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의 여왕>을 보러 찾아간 날 그 사람들이 득시글거리는 도심 한 복판 극장가에서 세 명 남짓 영화관을 채웠다. 8월 25일 개봉한 <범죄의 여왕>은 27일 기준으로 가까스로 2만 명의 관객을 넘었다.(22,082명 영진위)




이 초라한 성적표의 이유는 여러가지일 것이다. 우선은 이 영화가 상영되는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듯 '광화문 시네마' 제작, (주) 콘텐츠 판다의 배급이라는 배급과 제작의 불리함을 우선 들 수 밖에 없다. 한국 영화 제작의 독점이 심화되고, 이제 그 독점의 해법을 또 다른 외국 독점 자본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는 자조적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수평적 무브먼트'를 지향하는 영화 창작 집단 '광화문 시네마'의 시도는 건강하지만, 아직은 그 목소리의 울림은 역부족이다. 또한 new가 설립한 콘텐츠 유통 전문 회사로 독립 영화 배급에 뛰어든 (주)콘텐츠 판다의 배급도 역시나 한계적이다. 거기에 아직까지도 대중적이지 않은 '블랙 코미디'와 '스릴러'의 결합이라는 '신선한(?)' 장르도 제한적이다. 스타는 커녕 '엄마'가 주인공으로 범죄자를 잡는다니, 애초에 젊은 층들은 외면하고, 나이든 층들은 낯설어 할 내용이기 십상이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범죄의 여왕>이 흥행하기 힘든 이유를 대자면 손가락을 줄줄이 접어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색다른 한국 영화를 선택하고 싶다면 <범죄의 여왕>를 권하고 싶다.

독특한 분위기의 고시촌 스릴러
고시생 아들을 둔 지방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는 아줌마, 미용실이라지만 동네 장사의 한계성을 돌파하기 위해 아줌마가 요즘 주업으로 삼고 있는 건 '야매 보톡스'이다. '야매' 장사까지 해서 돈을 버는 아줌마에게 고시생 아들의 전갈, 수도요금이 120만원이 나왔으니 돈을 부치라는 것! 아들은 엄마의 '돈'이 필요해서 보낸 전갈이지만, 동네 아줌마들 상대로 '입'이 부르트도록 '보톡스'를 팔아 돈을 버는 엄마는, 그 돈 120만원을 호락호락 보내줄 수 없다. 아들의 수도세를 해결하기 위해 상경한 엄마,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윗층의 소음에 참다못해 뛰쳐 올라간 고시생의 비명으로 부터 사건은 이미 예고된다. 하지만, 저마다 문을 닫아 걸고 괴괴한 정적만이 맴도는 고시원, 그 철저한 '개인주의'의 무덤 속 사람들은 그 사건마저 불통의 관례로 접어 넘긴다. 하지만, 이미 미용실에서부터 동네 오지랖으로 한 '껀'을 했던 엄마는 예의 그 오지랖으로 아들의 수도요금을 '사건화' 시킨다. 



영화의 서사는 막상 다 보고 뒤돌아 서서 생각해 보면 전형적이다. 굳이 영화화 할 것도 없이, 드라마 스페셜의 한 편 정도로도 그닥 새로울 것 없는 내용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렇지 않다. 뻔히 다음이 어떻게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영화가 마무리되는 지점까지, 흥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 

그 흥미를 추동하는 첫 번째 요인을 든다면 <범죄의 여왕>이 가지는 독특한 '미장센'을 들 수 있다. 이형곤 감독의 <구미호 가족(2006)>같은 기괴함은 아니지만, 박찬욱 감독의 화려한 퇴폐미도 아니지만, 절망의 늪같은 분위기를 흠씬 자아내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스릴러'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고시원'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범죄의 여왕>의 분위기를 한껏 자아낸다. 분명 흑백 화면이 아닌데도, 흑백보다 더 암울한 분위기의 고시원에 한껏 화려한 색채의 원피스를 입고 등장한 엄마 양미경씨,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미, 고시원이란 공간에 파열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 색채의 대비만큼, 엄마는 지금까지 '고시원'이 암묵적으로 지녀왔던 '개인주의'적 규율에 파열음을 일으킨다. 

오지랖 엄마, 소통으로 사건을 해결하다 
고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돈이나 내고 내려가라는 아들의 말에, '엄마가~'를 연발하며 며칠의 말미를 얻은 엄마는 고시원 관리실을 시작으로 과잉 부과된 것이 분명한 수도 요금의 조사를 시작한다. 엄마의 야심찬 수사에도 불구하고 수도 요금 과적은 매번 장애를 만나게 되고, 야무지게 현장을 급습한 창고에서는 엉뚱하게도 합격탕의 실체만 만나게 된 채, 경찰행이 되고 만다. 

엄마의 수사, 그 과정의 포인트는 바로 오랜 미용실 경영으로 단련된, 만나는 사람 그 누구라도 대번에 '아는 사람'을 만들고 보는 '오지랖'이다. 관리실 형님들에게는 맞고 쑤셔박히는 신세지만, 고시생들에게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운 들짐승' 같은 '개태'를 '엄마 해줄까'라며 구워삼는가 하면, 동네 바보 취급당하는 만년 고시생을 '덕구야~'라며 부르며 사람 취급해주는 것도, 히키코모리 게이머 진숙과 소통하는 것도 엄마 특유의 너스레이다. 

그리고 바로 <범죄의 여왕>속 엄마가 '여왕'인 이유는, 고시촌 그 저마다의 섬 속에서, 각자 자신의 입신양명만을 향해 질주를 벌이는 무리들 속에서, 튕겨져 나온 '루저'들의 집합체 같은 고시원이라는 연옥에서, 엄마 특유의 너스레와 붙임성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점으로 이어, 그 '네트워크'로 사건 해결까지 이르렀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저 엄마의 아줌마 특유의 너스레나 오지랖을 영화적 도구 혹은 그저 아줌마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개인'들만의 섬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고시촌에서, 결국엔 '살인 사건'까지 해결할 수 있는 '소통'을 꼭 집어 낸다. 



또한 영화는 '입신양명'의 극한값인 '고시'라는 블랙홀에 휘말린 인간 군상과, 그 '고시'를 위해 영업정지를 당하며 보톡스 시술을 해가며 그것을 지탱하는 엄마를 통해 부도덕한 '성공' 사회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살인'에 귀결되는 십수생과 그런 부도덕한 뒷바라지를 창피해 하면서도, 해준 것이 없으면 조용히라도 있으라며 닥달하는 아들의 뻔뻔함을 통해 '부도덕'이 체화된 사회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영화는 그런 '부도덕' 혹은 '성공'의 늪같은 고시촌이란 배경을 통해 한국 사회를 '냉소'하면서도,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엄마 양미경을 통해, 그럼에도 '인간적인' 가능성을 열어보인다. 시골에서 보톡스나 해주며 영업 정지나 맞는 엄마를 부끄러워하면서도, 돈이나 내고 내려가라는 아들의 외면에, 마지막 순간 그래도 엄마를 구하러 와줬으니 되었다며 퉁치자는 양미경씨의 낙천성은, 그간 한국의 모성상을 고스란히 이어가는 듯 하면서도 변주된 흔쾌한 넉넉함이다. 모성의 고생을 신파조로 읇조리지도 않고, 그 삶의 노동성을 배경으로 터득된 '오지랖'으로 사건을 해결해 가는 엄마 양미경은 근자에 보기드문 건강한 모성성이다. 이 모성성의 건강함 덕분에, 한껏 기괴했던 고시촌 스릴러의 칙칙함은 쾌활한 블랙 코미디로 전화된다. 물론 거기에는 박지영이라는 배우의 독보적 매력이 전제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영화는 엄마의 조력자로 양아치 개태에, 동네 바보 취급당하는 만년 고시생 덕구와, 히키코모리 진숙을 배열하며, 인간의 가치를 반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예전 시골 공동체가 건재할 때는 동네 모자른 사람들도 저마다의 몫을 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고 했던가, 마치 <범죄의 영화>는 2016년 '인간 관계'가 사라진 도시 속에 시골 엄마가 재건해낸 저마다의 자리와 몫이 있는 '인간 네트워크'와도 같다. 


by meditator 2016. 8. 29. 06:59

'청춘시대'라면서, 전혀 푸르지 않은 청춘을 그리고있는 드라마 <청춘시대>, 이제 종영을 한 주 앞둔 드라마는 극중 두 주인공 이나(류화영 분)와 진명(한예리 분)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선사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전환점은 그 이전 두 사람이 살아왔던 삶 만큼이나 희비가 갈린다. 




나도 죽일 거예요?vs. 희망은 재앙이었어요 
돈많은 아저씨들을 '물주'삼아 하루하루를 탕진해왔던 이나, 그에게 등장한 '아저씨,  이나에게 추근거리던 다른 아저씨들과 달리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아저씨는, 자신의 원룸에 이나의 동정을 샅샅이 붙여두던 '스토커'였으며,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중에 이나와 함께 물에 빠졌지만 살아남지 못했던 학생의 아버지였다. 밀린 체납 임금을 받으러 갔다 벌어진 피치못할 사건으로 감옥에 있었던 아버지는 사건을 '기사'를 통해서 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딸에게 사주었던 싸구려 플라스틱 팔찌가 마지막 생존자 이나의 손목에 둘러져 있는 것을 본 아버지 오종규(최덕문 분)는 딸의 복수를 위해 감옥에서 나온 후 줄곧 이나를 스토킹해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나,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를 피했지만, 결국 그의 원룸을 찾아가, 그날의 진실을 말하고 묻는다. '그래서 나도 죽일 거예요?'라고. 

오종규는 결국 이나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나는 그날 이후, 그간 '업'으로 삼았던 아저씨들과의 만남조차도 시들해졌다. 대학생인 룸메이트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이나에게 나타난 아저씨, 그녀의 방에서 몰래 가져간 딸의 팔찌를 돌려주며, 그걸 '부적'삼아 열심히 살라고 말한다. 그리고 돌아가며 덧붙인다. '자책하지 말라'고. 

아저씨의 그 말 한마디로 이나는 비로소 자신을 들여다 본다. 그리고 물에 빠진 그날 이후, 오랫동안 물 속에서 자신의 팔목을 잡고 있는 것이, 죽은 아저씨의 딸이 아니라, 그날의 자신이었음을, 그날의 사건에서 자책감으로 헤어나오지 못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아저씨의 말 한 마디로 이제사 수면 위로 올라온 이나, 이나가 옷집 점원으로 새로운 삶의 전환점을 돈 그 시점, 늘 그녀와 암묵적 '신경전'을 벌였던 진명은 그녀의 삶에서 튕겨져 나와 버린다. 늦잠을 자고, 수업을 빼먹고 , 알바를 하는 곳에서도 엎드려 있다. 분초를 다투며, 시간을 쪼개 알바를 하고, 공부를 했던 진명, 하지만 룸메이트들이 섣부르게 축하했던 공기업 면접에서 떨어진 순간, 그리고 벼랑 끝이라 버텼던 레스토랑에서 도둑으로 몰린 그 순간, 그녀가 앙다물며 버텨왔던 삶의 끈이 툭 끊어진다. 동생의 신검 통지서를 어머니에게 전해준 진명은 '희망은 재앙이었어요'라는 말을 전한다. 



청춘, 그 어깨에만 온전히 지워진 삶의 무게 
이나는 면접에서 떨어져 망연자실해 있는 진명에게 말한다. 그날 신고갔던 신발때문이라고, 하지만 진명은 답한다. 자기보다 더 어려운 형편의, 그리고 그날 자기보다 다 나은 입성이 아닌 친구도 합격했는데, 그건 아닌거 같다고. 그리고 힘없이 덧붙인다. 계속 더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하는데, 자기가 뭘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나와 진명의 희비는 찰라에 뒤바뀐다. 몇 년의 세월을 두고 자책감에 자신을 내던졌던 이나에게 전해진 아저씨의 '니 탓이 아니라'는 한 마디, 그리고, 그럼에도 더 열심히 해야하지만, 동생이 죽을 뻔한 날 보았던 엄마의 어쩔 수 없는 표정에서 읽혀졌던 몸부림쳐도 빠져나갈 수 없는 진명의 가족사, 그리고 이제 엄마의 빛마저도 갚을 길이 막막한 현실. 

그래서 이나는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 하지만, 진명이 선택한 인생은 절벽 아래로 스스로를 밀어 뜨리는 선택, 하지만 그런 진명의 변화를 읽은 엄마는 진명이 하려했던 선택을 앞질러버린다. 



<청춘 시대>의 두 주인공 이나와 진명은, 우리 사회 어두운 청춘의 단면이다. 이나는 사건 사고의 트라우마에 짖눌린 청춘이라면, 진명은 '각자 도생 자본주의 사회'의 뒤안길이다. 드라마는 그걸 온전히 자신의 짐으로 감당해야 하는 '청춘'을 그린다. 그들은 한창 푸르러야 할 나이이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나에게 몇 년이 지난 후, 그녀가 자신의 딸을 죽이려 했다며 그녀를 스토킹하다 그녀의 아픔을 뒤늦게서야 알아봐주는 아저씨 대신, 사고가 일어났던 그 당시, 그녀의 트라우마를 치유해 주는 '사회'적 제도가 있었더라면, 이나는 그렇게 지난 몇 년간 자신을 방기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다. 진명이 오랜 동생의 병구완에 사채 빛까지 쓰며 파산해버린 엄마를 외면하며 자신의 대학 생활을 홀로 고군분투하며 애쓰지 않는 현실이었다며,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갖은 수모를 참으며 밤낮을 구분하지 않고 벌이를 하지 않고,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동생을 '사회'가 부조해 주었다면, 그녀가 이제 '무언가를 더 열심히 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휘몰아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는 가장 사적인 형태로 이 시대 청춘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드라마 속 '책임감있는 어른' 혹은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어른의 모습은, '사회'로 치환시켜 읽어내야 하는 '시대적 아픔'이다. 그래서 그 몇 년의 세월 동안 자신을 물 속에 수장시켰던 이나와, 더 열심히 할 여력이 남지 않아 막다른 선택을 하려했던, 그리고 그녀를 대신할 수 밖에 없는 진명모의 선택이 애닮다. 즉, 사회가 다하지 못한 책임이 온전히 청춘과 그를 둘러싼 '어른'들에게 짐지워진 그 사연은 어쩌면 운나쁘게 우리 중 누군가에게 닥칠 지도 모를, '운명의 장난'이기 때문에, 더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by meditator 2016. 8. 21. 16:21

소위 말하는 '막방 버프'라는 것도 없었다. 지난 주 올림픽으로 인해 한 주를 쉬어간 <원티드> 마지막 회 4.9%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나마 초반 7,8%를 오르내리던 시청률은 비슷한 장르 드라마인 <w>의 방영과 함께 반토막이 나다시피 했고, 거기서 좀처럼 반전의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종영을 맞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시청률'이라는 잣대로 <원티드>를 평가해야 할까? 중장년층이, 심지어 젊은 층조차 고달픈 현실 생활의 시름을 잊고자 드라마를 보는 세상에서, '현실'의 가장 적나라한 모사가 이루어졌던 비주류 장르 드라마를 '시청률'로만 평가한다면 아마도 공중파 tv에서 '스릴러'나, 신선한 시도는 씨가 마를 듯하다. 마치 우리가 건강을 위해 심심한 야채를 밥상에 채워넣듯, <원티드>와 같은 새로운 스릴러는 건강한 방송 문화의 비타민처럼 앞으로도 꾸준히 복용되어야 할 것이다. 




드라마로 들어온 리얼리티 쇼, 원티드 
당대 최고의 여배우 정혜인(김아중 분)이 은퇴 발표를 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아들이 납치 당한다. 그리고 범인은 요구한다. 자신의 미션을 수행할 시청률 20%가 넘는 리얼리티 쇼를 만들어라!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정혜인은 범인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하고, 현 남편인 송정호(박해준 분) ucn 사장과 방송인 신동욱(엄태웅 분) 피디와 최준구(이문식 분)  ucn 드라마국 국장등과 함께 <원티드>를 방영하고자 한다. 여기에, 방송 작가인 연우신(박효주 분)과 신참내기 방송인 박보연(전효성 분)이 합류한다. 범인의 미션에 따라 <원티드>를 만들기로 한 제작진 하지만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 정해인의 뜻과 달리, 합류한 각자의 이해 관계는 서로 다르다. 이런 서로 다른 이해 관계와 범인의 요구가 엇물리면서, 리얼리티 쇼 <원티드>는 첫 회부터 난항을 겪는다. 

방영 전부터 방송사 앞을 진을 치며 방영 반대를 외치던 시민들, 하지만 시청률 20%라는 요구를 달성하기 위해 타 리얼리티쇼에 출연까지 감행하며 애를 썼던 <원티드>, 하지만 '방송'이라는 목적에 충실하겠다는 신동욱 피디의 적나라한 연출은 선정성에 약한 시청자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순조롭게 시청률 20%라는 미션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방송 개시와 함께, 리얼리티 쇼는 뜻밖의 상황을 만들어 낸다. 어린 현우인 줄 알고 구출했던 아이가 알고보니 가정 폭력의 피해자라던가, 그 아버지가 범인에게 살해당한다던가, 현우의 주치의였던 사람이 가난한 환자들을 상대로 부도덕한 임상 실험을 했다던가, 현우의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사건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현우를 찾겠다는 목적에 정혜인은 애가 닳지만 이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 경찰 차승인(지현우 분) 등은 리얼리티 쇼에서 벌어진 사건의 '함의'를 찾기에 골몰하는데....

리얼리티 쇼의 중반을 넘기며 하나 둘씩 드러나는 진짜 사건의 그림자, 방송 초반 가정 폭력범인 대학 교수도, 불법 임상 실험을 했다던 의사도 알고보니 sg 그룹의 가습기 살균제 독성 실험을 무마했던 조력자들이었던 것이다. 조카의 안전을 돕겠다며 ucn 방송국조차 사들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큰아버지 sg 그룹 후계자는 알고보니 가습기 살균제 독성을 덮어둔 최후의 '보스'였고, 오히려 정혜인 아들을 납치까지 하며 범인에 조력했던 나수연과 bj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나, 내부 고발자의 가족이었던 것. 숨겨진 진실이 드러나며 이제까지 방송에 호의적이었던 sg 그룹은 경찰청장, 사장 등을 내세워 방송을 막고자 하고, 이제 방송팀은 현우의 안전과, 범인이 <원티드>를 통해 밝히려고 했던 진실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아야 하는 숙명에 처한다. 



너무도, 너무도 현실적이었던 <원티드>
납치된 아들을 찾기 위해 리얼리티 쇼를 만드는 독특한 상황을 설정한 드라마 <원티드>, 하지만 그 기발한 아이디어와 달리, 그 과정 속에서 드러난 인간 군상의 민낯은 현실을 고스란히 모사한다. 

아들을 찾기 위해 방송을 해야하는 정혜인, 하지만 정혜인과 손잡은 방송팀은 '돈'. 혹은 '방송사의 시청률', 심지어, '방송으로 할 수 있는 한계에 도전하고픈 욕망'까지 저마다의 이해 관계로 엇물린다. 하지만 그 엇물린 이해관계는 '시청률 20%'라는 마약같은 목적을 위해 뒤엉켜 굴러간다. 스스로 범인의 인질이 되는 순간에도 카메라에 잡히는 비극의 당사자로서의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그렇게 '방송', 혹은 '시청률'이라는 마약에 취한 듯한 제작진을 탓할 것도 없다. 그들에 기꺼이청자들이 춤을 춰주니, 정혜인의 아들이 납치당하고, 방송 과정에서 인질극이 벌어지고, 사람이 죽어나가며, 그 과정이 가감없이 전파를 타고 방영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게임'처럼 즐긴다. '재밌다'고 반응한다. 시청자들의 반응은, '비극'에의 공감이 나이라, 불난 집에 불구경하는 '오락성'을 넘지 못하고, <원티드>는 방송을 만드는 사람의 부도덕성과 함께, 시청자들의 탈도덕적 관음주의을 신랄하게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최준구로 밝혀진 범인은 그런 현실의 맹목적 부도덕, 탈도덕을 가장 예리하게 집어냈고, 덕분에 미스터리 리얼리티 쇼 <원티드>는 매회 높은 시청률로 전 사회적 관심을 끌었고, 덕분에 애초에 그가 목적했던 바, sg 그룹의 가습기 살균제 독성 폭로에 다가갈 수 있었다. <원티드>의 첫 회 가정 폭력에서, 이어 부도덕한 임상 실험 등이 '낚시밥'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가며, 경찰청장의 사생활 비리 등을 거쳐, sg라는 자본의 거대한 음모의 폭로로 이어가는 일련의 흐름은 대중적 관심도의 이율배반성을 절묘하게 증명해낸다. 

하지만,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통쾌하게 폭로된 자본의 음모는 드라마< 원티드>에서는 순탄치 않다. 자신의 이해를 위해 피해자 가족 따위나, 경찰은 당연, 심지어 자신의 혈연인 재벌가의 아들조차 제거했던 자본은, 방송사를 사들여 <원티드>의 방영을 막는 것에서 부터, 언제바 방송팀보다 한 발 앞서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당사자들을 제거하며, 진실에의 접근을 막는다. 심지어, 최준구가 스스로 칼에 찔려가며 자본가의 법정 구속을 노리지만, 언론을 장악한 자본은 그 조차도 유유히, 오히려 최준구를 '테러범'으로 몰며, 법망을 빠져나간다. 심지어 가습기 피해자들이 잔뜩 들어찬 스튜디오에서 '사과'를 요구하는 방송에,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며, 완벽한 조작이라며 반전을 꾀한다. 진실이 드러나도, 그 진실조차도 덮어버리는 자본의 힘!

영화 터널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심 끝에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하정우 분)를 구해내듯, 그리고 그의 '꺼져 개새끼들아!'로 답답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긁어주듯, 현실을 반영한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홍길동'이거나, '장총찬(인간 시장의 주인공)'이 되어 부도덕한 현실을 징벌한다. 그게 아니라도, 가진 자들이 스스로의 부도덕한 치여 무너지곤 한다. 하지만, 원티드는 그런 통쾌한 환타지에서 한 발 물러선다. 



사이다 대신, 저마다의 '도리'를 일깨운 결말
아들 현우는 돌아왔지만, 남편의 죽음, 그리고 그를 둘러싼 진실을 알게된 정혜인은 마지막 방송을 한다. 전남편이자, 동생이었던 함태영과의 대화 내용을 예고편으로 꾸민 제작진,  그들의 의도에 따라 함태섭은 방송에 출연한다. 그의 예견된 변호 발언을 뒤로 하고, 그가 예상치 못했던 bj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스튜디오로 등장하여, 그가 그간 벌인 인면수심의 사건과, 그것을 뛰어넘는 전 사회를 대상으로 한 '살해 시도'인 독성 무마에 대한 '폭로'를 한다.  하지만, '사과'를 하라는 피해자들의 읍소에도, 함태섭은 눈 하나 끔쩍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음모'로 돌린다. 그런 그가 자리를 나서고, 대신 정혜인이 허리를 숙여 사과를 한다. 왜 최준구가 자신을, 자신의 아들을 납치했을까 라는 오랜 질문에 대답을 하며. 자신의 전 남편, 함태영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해결하려 했을 때, 자기 가족의 안위를 내세우며,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 사과한다. 

<원티드>는 통쾌한 한 방의 해결, 혹은 사이다같은 자본에 대한 징벌이라는 '환타지' 대신, 그 무엇도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저마다의 '도리'를 남긴다. 시청률 상승을 위해 좀 더 자극적인 방송이나, 폭로에 골몰하던 제작진과 기자가, 다른 태도를 가질 때 방송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원티드> 10회는 보여준다. 또한 사건 수사 과정에서 죽어간 선배의 한 마디, 난 '형사니깐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라는 그 말 한 마디를 가슴에 담은 차승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한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 누구 한 사람의 '영웅'은 없었지만, 그래도 통쾌한 반전 복수극은 없었지만, 대신 사람들은 이제 저 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사람의 영웅 대신, 모두의 자각, 그리고 모두의 한 발이, 어쩌면 그 어떤 반전 복수극보다 가슴과 머리를 울린다. 그리고 이는 비록 4%의 낮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원티드>의 존재 이유를 설득한다. 


by meditator 2016. 8. 19. 16:50

8월 18일자 오마이뉴스 이선필 기자는  최근 개봉한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떨어진 완성도는 마블 코믹스와 경쟁에서 쫓긴 DC코믹스와 손잡은 워너브라더스 경영진의 조급함과 그에 따른 과도한 편집권 침해라 결론 내린다. <기사] 마고로비·설경구·빅뱅탑... 누가 더 억울하게 망가졌나> 하지만,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DC코믹스발 영화가 덜 만들어진단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일진일퇴를 할 뿐, 이제 미국 영화 시장에서 '2차원 미디어'의 영상화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 원더우먼, 아쿠아맨, 플래시 등 대기하고 있는 캐릭터에, 여성 아이언맨까지, 코믹스의 영화화는 앞으로도 미국 영화의 주류가 될 것이다. 




미국에는 코믹스, 한국에는 웹툰 
이렇게 미국 영화 시장의 콘텐츠 소스로서 '코믹스'가 대세를 이루고 있는 반면, 우리 나라의 2차원 콘텐츠 소스로서 활약을 펼치고 있는 건, '웹툰'이 대세다. 일찌기 <외인구단>을 비롯하여, <식객>까지 영화와 드라마의 콘텐츠 소스로서 각광을 받던 만화는, 이제 '웹'이라는 광활한 공간을 배경으로 다양한 소재와 장르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읽는 행위 영역'을 '독점'하고 있다. 일년에 책 한 권 안 읽은 사람은 많아도, 웹툰 한번 들여다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에 따라, 늘 '소재'의 갈증에 시달리는 영화나 드라마에 있어, 인기리의 웹툰은 더할 나위없는 '꺼리'가 된다. 윤태호 작가의 경우, <이끼>는 영화로, <미생>은 드라마로 만들어 졌으며, 심지어 그의 완결되지 않은 <내부자들>조차 영화화되어 2015년을 달구었다. <순정만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26년>의 강풀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가이다. 2015년 드라마화한 JTBC의 <송곳> 역시 최규석 작가의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다. 이종의 장르가 결합된 <밤을 걷는 선비(MBC 2015)>나, <냄새를 보는 소녀(SBS, 2015)>역시 웹툰을 각색한 작품이고, 기발한 상상력의 <패션왕<2014 개봉)>이나, 색다른 소재의 <닥터 프로스(OCN, 2015)>가 가능했던 것도 역시 원작 웹툰이 있었기 때문이다.

2차원의 공간 속에 펼쳐진 상상력 '웹툰'은, 그 2차원이란 한계를 '상상력'이란 날개를 달아,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넘나든다. '보는' 욕구를 적절히 만족시키며, '보는' 것 이상의 '상상'의 나래를 독자에게 달아준다. 그러기에 시각적 욕구가 과점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이 상상력의 덩어리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당연한 일이 된다.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되었던 웹툰,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자가 발전'을 한다. 웹툰을 드라마화하는 것을 넘어, 웹툰과 현실이 교차하고, 웹툰이 현실로 튀어 들어온다. 바로 MBC 수목 드라마 <W>다. 



웹툰의 주인공과 사랑을? 
공중파 수목드라마, 그것도 전통의 강호 이경희 작가가 줄곧 1위를 수성하고 있던 수목 드라마 대전에, 도전장을 내민 <W>는 방송 3회만에 <함부로 애틋하게>를 제쳤다.(전국 12.9%, 수도권 15%, 닐슨 코리아 기준) 김우빈, 수지 VS. 이종석, 한효주의 별들의 전쟁은, 싱겁게도 이종석, 한효주의 승리로 끝났다. 18일 8회를 방영한 <W>는 전반적인 시청률 하락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1위를 수성했다.(12.8%, 닐슨 코리아 기준)

스타급들 출연진의 별들의 전쟁보다, 이 수목 대전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수적인 공중파 시청자들을 상대로, 누선을 자극하는 정통 멜로를 독특한 아이디어의 <W>가 압도했다는 점이다. <별에서 온 그대>는 그래도 외계인이라는 '존재'가 분명한 대상과 사랑에 빠졌다지만, <W>속 남자 주인공 강철(이종석 분)은 웹툰의 주인공에 불과하다. '실재'하지 않는 인물, 가상의 세계 속 인물과 사랑에 빠진 여주인공 오연주(한효주 분)라니!

이 '허무맹랑'한 러브 스토리에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강철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웹툰을 그린 것은 오연주의 아버지 오성무 작가이지만, 정작 드라마 속 강철이 위기에 빠지자, 웹툰 속으로 뛰어 들어간 것은 그의 딸 오연주이다. 오연주는 아버지 오성무 작가가 자신이 그린 강철을 '죽음'으로 내몰려고 하자, 솔선하여 그걸 말리는 존재다. 그런 오연주의 행동의 근거에는, 아버지 오성무 작가가 그린 캐릭터 강철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 있다. 

즉, <W>의 러브 스토리는 죽어가는 강철을 살리기 위해 웹툰 속으로 뛰어든 오연주의 만남으로 시작되지만, 사실 이미 그 사랑은, 그런 '사건'이 시작되기 이전에, 만화 독자로서의 '오연주'의 일방적인 강철에 대한 사랑으로 부터 비롯된다. 즉 자신이 보는 만화 캐릭터를 '사랑하는 것',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작가의 '전지전능'한 캐릭터의 생사여탈조차 막아내는 열성 팬의 도발, 이것이 강철과 오연주 사랑의 근저에 깔린 것이다. 물론 드라마는 거기서 더 나아가, 강철의 마음에 반응하는 오연주의 현실과 만화 사이의 공간 이동의 원인이 알고보니, 강철의 탄생자가 아버지 오성무가 아니라, 오연주였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얹는다. 학창 시절 본 사격 시합의 여운을 캐릭터화시킨 오연주의 상상력, 거기서부터 강철과 오연주의 사랑은 시작된 것이다. 

일찌기 <캔디>의 남자 테리우스와 안쏘니를 둔 '사랑과 전재'으로부터 시작하여, 만화 속 남자 캐릭터를 사랑하는 전사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그런데 그런 해프닝, '덕질'의 역사가, 현실의 드라마로 등장한 것이다. 

사실 드라마의 전개는 아직 작가의 의도가 다 드러나지 않은 것인지 종종 맥락이 분명치 않다. 그토록 '복수'에 매달렸던 강철이 오연주가 자신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삶의 목표를 '사랑'으로 변환한 채, 질주하는 것도 머쓱하다. 마음의 변화가 '공간 이동'의 전제라는 건 공감하면서도, 어쩐지 코에 걸면 코걸이식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종종 석연찮은 맥락조차도, 오연주의 캐릭터 강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면 다 용서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오연주의 '덕심' 가득한 사랑에 대한 공감이 드라마 <W>에 대한 시청자 호응의 전제가 되기도 한다. 만화 캐릭터를 사랑하는 여자가 공감되는 시대다. 



웹툰 속 상상력에 대한 공감 
거기에, 오성무 작가가 그렸지만, 작가의 권역을 뛰어넘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한 강철, 그리고 그의 세계에 대한 공감 역시 드라마 <W>가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작가의 의지를 뛰어넘는 만화 주인공, 그리고 그의 세계. 17일 8회에서 사라지려했던 친구 윤소희(정유진 분)를 달랜 강철은 오연주에게 말한다. '우리도 인간이니까', <W>에서 가장 감동적이면서도 슬픈 장면은 자신이 만화 캐릭터임을 강철이 느낀 그 순간부터이다. 그토록 복수에 매진해 왔지만, 그것이 결국 '설정값'이었단 사실 앞에 좌절하는 강철, 그리고 이제 자신이 그녀를 택하지 않자, 사라지려한 여자 친구 앞에 슬퍼하는 강철, 그리고 그의 세계, 그런 외계와는 또 다른 2차원의 공간 속에 갇혀있는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드라마 <W>의 또 다른 자산이다. 

그리고 그런 상상력에 대해 수긍하는 대중이 바로 드라마 <W>를, 강철이 자신이 갇혀있던 웹툰의 세계를 뛰쳐 나오고, 그래서 작가의 의지를 뛰어넘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고, 이제 그와 그의 가족을 헤치도록 '설정'된 디멘터조차 뛰쳐 나오는 설정들을 '개연성'을 넘어 받아들이게 한다. 어느덧, 웹툰을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그 웹툰의 주인공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의 세계가 '실존'한다는 상상력이 공중파 드라마에서 수긍되는 세상, 바로 '웹툰'의 시대의 또 다른 증명이다. 웹툰 속 상상의 존재와의 사랑이 불치병을 이기고, 현실 비판을 넘겨버리는 시대, 2016년 8월이다. 



by meditator 2016. 8. 18. 16:58

2016년 광복절 특집 방송은 리우 올림픽덕분에 몇몇 다큐를 빼고는 그래도 구색맞추기라도 한 편씩은 있던 특집 드라마조차도 이젠 찾아볼 길 없다. 그나마 다큐도 kbs1이 공영방송으로서의 구색을 맞춰 다각도의 특집 다큐를 마련한 반면, mbc는 한 편으로 면피한 반면, 그나마 sbs는 광복절 경축식 외에는 별도로 마련된 프로그램을 찾아볼 수 없다. 한 연예인의 일본 전범기 관련 논란이 sns로 부터 시작하여 검색어 1위로 '광복절'의 해프닝을 톡톡히 벌인 반면, 정작 <비정상회담>에 출연했던 외국인 타일러도 '노는 날' 이상의 '자주적 권리와 자유를 되찾은'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는 상황에서 정작 리우 올림픽 중계에 열을 올리는 방송은 면피용 다큐 외에는 이렇다 할 '광복'의 경축을 할애하지 않는다. 




광복절의 의미를 되새기는 다양한 다큐들 
그런 가운데에도 다큐는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여, 71주년 광복절에 기릴만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광복절 특집 다큐를 마련한 kbs1은 2부작으로 구한말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의병과 유학자들을 2부작으로 다루었다. 그 첫 번째 13일 방영된 <발굴 추적>은 106년만에 처음 공개되는 서구 결사록을 통해 서간도로 망명한 유학자들이 주축이 된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다. 이어 15일에는 무장 항일 투쟁을 하다 사형당한 병법 전문가이자, 시인인 이강년 의병장의 생애를 다룬다. 그런가 하면, 오전 11시에는 여성 저격수 남지현 등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항일 투쟁의 흔적을 다룬 <독립군의 길을 가다, 1,129km의 기록>를 방영한다. 

이렇게 그간 알려지지 않았거나, 새롭게 조명되는 항일 독립 투쟁을 다룬 다큐들과 함께, 올해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일제에 의해 '경계인'의 삶을 강요받은 재일 동포 등의 삶을 다룬 다큐들이다. mbc는 광복절 특집 다큐로 <아버지와 나, 시베리아, 1945년>를 통해 일제에 의해 강제 징용된 젊은이들이 일본 패망이후 전쟁 포로로 넘겨져 소련 수용소에서 수용되었던 방기된 역사, 하지만 2003년 일본에 의해 보상 청구가 기각된 끝나지 않은 고통의 기록을 다룬다. kbs1은 8월 14일 <자이니치, 김수진 직진하다>를 통해 재일동포 2세의 삶을 다룬데 이어, 15일 당일에는 <kbs스페셜-빼앗긴 날들의 기억-가와사키 도라지 회>를 통해 재일동포 1세들의 현재를 기록한다. 일본의 우경화와 함께,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가 경직되어 가는 시점에서, 일본에 의해 여전히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본이 외면하고 하고 있는 역사의 상흔을 폭로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인다. 

그 중에서도 15일 방영된 <kbs스페셜-빼앗긴 날들의 기억-가와사키 도라지회>는 주목할 만하다. <자이니치, 김수진 직진하다>가 경계인의 도전을 그렸다면, <빼앗긴 날들의 기억>은 일본 한 구석에서 조용히 쓸쓸하게 늙어가는 대신, 거리로 나와 자신의 삶에서 우러난 목소리를 높이는 재일동포 1세 할머니들의 삶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재일 동포 1세대 할머니들의 화양연화 
다큐의 시작은 지난 6월 가와사키 공원의 집회이다. 예정되었던 반한 헤이트 스피치(인종 차별 발언), 하지만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뜻있는 사람들의 반 헤이트 스피치로 인해 헤이트 스피치는 무산되었다. 그 반 헤이트 스피치 집회의 스타는 다름아닌, 올해 79살이 되신 조양엽 할머니였다. 노년의 재일동포 할머니가 반 헤이트 스피치 집회까지 나서서 '전쟁 반대'를 외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양엽 할머니의 '전쟁 반대'는 그녀의 삶이 증명한다. 

가와사키는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사쿠라모토는 대표적인 재일 한인촌이다. 그곳의 복지법인 세이큐사에는 매주 화요일 재일 한국인 할머니들이 모여든다. 일명 '도라지 회', 할머니들은 이곳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함께 춤을 배우고, 글을 배우며 친목을 다져왔다.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에는 그들의 끈끈한 정에 기반한 여러 단체들이 있었지만, 이제 재일동포 1세들이 태반 세상을 뜨고, 그 2세들이 일본 사회에 '귀화'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단체들이 사라졌다. 가와사키에 남아있는 건, 도라지 회가 거의 유일할 정도로. 도라지 회의 할머니들은 이제사 이곳에서 글을 배운다. 일본어도 배우고, 한글도 배우고, 그  어렵게 배운 글로,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살아오며 뼈저리게 느낀 바대로, '전쟁 반대' 피켓을 만들어 들고 거리로 나선다. 

할머니들의 삶은, 나라를 빼앗긴 자의 삶에, 가부장제 그늘에 갇힌 여성의 삶, 그리고 가난한 자의 고통이라는 삼중고로 점철된 생애였다. 낡을대로 낡은 저고리 뒤에 교통편을 적은 채, 홀홀단신 아버지를 찾아 일본으로 온 열 댓살 먹었던 아이, 아버지는 딸을 만난다는 기쁨에 항구로 나갔지만, 정작 거지꼴인 딸을 보고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 식이다. 일본에 돈벌러 가서 소식없는 아버지를 찾아 어머니와 온 다섯살 배기 딸이라거나, 오빠 손에 이끌러 돈 벌러 온 열 두살 먹은 아이라던가, 할머니들의 일본 생활의 시작은 그랬다. 



그리고, 아버지가 새로 옷을 사입힌 소녀의 삶은 그렇다고 그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남자들도 들어가기 꺼리는 탄광 일에서부터, 할머니들의 지난 세월은 가족을 지키고,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기 위해 안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는 상급 학교를 진학하라 했지만 가난한 가정 형편에 꿈도 꾸기 힘들었던 소녀, 아니 일찌감치 돈을 벌러 나가다 보니, 일본어도, 한국어도 배우지 못했던 소녀들, 그녀들은 자식조차 떠나보내고, 홀로남은 이제서야 글을 배운다. 패망하기전 한인들을 그토록 혹독하게 일을 시켰던 일제는 정작, 패망 이후 한인들을 그들이 하던 일로부터 방출한다. 다니던 공장에서, 탄광에서 밀려난 한인들, 결국 가족들을 위해 일본인들이 안먹는 내장을 구워팔고, 밀주는 만들어 팔기 시작한 건, 역시나 여인들. 그렇게 할머니들은 '몇 번을 지더라도 녹슬지 않'는 저력으로 한인 사회의 견인차가 되어왔다. 

하지만, '녹슬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삶은 없었다. 누군가의 딸로,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어미로, 정작 자신은 피어볼 새도 없이, 어느덧 허리가 굽었다. 다큐는, 도라지회의 활동을 통해 이제서야 '자신'의 이름을 쓰고, 자신을 찾아가며, 반헤이트 스피치에 나서서 자신의 살아온 삶의 이력에서 우러난 소신으로 '전쟁 반대'를 외치는 자기 주관을 가진 할머니들의 활동과 함께, 할머니들 각자의 인생 역정을 들려줌으로써, 할머니들의 삶과 그 주장의 울림을 깊게 한다. 그저, 살아온 이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녀들이 거리에 선 이유가 충분히 공감될 만큼. 쟁동포 2세가 경계인이라면, 1세대 할머니들은 몇 십년을 일본에서 살아, 이젠 한국말조차 서툴지만, 한글을 배워 자신을 확인하는 여전한 '고향'을 그리워하는 한국인들이었다. 

by meditator 2016. 8. 16. 06:57

광복절이 71주년이다, 벌써. 하지만, 7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우리 국회의원들의 독도 입성이 '정치적 행위'가 되어야 하고, 그 상대편인 일본은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다. 두 나라 사이의 역사적, 정치적 긴장감은 미국의 동아시아 벨트라는 전략적 군사적 연합에도 불구하고 쉬이 잦아들지 않는다. 광복한 지 70년이 지나도록 두 나라 사이의 알력이 쉬이 해소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 경계에 선 사람들은 어떨까? 8월 14일 방영한 <다큐 공감>은 자이니치 연출가 김수진의 이야기를 통해 여전히 그 경계에서 쉬이 자유롭지 않은 재일동포들의 삶을 다룬다. 




자이니치, 경계인의 삶
'자이니치'(在日, ざいにち) 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통칭하는 표현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재일 한국인들을 뜻한다. 재일 한국인, 그들은 일본에 살며, 여전히 종종 일본인들에게 '조센징'이라 놀림을 받는 처지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해서 일본에 온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 일본에 의해 강제 징용 등으로 '끌려온' 사람들, 그러다 발붙이고 살다보니 이제 2세, 3세까지 일본에 살게 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귀화'하지 않는 한 '자이니치'로 여전히 '국외자'로 취급받는 경계인들이다. 

경계인들의 삶은 어떨까? 도쿄케이자이 법학부 교수가 된 자이니치 서경식은 그 경계의 삶을 '디아스포라(diaspora, 離散)'라는 학문의 영역으로 풀어낸다. 조선, 대한민국, 일본 그 어디에서도 정체성을 확인받을 수 없는 그의 존재가, 역사와 사회의 경계성으로 확산된 것이다. 와세다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가노 데쓰오였던 강상중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한국 이름을 찾았다. 하지만, 그 되찾은 한국 이름으론 일본 사회 진출이 어려워 독일로 유학을 가야만 했다. 그렇게 독일에서 공부한 정치학, 그는 일본의 근대화와 전후 정치사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차없이 하며, 비판적 지식인이 되었다. 그의 '경계'가 그의 '비판'의 토대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도 내노라하는, 책만 내놓았다 하면 베스트 셀러가 되는 학자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경계'라는 그 모호한 정체성 위에 놓여있다. 일본인이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 일본인 대접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국에서도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다.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한국 이름을 지키고 살자니, 일본 사회 내에서 삶은 고달프다. 이것이 여전한 '자이니치'들의 삶이다. 

그들 중 김수진은 대부격인 사람이다. 그의 일본인 아내는, 만약에 그가 '귀화'를 한다면 많은 자이니치들이 실망할 것이다라며 눈물짓는다. 재일 한국인의 대부, 대표적 연출가. 그는 일제 강점기 일본으로 유학왔다가 일가를 이룬 아버지가 물려준 이름 김수진을 고집하며, 30년째 연극 활동중이다. 그가 꾸려가고 있는 신주쿠 양산박은 일본인과 자이니치 단원들이 혼재되어 있는 극단으로, '자이니치'의 이해와 공감을 높일 수 있는 작품들을 주고 공연해 왔다. 

나날이 경직되어 가고 있는 한, 일 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한국의 연극인들을 찾은 김수진, 그들과의 술자리에 그는 '조센징'이라 놀림받던 젊은 시절, 연극이 없었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었을 것이라며 토로한다. 그렇게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고통받는 김수진은 무기 대신,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백년, 바람의 동료들>, <두 도시 이야기> 등을 통해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떠도는 자이니치들의 삶과 애환을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일본 내에서도 큰 상을 휩쓸며,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연출가이지만, 그는 공연이 있을 때면, 직접 견인차를 운전하며 무대를 꾸민다. 그뿐이 아니다. 때론 할머니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다. 그뿐이 아니다. 그의 아내는 극단의 재정을 맡고, 또 다른 단원들을 무대 의상이며, 무대 장치까지 품앗이를 한다. 하루 7000원 짜리 방에서 단돈 33만원으로 한국에서의 며칠을 보내는 그와, 신입 단원을 뽑기조차 힘든 형편의 극단, 하지만 그와 단원들의 열정은 쉬이 지치지 않는다. 가난한 극단의 처지는, 난파선에 휩쓸리는 자이니치의 고단한 삶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에 물을 퍼붓는 그의 파격적 연출을 실현하는 '천막 극장'이라는 차별화된 공연 방식으로 실현된다. 덕분에 그와 단원들은 천막이 펼칠 수 있는 곳이면, 일본 신주쿠의 신사든, 한국의 왕십리 역이든, 그 어디서든 자신들의 무대를 펼친다. 



경계인으로서 살아남기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60줄의 그는 아직 어린 두 아이의 아버지다. 스스로 충실치 못한 아버지라 자신을 평하듯, 그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그의 아이들은 인삿말을 제외하고는 한국어가 낯설다. 뒤늦게라도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려는 그, 하지만 그도 안다. 지금은 한국인이기도, 일본인이기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이, 20살이 되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는 더 늦기 전에, 아이들에게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고자 한다. 

그가 서두르는 이유는 바로 아이들도 자신처럼 경계인이기 때문이다. 경계인으로서 부대끼며 살아가려면,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인식이 명확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그들처럼, 가야인으로 태어나 신라의 명장이 된 김유신을 빗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명해 들어간다. 일본 사회에서 살기 위해, 일본인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일본 사회에서 버틸 수 있다는 그의 교육관은, 곧 그의 신념이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그는 지난 30여년간 자이니치의 삶을 연극으로 구현해 왔으며, 그래서 이제 자이니치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그것이 그가 일본에서 온전히 살아남는 방식이다. 
by meditator 2016. 8. 15. 06:05

청춘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 혹은 그 시절이라 정의내린다. 한자어로, 푸를 청(靑)에 봄 춘(春)이니, 마치 동어반복처럼, 푸르고 또 푸른 시절을 뜻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얼마 전 <응답하라 1988>에 삽입되어 다시금 회자되었던 김창완 작사, 작곡의 <청춘>은 청춘을 구슬프다 답한다. 가장 푸른 계절인데, 가장 애조띤 어조로, '정둘 곳없어라, 허전한 마음'을 노래한다. 가장 활기찬 계절이 구슬프다니, 그 답을 찾고자 한다면, jtbc의 <청춘시대>를 보면 되지 않을까?




구슬픈 청춘의 연가 
이십대의 청춘인 네 여주인공들이 세어 하우스 '벨 에포크'에 모여든다. 스물 여덟, 휴학과 알바로 점철된 대학 생활을 버티며 이제 겨우 고갯마루 졸업반까지 도달한 윤진명(한예리 분), 매일 '다이어트'와의 전쟁을 벌이며, '오빠'에 울고웄는 예은(한승연 분), 그녀가 지나가면 뭍 남자들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게 하등 이상하지 않은 매력적인 몸매와 아름다운 미모의 소유자 강이나(류화영 분), 성격도 좋고, 머리도 좋고, 심지어 말빨도 좋지만 남자는 없어 안달인 송지원(박은빈 분)에, 뒤늦게 합류하여 톡톡히 신방례를 치룬 유은재(박혜수 분)까지 다섯 명의 말 그대로 청춘들이다. 

하지만, 1회 '출발 선상의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시작된 드라마는 '싱그러운' 젊음의 찬사 대신, '젊음'이기에, 말 그대로 삶의 본격적 출발 선상에 선 자들의 어려움을 고스란히 옮긴다. 대학 입학과 함께 난생 처음 홀로 올라온 서울, 그곳에서 만나게 된 새로운 사람들, 그 '새로움'이 반가움보다, '두려움' 혹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첫 회는, 그간 '청춘'을 마냥 '예찬'하거나, 씩씩함으로 쉬이 극복해 왔던 여느 청춘 드라마와 다른 결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은, 이 쉽지 않은 솔직한 청춘 드라마의 갈길이 가시밭길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8회에 들어선 이 드라마는 첫 회 이후로 1%로 안되는 시청률에서 조금씩 회복하고 있지만, 여전히 2%의 고지조차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런 시청률의 고전과 상관없이, 드라마는 엄마의 카드 빚까지 덤태기를 쓰는 만년 대학생 윤진명에, 알고보니 대학생이 아니라 돈을 받고 남자들의 애인을 해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나에, 새침한 줄 알았더니 자존감 부족으로 나쁜 남자에게 끌려다니는 예은까지, '한심한' 청춘의 자화상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말 그대로 궁상맞다못해, 구슬픈 청춘의 연가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똑부러진 지원의 입을 통해 등장한 벨 에포크에 그들과 동거하는 귀신의 존재에, 순진한 은재를 비롯하여, 진명, 이나 등 등장인물들이, 놀라는 대신, 모두 그 귀신과 자신의 연관성을 떠올리거나, 입에 올리며, 드라마는 가장 푸르른 청춘과 '죽음'을 이어붙인다. 



청춘, 그 뒤안길에 드리운 죽음
거리에서 만나는 그 누군가 중 한 명이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그녀들, 하지만 '귀신'의 존재에 '두려움'보다는, 귀신과의 연관성을 떠올리는 모습은 기괴하다. 하지만, 그 '기괴함'을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 드라마에서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삶 속의 죽음이다. 

그만 버티고 나가라는 재완(윤박 분)의 충고에,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버틸 수 없을 것같아 나갈 수 없다는 진명, 그녀에게 죽음은 동생이다. 죽지 않고 6년째 식물인간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동생, 그런 동생에게 전적으로 헌신하는 엄마, 그런 가족을 외면한 채 자신의 삶을 버텨가지만, 결국 엄마의 카드빚 동의서에 서명하고 마는 처지, 신발장 앞의 귀신을 죽지 못한 채 떠돌고 있는 동생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죽음은 그녀가 기꺼이 바라지만, 바래서는 안될, 딜레마이자, 삶의 아이러니이다.  

그렇게 진명에게 죽음이 '딜레마'라면, 그녀와 비슷한 연배이지만, 삶 속에서 버티는 그녀와 달리, 너무 쉽게 자신을 세상에 던져버린 그래서 늘 진명과 신경전을 벌이는 이나의 죽음은, 8회를 통해 드러난 '트라우마'이다. 고등학교 시절 사고로 물 속에서 겨우 가방 하나에 의지한 채 발버둥치던 그녀에게 다가온 또 한 사람, 살아야겠다는 악다구니로 그 다가온 손길을 뿌리쳤던 이나는, 물 속으로 잠겨들던 그 눈빛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 그녀는 살아있다는 부적같은 거라고 하지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그녀의 말대로 이나는 여전히 그 물 속에 잠겨 있는 듯 자신을 방기한 '삶'을 살아간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았지만, 스스로 누군가를 죽였다고 이미 고백한 바 있는 은재에게 드리운 '죽음'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드리울 '죽음'의 그림자도. 드라마는 '극단'의 죽음에서부터 소소한 연애사까지, 2016년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세월호가 연상되는 이나의 트라우마에서, 사회보장 제도 대신 개인의 고스란히 짊어지는 경제적 질곡을 진명의 버티는 삶에서, 그리고 아직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족의 모순은 은재를 통해, 그리고 그 청춘 사업이라는 연애의 이면은 예은을 통해, 가장 현실적인 청춘의 모습들이 드라마로 그려진다. 



이렇게 <청춘 시대>는 여느 청춘 드라마들이 환상적인 연애사를 위한 짦은 시련으로서의 삶의 고통을 전제한 것과 달리, 청춘이라는 시절 조차도 우리 삶의 긴 여정 속에서 따로 띠어놓고 볼 수 없는 한 사람의 짊어진 긴 인생 여정의 일부로 그려내고 있다. 그래서 주인공들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이 겪은 사건 속으로부터, 튀어나오지 못한 채 아니, 거기에 청춘이기에 짊어져야 할 '연애사'조차 때론 숙제처럼 짊어진 채 고통받는다. 그리고 청춘을 지나간 사람들, 혹은 청춘이 되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청춘이 하냥 아름답다 하지만, 청춘들은 지나온 궤적과 함께, 그저 가능서으로만 열려있는 자신의 삶에서 이중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리고, <청춘시대>는 그걸 가장 '적나라하게' 그려내고자 한다. 

박연선의 역설
그러나, <청춘시대>의 작가가 누군인가.  바로 일찌기 이혼하고 만나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려내어 여전히 회자되고 있는 <연애시대(2006)>의 작가이자, 전무후무한 '괴작'이라 하면 꼭 언급되는 <얼렁뚱땅 흥신소(2007)>에, 걸출한 단막극이었던 <화이트 크리스마스(2011)>의 작가 박연선이다. 그녀의 작품에선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산 사람과 죽은 이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그리고 그걸 통해, 역설적으로 포장되지 않는 삶의 진솔함과, 기가 막히게도 긍정성으로 도달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섯 명의 여주인공들이 지금 함께 모여 살고 있는 셰어 하우스의 이름이 '벨 에포크'다. 프랑스 어로  La belle époque , 좋은 시대란 의미다. 그런데 여기서 좋은 시대는, 정확하게는 '좋았던 시대'다. 돌아올 수 없는, 지나간. 벨 에포크의 여주인공들은 저마다 삶, 혹은 죽음의 경계에 선 자신들이 짊어지기엔 버거운 문제들로 인해 고통받는다. 그리고, 벨 에포크라는 곳에서 저마다 그 문제들을 풀어가기 시작한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청춘은 푸른 계절이다. 아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프지만 버티려고 하고, 아프지만 아픔을 직시할 용기가 있던, 그래서 때론 아픔조차 껴안을 수 있었던, 그 푸른 기세의 시절, 그렇게 벨 에포키의 다섯 청춘들은 우리 시대 가장 첨예한 고민에 휩싸이지만, 그 속에서 고민하고 풀어감으로써 진짜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 아름다운 상처의 기록, 그게 아마도 청춘 시대가 아닐까.  소수의 애청자들만이 공유할 소중한 기억. 
by meditator 2016. 8. 14. 15:51

2009년 고작 세 개의 광고로 시작된 <꽃보다 남자>, 하지만 이미 원작 만화는 물론, 대만과 일본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널리 회자되었던 콘텐츠의 유명세는 제작진이 놀랄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 무려 최고 시청률 32.9%(18회, 닐슨 코리아 기준)를 달성했으며, 구준표 역의 이민호를 비롯하여, 김현중, 구혜선 등 출연진 모두를 '스타'로 만들었다. 그러나, 높은 시청률이 곧 좋은 드라마는 아니듯이, <꽃보다 남자>는 방영 내내, 어설픈 스토리로 질타의 대상이 되었으며, 배우들의 함량 미달의 연기는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었다. 




길고 긴 <꽃보다 남자>의 그림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전 '캔디' 열풍처럼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네 명의 잘 생긴 남자들을 '관람'하는 재미만으로도 '욕하면서도', 남자 주인공들의 '비주얼'때문에 용서되는 드라마의 효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8월 12일 tvn은 새로이 시작되는 금토일 밤 11시대의 드라마로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라는 백묘 작가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드라마를 방영하기 시작하였다. 제목에서도 벌써 알 수 있듯이, 신데렐라 처지의 한 여성과 네 명의 남자들이 얽히는 이야기이다.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꽃보다 남자>의 또 다른 '판본'인 셈이다. 2009년의 <꽃보다 남자>에서 2016년의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까지, 아니, 일찌기 77년 mbc를 통해 방영된 이래 83년 재방영되며 그 인기 여파를 몰아갔던 <들장미 소녀 캔디>까지, 한 소녀와 여러 남자들의 '몰아주기 식' 러브 스토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이 기세 등등한 듯 보인다. 

아직도 윤지후 역의 김현중이 하얀 턱시도를 입고 바이얼린을 켜던 이 '오글거리던'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보다 남자>가 기억되는 것은, 이제는 대표적 한류 스타가 된 이민호를 비롯하여, 김현중, 김범, 김준으로 이어지는 훤칠하고 잘 생긴 남자 주인공들이다. 대만 판 <꽃보다 남자>가 가장 먼저 드라마로서의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였고, 일본 드라마가 작품적 분위기에서 가장 원작이 취지를 잘 살렸음에도, 주인공을 한류 스타로 만들 만큼, 남자 주인공들의 '잘 생김'들은 다른 국가의 드라마의 <꽃보다 남자>를 압도한다. 이런 <꽃보다 남자>의 차별적 전략은 그 이후, 평범한 여주인공을 사랑하는 여러 남자들의 다른 버전을 양산했고, 아직도 <꽃보다 남자>가 회자되는 걸 보면, 그 이후의 아류작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방영 당시, 청소년은 물론, 젊은이, 그리고 아줌마들까지 '접수'했던, 이 작품은, 리모컨의 향배를 쥐고 있는 여성 시청자층을 '노리기'에는 가장 편한 선택지가 된다. 



가장 안이한 tvn의 금토 드라마 전략 
그러기에, tvn이 새로이 밤 11시 대에 금토 드라마를 신설하며, 그간 사전 제작임에도 불구하고, 공중파 등의 편성을 받지 못한 채 떠돌던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를 편성한 것은, 여전히 유효해 보이는 <꽃보다 남자>의 전략을 다시 한번 들고 나온 듯이 보인다. 그간, <꽃보다 남자>의 아류작들이 그래도 양심적으로 잘 생긴 남자 주인공들을 내세우되, 그래도 설정은 좀 달랐던 것과 달리,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는, 가난한 소녀 은하원(박소담 분)과 네 명의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돈'으로 많은 것을 해결할 있는 서로가 한 집안인 재벌가의 자제들 강지운(정일우 분), 강현민(안재현 분), 강서우(이정신 분)을 포진시켜, 노골적으로 <꽃보다 남자>의 전략을 따라한다. 사실, <꽃보다 남자>가 인기를 끌었던 솔직한 이유 중 하나는, 여러 잘 생긴 남자들이 한 평범한 소녀를 사랑한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잘 생긴데다, 돈까지 많다는, 그들의 '돈질'에 또 하나의 방점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방영 당시, 그들의 가진 것과, 잘 생김으로 그들이 다니던 학교의 f4가 되어 기세 등등했던, 예의 전략을 답습하며,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 첫 회, 은하원이 일하는 편의점을 찾은 강현민은 그의 약혼녀가 되기를 청하며 대번에 돈다발을 들이밀고, 은하원이 일하는 편의점을 통채로 비우는, '돈'자랑을 한다. 

어디 그뿐인가, 신데렐라에게 나타난 마녀처럼, 돈때문에 강현민의 약혼자가 되기로 한 은하원을 '신데렐라'처럼 꾸며준다. 물론, <꽃보다 남자>의 여주인공 금잔디가 그랬듯이 은하원은, 그런 강현민의 '돈자랑'이나, 그녀 주변에 우연처럼 등장하는 잘 생긴 남자 주인공들의 외모에 눈길 한번 흐트러 지지 않는 의연함을 보인다. 하지만, 금잔디처럼, 그런 의연함과 상관없이, 그녀의 어려운 형편은 그녀로 하여금 1일 약혼자가 되게 만들듯이, 이들과 한 집에서 얽히는 운명을 만들어 갈 것이다. 

이렇게 <꽃보다 남자>의 전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에 대한 반응은 갈린다. '오글거린다'는 반응 한편, 그럼에도 '로맨스 소설' 보듯이 볼 만하다던가, 연기랑 상관없이 잘 생겨서 좋다는 반응으로. <뷰티플 마인드>에 이어 다시 한번 씩씩한 여주인공으로 등장함으로써, 유망주로서의 자신의 캐릭터를 가두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뷰티플 마인드>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웠던 것과 달리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모습이 한결 자연스럽다. 이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의 성과가 영화 유망주에 이어, tv 유망주가 될 지 관건이 될 듯 보인다. 

그래도, 자연스러운 박소담에 비해, 그녀를 사랑하게 될 세 명의 재벌가 자제들의 면면은 그리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 극이 전개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멀쩡한 허우대, 하지만 그 허우대에 비해서는 이렇다할 연기력이 보이지는 않는, 그래서 전작에서 연기력으로 혹독한 신고식을 치뤘던 안재현조차도 그닥 이물감이 없어보이는 정도의 모습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의 모든 여성은 잠재적인 나의 애인이라는 강현민이나, 재벌가의 자제가 된 지 얼마되지 않아, 계층 상승의 괴리감을 오토바이를 타고 한껏 분위기를 잡는 강지운이나, 본투비 뮤지션같아 보이는 강서우나, 이렇다할 캐릭터 이상의 존재감을 드러내보이지 않는다. 마치 첫 회 그들의 연기는 '잘 생겼으니 다 용서가 된다'는 식이다. 

결국 이들의 연기랑 무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이 흐뭇하게 만드는 이들이 비쥬얼이 <꽃보다 남자>에 이어 다시 한번, 새로이 시작하는 tvn의 금토 드라마를 구원할 것인가? 하지만, 안그래도 이미 포화인 드라마 시장에 또 하나의 드라마를 등장시키며, 이미 안이한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tvn이, 여성 시청자들을 가장 안이하게 끌어들일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로 금토 드라마를 안정적으로 안착시킨다 해도, 여전히 굳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그 시간에 드라마를 방영해야 하는 당위론은 쉬이 설득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재벌들의 허황한 사생활에 휘말려든 시청자들을 위한 '고단한 세상에 대한 위로'라기엔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말이다. 
by meditator 2016. 8. 13. 06:50

<끝까지 간다>로 흥행은 물론, 2015 올해의 영화상, 감독상을 거머쥔 김성훈 감독이 새 영화 <터널>을 개봉했다. <터널>은 터널에 갇힌 주인공 이정수 역의 하정우의 고군분투를 그렸다는 점에서, 하정우의 2013년 작품 <더 테러 라이브>와 흡사하다. 더구나, <더 테러 라이브>가 방송국을 폭파하려는 범인을 통해 '대한민국'의 그림자를 그렸다면, <터널> 역시 무너진 터널과 거기에 갇힌 한 사람, 그 사람의 구조를 둘러싼 대한민국 각 집단의 이해 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2016년판 대한민국의 상징물이 된다. 2013년의 폭파된 방송국, 그리고 이제 2016년의 무너진 터널, 그렇게 대한민국은 부서지고, 무너져 간다. 



웃픈 재난극
하지만 시시각각 조여오는 방송국 폭파범의 협박에 핏대를 올리던 <더 테러 라이브> 속의 앵커 윤영화였던 하정우와 무너진 <터널>에 갇힌 자동차 딜러 이정수인 하정우는 다르다. 영화 초반 주유소에 들러 기름을 넣기가 바쁘게 길을 떠났던 그는 곧 전화 속 업무조차도 터널이 끝난 이후로 미루었지만, 곧 무너진 터널을 그를 가두고 만다. 하지만, 생활력 강한 남편이자 아빠 이정수는 무너진 터널 잔해에 깔린 상태에서도 곧 정신을 차리고 119에 신고를 하고, 곧 자신을 구하려 올 거라는 응답에 재난 메뉴얼에 따라 차분히 터널 속 생활의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심지어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려고 하면서. 사람들이 자신을 포기하는 그 순간까지도.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다짜고짜 터널에 갇힌 주인공, 그 대강의 줄거리만 보면 '재난' 영화로서 특별한 사건이 없을 듯한 이 딜레마를 뜻밖에도 구하는 건, 웃음이다. 하지만, 여기서의 웃음은 '기쁘거나 즐거울 때 나는 표정이나 소리'의 그 웃음이 아니다. 첫 장면 주유소에서 귀가 안들리는 노인 주유원과의 해프닝에서 부터 시작된 '삐져나오는 실소'는 지루한 터널 속 이정수의 고전 내내, 그리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관통한다. 무너진 터널에 갇혀 겨우 정신을 차려 가까스로 신호가 잡히는 차 뒤편에 손을 한껏 뻣어 119에 신고를 한 이정수, 하지만 그런 그의 절박함에, 119 교환원은 '메뉴얼' 대로 가장 형식적인 응대를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메뉴얼에 따른 형식적'인 응대로 부터 시작하여, 영화 내내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들은 바로 한 사람의 목숨을 도롱뇽만큼, 아니, 도롱뇽이나, 사람이나, 생명을 생명으로 존중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현실이 순간순간 삐져나오는 그 순간들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그 어이없는 상황이 너무도 현실적이라 삐져나오는 헛웃음, 어쩌면 그게 바로 영화 <터널>이 가닿는 주제 의식일 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덧댄 설명이 아니더라도, 아니 굳이 세월호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상황들은, 이제 구구히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너무도 잘 아는, 그래서 실소밖에 나오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사람이 죽어가는데 '메뉴얼'을 따지는 공무원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사진'찍는 것이 더 중요한 듯, 자신의 처신이 더 우선인 그 윗급들, 그들못지않은 이정수가 빨리 나올까봐 우려하는 '생명'을 '기사꺼리'취급하는 '언론'들, 그리고 '생명'에 대해 무뎌지고 이해타산적인 '여론'이란 이름의 우리들.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각자들은 각자 맡은 바의 자리에서,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공범'들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며, 우리는 그것들을 실감나게 확인하며 씁쓸한 공범 의식에 도달하게 된다. 

영화 <터널>이 빛나는 건, 세월호도 대변되는 대한민국 호의 부정과 부실, 그리고 부도덕을 이정수가 갇힌 무너진 터널이라는 재난 상황을 통해 기가 막히게 모사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부산행>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들이 대한민국을 빗대어 말하고 있지만, <터널>만큼 그 누구라도 면죄부를 운운하기 힘들게, 너나 가릴 것없이 대한민국 호의 각계 각층의 부도덕한 면면을 실랄하게 그려내고 있는 영화는 없었던 듯하다. 

너무도 '인간적인' 김성훈식의 재난 영화 
온 나라가 이정수 구하기에 나선 듯 호들갑을 떨어대던 세상은 그가 터널에 갇힌 뒤 시간이 흐르자, '도롱뇽'을 운운하며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경제적 손실을 들먹이며 살아있는 이정수를 죽은 사람으로 호도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인명 손실조차 고스란히 이정수의 몫으로 돌리며, 한때는 전국민적 성원이었던 사람들이, '여론'의 질타 대상으로 둔갑시켜 버리며. 그래서 결국 그의 아내에게 제 2터널 공사 시작에 대한 서명까지 강요하는. 

이정수가 즐겨듣던 클래식 방송을 찾아가, 어쩌면 살아있을 지도 모를 이정수에게 사람들이 당신을 구하러 가지 않을테니 기다리지 말라며 오열하는 아내, 거기까지, 영화는 계속 가지만, 영화가 절묘하게 묘사해 내는 현실은 거기까지다. 지금까지 신랄하게 현실을 모사해온 대로라면, 세월호가 그랬듯, 이정수는 결국 그 누구도 구하러 오지 않는 터널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맞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으니까. 하지만, <터널>은 잠시 주춤거리지만, 그래도 이정수를 구한다. 



하지만 <터널>에서 이정수가 살아 세상을 맞이하는 방식은 예의 재난 영화 속 그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그 좌절과 절망의 상황에서, '인간적인 의지'로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이기고 '인간 승리'의 역전극을 써내려가지만, 물론, 모두가 포기한 이정수를 단 한 사람, 그와 함께 그가 마셨던 오줌까지 '동참'하려 했던 구조대장 대경(오달수 분)에 의해, 포기했던 가능성의 돌파구를 열었지만, 그것이 천만 영화 <부산행>의 감동과 신파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마지막, '다 꺼져, 이 새끼들아'라는 이정수를 대변했던 대경의 그 한 마디처럼, 오히려 이정수의 생존은 대한민국을 무안케 하고, 그리고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이정수를 살린 것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를 저버리지 못한 대경의 시도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성훈 식의 '인간주의'이고, 이 영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며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김성훈이 그려내는 '인간'은, 흔한 재난 영화의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영웅이라기 보다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포기하지 말아야 할' 최후의 도덕적 양심에 가깝다. 그리고 그건 그의 전작 <끝까지 간다>에서의 인간상과 일맥 상통한다. 

<끝까지 간다>에서 주인공 고건수(이선균 분)는 결코 도덕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장례식날 뜻하지 않게 저지른 교통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어머니의 시신조차 유기하는 파렴치범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진짜 '도덕'따위는 밥말아먹은 박창민(조진웅 분)을 상대로,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예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다. 터널 속에 갇힌 이정수는, 자신처럼 갇힌 미나를 독려하면서도, 그녀와 물을 나누는데 주춤거린다. 자신의 생명줄을 나누어 주는 그 순간에 주저하던 그,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저승길에 매마르지 않게 자신의 생명수를 나누어 준다. 

바로 그 지점, 그것이 김성훈이 말하는 '인간'이다. 대경도 마찬가지다. 내내 대책반의 구조 대장이었지만, 정부의 보여주기 식 구조 대책에 휩쓸려 다니던 그가, 그저 하는 것이라곤 기자들을 상대로 목소리나 높이던 그가, 그래도 갇힌 이정수에 공감하기 위해 자신의 오줌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 최소한의 '역지사지', 그리고 모두가, 그리고 심지어 아내조차도 여론에 떠밀려 이정수의 죽음을 시인해야 했던 그 상황에서,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마지막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바로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터널>을 통해, 김성훈은 멋진 영웅 대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무너진 터널같은 대한민국에서 포기해서든 안될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를 물으며 영화를 마무리한다. 

덕분에, 영화는 흔한 재난 영화로서의 통쾌한 역전 블록버스터는 되지 못했다. 감동과 신파의 도가니도 선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터널 속에서 구해진 이정수의 '꺼져 이 새끼들아!'만으로도 충분히 현실적으로 통쾌했고, 그랬기에, 우리 모두가 고민할 수 있는 진솔한 주제 의식을 남긴다. 세월호를 비롯한 무너진 대한민국, 다수의 영화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꺼리로 삼는다. 과연, 이 사회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어야 할까, <터널>은 그 고민의 깊이가 진솔하게 와닿은 영화다. 


by meditator 2016. 8. 12. 18:02

온 몸에 진흙을 묻힌 채 뒹굴며 느긋하게 휴양지의 일상을 보내는 두 남녀가 있다. 그 때 문득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지금 곧 공항에 도착한단다. 그는 바로, 여자의 전 애인, 당연히 두 남녀와 불청객 그 사이엔 긴장감이 돌고, 한 술 더 떠서 그의 딸이란 여자인지 소녀인지 모를 그녀는 그녀의 현재 남자에게 대놓고 어필하기 시작한다. 이 뒤얽힌 사각 관계의 결말은, 그 얽힌 관계답게 '치정'으로 인한 '사고'로 귀결된다.


poster #1




<수영장> 그리고 두 번의 리메이크, 그것이 담고 있는 것은?

현재의 애인과 전 애인 사이의 여자, 거기에 끼어든 전 애인의 딸, 이런 '막장' 스토리의 주인공은 한 편이 아니다. 일찌기 알랭 들롱이 현 애인으로 등장하여, 당시 연인이었던 로미 슈나이더와 젊은 제이 버킨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는 폴을 연기했던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 la piscine>가 제일 첫 번째 작품이다. 그리고 2003년 프랑스와 오종 감독은 <수영장>을 오마주한 <스위밍 풀>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육감적인 로미 슈나이더 대신, 선병질적인 중년의 작가로 셜롯 샘플링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네 남녀의 서스펜스 스릴러는, 작가인 셜롯 샘플링과 편집장의 딸로 수영장이 딸린 외딴 별장을 찾은 줄리(뤼디빈 사니에르)의 숨막기는 심리극, 그리고 뒤통수를 맞은 듯한 반전의 결말로 변주된다. 그리고 이제 2011년 <아 엠 러브>에서 틸다 스윈튼과 함께 했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비거 스플래쉬>란 제목으로 새롭게 리메이크 하여 돌아왔다.

 

 

네 남녀의 숨막히는 심리극이 걸출했던 1969년작이건, 그녀의 범죄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숨막히는 눈빛의 셜롯 램플링에 의한 욕망 심리극이건, 그리고 이제 틸다 스윈튼에, 수식어가 필요없는 랄프 파인즈, <대니쉬 걸>의 마티아스 쇼에나에츠, 그리고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통해 두각을 나타낸 다코타 존슨까지 합류한 <비거 스플래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휴양'이라는 미묘한 목적으로 고립된 공간에 머물게 되며, 드러나는 '인간'의 맨 얼굴, 즉 욕망이다.

 

 

 

 

 

결국 파국이 되고 만 욕망의 파문

2015년작 <비거 스플래쉬>에서 틸다 스윈튼이 맡고 있는 마리안은 한때 무대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연호를 받았던 '스타'이다. 하지만, 현재 그녀는 과도한 성대 혹사로 인한 수술이후, 판탈레리아 외딴 별장에 애인 폴과 함께 머물고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전나의 몸으로 관객을 맞이한 마리안과 폴, 하지만 무안한 관객과 달리,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마리안은 이제 그 누구의 시선에서도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한다. 그런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 한 통, 그녀가 허겁지겁 달려간 공항에 도착한 것은 한때 그녀의 사랑이었던 해리와 그가 1년 전에 알게 된 22살 먹었다는 딸이다.

 

 

로마에 자주 왔다는 폴은 대뜸 그들을 판탈레리아 언덕의 기묘한 식당으로 안내하며, 고즈넉한 폴과 마리안의 일상에 파열음을 빚어낸다. 그리고 천연덕스럽게 그들의 빌라에 얹히고, 손님까지 초대하며 주도권을 쥐어간다. 그런 해리가 잔뜩 못마땅한 폴과 달리, 마리안은 폴과는 전혀 다른, 해리가 빚어낸 일상의 소란스러움이 그리 싫지 않은 듯 합류한다. 그렇게 해리가, 그리고 그런 해리와 자연스레 어울리는 마리안과 겉도는 폴, 그런 그에게 해리의 딸 페넬로페가 도발적으로 접근한다.

 

 

마치 로마와 왔다 자연스레 들린 듯했던 해리의 속내는 영화가 진행되며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마리안과 자신의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 마리안을 폴에게 넘겼다던 해리는 마리안에게, 그리고 폴에게 자신의 결정에 대한 후회를 노골적으로 표명하다 못해, 이젠 대놓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영화 속 욕망은 거의 '주접스럽게' 자신을 드러내는 '해리'나, 알고보니 10대의 거침없는 도발이었던 페넬로페만이 아니다. 대놓고 부담스러워하는 폴의 의사를 사뿐히 즈려밟고 전 애인을 집에 들이는 마리안이나, 그런 마리안에게 전전긍긍하며 어쩌지 못하다 결국 폭발하고 마는 폴 역시 '욕망'이란 '전차의 탑승객이다.

 

 

 

일찌기 네 남녀의 '육욕' 혹은 '소유욕'에 집중했던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을 새롭게 각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저 이탈리아 명문가의 며느라의 불륜을 넘어 '삶의 존재' 양식에 대한 반문으로 이어졌던 <아 엠 러브>에서 처럼, <비거 스플래쉬>를 통해 '욕망'에 서사를 부여한다. 한때 수만의 관중에 주목을 받았던 마리안은 이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조차 숨기며 자신의 삶을 조용히 살아가고자 한다. 그런 그에게 찾아온 해리는 그 예전처럼, 자신이라면 다시 마리안을 거뜬히 무대 위의 스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손님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프로듀싱했던 장황한 후일담처럼. 그의 사랑이라면. 당연히 그런 해리가 한때는 카메라 감독이었지만, 이제는 다시 작품을 할 기약조차 불투명한, 마리안의 종속물같은 폴은 하찮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불과 1년 전에 해리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하지만 그런 뒤늦은 부녀 관계가 무색하게 어머니에 의해 내처지다 싶게 해리에게 떠맡겨진 페넬로페의 의지가지없음은 아버지 해리와 폴 사이에서 묘한 도발로 드러나고. 그렇게 영화는 '욕망'의 심리는 넘어서 '존재'를 묻는다.

 

 

그렇게 불안정한 혹은 정처없는 각자의 존재들은, 판타레리아라는 휴양지라기엔 모랫바람이 불어오는 삭막한 공간 속에서 '남'과 '여'의, 그리고, '확정되었지만, 불투명한' 관계들 속에서 '파문'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그 '파문'은 '사건'이 되는 대신, '락'의 정신 대신 비겁하게 불법 이주민들을 핑계대는 스타 마리안의 처신으로 덮어지고, 물 속에 잠겨버린 채 야무진 꿈조차 수장시켜 버린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간다.

 

 

 

 

자크 드레이 감독의 <수영장>은 우리나라에 알랭 들롱의 작품답게 <태양은 알고 있다>로 번안되어 개봉되었었다. <비거 스플래쉬>의 태양은 아쉽게도 사건이 일어나던 그 날 밤의 일을 알 수는 없다. 폴은 페넬로페에게 질문하지만, 관객은 그 답을 듣지 못한다. 폴과 페넬로페가 함께 간 짧은 도보 여행의 내막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사건의 내막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신, 관객 각자가 품고 있는 '욕망'에 따라 답하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다. '막장'으로 보이는 이 네 남녀의 '욕망'이 빚어낸 파국에 대한 '해석'도.

by meditator 2016. 8. 11. 06:54
| 1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