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12부)보다 조금 길었던 <청춘 시대2(14부)>도 결국 또 이렇게 끝났다. 박연선 작가답게 마지막인듯, 마지막이 아닌듯 한껏 여운을 남기고 마무리를 지었고, '하메'들은 마치 오랜 친구에게 하듯, 카메라를 향해(시청자들에게) 또 보자, 다녀오겠다, 잘 지내라 인사를 남겼다. 시즌 1부터 '거짓말'을 밥먹듯했던 지원보다는 '쏭'이 더 익숙한 송지원(박은빈 분)의 '이명'까지 얹힌 곡진한 개인사 아닌 개인사는 시즌2의 대장정 끝에 비로소 매듭을 지었다. 하지만, 시즌1부터 남친인듯 남친 아닌 친구 사이 성민(손승원 분)과의 '진도'는 여전히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이다. 흔한 미니 시리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하메'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몰입했던 대상에 따라 흡족하거나, 흡족하지 않은 채 시즌이 마무리되었다. 결국 또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다음 시즌이라고 다를까? 청춘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듭이 지어지고 다시 풀어져 가는 것을. 




여전히, 그리고 다시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들
시즌 1에서의 캐릭터들 중 강언니(류화영 분)를 제외한 모든 하메들이 남은 가운데(은재 캐릭터는 배우는 바뀌었지만) 강언니의 빈자리를 조은(최아라 분)이 이제 시즌2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천양지차인 의뭉스러운 존재감으로 시즌을 열었다. 

키 만큼이나 정체성이 의심이 가던 조은의 존재에 대한 해프닝으로 시작했지만, 시즌2는 각 캐릭터별로 시즌 1에서 자신이 부딪쳤던 삶의 과제를 고스란히 짊어지고 시작한다. 시즌 1에서 집착을 넘어 데이트 폭력이 되고만 남친과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해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예은(한승연 분), 가정사의 그늘에서 벗어나 첫사랑을 시작했지만 이제 그 사랑의 아픈 기억만을 부등켜 안은 은재(지우 분), 그리고 스스로 동생의 목숨을 걷으려고 까지 하며 삶의 기로에 섰던 진명(한예리 분)의 첫 직장 생활, 그리고 가장 밝았지만 가장 뜻모를 이명에 시달리던 쏭, 그리고 거기에 또 다른 가정사의 짐을 진채 헌책방에서 발견한 쪽지를 따라 흘러온 조은까지.



시즌 1의 강언니나 진명에게 닥친 문제가 우리 시대의 사회적 접점과 맞닿아 보다 큰 공감의 진폭을 가진 반면, 이제 시즌2에서 각 하메들의 문제는 예은의 데이트 폭력이나, 그리고 시즌의 마지막 쏭이 과거의 기억에서 길어올린 아동 성추행 등은 여전히 '사회적'인 파장을 가진 소재이지만, 시즌 1에 비해 가벼운 소재가 아님에도 보다 '사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건, 그 주제가 '보다 사적'이라서보다는, 시즌1의 진명이나 강언니가 맞닦뜨린 접점이 사회라면, 이제 시즌2의 예은이나 쏭의 문제들은 보다 '개인적'으로 '천착되어진 지점이 깊어서이기 때문이다.

예은이 겪은 데이트 폭력의 상흔이나, 쏭의 상실된 기억은 드라마의 과정에서 조은의 가정사로 부터 비롯된 자신감 부재와, 은재의 실연과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 시즌 2를 채워간다. 마치 작가가 그들이 겪는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더하고 덜하다 말할 수 없다 하는 것처럼. 그건 어쨋든 지금 그건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에겐 시즌 2의 <청춘시대>가 이도저도 아닌 뜨뜻미지근한 결말일지 몰라도, 그러나 다섯 하메들은 저마다 각자의 실타래의 한 매듭을 풀었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세상에 한없이 도망치던 예은은 친척들이 모인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이 데이트 폭력을 겪었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녀를 돌보던 친구는 오히려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로 폭언을 퍼붓는 뜻밖의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과정을 통해 예은은 자신의 아픔을 객관화하고 동시에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수 있는 한 뼘의 성장을 이루었다. 



저마다의 결자해지 
시즌 2의 주제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바로 이 '객관화'가 아니었을까? 시즌1에서 알바를 하며 고달프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기 껏만을 챙기던 진명은 시즌1의 그 진명이 맞나 싶게 해체된 아이돌 그룹 해임달을 뒷감당하느라 고전한다. 하지만, 그녀가 시즌 1에서 삶이 버거워 동생의 목숨까지 거두려했던 그 고통을 되짚어 보면, 이제 또 동생 또래의 한 청년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건 너무도 명확하다. 또한 한없이 낙관적으로 꿈을 이야기하는 이 가망없는 아이돌을 바라보는 진명의 복잡한 눈빛은 처절했던 자신의 지난 시간 또한 복기했을 것이라고 짚어진다. 해임담을 '처리'하라는 직책으로부터 시작된 진명의 수난기는 다른 이름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살아왔던 진명의 '자기 객관화'의 시간으로 시청자들에겐 읽혀지는 것이다. 

그렇게 진명이 해임달을 통해 그랬듯이, 예은은 친구의 폭력적 메시지 폭력을 통해, 조은은 풋풋한 첫사랑을 통해, 은재는 바닥을 치는 처절한 사랑의 복귀 실패를 통해, 그리고 쏭은 문효진의 죽음을 통해 상실된 기억을 불러오며, 각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수동적이기만 하던 은재가 종열 선배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보이며 자존심이 무너져가며 사랑의 바닥을 드러내 보이고서야 비로소 사랑의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듯이, 박연선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가감없이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하나의 매듭이, 한 사이클의 성장이 마무리된다 시즌2를 통해 말하고 있는 듯하다. 

누군가는 시즌 2가 시즌 1에 비해 어쩐지 스케일이 작다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세상과의 싸움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진짜 더 어려운 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지점에서 <청춘시대2>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깊다. 오히려 세상과의 전선은 더욱 분명해 질 수록, 나 자신과의 접점은 놓쳐버리기 쉬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시작과 끝은 나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밝히는 청춘 드라마를 만날 수 있는 건 이 시대 청춘들의 축복일 지도. 

그러기에 다시 또 감질나는 이 14부작의 다음 시즌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네버엔딩의 청춘 서사를 그리듯이. 하지만 그런 반면, 이제 한편으론 박연선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가 기대되기도 한다. 어쨋든 무엇을 그리든 박연선월드가 여전히 확고하다는 건 분명하니까. 
by meditator 2017. 10. 8. 04:28

<남한산성>, 이어 <범죄 도시>로 그 흥행세가 주춤하고 있지만, 엇갓린 평에도 불구하고 <킹스맨; 골든 서클>은 청불 최단 기간 400만을 돌파하며 우리나라에서 1편에 이어 흥행의 호조를 보이고 있다. 


시즌을 '스타일'이 이어가다. 
<킹스맨>은 등장은 그 유래부터 007과는 다르다. 영국 정보부라는 국가 조직의 관리 하에 첩보원이 아닌, 영국 테일러 산업의 이익을 환원하기 위한 조직으로, 테이러 산업이 만들어낸 슈트를 '갑옷'처럼 입은 '원탁의 기사'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가장 '신사적'인 것이 요구되는 훈련 과정은 '왕실에 의한 작위'가 아니라, 그 '신사복'을 만드는 협회에 의해 주도된다는 '장인적 설정'이 이 '시리즈'의 관건이다. 그러기에 원작이 없는 2편에서 미국의 위스키 협회, '스테이츠맨'이 그들의 동지로 등장한 건 시리즈의 연장 선상에서 개연성을 갖는다. 



이렇게 협회가 만들어 낸 '킹스맨'에 1편을 본 사람들은 알다시피 온갖 신사 가문의 자제들이 지원한다. 하지만 정작 '킹스맨'이 된 건, '동지애'를 실천한 사투리를 쓰는 하층민 에거시(태런 에저튼 분)이다. 취지야 진정으로 '신사'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킹스맨'의 자격이 있다는 말로써 '문화'의 본질을 짚는다. 

하지만 해학적으로 해석하되, 테일러 협회 수장과 재단사, 그리고알고보니 '나비 연구가',  뒷골목 소년에 의해 완성된 킹스맨은 그 어떤 '신사'보다 더 '신사스러운' 정서와 스타일을 선보인다. 안경, 우산, 가방을 활용한 무기하며, 007보다 더 007스러운 신사들이다. 2편에서 신사복을 벗은 에거시가 동네 친구들과 예의 사투리같은 자신의 언어를 쓰다가도, 킹스맨의 복장을 장착하면 어엿한 '신사'로 전투에 임하는 장면은 본투비 신사였던 007과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한 편에서 '신사'들이 무게 중심을 잡고 있는 가운데, 1편에서는 그런 '신사'의 반대 편에 지구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바이러스같은' 인간들을 절멸시키겠다는 야욕을 가진 발렌타인(샤무엘 L잭슨 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인간의 뇌'에 칩을 작동시키는 천재적 발상의 과학자 악인의 모습이 반전이다. 힙합 보이 복장에, 힙합스러운 어투로 '맥도널드' 햄버거를 대접하는 식이다. 



그런가 하면 2편에서 캄보디아 정글 속에 자신만의 '포피랜드'를 포진한 빌런 포피 역시 발렌타인에서 시대를 거슬러 7,80년대 미국 팝음악을 배경으로 현란한 색채를 덧입혀 그 시절 미국 거리를 재현한다. 거기에 그녀가 오만불손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살려준 인질이 바로 그 시절 대표적 팝스타 '엘튼 존'의 등장이 화룡점정이 된다. 

이렇게 1편에 이은 2편에서 <킹스맨>은 '전통적 영국의 신사 문화'에 힙합 문화와, 7,80년대의 파퓰러한 미국의 대중 문화를 대비시키며 '스타일'의 격전지로서 시리즈를 이어간다. 2편에서도 영화의 정점이라 하면 뜻밖에도 장엄한 '존던버'의 노래가 울려퍼진 가운데 멀린의 장렬한 죽음이었다. 영화 시작부터 빈번하게 에거시의 현란한 액션이 이어지지만 정작 공을 들여 보여주는 건 '스타일'의 전시이며, 그 '스타일'의 활용에 관객 역시 <킹스맨>을 다른 스파이물과 다르게 시선을 빼앗기게 된다. 작품의 호불호, 혹은 성패와 상관없이 적어도 <킹스맨>은 1편에 이어, 2편까지 '스타일'의 계보를 순조롭게 이어갔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듯하며, 그런 의미에서 과연 3편의 '스타일'은? 이라는 궁금증을 덧붙이게 만든다. 

그리고 남겨진 질문들
1편의 클라이막스에서 벌어진 인간 폭발의 '카니발'은 두고 두고 회자되었다. 심지어 가장 잔혹스런 장면에서 울려퍼진 위풍당당 행진곡은 이후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의 차용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될 만큼, 신선하고도 충격적이었다. 

그런 '충격파'에 대한 부담이었을까? 마치 1편만큼 쇼킹한 '인간 살육'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의 소산이기라도 하듯, '인간 분쇄기'가 2편에 등장한다. 1편과 같은 화려한 배경 음악도, 연출도 없이 가감없이 '인간'을 '햄버거 패티'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 심지어 꼭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인증이라도 하듯, 두 다리는 남겨두는 그 처단에 눈을 질끈 감은 관객들이 많을 듯하다. 

'가감없이 잔혹하다', 이런 평가에서 어쩌면 우리는 1편에서 간과했던 질문을 이제 다시 해보아야 할 지도 모른다. 1편의 발렌타인의 방식이나, 2편의 포피의 방식이나, 사실 보여주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지, '생명에의 경시'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2편에서 그것이 전면적으로 드러남으로써, 1편의 그 '잔혹했던 살상'을 오버랩하며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1편에서 각국의 지도층 인사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안위 이상 지도자로서의 책임 의식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 살상에 대한 살인에 대한 묘한 대리만족과 그럼에도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이제 2편에서 애꿏게도 그 대상이 된 '약물중독'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 질문은 정작 포피를 제거하자, 등장하여 사랑했던 연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킹스맨 일행이 해독제 버튼을 누르는 걸 저지하려고 했던 스테이츠맨이나, 미국 대통령의 결정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이처럼 <킹스맨>이 내세운 '정의'는 모호하다. 

마치 제국주의 시대 '신사'복을 입고 제국주의 영국의 첨병이 되었던 그들이 이제 영국 문화의 전통이 된 것처럼, 1편에서 인간 카니발의 제물이 된 각국 수뇌부의 목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야 하는 임무나, 이제 2편에서 걷잡을 수 없는 필요악이 되어가는 약물 중독자에 대한 구급 버튼의 수호처럼, 현대의 신사들의 임무는 그 자체에 '딜레마'를 안고있다. 하지만, 그건 햄버거 패티가 되는 인간에 대한 반작용이 곧 '정의'가 되는 임무에서 '킹스맨'의 고민은 깊지 않다. 나비 연구가가 되는 대신 나라를 위한 길을 선택했던 해리의 고민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처럼. 

이런 식이다. 신사복을 입은 에거시에게 주어진 임무는 뜻밖에도 상대편 여성의 질 속에 첩보용 칩을 이식하는 것이다. 거기서 그가 고민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반응을 보인 '여성의 도구화'가 아니라, 자신의 약혼자에 대한 순결 여부이다. 어쩌면 가장 신사입네 하면서 그 신사적인 면을 숱한 '여성 편력'을 증명하는 007 시리즈와 차별성은 에거시의 결혼으로 마무리지은 소박한 순애보라 영화는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화는 '아이러니한' 설정들의 집합체이다. 전통을 가진 문화의 수혜자가 된 청년은 이제 신사의 제복을 입고 정의의 사도가 되어, 하지만 여느 스파이물 못지 않은 혹은 더 적나라한 액션과 살극을 펼친다. 그의 정의는 분명하지만, 그 결을 따지고 들어가면, 어쩌면 우리 시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 투성이다. 이 모호한 시대 속에서 '정의'을 외치는 시도 자체가 가진 본원적 딜레마일지도. 

by meditator 2017. 10. 8.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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