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변함없이 다행스럽게도 <드라마 스페셜>이 찾아왔다. 가을이라는 계절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낮은 시청률을 돌파하고자 하는 암중모색이었을까? '멜로의 법칙'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찾아온 2017년의 <드라마 스페셜>은 그 부제 만큼이나 다종다양한 '사랑' 이야기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하지만 부제가 어떻든 <드라마 스페셜>이라면 변치않고 담아내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 청년들의 자화상이라 할 작품들이다. 올해도 변함없다. 지난 일요일 밤에 이어, 수요일 밤 다시 찾아온 <드라마 스페셜- 혼자 추는 왈츠>는 드라마로 그려낸 이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이다. 




2015년 <노량진 역에는 기차가 서지 않는다>
이 여운이 긴 제목에서 지칭하는 지명만으로도 이젠 어떤 청춘의 이야기를 그릴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곳 노량진, 그렇다. 이 드라마는 '공시생'의 이야기이다. 2015년에도 그렇고, 이제 공무원 수를 늘린다니 기하급수적으로 더 늘어났다는 노량진 공무원 수험생의 사랑 이야기다. 세상에 시험 공부하기에도 빠듯한데 사랑이라니, 사랑이 사치가 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렇다. 바로, 그래서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였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단 1 점차로 시험에 떨어져 공시생 5년차가 된 모희준(봉태규 분), 그 끝없는 좌절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노량진 철교 위로 올라갔다. 바로 그 나락의 순간에 그의 앞에 나타난 유하(하승리 분)는 그를 '강제적 연애'의 세계로 인도한다. 다짜고짜 그의 수험 생활에 쳐들어와 공원 데이트를 하게 하고,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던 유하, 그러나 그런 만남이 늘 버거웠던 희준은 결국 시험을 두 달 앞둔 시점에 그녀와 연락을 끊는다. 그리고 드디어 합격! 당당하게 합격 소식을 전하고자 그녀를 찾아간 희준이 받아든 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녀의 소식. 그렇게 드라마는 '미래의 행복'을 담보로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마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2015년 청년들의 운명을 찰라의 사랑을 통해 담아낸다. 



2016년 <아득히 먼 춤>
드라마 속 연극이라는 실험적 도전을 했던 <아득히 먼 춤>, 하지만 정작 이 실험적인 이야기가 담고 있는 건 2016년 청춘의 자화상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자화상은 '영정 사진'으로부터 시작되고 만다. 젊은 연극 연출가 신파랑(구교환 분), 그는 불모지인 연극판에서도 동료들에게조차 인정받기 힘든 sf연극<로봇의 죽음>을 무대 올리려 했다. 유서 한 장 없이 세상을 버린 그의 작품과 생애를 '졸업'을 위해 마지못해 무대에 올리는 후배 연출가 최현(이상희 분)을 통해 되짚어간다. 

무용극과 전위적 연극 무대를 통해 드라마가 담고자 하는 건, 2016년에도 순수 연극을 하고자 애쓰는 젊은 연극인의 현주소이다. 연극을 한 편 무대에 올리기 위해, 이 시대의 젊은 연출가에게 필요한 건? 정작 후배들이 기억하는 그는 술에 취해, 혹은 잠에 취해 디렉팅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불성실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불성실은 연극을 포기하지 못하고 공연비를 마련하고자 철거 작업까지 뛰어야 하는 삶의 성실성이 잉태한 것이다. 보장되지 않는 예술로 고민하는 최현의 고뇌를 신파랑이 남긴 연극을 통해 신파랑의 실존적 절규로 까지 확장시키며 이 시대 예술가의 삶을 살려는 청춘들을 그려내려 한 드라마는, 영생을 포기하고 유한성의 '예술적 행위'를 선택하는 '안드로이들'들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될 수 없는 예술혼'으로 마무리된다. 



2017 <홀로 추는 왈츠> 
2015년에 미처 못다해서 안타까운 사랑과, 2016년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래도 작품을 통해서나마 예술적 연대를 했던 청춘은 2017년에 오면 좀 더 처절해 진다. 

'왈츠의 이해'라는 대학의 강의, 이 수업에서 학점을 얻지 못하면 원하는 성적을 낼 수 없는 김민선(문가영 분)은 다짜고짜 구건희(여회현 분)에게 사겨주겠다는 조건을 내걸며 왈츠 수업 참가를 종용한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 군대를 가고, 인턴 생활을 하며, 그렇게 8년의 시간을 보낸 오랜 연인을 드라마는 두 사람의 '왈츠'를 통해 아름답게 그려낸다. 

하지만 삼박자의 온유한 왈츠 음악과 달리, 8년째 연애를 맞이한 두 사람의 처지는 그리 평화롭지 않다. 민선과 달리 지방 캠 출신의 건희는 대기업 하청업체 직원의 처지이고, 어떻게든 정규직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려 하지만 정작 민선에게 기회는 번번히 주어지지 않는다. 함께 만든 통장의 잔고로 신경전을 벌이고, 모텔비가 아까워지는 시간, 무엇보다 그들을 압박하는 건, 벼랑 끝에 서있는 그들의 존재이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한 이들 연인, 결국 그럼에도 '너 밖에 없어'라고 했지만, 어렵사리 도전한 한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맞붙게 된 두 사람은, 그 애절한 사랑 고백도, 성대한 만찬도 뒤로 하고, 서로의 포기를 종용하는 치사한 처지가 되고 만다. 심지어 한껏 서로의 자존심을 긁고 대판 싸우고 난 다음날, 지하철 계단에서 실신한 민선을 건희는 모른 체 하고, 안심하는 건희가 무색하게, 민선은 피투성이가 된 채 면접장에 나타난다. 

애써 쾌활한 척 하며 오가던 덕담 몇 마디 후 명함만을 만지작거리던 두 사람이 이후 도망치듯 숨어 오열하던 두 사람의 엔딩은, 그 서정적인 왈츠와 비교대며 이 시대 청춘의 현주소를 비극적으로 그려낸다. 2015년의 연민도, 2016년의 예술적 각오도 무색하게 이제 2017년의 청춘은 전장의 적이 되어 서로에게 상처로 작동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각박해져만 가는 청춘들의 현주소를 드라마 스페셜은 담담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홀로 추는 왈츠>는 드라마 스페셜의 존재 이유를 강변해 낸다. 

물론, 이 드라마를 보는 혹자의 청춘은 그리 말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두 사람은 취직을 했지 않느냐고. 그래도 드라마는 알량한 미덕을 포기하지는 않았다고. 언제나 드라마는 현실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by meditator 2017. 9. 28. 16:47

9월 26일 종영한 tvn월화 드라마 <아르곤>은 생소한 원자 기호 18번의 기체 아르곤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산소가 다른 물질들을 산화시키지 못하도록 막는 기체 Ar야말로, 8부작의 이 드라마가 가진 의의를 절묘하게 드러낸다. 


촛불 항쟁과 함께 시작한 새로운 시대, 그 시대의 과제 중 하나인 '적폐'를 철페하기 위해, 지난 보수 정권 10년간 '훼절'한 언론을 되살리기 위해 mbc를 비롯한 각 언론사들의 '파업'이 시작되는 즈음에 시작된 '사실을 통해 진실을 보도하고자 고군분투'하는 탐사 보도팀 아르곤의 이야기는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시의적이었다. 

드라마 속 탐사 보도팀 아르곤이 소속되어 있는 HBC의 상황은 현재와 그리 다르지 않다. 기자들은 파업으로 '해직' 당하고 한때 대표적 탐사 보도팀이었던 아르곤은 마감 뉴스로 밀려난 처지. 팀장 김백진(김주혁 분)은 여전히 사실을 통한 진실 보도에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보도 내용까지 사건에 '검열'당해야 하는 팀의 처지는 늘 마감 뉴스의 자리조차 위태롭게 한다. 그런 아르곤에 해직 기자를 대신한 막내 이연화(천우희 분)가 들어와 '용병'이라 눈칫밥을 먹게 되고, '미드 타운 붕괴'사건이 전 사회를 덮친다. 

8부작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아르곤>은 세월호 혹은 그 이전에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을 연상시키는 '미드 타운 붕괴'사건을 다루며, '사실'을 통해 진실을 향해 고전하는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프레임'; 사실의 안과 밖
우리는, 이른바 시청자들, 혹은 독자라는 이름의 '대중'들은 '언론'을 통해 전해진 기사, 혹은 보도들을 '사실'이라 믿는다. 아니 믿기 쉽다. 설사 의심을 하더라도 전 언론이 입을 모아 떠들기 시작하면 자신의 의심을 거두고, 그곳으로 눈과 귀가 쏠린다. 보수 정권 10년 동안 정권이 그토록 공을 들여 기자들을 해직하고, 운영진을 물갈이하며 '언론을 장악'하고자 애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아르곤>은 다시 한번 그 언론을 통해 전해지는 사실이, '프레임' 이란 틀 속에 얼마든지 날조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미드 타운 붕괴 사건을 접한 아르곤 팀은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는 한편, 이 사건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명을 빼앗아간 비극이라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렇게 아르곤이 그곳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에 주목하는 사이, 권력의 하수인이 된 보도국장 유명호(이승준 분)는 '특종'이라는 이름 아래 미드 타운 붕괴 사건의 프레임을 '사라진 현장 소장'의 책임으로 돌린다.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던 미드 타운 보도는 김백진의 책임이란 프레임을 넘어서기 힘들어 보인다. 

언제나 그렇듯, 유명호가 던진 특종을 받아든 각 언론들은 너도 나도 현장 소장을 희생양으로  만들었고, 급기야 사람들이 현장 소장의 가족들에게 몰려가 집단 린치를 가하는 지경에 이른다. 물론 드라마는 아이를 살리고 현장에서 숨져간 현장 소장의 희생을 통해, 그 '집단적 히스테리'와도 같은 프레임을 전복시킨다. 

비록 짧은 8부였지만, <아르곤>의 고군분투는 바로 이 권력과 거기에 야합한 언론, 그들이 마든 '프레임'에 미혹되는 세상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된다. 현장 소장에게 뒤집어 씌워진 프레임, 섬영 식품 안재근 연구원의 자살과 관련된 이중 언론 플레이, 거대 교회 권력 성종 교회의 손해 배상 소송 등등 '보도되는 사실'과, 그 사실 이면의 진실을 향한 싸움이다. 

이는 결국 진실을 향해가는 사실 탐사 보도 아르곤의 '정의로운 언론 행위'를 빛내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상의 모든 보도되는 사실들이 '편집된 사실'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한다. 심지어 <아르곤>은 김백진이 놓친 선광일의 진실과 미드 타운의 실체를 들어 '정의'란 이름의 진실조차 의심하고 판단하기를 요구한다. 

김백진은 말한다. 진실조차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정의롭다고 믿어지는 그 누군가에 의해 가져다 줘서 받아먹는 진실이 아니라, 각자 '프레임'의 틀을 벗고 나와 사실을 통해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이성의 시대에 대한 요구가 <아르곤>이 말하고자 하는 숨겨진 주제이다. 광야에서 온 초인을 기다리고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나부터 정신차리고 제대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 새로운 시대를 채워갈 우리의 과제인 것이다. 



아르곤, 영웅의 결연한 퇴장
<아르곤> 8부의 여정이 빛나는 건 그래서, 그 '프레임'에 갇힌 사실 아닌 사실을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싸움의 과정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도달한 '정의'보다 더 이 드라마가 그간 거대 권력을 향한 싸움을 다룬 드라마들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발하는 건, 그들과의 싸움만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철저했다는 점에서이다. 

용병으로 들어온 이연화에게 김백진은 그로 인해 기자가 되고 싶어서였던 그 '로망'만큼이나 거대한 우상이다. 그리고 그 우상은 '진실을 알리고 싶어' 기자가 되고 싶었다던 그의 말 만큼이나 영웅적이다. 진실을 보도하는데 있어 물러섬이 없다. 

하지만 그와 그의 팀이 추구하는 진실은 늘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한다. 매년 만우절이면 그를 찾아와 아내가 성추행당했다며 행패를 벌이던 선광일의 진실을 자신을, 자신이 선택한 사실을 믿었던 김백진은 쉽게 무시했다. 그가 느지막히 도달한 진실은 죽은 선광일을 구원할 수 없었다. 언론을 바로 세우기 위한 김백진의 9시 앵커 도전은 10년동안 동거동락한 육혜리(박희본 분)의 희생을 발판삼으려 한다. 오합지졸이 될 뻔한 아르곤을 구하기 위한 신철(박원상 분)의 섬영식품 특종은 한 연구원의 죽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미드 타운에 대한 진실 보도가 결국 3년전 자신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아르곤>은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영웅의 탄생대신, 끝까지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언론의 자세를 말한다. 늘 정의 앞에 떳떳한 영웅이 아니라, 늘 의심하고 진실을 추구하지만, 인간이기에 실수하고 구르고 엎어지고 고뇌하는, 과정 속에서의 언론을 말하고자 한다. 영웅 대신 인간이 하는 일로서의 '언론'이다. 

그런 면에서 <아르곤>을 새로운 시대 정신을 추구한다. 우리는 늘 영웅을 갈구한다. 그리고 영웅은 난세에 태어나듯, 어려운 시절 속에 우리들은 새롭게 탄생되는 각 분야의 영웅들에 열광한다. 하지만, 이제 <아르곤>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그 누군가 몇 사람의 탁월한 영웅 대신, 인간의 일로서 만들어 가는 '정의'를. 

아르곤의 우상, 김백진은 그래서, 결국 의도했던 의도치 않았던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정의로운 언론의 수호자로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리고 용병이었던 그러나 김백진의 실수조차 기사화할 수 있는 용기를 냈던 이연화는 정규직 사원이 된다. 정의는 몇몇의 영웅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깨어있는 포기하지않는, 그리고 책임지는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가능하다. 상을 받는 대신, 자신을 앞서간 많은 선배 동료 언론인에게 공을 도린 김백진의 마무리 수상 소감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by meditator 2017. 9. 27. 15:30

제목이 곧 '메이커'가 된 <응답하라> 시리즈, 이 시리즈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핵심 코드 중 하나는 '낭만적인 복기'일 터이다. 마치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예전이 좋았어 라며 과거를 회상하는 '과거부심'인 것이다. 그런 '낭만적 복기'의 시리즈 <응답하라>가 가장 '과거'로 간 시대는 1988. 어쩌면 그건 '낭만'의 마지노 선이 1988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른바 '민간인 코스프레'였어도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으로 '직선제'의 민주주의 시대를 열었던 1987년 이후에야 우리의 현대사는 '낭만'이라는 걸 그래도 논할만한 여지가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란제리 소녀시대>는 저돌적이게도 낭만적이어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은 79년의 한 시절로 시청자들을 이끈다. 아마도 4%의 콘크리트 시청률 기여하는 것 중 하나는 혹시나 또 한 편의 <응답하라> 일까 하고 봤다가 생각외로 심각한 그 시절의 공기가 부담스러워 질겁한 시청자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바로 이 낭만적이지 않은 암울했던 시절의 공기가 바로 유신시대를 마무리해가던 79년의 정서다. 



79년 비극적 정서를 잉태한 첫사랑 
<란제리 소녀 시대>는 <응답하라>처럼 전형적인 '첫사랑'의 삼각 관계 구도로 설정된다. <응답하라>의 덕선이처럼, 나정이처럼, 시원이처럼 '천방지축 유쾌발랄한 소녀' 정희(보나 분), 그리고 그녀가 흠모하는 전교 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 그리고 첫 미팅에서 정희에게 반해 일편단심 정희 바라기인 동문(서영주 분),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 그리고 다크호스로 등장하여 영춘과 손진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혜주(채서진 분)가 그 주인공들이다. 여느 청춘물처럼 서로 얽히고 섥혀 사랑하고 질투하고 갖은 해프닝을 벌이던 이들의 사랑에 <란제리 소녀 시대>는 '시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한다. 

교수인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전학온 혜주는 여학생들의 '브래지어 끈'을 당기는 모욕감어린 체벌을 하는 오만상(인교진 분)에게 부당함을 제기하는 당당한 여학생이다. 공부는 물론 오자마자 모의고사 전교 1등을 할만큼 발군이다. 전교 회장 손진의 시선을 한 눈에 나꿔챌만큼의 청순한 미모에, 방송반 아나운서를 맡을 만큼 재능까지 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춘 완벽한 혜주, 하지만 손진은 그녀를 외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아버지가 '빨갱이'였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반정부 시위를 주동하고 도피한 학생을 숨겨준 혜주의 아버지는 그 연루자가 되어 하루 아침에 사라진다. 경찰서장인 손진의 아버지는 혜주의 아버지를 빨갱이라 낙인찍으며 혜주 주변에 얼씬거리지도 말 것을 강요한다. 

그 시절 '빨갱이'는 그랬다. '호환마다'보다 더 무섭다고 극장의 '대한뉴스'는 주입을 했고, 6.25전쟁의 레드 컴플렉스를 교묘하게 이용한 정권은 그를 확대 재생산하여 반정부 세력에게 그 '호환마다보다 더한 빨갱이 낙인'을 거침없이 찍어버렸다. 제 아무리 이쁘고 공부 잘하고, 아버지 교수라도 그 아버지가 빨갱이이면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한 것이 되어버린 시절. 



사라진 아버지의 향방을 몰라 혜주는 노심초사하지만, 그런 혜주의 동정을 보고하라 교감 선생이 담임에게 지시를 내리는 시절,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없는 담임은 그 불편한 심정을 학생들의 체벌에 항의하는 혜주에게 운동장 100바퀴라는 화풀이로 표출해 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 혜주가 걱정되어 그 집앞에서 얼쩡거리는 것만으로도 경찰서장 아버지에게 뺨이 날아가도록 맞던 시절의 비극을 <란제리 소녀시대>는 첫사랑의 불온한 공기로 담아낸다.

마치 조선 시대의 사랑이 '역적'으로 몰려 하루 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한 가문의 이야기를 통해 '비극'을 잉태하듯이, '난사람'이었던 혜주는 하루 아침에 동네 사람들의 소리없는 외면과 입방아의 대상이 되어 '배척'받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사랑'조차 그 흔한 선남선녀의 꽃길 대신, 그 어려운 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영춘에게 의지하는 곡진한 순애보에 기대는 뜻밖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애증의 여성 연대 
그렇게 혜주가 시대적 비극을 사랑의 비극으로 잉태해 가는 동안, 그 사랑의 경쟁자였던 정희는 혜주와 미묘한 우정의 관계로 전환된다. 제목에서부터 상징되듯 평범한 런닝과 끈 런닝으로 대변되는 '패션'의 갈림길에서 늘 '평범함'의 처지에 아둥바둥거리던 정희는, 그러기에 혜주는 선망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도 아버지는 말끝마다 '가시나'를 달고 살며 딸을 타박했지만, 그 공기와는 다르게 심지어 공부를 잘해도 쌍둥이 오빠 앞 길을 막는다고 대놓고 차별을 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 그 당연한 '차별'에 안간힘을 쓰는 정희는 선생님 앞에서 당당하게 모욕적인 체벌에 항의하는 혜주의 운동장 100퀴의 동반자가 된다. 

혜주가 선뜻 친구가 되자 했지만 좋아하는 손진 오빠야의 마음을 빼앗은 혜주에게 늘 불편했던 정희의 마음은 같이 운동장을 달리지만 그래도 혜주를 앞지르고 싶던 그 복잡한 마음으로 드라마는 절묘하게 엇갈린 우정을 표현한다. 



그리고 오빠에겐 메이커 옷을 사주면서도 정희는 독서실도 안보내주던 엄마가 정작 오빠 대신 독서실을 가는 정희에게 회초리를 드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같이 죽자라며 우산대로 정희를 때라다 결국 정희 방으로 베개를 들고 오는 장면에서, 우리 시대 질긴 모성 연대의 지난한 역사를 고증한다. 

그렇게 <란제리 소녀시대>는 '낭만'이라기엔 무겁고 짖눌려진 79년의 시대상을 절묘하게 드라마로 담는다. <응답하라> 시리즈 뺨치게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 'feeling'을 비롯한 '파파', 'sing' 등 당시의 유행 음악은 이런 시대의 사랑에 아이러니한 낭만을 제공하며 그 운명의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비록 시청률은 응답하지는 않지만 극소의 시청자라도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이라면 그 여운이 긴 음악들만큼 오랜 잔향을 잊지 않을 것이다. 
by meditator 2017. 9. 26. 16:55

영화를 보고 나면 알게 된다. 도발적이게도 이 영화는 이미 <인비저블 게스트>라는 제목을 통해 관객에게 모든 패를 다 보여주었다는 것을. 하지만, 오리올 파올로 감독이 보여준 그 반전의 패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 한 편의 종주는 필수적이다. 


스릴러 영화의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평범한 한 시민이 뜻하지 않은 범죄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 비저블 게스트> 역시 그렇게 시작된다. 유망한 젊은 사업가 아드리안(마리오 카사스 분)은 고립된 호텔 방에서 살해당한 내연의 애인과 함께 발견되었다. 동절기 추위를 피하기 위해 아예 걸쇠를 제거한 창문들, 보조 잠금 장치까지 잠궈진 채 안으로 잠궈진 방,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아드리안과 그의 연인 로라(바바라 레니 분)뿐,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온 경찰은 아드리안을 로라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밀실 범죄의 트릭 속에 갇힌 주인공
에니메이션의 고전이 된 <명탐정 코난>에서 부터 최신 트렌드 추리물 영드 <셜록>까지, 살인 사건이 난 장소가 '밀실'이라 하면, 마치 '게임이 끝났다'는 말처럼 가장 완전 범죄의 필요 조건이 갖추어 진다. 아드리안과 로라가 있던 밀실, 그곳의 살인 사건,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아드리안에게 불리한 증인으로 인한 검찰 소환까지의 3시간이란 제한된 시간을 앞두고 승소 확률 100%의 변호사 버지니아와 아드리안의 숨막히는 '진실 찾기' 게임으로 뻗어나간다. 

승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숨김없는 진실을 털어놓아야만 아드리안을 위한 승소의 계획을 짤 수 있다며 아드리안을 압박하는 은퇴를 앞둔 은발의 여 변호사 버지니아. 그녀의 다그침에 아드리안은 자신이 말려들어가 버린 이 범죄의 트릭에 대해 토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하는 뜻밖의 또 하나의 범죄 아닌 범죄, 각자 아내와 남편이 있었던 두 사람은 은밀하게 만나 밀회를 즐기고 서둘러 돌아가던 중, 뛰어드는 사슴을 피하느라 핸들을 돌리고 그 과정에서 맞은 편에 오던 차가 사고를 당하게 된다. 황급히 사고 차량을 살펴보니 이미 운전자는 숨을 거두고, 그의 사고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아드리안과 로라의 이해 관계는 얽혀 들어간다. 

아드리안은 주장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로라의 제지 때문이었다고. 신고를 하려던 자신을 제지하고, 자신들의 밀회와 사회적 위치를 보존하기 위해 아드리안에게 사고 차량과 운전자의 '수장'을 지시했으며, 이후 그들을 추적해오는 경찰과 협박범에 대한 모든 대응은 오로지 '팜므 파탈'같은 로라의 의도였다고. 

영화는 로라의 살인 사건 뒤에 숨겨진 또 하나의 뜻밖의 교통 사고와, 그 우연한 사고를 덮기 위해 아드리안과 로라가 벌이는 고군분투(?) 과정에서 빚어진 경찰과 존재를 알 수 없는 협박범과, 그리고 아드리안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장시킨 사고 차량 운전자의 시신만이라도 알려달라 애걸하는 그 부모 가리도 씨 등과의 접점을 로라 살해범 아드리안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재구성 과정으로 다각도로 접근해 들어간다.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
그 '밀실'에 자신들 두 사람말고 그 누군가가 또 있었다고 주장하는 아드리안, 그 주장만큼 아드리안은 그 일련의 두 사건 사이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그런 아드리안을 제한된 시간과 그가 내뱉는 진술의 헛점을 지적하며, '진실'을 파고든다. 

올해의 기업인 상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아드리안, 그는 자신은 그저 로라의 함정에 걸린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진실을 말해야만 너를 도울 수 있다는 버지니아의 압력은 시간이 갈수록 결백했던 아드리안의 진술, 그 이면의 것들을 드러내도록 만든다. 

2017 전주 국제 영화제 초청 작품으로 관객들의 호평을 받고, 국내 영화사를 통해 '리메이크'가 결정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바람난 사업가와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사건이라는 어찌보면 가장 통속적이며 대중적인 서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통속적'인 이야기를 한 건의 실종 사건과 또 한 건의 밀실 살인 사건이라는 두 건의 사건과 그 사건과 사건 사이에 벌어진 모든 변수를 놓고 벌이는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을 통해 마치 한 편의 추리 소설을 읽듯 추리의 향연을 벌인다. 



진실을 다그치는 변호사, 그 변호사의 다그침을 피해 어떻게든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은 채 두 개의 사건 사이를 피해 가보려던 아드리안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검찰의 소환과 '고통없는 구원은 없다'는 변호사의 압박 사이에서 자신에게 덜 피해가 가는 변수를 제시해 간다. 그리고 그 변수의 과정은 바로 우리가 이 영화가 제시한 두 개의 사건에 대해 '추리'해볼 수 있는 모든 변수들이다. 똑같은 사건이 '프레임'을 어떤 각도로 잡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한껏 내보인다. 그렇게 변수에 변수를 돌다리를 두드리듯 건너간 변호사와 관객들은 결국 그 어떤 가능성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의 지점에 도달하게 되고, 영화는  범죄의 늪에 빠진 주인공에게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확실한 희망' 대신, '반전'을 선사한다. 

그 '반전'은 관객으로 하여금 복기하도록 만든다. 애초에 자신이 밀실 살인 사건을 목도하고 했던 의심을, 아드리안의 최초 진술에 대한 의혹을, 그리고 애초에 감독이 그 모든 진실을 다 흘뿌려놓았음에도 아드리안의 그 초조한 '평범한 이의 억울한 누명'이라는 결정적 복선 앞에 가장 분명한 의심 대신 자신 역시 갈짓자를 걸었음을, 그리고 바로 이 갈짓자의 걸음이 바로 <인비저블 게스트>의 묘미였음을. 추리 소설의 진짜 묘미는 드러난 진실도 진실이지만, 그 진실을 글쓴이와 함께 고민하고 모색하고 추적해 가는 과정의 매력이다. 사건의 진실 만큼이나, 그 진실을 찾아가는 갈짓자 걸음의 묘미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그런 의미에서 <인비저블 게스트>는 밤을 세워 손에 땀을 쥐고 읽은 한 편의 추리 소설과도 같다. 
by meditator 2017. 9. 25. 16:40
'동심을 바탕으로 하여 어린이를 위해 쓴 산문 문학의 한 갈래', 이 정의의 문학이 바로 '동화'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동심'이란 무엇인가? 생뚱맞지만, 일본의 에니메이션 <짱구>를 예를 들어보겠다. 아이들을 한참 키우던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이 에니메이션 <짱구>를 못보게 하기 위해 실랑이를 벌인 기억을 가진 부모들이 있을 터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매번 못보게 하는데 어린이 채널만 틀면 자주 나올 뿐더러, 아이들이 참 좋아했다. 어른들이 보기엔 종종 '선정적(?)이기 까지한 그 내용을 아이들은 재밌어 했다. 이런 식이다. 어른들이 자라던 시절 가장 즐겨보던 백설공주니, 신데렐라를 이제는 좋은 동화라고 하지 않는다. 심지어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용어까지 생겨날 지경이다.

가치 판단을 제쳐두고,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를 되새겨 보면, 굳이 '잔혹 동화'란 범주를 따로 둘 필요가 없을 만큼 적나라했다. 왕비는 질투와 시기에 눈이 멀어, 의붓 딸을 죽이려 했고, 심지어 요리를 해서 먹고자 했다. 그런 왕비에게 주어진 벌은 뜨겁게 달군 무쇠 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주는 것이었으니, 요즘 웬만한 형벌 저리 가라다. 자신의 저주 걸린 발을 스스로 자른 '분홍 신을 신은 소녀'는 어떻고. 그 반대도 있다. 착하게 잘 지내니, 굴러 들어온 호박이 황금 마차로 변하기도 한다. 아니 왕자와 결혼을 꿈꾸던 바닷 속 공주는 허망하게 물방울로 변해버리기도 한다.

예전 사람들이 요즘의 사람들에 비해 '속물'이라서 저런 동화가 오래도록 '회자'되었던 것일까? 오늘날 출판물의 형태로 정화된 동화보다 훨씬 '잔혹'했던 원형질의 동화가 오래도록 '스테디셀러'였던 의미는 어쩌면 가장 본원적인 '인간의 욕망과 그 가감없는 구현의 결과물을 적나라하게 반영'해 주었다는데 있지 않았을까? 백설 공주와 신데렐라를 부정하는 어른들은 정작 여전히 tv를 통해 변종된 '동화'의 형태로 이 시대의 사람들의 숨겨진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드라마들에 매료된다. 우리 시대 최고의 인기 작가 김은숙의 드라마는 바로 저 '동화적 욕망'의 가장 충실한 구현이 아닐까? 바로 그 가장 '솔직한 인간의 원형'을 통해 '성장의 치유제'가 된 이 시대의 동화 한 편이 찾아왔다. 바로 <몬스터 콜>이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가 들려 준 동화
말기 암에 걸린 엄마와 사는 소년 코너, 그에게 학교는 '폭력'이라는 통과 의례를 거쳐야먄 하루 일과가 끝나는 곳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밤, 그의 방에서 바라보이던 언덕 위의 느릎 나무가 '몬스터'가 되어 찾아왔다.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색과 다르게 그에게 '동화'를 들려주겠다는 몬스터, 하지만 그냥은 아니다. 언제나 동화 속 '이종의 존재'들이 그러하듯, 몬스터는 그에게 자신의 이름을 맞추라거나, 혹은 비밀의 보화 대신, 소년이 만든 동화를 요구한다.

몬스터가  들려준 첫 번 째 동화, 우리가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었을 법한 계모 왕비와 왕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랑하는 이와 도망을 친 왕자는 그녀를 잃고,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 마녀 왕비를 물리치고 왕국의 계승자가 되었단다.
그런데, 동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치 100년의 잠에서 깨어난 숲 속의 공주가 뜻밖의 식성을 보이듯, 왕좌를 차지하고 훌륭한 성군이 된 왕자의 뒷담화에는 뜻밖의 진실이 숨겨져 있다. 두 번째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신실한 목사와 그를 시험에 빠뜨리는 마법사같은 약사의 이야기 역시 숨겨진 진실을 가지고 있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우리는 언제 '성장'할까?
어릴 적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은 '흥부'처럼 착한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고 곧이 곧대로 믿었다. 하지만, 머리가 좀 더 커지고 단단해 지는 그 언젠가부터, '흥부'가 좀 '바보'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식이다. 어린 시절 전달된 '이야기의 교훈'들을 곧이 곧대로 '수용'하던 소극적 수용자'들은 조금 커지자, 그 이야기를 '시시'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몬스터'의 힘을 빌어 '사고'를 친 코너는 한결같이 어른들에게 묻는다. 저에게 벌을 주지 않나요? 저를 야단치지 않아요? 아마도 이 영화의 가장 큰 '복선'이 될 대사이다.

어른들은 코너를 그저 엄마가 아픈 불쌍한 아이로만 '대상화'시킨다. 하지만, 정작 '몬스터'에 의해 결국 드러난 코너의 속내는 그보다 복잡하다. 왕국을 자신의 것으로 되돌리기 위해 손에 피를 묻힌 왕자나, 한밤중 약사를 찾아간 목사처럼. 그리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증거이다. 어른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듯 코너는 그저 엄마를 잃는 것만을 생각하는 단순한 아이만이 아닌 경계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몬스터의 동화는 그래서 마치 옷의 겉감과 안감처럼 두 개의 전혀 다른 질감의 속살을 가진다. 세상에 알려지는 이야기와, 미처 드러낼 수 없었던 속사정이라는, 그리고 코너는 그 이면의 속살을 가진 이야기들을 발판 삼아, '폭력'으로 밖에 표출 할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볼 용기를 얻는다. 그 '용기'의 관건은 가장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 진솔한 모습은 비겁하고 때로는 용렬하며, 심지어 '도덕'이라는 잣대에서는 한참 비켜 선 날 것 그대로의 인간이다. 소년은 질타하지만, 몬스터는 그가 들려준 동화 속 주인공 그 누구도 힐난하지 않는다. 그냥 그런 속사정을 지니고 살아가는게 인간이라는 듯. 마치 조금은 머리 커져버린 우리가 '놀부전'을 탐닉하게 되듯이 말이다.

소년은 무시하지만 어느 덧, 스스로 용기를 내어, 자신이 외면했던 악몽을 직시한다. 그리고 그 악몽 속에 숨겨진 용납할수 없었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소년에게 '몬스터'는 자기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몬스터 콜ⓒ 롯데 엔터테인먼트
<몬스터 콜>은  꼬리에 꼬리를 문 '동화'이다. 소년 앞에 나타난 몬스터, 그 설정 자체가 동화적이지만, 한 술 더 떠서 몬스터는 나타나서 '동화'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동화 속에는 또 다른 잔혹 동화가 숨겨져 있고, 그 동화와 잔혹 동화의 과정은 일그러진 욕망으로 표출된 소년의 해프닝과 궤를 같이 한다. 누군가에게 맞는 걸 넘어서 스스로 '파괴자'가 되어가던 소년의 파국을 '몬스터'와 '동화'는 욕망의 배출이자, 정화의 동화가 되어, 소년을 이끈다. 할머니가 꽁꽁 잠궈놓았던 엄마의 방에서 만난 스케치들, 그리고 마지막 엄마와 눈을 맞추던 몬스터까지. 영화는 충실하게 또 한편의 동화를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 우여곡절의 동화를 통해 그저 엄마와의 이별이 싫고, 엄마의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던 소년은, 이제 엄마를 보낼 수 있게 '성장'한다. 그렇게 거대한 성장의 담론은 소년은 슬프지만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답니다 라는 성숙의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몬스터'라니 정말 괴물 영환줄 알고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부모들은 내내 칭얼거리는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 했다. 코너라는 소년의 이야기지만, 오히려 영화는 아직도 tv 속 동화에 위로를 얻는 어른들에게 필요한 몬스터 동화이다. 자신을 다져넣고 욕망을 거세하며 사는 것이 '어른'이란 여기며 사는 이 시대의 '어른이'들에게, 솔직담론으로서의 <몬스터 콜>은 결국 눈시울이 붉어질 수 밖에 없는 어른을 위한 찐한 동화 한 편으로 다가간다.
by meditator 2017. 9. 23. 17:39

언제나 그랬다. 정권이 바뀌면 전리품처럼 야심차게 백년지대계라는 교육 제도부터 야심차게 뜯어 고치고자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대입 제도 3년 예고제도 무색하게 김상곤 교육부 장관을 중심으로 수능 제도 개편안을 밀어부치려 했다. 지금의 복잡한 수시 지원 방안을 간편하게 고치고, 학생부를 투명하게 관리 강화에 방점을 둔 개편안은 당장 올 대학 입시부터 실행을 강행하려 했다. 하지만, 최근 학생부를 둘러싼 문제 의식의 격화와 함께 학부모들의 반발이라는 여론에 밀려, 수능 제도 개선은 한 해를 유보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그런 가운데 9월 18일부터 방영된 다큐 프라임 3부작 <4차 산업 혁명 시대 교육 대혁명>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능 제도 개선 논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식'인가를 질타하고 있다. 




세상은 이미 변화하고 있다. 
일본의 한 호텔, 투숙객이 호텔에 들어서자 그를 맞이하는 건 공룡 모습을 한 AI 직원이다. 호텔의 수족관에는 AI 물고기가 유영하고, 각 객실 손님의 요구에 맞워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주는 직원 역시 AI다. 심지어 수고했다는 칭찬에 온 몸을 흔들며 반응한다. 

미국으로 카메라의 시선이 옮겨진다.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알라딘, 그곳 물류센터에서 일하던 처남과 매형은 이제 새로운 직업을 알아보는 중이다. 그들이 하는 일을 이젠 AI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익숙한 드론의 영역은 농약 살포, 배달, 고공 촬영 등 다양하게 뻗어나가고 있는 중이고, 수학, 과학 분야의 많은 정보를 저장한 인공 지능 슈퍼 컴퓨터는 이제 의학 분야에서 진단에서 치료법 처치까지 의사의 정확도를 뛰어넘고 있다. 학교라고 다를까, 선생님이 전달해 주는 지식은 이제 AI의 몫이 되어가고 있다. 

다큐는 말한다. 4차 산업 혁명 이후의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지 그 누구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그 한 가지는 AI로 인해 인간은 일자리를 빼앗길 것이며, 상당수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루 8시간을 일하면서도 정확도가 떨어지는 인간과 24시간 쉬지 않고 일하며 불평 불만이 없는 AI는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다.

선생님도, 의사도, 물류센터 직원도, 배달도, 농사도 다 AI가 해주는 세상, 인간의 설 자리는 없을까? 그 해결 방법은 뜻밖의 곳에 있다. 영화 <트랜스포머4>에서 사막 경주용 자동차로 등장했던 랠리 파이터. 이 차를 생산하는 건, 3D 프린터, 3D 프린터를 활용하여 하루에 한 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자동차를 만드는 건, 온라인의 전 세계 사람들. 즉, 다큐가 주목하는 4차 산업 혁명 시대 '인간의 살 길'은 바로 '창의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한 협업'체계이다. 머리를 맞대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아이디어만이 4차 산업 혁명 시대 인간의 쓸모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더 많은 지식을 아는 건 이제 '교육'의 중심이 될 수 없다. 
클릭 한번으로 AI를 통해 지식을 전달 받을 수 있는 세상, 선생님의 역할과 의사의 역할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선진국의 발전을 따라하는 것으로 '성장'을 거듭해온 우리의 교육에서 '더 많은 지식'은 유효한 것이었지만, 이제 4차 산업 이후 '답이 없는 신세계'가 도래하는 시점에, 기존의 '지식 전달 위주'의 교육은 이제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창의적 협업'이란 무엇일까? 하버드 대학에는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지 않은 구 시대의 칠판이 교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만나 토의하고 토론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라는 무언의 압력이다. 그 결과 하버드의 두 한국인 대학생은 서로 '이론'과 '실험'의 다른 분야 학생이지만, 그 칠판에서 만나, 새로운 연구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런 식이다, 분야, 전공, 교수, 학생, 이런 기존의 프레임이 이곳에선 그 틀을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이게 바로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창의적 협업'이다. 

이런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세계의 교육 제도는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4차 산업 혁명 시대를 고민하던 일본은 새 시대에 맞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 맞추어 IB 교육 제도를 도입하고, 2020년까지 객관식 대입 시험 센터를 폐지한다 발표했다. 특정 과목에 연연하지 않고 글로벌 인재 양성에 목적을 두고 쌍방향 소통의 교육 방식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국제 바깔로레아) 교육 방식을 채택했다.

일본의 새 교육 제도와 우리의 수능을 양쪽 학생들의 시험을 통해 비교해 본다. 우리의 수능 문제는 긴 지문과 5지 선다형의 선택 문항이다. 이 시험지를 본 IB 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당혹스러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IB 식은 한 시를 제시하고, 이 시의 문학적 해석을 쓰는 식이기 때문이다. 한번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시험, 그에 반해 자신의 서술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평가의 여지가 있는 시험.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의 현실이 등장한다. IB 시험을 친 우리 학생의 반응, 객관적 채점에 의문을 제기한다. 바로 이 지점이다. 수능 시험 제도 하나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고, 학생부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나라에서, 과연 이 서술형의 창의적 시험 제도가 가능할까?



학교의 변화도 주목할 만하다. 
2012년에 설립된 샌프란시스코의 미네르바 스쿨은 캠퍼스와 강의실이 없는 4년제 대학이다. 전세계 7개국의 기숙사를 옮겨다니며 전세계의 학생들과 교류하며 온라인 토론을 중심으로 한 거꾸로 수업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의 아시아 허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싱가폴의 변화는 대표적인 대학 난양 공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 역시 모든 수업을 동영상으로 미리 예습하고 수업은 학생들의 토론과 토의의 거꾸로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프랑스 자동차 회사와의 자율 주행차 협력을 비롯 7000 여개 글로벌 기업과의 산학 협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교수의 역할은 지켜보며 조언을 하는 것에 그친다. 세계 11위 대학의 현재이다. 
전문가들은 새로운 시대는 블루 칼라와 화이트 칼라라는 기존의 분류 대신, 4차 산업 혁명의 새로운 기술력을 습득한 뉴 컬러와의 또 다른 계급적 구분이 사회의 차별을 낳을 것이라 예고한다. 

물론 우리나라라고 해서 그저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지력, 심력, 자기 관리력, 인간 관계력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5차원 수용성 교육이 중교등학교 현장에서 도입되어 '자기 경영서'를 쓰며 자기 주도적 학습 활동을 유도한다. 카이스트에서는 EE CO-OP 인턴십 프로그램이 도입되어 3,4학년들이 전공 관련 기업에서 6개월간 인턴쉽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5차원 수용성 교육이란 좋은 제도가 입시 제도와 학습 위주의 수업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의 반발에 부딪쳐 무력화도기십상이다. 

전문가는 시험의 변화을 선행적으로, 제도와 학제의 변화가 뛰따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연 일방적 지식 전달의 교육 방식, 교수, 선생의 권위, 그리고 학제의 개편이라는 이 엄청난 변화를 현재의 입시 위주의 교육 방식이 수용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 그 존재의 가치를 증명하느냐, AI에게 직업도 주도권도 빼앗기느냐, 그 기로에 선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는 생각보다 빨리 성큼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다큐는 우려스럽게 우리의 교육 제도를 바라본다. 


by meditator 2017. 9. 21. 16:13

슬슬 '사교육'에 가성비를 따지기 시작했다. '못먹어도 고' 였던 부분에서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는 건, 결국 현재의 '사교육'이 '인풋'한 만큼, '아웃풋'의 효과를 내지 못하지 않나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지금의 사교육이 '남는 장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이다. sbs스페셜이 지난 9월 10일에 이어, 17일 방영된 <사교육 딜레마> 1,2부가 출발한 문제 의식이 바로 '사교육의 가성비'이다. 


다큐의 시작은 '통장에서 용난다'라는 우스개 소리가 공감을 얻는 요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통계청 조사 결과 월평균 사교육비 25만 6000원, 하지만 이건 전체적인 평균 수치일 뿐이다. 우리나라 중산층 평균 소득이 450만원으로 산정했을 때, 현실은 이 보다 아이 한 명당 이보다 훨씬 많은 사교육비가 들어가고 있는 현실. 30년을 직장 생활을 한다 했을 때 집값에 과중한 사교육비를 부담하고 나면 정작 두 부부의 '노후 자금'은? 이란 적자 계산서가 나온다. 





사교육 몰빵의 적자 계산서, 가성비는?
예전이야 집안에서 자식 한 명이 잘 되면 온 집안 식구가 그 덕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물론, 자식 농사를 잘 지으면 부모들이 '벤츠'타는 것이 자명한 결과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사교육 시킬 돈이 있으면 차라리 그 돈으로 '포크레인 두 대'를 사서 하나는 자식에게 굴리게 하고, 또 한 대는 임대를 하는 것이 수익성 측면에서 낫다는 '가성비'가 등장하는 시절, 부모들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현실은 7~800명이 정원인 과학 영재 학교를 보내기 위해 초등 5학년때부터 그 100배가 넘는 학생들이 영재고를 지망하여 각종 사교육 레이스를 질주하는 시절, 과학 영재고뿐인가, 사교육의 메카 강남을 피라미드의 꼭지점으로 하여, 온 국가의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사교육'의 정글에 내던지고 있다. 그 결과 아이들은 '한껏 하고픈 것을 하며 뛰어놀며 창의력을 키워야 하는 시절'에 '뛰어노는 법을 배우는 학원, 창의력을 키우는 학원'까지 전전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왜 부모들은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해 사교육에 매진하는 학부모들은 항변한다. 과학 영재고는 가지 못할 지라도 상위 1%의 교육이 아이에게 더 나은 선택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이 사회에서 더 나은 기회의 안전망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정작 그 모든 안정망과 기회를 위해 청소년의 시절을 저당잡힌 카이스트 출신의 여행 작가는 '그러면 행복은요?;라고 반문한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한 대안으로 다큐가 제시하고 있는 건, 사교육 없이도 '아이 양육'에 성공한 '시크릿'의 공유이다. ㅣ



사교육 없이도 잘 크는 시크릿?
그 '시크릿'의 대안 첫 번째는 충남 아산의 예꽃재 마을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뛰어노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부모들의 생활 공동체 예꽃재 마을. 이곳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이집 저집 이 마당, 저 마당을 뛰어놀며 놀고, 놀고, 또 논다. 초등 4학년 이제 공부에 신경쓸 나이가 되었다는 이웃 학부모의 충고 대신 비록 성적표에는 미흡하다지만 아이 본인이 이해하고 있다면 됐다는, 심지어 굳이 고등학교, 대학교를 갈 필요가 없다는 학부모들의 공동체이다. 

그 다음에는 아빠가 주 교육자로 나선 이상화씨네의 '몰빵 교육법'이다. 큰 아이를 낳고 큰 병을 앓는 바람에 아이들의 교육에 나서게 된 아빠는 이제 그만의 방식으로 큰 아이를 하나 고등학교에 보내고, 작은 아이 교육을 전담하고 있다. 안하는 듯 하면서 아이와 도서관을 놀이터로 삼고, 안하는 듯 하면서 영어, 컴퓨너, 수학 공부를 시키는 아빠의 모든 관심은 웬만한 사교육 이상의 효과를 낳는다. 

마지막 주자는 현대판 맹모 삼천지교이다. 유명 학습지 대표 김준희씨네 부부, 어려서 부터, 스스로 선택을 하게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도록 만들었던 이 부부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오히려 강남 8학군이 아니라, 외딴 강화도 주택으로 집을 옮겨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고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고 했다. 

2부의 다큐가 말하고자 하는 건 아마도 그런 것일 듯하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간을 줘라. 아이들에게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감을 부여해라. 억지로 무언가를 강요하지 말고,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공부에 관심을 가지로록 유도하라. 아이들은 아낌없이 주는 만큼 자라는 나무와도 같다. 

물론 현재의 거의 '학대'에 이르른 사교육 몰빵의 현실에서 저건 가장 기본적인 되새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프로그램을 본 학부모들이 그런 다큐의 취지에 공감할 수 있을까?



사교육이 필요없는 시스템이 먼저다. 
외려, 다큐에서 보여지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교육의 방식을 바꾸면 대학에 잘 갈 수 있어요로 비춰지지 않을까? 충남 예꽃재 마을에서 실컷 뛰어놀던 아이들은 청소년기에 이르자, 스스로 대학을 가겠다, 학원을 가겠다며 나선다. 아버지와 함께 도서관을 가고, 책을 읽던 아이는 4개 국어에 능통하여, 가장 유명하다는 자사고 하나고에 입학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명 학습지 대표의 네 아이들은 이른바 명문대도 부족하여, 의학 전문 대학원에, 치의학과 대학원 생이다. 

다큐가 제시하고 있는 건,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붐을 이루었던 '대안학교'나 '홈스쿨링'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닐까? 아니 그게 아니면, 단지 이상화씨의 말처럼 '돈을 들여 남에게 시키는 사교육이 아닐뿐이지, 아빠가 거의 컨설턴트 수준으로 1;1 마크하는 또 다른 형태의 사교육일 수도 있다. 

이미 교육 시스템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대안 학교나 홈스쿨링이 존재함에도, 왜 '사교육' 범람의 현실은 변화되지 않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다큐가 그 답을 보여주고 있다. '사교육'의 '가성비'가 문제되고 있는 현실, 다큐는 이런 시크릿의 방식으로도 아이를 잘 교육 시킬 수 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보여지는 건, 이렇게 해도 좋은 대학을 갈 수 있어요 인데, 그 방식이 '사교육'보다 오히려 시청하는 학부모들에게는 버겁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대도시에서 맞벌이를 하며 혹은 한 부모 가정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충남의 예꽃재 마을은 비록 대도시 아파트보다는 싸겠지만 그림의 떡이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 부모가 생이별을 하며 전적으로 교육에 매진하는 이상화씨네의 방식은 이미 우리 나라에서 비일비재한 기러기 가족의 또 다른 양상일 뿐이다. 유명 사교육 업체 대표의 사교육없이 성공적인 자녀 대학 진입기는 말 그대로 '아이러니'다. 

1부의 마지막, 평범하게 살아가는 학부모들의 바램은 소박하다. '사교육은 힘들어요, 공교육에서 다했으면 좋겠어요.' 결국 시스템이다. 더 나아가 유명 대학을 가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다. 경향 신문에 연재된 일본 학부모의 연재기 중 <박철현의 일기일회> 역시 공부하지 않는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다. 형편이 여유롭지 않아서, 학원을 다니지 않아도 방학 중에 참여해야 할 각종 행사가 많아서, 굳이 비싼 돈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배울 수 있는 동네 센터가 있어서 등등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 중 결국 결정적인 건, 일본 사회가 업종과 상관없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인정해 주고 있다는 이른바 '신분상승의 욕구가 없는' 분위기이다. 

당장 추석 연휴, 정부가 내세운 10일 간의 연휴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근 연휴를 이용하여 해외 여행도 가고 그러는 사람들은 대기업이나, 그에 부합되는 위치의 사람들이다. 심지어, 중소기업이나, 그 이하의 직종들은 10일을 다 놀지도 못한다. 월급, 대학생들에게 눈을 낮추라고 하기 전에, 중소기업 직원과 대기업 직원의 월급을 똑같이 해줘보라. 비정규직 직원이라 해도 추석 연휴 페이 걱정없이 다 놀고, 여행 다닐 수 있다면 굳이 왜 애를 써서 아이들을 하루 종일 학원에 가두어 놓겠는가. 이런 기본적인 모색없는 사교육 가성비 비교와 시크릿 제안은 결국 또 다른 치맛바람과 다른 버전의 사교육일 뿐이다. 

by meditator 2017. 9. 18. 15:15

젊음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꽃보다 아름다운 청춘이라지만, 정작 청춘의 시절 자신이 꽃보다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지했던 청춘이 얼마나 있으랴. 오히려 자신이 한창 아름답다는 사실보다도,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주체하지 못한 채 얹혀서 한 시절을 보내곤 하는 것이 청춘의 실상이기가 쉽다. 그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의 고통을 이 시대의 청춘들은 '자존감'이란 대명사로 명명한다.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이 되어버린 자신의 무게는 스스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하는 정의만큼이나 묵직하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지만 늘상 부딪치는 건 그 반대의 현실, 그 현실로 인해 상당수의 청춘들은 '낮은 자존감'을 자신의 고민 중 하나로 꼽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청춘시대2>는 주목한다. 




시즌1의 시절을 함께 보낸 '하메'들, 12부작의 시간만큼 각자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밥 먹을 틈도 없이 알바를 전전하던 윤진명(한예리 분)은 이제 정규직 사원이 되어, 자신이 겪었던 그 '을'의 시간을 겪는 해임달의 '목격자'가 된다. 어렵게 첫사랑을 얻었던 유은재(지우 분)는 실연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투명 유리창처럼 모든 것이 드러나보였던 송지원(박은빈 분)은 그 투명한 유리창 너머의 숨겨진 기억 속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건 예은, 얄밉도록 똑부러지던 그녀는 시즌1에서 겪은 데이트 폭력의 트라우마와 여전히 고전 중이다. 그리고 강언니가 나가고 대신 선머슴애 같지만 그 누구보다 여린 조은(최아라 분)이 합류했다. 

자신으로부터 발화
시즌1의 발화점이 하메들 그들과 부딪치는 세상이었다면, 시즌2 역시 여전히 그녀들은 세상 속에 있지만, 그 발화점의 시작이 자신으로 부터 비롯된다. 늘 갑질의 대상이었던 윤진명이 정규직 사원이 되어 겪는 세상, 여전히 그녀는 자신이 속한 조직에선 신입 사원이지만, 경영 지원팀으로서 그녀는 아이돌 '아스가르드'에게는 회사를 대변하는 '갑'의 존재가 된다. '갑'이지만, '을'의 잔상이 그득한 그녀가 바라보는 '해임달'을 통해, 진명의 또 다른 변화가 움트는 중이다. 시즌 1에서 '당하던' 그녀가, 그녀의 또 다른 버전같은 '해임달'에 자꾸 걸려버리는 모습은, 그러면서도 경영 지원팀으로서의 일에 충실하고자 하는 모습은, '사회'라는 곳에 첫 발을 딛은 그 누군가의 자화상이다. 

알바 한 사람으로서 '을' 개인의 고통에 침몰하고 부유하며 버텼던 윤진명이, 이제 '조직' 화 되어 가는 과정은, 존재감에 대한 또 다른 물음이다. 또 다른 질문은 가장 인간 친화적인 송지원에게서 비롯된다. 휴학을 하고 취준생이 된 그녀는 가장 스스럼없이 예전의 대학 신문사를 드나들지만 그곳이 자신이 없이도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서 진명과는 또 다른 존재의 고독을 맛본다. 졸업반으로 사랑하는 이와의 해피엔딩만을 꿈꾸던 여유로운 대학 생활을 하던 예은에게 대학은 하루 하루 한 시각 한 시각이 자신을 뱉어내는 듯한 세상과의 싸움이다. 은재 역시 지나간 사랑의 그늘과 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자신의 키만큼 세상과의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쓰는 조은이야 말할 것도 없고. 



7회의 소제목이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이제 또 훌쩍 커버린 그녀들이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 지점을 포착한다. 무리 동물인 인간, 그들은 그 '무리'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중심으로 편재되어 있지 않음을 절감하며 '자존감'의 바닥을 친다. 
8회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세상의 중심도 아닌데, 심지어 내가 '착한' 사람도 아니었다니! 류적 존재이면서도 인간의 아이러니한 점은 그 어떤 동물보다도 '나르시즘'이 강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미모에 홀려 물에 빠져죽었다는 그 신화의 dna는 모든 이에게 유전되어 아닌 것같지만 알고보면 모두 한 '자뻑'을 해야 '자존'이 된다고 살아가기가 쉽다. 그런데 <청춘 시대2>의 박연선 작가는 그런 '자뻑의 자존감'에 발을 건다. 

바닥으로 부터 시작되는 자존감
8회 <나는 나를 부정한다>에서 순둥이 은재는 가장 편협한 시선에서 예은을 몰아붙인다. 물론 떠나는 예은의 손을 잡은 건 은재이지만, 첫사랑의 상흔은 예은의 또 다른 사랑에 한없이 옹졸해졌다. 예은이라고 다를까. 자신의 트라우마를 기꺼이 감싸주는 하메들의 친절에 감사하면서도 반발한다. 해임달의 1인 시위는 신입 사원 윤진명에게는 그저 해내지 못한 업무로 불편하다. 찾아온 아버지에게 조은은 너그럽지만도, 까칠하지만도 못하다. 그렇게 하메들은 각자 '이기적인' 자신의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우리 사회에선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으로 흔히 '칭찬'을 든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나를 한없이 칭찬하고, 잘했다고 해야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라고 <청춘 시대2>는 묻는다. 어린 시절 내가 잠들면 세상도 다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던, 즉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돈다 생각했던 그 착각에서 깨어나오는 것이 '자존감'있는 어른으로서의 첫 발이 아닌가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나를 향한 칭찬이 '환타지'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새는 알을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한다. 그 얇은 알 껍질이지만, 알 속의 어린 새에게는 고통스러운 '투쟁'의 과정이다. 엄마의 산도를 머리를 틀어 나와야 하는 신생아의 출산의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듯 '탄생'은 '고통'이다. 마찬가지로 이제 더는 '보호되어야 할' 미성년이 아닌, 진정한 성년이 되는 과정은 자신을 세상 속의 '한 존재'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자각'으로 부터 비롯된다고 <청춘시대2>는 7,8회를 통해 냉정하고 제의한다. 

더는 세상의 중심도 아니고,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건 더더욱 아니면, 심지어 자신이 어쩌면 그리 좋은 사람이지만은 않다는, '인간'의 보편적 모습을 자신의 모습으로 수용하고, 그런 '모자란' 자신을 바라보는 과정을 <청춘시대2>는 섬세하게 그려낸다. 내가 중심이고 잘나서 사랑하고 칭찬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나라서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어야 하는 그 과정으로서의 '청춘이다. 여전히 이 드라마가 청춘의 교과서이기에 모자람없는 이유이다. 
by meditator 2017. 9. 17. 02:57

개봉 5일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살인자의 기억법>이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설경구, 김남일의 강렬한 연기에 원신연 감독의 절묘한 연출에 힘입은 바 크지만, 최근 <알쓸신잡>에서 다시 한번 존재감을 확인시킨 김영하 작가의 원작이라는 '뒷배'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김영하 작가는 애써 원신연 감독의 연출과 자신의 원작의 거리를 두고자 하지만, 이 글을 쓰는 사람부터 시작하여 이미 영화로 만들어지기 전에 베스트 셀러였던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읽은 사람이라면 과연 이 작품이 스크린에서 어떻게 구현이 될 지에 대한 궁금증이 극장으로 향하는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 같은 소설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구분이겠지만, 마치 80년대 운동권이 추억을 90년대 2000년대의 한국 소설이 '후일담'의 형식으로 다루어 한 장르화 되었듯이, <살인자의 기억법>은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번져나갔던 '기억'에 대한 장르에 속하는 듯 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어패'가 있는 게 세월호 사건은 2014년인데 반해,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 보다 한 해 전인 2013년에 출간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치 '선견지명'이라도 되듯이, 작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를 주인공으로 삼아 '기억'과 '존재'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펼쳐놓으며 세월호 사건 이후, '망각'이란 사회적 정서에 대응하여 애썼던 일련의 흐름에 마중물인 듯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영화와 달리 소설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이코패스 노인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가 기억의 실마리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가운데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실체를 '폭로'하고야 만다. 애쓰면 애쓸 수록 헷갈리는 자신의 존재, 자신이 사이코패스 연쇄 살인범인 건 알았지만, 결국 시간이 다한 모래 시계처럼, 그의 기억이 다한 곳에서 만난 그의 존재는 원신연 감독이 그려낸 딸을 살려내기 위해 애쓰는 최소한의 인간적 미덕을 지닌 아버지 따위도 없이 참담하다. 그저 '살인'의 기회를 얻은 그때 이래로, 죽이고 또 죽여왔던, 한 연쇄 살인범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참담한 목도의 과정을, 김영하 작가는 영화 속 병수가 자신의 흐트러진 기억을 녹음기에 담는 그 장면부터 스크린 위에 펼쳐진 스릴러 영화처럼 구성하여 결론에 도달한다. 

일찌기 <주홍 글씨(2004)>, <오빠가 돌아왔다(2010)> 등 김영하의 작품 다수가 영화화 된 것은 한국에서 드문 그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전작 작가 중 한 사람이며, 발표하는 작품마다 늘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베스트 셀러 작가였다는 점이 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김영하 작가의 작품의 영화화를 설명하는 건 부족하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의 각색으로 2005년 대종상 각색상 수상처럼, 김영하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소설보다 머릿 속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영상적 서사에 공감한다는 점이 '영화같은 소설'로서의 김영하 를 손꼽을 수 있다는 점이 된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176페이지, 장편 소설이라기엔 짧은 분량이다. 내용 역시 '기억'과 '존재'에 대한 구구절절 작가의 사상 대신, 기억을 잃어가는 병수가 헤집고 다니는 기억의 편린들이 '이미지화'되어 그려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는 건, 그 어떤 합리화로도 해명할 길없는 존재의 허무이다. 세월호 이후, 우리 사회가 그토록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그 '기억'의 존재가치를 일찌기 김영하는 설파했다. 흐트러지고 흩어지는 기억의 편린을 잡아 결국 도달한 그 '허무'의 기록을 통해 묻는다. 당신은 기억할 만한 존재인가? 그것은 2013년 허황되고 허무했던 한국 사회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소설같은 영화 
그렇게 휘발되고 마는 허무한 존재의 이야기를 영화로 빌어오며 원신연 감독은 그 포문을 뜻밖에도 주연 설경구의 대표작 <오아시스>의 오마주로 연다. <오아시스>의 마지막 장면 철교 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나 돌아갈래를 외치던 그 설경구는 이제 기억을 잃은 노인이 되어, 역시나 굴 앞에 서서 당혹스러워 한다. 그리고 영화는 그 '당혹'의 근원을 찾아 설경구, 영화 속 병수의 기억의 터널 속으로 들어선다. 

김영하 작가가 원작과 영화의 거리감을 유지하고자 하듯, 기억의 편린 속을 헤매다, 겨우 추스려 붙잡은 존재가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인 골격을 감독 원신연은 뒤집어 버린다.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영하가 그려낸 서사의 구성은 빌려 왔으되, 원신연의 각색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 한국적 정서에서 가장 익숙한 '아버지'의 역사가 된다. 

역시나 사이코패스지만, 이제 알츠하이머를 앓아 잃어가는 기억을 녹음기에 의존하여 붙들어 두려는 병수, 하지만 그에게는 소설과 다르게 진짜, 딸(?) 은희와 그의 앞에 나타난 태주라는 그와 같은 연쇄 살인범이라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 소설은 그 모든 것을 병수에게 나타난 병증으로 휘발시켜 버리지만, 영화는 그들을 실존으로 끌어들이며 사이코패스 병수의 존재에 부피를 더한다. 



그러기에 결국 <살인자의 기억법>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이코패스 병수를 통해 또 한 편의 아버지의 고군분투기로 귀결된다. 또한 실존하지 않은 누나의 존재를 끌어들여, 사이코패스란 그의 연쇄 범죄 행각의 근원을 추적하고, 그 끝에서 핏빛 폭력으로 얼룩진 우리의 가족사를 끄집어 내어온다. 

즉, 소설이 알츠하이머가 심해진 병수 앞에 나타난 자신과 같은 연쇄 살인범과 딸 은희의 존재조차 그의 병적 기억의 산물로 만들며, 사이코패스란 존재론를 허무하게 설파했다면, 영화는 그 존재론을 수용하되, 사이코패스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인간 병수의 생애를 덧칠한다. 오히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이 명징한 한 장면에 집중한 단편 같다면, 원신연의 <살인자의 기억법>은 비록 여전한 아버지의 활극이지만, 그 서사로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깊이를 가진 장편 소설과도 같이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앞과 뒤편, 오마주한 <오아시스>의 장면들이 김영하가 소설 속에서 인용했던 숱한 '시간'에 대한 인용구처럼, 병수란 사람이 불가항력으로 맞닿은 시간에의 허무를 설명하며 영화의 문학적 색채를 더한다. 

그 누군가에겐 원작이 말하는 바, 사이코패스조차 무기력한 '기억'과 '시간'의 주제가, 실존의 가족을 가진 병수를 통해 윤색되었다고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 반대로, 작가가 드러낸 편린의 상념이, 아버지 병수를 통해 '회한의 기억'들로 설득력있게 구현될 거이라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좋았던 것은 원작의 덕택이든, 모처럼 어설프지 않은, 상투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설경구라는 대체 불가한 배우의 호연, 그리고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던 김남길의 존재감이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by meditator 2017. 9. 16. 15:27

mbc에 이어 kbs로 이어진 파업의 여파로 <추적 60분>이 연 2주 결방했다. 그 빈 자리에 '어부지리'의 혜택을 입은 건 뜻밖에도 2017 드라마 스페셜이다. 애초 일요일 밤 10시 40분이 정규 편성이었던 <드라마 스페셜>은 평일 수요일 밤 11시 다시 시청자들과 만남을 갖게 되었다. 지난 주 <우리가 계절이라면>에 이어, 이번 주 <만나게 해주오>가 다시 찾아왔다. 




1930년대 경성의 혼인 정보 회사라니
드라마의 배경은 1930년대 경성, 지금의 서울이다. 정치적으로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하였지만, 그 '식민지배'의 체제 아래, 일본을 통한 서구적 문화가 조선, 그 중에서도 경성을 강타했다. 서구의 문물의 상징인 '백화점'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나날이 새로운 문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두발과, 의상, 언어, 의식에 있어서 그 이전의 젊은 세대와 다른 이른바 '모던 보이, 모던 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17 드라마 스페셜 두 번째 작품 <만나게 해주오>는 바로 이런 '모던 보이'가 활보하는 경성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경성의 모던 보이들은 전통의 관습과 풍속 대신, 서양의 문화에 매료되어 '적극적' 실천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대표적인 실천의 양식 중 하나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자유 연애'다. 일찌기 이광수의 소설을 통해 그 시절 젊은이들의 고뇌로 등장한 자유 연애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강제된 계약 관계인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상대를 선택하고 사랑에 빠지는 '개인주의적' 삶으로의 도약(?)이었다. <만나게 해주오>는 바로 이런 '자유 연애' 지상주의 경성을 배경으로, 오늘날의 결혼 정보 회사가 당시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력으로 드라마를 연다. 

얼룩진 얼굴에 치마 저고리를 입고 결혼 정보 회사를 찾은 수지(조보아 분), 아니 사실은 숙희는 '모던 보이'와의 결혼을 목표로 하는 여성이다. 그 야심찬 목표에 따라 경성 혼인 정보 회사 주최 쌍쌍파티에 난입한 그녀는 막춤을 추며 파티장의 수질(?)을 흐리다 대표 차주오(손호준 분)의 눈에 띤다. 10전 상점 점원인 그녀를 10전 상점 여주인으로 오해한 차주오와 그녀를 아끼는 10전 상점 여주인의 배려로 '모던 걸'로 수지로 변신한 숙희는 차주오의 적극 응원에 힘입어 여러 모던 보이와의 맞선 자리에 나선다. 

1930년대 자유 연애가 부르짖던 그 시대에도 결국 결혼은 '돈과 집안과 외모에 따라 결정된다는 만고불변의 속물주의를 내세운 결혼 정보 회사와 그들의 주선으로 맞선 자리에 나선 수지를 통해 드라마는 당시 '모던 보이'의 실상을 들여다 본다. 와세다 대학이란 허울좋은 간판, 고위직이라는 직위를 이용한 축첩의 시도 등이 매번 '헛물'을 키게 만드는 숙희의 맞선 작전의 실체다. 

결국 맞선 자리의 해프닝으로 총독부까지 끌려가, 정보 회사가 문을 닺게 될 위기에 빠지며 뚜쟁이와 속물 모던 걸이었던 두 사람의 속내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그저 모던 걸의 결혼 작전이었던 드라마 역시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두 청춘의 고달픈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한다. 

우선 수지라고 이름조차 세련되게 바꾼 숙희는 사실 제천 출신의 가난한 아가씨, 아픈 어머니를 경성에 있는 큰 병원에도 데려가지 못한 채 잃은 그녀는 아버지가 강제로 권하는 결혼에 반발하며 스스로 결혼을 통해 성공하고자 경성으로 온 사연이 있다. 그런가 하면, 경성 혼인 정보 회사 대표 차주오는 넉넉한 형편이었지만, 독립군 자금을 대주는 바람에 집안이 온통 빨간 딱지 투성이가 된 집안의 청년으로 아버지가 살아가는 방식에 반발하여 '돈'을 쫓아 혼인 정보 회사를 하는 중이다. 그렇게 알고보면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두 사람은 혼인 정보 회사 대표와 고객이라는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으며 가까워져 간다. 



뜻밖의 만주행
그렇게 가까워지던 두 사람 사이에 장벽은 뜻밖에도 총독부 공문으로 부터 시작된다.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정복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일본은 일본군 위안부로 추정되는 여성 100명의 만주행을 결정한다. 총독부 관리에게 이자를 주러 온 주오의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게되고, 혹시나 끌려갈까 주오의 여동생을 강제 결혼시키려 하다 동생의 가출 사건으로 이어진다. 동생의 가출 사건은 두 사람을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지만, 주오는 그 만주행 명단에 숙희가 있음을 알게 된 후 자신의 마음을 숨긴 채 일본인과의 결혼을 서두른다. 그런 주오가 섭섭한 숙희는 그녀의 로망이었던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 대신 만주행을 택하게 되는데,

달콤쌉싸름한 연애사였던 드라마는 여성 100인의 만주행 공지문으로 인해 식민지 조선의 현실로 냉큼 발을 딛는다. 부푼 꿈을 안고 만주로 향하던 숙희는 실상을 알게되지만 강제로 기차에 태워지고, 그녀를 찾아온 주오는 쌍쌍파티를 이용하여 숙희를 구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나 애초에 전형적인 '로코'의 형식을 띠었던 드라마는 위기의 만주행 기차를 주오와 아버지의 화해를 도구로, 만주로 잡혀갈 뻔했던 100명의 조선 여인들의 탈출 작전으로 변모시킨다. 결국 총독부 관리들의 실패와 실수로 만주행은 없었던 일이 되고 주오와 숙희는 행복한 사랑을 이루게 되었다로 끝나게 되는 드라마. 



시대적 고통을 담아내는 진지한 접근이 아쉽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 드라마는 전통적 결혼에 반발하는 여성과 독립 운동을 하는 아버지에 반발하는 청년이라는 시대적 청춘의 고통으로 일제 시대라는 배경의 깊이를 더한다. 거기에 뜻밖에 숙희에게 닥친 만주행은 2017년에도 끝나지 않는 시대적 고통을 절묘하게 극적 긴장의 소재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문제다. 21세기에도 끝나지않는 민족적 고통, 그 일제 시대 여성들의 강제 공출의 문제를 '로코'의 형식을 드라마가 '절정'의 갈등으로 차용한 지점에 대한 고민이다. 드라마에서 강제로 기차에 태워진 숙희를 구하기 위해 주오는 애를 쓰고, 그런 주오를 발견한 총독부 관리는 총을 든다. 그런 그를 주오의 아버지가 가격하고, 주오가 구한 여성들은 총독부 군인들을 함께 물리친다. 

바로 이 지점이 과연 역사적 비극을 '환타지'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래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라라는 '로코'의 소모적 갈등 도구로 소비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지 모호하다. 그런데 그 모호한 지점에서 주오가 자신의 혼인 정보 회사의 쌍쌍 파티를 활용하여 총독부 경무 국장 요시다를 희롱하고, 아버지의 도움을 얻어 만주로 갈 처녀들을 구하는 과정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시대의 억압적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조악'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의도'는 알겠지만, '안이하고, 편의적'인 구성이라는 생각 역시 지울 수 없다는 점이다. 

로베르트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강제 수용소를 '단체 게임'으로 속인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들을 구하지만, 아버지의 목숨을 구할 수 없는 현실성에 기대어 울림을 가진다. 과연 , <만나게 해주오>가 숙희의 위기로 등장시킨 만주행 강제 징집은 그 역사적 무게감에 비해 드라마 속 장치로 너무 가볍게 처리되었다는 점이 걸린다. 물론 시대적 비극에 상상력이 짖눌릴 필요는 없다지만, 그래도 그 상상력의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더 비극의 무게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려 애써야 하지 않았을까? 두 주인공의 행복하게 사랑했어요란 결말조차 불편해 지지 않을 만큼 말이다. 

by meditator 2017. 9. 1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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