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로 가는 길>을 보러 갔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나이때문일까? 중장년층의 여성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극장을 채운다. 영화 속 여주인공 앤(다이안 레인 분)의 프렌치 로드를 자신들이 떠나기라도 하는 듯 어딘가 설레임을 담뿍 담은 표정들, 과연 엔딩 크렛딧이 올라가고 이분들이 원했던 여행의 목적을 달성하셨을까?


공자께서는 나이 마흔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不惑), 오십에는 하늘의 뜻을 아셨다는데(知天命),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오십이란 '갱년기'라는 신체적 증상만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막막한 시절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막막한 시절에 <파리로 가는 길> 여주인공 앤이 서있다. 



아내라는 이름표로 살아가는 앤의 뜻하지 않은 일탈
미국 나이로 쉰 두 살. 앤은 영화 제작자인 마이클(알렉 볼드윈 분)의 아내다. 그녀를 소개하는데 마이클의 아내라는 이름표가 가장 앞선 건, 현재 그녀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이다. 영화 제작자인 남편을 따라 영화의 도시 칸으로 휴가를 온 부부. 한때는 의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그것마저도 손을 놓고, 애지중지하던 딸도 다 커서 그녀의 품을 떠났다. 휴가라고 칸에 왔지만, 바쁜 남편은 업무상 스케줄로 바쁘고, 그녀는 호텔에서 시켜먹은 식사조차 남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 하지만 샌드위치를 두 개나 시켰다고 잔소리를 하던 남편은 정작 그녀가 없이는 자신의 물건 하나 제대로 찾을 줄 모르는 사람, 거기에 그녀의 존재가 있다. 그리고 이는 영화 속 앤만이 아니라, 오십 줄에 들어선 '아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사는 대다수 여성들의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사업차 바쁜 남편이라도 그래도 함께 칸에 온 그 여행조차도 남편의 바쁜 영화 제작 스케줄을 허락치 않는다. 문제가 생겨 당장 부다페스트로 떠나야 하는 부부,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앤의 귀 통증은 그녀의 비행을 허용치 않고, 거기서 등장한 남편의 사업 파트너 자크(아르노 비야르 분)가 그녀에게 자동차를 이용한 파리 행을 제안한다. 

그런데 7시간이면 도착할 것같던 파리 행, 공항 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아픈 그녀를 위한 약에서 부터 딸기 등등을 구하느라 차를 멈추던 자크는, 이제 앤과 길을 떠나자 작정을 한듯, 샛길로 빠진다. 하지만 그런 자크의 곁눈질에 이미 남편으로부터 프랑스 남자의 방탕함을 경고받은 바 있는 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파리에 도착해야 한다는 현대 미국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강박이 그녀를 재촉한다. 

영화는 그렇게 바쁜 남편 마이클을 제외한 그의 아내 앤과 그의 사업 파트너 자크의 동상이몽을 주된 갈등으로 제시한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여전히 그 나이에도 독신의 삶을 즐기는 남자, 미국식 시간 관념이 내재화된 사람과, 지금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그것을 위해, 혹은 지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것들, 혹은 사람을 위해 언제라도 시간을 허용할 수 있는 프랑스 식 삶을 대비시킨다. 또한 부유한 남편을 가졌지만(?)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지, 아니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조차 자신이 없는, 하지만 그 무엇을 해야할 이유조차 없는 사람과, 지금 현재 이곳에서의 삶과 즐거움이 곧 인생이라고 믿는,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사업 일정과 자금에 쫓기는 사람의 만남이다. 

자크는 길을 떠나자 마자 마주친 생 빅트와르 산을 세잔의 명화를 통해 그녀에게 소개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전히 귀는 아프고, 남편의 잔소리에, 파리로 갈 여정만이 가득하고, 이 프랑스인 남자도 부담스럽다. 그런 그녀가 자크의 도발적인 프로방스, 가르동 강, 리옹으로의 여정을 통해 변해간다. 빅트와르 산을 쳐다보지도 않던 그녀가, 자크와 함께 마네의 '풀밭에서의 점심'을 재현하며 마을을 열고, 리옹의 자수 박물관과 베즐레이의 성 막달레나 대성당으로 기꺼이 에돌아 가기를 원하기에 이른다. 



로맨스를 넘은 질문들 
자크는 이 여정에서 그녀에게 '손끝하나 안 대기로 마음을 먹었다'지만, 영화 속 그가 보인 행보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그것이다. 여자가 원하는 장미로 차를 채우고, 여행지의 가장 맛있는 음식으로 그녀를 유혹하고, 달콤한 말로 그녀의 귀를 간지른다. 하지만, <파리로의 여행>을 그저 오십 줄 자크와 앤의 연애 이야기로 보면 아쉽다. 오히려 그 보다는 오십줄, 자신의 존재에 길을 잃은 앤에게 자크는 그녀 앞에 얼마든지 열려있는 새로운 길의 '사랑'이라는 이름의 전도사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자크는 앤을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그저 첫 눈에 이 여자가 이뻐라고 하는 그 남성적 본능이 아니라, 마이클의 사업적 파트너로서 오랜 시간 그녀를 보아오며, 오십이 되도 여전히 매력적인 앤에 대한 '헌사'이다. 남편은 그녀를 자신의 물건을 찾아주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소모하지만, 자크에게 그녀는 늘상 카메라를 달고 살며, 그 카메라를 통해 섬세한 지점을 포착해낼 줄 알고, 그것을 통해 전체를 연상케 만드는 능력자이다. 이제 남편의 도구와, 자식에게마저 지켜볼것만 남겨진 그녀가 자크를 통해, 그와의 여행을 통해 오십 줄에도 자신의 존재를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본질인 것이다. 

귀가 아프던 그녀는 어느 틈에 귀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여정에 동참했던 관객들조차 자크의 도발적 행보와 그 행보에서 그녀가 보이는 긴장감에 어느덧 그녀의 그 '스트레스성 증후군'을 놓아버린다. <파리로 가는 길>의 매력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뻔히 스트레스성 질병인 게 보이는 앤과 함께 여행을 하며, 그녀가 자크의 담배처럼 자신의 초콜릿 중독을 털어놓고, 결국 그 누구에게도 끄집어 낼 수 없었던 오랜 아픔을 고백하기까지, '프랑스 로드'의 여유와 낭만이 주는 일탈을 만끽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짝짝이 양말을 줬다고 모로코에서도 양말을 찾는 남편과 그녀가 쥐어준 짝짝이 양말을 기꺼이 신어주는 남자, 이 현실적이고도 낭만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그녀는 마지막 자크가 보내준 장미 초콜릿으로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천명의 시절,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갈 것이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비록 함께 여행하며 유혹해주는 멋진 남자는 없지만,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by meditator 2017. 8. 10. 14:51

청춘 스타의 요람이라 여겨지는 <학교> 시리즈가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런데 전통의 명문 <학교>가 무색하게 8회를 맞이한 <학교 2017>의 중간 성적표는 시원찮다. 아직도 첫 회 5.9%가 최고 시청률이며, 야곰야곰 오른다 해도 4%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8회 4.7%) 


새로운 스타 탄생인가 했지만, 이미 각종 예능과 광고를 통해 이미지가 소진된 라은호 역의 김세정의 연기가 극과 어우러지지 않는다 질타를 받았고,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기에 앞서 학교 시리즌데 과연 작가가 학교를 다녀본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정도로 현재의 학교 현실과 괴리된 해프닝으로 점철된 초반의 설정들이 이 시리즈를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8회를 맞이한 <학교 2017>은 초반의 우려와 달리, 원래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본 궤도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안정감을 찾아가고 있다. 무엇보다, 과장된 연기, 혹은 만화같은 해프닝을 넘어서 현재 학교 현실의 문제점을 드라마 속에 담아내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생기부란 이름의 계급 사회 보고서 
사립 금도고등학교, 점심 시간 배고파 달려온 학생들에게 성적 순으로 밥을 먹을 것을 종용하는, 성적 지상주의의 학교, 그리고 사립학교답게, 이 사립 학교의 운영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돈 있는 아이들의 원만한 학교 생활과 진학 지도에 매진하는 학교. 이런 학교의 현실을 단 하나로 증명하는 건, 현재 대학 입시 시스템에서 '생기부', 생활기록부라는 미명 하에, 학생들의 학창 시절의 기록을 일일이 나열하여, 입시에서 유불리한 증거 자료로 작동하는 이 서류가, 오늘날 대학 입시에서 학생들의 목을 조여온다. 

그 '생기부' 지옥도의 현실은 전교 1등 송대휘(장동윤 분)에게조차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고, 이미 1등이 정해진 수학 경시 대회의 시험지를 훔치기 위해 교무실에 잠입케 하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도록 만든다. 전교 1등조차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스펙이 필요한 오늘날 입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즉 생기부는 학생들의 학교 생활을 기록하지만, 그 기록의 대부분은 학교 생활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딴 교내, 교외 각종 수상 실적으로 채워지고, 학내 실적은 공부 잘 하는 아이들 위주로 재편된다는 것이 이미 현재의 입시 현실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 돈과, 돈에 뒷받침된 정보로 선점된 교외의 수상 실적은 결국 오늘날 생기부가 빈익빈 부익부의 대한민국 계급 사회의 보고서가 되도록 만들고 있다. (지난 5월 ebs 다큐 프라임 <대학 입시의 진실> 6부작을 통해 통렬하게 지적된 바 있다) 

그러기에 가난해서 오로지 공부 밖에 할 수 없는 송대휘는 공부를 잘함에도 불구하고 생기부에서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고, 더구나 사립학교인 금도고에서 재단 이사장의 아들인 현태운(김정현 분)의 1등이 따논 당상으로 사전 모의된 상황에서, 공부만이 유일한 동앗줄이던 대휘는 불법과 학칙의 경계를 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드라마는 공부만 잘해서도 대학을 갈 수 없는 오늘날 대학 입시, 아니 철저하게 금권 계급 사회가 되어버린 현실을 담는다. 그리고 거기에 7회에서 8회에 걸쳐 등장한 유빛나(지헤라 분)와 서보라(한보배 분)의 음악실 난투극을 통해 그 금권사회의 아이러니에 색을 더한다. 학교 운영위원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빛나의 집안, 그런 상황에서 빛나는 안하무인 격으로 자신이 없어진 볼펜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보라의 필통을 뒤엎고, 이는 두 아이의 난투극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작 빛나의 엄마는 변호사를 동원하여 학교 폭력 위원회를 열어 보라의 응징을 강하게 요구한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상황에 이미 1학년 때 이와 비슷한 상황에서 선생님의 묵살로 억울한 징계를 당한바 있던 보라는 가해자로써의 처분을 감수하려 하고. 결국 학생을 폭력의 위험으로 부터 구해줘야 할 학교 폭력 위원회라는 제도조차 가진 자들의 아이들을 구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어가는 과정을 드라마는 에피소드로 더한다. 








생기부 지옥도를 살아가는 아이들
x라는 어설픈 히어로 해프닝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차근차근 회를 거듭하며 오늘날 학생들이 학교를 다니며 받는 고통의 현실로 한 발 한 발 차근차근 발을 디뎌나간다. 오죽하면 어설픈 교육 개혁 대신, 그냥 성적대로 한 줄로 대학을 가는 것이 가장 공평하다는 여론이 형성되는 현실은 송대휘의 절박함으로, 체벌은 없어졌지만, 벌점이 체벌보다 더 가혹한 낙인이 되는 현실은 라은호와 보라의 아득함으로 드라마는 현실을 담는다. 덕분에 아이들은 꿈을 꾸는 대신 꿈을 이루기 위해 교무실을 침범하고, 가진 자의 순서대로 배열된 학교 사회에서 운수 회사 딸로 자신을 코스프레하는 홍남주(설인아 분)처럼 부의 그늘에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이제 절반의 궤도를 넘어가는 드라마는 그 억압적 현실 속에 신음하던 아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교무실에 들어가 시험지를 훔쳤던 대휘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대신 막아서는 은호와 태운으로 인해 비로소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그 시인과, 그에 따른 처벌은 뜻밖에도 늘 가파른 사다리를 오르느라 숨가빴던 대휘가 모처럼 한숨을 돌리는 안식으로 돌려받는다. 홍남주의 위선은 뜻밖에도 거리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전혀 스스럼없이 대하는 라은호의 당당함에서 무너진다. 

서울대를 향한 가파른 사다리에 몸을 맡긴 전교 1등 송대휘의 사연도, 자신의 가난함을 부잣집의 그늘에 숨긴 홍남주의 위선은 새로울 것 없는 에피소드이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들이 '생기부' 지옥도와 만나 현실성을 얻는다.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도 아이들은 자신의 문제 속으로 들어가 해결의 실타래를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런 의미에서 시청률과 상관없이 여전히 <학교>는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그려내는 그 전통의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고 순항 중이다. 

물론 아쉬운 점도 여전히 많다. 보라의 학폭위 사건에서 무기력해 책임감을 절감했던 선생님이나 전담 경찰관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희희낙락 애정 전선에 몰입하는 상황은 마치 여러 편의 단편 에피소드를 모아놓은 듯 극의 통일성을 해친다. 또한 신인들의 어설픔이나, 과잉된 감정과  틀에 박힌 중견 배우들의 연기가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초반의 난맥을 헤치고, 여전히 2017년 청소년 드라마로서 <학교 2017>의 미덕은 유효하다. 




by meditator 2017. 8. 9. 15:49

아름다운 절벽으로 둘러싸인 일본 후쿠이현 시카이시 도진보 절벽, 하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목적은 두 가지로 갈린다. 그 아름다운 명소를 죽음에 이르는 지름길로 택한 사람들, 도진보 절벽은 '자살 절벽'으로 이름이 높다. 그런데 그 자살 절벽 주변에서 부지런히 순찰을 도는 사람들이 있다. 13년 째 이곳에서 순찰을 빼먹지 않는 시게 유키오 씨 등의 사람들은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것. 오늘도 20대 여성의 목숨을 구한다. 


이 도진보 절벽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방송을 탄 바 있다. 2013년 9월 <ebs 다큐 프라임-33분마다 떠나는 사람들>, 즉 2013년을 기준으로 8년째 자살율이 1위인 우리의 현실을 다루었던 다큐이다. 



억눌린 감정, 가짜 감정으로 
당시 다큐에서 한 해 평균 17명의 자살 장소로 선택되었던 도진보 절벽, 이 절벽의 이야기로 <mbc스페셜-당신의 행복을 앗아가는 가짜 감정 중독(이하 가짜 감정 중독)>은 시작된다. 그렇게 자살의 대표적 예로 등장했던 도진보, 하지만 <가짜 감정 중독>은 자살을 해야하는 그 이유를 묻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일본인들은 자살을 선택했는가? 서양과 달리, 불교와 유교 문화권의 동양에서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기 보다는 숨겨야 하는 것으로 각인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가망(がまん) 문화는 일본인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참으라고 강요한다. 그 결과 자신의 감정을 숨기다 못한 일본인들은 도진보를 찾는다. 

그렇다면 일본의 문제일까? 우리나라의 감정 문제를 들여다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선 정신과 의사가 등장한다. 5년차 정신과 의사 임재영씨가 거리로 나섰다. 자신의 병원으로 찾아온 사람들은 이미 상담만으론 치료가 어려운 상태였음을 절감하게 된 그는 약물을 쓰기 이전의 상태에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거리 상담을 자처한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자는 평생 3번 울어야 한다'라던가, '여자의 목소리가 담을 넣어선 안된다'는 전통적 감정 훈련을 받은 사람들은 쉬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처럼 된 감정의 '쿨함' 역시 또 다른 감정의 통제 기제가 된다. 

일본이나 우리 나라에서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 지지 못하는 문화, 그로 인한 극단적 선택의 문제는 이미 새로운 문제 제기가 아니다. 하지만 8월 3일 다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가까 감정 중독'을 주목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강제된 사람들은 그 자기 강제된 감정이 왜곡된 형태로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슬픔을 화로 표현하는 사람, 화를 내어야 하는데 우는 사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감정 자체에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가짜 감정에 중독된 상태'라고 다큐는 진단한다.

 

슬픔을 화로, 두려움을 무감정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진단의 증명을 위해 두 사례자가 등장한다. 
4살과 6살을 둔 엄마 정인수 씨(34), 그녀의 가정은 조용할 날이 없다. 엄마는 그 어느 곳이든 울컥울컥 화를 내고, 그 화는 대부분 아이들에게 쏟아진다.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들, 정신을 차린 엄마는 후회하지만, 결국 쳇바퀴돌듯 그 '화풀이'를 되풀이한다. 

아마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라면 공감할 이 장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 그래고 정인수씨는 화라도 내지만 오현정(28)에게로 가면 더 심각하다. <비밀의 숲> 황시목처럼 외과 수술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감정이 없다. 매사에 무표정하다. 

정인수 씨는 상담을 시작하자마다 자책의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 적어본 감정 노트를 채운 단어는 지친다. 외롭다. 힘들다 이다. 자신의 감정을 채워본 물병만을 봐도 눈물을 터트리는 그녀. 이른바 '독박 육아' 속에서 그녀는 마모되어 가고, 그 마모된 자아는 '화'라는 가짜 감정을 통해서만 폭발해 왔던 것이다. 기꺼이 자신과 같은 처지의 남들에게는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말을 자기 자신에게는 인색했던 그 저변엔 엄마없이 살았던 어린 시절의 상실감으로까지 뿌리가 드리워진다.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던 오현정 씨의 경우에는 주변으로 부터의 상흔의 결과다. 그래서 늘 관계에 두려움을 가지고 주춤거리던 그녀는 어느 새 마음을 닫고, 그 부작용은 몸으로 왔다. 하지만 울컥하지만 눈물을 흘릴 수는 없다던 그녀가, 병을 가득 채운 자신의 마음에 눈물이 흐른다. 

독박 육아에 지친 엄마에게 '화'라는 감정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현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너무 외롭고 슬펐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싶지 않아 닫아건 마음은 사실 그 누군가의 관심이 그리운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한 사람들, 놀랍게도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두 사례자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상담을 하고,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읽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90일간의 중독 치유 프로젝트, 놀랍게도 사례자들의 얼굴이 달라졌다. 똑같은 사람인데, 화가 잔뜩 나있던 얼굴에 밝아졌고, 무표정했던 얼굴에 생기가 돈다. 화장법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관상'이 변한다. 



아이와 함께 친구집에 놀러간 정인수 씨, 아이는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잔뜩 찡이 났다. 아이와 함께 조용한 곳을 찾은 엄마, 아이는 지금까지 하던대로 엄마를 때리며 투정을 부린다. 그때 엄마 정인수씨가 말한다. 엄마가 화를 내지 않을 테니 말해봐 라고. 그런데 그 엄마의 말이 마법처럼 울며 떼쓰던 아이의 울음을 잦아들게 만든다. 그리고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엄마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아이, 결국 엄마의 품에서 감정을 토해내며 풀어진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더 놀라운 건 매사에 화를 내던 정인수 씨다. 그저 화를 참았는가 싶던 정인수 씨가 아이의 서러움에 공감하며 함께 울어준다. 정인수씨는 화를 잘 내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작은 슬픔에도 마음이 아픈 너무도 마음이 여린 엄마였던 것이다. 이게 정인수 씨가 찾은 진짜 감정이다. 

오현정 씨 마찬가지다. 늘 상처받을까 무표정에 자신을 숨겼던 그녀가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흔히 '화'를 잘 내는, 혹은 항상 화가 나있다는 오늘날 한국 사회, 어쩌면 한국 사회의 '화' 역시 삶의 고난과 고통을 방어하는 가짜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다큐는 말하고 있다. 
by meditator 2017. 8. 4. 02:43

위안부'와 관련된 망언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한때 그녀의 책이 베스트 셀러 순위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시오노 나나미다. 그녀의 <로마인 이야기> 정도는 읽어줘야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 대중적 역사가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호소력높은' 작가여왔다. 그런 그녀의 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있다. 


1459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오스만 제국의 10만 군대가 몰아닥쳤다. 새벽 1시 시작된 총공세는 날이 밝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인류 역사의 중세가 마무리 되던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 역사적 장면을 시오노 나나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베트 2세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못지않게, 그 역사의 한 획에 참여한 병사, 즉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총공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예군답게 갖가지 도구와 수단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철옹의 성벽을 거스르는 건 사람들이다. 철옹의 성벽을 무너뜨린건 결국 '인간의 목숨'이었다. 7000 명 남짓한 방어군을 공격하는 10만 대군, 결국 역사에 기록되는 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사건이지만, 그 사건이라는 역사 속에는 목숨을 던져 성벽을 올랐던 사람들과, 또 그 성벽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수성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던져진 인간들
영화가 시작하면 아직 앳된 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라고 해도 크게 범주에 벗어나지 않을 몇몇 군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총성, 젊은, 아니 어린 군인들은 허겁지겁 뛰기 시작하고, 그들이 골목을 돌 때마다, 지형지물을 피해 몸을 숨길 때마다 그들은 스러져간다. 결국 마지막 아군의 진지를 가까스로 넘은 채 목숨을 구한 이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총성은 따라오고, 그를 구한 진지의 군인들도 쓰러져 간다. 그 진지를 지나 겨우 도달한 해변, 엄호해줄 그 무엇도 없는 겨울 해변에 수를 가늠하기 조차 힘든 군인들이 '구출'에 생명을 내맡기고 있다. 그곳이 이제 유럽 대륙에서 밀리고 밀린 영국군의 마지막 배수진, 덩케르크이다. 

원래 배수진의 뜻이라면 자신들을 몰아친 상대로 물을 등지고 결사항전의 의지를 다진다는 것이지만, 영화 속 <덩케르크>의 군인들은 이제 다가올 독일군의 총공세를 피해 본국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지막 동앗줄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2차대전은 화려한 연합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승리의 역사 속, 한  장면 10만 군인들의 생명이 몸을 가릴 곳 하나 없이 생존을 갈구하는 덩케르크 해변에서 '전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호할 지형지물하나 없는 해변, 그래서 그들을 공격하는 독일군 비행기의 포격을 그저 몸으로 받아내, 운좋게 살아나면 다시 줄을 지어 탈출을 도모해야 하는 곳에서 미덕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러기에 가까스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한 토미가 죽은 영국군의 옷을 입은 깁슨과 죽어가는 병사를 의무병인채 함께 들고 구출선을 향해 달리는 모습에 반감은 커녕 절박한 응원에 동참하게 된다. 그 절망의 생존기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물로 뛰어드는 병사의 막막함에 공감하듯이. 

이런 덩케르크의 생존기는 우리나라의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떠올리도록 한다. 이제는 중견을 넘어 노년이 되고, 혹은 돌아가시기 하신 한 작가들, 박완서, 이문열, 이문구,등 전쟁을 겪고, 그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가들의 글에서는 <덩케르크>의 토미, 깁슨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수난기가 빠짐없이 등장했고, 그 생존의 수난기는 전쟁 세대를 상징하는 세대적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우리의 전세대가 경험했던 그 역사 속에 무기력하게 던져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성'이라 정의내린다. 덩케르크 해변에 뒤늦게 도착한 토미, 10만이 넘는 패잔병과, 하지만 영국 본국에서 구출하고자 하는 3만의 인원 사이의 엄청난 현실적 갭 사이에서, 어떻게든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토미를 몇 번이나 도와주웠던 깁슨이 결국 마지막 성공의 순간에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영국군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다음 차례는 토미 너 라며 울부짖듯 질타하는 그 동료 병사의 생존이 곧 정의라는 잔혹한 단호함이, 어쩌면 거대한 역사 속 인간 생존의 진솔한 목소리이겠다. 



이런 역사와 그 속에 던져진 인간에 대한 놀란 감독의 직관이 보다 긍정적으로 발현한 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에서 였으며, 늘 역사적 숙명과 그 사이에 낀 자아의 고민은 그의 히어로 물의 주된 주제여왔다. 그리고 이런 놀란 감독의 생각은 뜻밖에도 최근 작년 우리나라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통해서 인문학적 정의에 도달하게 된다. 

유발 하라리는 단언한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인류가 자랑스레 펼쳐온 문화를 '정신적 기생충'이라 명명한다. 그 기생충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인간의 희생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전파한다. 이 인간을 도구화 한 정의에 불쾌하지만, 그 승리의 2차 대전 전장에서, 덩케르크 해변에 줄을 지어 생명을 도모하는 숱한 인간의 대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탄식과 함께 유발 하라리의 정의가 떠올려진다. 거기엔 2차 대전의 승리 기록에 씌여있는 그 정의의 이데올로기란 없다. 그저 역사란 전장 속에 던져진 숱한 생명들이 있을 뿐.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전진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도모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알렉스의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살아돌아온 그 자체가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구르고 뜯기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해도 '생존'의 승리자가 되어 기록을 남겼던 전쟁 후 소설가들처럼. 



류적 존재로서의 동지애 그 이상, 인간을 빛낸 존재들
하지만 감독은 그저 역사의 전파체 '밈'으로서의 도구적 존재 인간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역사는 문명은 그들을 그렇게 수단화하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거기서 빛난다. 그들이 그런 역사라는 전장에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도모하여 빛나지만, 또한, 그 생명의 도모를 넘어선, 존재 이상의 모습으로 빛난다. 

겨우 도망쳐 나온 해변에서 구출의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한 토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깁슨의 몇 번의 동료애가 그랬고, 영국 해협의 거친 파도를 작은 배 하나로 넘으며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자국의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도슨(마크 라이언스 분)을 비롯한  평범한 영국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무사귀환 대신, 해변의 병사들을 마지막까지 엄호한 유일했던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 분)가, 병사들을 보내고 뒤에 남은 볼튼(케네스 브래너 분)이 그랬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았지만, 해변의 병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을 사수했던 엄호병들이 그랬을 것이다. 

<군함도>와 함께 개봉하는 <덩케르크>의 개봉 초반, 영국의 국뽕 영화란 평가처럼, 이들의 '헌신', '희생'이 조국을 위한 애국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류적 존재를 보존하기 위한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의에서 그 본질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정의 또한  인간의 류적 존재의 생존을 위한 단위로서의 '이타적 본능'으로 귀결되는가 싶기도 한다. <덩케르크>에서 토미 등의 생존기가 빚은 공감의 눈물을, 파리어 등의 존재를 초월하는 행동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앞질러 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이타적 감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싶다. 그리고 그 '이타적 감성' 행위에 대한 감동이 곧 어쩌면 생존을 넘어선 인간의 진짜 '생존' 모듈이 아닌가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뭐 구구절절 이론을 들었지만, 결국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는 감동은 생존을 넘어선다. 



그랬다. 늘, 놀란 감독은, 시간을 다룬 새로운 영화다 해서 보러갔는데, 존재의 형식에 대한 철학적 화두를 받아들었고, 히어로 물을 보러갔는데 사회적 존재와 자아의 문제에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제 잘 빠진 전쟁 영화(총 소리 하나에서 부터 전쟁을 실감나게 해주었다)라 해서 보러갔는데,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영화로 인문학하기, 이게 바로 덩케르크를 만든 놀란의 진짜 직업인가 보다. 구구절절 우리 영화는 어떤데라고 말하기 조차 구차하다. 그저 당대에 이런 감독과 함께 인간과 역사를 고민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by meditator 2017. 8. 3. 18:16

공교로웠다. 얼마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엄지 척하는 인증 사진으로 '물의'를 빚었던 손혜원 더불어 민주당 국회의원이 8월 1일 <냄비 받침>에 등장했다. 하지만 프로그램은 그 '공교로운 시기'를 허심탄회한 인터뷰를 통해 운영의 묘를 살렸다. 출연 당사자에게는 공개 사과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력하고픈 속내를 말할 수 있는 시간을, 그리고 이런 자리를 마련함으로써 명색이 '스타의 사생활을 한 권의 책으로 담는다'던 그 어정쩡한 콘셉트를 이제 예능판 <썰전>으로 자리잡아가는 정치 예능 토크쇼로서의 새 장을 안착시켰다.


 

손혜원 vs. 나경원 
일단 8월 1일의 <냄비 받침>은 손혜원과 나경원이라는 두 국회의원을 한 자리에 불러모아 앉힌 제작진에 가장 큰 점수를 주어야 하겠다. 

한 자리에서 밥도 먹기 힘들다는 초선 의원과 다선 의원의 독대, 하지만 연륜으로 보면 이미 60줄을 넘은 건 물론, 사회적으로도 '참이슬', 처음처럼' 등 '브랜드 디자이너'로 한 획을 그은 손혜원 의원과, 소장 판사로써의 재직 경험 외에, 일찌기 국회로 들어와 여당의 각종 직책을 맡아가며 모범생 국회의원으로 잔뼈가 굵은 나경원 의원의 조합은 한 그릇에 담기엔 너무도 이질적인 조합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인선 사실조차 신문을 보고 알았다지만 김정숙 여사의 고등학교 동창에, 더불어 민주당 당명 선정 과정에서, 이번 대선까지 '브랜드 디자이너'로서의 그 역할을 톡톡히 드러낸 나경원 의원이 평가한 여권 실세와, 정치 입문 시절부터  '근황'조차도 뉴스꺼리가 되어 온 '실세'였던 나경원 의원의 조합은, 현재의 정치권에서 가장 어울리는 만남이다. 

그랬기에 연륜과 사회적 경험이 풍부하지만 내일이 없는 초선 손혜원 의원과, 연륜으로 치면 몇 년이 밀리지만, 정치적 연륜에 있어서는 손혜원 의원의 그 어떤 행보에도 '훈수꺼리'가 있는 다선 의원 나경원 의원의 노회함은 적절한 조화를 이루었다. 

무엇보다 적폐 청산을 내세운 여당의 전투적 초선과 투쟁적으로 여당의 발목을 잡는 것이 사명이지만, 정작 내일을 고민하는 야당의 다선의 중후함은 그 자체로 현재 여당과 야당을 상징하는 듯이 보였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여성 국회의원이지만, 이젠 시대가 달라져 '여혐' 발언을 했다간 같은 당 남자 의원이라도 뼈를 못추릴 것이라며 달라진 시대를 선언하는 손혜원 의원과 여당 대표 추미애 의원조차도 접근성에서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그간의 정치 생활 동안 체험한 유리 천장을 토로하는 나경원 의원에게서는 슬로건으로서의 여성주의와 현실에서의 한계를 동시에 경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해를 넘어선 이해 
흥미로운 예능적 조합을 넘어 <냄비 받침>이 의미가 있었던 건, 그간 손혜원, 나경원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오해'를 넘어선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시간이었다. 

우선 김군자 할머니 장례식장에서의 적절치 못한 처신으로 문제가 되었던 손혜원 의원, 그 일에 대해 다른 사안에 있어서는 매사에 자신이 넘쳤던 손혜원 의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무조건 '사과'를 했다. 자신이 순간 경계가 풀렸었다며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에 대한 반성과 어려움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날의 상황을 설명했다. 김군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빈소에 사람이 너무 없었다고. 자신의 sns를 통해 급하게 요청을 했는데, 그 요청에 100 명이 넘는 분들이 와주셨다고. 그 분들과 함께 장례식장에서 상주처럼 분주했던 손의원. 이제는 지역구에 가면 아이돌급 인기인답게 내내 사진 한 장 찍다는 부탁을 받고, 내내 거절하던 손의원이. 늦은 밤 장례 일정을 마무리하고 너무 미안한 맘에 한 장 찍은 사진이 그만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고. 

사과는 사과대로, 하지만, 그 사과와는 별개로 그 날의 설명을 담담하게 한 손의원의 해명은, 분명 적적치 못한 행동이지만 아직 정치인 초년생의 그 해프닝을 이해할 터전을 만든다. 그런 손의원이기에, 그의 '닥치세요'라는 그 유명한 발언에, '오죽하면 그랬겠어요'라는 해명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어쩌면 8월 1일의 <냄비 받침>에서 오해를 넘어선 이해의 이득을 더 많이 본건 나경원 의원일지도 모르겠다. 늘상 '해'가 드는 곳에만 있는 '공주'같은 미모의 정치인, 심지어 표정 변화가 없어 '얼음 공주'란 별명까지 얻은 연륜의, 하지만 어쩐지 인간미가 없어보였던 이 정치인의 또 다른 면을 <냄비 받침>은 들춰낸다. 

사람들은 늘 '실세'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 누구의 세력이었던 적이 없던, '공주'라 하지만 '무수리'처럼 늘상 여당의 어려운 뒷설거지를 마다하지 않으며, 때론 패전장으로 잠시 정치의 무대를 멀리한 적도 있었던, 하지만 여전히 그의 근황이 뉴스꺼리가 되는 성실하고 진득한 직업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로 다른 당에, 한 자리 하기도 힘든 초선과 다선이지만,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때마다 나경원 의원을 지켜보게 되었다는 손의원의 말처럼, 불통의 아이콘, 독불장군 노땅의 상징이 된 야당에서도 여전히 자신의 보수적 신념에 따라, 하지만 '당명'에서부터 진솔하게 터놓고 고민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하고 노력하고자 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신선'했다. 

물론 이런 나경원 의원의 모습을 오랜 정치적 경험을 통과한 세련된 자기 포장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런 식의 평가는 반대당인 손의원의 진솔한 자기 표현 역시 그에 상응하는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당연히 예능이라는 '프레임'은 편집을 통해 제작진이 의도한 '사실'들을 선별적으로 전해주는 방식이다. 그건 '미디어'가 가지는 본질이다. 마치 사람들이 소주를 마시면서도 그 이름이 '참이슬'이라 하니, 이슬을 마신 듯 청량감을 맛본다고 느낌을 받듯이. 



예능판 <썰전>의 가능성을 잘 살려내길
하지만, 소주를 참이슬로 위로하듯, <냄비 받침>이 제시한 정치 예능은 '포장'을 넘어선 '정치적 마타도어'를 비껴간 그래도 진솔한 정치적 비젼들이다. 막말 선봉대가 아니라, 오죽하면 닥쳐가 아닌 그래도 존댓말인 닥치세요를 한 정치인의 모색과, 자기 당 의원들이 반말에 삿대질을 하는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 없이 질끈 외면하고픈 정치인의 고뇌를 통해, 그래도 서로 최소한의 기본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한 '의도성'말이다. 

설사 그것이 각자 자신의 한껏 치장된 정치적 수식어라 하더라도, 다음 국회의원을 위해 달리지 않고 이 정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문화계 적페 청산을 위해 한껏 타오르겠다는 초선 의원의 포부도,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내일이 없는 야당에서, 그래도 열심히 보수의 가능성을 지펴보겠다는 그 초라하지만 성실한 의도는, 이데올로기와 수식어를 제한 현실 정치의 이성적인 '전선'이다. 세상이 하나의 명쾌한 색깔로 정리되면 좋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대치된 전선'의 현실에서 마주친 '이성적인 모색'과 이해가능한 호감의 자리로서 <냄비받침> 손혜원-나경원 편은 유효하다. 

그리고 이런 예능판 <썰전>으로서 스스로를 자리 매김해 가는 <냄비 받침>의 성과이기도 하다. 이경규라는 '중용'의 미학을 통달한 mc의 균형추 아래, 여,야라는 현실의 가장 두 극단을 모아놓고, 각 정치인들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내공은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연다. 다행히도 어설픈 아이돌 탐구 생활의 끼얹음이 없으니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더욱 빛난다. 어설픈 책 출간이나, 냄비받침이라는 어긋난 네이밍이야 민망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자리잡아가는 예능판 썰전의 기획을 잘 살려내길 바란다. 

그런데, 손혜원 의원의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회의원이 됐지?라는 의아함처럼 이렇게 나와서 이성적으로 자기 생각을 풀어낸 정치인이 얼마나 있으려나 싶은 우려가 들기도 한다. 아니 뭐 꼭 정치인만 하라는 법은 없지 않나?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푸드 칼렄니스트 황교식 씨 등의 '사회적 자폐' 논란처럼, 우리 사회 함께 모여 생각을 나눌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겠다. 연예인의 신변잡기가 아니라도. 부디 이런 모처럼의 모색을 잘 살려내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7. 8. 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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