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가 시작되자 등장한 것은 한 마리의 병아리, 아니 달걀, 이제 막 그 속에서 검은 병아리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 정지된 화면 안에서 달걀 한 알이 갓 태어난 병아리로 변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고투다. 이렇게 <sbs스페셜- 알을 깨다>는 정말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병아리를 통해 마흔까지의 직장인의 삶을 거하고, 이제 철부지 50대에 도달한 미즈노 마사유키의 삶을 상징한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미즈노 마사유키, 그 인생의 황금기
흔히 오십 줄에 든 사람들에게 당신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냐고 질문하면 꽃다운 20대 청춘 시절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아직 세상 그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았던 그 시절,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었던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여기 그런 일반적인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 바로 미즈노 마사유키, 그는 말한다. 50, 이제부터가 황금기의 시작이라고. 그런데 전북 김제에 자리잡은 그의 집, 그 집에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살펴보노라면, 그런 그의 장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도 남들처럼 살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에서 컴퓨터로 설계일을 하며 살던 그, 좋은 아파트, 좋은 차, 그리고 가족들의 풍족한 생활, 그런 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 걸릴 일을 삼, 사일에 해치우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 어느 날 문득 창 밖을 보니 보도의 틈 위에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살던 시절, 그 봄의 전령을 보고 미즈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렇게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가? 라고. 

어린 시절 미즈노는 풀과 벌레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어른이 된 미즈노는, 그 어린 시절의 꿈을 잊었다. 대개의 어른들이라면,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런 거지하고 넘어갔으련만, 미즈노는 달랐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아내의 고향 전북 김제로 다섯 아이를 끌고 갔다. 그리고 이제 아내가 일을 나간 집에서 그는 기르고 싶던 머리도 기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며, 온 동네 버려진 물건을 집어다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아홉살 딸내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지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그가 만든 네온이 은은하게 빛나는 바에서 재즈를 들으며 막걸리 한 잔에 치즈을 입에 넣을 때.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
집 앞 30년된 나무와, 100년된 나무 사이에 층층이 건들건들 매어달린 나무집, 4년 동안 지은 이 나무집이 그가 보낸 '철부지 세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이 나무집만일까? 다큐는 직장인 미즈노가 철부지 50살 소년이 된 그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와 그의 자녀들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다큐가 시작하자 마자 미즈노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오늘 탄생한 검은 병아리 한 마리'는 BJ가 꿈인 막내 딸의 첫 방송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야무지게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제치는 아빠의 손을 빌어 집까지 만들어 줬는데, '러브 하우스' 하모니가 끝나기도 전에, 막내딸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어미 고양이가 단박에 나꿔채버렸다. 허겁지겁 고양이의 입을 벌려 구출 작전을 시도해 보지만 오늘 태어난 생명에게 새끼를 난 어미 고양이의 허기진 입은 가혹했다. 

죽은 병아리를 손 위에 놓고 망연자실해 하는 아홉 살 난 딸에게 아빠 미즈노는 담담하게 말한다. 새끼를 네 마리나 낳은 어미 고양이는 배가 고팠을 것이라고. 우리가 방심했다고. 하지만 네가 어떤 결론을 내릴 지는 너의 몫이라고. 흔히 이런 상황에서 부모들이 하는 귀여운 병아리를 죽인 고양이가 나쁘다던가 하는 선입견에서 아빠 미즈노는 한발 물러선다. 

미즈노네 집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있는 미즈노네 아침, 하지만 아무도 학교 가라, 아침 먹어라 독촉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저마다 알아서 때가 되면 일어나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학교로 간다. 엄마 역시 자신의 출근 준비에 바쁘다. 사진과에 다니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즈노는 말한다. 부모로써 그 짐을 조금 덜어주곤 싶지만, 그러나 딸의 인생은 딸의 것, 그런 아빠, 엄마가 지킨 경계선에서 미즈노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물어 스스로 답을 얻는다. 

아홉살 난 딸은 병아리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미 아홉 살이지만 병아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이해한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은 스스로 새로운 자신을 향한 길을 찾아 아버지의 도움없이 라오스로 떠났다. 마흔 살 창 밖의 민들레를 보고 전북 김제로 향하기 까지 2년 아마도 미즈노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그와 딸들의 관계를 통해 짚어보게 된다. 풍족한 삶 대신, 때로는 득도한 스님처럼, 때로는 소년처럼 꿈꾸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찾아서 즐기는 그의 삶은 마치 잠시 도원에 든 나무꾼의 일장춘몽과도 같다. 

하지만 미즈노는 말한다. '마흔까지 가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일벌레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보니, 가족은 행복할 지 모르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선후를 바꿨다. 그러고 나니 나도 행복하고, 가족도 또한 행복해 졌다' 이건 미즈노가 도달한 결론이고, 다큐는 보는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병아리가 깨고 나온 알 껍질을 들고, 미즈노는 말한다. 알은 병아리를 보호해주지만, 그러나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 알은 장애라고. 그렇게 어렵사리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하지만 태어난 첫날 고양이에게 물려죽었다. 다큐는 그럴 듯한 미즈노의 트리집과 그 자녀들의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 각자의 삶을 버거워 하며 이겨내는 알을 깨는 과정은 복선처럼 깔려있다. 병아리의 죽음이 아홉살 소녀에게 화두가 되듯, 저마다 삶의 화두를 붙잡고 가야한다는 것을 철부지 50세 소년은 초연하게 웃으며 받아들인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SBS스페셜> 버전같았던 <알을 깨다>는 하지만, 가족, 사회와 괴리된 채 자연을 벗삼던 자연인들과 다르다. 50살 철부지라며 스스로 하염없이 선한 웃음을 날리는 아버지에게, 스무 살이 넘는 딸은 영원토록 철들지 않기를 소원한다. 아홉 살 딸에게는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자, 경계를 넘지않는 든든한 멘토이다. 이제 남편 대신 돈을 벌러가는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행보에 신중한 남편이 믿음직스럽다. 나무 위에 지은 꿈의 공장같은 트리 하우스는 그저 미즈노의 자기 만족을 넘어, 새로운 일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퇴사하겠습니다>, <성신제의 달콤한 인생>, <회사를 바꾼 괴짜 사장>에 이은 <알을 깨다>는 욜로 라이프(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주제로 꿰어질 수 있다. 이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사회, 인간성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쟁 사회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창되고 있는 욜로 라이프, 그 범주 안에서 다큐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미즈노의 즐거운 인생 역시 이 시대의 또 한 편의 새로운 선택지로 제시된다.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은 병아리를 들고 황망해 하는 딸에게 네가 고민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듯, sbs 스페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 당신이 살아갈 한번 뿐인 삶을 누리는 이런 방식도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당신의 선택이라고. 


by meditator 2017. 7. 31. 15:09

15회, 드디어 첫 회 박무성의 살해 사건으로 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음모'의 배후가 비로소 드러났다. 하지만, 드디어 배후가 밝혀졌다는 통쾌함도 잠시, 그 배후는 16회가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선배라는 말이 좋다는 이창준은, 마치 그것마저도 '결자해지'라는 듯, '밥 한 끼'로 시작되었던 그 '적폐'의 대가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그 해결의 젯밥으로 던지며 생을 마무리했다. 괴물이 되어버린 그와, 그런 그가 만든 토양 속에서 자라 그가 남긴 것들을 법대로 처리할 황시목이 그 방식을 두고 '설전'조차 제대로 벌이지 못한 채 당혹감과 후일담 속에서 깊은 여운과 물음을 남긴 채 드라마는 마무리되었다. 




법 앞에 선 사람들
이창준(유재명 분)이 시작하고, 스스로 마무리한 듯이 보인 비밀에 쌓였던 숲의 거사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영일재(이호재 분)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가장 강직했던 법관, 그래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그가 대한민국 경제의 30%를 책임진다는 재벌 '한조'의 불법 재상 증여에 대해 손을 대려고 하자, 장관이던 그는 하루 아침에 불법적으로 자금을 받은 죄인이 되어 법 앞에 끌려나왔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영일재는 '가족의 안녕'을 대가로 '전직 비리 장관'이 되어 '침묵'을 택했다.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적폐 앞에 개인 영일재는 무기력했고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후배들은 목도했다. 가장 강직한 그의 후배였지만 이제 재벌가의 사위가 된 이창준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연수원의 새싹 검사 황시목(조승우 분)은 물론 그에게 배웠던 검사들은 존경하던 스승님의 몰락을 잊지않았다. <비밀의 숲> 내내 되새기고 또 되새겼던 영일재의 몰락,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영일재의 시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창준이 남긴 유서의 첫 마디, '대한민국이 썪어가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에서 법의 저울을 든 이들은 정권의 '가이드라인'이나 지키는 하수인이 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뼈저린 자각으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 영일재는 무기력했다. 



그런 스승의 몰락을 배웠던 이창준, 적당히 썪었다면 가진 것을 누리고 살고 싶었던 그였지만,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 앞서 몰락한 선배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괴물'이 되었다. 법의 저울을 쥔 사람이, 기꺼이 '살인을 교사'하고 '납치를 지시'하며, 불법 도청과 녹음을 감행하고, 끝내 자신을 재벌의 개로써 낙인찍어 재벌을 옭죄는 증거가 스스로 되었다. 기꺼이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킬 '젯밥'으로 자신의 피를 뿌릴 각오를 했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피의 제물이 되고자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힌 이창준이 펼쳐놓은 그물에 후배 강원철과 더 어린 후배 황시목이 걸어들어왔다. 설계는 그가 했지만, 이들은 스스로 걸어들어왔다. 한직으로 밀려나면서도 증거 수집을 포기하지 않았던 강원철, 그리고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수 없더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는 자신이 기대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식을 '법'이라 선택한 황시목, 그들은 오래오래 자신들을 기다린 이창준의 퍼즐을 맞출 결정적 인물로 스스로 간택당한다. 

그렇게 이제 그 누구도 공감할 대한민국, 적폐의 사회, 그 폐부에 감히 도전하는 법의 삼대, 혹은 사대는 이렇게 도전하고 깨지고, 피흘리며 겨우 저들을 법의 심판 앞에 끌어다 앉혔다. 영일재, 이창준, 그리고 강원철, 황시목, 그들의 실패와 성취는 어쩌면 선택과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청산'의 역사라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마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영일재가 틀리고, 이창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로를 밟고 이제 황시목이 기꺼이 적페 청산의 땔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가 아닌 법의 숲을 그렸던 드라마
더위가 몰려올 무렵 찬 겨울 공기를 몰고왔던 드라마, 그리고 그 찬 공기만큼이나 우리의 답답한 가슴에 서늘한 의문과 함께, 그 보다 더 속시원한 황시목, 한여진 등을 사이다처럼 선사해준 드라마, <비밀의 숲>

주인공의 이름은 황시목, 한자로 땔나무(땔나무 시柴 나무 목木), 그리고 그는 정말 땔나무처럼 기꺼이 '한조'라는 재벌로 시작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져나간 부정부패의 뿌리를 끊어냈다. 하지만 그런 땔나무 시목을 위해서는 영일재와 이창준의 전사가 필요했다. 

<비밀의 숲>이 빼어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직무'에 엄정하고 헌신적인 '프로페셔녈'한 존재들의 활약상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흔히 장르물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검사'나 '형사'들, 하지만 부정부패가 시스템화된 시대에 이들의 '정의'를 설득하기 위해 곧잘, 그들을 '피해의 당사자'이자, 정의의 사도로 그려왔다. <피고인(sbs)>이 그랬고, <시그널(tvn)>이 그랬다. 

물론 <비밀의 숲>에서도 그런 당사자들이자, 그래서 물불 가리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 영은수 검사(신혜선 분)나 윤세원 과장(이규형 분)도 있었지만, 결국 드라마는 마치 '검사' 혹은 형사라는 '공공재'여야 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 대해 묻는다. 촛불 정국을 통해 밝혀들어가며 드러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참상은 몇몇 권력을 쥔 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주며 거기에 복무한 수많은 '공공재'들의 문제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사전 제작된 <비밀의 숲>은 눈밝게 그 지점을 포착한다. 



민주주의의 시초가 청교도적인 부르조아 체제를 기반으로 융성했듯, 헌법을 근간으로 하여 건강한 법질서를 근간으로 설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는 공공의 자리에 있는 각자의 제 몫의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드라마는 역설한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도모했던 영일재 장관에서 참담한 존속의 상실이 도래한 것이며, 자신이 한번 눈감은 결과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을 좀먹는 거미줄같은 적폐가 되어 스스로의 피로써만이 그걸 저지할 수 있었던 이창준의 역설이 그걸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앞서간 선배들의 실패를 이제 후배 황시목, 한여진 등은 가장 프로페셔널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써 다가간다. 그들의 정의는, 그들의 직업적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이 평범한 원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가진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해답이다. 물론 그건 쉽지 않다. 마지막 회 최근 국정 농단의 주범들의 재판 형량과 이창준이 유서에서 언급한 가난으로 인해 죄를 지은 이들의 형량 비교가 인터넷에 떠돌듯, 어렵사리 법정으로 끌고 간 그들의 형량은 죄질에 비해 가벼웠고, 그 마저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조만만 세상의 빛을 볼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서동재와 같은 이들은 다시 원래의 방식대로 살아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한여진의 말처럼, '선택을 빙자한 침묵'에 거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아니라, 특별한 정의감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당신들이 바로 황시목이고, 한여진이어야 한다'며  주어진 숙제처럼 드라마는 주제를 내보인다. 



박무성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이창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비밀의 숲>은 장르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 대부분 장르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전체적으로 굵직한 하나의 사건을 깔고 매회 소소한 사건들을 터트리며 극의 엔진을 삼는 것과 달리, <비밀의 숲>은 결국 오직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16부의 장정을 달려왔다. 뿐만 아니라, 사전 제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조급하게 시청자의 시선을 잡기 위한 자극적이거나 인스턴트같은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겨울의 공기처럼 차갑게 이성적으로, 조금은 느리더라도 차분하게 사건의 본질을 향해 시청자와 함께 고민하며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늘상 소리치고 절규하고 터트리는 장르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겐 무감정해서 오히려 신뢰가 갔던 황시목이라는 캐릭터만큼  신세계였고, 그래서 말없이 고뇌하는 황시목과 함께 고민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하는 드라마'에 환호했다. 

입봉 임에도 드라마 사에 한 획을 그은 이수연 작가, 숨은 보석이었던 안길호 피디, 그리고 말을 덧붙여봐야 입이 아픈 조승우, 배두나, 그리고 무엇보다 이분이 동룡이 아빠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젠 밑겨지지 않은 유재명 배우, 그가 살해범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던 이규형 배우, 그 누구보다 안타까웠던 신혜선, 끝까지 변치않아 오히려 좋았던 이준혁 등등, 등장했던 그 모두가 드라마의 개연성이자, 감동이 되었던 제작진으로 인해, <비밀의 숲>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그래서 당연히 시즌2를 소원하게 되는 드라마로 남았다. 
by meditator 2017. 7. 31. 12:57

리메이크' 작품은 어쩔 수 없이 '원작'과의 비교를 피할 수 없다. '다니엘 헤니'의 출연으로 화제가 된 시즌 13을 앞두고 있는 미국의 장기 시리즈 <크리미널 마인드>라면 더더욱. 그런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제작발표회의 제작진과 배우들은 입을 모아, '한국적 정서'를 강조했다. 그렇다면 이제 1,2회를 마무리한 <크리미널 마인드>는 과연 미드의 한국적 토착화에 안착했을까?




친숙해진 프로파일링
평가에 앞서, 최근 범죄 수사 드라마라면 약방의 감초처럼 빠짐없이 등장하는 '프로파일링'에 대해 짚어보아야 한다. 범죄 심리 분석, 혹은 범죄자 프로파일링(offender profiling, criminal profiling )은 심리학, 사회학, 범죄학 등의 인문 사회학적 접근을 통해 범죄자의 심리 및 행동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범인상을 추정, 범죄 유형 분류, 피의자 신문 전략을 지원하는 수사 기법이다. 사건 현장 조사와 추적에 더해, 그 증거를 가지고 '인문사회학적' 분석으로 범죄자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고자 하는 수사 방식인 것이다. 이런 프로파일링 기법의 가장 극단적인 반대 방향에 <살인의 추억> 식의 '감'으로 잡아, '족치면' 다불도록 하는 '전근대적'인 수사 방식'이 있을 터이다. 

프로파일러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된 표창원 의원 등의 빈번한 언론 접촉은 물론, 영드<셜록>, <시그널> 등을 통해 이제는 매우 익숙한 분야가 되었지만, 우리나라에 프로파일링 기법이 수사에 도입되기 시작한 건 2000년 권일용 경위 한 사람에서 부터, 2004년 경찰청 과학 수사과 내에 폭력적 범죄 분석팀이 설치되고, 2005년에서야 김리학, 사회학 전공자 중 범죄 분석 요원을 뽑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2015년 현재 40여명의 요원이 있고, 각 지방 경찰청에 1~2명 정도의 인원이 배치되어 있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토록 장황하게 대한민국 프로파일링의 현실을 구구절절 설명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한국적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는 '한국적'인 이런 현실에서 바로 건너 뛰어 미드와 동일하게 국가 범죄 정보국(nci)와 그 소속 범죄 분석팀의 정예화된 프로파일러 집단을 내세운다. 그리고 미드와 거의 유사한 캐릭터의 등장인물군을 배치한다. 



곡진한 사연으로 포문을 연 드라마
첫회 드라마를 연 것는 폭발물 범죄 현장에서 마주친 강기형(손현주 분)과 김현준(이준기 분)이다. 이제 폭발을 앞두고 마지막 선택을 해야 할 순간, 자신의 프로파일링에 근거하여, 예측된 결과를 뒤집으려는 강기형을 현장의 윗선이 저지하고, 결국 폭발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그 폭발로 인해 가장 아끼는 후배를 잃게된 김현준, 그 자신도 프로파일러 출신이지만, 잘못된 프로파일링에 대한 불신을 쌓게되고...... 이렇게 '이성'을 무기로 범죄자와 싸우고자 하는 드라마는 한국 범죄 드라마에서 가장 익숙한 얽히고 섥힌 인간 관계와 사연으로 포문을 연다. 그리고 당연히 그 '상처'를 입은 주인공 김현준은 사건을 통해 자신의 후배를 죽인 것이 강기형의 판단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 프로파일링이 자신이 사랑하는 후배의 여동생을 구할 때까지 '반항적'으로 폭주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김현준의 반항은 그가 가는 곳곳마다 nci 범죄 분석팀과 그 중에서도 하선우(문채원 분)와 부딪치며 결국 공동 작전 하에 범인을 검거하고, 진실을 깨닫게 된 김현준은 강기형 측의 청을 받아들여 nci에 합류하게 된다. 1, 2회에 여성 연쇄 납치 살인 사건이 등장하지만, 드라마가 전면에 부각시킨건 바로 김현준이 합류한 범죄 분석팀의 합체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과정은 이미 우리나라의 범죄 드라마에서 조금 보태 한 열 번도 넘게 보아본 흔한 설정이다. 오해와 불신, 하지만 수사 과정을 통한 합류, 이 과정말이다. 그렇다면, 이 뻔한 한국 수사 드라마의 클리셰를 넘어, 리메이크 작으로 <크리미널 마인드>가 새로운 지점을 제시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이 지점에서 1,2회의 드라마는 시청자들 설득하는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앞서도 구구절절 설명하듯, 프로파일링은 기존 범죄 수사학에 심리학, 사회학의 도입이듯이,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수사 방식이다. 예를 들어 <셜록>에서 셜록의 프로파일링이 설득을 얻는 것은, 그의 소시오패스적인 '무감정'이다. 즉, 범죄자나, 범죄 사실에서 '거리를 둔', 그의 객관성이, 그의 프로파일링에 설득력을 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셜록>의 예를 따라, <시그널>에서도, 혹은 <너를 기억해>에서도 프로파일러로 등장한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이성적이며, 그래서 그들의 분석의 객관성에 신임을 얻게 된다. 비근한 예로, <비밀의 숲>에서 오로지 법에 의하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황시목이 설득력을 얻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갓쓰고 오토바이 탄 프로파일링 드라마 
그런데 <크리미널 마인드>는 이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한국적 정서'를 내세우며 가장 인간적인 모습의 수사관들의 사연을 전면에 배치한다. 아끼는 후배와 그 동생마저 잃을 뻔해 폭주하는 수사관, 수사 현장에서 자신의 주저함으로 현장을 멀리하지만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는 자상한 가장인 수사관, 그리고 여전히 한 소녀의 살인 사건으로 밤마다 악몽을 꾸는, 이런 장황한 '인간적'인 설정은 각자의 인물에 대한 설명을 풍성하게 할 수는 있지만, 안타깝게도 '프로파일링 수사극'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들을 설득해 내는데는 미흡하다. 

그렇게 사연에 집중하는 반면, 드라마는 마치 누르면 나오는 프로파일링 자판기처럼 범인과 관련된 '프로파일링' 내용들을 줄줄이 읊는다. 분명 미드에서도 이런 식으로 하고, 그 만능의 능력치들이 <크리미널 마인드>의 결정적 매력일진대, 어쩐지 태평양을 건너온 <크리미널 마인드>에선 그 '프로파일링'이 선무당의 말처럼, 아니 마치 컨닝한 답안지를 외워되는 수험생처럼 신뢰가 가지 않는다. 그 신뢰가 가지 않는 프로파일링이라도 범죄와 결합되면 좀 나을 수도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범죄 수사 드라마의 가장 기본 요건인 범죄와, 그 추적, 검거의 과정에서의 긴장감을 <크리미널 마인드>는 전혀 살려내지 못한다. 덕분에, 소년원 출신의 범죄자 박재민과 그들의 보호 관찰자이자, 최종 보스인 안상철(김인권 분)의 존재감은 휘발되고 만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것이, 주인공들의 곡진한 사연인지, 폼나는 프로파일링인지, 아니면 범죄 수사인지.

김영철, 손현주, 이준기, 문채원, 그 이름의 면면 만으로도 쟁쟁한 출연진,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들의 조합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아 보인다. 원작을 본 이들이라면, 원작의 인물들과의 비교에서, 아니 원작을 보지 않은 이들이라도, 이미 타 작품에서 각자 너무도 강하게 각인된 이 주인공들의 연기가, nci 범죄 분석관으로서 이들에게 집중하는데 방해가 된다. 차라리 조금 더 낯이 덜 익은 배우들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들 정도로. 손현주, 이준기, 문채원의 연기가 너무도 낯익다. 

그래도 이 정도에서는 제 몫이나마 성실하게 해낸다. 팀장 강기형의 포스는 강력하고, 이준기의 성실함이나, 무미건조한 문채원의 연기는 김현준과 하선우에 이질감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작 미드 <크리미널 마인드>의 인기 요소 중 하나인 꽃미남 리드 의 배역을 맡은 이한이나, 정보화 요원 페넬로페 역의 나나황에 이르면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어버린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정작 한국적 정서를 고려한다면서, 이런 손도 발도 펼 수 없는 캐릭터의 나열이라니!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캐릭터의 접선은 이미 <안투라지>를 통해 혹독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여전히 고질적으로 도용되고 있다. 

진짜 심각한 건, 남용되는 총기 사용
하지만 그 뻔한 한국 드라마의 사연팔이나, 싱크로율 제로에 육박하는 캐스팅, 혹은 전작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연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사건의 전개이다. <크리미널 마인드>는 미국의 드라마이다. 미국은 '총기 규제' 법안을 매번 상정시키지만 아직도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한 총기 자유화의 국가이다. 그러기에 <크리미널 마인드> 속 대다수의 범죄자들이 사용하는 범죄 수단에서 '권총'의 사용이 하등 이질감을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 1,2회, 한국으로 온 <크리미널 마인드>는 어땠을까? 뜻밖에도 보호 감찰관 안상철도, 그리고 이제 다음 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할 열차 살인범도 범죄 수단으로 '권총'을 자연스레 들고 등장한다. 

아마도 다른 드라마에서라면, 범죄자의 프로파일링 만큼이나 그가 어떻게 총기를 취득하게 되었느냐 여부가 중요한 수사 내용일텐데, 정작 '프로파일링'에 방점을 찍은 <크리미널 마인드>는 이 지점에 너무도 안일하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온 범죄 드라마가 신경써야 할 지점은 '한국적 정서'라는 명목의 사연 팔이가 아니라, 프로파일링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떤 현실적인 활약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국 사회의 범죄는 어떤 유형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지점에서, <크리미널 마인드>의 '한국화'는 갓쓰고 오토바이 탄 격처럼 보인다. 

by meditator 2017. 7. 28. 14:24

2026년 인구 20%가 노인, 대한민국이 초고령 사회로 진입한다. 이른바 인류의 염원이던 100세 시대가 우리에게도 도래한 것이다. 그런데, 코 앞으로 다가온 이 '장수의 시대'는 마냥 오래 살아 행복할까? 마치 암초처럼 준비되지 않은 채 우리의 삶을 좌초시킬 지도 모를 '장수의 시대'를 <ebs다큐 프라임>이 발빠르게 맞이했다. 


100세를 쇼크라 진단하기 전에, 다큐는 '프롤로그'처럼 '나이듦', 즉 노화에 대해 정의내리고자 한다. 일찌기 공자께서 50이 되면 하늘의 뜻을 알고(지천명 知天命), 60이 되면 경륜이 쌓이고 사려와 판단이 성숙하여 남의 말을 알아들으며(이순耳順 ), 70이 되면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도덕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오른다(종심 從心)고 하였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바라보는 '노인'은 이런 공자님 말씀과는 전혀 다르다.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함께 '노인'에 대한 이미지를 측정하는 실험에서 젊은이도, 노인들도 모두 노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나이듦이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노인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결정적인 이유는 산업화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존재 가치 잣대가 '생산성'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사회에서 '경험많은 어른'으로 대접받던 노인들은 이제 더 이상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치부받는다. 하지만 그런 사회적 무능력에 더해, 나이든 사람들이 나타내는 공통적인 태도가 다른 세대에겐 소통 불능의 '고집 불통'으로 낙인 찍혀 가는게 요즘 세상이다. 왜 그럴까?

그런 노인들의 '고집'을 다큐는 '정서적 최적화'라 정의 내린다. 홀로 살아가는 100세의 할아버지 스스로 빨래를 하고 일상 생활을 해결해 나간다. 하지만 옆집 아주머니는 들여다 보고 질색을 한다. 말이 빨래지 비눗물에 담궜던 옷가지를 헹구기는 커녕 짜지도 않고 걸어놓고, 방안은 씻지도 않은 젓가락이며 그릇이며 먹고남은 막걸리 통까지 발 디딜 틈이 없다. 하지만,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이 지저분하기 그지 없는 상태가 사실은 이제 100세가 되어 활동력이 현격하게 떨어진 할아버지에게 살아가기에 최적화된 환경. 이런 것이다. 바로 나이가 드신 분들은 그분들의 '스타일'대로 자신에 맞는 최적의 상태를 추구하려 하지만, 그것이 '현재'의 시대에 늘 '불화'한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말할 것이다. 좀 '시대'에 맞추라고. 하지만 나이가 들었다고 사람이 쉽게 변하진 않는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자신들의 입장을 '인정'받고 싶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싶으니, 어쩌면 이 세대간 '부조화'는 '숙명적'이다. 

재앙이 되어 가는 장수 
이렇게 숙명적으로 이미 '불화'할 수 밖에 없는 노인 세대, 그런데 그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이 점점 늘어만 간다. OECD 국가 노인 빈곤율 1위, '빈곤과 질병과 고독'과 싸워야 하는 장수는 재앙이다. 

부산 쪽방촌 문에는 이름들이 쭈욱 내려 써있다. 무연고로 장례를 치르지도 못하고 납골당에 모셔져 있는 노인들의 이름이다. 이른바 '고독사'이다. 해마다 늘고 있는 고독사, 2016년에는 1232명, 그중 48%가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사회 관계망에서 일찌감치 방출된 사람들, 특히나 일반적으로 남성에 비해 10년 정도 평균 수명이 더 길며, 남편 사후 빈곤층 추락 가능성이 더 높은 여성 고령자의 경우 더욱 '고독사'의 위험이 높다. 한때 우리 나라 최초 사립 유치원 선생님 출신의 여성 엘리트였지만 이혼후 급격하게 추락하여 이젠 저녁 한 끼를 우유에 밥 한 술 말아 때우고 마는 조경숙씨(80)처럼, 우리 사회 노인들의 노후 문제는 곧 여성 노인의 빈곤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우리 사회 노년의 장수가 재앙이 되는 이유중에는 자식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라며 자신이 일할 수 있는 기간 동안 번 경제적 능력을 온통 자식에게 쏟아붓고마는 한국인 특수한 문화도 한 몫을 한다. 심지어 두 노년의 부부가 하루에 700원 남짓 폐지를 줏어 생활을 하면서도 8평 남짓 자신들 소유 빌라를 손주에게 상속해야 한다며 꾸역꾸역 쥐고 앉은 이 '상속'의 문화는 고질병 수준이다. 

물론 모두가 노년에 대해 무방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방비'를 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은퇴를 맞이한 베이비붐 세대의 상당수가 은퇴후 일자리가 마땅치 않자, 빚을 내서 자영업에 뛰어든다. 60대 은퇴자의 52%가 창업을 하고, 그 중 2/3이 폐업을 하며 퇴직금까지 날리고 '노후 파산',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유엔이 조사한 노인 소득 90위(91개국 중, 아프가니스탄이 91위), 꼴찌의 현실이다. 

하지만 추락하는 '노년'에 날개를 달아줄 자녀는 이제 없다. 자녀세대는 이제 더 이상 부모에 대해 부양해야 할 의무감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은퇴 시기를 맞이한 베이비붐 세대들에겐 아직 부양해야 할 부모님이 계시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 효'사상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들은 의료 복지 시설에 대한 인식이 낮아 스스로 그 짐을 떠앉아 버리는 경우가 많아, 이중고에 시달린다. 

이런 노년의 문제에 대해 연구자는 노년의 리스크를 세 가지로 정의한다. 그 첫 번째로 무의미함, 살아온 시간, 그리고 살아갈 시간에 대한 허망함이다. 두번 째는 살아가야 할 시간에 대한 부담, 즉 삶의 지루함이다. 그리고 세 번 째, 가난, 그런데 여기서 가난이란 물질적 가난만이 아니라, 시간적 가난도 함께 포함된다. 노인 빈곤율 OECD 1위의 현실에서 다큐가 주목하고 있는 건, 물질적 가난 보다는 '노년에 대한 인식 제고'이다. 

어쩌면 물질적 가난보다 더한 인식의 가난, 그 개선에서 부터 
서울의 한 교회, IMF 때부터 시작한 일주일에 한번씩 500원씩 주기, 거기엔 새벽부터 장사진을 친 노인들로 북적인다. 그러나 정작 인터뷰를 해보면 정말 끼니를 걸러서 나온 분들이 대다수가 아니다. 오히려 남아도는 시간 소일 거리 겸 용돈 벌이로 나온다는 분들. 대부분 노인들의 취미 생활이 TV 시청이듯, 노인들 대부분이 무료한 몇 십년씩 삶을 이어간다. 

'노년의 물질적 가난도 문제지만, 어쩌면 지금 100세 시대 더 심각한 것은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며 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노인들의 인식 제고라고 다큐는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 대한 '개선'을 시도하고자 한다. 

1분에 대해 시간 측정을 해보는 실험에 참가한 노인들, 실험은 약간의 트릭을 써서, 노인분들이 생각한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1분이라 답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실험에 참가한 노인분들은 이후 노년에 대한 인식 실험에서 인식이 달라진다. 즉, 남은 노년의 시간에 대해 '다 살았다'가 아니라, '그 시간이나 남았다'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 



인식의 변화는 생활의 변화를 낳는다. 경남 양산의 효암 고등학교에는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며 휴지를 줍고 다니는 노인 한 분이 있다. 아이들이랑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이 노인,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자신들을 도와주는 할아버지라는 이 분, 알고보니 이 효암 학원의 이사장이다. 젊어 흥국탄광등 스무 개가 넘는 기업을 이끌었던 거부,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한 후 학교 한편 방 한 칸에서 생활하며 학교를 어슬렁거린다. 췌장암 치료를 받지만, 그에겐 암이나 당뇨병이나 매한가지일 뿐. 그는 말한다. 노인은 늙는 것이 아니라, 젊게 산 것의 결과라고. 기자 은퇴 후 여행작가로 <나는 걷는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노년을 '완전한 자유'를 갖는 순간이라 명명한다.

물론 여전히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리는 다수의 노인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에 그친 점은 아쉽다. 하지만, 그 '가난'한 노인들 조차도 돈 만원이 있으면 삼일을 버틸 수 있지만, 외로움은 견딜 수 없다는 '시간'의 벽에 대해 '방점'을 찍은 다큐의 시각은 의미있다. 은퇴 후 20년, 하지만 그걸 시간으로 환산하면 10만 시간이다. 생산적이지 않은 사회의 유휴 노동력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기엔 너무 긴 시간이다. 그 시간이 '재앙'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 시스템은 물론, 그 시간을 맞이한느 노인들 자신들이 '다 산 사람'이 아니라, '아직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주인공'으로 자신의 작품을 완주해야 하는 '인식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 역시 100시대를 맞이한 우리에게는 절실한 '주문'이다. 

 






by meditator 2017. 7. 27. 16:04

tvn의 <비밀의 숲>이 매회 호평을 받으며 종결을 앞두고 있다. 화제성높았던 <시그널>과의 흐뭇한 비교 속에, 아마도 <비밀의 숲>은 오래도록 회자될 신선한 장르물로 평가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황리에 방영되고 있는 장르물이 선점하고 있는 가운데 또 한편의 장르물이 도전장을 내민다는 건 부담이 크다. 장르물은 극의 진행상 타 드라마에 비해 '집중도'를 더 요구하는 드라마이다. 그러기에 동일한 장르물의 연속 시청은 어쩔 수 없이 시청자들에게 피로감을 안겨준다.더구나 익숙한 검찰과 재벌 커넥션에 근거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컴퍼니 VS. 조작 어벤져스 
하지만 1,2회를 방영한 <조작>은 그 난감한 상황을 '기레기'라 야유받는 '언론'의 상황을 전면에 내세우며 새로운 면을 부각시켜 나갔다. 또한 거대한 커넥션에 다가서다 뜻밖의 죽음을 당한 언론인 형 한철호(오정세 분)과 그 자신도 내부 고발자로 불의한 음모에 휩싸여 선수 생명을 위협받게 되는 유도 선수 한무영(남궁민 분)의 형제 비극사를 내세워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거기에 정의로우려다 통수를 맞고 나락에 떨어지게 되는 대한일보 스플래쉬 팀의 팀장 이석민(유준상 분)과 검사 권소라(엄지원 분)의 처지도 눈길을 끓었다. 



그렇게 드라마는 형의 죽음을 추적하기 위해 애국일보 기레기가 된 한무영을 중심으로, 한 기업인의 정관계 커넥션 폭로 과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대한일보 이석민과 권소라라는 미래의 적폐 청산 어벤져스의 단초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런 어벤져스의 맞은 편에 이른바 어르신들의 조직인,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여 온 비선 조직 '컴퍼니'와 그 실행책인 국내 최대 로펌 대표 조영기(류승수 분)와 대한일보 구태원(문성근 분) 상무가 포진한다. 이미 영화 <내부자들을 통해 등장했던 권언 유착, 그리고 최근 <비밀의 숲>, <귓속말> 등을 통해 클리셰가 되다시피한 검찰 권력 등이 '총동원령'으로 집결한 듯하다. 


어벤져스 급 스케일이 낳은 딜레마 
그리고 <조작>이란 드라마의 딜레마는 바로 이런 '어벤져스'한 스케일에서 비롯된다. 드라마는 박응모의 검거 과정에 뛰어든 애국일보 기레기 한무영, 그리고 직접 현장에 나가 가를 검거하지만 결국 조작된 범죄 유효 시한으로 또 놓쳐버리고 마는 권소라, 그리고 자격도 없으면서 그 취재 과정에 개입해 들어가는 이석민을 조명하며, 이들의 아직은 역부족인 고군분투를 다룬다. 한 명의 주인공이 아닌, 타블로이드판 언론의 기자, 한직으로 밀려난 대한일보 기자, 그리고 검사 등 세 명의 사연을 곡진하게 다루려다 보니 마치 주인이 여러 명인 음식점처럼 어수선하다. 

대한일보 스플래시 팀장이었던 이석민의 후배 기자는 한무영의 형 한철호였다. 한철호는 취재를 핑계로 스플래시 팀의 자리를 비웠는데, 이석민은 결정적 순간 자신을 반대한 한철호에 대해 자신이 야심차게 준비했던 민회장의 로비 장부 사건에 훼방을 놓은 사람으로 오해한다. 한철호의 집을 드나들며 그의 동생 한무영의 도핑 파문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했던 이석민은 한철호의 죽음을 파헤치려는 한무영에게 이제 그만 덮으라 충고하며 돌아섰다. 그런가 하면 정의의 입장에서 나섰던 내부 고발의 담담자였던 권소라는 도핑 파문에 몰린 한무영을 외면했다. 



이렇게 과거의 악연으로 얽힌 이들, 드라마는 이렇게 거미줄처럼 주인공들 사이의 사연과 관계를 얽어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묘하게도 한무영을 비롯한, 이석민, 권소라의 프로필은 명확하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쉽게 각인되지 않는다. 그들은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선 한무영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역사 추진 위원회라는 책상 하나 딸랑 남긴 치욕을 견디는 이석민이 왜 여전히 공정 보도에 목숨을 거는 기자인지, 서울로 상경하는 것 외에, 여전히 정의를 수호하려 하는 권소라가 어떤 인물인지, 분주한 사건 속에서 그들은 맡은 바 임무는 충실하지만, 그 이상 '인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아니 그들 각자 한 명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어도 될만한 이들을 한 드라마 안에 모아놓으니 인간적으로 조명할 여유가 없다, 드라마는. 그리고 <조작>이 고민해 봐야 할 점은 조명할 여유가 없는 것인지, 조명할 내용성이 없는 것인지라는 지점이다. 

또한 이제 4회에 불과한데, <내부자들>의 이강희 주필과 비슷한 캐릭터이지만, 그만의 노회함으로 중심을 잡아버린 구태원과 달리, 한무영도, 이석민도, 권소라도 마치 똑같은 체급의, 똑같은 스타일의 복서마냥, 목청높이고, 주장하고, 달겨들며, 나자빠지는 방식에 있어서는 동일한 스타일의 연기로 시청자들을 피로감에 빠뜨린다. 인파이터도, 아웃 복서도 있어야 보는 이가 흥미진진할 텐데, 한 시간 내내 정의로움을 향해 이리저리 달리는 이들은 그저 정해진 레이스를 달리는 경주마같을 뿐이다.
특히 한무영 역의 남궁민은 아직 호평을 받았던 김과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듯, 종종 기레기가 된 <김과장>의 기시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과연 한때 촉망받는 유도 선수였으며, 기꺼이 내부 고발을 감수한 정의로운 인물이며, 형을 철썩같이 믿는 우애 가득한 동생이라는 캐릭터와, 막상 극에서 그가 보여주는 느물느물한 연기톤의 이질감은 어쩔 수 없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김과장>을 떠올리도록 만든다. 그런 면에서 유준상의 캐릭터는 새로운데, 역시나 그의 연기가 새롭지 않게 느껴지는 것 역시 이 드라마의 아쉬운 점이다. 

드라마는 외양으로는 EM무역 대표이지만, 실질적으로 인신 매매, 살인 등 온갖 뒷설거지를 담당했던 박응모(박정학 분)의 검거로부터 시작된다. 형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한 실마리로 몸을 던져 법의 손에 넘겨준 박응모,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분'들의 뜻대로 유유히 법망을 빠져나갈 예정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장르 드라마들이 좀 더 교묘하게 잔인하게 권언유착을 다루지만, 이미 검찰 개혁과 적폐 청산의 시대에 한 발을 들인 시청자들에게 그건 새삼스러운 '폭로'가 아니다. 그러기에 이제 <조작>은 그 '폭로'와, 그들의 점입가경의 범죄적 행보 이상, 그 무엇을 제시해야 하는 지점에 놓여있다. 

그러기에 <조작>은 그런 장르물의 후발 주자로서의 고민을 야심차게 그 동안 이와 같은 드라마들이 제공했던 정의로운 주인공들을 몽땅 모아 어벤져스 급 캐릭터들로 진수성찬을 차렸다. 하지만, 산해진미의 음식을 맛보고 돌아온 후 무엇을 먹었는지, 그게 맛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듯, 이제 4회까지의 <조작>은 차린 건 많은데, 영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부디 이 잘 차린 한 상에 '푸짐하게 즐겼다'는 평이 나올 수 있도록, 어벤져스들의 조화에 좀 더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7. 7. 26. 14:18

새로운 수목 대전이 시작되었다. kbs2의 <7일의 왕비>가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지만, sbs의 <다시 만난 세계>와 mbc의 <죽어야 사는 남자>가 동시에 방영을 시작했다. sbs의 <다시 만난 세계>는 <옥탑방 왕세자>, <냄새를 보는 소녀>, <공심이>로 신선하고 대중적인 스토리로 시청률은 따논 당상이라 말할 수 있는 이희명 작가의 작품이다. 이미 <냄새를 보는 소녀>, <공심이>로 호흡을 맞춘 백수찬 피디와의 작품이니, 당연히 '기대작'이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본 결과가 무색하다. 당연히 1위를 하리라 믿었던 이희명 작가의 작품을 가뿐히 누르고 1위를 차지한 작품은 그 이름조차도 생경한 사이드 파드 알리 백작(한국명 장달구, 최민수 분)이 주인공으로 나선 <죽어야 사는 남자>다.(<죽어야 사는 남자> 9.6%, <다시 만난 세계> 7.2%,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심지어 <죽어야 사는 남자>는 기존 미니시리즈와 달리 24부작(기존 12부작) 작품이다. 




그렇다면 당연했던 기대작이었던 <다시 만난 세계>와 <죽어야 사는 남자>의 희비를 엇갈리게 한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니었을까?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되었던 일본 에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처럼 <다시 만난 세계>는 시간을 거슬러 만나게 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 첫사랑이었던 소년, 하지만 그 소년은 자신의 생일날 뜻밖의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바로 그 소년이 31살 첫사랑 소녀 앞에 다시 나타난다는 이야기로부터 드라마는 시작된다. 그런데, 소녀가 31살이 되도록 여전히 19살 소년인 성해성(여진구 분)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연기와 달리, 이제는 중견이라 말할 수 있는 여주인공 정정원(이연희 분)과 최근 구혜선과의 신혼일기로 예능에서 화제성을 얻은 차민준의 안재현의 연기가 누가 더 어색한가로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주인공들 중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되는데 무려 두 사람의 연기가 문제가 되고 보니, 이희명 작가가 잔뜩 차려놓은 <옥탑방 왕세자> 못지 않은 아련한 서사도, 백수찬 감독의 감성어린 연출도 무기력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1위 <죽어야 사는 남자>, 그 매력은? 
그에 반해, <죽어야 사는 남자>는 생뚱맞은 스토리로 시작된다. 중동에 있는 가상의 이슬람 왕국 보두아티안 왕국의 백작이 된 남자 장달구, 이 어색한 설정을 드라마는 외국 로케 한번 없이 사막의 모래 바람을 그럴 듯하게 만들어 내더니, 최민수의 연기로 개연성을 설득해 버린다. 이제는 그 존재 자체로 '기인'인 되어버린 최민수가 거기에 연기를 입혀 중동 국가 백작이 된 장달구를 설명해 내는 것이다. 




그런 희한한 설정을 최민수가 설득해 버리고, 그 위에 그의 딸일지로 모를 이지영 1(강예원 분),과 이지영2(,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남편과 불륜남으로 얽힌 익숙한 치정사가 토핑처럼 얹히는데, 이를 강예원, 이소연, 신성록이 또 기가 막히게 살을 입힌다. 이미 2회만에 신성록은 <별에서 온 그대>의 사이코패스 이재경보다 더 얄미워졌고, 강예원은 <백희가 돌아왔다> 이래 또 한번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듯 보인다. 거기에 '그래 내가 유부남 사귄다'는 이소연의 '이 구역 미친 년은 나야'라는 당당함이라니! 심지어 백작의 비서(조태관 분)에서 부터, 호림의 동창 저축은행장 최순태(차순배 분), 지영의 친언니같은 한방병원장 왕미란(배해선 분)까지 등장인물들의 연기 하나 놓칠 것이 없다. 

거기에 그저 백마 타고 온 왕자님 만나기를 벤틀리 타고 온 석유 재벌 아버지로 바꾼 듯한 뻔한 신데렐라 이야기는 동명이인 이지영으로 인한 해프닝으로 이야기의 갈래가 풍성해진다. 사생사 이지영 2에, 아버지 실종 이지영 1의 서사는 각자의 사연으로 '오해'를 더욱 그럴듯하게 풀어놓는다. 또한 그저 한 남자를 둔 치정극일 것만 같던 이야기는 시댁의 갖은 갑질에도 불구하고 방송 작가로서의 자신의 꿈을 접지 않는 이지영 1의 '캔디'같은 스토리로 '신데렐라' 이상의 가능성을 열어제친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수목극 전체 시청률 파이가 20%를 웃돌 정도로, 1위가 9%를 겨우 넘는 공중파 미니 시리즈의 위상은 초라하다. 충분히 흥미로운 설정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24부작이라는 바튼 일정에도 벌써 2회만에 되풀이되는 서사는 20부작이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는다. 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와, 그 이야기들을 감칠맛나게 연기해내는 배우들의 호연은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죽어야 사는 남자>라는 색다른 이야기를 설득해 낸다. 부디, 유종의 미를 거두어 미니 시리즈라면 기존의 16부작, 20부작이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가뜬하게 1위로 시작한 <죽어야 사는 남자>를 통해 제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 좋겠다. 그리하여 좀 더 자유로운 형식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미니 시리즈'라는 시간을 통해 시청자들을 만날 수 있기를. 


by meditator 2017. 7. 21. 16:01

지난 1월 kbs2의 다큐 3일은 새해 맞이 특별한 기획을 맞이했다. 세계의 두 강대국을 바라보는 한국과 일본의 서로 다른 3일의 시간, 우리의 다큐 팀이 세계 최대의 중식당을 배경으로 신흥 부국으로 떠오르는 중국을 지켜본 반면, 일본 nhk 다큐팀은 뉴욕 퀸즈 거리의 한 빨래방에 시선을 맞춘다. 왜 퀸즈 거리였을까? 다섯 개의 자치구로 구성된 뉴욕, 그 중에서 퀸즈 거리는 다국적 이민자들과 노동자들의 밀집처이다. 그곳에서  빨래방은 할렘가의 아이들과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하여 쫓기듯 이민온 혹은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건너온 그리스, 멕시코 노동자들의 '부유하는' 삶의 정류장 같은 곳으로 그려진다. 그런 퀸즈 거리, 그 거리에 빨간 쫄쫄이 옷을 입고 거리를 부산하게 날아다니며 도시의 '보이스카웃' 노릇을 하는 소년이 있다. 




퀸즈 거리의 스파이더 맨
그렇게 영화는 뉴욕 자치구 중 상대적으로 경제적 수준이 떨어지는 노동자 지구 출신의 한 소년 '피터 파커'(톰 홀랜드 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심지어 그는 부모도 없이 숙모네 집에 얹혀산다. 그런 그가 잠시 '어벤져스 팀'에 다녀온 후, 줄곧 어벤져스 팀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노력'을  '토니 스타크 재단 인턴 사원'으로 포장하고, 학교 친구들은 수재인 그러나 늘 잘 사는 친구들에게 찌질하다 놀림감이 되던 그의 '인턴쉽'을 응원한다. 나름 퀸즈 거리 출신 수재 소년의 전도유망한 입신 양명인 셈이다. 우리 말로 치면 개천에서 용난 셈? 삼성 취업 정도로 받아들이는 정도?

그런데 이게 속사정은 다르다. '시빌워'에서 활약을 보이고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에게 첨단 기능의 수트까지 선물받지만, 거기까지 스타크 재단에 머물며 어벤져스의 일원이 되는 대신, 고향 뉴욕으로 가서 '학업'에 충실하라는 충고만을 받고 돌아온다. 당연히 피터 파커는 '학업' 대신, 이미 한번 맛본 '히어로'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어벤져스 팀이 되려면 시험봐요?'라고 천진하게 묻던 소년은 어떻게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퀸즈 거리의 '날으는 보이스카웃' 노릇에 매진한다.

그런데 중2병같은 스파이더맨의 자존감을 그가 애정하는 퀸즈 거리 잡화점과 함께 박살내 버린 악당이 등장했으니 그가 바로 악당은 빌런 벌처이다. 영화 <스파이더 맨>은 아버지없이 어머니 역할을 하는 숙모에게 얹혀 사는 피터 파커 앞에 두 명의 아버지를 등장시킨다. 그 한 명은 당연히 어벤져스 팀의 대장인 아이언맨이다. 불철주야 사업과 세계 평화를 위해 바쁜 틈틈이 피터 파커 앞에 나타나서,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하듯 츤데레 부성애를 보이며, 딴짓(?) 하지 말고 대학 갈 준비도 하고 학업에 충실하라는 뻔한 충고를 하는 토니 스타크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스파이더맨이 벌인 판에 나타나 '해결사'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두 명의 아버지, 피터 파커와 빌런 벌쳐
이렇게 츤데레 아버지 상의 한 편에 또 한 명의 아버지가 등장한다. 바로 악당 빌런 벌처이다. 원작에서 자력을 이용하여 공중에 뜰 수 있는 수트를 개발한 전기 공학자였던 빌런 벌처는 이제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2012년판 어벤져스의 뉴욕 대전이후 토니 스타크 재단의 하청업자로 등장한 빌런, 하지만 그의 작업장에 등장한 재단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그와 그의 동료들을 '실업자'로 만들어 버린다. 

'가족'을 부양하고, 동료들을 책임지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장비까지 들인 '빌런 벌처', 그의 선택은 미처 재단이 수거해가지 못한 외계 물질을 활용한 '가장'으로서의 돈벌이이다. 하지만 그의 '돈벌이'는 불법적 영역을 향할 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동네 보이스카웃 스파이더맨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하자만 뜻밖에도 <스파이더 맨>에서 가장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은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아버지로서의 빌런 벌처이다. 

당연히 소년에게 따르고 싶은 아버지 상은 어벤져스의 대장님인 아이언 맨이다, 심지어 그 '망나니'같던 아이언 맨은 어색해 하며 '아버지'처럼 군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충고에도 소년은 그의 대학 입학에 결정적 스펙이 될 경시대회 대신, '정의'의 수호자가 된다. 출신은 다르지만, 퀸즈 거리 출신의 소년 스파이더 맨과 재벌 아이먼 맨은 그렇게 정신적으로 '부자'의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반면, 소년은 어쩌면 자신과 같은 출신의 빌런과 대립한다. 소년이 소영웅주의를 극복하고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나는 동안, 자신의 가정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고'의 합리화로 빌런은 악행을 증폭시켜 나간다. 영화 속 빌런 벌처로 분한 마이클 키튼은 과거 배트맨을 맡은 바, 그런 '추억'이 그의 오랜 팬들에게는 '시간'의 감회를 불러 일으킬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스파이더 맨>의 빌런 벌처의 독수리를 연상시키는 수트를 보면, 마이클 키튼의 또 다른 영화 <버드맨>이 연상된다. 

추락하는 또 한 명의 버드맨
슈퍼 히어로 버드맨으로 브로드웨이 무대에서 전성기를 누렸지만 이제 딸의 냉소를 받으며 재기의 칼을 가는 그 '버드맨'의 환청은 <스파이던 맨> 속 벌런 벌처의 그 슈퍼 수트와 비슷하다. 대신 '자아분열'과 ;'환청' 속에서 만나던 슈퍼 히어로를 <스파이더 맨>은 외계 물질에 기반한 '과학 기술'의 도움으로 그를 하늘을 날며 스파이더맨이 거미줄도 잘라버리는 무적 악당으로 거듭나게 한다. 

그런데 그 '기술'이 흥미롭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도움을 얻어야 고성능의 그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기술을, 영화 속 하청업자 집단은 뚝딱뚝딱 만들어 내며, 심지어 스타크 재단의 비행선을 하이재킹할 수준에 이른다는 지점은 흥미롭다. 그렇게 하청업자 보스의 주문 아래, 노동자들의 손에서 거듭난 외계 물질은 안타깝게도 스타크 재단으로의 하청 대신,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불법 무기로 그 항로를 바꾸게 된다. 그렇게 방향을 잃은 노동자의 기술, 결국 <버드맨>의 아버지 리건 톰슨과 <스파이더 맨>의 아버지 빌런 벌처에게는 '재기' 대신, '추락'이 기다릴 뿐이다. 

tv시리즈 <디즈니랜드>의 소년 성장물을 본듯한 기시감을 주었던 <스파이더 맨>은 히어로의 외관을 떼어내고 나면 질풍노도 시기의 소년이 책임감있는 한 인간으로의 성장 서사를 고스란히 답습한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혹은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리 쉽게 마음이 털어지지 않게 되는 건 오히려 '츤데레하면서도 자상한 아버지'였던 돈많은, 그리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이 가능했던, 그러나 '모럴헤저드'하지 않은 이 시대의 영웅으로서의 아이언맨보다,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을 시기에, 가족과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악'의 길을 걸으며 '재벌 스타크'를 증오하는 '추락하는 영웅' 빌런 벌처때문이다. 오히려 우리의 아버지들은, 돈이 많지만 그럼에도 도덕적인 아이언맨보다는, 가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 날개꺽이고 만 빌런 벌처였을 경우가 더 많으니까, 

영화는 어벤져스 팀에 당당하게 된 스파이던 맨이, 그곳을 대신하여 고향 뉴욕을 지키는 보이스카웃, 아니 이제 당당한 한 몫의 영웅으로 '홈커밍'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온 그곳엔, 그가 흠모하던 홈커밍데이의 꽃이던 그녀는 없다. 첫사랑도 가고, 가족을 위해 잠시 하늘로 날아올랐던 아버지도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by meditator 2017. 7. 18. 16:42

2017년 3월 '헌법'에 의거하여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역설적으로 '헌법'의 존재 가치를 증명시켜주었다. 하지만, 지금 일각에서는 바로 그 '박근혜 전대통령 탄핵의 근거가 된 '헌법'이 '개헌' 논의가 불붙고 있다. 즉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제왕적 대통령이 가능토록 한 87년 체제의 헌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필요한 것이 '개헌'일까? 그리고 '개헌'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대해 sbs스페셜은 우리 헌법의 지난 과정을 짚어보는 <헌법의 탄생>을 통해 현 시기 '개헌론자'의 속내와, 만약 개헌을 한다면 그 새로운 헌법이 담보해야 할 내용에 대해 짚어보고자 한다. 



87년 '직선제 개헌', 그건 2017년 촛불 광장의 기억처럼, 4.13 호헌 철폐에서 6월 항쟁, 그리고 6.29 선언으로 이어진 '쟁취해낸 역사'로서의 감동이 서려있다. 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거리를 메웠던 넥타이 부대의 물결, 이한열 열사 등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쟁취해낸 '민주'의 기억. 4.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개헌 불사 호헌'을 주장했고, 이에 사람들은 거기로 쏟아져 나와,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야 합의 하에 '체육관이 아닌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쟁취해 냈다. 



그런데 다큐는 그렇게 승리의 역사로 기록된 당시의 시대사를 다시 한번 들춰본다. 과연 '승리'만의 역사인가? 그들은 왜 '대통령 직선제'를 내주었을까? 무엇보다 가장 큰 계기가 된 건 서울 거리를 채워낸 민심이다. 서울은 광주와 같이 '고립'시킬 수 없는 '대한민국의 수도'였기에, 그 거센 민심을 쉽사리 '총칼'로 제압해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민심'의 요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개헌의 역사, 그 진정한 의미는? 
87년 개헌의 의미를 짚어보기에 앞서 다큐는 그에 앞선 8차례 개헌 과정을 짚어본다. 과연 지난 9차례 개헌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우리 역사상 첫 개헌 아직 전쟁이 채 마무리도 되지 않은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상정했다. 하지만 이에 국회가 반대를 하자, '관제 데모'등을 조작하는 한편, 국회의원 12명 등을 '공산주의 혐의'로 체포하는 등 '트루먼 대통령 등 국제 사회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국회의원안'을 발췌한 내용으로 경찰에 포위된 국회의원들의 기립 투표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이 가능한 '개헌'을 찬성 163표, 기권 3표로 통과시켰다. 

바로 이 첫 개헌은 지난 우리나라 개헌의 역사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추어 '정권 연장을 위한 개헌', 바로 이게 우리 헌법 개정의 역사인 것이다. 그 다음 2차 개헌은 더 기가 막힌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중임제 철폐 등의 내용을 담은 개헌은 이른바 '사사오입'이라는 어불성설의 수학적 논리로 개헌 정족수에 1표 미달한 135 찬성을 '개헌안 가결'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밀어붙인 권력은 역시나 이때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젊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4.19 혁명을 통해 붕괴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국회 간선제, 그리고 부정 선건 관련자 처벌 등의 3.4차 개헌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런 4.19 혁명의 결과문은 61년 5.16 쿠데타에 이은 5차 개헌으로 다시 대통령 직선제로 돌아서게 된다. 

박정희 정권 개헌의 역사는 더욱 자명하다. 대통령 중임제 범위를 3번으로 연장하는 6차 개헌, 통일 주체 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임기 6년의 중임 제한 철폐의 사상 최대의 '유신 헌법'의 7차 개헌이 이루어 지면 박정희 영구 독재의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헌법을 뜯어고치며 영구 집권을 획책한 박정희는 역사의 심판을 받았고, 하지만 역시나 그 역사의 심판의 결과물은 5.17을 거쳐 군화발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으로 이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시한번 체육관에서 벌어진 대통령 선거였다. 



87년 직선제 개헌은 민중 항쟁의 결과물?
이렇게 짚어본 대한민국 개헌사는 정권의 연장사요, 집권의 획책사였다. 그렇다면 6월 항쟁을 통해 얻은 8차 직선제 개헌은? 다큐는 안타깝게도 8차 개헌 역시 많은 이면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폭로'한다.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지만 좀처럼 수그러들기는 커녕 나날이 거세어져 가는 민심의 이반에 대해, 당시 정권은 '직선제' 개헌 카드를 이미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마치 민심에 대한 완전 항복같았던 6.29 선언 당시, 이미 전두환, 노태우 측은 '직선제 개헌'을 해도 자신들의 정권 연장이 가능하다는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야권의 두 거대한 잠룡 김영상, 김대중이라는 두 세력은 결코 단일화를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은 적중했고, 6월 항쟁은 '보통 사람 코스프레'를 하는 노태우 정권으로 넘겨지게 된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노태우 정권 자체보다. 오히려 87년 개헌 협상 과정에 있다고 다큐는 짚는다. 여야 8인이 모여 합의 하에 준비한 개헌, 하지만 불과 그 준비 기간은 40일에 불과했고, 야당의 경우 오로지 '대통령 임기'등의 '잿밥'에만 눈이 어두워 87년 체제의 본질을 간파하거나,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김영상, 김대중, 노태우 등의 정권 돌려먹기에 눈독을 들인 다시 협상단은 직선제로 대통령 한번씩 돌려먹기 하는데만 관심을 쏟았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쫓겨 권력 구조에만 정신이 팔렸던 87년 개헌은 박정희 대통령의 5차 개헌 내용을 거의 대부분 수용했다.  심지어 '군인 국가 배상 금지법'. '대통령 긴급 명령권', '공무원 노조 금지', '대통령 대법관 임명권' 등 유신 헌법의 잔재도 고스란히 온존한다. 이에 심용환 연구가는  여전히 우리는 '박정희가 설계한 시대, 박정희의 세계 속에 살고있다' 정의내린다. 



박정희 시대의 완전 종결을 위한 개헌 논의
그러기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그리고 87년 체제의 종식은 궁극적으로 '박정희 시대'의 공식적 폐막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시 '개헌'일까? 이에 헌법 학자는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짚어보았다시피,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는 '권력'의 정권 연장 획책의 역사이고, 그것은 곧 민심 이반의 치욕의 역사였다. 그 이유는 바로, 개헌이 매번 '권력 구조 개편'에만 눈독을 들이기 때문이었다. 또 그러기에 지금 야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새로운 권력 구조 개편으로서의 개편 역시 다시 한번 '개헌의 악몽'에 우리를 끌고 들어갈 여지가 크다고 다큐는 짚는다. 

그렇다면 과연 이제 그 수명을 다한 87년 체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 서구 민주주의 사에서 '개헌'이란 민중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반면 우리 개헌의 역사는 집권자의 혹은 어떤 기득권 세력의 정권 연장 음모였다. 이런 '악몽'의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권력 구조냐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개헌이어야 하는가, 어떤 사회적 합의의 내용이 담겨야 할 내용인가에 대한 논의가 전제 되어야 한다고 다큐는 주장한다. 어떤 권력 구조라는 블랙 홀이 아니라, 누구글 위한 개헌, 이것이 개헌의 진짜 전제 조건이다. 
by meditator 2017. 7. 17. 15:18

비록 1위는 아니지만 sbs의 수목 드라마 <수상한 파트너>는 사극인 <군주>에 이어 2위를 수성하며, 자체 최고 시청률로 종영했다. (9.5%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지하철 치한과 피해자, 검사와 검사 시보, 그리고 변호사와 변호사,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라는 해프닝과 다양한 직업을 오가며 성장하고 사랑하는 두 주인공의 신선한 이야기가 궁금해 작가가 누굴까 하고 혹시나 찾아봤던 사람이라면 권기영이라는 작가의 이름이, 자신이 전에 재밌게 봤던 그 작품들, <너를 기억해>, <내연애의 모든 것>, <보스를 지켜라>의 그 작가와 동일인이라는 사실에 반가움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장르' 드라마가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는 시절, 혹은 '사이코패스'란 말이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시대, 하지만 일찌기 권기영이란 작가가 그것을 시도할 때만 해도 '장르물'이나, 구체적 정신병력을 가진 등장인물은 생소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기에 권기영의 작품은 늘 그 앞서가는 덕분에 '대중적'이기 힘들었고, 그래서 '눈밝은 호청자'들의 관심을 모았다. 




개성강한 남자 주인공
만약에 내가 남자 배우의 팬이라면 아마도 내 배우가 권기영 작품을 한번쯤 하기를 원할 듯하다. 이른바 '대박'은 아니지만, 남자 배우라면 팬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매력적인 캐릭터를 하나 남기는 셈이니. 그렇듯, 권기영의 작품 속 남자 주인공들은 그 어디서도 다시 보지 못할 독특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배우 지성에게 '연기파'란 명예를 안겨준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킬미힐미(2015)>이다. 무려 일곱 명의 다중 인격을 가진 주인공이라니! 하지만, 번듯하고 정의로운 주인공 역할의 단골이었던 지성이란 배우에게 '연기'의 스펙트럼을 열어준 계기가 된 정확한 작품을 꼽으라면, 2011년작 <보스를 지켜라>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거기서 지성은 어린 시절 엄마를 잃어버린 트라우마로 인해 일종의 공황장애라 말할 수 있는 '광장 공포증'을 가진 차지헌으로 등장한다. 물론 차지헌은 그 흔한 로맨틱 코미디(이하 로코)의 주인공 단골인 재벌 2세다. 하지만, 좀 부족하긴 해도, 혹은 가끔가다 신체적 질병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래도 재벌 2세에게 히키코모리일 수 밖에 없는 대인 공포에 발작까지 포함한 '가오'라고는 1도 없는 찌질한 캐릭터를 부여한 것은 신선함을 넘어선 시도였다. 



2013년 정치적 상황이 암울할 당시,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보수정당 남성 국회의원과 진보정당 여성 국회의원의 연애 이야기 <내 연애의 모든 것> 주인공 김수영(신하균 분) 역시 막말 작렬에 결벽증이 극심한 그다지 사랑스럽지 않은 로코의 주인공이었다. 
2015년 <너를 기억해>는 한 술 더 뜬다. 드라마 초반 <셜록>의 분위기를 잔뜩 내며 등장한 이현(서인국 분)은 범죄학 교수 출신으로 뉴욕 경찰 범죄 컨설팅해주던 전력으로 이제 특수범죄 수사팀의 조력자가 된다. 셜록 뺨치게 프로파일링을 하고 사건 현장을 분석하지만, 김수영 저리가라 할 오만함에 독설을 장착, 그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알고보니 니가 사이코패스'일 지도 모를 어린 시절 아버지로 부터 잠재적 살인마란 평가를 받고 감금되었던 '경력(?)의 소유자다. 

그렇게 너무 시대를 앞서갔던 차지헌, 김수영, 이현에 비하면 <수상한 파트너>의 노지욱(지창욱 분)은 제법 멀쩡해 보인다. 물론 검찰 내 평가 꼴찌지만 현직 검사니까. 하지만 권기영이 그저 그런 뻔한 설정에 만족할리가. <너를 기억해>를 통해 '니가 사이코패스냐 내가 사이코패스냐?' 헷갈리며 주인공과 주인공의 동생을 두고 시청자들을 헷갈리게 했던 권기영은 이제 <수상한 파트너>의 절정에서 검사인 노지욱과 연쇄 살인범 동하의 과거 트라우마로 인한, 기억 장애, 그리고 기억 조작을 엇물리며 '기억에의 상흔'을 주목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노지욱이 당시 검사였던 장무영(김홍파 분)에 의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 불면증에 시달렸다면, 역시나 좋아했던 또래 여고생의 죽음에게 무기력한 방관자였던 동하는 자신의 기억을 스스로 조작하여 법망을 피해간 당시 가해자들의 '처단자'로 살인을 저지른다. 

이렇듯 권기영의 남자 주인공들은 늘 너무도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여 막말을 내뱉어 주로 주변과 불화하며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로 인해, '애정'보다는 '의심'을 사기 쉬운 캐릭터들이다. 기존의 한국 드라마보다는 '미드'에서 본듯한 트러블메이커들이다. 그래서 낯설고, 그래서 신선하여 그 캐릭터의 이름으로 호청자들에게는 오래도록 기억되는 그 한 사람이다. 



어쩌면 주인공보다 더 기억에 남을 그 사람, 혹은 그들
<수상한 파트너>에서 두 주인공을 제외하고 가장 크게 기억이 될 한 사람을 꼽자면 아마도 이 드라마를 본 대다수의 시청자들이 연쇄 살인범으로 나왔던 동하 역의 정현수를 꼽을 것이다. 그가 까페 벽에 붙어있던 메모를 이용하여 기억을 천연덕스럽게 만들어 내 법망을 피해가는 장면은 아마도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 못지않은 전율을 주었다. 눈빛 하나, 표정은 더더욱 천연덕스러운 이 이십대 청년이, 자신이 학창 시절 연모했던 소녀를 그리워하다, 다음 순간 자신의 범행에 방해가 되는 그 누구라도 얼굴빛하나 변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리고 너무도 당연하게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그 모습에 이젠 그 뻔하다는 '사이코패스'의 또 다른 유형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 알고보니 자신이 그 범행의 조력자였다는 것을 분노하며 부인하다 깨닫게 되는 '아이러니한 순간'은 아마도 <수상한 파트너>란 드라마의 백미 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동하라는 사이코패스는 <너를 기억해>의 이준호(최원영 분) 앞에서 한 수 배우겠습니다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배우 지성이 <보스를 지켜라>을 통해 연기파의 지평을 넓혀갔듯이, <백년의 유산>을 통해 최원영이란 이름 석자를 알렸던 그에게 역시나 '이런 면'이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건 <너를 기억해>에서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미 <쓰리데이즈>에서 소시오패스 재벌 역을 했던 최원영, 그러나 <너를 기억해>에서 그는 <터널>의 범인처럼 법의학자로 여주인공 차지안의 든든한 조력자로 등장하지만 이현과 정선호(박보검 분) 형제의 어린 시절부터 때로는 그들의 보호자로, 때로는 그들이 가진 '잠재적 범죄 성향'의 보스로서 다양한 얼굴을 매력적으로 표현하여 때로는 주인공보다 더 멋진 '악역'으로 기억을 남긴다. 또한 일찌기 될 성부른 나무였던 박보검의 또 다른 모습 역시 그가 분한 정선호라는 캐릭터를 통해 충분히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권기영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그저 악역'이 없다. 그렇다고 '악역'에 빙의하여, 그의 사연에 천착하지도 않는다. 물론 극의 중심에 악행이 있고, 그 악행의 근원에는 매력적인 악인이 있지만, 전지전능한 심판자연했던 동하가 알고보니 방관자이듯, 최종 보스 사이코패스였던 이준호 역시 어린 시절 학대의 결과물이지만, 결코 그것을 '천착'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매력적인 악역만 있는 것은 아니다. 권기영 속 등장인물들은 그저 그런 뻔한 인물이 하나도 없다. <수상한 파트너>에서는 주인공 두 명과 그 들의 연적, 사무장, 로펌 대표이자 의붓아버지까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극중에서 열심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보스를 지켜라>의 찌질하기 그지없던 재벌가 사람들이 그러했고, <내 연애의 모든 것>에서 주인공보다 때론 더 열렬히 응원하게 되었던 문봉식(공형진 분), 고동숙(김정난 분)의 다이내믹했던 연애 역시 마찬가지다. <너를 기억해>의 허우대만 멀쩡했던 팀장을 비롯한 특수수사 팀원들의 개성강한 모습들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아쉽다면 이렇게 개성강한 남자 주인공들에 비해, <너를 기억해>의 차지안(장나라 분), ,보스를 지켜라>의 노은설(최강희 분), <내 연애의 모든 것>의 노민영(이민정 분), 그리고 <수상한 파트너>의 은봉희(남지현 분)는 묘하게도 다들 하나같이 씩씩하고 형사로서, 국회의원으로, 변호사로 제 몫을 해내지만, 어쩐지 종종 '복제인간'같은 개성강한 남자 주인공에 비해 평범한 캔디형의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늘 범죄와 사랑, 성장과 사랑, 정치와 사랑이라는 두 마리 토끼의 포석을 야심차게 벌여놓은 권기영 작가의 작품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주제로 인해 대중성에서 딜레마를 안는 것과 함께, 이 두 마리의 토끼의 회수에 '고전'한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권기영의 작품을 접하는 건 마치 얼리어답터가 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늘 다음이 더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7. 7. 16. 02:21

영화를 만든 사람이 보여준 행보가 영화적 서사를 넘어섰을 때, 그가 만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어렵다. 특히나, 그 영화가 현실에 그가 봉착한 질문과 연관되어졌을 때. 그런데 영화 <그후>를 보니, 오히려 어쩌면 그런 영화를 만든 이의 행보가, 또 하나의 등장하지 않은 등장인물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담론을 두텁게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 홍상수의 행보로 인해, <그후>의 이야기는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를 넘어선다. 


사랑은 질병과도 같다. 누군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질병이 예고도 없이 우리 몸을 침공하듯이, 사랑도 그러하다. 거기엔 '제도'도, '처지'도, '존재'도 무기력하다. 결국 남겨지는 것은 그 '사랑'에 임하는 자의 '자세'이고, '선택'이다. 자유로운 싱글들이야 '사랑무한주의'겠지만, 만약에 그 '사랑의 질병'에 걸린 존재가 이미 그 누군가의 파트너로 공인된 사람이라면? 



질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진 남자, 그 후 
영화 <그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런 '인간 감정의 불가피성'에 대한 전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게 이른바 최근 지탄받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행보에 대한 '용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질병'에 걸린 '인간'에 대한 질문이라는 것이 정확하다 할 것이다. 일찌기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영화 속 등장인물이었던 유부남 감독의 '바람끼'라 하루 이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늘 홍상수 감독 영화 속 남자들은 여자라면 환장을 했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듯 갖은 해프닝을 벌이며 구질구질하게 굴었다. 그리고 그걸 홍상수 감독은 '인간'이라 정의하곤 했다. 

하지만, 그저 만든 이의 입장에서 바람끼 다분한 남자 인간을 정의하는 것과 이제 그 자신이 스스로 그것을 '실천(?)' 보인 입장에서 그의 주장은 궤를 달리한다. 그래서일까, 그의 실천 이후 그의 이야기들은 '발정'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같은 해프닝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사건'으로 빠져든다. 2016년 김민희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유부남과 사귄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다면, 이제 2017년 <그후>는 그 반대편, 그 '유부남'의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평론가이자 작은 출판사 사장인 봉완(권해효 분)의 뜻하지 않은 사랑, 혹은 바람으로 벌어진 그의 처지로부터 시작된다. 잠도 못이루고, 입맛도 없으며, 달려도 시원하지 않는 그 질병을 그는 그만 아내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그녀도 가정과 자신과의 풋사랑을 놓지 않는 그의 '비겁한' 행보에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출판사의 직원으로 등장한 아름(김민희 분). 그녀와의 첫 식사 자리는 뜻하지 않은 '실존적 논쟁'으로 이어진다. 

왜 사느냐고 묻는 당돌한 아름, 그런 그녀에게 봉완은 그 질문 자체를 부정한다. 세상의 삶이란 실체를 몇 마디의 말로 정의내릴 수 있냐고. 그런 그에게 아름은 그런 정의의 회피가 또 하나의 비겁함 아니겠냐고 반박한다. 장황한 두 사람의 논쟁, 이 장면은 하지만 상징적이다. 아름의 구구절절 몇 가지 존재의 정의를 차치하고, 그 삶의 실체에 대한 정의는 곧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결혼이라던가, 가정이라던가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왜 결혼을 하는가. 그리고 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가. 결혼을 할 당시에는 그 분명한 것같은 결정과 선택이 살아가는 해를 거듭할 수록 불명확해지고 모호해진다. 아니, 봉완이 답을 애써 피하듯, 오히려 답을 말하고 나면 낯부끄러워지는 상황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아니, 몇 마디의 정의로 퉁치기엔 이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유는 너무도 다양하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답을 피해간 봉완은, 그가 맞닦뜨린 상황에서도 그렇다. 당신 바람피니? 라는 아내의 질문에 대해서도, 비겁하다며 그의 곁을 떠나간 출판사 여직원에 대해서도, 그는 하냥 그 상황의 바깥에 서있다. 심지어 돌아온 그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다시 안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내쫓고, 그녀의 뜻대로 아름을 이용하는 그 상황에 그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출판사에 쳐들어온 아내에게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아니야'다. 그녀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 포옹을 하던 그 유일한 적극적 행위 외에 봉완의 태도는 늘 수동적이고 자기 보호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늘 홍상수 영화 속 남자들이 대부분 그래왔듯이 편의적이다. 

뜻밖에도 그런 봉완이 적극적이었던 지점은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온 아름과의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돌아온 출판사 직원의 책략대로 아름을 핑계로 양 다리를 자연스럽게 하려고 들어갔던 가정에서 봉완은 뛰쳐나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 한동안 지냈단다. 하지만, 늦은 시간 아내가 딸 아이를 잘 차려 입히고 찾아오자, 봉완은 뒤도 안돌아보고 가정을 택하고, 그의 사랑인지 바람인지는 거기서 마무리된다. 다시 찾아온 아름은 봉완이 한결 편해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자 봉완은 그렇게 자신이 풋사랑이 마무리되자, 마치 보상처럼 상도 받았다며 헛헛하게 말한다. 편해진 남자, 그가 겪은 '사랑'의 질병을 영화는 그렇게 표현한다. 

영화 그 이상의 질문, 홍상수 
하지만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런 봉완의 결정으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 속 주인공인 봉완이 그 잠시의 사랑을 '바람'으로 마무리한 것과 달리, 감독 홍상수는 다른 결정을 내렸으니까. 오히려 영화의 질문은 거기서 시작된다. 감독 홍상수가 내린 결정과 영화 속 주인공 봉완의 결정 사이에서. 심지어 홍상수 감독도 봉완과 다른 결정을 내렸음에도 상도 받았다.(물론 여주인공이었던 김민희가 받은 상이지만) 하지만 그 상이 무색하게 그와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욕'을 먹는다. 다른 선택이 낳은 다른 결과다. 



영화 속 봉완은 이제는 편하게 '가정'을 위해 살아갈 거라고 말한다. 그 봉완의 말은, 어쩌면 홍상수 감독이 그런 편한 종결점으로 가는 여정 속에 있다는 말일 수도 있다. 혹은, 마치 늙으막 노인정에서 사랑을 위해서는 머리끄댕이 잡기를 마다하지 않은  그 상황처럼 아이도 다 성장한 내 인생 마지막의 사랑을 위한 장렬한 최후의 헌신이라는 자기 변명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다. 혹은 영화 속 아직 어린 딸아이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던 봉완은 젊은 날 홍상수 감독일 수도. 마치 자신들을 부도덕하다 손가락질하는 세상을 위한 서비스 컷처럼 출판사에 찾아온 아내에 의해 아름으로 분한 김민희에게 퍼부어진 통렬한 따귀 세례처럼 영화 <그후> 자체가 홍상수 감독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 자기 자신에게 준 '따귀'세례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 반대로 제도로서의 결혼, 자신보다는 가정을 위한 희생 대신, 여전히 자신을 놓을 수 없는 자기 중심적인 감독의 숨겨진 변호일 수도 있겠다. 어쨋든 관객들은 <그후>를 통해 감독과 다른 이율배반적인 영화적 서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의 갈래를 펼쳐나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영화 <그 후>가 서있는 곳이다. 

이 모든 가능태로서의 생각들을 통해, 마음이 열어 도달하는 곳은 다시 처음,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이다. 존재하지만 쉬이 답할 수 없는, 제도로서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하지만 변덕스러운 인간을 다 품어낼 수 없는 아이러니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한. 구구절절 변명 대신, 가능할 수 있는 수많은 질문을 품고 돌아온 홍상수는 그래서, 그가 내린 부도덕한 결정과 달리, 여전히 그가 해왔던 수많은 작품들처럼 유의미하다.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실존적으로 터놓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희귀한 감독으로서 말이다. 

by meditator 2017. 7. 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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