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시리즈는 드라마계에 새로운 시대극의 조류를 형성하게 했다. 1988, 1984, 1994란 특정 연도를 배경으로 그 시대를 살아간 청춘들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낸 세대에게는 추억을,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는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과거'라는 추억을 바탕으로 한 '순정'의 코드가 사랑의 진정성을 더하며 '열광'을 불러왔다. 그 이전에 시대극이라고 하면 '사극'이거나, '일제 시대' 혹은 '6.25'를 배경으로 한 협소한 범주를, <응답하라> 시리즈는 확장, 계발하였다. 물론 <응답하라>시리즈가 처음은 아니었다. <tv소설>이라는 이름 아래 kbs에서 꾸준히 방영되었던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들이 있었지만, 중장년층의 향수에 주로 기댄 이들 아침 드라마와 달리, 전 연령대에게 적극적 호응을 얻어 '시대극'의 새로운 장을 연 것이다. 




<응답하라>의 70년대 확장판 
그리고 9월 11일 방영된 kbs2의 <란제리 소녀 시대>는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확장된 시대극의 70년대 버전처럼 찾아왔다. 대구를 배경으로 70년대의 시대적, 사회적 배경을 한껏 흐드러지게 풀어내며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그때 그 시절로 이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의 정서를 두고, 동시대를 살았던 친구와 갑론을박한 적이 있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곳에서 자란 두 사람은, 드라마 속 1988년이란 배경을 그려낸 제작진에 대해 호와 불호의 의견을 나누었다. 왜 같은 시대를 공유했음에도 그 '추억'에 이견을 보였을까? 그건 아마도 같은 서울 하늘을 이고 살았어도, 가스 렌지와 석유 풍로로 대변되는 삶의 다른 층위가 가져온 다른 반응일 것이다. 그건 아마 언젠가 2017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 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남 타워 팰리스와, 변두리 반지하방의 경험이란 한 시대, 하나의 지역적 추억으로 뭉뚱그려 그려 낼 수 없는 차별적 층위를 가진다. 그런 시대적 다른 경험의 층위가 내는 오류를 방지하기 위해, '시대'를 내세운 드라마들은 '시대'를 대변하는, 그 그 '시대'를 산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밖에 없는 '문화적 코드'에 집중한다. 새로이 방영된 <란제리 소녀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공교롭게도 이 글을 쓰는 이와 같은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여학생도 '교련'을 배워야 하던 그 시절의 여고생이다. 조남주 작가의 <82년 김지영>을 통해 이제 하나의 시대적 코드가 된 82년 김지영 세대, 그 시대의 여성들이 제삿상도 차려줄 수 없어 차별을 당연하게 당하며 자랐던 그 시절에서 한 발 더 과거로 드라마는 발을 담근다. 같은 반의 공부도 잘 하고, 심지어 시도 빼어나게 쓰던 친구가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여상'을 가던 시절, 군복을 입지는 않았어도 교련 선생님이던 수학 선생님이던 이제는 '성희롱'이 될 수도 있는 벌을 받는 게 당연하던 그 시절을 <란제리 소녀 시대> 충실하게 복기해낸다. <란제리 소녀 시대>가 방영되고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온 댓글처럼 '여자도 교련을 했어?'라는 그 신기한 시절이었다. 

70년대만 해도 융성하던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던 대구, 당시에는 흔했던 가내 수공업 수준의 메리야스 공장과 체벌이 시스템처럼 갖춰져 횡행했던 교실을 드라마는 충실하게 구현한다. 그리고 제목의 란제리 답게, 하얀 백런닝과 끈 달린 런닝으로 대별되는 당시 소녀들의 '속옷 로망'을 드라마는 놓치지 않고 그려내며 시대의 세밀화를 완성해 간다. 여주인공과 같은 이름의 기자 역시 무심하게 드라마를 보던 중 그 '끈달린 런닝'에서 움찔하고야 말았다. 여고 시절, 교복 사이로 드러난 그 두 줄의 끈은 정말로 당시 여학생들에게는 '여성성'의 로망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드라마 속 '사물'들은 아마도 그 시절을 살아온 그 누군가의 추억 속의 '어떤 것'들을 자극하며 이 드라마 앞으로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 <응답하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등장하는 주인공들, 전교 회장 교회 오빠 손진(여회현 분)과 그런 오빠를 흠모하게 되는 여고생 정희(보나 분), 그리고 그런 정희에게 미팅 자리에서 첫 눈에 반해버린 순정파 동문(서정주 분)에, 다크호스처럼 등장한 서울에서 온 혜주(채서진 분), 그리고 그 시절 있음직한 동네 총각 영춘(이종현 분)까지, 70년대 시대극의 전형적 요소를 빠짐없이 채워넣었다. 



추억은 여전히 힘이 세다?!
이런 주인공들의 면면은 이미 아침 드라마 <TV 소설>을 통해 되풀이 반복 학습되다시피한 70년대 인물의 전형적 갈등 구조이다. 그리고 <란제리 소녀 시대> 역시 다르지 않다. 첫 회, 교회 오빠 손진과 문학의 밤을 통한 우연한 만남, 그리고 그 첫사랑의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집에서 먼 도서관까지 손진을 보러 가는 해프닝 과정은 <응답하라> 시리즈는 물론, 그런 시대극에서는 '클리셰'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내용이다. 

하지만 뻔한 클리셰의 중복이라 해도 아침 드라마 <TV 소설>이 계속 되풀이 될 수 있듯이, 모처럼 미니 시리즈로 찾아온 70년대의 복기는 70년대스러운 화면과, 그보다 더 70년대의 추억을 끌어오는 음악이란 양수 겹장의 장치로 인해, 추억을 찐하게 자극한다. 그리고 그 '맞춤 양복'처럼 잘빠진 70년대의 추억은 신기한, 그래서 새로운  콘텐츠로 젊은 세대를 솔깃하게 만든다. 적어도 첫 방송의 <란제리 소녀 시대>는 '추억'의 힘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성공적인 듯보여진다. 

과연 79년 여름 대구라는 구체적 시간을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가 그저 '추억'의 복기만으로 끝날까? 10.26를 코 앞에 둔 79년의 그 여름의 끝에서 어떤 성장통을 보여줄 것인지, 8부작이라는 실험적 형식을 통해 그 주제 의식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비록 시청률면에서는 미비했지만 신선한 시도였던 <완벽한 아내>의 홍석구 연출과 윤경아 작가 등 제작진의 그 여정이 궁금하다. 
by meditator 2017. 9. 12. 19:02

공교롭게도 코폴가 가문 모녀의 영화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얼마전 코폴라 감독의 아내인 엘레노어 코폴라가 81세의 감독 데뷔작 <파리로 가는 길>에 이어, 그녀의 딸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엘레노어 감독의 <파리로 가는 길>이야 데뷔작이고 남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원 아래 배우들을 섭외했다 하여 그렇다 치지만, 소피아 코폴라 감독을 그저 '코폴라'란 가문의 이름 아래 두기엔 소피아 코폴라란 이름의 그늘이 무성하다. 엄마와 딸의 영화, 두 모녀는 모두 '여성'에, 그리고 그들의 숨겨진 혹은 억눌린 이면에 촛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엄마의 <파리로 가는 길>이 보다 로맨틱하고 데뷔작임에도 연륜의 깊이가 담겨있다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여성, 그 시간과 공간 속에 담겨질 수 없는 끈끈한 욕망과 생존의 정체성을 적나라하게 담고자 한다. 그리고 칸 영화제는 그런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손을 들어, '감독상'을 수여했다. 




2017년판 <매혹당한 사람들> 
<매혹당한 사람들>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미국의 소설가이자 극작가인 토머스 컬리넌이 1966년 발표한 그의 첫 소설이(<The Beguilled>)다. 그리고 이 소설은 1971년 <더티 해리>의 돈 시겔 감독에 의해 클린트 이스트우스를 남자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로 이미 만들어진 바 있다. 그리고 이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2017년 다시 한번 영화화한다. 

1966년 발표와 함께 평단과 독자의 지지를 받았던 <매혹당한 사람들>은 남북 전쟁이 한참이던 시절, 남부연합 소속의 버지니아 주 마사 판스워스 신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말이 학교지, 전쟁으로 인해 학생과 교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교장과 또 한 명의 선생님,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보다 학교에 남는 것이 처지가 나은 다섯 명의 소녀,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만이 남아 덩그러니 큰 남부의 저택을 북군의 공격과 남군의 침탈로 부터 지켜가며 생존을 도모하고 있는 처지이다. 

부족한 식량을 보충하기 위해 이슥한 숲으로 버섯을 따러 간 소녀 아멜리아는 숲 속에 부상을 입고 낙오된 북부의 병사 존 맥버니를 발견하고 학교로 부축하여 돌아온다. 전쟁으로인해 고립된 공간에 남겨진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 그리고 거기에 뜻하지 않게 들이닥친 한 남성, 이 폐쇄적 공간에서 극단적으로 편파적인 성비의 만남은 다양한 스펙트럼의 이야기를 빚어낸다. 

그 설정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진진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는,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 주인공에 촛점을 맞추어 그 애증의 서사를 펼쳐나간다. 그렇다면 2017년 칸이 감독상을 수여한 소피아 감독의 영화는 어떻게 달랐을까?

존 역의 콜린 파렐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지만, 마사 교장 역의 니콜 키드먼, 선생 역의 커스틴 던스트, 그리고 학생 엘르 패닝 등으로 가면 남성과 여성의 성비만큼이나, 그 존재감의 무게감이 달라진다. 또한 2003년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2006년 <마리 앙투와네트>, 2013년 <블링 링>까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여성'에 방점이 찍힌 영화의 주제 의식이 미루어 짐작된다. 



전쟁이란 시간과 공간 속의 여성들
아멜리아가 부상을 입은 존 맥너니를 데리고 온 마사 신학교, 말이 남부 연합이지, 교장 마사는 남부 연합의 군인들이 자신들이 몰래 키우고 있는 소와 밭 작물을 '공출'해 갈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처지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에게 '북군'은 자신들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몬 성경 속 악마와 같은 '적', 그렇게 생존에 몰린 여성들의 공동체에, '적'이나 그녀들과 다른 성인 북군 존이 들이닥친다. 

파편이 박혀 부상이 심한 다리로 인해 그대로 남군에 넘기면 죽을 것이 뻔한 상황, 기독교 인도주의 정신을 내세워 존의 부상을 치료해주기로 선생과 학생들은 마음을 모은다. 자신의 가족을 전쟁터로 내몰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 그리고 자신들에게도 어떤 위해를 가할지 모르는 '적'이라는 적개심은, 그러나 방어 불능의 부상자이자, 그녀들과 다른 남성이라는 요소로 인해 잔뜩 동여맸던 교장과 학생들의 적대감과 경계심을 허물어 뜨린다. 물론 그 층위는 각자 다르다.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 똘똘 뭉친 교장 마사는 존의 몸을 닥아주며 달아오른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면서도 곧 냉정한 교장의 자리로 돌아가고자 한다. 오빠보다 무거운 존을 이끌며 학교로 데려온 아멜리아는 그를 자신의 친구라 여긴다. 마사 학교의 이방인, 도시로부터 이곳으로 온 에드위나는 처음부터 이방인인 그에게 별다른 경계심이 없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감정적으로 저항하던 캐롤 등등.

영화는 원작에서 등장하던 여자 흑인 노예의 설정을 없애고, 성애의 전면적인 등장 대신, '교장이 존을 좋아한다'던가 하는 식의 뒷담화와 교장과 선생, 학생들간의 묘한 심리적 변화를 통해 작품을 이끌어 간다. 전쟁 속에서 여성들만의 공간을 지켜가야 한다는 절박감, 방어심이, 자신들의 공간으로 들어온 무방비한 남성을 통해, 여성성을 회복하고 도발하며 만개하는 과정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자연스레' 그려나간다. 회복 정도에 따라, 괴물과 같은 적이 아니라, 북군이지만 충분히 자신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신사'라는 것을 깨닫게 된 마사 학교 여성들은 그와의 만찬날 한껏 차려입은 각자의 드레스만큼이나 급격하게 각자의 여성성을 회복해 나간다. 

그러나 애초에 일곱 명의 고립된 여성과 한 명의 남성이라는 불공정한 성비는 '비극'을 잉태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에게 어필하던 그녀들, 그리고 그녀들에 맞추어 그녀들을 대하던 존은 그의 '추방(?)'을 앞둔 어느 날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비극'으로 향한다. 일곱 명의 여성들과 한 명의 남성이 가지는 불안하지만 도발적이었던 동거는, 선의였던 의도적이었던 존의 '실족'으로 불행을 향해 달려가고. 결국 생존 공동체이자, 운명 공동체였던 마사 학교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에 이르른다.

영화는 존이 그들을 자신의 편의적으로 대하는 것에 대응, 혹은 적극적으로 유도해가는 마사 교장과 에드위나, 캐롤, 아멜리아 등의 욕망과 의지에 주목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존을 그곳에 머물게 하는 그 순간에서 부터, 마지막 남군 연합에게 존을 양도할 때까지, 그녀들은 욕망의 공모자이자 생존의 조력자로 서로에게 충실한다. 존이라는 한 남성을 두고 경쟁하지만, 한껏 빼어입고 식사 자리에 앉아, 각자의 매력을 뽐내는 그녀들의 모습은 '위악적 본성'이라기 보다는, 여성성의 가장 자연스런 발로로 소피아 감독은 그려낸다. 하지만 그 여성성이 유약하진 않다. 자신들이 기만당하고 도전받았을 때, 그들은 그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지켜낸다. 전장 속에서 여성이 살아가는 방식으로서의 운명일 뿐이다. 



by meditator 2017. 9. 11. 15:19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은 바 있다. 그러기에 과연 이 지적인 소설이 어떻게 스크린 위에 구현되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은 후 다시 처음부터 뒤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반전'이란 말로 설명되지 않는 작가의 전복적 의도 때문이었다. 글의 구성이 곧 소설의 주제 의식이라 말할 수 있었던 그 '역설'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까?


영화를 본 내 처지는 영화 속 토니 웹스터(짐 브로드밴트 분)의 황망함에 비견될 수 없겠지만, 나 역시도 내가 읽었던 책과 내가 본 영화의 갭 사이에서 잠시 혼돈을 느꼈다. 결국은 같은 반전을 가진 것이었지만,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왔던 두 책과 영화, 그 간극에 토니처럼 역시나 나의 자의적 '해석'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 그 널찍한 행간
영화는 영국 런던의 거리에서 이제는 '빈티지'가 된 하지만 여전히 가치가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 토니의 카메라 상점과 홀로 아침을 맞이하는 토니의 고즈넉한(?) 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이혼한 전처와 홀로 새 생명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의 딸을 등장시키며, 해체된 가족을 지닌 소통불가의 한 가장이었던 사람을 설명한다. 그런 그에게 도착한 첫사랑 베로니카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 그녀의 유언으로 남겨진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그렇게 토니는 자신에게 전달된 뒤늦은 과거의 편린을 통해 과거로 흘러들어간다. 

거기엔 시계를 거꾸로 차는 것이 무리의 자랑인 양 으쓱거리던 또래 청소년들의 부풀음이 담겨있는 고등학교 시절과,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있다. 평범한 패거리였던 토니와 그 친구들과 달리, 선생님과 대등하게 역사를 논했던 에이드리언(조 알윈 분)은 학창 시절부터 남달랐다. 

영화 속 수업의 한 장면으로 등장한 역사 시간, 소설은 그 시간에 보다 천착한다. E.H.카가 말한 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역사의 정의를 놓고, 격돌한다. 에이드리언은 여기서 말한 '과거'에 반기를 든다. 허구의 역사학자 라그랑주를 인용하여,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주장을 펴낸다. 즉, 역사라는 것이 기록물에서 건져진 사실들을 기반으로 저술된다 했을 때, 기록물이라는 것 자체가 그 시대의 전면적인 대변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부터, 그리고 그것을 해석해 내는 당사자의 편협된 사상을 문제로 삼았을 때, 역사는 결코 그 어떤 순간에도 객관적인 사실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에이드리언은 강력하게 주장한다. 

결국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 그것을 기록하는 그 누군가의 자의적인 역사가 될 수 밖에 없는 '상대주의', 거기에 주인공 에이드리언도 작가 줄리언 반스도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에이드리언 자신이 그런 상대주의적 기억 속에 박제되어 사라진다. 



빈티지가 되어가는 세대의 반성
영화는 그의 빈티지한 카메라 상점같은 토니의 삶에 집중한다. 평범하지만 치기어렸던 청소년시절, 거기서 만난 반짝이던 별과 같은 친구 에이드리언, 그리고 60년대의 자유분방했던 대학생 시절, 그곳에서 그가 여전히 카메라를 놓지 못한 이유가 된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가족과 운명적인 만남을 나열한다.  홀로 출산을 앞둔 만삭의 딸과 말도 섞기 힘든 노땅이 된 토니에게 전달된 한 통의 소식으로 그는 망각의 그 역사 속을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현재의 토니와, 그 전처와 딸과의 관계, 즉 해체된 가족과 그 가족에서 놓여난 가장의 모습에 영화는 촛점을 맞춘다. 그에게 배달된 '과거'는 굳은 살이 베겨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마음'을 꺼내들게 만들고, 자신을 반추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동한다. 60년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만난 베로니카, 하지만 그녀를 따라서 간 그의 집에서 만난 그녀의 가족들, 영화는 식사 자리에서 오가는 '지적인 대화'와 여자 친구의 어머니 그 이상인 분위기의 사라(에밀리 모티머 분)를 통해 청춘의 잔해를 설명한다. 그리고 전해진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교제, 그리고 그의 비극적 결말. 

토니의 기억 속 과거는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된 사라의 죽음과 그녀가 그에게 전해주려한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통해 토니는 자신의 빠뜨렸던 젊은 날의 역사 속 행간을 더듬어, 비겁하고 치졸했던 자신의 젊은 날을 목도하고야 만다. 토니의 나레이션이 등장하지만 '사건'을 중심으로 이어가는 영화는 '토니'의 '가족 영화'로 마무리된다. 자신의 비겁했던 과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는 아버지, 그리고 이제서나마 가족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가장이라는 '가족 영화'의 전형적 구조를 따라간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리고 영화와 소설의 범주가 궤를 달리한다. 소설속 청소년 에이드리언이 역사 선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저 다른 역사적 시각이 아니다. 우리가 이른바 상식이라, 객관이라 말해지는 바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다. 그리고 그건, '객관'이 된 세대, 그리고 삶에 대한 문제 제기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황망한 반전으로 등장했던 에이드리언의 삶은 그리고 그게 제기했던 그 객관에 대한 도전, 그는 삶조차 의도했던 그러지 않았든 그 시대가 객관적으로 예단한 삶에 반기를 든다. 

그리고 그런 에이드리언의 맞은 편에 토니가 있다. 영화 속 토니, 그는 노땅이 된 고집불통 할아버지, 하지만 그는 60년대에 청춘을 보내 세대의 전형이다. 자유분장한 사고를 하며, 그못지 않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했던, 하지만 그는 베로니카의 당당함과, 부유하고 지적인 그녀의 가족들 앞에 위축돠고, 그런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 앞에 당당할 수 있는 에이드리언에게 비겁했던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그 졸렬했던 역사의 한 장면을 행간에 지운 채, 자신의 세대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줄리언 반스가 토니에게 보낸 과거의 기억은, 그저 토니라는 노인이 아니라, 60년대 세대에게 보낸 회한의 반성문이다. 즉 이제는 과거의 찬란했던 역사라며 저물어 가는 기성 세대, 그 행간의 비겁을  토니라는 인물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그런 작가의 시대적 야심은 하지만 영화로 오면, 같은 이야기인데 개인사, 혹은 가족사의 범주로 국한된다. 무엇보다 토니, 베로니카, 그리고 그의 가족, 에이드리언의 이 복잡 미묘한 우정, 애정,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계급과 사상의 범주를 영화는 '스캔들'의 차원으로 치환시켜 아쉬움을 남긴다. 아버지의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의 반성을 이야기하지만, 소설<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와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같지만 다른 범주와 빛깔의 이야기들이다. 
by meditator 2017. 9. 8. 13:14

자유로운 개인을 탄생시킨 근대의 시작은 '사랑'의 시작이다. '의지'와 상관없는 관례 결혼으로'사랑'의 존재를 무용하게 했던 전근대의 종식은 연애 지상주의, 사랑 지상주의 시대의 도래였다. 그러기에 이 시대 고달픈 삶에 짖눌린 젊은이들이 '결혼'과 '연애'를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시대의 재앙이 된다. 그렇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시대의 대표적 정서가 된 '사랑', 하지만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칭송받는 사랑은 그것을 수호하는 신이 변덕스럽고 심술궃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듯이 불가해하고 변칙적인 감정으로 사람들을 혼돈에 빠져들게 하고, 그 이타의 감정의 혜택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잔인한 형벌도 다가온다. 많은 철학자들은 '사해동포주의'로 사랑의 승화를 외치지만, 대부분 비극은 '너와 나', 혹은 '우리'라는 협소한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렇게 장황하게 '사랑학 개론'을 줏어 올린 것은 9월 3일 첫 방송을 탄 2017드라마 스페셜의 스타트를 연 작품이 바로 <우리가 계절이라면> 때문이다. 대문을 나란히 한 이웃집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다시피 한 해림(채수빈 분)과 기석(장동윤 분)의 '학교물'의 외형을 띠고 진행된다. 전교 1,2등을 나란히 하며 자전거를 함께 타며 학교 생활을 하는 두 사람. 이제 청소년기의 통과 의례처럼 첫사랑의 홍역을 앓게 된다. 방과 방 사이를 줄로 이어놓을 만큼 가까운 사이인 두 사람. 이제 기석은 수행 평가 과제로 친구들이 장난스레 쓴 해림과의 첫키쓰를 중대 과제로 여길만한 처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일찌기 <겨울 연가> 이래 이제는 고전이 되어버린 담타기에 이어, 담 안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새로운 인연 동경(진영 분)은 순탄할 것만 같던 소꼽친구의 첫사랑 전선에 균열을 가져온다. 

우연히 아빠의 핸드폰을 통해 아빠의 외도를 직감한 해림은 아빠의 뒤를 쫓고 그곳에서 동경을 만나게 된다. 결국 외도에 대한 추적은 오해로 드러나고, 해림과 동경은 동병상련 아닌 동병상련으로 서로의 벽을 조금씩 허물게 되고, 반면 해림과의 첫 키쓰에 집착한 기석은 자꾸 해림과의 관계에서 엇박자를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만남과, 오누이같은 관계의 성장통은, 엄마의 생일날 당연하게 여겨졌던 선물의 엇갈린 행방으로 전혀 다른 질감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아빠가 해림의 오해를 받으며 어렵사리 구한 악보, 해림은 그게 당연히 엄마의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는 엄마의 피아노 학원에 새로온 젊은 여선생, 눈물가득 추궁하는 해림에게 아빠는 그런게 아니라면서도, 그냥 주고 싶었고, 좋았다며 사랑의 불가역성에 손을 들고 만다. 

아빠를 한껏 원망해야 할 해림, 하지만, 해림 역시 자유롭지 않다. 당연히 오랫동안 자신을 지켜보아와 준 기석의 첫 번째 고백을 들어줘야 할 처지, 하지만 정작 해림 역시 새로온 전학생 동경에게 마음을 흔들리고 만 것이다. 



사랑의 아포리즘, 그러나 
뻔한 사랑의 성장통같았던 이야기는 아빠의 외도 아닌 외도(?)를 통해 '사랑'에 대한 아포리즘'으로 변모한다. 뻔한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라는 속된 경구 대신, 여전히 가정에 성실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어른 아빠를 등장시켜, 해림의 뜻하지 않은 두근거림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설명'을 통한 '사랑에 대한 신선한 접근'을 시도해 보고자 했던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과연 이 드라마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헷갈리는 이도저도 아닌 모양새가 되어 버린다. 

<구르리 그린 달빛>의 조연출답게 청량한 젊음을 서정적으로 한껏 분위기로 자아냈지만, 과연 목적한 바가 해림과 기석의 성장통인지, 아니면 사랑의 불가역성에 대한 담론인지, 정작 '절정'의 순간에 머뭇거린다. 아빠의 불가역적인 사랑도, 해림 앞에 등장한 동경의 존재로 '단막극'이란 핑계를 대기에는 '소모적'으로 사용한 드라마는, 성장통 그 자체를 '도구'로 삼아, 청춘의 한 시절을 그저 시각화시키는데 천착하고만 만듯한 결과에 이른다. 아름다운 화면만으로 사랑의 불가역성을 설득하기엔 화면은 너무 단편적 나열이었고, 그렇다고 그게 아닌 그저 성장통을 그려내고 싶다기엔 너무 뻔했다. 아니 뻔하다고 하기에도 불친절했다. 가슴 떨림, 그저 좋아함의 감정은 그저 한 컷처럼 지나치기엔 너무 묵직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한 계절이 지나고, 동경은 스리슬쩍 사라져 버리고, 이제 청소년의 터널을 지나버린 해림과 기석은 우정인 듯 사랑인 듯 기차역에서 해림이 원하던 포옹을 하며 끝이 아닌 이별을 하지만, 지난 과정에서 해림과 기석의 감정을 충분히 설득해 내지 못한 드라마는 그 엔딩조차 눈물로 포장된 아름다운 청춘에 대한 장식처럼 여겨진다. 

오히려 도발적이라도 아빠와 해림의 불유쾌하지만 불가피했던 감정에 좀 더 솔직하게 파고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스치듯 지나쳐버린 기석의 잔인한 목격 장면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보았으면 어땠을까? <구르미 그린 달빛>처럼 시청률이 필요한 미니 시리즈도 아니고, 비록 '멜로의 법칙'을 내세웠지만 '실험작'으로서의 단막극에 대한 기대를 부푼 채 맞이한 첫 번째 2017 드라마 스페셜의 작품치고는,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좀 안이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 그게 아니라면, 매년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단막극 시리즈가 가진 한계를 손쉬운 '멜로의 전략'으로 통과해 보려는 야심이었을까? 

그러기에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다시 원점에서 단막극의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과연 매년 없는 편성을 쪼개어 단막극이 방영되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뻔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화면에 담아,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서일까? <다큐 3일>을 뒤로 제친 채 끼어든 시리즈라면, <다큐 3일>의 목소리를 제칠만한 특별한 존재감을 기대해 보는 건 무리일까?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도 해줄 이야기가 많아서 좋았던 드라마 스페셜이 '멜로의 법칙'으로 돌아와, 단막극의 생존을 위한 '연성화'가 아닐까란 우려가 드는 가운데, 첫 작품 <우리가 계절이라면>은 그 고민의 깊이를 더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멜로는 어찌보면 '근대'와 '자본주의'가 낳은 가장 치명적 상흔이다. 그 상흔을 내세워, 심지어 법칙이란 말까지 등장시켰다면 그래도 최소한 드라마 스페셜이라면, 좀 더 치명적인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저 녹록하게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한 잔이 아니라. 

by meditator 2017. 9. 4. 19:38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명불허전>은 조선시대 침술의 대가로 알려져있는 허임이란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환타지물이다. 국중 허임은 혜민서 의원 생활 10년만에 허준의 도움으로 겨우 왕의 편두통을 치료할 기회를 얻었지만 손을 떠는 바람에 관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던 그가 의문의 인물이 쏜 화살을 맞는데, 뜻밖에도 그가 눈을 뜬 곳은 한양, 아니 2017년의 서울 청계천 한복판이었다. 이렇게 타임슬립 드라마 <명불허전>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조선 시대의 의원 허임이 대한민국 한 가운데 등장한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은 상황을 황망해 하던 허임, 하지만 그는 곧 조선으로 돌아가기를 애쓰는 대신, 이곳 서울에서 의원으로 떳떳하게 자리잡기를 원한다. 임금을 치료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에서 그랬듯이 이곳에서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었을까? 에돌고 에돌아 9월 3일 방영된 <명불허전> 8회는 그 '속없어 보이던 속물' 허임(김남길 분) 선생의 실체를 비로소 드러냈다.


 

왜 허임은 노비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애꿏게도 조선에서 허임의 뒤를 쫓던 건 관군만이 아니었다. 병조참판의 노비 두칠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니 관군은 허임을 잡으려 했지만 두칠은 허임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심지어 그가 잡혀 의금부로 가자, 자기가 죽일 기회를 놓쳤다며 발을 동동 구를 정도였고, 그를 죽이러 불속을 뛰어들었었다. 

그 사연의 시작은 밤이슬을 맞고 양반가의 비밀 치료를 다니던 허임의 행보에서 비롯된다. 혜민서를 찾아 자신을 치료하라 호통치던 병조참판을 거절했던 허임은 그날 밤이 깊자 병조 참판의 집을 찾는다. 높은 분을 백성들이 치료받는 혜민서에서 모실 수 없어 그랬다며 사정을 말한 허임은 병조참판의 신뢰를 얻고 돌아가는데, 그의 발목을 노비 두칠이 잡는다. 생사의 기로에 선 자신의 어미에게 침을 한번이라도 시술해주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병조 참판 정도의 집안 노비가 왜 허임의 발목을 잡고 침 시술을 간청했을까? 이는 조선 시대의 의료 체계를 통해 그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치료받을 수 있는 의료 기관이 달랐다. 왕실이나 관료들은 '내의원'을 통해, 일반 백성들은 '혜민서'에서, 그리고 전염병 치료나 빈민 구제 기관인 '활인서'가 있었다. <성종 실록>에 기록된 노비는 대략 35만명, 인구 대비 공노비가 10%, 사노비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으니, 조선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위에서 보여지듯이 조선 시대 의료 기관 중에 '노비'를 치료하는 의료 기관은 없었다.

<명불허전>의 주인공 허임이 의원이 된 계기만 봐도 당시 노비 등 하층민들의 의료 실상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극중에서도 드러나지만 관노의 아들인 허임은 집안이 가난해 어머니 박씨가 병에 걸렸을 때 의원을 부를 수 없었다. 당시 의료 행위는 허준처럼 약을 쓰는 방법과 허임처럼 침을 통하여 고치는 방법이 있었는데, 약의 경우 약재가 비싸, 서민들이 경우 침을 놓는 방법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가난한 백성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허임 역시 어머니의 침 시술비를 갚을 수 없어 의원 집에서 일을 해주며 눈썰미로 침을 익히기 시작한 것이 그가 의원이 된 계기였다고 역사는 밝힌다. 그러기에 성주 지방의 선비 이문건의 <묵재 일기>에서도 드러나듯서민들은 먼 의료 체계 대신 손쉬운 무당, 점쟁이, 승려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게 백성들에게 조차 먼 의료 체계, 그 중에서도 노비는 더욱 극악한 상황이었다. 극중 허임은 발목을 잡고 매달리는 두칠 형제의 청을 외면하고 병조 참판의 집을 떠난다. 충분히 돈만 밝히는 속물 의원이란 것이 의심되는 상황, 8회까지 <명불허전>은 '입신양명'을 노리며 2017년 서울에서도 야심을 숨기지 않는 허임에 대한 '오해'로 드라마의 주된 갈등을 이끌어 간다. 



노비에게 침통을 연 허임, 그가 택한 죽음의 길 
하지만, 8회 드디어 왜 허임이 두칠 형제의 간청을 거부했는지 드러난다. 덕술이 의금부 앞에서 허임을 자기 손을 없앨 기회를 잃었다는 사실에 발을 구르고 있었을 때, 그의 동료가 찾아온다. 그리고 밤이 이슥한 시간, 병조 참판의 특별 조치로 허임의 하루 방면이 허락되었다면서 덕술이 그를 찾아온다. 두칠을 따르는 대신 의문을 제기하는 허임 앞에 두칠이 통곡하며 머리를 조아린다. 자신의 형을 살려달라고. 

동생 바보였지만, 양반집 노비를 하기엔 조금 모자랐던 형, 병조참판 첩의 심부름 과정에서 동생에게 주려고 곳감 하나를 슬쩍한 것이 들통이 나 매타작을 맞고 죽음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형을 살려달라는 두칠, 그런 두칠에게 허임은 자신의 시술 행위가 형의 목숨은 물론, 덕술조차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경고한다. 하지만 눈물로 매달리는 두칠, 결국 허임은 침통을 연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겨우 복수로 가득찼던 두칠 형의 배를 꺼지게 만들며 그의 숨을 고르게 하는 찰라, 두칠의 방문이 열리고 병조 참판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허락없는 허임의 시침 행위에 분노하며 두칠 형의 목숨을 멍석말이로 거둔다. 결국 형은 맞아죽고야 만다. 

그랬다. 허임은 그 장면을 지켜보는 동막개의 눈물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처지를 잊지 않고 남몰래 노비들을 치료하러 다니던 의인이었다. 하지만, 그의 의로운 의료 행위는 결국 동막개 어머니의 목숨을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 두칠 형제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을 돌렸던 건, 그들의 어머니에게 침을 놓는 순간, 두칠 형제의 목숨조차 위험해질 것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극중 조선으로 타임 슬립한 최연경(김아중 분)은 양반댁 아가씨로 위장해 거리를 걷던 중 천민 꼬마랑 부딪친다. 그러자 천민 꼬마와 그의 아비는 죽을 죄를 지었다며 바닥에 고개를 쳐박는다. 허임 역시 걸출한 그의 능력에도 불구하고 혜민서에서 10년을 썩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신분제 사회' 조선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던 드라마는 이제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두칠 형제와 그 어머니의 비극을 통해 신분제 사회의 비극 에 방점을 찍는다. 

조선 시대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을 소유한 국가든, 개인이든 그들의 재산이었다. 양도, 매매, 상속의 대상이었다. 즉, 허임의 의료 행위는 병조참판의 사적 소유 재산을 허락도 없이 '건드린' 것이었다. 의무만이 있는 천민 중의 천민인 노비, <경국대전> 등은 여러가지로 노비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지만, <노비구가장조> 등에 따른 현실은 달랐다. <명불허전> 8회에서도 드러나듯이 '만약 노비가 주인의 시키는 명령을 위범(違犯)하였으므로 법에 의거하여 형벌을 결행(決行)하다가 우연히 죽게 만든 것과 과실치사한 자는 모두 논죄하지 아니한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렇게 허임은 그가 제 아무리 빼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관노 출신이라는 신분의 제약, 그리고 그가 몸담은 신분제 사회 조선이라는 사회적 제약으로 인해 의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 없었다. <명불허전> 8회는 속물 의원 허임의 실체(?)를 드러내며 신분제 사회 속 모순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리고 그 고발을 통해 허임이 왜 그토록 2017년 서울에서 떳떳하게 의원 생활을 하기를 갈망했는지, 설득해 낸다. 흔히 신분제 사극에서 자신의 신분적 한계에 고민하는 방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치료하고 싶어도 치료할 수 없는 의원의 고뇌를 극적으로 그려내며 중반을 넘어선 극에 '화력'을 더한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갈등의 시작이다. 그를 스카웃한 신혜 한방 병원의 원장 마성태(김명곤 분)는 그를 vip 병동 전담 의사로 이용하고자 한다. 즉 신분제 사회 조선의 모순이 싫어 이곳에 안착하려는 허임은 자본주의 사회의 또 다른 신분제 벽에 봉착할 예정이다. 이렇게 <명불허전>은 그저 속물 의원 허임의 타임슬립기인듯 코믹한 외피를 벗어내던지고, 조선과 2017 대한민국 다른 듯 어쩌면 같은 신분제 사회의 모순에 맞부닥치는 의원 허임을 통해 '참의술'의 길을 고민해 보고자 한다. 


이런 코믹과 진지한 주제 의식을 오가는 <명불허전>을 설득해 내고 있는 건 김남길이다
당찬 최연경의 김아중 역시 매력적이지만, 속물 허임에서 병자 앞에서 한없이 진지한 의원 허임, 그리고 병조 참판 앞에서 눈물로 읍소하며 자신이 한낯 양반네의 개새끼임을 고백하는 관노 출신 허임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건 바로 김남길이다. 배우가 인상깊은 연기의 캐릭터로 불리는 것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랫동안 그는 김남길 대신 비담으로 불리웠었다. 이제 그에게는 한동안 '비담'대신 허임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을 듯하다. 


by meditator 2017. 9. 4. 14:30

갑자기 하늘이 높아진 계절에 딱 맞춤한 영화다 싶다. 가을은 그저 높아진 하늘과 서늘한 온도만이 오는 게 아니라, 그 낮아진 기온과 함께 외로움, 쓸쓸함도 함께 온다고 어느 분이 말했던가. 그렇게 아직은 한낯의 볕이 저항을 하지만 계절의 서늘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무는 해와 함께 고꾸라져 버리는 환절기, 아마도 <더 테이블>은 이런 계절의 정서를 함께 하기엔 딱인 영화일 듯 싶다. 




주목하다
<더 테이블>속 시선은 지켜보다라고 하면 좀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 보다는 주목하다라는 조금더 목적의식적인 술어가 적확하다는 생각이다. 

영화는 한 까페를 주목한다. 서울 어느 골목 한 켠의 까페, 그리 세련될 것도, 화려할 것도 없는, 오래된 상들리에와 그 오래된 상들리에만큼 시간의 흔적이 묻은 테이블이 있는, 그래서 찾는 이도 그리 많지 않은 까페, 그곳의 테이블에 물컵에 담긴 흰 꽃 몇 송이가 올려지며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그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손님들을 주목한다. 오전 11시 에스프레소와 맥주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예전의 연인 유진(정유민 분)과 창석(정준원 분), 오후 두 시반 두 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 케이크를 사이에 둔 채 신경전을 벌이는 경진(정은채 분)과 민호(전성우 분),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라떼를 사이에 둔 채 사업인지 연민인지 모를 은희(한예리 분)와 숙자(감혜옥 분), 저녁 아홉 시 커피와 홍차를 사이에 두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찍을 뻔한 혜경(임수정 분)과 운철(연우진 분)

하룻동안 이 네 커플의 만남은 우리 사회 인간 군상의 단면을 충분히 보여준다. 한때는 연인이었지만, 이제는 속물과 찌라시의 주인공이 된 남녀가 빚어내는 불협화음, 그리고 그 간극의 서늘함. 관계보다 감정이 앞서는 이 시대 연인들의 뒤늦은 사랑 만들기의 어깃장과 그 어깃장의 끝에서야 어렵게 시작된 사랑, 진심조차 포장할 수 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진심을 길어내는 사기 공모자 커플, 그리고 그 흔한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신파의 2017년 자본주의 버전까지. 하룻동안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이들의 사연은 그 하나로 영화가 되고 서사가 됨직한 것들이다. 



우리 시대의 미시사
하지만, <더 테이블>에서 그런 네 커플의 사연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영화를 보다보면, 그들의 사연보다, 그 사연을 오가는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고 가는 그들의 감정과 정서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 속 혜경은 홍차를 시킨다. 홍차가 우려지는 티포트, 맑은 물 속에 붉은 빛깔의 차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영화는 집요하게 지켜본다. 이런 식이다. 영화가. 테이블을 중심으로 만나는 두 인물의 감정, 정서를 마치 홍차가 우려내어지는 그 순간을 주목하듯 한 치의 감정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관객은 '이해'를 하게 된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 되는 인생사의 그 한 장면, 주인공들의 속내를 헤아리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찌라시의 주인공이건, 혹은 이제는 과거의 연애사보다 동료들에게 자랑할 사진 한 장이 더 중요한 속물이 됐을 지라도, 미친 짓을 바래는 미친 년이 되었을지라도, '사기'를 직업으로 하다 덜컥 사랑에 발목잡히지만 어쩔 수 없이 하던 가락으로 결혼조차 이루려 하고, 그 결혼에 '역지사지'로 엮어들어가더라도, 풋사랑에 안달을 하더라도, 세상사 얼마든지 비난과 구설수와 심지어 욕설의 대상이 될 그 사연들이 그 테이블 위에서 사람에 대한 '이해'를 얻고 간다. 

문득 궤를 달리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김종관 감독이 홍상수 감독처럼 오래도록 '이런(?) 영화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의 '미시사'랄까? 늘 무언가 구체적인 꺼리를 가지고 선명한 주제 의식을 전달해야 하는 한국 영화의 흐름 속에서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생소하다. 그래서 소중하다. 서사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주는 이런 영화를 종종 휴식처럼 만나 이해받고 싶다. 오래도록 우리 시대의 마음을 읽어주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본다. 
by meditator 2017. 9. 1. 21:49

14%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화려하게 종영한 <죽어야 사는 남자> 후속으로 '하지원'을 앞세운 <병원선>이 찾아왔다. 1회 10.6%, 2회 12.4%의 동시간대 1위 순조로운 출발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하지원'이 주인공 불패 신화가 다시 한번 시작된 것일까? 


[TV성적표] <병원선> 드디어 출항! 허탈한 죽음은 이제 그만 이미지-3



하지원의 건재
<병원선>이란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믿고보는 배우'의 힘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울어~'는 캔디형 캐릭터에 가장 맞춤형인 하지원은 '생존의 신호음'을 제외하고는 눈물을 사치고 여기는 소녀 가장 외과 의사 송은재 캐릭터로 다시 한번 그녀가 잘 할 수 있는 연기에 도전한다. 그리고 <병원선>이란 드라마를 극 초반부터 가장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가는 건, 이러니 저러니해도 하지원이다. 종종 그런 하지원조차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병원 용어가 생경하게 들리지만, 그럼에도 극적인 상황에서 '제가 그 수술합니다'라고 당차게 외칠 때, 심지어 도끼를 내려 칠때조차 그 대사와 행위에 믿음이 가도록 하는 건 역시 하지원 때문이다. 

<병원선>은 심하게 하지원에게 의존한다. 여주인공 하지원을 제외하고는, 남자 주인공이라지만 어쩐지 그와 같이 병원선에 트러블 메이커로 등극한 이서원, 김인식과 구분이 잘 가지 않는 강민혁은, 이 드라마가 이른바 '역하렘물'이라지만, 그 꽃이될 남자들의 존재감은 하지원 한 명에 비해 현격하게 부족해 보인다. 드라마는 회차마다 내과 의사, 한의사, 치과의사인 그들의 사연을 풀어놓을 예정인 듯하지만, 그 사연은 그저 양념처럼 여겨질 뿐이다. 남자 캐릭터들뿐만이 아니다. 하지원에 맞서 그녀의 발목을 걸고 들어설 조연 캐릭터들의 비중 역시 그다지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그녀가 근무했던 병원의 외과 과장도, 이제 새로이 그녀를 응급실에서 맞이하려다 내치는 종합 병원장도 하지원의 존재감에는 한참 못미친다. 

그런 면에서 <병원선>은 본의인지, 혹은 본의 아니게인지, 결국 '하지원'의 드라마가 된다. 물론 <태양의 후예> 등의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의사로 나와 '휴머니즘'을 실현했지만, 그 누구도 <태양의 후예>의 강모연(송혜교 분)에 비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지원이 분한 송은재로 치면 이전 남자 배우들이 의사로 분해 드라마를 끌고 가던 의학 드라마의 형식을 띤다. <명불허전>에서 최연경으로 분한 김아중과 비슷하지만, <병원선>엔 김남길만큼 원맨쇼를 벌이며 여주인공을 보완해줄 그 누군가가 없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 수없는 건 비단 극중에서만이 아니다. 

 하지원, 차화연 죽음에 ‘자책’··· 강민혁에 이어 병원선 탑승 완료! 이미지-2


촌스러워 보게 되는 드라마?
하지만 단지 <병원선>이 하지원으로 인해서만 시청률이 잘 나올까? 이 드라마를 본 시청자들 중 '촌스럽다'는 반응이 상당수가 있었다. 파업의 여파때문인지 연출이나 편집, 화면, 구성에 있어서 상당히 '올드'해 보인다는 것이다. 

실제 드라마를 보면, 드라마의 배경이 2017년이지만 마치 70년대의 어느 시절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료 사각지대인 섬을 돌아다니며 '의료 봉사'를 하는 병원선. 실제 병원선에 비해서 심지어 수술실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설정으로 한결 조촐하게 설정된 병원선의 세트하며, 70년대 낙도 봉사 활동의 어느 시절로 돌아간듯한 기시감조차 주는 컨셉이다. 
올드한 장치만이 아니다. 실제 드라마의 내용도 이제는 도시에는 가볍게 여기는 맹장 수술이 응급 상황이 되는 설정에서 부터, 단 한 순간의 외면으로 어머니를 잃게되는 사연까지 21세기의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들이 드라마의 주요 에피소드로 등장하여 '휴머니즘의 인술'의 도구로 작동한다. 

그래서 드라마는 '사극'은 아니지만, '시대극'처럼 시청자들을 향수처럼 이끌며 끌어앉힌다. '안되도 되게 하는' 응급 상황과, 그 속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이야기들은 '의학 드라마'의 본령으로 시청자들을 솔깃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세련된 맛이라고는 없는 투박한 연출과 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서사가 오히려 시청자들을 끌어당긴다. 21세기에 안락한 아파트에서 느긋하게 리모컨을 쥐고 드라마를 시청하는 이들에겐 여전히 힘들고 고달프게 이겨왔던 그 시절의 정서가 지배적일 지도 모르기에. 어쩌면 <병원선>의 이 방식은 서투름이 아니라, 의도된 촌스러움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죽어야 사는 남자>가 여전히 가장 호소력있는 '가족애'를 주제로 내건데 이어, <병원선>이 도시의 성장주의에서 탈락한 여의사를 내세워 다시 한번 가장 근원적인 '휴머니즘 인술'을 내세워 시청자들을 이끄는 이 전략은 이제 중장년층이 대세가 된 공중파 tv에서 어쩌면 가장 영리한 전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즉 21세기의 시대를 살지만, 7,80년대를 살아왔던 그 세대에게 <병원선>은 그럼에도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정서를 복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시간을 거스르는 기발한 설정의 <맨홀>과 역시나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 <다시 만난 세계>가 고전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병원선>의 전략 성공 여부를 예단하기엔 이르다. 상대작인 <맨홀>이나 <다만세>가 공정한 경쟁작이라기엔 완성도면이나 연기면에서 너무 수준 미달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분간 안정적인 시청률 호조세를 보일 <병원선>의 진검 승부는 이종석, 수지를 앞세운 트렌디한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의 방영과 함께 이루어질 전망이다. 


by meditator 2017. 9. 1.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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