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숲>, <터널>, <쌈마이웨이>, <품위있는 그녀>, <죽어야 사는 남자> 이들 드라마들은 최근 '화제'의 드라마들이다. 그리고 화제의 드라마들답게 시청률면에서도 동시간대 1위를 거뜬히 낚아챈 드라마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 드라마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바로 입봉의 신인이거나, 입봉작이 아니더라도 드라마화한 작품이 몇 개 되지 않은 '신인'이라 말할 수 있는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 공중파, 케이블, 종편을 넘나들며 새로운 작가군의 활약이 도드라진다. 이들 신진 작가군의 활약은 그저 '신인'이라는 점에만 방점을 찍어서는 아깝다. 신인다운 패기와 신선한 기획과 서사, 그리고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구성으로 이들 드라마에 시청자들을 열광케 했다는 점이 진짜 놀라운 점이다. 이렇게 드라마의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다. 




장르물의 약진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타임 슬립을 통해 풀어낸 구성으로 방송 초반 <시그널>과 비교되던 <터널>은 극이 중반을 넘어서며 더 이상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터널>이라는 드라마 자체만으로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구었으면, 과거에서 온 형사와 현재에서 그의 과거 인연으로 얽힌 인물들과의 공조 수사만으로, 그리고 과거에서 부터 현재까지 악행을 멈추지 않는 연쇄 살인마의 귀추에 시청자들은 열광하고 범죄의 종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계에서 장르물은 희귀했다. 그러기에 2011 <싸인> 이래 장르물의 김은희는 독보적이었다. 늘 '장르물'이 작품이 등장하면 과연 김은희의 작품을 넘어설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젠 그렇게 김은희 작가를 불러내기엔 장르물이 너무 잦아졌다. 거의 2년에 한번씩 작품을 선보이는 김은희 작가를 '학수고대'하지 않아도 장르물 애청자들의 마음을 쏙 빼앗을 장르물들이 빈번하게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신인 그룹'의 작품들이다. 

신인 작가 그룹에 의한 드라마계 지형도의 변화에 있어 가장 두드러진 점은 바로 드라마 장르의 변화이다. 위의 검찰청을 '숲'으로 상징하고 그 속에서 직업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실감나게 그려낸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는 한국 장르물을 비밀의 숲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독보적인 영역을 단 한 작품만에 구축했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복수'를 매개로한 정의 실현이 한국 장르 드라마의 일반적 양상이었던 그 '한계'를 단 한 개의 사건으로 16부을 뚝심있게 이끌어간 <비밀의 숲>은 그 흔한 '미드'와의 비교에서도 우리의 어깨를 우쭐하게 할 만큼 주제 의식과 구성에 있어 시청자들의 자부심을 한껏 만족시켰다. 

<비밀의 숲>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터널>역시 과거와 현재의 인연이 바탕이 되었지만, 형사라는 직업군의 책임 의식이 드라마를 이끌어 가면서도, 장르물 특유의 묵직한 정서를 대중적 호흡으로 적절하게 순화시킨 <터널>은 ocn 드라마로는 드물게 6%를 넘는 성취를 이루었다. (6.490% 16회, 닐슨 코리아 유료 플랫폼 가입 가구 기준) 동시간대 1위는 아니었지만, 화제성에 힘입어 시즌2를 예약한 kbs2의 <추리의 여왕>은 '추리'를 전문가만큼 잘 하는 동네 아줌마와 열혈 형사 콤비의 신선한 조합으로 사건을 해결해 가며 묵직한 주제를 가벼운 터치로 풀어나가면 <추리의 여왕>만의 정서를 구축한다. <피고인(sbs)>의 최수진, 최창환 작가나, <피고인(mbc)>의 김수은 작가 역시 공모전 출신으로 장르물로 작가 입문의 시작을 열었다. 



기존의 장르라도 이들이 쓰면 다르다. 
그러나 이런 장르물만이 있는 건 아니다. 최근 종영한 <품위있는 그녀>는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화제성으로 인기를 몰았다. 대성 펄프라는 가상의 재벌가를 중심으로 상류 사회와 그 주변의 인간 군상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내며 인기를 모은 <품위있는 그녀>는 주말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는 막장 드라마의 요소를 고스란히 수용하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스릴러'적 요소를 가미하고, 그것을 '부조리극'으로 승화시키며 퀄리티있는 드라마로 호평을 받았다. 

더욱이 놀라운 점은, 이 드라마를 저술한 백미경의 작가의 경우 죽음을 사이에 둔 연상연하 남녀의 순애보 넘치는 사랑 이야기 <강구 이야기(2014)>가 20여년만에 만난 톱스타와 작가의 우여곡절 사랑 이야기 <사랑하는 은동아(2016)>로 업그레이드 되더니, 천하장사 여성과 재벌남의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힘센 여자 도봉순(2017)>의 변주를 통해, <품위있는 그녀>에 이르렀다. 순애보 러브 스토리에서 막장 스릴 부조리극에 이르기까지 장편 드라마로는 불과 3작품에 이르를 동안 자신의 작품이 자신의 작품을 이기는 기묘한 역전극을 벌이고 있는 백미경 작가의 다음 작품은 예측 불허라서 더 기대가 된다. 



청춘물도 이들이 쓰면 다르다. 이미 <백희가 돌아왔다>로 단막극으로서는 드물게 인기를 끌었던 임상춘 작가의 <쌈 마이웨이>는 재벌가 없이, 88만원 세대의 현실감넘치는 사랑 이야기로 공감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죽어야 사는 남자>의 김선희 작가는 헤어진 모녀 상봉이라는 '가족 드라마'를 기상천회한 코믹물로 업그레이드 시켜 땜빵 드라마의 승리를 거머쥐었고, <자체 발광 오피스>의 정회현 작가는 '오피스'물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도전했다. 

장르도 신선했지만, 그간 시간에 쫓기는 촬영 일정으로 완성도에 있어 문제 제기가 되왔던 고질적 문제점들에 있어서도 진일보한 성과를 보였다. 한 여름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겨울옷, 하지만 결코 그 설정과 의상이 답답하지 않게 느껴질 만큼, 서늘한 분위기로 압도했던 <비밀의 숲>과 <품위있는 그녀>는 작품성만 보장된다면, 굳이 시의성있는 피드백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전 제작'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22부작의 <죽어야 사는 남자>가 보인 속도감있는 전개 역시 16부작, 20부작의 관성에 대한 반문이 되었다. 

이렇게 신진 작가군의 등장과 그들의 신선한 작품에 의한 드라마계의 수혈은 시청자들에게는 뻔하지 않은을 넘은 올드 미디어로서 tv의 가능성을 다방면에 걸쳐 열었다. 미드 등을 통해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만족시키며 젊은 층들에게도 호응을 얻으며 노령화된 시청층의 벽을 허무는데 큰 역할을 해냈다. 여전히 스타 작가의 아성은 공고하지만, 이들 신진 그룹의 활약으로 좀 더 다양하고 재밌는 드라마의 가능성을 열었다. 
by meditator 2017. 8. 29. 16:42

고백컨대, 그랬다. 글을 쓰는 기자도. 청춘시대의 조은 역에 최아라라는 키가 훤칠한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했을 때, 심지어 이 캐릭터가 선머슴애처럼 짧은 쇼트 머리에, 검은 색으로 아래 위를 도배한 옷을 입고 등장했을 때, 아하 저 친구는 이 드라마에서 '레즈비언'의 캐릭터로 '소모'되지 않을까, 연상했었다. 그리고 2회를 보고, 내 '얼토당토'않은 선입견에 정곡을 찌른 박연선 작가 앞에 새삼 부끄러웠다. 바로 이 '안일한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에 대해 새로 시작한 <청춘시대2>는 문을 열었다. 




이른바 '연선내'의 징후
동시대 젊은이들의 초상을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실감나고 공감가게 그렸던 <청춘 시대1>을 보고, 드라마의 대본집대신 당시 따끈따끈했던 박연선 작가의 신작 장편 소설 <여름, 어디선가 시쳬가>를 찾아 읽었다. 드라마와 소설, 장르는 달랐지만, 2016년 청춘의 이야기를 '당대성'을 살려 구현해내 칭송을 받았던 <청춘시대>처럼,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는 무시무시한 제목과 달리, 어쩌면 <청춘 시대>보다 더 '당대성'을 살린 청춘들의 이야기다. 단지 그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15년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청춘 시대>가 벨 에포크라는 대학가 셰어하우스를 배경으로 했다면, <여름, 어디선가 시쳬가>는 이제는 쇄락한 첩첩산중 마을 두왕리를 배경으로 한다. 

<청춘시대2>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전에 이토록 장황하게 박연선 작가의 <청춘시대1>과 그녀의 소설 <여름, 어디선가 시체가>에 대해 구구절절 풀어놓는 건 박연선 작가의 '스타일'와 '주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서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막장 드라마를 보던 할아버지의 갑작스런운 죽음으로 인해 하루 아침에 할머니 홍간난 여사네 집에 떨어진 백수 강무순의 뜻하지 않는 보물찾기 대작전으로 부터이다. 그러나 보물을 찾아나선 강무순이 건드리게 되는건 15년전 온 마을 사람들이 최장수 노인 백수 잔치로 마을이 비었을 때 이 동네 소녀들 4명이 한 날 한 시에 사라진 사건, 그때부터 드라마는  본격 미스테리 스릴러로 장르를 변경한다. 즉,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할머니 집에 떨어진 손녀의 엉뚱한 보물 지도 해프닝을 '과거'로 번져 사라진 4 소녀들의 비밀로 이야기 속의 이야기처럼 독자를 끌어간다. <청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박연선 작가는 '셰어 하우스'라던가, 가장 일상적인 공간, 거기에 모인 청춘들을 통해 '죽음'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은 괴상한 이야기 속으로 시청자 혹은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하지만 죽음이나 귀신조차도 무색하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내고 보면, 그곳에선 거기 사는 사람들의 가장 진솔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편의적 편견은 배제를 낳는다
그랬기에 <청춘 시대2>의 시작은 셰어 하우스답게 헤어짐과 만남으로 시작된다. 그렇게 벨 에포크에 등장한 최아라. 하지만 그녀의 외모만큼이나, 쉽게 말조차 붙이기 힘들고, 송지원의 너스레나 농담까지도 '반사'라도 하듯 무안함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녀의 등장은 <청춘 시대> 그 서막에서 저마다 쉽게 정가지 않을 것처럼 등장했던 주인공들의 면면을 회상케 만든다. 그런데 그저 싸기지 없거나 비밀에 잔뜩 쌓였던 시즌1의 등장 인물들을 넘어 최아라는, 그의 행위나 태도, 심지어 방문객을 통해 혹시나 그녀가 '레즈?'라는 의심을 유도하고야 만다. 

조은을 제외하고 신입 주제에 자신들에게 만만하게 굴지 않아 전전긍긍했던 윤진명(한예리 분), 정예은(한승연 분), 송지원(박은빈 분), 유은재(지우 분)는 '쿨을 넘어선 조은의 태도를 '남성성'으로 오해하고 지레 그녀를 혹시? 라며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의심이 가기 시작하자 그녀의 모든 태도는 그 의심하는 내용에 딱딱 들어맞기 시작한다. 최아라가 감기약을 사들고 안 열려지는 은재의 방을 억지로 열고 은재를 쫓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

시즌 1에서 각자 청춘의 통과 의례를 혹독하게 겪었던 네 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은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증명하듯 그런 경험에서 배운 깨달음따위는 흘려버리고, 자신들의 앞에 등장한 이질적인 한 인물에 대해 쉽게 '편견'의 색안경을 끼어버린다. 타인이 저어하는 행동이나 태도에 있어 지나치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은재가 이제 가장 쉽게 조은의 편견에 거침없는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이나, 정작 말로는 공정한 잣대를 운운하면서도 하우스 메이트들의 편견을 방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윤진명에 이르기 까지 손쉽게 조은을 그녀의 예상되는 성적 정체성으로 '따' 시켜버리는 그녀들의 속단은 근거없이 확신에 차있다. 

의심이 곧 배제로 이어지는 <청춘 시대 2>의 서막은 그래서 가장 동 시대적인 출발이 된다. '혐오 사회'라고 칭해지는 이 시대에서 그 편견과 혐오의 시작이 저리도 어이없이 그저 자신들이 가졌던 편견을 바탕으로 손쉽게 이루어지며, 그 편견의 결과가 불편으로, 그리고 배제에 대한 고려로 이어지는 과정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혐오의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말은 달리 하지만, 네 명의 하우스 메이트들은 자신들의 경험과 인지적 능력이 무색하게 조은이 '레즈'라는 편견에, 그리고 그런 자신들과 다른 성적 정체성에 거침없이 불편해 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생각은 상대방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낳고,그 것은 결국 한 여름 거리의 질주로 마무리된다. 알고보니 그저 키 큰애라서 늘 오해받고 불편했던 조은, 그저 키크고, 남성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잠시 하우스 메이트들에게 받은 그 편견과 그로 인해 벌어질 뻔한 결과는 어처구니없지만, 작가는 그를 통해 우리 사회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편견과 혐오의 과정을 까발린다. 

물론 여전히 조은을 바라보는 친구 안예지(신세휘 분)의 모호한 눈빛으로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의심'은 또 다른 갈래롤 펼쳐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2회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건, 레즈건, 게이건 혹은 성적 정체성이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타인을 쉽계 예단하고, 그들을 우리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는데 편의적인가 하는 지점이다. 하우스 메이트 한 명의 등장이란 에피소드 만으로 우리 사회에 현재 만연한 성적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그 결과로서의 배제의 '기제'를 드라마는 대번에 설파해 낸다. 그렇게 박연선 작가는 자신의 장기를 뽐내며 가장 묵직한 주제 의식을 가장 평범한 일상을 통해 그래서 가장 설득력있게 풀어내며 <청춘시대2>에 대한 기대를 2회만에 업그레이드 시켜낸다. 
by meditator 2017. 8. 27. 04:00

도발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일 듯하다. 이제 종영한 수목 드라마 <죽어야 사는 남자(이하 죽사남)>가 수목 드라마 대전에서 거둔 성과는. 22회 기준 12. 8(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라는 이제 이 정도면 공중파에서는 중박이라고 치는 시청률을 전제로 하지만, 시청률 이상 '공중파 미니 시리즈'에 대해 생각해 볼만한 문제 제기의 기회를 '도발'했다. 



'근본이 없는'이 아닌 근본이 제대로 있었던 죽사남
마지막 회, 딸을 찾고 가족을 이루어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한 행복을 이룬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최민수 분)은 자신의 친지들을 이끌고 전세 비행기를 동원하여 보두안티아 공화국을 향해 떠난다. 신이 나서 비행기에서 원맨쇼를 벌이던 백작, 하지만 기상 변화에 흔들리던 비행기는 끝내 엔진에 불이 붙고 뜻하지 않은 곳에 불시착을 한다. 뻘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살아남은 백작과 그 가족, 친지들, 그들을 맞이한 건 괴수의 음성같은 효과음이 들리는 무인도로 추정되는 섬이다. 



내내 가족드라마인 줄 알고 '화목한 해피엔딩'을 꿈꾸던 시청자는 종영을 10분 남겨놓고 나타난 백작의 또 다른 아들 때문에 아버지에게 '죽빵을 날리는' 존속 상해의 현장을 목격한 것도 모자라, 어떻게 전재산을 날릴 뻔했던 해프닝에서 벗어나 희희낙락 딸과 함께 헐리웃 생활을 즐기는가 싶더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무인도 행으로 마무리짓는 드라마에 '어이상실'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되돌아 보면, 이게 과연 어이상실할 일인가 싶다. 애초에 가상의 보두아티아 공화국에서 나타난 석유 재벌 바람둥이 아빠란 이 '희귀한' 설정에서 시작된 드라마는, 바람난 남편을 아내 바보로 개과천선을 시키는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안되는 것이 없는 행보를 보였다. 그 전형적인 악녀의 딸 코스프레라는 막장 가족극의 소재와, 남편의 바람, 그리고 헤어진 친딸 찾기, 심지어 치매 등 한국 드라마에서 그간 전형적으로 등장했던 소재를 차용했지만, <죽사남>은 이중 어떤 클리셰에도 천착하지 않고 단 1분의 진지함을 넘기지 못하는 코믹하고 엉뚱한 서사로 드라마를 반전에 반전으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딸이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장소가 '헌팅'을 위한 클럽이었다는 기가 막힌 설정에서부터 시작된 코믹한 반전들만을 가지고 <죽사남>을 평가하면 아쉽다. 오히려, 진짜 이 드라마의 매력은 동시간대 드라마들이 어설픈 사랑 놀음에 16부작 혹은 32부작의 이야기를 늘이고 있는 동안, 짤막한(?) 24부의 쾌속 정진을 통해 '가족'의 의미를 천착해 들어갔다. 

클럽에서 만난 아빠와 딸이 서로의 존재를 알기 전에 '인간적' 교감을 나누고, 딸의 존재를 알아차렸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서로의 상처로 인해 고통받고, 보다듬고, 가족으로서의 교감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죽사남>은 그 어떤 가족 드라마보다 정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특히 <내조의 여왕>, <파스타>의 고동선 피디 특유의 섬세한 정서의 교감이 때론 어수선할 수 있는 '코믹' 드라마의 정조를 따스하게 감싸며 드라마의 본질을 놓치지 않았던 점이 무엇보다 <죽사남>의 장점이라 할 것이다. 



그렇게 가족 드라마이면서, 그 풀어가는 서사에 있어서는 기존 드라마들이 의존했던 진부한 설정 방식에 단 한번도 기대지 않았던 김선희 작가의 뚝심있는 전개는 한류에 의존하여 어설픈 소재와 연기, 혹은 작가의 명망에 기대어 안일한 소재와 더 안일한 연기로 매 회를 인공호흡하는 타 미니 시리즈와의 차별점을 더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기에 우리 사회 가족을 여전히 이상향으로 그려내지만, 드라마는 결코 '가족'이란 이름으로 개인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딸의 아버지로 돌아왔지만 그 특유의 '유아독존' 스타일을 버리지 못했고, 심지어 바람둥이 기질조차도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남편의 불륜은 곧 이혼이 되어버린 드라마의 공식에서 응징과 개과천선이라는 모색은 수긍은 둘째치고라도 신선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갑인 '부'의 문제에 있어서도 '환타지'를 버리진 못했지만, 사람을 그에 굴복시키지 않고자 노력한다. 무엇보다 '악인'의 처리에 있어서조차 '인간적'인 기조를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심지어 중동 진출 일꾼이었던 장달구, 현 알리 백장의 과거을 추적하는 '국정원' 직원을 통해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졌던 산업 일꾼의 역사까지 헤아리는 내공을 드러낸다. '가족'이라는 진부한 소재를 다루지만, 그 다루는 방식은 '인간 친화'적이었던 <죽사남>의 패기넘치는 도전은 최근 부진을 겪고 있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진짜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케 만든다. 

최민수, 그리고 신성록, 강예원의 절묘한 삼각 편대 
또한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문제점에 대한 <죽사남>의 가장 큰 도발 중 하나는 다름아닌 <죽사남>의 출연진이다. 최민수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란 단언을 하게 만든, 거의 원맨쇼에 가까웠던 그의 보두아티아 백작 연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그런 최민수의 연기만이 있었다면 <죽사남>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드라마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최민수의 무대를 충실하게 받쳐준, 아니 사실은 최민수가 앞서나가서 그렇지, 그 연기의 내공에 있어서는 만만치 않다 싶었던 강호림의 신성록과 딸 이지영의 강예원의 연기 역시 이 드라마의 빼놓을 수 없는 공신이다. 가짜 딸 이지영의 이소연과 비서 앞달라의 조태관은 눈이 즐거운 감초로서 드라마를 넘기게 했다. 갈수록 그의 몸짓 각도가 커져만 가던 최민수와 그걸 흥겹게 받아쳐준 신성록과 강예원의 연기는 마치 '변검'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가장 감동적인 가족애의 현장으로 시청자를 이물감없이 이끌며 드라마의 수목 1등이 되도록 하는데 헌신한다. 



이 처럼 드라마는 그간 그의 연기 내공이 무색하게 주인공 아버지로서 소모적으로 소비되던 한때 잘 나갔던 배우 최민수에게 새로운 대표작을 제공했다. 최민수에게 대표작이 <모래 시계(1995)> 만이 아니라, <사랑이 뭐길래(1991)>와 영화 <미스터 맘마(1992)>와 <결혼 이야기(1992)>도 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는 <죽사남>, 무엇보다 '왕년'의 배우가 아닌 현역의 최민수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함께 한류 스타가, 젊은 청춘 스타가 아니라도 연기를 맛깔나게 하는 배우들의 조합이라면 거뜬히 주중 미니 시리즈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신성록, 강예원 불패 신화로 증명해냈다. 이런 <죽사남>의 선전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최근 부진의 늪에 시달리는 공중파 드라마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온다. 
by meditator 2017. 8. 25. 02:24

1980년 8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첫 유세 장소로 선택한 곳은 민주당의 텃밭이라고 알려진 미시시피주 네쇼파 카운티였다. 1964년 흑인 인권 운동가 세 명이 kkk단에 의해 살해된 이래 민주당을 전통적으로 지지해온 이곳에서 레이건은 복지연금을 받으며 캐딜락을 모는 시카고의 여성을 언급하며 복지 문제를 인종 갈등으로 국면 전환을 시켜 남부 지역에서의 지지를 끌어모았다. 당시 대통령 후보 레이건의 연설을 통해 사람들은 당연히 복지 무임승차한 여성을 흑인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백인이었다. 하지만 레이건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화려하고 유머러스하며 신뢰할 만한 언변에 진실에대한 눈을 가리고 말았다.


레이건 쇼 ⓒ ebs
뛰어난 배우 레이건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70이 넘은 나이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며 재선에 성공한 역대 가장 나이가 많았던 대통령, 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우리 대통령만큼이나 익숙했던 그는, 무능과 존경이라는 양 극단의 평가를 받지만,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호감도가 높은 대통령이다. eidf 개막식의 자리를 빛내준 파쵸 벨레즈 감독은 바로 이 대통령 레이건의 시대를 <레이건 쇼>라는 제목의 영화로 작품상 경쟁 작품의 대열에 올랐다.

다큐는 레이건 시대가 저물어 가는 1988년 이제 곧 대통령 직을 마무리할 레이건과의 인터뷰에서 시작된다. 인터뷰어는 질문한다. 당신이 배우였던 것이 대통령 직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 ' 배우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라고 답한다. 바로 이 레이건이 한 답이 파쵸 벨레즈 감독의 <레이건 쇼>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레이건 취임 후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미국은 핵전쟁 위기가 높어져 갔고 그런 위기에 대통령 레이건은 불을 지폈다. 다큐가 주목하는 건 레이건의 정치 행위 방식이다. '한번도 정치가가 되본 적이 없다'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던 대통령 레이건의 행보는 그 이전의 역대 다섯 정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영상 자료가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대통령이 된 첫 해에만 무려 7번의 국정 연설을 한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은 tv 쇼의 세트장으로 삼았고, 다큐는 컷 소리와 함께 국민을 향애 유려한 언변을 펼치는 대통령 레이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담는다.

그토록 수많은 영상을 통해 국민들을 매료시킨 대통령, 그 저변의 자질은 그가 '배우' 출신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 스스로 배우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배역의 소화만이 아니라, 각본까지 해야 하는 대통령 직의 어려움을 토로할 정도로, 좋은 대통령으로 보이는 연출의 과정에 전혀 스스럼이 없었던 대통령.
비록 '조연'으로 배우로서 헐리웃 역사 에서 그 존재감은 돋보이지 않았지만, 훤칠한 키에, 듬직한 체구, 호남형의 인상을 지닌 이 배우는 헐리웃 영화에서 매번 성격좋고, 이상적인 영웅상을 맡아왔었다. 그리고 그 '배우'로서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대통령의 이미지에 치환시켰다.

레이건 쇼 ⓒ ebs
미디어프렌들리한 정치, 
차기 대통령에 나올 후보들이 일찍이 방송을 타면서 이미지 쇄신을 노리는 시절,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인의 이미지 메이킹이 그의 정치적 입장만큼이나 중요해진 시절에 레이건의 미디어 프렌들리는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재임 기간 내내 1/3은 정책 구상을 하는 둥하다가, 2/3는 홍보와 행사에 치중했던 대통령 레이건은 2017년에는 새로운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바로 '정치'에 있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선례를 남긴 사람이 바로 레이건이라는 점에 다큐는 주목한다.

미디어프렌들리한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반문할 수 있는 시절, 하지만 레이건은 그 질문의 시작이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준 대통령이다. 그의 재임 기간 내내 그에게는 그가 정말 행정부의 수반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다녔다. 미디어를 통해 유머러스한 모습을 시종일관 놓치지 않고, 결단력 넘치는 영웅의 모습을 견지했던 그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참모 의존적이며, 심지어 실제 대통령이 영부인이 아니냐는 의문이 나올 정도의 반문이 따라 다닌 인물이고, 그 의문에 그는 이란 인질 석방  종종 자신의 정책조차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실언'이나 '허언'으로 증명을 해냈다.

행정부의 수반답지 못한 무지보다 더 심각한 건, 그의 맹목적인 카우보이식의 안보관이었다. 1983년 역시나 tv를 통해 중계된 대통령의 연설에서 자유 진영 시민들이 맘놓고 살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를 앞세워 '스타워즈'란 그럴 듯한 허울좋은 명목 하에, 전략 방위 계획을 발주했던 것이다. 소련의 미사일이 닻기 전 격추할 수 있는 무기 체계라고 하지만, 언제나 방아쇠를 담길 수 있는 무력 행사에 레이건은 거침없었고, 그런 영웅적 행보에 국민들은 열광했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레이건 쇼 ⓒ ebs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미디어 프렌들리 대통령의 발목을 건 건, 그보다 더 미디어 프렌들리한 소련의 지도자 고르바쵸프란 사실이다. 미소의 국제적인 긴장이 세계적 화두였던 시절, 54세의 레이건보다 더 언론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고르바쵸프의 등장은 정책보다 이미지로 정치를 해온 레이건에겐 가장 큰 위기를 불러왔다. '도베랴이 노 프로베라이(신뢰하되 검증하라)'는 소련어 한 마디 외에 이렇다할 이미지적 각인을 불러오지 못한 미국은 전세계인이 그토록 원하는 핵무기 동결 나아가 폐기까지를 내세운 도발적인 고르바쵸프의 제안에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규정했던 레이건의 냉전적 이미지는 자중지난에 빠지게 된다.

결국 노령의 나이에도 재선에 성공했지만 '처음 4년간 히트작만 내다 줄곧 실패작만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는 여전히 기자들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유머의 너스레를 떨지만 그 약발은 잦아져갔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한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대중적 호감도와 별개로 능력있는 대통령의 순위에서 레이건을 찾아보긴 힘들다.  제 아무리 '이미지 메이킹'을 해도 결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그가 한 일로 결정된다는 것을 다큐는 냉정하게 지켜본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을 행위 예술가로 평가하듯, tv에서 먼저 성공해야 대선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다는 미디어 정치의 나쁜 선례로서 다큐는 그의 행보를 반면교사의 선례로 삼고자 한다.
by meditator 2017. 8. 23. 23:25

도시 농업'은 우리 사회에서도 더는 생소한 용어가 아니다. '귀농' 만큼이나, '도시에서 농사'를 짓는 건 이 시대 삶의 대안적 담론으로 언제나 매력적이다. 그러기에 8월 21일 eidf의 첫 째날 ebs를 통해 방영된 <도시 농부 프로젝트>은 그저 또 하나의 실용적 해외 도시 농업 다큐인가 싶었다. 하지만, 막상 본 <도시 농부 프로젝트>에서는  이 영화의 원제 wild plants가 그 의미를 가장 잘 전달한다 싶게, 식물의 철학, 아니 식물을 빌어 인간의 대안적 삶을 모색해보는 삶의 화두를 만나게 된다. 


이 영화의 부제는 transform변화이다. 우리 시대의 변화란 기존의 것을 부수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쌓아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큐가 말하는 변화는 전혀 다르다. 



실용적인 농업 다큐에 대한 기대는 오프닝에서 부터 머쓱해진다. 아직 얼음이 녹지 않은 황량한 겨울 들판에서 부터 시작된 서정적인 영상, 그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간다. 마치 '없음'을 상징하는 듯한 겨울을 이제 더는 사람이 머물지 않는 앙상한 폐건물이 대신하고, 그렇게 다큐는 디트로이트란 공간을 설명해 들어간다. 

폐건물더미에서 건져낸 삶과 죽음의 철학 
그리고 다음, 앤드류 캠퓨가 폐허가 된 집기들 사이에서 땅을 판다. 그러면서 '자기 마당의 쓰레기들에서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이라 같이 일을 하는 청소년 말릭에게 말을 건넨다. 그 쓰레기들에서 생애 주기를 느끼고 삶과 죽음을 끝이 아니라, 변화로 느껴보라고. 그 흙을 대하는 과정은 종교와도 같다고. 앤드류의 잠언과도 같은 말에 청년 말릭은 래퍼처럼 답한다. 쓰레기에서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를 하려하면 할 수 있지만, 거기서 삶과 죽음에 대한 경지까지는 어쩐지 쉬이 다가오지 않는다고. 

이 동문서답같은 앤드류와 말릭의 대화가 바로 이 다큐가 던진 질문의 시작이다. 삶의 문화에 익숙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거기서 생략된 질문, 죽음 이후, 심지어 죽음 조차도 거창하고 장식적인 형식 속에서 휩쓸려 들어가버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을 잃었다고 다큐는 원주민 노인 마일로 예롱우헤어의 입을 빌어 말한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농업'의 의미, 도시 농업, 텃밭 가꾸기는 '자연 친화적'인 삶의 방식으로 존중받는다. 또한 기업화된 식량 생산의 사이클에 대한 대안적 방식의 모색으로도 유의미하다. 그런데 다큐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네바의 혁신적 노동조합 자르댕 드 코카뉴에는 젊은 청년들이 여럿 모여 텃밭을 일군다.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잡초를 뽑는 이들, 심지어 밤에 꿈에 나올 정도라고 서로 농담을 할 정도다. 하지만 그렇게 고된 노동을 선택한 이들에게 텃밭 가꾸기는 식량을 얻는 것 이상이다. '상업적 활동'이 아니라, 도시의 소비자들과 연계하여, 필요한 만큼의 생산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들, 그들에게 이 일은 도시에서 원자화되었던 삶을 벗어나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요, 하늘과 생명과 나를 연결하는 과정이 된다. 그 풍성한 활동으로서의 농업은 끝나지 않는 삶의 사이클로서의 자각을 이들에게 일깨운다. 그들에게 식물은 그저 농사의 대상이 아니라, 느리게 사는 삶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다. 여리게만 보이지만 식물 역시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생존을 위한 싸움을 쉬지 않는 존재로 이들은 이런 식물에게서 종교와도 같은 영감을 얻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제네바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식물적인 삶(?)은 정치적인 자기 표현이기도 하다. 익명성의 세상에서 협동심을 키우고, 생산과 사람간의 거리를 좁히는, 이 세상의 흐름을 혁명적으로 거스르는 정치적인 '저항'이다. 

이런 과정을 마일로 노인은 '노래'라 칭한다. 자연의 언어를 이해하는 과정, 내 피부는 흙과 같고, 내 숨결은 바람이 되며, 내 피는 흐르는 물과 같으니, 우리 인간도 하나의 식물로써 변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그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면 자신의 안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라코타 어로 노래를 부르는 노인, 그 노랫말은 우리의 할 일은 '창조'를 거듭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식물과 동지가 되어 
그 '창조'의 의미를 오랜 시간을 걸려 실천하는 이가 있다. 바로 제네바의 모리스 마기이다. 늦은 밤 제네바의 거리, 이제 노년에 이른 한 사람이 거리를 헤맨다. 가로등만 덩그러니 서있는 황량한 공간, 그곳에 모리스는 땅을 파고 무언가를 심는다. 모리스의 가방 안에 들어있는 식물의 씨앗, 키 별로 네 종류로 나뉘어진 씨앗들은 거리의 척박한 땅에서도, 심지어 콘크리트 틈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선구 식물들이다. 

선구식물을 자신의 정치적 동지라 부르는 모리스. 사향 엉컹퀴와 같은 이들 식물에게서 삭막한 취리히를 10년안에 숲이 우거진 도시로 만들고자 하는 모리스는 동지애를 느낀다. 척박한 땅과의 싸움을 통해 선구 식물들은 그 보다 순한 다른 식물들도 자랄 수 있는 토양의 개선을 이뤄낸다. 그리고 그 과정은 누구 하나 시키는 사람없이 홀로 취리히의 거리에 거미줄같은 식물의 지도를 만들어낸 모리스의 행보와 일치한다. 



동지애는 또 다른 도시 디트로이트의 앤드류 부부도 마찬가지다. 식물을 키우는 과정을 통해 자신처럼 농사를 지었던 할머니 세대의 삶을 이해하게 된 앤드류의 아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 이후 관계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가졌던 그녀는 식물의 사이클을 통해, 죽음이 끝이 아닌, 거름으로서 새로운 순환의 시작이라는 새로운 차원에의 이해를 열게 된다. 우리가 버린 것에서 다시 무언가를 돌려받는 과정, 생명이 끝난 것 같던 계절 뒤의 새로운 생명의 잉태, 결국 그 과정은 우리 인간의 죽음 이후의 과정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연다. 끝이 아닌 휴지기, 다시 새로운 생명을 위한 헌신. 그리하여, 삶의 단계는 서로 차별성없이 하나의 순환으로 이해되고, 살아가고 나이들어 가고 변하는 것에 기꺼이 순응하게 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계란 등을 둘러싼 해프닝은 결국 우리 사회가 살아가고 있는 담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에서 늘 과잉된 생산물을 '소비'하는 주체로서만 자신을 증명하는 세상, 그러나 우리에게 물건으로 행복감을 주는 이 사회를,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그 인간의 수 배, 수십 배, 혹은 수 백배의 동물 등의 잔혹사와 불행을 깔고 앉은 사회라 단언한다. 그리고 그 단언의 재앙을 '계란'이라는 가장 익숙한 소비물품을 통해 확인한다. 그런 현실에대해, <도시 농업 프로젝트>는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식물을 통해 벌어지는 대순환의 사이클에 대한 진득한 천착을 통해 삶의 새로운 담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저 숲에 들어가 한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배움을 얻는 아이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더는 두렵지 않은 부부, 그리고 땀 흘려 일하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이 자신의 존재 이유가 된 젊은이들. 그들을 통해 얻는 건 농사의 기술이 아니라, 삶의 새로운 철학이다. 

by meditator 2017. 8. 22. 16:51

그랬다. 주인공은 맥베스였지만, 막상 이 작품을 읽고 나면 맥베스는 그냥 귀가 얇은 조절장애를 가진 남자처럼 여겨진다. 3명의 마녀와 아내, 예언을 빌어 그를 충동하는 마녀도 마녀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남편인 맥베스의 욕망에 엔진을 달고, 연료를 들이붓는 역할의 아내를 빼놓고서는 이 작품의 악행은 설명될 수 없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운명에 휘말린 맥베스를 인간적으로 나약한 인간으로 여기는 반면, 그의 아내 레이디 맥베스를 최종 보스마냥 악행의 주체 세력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하지만 정작 원작의 레이디 맥베스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남편의 왕좌를 지키려하더니 결국 죄책감에 미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버리는 걸로 셰익스피어는 그린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결말과 상관없이 '레이디 맥베스'는 욕망의 화신, 그 대명사가 되었다. 그렇게 욕망에 주도적으로 자신을 내맡긴 여성의 대명사가 된 그녀는 19세기라는 영국을 배경으로 새롭게 해석되어 등장한다. 


아니, 개봉한 영화 <레이디 맥베스> 이전에 역시나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영화 <레이디 맥베스>그 언어적 시원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로부터 찾을 수 있지만, 영화적 설정은 니콜라이 레스코프가 러시아 전역을 유랑하다 만난 봉건적 러시아 사회 내 인간 군상들의 실화로 비롯된다. 70살의 시아버지를 살해한 죄로 마을 광장에서 처형된 젊은 여성, 시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귀에 끓는 납을 부은 이 엽기적인 실화가 이 영화를 잉태했다. 



시아버지를 죽인 젊은 며느리의 도발 
도대체 왜 젊은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죽여야 했을까? 거기엔 아직 사회적 존재로서 자기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는 전근대 사회 속의 여성의 존재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에서 레이디 맥베스는 자신이 가진 권력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남편을 왕으로 만들어야 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도 있고, 역사 속 다수의 여왕들이 있었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여성은 남편의 존재에 의해, 더 정확하게는 남편이 속한 사회적 계층의 이름표에 의해 여성들의 존재가 값이 매겨졌다는 것이 맞겠다. 

그리하여 <레이디 맥베스>는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해 보이는 10의 소녀티가 벗어지지 않은 캐서린(플로렌스 퓨 분)의 결혼식으로 시작된다. 그녀가 전에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영화는 전혀 설명치 않는다. 이 결혼으로 인해 그녀는 이제 지주 집안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바로 다음 장면이 보여주듯 거의 아버지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남편과의 자식 생산. 하지만 영화는 결국 젊은 아내가 문제가 아니라는 걸 첫 날 밤 증명한다. 
집안의 대를 이을 수 없는 며느리, 할 일이라고는 몸을 옥죄는 옷을 입고 앉아서 조는 거 말고는 할 일이라고는 없는 꽃다운 나이의 그녀, 집안 광산에 생긴 사고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주 집안 며느리로 하인들 단속에 나섰던 그녀의 눈에 자신을 거스른 한 명에 오히려 매료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씨받이로 들인 젊은 며느리가 불능인 남편 대신 젊은 하인과 바람나는 설정, 이는 '열녀문의 비밀' 식으로 <전설의 고향> 등을 비롯한 다수의 전래 괴담의 단솔 소재였었다. 이들 역시 전해져 내려오는 '사실'에 근거한 전래 설화였었다. 양반 가문, 그리고 그 가문의 전통과 혈연적 승계를 위해 희생된 여성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원작의 러시아, 영화의 배경 영국 등 세계 그 어느 곳이든 아직 여성을 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 어느 곳에서나 쉬이 만날 수 있는 '괴담'들이다. 

영화 속 캐서린이 살았던 19세기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고, 시민 혁명 이후 제도적 민주주의가 갖춰져 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절과 시골 마을 지주의 아내이자 딸인 캐서린에게는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를 작황도 좋지 않은 밭과 돈 몇 푼에 사온 시아버지는 그녀에게 지주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강요한다. 



열녀문의 희생 대신, 권력의 화신이 된 
그 '괴담'들의 주인공들은 끓는 납을 시아버지 귀에 부어 살인을 저질렀지만, 결국 광장에서 처형되거나 열녀문의 희생자로 전해진다. 그런데 21세기에 재연된 레이디 맥베스의 여주인공 캐서린은 괴담의 주인공이 되었던 그녀들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물론 시작은 욕망이다. 불구인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을 요구하고 절도있는 예절을 요구하는 시아버지, 그런 숨막히는 집안 분위기의 틈에서 그녀는 거침없이 욕망의 일탈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욕망은 에스컬레이션을 타고 연인과의 밀애를 위한 수단들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가는 것으로 나아간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일탈은 곧 부도덕이란 낙인과 함께 가장 엄격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남성의 혈연에 의해 계승되는 사회에서, 그 혈연의 승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여성의 순결성이야말로 그 제도를 가능케 해주는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거기에 남성과 여성의 성적 욕망은 중요치 않는다. 영화는 바로 그런 배제된 여성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운다. 19세기의 <마담 보봐리>의 성적인 일탈이 곧 사회적으로 억눌린 여성의 해방을 상징하듯, <레이디 맥베스> 역시 캐서린의 욕망을 직시한다. 

하지만 영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마담 보봐리>를 비롯하여, 그리고 원작 <레이디 맥베스>, 그리고 숱한 우리네의 열녀문이란 허상 속에 스러져간 여성 잔혹사 속 주인공들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하지 못한 채, 사랑이란 멍에를 짚어지고 스러져 간 것과 달리, 캐서린은 자신의 욕망을 지켜내기 위해 '남성'으로 상징되는 권력'을 쟁탈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랑'의 순교자가 되는 대산, 그 욕망의 대상조차도 자신이 쟁탈한 권력을 위해 거침없이 제물로 삼는 과정은 새로운 권력의 탄생을 뜻한다. 비록 그 권력이 그 커다란 집안에 그녀 혼자 오도카니 남겨진 것이라 해도.



남성과 여성의 욕망이 만나는 가장 본능적인 과정은, 역사를 통해 제도화된다. 하지만 그 제도는 사회의 주도권이 남성에 의해 편제되는 과정에서 여성 존재 자체는 물론, 여성의 성도 소외되고 만다. 영화 <레이디 맥베스>는 그 소외된 여성의 성과 욕망에 대한 직시에서 부터 문제를 바라본다. 삿된 욕망이 아니라, 팔려온 소녀의 정당한 자기 욕망이 왜곡되어졌을 때, 거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의 표현 과정에 대해, 권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그녀의 부당한 대우는 '권력'을 가진 남성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반작용으로 캐서린은 자신의 권력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다. 늘 그 욕망의 끝에서 파멸하고야 마는 여성들에 익숙했던 우리에게, 사랑조차도 권력 앞에 희생하고마는 새로운 권력 주체 캐서린의 존재는 낯설지만, 이제는 던져봐야 할 질문이 된다. 

물론 영화는 쉽게 캐서린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돈에 팔려왔지만 남편과 시아버지가 없는 집안에서 거뜬히 채찍을 손에 들었던 백인 여성 지주가 된 캐서린은 비록 남편과 시아버지, 그리고 마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는 '을'이 되지만,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들의 목숨이 마차에 짐짝처럼 실려가는 신세가 되어버린 하녀와 하인의 존재에 이르면 인종과 계급의 모순 역시 놓치지 않는다. 아니 그러기에 어쩌면 레이디 맥베스는 인간의 욕망과 권력, 그리고 사회라는 그 체계 자체에 대한 깊은 질문의 시작이 될 지도 모르겠다.
by meditator 2017. 8. 19. 16:59

72주년이다. 그 어느 해보다도 '광복'이란 의미가 다가오는 올해의 광복절, 하지만 그 드라마의 홍수 속에서도 그 흔한 광복절 특집 드라마 하나 없이 영화 <암살>의 재방이 면피를 하고, 한류 뮤직뱅크로 축하를 하는 시절이 되었다. 72년이 지난 광복은 이제 그런 것일까? 세계 역사상 식민지의 기간 내내 독립 운동이 멈추지 않았던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무이하다는데, 과연 그 자부심을 현재의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걸까? 그 미완의 과제에 성실하게 답한 건 그래도 다큐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음악을 통해, 그리고 독립 운동가들이 쓰던 암호를 통해 독립 운동을 살펴보고자 한 ebs의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와 kbs의 <독립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는 주목할 만하다.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

우리는 한국 혁명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우리는 한국 광복군/ 악마의 원수를 쳐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 <압록강 행진곡> 박영만 작사, 한유한 작곡

방송을 통해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이 노래가 나오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국 광복군가였다는 이 노래는 7,80년대 학생 운동권에서 회자되던 노래이기도 하였다. 정말 우렁차게 이 노래를 부르면 당장이라도 압록강을 넘어 백두산을 넘을 만큼 열정이 차오르게 했던 노래, '노래'의 힘이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세월을 건너 후손이던 대학생들의 가슴마처 차오르게 했던 이 노래를 만든 주인공에 대해서는 정작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그 작업을 ebs 광복절 특집 다큐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가 <1부 망국의 노래, 깊이 생각>, <2부 중원에서 별이되다>로 다루었다. 

다큐는 이제는 기록에서조차 희미해진 그 노래를 오늘날의 노래로 되살리려는 노력과 함께 진행된다. 우리 항일 가요의 시작은 1914년 민족 정신을 담은 최신 창가집을 그 시작으로 본다. 광성 중학교에서 발행된 이 창가집은 발행 1년만에 그 일제에 의해 압수, 그 내용이 남겨져 있지 않다. 하지만 독립 운동의 역사 그 갈피갈피에 음악은 함께 했다. 1908년 만주로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옮긴 민족 운동 세력이 명동 학교를 설립하고 영국 국가의 곡을 차용하여 '아무런 일 겁낼 것없구나 정신은 자유요 의기가 용감한' 교가를 만들었다. 이런 민족의 의분이 담긴 교가는 1899년 약관 21세의 안창호 선생은 평안남도에 최초의 사립학교인 점진학교를 세우며 '쾌하다, 장검을 비껴들었네, 오늘날 우리 손에 잡은 칼은 요동 만주에 크게 활동하던 동명왕의 칼이 방불하구나'란 '격검가'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저기 정순이 쉬던데/ 피던 꽃 떨어지고 
뻐국 색도 울고가니/ 지났구나 봄철이   - <저기 정순이 쉬는데>, 동해 수부 작사, 외국곡

의기가 넘치는 곡만 있는건 아니다. 3.1운동 당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처참하게 처결당한 정순이란 여학생의 소식을 전한 미국의 민족 신문 <신한일보>는 정순의 슬픈 사연을 서정적으로 승화시킨 <저기 정순이 쉬는데>를 발표했다. 당시 음악들을 보면 '항일 의식' 고취를 중요시해 가사는 우리의 손으로 짓는 반면, 곡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외곡곡을 차용한 사례가 많았다. 이렇게 다큐는 당시 곡들의 특징과 함께, 동해수부나, 한유한 등 그 곡을 만든 이들의 흔적을 찾아간다. 또한 그런 독립 운동 시기의 음악을 꾸준히 연구해온 작년에 돌아가신 후 올해에 이르러서야 <항일음악 330곡집>을 펴낸 노동은 교수를 비롯, 고등학교 교사를 하면서 평생을 역시나 일제 하 음악 발굴에 헌신하겠다고 공언한 황선열 교사 등을 소개한다. 

그렇다면 다큐를 통해 소개된 항일 음악들의 의의는 무엇일까? 일찌기 격검가를 비롯, 최근 우리의 애국가 역시 안창호 선생님을 비롯한 임시 정부 요인들의 합작품이 아닐까 라고 추정되는 20여곡의 음악을 남기신 안창호 선생은 일찌기 음악이 정서와 감흥을 울려 독립 운동의 투쟁심을 끌어내는 건 물론, 치료 효과조차 갖는다'고 주장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이제 역사가 된 항일 음악, 그에 대해 황선열 선생은 손으로 씌여 입으로 향유된 한국 문학의 빠져서는 안되는 중요 장르라 정의내린다. 그 잊혀졌던 장르로서의 항일 문학, 그 복원으로서 <노래로 조국 광복을 염원하다>는 의미를 지닌다. 



<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
어떤 분이 얼마나 독립 운동의 주요한 역할을 하셨는가는 독립운동사의 행간마다 만나게 되는 그분의 이름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여곡의 작사가로 항일 음악사에서 이름을 남기셨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존함은 kbs1에서 방영된 광복절 특집 다큐<독립 운동의 비밀 병기, 암호>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1932년 서대문 형무소 안창호 선생이 수감되셨다. 만주와 미국으로 오랜 외국 생활을 하셨던 안창호 선생, 그러기에 조국 독립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나누던 대화에 익숙치 않으셨다. 그런 안창호 선생에게 옆 방의 김정련 선생이 감옥에서의 대화를 전수하고자 나서셨는데, 그게 바로 이 다큐가 첫 번째로 소개한 타벽 통보법이다. 자음과 모음, 숫자 등을 주먹, 손가락, 손바닥을 이용하여 벽과 벽을 통해 전달하는 이 방식은 '내일 오후 두시 만세 시위'라는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 23번의 타벽이 필요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에서 이 타벽 통보법은 그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실제 안창호 선생에게 타벽 통보법을 전달하려가 걸릴 뻔한 김정련 선생은 스스로 똥물을 뒤집어 쓰고 미친 척을 하며 암호를 지켜냈지만, 독방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이렇게 일제 하 감옥에서의 눈물겨운 에피소드를 통해 다큐는 비밀 병기 암호에 대한 기록을 연다. 

그런데 독립운동의 암호 연구에는 아이러니한 면이 있음을 다큐는 지적한다. 성공한 작전의 암호는 알려지지 않았다는, 즉 작전의 성공은 곧 암호의 비밀 보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니 암호 연구는 결구 실패한 작전, 기사 등을 통해 알려진 흔적을 통해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1930년대 호서 은행 불법 금융 사기 사건. 일제는 암호 문서를 단서로 이 사기 사건을 발각하고 1만 7천원을 회수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호서 은행은 지금의 충남 예산에 있던 당시 예당 평야를 배경으로 한 충남의 대표적인 은행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사건은 미곡상 최석영이 서류를 위조하여 여러 은행에서 불법으로 대출을 받은 사건이지만, 그 뒤에는 고향 예산에서 독립 운동자금을 모으려고 했던 독립운동가 신현상이 있었다. 일제는 이 사건으로 중국 베이징 등지에서 신현상 외 5인을 체포하였던 것.

결국 비밀 병기로서의 암호는, 다른 한편에서 일제와의 피말리는 정보전의 양상으로 진행된을 다큐는 보여준다. 중국 텐진 화평구 일본 조계지의 정실은호 일본 은행이 대낮에 금고가 털린 사건, 이 사건에서 활약을 한건 암호 닭다리라 칭해졌던 권총이었다. 또한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우당 이회영 선생이 고국에 보낸 서신에 등장한 새우젓, 골뱅이젓은 당시 독립운동 자금을 위해 접촉할 사람들의 별명, 그렇게 당시 사람들은 친일파는 모이를 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덤빈다 하여 꿩이라 하거나, 밀정을 여우라는 식으로 빗대어 말하는 은어를 흔히 사용하곤 했음을 당시를 연구했던 연구자들의 입을 빌어 밝힌다. 



하지만 이런 은어는 1921년 일제에 의해 발간된 후 보다 체계화되어갔다. 일본 외무성에 남겨진 자료중 가장 오래된 1919년 2월 28일 자료를 통해 본 독립운동의 암호는 자음과 모음을 숫자로 표시하는 식으로 변화해 갔고, 3.1만세 운동 이후 보다 고도화되어갔다. 일본의 감시와 검거가 치열해지는 만큼 암호 체계는 서신용, 전보용으로 분화되고,  자리수가 두 자리, 세 자리로 보다 해독할 수 없는 복잡한 체계로 변화되어갔음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또한 그 변화의 주기도 점점 짧아져 가는 것도 한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독립 운동이 다양한 계열로 분화되어가는 그 양상은 암호에도 반영되어 통일되어 있지 않은 일제에 혼돈을 준 지점이라는 것도 놓치지 않는다.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던 유격대원들, 일제의 공격을 대비하기 나선 어린 학생들이 방어할 시간을 마련하기 위해 잇닿은 산봉오리에서 새오리, 나무통 두드리기, 깃발, 봉화 등 다양한 수단과 방식도 멀리 연길 구룡마을 현장에서 전한다. 

실패한 작전을 통해 유추해본 비밀 병기 암호는, 그 암호 자체로 한편의 첩보 영화 소개 프로그램처럼 흥미진진했다. 또한 해방의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제에 항거했던 우리 선열들의 치열한 결과물로써 암호만큼 명확한 증거인 것도 없을 것이라는 걸 다큐는 여실하게 보여준다. 

노래와 암호, 이 전혀 다른 상징 체계, 하지만 그 극과 극의 메시지가 두 개의 다큐를 통해 항일과 광복에의 염원으로 통일된다. 그리고 역사 행간 속에서는 읽어낼 수 없었던 생생하고 치열한 독립의 현장으로 다큐는 우리를 인도한다.  
by meditator 2017. 8. 16. 15:59

올 여름 느지막이 극장을 찾아온 납량 특집 영화들과 달리 tv에는 이렇다할 '공포'를 다룬 작품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포물'이 보고 싶은 시청자들이라면 굳이 멀리서 찾을 것이 없다. 죽은 어머니를 빙의한 딸이 어머니의 옷을 입고 온 집안을 휘젖고 다니거나, 비오는 날 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산 사람이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협박하는 드라마라면 이 무더운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주말 드라마의 진화는 이제 가족극의 형식을 호러와 스릴러의 영역까지 진화하기에 이른다. 바로 jtbc의 <품위있는 여자>와 sbs의 <언니는 살아있다>가 그것이다. 




재벌가 부조리극으로서의 주말 드라마
점찍고 돌아와 복수를 한다는 황당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 화끈한 복수의 방식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었던 김순옥 작가는 <내딸 금사월(2015)>과 <왔다 장보리(2014)>에 이어 2회 연속 주말 드라마 <언니는 살아있다>로 돌아왔다. 높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악녀에 의존한 엉성한 구조로 질타받았던 전작에 대한 평가로 절치부심했다는 듯 고속도로 다중 충돌 사고로 시작된 드라마는 민들레(장서희 분), 강하리(김주현 분), 김은향(오윤아 분), 양달희(다솜 분)의 악연을 한 쾌에 조장한다. 그 그 배후로 공룡그룹 구필모(손창민 분) 회장의 딸 구세경(손여은 분)과 아들의 친모 이계화(양정아 분)를 얽혀들게 만든다. 한날 한 시에 일어난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게 된 사람들과 그 사건을 직접, 혹은 간접으로 만들어 낸 이들의 한 판 복수극은 공룡그룹이라는 재벌가를 중심으로 때론 스릴러로, 때론 블랙코미디로, 심지어 때로는 호러의 영역까지 넘나들며 엎치락뒤치락하는 50부의 레이스를 벌인다. 

<사랑하는 은동아>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힘쎈 여자 도봉순>으로 인기 작가가 된 백미경 작가가 들고 온 작품은 뜻밖에도 전작의 장르와는 전혀 다른 <품위있는 여자>이다. <언니는 살아있다>의 시작이 다중충돌 교통사고였다면, <품위있는 여자>는 주인공 격인 박복자(김선아 분)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재벌가 대성펄프에 간병인으로 등장하여 숟가락을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마다할 수 없다는 안태동 회장의 아내 자리까지 등극하여 상류 사회 진입에 성공한 미스터리한 인물 박복자, 그녀를 중심으로 안태동 회장의 자녀들과, 자녀들 중 특히 그녀를 그 자리에 있게 해준 둘째 며느리 우아진(김희선 분)과의 갈등, 그리고 우아진이 몸담은 상류 사회의 민낯을 낱낱이 까발리며 '부조리극'이자 '스릴러'으로서의 이 드라마의 묘미를 한껏 살려나가는 중이다. 

두 드라마는 공히 재벌가, 혹은 준재벌가를 배경으로 삼은 전형적인 주말 가족극의 형태를 띤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 주말 드라마에는 '가족'이 주인공이 되었고, 또한 그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재벌'이 없으면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품위있는 그녀>와 <언니는 살아있다> 역시 마찬가지로 그 전통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회장님이, 그가 이룬 부가 결국은 이들 드라마가 벌이는 모든 갈등의 근원이 된다. <언니가 살아있다>의 양달희는 자신의 신분 세탁을 위해 사고 현장에서 도망치며, 구세경은 그룹 내에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설기찬(이지훈 분)의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심지어 그를 없애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애꿏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회장의 아이를 낳은 이계화는 '미쓰리' 취급을 받는 자신의 수모를 자기 아들의 재벌가 승계로 보상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품위있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대성 펄프의 부를 통해 상류 사회로 진입하고자 하는 미스터리한 인물 박복자와 그런 그녀가 자신들이 물려받을 부를 훼방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자식들이 벌이게 되는 갈등 역시 대성 펄프와 그것의 현신인 회장님과의 관계로 현실화된다. 대성 펄프만이 아니다. 우아진이 만나는 상류 사회 속 각 집안의 갈등은 결국 경제적 주도권과 그것을 가부장으로 승인받은 오늘날 한국 사회 가족의 문제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여여 갈등'으로 드러나는 이들 드라마의 주된 갈등은 이전의 재벌가의 권력 승계와 관련된 재벌가의 드라마를 가족극의 형태로 질적 전환을 이뤄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재벌이라는 이중적 권위 속에서의 '아비규환'이 된다. 



특히 <품위있는 그녀>의 박복자와, <언니는 살아있다>의 이계화가 극중 악의 최종 보스로 극중 모든 인물들에게 가장 적대적인 존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극중 인물들이 아버지라던가, 시아버지라던가 혈연적 관계로 재벌가와 관계를 맺은 것과 달리, 단 한 방울의 피가 섞이지 않은 완벽한 타인이다. 그런 타인들이 그저 자신들의 욕망 만으로 재벌가에 진입하여 여성이라는 특별한 능력(?)을 이용하여 상류 사회의 일원이 되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들의 그런 욕망은 이계화의 경우 재벌 회장의 아이를 낳았음에도 정당한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받지 못한 채 가정부 취급을 받는다거나, 박복자처럼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었음에도 그녀의 자리와 상관없이 그녀를 배척하고 하는 갖가지 장치를 주변인들이 제안하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을 배쳑하는 주변인들때문에, 아니 끓어오르는 자신의 욕망으로 인해 그녀들의 상승 욕구는 결국 여러 부작용을 안고 스스로 자중지난에 빠지고 만다. 

도발적인 하지만 순수하리만치 정확한 박복자와 이계화의 욕망, 그 대상이 되는 재벌가의 회장님들은 적극적인 그 욕망에 대해 무기력하다. 반신불수였던 안태동 회장은 심지어 그녀의 실체를 알고나서도 자신의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박복자의 진심을 얻고 싶어한다. 그런가 하면 구필모 회장은 민들레와 이계화의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한 채 흔들리고, 딸 구세경의 비리에 눈뜬 장님이나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재벌이라는 부권을 가운데 놓고, 욕망하는 여성들의 매치를 통해 그 부권과 부를 흔들며 시청자들의 구미를 당긴다. 그들이 흔드는 그 반동이 커질수록, 시청자들의 흥미와 시청률은 따라 상승한다. 무기력한 가부장제와 부도덕한 부에 대한 조롱은 이런 식으로 드라마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그에 대한 열렬한 반응으로 시청자들은 화답한다. 



부도덕한 욕망의 결과는? 
물론 과정은 그렇지만 두 드라마의 결론은 다를 듯하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실소와 썩소라는 두 드라마에 대한 평가를 낳을 것이다. 어쨋든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자신의 능력만으로 상류 사회에 진입하려던 그 욕망은 2017년에도 실패할 것이다. 재벌가의 며느리로서 안락함을 누리던 우아진이 재벌가를 나와, 이제 재벌가를 상대로 돈을 벌며 자신의 인생을 찾았다고 하는 것처럼, 돈이 전부가 아닌 삶의 주제 의식으로 <품위있는 여자>는 돈이 전부인 사회에 대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자 하듯, 돈을 위해 자신을 던졌던 박복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루게 할 것이다. 대성 펄프는 물론 극중에서 나름 상류 사회연했던 사람들이 쌓은 부의 성채는 공허한 허깨비로 남아 씁쓰레하지만 돈이 전부가 아닌 삶에 대한 위로를 주제 의식으로 남길 것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아진도, 박복자도 두 주인공은 사회적 신분 상승에서는 멀어졌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쾌감'과 현실적 결과의 괴리다. 



그에 반해, 늘 오락가락하던 구필모 회장이 드디어 이계화의 정체를 알아차린 <언니는 살아있다>는 부도덕한 승계자 이계화 모자를 처리하고, 부조리한 방식으로 부를 재편하려 했던 구세경을 제거하며,  잃어버린 아들 설기찬을 만나는 등의 과정을 통해 건강한 재벌가이자 가부장적 구조로 재편될 것이다. 실소를 자아내던 설정들의 납치, 불륜. 살인 등 드라마에서 보여질 수 있는 갖가지 방법들을 다 동원했던 드라마는 그럼에도 결국 착한 사람들은 부의 은총마저 받으며 행복해지고, 어긋난 욕망으로 계층 상승의 에스컬레이션을 꿈꾸던 이들은 처분될 것이다. 

올 여름의 더위만큼이나 브라운관을 갖가지 범죄와 욕망으로 달구었던 이들 드라마가 보여준 건, 결국 '가족'과 '부'라는 이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두 가지 요소가 보이는 '막장'의 현실이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어느 집의 이야기다라는 소문이 회자되는 그 이야기들의 현실성을 차치하고서라도 '가족'과 그 '가족'을 지탱하는 부의 성채가 이루어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의 스릴러적 장치, 그 현실성말이다. 

by meditator 2017. 8. 15. 16:55

시간을 건너뛰는 '타임 슬립'은 이제 드라마에서는 울궈먹을 대로 울궈먹은 단물이 거의 나올 것도 없는 소재다. 하지만, 그 '시간'의 환타지는 얼마전 <너의 이름은> 흥행에서도 보여지듯이 또 여전히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대중적 공감대를 배가시킬 '마법'의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비슷한 시기 두 편의 '타임슬립'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두 편 찾아왔다. kbs2의 <맨홀; 이상한 나라의 필(이하 맨홀)>과 tvn의 <명불허전>이 그것이다. 


시작은 두 드라마 모두 미미했다. 수목 공중파 3사 드라마에서 부진했던 전작 <7일의 왕비>의 후속작이란 부담때문이었을까? 첫 회를 방영한 <맨홀>은 3.1%(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시작했다. <명불허전> 역시 마찬가지다. 너무도 화려한 <비밀의 숲>의 후광은 순식간에 사라진듯, 2.715%(닐슨 코리아 케이블 전국 기준)로 첫 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숫자로 보면 2%나 3%나 라고 보여지지만 공중파의 3%와 케이블의 2%는 사실 하늘과 땅의 차이다(2%대에도 불구하고 <명불허전>은 케이블 시청률 1위다). 하지만 두 드라마가 더욱 간격을 넓힌 건, 이어진 2회이다. <맨홀>이 2회 2.8%로 kbs2의 10년 내 최저 시청률을 기록한 것과 달리, <명불허전>은 2회 3.995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하며 앞날에 서광을 스스로 펼친다. 무엇이 이 '타임슬립' 두 드라마의 궤적을 달리하도록 만들었을까?




대략난감의 고난을 타임슬립으로 
왜 타임 슬립을 해야할까? 그건 아마도 '환타지'임에도 시간을 거스르는 개연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전제 요건이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맨홀>과 <명불허전> 두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의 대략 난감 현실적 딜레마를 제시한다. 

<명불허전>의 주인공 허임(김남길 분). 그는 그에게 병을 고치려는 환자들이 줄을 서는 혜민서의 뛰어난 침술을 가진 의원이다. 하지만 하루의 일과가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밖의 환자들을 핑계로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그는 혜민서를 찾은 민초들이 우러러 마지않는 신의가 아니라, 천출로 인한 만년 참봉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고관들의 비밀 진료를 통해 얻은 부로 보상받으려는 '속물'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편두통에 시달리는 왕에게 침으로 시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에 나타난 뜻밖의 침통을 들고 어전으로 달려간 그의 손이 떨렸다. 혜민서의 신의에서 하루 아침에 어심을 거스르는 죄인이 된 그, 쫓기던 그는 그만 화살을 맞고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그가 눈을 뜬건 2017년 청계천 한복판이다. 

<맨홀>의 봉필(김재중 분)이라고 해서 나을 게 없다. 하음 봉씨 집안의 3대 독자라고 하나, 공시생 2년차에 동네 대표 백수 그의 부재에 부모님은 안부조차 궁금해 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같은 산부인과 병동에서 태어난 인연으로 28년째 짝사랑을 해오던 수진(유이 분)가 겨우 만난 지 3개월된 남자와 결혼을 한다니. 봉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하지만 그런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혼 앞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술의 기운을 빌려 진심을 토로해 보려 하지만, 보여지는 건 그저 '진상', 그런 그를 외계의 기운을 받은 '맨홀'이 집어 삼켜 버린다. 맨홀을 토해낸 그가 도착한 곳은 수진과 그의 인연이 꼬이기 시작한 고등학교 시절. 

비슷한 타임슬립 고난기? 하지만 그 극과 극의 차이를 낳은 건 개연성. 
얼핏 보면 2%나 3%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숫자 같지만 공중파와 케이블이라는 매체의 차이로 극과 극의 결과가 된 <맨홀>과 <명불허전>, 하지만 더 심각한 건 <맨홀>이 2회만에 자체 최저 시청률을 찍었음에도 앞으로 그다지 시청률 회복의 기미는 커녕, 더 낮아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는 것과 달리, 단 한 회만에 1%대의 상승률을 보인 <명불허전>은 의학 드라마 불패의 신화까지 얹은 채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입소문을 타고 있는 중이다. 

똑같이 난처한 처지에 빠진 남자 주인공인데 무엇이 두 드라마의 희비를 엇갈리게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극중 초반 많은 비중을 가지고 활약을 보이는 남자 주인공 캐릭터의 개연성과 연기력이 아닐까 싶다. 




이미 허준이라는 조선의 걸출한 명의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는 상당수의 시청자들은 같은 '허씨 집안'인가 싶은 허임의 등장에 솔깃해진다. 심지어 극 초반, 이 허임이란 자가 허준못지 않은 명의같아 보이니 더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명불허전>은 반전으로 천출의 만년 참봉이란 새로운 설정을 들이민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 거기서 제 아무리 침술이 뛰어난다 한들, 신분제의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없는 허임은, 대체적으로 신분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그 벽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비탄의 세월을 보내는 것과 달리, 그런 자신의 처지를 역으로 이용하여 이재 축적에 몰두한다. 

신분제의 처지에 절망하는 대신 고위층 상대로 의술을 팔아먹는 캐릭터는 그 자체로 신선하지만, 또한 이전 사극과는 다른, 현대적인 그 속물 캐릭터로 인해 그의 타임 슬립 이후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들 바탕이 된다. 무엇보다, 그의 이중적 속물 캐릭터가 그런 이면의 모습으로 인한 갈등과 사건을 만들어 내며, 어전 침술의 해프닝에 대한 개연성을 뒷받침하게 되는 것이다. 뜻밖에 그에게 나타난 신비의 침통, 마치 하늘이 내린 그 침통은 진정한 의술의 길에서 비껴간 그에게 벌을 주듯이 '타임 슬립'을 선사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스른 이곳에서 만난, 과거와 똑같이 자신의 삶을 포기한 소녀, 그 소녀로 인해 인술은 천술 대신, 재물 축적의 기회로 삼았던 속물 의원에겐 새로운 개과천선의 기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걸 1,2회 드라마는 시청자에게 설득한다. 

그에 반해 일본 드라마 <프로포즈 대작전>의 갖가지 설정을 고스라히 빼다박은 듯한 <맨홀>의 문제점은 바로 그 드라마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 주이공의 캐릭터와 시대와의 불화로 인해 덜커덕거리기 시작한다. 3포 세대, 5포 세대, 9포 세대라며 취업이 안되면, 설사 취업이 된다 하더라도 결혼은 사치가 된 세상에서 동네 대표 백수 봉필의 캐릭터는 너무나 유유자적이다. 공시생 3년만에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는 다큐 속 주인공의 표현이 아니더라도, 취업이 하늘에 별따기인 세상에서 '자존감'의 무너짐을 청춘의 댓가로 알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28년을 짝사랑했다고 그녀의 결혼 앞으로 돌진하는 봉필의 패기는 설득력을 잃는다. 

또한 패기 잃은 설득력을 설득해 내는 방식도 매번 화를 내는 건지, 진심을 말하는 건지 모를 악다구니와, 술의 힘을 빌린 진상이라니, 그 조차도 그렇다 치더라도, 시간의 힘을 빌린 그의 타임 슬립에서도 여전히 달라지지 않는 봉필이며, 그럼에도 그런 그에게 변화하는 여주인공의 설정은 이해를 불가하게 한다. 아니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가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건, 결혼이라는 제도 앞에선, 혹은 28년 짝사랑 앞에 선 여주인공의 비주체적 설정이다. 2007년의 일본 드라마를 2017년의 대한민국에 어떤 고민도 없이 베끼듯 들여놓은 설정에서 여자 주인공은 비중을 말하기 전에 너무도 극중 설정에서 '대상화'되어 있다는 점이 굳이 당찬 <명불허전>의 최연경(김아중 분)을 비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진상 남자 주인공과 함께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두 번 째 패착이 될 것이다. 

하지만 설정이 시대착오적이라 하더라도 때로는 주인공들의 연기로 호흡기를 달고 기사회생하는 드라마가 있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맨홀>에서의 김재중과 유이의 연기는 주인공으로 극을 끌고 가기에는 너무도 안이하다. 특히 극중 80%의 활약을 보이는 김재중의 경우, 감독의 디렉션이 있었는가가 의심스러울 만큼 그의 소란스러운 연기와 소통안되는 대사 처리로 인해 지레 채널을 돌리게 만든다. 후에 이 드라마의 패인에서 남자 주인공의 책임을 결코 피해 갈 수 없을 만큼. 

그에 반해 김남길이 연기하는 허임은 절묘하다. 사실 극중 진상짓이라고 하면 봉필에 못지 않다. 심지어 음식을 앞에 두고 침까지 질질 흘린다. 하지만 그런 진상짓조차 순간 순간 진지해지는 의원으로서의 그의 연기와 절묘하게 합을 이뤄가며 속물 의원의 타임 슬립기를 그저 가볍지만은 않게 무게 중심을 잡는다. 거기에 이제 김아중이 선택한 작품이라면 믿고 보게 만든 김아중의 작품 선택과, 그 선택이 아쉽지 않은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역시 <명불허전>을 믿고 다음 회를 기다리도록 만든다. 



사실 두 남자 주인공의 연기를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잘 되는 집은 모든 것이 다 이유가 되고, 안되는 집은 지푸라기 하나도 핑계가 되듯이, <명불허전>의 과하지 않은 연출과 신선한 스토리, 하물며 기가 막힌 배경 음악까지 아직은 섣부르지만 2회에 이르러서까지 이 드라마의 앞날을 밝게 해준다. 그런 반면 <맨홀>에 이르러서는 무엇보다, 한류 스타를 앞세운 안이한 외화 벌이 드라마의 기획을 다시 한번 질타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이 드라마의 작가가 기대주였던 <텐>의 작가였다는 점에서 더더욱 안타까움을 남긴다. 설사 이 드라마가 국내에서 최저의 기록을 세우고, 해외 판매에서 호조를 보인다 한들, 과연 이런 식의 영업 방식이 안그래도 위기를 맞이한 한류에 도움이 될까?
by meditator 2017. 8. 14. 16:20

'베짱이', '생기가 다빠진 죽은 생선' 이건 직장인들이 생각하는 퇴근 후 자신들의 모습이다. 퇴근 후에 하는 가장 많은 일이 tv 시청, 인터넷, 그리고 술이기가 십상인, 그러다 내일을 위해 '자자'는 삶. 문제는 없지만 답도 없는 직장 생활, 하지만, 그 직장 생활보다 어쩌면 더 답이 없는 퇴근 후의 삶, 그게 현재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삶이 아닐까? 그런 쳇바퀴같은 대한민국 직장 문화에 2017 새로운 핫 키워드가 등장했다. 바로 워너벨, work & life balenced가 그것이다. 




60;40? 아니 40; 60? 퇴근 후의 삶
그 시작은 오밤중에 거리를 달리는 사람들로 부터 시작된다. 동호회나 직장인들이 아닌 달리기가 좋아서 만난 사람들의 '야밤 런닝', 그들은 각자의 직업을 가졌지만, 이렇게 밤을 달린다. 너무 힘들어 다음 번에는 안나가겠다 하면서도 결국은 또 다음 대회를 준비하게 되는, 좋아서 달리다보니, 이젠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대회까지 참여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다. 직장 생활 60%, 러닝 40%라고 하고 싶지만, 종종 그 균형 비율이 헷깔리는 사람들은 그저 달리며 조금씩 자신의 기록이 단축되는 그 '단순한 즐거움'에 퇴근 이후의 시간을 헌납한다. 

8월 10일 mbc스페셜이 주목한 2030 세대의 새로운 트렌드 워너벨의 현장에는 이른바 우리 사회에서 취미라고 내세우는 등산, 축구, 종교 활동의 경지를 넘어서 새로운 삶의 영역을 개척해 가는 사람들이 있다. 



지하철에서 보호대를 찬 발목을 치켜세우며 턴을 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31살 항공사 사무직인 손인하 씨가 선택한 워너벨은 '발레'이다. 아마츄어 발레단의 일원으로 그녀는 이제 곧 공연을 앞두고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대학병원 응급실 경력 간호사 16년차 김효선 씨는 간호사 파이터로 방송을 탈 정도로 화제가 되었던 격투기에 빠져있다. 다이어트로 시작한 격투기는 이제 당당하게 그녀를 프로 무대에 세웠고, 휴가조차 태국에 가서 무에타이를 배울 정도로 자신의 '취미'에 빠져있다. 
그 '취미'를 위해 300만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주말마다 바다를 건너는 이도 있다. 대학병원 원무팀장 유주형씨는 50세의 최고령 해녀학교 학생이다. 1000km의 통학 거리를 마다않고 제주도 한림읍 앞바다 물로 달려가는 그는 이제는 퇴직 후 제 2의 인생으로 '물질'을 고려 중일 정도다. 

성공 신화가 깨어진 대한민국, 각자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
이렇게 저마다 각양각색의 '퇴근 후'의 삶을 모색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삶의 변화가 트렌드로 등장한 2017. 그 저변엔 이제 더 이상 '성공 신화'를 쓸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가 있다. 자신의 욕구를 짖누르며 일에 매달려가며 평생 직장을 위해 헌신했던 것이 선배 직장인들의 삶이었다면, 더 이상 평생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에서, 보장되지 않는 직장에서의 성공 대신, '나'의 행복을 모색하고자 노력하는 직장인들, 그런 고민에서 바로 특별한 존재 이유로서의 사생활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시작은 저마다 다르다. 유주형씨와 같이 해녀 학교를 다니는 정규환씨. 43살의 그는 해녀 학교의 열혈 학생이다. 이제는 제주도에 와서 때로는 현재의 자신이 삶이 허하다고 까지 느낄 정도는 그는 한때 서울의 잘 나가는 병원의 소아 외과 의사였다. 퇴근을 하고 집 앞에 주차를 하는 순간 다시 호출을 받아 병원으로 돌아가는 식의 삶을 되풀이 하던 그, 아이들의 자는 모습이라도 보며 산다고 했지만 정작 조금씩 '번아웃 증후훈'을 보이며 '활화산'이 되어가던 그에게 '버킷리스트'로서 해녀가 되고팠던 아내가 이곳을 권유했다. 그리고 아내와 그는 서울에서의 생활을 접고 이곳 제주로 내려왔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과 위치를 가졌지만, 그것을 행복이라 느낄 수 없었던 그, 하지만 이제 해녀학교 상군으로, 퇴근이 보장된 제주에서의 의사 생활로 삶의 행복을 '만족'할 줄 아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녀 학교의 이주혜씨, 이른바 '애기군'으로 아직 잠수조차 못하는 초급생에 불과한 처지다. 지금은 잠수가 안되서 쩔쩔매는 그녀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역사 선생님을 꿈꾸는 임용 고시 준비생이었다. 하지만 지난 3년 시험을 준비하면 준비할 수록 길을 잃었던 그녀가 퇴근이 보장된 유통업계의 일을 하며, 해녀 학교 일원으로 살아가는 현재의 삶을 통해 '나도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워너벨의 등장은 지금까지 '일'과 삶이라는 균형추가 '일중독'이라는 쪽으로만 기울어진 불균형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다. 원해서 간 직장이라 하더라도 직장에서의 삶이 늘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현실, 혹은 '호구지책'이 나의 욕구를 우선할 수 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한 취업 포탈 사이트의 조사 결과, 20대 청년 층 89.7%가 '취미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는 것이 행복하다'는 현실에서 '직장'을 뛰쳐나오지 않고도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고자 하는 '균형추'의 모색이 워너벨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때론 이 워너벨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때 함께 학원을 다니다 뒤늦게 대학에서 만난 친구 구은혜, 조유진씨는 회사원과 선생님이라는 직업 대신 이젠 스타트업 기업을 이끈다. 그녀들이 하는 일이란 '취미'를 배송하는 일, 매월 다른 취미를 개발하여, 쳇바퀴같은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에게 삶의 활력을 제공한다. 이번 달 그녀들이 고안한 취미는 집에서도 바캉스 기분을 낼 수 있는 냉족욕기. 어느날 직장 의자에서 녹아내릴 것같았던 그 순간 직장을 그만두고 시작된 이 엉뚱한 사업이야말로, 자신의 행복을 회사라는 공간에만 가둘 수 없는 이 시대 직장인들의 욕구를 '즉자적'으로 반응한 아이디어 상품이다. 

물론 늘 워너벨이 이상적일 수는 없다. 워너벨을 지향하여 퇴근이 보장된 직장을 얻었던 손인하씨는 막상 퇴근 후 지쳐 쓰러지기가 일쑤였다고 고백한다.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일을 많이 하고 직장인 10명 중 8명이 퇴근 후 '번아웃 현상'을 경험하는 현실. 현실은 일과 삶의 조화이지만,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55.5%가 상사 눈치를 안보는 퇴근을 원하는 갑갑한 환경이 현실이기도 하다. 또, 최저 임금이 내년 올해보다 16.4% 늘어나 7530원이 되었지만 이는 oecd 32개 회원국 중 15위 수준, 경제적 조건 역시 워너벨의 균형을 저해한다. 

하지만 늦깍이 해남이 된 유주형씨의 말대로 한번 뿐인 인생은 이제 '성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소모품이 되기 싫은 사람에겐 절실한 화두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화두의 해법 중 하나가 '워너벨'이다. 


by meditator 2017. 8. 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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