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 시리즈가 첫 선을 보였을 때 미국 등지의 인기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반응이 저조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망치를 휘두르는 토르'신에 대한 낯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필독 도서처럼 우리나라 신화보다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만화에서부터 섭렵하며 자란 세대에서 북유럽의 망치를 휘두르는 신은 이질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인문학적 탐구열과 함께 북유럽 신화가 소개되기 시작하고, <반지의 제왕> 등의 붐과 함께 북유럽 정서에 대한 전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북유럽의 신은 생소했다. 


오히려 '토르'을 익숙하게 만든 건, 이미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아이언맨'을 필두로 한 슈퍼 히어로 군단의 활약을 그린 <어벤져스(2012)>로 부터라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그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을 알고, 태생적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주신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를 침공하려는 로키(톰 히들스턴 분), 그리고 그런 동생, 사실은 의붓 동생이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어벤져스 군단에 합류한 토르(크리스 햄스워스 분)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일견 코믹하면서도 좌충우돌 끊임없이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막장'드라마에서 익숙한 그 캐릭터에 관객들은 매력을 느꼈을 터이다. 그리고 이제 토르 시리즈는 2편 <다크 월드>에 이어, 3편 <라그나로크>로 아이언맨 못지 않은 인기 캐릭터가 되어 극장가를 섭렵한다. 



히어로물에 등장한 신들의 종말; 라그나로크 
그런데 이번 3편의 <토르; 라그나로크(이하 토르)>가 주목할 만한 점은 이미 1편에서부터 차용되어온 토르와 로키를 탄생시킨 북유럽 신화를 절묘하게 버무려 냈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아예 부제를 '라그나로크'라고 한 3편은 북유럽 신화의 종결, 세계의 종말 전쟁을 다루고 있다.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북부 동일 등지에 살던 노르드 인들을 비롯한 북게르만 민족들의 신화를 통칭하는 북유럽 신화는 영생으로  신들의 세상이 이어지는 다른 지역의 신화와 달리, '라그나로크'라 불리는 신들의 멸망을 다룬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이는 겨울이 1년의 반을 넘는 척박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지리적 환경에 힘입은 바 신조차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비극적 운명의 서사를 신화의 내용으로 수용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 로마 신화 처럼 다양한 신들이 저마다의 '능력'을 활용하는 다신론에 기반하되, 그럼에도 그리스 로마 신화가 제우스라는 확고한 가부장적 권위 체계의 규율에 의해 그 질서가 유지되는 것과 달리, 북유럽 신화는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신화가 곰을 토템으로 섬겼던 부족과 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섬겼던 부족간의 쟁투 과정을 신화화 하였듯이 신화의 역사 속에 부상했던 다양한 민족이 섬기는 신을 북유럽 신화의 근간 속에 수용해 내면서 '티르', '토르', '오딘' 등의 여러 우두머리 신의 집단 중심 체제를 골격으로 삼는다. 그래서 오딘이 신들의 제왕이라 칭해지면서도 정작 천둥의 신 토르가 대중적으로나 그 힘에 있어서 압도적인 등 북유럽 신화에서는 그 권력이 일원적이지 않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오딘과 토르, 로키의 부자 관계 역시 다르다. 오딘과 토르가 부자 사이, 때로는 형제 사이로 전해지는 것과 달리, 로키는 오딘이 데려온 아들이라는 영화적 설정과 달리 거인족 출신으로 오딘과 의형제를 맺은 것으로 신화에서는 그려진다. 하지만 아들이건 형제건을 떠나 오딘과 토르가 제휴 관계인 것과 달리, 신들의 종말 그 시작이 된 로키는 애초부터 신들과는 다른 종족 다른 이해 관계를 가진 존재였다는 것이다. 
영화 속 로키가 적자가 아니라는 자신의 열등감을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통해 극복하고자 하다 토르를 어둠의 세계에 가두고, 오딘을 무력하게 만들며 지하 세계의 헬라가 그 힘을 회복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듯, 신화에서 역시 아내와 딸을 잃은 로키의 복수로 부터 종말, 라그나로크는 시작된다. 



신화적 종말에 대한 현대적 해석 
영화에서 신들의 제국 아스가르드와 그 주변에서 오딘이 점령한 9개의 왕국은 신화 속 큰 물푸레 나무, 위드그라실을 중심으로 제일 윗부분에 존재하고, 그 가운데 부분에 인간들의 미드가르드, 그리고 반지의 제왕 등에 등장한 거인과 난쟁이들의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나무의 아랫 부분 죽은 자의 세계, 바로 헬라가 돌아온 그곳 저승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북유럽 신화는 그려낸다. 사실 신화 속 헬라는 말썽의 근원인 로키의 딸로 그려지지만 영화는 오딘의 숨겨진 첫 째 딸, 그리고 선한 군주였던 오딘의 지난 날 잔혹했던 정복욕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오딘이 사랑했던 아들 발데르의 죽음으로 초래된 신들간의 갈등, 그것이 극대화하며 라그나로크는 시작되고 결국 저승에 가두어졌던 늑대 펜리르와 뱀 요르문간드가 나타나 신들과 서로 죽고 죽이는 대 멸망이 시작된다. 영화는 그 신들의 전쟁을 저승에서 돌아와 다시금 정복 전쟁을 벌이고자 하는 헬라 여신과 그 수하 늑대로 표현해 낸다. 오딘의 첫 번째 자식으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여신, 그에 대항해야 하는 역부족의 토르. 그를 돕는 문지기 신 해임달과, 오딘의 전사 발키리와, 결국 합류한 로키까지. 선과 악이라 구분할 수도 없이 각자 신들의 욕망이 뒤엉켜 싸우다 모든 것이 불태워져 세상이 끝나 버리는 라그나로크를 영화는 히어로물의 전형적인 선과 악의 싸움으로 치환해 냄과 동시에 제국의 권력욕과 그에 대항하는 선의 영웅 세력으로 대립시켜낸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딘으로부터 토르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세대 교체도, 그리고 <글래디에이터>의 우주 버전 형식을 통한 아들의 성장사 역시 통과 의례로서 더해진다. 역시나 언제나 자신의 정체성에 모호했던 중간자 로키의 절묘한 선택 역시 빠질 수 없는 관람 포인트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신들의 전쟁 이후 아스가르드는 불타고, 인간 세상 역시 종말의 전쟁과 이어진 혹한으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고 겨우 살아남은 인간들로 신들의 세상에 이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인간의 역사를 막강한 힘의 헬라 앞에 아스가르드를 포기한 토르의 결정, 즉 아스가르드의 존재론에 대한 의미심장한 결론으로 이끈다. 즉 헬라에 의해 지배되더라도 아스가르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민들, 즉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진정한 아스라르드라는, 북유럽 신화의 '민주주의적 해석'을 통해 신화적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내며 장대한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신화에서 '신들의 종말'이 '인간의 역사로 대체되는 서사가, 영웅들의 활약상에 힘입어 '정복 군주'의 국가가 아닌,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들이 존재하는 그곳, 설사 그곳이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이라 하더라도, 그곳이야말로 진정한 국가라는 것을 <토르;라그나로크>는 주장하며 시즌 3를 마친다. 그 흔한 쇠망치를 휘드르는 토르을 차용했던 히어로물은 그저 신화적 인물의 차용을 넘어 세계관의 재해석을 통해 시리즈물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 낸다. 이렇게 어벤져스로 규합된 히어로들은 각자 아이언맨의 자본주의적 세계관, 그리고 <캡틴 아메리카>의 국가주의적 세계관에 이어, <토르>의 민주주의적 세계관에까지 다양한 세계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시리즈를 풍성하게 만들며 보는 재미와 함께 생각할 재미를 던져주며 이 시대의 담론을 형성해 간다. 아마도 이 지점에 마블 군단의 독보적인 선점의 또 다른 지점일 것이다. 


by meditator 2017. 11. 7. 15:10

영화 감독들의 단편 영화 제작기를 예능으로 담은 <전체 관람가>는 정윤철, 봉만대 감독의 제작기를 통해 메이킹과 영화의 콜라보의 의미를 십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정윤철 감독의 <아버지의 검>이나, 봉만대 감독의 <양양>이 게임과 실사 영화의 콜라보라던가, 19금 감독의 전체 관람가 가족 영화라는 신선한 시도라는 측면에서는 주목을 받았지만, 메이킹과 영화라는 균형추에서 영화적 완성도의 아쉬움을 남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아쉬움은 3000만원의 부족한 제작비와 짧은 촬영 시간의 핑계로 대신되었었다.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 드디어 단편 영화의 빛을 발하다
하지만 이제 4회를 맞이한 <전체 관람가>는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를 통해, 그런 핑곗거리를 역설적 기회로 활용하며 프로그램 본연의 가치를 제사한다.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액션 영화에서 급 변경된 뮤지컬이라는 장르, 그것도 '노래방' 음향이라는 척박한 환경의 산물이 오히려 이원석 감독이 주제로 삼은 '아재들의 이야기'의 화룡점정이 되어 작품의 빛을 더한다. 

<상의원>이라는 작품이 있지만, 그보다는 그 전작 <남자 사용 설명서>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분명하게 했던 이원석 감독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요 이래 <영웅;샐러맨더의 비밀(2010)>을 유일하게 개봉한 극장에서 찾아 볼 만큼 배우 김보성의 팬이었던 자신의 팬심을 영화에 활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김보성만큼이나 <클레멘타인> 등을 통해 액션 배우로 일가견이 있는 이동준 배우와 함께 하고자 한다. 

대중들에게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혹은 광고를 통해 등장해 철 지난(?) '의~리'를 외치는 그 '아재'들의 감성을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여전한 그 무엇에 대한 고찰로 승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원석 감독이 여전한 아재들의 액션 감성을 고수시키고자 하는 의도는 3000만원이라는 제작비에 엄격한 조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에 의해 대번에 가로막히고 만다. 그리하여 정윤철 감독처럼 '즉흥 환상곡'처럼 아재들의 감성을 역설적으로 '랩권하는 세상' 속에서 구원하고자 발리우드의 한국판 버전 '코리우드 뮤지컬'로 급변경된다. 


열악한 제작 환경이 만들어 낸 코리우드 노래방 뮤지컬 
빠듯한 제작비에 하나 둘씩 톡방을 빠져나가는 스텝들, 그리고 말 꺼내기도 어려운 배우의 섭외 등의 과정은 이제 <전체 관람가>의 통과 의례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자신을 여전히 팬이라 알아봐주는 이원석 감독을 위해 혹은 여전히 영화인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감독을 위해 시나리오도 보지 않고 촬영에 성실하게 임해 생전 처음해보는 랩에서 부터 60의 나이에 등에 땀이 나도록 안무를 연습하는 이동준 배우의 '노익장(?)은 그 자체로 한편의 '인간 극장'처럼 다가온다. 

드디어 영화의 개봉, 영화는 신나는 싱어롱 노래방 뮤지컬을 표방하며, 당부의 말을 덧붙인다. 뜬금없는 설정에 이해가 되지 않으신다면 잠시 옆 사람을 보거나 다른 생각을 한 후 본다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시작된 영화는 여전한 의리의 김보성이 영화 오디션 현장에서 난감한 처지에 빠지는 거승로 시작된다. 어떻게 요구를 해도 변하지 않는 김보성의 일정한 연기는 '갓잇'의 수식어를 요구하는 '랩부심'이 충만한 현장에서 당연히 '거절'을 당하고, 그에게 겨우 마련한 오디션 자리를 소개해준 후배의 타박이 이어진다. 그리고 뜻밖에도 음악이 흘러나오며 김보성의 '시간이 째깍째각~ 흐르는 세월~'하는 노래가 이어진다. 김보성의 노래에 맞춰 방금 타박을 주던 후배의 백댄서 변용까지, 우리가 이른바 '발리우드'라 칭하는 인도 영화에서 흔히 보던 급전직 뮤지컬의 등장 방식을 영화는 그대로 차용한다. 

혼자 술을 마시며 눈시울을 적시던 아버지 김보성 앞에 등장하여 아버지는 '아재'라며 구박을 하는 아들의 대사 역시 '랩'으로 대신한다. 이후 열 번의 오디션에서 계속 물을 먹은 아버지 김보성은 마지막이라며 후배가 권한 영화의 배역 '랩에 빠진 아버지'의 역을 맡기 위해 '랩하는 방법'에서 부터 첫 걸음을 뗀다. 그리고 이원석 감독의 <남자 사용 설명서>에서 등장했던 방식을 차용하며 '보헤미안 랩소디'의 도입 부분처럼 cg를 활용한 김보성의 랩 입문기는 그 자체로 실험적인 영역으로서 단편 영화의 맛을 한껏 만끼하도록 만든다. 

드디어 랩에 빠진 아버지 역할의 오디션을 보는 날, 말이 래퍼지 80년대 촌스러운 운동복에 머리띠까지 두른 어색한 아재미 풀풀 풍기는 김보성 래퍼가 뜻밖에도 오디션 장에서 그처럼 오디션을 보러 온 그와 같은 왕년의 액션 배우 이동준을 만난다. 아내의 롱 털코트까지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과거를 상징하는 트로피까지 들고 온 또 다른 아재 배우 이동준. 

두 사람이 트로트 반주에 어머님을 그리는 노래를 채 마치기도 전에 시작된 오디션, 의상까지 맞추며 등장했지만 빠른 비트 박스에 이동준 배우는 차마 입도 떼지 못한 채 오디션 장을 나서고 만다. 김보성 배우라고 다를까. 하지만 한번의 기회를 더 청한 그는, 그만의 리듬으로 '현실을 피한 돈키호테'로서의 자신의 현실을 토해내고 오디션 장을 빠져나간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다른 촬영의 보조 출연자로 조우하고, 그곳에서도 타박을 받다 잠시 벤치에서 쉬던 두 사람은 아직도 두 사람을 알아보는 왕년의 팬들로 인해 한숨을 돌리고 <라라랜드>의 그 절정의 음악 못지 않은 아재들의 <랄라랜드> 협연으로 영화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새롭지 않지만 새로웠던 아재들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영화가 끝나고 많은 감독들이 기립 박수를 쳤고, 눈물로 환대하듯, 이원석 감독의 <랄라랜드>는 웃음과 그 특유의 b급 감성과 그럼에도 그 속에 담겨있는 아재들의 순정으로 인해 한 조각의 '맛있는 케이크'처럼 15분을 60분처럼 느끼게 다가온다. 문소리의 평처럼 김보성, 이동준이라는 두 배우의 현실이 그대로 애정을 가지고 영화 속에 녹아든 아재들의 <랄라랜드>는 '랩'으로 대변되는 흐르는 세월 속에 템포를 맞출 수 없는 '돈키호테'같아졌지만 그래도 '사나이'로 대변되는 '순정'의 가치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나이듦에 대한 긍정적 단상으로 결론내려진다.

이원석 감독의 영화는 새로운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제는 뒤처진 단어가 되어가는 '아재', 그들의 존재 가치를 '코리우드'라는 신조어가 어울리는 노래방 뮤지컬의 형식을 통해, 이제는 아니 예전에도 a급은 아니었지만, b급 그 자체로서도 얼마든지 존재 가치가 있는 '아재'의 존재 가치를 빛낸다. 바쁘게 변하는 세상에, 오히려 변하지 않아 가치가 있어져 버린 영역에 대해 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김보성, 이동준 배우의 재발견은 물론, 나이들어 가며 세월에 뒤쳐져 조바심을 내는 이들을 위로한다. 우스개처럼 장편이라면 투자를 받지 못했을 것이란 이 <랄라랜드>야 말로 단편만이 해낼 수 있는 독보적인 감성의 승리다. 
by meditator 2017. 11. 6. 17:24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요즘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자랑의 물꼬를 튼다. 친구의 연식으로 보아 공중파에서 한참 인기가 있는 그 어머니들의 출연하는 예능? 아니면 케이블의 인문학 수다?인가 했더니 뜻밖에도 유툽의 항해에 빠졌단다. 지난 촛불 광장으로부터 불붙은 그 친구의 관심은 유툽에 있는 다종다양한 정치 팟 캐스트에 대한 열혈 시청 욕구를 불붙였고. 직장 일로 바쁜 틈틈이 접근성이 좋은 팟 캐스트를 한 편씩 시청하는 것이 요즘 일상의 낙이라고 적극 추천한다. 




팟 캐스트, 그 선두 주자로서의 김어준 
이런 식이다. 어쩌면 공중파의 면구스러운 시청률을 케이블이나 종편 핑계를 댈 것도 없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유툽을 비롯한 다양한 채널의 프로그램에 접근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친구처럼 지난 촛불 정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치적 사안을 펼쳐내는 팟 캐스트가 인기를 끌었고, 그 선두에 '김어준'이 있다는 건 자타공인이다. 

김어준이라 하면, 기억을 거슬러 딴지 일보 총수라는 독특한 그의 이력을 시작으로 아직 팟 캐스트라는 채널이 볼모지인 시절, 2011년 4월부터 '가카 헌정 방송'을 표방하며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그 주변 인물들을 향한 저격수의 역할을 자처한 <나는 꼼수다>를 당시 주진우 시사인 기자, 김용민 시사 평론가, 정봉주 17대 국회의원 과 함께 시작했다. 18대 대선 하루 전인 33회차를 끝으로 종영한 <나는 꼼수다>는 이후 한겨레 tv와 함께 한 김어준의 <파파이스>, 김용민의 국민tv <맘마이스>, 정봉주의 <전국구> 등으로 확산되어가며 촛불 정국을 달군 팟캐스트 열풍에 힘을 실었다. 

왜 팟 캐스트 였을까? <나는 꼼수다>의 등장에서 부터 보여지듯 이 정치 팟캐스트의 존재는 파격적이었다. 때로는 욕설까지 등장하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그보다 더 직설적으로 '가카'의 존재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이 정치 풍자, 비판 방송에 당시 17대 총선이후 좌절되었던 의식있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다시금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후, 이런 <나꼼수>의 활동이 촉매가 되어 18대 대선 이후 정의당의 노회찬, 유시민, 진중권 등의 정치 까페 등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최근 보여지듯이 정권의 공영 방송 장악과 종편의 파상적인 정치 공세에 좌절한 의식적 대중의 마음에 등대지기 역할을 하며 지난 촛불 정국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정치 팟 캐스트의 역할은 그 어떤 공영방송의 뉴스보다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19대 총선을 성공적으로 이끈데 일조한 김어준과 그의 팟 캐스트는 당당하게 공중파 sbs에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 선을 보이기에 이르른다. 바로 지난 4일과 5일에 선보인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다.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란?
하지만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이하 블랙하우스)>를 그저 개선장군으로서의 행진으로만 보아서는 아쉽다. 오히려 <블랙 하우스>의 존재는 오히려 2011년 이래 줄기차게 이어져 온 김어준의 '가카 헌정 방송'의 절정이며, 또한 동 시간대 방송해온 <그것이 알고싶다>가 타 방송사의 다큐 프로그램들이 정권과 야합하는 가운데에서도 끈질기게 시도해온 정치 비판 다큐의 연장선상에 서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살펴보아야 한다. 

4일의 첫 방송에서 다큐는 화제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그 첫 주자는 다름아닌 유병언 세모 회장의 아들 유대균씨, 외국의 모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그간 '음모론'으로 세간에 회자되던 아버지 유병언의 자살에서 부터 국정원 연계설까지 모든 의문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거침없이 펼쳐낸다. 

그렇게 세간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가던 세월호를 다시 부양시킨 인터뷰는 이어서 <그것이 알고 싶다> 피디와 함께 정창래 국회의원 등과 함께 한 두바이의 비밀 인터뷰를 공개한 박근혜 5촌 살인 사건에 대한 대담으로 이어진다. 이 내용은 이미 <그것이 알고 싶다>, 그리고 김어준의 팟 캐스트 등을 통해 그 일부가 소개되었음에도 그 실체의 진실에 대해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세월호와 함께, 박근혜 정권의 도덕성에 심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게 박근혜 정권의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비도덕적 행각을 폭로하는데 거침이 없는 한편, 2회 강유미를 등장시켜 '다스는 누구꺼죠?'라는 질문을 하게 만들고야 만 '흑터뷰'에서는 여전히 끝나지 않는 아니 이제서야 드러나기 시작한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다스로 이어지는 거대한 비리의 서막을 명쾌하게 설명해 낸다. 

즉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 새 정권의 최대의 임무가 '적폐 청산'이듯, 아직도 크게 우리 사회에 드리워진 이명박-박근혜로 이어진 적폐 정권의 그림자를 김어준과 제작진은 드러내 보이기에 거침없었고, 이를 통해 <블랙하우스>의 존재론을 설파했다. 



하지만 과거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2회 강경화 장관과의 인터뷰, 그리고 1회 정신과 전문의 최명기와 정세현 전 외교부 장관을 등장시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둔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하며 '코리안 패싱'은 없다는 해명의 여지도 주는가 하면, 새 정부의 행보에 대한 훈수를 두는데도 서슴치 않았다. 

1,2회 파일럿을 마친 <블랙 하우스>에 비견될만한 프로그램은 아마도 jtbc의 <썰전>이라 할 것이다. 지난 정국에서 <썰전>의 파격적 존재감을 보며 앞다투어 종편에서 그와 비슷한 포맷의 정치 대담 혹은 방담 프로그램을 선보인바 있다. 하지만 <블랙 하우스>는 그런 종전의 방식과는 다른 '김어준'이라는 '총수'로 불리는, 하지만 가장 어려운 정치적 사안도 가장 명쾌하고 단순하게 설득해 내는 그의 존재감에 기대어 새로운 정치 프로그램을 제시한다. 그와 초대 손님의 직설 인터뷰에 이어, 그를 중심으로 한 패널들의 정치 분석, 그리고 강유미와 같은 '정알못'(정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등장시킨 명쾌한 이명박 전대통령과 다스에 대한 설파에 이르기까지 마치 종합 예능 프로그램처럼 다양한 코너로 정치에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포맷의 이 정치 시사 프로그램은 첫 방 6.5%에 이어 2회 7.8%로 정규 편성의 청신호를 밝혔다.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by meditator 2017. 11. 6. 12:56

2일 개봉한 <침묵>은 1999년 <해피엔드>에 이어 18년만에 정지우 감독과 최민식 배우가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또한 2014년 중국에서 개봉한 곽부성 주연의 <침묵의 목격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기도 하다. 법정을 무대로 재벌 임태의 약혼녀인 유명 가수 양단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의 딸이 유력한 용의자로 구속된 가운데 임태(손홍뢰 분)를 사기 사건으로 기소한 적 있는 동도(곽부성 분)와 변호사 주리(위난 분)가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법정 공방을 펼치지만, 정작 영화의 결말은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며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최민식에 방점이 찍힌 리메이크 
그리고 11월 2일 개봉한 <침묵>은 이런 원작의 얼개를 그대로 따른다. 차기 대통령 선출에 간여할 정도의 재계의 실력자 임태산 회장(최민식 분)이 그 주인공이다. 한 음식점에서 정가의 뒷거래를 하는 한편, 그런 그가 마음을 쏟는 또 하나의 '사업'이 있으니 바로 늙으막한 그에게 찾아온 로맨스이다. 그 주인공은 여가수 '유나', 하지만 그 '로맨스 그레이'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며 대뜸 눈물을 보이는 그의 외동딸 미라로 인해 난관을 겪지만, 그에게 모처럼 찾아온 사랑은 쉬이 식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딸 미라를 만나고 오겠다는 유나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역시나 유력한 용의자로 미라가 체포된 가운데, 매번 법망을 빠져나가는 임태산을 벼르던 동성식(박해준 분)이 재빨리 현장을 선점하고, 아버지와의 면회조차 마다하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유일하게 딸과 소통했던 예전 과외 교사 출신의 최희정(박신혜 분)가 변호사로 선임된다. 원작 <침묵의 목격자>가 검사 역인 곽부성에게 방점을 찍은 반면, 한국으로 온 <침묵>은 동일한 플롯과 반전을 취하면서도, 출연진의 비중에서 재벌 회장이자 아버지 역의 최민식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비중은 왜 정지우 감독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는가를 설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원작의 작품성이나 만듬새를 차치하고, <침묵>의 노선을 미묘하게 만든다. 

영화는 서막에서 부터, 엔딩까지 줄곧 최민식이 분한 임태산의 '순애보'에 집중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애보'는 '반전'을 품은 스릴러 장르로서의 영화의 매무새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의 애인을 살해한 범죄 현장에서 잡힌 재벌가의 딸, 그 범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법정 스릴러의 뼈대를 가진 영화는, 그 사건의 배후에서 암약하는 아버지의 존재감과 충돌한다. <침묵>처럼 뜻밖의 반전이 중요한 영화로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다. 이 영화 역시 줄곧 진행되던 사건의 진실이 마지막 장면에서 뜻밖의 반전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던 작품이다. <침묵> 역시 동일한 반전의 트릭과 해석이 필요한 영화인데, 문제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유일한 생존자인 버벌(사실은 카이저 소제)의 진술과 그 진술을 듣는 수사관 데이브가 영화의 본 무대의 주요 등장 인물이었다면, <침묵>의 경우 본 무대가 법정이며, 그 법정에서 주인공은 검사와 변호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법정과 법정 밖의 임태산의 존재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그리고 원작처럼, 최후의 한 방이 되어야 할 임태산은 줄곧 영화에서 지분을 가지고 활약을 하며,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돈이 진실'인 역할에 충실한다. 문제는 이런 임태산의 활약이 그리고 그 역할을 분한 최민식의 존개감이 두드러질 수록 정작 이 영화의 본 게임이 되어야 할 법정의 두 주인공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이 미흡해 진다는 것이다. 이 운영의 묘에서, <침묵>은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 히든 카드를 너무 손쉽게 넘겨주며,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주저앉혀 버리며 임태산의 순애보를 설명하는데 진력한다. 



비극적인 아재들의 순애보 
그렇다면 왜 장르물로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순애보'에 연연해 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침묵> 한 작품보다는 최민식와 정지우 감독의 첫 만남 <해피엔드>에서 <은교(2012)>, 그리고 이제 <침묵>으로 이어지는 '아재들의 비극적 순애보'에 대한 정지우 감독의 천착에 대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9년작 <해피엔드>에서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 분)는 아내 최보라(전도연 분)의 불륜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인고하려 하지만, 자식마저 내팽겨쳐 버린 채 남자를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집을 비워버리는 아내를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12년의 <은교>에서는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가 십대의 은교(김고은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관능은 생로병사가 없는 모양이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존경받는 시인은 그를 찾아온 '노욕 칠정'에 그만 한 평생 자신이 지켜온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만다. 
'아재'라기는 뭐하지만 역시나 박해일이 분한 2008년작 <모던보이>의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비밀구락부 댄서 조난실(김혜수 분)에게 '반'해 자신의 인생 궤도를 180도 바꿔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침묵>에서 그 비극적 순애보의 주인공은 재벌 회장 임태산이 되었다. 

그들은 남자였고, 그리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그들의 사랑은 '동의'받지 못했다. 가정을 함께 꾸려갈 아내에게, 시대에, 그리고 세월에, 자식에게, 세상에게.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늘 불온했고, 좌절했고, 처절하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자신이 한 사랑의 대가를 짊어지고자 한다. <침묵>에서 정지우 감독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신에게 빨대를 꼿는 것일 수도 있는, 심지어 섹스 비디오까지 있는 유나를 사랑한다. 유나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임태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명장면이 모든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 최민식의 끝없는 오열이었듯이, 그 오열과도 같은 것이 바로 자신의 사랑으로 부터 비롯된 범죄을 책임지는 것이다. 젊은 서민기는 오열했지만, 늙은 임태산은 '회자정리'의 담담함을 택했다. 임태산의 선택은 <은교>에서 이적요가 택했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했던 그 방식의 또 다른 변형과도 같다. 

세월이 흘렀지만 정지우 감독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2017년이 되었다고 해서 '한남'이라 새삼스럽게 지탄받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정지우의 방식이니. 단지, 99년의 서민기 식 역설적 사랑이 IMF에 강타당한 그 시대 가장들의 마음을 공감했고, 2012년의 이적요가 '노모족(NO-MORE-UNCLE)'과 나오미족(NOT OLD IMAGE)의 등장과 함께 실버 세대의 욕망을 대변했다면, 안타깝게도 2017년의 임태산의 사랑과 공감에 대한 '공감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이 시대엔 '나이든 남자'의 순애보도, 돈이 진심이라는 재벌 회장의 사랑도 체감이 쉽지 않다. 어쩌면 <침묵>의 고전은 작품의 만듬새보다도 바로 그런 '공감'의 원심력 부재에서 찾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17. 11. 4. 14:49

마치 돌림 노래처럼 너도 나도 연예인 혹은 연예인 측근들의 관찰 예능이 붐을 이루는 최근, 지난 10월 10일 첫 방송을 시작한 jtbc의 <내 이름을 불러줘 -한 名회>의 존재는 남다르다. 신개념 소설 클럽을 표방한 이 프로그램은 '동명이인'이라는 우리 사회 흔한 현상을 '휴먼 스토리'의 일반인 토크쇼의 소재로 끌어와 거기에 장성규 아나운서의 '이름의 사회학'을 곁들여 차별적인 프로그램이 되었다. 첫 회 그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확실한' 김정은으로 부터 시작하여, 불멸의 영웅 이순신을 건너, '하늘', 그리고 이제 2017년 가장 유명해진 '김지영'으로 따로 또 같은 이들의 사연과 입담, 그리고 사회적 공감대를 열어간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매개가 된 김지영 씨들의 소셜 클럽 
4회 김지영이란 이름을 가진 출연자들에 앞서 우선 2017년을 달군 <82년생 김지영>으로 시작되어야 할 듯하다. 지난 2016년 10월 민음사의 오늘의 젊은 작가 13번째 책으로 선을 보인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서른 네살 갑자기 이상 증세를 보인 김지영을 상담한 리포트를 재구성한 형식의 소설이다. '젠더'적 감성에 기반한 이 소설은 태어나면서 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가족에서 차별을 당하고, '여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결혼'과 '육아'라는 제도를 통해 정체성을 상실해 가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 82년생 여성의 리포트는 발간과 동시에, 1999년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이 제정되고, 여성 가족부가 출범, 성평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음에도 '내재화되고 관습화된 성차별'의 감성을 건드리며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라는 시대적 화두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 결과 이 시대 차별받는 여성의 상징처럼 된 <82년생 김지영>은 그 공감대를 발판으로 '일, 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개정안 발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다큐 등 여러 프로그램 들이 앞다쿠어 이 화제의 책을 언급하고 다룬 가운데, 이제 10월의 마지막 날 jtbc<한명회>에서 그 '김지영'씨들을 소셜 클럽의 주인공들로 모셨다. 
소설은 82년생이라는 특정 연도의 출생 김지영을 다루었다. 실제 김지영의 출생 연도를 조사해 보니, 1980년에 제일 많은 김지영의 출생 신고를 한 것에서 보여지듯, 김지영이란 이름은 80년대 여성의 가장 '흔한' 이름이었다. 그 '흔해서 무시받던' 이름이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대한민국 여성의 대명사'가 되며 재조명받아 감사하다는 90년생에서 61년생까지의 9명의 김지영들이 스튜디오에 모였다. 

나이가 다르듯 세대적 현실이 다르고, s대 출신 의사, 변호사에서 웃음 치료사, 아르바이트 전문가, 주부, 공백기를 가진 회사원까지 다양한 직종과 경험을 가진 9명의 여성들, 그저 그녀들의 아침 주부 대상 휴먼 스토리 토크쇼가 될 뻔한 프로그램에 차별적 연결 고리가 된 건, 바로 소설 <82년생 김지영>이다. 

이 소설을 읽은 9명의 김지영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66년생의 김지영도, 83년의 김지영도 어떻게 세월이 흘러도 어쩌면 이렇게 여성의 삶은 변화하지 않는가라고. 심지어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mc 한혜진은 소설 속 어머니의 삶조차 자신의 어머니의 삶과 너무도 똑같다며 공감대를 넓힌다. 

그리고 이 놀라움의 배경을 장성규 아나운서가 등장하여 '숫자로 보는 대한민국 여성의 삶'이라는 사회적 통계를 통해 설득한다. 2016년 전체 인구 중 여성 비율 49.9%, 여성의 대학 진학율 73.5%, 고용율 50.2%의 세상, 그러나 20세 이상 928만 9천 명의 여성 중 696만의 여성이 결혼, 임신, 출산, 양육 등의 이유로 경력 단절을 겪게되는 것을 통계는 보여준다. 10명 중 7명이 퇴사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중 15%는 경력 단절의 갭을 넘어 사회에 복귀하지만, 상당수가 그 이전에 비해 직종이나 임금에서 다운그레이드한 상태를 겪게 된다고 수치는 증명한다. 그리고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15조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런 소통의 '페미니즘'은 어때? 
이런 숫자로 보는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9명의 김지영들의 삶이 보충한다. 의사나 변호사라는 전문직이라도 결혼을 하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전제'만으로 선택 과정에서 당연한 차별을 겪게 되며 결혼조차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 그나마 첫 아이까지는 출산 휴가를 받을 수 있지만, 둘째 아이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처지로 만드는 조직.
조직만이 아니다. 낳았을 때부터 시작하여 성장 과정,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가족내에서부터 사회 조직에서까지 여성이 잘 나가면 오히려 불쾌해지는 아이러니, 마치 그리스 신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처럼 세상에 여성은 너무도 작아 계속 잘리는 느낌이라고 출연자가 말하는 그 '내재화되고 제도화된 차별'에 8명의 여성들은 입을 모은다. 

그리고 이런 8명의 김지영들의 토로와 공감은 출연한 한 명의 남자 김지영과 mc 노홍철, 그리고 출연자의 가족인 남자들에서부터 의식 변화의 출발점이 된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그리고 자신이 겪은 차별적 삶에 대한 해법에 대한 답을 '사회적 의식 변화'라고 명쾌하게 정의한 그 '변화'의 물꼬를 프로그램은 유도한다. 



프로그램에 출연하기 위해 소설을 읽은 남자 김지영은 '도와준다'고 했던 가사 노동에 대한 다른 변화된 시각을 보인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그저옛날 이야기라 여겼던 노홍철은 현실에 대한 놀라움과 자각을 솔직하게 토로한다. 차별적 상황을 헤쳐나가기 위해 '비혼'을 선택했던 72년생의 변호사와, 자신의 성취를 위해 '비혼'을 희망한다는 90년의 구직자, 그리고 딸이라면 '비혼'을 권장하겠다는 현실의 막막함을 함께 공감한다. 

프로그램은 어떤 캠페인이나 구호를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설보다 영화보다 더 치열했던 8명의 김지영을 통해 우리 시대 여성의 차별적인 삶을 이해시킨다. 왜 이 시대 여성이 존중받아야 하는지, 그러기 위해 좀 더 여성을 위한 제도와 배려들이 필요한 것인지, 지난 시절의 내재화된 차별 속에서 그녀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통해 설득한다. 남성들의 무지와 외면 역시 노홍철과 남성 김지영 등을 통해 교감하고 소통한다. 어쩌면 그저 흔한 '휴먼 스토리'일 수도 있던 토크쇼는 한 편의 소설이라는 문화적 콘텐츠의 의미와 공유, 그리고 자신들의 경험의 사회화, 그리고 공감과 소통을 통해 멋들어진 '페미니즘'의 결과물에 도달한다. 





by meditator 2017. 11. 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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