕망의 접점은 흥미롭다. 이들은 '조직'의 일원이지만, 막상 그들의 '행동'의 동인에 '조직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개인적 욕망으로 추돌한다. 당연히 그들의 욕망 앞에 조직은 소모적으로 소용될 뿐이다. 

그래서 차라리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이 최대식과 상훈을 그리듯이 나현정 역시 어설픈 모성에의 헌사 대신, 그녀의 액션만큼이나 그간 언더보스로 닦여온 범죄 조직의 2인자 다운 생존과 보존과 안위, 그 욕망의 발현이었다면 오히려 <미옥>은 좀 더 치열한 느와르로서의 성취를 이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남겨진 고민들. 
그간 김혜수의 전작이었던 <차이나타운>, 그리고 <악녀>, 그리고 <미옥>은 여성을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느와르 장르에서 여성을 앞세운 차별성으로 관객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전면'에 내세웠다는 홍보성을 뛰어넘어, 여성의 자기 주도성을 내적으로 이해하는데 한계를 보인다. 저 정도를 '주체적'인 여성이라 생각하고 있었는 지도 모를 일인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그 누구 한 사람의 오류나 오인이라기 보다는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 대한 시대적 이해가 부족한 지점의 소산이라 보는 게 맞을 듯싶다. 그런 면에서 이들 영화가 흥행에 부진을 겪는 지점 역시 과연 그런 전면에 내세운 여성의 캐릭터에 대한 일천한 이해때문인지, 아니면 어쩌면 아직도 사람들에게 여성이 전면에 나선 느와르에 대한 이질적임 때문인지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고민해볼 여지를 남긴다. 


by meditator 2017. 11. 12. 02:06

mbc의 월화 드라마 <20세기 소년 소녀>와 tvn의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2017년을 살아가는 2,30대 여성들을 드라마의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동일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두 드라마의 성과는 전혀 다르다. 돌아온 한예슬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은 <20세기 소년소녀>는 그 화제성이 무색하게 2%대의 시청률에서 고전하고 있다. 반면, 남자 주인공, 표절과 관련된 잡음으로 시작에서 부터 삐걱거렸던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 초반의 문제들을 불식시키며 매주 케이블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화제의 드라마가 되고 있는 중이다. (10회 4.197%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가입 가구, 전국 기준)


물론 공중파와 케이블의 시청률을 수치상으로 비교하는 것이 애초에 무리라지만, 그럼에도 <20세기 소년 소녀>의 부진은 명확해 보인다. 똑같이 동시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다른 온도차를 보이는 건 무엇때문일까? 아마도 이 두 드라마의 희비를 엇갈리게 만드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현실감'때문일 듯싶다. 



내 얘기같아 마음아프고 마음이 가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
83년 함께 학원 봉고차를 타고 다니면서 우정을 쌓았던 이제는 서른 중반의 동갑내기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드라마는 <응답하라> 시리즈의 감성을 고스란히 이어 청소년 시절의 풋내기 첫사랑의 정서를 이어가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지만 서른 중반의 그녀들이 보이는 현실의 사랑 이야기에서 여전히 '기존' 이라 쓰고 '진부하다'라고 읽혀지는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를 뛰어넘지 못한 채 답습하며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는다. 알고보니 모쏠인 스타 사진진(한예슬 분)하며, 매번 승무원 복장의 핏을 고심해야 하는 한아름(류현경 분), 초짜 변호사 장영심(이상희 분)의 처지가 그럴 듯하지만 그 풀어나가는 이야기는 어쩐지 어디선가 본 로코의 한 장면인 듯 익숙하다. 

반면, 오갈 데가 없어 계약 결혼을 감행한 전직(?)드라마 작가 윤지호(정소민 분)와 대기업 대리로서 생존하기 위해 '비혼'을 선택한 우수지(이솜 분), 로망은 현모양처지만 현실은 옥탑방 동거 신세인 양호랑(김가은 분) 등이 매회 맞닦뜨리는 결혼과 사랑, 우정의 현실은 '너무 내 얘기같아 마음이 아프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우여곡절 끝에 남세희(이민기 분)와 결혼에 골인한 지호, 세입자가 필요한 집주인과 가장 점수가 높았던 세입자라는 계약 관계를 안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선택한 결혼이지만 대한민국에서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변화를 겪는다. 무엇보다 결혼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는 물론, 오해의 해프닝이지만 복남이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달려와 준 세희를 보며 지호는 집주인을 넘어 세희를 남편으로 좋아하기 시작하며 관계의 설정에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사랑'이 시작된다고 섣부르게 덜컥 '로코'의 정석으로 넘어가지 않는게 <이번 생은 처음이라.의 장점이다. 



결혼, 제도를 넘어선 변화에 대한 미시적 고찰 
하지만 정작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흔드는 지점은 그 '마음'의 변화와 함께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하며 겪는 지호의 변화이다. 수지가 칭한 '감배' 모임, 즉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들의 사생활에 '감놔라 배놔라'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으로 변질된 동창 모임에서 그간 친구들과 소원했던 지호는 묘하게 동질감을 느끼며 안온함을 느낀다. 반면 '비혼주의자' 수지는 재수없어 하고, 결혼이 로망이 호랑은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시어머니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 달려간 시댁 제사에서 고단수의 딸내미같다는 칭찬을 들으며 시댁 제사일을 다 떠앉은 지호는, 이른바 '착한 며느리 증후군'이라는 진단과, 수비수로서의 존경을 받았던 전력'이 무색하다는 세희의 평가에 혼돈스러워 한다. 

이처럼 그간 드라마들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과한 여성, 혹은 부부 관계를 상투적으로 그려냈던 것과 달리,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미시적'으로 그 제도에 속해가는 지호를 들여다 본다. '감놔라 배놔라'해서 싫다는 수지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 소속감이 싫지 않았다는 지호의 마음이나, 적당히 거절할 수 있지 않았냐는 세희의 비난에 착한 며느리 증후군인가 들여다 보면서도 '마음'을 놓치지 않는 문과 출신 지호의 고민은 그래서 오히려 생각할 지점을 남긴다. 



착한 며느리 증후군을 통해 짚어보는 '이데올로기적 관점'도 유효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으로서의 결혼이라는 정서적 결합으로서의 결혼의 그 미묘하고도 복잡한 사회학을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섬세하게 살펴낸다. 

또한, 결혼이 로망인 호랑을 위해 2년 동안 자신이 해오던 일을 접어가면서 까지 '취직을 감행한 그녀의 남자 친구 심원석(김민석 분)과, 하지만 옥탑방에서 결혼까지의 과정은 여전히 아득한 이 커플의 현실은, 개념, 무개념이라 선을 그을 수 없는, 집을 가진 세희와 지호의 고민과 또 다른 지점에서 88만원 세대의 현실을 짚어낸다. 연애는 하지만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고싶지는 않은 수지의 계약 연애 역시 또 다른 현실이기는 마찬가지다. 

by meditator 2017. 11. 8.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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