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관람가>와 봉만대, 이 처럼 언밸러스한 조합이 있을까? 하지만, 그 이질적인 조합을 JTBC <전체 관람가>가 해냈다. 영화와 예능의 블록버스터 콜라보를 주창하는 <전체 관람가> 그 두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에게 19금 에로 영화의 대명사로 알려진 봉만대 감독이었다. 




19금 에로 영화 감독이 아닌, 그저 감독 봉만대
그의 앞에 붙여진 수식어답게 동료 감독을 비롯하여, MC 윤종신, 김구라, 문소리를 비롯하여, 단편 영화 제작에 돌입하여 그를 만난 제작진, 배우들은 모두 그에게 '19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MC이자, 그의 친구로써 봉만대 감독의 <떡국열차>에 출연한 바 있는 김구라가 그가 19금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에로의 종착점은 휴머니티'라던가, 사실은 봉만대 감독의 장기는 '19금에 가려진 스토리'라던가 하는 동료 감독의 평가는 그럼에도 호기심어린 그래서 '19금은?'하는 질문에 묻히고 만다. 

그런 자신의 궤적이 이름표가 되어버린 봉만대 감독, 그가 야심차게 '19금'이 아닌 '휴머니즘 전체 관람가'를 위한 '잠정' 에로 영화 은퇴를 선언하지만, 매번 그에게 던져지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숙여야 하는 숙명은 예능 <전체 관람가>가 보여준 봉만대 감독편의 첫 번째 관전 포인트이다. 

통과 의례처럼 19금의 질문을 넘기자 수월하게 진행된 촬영 일정, 하지만 MC 문소리의 촬영 날씨는 '하늘이 도와야 한다'는 설레발이 뜻밖에 영화 감독 30년(?) 인생에 발목을 잡는다. 지난 주 정윤철 감독 편이 영화 보다 재밌는 메이킹이라는 평을 받았듯이, 이번 주도 어김없이 <양양>의 작명 과정에서, 봉준호의 <설국 열차>를 <떡국열차>로 패러디했던 바 봉만대 감독의 전작을 빗대, 봉창동의 <양양>이라는 작명 과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출연 계약서 등등의 과정에서 즉흥 환상곡의 쇼팽 정윤철 감독만큼이나, 개성있는 봉만대 감독의 영화 촬영 과정이 시청자의 시선을 잡는다. 

특히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한없이 부드럽고 유연하다가도, 촬영을 접어야 하는 악천후 속에서도 빠듯한 일정을 맞추기 위해 흔들림없이 진두지휘하는 봉만대 감독의 의지는 MC 문소리의 지적처럼 왜 그가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19금이라는 영역을 고수해 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 편의 시, <양양>; 봉만대라서 신선했더, 그리고 어쩐지 아쉬웠던
JTBC<전체 관람가>는 주어진 주제 중에 감독들이 하나의 주제를 선택하여 15분 분량의 단편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이다. 그에 따라 봉만대 감독은 '고령화사회의 딜레마'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양양으로 가는 국도, 캐러반을 메단 미니 트럭이 경찰의 속도위반 단속에 걸린다. 규정 속도를 지켰다는 차주 하태(기태영 분)와 실랑이를 벌이다 운전 면허증을 받아들고 캐러반을 살펴보던 경찰, 다짜고짜 캐러반의 창문이 열리며 하태의 부친 상태가 등장하며 예전 방식으로 '수고하는 경찰분에게 돈이라도 몇 푼 쥐어드리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다음 장면, 불법인 캐러반에서 하태의 차로 바꿔탄 부친 상태는 연신 아들의 융통성없음에 대해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그 잔소리는 결국 아들의 차 시트에 '실례'로 마무리된다. 이어진 옷을 갈아입히려는 아들과 혼자 하겠다며 어린 아들에게 하듯 아들에게 뭇매를 가하는 아버지의 해프닝은 뇌졸증으로 자기 몸도 못가누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모시는 아들의 힘겨운 부양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비바람이 불어대는 양양에 도착한 부자, 형이 일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서핑샵에서 형의 부재를 확인한 하태는, 형을 기다리는 대신, '잠시 아버지를 돌봐달라'는 쪽지 하나를 남긴 채 캐러반을 분리해버리고 아버지에게 인사도 없이 홀로 길을 떠나버린다. 하지만 국도에서 난리를 치는 아버지가 있는 캐러반의 잠긴 문이 그의 발목을 잡고, 본의 아니게 세 부자는 한 자리에 둘러앉지만 결국 형제는 난투극으로 치닫는다. 

결혼을 하면 후에 자식에게 짐이 될까, 아버지 재산도 안받고 홀가분하게 산다는 형 중태(권오중 분)는 '미니멀 라이프'를 운운하며 아버지와 동생에게 '요양원행'을 강권하며 아버지를 외면하고자 한다. 그런 형에게 지난 1년간 아버지를 모신 고통을 호소하던 동생은 결국 '치사하다'는 말과 함께 뒤엉켜버리고 마는데......

정윤철 감독의 <아버지의 검>이 마지막 장면 게임 속 캐릭터 아버지와 현실 아들과의 만남이란 환타지를 통해 '왕따에 시달린 아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감동을 준 것처럼, <양양> 또한 현대판 고려장인 아버지 떠넘기기의 극한 현실을 사랑했던 아내와 어린 아들들을 따라나선 아버지의 '환타지'를 통해 극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 영화의 베스트 관객평인 '버릴 수 없는 정'의 딜레마를 환상을 따라 바다로 간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구하러 바다로 뛰어든 현실의 형제를 통해 '누선'을 자극하며 마무리지으며 '휴머니스트 봉만대'를 증명해 낸다.









남겨진 질문
두 번째 영화를 마무리지은 <전체 관람가>는 게임과 현실의 조화, 에로 영화가 만든 전체 관람가 가족 영화라는 신선한 시도로 감독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숙제도 남긴다. 

무엇보다 3000만원이라는 작은 제작비와 짧은 제작 기간을 통해 15분이라는 제한된 '단편'을통해 무엇을 그려내야 하는가라는 원론적 질문이다. 봉만대 감독의 <양양>에서 영화가 마무리되고 던져진 '영화 속 운동화의 상징'이나, 특별 출연인 김구라나 브릿지로서의 김혜나의 등장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처럼, 장편을 줄인 것이 아닌 정윤철 감독의 정의처럼, '한편의 시', 그래서 '서사'보다 '표현'이나 '정서'로서 다가가야 할 단편 영화에 대해 고민을 남긴다. 

또한 정윤철 감독이 시도했던 바 게임과 실사 영화의 결합이나, 에로 영화 감독 봉만대가 만든 전체 관람가같은 시도는 신선하지만, 방식이나 장르의 새로움과 별개로, 이들이 다루고 있는 '가족'에 대하 보다 진전된 '사고'를 다루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숙제를 남긴다. 특히 봉만대 감독의 경우, 그가 고집스레 천착해 왔던 '에로'라는 영역이 가진, 우리 사회 속 '솔직한 욕망'의 이야기가 '전체 관람가'라는 틀에 맞추기 위해, <양양>에서는 드리워지지 않은 채 결국 '기승전 인지상정효'로 한정된 것이 아닌가라는 아쉬움을 남긴다. 아마도 그 아쉬움은 전체관람가에서 '에로'가 아니라, 봉만대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진솔한' 그 무엇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을까. 


by meditator 2017. 10. 30. 16:35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더니, 초식남의 연애담과 가사 노동의 소중함을 주제로 삼아 '가정' 꾸리기에 집중했던 일본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逃げるのは恥ずかしいけど役に立つ>(아래 <니게하지>의 계약 결혼은 바다를 건너 한국으로 와 가족과 결혼에 대한 현실적 담론으로 변모했다.  여전히 일본 원작 설정의 기억을 지울 순 없지만, 회를 거듭하며 왜 이 드라마의 제작진이 이 드라마가 '리메이크'라 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될 만큼 바다 건너 온 계약 결혼의 양상은 달라진다.  <직장의 신(2013)>, <호구의 사랑(2015)>를 통해 공감어린 현실을 그리는데 발군의 능력을 보였던 윤난중 작가답게 2017년을 살아가는 청춘들의 '현실'을 윤지호(정소민 분), 우수지(이솜 분), 양호랑(김가은 분) 세 30세 동창생들을 통해 실감나게 그려낸다. 




본의 아니게 '우리'가 되어버린 세희와 지호 
세입자가 필요했던 남세희(이민기 분)와 오갈데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전직 보조작가 지호는 '의기투합' 집주인과 세입자의 월세 결혼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두 사람의 계약은 순조로웠다.  평생 살 집의 경제적 보조와 분리 수거, 고양이 밥 줄 사람이 필요했던 세희에게,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청소에, 고양이를 애지중지하며,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지호는 더할 나위없는 찰떡 궁합이었으니까. 

하지만 정작 이 순조로운 두 사람의 2년 약정 동거 프로젝트에서 함정이 된 건 현실 대한민국의 결혼 제도이다. 양가에 인사만 드리고 결혼 과정을 뚝딱하려던 두 사람에게 결혼만 하면 더 이상 어머니와 이혼을 운운하지 않겠다던 세희의 아버지와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호의 서울 생활을 지원하던 어머니가 반기를 든다. 이런 식의 '동거'는 결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7년 방영된 ebs 다큐 프라임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한국의 부부를 '전통적 가족간의 결합'과 '개인의 자유로운 결합', 그 과도기에 있는 형태로 본다. 즉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연애에서 결혼으로 가는 과정에는 '가족'이라는 제도의 체계적 결합이 필수적이라는데 있다. 대부분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결혼 후의 집이라던가 결혼식 과정에서의 비용 면에서 부모들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결혼은 그저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결합으로 여겨지며, 그 과정에서 양가 간의 경제적 균형에서 비롯된 갈등이 비일비재하게 속출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거기에 결혼식 자체도 부모 세대는 물론 결혼 당사자에게도 그간 자신이 다른 친지들의 결혼식에 낸 '부주'의 수확 과정이라 여겨지는 게 오늘날의 결혼이다. 

다시 드라마로 와서 세희와 지호는 '결혼'이라는 면피를 통해 그들의 동거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들이 사는 21세기의 '결혼'이라는 통과 의례의 '난코스'를 본의 아니게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들의 상견레와, 결혼식을 통해, '우리'라는 확대 가족의 범주에 자신들을 끼워넣게 되어버리고 만다. 그 과정은 코피를 쏟을 정도로 번거로운 과정임과 동시에,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의 정을 다시금 깨닫는 여전한 가족의 울타리를 확인하는 시간이요, 그런가 하면 그저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형식의 '중력'을 깨뜨리는 본의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 탄생 순간으로 드라마는 기록한다. 

가장 현실적인 이해 관계로 함께 한 두 사람이 가장 운명적인 제도 결혼을 통해 드러내는 한국의 여전히 강고한 가족 제도는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하 이번 생)>을 회수를 건너 탱자의 정체성을 실감나게 살린다. 그리고 이 본의아니게 이번 생 처음으로 '우리'가 되어버린 세희와 지호가 겪어갈 해프닝이 이 드라마의 다음 관전 포인트가 된다. 



원석과 호랑의 결혼에 대한 동상이몽
<이번 생>의 한국적 정체성을 더해주는데 한 몫을 하는 건 지호의 친구 호랑과 수지이다. 그 중에서도 허무맹랑하게도 아직도 21세기에도 현모양처를  꿈꾸지는 현실은 옥탑방에서 동거를 하는 수지의 '결혼에 대한 로망'을 또 다른 각도에서 결혼에 대한 이 시대의 현실을 건드린다. 

이제 서른, 물론 마흔이 넘어 오십이 되어서도 임신이 가능하다지만 일찌기 고등학교 시절부터 결혼하여 알콩달콩 깨가 쏟아지도록 살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픈 호랑에게 서른은 마치 마지노선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호랑의 조바심에 동거남 원석(김민석 분)은 철이 없는 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동문서답만 한다. 프로포즈를 원한 호랑에게 신혼집에 들여놓을 소파를 몇 개월 할부로 옥탑방에 들여놓는 식이다. 

하지만 원석의 입장은 현실적이다. 앱 개발을 하는 중 투자도 못받아 전전긍긍하는 그에게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일은 하늘의 별과도 같이 먼 미래의 이야기다. 호랑을 사랑하지만, 결혼은 그에겐 사랑과는 별개의 '책임'이란 무게를 더한 다른 범주의 문제가 된다. 

어쩌면 호랑과 원석의 갈등이야말로, 세희-지호 커플보다 조금 더 현실에 한발을 들여놓은 에피소드가 될 수도 있다. 계약이 진짜 가족간의 결합이 되어버린 세희와 지호의 결혼 과정에서 세희의 번듯한 직장과 집이 중요한 관건이 되었다는 건 이미 드라마를 통해 짚어진 바 있으니까. 그런데 미래가 불투명한 옥탑방 앱 개발자에게 결혼이란 '무책임'이라기보다 오히려 '책임감'있는 소신이 되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결혼도, 연애도 사치, 우선은 직장에서 살아남기가 먼저인 수지 
어쩌면 호랑과 지호를 만날 때마다 가장 넉넉하게 그녀들의 지원군이 되어주는 수지야 말로, 가장 그녀들 중에 '여유'가 없는 형편일 지도 모른다.  그래도 작가라는 꿈을 꾸었던 지호와, 여전히 결혼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호랑과 달리, 수지는 일찌감치 'ceo'라는 꿈을 접은 채 대기업에서 여성으로 살아남기에 매진하는 중이니까. 

남들이 보기엔 그럴 듯한 직장의 대리지만, 수시로 치고 들어오는 직장 동료들의 성희롱 발언들도 유들유들하게 웃어 넘기고, 친구들과 모처럼 노래방에 갔다가도 직장 일로 부리나케 출동해야 하는,  남자는 그저 '성욕'의 대상일 뿐, 사랑 따위 사치가 여기는 수지야 말로 이 시대의 또 다른 청춘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7. 10. 25. 15:05

영화는 불에 탄 여성, 그리고 그 여성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눈빛의 남성,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집에서 부터 시작된다. 화재로 인해 전소가 된 그곳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회복'되어져 가고, 그곳에서 한 여성(제니퍼 로렌스 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옆의 잠자리의 남편을 찾던 그녀는 남편의 흔적을 찾아 온 집안을 헤매고 현관 앞에서 홀로 자신의 시간을 갖던 남편(하비에르 바르뎀 분)을 조우한다.


부부는 무엇으로 사는가? 
1969년 생의 하비에르 바르뎀과 1990년생의 제니퍼 로렌스가 분한, 이 '세월'을 초월한, 그래서 이 집을 방문한 이들이 '아버지'와 '딸'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 부부가 이 집의 주인들이다. 그리고 이 세월을 건너뛴 듯한 오묘한 부부의 조합이 영화 초반 보여진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장면과 함께 영화 <마더>의 거대한 복선이 된다. 

하지만 이 보다 더한 복선은 이 영화가 <블랙 스완>의 대런 아르노프스키 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 아닐까? 한 줄의 시를 만들어 내기 위해 고심하는 남편, 그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화재가 났던 집의 복구에 헌신하는 아내의 평온한 일상, 하지만 이미 대런 감독이 뉴욕 발레계를 배경으로 '성공'의 세계관을 내면화하여 그로 인해 자신을 '파괴'해 가는 한 여성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과 그 여성을 가혹하게 혹은 소모적으로 소용하는 예술 감독 토마스 리로이(뱅상 카셀 분)의 <블랙 스완>을 기억한다면 이미 그 자체로 <마더> 속 평온한 부부의 일상은 불온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스럴러 아니 그 보다는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외딴 곳의 이 집에 불현듯 찾아온 낯선 중년의 남성(에드 해리스 분), 이 이방인에 대해 경계를 가지는 아내와 달리 그가 자신의 시를 알고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은 방을 내주고, 과음으로 인해 몸을 추스리는 못하는 그의 시중을 드는 등 과도한 '환대'를 한다. 아내는 남편과 자신이 이룬 평화로운 가정의 일상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만, 남편은 마치 그런 아내가 지켜내려 했던 평화로운 일상이 그의 써지지 않는 시에 대한 강제라도 되었던 양 이 일상을 깨뜨리는 혼란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아니 보다 솔직하게는 아내와의 평화로운 일상에서 한 줄도 써지지 않던 시가 이 낯선 손님의 '파격'을 통해 '구원'받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손님'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들들의 '다짜고짜'식의 방문, 그리고 뜻밖의 사고는 이 집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조차 모호하게 이 '가정'을 '공용'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어준 남편과 달리 그 속에서 아내는 혼돈스러워하며 '가정'을 지키려 한다. 



남편의 시, 그리고 아내의 가정
<블랙 스완>에서도 그랬듯이 대런 감독은 <마더>에서도 '현모양처'처럼 순종하며 남편의 처분을 바라는 아내에 대비하여 방문객의 아내(미셀 파이퍼 분)를 등장시킨다. 마치 시바 여신처럼 관능적이고 파괴적인 그녀는 그녀의 '편애'로 말미암아 두 아들을 파멸로 이끌고, 그들이 방문한 집마저 난장판으로 만들고야 마는 그 장례식의 순간까지도 모성의 주도권을 놓지 않는다. <블랙 스완>에서 화이트 스완이었던 나나가 변모하듯이, '현모양처'로 처분만 기다리던 아내는 그 자신의 집을 흔들어 놓았던 그 '모성'에 충동을 받아, 남편을 도발하고 '잉태'를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외부인을 통해 자신의 시를 길어올리려던 남편은 정작 '아내의 잉태'를 통해 샘솟듯 영감이 떠오르고 10년 만에 '신작'을 내놓을 수 있게 된다.

어쨋든 그 낯선 가족의 방문의 결과 '아이'를 얻고, '시'도 얻게 된 부부, 하지만 그 '영광'은 온전히 가정으로 수렴되는 대신, 남편의 분에 넘치는 명망과, 그리고 그 와중에 '가정'을 지키려는 아내와 아이의 처참한 희생을 결과한다. 

영화 속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마치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부부 관계를 보는 듯하다. 마오리 족 남자들은 170cm가 넘는 장신의 이 부족 남자들은 말과 소의 피를 먹으며 전사로써 길러지지만, 정작 그들의 일상을 채우는 건 마오리족 여성들의 '가사 노동'이다. 언젠가 일어날 지 모르는(?) 전쟁에만 대비하며 빈둥거리는 남자들과 달리, 마오리 족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 농삿일까지 전념하며 '가정'을 책임진다. 그렇게 영화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규정짓는다. 마더를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속 그녀가 엄마가 되는 건 영화가 시작되고서도 한참 지나서이다. 오히려 영화 속 마더는 남성이라는 체제의 보호자로서의 '여성'이다. 

그처럼 남편은 '시'를 위해 아내의 '사랑'을 먹으며 살아간다. 아내는 집을 손보고, 가사를 돌보며, 그를 뒷바라지한다. 그녀의 소망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낳으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지만, 그에게 가정은 그의 '시'를 잉태하는 영감이지만, 배경일 뿐, 그의 관심은 '시'를 매개로 한 세상 속 자신에게로 향한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아들을 희생하고, 결국 아내를 제물로 삼아서까지. 

평화로운 한 부부의 일상으로 시작된 영화는, 서로의 이해 관계를 달리한 부부가 잉태하여 생산한 아이와 시를 계기로 대런 감독이 생각한 '세계'에 대한 담론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가장 추상적인 인간 사고의 산물 '시'를 통해 자신을 '입신양명'하는 남편과, 가장 구체적인 인간의 생산물 '아기'를 통해 남편과 여성의 이해를 엇물린다. 

아내가 집이라는 구체적 공간, 그 속에서 이루어진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기라는 '가족' 단위에 대한 로망을 놓지 못하는 반면, '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 남편은, 그 욕망을 '전지전능한 지배욕'으로 펼쳐낸다. 일찌기 아내의 동의 없이 외부인을 기꺼이 집으로 맞이하여 '칭송'을 받았던 그는 자신의 아들조차 강탈하여 '제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욕망에 대한 화답한 바깥 세상은 그를 영감의 지도자로, 나아가 종교적 신망의 대상으로, 이 시대 인간의 정신이 낳는 모든 행태를 드러낸다. 그저 그의 시가 좋다 찾기 시작한 사람들은 극성 열혈 팬이 되었고, 영감의 교도가 되었고, 과격한 극렬 사상 집단으로 변모해 간다. 그리고 그것을 필연적으로 '테러'와 '유혈'과 '진압'을 초래한다. 

'사랑'을 기반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생산하려는 '모성성'은 철저히 '남성'의 세계 속에서 '소모'되고 '희생'된다. 하지만 감독은 영화 중후반부터 벌어지는 난장을 통해 그 '추상'과 '허명'에 집착한 남성의 세계가 도래하는 건 '폭력'밖에 없다고 일갈한다. 심지어, 안타까운 건, 그 폭력의 세계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암시하듯, 여성의 '희생'을 통해 끊임없이 '재부팅'되고 있다고 방점을 찍는다. 



인간의 역사라 쓰고 남성의 역사라 읽고팠던 대런 감독 
대런 감독의 <마더!>는 '인간의 역사'라고 쓰고 '남성의 역사'라고 읽어야 하는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 속에서 남편으로 상징되는 남자들은 <블랙 스완>의 리로이만큼이나 여성을 '소비'하고 '소모'하며 자신의 권력과 명예를 이어가고자 한다. 잠시 등장했던 미셸파이퍼의 또 다른 '마더'는 남성의 권력으로 이어진 강고한 위계 질서의 강렬하지만 또 다른 형태의 조력자일 뿐. <차이의 정치와 정의>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의 '결국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될 뿐'이라는 정의처럼. 마지막 보다 젊은 '마더'로 리뉴얼되는 아내로 마무리되며 '도식적'으로 여성을 희생양으로 폭력으로 귀결되는 남성의 역사를 '담론'화 하였다. 

<마더!>에 대한 호불호는 이 정체모를 영화가 나아가는 궤적에 대한 이해와 대런 감독이 펼쳐보이는 상징적이면서도 도식적인 담론이 21세기에도 유효한가에 대한 공감 여부로 귀결될 것이다. 한 성에 의한 일방적인 또 다른 성에 대한 지배의 역사로 규정지어진 역사로 상징되는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남성과 여성에 대한 '규정적 역할론'에 매몰되어 있다. '지배'와 '억압'으로 도식화한 인간의 역사는 지난 세기까지는 충분히 그런 성역할로 규정받을 수 있다지만, 21세기의 담론으로 등장한 이 영화는 과연 21세기에도 그 성적 역할론이 여전히 유효한가 라는 질문을 남긴다. 그러기에 오히려 차별의 역사를 논하고자 하는 바가 남성과 여성을 '본투비 외향적 남성성'과 '본투비 사랑순종주의의 여성성'으로 규정하는 역설적 차별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와 억압의 도식이 낳은 자충수이다. 




by meditator 2017. 10. 24. 15:42

지난 10월 10일자 오마이 스타 < 스크린 독과점 그 너머의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를 보면 '일부 대형 배급사들이 실패 위협을 낮추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스크린을 독점하고, 유통에 개입했지만 최근 2년간 성공률이 현저히 낮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지난 10년의 기간을 돌아보면 여전히 대형 배급사의 흥행률은 실패율보다 3,4배 높다. 그러나, 이건 글에서도 나타나다시피 독점하고 유통에 개입한 경우에 한해서이다. 독점과 유통의 빛을 받지 못한 중소 규모의 영화들의 경우 '손익분기점'을 넘기란 점점 하늘의 별 따기가 되어가고 있다. <대립군>, <비밀은 없다>, <조작된 도시>, <마담 뺑덕> 등의 우리 영화들은 그 '손익분기점'의 턱걸이를 넘지 못한 채 사라졌다. 흥행을 담보해내지 못한 감독들에게 '차기작'의 기회는 더더욱 하늘의 별따기가 된다. 때로는 그래서 첫 데뷔작이 은퇴작이 된 감독들도 많다. 대기업 중심, 대박아니면 쪽박의 한국 영화 시장에서 '중견' 감독이 꼭 다음 작품을 보장받기란 점점 어려워지는 구조가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극장 흥행과는 또 다른 문화적 트렌드가 등장하고 있다. 예전에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는 명절 특선 영화로나 만나야 하던 시절은 이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가 되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어둠의 경로'를 비롯하여, 핸드폰, 인터넷 등의 다양한 수단으로 영화를 접하는 세상이다. 더구나 이동하는 혹은 잠시 틈을 타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짧은 시간을 활용한 '웹툰'이나, '동영상' '웹드라마'의 인기는 미디어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변화하는 트렌드, 감독들을 예능으로 모이게 하다 
그런 변화하는 영화 콘텐츠의 흐름을 jtbc의 <전체 관람가>가 발빠르게 '예능'으로 흡수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아직까지는' 가장 영향력이 크다 자부하는 두 매체, 영화와 예능' 두 장르의 콜라보 예능이 탄생한 것이다. 

한 시대의 획을 그은 감독들, 그의 이름은 낯설어도 그의 대표작을 들면 영화 좀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감독들이 <전체 관람가> 스튜디오에 모였다. <인정사정 볼 것없다>의 이명세 감독, <웰컴 투 동막골>의 박광현 감독, <말아톤>의 정윤철 감독, <남극 일기>의 임필성 감독, <미스 홍당무>의 이경미 감독, <남자 사용 설명서>의 이원석 감독,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봉만대 감독, <계춘 할망>의 창감독,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한국 영화계에서 내노라하는 대표작을 가진 감독들이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작이 부진하거나, 최근작을 만나보기 힘든 감독들이다. 

이들을 모아놓고 제작진은 mc 윤종신, 김구라, 문소리를 내세워 '신나리' 프로덕션을 만들고, 제작비 3000마원, 12분 내외의, 2017년을 대표할 키워드를 내세운 '단편 영화 제작'을 제작할 것을 주문한다. 전체적인 모양새는 영화 제작이다. 하지만, <전체 관람가>는 말 그대로 예능과 영화의 콜라보, 하지만 엄밀하게 분류로 보면 '예능'이다. 

첫 회 한 자리에 모인 늘 카메라 바깥에서 지시를 하다 카메라 프레임에 들어와 어색해 하는 감독들의 만남에서 부터, 스튜디오에 모인 감독들의 입담과 영화 제작 순서와 제작 과정을 '현미경'처럼 들여다 보며 '예능의 형식'으로 담아낸다. 첫 영화는 정윤철 감독의 <아버지의 검>이지만, 그 영화를 만나기 위해서는 1회와 2회를 다 보고 마지막 20분전까지 기다려야 한다. 대신 그 시간을 채운 건, 감독들과 mc진의 토크와, 짧은 시간, 부족한 제작비를 두고 그럼에도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감독, 배우, 제작진의 '리얼 버라이어티 '이다. 

<전체 관람가>는 자칭 블록버스터 콜라보 예능이란 명칭에 어울릴 만큼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감독들의 만남, 그리고 영화 제작기는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관찰' 예능의 형식을 담아낸다. 촉박한 시간, 정윤철 감독 제작부의 표현대로 '즉흥 환상곡'처럼 변수를 만들어 내는 제작 현장, 그 속에서 '창작'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고 가는 감독, 배우, 제작진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새로운 관찰 예능이다. 첫 방송 후 영화 보다 재밌는 감독들이란 '아이러니한 평가(?)를 받았던 스튜디오 녹화는 그 자체로 '토크쇼'로서의 맛깔나는 성찬이었다. 열 명의 개성 강한 감독들과, 그들과 한 배를 탄 배우 문소리, 영화에 대해 안목이 있는 중견 mc 윤종신과 김구라의 조합은 그 자체로 흥미를 자아냈다. 

그런가 하면 영화 제작에 있어 필수 요건으로 제시된 신인 배우 출연은 그 과정에서 이 프로그램을 위한 신인 배우 오디션에서 부터, 출연기까지 또 한편의 오디션 프로그램 형식을 띤다. 그리고 방송을 통한 영화 개봉 이전에 미리 온라인 시사회 관객단 100명을 통한 사전 시사 프로그램과 그 댓글의 공개나, 영화 사후 동료 감독들의 평가는 최근 등장한 상호 교감 방송의 또 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 



화룡점정을으로서의 영화(?), 그 첫 번째 정윤철의 <아버지의 검> 
이 처럼 <전체 관람가>는 예능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다 구비하며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예능의 콜라보를 내세운 하지만 결국은 '중견 감독들이 만드는 단편 영화'라는 신선한 시도로 '호객'한 이 프로그램의 절정은 '영화'가 된다. 

그리고 그 첫 영화 신윤철 감독의 <아버지의 검>이 10월 22일 오랜 기다리 끝에 방영되었다. 과연 정윤철 감독의 영화는 토크와 메이킹을 뛰어넘어, '영화'프로그램으로서 위신을 지켜냈을까? 댓글 창의 호평과 달리, 이명세 감독은 메이킹을 본 기대에 비해 영화의 만듬새의 아쉬움을 지적했다. 하지만 이명세 감독의 표현처럼 '영화는 한 방이다'란 말에 걸맞게 동료 감독들의 찬사를 받으며 12씬 165컷, 1759 테이크를 밤을 세어가며 '전광석화'처럼 만들어 낸 <아버지의 검>은 실사 영화와 게임의 절묘한 콜라보를 이룬 절정으로 이 프로그램의 가치를 증명해 내었다. 

적은 제작비, 짧은 시간 동안 중견 감독이 만들어 낼 영화는 어떤 것이어야 했을까? <좋지 아니한가(2007)>, <말아톤(2005)>, <대립군(2017)>을 통해 '드라마틱한 서사'를 통한 '성장'에 능했던 정감독은 예의 자신의 장점을 살려 '왕따' 문제를 영화화했다. 하지만, 그 장점에 더해, 단편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실험적 도전'으로 게임과의 콜라보를 시도한다. 왕따를 당하는 중학생 소년, 그에게 학교 폭력을 가하는 무리들은 게임 머니 충천을 요구한다. 하지만 돈이 없어 가해에 무기력하게 당할 수 밖에 없는 소년, 그의 좌절에 아버지가 쓰러지신 사고는 더 절망으로 그를 이끈다. 이 '평범한 클리셰'에 반전은 아버지의 병실을 찾아온 아버지를 '군주'라 부르며 흠모하는 사람들. 일상 생활에서는 존재감이 없던 아버지이지만 게임 속 '최 게바라'로 여러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악의 무리에 대항하여 전쟁의 승리를 이끈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이 '황당무개'한 설정을 이희준, 구혜선 등의 진지한 연기를 통해  정윤철 감독은 '현실'과 '게임'의 세계를 이으며 <좋지 아니한가>처럼 '역설'의 존재론을 설득해 낸다. 그리고 마치 포켓몬 고처럼 가상과 현실을 이은 영화는 지리산까지 찾아가 아버지의 검을 획득해낸 소년이 스스로 왕따의 굴레에서 벗어나 '최게바라 '아버지를 만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왕따, 가장의 죽음이라는 현실적 소재는 '게임', '가상 공간 속 관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또 다른 의미를 짚는다. 그리고 이런 파격적 정의야 말로 , 12분의 한계 속에 적은 예산의 단편 영화이기에, 가능한 시도이고, 그걸 정윤철 감독은 첫 영화로 스타트를 끊으며 프로그램의 가치를 높인다. 





남겨진 과제
가치의 증명에도 불구하고, 이제 2회를 마친 <전체 관람가>는 숙제를 남긴다. 새로운 콘텐츠 환경에 대한 시도라는 점에서 획기적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영화와 예능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어 갈 것인가의 과제는 내내 남을 것이다. 이미 초창기 jtbc가 단편 영화 제작을 예능으로 담으려 시도했던 바의 연장 선상에 있는 이 프로그램은 과연 그때의 신인, 혹은 일반 감독들과 이제 중견 감독으로의 차별성 속에서 '단편 영화'의 부흥에 기여할 것인가가 궁극의 과제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영화'가 재밌어야 하는데, 과연 예능보다 재밌는, 혹은 화제성있는 영화의 탄생기가 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또한 이 프로그램과 관련 구혜선 등의 재능 기부가 화제가 되었듯이 3천만원의 제작비에 감독들이 그건 솔직히 자신들에게 '출연배우들' 및 제작진들에게 '사과'와 '구걸'을 하라는 다른 말이 아니냐는 반문에서 보여지듯이, '밤샘 촬영'과 함께, 또 다른 '열정 페이'의 현장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사족으로 더해본다. 좋은 시도와 좋은 과정이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 되기를~
by meditator 2017. 10. 23. 15:36

월화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하 이번 생)>에 이어, 수목 <부암동 복수자들(이하 복수자들)>로 편제된 tvn의 주중 미니 시리즈 배치는 다분히 시청률 타깃을 의도한 편성처럼 보여진다. 월화 <이번 생>이 2,30대 청춘들을 타깃으로 한 헬조선 청춘 백서에 가깝다면, 그에 이어 바톤을 물려받은 <부암동 복수자들>은 그 이후의 중년층의 현실을 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차별적 편성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지는 모르겠지만, 어쨋든 지금의 구도는 이와 같고, 그런 타깃별 편성은 4%를 바라보는 <이번 생>에 이어, 첫 회 2.9%, 그리고 2회 그 두 배에 가까운 4.63%로 폭발적인 출발을 보인 <복수자들>로 성공적이라 점쳐진다.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가입 가구 기준)


<부암동 복수자들>은 최근 트렌드가 되고 있는 웹툰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다음 온라인 만화 대전 장려상을 수상하고 이미 웹에 게재될 당시부터 화제작이었던 이 작품은 <작업의 정석> 각본 황다은, 김이지 작가와 <골든 타임> 권석장 피디의 손을 거쳐 tvnd의 수목 드라마로 안착했다. 



같이 복수하실래요? 
제목에서 부터 '복수'라는 말로 이미 충분히 매력적(?)인 이 작품은 더구나 중년의 세 여성이 모여 각자의 복수를 함께 도모한다는 신선한 설정만으로도 솔깃해 지는 작품이다. 부암동에 있는 까페에 모인 세 여인, 그 시발점이 된 건 재계 서열 10위 건하 그룹의 딸로 역시나 재벌가의 첫째 며느리인 김정혜(이요원 분)의 '같이 복수하실래요?'라는 청에서 부터 비롯된다. 

세상에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가의 여인이 생선 장수에게 '같이 복수하실래요?'라니. 하지만 가진 게 돈 밖에 없는 정혜는 재벌가의 여인이지만, 아기도 없고, 심지어 이제 남편에게 혼외 자식이 있다는 통보까지 받은 상태이다. 남편은 미안해하기는 커녕 남편의 자식이라는 그 녀석과 희희덕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그에게 아들이 생긴다는 건 재벌가 후계 구도에서 그 누구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포기하지 못한 아기의 방은 그 듣도보도 못한 남편의 자식 방이 되어 아기 용품들이 바닥을 뒹군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다정한 부부지만, 정혜는 더는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자신처럼 '복수'가 필요한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나선다. 

그녀에 눈에 띤 첫 번 째 동지는 바로 남편과 함께 참석한 사교 모임에서 만난 이미숙(명세빈 분)이다. 이미 까페세서 정혜의 눈에 들어온 이미숙을 보고 정혜는 확신한다. 그녀가 남편에게 맞고 사는 여자라는 것을.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청한다. '함께 복수하실래요?' 그러나 순종적인 미숙에게 그런 정혜의 청은 청천벽력이다. 그러자, 안하무인 정혜는 이제 곧 교육감 선거에 나설 남편의 폭력 행사를 폭로하겠단다. 그래서 정혜는 울며 겨자먹기로 '복수자 클럽(이하 복자 클럽)'에 나섰는데, 점점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도 정혜와 미숙은 서로 모임을 통해 남편들끼리도 아는 처지라지만, 세 번 째 멤버 홍도희(라미란 분)의 등장은 생뚱맞다. 교통사고 가해자와 피해자로 만날 뻔한 두 사람은, 그 대가로 차를 태워주고, '홍도 생선'이라 불러주며 인연의 끈을 맺기 시작했다. 아들의 학교 폭력 사건을 계기로 애를 태우는 홍도희에게 '복수 클럽'은 동앗줄과도 같았으며, 화끈하고 통이 큰 도희는 곧 정혜와 미숙의 언니처럼 이들을 품으며 격이 다른 삶에도 불구하고 함께 클럽 멤버가 된다. 

그리고 3회, 주부만이 이 클럽의 멤버가 될 수 있다는 정혜의 냉정한 배척에도 끊임없이 주변을 멤돌던 유일한 청일점 이수겸(준 분)이 복자 클럽 제 4의 멤버가 되었다. 정혜와는 남편이 데리고 들어온 굴러들어온 돌멩이 같던 녀석이었지만, 처음부터 정혜에게 호의적이었던 수겸은, 자신 역시 그 나이 되도록 코끝 한번 비추지 않았던, 오로지 돈과 승계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는 친부모들을 향한 복수라는 취지에서 복자 클럽의 멤버가 되기를 '고소원'한다. 그리고 도희 딸에게 성추행과 보복 행위를 가하는 교장을 향한 복수를 성공시키며 '복자 클럽'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합류한다. 



'가부장제'에 대항한 '복수'
재벌가의 맏며느리와, 교육감 아내, 생선 가게 아줌마, 그리고 재벌가의 혼외 자식, 이들 네 사람을 엮이게 만들어 준 복수의 교감은 무엇이었을까? 그저 누군가에게 '복수'를 하고 싶어서?

물론 네 사람 모두 '복수'를 하고 싶은 건 맞지만 이 이질적인 네 사람을 묶어주는 건 '가부장제'의 공고하고도 거대한 위계이다. 재벌가의 맏며느리이지만 가문을 승계한 아들을 낳지 못해 혼외자식을 들이는 일조차 '통보'를 받는 굴욕을 겪어야 하는 정혜.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재벌가의 아들로 입성하게 된 수겸은 바로 그 재벌가라는 가문으로 윤색된 가부장제의 '희생양'들이다. 번듯한 교육감 후보의 아내 미숙이지만 술만 먹으면 돌변하는 남편에게 학대당해 그의 손길 한번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녀에게 돈과 명예로 휘감은 '가부장'의 권력이이 힘없는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인 '가해자'이라는 건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하지만 도희에겐 '가부장'이 없지 않냐고? 아니 도희에게 '남편'이 없다는 건, 바로 그 남자로 이어지는 가부장제의 조직에서 '도희'와 그녀가 보호해야 할 자녀들은 이미 '루저'라는 증거가 된다. 아버지가 없다고, 엄마가 생선 장수를 한다고 돈이 없고, 기댈 언덕이 없다고 같은 학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다 참다 못해 밀친 동희 아들 희수의 '자기 방어적 행동'이 '학폭위(학교 폭력 위원회)'의 가해자로 돌변하는 상황이나, 기간제 교사로 들어간 딸이 학교의 윗어른(?)인 교장에게 당하는 성추행은 '가부장제'적 모순의 현실태이다. 

혼외 자식의 입성에 입을 다물어야 하는 정혜, 그리고 가정 폭력에 무방비한 미숙, 그리고 뻔히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 엄마 앞에서 무릎까지 끓어야 하는 도희는 남성 권력으로 체계화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왜소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도 남는다. 그러기에 그녀들은 각자의 힘으로 돌파해 나갈 수 없는 이 '거대한' 권력 앞에서 '소심하게나마' 복수를 꿈꾸며 모여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아픔을, 고통을 그녀들의 계급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피해자 여성이기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에 서슴치않고 '동지'로 뭉칠 수 있었다. '돈'과 사회적 지위를 앞선 고통과 공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의 복수가 드라마로서 '공감대'를 얻고 있는 건,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상당수가 이런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비록 아직은 '복수'를 꿈꾸지만, 그 '복수'의 의도보다는 헛발질이 더 많은 그녀들의 복수, 그래서 더 공감이 가는 부암동 복수 클럽의 '전도양양한' 복수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by meditator 2017. 10. 19. 05:46

9시 30분으로 자리를 옮긴 tvn의 월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이하 이번 생)>는 2. 023 %로 첫 방송을 시작한 이래 4회 3.841%까지 상승하며 월화 드라마의 자리를 안착시켰다. 하지만 상승하는 시청률과는 별개로 매회 <이번 생>을 보는 마음은 편치만은 않다. 


그건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이민기의 군 복무 중 논란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혐의를 벗은 배우의 방송 출연 여부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이제 와 발목 잡기일 뿐이니. 그 보다 정작 베일을 벗은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건 <이번 생> 드라마와 2016년 tbs에서 방영하여 20%가 넘는 화제작이었던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逃げるのは恥ずかしいけど役に(이하 니게하지)>와의 유사성이다. 



<이번 생>과 <니게하지>, 그 미묘하게도 같은
38세의 가구주 웹 디자이너 남세희(이민기 분)와 그가 여성인 줄 알고 그의 집에 세입자로 들어오게 된 30세의 윤지호(정소민 분)은 집에서 결혼 독촉에 시달리는 남세희의 상황과 집도, 일도 다 잃은 채 고향 남해로 돌아갈 처지에 놓인 윤지호의 이해가 맞물리며 4회 드디어 계약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계약 결혼 스토리는 이제는 그리 낯설지 않은 서사이지만, 일드 <니게하지>에서 역시나 비슷한 시스템 엔지니어라는 첨단 직종에 프로 독신남 히라마사(호시노 겐 분)가 아버지의 권유로 그의 집에 '가정 도우미'로 들어온 미쿠리(아라가키 유이 분)와 엮이게 되고 집의 이사로 그에게 계약 결혼을 권한 미쿠리의 요구를 냉철하게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손해날 것이 없다며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본 사람이라면 그 다르지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을 듯하다. 

특히나, 두 드라마의 공감이 기초하는 곳은 바로 사회에서 도태되어 버린 여주인공의 처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25세 파견 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보다 전문적인 일을 찾아 임상 심리 대학원까지 진학하지만 문과 계열 그녀에겐 취업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집에서 놀고 있는 그녀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자신의 지인인 히라마사 집에 가정 도우미 알바를 권하게 되는 것으로 두 사람의 만남은 시작된다. 물론 <이번 생>의 윤지호의 서사는 전혀 다르다. 30살, 서울대 국문과까지 나왔지만, 현실은 보조 작가, 이번에는 입봉을 하려나 했지만 그녀가 맞닦뜨린 현실은 기존 작가에 의한 원작을 알아볼 수 없는 정도의 '윤문'과 작업실을 빌려준 피디의 성폭행 시도, 결국 윤지호는 집도 절도 없이, 심지어 자신이 하고자 했던 글 쓰는 일조차 포기하며 10년 여의 서울 생활을 정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이렇듯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르지만, 문과 출신의 여성이 자신의 꿈은 커녕 사회에 발 붙이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남자 주인공과의 만남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 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 tvn 측은 불거진 표절 시비와 관련하여, '리메이크도 표절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지만, 두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과연 <니게하지>가 없었다면 <이번 생>이란 드라마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기에 더욱 <이번 생>의 입장이 아쉽다. 

더욱이 의심이 깊어지는 건, <이번 생>의 윤난중 작가에게 이와 같은 일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직장의 신(2013)> 역시 2009년 연습 삼아 일본 드라마를 각색했다 이후 판권을 사서 드라마화 전례가 있으며,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달팽이 고시원>은 소설<와세다 1.5평 청춘기>, <위대한 계춘빈>은 역시나 소설 <공중 그네>와의 유사성 논란이 이어졌던 바 있다. 그런 면에서 차라리 <이번 생>이 일본 드라마 <니게하지>를 <직장의 신>처럼 판권을 사서 각색했더라면 가감없는 호평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 행보가 더욱 아쉽다.  



표절이라기엔 너무도 현실적인 <이번 생>
물론 표절이라 하기엔 <이번 생>의 이야기는 다르게 진행된다. <니게 하지>가 자신의 필요를 알아주는 남자 주인공에게 여자 주인공이 먼저 계약 결혼을 요구하는 것과 반대다. <이번 생>은 결혼 독촉에 시달리던 남세희가 지금까지 자신의 집에 들어온 세입자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분리 수거라던가 청소라던가, 고양이 돌보기같은 일을 완벽하게 해낼 뿐 아니라, 해외 축구를 좋아하는 취향까지 비슷한 윤지호라면 가장 완벽한 '결혼 상대자'가 될 것이란 생각에서 먼저 계약 결혼을 제시한다. 

수지타산을 맞춰보니 가장 적합한 결혼 상대자일 거라는 남세희의 청혼에 윤지호가 응답을 한 건, 바로 이 시대 청춘의 응답이기도 하다. <이번 생>에는 일드와 달리 윤지호를 비롯하여 다른 두 명의 동년배 여성 양호랑(김가은 분), 우수지(이솜 분), 세 명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친구이지만 각자 전업주부, 사장, 그리고 작가의 꿈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제 서른 줄의 그녀들은 결혼이 늦어져 임신조차 못할 지도 모른다는 기약할 수 없는 동거, 사장 대신 사장님의 호출이라면 언제든 달려가야 하는 대기업 대리, 그리고 연애 따위 사랑 따위조차 사치로 여기며 방 한 칸을 위해 계약 결혼을 감행하는 처지에 놓여있다. 

전업 주부에 럭셔리 현모양처가 꿈인 호랑의 꿈이 허무맹랑해 보이듯, 오히려 <이번 생>의 결혼이란 제도 자체가 빗나간 전통의 강제일 뿐, 비효율적이며, 비인권적이라는 남세희와 우수지의 '비혼주의'가 공감되는 지점, 그리고 이번 생에 연애는 개뿔, 차라리 방 한 칸이 현실적이라는 윤지호의 선택이 호소력을 얻는 그 현실적 묘사가, <직장의 신>에 이어 다시 한번 3포시대 시청자들에게 설득력을 얻으며 <이번 생>의 시청률에 청신호가 되고 있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7. 10. 18. 14:30

최근 송승헌의 행보가 심상찮다. 그저 번듯한 외모를 앞세워 '치명적 멜로'의 단골이었던 이 '미남 스타'는 주춤했던 행보를 건너고 이영애와 함께 한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만 해도 예의 캐릭터를 답보하는가 싶더니, 영화 <김창수>에서 고문을 일삼는 악랄한 감옥 소장으로, 이제 드라마 <블랙>에서는 '바바리맨' 스타일의 안하무인 저승 사자에서 시체만 보면 토해대는 어수룩한 초년 형사까지 다양한 캐릭터로 자신의 연기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하지만 <블랙>을 그저 새로운 송승헌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준 작품이라는 수식어로만 설명하면 아쉽다. 오히려, 그런 송승헌을 가능케 해준, 두 사람 최란 작가와 김홍선 감독을 빼놓은 <블랙>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 최란과 <보이스> 김홍선의 콜라보, 거기에 화룡점정 송승헌 
그러고 보면 송승헌이 처음은 아니다. 김홍선 감독의 전작 <보이스> 역시 익숙한 연기로 고전하던 장혁에게 오히려 그 익숙함을 극대화시킨 '미친 개'라는 '추노' 대길에 이은 새로운 닉네임을 선사하며 중견 배우의 영역 확장을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장혁만큼 그 '트레이드 마크'에 갇혀있던 송승헌에게 <블랙>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최란 작가 역시 이제는 황시목이 된 조승우에게 고전했던 <마의>이후 다시 드라마를 할 의욕을 불러일으킨 '기동찬'의 캐릭터를 선물한 <신의 선물> 작가이다. 

하지만 김홍선 감독과 최란 작가를 그저 배우를 다시 새롭게 탄생시키는 콤비로만 규정하는 건 아쉽다. tvn에 이어 ocn에서 김홍선 감독이 선보인 <라이어 게임(2014)>, <피리부는 사나이(2015)>, <보이스(2016)>는 100억원을 놓고 겨루는 생존 게임, 인질극과 위기 협상팀의 일촉즉발 협상극, 그리고 범죄 현장 112를 배경으로 범죄의 골든 타임 수사극에 이르기까지 신선한 소재와 구성으로 장르물의 신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비록 마무리는 아쉬웠지만 매회 시청자들에게 롤러코스터를 선물했던 독특한 장르물 <신의 선물-14일>의 최란 작가와 만났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송승헌의 출연 이전에 이미 <블랙>은 기대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화제의 감독과 작가, 그리고 스타 배우까지 얹힌 <블랙>의 서장은 어땠을까? 생과 사의 미스터리를 화두로 삼았던 <신의 선물-14일>의 최란 작가답게 이번에도 드라마에는 '죽음'의 기운이 뻗친다. 범죄 현장의 시체만 보면 토해대기가 바쁜 신참 형사, 조폭들 앞에서 기를 못쓰는 '형사'라는 직업이 안어울려 보이는 어수룩한 한무강이 송승헌이 첫 회에 선보인 캐릭터이다. 그런 그가 햄버거 집에서 우연히 선글라스를 쓴 하람(고아라 분)을 만나게 되고, 죽음을 보는 자신의 능력을 저주라 믿는 하람에게 '축복'이라는 선의를 던진 바람에 그녀와 함께 '죽음'을 구하는 길에 나선다. 
하지만 인질극 현장에서 죽을 운명의 사람을 구했다는 기쁨도 잠시, 역시 운명을 거스를 순 없는 것이었을까? 그 자리에 대신 나간 한무강이 총을 맞고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과 함께 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될 뻔한 1회, 한무강의 시체가 누워있는 영안실에 잠입한 킬러는 그의 머리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려 하고, 뜻밖에도 그 손을 잡아챈 건 죽은 줄 알았던 한무강, 그렇게 1회는 반전의 결말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2회를 열고보니, 살아난 사람(?)이 그 한무강이 아니었다는 것이 진짜 반전이다. 시체를 보면 토하던 한무강은 온데간데 없이 시체를 들척이며 초짜 형사의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시체의 사인을 척척 알아맞추는가 하면, 1편에서 한무강을 꼼짝못하게 하던 조폭들을 혼자의 힘으로 제압해 버린다. 게다가 마치 '인간 세상'에 처음 온 신처럼 '인간들'을 낮잡아보며 바바리맨 차림에 아래를 훤히 내놓는 걸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가 하면, 장농이고 드레스룸이건 문만 열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무언가를 찾는 듯한 새 무강의 행보는 1편의 한무강과 극과 극이기에 더욱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죽음의 사자, 능력자 여주인공, 그리고 과거의 사건, 익숙하되 신선한 조합
이렇게 배우 송승헌을 앞세원 한무강의 양 극단 캐릭터가 1회의 씨줄이었다면, 그 날줄은 죽음을 보는 능력으로 인해 자꾸 죽음과 엮이는 하람의 바람잘 날 없는 인생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나타난 죽음의 그림자를 보고도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어머니에게 그 주둥이를 꼬매고 다니라는 막말을 듣는 이 소녀는 선글라스를 벗을 때마다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친다. 어린 시절 그리고 지금의 무강으로 인해 용기 백배하여 세상에 나서기가 무섭게, 이제 달라진 무강과 엮이며 그녀의 죽음을 보는 능력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2회의 마지막, 빗속을 거닐어 집으로 돌아온 무강과 그 무강에게 너는 이미 죽었다는 무강의 몸을 빌은 검은 옷의 인물을 대치시키며, 두 무강의 존재로 인한 흥미를 극대화시킨다. 하지만, 무강의 두 캐릭터 이전에, 전혀 형사스럽지 않지만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막내 형사가 되어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도 97년 무진 주택 화제 사건을 뒤쫓던 한무강과 알고보니 무강이 찾던 그 의문의 여중생이 지금의 약혼자라는 미스터리에 숨겨진 음모는 <블랙>의 또 다른 밑그림이다.
그리고 거기에 얽혀든 어린 시절 무강과 하람의 인연, 그리고 하람의 비극적 가족사와 능력. 드라마는 마치 페스트리처럼 켜켜이 복선과 복선을 쌓으며 저마다 빛나는 구슬처럼 사건과 캐릭터를 나열한다. 

그래서일까? 너무 많은 구슬같은 이야기들은 아직 엮어지지 않은 티를 내며 각각 굴러다니기도 한다. 1,2회 나열한 구슬들은 저마다 흥미를 가지로 굴러다니지만 드라마의 초반이기에 우려보다는 기대가 크다. 거기에 새로운 면모의 송승현을 발견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마지막 장면의 김태우는 그 한 장면만으로도 다음 회를 기약하게 만든다. 죽음의 사자를 내세운 드라마가 처음은 아니고, 과거의 사건을 현재와 다른 드라마 역시 처음은 아니지만, 적어도 <블랙>은 이 낯설지 않은 제재들을 신선하게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성과를 거둔다. 과연 이게 '편집'의 미숙인지, 과유불급인지 그 답은 결국 '다음 기회'로  남겨진다. 
by meditator 2017. 10. 16. 16:14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이 정의가 가족보다 더 어울리는게 있을까? 일찌기 레오 톨스토이는 그의 명작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르다'라 했다. 그 '가정', 혹은 '가족'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마도 그건, 각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바 '가족' 혹은 '가족 구성원'에게 성문법이 아니지만, 성문법만큼 강고하게 강제되는 역할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20세기를 지나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 가족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현모양처'로서의 어머니, 그리고 그에 부응하여 '공부 잘 해서 입신양명에 애쓰는 말 잘 듣는 자식들'일 것이다. 10월 15일 방영된, <나쁜 가족들>은 제목 그대로, 바로 이 역할에 가장 '나쁜 케이스'의 집합체가 등장한다.

이 작품은 <드라마 스페셜>의 명작으로 회자되는 <빨간 선생님>, <개인주의자 지영씨>의 신작이다. 85년을 배경으로 선생님과 제자의 갈등을 시대적 유감으로 풀어낸 <빨간 선생님>이나, 오피스텔의 '개인주의'를 현대 사회 고립된 개인의 뿌리깊은 사연으로 풀어낸 작품들처럼, 역시나 만만치 않은 사연을 그러나 그저 무겁지만 않게 그려낸다.




이보다 더 나쁠 수 없는 가족
시작은 지금부터터 6년 전, 이제 갓 청소년이 된 나나(홍서영 분)네 가족에게 생긴 일로부터 시작된다. 아빠와 엄마, 그리고 나나는 군대를 다 마치치 못하고 오빠 민국(송지호 분)을 데리러 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엄마와 아빠의 '부부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김정국(이준혁 분)씨와 박명화(신은경 분)씨는 미로에 빠지고 만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온 오빠, 그 오빠를 물고빨고 하는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질색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오빠, 그리고 그저 난처해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가족들.

그리고 6년 후, 다시 가족은 나나의 자퇴 문제로 한 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모인 곳이 뜻밖에도 경찰서다. 도망치는 나나의 머리끄댕이를 잡다 청소년 학대 혐의로 온 가족이 호출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가족 가관이다. 담임 선생님이 나나의 자퇴를 의논하고자 전화를 건 순간 아버지 김정국 씨는 '노조 투쟁'을 하느라 아니, 딸이라도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결정하라며 전화를 끊는다. 딸의 머리 끄댕이를 잡으며, 딸의 남친에게 돈을 주면서까지 이별을 회유하며 적극적인 엄마는 뜻밖에도 호시탐탐 바람한번 펴보는 게 소원인 막장 엄마다. 심지어 경찰서를 찾아온 나나를 보호해야 할 담임이 바로 전날 엄마랑 은밀한 문자를 오가던 그 문제의 남자(?)다. 오빠는 다를까? 할머니만 오면 줄행랑을 치는 오빠는 '의가사 제대' 이후 무의도식의 경지에 빠져있다.

말 안듣는 제자와 선생님의 갈등을 '시대의 풍경'으로 풀어낸 <빨간 선생님>처럼, <나쁜 가족들>은 해체 일보 직전의 가족들을 내세우며 21세기 가족의 현실을 짚어간다. 가장이어야 할 아버지 김정국씨는 홀어머니의 지극한 편애의 반발로 '가장'임을 방기한 채, 노조 활동에 매몰된다. 학창 시절 사고를 쳐서 엄마가 되어버린 박명화씨 역시 굴레다. 청소년 시절 사고쳐서 엄마가 된 그녀에겐 '연애'라 쓰고, '다른 남자랑 한번 자보는 게' 소원이고,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부산으로의 발령을 자청할 정도다. 두 부부를 보면, 이 가족을 마주한 경찰이나 선생님의 표정에서 드러나듯 부모가 이 모양인데 아이들이 오죽할까?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청소년 시절 사고를 쳐서 '인지'도 하기 전에 부모가 되어버린 김정국씨와 박명화씨가 맞닦뜨린 부모, 가족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할머니의 과잉 보살핌으로 품안의 자식으로 자라난 아들은 서울대 법대를 갔지만 군대 폭력으로 의가사 제대를 하고 현실 부적응자가 되었다. 청소년이 될 그 때부터 부모님께 왜 결혼을 했냐고 도발적 질문을 던지던 나나는 내 인생은 내꺼라며 자퇴와 가출, 가족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꾼다.

정말 부모같지 않은 김정국, 박명화 씨의 행태를 보며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낫다며 나나는 도발적 조언을 했지만, 그래도 나나의 자퇴만을 막아보겠다는 김정국, 박명화씨는 가족으로 거듭나는 선택을 한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방기했던 김정국 씨는 아들의 취업과 노조위원장 자리를 바꾸며 아버지 되기를 선택하고, 부산으로의 탈출을 꿈꾸던 엄마는 어떻게든 나나를 졸업시키기 위해 눈물의 휴직을 감내한다. 이른바 우리 사회가 규정하는 아빠되기와 엄마되기에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부부의 헌신(?)은 물거품이 되고 다시 가족은 경찰서에 나란히 앉는 신세가 된다.




21세기 가족을 묻다.
그리고 결국은 실패한 이 두 부부의 '가족되기 해프닝'은 역설적으로 오늘날 '가족'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묻는다. 시어머니의 그 길고 긴 레파토리, 내 인생 희생해서 너희들을 키웠다는 그 징한 역사의 방식을 답습했지만, 실패하고만 김정국, 박명화씨의 부모되기를 통해 '자기 희생'위에 견고한 성채를 쌓아온 우리 사회 가족 제도를 근본에서부터 회의한다.

이 짧은 드라마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씬, 전혀 가족같지 않은 이들이 한 차에 어쩔 수 없이 낑겨앉은 이 장면이야 말로 피하고 도망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우리 사회 가족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상징한다. 음주 운전을 피하기 위해 자리를 바꿔보려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서로의 처지와 책임이 부가되는 가족의 현장이다.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버린 엄마가 다음날 남편의 호텔에서 시어머니 칠순 잔치 현장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낸 선생님과 마주친 가족들과의 상면은 드라마의 갈등을 '불꽃놀이'처럼 점화한다.

결국 알량한 부모의 위신이나 희생을 향한 어거지 노력마저도 수포로 돌아간 후, 비로소 부모들은 솔직해 진다. 자신들 역시 아직은 '어른답지 않음'을. 부모로 시간을 보냈지만, 여전히 부모로써의 자신이 없음을. 그리고 '부모'라는 정해진 틀에 가두기엔 자신들의 삶에 대한 욕구가 너무도 가열참을. 이 사회가 제시한 부모라는 '제복'에 틀어 맞추기엔 너무도 자유분방하게 커져버린 개인으로서의 삶을.

그럼에도 <나쁜 가족들>은 비관주의에 허우적거리지 않는다. 군대 내 폭력, 노조 투쟁, 그리고 섹스리스 부부 문제, 히키코모리에 가출 청소년의 문제 등 심각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김정국 씨 가족들을 통해 나열되지만, 오히려 드라마의 결론은 '불꽃놀이 축제'의 결말처럼 훈훈하다. 들여다 보면 비극이지만, 어쩌면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해결을 모색해보면 안될 것도 없다며 드라마는 '사회가 끼워 준 색안경'을 벗어버린다. 애써 작아진 '가족이란 제도'에 끼워맞추기보다. 각자 자신의 현실을 솔직하게 토로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가족'은 새로이 시작한다. 자식을 위합네 어거지 부장 역할 대신 원하던 노조로 돌아간 아빠, 잘 나가는 서울대생 아들, 군대 폭력의 트라우마을 떨친 채 이제 드디어 숟가락 얹는 생활을 마무리할 준비를 하는 오빠, 원하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엄마, 그리고 자퇴를 하고 '방황'을 하기 위해 가방을 짊어진 딸, 그렇게 사회가 원하는 가족의 역할은 아니지만, 각자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 '가족'은 '기사회생'한다. 그리고 이것이 21세기'가족의 생존기'이다.

by meditator 2017. 10. 16. 14:00

새로운 작가의 등장은 반갑다. 뻔하지 않은 이야기, 뻔하지 않은 설정이, '드라마'의 신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수식어에 어울리는 또 한 편의 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kbs2  수목 드라마로 찾아온 <매드독>이다. 


ocn의 인기 시리즈였던 <특수사건 전담반; 텐>의 작가였다는 후광이 무색하게 최저 시청률을 갈아치웠던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후속작의 자리는 거의 '맨 땅에 헤딩'을 하는 처지나 다름없다. 물론 아직은 수목 드라마 꼴찌이지만 그 '맨땅'에서 대번에 5%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한 건, 사실 '대박'에 가깝다. 그만큼, 첫 회를 선보인 <매드독>의 활약은 화려했다. 



'법이고 나발이고 물어 뜯어버려!'; 다크 히어로 매드독
드라마를 연 건 일명 '매드독', 보험조사 회사(?)의 활약상이다. 화려한 미모를 앞세워 병원의 환자로 위장잠입한 전 태양보험 보험 조사팀 대리 장하리(류화영 분), 그녀가 '베이글녀'의 특기를 앞세워 의사의 눈길을 끄는 동안, 전직 조폭, 전과 5범의 박순정(조재윤 분)이 컴퓨터 수리공으로 등장하여 병원 정보를 빼돌린다. 그런 그들을 아지트의 자칭 스티브 잡스 친구인 온누리(김혜성 분)가 돕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상대편 건물 옥상에서 전설의 보험 조사원 최강우(유지태 분)가 진두지휘한다. 태양 생명 보험조사원 박무신(장혁진 분)이 경찰들과 들이닥치는 일촉즉발의 상황, 장하리는 전직 체조 선수의 특기를 살려 건물 사이를 날아 안전하게 박순정과 함께 피신하고, 병원의 보험 사기 보상금은 '매드독'에게 입금된다. 박무신이 그들의 자화자찬 뒤풀이에 나타나 발을 굴러봐야, 이미 게임은 끝났다. 

이렇게 드라마는 한 해 보험 사기 적발 금액 7185억원, 보험 사기 공화국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보험 조사 어드벤처'의 서막을 연다. '차는 주차장에 조사원은 법 안에'라는 신념을 가졌던 최강우, 그러나 그는 항공사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미친 개가 되었다. '법'의 테두리에서 보험 사기를 조사하던 성실한 직장인은, '안 걸리면 대박, 걸리면 사기 미수의 경미한 처벌'이라는 헐거운 그물의 보험 사기 법망을 무시하고, '법이고 나발이고 물어 뜯어버리'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보험 사기를 조사하는 저돌적인 '다크 히어로'로 거듭났다. 그리고 그의 곁엔, '어벤져스' 급의 동지들. 

하지만 드라마는 이 '날뛰는 매드독'의 소개로 만족하지 않는다. 뜻밖에도 주인공인 '매드독'을 물먹이는 한 술 더 뜨는, 조물주 위의 건물주 사기꾼을 등장시키며 시선을 집중시킨다. 



전문가 김민준 씨?
전 직장 태양 생명사를 나오다 마주친 건물 붕괴 사고 피해자 부자의 사연을 풀어주기 위해 나선 매드독, 그들이 작전을 펼치는 곳곳에서 뜻밖에도 어리숙한 건축사무소 직원 김민준을 만난다. 

부실공사로 인한 건물 붕괴라 확신하는 매드독팀, 그런 확신에 여유롭게 사사건건 반론을 제기하는 전문가 김민준씨, 매드독과 건축사무소 비밀 문건을 내건 매드독과 김민준의 경쟁은 뜻밖에도 김민준의 승리로 끝난다. 아쉬움에 돌아온 사무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들을 맞이한 건 그들이 사건 조사 과정에 밝힌 건축주 안치환의 비리 서류가 경찰서 캐비닛에 있고, 그들이 패배한 보험금이 피해자들에게 골고루 나눠지게 되었다는 사실, 황망해 하는 것도 잠시 그들 앞에는 매드독이 입주해있는 건물의 건물주로 등극한 전문가 김민준이 등장한다. 마치 배트맨 앞에 등장한 슈퍼맨처럼, 

그렇게 1회는 정체가 모호하지만 그 결과로 보건대 다크 히어로 집단 매드독과 그 길이 다르지 않은 전문가 김민준의 '매드독 소유권' 주장으로 흥미롭게 마무리된다. 과연 이들이 펼쳐보일 따로 또 같이의 '저스티스 리그'는 어떤 방식일지. '매드독' 그들의 어벤져스 급 활약도 흥미로운데, 거기에 화룡점정, ocn <구해줘>를 통해 눈도장을 찍은 신인 우도환의 '전문가 김민준'씨의 신선한 활약은 '보험 사기 조사극'이라는 생소한 소재에 대한 낯섬을 거뜬히 기대감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예고에서 보여지듯 최강우와 김민준의 항공사 사고로 인한 악연 혹은 인연, 거기에 JH 항공 운송 그룹 부회장 주현기(최원영 분)에서, 태양 보험 차준규(정보석 분)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악의 라인은 그 면면만으로도 이 드라마의 큰 그림에 대한 기대를 높이게 하고 드라마 <매드독>의 기대치를 높인다. 
by meditator 2017. 10. 12. 14:33

소설 <남한산성>이 지난 6월 5일 100쇄를 찍었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와 함께 김훈 작가의 역사 3부작으로 불리우는 이 작품은 2007년 출간 이래 꾸준한 스테디셀러로 무려 100쇄, 총 누적 판매수 59만부에 이르렀다. 우리 소설계에서는 진귀하고도 소중한 성과다. 하지만 영화로 온 <남한산성>은 그와 달리 고전 중이다. 손익분기점 500만이 무색하게 액션 영화 <범죄도시>에 추격을 당하며 11일 현재 누적 관객수 331만으로 초반의 흥행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 


장고한 스테디셀러 소설 <남한산성>과 영화 <남한산성> 사이에 이 갭, 그건 그저 만듬새나 지루함의 문제일까? 과연, 59만부가 팔린 소설 <남한산성>을 산 사람들은 김훈의 필설을 다 마무리했을까? 혹 김훈의 명망에 기대어 샀다가 서가에서 먼지를 맞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100쇄 출간에도 불구하고 실용서가 아니고서는 쪼그라져만 들어가는 우리의 독서 시장의 현실과 맞물려 비유하는 것이 더 적확할 듯 싶다. 영화를 통한 '사유', 아니 '사유' 그 자체가 낯설어가는 세상에서 어쩌면 애초에 영화 <남한산성>은 무모한 도전이었을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영화 <남한산성>에는 그저 김훈 원작 이상 2017년의 황동혁의 '언어'가 유려하게 담겨있으니, 그저 손익분기점을 못넘은 영화로 기억되기엔 안타깝다. 



소설<남한산성>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 
소설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대군을 피해 인조와 신하들이 머문 47일을 그린 작품이다. 영화 속 자막에서도 알려주다시피 유난히도 춥고 눈이 많았던 그 겨울, 어쩌자고 퇴로가 막히면 도망갈 곳도 없는 산성으로 살자고 도망온 왕과 군주들의 행보에서부터 소설은 탄식을 이어간다. 그리고 채워가는 살아감의 엄정함, 그 속에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지속되는 하던대도 지속되는 정사. 이에 대해 소설가 김훈은 '아무런 결론도 없는 소설'이라 정의한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조건들, 인간의 야만성, 인간의 삶이 빚어내는 풍경들을 묘사하려 했을 뿐'이라 한다. 하지만, 감정을 배제하고 장군의 언어로 전쟁터의 풍경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간략하게 전한 <칼의 노래>를 통해 그래서 더 비감하게 임진왜란을 실감했듯, 가감없이 묘사해 내려간 47일 피폐해져만가는 배수진 남한산성 역시, 병자호란 풍전등화 속 조선의 모습을 절실하게 전한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의 그 기조를 이어받아, 1636년 남한산성의 풍경과 인간들을 그려나간다. 역사는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지만, 하지만 그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가 오늘의 사람이라, 언제나 거기엔 오늘의 색채가 덧칠해 질 수 밖에 없다. 트럼프의 미국과 김정은의 북한 사이에서, 입지가 좁은 우리의 처지는 절묘하게도 선택의 여지가 별로없는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처지와 오버랩되며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시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안타깝다. 영화 <남한산성>이 저어가는 사유의 깊이는 이미 우리가 배워서 알고 익힌 역사, 남한산성에 갇혀 주화파나 주전파냐를 놓고 싸우고, 결론 내려진 그 뻔한 역사의 결론을 한 발 넘어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안다. 당시 조선이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서 얼마나 무지했는지, 최명길이 제시한 청과의 휴전이 얼마나 자명한 결론이었는지. 하지만 이미 '안 자', 혹은, 방관자, 혹은 목격자의 관점을 넘어, 황동혁 감독이 애써 그려낸 1636년 남한산성에 있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되돌려 질문을 던져보면 과연 그때도 그럴까?

소설이 '남한산성'이라는 지역성을 배경으로 그 속에 담겨진 인간들을 수사를 아낀 문장으로 담백하게, 그래서 서늘하게 묘사해 나갔다면, 영화는 그런 원작의 묘사에 더해, 인조를 중심으로 그들 앞에서 조선의 운명을 둔 '인간군상'들에 조금 더 방점을 찍는다. 걸출한 두 배우, 김윤석, 이병헌이 분한 김상헌과 최명길,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고뇌하는 인조 박해일, 그리고 사실은 그 못지않게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을 분노케한 영상 김류의 송영창, 이들의 설전과 팽팽한 긴장감이, 마치 한 편의 연극 무대를 보듯 관객을 끌어들인다. 
 
경계에 선 자들에게 그 해 겨울은 냉혹했다. 조선 강토를 짓밟으며 청병이 다가오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은 두려워 도망가는 백성들 사이를 뚫고 남한산성에 다다랐다. 성벽을 두고 대치하는 것들의 성격은 명백했다. 조선과 청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임금 인조와 청의 황제 칸이 대치하고 있었고 조선의 병사와 청의 병사가 대치하고 있었다. 쫓겨온 자와 쫓아온 자의 대치였고 굶주린 자와 배부른 자의 대치였고 말과 말, 문장과 문장의 대치였다.......대치는 성벽을 사이에 둔, 성 밖와 성 안의 것이 아니었다. 성 안에서 군과 신이 대치하고 있었고, 병과 병이 대치하고 있었으며, 병들의 목숨과 성첩을 덮는 추위가 대치하고 있었다......어디도 대치를 피할 곳은 없었다. 


<남한산성>, 국가를 묻다. 
아마도 영화 <남한산성>이 지루했던 이들이라면, 그 이유의 상당수가 이들의 사실은 '절체절명'의 설전 그 행간 속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에는 너무도 분명한 결론이지만, 김훈이 그러했듯, 감독 황동혁 역시, 애써 그 결론에 의거치 않고, 그 시대를 산 그들의 입장 각각에 힘을 실어준다. 사대의 나라 조선, 이미 그렇게 몇 백년을 이끌어 온 조정에서, 적페가 되어가며 기득권이 된 영상과, 적폐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교의 국가 조선의 신하가 자신의 정체성인 김상헌, 그리고 그럼에도 국가의 생존을 우선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주장은 각각 명징하게 자신의 길을 갖는다. 이념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각자의 입장에서 쟁투하는 오늘날의 인간들에 굳이 비교할 것도 없다. 

'경계에 선 인간들',  김훈은 그리 표현했다.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는게, 지구가 멸망해도 희망을 심고자 해서가 아니라, 내일 지구가 멸망하는 걸 알지 못해서이듯, 과연, 몇 백년을 사대의 유교 국가로 살아온 조선에게, 청과의 화친이 '수긍'될 수 있을까?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 압록강 주변까지 도망쳐, 명의 도움으로(?) 나라를 구했다 하는 인식을 가질 지도 모르는 사대부들에게, 최명길의 '혜안'은 얼마나 멀고도 아득한 이야기일지. 

보름달이 뜨면 봉화가 올려질 것이라 기대하는 김상헌과, 보름달이 뜨기 전 항복을 해야 한다는 최명길의 절박한 설득은 바로 그런 경계에 대한 공감에서부터 절절해진다. 하지만 이미 역사적 혜안의 최명길과, 역사적 고집불통의 대명사가 된 김상헌이란 결론을 알고 있는 후대의 관객들에겐 싱거운 선택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미 '안 자'가 되어 그 '선택'의 감별사가 되어버린 관객이 영화 <남한산성>의 손익 분기점을 위협할 것이다.



소설은 그 답을 그들이 아닌 조선의 백성들에게서 찾았다. 영화 역시 김상헌의 눈에 밟힌 산성의 군인들과 서날쇠, 소녀 나루에게서 찾는다. 영화는 최명길을 청과의 경계에 서게 한 반면, 뜻밖에도 고루한 김상헌을 나룻터에서 부터 산성에 이르기까지 그들 진짜 조선의 주인들과 접점을 가지도록 만든다. 그래서일까? 분명 이병헌과, 김윤석 두 배우의 백중지세로 이어지는 영화 속 두 인물의 입장에서 결코 그 저울이 흔들리지 않지만, 그 접점에서 오늘날 역사가 '남한산성 그 치욕의 공범자'로 기록하고 있는 김상헌의 처지와 생각을 되짚어 보게 만든다. 

심지어 굳이 역사적 사실을 들먹일 필요조차 없이, 김상헌의 마지막을 사실과 다르게 그려낸다. 그리고 그 다른 선택이 오히려 묻는다. 과연, 1636년 조선이 그 치욕을 감당하면서 지킬 가치가 있는 국가인가? 라고. 소설은 남한산성의 그 피할 곳없는 풍경에서 자명한 진실에서 비껴간 정사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드러냈다면, 영화는 오히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의 존속을 묻는다. 그렇게 많은 백성을 희생하고, 삼전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지켜낸 조선이 그 이후에 어땠던가?, 돌아온 인조는 어땠던가? 과연, 그 곳에서 조선이 살아돌아올만한 가치가 있었던가? 사료와 달리,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자기 대신 돌아가 조선을 책임져 달라 하지만, 그 가치와 명분을 가지고 조정을 지키고자 애쓰던 김상헌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거의 '혁명적'이었다. 

영화 <남한산성>이 던진 진짜 질문은 이것일 지도 모른다. 1636년 청 앞에서 풍전등화의 조선, 굴복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쩌자고 임진왜란에도 그랬듯이 백성은 내팽개쳐두고 그 산성으로 도망친 것에서 부터, 그 삼전도의 치욕을 겪고도 왕조, 아니 왕의 운신만이 여전했던 그 국가, 과연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립할 가치가 있는가 라는 보다 근원적인 질문이다. 여전히 '국가'의 존재가 크고도 엄정한 대한민국에서 어쩌면 이 질문은 그래서 낯설고, 도발적이다. 그리고 이 묵직할 질문이 바로 영화 <남한산성>의 가치다. 

by meditator 2017. 10. 11.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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