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가 시작되자 등장한 것은 한 마리의 병아리, 아니 달걀, 이제 막 그 속에서 검은 병아리 한 마리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를 쓴다. 정지된 화면 안에서 달걀 한 알이 갓 태어난 병아리로 변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고투다. 이렇게 <sbs스페셜- 알을 깨다>는 정말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병아리를 통해 마흔까지의 직장인의 삶을 거하고, 이제 철부지 50대에 도달한 미즈노 마사유키의 삶을 상징한다. 


새는 알을 깨기 위해 발버둥 친다. 알은 하나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만 한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



미즈노 마사유키, 그 인생의 황금기
흔히 오십 줄에 든 사람들에게 당신 인생의 황금기가 언제였냐고 질문하면 꽃다운 20대 청춘 시절이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아직 세상 그 어느 곳에도 구속되지 않았던 그 시절,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가능성을 품었던 그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여기 그런 일반적인 대답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가 있다. 바로 미즈노 마사유키, 그는 말한다. 50, 이제부터가 황금기의 시작이라고. 그런데 전북 김제에 자리잡은 그의 집, 그 집에서 살아가는 그의 삶을 살펴보노라면, 그런 그의 장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도 남들처럼 살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에서 컴퓨터로 설계일을 하며 살던 그, 좋은 아파트, 좋은 차, 그리고 가족들의 풍족한 생활, 그런 것들이 그의 삶을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다. 일주일 정도 걸릴 일을 삼, 사일에 해치우기 위해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시절, 어느 날 문득 창 밖을 보니 보도의 틈 위에 민들레가 자라고 있었다. 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살던 시절, 그 봄의 전령을 보고 미즈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행복한가?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 이렇게 자신을 소모하고 있는가? 라고. 

어린 시절 미즈노는 풀과 벌레를 좋아하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어느덧 어른이 된 미즈노는, 그 어린 시절의 꿈을 잊었다. 대개의 어른들이라면, 나이가 든다는 게 그런 거지하고 넘어갔으련만, 미즈노는 달랐다. 지금까지 해오던 모든 것을 접어두고, 아내의 고향 전북 김제로 다섯 아이를 끌고 갔다. 그리고 이제 아내가 일을 나간 집에서 그는 기르고 싶던 머리도 기르고, 커피를 내려 마시며, 온 동네 버려진 물건을 집어다 뚝딱뚝딱 무언가를 만들고, 아홉살 딸내미의 가장 친근한 벗이 되어 지낸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하루의 일과가 끝난 후 그가 만든 네온이 은은하게 빛나는 바에서 재즈를 들으며 막걸리 한 잔에 치즈을 입에 넣을 때. 



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
집 앞 30년된 나무와, 100년된 나무 사이에 층층이 건들건들 매어달린 나무집, 4년 동안 지은 이 나무집이 그가 보낸 '철부지 세월'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단지 이 나무집만일까? 다큐는 직장인 미즈노가 철부지 50살 소년이 된 그 과정을 설명하는 대신, 그와 그의 자녀들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다큐가 시작하자 마자 미즈노의 상징으로 등장했던 '오늘 탄생한 검은 병아리 한 마리'는 BJ가 꿈인 막내 딸의 첫 방송 초대 손님이 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야무지게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제치는 아빠의 손을 빌어 집까지 만들어 줬는데, '러브 하우스' 하모니가 끝나기도 전에, 막내딸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어미 고양이가 단박에 나꿔채버렸다. 허겁지겁 고양이의 입을 벌려 구출 작전을 시도해 보지만 오늘 태어난 생명에게 새끼를 난 어미 고양이의 허기진 입은 가혹했다. 

죽은 병아리를 손 위에 놓고 망연자실해 하는 아홉 살 난 딸에게 아빠 미즈노는 담담하게 말한다. 새끼를 네 마리나 낳은 어미 고양이는 배가 고팠을 것이라고. 우리가 방심했다고. 하지만 네가 어떤 결론을 내릴 지는 너의 몫이라고. 흔히 이런 상황에서 부모들이 하는 귀여운 병아리를 죽인 고양이가 나쁘다던가 하는 선입견에서 아빠 미즈노는 한발 물러선다. 

미즈노네 집은 매사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있는 미즈노네 아침, 하지만 아무도 학교 가라, 아침 먹어라 독촉하는 사람이 없다. 아이들은 저마다 알아서 때가 되면 일어나고,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다 학교로 간다. 엄마 역시 자신의 출근 준비에 바쁘다. 사진과에 다니다 잠시 휴학을 하고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딸에게도 마찬가지다. 미즈노는 말한다. 부모로써 그 짐을 조금 덜어주곤 싶지만, 그러나 딸의 인생은 딸의 것, 그런 아빠, 엄마가 지킨 경계선에서 미즈노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길을 물어 스스로 답을 얻는다. 

아홉살 난 딸은 병아리의 죽음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고양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미 아홉 살이지만 병아리의 죽음을 통해 인생의 한 단면을 이해한다. 스무 살이 넘은 딸은 스스로 새로운 자신을 향한 길을 찾아 아버지의 도움없이 라오스로 떠났다. 마흔 살 창 밖의 민들레를 보고 전북 김제로 향하기 까지 2년 아마도 미즈노도 그랬을 것이라는 것을 그와 딸들의 관계를 통해 짚어보게 된다. 풍족한 삶 대신, 때로는 득도한 스님처럼, 때로는 소년처럼 꿈꾸는 것을 미루지 않고 지금 당장 찾아서 즐기는 그의 삶은 마치 잠시 도원에 든 나무꾼의 일장춘몽과도 같다. 

하지만 미즈노는 말한다. '마흔까지 가족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며 일벌레로 살아왔다. 하지만 어느 날 보니, 가족은 행복할 지 모르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선후를 바꿨다. 그러고 나니 나도 행복하고, 가족도 또한 행복해 졌다' 이건 미즈노가 도달한 결론이고, 다큐는 보는 우리에게 던진 질문이다. 병아리가 깨고 나온 알 껍질을 들고, 미즈노는 말한다. 알은 병아리를 보호해주지만, 그러나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 알은 장애라고. 그렇게 어렵사리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는 하지만 태어난 첫날 고양이에게 물려죽었다. 다큐는 그럴 듯한 미즈노의 트리집과 그 자녀들의 이상적인 관계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 각자의 삶을 버거워 하며 이겨내는 알을 깨는 과정은 복선처럼 깔려있다. 병아리의 죽음이 아홉살 소녀에게 화두가 되듯, 저마다 삶의 화두를 붙잡고 가야한다는 것을 철부지 50세 소년은 초연하게 웃으며 받아들인다. 




<나는 자연인이다>의 <SBS스페셜> 버전같았던 <알을 깨다>는 하지만, 가족, 사회와 괴리된 채 자연을 벗삼던 자연인들과 다르다. 50살 철부지라며 스스로 하염없이 선한 웃음을 날리는 아버지에게, 스무 살이 넘는 딸은 영원토록 철들지 않기를 소원한다. 아홉 살 딸에게는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자, 경계를 넘지않는 든든한 멘토이다. 이제 남편 대신 돈을 벌러가는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삶의 행보에 신중한 남편이 믿음직스럽다. 나무 위에 지은 꿈의 공장같은 트리 하우스는 그저 미즈노의 자기 만족을 넘어, 새로운 일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퇴사하겠습니다>, <성신제의 달콤한 인생>, <회사를 바꾼 괴짜 사장>에 이은 <알을 깨다>는 욜로 라이프(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주제로 꿰어질 수 있다. 이제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사회, 인간성을 극한까지 밀어부치는 경쟁 사회에서, 이 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창되고 있는 욜로 라이프, 그 범주 안에서 다큐는 새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평범한 회사원이라는 알을 깨고 나온 미즈노의 즐거운 인생 역시 이 시대의 또 한 편의 새로운 선택지로 제시된다.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죽은 병아리를 들고 황망해 하는 딸에게 네가 고민하고 선택한다고 말하듯, sbs 스페셜 역시 마찬가지다. 이 시대, 당신이 살아갈 한번 뿐인 삶을 누리는 이런 방식도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지는 당신의 선택이라고. 


by meditator 2017. 7. 31. 15:09

15회, 드디어 첫 회 박무성의 살해 사건으로 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음모'의 배후가 비로소 드러났다. 하지만, 드디어 배후가 밝혀졌다는 통쾌함도 잠시, 그 배후는 16회가 시작하자마자 스스로 몸을 던졌다. 선배라는 말이 좋다는 이창준은, 마치 그것마저도 '결자해지'라는 듯, '밥 한 끼'로 시작되었던 그 '적폐'의 대가를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그 해결의 젯밥으로 던지며 생을 마무리했다. 괴물이 되어버린 그와, 그런 그가 만든 토양 속에서 자라 그가 남긴 것들을 법대로 처리할 황시목이 그 방식을 두고 '설전'조차 제대로 벌이지 못한 채 당혹감과 후일담 속에서 깊은 여운과 물음을 남긴 채 드라마는 마무리되었다. 




법 앞에 선 사람들
이창준(유재명 분)이 시작하고, 스스로 마무리한 듯이 보인 비밀에 쌓였던 숲의 거사는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영일재(이호재 분)로 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가장 강직했던 법관, 그래서 후배들의 본보기가 되었던 그가 대한민국 경제의 30%를 책임진다는 재벌 '한조'의 불법 재상 증여에 대해 손을 대려고 하자, 장관이던 그는 하루 아침에 불법적으로 자금을 받은 죄인이 되어 법 앞에 끌려나왔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영일재는 '가족의 안녕'을 대가로 '전직 비리 장관'이 되어 '침묵'을 택했다.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적폐 앞에 개인 영일재는 무기력했고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후배들은 목도했다. 가장 강직한 그의 후배였지만 이제 재벌가의 사위가 된 이창준은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연수원의 새싹 검사 황시목(조승우 분)은 물론 그에게 배웠던 검사들은 존경하던 스승님의 몰락을 잊지않았다. <비밀의 숲> 내내 되새기고 또 되새겼던 영일재의 몰락,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다. 

영일재의 시작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창준이 남긴 유서의 첫 마디, '대한민국이 썪어가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극단에서 법의 저울을 든 이들은 정권의 '가이드라인'이나 지키는 하수인이 되어가는 상황에 대한 뼈저린 자각으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으로 영일재는 무기력했다. 



그런 스승의 몰락을 배웠던 이창준, 적당히 썪었다면 가진 것을 누리고 살고 싶었던 그였지만,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 앞서 몰락한 선배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괴물'이 되었다. 법의 저울을 쥔 사람이, 기꺼이 '살인을 교사'하고 '납치를 지시'하며, 불법 도청과 녹음을 감행하고, 끝내 자신을 재벌의 개로써 낙인찍어 재벌을 옭죄는 증거가 스스로 되었다. 기꺼이 무너진 시스템을 복구시킬 '젯밥'으로 자신의 피를 뿌릴 각오를 했고, 그걸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피의 제물이 되고자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힌 이창준이 펼쳐놓은 그물에 후배 강원철과 더 어린 후배 황시목이 걸어들어왔다. 설계는 그가 했지만, 이들은 스스로 걸어들어왔다. 한직으로 밀려나면서도 증거 수집을 포기하지 않았던 강원철, 그리고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수 없더 '괴물'이라 손가락질하는 자신이 기대어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방식을 '법'이라 선택한 황시목, 그들은 오래오래 자신들을 기다린 이창준의 퍼즐을 맞출 결정적 인물로 스스로 간택당한다. 

그렇게 이제 그 누구도 공감할 대한민국, 적폐의 사회, 그 폐부에 감히 도전하는 법의 삼대, 혹은 사대는 이렇게 도전하고 깨지고, 피흘리며 겨우 저들을 법의 심판 앞에 끌어다 앉혔다. 영일재, 이창준, 그리고 강원철, 황시목, 그들의 실패와 성취는 어쩌면 선택과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청산'의 역사라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마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영일재가 틀리고, 이창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도로를 밟고 이제 황시목이 기꺼이 적페 청산의 땔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무가 아닌 법의 숲을 그렸던 드라마
더위가 몰려올 무렵 찬 겨울 공기를 몰고왔던 드라마, 그리고 그 찬 공기만큼이나 우리의 답답한 가슴에 서늘한 의문과 함께, 그 보다 더 속시원한 황시목, 한여진 등을 사이다처럼 선사해준 드라마, <비밀의 숲>

주인공의 이름은 황시목, 한자로 땔나무(땔나무 시柴 나무 목木), 그리고 그는 정말 땔나무처럼 기꺼이 '한조'라는 재벌로 시작되어 우리 사회 곳곳에 암세포처럼 퍼져나간 부정부패의 뿌리를 끊어냈다. 하지만 그런 땔나무 시목을 위해서는 영일재와 이창준의 전사가 필요했다. 

<비밀의 숲>이 빼어난 이유는 바로 '자신의 직무'에 엄정하고 헌신적인 '프로페셔녈'한 존재들의 활약상을 그려냈다는 점이다. 흔히 장르물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검사'나 '형사'들, 하지만 부정부패가 시스템화된 시대에 이들의 '정의'를 설득하기 위해 곧잘, 그들을 '피해의 당사자'이자, 정의의 사도로 그려왔다. <피고인(sbs)>이 그랬고, <시그널(tvn)>이 그랬다. 

물론 <비밀의 숲>에서도 그런 당사자들이자, 그래서 물불 가리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자신을 던진 영은수 검사(신혜선 분)나 윤세원 과장(이규형 분)도 있었지만, 결국 드라마는 마치 '검사' 혹은 형사라는 '공공재'여야 할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에 대해 묻는다. 촛불 정국을 통해 밝혀들어가며 드러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의 참상은 몇몇 권력을 쥔 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시스템으로 만들어 주며 거기에 복무한 수많은 '공공재'들의 문제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사전 제작된 <비밀의 숲>은 눈밝게 그 지점을 포착한다. 



민주주의의 시초가 청교도적인 부르조아 체제를 기반으로 융성했듯, 헌법을 근간으로 하여 건강한 법질서를 근간으로 설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기 위해서는 공공의 자리에 있는 각자의 제 몫의 일을 해내야 한다는 것을 드라마는 역설한다. 자기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도모했던 영일재 장관에서 참담한 존속의 상실이 도래한 것이며, 자신이 한번 눈감은 결과가 결국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을 좀먹는 거미줄같은 적폐가 되어 스스로의 피로써만이 그걸 저지할 수 있었던 이창준의 역설이 그걸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앞서간 선배들의 실패를 이제 후배 황시목, 한여진 등은 가장 프로페셔널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써 다가간다. 그들의 정의는, 그들의 직업적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이 평범한 원리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가진 시스템의 붕괴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해답이다. 물론 그건 쉽지 않다. 마지막 회 최근 국정 농단의 주범들의 재판 형량과 이창준이 유서에서 언급한 가난으로 인해 죄를 지은 이들의 형량 비교가 인터넷에 떠돌듯, 어렵사리 법정으로 끌고 간 그들의 형량은 죄질에 비해 가벼웠고, 그 마저도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조만만 세상의 빛을 볼 것이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던 서동재와 같은 이들은 다시 원래의 방식대로 살아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한여진의 말처럼, '선택을 빙자한 침묵'에 거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면 조금 더 나은 세상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피해를 당한 당사자가 아니라, 특별한 정의감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당신들이 바로 황시목이고, 한여진이어야 한다'며  주어진 숙제처럼 드라마는 주제를 내보인다. 



박무성의 죽음으로 시작하여 이창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 <비밀의 숲>은 장르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 대부분 장르 드라마들이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전체적으로 굵직한 하나의 사건을 깔고 매회 소소한 사건들을 터트리며 극의 엔진을 삼는 것과 달리, <비밀의 숲>은 결국 오직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16부의 장정을 달려왔다. 뿐만 아니라, 사전 제작이었던 이 드라마는 조급하게 시청자의 시선을 잡기 위한 자극적이거나 인스턴트같은 잔꾀를 부리지 않았다. 겨울의 공기처럼 차갑게 이성적으로, 조금은 느리더라도 차분하게 사건의 본질을 향해 시청자와 함께 고민하며 뚜벅뚜벅 걸어들어갔다. 늘상 소리치고 절규하고 터트리는 장르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겐 무감정해서 오히려 신뢰가 갔던 황시목이라는 캐릭터만큼  신세계였고, 그래서 말없이 고뇌하는 황시목과 함께 고민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각하는 드라마'에 환호했다. 

입봉 임에도 드라마 사에 한 획을 그은 이수연 작가, 숨은 보석이었던 안길호 피디, 그리고 말을 덧붙여봐야 입이 아픈 조승우, 배두나, 그리고 무엇보다 이분이 동룡이 아빠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젠 밑겨지지 않은 유재명 배우, 그가 살해범이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던 이규형 배우, 그 누구보다 안타까웠던 신혜선, 끝까지 변치않아 오히려 좋았던 이준혁 등등, 등장했던 그 모두가 드라마의 개연성이자, 감동이 되었던 제작진으로 인해, <비밀의 숲>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그래서 당연히 시즌2를 소원하게 되는 드라마로 남았다. 
by meditator 2017. 7. 31. 12:57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