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울 것이 없는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 그 '므흣'한 설정이 알콩달콩하게 풀어내지던 영화가 중반 이후, 그 설정의 비밀을 풀어가기 시작하면서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리고 결국 영화의 클라이막스 '사라짐'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현재와 과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참았던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눈물을 쏟게만든 건 에니메이션이었지만, 그리고 그 에니메이션이 있도록 만든 건 타국의 재난이었지만, 결국 내 눈물의 의미는 지금 현재 여전히 우리 땅에서 풀어내지 못한 '세월호'라는 그 날의 슬픔때문이다. 이국의 재난 영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물밀듯이 끌어올리고 만다. 천 일 여전히 학부모들을, 그리고 힘들게 생존 학생들을 차가운 거리로 불러모으고 있는 것은 바로 <너의 이름은>이 하고 있는 그것때문이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홍보 기간 중에 배려없는 아저씨의 행태로 물의를 빚는 바람에 배우 김윤석의 홍보는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런 아쉬운 행보에 묻힌 것 중에 그의 진심어린 한 마디도 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윤석은 답한다. 2014년으로 돌아가 '타지 마라, 그 배에 타지 마라'라고 할 것이라고. 이 간단 명료한 소망, 그 소망을 <너의 이름은>은 들어준다.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와 <너의 이름은>은 똑같이 과거로 돌아가 죽음에 이른 연인을 구하는 드라마이다. 심지어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는 우리나라에서 인기있는 기욤 뮈소의 동명 원작 소설의 리메이크로 익숙한 서사다. 하지만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와 달리, <너의 이름은>은 정유년 새해 벽두부터 블록버스터 급 한국 영화들을 밀어내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청춘 로맨스로부터 환타지 재난 블록버스터로 
무엇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풋풋한 청춘 남녀의 성 바꾸기로 시작된 '청춘 로맨스'의 외양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흔한 성 바꾸기의 설정조차도 <너의 이름은> 버전이 되면 신선하고 새로워진다. 이야기의 테이프를 끊은 것은 시골 마을의 미츠하. 신사 의식과 개발이라는 발전과 전통의 과도기를 겪고 있는 시골 마을, 어머니가 죽은 후 집을 떠난 아버지 대신 신사 의식을 수행하며 도시에의 꿈을 품고 사는 소녀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사건으로 영화는 서두를 뗀다. 

영화는 미츠하의 시선으로 시작하며, 관객을 오롯이 미츠하와 미츠하가 사는 마을, 시간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 시선은 일종의 트릭이자, <너의 이름은>의 후반부 감동을 가져오는 주요한 장치가 된다. 관객들은 타키와 함께 '현재'에 존재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시공간의 개념을 제시하지 않은 채 대뜸 미츠하에게 벌어진 이상한 해프닝과 함께 이 소녀가 사는 시공간으로 관객을 흡인하면서 이후 벌어질 사건의 중심에 관객들을 놓이게 만든다. 

그저 미츠하에게, 그리고 타키에게 벌어진 이상한 일, 두 청춘 남녀에게 벌어진 '므흣'한 해프닝에 정신없이 흐뭇하게 빠져들던 관객들, 하지만 그저 도쿄와 외진 시골 마을의 공간적 격차가 벌이는 해프닝인 줄 알았던 에피소드가 중반 그 비밀의 열쇠가 풀어지며 거기에 '시간'의 격차가 더해짐을 깨달으며 충격에 빠진다.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소녀와 소녀 동네 사람들이 알고보니 '과거'의 역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 그 충격은 영화 속 타키의 충격과 그리 다르지 않는다. 


왜? 이미 영화 초반부터 우리는 미츠하와 그녀의 동네를 동시대의 삶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어린 나리에 고사리 손으로 매듭을 만들고, 신사의 제례 행사를 받들고, 동급생의 조소를 이겨내며 씹던 쌀을 뱉어 술을 빚는 등의 미츠하가 살았던 시대를 따라잡지 못한 거 같던 유물의 삶이, 그리고 이제 막 청소년들에 들어선 미츠하가 타키와의 해프닝을 통해 때론 당황하고 설레이던 그 청춘의 열기를, 그리고 소소하게 일상을 메워가는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의 삶이. 그 모든 일상과 꿈, 그리고 갈등조차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구절절 설명한 상실, 설득한 상실이 아니라, 짧은 시간이지만 영화를 통해 공유했던 시간을 관객조차 잃어버리게 만드는 설정을 통해 <너의 이름은>은 '상실'의 상처를 드러낸다. 

상실의 공유, 상실의 환기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설정하고 있는 상실은 동일본 대지진의 상흔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너무도 생생하게 전해지는 그 상실의 감정에서 이곳에서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피해갈 수 없이 우리 시대의 숙제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그렇게 영화는 '상실'을 말한다. 그리고 그 상실이 '역사' 혹은 '사건'의 저편으로 잊혀질 수 없는 동시대성을 불러낸다.

그리고 애초에 미츠하와 타키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몸이 바뀌는 환타지답게 '사실'을 알아버린타키는 시간을 돌이키기 위하여 죽음의 강조차 건너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던진다. 마치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행을 감행하듯. 물론 타키의 헌신만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다. 타키가 자신을 던지듯, 시간 속의 미츠하 역시 '난 안되는 걸까?'라는 소극적인 자아를 딛고, 마을을 구해낸다. 두 소년 소녀가 소극적이고 수동적이며 방관자적이었던 자신을 던지고, 보다 적극적인 자아로 한 단계 성장하는 통과 의례와 함께, 역사속 사건이 되었던 마을은 '현재'로 돌아온다. 



물론 환타지인 만큼 영화를 보고, 우리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 환타지를 넘어, <너의 이름은>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린 것인가를 명확하게 상기시킨다. 남의 일, 다른 시간, 다른 곳이 아니라, 그것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면 나와 관계를 맺을, 같은 공간의 '소중한 인연'임을 상기시킨다. 애써 주장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공존의 울림은 강하고, 상실의 아픔은 진해진다. 우리 무속 신앙 중에 바다에서 죽은 이를 보내는 신례 중에 넋 건지기라는 방식이 있다. 죽은 이의 바다에 가서 죽은 이의가 사용하던 그릇에 끈을 연결하여 혼을 불러내 억울함을 풀어주고 저승으로 편히 보내주는 방식이다. <너의 이름은>은 흡사 그 무속과도 같다. 과거의 미츠하와 타키가 연결된 끈, 그 끈을 통해 타키는 억울하게 죽을 뻔한 미츠하를 불러내고, 결국 억울한 죽음에서 건져냈다는. 그 의식은 죽은 자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동시에, 산자의 가슴 속 상실의 고통도 풀어낸다. 아마도 <너의 이름은>이 흥행을 이어가는 것은 저 무속의 넋건지기 의식처럼 청춘 로맨스를 넘어, 우리 시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억울한 죽음의 상흔을 불러내어 위무했기 때문이 아닐까. 


by meditator 2017. 1. 9. 16:14

지난 연말부터 이광수는 주말 밤마다 바빴다(?) 12월 24일 종영한 <안투라지>에서는 주인공의 사촌 형, 카메라 울렁증을 가진 만년 조역 연예인으로, 그리고 이제 1월 6일 종영한 <마음의 소리>에서는 만년 백수 웹툰 작가 지망생 조석으로 분했다. 서로 다른 채널, 다른 장르의 드라마지만, 첫 회부터 맨몸으로 목욕탕에서 열연했던 <안투라지>나, 마지막 회까지 나체바람으로 거실을 활보하던 <마음의 소리> 조석은 이광수하면 떠오르는 예의 캐릭터와 그리 다르지 않은 캐릭터들이다. 순수하지만 사회적응력은 조금 떨어지고, 열심히 하려하지만 세상의 코드와 맞지않아 늘 보는 사람에게 안타까운 웃음을 짓게 만드는. 하지만 그리 다르지 않은 캐릭터로 출연했던 두 작품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온도차가 크다. 



<안투라지>와 <마음의 소리>, 그 다른 행보 
심지어 미국 HBO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안투라지>를 리메이크하고, 화제 웹툰이었던 <마음의 소리>를 드라마화한다며 방송 되기 전부터 그 출연 캐릭터들이 화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두 작품의 화제성은 방영 전부터 대단했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자, <안투라지>는 첫 방 시청률이 최고 시청률이 되고만다.(2.264% 닐슨 코리아) <안투라지>와 달리 <마음의 소리>는 비록 금요일 밤을 달군 예능들에는 못미치는 성적이지만(4.7% 닐슨 코리아) 전작이었던 <언니들의 슬램 덩크>못지 않은 시청률에 무엇보다 웹 동시 방영 작품으로 최단 시간 네이버 조회수 100만 돌파에, 3천 6백만 뷰를 넘기며 웹드라마 전체 조회수 1위, 한한령에도 불구하고 중국 웹 조회수 1억뷰를 넘기는 기록을 갱신하는 놀라운 성과를 내며 '성공작'으로 평가받는다. 

똑같은 리메이크작임에도 무엇이 두 작품의 행로를 갈랐을까? 첫 방송부터 알몸 열연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똑같았던 두 작품이었지만 결국 그 행보를 가른 것은 '리메이크' 운용의 묘였다. 미국 케이블 드라마의 선정성을 한국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옮겨온 <안투라지>는 성인용 드라마의 표방을 우리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농담과 욕설를 통해 풀어내며 비호감을 자처했다. 따지고 보면 삶의 민낯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은 <마음의 소리>는 그 배경을 가족, 그리고 가족이란 테두리에서 살다보면 그 누구라도 공감할 가족들의 '찌질한' 속내,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가족애를 시트콤 형식으로 그려내며 똑같은 이광수 임에도 호감과 비호감으로 그 길을 달리하게 만들었다. 



<마음의 소리> 그 흥행의 배경
그러나 어쩌면 이런 평가에 대해 <안투라지> 제작진은 억울할 수도 있겠다. 비록 인기 미드이지만 대중적 접근성이 떨어지는 미국 케이블 채널 작품과 이미 그 만화가 조석의 이름 두 자가 명망성을 충분히 얻었던 인기 웹툰 <마음의 소리>를 절대 비교한다는 자체가 어불설성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듯 <마음의 소리>는 이미 확보된 대중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시트콤 <마음의 소리>를 그것만으로 또 퉁치기엔 아깝다. 드라마화 하는 과정에서 웹툰 그 이상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캐릭터 구현에서 시트콤 <마음의 소리>는 성공적이었다. 웹툰 <마음의 소리>가 작품화된다고 했을 때 관심을 끌었던 등장인물들은 배역의 선정에서 '절묘하다'는 찬사를 이미 받았고, 방송 중 빈번하게 등장하는 웹툰과의 이질감조차 느낄 수 없는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다수의 작품에서 잔인한 악역으로 등장했던 김병옥 배우의 전작 캐릭터를 활용한 쉰(50) 세계나, 어머니 역 김미경 배우의 숨은 매력을 아낌없이 발휘하게 했던 2부에서 보듯 배우의 장점을 유감없이 살려냈다. 

무엇보다 이미 <하이킥> 시리즈에서 검증되었듯이, 가족,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권위도 무색하고, 논리 따윈 없는 먹고 자고 싸며 끊임없는 갈등을 조성하고, 그렇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무장해제되는 인간 공동체 기본 단위의 민낯은 공중파 시트콤의 가장 어울리는 소재였다. 마지막 회 웹툰 작가로 성공한 조석이 세상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주었던 작품 그 자체였던 개그 가족에 감사하듯, 누구나 되돌아 보면 '우리 가족 참 웃겨'라는 공감대를 가질 수 있는 익숙하고 친숙한 소재를 들고 온 것이 <마음의 소리>성공의 관건이었다. 



덕분에 결국 시청률이라는 늪을 헤쳐나오지 못해 각 방송사에서 고사되고만 '시트콤'이라는 장르가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몇 년만에 <복면 가왕>에 등장한 최민용이 연일 검색어에 오르내리듯 한때는 가장 인기있는 주중 작품이었던 시트콤이 공중파에서 그 설 자리를 잃고, 케이블에서조차 발을 내밀지 못하게 된 것은 결국 그 '시청률' 때문이었다. 비록 <마음의 소리>가 양 방송사의 터줏대감이 된 금요 예능의 벽을 뚫진 못했지만, 전작의 예능보다 그리 나쁘지 않은 시청률을 선방했다는 점에서 밤 11시 프로그램 대의 가능성을 연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애초에 시청률 자체의 무용론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시청률에 의존하지 않고 웹 드라마와 공중파 드라마 양수 겸장의 방식으로 시트콤 부진을 뚫고 나간 전략은 시트콤 부진의 활로를 뚫은것이라 볼 수도 있다. 특히 웹상 접근성이 좋을 짤막한 에피소드 중심의 스토리 라인, 그 스토리 라인 몇 개를 다시 모아 한 회분 시트콤으로 편성한 방식도 지혜로운 운영의 묘라 할 수 있겠다. 덕분에 몇 년만에 돌아온 시트콤이 <마음의 소리>를 통해 가능성을 열었다. <마음의 소리> 2, 혹은 또 다른 운용의 묘를 가진 시트콤의 귀환이 덕분에 기대된다
by meditator 2017. 1. 7. 12:12

728회 mbc 스페셜의 신년 첫 방송분은 < 나 혼자 '먹고' 산다>이다. <나 혼자 산다>의 다큐편일까? 왜 신년 벽두부터 혼자 사는 이야기를 다루었을까? 다 이유가 있다. 


거리에 '집' 미니어처를 만들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이 집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살 꺼 같냐고? 그래도 세상이 많이 변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식구가 많이 줄었으니 하면서, 두 명이나 세 명을 미이어처 집의 가족으로 셈한다. 여전히 사람들의 머릿 속에 '집'에는 '가족'이 사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tv만 틀면 나오는 드라마들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대가족이 등장한다.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한데 살면서 세대 간 갈등과 화해가 대부분 '가족' 드라마들의 주 내용이다. 여전히 '가족'이 대세인 양 하는 대한민국, 하지만 실상은 대한민국 가족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제 1인 가족이다. 520만 1인 가족 시대 어느덧 우리는 인생의 과정에서 젊은 시절 교육과 구직을 위해서 부터 시작하여, 이혼, 사별 등의 이유로 노년에 이르기까지 한번 그 이상 홀로 사는 시기를 '필연적'으로 경과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여전히 사회는 1인 이상의 다인 가족을 사회의 기본 단위로 작동하는데, 대세가 되어버린 1인 가구, 이 언밸러스한 사회 구성이 낳은 문제를 신년 벽두의 mbc 스페셜은 '한 끼'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래에 알약 하나로 식사를 대신하는 날이 온다면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거예요” - 혼자 살기 5년 차 돌싱남 김성현

홀로 때우는 한 끼
'혼밥'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이와 관련된 내용의 드라마가 만들어 질 정도로 홀로 먹는 한 끼가 낯설지 않은 시대,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주말 부부 6년차인 강대문씨는 가족과 함께 하는 식사에서는 바베큐 장인 포스를 지녔지만, 정작 홀로 돌아온 그의 숙소에서 그의 한끼는 맥주 한 캔과 약간의 견과류 안주이다. 그의 싱크대를 채운 것은 3분 즉석밥들. 그만이 아니다. 다큐가 따라간 1인 가구, 다수의 1인 가구들에게 식사란 한 끼 '때우는 것'이다. 라면 등의 인스턴트 식, 편의점 도시락이나, 시켜먹는 경우가 대부분인 1인 가구들, 홀로 음식을 해먹으려 장을 봐놨다가 버리는게 더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이들은 어느샌가, 고민스런 한 끼대신 '알약'을 소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렇게 때우는게 되어버린 1인 가구의 한 끼는 필연적으로 영양 불균형을 초래한다. 전국의 대부분 1인 가구주들은 2인 이상의 가구들에 비해 영양이 결핍되어 있거나, 불균형적인 것이다. 대세가 되어버린 1인 가구, 그들의 불균형적인 한 끼 식사, 이는 결국 전국민 건강의 적신호로 이어지는 것이다. 결국 <나 혼자 먹고 산다>가 둘러보는 1인 가구의 한 끼는 이제는 국민 건강에 대한 우려이다. 



알약으로 대처했으면 좋겠다는 1인 가구의 영양 부족이나 결핍에 대한 대안을 위해 다큐는 여러가지 방식의 홀로 한 끼 식사 방안을 찾아본다. 

우선은 혼자서도 잘 해 먹는 방법, 서른 초반 이제 막 1인 가구 생활을 시작한 가구주는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엄마의 도움없이 홀로 된장찌개를 끓여본다. 하지만, 결과물은 홀로 식사라기엔 너무도 풍성한 서넛이 먹어도 남을 만한 양의 찌개. 과연 대안은 없을까? 일찌기 이십대 초반 홀로 살기 시작하여 서른 중반이 넘은 자취 생활 십 몇 년차에 이른 고수를 찾아가 본다. 오랜 자취 생활의 경험 끝에 '살기위해' 스스로 음식을 해먹기 시작했다는 고수는 근처 재래 시장을 활용한 한 사람의 먹거리에 걸맞는 장보기에서 부터, 있는 재료를 활용한 요리 팁, 그리고 마른 재료 등의 적절한 재료 찾기까지 유용한 팁들을 제시한다. 

“1인 가구에게 해물찜이란? 과도한 허세!” - 우야TV 애청자 조아연

이렇게 요리에 도전하는 1인 가구를 위한 손쉬운 팁을 제시하는 이들도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인해 시장 판매의 저하로 고민하는 망원시장 상인들은 역시나 우야 tv라는 먹방을 주도하는 1인 가구 세 청년 셰프와 함께 먹거리 꾸러미를 준비한다. 시장에서 파는 신선한 재료들로 음식 쓰레기를 남길 여지도 없이 바로 조리해서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낸 덥밥, 찌개들의 소분 꾸러미. 이 덕분에 해물찜이란 1인 가구의 허세가 현실이 된다. 

혼자서도 잘 먹고 잘 사는 법 
1인 독거 노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홀로 남은 남성 독거 노인을 위한 요리 교실을 운영한다. 시금치 다듬기, 콩나물 데치기 등 가장 기본적인 요리 방법을 가르쳐 준다. 여성 어르신들과 달리, 홀로 남겨진 남성 어르신들이 한 끼의 식사를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색이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밥 해먹기가 번거로운 이들이라면 1인을 위한 식당을 찾아가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관악구의 한 식당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대신 인터폰을 눌러야 한다. 직원의 허가를 얻어 들어간 식당은 일반 식당과 달리 요리공간을 둘러싼 ㄷ자의 식탁이 삥 둘러싼 공간, 그 곳에서 홀로 식사하는 사람들은 일반 식당에서의 소외감없이 조용히 식사에만 집중할 수 있다. 연인조차도 나란히 앉아 사랑의 밀어를 자중해야 하는 처지다. 



조금 더 대안적 방식으로 등장한 것은 이미 사회적으로 알려진 소셜 다이닝이다. 금천구의 한 빌딩, 오로지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모인 열 댓명의 청년들은 풍성한 해물찜을 앞에 놓고 모처럼의 호사를 누린다. 한 끼의 호사만이 아니다. 일이 아니고서는 일주일에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일이 별로 없는 1인 가구가 모처럼 가족처럼 속을 터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우리 사회 1인 가구의 한 끼 식사를 모색해 보던 다큐는 시선을 덴마크로 옮긴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가게, 우리 나라의 식료품 가게와 같은 곳이지만, 파는 방식이 다르다. 비누 한 개도 반으로 잘라 살 수 있는 곳, 모든 식재료가 유리 용기에 담겨 있어 필요한 만큼 살 수 있는 곳, 코펜하겐 과반수에 해당하는 1인 가구를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가게다. 심지어 장바구니를 가져오지 않으면 가게에 구비된 주머니에 물건을 담아갈 수 있는 곳, 1인 가구 = 인스턴트와 그 음식물 쓰레기로 대변되는 우리네 현실과는 여러모로 대비되는 모습이다. 

소셜 다이닝이 승화된 형태도 등장한다. 90대 노인에서 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30명 15가구의 가족들이 어울려 사는 덴마크의 코하우징. 한 달에 한 두번 돌아오는 식사 당번, 매일 저녁 함께 하는 식사, 하지만 의무는 아닌, 자유롭지만, 함께 하는 덴마크의 삶의 방식을 이상으로 다큐는 궁핍한 우리의 홀로 한 끼 식사에 대한 탐험을 마무리한다. 

무엇보다 <나 혼자 먹고 산다>가 대세가 된 1인 가구, 그들의 식생활에 주목한 것은 그간 다큐가 우리 사회 주도적 생활 방식이 된 1인 가구에 대한 관심을 넘어선 시도이다.  또한 그들의 영양이 궁핍한 현실과 그 대안 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법은 <나 혼자 산다>의 현실판으로, 또한 우리 시대의 현실에 대한 생생한 접근으로 새해 첫 다큐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by meditator 2017. 1. 3. 17:49

1월 2일 <jtbc 뉴스룸>은 신년 특집으로 <100분 토론>을 준비했다. 손석희의 100분 토론이라니! 아마도 mbc 시절 손석희가 벼려냈던 100분간의 공정한 토론의 광장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억' 이상의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논객이 <썰전>의 유시민, 전원책에, 냉철한 입담으로 이미 그 명성을 쌓은 개혁 보수 신당의 유승민, 이재명 성남 시장이라니, 더더욱 그 기대는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당일 <신년 특집 100분 토론>은 <100분 토론>이라는 mbc의 허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토론의 질을 담보해 낼 수 있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가를 말하기 조차 무색하게 만든 11.89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첫 술에 배부르랴, 기대감이 높았던 만큼 13년전 손석희의 풍성한 <100분 토론>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1월 2일의 100분은 너무도 짧은 시간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내 검색어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는 전원책이라는 이름처럼, 그 길지 않은 100분의 시간을 자신의 고집스런 입장으로 농단해버린 전원책 변호사의 장황한 언설때문에 손석희의 벼려진 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들은 말은 안타깝게도 '전원책 변호사님~'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예능같은 화제성에 흥분할 일만은 아니다. 비록 많은 시간을 전원책 변호사가 잡아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의 <썰전>에서 처럼 사이다 성 발언도 몇 마디 했고, 무엇보다 전원책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2017년의 정국에서 '개혁'은 대세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시간이었으니까. 

탄핵, 법보다 중요한 것은 
탄핵 정국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한 <100분 토론>, 유시민, 유승민, 이재명 세 사람의 논객이 순탄한 탄핵 과정을 예견한 것과 달리, 전원책 변호사는 변호사라는 전문가적 입장에서 '탄핵'이라는 과정의 법리적 적용이 쉽지 않음을 진단한다. 누적 참가자 1천만 명을 넘기며 그 차가운 12월의 겨울 거리를 매주 촛불로 메우며 겨우 탄핵을 이끌어 낸 민심, 하지만 그것이 헌법이라는 법률적 과정으로 들어서면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런 전원책의 입장에 유승민 가칭 개혁 보수 신당 의원 역시 뇌물죄의 입증의 난감함에 동조했다. 또한 세월호 7시간 역시 마찬가지의 논리로 풀어낸다. 역시나 전직 변호사였던 이재명 시장이 명쾌한 논리로 대응을 했지만, 토론의 상황은 '법리적 해석' vs. '법리적 해석'이라는 자중지난으로 빠지는 듯 했다. 이때, 유시민 작가가 일갈한다. 상식적으로 그날 시골의 밭 가는 할머니도 무엇을 했는지 다 기억하는데, 하물며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발언 자체가, 그리고 보고도 받지 않은 것이 역력한 반응을 보이며 뒤늦게 나타난 자체가 그 7시간 동안 무엇을 했냐의 규명과 상관없이 상식적 차원에서 탄핵감이라고 단언한다. 

'토론'은 말과 말의 전쟁이며, 입장과 입장의 부딪침이요, 논리와 논리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토론 과정에서 설사 그가 옳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가 입장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에 앞서 그 논리와 논리가 용호상박으로 부딪쳐 버리면, 그것을 보는 사람은 자중지난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탄핵 정국과 관련한 전원책 변호사나 유승민 의원의 입장이 바로 그 '법리'라는 논리를 이용하여 결국은 '탄핵'이 용의치 않거나, 빨리 이루어지기 힘들 수도 있다는, 하지만 결국은 '보수'적 바램을 피력한 것이라면, 그에 대해 이재명 변호사는 법리적 해석을 들어 방패가 되었고, 유시민 작가는 현재의 탄핵 과정의 본질을 새롭게 환기시키며 자중지난의 늪에 빠져들 탄핵을 구해냈다. 

1월 2일 <100분 토론>의 묘미와 본질은 바로 이것이다. 전원책 변호사는 예의 <썰전>에서 하듯, 아니 그 이상 '보수 논객'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탄핵' 등에 발을 걸려 애를 썼지만, 결국 결론은 현재의 '탄핵' 과정을 이끌어 가는 건, '법리' 이상의 민심이라는 결론을 드러내게 했을 뿐이다. 물론 이마저도 오독한 그 누군가가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탄핵으로 시작한 토론은 이날 참석자 중 다음 대선에 출마할 유승민, 이재명 두 사람에 집중된다. 아니, 그에 앞서 유승민이 소속된 가칭 개혁 보수 신당에 대한 검증이 앞선다. 



너도 나도 개혁, 호가호위와 실천을 구분할 수 있어야 
역시나 전원책 변호사의 전방위적인 불만 토로에도 불구하고, 유승민 의원의 입을 빌어 드러난 것은 현재 이 나라의 '보수'가 우리 사회의 '개혁'을 내세우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음을 스스로 증명한 과정이었다. 촛불 민심을 통해 대통령 한 사람의 제거가 아니라, 그 물질적 배후가 되었던 재벌의 개혁과 그 재벌의 편중된 부로 인해 고통받는 대다수 국민의 보호받아야 할 노동에 대한 사회적 배려가 여야를 막론하고 대세가 되었음을 스스로 입증한다. 특히나 유승민 의원이 영국 노동당이 지난 세월 동안 성장해 온 예를 들어, 보수의 생존이 곧 일부 특권층에 의존이 아니라, 광범위한 복지에 대한 대중적 공감에 있음을 단언하는 장면은 현재 보수가 선택한 자명한 길, 아니 대한미국에서 '정치'가 나아갈 자명한 길에 대한 선포이다. 

하지만 1월 2일 <100분 토론>에서 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유승민 의원이 내세운 보수의 자기 탈피가 아니다. 오히려 시대가 밀어붙여 개혁을 당 앞에 걸어야 하는 보수의 처지를 두고 이재명 변호사는 그런 유승민 의원의 의견이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공감한다. 또한 지난 대선에서 현재 청와대에서 주인입네 하고 있는 사람이 모든 좋은 정책을 다 끌어다 모아 하겠노라고 대중의 눈을 현혹시켰던 과거를 불러온다. 그리고 무엇을 하겠다라는 입에 발린 정책은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보수라 칭하는 사람들은 그래왔다며,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입으로는 국민을 위한다는 사람들이 '노동 개혁'이라는 것을 내세워 노동 악법을 만들어 내는 것이 현실이라 진단한다. 

이재명 변호사가 내세운 수치를 들고 갑론을박을 벌이며, 심지어 목소리를 높여 윽박지르는 전원책 변호사에 대해 이재명 변호사가 남긴 한 마디는 인상적이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온갖 머리 좋다는 사람들이 나서서 경제에 좋다는 정책은 다 해봤지만 결국 나라가 이 모양 아니냐고, 문제는 어떤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편중된 부를 사회 전체에 나누고자 하는 기본적 '윤리'가 우선해야 한다고 검증의 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돌아다니는 웃긴 영상 중에 지금 청와대에서 있는 사람이 상대였던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제가 다 할 겁니다'하며 씨익 웃는 영상이 있다. 그 당시 대선 토론에서 그 사람은 온갖 개혁적 정책은 자신이 다 할 것처럼 의기양양했었다. 야당 후보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그로 부터 불과 몇 년이 흐르지 않아, 이제 그 사람은 자신의 임기조차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의 처지에 놓여있다. 

1월 2일의 100분 토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세 치 혀를 통해 나온 논리와 말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말의 행간 속에 숨어있는 그들의 실체다. 그간 <썰전>의 기가막힌 편집을 통해 사이다성 발언을 해왔던 전원책 변호사였지만, 결국 생방송 토론 과정에서 그가 보인 모습은 고집불통 보수 논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믿어주지 않을 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개혁을 하겠다고 나선 보수 정당의 의원은 그 시절 최순실의 농단을 몰랐다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빨 센 사람들의 말싸움이 아니라 추운 날 시민들을 거리로 불러 모은 민심이요, 그 민심이 바라는 바, 빠른 탄핵과, 그들의 비호 세력이었던 재벌 개혁이라는 사실이다. 논리의 맞고 그름을 넘어선 진실, 그걸 눈밝게 찾아낼 수 있는, 바로 그것이 <jtbc 신년 특집 100분 토론>의 관전 포인트다. 
by meditator 2017. 1. 3. 14:40

kbs2의 <월계수 양복점>은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다. 이번 주에도 전국 수도권 가릴 것없이 34%로 자체 최고 시청률의 기염을 토했다.  2위인 mbc의 <불어라 미풍아>(18.9%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차이가 나는 수치이다. 그에 걸맞게 지난 2016 kbs연기 대상에서 <월계수 양복점> 팀은 우수상, 여자 조연상, 신인상, 베스트 커플상까지 다수의 상을 휩쓸었다. 


1월 1일 방송분에서 그간 재기의 설움을 겪던 성태평(최원영 분)이 동숙(오현경 분)-다정(표예진 분)모녀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드디어 <가요 무대>에서 트롯 가수로 재기에 성공하듯이 과거의 가수와 팬의 사랑이라던가, 월계수 양복점을 매개로 한 수제 맞춤 양복(belpoke handmade suit) 등 신선한 트렌드의 도입처럼 그간 주말 드라마에서 다루지 않았던 이색적 소재와 '가족', '사랑'이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버무려 주말 안방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제 중반을 넘겨 드라마 속 등장한 커플들의 이야기가 각각 절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즈음 <월계수 양복점>이 '사랑'에 대해 다루고 있는 관점에 대해서는 한번쯤 짚어보아야만 한다. 아니 <월계수 양복점>만이 아니다. <월계수 양복점>을 비롯하여 우리네 안방 극장의 주인공이라 할 주말극, 일일극들의 관성적인 구성 방법 자체에 대해 새삼스럽지만 간과해서는 안될 지점이기도 하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하는 여주인공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고 드디어 공중파 음악 프로까지 나선 성태평의 무대가 1일 <월계수 양복점>의 화려한 눈요기였다면, 정작 시청자들의 관심이 모아진 것은 바로 남녀 주인공 이동진(이동건 분)과 나연실(조윤희 분)의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이별이었다. 

그 과정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전형적인 관례에 따른다. 잘못꿰어진 첫 만남으로 인해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던 이동진-나연실 커플, 심지어 아버지가 사라진 월계수 양복점에 사장으로 취임한 이동진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나연실의 해고였을 정도로 이 커플의 사이는 나빴다. 하지만 드라마가 그렇듯이 그럴 수록 사사건건 얽히게 된 이 커플,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드디어 결국 당연하게도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데. 

하지만 나연실은 비록 형식적인 식이나마 올리다 잡혀간 명색이 남편 홍기표(지승현 분)가 조만간 감옥에서 출소할 예정이고, 이동진은 한때 미사 어패럴의 사위였다, 비록 지금은 이혼했지만. 엄연히 법적으로 싱글인 두 사람, 하지만 막상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결혼'을 약속하기에 이르자 두 사람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처음부터 나연실을 데리고 안성에 데려가 시집살이를 시키려 했던 홍기표의 어머니는 이제 아예 대놓고 연실의 집을 점거하기에 이른다. 소용이 다했다고 내칠 땐 가방 하나 싸서 짐짝 버리듯 내버릴 땐 언제고 이제와 잊지 못하겠다며 미사 어패럴의 큰딸 민효주(구재이 분)는 미련이 한 보따리다. 하지만 문제는 이 둘이 아니다. 정작 가장 큰 두 사람의 복병은 연실이 부모님처럼 믿고 따랐던 이동진의 어머니(김영애 분)다. 극중에서 꼬장꼬장하고 잔걱정이 많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따뜻했던 동진의 어머니가 정작 연실이 동진의 배필이 된다고 하자, '시'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미사 어패럴의 큰딸인 옛 며느리 민효주를 불러들이는가 하면 대놓고 연실에게 떠나달라 요구하는 식이다. 드라마는 아내에게 말도 없이 집을 나갔던 동진의 아버지는 묵묵히 사랑을 후원하는 마음 넓은 아버지로 그리는 반면, 어머니는 제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했어도 자식의 결혼 앞에서는 이해가 앞서는 이기적인 캐릭터로 그린다. 이 역시 우리 드라마에서는 익숙한 설정이다. 극단적 모성으로 희화화된 민씨 일가의 고은숙(박준금 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2017년에도 여전한 가족 이데올로기 
2016년, 그리고 17년, 무려 21세기에도 여전히 '시어머니'의 반대가 결혼의 주요한 장애가 되는 드라마, 그리고 그런 장애를 넘지 못하고, 테일러의 기술자가 되겠다며 의욕을 냈던 나연실은 자신이 그간 쌓아왔던 커리어를 다 버린 채 야반도주하듯 월계수 양복점을 떠나 딸기 농장의 일용직 노동자가 된다. 물론 극중에서 연실은 이미 앞서도 마트 직원과 야쿠르트 아줌마를 전전했다. 하지만 그건 월계수 양복점에서 해고가 되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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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경우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커리어를 단박에 포기하고 떠나는 '순애보적'인 여인을 드라마는 눈물겨운 사랑이라 칭송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사랑에 목매는 여성은 연실만이 아니다. 이미 성태평과 동숙의 결혼 과정도 '스타'와 '팬'이라는 관계로 설정되었을 뿐 처음부터 동숙이 태평을 거둬먹이다시피한 사랑이었다. 

어디 태평과 동숙 뿐인가. 요즘 '아추' 커플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민효원(이세영 분)-강태양(현우 분) 커플 역시 성태평-동숙 커플의 판박이다. 비록 낙하산이었지만 미사 어패럴 실장이었던 민효원은 모든 것을 제친 채 드라마 속에서 오로지 강태양 바라기만을 한다. 그녀의 배움, 그녀의 학력 따위는 모두 소용이 없다. 한때 닭집을 하며 시장을 호령하고, 양복점을 하다 망한 남편까지 거두었던 복선녀(라미란 분)는 그래도 한때는 아르바이트라도 열심히 하더니 요즘은 오로지 잘 생긴 남편 배삼도(차인표 분) 스토커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 

드라마는 이런 여성들의 '사랑 밖에 난 몰라'를 요즘식의 적극적인 여성의 구애 방식이라 그린다. 사랑에 있어 적극적인 것은 좋다. 하지만 적극적인 것과 사랑밖에 몰라서 자신의 일상 생활을 온통 사랑에 몸바치는 것과는 별개의 차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의 주말, 일일 드라마는 쉽게 여성을 사랑을 위해 자신이 그간 쌓아왔던 것들을 포기하고, 사랑으로 인해 분노하여 복수에 헌신하는 캐릭터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런 여성들이 삶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사랑과 그 결실인 '가정'이다. 그 결과물이 가정이건대, 당연히 그 가정의 위계를 이루는 '시어머니'의 입김 또한 절대적이다. 가정과 사랑에 목매는 여성, 드라마가 강요하고 있는 이 시대의 이데올로기다. 
by meditator 2017. 1. 2. 16:25

우리 시대 '꿈'은 희망 고문이다. 남들과 다른 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평범함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꿈'을 가진 사람은 사회와 꿈의 부조화로 인해 고통받기 십상이다. 꿈은 날개같지만 마치 태양에 다가가면 녹아버리는 이카루스의 날개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선 그 꿈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있어도, 없어도 괴롭히는 꿈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 '꿈'이라는 것은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미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삶이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의 여지란 한정적이었을테니, 그 말은 즉 꿈은 곧 '근대 이후 신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의 탄생과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대를 이어 주어진 책무가 없는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개인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유토피아로서 꿈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꿈이란 것이 애초에 인간 본연의 품성인 양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굳이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은 이카루스 부자처럼 인간은 늘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그것이 가진 무한대의 조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 들어서며 새로운 세습 계층이 등장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택지가 줄어들거나, 선택의 여지가 넉넉치 않은 젊은 계층의 딜레마가 바로 이 시대 꿈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흔한 자본주의적 성공이 아닌 꿈의 이야기 
그렇게 꿈이 희망 고문이 된 시대, 한 감독이 만든 두 편의 꿈에 대한 영화를 통해 정유년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바로 데미언 채즐 감독의 <라라랜드>와 <위플래쉬>가 그것이다. 

2015년 '교육'에 대한 충격적 담론으로 등장했던 <위플래쉬>에 이어 데미언 채즐 감독은 그와는 정반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음악극인 듯한 <라라랜드>를 들고 와 한국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위플래쉬 1,589,048 명, 라라랜드 12월 31일 기준 2,358,457 영진위 기준)

음악이라는 매개를 제외하고는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편의 영화 하지만 뜯어보면 두 영화는 놀랍도록 유사한 면면이 제법 발견된다. 무엇보다 우선 두 편 모두 다루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 '재즈'라는 점이다. 

<위플래쉬>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 위해 음악 학교에 들어간 앤드류(마일스 텔러 분)가 폭군과도 같은 플랫처 선생(j.k 시몬스 분)를 만나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또한 <라라랜드>는 고집스런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이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분)을 만나 겪게 되는 사랑과 꿈의 사계를 다룬다. 

그런데 두 영화 속 주인공인 앤드류와 세바스찬은 모두 '재즈'에 홀린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재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위플래쉬> 상영 당시 성공과 그를 위한 지옥 훈련과도 같은 플래쳐 선생의 교습법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토록 학생들을 죽어라 교육하는 플래처 선생조차도 재즈가 죽어가는 장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흥미를 가지지 않는 장르, 신기에 가까운 장인들은 존재했지만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장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두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홀린 것은 마치 현재의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판소리에 홀린 듯한 어쩌면 트렌디하지 않은 꿈의 선택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트렌디하지 않은 것에 빠져든 시대 착오적인 젊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의 헌신'이라는 것이 정확한 포인트다. 

그리고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하다못해 3류 미식축구 팀의 사촌보다도 못한 존재감을 가진 재즈, 이젠 함께 하던 동료들 조차 철 지난 장르라 여기며 새로운 트렌드로 앞서 따라가는 그 장르에 미친 주인공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의 여정은 그것이 꿈인 한에서 여전히 질곡의 계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 편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럼에 피가 튀고, 재즈를 잘하고 싶었으나 플랫처 선생의 학대에 가까운 교습법에 견디다 못한 선배가 결국 우울증을 못이겨 자살을 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교습법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선생과 그런 선생에 못지않은 제자의 기 싸움의 결과물인 마지막 연주 시퀀스가 보여준 재즈 연주 실연의 백미는, 절창을 위해 자식의 눈멈을 방조한 <서편제>의 위악에 맞먹는다. 단지 그것이 화려한 연주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토핑, 그리고 무엇보다 이국의 음악이라는 장식이 우리에게 와 재즈라는 소외된 장르보다 '성공'에 방점이 찍힌 채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한 꿈의 여정 
이 두 편의 영화는 공교롭게도 제목에서 중의적 의미를 띤다. <위플래쉬>가 영화 속 삽입된 연주곡 제목임과 동시에 채찍질이라는 영화 속 교수법을 상징하고 있듯이, <라라랜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두 젊은이의 꿈이 펼쳐지는 지리적 장소인 LA와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꿈의 나라라는 역시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영화 속 직접적인 소재이자, 동시에 영화 구성의 특징을 제목으로 한 두 영화는 '꿈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재즈 드러머로서의 선망으로 꿈에 부풀었던 신입생 앤드류가 플랫처 선생의 눈에 띠어 졸지에 월반을 하며 재즈 드러머로서 짧은 인정과 그 짧은 성공보다 더 큰 낙차를 겪으면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 선생을 이겨먹으며 결국은 그토록 선생이 원하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장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즈 드러머로서 LA를 전전하다 자신처럼 꿈을 가진 엠마를 만나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윤색하고 왜곡하던 세바스찬이 마치 거울 앞에서 선 누이처럼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과정은 비록 과정은 다르지만 질곡어린 꿈의 여정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꿈은 이루었지만 사랑까진 얻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엠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언해피엔딩이겠지만, 꿈의 동지로서 보자면 영화는 각자의 삶에서 해피엔딩이다. 뒤늦게 니콜을 챙길 여유가 생긴 마일스가 니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니콜에겐 함께 할 애인이 있듯이, 단지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의 궤도가 달랐을 뿐. 영화는 말한다. C'est la vie



흔하디 흔단 일상적인 성공과 꿈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달된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던진 기본적인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당신이 원하는 꿈은 무엇입니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마일스와 세바스찬이 도달한 그곳은 자본주의 사회 속 성공의 그것과는 분명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상이 외면하는 그 꿈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냐고 덧붙인다. 바로 그런 고집스런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은 데미언 채즐 감독의 질문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정유년의 시작에 공유해 본다. 
by meditator 2017. 1. 1. 16:46

12월 31일은 참 이름다웠던 '병신'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지만 그 이름같았던 '병신'년은 역설적으로 '민주'의 목소리를 올곧이 세웠던 해이기도 하다. 토요일, 변함없이 광장에는 10번째 촛불 집회가 열렸고, 110만 명이 참석하여 누적 참가인수가 1천만 명을 넘겼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광장의 촛불이 불타오르는데, 그런데 '따뜻한 위로'의 가장 손쉬운 매체인 tv가 한 해를 보내는 방식은 어땠을까? 촛불과 함께 좀 달라졌을까? 아쉽게도, 연일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이와 그 조력자들이 드러나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즈음, tv를 시청하며 한 해를 보내는 시청자들은 그저  '암흑이 없다면 별이 빛날 수 없고, 어둠과 빛은 한 몸이라는(한석규)' 추상적 메타포의 속뜻을 헤아릴 수 밖에 없거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거나, '참이 거짓을 이기는' 개념 한 마디에 통쾌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개념 소감으로 만족하기엔 아쉬운 
몇몇 수상자, 혹은 시상자의 개념 발언을 제외하고는 작년이나, 혹은 그 이전이나 그저 등장하는 스타의 면면만 달라졌을 뿐, 하등 달라지지 않았던 시상식과 가요 제전, 아니 달라진 것은 있었다. 흔히 12월 31일 밤 12시가 다가오면 거리로 카메라를 옮겨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그 흥겨운 카운트 다운의 현장을 중계하던 공중파 방송 3사가 약속이나 한 듯 그 현장음을 소거해 버린 것이다. mbc와 kbs는 자체 스튜디오에서 팡파레를 울렸고, sbs는 보신각을 비춰졌지만 원경으로 잠시 스쳐지나가듯 했을 뿐이다. 왜? 혹시나 보신각으로 행렬을 진행하겠다는 촛불 집회측의 발표에 제 발이 저리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시나 제야의 종소리 현장에 끼어든 촛불 집회 행렬이 행여나 방송국의 집안 잔치에 '누'가 될까 저어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세월호 부모님에서부터 위안부 할머니분이 함께 하는 보신각 타종 행사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 어느때보다도 격동적이었던 2016년이었건만 여전히 연말 시상식 무대는 마치 그런 세상의 흐름과는 별개의 유흥 파티장같았다. 과연 이런 변화되지 않는 방송 환경에서 sbs 시상식 말미 <그것이 알고 싶다> 출신의 박정훈 사장의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출사표는 생소하다. 내년을 기약해야 할까?

특히 kbs의 경우 시상식에 앞서 고두심과 최수종을 등장시켜 31일의 시상식이 kbs 연기 대상 30주년이었음을 자축하는 자리를 가진다. 하지만, 30년의 축하는 최수종이 전성기를 열었던 대하 드라마에 대한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류 붐을 일으켰던 <겨울 연가>의 주제 음악과 방송 영상으로 이어지며 30년의 관록이 무색해져 버린다. 30년의 기념답게, 아니 언제나 kbs는 공영 방송의 권위를 세워 다수의 조연 연기자들을 시상식에 배석시키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록의 중견 연기자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만다. 오죽했으면 중견 연기자 김영철씨가 그분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을까. 입으로는 30주년을 칭송했지만, 정작 시상식은 올 한 해 시청률로 kbs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태양의 후예>와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이었다. 결국 대상을 받은 송혜교, 송중기 커플은 등장부터 방송 중간, 중간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대상 수상에 대해 무안하리만큼의 소감을 집요하게 질문받았고, tv 카메라는 이들의 동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청와대의 그분이 즐겨 시청했다는 그 드라마에 대한 일고의 반성은 없다. 오로지 화려한 성과급의 잔치뿐. 그나마 kbs 다운 면피라면 '단막극'에 대한 시상 정도랄까. 

여전한 제 논에 물주기 식 수상 
그나마 kbs는 그래도 집안 잔치라도 제 논에 물주기라도 시상 과정에 구색은 갖추었지만, sbs로 가면 그 장르별 나뉜 수상 면모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정도로 남발하는 시상 과정이 스타 체면 치레용 생색내기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매번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구설수에 오르곤 하는 mc를 스스로 자부하듯 연 4년에 걸쳐 사회를 보게 하며, 시상식인지 지인들 모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언급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연례 행사를 올해도 변함없이 재연했다. 허긴 대상은 투표에 따른 인기상으로 스스로 폄하한 mbc가 있음에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엇보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국의 사정답게 결국 시상식은 학교에서 성적좋은 아이에게 주는 우등상처럼 시청률 그래프에 따라 그 결과가 점쳐지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상'쯤 되면 관록과 내공있는 중견 연기자의 몫으로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시상대에 오르던 시상식의 권위를 찾는 것이 무색했졌다. 덕분에 '대상'의 대상이 점점 젊은 연기자들의 몫이 되고, 그 대상을 받아든 당사자도 무안해지는 상황이 매년 연출되곤 한다. 그나마 올해 sbs의 대상이 <낭만 닥터 김사부>의 한석규에게 갔지만, 23.7%(15회 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이리라. 한석규는 수상 소감을 통해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 지지 않기를,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환기를 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소통과 공감조차 '시청률'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거리의 촛불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시청률 지상주의와 제 논에 물주기 식의, 그리고 아이돌 음악 위주의, 무엇이 무서운지 제야의 종소리 현장조차도 중계하지 못하는 연말 시상식과 방송 제전을 보고 있노라면 '자괴감'이 든다. 과연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어느 곳보다도 강고한 방송 현장의 낱낱한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7. 1. 1.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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