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온 지 2년이 넘었다. 가정 형편으로 집을 줄여 이사를 오느라, 눈물을 머금고 세간살이를 반넘게 정리해서 창고에 쟁여놓고 이사를 했었다. 그리고 이 집에서 생활하며 문득 놀라게 되는 사실은 그 '눈물을 머금고' 정리했던 물건들이 이 집에서 사는데 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다. 먼저 집에서 곳곳에 쟁여져있던 물건들, 손때 묻어서 버리지 못하고 쌓아놓았던 소중한 것들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 '소중한' 것들의 쓰임새가 사는데 별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런데 더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그렇게 버리고 왔는데, 어느새 이 좁은 집에서 또 물건들이 쌓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누군가 내놓은 5단 책장을 낑낑거리고 들고 와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 구석에 놓았다. 들여놓기가 무섭게 5단 책장은 그득하게 물건들이 쌓여갔다. 사는게 이렇다. 다 버리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난 또 물건에 치이고 있다. 




혁명적인 미니멀 라이프 
8월 31일 저녁 7시 35분에 방영된 <사람과 사람들-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는 바로 이런 현대인의 '물욕'에 대한 '혁명'을 그려낸다.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방송 카메라는 하남시의 한 아파트로 들어선다. 하얀 붙박이 가구들, 거실엔 덩그러니 검은 색 가죽 소파와 tv, 그리고 몇 그루의 화분뿐. 이런 식이다. 부엌으로 가니 더 단촐하다. 그 흔한 김치 냉장고도, 식탁도 없다. 거실도, 부엌도, 방들도 훵~하다. 이렇게 '단촐'하다 못해, 사람이 사는가 싶은 박동성, 황윤정씨의 집을 사람들은 '모델하우스'라 부른다. 아니 모델하우스도 이보다는 차려놓은 것들이 많겠다. 

그런데도 방송팀이 방문한 날 아내 황윤정씨는 바쁘다. 매일 출근하는 요일 별 옷이 전부인 그녀의 옷장, 그리고 행거 하나를 채운 남편의 옷장, 거기서 아내는 안입는 옷을 골라내느라 바쁘고, 그런 아내에게 '이건 보프라기가 나서, 이건 은갈치 같아' 라며 남편도 신이나서 장단을 맞춘다. '버리는데 너무 신나신 거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두 부부는 이를 '축제'라 답한다. 

'버리는 것이 축제'가 되는 삶, 박동성, 황윤정씨가 추구하는 '미니멀 라이프'가 이날 방송의 주제다. 두 부부가 사는 집엔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이 있다. 다섯 식구 분의 그릇과 수저, 압력 밥솥은 밥을 했다가, 뚜껑을 바꾸면 국솥이 된다. 요리는 후라이팬 하나로 뚝딱. 새로운 요리를 할랴치면 씼어서 하면 된다. 그러니, 당연 설겆이가 줄어든다. 이 집에서 줄어든 것은 '설겆이'만이 아니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 전에 베란다를 가득 채웠던 화분이며, 거실을 채웠던 커다란 어항, 그리고 가구와 그 가구를 채웠던 물건들. 맞벌이를 하는 아내 황윤정씨는 집에 오면 그 물건들을 보살피느라 허리를 펼 틈이 없었고, 남편 박동성씨 역시 그런 아내 눈치를 보느라 집에 와도 맘 편하게 소파에 눕기가 힘들었다.



늘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치워'였다는 아내 황윤정씨, 어느날 돌아보니, 그렇게 자신과 식구들을 괴롭히던 물건들이 다 자기가 사들인 것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단다. 그래서 하나둘씩 버리게 된 세간살이, 꽃을 좋아했던 황윤정씨는 이제 꽃을 보기 위해 베란다에서 죽은 화분을 키우는 대신, 밖으로 나간다. 자연이 선사해준 정원에서 한껏 자신의 취미 생활을 한다. 백로가 날라드는 그녀의 정원(?)을 보고 너무 사치스러운 게 아니냐며 감격하며. 

그렇게 버리는 것을 실천하기 시작한 황윤정씨는 그녀의 미니멀라이프를 자신의 삶에서 멈추지 않았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온라인 카페 '최소한의 것으로 사는 삶'을 만들었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녀의 집에 모인 그녀의 '미니멀 라이프 친구들'. 동지들답게 함께한 식사 자리에 저마다 보자기에 싸온 각자의 식기들을 꺼낸다. 식기와 수저를 들고 온 '혼밥' 한 끼. 어느 집이나 '손님 초대용'이라며 쓰는 그릇보다, 쓰지 않는 그릇을 쟁여놓고 사는 것이 당연한 세상에 저마다 식기와 수저를 싸들고 온 '미니멀 라이프 까페' 회원들의 식사 자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쉽지 않은 버리는 삶, 하지만 버리고 나면 행복해 지니
카메라는 황윤정씨네 집을 넘어 그녀의 까페 동지들의 집을 탐방한다. 아이 장난감이 너무 없어 아이를 '학대'한다는 소리를 듣는다는 이지현씨네 집은 황윤정씨네도 있는 소파조차 없다. 거실에는 요 하나 깔려있고, 책 몇 권이 끝이다. 부엌 식기는 컵까지 12개, 시부모님이라도 오실라치면 아들의 캐릭터 식기는 졸지에 남편 몫이 되고, 아내 이지현씨와 아들은 시부모님들이 드신 다음에 그 그릇을 씻어서 식사를 해야 한단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그런 이지현씨네 생활 방식을 그러려니, 알뜰하다고 너그럽게 보아 넘기신다고. 장난감이 없는 아이는 바구니 하나를 가지고도 신이 나서 놀이를 즐긴다. 동료 까페원의 말처럼 장난감없이 노는 아이는 작대기 하나만 쥐어줘도 한 나절을 논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란듯이.

이지현씨네 집의 미니멀 라이프는 그저 물건을 버리는 삶에서 그치지 않는다. 물건에 대한 절제는 먹거리에 대한 절제로 이어져, 이 부부는 생협 매장을 이용해 건강한 먹거리를 먹되, 채식 위주의 식사로 생활 습관을 바꿨다. 2~3가지의 채식 반찬, 덕분에 중년에 들어선 남편은 애써 운동을 하지 않아도 몸무게가 줄었고, 건강 검진에서 좋은 수치를 얻었다고 한다. 



이제 막 까페에 가입한 류정국, 문정현씨 부부는 까페 회원들의 미니멀 라이프를 본받으려 하지만 녹록치 않다. 남편과 아이들과 자신의 꿈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처분'하겠다고 마음 먹은 아내 정현씨, 하지만 막상 버리려고 하는 물건마다 그녀를 갈등에 빠지게 만든다. 심지어 남편과 서로 다른 의견으로 인해 약간의 충돌마저 벌어진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 버리려고 했던 시작이 아이들을 맡기고 벌여야 하는 전쟁이 끝난 후, 아직은 세 명의 아이들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류정국-문정현 부부의 집에 공간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다큐는 말한다. 삶을 변화시킨다고 할때, 철학 등을 우선 논하기가 쉽지만, 어쩌면 진짜 필요한 것은 8월 31일 방송이 보여준 삶의 구체적 실천이라고. 자본주의 사회는 무한 생산 시스템을 전제로 하고, 그 전제의 바탕 위에 쌓여진 '소비'의 거대한 성채다. 그리고 우리는 늘 그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허덕이며 신음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그 시스템으로부터의 탈출은 어떤 거대한 사상의 전환이나, 정치적 격동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산다>는 바로 그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삶의 전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부끄럽게 만든다. 어쩌면 나도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무감각하게 투항하며 길들여져 왔던 삶의 관성을 다큐는 직시하게 만든다. 다큐에 등장한 몇몇 부부의 미니멀 라이프를 다큐는 '주제가 있는 삶'이라 정의내린다. 그저 쓰지 않고 소용되지 않는 것들을 쓸 것이라 고집하며 쌓아두었던 '적체된 삶'의 관행에서 벗어난 '버리는 삶'은 그저 물건을 버리는 것만이 아니다. 과연 내 집의 주인은 누구며, 내가 아둥바둥 늘리려고 하는 집을 채우는 것이 무엇인가 대한 '레디컬'한 질문이다. 내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을 덜어내며, 훤해진 집처럼, 삶도 훤해지는 듯 보여진다. 늘 서로의 가사 일 때문에 신경전을 벌였던 부부는 이제 서로를 마주보며 감사해 하고, 그 물건으로 인해 빼앗겼던 일상을 소중한 것들로 채워간다. 물건만 덜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에 치덕치덕 덧대어 졌던 '허위의식'들을 덜어내는 과정이다.  그저 물건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by meditator 2016. 9. 1. 17:15

8월 24일 첫 회를 방영했던 sbs의 수목 드라마 <질투의 화신>, <w>와 <함부로 애틋하게>의 스타들이 포진한 양 강 구도에서, 1회 7.3%, 2회 8.3%(닐슨 코리아 전국 기준)로 거뜬히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양호한 성적과 달리, 1,2회를 방영한 직후 <질투의 화신>과 관련하여 화제가 되었던 것은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 상 설정이었다. 




빨간 출입증의 기상 캐스터, 표나리
실제로 기상 캐스터로 일하는 사람의 입장까지 등장하며(실제 기상캐스터가 본 질투의 화신, 사실 왜곡 화난다, 스타뉴스) 온라인 상에서는 극중 기상 캐스터로 등장하는 표나리(공효진 분)의 처신과 표나리를 대하는 방송국 사람들의 적나라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극중 표나리는 3회에 설명되는 것처럼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아나운서 학원을 다니고, 몇 번의 낙방 끝에 아나운서 대신 기상 캐스터가 되었다. 7시 뉴스의 마지막 5분을 책임지는 경력 5년 차이지만 여전히 정규직 아나운서들 앞은 물론, 방송국에서 기를 못펴는 비정규직이다. 거기에 뉴스 디렉팅을 맡은 부조 피디의 '엉덩이를 좀 더 빼라'는 식의 성적 수치심을 주는 디렉팅을 감수하는 것은 물론, 아르바이트 명목으로 갖은 잔심부름까지 하는 형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결국 기상 캐스터의 존재론이다. 3회에 드러나듯이, 서숙향 작가가 표나리를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정규직의 파란 줄 출입증을 가지지 못한, 빨간 줄의 비정규직 기상 캐스터이다. 거기에 분명 뉴스의 일부이면서도, 보도국의 일원으로 대접하지 않는 방송국의 노골적인 위계 질서와, 방송이 여성을 다루는 관습에 대한 '통찰'이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의견은 '성적'으로 희화화된 표나리와 노골적인 '을'의 존재로 인해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여자 아나운서'를 '뉴스의 꽃'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했던 세상에, 거기에 '연성화'되어가는 방송에서, 케이블을 위시한 각 프로그램의 여성 캐스터들의 '야한' 옷차림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질투의 화신> 속 표나리의 노골적인 을의 처지는 그 누군가에게는 모욕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너무도 현실적인 설정으로 '공감'을 주는 내용이 될 수도 있다. 드라마 속 기상 캐스터의 설정이 줬던 불편함은 '진실'과 '왜곡'의 경계에서 문제를 던진다. 이렇게 서숙향 작가의 <질투의 화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미묘한 지점'에 촛점을 맞춘다. 

유방암에 걸린 남자, 이화신 
방송국내 '을'인 기상 캐스터 표나리의 수모로 이어졌던 1,2회에 이어, 3회는 남자 주인공 이화신의 수모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미 첫 회에서 이화신의 가슴을 '탐'하여, 그 조차도 여성에 의한 성희롱 논란을 빚었던 드라마는 그 '미묘한' 접촉을 이화신의 유방암 설정으로 이어간다. 부담스레 이화신의 가슴에 집착했던 표나리는 그 이유를 유방암에 걸렸던 할머니, 어머니와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라 밝히며 '성희롱'의 경계를 넘어선다. 자신에 대한 집착이라 무시했던 이화신은 하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병원 치료 과정에서,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진단을 받기에 이른다. 

결국 이화신은 여성들이 입는 '분홍색' 가운을 입고, 유방암 진단을 위한 촬영을 하게 된다. 건강 검진을 해본 여성들이라면 공감할 그 어떤 검진보다도 고통스럽고, 때론 모멸스럽기까지한 유방암 진단 촬영을 가슴이 없는(?) 남자 이화신이 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없어서 쥐어짜서 촤영을 해야만 하는 과정을 드라마는 애교스럽게(?) 그 옛날 영화에서 남녀 상열지사를 물레방아로 대신하듯, 과즙이 쥐어짜지고, 호두가 부서지는 영상을 통해 생생하게 표현해 냈다. 하지만 어거지로 유방암 촬영기 앞에 가슴을 짖눌리는 이화신의 모습에서, 앞서 표나리의 기상 예보 과정처럼, 보는 이로 하여금 미묘한 경계에 다시 한번 서도록 만든다. 과연 저 장면을 유방암 진단 과정의 '리얼'함으로 웃어 넘겨야 할까? 아니면, 표나리가 이화신의 가슴을 주무르는데서 느꼈던 불편함처럼, 또 다른 성적 '희롱'으로 보아야 할까? 



드라마는 마치 장군멍군처럼, 여주인공 표나리에 이어, 이화신에 대한 경계성의 설정을 통해 서사를 풀어나간다. 과연 이런 것들은 '노이즈 마케팅'처럼 '논란'을 통한 화제성의 부추김일까? 

아니 오히려 <질투의 화신>이 하고자 하는 바의 이야기가 바로 그 '경계'인 듯하다. 극중 남자 주인공 이화신은 가족과 '절연'에 가까운 상태다. 그 이유는 바로 촉망받는 기자였던 그가 자신의 형인 이중신이 했던 사업체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 보도를 했기 때문이다. 그 보도로 인해 이화신은 기자상을 받았지만 도피하듯 지난 3년간 방콕에서 보냈다. 이화신은 어차피 형의 가짜 차돌박이 사용은 보도가 될 사안이었기에 동생인 자신이 먼저 해서 언론의 '가차없는' 뭇매를 피해 정확하게 보도하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그 결과 형의 사업은 망했고, 형의 딸인 빨강을 비롯한 가족, 심지어 형의 전처까지 그를 '사람'처럼 보지 않는다. 

이런 식이다. 이화신의 진심과, 그의 진심이 드러나는 현실은 '공감' 대신, 그를 천하에 형까지 팔아먹는 나쁜 놈으로 '모욕'한다. 아니 '곡해'한다. 작가는 그런 '오해받기 딱 좋은' 경계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려가고 싶은 것은 아닐까? 세상은 한 발 물러서면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공감대신, 갈수록 니 편과 내 편, 남자 편과 여자 편을 갈라, 서로의 편먹기와 그 편의 성을 공고히 하는 전열을 정비하는데 골몰한다. 제반의 사건들은 조금의 이해 대신, 과연 이것이 내 편의 전략에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가의 전술적 가치로 나뉘어지고, 그런 가로세로 구획 정리가 바쁜 세상에서, <질투의 화신>은 가장 미묘한 경계로부터 오해를 불러 일으키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위험천만한 시도가 대중의 공감을 살지, '모욕'만을 남기며 사라질지는 서숙향 작가의 내공에 달려있다. 부디 그 경계의 서사에 행운을. 


by meditator 2016. 9. 1. 06:20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