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 '꿈'은 희망 고문이다. 남들과 다른 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평범함으로 인해 '자괴감'을 느끼고, '꿈'을 가진 사람은 사회와 꿈의 부조화로 인해 고통받기 십상이다. 꿈은 날개같지만 마치 태양에 다가가면 녹아버리는 이카루스의 날개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우선 그 꿈이라는 것에 대해 한번쯤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시대 젊은이들을 있어도, 없어도 괴롭히는 꿈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근대 이전 신분제 사회에서 '꿈'이라는 것은 불온한 상상에 불과했을 지도 모른다. 즉 이미 태어나는 순간 자신의 삶이 정해진 사회에서 개인의 여지란 한정적이었을테니, 그 말은 즉 꿈은 곧 '근대 이후 신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온 개인의 탄생과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더 이상 대를 이어 주어진 책무가 없는 사회에서 원자화된 개개인은 자신의 미래를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결국 그 과정에서 유토피아로서 꿈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꿈이란 것이 애초에 인간 본연의 품성인 양 자기 어깨에 짊어진다. 굳이 밀랍으로 날개를 만들어 태양을 향해 날은 이카루스 부자처럼 인간은 늘 자신의 조건과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지만, 그것이 가진 무한대의 조건은 전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산물인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후기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 들어서며 새로운 세습 계층이 등장하고, 그런 과정에서 선택지가 줄어들거나, 선택의 여지가 넉넉치 않은 젊은 계층의 딜레마가 바로 이 시대 꿈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흔한 자본주의적 성공이 아닌 꿈의 이야기 
그렇게 꿈이 희망 고문이 된 시대, 한 감독이 만든 두 편의 꿈에 대한 영화를 통해 정유년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바로 데미언 채즐 감독의 <라라랜드>와 <위플래쉬>가 그것이다. 

2015년 '교육'에 대한 충격적 담론으로 등장했던 <위플래쉬>에 이어 데미언 채즐 감독은 그와는 정반대로 한 편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음악극인 듯한 <라라랜드>를 들고 와 한국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위플래쉬 1,589,048 명, 라라랜드 12월 31일 기준 2,358,457 영진위 기준)

음악이라는 매개를 제외하고는 접점이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편의 영화 하지만 뜯어보면 두 영화는 놀랍도록 유사한 면면이 제법 발견된다. 무엇보다 우선 두 편 모두 다루고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 '재즈'라는 점이다. 

<위플래쉬>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가 되기 위해 음악 학교에 들어간 앤드류(마일스 텔러 분)가 폭군과도 같은 플랫처 선생(j.k 시몬스 분)를 만나 겪는 우여곡절을 다룬다. 또한 <라라랜드>는 고집스런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분)이 배우 지망생 미아(엠마 스톤 분)을 만나 겪게 되는 사랑과 꿈의 사계를 다룬다. 

그런데 두 영화 속 주인공인 앤드류와 세바스찬은 모두 '재즈'에 홀린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재즈란 무엇인가. 우리나라에서 <위플래쉬> 상영 당시 성공과 그를 위한 지옥 훈련과도 같은 플래쳐 선생의 교습법이 화제가 되었지만, 그에 앞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토록 학생들을 죽어라 교육하는 플래처 선생조차도 재즈가 죽어가는 장르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이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더 이상 젊은이들은 흥미를 가지지 않는 장르, 신기에 가까운 장인들은 존재했지만 '과거의 영광'이 되어버린 장르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즉, 두 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이 홀린 것은 마치 현재의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판소리에 홀린 듯한 어쩌면 트렌디하지 않은 꿈의 선택이란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막연한 꿈이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은 트렌디하지 않은 것에 빠져든 시대 착오적인 젊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꿈에의 헌신'이라는 것이 정확한 포인트다. 

그리고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도 하다못해 3류 미식축구 팀의 사촌보다도 못한 존재감을 가진 재즈, 이젠 함께 하던 동료들 조차 철 지난 장르라 여기며 새로운 트렌드로 앞서 따라가는 그 장르에 미친 주인공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에의 여정은 그것이 꿈인 한에서 여전히 질곡의 계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 편의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드럼에 피가 튀고, 재즈를 잘하고 싶었으나 플랫처 선생의 학대에 가까운 교습법에 견디다 못한 선배가 결국 우울증을 못이겨 자살을 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교습법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선생과 그런 선생에 못지않은 제자의 기 싸움의 결과물인 마지막 연주 시퀀스가 보여준 재즈 연주 실연의 백미는, 절창을 위해 자식의 눈멈을 방조한 <서편제>의 위악에 맞먹는다. 단지 그것이 화려한 연주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토핑, 그리고 무엇보다 이국의 음악이라는 장식이 우리에게 와 재즈라는 소외된 장르보다 '성공'에 방점이 찍힌 채 다가온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한 꿈의 여정 
이 두 편의 영화는 공교롭게도 제목에서 중의적 의미를 띤다. <위플래쉬>가 영화 속 삽입된 연주곡 제목임과 동시에 채찍질이라는 영화 속 교수법을 상징하고 있듯이, <라라랜드>는 영화 속 배경이 되는 두 젊은이의 꿈이 펼쳐지는 지리적 장소인 LA와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꿈의 나라라는 역시나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영화 속 직접적인 소재이자, 동시에 영화 구성의 특징을 제목으로 한 두 영화는 '꿈의 여정'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재즈 드러머로서의 선망으로 꿈에 부풀었던 신입생 앤드류가 플랫처 선생의 눈에 띠어 졸지에 월반을 하며 재즈 드러머로서 짧은 인정과 그 짧은 성공보다 더 큰 낙차를 겪으면서도 결국 포기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 선생을 이겨먹으며 결국은 그토록 선생이 원하던 그리고 결국은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장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과,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재즈 드러머로서 LA를 전전하다 자신처럼 꿈을 가진 엠마를 만나 그녀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윤색하고 왜곡하던 세바스찬이 마치 거울 앞에서 선 누이처럼 비로소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는 과정은 비록 과정은 다르지만 질곡어린 꿈의 여정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들은 자신이 원하던 꿈은 이루었지만 사랑까진 얻을 수는 없었다.

그건 엠마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 영화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들의 사랑은 언해피엔딩이겠지만, 꿈의 동지로서 보자면 영화는 각자의 삶에서 해피엔딩이다. 뒤늦게 니콜을 챙길 여유가 생긴 마일스가 니콜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이미 니콜에겐 함께 할 애인이 있듯이, 단지 그들이 함께 하는 여정의 궤도가 달랐을 뿐. 영화는 말한다. C'est la vie



흔하디 흔단 일상적인 성공과 꿈에 대한 이야기처럼 전달된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던진 기본적인 질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당신이 원하는 꿈은 무엇입니까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마일스와 세바스찬이 도달한 그곳은 자본주의 사회 속 성공의 그것과는 분명 류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세상이 외면하는 그 꿈이라도 당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냐고 덧붙인다. 바로 그런 고집스런 재즈에 대한 열망을 담은 데미언 채즐 감독의 질문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할 정유년의 시작에 공유해 본다. 
by meditator 2017. 1. 1. 16:46

12월 31일은 참 이름다웠던 '병신'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지만 그 이름같았던 '병신'년은 역설적으로 '민주'의 목소리를 올곧이 세웠던 해이기도 하다. 토요일, 변함없이 광장에는 10번째 촛불 집회가 열렸고, 110만 명이 참석하여 누적 참가인수가 1천만 명을 넘겼다. 그렇게 한 해의 마지막을 광장의 촛불이 불타오르는데, 그런데 '따뜻한 위로'의 가장 손쉬운 매체인 tv가 한 해를 보내는 방식은 어땠을까? 촛불과 함께 좀 달라졌을까? 아쉽게도, 연일 '블랙리스트'를 지시한 이와 그 조력자들이 드러나고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즈음, tv를 시청하며 한 해를 보내는 시청자들은 그저  '암흑이 없다면 별이 빛날 수 없고, 어둠과 빛은 한 몸이라는(한석규)' 추상적 메타포의 속뜻을 헤아릴 수 밖에 없거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거나, '참이 거짓을 이기는' 개념 한 마디에 통쾌해 할 수 밖에 없었다. 




개념 소감으로 만족하기엔 아쉬운 
몇몇 수상자, 혹은 시상자의 개념 발언을 제외하고는 작년이나, 혹은 그 이전이나 그저 등장하는 스타의 면면만 달라졌을 뿐, 하등 달라지지 않았던 시상식과 가요 제전, 아니 달라진 것은 있었다. 흔히 12월 31일 밤 12시가 다가오면 거리로 카메라를 옮겨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그 흥겨운 카운트 다운의 현장을 중계하던 공중파 방송 3사가 약속이나 한 듯 그 현장음을 소거해 버린 것이다. mbc와 kbs는 자체 스튜디오에서 팡파레를 울렸고, sbs는 보신각을 비춰졌지만 원경으로 잠시 스쳐지나가듯 했을 뿐이다. 왜? 혹시나 보신각으로 행렬을 진행하겠다는 촛불 집회측의 발표에 제 발이 저리기라도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시나 제야의 종소리 현장에 끼어든 촛불 집회 행렬이 행여나 방송국의 집안 잔치에 '누'가 될까 저어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세월호 부모님에서부터 위안부 할머니분이 함께 하는 보신각 타종 행사가 못마땅했던 것일까? 그 어느때보다도 격동적이었던 2016년이었건만 여전히 연말 시상식 무대는 마치 그런 세상의 흐름과는 별개의 유흥 파티장같았다. 과연 이런 변화되지 않는 방송 환경에서 sbs 시상식 말미 <그것이 알고 싶다> 출신의 박정훈 사장의 '변화하는 환경에 걸맞는 방송을 만들겠다'는 출사표는 생소하다. 내년을 기약해야 할까?

특히 kbs의 경우 시상식에 앞서 고두심과 최수종을 등장시켜 31일의 시상식이 kbs 연기 대상 30주년이었음을 자축하는 자리를 가진다. 하지만, 30년의 축하는 최수종이 전성기를 열었던 대하 드라마에 대한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류 붐을 일으켰던 <겨울 연가>의 주제 음악과 방송 영상으로 이어지며 30년의 관록이 무색해져 버린다. 30년의 기념답게, 아니 언제나 kbs는 공영 방송의 권위를 세워 다수의 조연 연기자들을 시상식에 배석시키지만 언제나 그렇듯 관록의 중견 연기자들을 들러리로 세우고 만다. 오죽했으면 중견 연기자 김영철씨가 그분들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을까. 입으로는 30주년을 칭송했지만, 정작 시상식은 올 한 해 시청률로 kbs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태양의 후예>와 <구르미 그린 달빛>에 대한 집중적인 관심이었다. 결국 대상을 받은 송혜교, 송중기 커플은 등장부터 방송 중간, 중간 몇 번의 인터뷰를 통해 대상 수상에 대해 무안하리만큼의 소감을 집요하게 질문받았고, tv 카메라는 이들의 동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 어느 곳에서도 청와대의 그분이 즐겨 시청했다는 그 드라마에 대한 일고의 반성은 없다. 오로지 화려한 성과급의 잔치뿐. 그나마 kbs 다운 면피라면 '단막극'에 대한 시상 정도랄까. 

여전한 제 논에 물주기 식 수상 
그나마 kbs는 그래도 집안 잔치라도 제 논에 물주기라도 시상 과정에 구색은 갖추었지만, sbs로 가면 그 장르별 나뉜 수상 면모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 정도로 남발하는 시상 과정이 스타 체면 치레용 생색내기처럼 보일 정도다. 무엇보다 매번 시상식이 끝나고 나면 구설수에 오르곤 하는 mc를 스스로 자부하듯 연 4년에 걸쳐 사회를 보게 하며, 시상식인지 지인들 모임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언급으로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연례 행사를 올해도 변함없이 재연했다. 허긴 대상은 투표에 따른 인기상으로 스스로 폄하한 mbc가 있음에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엇보다 시청률에 목을 매는 방송국의 사정답게 결국 시상식은 학교에서 성적좋은 아이에게 주는 우등상처럼 시청률 그래프에 따라 그 결과가 점쳐지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대상'쯤 되면 관록과 내공있는 중견 연기자의 몫으로 기립 박수를 받으며 시상대에 오르던 시상식의 권위를 찾는 것이 무색했졌다. 덕분에 '대상'의 대상이 점점 젊은 연기자들의 몫이 되고, 그 대상을 받아든 당사자도 무안해지는 상황이 매년 연출되곤 한다. 그나마 올해 sbs의 대상이 <낭만 닥터 김사부>의 한석규에게 갔지만, 23.7%(15회 닐슨 코리아 기준)의 시청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결과이리라. 한석규는 수상 소감을 통해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 지지 않기를,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환기를 했지만, 그 아름다움에 대한 소통과 공감조차 '시청률'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거리의 촛불에 아랑곳없이 여전히 시청률 지상주의와 제 논에 물주기 식의, 그리고 아이돌 음악 위주의, 무엇이 무서운지 제야의 종소리 현장조차도 중계하지 못하는 연말 시상식과 방송 제전을 보고 있노라면 '자괴감'이 든다. 과연 우리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어느 곳보다도 강고한 방송 현장의 낱낱한 현실이다. 
by meditator 2017. 1. 1. 03:56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