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2 vs. sbs의 월화극 대결 1라운드, 김래원, 박신혜 주연의 <닥터스> vs. 장혁, 박소담 주연의 <뷰티플 마인드>였다. 동일한 의학 드라마를 편성한 이 '핓빛어린 대결'은 싱겁게도 <닥터스>의 압승이었다. <닥터스>가 20%를 오르내리는 시청률로 동시간대 1위를 너끈히 수성할 때, <뷰티플 마인드>는 최고 시청률이 4.7%(3회, 닐슨 코리아 기준)였다. 물론 이 두 드라마의 대결은 '외연적'으로 보면 '의학 드라마' vs. 의학 드라마라는 동일한 장르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결국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구조였던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였던 <닥터스>를 상대로 하여, 사이코패스 의사의 성장담이자, 병원을 둘러싼 비리를 고발하는 사회성 짙은 드라마이며, 나아가 '교육'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심리'드라마였다. 일반적인 시청자들이 선호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비리와 인간의 속내를 훑어보는 이 드라마가 결국 병원에서 연애하는 드라마에 압도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 드라마 판에선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다른 주제와 내용을 다룬다 해도, '의학'이라는 소재를 차용했다는 점에서 같은 장르의 드라마의 격돌은 '전파 낭비'가 아니냐는 반응이 뒤따랐다.  2                                                 



sbs vs. kbs2의 두 번의 월화극 혈전, 장군멍군
하지만 전파 낭비따위, 마치 승자 독식이 순리가 된 세상에서, 압도적 시청률의 승리는 그만큼 매력적이었던 것이었을까? kbs2와 sbs는 다시 한번 '사극'이라는 장르로 2차전을 벌였다. <닥터스>를 통해 승기를 잡았던 sbs, 방영 전 이미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었던 <보보경심>의 리메이크 작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이하 달의 연인)>를 포진시키며 2차전에서도 압승을 예언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150억 대작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괜찮아 사랑이야>의 김규태 피디가 선보인 <달의 연인>은 <구르미 그린 달빛>에 압도당하고 있는 중이다. 지난 1차전의 <닥터스> vs. <뷰티플 마인드>의 시청률이 고스란히 반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장군멍군인 셈이다. 

그래도 <닥터스>에 대해 고전했던 <뷰티플 마인드>는 비록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웠지만, 그간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힘든 사이코패스와 그를 둘러싼 병원과 가족의 관계를 '해부'했다는 점에서 신선한 시도라고 평가받았었다. 그런데 <구르미 그린 달빛>에 기를 못펴는 것은 물론, 동시간대 방영중인 <몬스터> 시청률에도 한참 뒤처진 <달의 연인>은 안타깝게도 <구르미 그린 달빛>과 시청층이 겹치는 '과거'에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9월 6일 방영된 <구르미 그린 달빛> 6회, 세자 이영(박보검 분)은 청의 사신에게 수청을 들게 된 동궁전 내시 홍삼놈(김유정 분)을 구하기 위해 다짜고짜 사신이 머무는 곳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내시에게 칼을 들이댄다. 드라마는 제 아무리 궁중의 법도 따위는 밥 먹듯이 무시하고 지내는 '똥궁'이라지만 외교적 절차를 무시한 이 '사태'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를 방지하기 위해, 사태의 진행 과정을 생략한 채 세자의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는 작전에 집중한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법도'와 외교적 상식을 무시한 세자의 무례 대신, 사랑하는 여인에 눈이 먼 사랑에 빠진 남정네의 과감한 행동에 홀리게 된다. 



기승전 '사랑'의 두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이영은 조선 순조 때 세자인 '효명 세자'로 그려진다. 역사적 인물인 효명 세자는 아버지 를 대신하여 19의 나이에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를 상대로 수렴 청정을 했을 정도로 영민한 인물로 전해진다. 또한 이덕일의 책 <조선 왕 독살 사건>을 비롯하여 일부에서 그의 죽음이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한 죽음으로 전해지기도 하는 세도 정치의 중심에 놓여있던 '정치적 인물'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과도한 업무 등으로 인해 4년 동안 거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과로사'라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워커 홀릭'에 가까운 면모를 기록으로 남긴 인물 효명세자, 하지만 그 세자가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는 그런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게 '사랑꾼'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실은 여자지만 내시로 궁에 들어온 홍삼놈을 '친구'로 여긴 세자는 그가 김윤성(진영 분)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시기하여 내치거나, 그에 대해 화를 내며 어쩔 줄 모른다. 홍삼놈이 등장하기전 세자는 비록 '똥궁전'이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에 대응하며 정치적 반전을 꾀하는 인물이었던 반면, 홍삼놈의 등장 이후 그의 모든 행보는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 연애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기승전 스토리이다. 

<달의 연인>도 그리 다르지 않다. 태조 왕건의 넷째 아들, 후에 광종이 되는 왕소(이준기 분)는 역시나 결혼 정책으로 34명의 자식을 둔, 극중 8명의 왕자들과 피튀기는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이다. 하지만, 어머니에 의해 얼굴에 흉터까지 지닌, '늑대'라고 불리우는 이 사내는 볼모로 잡혀있던 곳에서 개경으로 온 이후 현재에서 타임슬립한 해수(아이유 분)와 얽히며 '사랑'에 눈이 멀기 시작한다. 

아니 드라마 속 사랑꾼은 이들 남자 주인공만이 아니다. <구르미 그린 달빛>의 무소불위 권력가 김헌의 유일한 아들로 등장하는 김윤성 역시 홍삼놈을 만난 이후로 줄곧 끌린다. 김헌과 이영은 한때 우정이었으나, 이제 여인 홍라온 앞에서 '권력'을 내건 연적으로 자리 바꿈을 한다. <달의 연인>은 고려 판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란 우스개가 떠돌 정도로 극중 8왕자 들이 대부분 왕실의 예법에서 자유로운 해수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인연'을 만들어 가며 '사랑'의 볼모가 되어간다. 심지어 해수의 육촌 언니의 남편 8왕자 왕욱(강하늘 분)까지도. 

드라마는 조선 순조 때 안동 김씨 세도가에 대항하는 세자 이영과, 태조 왕건 시기의 결혼 정책으로 권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세자들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들의 '권력' 투쟁이자, 정치적 위기는 '사랑'을 극적으로 그려가기 위한, 보조적 장치일 뿐이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결국 그들은 사랑꾼이요, 사랑에 웃고, 울고, 자신의 많은 것들을 거는, '역사'와 무관한 '로맨스 가이'들이다. 심지어 이영이나, 왕소나 모두 어머니가 없거나, 어머니에 의해 버림받은 '모성 유발'의 남성들이며,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권력'을 가진 자에 대항해야 하는 운명적 인물들이다. 그렇게 태생적으로 '불운'한 그들 앞에 그들의 맘을 위로하는 '밝은' 소녀같은 여인이 등장하여, 벗인양, 그들과 어울리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안타깝게도 두 드라마의 공통적 설정이다. 



그런 면에서 익숙한 '조선'이라는 시대적 배경에, 정통 사극의 모양새를, 유려한 화면으로 그려내고 있는 <구르미 그린 달빛>이 그보다 시대적 배경이 먼, '고려'를 배경으로 한 <달의 연인>에 유리한 위치를 점한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다. 만약에 <달의 연인>이 고려판 <꽃보다 남자> 설정 대신, 초반 왕소의 치명적 존재를 중심으로 태조 왕건 시기의 권력 싸움에 집중했더라면, 이런 정치 사극에 흥미를 가진 '남성 시청자 층'의 호응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의 연인>은 그런 가능성 대신, 무엇을 해도 사극과 이질감을 주는 해수 역의 아이유와 왕자들과의 '로맨스'에 매진하며, 이미 몰입도가 강한 이영과 홍삼농의 로맨스에 스스로 '하수'로 자리매김하고 만다. 

이런 <달의 연인>의 안이한 선택은 그보다는 다층적 서사를 그려냈던 중국 드라마 <보보경심>에 매료되었던 팬들을 이반시키는 자충수이며, 동시에 스스로의 차별성을 닫아버리는 결과물이 되고만다. 하지만, <달의 연인>의 패착이든, <구르미 그린 달빛>의 승기든, '사극'을 표방한 역사를 배경으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드라마는 그 시청률의 성취와 상관없이 가장 '안이한' 시청률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점에서는 이견을 달 수 없을 것이다. 얼마전 서울 드라마 어워드에서 <육룡이 나르샤>의 작품상 수상이 무색해지는 드라마 시장의 답보다. 


by meditator 2016. 9. 7. 06:45

5월 <스타 꿀방 대첩 좋아요>를 기점으로 쏟아진 sbs의 파일럿 프로그램들, 하지만 쏟아부은 물량에 비해 성과는 미미했다. 그러나 몇 달간의 시행 착오를 거친 끝에 정규 편성 이후 금요일 밤의 강자 <나 혼자 산다>에 이어 최근 화제가 되었던 <언니들의 슬램덩크>까지 제치며 <미운 우리 새끼>가 연속 2회에 걸쳐 동시간대 1위를 달성했다. (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 7.2%) 그에 이어 새롭게 안착한 <꽃놀이패> 역시 파일럿의 아쉬운 점을 개선하여 호의적 반응을 얻고 있다. 




<미운 우리 새끼>와 <꽃놀이패>의 묘수 
이렇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거나 정규 편성된 두 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와 <꽃놀이패>는 묘한 공통점을 가진다. 두 프로그램 모두 신규 프로그램이지만 '신규'라기엔 어쩐지 익숙한 모양새를 띠고 있다. 그건 바로 두 프로그램을 보면 모두 어떤 프로그램이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마치 이미 성공적으로 검증된 모 프로그램들의 '아류'라는 오명을 둘러댈 길 없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미운 우리 새끼>는 <우리 아들이 혼자 산다>라는 우스개가 떠돌듯 동시간대 mbc의 <나 혼자 산다>가 없었으면 등장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미운 우리 새끼>의 소재는 <나 혼자 산다>와 같은 '싱글 라이프', 하지만 <미운 우리 새끼>는 거기에 '모성'이라는 조미료를 친다. 그래서 엄마가 지켜보는 우리 아들의 혼자 사는 모습이 <나 혼자 산다>의 싱글 라이프와는 다른, '가족애'라는 변주를 가능케 하며 <나 혼자 산다>보다 광범위한 시청층을 흡수해 낸다. 

<꽃놀이패> 역시 마찬가지다. 연예인들이 모여 지정된 장소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포맷은 <1박2일>을 고스란히 답습한다. 거기에 이미 <1박2일>에서도 자주 등장한 바 있는 두 편으로 나누어 '비교 체험 극과 극'의 여행 과정, 잠자리 복불복 역시 익숙한 것이다. <꽃놀이패>는 이런 이미 익숙한 포맷에 '환승권'과 '투표'라는 변주를 주어 새로움을 낳는다. 꽃길과 흙길로 나뉘어진 팀, 제작 발표회에서 기자단의 노골적인 거수 투표로 흙길 팀장을 고르는가 싶더니,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역전'이 가능한 '환승권' 추첨으로 여행의 긴장감을 부여한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꽃길과 흙길의 맛보기 여행이 끝난 밤, 출연자들이 익명으로 제출한 시를 통해 네티즌의 투표로 출연자들의 운명이 갈린다. 

<미운 우리 새끼>나 <꽃놀이패>의 전략은 sbs가 시도했던 다른 파일럿 프로그램 <신의 직장>이나 <스타 꿀방 대첩 좋아요>가 보여주었던 이질감과 생소함을 우선적으로 넘어서는 유리함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 거기에 두 프로그램이 가미한 '조미료'는  이 프로그램들이 본딴 프로그램의 시청층을 확장하거나, 포인트를 달리하며 새로운 재미를 창출한다. 마치 <나는 가수다>로부터 시작된 가요 프로그램들이 <복면가왕>까지 변주되는 것처럼. 하지만 이미 타 방송사에서 스테디 셀러인 프로그램을 '조미료'만 곁들였다는 점에서 콘텐츠적 안이함이나 비겁함을 핑계댈 말은 딱히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가 방영되는 가운데, <불후의 명곡>을 런칭하는 관행이 이제 더는 치사하다고 욕먹을 일조차 되지 않는 방송가의 현실에서 새로울 것도 없는 '콘텐츠의 변주'이다. 

어쨋든 최근 <동상이몽, 괜찮아괜찮아(이하 동상이몽)>에 이어 <보컬 전쟁; 신의 목소리(이하 신의 목소리)>, <스타킹>, <오 마이 베이비>까지 줄을 이어서 폐지되고 있는 sbs 예능의 빈 자리를 <미운 우리 새끼>와 <꽃놀이패>가 순조롭게 바톤을 이어 받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제작비 부담의 고육지책이 낳은 
그런데 앞서 폐지된 예능과 이제 새롭게 자리를 잡기 시작한 예능 사이에는 차별점이 두드러진다. <동상이몽>, <신의 목소리>, <스타킹> 등이 일반인 관객들을 비롯하여 다수의 출연자등 제작비에서 부담을 주었던 프로그램들이다. 그에 반해 새롭게 편성된 <미운 우리새끼>나 <꽃놀이패>는 보다 적은 수의 출연자들과 스튜디오라는 '경제적 예능'이라는 점에서, 최근 공중파의 예능 부진에 따른 제작비 부담을 한결 덜어낸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도 두 프로그램은 불황 속 공중파를 구제할 구원 투수이자, 예능의 새로운 트렌드로서 주목할 바가 크다. 


또한 제작비의 부담을 가졌던 sbs 예능이 그 모색으로서 거대 연예 기획사 yg와 손잡았다는 점에서 <꽃놀이패>는 또 다른 변수를 낳는다. 이미 대표적 연예 기획사 sm이 예능을 비롯한 다수의 드라마에서 초반 부진을 넘어서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빅뱅의 군입대가 예견된 시점에서 수익성 창출에 고민해 왔던 yg의 예능 참여는 또 다른 국면을 연다. 

그러나 'sm의 저주'라는 용어가 떠돌 정도로 sm의 아이돌들을 비롯한 소속 연예인을 중심으로 꾸렸던 sm발 작품들이 연달아 부진의 늪에 빠졌던 전례를 예능 프로그램을 처음 제작한 yg 역시 비껴가지 못한다. 정규 편성된 <꽃놀이패>는 제작 발표회장에서 출연자 조세호를 통해 이 프로그램의 정규 편성이 yg 소속 유병재때문이라는 조크인지, 진실인지 모를 언급이 등장하는가 하면, yg 수장 양현석의 처남인 이재진을 합류시켜 두 사람이 yg 소속 아파트에서 사는 대화 등을 가감없이 내보낸다. 과연 이런 자사 소속 연예인을 대거 출연시킨 yg 예능, 혹은 yg 예능에 출연한 yg 연예인들이 '저주'를 피해갈 것인지, 그 귀추도 주목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미국과 달리, 제작과 배급의 독점을 규제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영화계가 일부 대기업에 의한 제작과 배급의 독과점으로 인해, 영화 배급 시장의 왜곡 및 영화 수준의 하향 평준화를 이뤄, 이제 그 돌파구를 외국의 거대 자본에 기대어야 하는 웃픈 현실이 tv에서도 재연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이미 예능 mc에 sm 소속 mc들의 과점과 <라디오 스타>에서도 보여지듯 sm 소속 연예인의 잦은 출연처럼, 이미 관행처럼 정착되고 있는 연예거대 기획사의 전횡이 더더욱 고착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접어둘 수가 없다. 
by meditator 2016. 9. 6. 06:20

캥거루족, 어미의 육아낭 속에서 1년 여를 보내는 캥거루에 빗대, 부모에게 경제적 이유 등으로 얹혀사는 젊은이들을 뜻하는 이 단어가 우리 사회에 등장한 것을 이웃 일본을 통해서이다.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아르바이트 등 비정규직이 늘어나며 나이가 들어서도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 기대어 사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격세지감이라고 그로부터 미처 십년이 되기도 전에 일본이 맞닦뜨린 그 '불황'은 이제 한국 사회를 덮쳤고. 우리 사회에도 '신(新) 캥거루 족이 등장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낯설지 않은 신 캥거루 족에 대해 9월 4일 <sbs스페셜-우리 집에 신 캥거루가 산다>가 다루고 있다. 




하지만 이웃 일본의 캥거루 족, 그리고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생소하지 않은 신 캥거루 족이지만, 전세계적 불황 속에 이런 독립할 수 없는 젊은 세대는 전세계적 고민이 되고 있다. 미국에는 대학 졸업 후 경제적 독립을 못해 결혼도 못한 채 부모에게 얹혀사는 트윅스터(Twixter) 족이 있고, 눈치없는 자식과 부모 사이의 내전을 코믹하게 그린 영화에서 유래된 탕기족이 프랑스에는 있다. 영국에는 부모의 은퇴 수당을 좀먹는 키퍼스가 있고, 중국에도 일정한 수입이나 직업없이 부모를 '갉아먹고'사는 컨라오 족이 있다. 

평생 엄마 아빠 그늘 아래 쉬고 싶다-효도가 최고의 재테그 
프랑스 영화 <탕기>의 주인공 탕기의 말처럼 캥거루 족은 '평생 엄마 아빠 그늘 아래 쉬고 싶'은 자식들이다. 한국 보건 사회 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1985 9.1%에 비해 2010년 26.4%로 부모와 같이 사는 미혼 자녀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미혼 자녀만이 아니다. 경제적, 혹은 육아의 이유로 부모와 같이 사는 기혼 자녀의 비중도 4.2%나 늘었다. 물론 이 통계 안에 자녀의 편의가 아니라, 부모를 모시는 전통적인 '관례'가 있음을 감안한다 해도 급격한 증가율이다. 2016년 대한민국 청년 실업률 12.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저임금 고용불안 등으로 대졸 청년들 가운데 51%가 여전히 부모로 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다. 캥거루 족에 대해 신 캥거루 족의 원래 의미는 결혼 한 뒤에도 부모와 같이 사는 자식들을 뜻하는 말이지만, 9월 4일 방영된 <sbs스페셜>은 결혼한 자녀는 물론, 결혼할 나이의 자녀들이 여전히 부모와 함께 사는 사례를 '신캥거루족'의 범주에 넣어 다루고 있다. 



다큐는 여러 유형의 신 캥거루 족을 보여준다. 대기업 협력 회사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안덕호 씨 정년이 2년 남은 그지만 최근 그가 종사하는 산업의 불황 여파로 그조차도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아직 그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다. 고등학교 시절 아이 아빠가 되어 25살이 된 현재 세 아이를 둔 핸드폰 업체에 근무하는 큰 아들 내외와 대학원 다니는 딸까지 그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직장은 다닌다지만 한 달 벌이가 150만원 여, 하지만 안덕호씨네 한 달 생활비는 300만원이 넘고, 그건 온전히 아버지 안덕호 씨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은퇴 후 귀농을 하고 싶지만 후에 봉양을 할테니 집을 두고 가라는 아들 내외, 아버지가 능력이 되는 한 아버지 그늘에서 버티고 싶다는 아들의 의지에 아버지는 불가항력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서른 다섯이 되도록 경제적 독립을 하지 못한 인디 밴드 로맨틱 펀치의 기타리스트 강호윤 씨도 아버지가 여유 자금을 털어 실용 음악 학원까지 내주며 아들을 뒷바라지하고, 어머니는 아들의 끼니를 책임진다. 그런가 하면 서른이 되도록 직장을 잡지 못한 취업 준비생 아들 김경한 씨와 김은정씨의 딸도 당연히 부모의 책임이다. 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대신해서 목욕탕에서 일하는 가장 어머니에게 딸은 밀린 핸드폰비라도 내달라 '애걸'하는 신세다. 하지만 어머니는 도와주자니 끝이 없고, 외면하자니 능력이 없는 딸 앞에서 언제까지 너를 보살펴야 하냐고 오히려 읍소한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81세의 고충진씨 노부부는 곰팡이가 핀 낡은 지하 전셋집에 산다. 마흔이 넘은 아들이 있지만 이집엔 경제 활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중동 공사 현장에서 일해 번듯한 아파트까지 마련했던 아버지, 하지만 대학원까지 나와 사업을 했던 아들은 imf 외환 위기를 겪으며 아버지 집까지 날려 버렸다. 이제 노부부는 자신의 집도 없이 남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할 현실에 안타까워하지만 희망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자식 몰입 사회 한국, 하지만 결국 문제는 개인이 독립할 수 없는 사회
세계적 불황, 거기서 비껴가지 않는 한국 사회에 신캥거루 족은 예외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이기에 더 특별한 이유도 있다. 6,25전쟁 이후 자식 교육만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성공'을 담보한다 생각했던 그 후 현대사에게 온전히 자식에게 몰입했다. 그래서 전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자식에 대한 헌신은 화려한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일구었지만, 그 결과 2016년 대한민국 현실에서 보여지는 부모에게 의존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그리고 그 반대 급부로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은 자식을 여전히 '아기'처럼 여기는 '독립'하지 못한 부모와 자식이라는 성숙되지 못한 '가족 관계'를 낳는다. 다큐는 이런 비정상적인 한국 사회의 가족적 인식을 '노후에 봉양할 테니 지금은 가능한한 부모의 도움을 받겠다'며 당당히 손을 내미는 자식들과, 심지어 '아기'라 부르며 끼니에서부터 벌이까지 노심초사 뒷바라지를 하는 , 그러면서도 독립할 능력도 되지 않는 자식에게 결혼과 아이를 바라는 부모들을 통해 다큐는 보여준다. 



하지만, 그저 한국적 특수한 가족 관계에 머무르지는 않는다. 그런 '전근대적 가족' 관계가 가진 인식의 한계를 넘어, 현재 한국 사회가 '신캥거루 족'을 배태한 원인을 다큐는 '사회'로 귀결시킨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서 일찌기 독립하여 병원에서 일하게 된 김현두씨 계약직으로 전국을 전전했던 그녀는 이제 또 '해고'도 못되는 '계약 해지'의 현실에서 절망한다. 돈을 벌면 부모님을 도와줄 수 있으려니 했지만, 계약직으로 전전한 그녀가 결국 향하게 되는 것은 고향 집이다. 

청년층이 첫 직장을 잡는데 걸리는 기간 평균 12개월, 하지만 그 조차도 상당수가 계약직인 고용 불안이 항시적으로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녀들에게 '경제적 독립'은 먼 꿈과도 같은 일이다. 또한 한 개인의 경제적 실패를 온전히 그 개인, 그리고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가족 책임'의 사회에서 부모는 책임의 수레바퀴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다. 4,50대의 70%, 그리고 6,70대의 53%가 은퇴 준비 대신 자녀를 우선 지원하겠다는 부모 세대의 인식은 이런 한국 사회의 불안정한 구조를 견디는 버팀막이 되고 있고, 그 현실이 '신캥거루 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는 걸 다큐는 강조하고 있다. 
by meditator 2016. 9. 5. 06:53

또 임진왜란인가 싶었다. 일찌기 kbs1을 통해 방영되었던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했던 <불멸의 이순신(2004)>에서 무려 천만 하고도 700만이 더 보았던 (17,615,057 영진위 기준) <명량(2014)>가 있었는데, 또 이순신이라니. 그것도 웬만한 위인은 다 해본 거 같은 최수종의 이순신이라니.  임진왜란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지겹다'는 느낌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소재적 진부함에 대해 9월3일 첫 회를 방영한 <임진왜란 1592>은 '팩추얼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돌파하고자 한다. 




팩츄얼 드라마로 다룬 임진왜란 
인물, 사건, 이야기 모두를 역사적 사건에 기반을 둔 드라마를 '팩추얼 드라마(factual drama)라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미 케이블 채널 HBO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2001)>와 <더 퍼시픽(2010>>을 들수 있다. 또한 다큐멘터리 채널 내셔널 지오그라픽에서 <임진왜란 1592>처럼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팩추얼 드라마인 <초한지(2013)>, <킬링 링컨(2013)> 등을 제작한 바 있다. 특히나 최근 '일제 시대'나, 그 이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와 드라마들이 만들어지면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경계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역사적 사실을 다룬다지만, '자의적 해석'이나 심지어 '왜곡'이 두드러진 영화들이 흥행을 이어가며, 역사적 상상력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런 논란 속에서 팩추얼 드라마로써의 <임진왜란 1592>가 내세운 것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사실적이고 생생한 임진왜란이다. 첫 회 과연 이전의 사극들속 임진왜란과 <임진왜란 1592>의 임진왜란은 어떻게 달랐을까?

첫 회 <임진왜란 1592>는 5부작이라는 길지 않은 회차의 난관을 임진왜란에 대한 서사적 접근 대신, 바로 난중의 영웅 이순신과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선다.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침략해가는 왜군, 그런 적들에 대해 조정은 맞서 싸우는 대신 임금은 돌아오겠다는 기약없는 약속만을 남긴 채 서둘러 한양을 떴다. 그렇게 무구공산 적들의 잔인한 도륙만이 곳곳에서 자행되는 조선에서 전라도 좌수영의 이순신만이 홀로 그곳을 지키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세 번을 싸워 세번을 이긴 이순신,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부하 나대용은 그 누구도 지키려 하지 않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가치가 있는가 물으며, 자신의 목숨부터 지키라 읍소한다. 하지만 그런 부하의 절망적인 요구에 이순인 누구를 위해 싸우는가라는 우문현답으로 답한다. 그리고 단 26척의 판옥선으로 결코 져서는 안될 전장으로 향한다. 





구체적 전투 상황을 조명하며 살려낸 전쟁의 박진감 
<임진왜란 1592>가 이순신의 영웅담 중에서도 촛점을 맞춘 것은 바로 귀선, 바로 거북선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하루 전 완성된 거북선,  하지만 견내량 전투 이전까지 귀선은 한번도 전투 경험이 없었다. 매번 왜군에 지고 있는 조선 수군들, 당시 왜군은 최대한 가까이 조선 수순의 배에 접근하여 그들의 최신 무기인 조총을 쏘고, 갈고리로 판옥선에 올라 육박전을 벌이는 방식의 전술을 썼었다. 그런 왜군의 전투 방식에 대응하기 위해 조총이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소나무로 배를 뒤덮고, 거기에 혹시라도 배위에 오를 시 귀선 등에 촘촘히 박힌 칼고 창등을 동원해 만든 철송곳에 찔리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 녹독에 당하도록 만든 귀선을 만드는 과정을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는 보여준다. 

하지만 귀선의 만듬새나 쓰임새만이 첫 회의 관전 포인트가 아니었다. 마치 전쟁사처럼 그동안 두루뭉수리하게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결사항전을 강조했던 다른 드라마와 달리, 우리에겐 이젠 익숙한 '학익진' 등의 전투 대형을 넘어 단 26척의 판옥선과 한 척의 귀선으로 엄청한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순신의 전술을 꼼꼼히 살펴본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은 바로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화포, 순천의 실패을 거름삼아 이순신은 판옥선에서 멀찌감치 포를 쏘았을 것이란 그간의 정설을 뒤엎고 가까이 접근하여 활을 쏘며 조총을 무력화시킨 다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확히 조준하여 포를 쏘는 방식으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가설에 따라 구성한다. 



그에 따라 그려진 새로운 각도의 견내량 전투, 수군들과 장수들, 그리고 무엇보다 후방에서 지휘를 해야 할 이순신이 앞서 활을 쏘며 독려를 하는 상황과, 불리한 조건에서도 가장 정확한 포격과 귀선의 종횡무진 활약은 그간 드라마틱하게 당시의 상황을 그려냈던 다른 드라마나 영화못지 않은, 심지어는 사실적이라 더 박진감넘치는 임진왜란사를 탄생시킨다. 거기에 사극하면 역시 최수종이라는 감탄이 나올 만큼, 김명민이나 최민식이 떠오르지 않은 정말 전장의 이순신이라면 저랬을 것같은 움푹 패인 볼과 초쵀한 모습과 곳곳에 검댕이마저 묻은 얼굴의 최수종의 이순신은 또 한 사람의 이순신을 각인시킨다. 또한 최수종 못지 않은 능숙한 일본어로 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김승수나, 실제 일본 배우가 연기한 일본 장수들, 거기에 이기남이란 인물을 재발견하게 해준 이철민을 비롯한 조선 수군의 열연이 사실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덕분에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다큐멘터리보다 더 사실적인 팩츄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가 등장한다. 

이런 신선한 시도의 포문을 연것은 극본과 연출을 겸한 김한솔 피디의 내공이 있기 때문이다. 일찌기 <역사 스페셜>, <한국사 傳>, <문명의 기억 지도> 등의 역사 다큐를 거쳐온 그의 내공이 팩추얼 드라마 <임진왜란 1592>를 통해 피어난다. 거기에 한, 중, 일 삼국이 합작하여, 지금까지 '조선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조선, 명나라, 일본이 참가한 동아시아 최대 전쟁으로 새롭게 해석하려는 포부를 얹어, 명나라는 중국의 배우들이, 왜는 일본의 배우들이 직접 연기하며 합작 드라마로써의 각을 살리고자 한다. 물론 우려되는 바도 있다. 합작 드라마로써 명과 일본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가 여부이다. 첫 회 일본의 야만적 침탈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며 우선은 이런 우려를 기우로 접어두게 한다. 과연 첫 회의 순조로운 출발이 5회까지 이어질지, 그 여부에 따라 새로운 시도 팩츄얼 드라마의 앞날도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첫 회만으로도 최근 그 어떠 사극보다도 흥미진진했다. 
by meditator 2016. 9. 4. 04:56

<다시 쓰는 육아 일기! 미운 우리 새끼(이하 미운 우리 새끼)>는 사실 동시간대 mbc 예능 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와 그리 다르지 않은 프로그램이다. 홀로 사는 연예인의 싱글 라이프를 카메라를 통해 시청자들의 '관음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나 혼자 산다>에 옥탑방에 사는 육중완이 나와도, 그리고 생후 584개월에 이르는 김건모가 나와도, 사실 그들은 시청자들이 그 이름만으로도 그들을 알 수 있는 이미 검증된 연예인이다. 그런 알려진 연예인의 삶은 우리 이웃의 필부의 삶과 다르게 정해진 프레임 속에서 생존의 전투에서 일정 정도 보장된 삶을 사는 '프레임' 속의 삶이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들의 거꾸러질 일 없는, 하지만 인간이기에 겪는 희로애락의 공감대를 유지하며 적당히 '편안하게' 엿볼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원래 즐거움 중에 가장 짜릿한 것 중 하나가 '엿보기' 아닌가. 그 부담없는 엿보기가 <나 혼자 산다>를 스테디셀러로 만들었고, 이제 그 아류인 <미운 우리 새끼>를 순탄하게 정규 방송화시키고 있다. 




<나 혼자 산다>와는 다른 질감의 <미운 우리 새끼>의 싱글 라이프 
그런데, 똑같이 싱글 라이프인데 거기에 '엄마'라는 존재가 곁들여 지면서 <미운 우리 새끼>는 다른 질감을 가져오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의 명칭인즉슨 생후 몇 백 개월을 들먹이며, 육아 일기를 다시 쓴다는 명목을 내세웠지만, 사십 줄, 오십 줄의 홀로 사는 아들의 삶을 전혀 몰랐던 엄마들에겐 그들의 싱글 라이프가 '깜짝 쇼'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런 엄마들의 '충격'파는 <나 혼자 산다>와 다르게, 가족적 공감대라는 신선한 볼거리의 지형을 연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며 아들들의 싱글 라이프가 전개되고 그리고 그런 아들들에 대한 엄마들의 입장이 분명해 지면서 <미운 우리 새끼>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세 mc 신동엽, 서장훈, 한혜진과 함께 스튜디오에 자리잡은 어머니들, 어머니들의 일관된 입장은 우리 전통의 가족관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들이 마흔이 넘었건 오십이 넘었건, 여전히 '육아'의 관점에서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여전히 맹목적으로 아들의 결혼과 안정된 결혼 생활을 바란다. 하지만 첫 회만 해도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소개팅도 하고 그러던 아들들은 회를 거듭하면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정규 편성과 함께 합류한 박수홍, 방송에서의 반듯한 이미지와 달리, <미운 우리 새끼>의 박수홍은 클럽을 좋아하는 반전의 모습을 보인다. 미스코리아를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평소 집에서 아저씨처럼 뒹굴던 모습을 뒤로 하고 말끔하게 꽃단장(?)을 하고 외출한 박수홍, 친구의 집에 시커먼 사내들만이 포진해 있자, 노골적으로 실망을 표시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 주도적으로 클럽 행을 부추키고 일행을 이끌고 밤 나들이에 나선다. 

이런 박수홍의 모습을 본 박수홍의 어머니는 당혹감을 넘어 어머니의 뒷배경으로 등장하는 분출하는 화산처럼 화를 좀처럼 누르지 못한다. 무려 마흔 일곱의 아들, 그 아들의 클럽 행이라는 '취미 생활'에 어머니는 여전히 스무 살 아들을 대하듯 못마땅해 한다. 이런 식이다. 프로그램의 제목 그대로, 스튜디오에 나란히 앉은 어머니들은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몇 십년의 생을 살아온 아들들을 '육아'의 관점에서 애를 끓인다. 아들들은 우리 사회에서 다 저마다의 커리어를 가지고 이제는 중견조차 넘어선 위치에 있는 인물들인데, 여전히 어머니에게는 '품안의 자식'인 것이다. 이게 좋게 말하면 '모성'이자, '가족애'이지만, 달리 보자면, 성인이 된 아들과 어머니가 서로를 객관화시키지 못하는 지점인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미운 우리 새끼>의 예능적 재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빚어진다. 출연자들과 모두 안면이 있는 신동엽은 때론 어머니들의 그런 '노심초사'를 부추키고, 때론 진화를 시키며 적절하게 아이러니한 가족애를 조장한다. 

가족주의를 말하려 하지만, 오히려 가족에의 일탈이 드러나는 
하지만 그 조장에도 불구하고, 9월 2일 방송에서 보여지듯, 이제 마흔 줄, 오십 줄에 넘어선 아들의 삶은 이미 어머니가 그토록 바라는 '가족주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클럽 애호가인 박수홍, 하지만 주말 저녁 그의 클럽 행은 결국 예약 혼선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친구들과 결국 해장국 집에서 늦은 저녁인지, 야식인지를 먹게 되는데, 그런 클럽 행 이전에 친구의 집에서 박수홍은 어머니의 간곡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해장국집에서도 변함없다. 오랜 연애에도 불구하고 집안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던 상처를 가진 그는 그 과정에서 믿었던 사람들로 인해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당시 반대를 무릎쓰고 결혼을 했더라면 하고 반문해 보면, 과연 행복한 결혼을 유지할 수 있을까란 회의가 든다고 한다. 그러기에 박수홍은 사랑은 감정이지만 결혼은 현실이라며 회의론에서 한발 도 나서지 않는다. 



박수홍만이 아니다. 상처로 인한 어려운 터득이라는 점에서 허지웅도 그리 다르지 않다. 모처럼 남자 친구들과의 여행, 오랜 지기들과의 격의없는 대화에서 허지웅은 연애는 가능하지만 결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no라며 선을 긋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아이'는 바란다. 허지웅만이 아니다. 오십이 넘어서도 여전히 철이 없는 소개팅 자리에서도 개구장이처럼 굴다 끝내버린 김건모의 속내도 외롭지만 그렇다고 결혼은 글쎄다. 찾아온 후배 김종민이 이리저리 그의 생활을 들쑤시자 못견뎌하는 김건모, 남들이 외로워 보인다 하건 말건, 이미 그의 삶은 김종민이 함부로 흐트러 놓을 수 없는 그의 물건처럼, 나름의 궤도를 가지고 움직인다. 때론 외롭지만, 그래도 나날이 게임을 하든, 피아노를 치든 바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그. 

프로그램은 어떻게든 어머니들의 입장과 그 어머니들의 입장에 맞춘 프레임 속에서 아들들을 마치 예전 어른들이 장가를 못가면 영원히 성인 취급을 못해주듯, 생후 몇 백 개월을 들먹이며 철이 덜 난듯이 취급한다. 이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삶의 단계로 규정짓는 '가족주의'의 편견이다. 프로그램은 그 편견을 '모성'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며, 엄연한 자기만의 궤도를 가진 아들들의 삶에 덜 떨어짐이라는 시선을 얹는다. 

하지만, 9월 2일 방송에서 드러난 것은, 흔히 '세대 차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간극이다. 어머니는 그 예전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아들들이 살아가길 바라지만, 이미 아들들이 사는 세상은 어머니들이 살던 세상과 다른 세상이 되었음을 아들들은 증명한다. 오십이 넘은 아들은 비록 외롭지만, 그 외로움을 여백으로 삼으며 음악과 게임, 그리고 자신만의 취미 생활로 나날을 이어간다. 또 다른 마흔 후반의 아들은 나이가 무색하게 클럽을 적극적으로 즐긴다. 한번의 실패를 겪은 또 다른 아들은 연애는 하고, 아이는 갖더라도 결혼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서 키워야 '정상'인 세상과 다른 세상을 이미 아들들은 오래전부터 살아왔고, 프로그램이 그리려고 하듯, 이 철없는 아들들만이 아니라, 이미 우리 사회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어머니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가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왔던 것일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은 '육아일기'라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의 관점에서 아들들을 예단하려 시도하지만, 오히려 그 결과로 회를 거듭할 수록 드러나는 것은 이미 자신만의 삶의 구조가 탄탄해진, '가족' 밖의 아들들이다. 문자를 자주 하고, 수시로 아들의 집에 쳐들어가 보지만, 하지만 이미 아들들은 어머니의 세대가 만들어 놓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한참을 벗어나있다. 프로그램은 '가족'의 언어로 이야기하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아들들의 언어는 다른 세상의 언어다. 프로그램은 '육아'를 통한 '연대'와 '관계'를 끊임없이 모색하지만, 그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서로 다른 세대의 가치관과, 그 불협화음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들들이 어머니의 입장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여전히 아들들은 어머니의 메시지에 바로 답을 하는 순종적 아들이다. 하지만 아들의 달디 단 대답과 달리, 아들들의 삶이 말한다. 이미 우리는 어머니와 다른 세대를 산다고. 그러나 아들의 외국인과의 결혼조차도 양보할 수 없는 어머니, 여전히 양갓집 규수와의 반듯한 결혼 생활을 꿈꾸는 어머니와 아들의 공감은 평행선이다. 그리고 이는 프로그램 속 모자의 평행선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사회 어머니 세대와 아들 세대의 평행선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6. 9. 3. 06:38

이제 우리나라에서 <어바웃 타임>은 성공한 로맨틱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덕분에 개봉하는 외국 영화 중 종종 <어바웃 타임> 제작진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개봉하는 영화들이 눈에 띤다. 2014년에 개봉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그랬고, 이번에 개봉한 <이퀄스>가 그러했고, 9월에 또 개봉할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가 그렇다.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믿고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이들 영화에서 <어바웃 타임>에 필적할 만한 잔향깊은 로맨스를 기대한다. 하지만 그 기대가 늘 부합하는 건 아니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제목은 사랑을 앞세웠지만 막상 영화를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어바웃타임>과는 다른 질감을 가진 사랑의 생로병사였다. 마찬가지로, <어바웃 타임> 제작진에 젊은 청춘 스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내세운 <이퀄스>에 대한 반응 역시 호불호에 차이가 있을 듯하다. 




그 호불호의 간격은 니콜라스 홀트와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사랑을 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어바웃 타임>의 돔놀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진득한 사랑 저리 가게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은 곡진하며, 그 마무리의 여운 역시 쉽게 잦아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청춘 남녀의 순애보에도 불구하고 <이퀄스>란 영화를 온전히 사랑만으로 완결시키지 않는 건 바로 <이퀄스>란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 두 남녀가 존재하고 있는 세계와 세계관이 관객들이 온전히 '사랑'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아니, 오히려 <이퀄스>는 <어바웃 타임> 제작진을 내세워 사랑 영화임을 표방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되는 세상에 대한 질문이다. 

사랑이 허용되진 않는 세상에서의 사랑, sos
영화의 배경은 선진국, 인류는 서로간의 전쟁으로 지구 대부분을 파괴시키고, 겨우 피해를 입지 않은 일부의 지역 선진국과 반도국을 남겼다. 그 중 선진국은 인간이 살기에 매우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췄다. 지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인간의 통제되지 않은 감정'에 있다고 생각한 선진국 사람들은 dna조작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거세시켜, 이퀄(equal)을 만들었다. 감정이 sos(switched- on-syndrome)가 되고, 사랑이 유일한 범죄가 된 '완벽한(?) 사회. 그곳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먹고 살 것을 걱정하지 않고, 쾌적한 환경에서 적절한 케어를 받으며 각자가 원하는 바 노동에 종사하며 살아간다. 



그 선진국의 일러스트레이터 사일러스(니콜라스 홀트 분), 그는 여느 때처럼 일어나 식단에 맞는 식사를 하고 갖춰진 옷을 차려 입고 출근을 해 자신의 업무에 종사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변화가 생겼다. 그의 눈에 이상이 감진된 동료 니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분)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언제부턴가 그의 시선은 니아를 쫓는다. 결함인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날 주먹을 꼭 쥐며 감정을 짖누르는 니아를 발견한 사일러스, 서로서로가 감정이 생겨난 동료를 감시하고 고발하듯 그렇게 자신도 니아를 바라보는 거라 사일러스는 받아들이려 하지만, 니아에 대한 그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그를 괴롭힌다. 결국 그 감정의 혼돈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일러스는 스스로 병원을 찾고 감정 통제 오류 1기임을 판정받는다. 영화는 '감정'을 맛보지 못한 사일러스가 스토커처럼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을 통해 그의 감정을,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의 불가항력을 설명한다. 그리고 결국 모든 사랑 영화의 공식대로 사일러스, 그리고 니아는 결국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마는데...

감정이 느껴지면 스스로 병원에 가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약을 받거나, 그걸 숨기면 끌려가는 세상, 그 속에서 감정을 숨기지 못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들며 동시에 의문에 빠진다. 과연 사랑이 문제일까?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서 사랑을 범죄시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들이 종사하는 '노동'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사일러스와 니아는 그런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느낀다. 처음 사랑에 빠져들때의 혼란도 잠시, 스스로 병원에 갔던 것을 후회할 만큼 두 사람의 나날은 환희에 차있다. 오히려 방해는 커녕 노동 생산성은 높아진다. 그저 문제가 되는 것은 주변 동료들과, '사랑'을 범죄시하는 사회. 

사랑을 넘어선 존재의 묵시록 
두 스타 배우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에 몰입하는 잦은 클로즈업, 그리고  온전히 두 사람의 감정에 집중하는 서사,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들이 사는 '선진국'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인간을 통제하는 사회에 대한 서사는 2003년 크리스찬 베일의 <이퀼리브리엄>을 통해 익숙한 것이다. 단지 <이퀼리브리엄equillibrium>이 영화 후반 '감정 통제'를 둘러싼 '액션'이 백미를 이루었다면, <이퀄스>는 그걸 온전히 두 주연 배우의 금지된 사랑을 통해 설명한다. 

사일러스와 니아가 사는 세상은 '감정'만 제외하면 완벽한 세상이다. 온통 하얀 옷에 하얀 건물의 거세된 감정을 상징하듯 무미건조한 색채의 세상이지만, 그걸 제외하면 생로병사의 모든 것을 사회가 책임져 주는 세상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선사시대 동굴벽에다 '예술'을 했던 인간의 감정은 dna의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다. 그 완벽한 삶을 뚫고 나오는 송곳처럼, 곳곳에서 감정을 느낀 사람들은 그 감정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 스스로 몸을 던지거나, 울부짖으며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렇게 영화는 dna 조작으로도 거스를 수 없는 인간 감정의 숭고함을 설파하며 두 남녀의 순애보를 설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 그리고 사랑의 숭고함과 함께, 동시에 솟아오르는 의문, 이 가상의 감정 전체주의 선진국이 과연 '가상의 사회'일까? 란 의문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퍼져가고 있는 3포, 5포의 포기 증후군은 21세기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통제된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과연 사랑과 결혼과 연애를 포기하고 도달하고자 하는 사회적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을 조장하고 암묵적으로 통제하는 사회는 이퀄스 속 하얀 전체주의와 다른 것인가란 의문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아니 다른 것이 있다면, 영화 속 전제된 환상적인 '물신성'이 이 사회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주어지지 않았기에 신기루처럼 이 사회 속 인자들을 더 강력하게 포섭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아닐까? 

영화에서 사랑은 '노동'에 대적되는 소모적 감정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노동'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랑과 연애와 결혼을 포기한다. 심지어 외모나 인성도 '노동'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고자 트레이닝을 받거나, 교정하고, 수술대에 오른다. <이퀼리브리엄>이 그 감정을 통제하는 전체 사회에 '액션'으로 저항했지만, <이퀄스> 속 연인들의 도발은 그 중 한 사람의 '투항'으로 실패하고 만다. 2003년과 2016년의 격세지감이다. 사일러스의 투항으로 영화는 비극적 순애보의 여운과 함께, '자본'에 무기력해져버린 현대인을 투영한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 하지만, 겨국 영화는 당신들의 존재를 묻는다. 그 존재의 묵시록에 전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퀄스>가 잔향이 깊을 듯하고, 그렇지 않는다면 어쩌면 지루한 감정의 소모로만 남을 가능성도 있다. 
by meditator 2016. 9. 2. 16:09

이사온 지 2년이 넘었다. 가정 형편으로 집을 줄여 이사를 오느라, 눈물을 머금고 세간살이를 반넘게 정리해서 창고에 쟁여놓고 이사를 했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생활하며 문득 놀라게 되는 사실은 그 '눈물을 머금고' 정리했던 물건들이 이 집에서 사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먼저 집에서 곳곳에 쟁여져있던 물건들, 손때 묻어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았던 소중한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소중한' 것들의 쓰임새가 사는데 별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데 더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버리고 왔는데, 어느새 이 좁은 집에서 또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 내놓은 5단 책장을 낑낑거리고 들고 와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구석에 놓았다. 들여놓기가 무섭게 5단 책장은 그득하게 물건들이 쌓여갔다. 사는게 이렇다. 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난 또 물건에 치이고 있다. 




혁명적인 미니멀 라이프 
8월 31일 저녁 7시 35분에 방영된 <사람과 사람들-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물욕'에 대한 '혁명'을 그려낸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방송 카메라는 하남시의 한 아파트로 들어선다. 하얀 붙박이 가구들, 거실엔 덩그러니 검은 색 가죽 소파와 tv, 그리고 몇 그루의 화분뿐. 이런 식이다. 부엌으로 가니 더 단촐하다. 그 흔한 김치 냉장고도, 식탁도 없다. 거실도, 부엌도, 방들도 훵~하다. 이렇게 '단촐'하다 못해, 사람이 사는가 싶은 박동성, 황윤정씨의 집을 사람들은 '모델하우스'라 부른다. 아니 모델하우스도 이보다는 차려놓은 것들이 많겠다. 

그런데도 방송팀이 방문한 날 아내 황윤정씨는 바쁘다. 매일 출근하는 요일 별 옷이 전부인 그녀의 옷장, 그리고 행거 하나를 채운 남편의 옷장, 거기서 아내는 안입는 옷을 골라내느라 바쁘고, 그런 아내에게 '이건 보프라기가 나서, 이건 은갈치 같아' 라며 남편도 신이나서 장단을 맞춘다. '버리는데 너무 신나신 거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두 부부는 이를 '축제'라 답한다. 

'버리는 것이 축제'가 되는 삶, 박동성, 황윤정씨가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이날 방송의 주제다. 두 부부가 사는 집엔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이 있다. 다섯 식구 분의 그릇과 수저, 압력 밥솥은 밥을 했다가, 뚜껑을 바꾸면 국솥이 된다. 요리는 후라이팬 하나로 뚝딱. 새로운 요리를 할랴치면 씼어서 하면 된다. 그러니, 당연 설겆이가 줄어든다. 이 집에서 줄어든 것은 '설겆이'만이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 전에 베란다를 가득 채웠던 화분이며, 거실을 채웠던 커다란 어항, 그리고 가구와 그 가구를 채웠던 물건들. 맞벌이를 하는 아내 황윤정씨는 집에 오면 그 물건들을 보살피느라 허리를 펼 틈이 없었고, 남편 박동성씨 역시 그런 아내 눈치를 보느라 집에 와도 맘 편하게 소파에 눕기가 힘들었다.



늘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치워'였다는 아내 황윤정씨, 어느날 돌아보니, 그렇게 자신과 식구들을 괴롭히던 물건들이 다 자기가 사들인 것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단다. 그래서 하나둘씩 버리게 된 세간살이, 꽃을 좋아했던 황윤정씨는 이제 꽃을 보기 위해 베란다에서 죽은 화분을 키우는 대신, 밖으로 나간다. 자연이 선사해준 정원에서 한껏 자신의 취미 생활을 한다. 백로가 날라드는 그녀의 정원(?)을 보고 너무 사치스러운 게 아니냐며 감격하며. 

그렇게 버리는 것을 실천하기 시작한 황윤정씨는 그녀의 미니멀라이프를 자신의 삶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온라인 카페 '최소한의 것으로 사는 삶'을 만들었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녀의 집에 모인 그녀의 '미니멀 라이프 친구들'. 동지들답게 함께한 식사 자리에 저마다 보자기에 싸온 각자의 식기들을 꺼낸다. 식기와 수저를 들고 온 '혼밥' 한 끼. 어느 집이나 '손님 초대용'이라며 쓰는 그릇보다, 쓰지 않는 그릇을 쟁여놓고 사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저마다 식기와 수저를 싸들고 온 '미니멀 라이프 까페' 회원들의 식사 자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쉽지 않은 버리는 삶, 하지만 버리고 나면 행복해 지니
카메라는 황윤정씨네 집을 넘어 그녀의 까페 동지들의 집을 탐방한다. 아이 장난감이 너무 없어 아이를 '학대'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이지현씨네 집은 황윤정씨네도 있는 소파조차 없다. 거실에는 요 하나 깔려있고, 책 몇 권이 끝이다. 부엌 식기는 컵까지 12개, 시부모님이라도 오실라치면 아들의 캐릭터 식기는 졸지에 남편 몫이 되고, 아내 이지현씨와 아들은 시부모님들이 드신 다음에 그 그릇을 씻어서 식사를 해야 한단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그런 이지현씨네 생활 방식을 그러려니, 알뜰하다고 너그럽게 보아 넘기신다고. 장난감이 없는 아이는 바구니 하나를 가지고도 신이 나서 놀이를 즐긴다. 동료 까페원의 말처럼 장난감없이 노는 아이는 작대기 하나만 쥐어줘도 한 나절을 논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란듯이.

이지현씨네 집의 미니멀 라이프는 그저 물건을 버리는 삶에서 그치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절제는 먹거리에 대한 절제로 이어져, 이 부부는 생협 매장을 이용해 건강한 먹거리를 먹되, 채식 위주의 식사로 생활 습관을 바꿨다. 2~3가지의 채식 반찬, 덕분에 중년에 들어선 남편은 애써 운동을 하지 않아도 몸무게가 줄었고, 건강 검진에서 좋은 수치를 얻었다고 한다. 



이제 막 까페에 가입한 류정국, 문정현씨 부부는 까페 회원들의 미니멀 라이프를 본받으려 하지만 녹록치 않다. 남편과 아이들과 자신의 꿈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처분'하겠다고 마음 먹은 아내 정현씨, 하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는 물건마다 그녀를 갈등에 빠지게 만든다. 심지어 남편과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약간의 충돌마저 벌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버리려고 했던 시작이 아이들을 맡기고 벌여야 하는 전쟁이 끝난 후, 아직은 세 명의 아이들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류정국-문정현 부부의 집에 공간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큐는 말한다. 삶을 변화시킨다고 할때, 철학 등을 우선 논하기가 쉽지만, 어쩌면 진짜 필요한 것은 8월 31일 방송이 보여준 삶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 생산 시스템을 전제로 하고, 그 전제의 바탕 위에 쌓여진 '소비'의 거대한 성채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허덕이며 신음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은 어떤 거대한 사상의 전환이나, 정치적 격동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는 바로 그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삶의 전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부끄럽게 만든다.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무감각하게 투항하며 길들여져 왔던 삶의 관성을 다큐는 직시하게 만든다. 다큐에 등장한 몇몇 부부의 미니멀 라이프를 다큐는 '주제가 있는 삶'이라 정의내린다. 그저 쓰지 않고 소용되지 않는 것들을 쓸 것이라 고집하며 쌓아두었던 '적체된 삶'의 관행에서 벗어난 '버리는 삶'은 그저 물건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과연 내 집의 주인은 누구며, 내가 아둥바둥 늘리려고 하는 집을 채우는 것이 무엇인가 대한 '레디컬'한 질문이다. 내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덜어내며, 훤해진 집처럼, 삶도 훤해지는 듯 보여진다. 늘 서로의 가사 일 때문에 신경전을 벌였던 부부는 이제 서로를 마주보며 감사해 하고, 그 물건으로 인해 빼앗겼던 일상을 소중한 것들로 채워간다. 물건만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치덕치덕 덧대어 졌던 '허위의식'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저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by meditator 2016. 9. 1. 17:15

8월 24일 첫 회를 방영했던 sbs의 수목 드라마 <질투의 화신>, <w>와 <함부로 애틋하게>의 스타들이 포진한 양 강 구도에서, 1회 7.3%, 2회 8.3%(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거뜬히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양호한 성적과 달리, 1,2회를 방영한 직후 <질투의 화신>과 관련하여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 상 설정이었다. 




빨간 출입증의 기상 캐스터, 표나리
실제로 기상 캐스터로 일하는 사람의 입장까지 등장하며(실제 기상캐스터가 본 질투의 화신, 사실 왜곡 화난다, 스타뉴스) 온라인 상에서는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표나리(공효진 분)의 처신과 표나리를 대하는 방송국 사람들의 적나라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극중 표나리는 3회에 설명되는 것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아나운서 학원을 다니고, 몇 번의 낙방 끝에 아나운서 대신 기상 캐스터가 되었다. 7시 뉴스의 마지막 5분을 책임지는 경력 5년 차이지만 여전히 정규직 아나운서들 앞은 물론, 방송국에서 기를 못펴는 비정규직이다. 거기에 뉴스 디렉팅을 맡은 부조 피디의 '엉덩이를 좀 더 빼라'는 식의 성적 수치심을 주는 디렉팅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아르바이트 명목으로 갖은 잔심부름까지 하는 형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기상 캐스터의 존재론이다. 3회에 드러나듯이, 서숙향 작가가 표나리를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정규직의 파란 줄 출입증을 가지지 못한, 빨간 줄의 비정규직 기상 캐스터이다. 거기에 분명 뉴스의 일부이면서도, 보도국의 일원으로 대접하지 않는 방송국의 노골적인 위계 질서와, 방송이 여성을 다루는 관습에 대한 '통찰'이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의견은 '성적'으로 희화화된 표나리와 노골적인 '을'의 존재로 인해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여자 아나운서'를 '뉴스의 꽃'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했던 세상에, 거기에 '연성화'되어가는 방송에서, 케이블을 위시한 각 프로그램의 여성 캐스터들의 '야한' 옷차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질투의 화신> 속 표나리의 노골적인 을의 처지는 그 누군가에게는 모욕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으로 '공감'을 주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 속 기상 캐스터의 설정이 줬던 불편함은 '진실'과 '왜곡'의 경계에서 문제를 던진다. 이렇게 서숙향 작가의 <질투의 화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미묘한 지점'에 촛점을 맞춘다. 

유방암에 걸린 남자, 이화신 
방송국내 '을'인 기상 캐스터 표나리의 수모로 이어졌던 1,2회에 이어, 3회는 남자 주인공 이화신의 수모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미 첫 회에서 이화신의 가슴을 '탐'하여, 그 조차도 여성에 의한 성희롱 논란을 빚었던 드라마는 그 '미묘한' 접촉을 이화신의 유방암 설정으로 이어간다. 부담스레 이화신의 가슴에 집착했던 표나리는 그 이유를 유방암에 걸렸던 할머니,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라 밝히며 '성희롱'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 무시했던 이화신은 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병원 치료 과정에서,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결국 이화신은 여성들이 입는 '분홍색' 가운을 입고, 유방암 진단을 위한 촬영을 하게 된다. 건강 검진을 해본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그 어떤 검진보다도 고통스럽고, 때론 모멸스럽기까지한 유방암 진단 촬영을 가슴이 없는(?) 남자 이화신이 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없어서 쥐어짜서 촤영을 해야만 하는 과정을 드라마는 애교스럽게(?) 그 옛날 영화에서 남녀 상열지사를 물레방아로 대신하듯, 과즙이 쥐어짜지고, 호두가 부서지는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해 냈다. 하지만 어거지로 유방암 촬영기 앞에 가슴을 짖눌리는 이화신의 모습에서, 앞서 표나리의 기상 예보 과정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경계에 다시 한번 서도록 만든다. 과연 저 장면을 유방암 진단 과정의 '리얼'함으로 웃어 넘겨야 할까? 아니면, 표나리가 이화신의 가슴을 주무르는데서 느꼈던 불편함처럼, 또 다른 성적 '희롱'으로 보아야 할까? 



드라마는 마치 장군멍군처럼, 여주인공 표나리에 이어, 이화신에 대한 경계성의 설정을 통해 서사를 풀어나간다. 과연 이런 것들은 '노이즈 마케팅'처럼 '논란'을 통한 화제성의 부추김일까? 

아니 오히려 <질투의 화신>이 하고자 하는 바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경계'인 듯하다. 극중 남자 주인공 이화신은 가족과 '절연'에 가까운 상태다. 그 이유는 바로 촉망받는 기자였던 그가 자신의 형인 이중신이 했던 사업체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 보도로 인해 이화신은 기자상을 받았지만 도피하듯 지난 3년간 방콕에서 보냈다. 이화신은 어차피 형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은 보도가 될 사안이었기에 동생인 자신이 먼저 해서 언론의 '가차없는' 뭇매를 피해 정확하게 보도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그 결과 형의 사업은 망했고, 형의 딸인 빨강을 비롯한 가족, 심지어 형의 전처까지 그를 '사람'처럼 보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이화신의 진심과, 그의 진심이 드러나는 현실은 '공감' 대신, 그를 천하에 형까지 팔아먹는 나쁜 놈으로 '모욕'한다. 아니 '곡해'한다. 작가는 그런 '오해받기 딱 좋은' 경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려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세상은 한 발 물러서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신, 갈수록 니 편과 내 편, 남자 편과 여자 편을 갈라, 서로의 편먹기와 그 편의 성을 공고히 하는 전열을 정비하는데 골몰한다. 제반의 사건들은 조금의 이해 대신, 과연 이것이 내 편의 전략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의 전술적 가치로 나뉘어지고, 그런 가로세로 구획 정리가 바쁜 세상에서, <질투의 화신>은 가장 미묘한 경계로부터 오해를 불러 일으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위험천만한 시도가 대중의 공감을 살지, '모욕'만을 남기며 사라질지는 서숙향 작가의 내공에 달려있다. 부디 그 경계의 서사에 행운을. 


by meditator 2016. 9. 1.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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