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는 이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케이블 tvn에서 시작된 <응답하라>는 정작 그 본 시리즈가 후일을 기약하지 않은 것과 달리, 그 '추억'의 정서가 드라마의 '장르'가 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추석 전에 종영한 kbs2의 <란제리 소녀 시대>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더니, 이제 mbc에서 새로이 시작한 <20세기 소년 소녀>는 1990년대에 성장하여 이제 35살이 된 '그녀'들의 이야기를 '추억'을 바탕으로 끌어가고자 한다. 




추억은 힘이 세다
뜬금없지만 추석 특집 sbs스페셜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해 본다. 추석 특집으로 sbs스페셜은 지리산 도마 마을의 정경을 다룬다. 그 중 2부는 도마 마을의 가장 웃어른인 90살 한두이 할머니, 평생을 도마 마을에서 나고 자라 일가를 이룬 그녀는 이제 삶의 전선에서 물러나 반 평 툇마루를 지키는 신세가 되었다. 육신은 늙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정신이 육신을 따라 늙어지지 못한 그녀는 그 반 평의 툇마루에서 이제 하나 남은 일, 죽음을 기다려야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도마 마을 여기저기를 흘러다닌다. 시계에 맞춰 버스 오는 시간하며 고사리 캐러가는 일상을 놓치지 않는 한두이 할머니는 말한다. 지나온 평생 늘 굶지 않고 살아내기 위해 고생 밖에 안했는데, 돌아보니 그 시절이 다 꽃같다고. 그래서 자식들도 잠깐 다녀가는 고향, 구부러진 허리로 여전히 고향을 지키는 그곳을 다큐는 복사꽃이 지천이라 말을 맺는다. 

그렇다. 돌아보니 다 꽃같던 시절, '추억'의 정의로 이 보다 더 절묘할 것이 있을까? 더구나,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툇마루를 지키는 한두이 할머니만큼은 아니더라도, 강팍한 현실을 꿋꿋이 밀고가야 하는 불황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을 꿀 수 있었던, 그 시절의 잔향은 그 어느 때보다 그윽할 것이다. <응답하라>라는 드라마가 '수작'이었던 이유를 차치하고, 번복되어 그 '추억'을 소환하고자 하는 이유에는 아마도 현실의 강팍함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응답하라>와 달리, 공중파로 온 추억의 소환이 흡족치는 못하다. <란제리 소녀 시대>가 3~4%의 시청률로 고전했으며, 야심차게 연방을 하며 폭죽을 쏘아올린 <이십세기 소년 소녀> 역시 4~3%로 만족스런 출발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란제리 소녀 시대>가 낮은 시청률과 상관없이 '올해의 좋은 드라마'로 손꼽히듯, 비록 이제 4회를 선보였지만, <20세기 소년소녀> 역시 '추억'의 훈훈함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 

한 교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우정과 교감을 나누고, 같은 시대의 노래를 듣고, 같은 문화를 공감하며, 90년대의 문화가 된 '한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녀들은 이제 설마하던 서른 중반, 여전히 미혼의 '봉고파'가 되어 '동지애'를 나눈다. 그녀들의 동지애의 기반은 한 교실에서 서로 일기장을 나누어 가며 나누던 그 '교감'에서 비롯되고, 한 남학생으로 잠깐 금갔던 그 찰라의 이별을 제외하고는 늘상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아왔던 '인생의 다르지만 같은 레일'의 시대성에서 이제는 변호사 취준생에, 비행기 승무원에, 스타라는 다른 삶의 궤적을 이어가는 공통 분모를 찾아간다. 거기에 여전히 다같이 '결혼하지 못했다는' 미혼의 딱지까지(극중 그 누구도 '비혼'을 내세우지 않는다)



21세기의 강팍한 현실을 버티게 하는 추억
하지만 그렇게 같은 노래를 듣고, 저마다의 꿈을 꾸며, 같은 남학생을 좋아하며 투닥거리던 소녀들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소녀시절부터 지금까지 울다가도 '뭐 먹을까?'란 소리에 눈물이 뚝 그치는 한아름은 사이즈 77과 뚱뚱한 승무원에 대한 컴플레인과 싸우는 전문직 여성이 되었다. 심지어 '자궁근종'과도 싸우는 처지. 
학창 시절 늘상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영재 소녀 장영심(이상희 분)은 겨우 11년만에 턱걸리로 사법 시험은 패스했지만, 로펌 취업은 하늘에 별따기, 늘 이력서와 홀대하는 아버지와 싸우는 그녀에게 기회는 저 멀리에만 있는 듯. 겨우 그녀에게 기회가 오긴 왔는데, 원하던 로펌이 아니라 소파가죽마저 뜯어진 개인 변호사 사무실. 
세 소녀들 중에서 운좋게도 가장 잘 나가는 대한민국의 트렌디한 스타가 된 사진진, 아이돌로 시작하여 17년차의 관록있는 '천만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은 그녀, 그런 그녀에게 뜻하지 않은 섹스 동영상 사건에, 아름이 문병차 간 여성 병원 사진까지 터지며 연예계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는다. 

이렇게 4회만에 드라마는 서른 다섯이라는 나이에 '결혼'과 '연애'는 커녕,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맞이한 그녀들의 '사연'을 풀어놓는다. 사진진의 '섹스 스캔들'에서 보여지듯이, 세상은 보이는대로 믿고, 보여지는대로 손가락질하며 평가한다. 그렇게 강팍한 세파 속에 던져진 그녀들은 '개별적 존재'일 뿐. 

그러나 그녀들은 여전히 20년 '안소니' 팬심을 간직한 모태 솔로 혹은 그 비슷한 순정파의 '소녀'들. 드라마는 바로 이렇게 한두이 할머니처럼, 육신은 서른 다섯의 세파와 싸우지만, 정신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있는 서른 다섯의 20세기 소녀들의 '관점'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관점에 집중할 뿐 아니라, 서른 다섯의 삶을 그럼에도 여전히 20세기 소녀들의 의지로 헤쳐나가는 '정서'에 촛점을 맞춘다. 세상의 편견어린 시선에 상처받은 사진진을 위로하는 건, 그녀가 애지중지하는 오래된 기린 인형처럼, 여전히 그 시절처럼 그녀와 함께 자란 친구들, 가족들, 그리고 불현듯 그녀 앞에 나타난 그 시절 봉고남 공지원(김지석 분). 그 20세기의 정서가 그녀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오랜 인연의 소속사 사장마저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세상은 각박해도 '관계'는 여전한 유대가 되어 세상을 버틸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를 <20세기 소년소녀>는 단 4회만에 설득해 버린다. 

그 이전의 세대가 고생하며 일군 '가족'이 그들의 방패였다면, 도시에 깃들어 핵가족으로 뿔뿔이 흩어진 대가족들은 새로운 '도시의 가족(?)'을 이룬다. 이제 '추억'을 소환한 이 세대에겐 그 '추억'을 공유한 '관계'들이 새로운 방패로 등장했다. 그 시절 '가족'드라마와도 같은 장치다. 병원 입원 중에도 홀로 뒤척이는 사진진을 찾아와 함께 잠을 청해주고 라디오 공개쇼에 나타나 자신의 스캔들을 진솔하게 밝힌 사진진이 함께 부등켜 안고 웃고 운 건 가족이 아니라, 그런 '추억의 동지', 새로운 가족들이다. 그렇게 힘을 가진 '추억', 당의정처럼 달콤하다. 

by meditator 2017. 10. 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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