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개봉한 <침묵>은 1999년 <해피엔드>에 이어 18년만에 정지우 감독과 최민식 배우가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또한 2014년 중국에서 개봉한 곽부성 주연의 <침묵의 목격자>를 리메이크한 작품이기도 하다. 법정을 무대로 재벌 임태의 약혼녀인 유명 가수 양단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의 딸이 유력한 용의자로 구속된 가운데 임태(손홍뢰 분)를 사기 사건으로 기소한 적 있는 동도(곽부성 분)와 변호사 주리(위난 분)가 각자가 믿는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치열한 법정 공방을 펼치지만, 정작 영화의 결말은 또 다른 진실을 보여주며 반전으로 마무리된다. 




최민식에 방점이 찍힌 리메이크 
그리고 11월 2일 개봉한 <침묵>은 이런 원작의 얼개를 그대로 따른다. 차기 대통령 선출에 간여할 정도의 재계의 실력자 임태산 회장(최민식 분)이 그 주인공이다. 한 음식점에서 정가의 뒷거래를 하는 한편, 그런 그가 마음을 쏟는 또 하나의 '사업'이 있으니 바로 늙으막한 그에게 찾아온 로맨스이다. 그 주인공은 여가수 '유나', 하지만 그 '로맨스 그레이'는 '엄마를 닮지 않았다'며 대뜸 눈물을 보이는 그의 외동딸 미라로 인해 난관을 겪지만, 그에게 모처럼 찾아온 사랑은 쉬이 식지 않는다. 

그러나 잠시 딸 미라를 만나고 오겠다는 유나가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역시나 유력한 용의자로 미라가 체포된 가운데, 매번 법망을 빠져나가는 임태산을 벼르던 동성식(박해준 분)이 재빨리 현장을 선점하고, 아버지와의 면회조차 마다하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유일하게 딸과 소통했던 예전 과외 교사 출신의 최희정(박신혜 분)가 변호사로 선임된다. 원작 <침묵의 목격자>가 검사 역인 곽부성에게 방점을 찍은 반면, 한국으로 온 <침묵>은 동일한 플롯과 반전을 취하면서도, 출연진의 비중에서 재벌 회장이자 아버지 역의 최민식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이 압도적인 비중은 왜 정지우 감독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했는가를 설명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원작의 작품성이나 만듬새를 차치하고, <침묵>의 노선을 미묘하게 만든다. 

영화는 서막에서 부터, 엔딩까지 줄곧 최민식이 분한 임태산의 '순애보'에 집중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순애보'는 '반전'을 품은 스릴러 장르로서의 영화의 매무새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버지의 애인을 살해한 범죄 현장에서 잡힌 재벌가의 딸, 그 범죄를 증명하고자 하는 법정 스릴러의 뼈대를 가진 영화는, 그 사건의 배후에서 암약하는 아버지의 존재감과 충돌한다. <침묵>처럼 뜻밖의 반전이 중요한 영화로 <유주얼 서스펙트>가 있다. 이 영화 역시 줄곧 진행되던 사건의 진실이 마지막 장면에서 뜻밖의 반전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던 작품이다. <침묵> 역시 동일한 반전의 트릭과 해석이 필요한 영화인데, 문제는 유주얼 서스펙트가 유일한 생존자인 버벌(사실은 카이저 소제)의 진술과 그 진술을 듣는 수사관 데이브가 영화의 본 무대의 주요 등장 인물이었다면, <침묵>의 경우 본 무대가 법정이며, 그 법정에서 주인공은 검사와 변호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법정과 법정 밖의 임태산의 존재가 충돌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그리고 원작처럼, 최후의 한 방이 되어야 할 임태산은 줄곧 영화에서 지분을 가지고 활약을 하며,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돈이 진실'인 역할에 충실한다. 문제는 이런 임태산의 활약이 그리고 그 역할을 분한 최민식의 존개감이 두드러질 수록 정작 이 영화의 본 게임이 되어야 할 법정의 두 주인공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이 미흡해 진다는 것이다. 이 운영의 묘에서, <침묵>은 아쉬움을 남긴다. 마지막 히든 카드를 너무 손쉽게 넘겨주며,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주저앉혀 버리며 임태산의 순애보를 설명하는데 진력한다. 



비극적인 아재들의 순애보 
그렇다면 왜 장르물로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순애보'에 연연해 했을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침묵> 한 작품보다는 최민식와 정지우 감독의 첫 만남 <해피엔드>에서 <은교(2012)>, 그리고 이제 <침묵>으로 이어지는 '아재들의 비극적 순애보'에 대한 정지우 감독의 천착에 대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9년작 <해피엔드>에서 실직한 남편 서민기(최민식 분)는 아내 최보라(전도연 분)의 불륜을 목격하고 분노한다. 그래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인고하려 하지만, 자식마저 내팽겨쳐 버린 채 남자를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집을 비워버리는 아내를 그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박범신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12년의 <은교>에서는 70대의 노시인 이적요(박해일 분)가 십대의 은교(김고은 분)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관능은 생로병사가 없는 모양이다'라는 말로 정의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시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존경받는 시인은 그를 찾아온 '노욕 칠정'에 그만 한 평생 자신이 지켜온 모든 것들을 놓아버리고 만다. 
'아재'라기는 뭐하지만 역시나 박해일이 분한 2008년작 <모던보이>의 조선총독부 1급 서기관 이해명은 비밀구락부 댄서 조난실(김혜수 분)에게 '반'해 자신의 인생 궤도를 180도 바꿔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제, 2017년 <침묵>에서 그 비극적 순애보의 주인공은 재벌 회장 임태산이 되었다. 

그들은 남자였고, 그리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그들의 사랑은 '동의'받지 못했다. 가정을 함께 꾸려갈 아내에게, 시대에, 그리고 세월에, 자식에게, 세상에게.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늘 불온했고, 좌절했고, 처절하게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자신이 한 사랑의 대가를 짊어지고자 한다. <침묵>에서 정지우 감독은 이제는 나이가 들어 자신에게 빨대를 꼿는 것일 수도 있는, 심지어 섹스 비디오까지 있는 유나를 사랑한다. 유나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임태산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피엔드>의 명장면이 모든 일을 저지르고 난 이후 최민식의 끝없는 오열이었듯이, 그 오열과도 같은 것이 바로 자신의 사랑으로 부터 비롯된 범죄을 책임지는 것이다. 젊은 서민기는 오열했지만, 늙은 임태산은 '회자정리'의 담담함을 택했다. 임태산의 선택은 <은교>에서 이적요가 택했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격리했던 그 방식의 또 다른 변형과도 같다. 

세월이 흘렀지만 정지우 감독은 여전히 변함없이 '그들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이 2017년이 되었다고 해서 '한남'이라 새삼스럽게 지탄받을 필요는 없다. 그건 정지우의 방식이니. 단지, 99년의 서민기 식 역설적 사랑이 IMF에 강타당한 그 시대 가장들의 마음을 공감했고, 2012년의 이적요가 '노모족(NO-MORE-UNCLE)'과 나오미족(NOT OLD IMAGE)의 등장과 함께 실버 세대의 욕망을 대변했다면, 안타깝게도 2017년의 임태산의 사랑과 공감에 대한 '공감의 온도'가 낮다는 것이다.  이 시대엔 '나이든 남자'의 순애보도, 돈이 진심이라는 재벌 회장의 사랑도 체감이 쉽지 않다. 어쩌면 <침묵>의 고전은 작품의 만듬새보다도 바로 그런 '공감'의 원심력 부재에서 찾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by meditator 2017. 11. 4. 14:49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