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5일 가요프로 mbc <음악 중심>의 1위 후보 가수는 이선희, 임창정, 박효신이었다. 마치 눈을 씼고 이게 2014년이 맞는가 싶게 확인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다. 한 시절 가요계의 레전드라 칭송받았던 이들이 2014년 4월 첫 째주 <음악 중심>에 다시 1위 후보곡을 가지고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이선희와 임창정은 같은 날 저녁 <불후의 명곡>을 통해 전설과, 전설을 노래하는 가수로 다시 조우하였다. 

최근 <무한도전>의 시청률이 예전 같지 못하자, 트렌디했던 이 프로그램의 인기가 이제 한 물 간 것이 아니냐는 조급한 진단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물론 오랜 세월 동일한 멤버로 지속되어온 <무한도전>의 피로도를 운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오히려 최근 이미자에 이어 이선희까지 이어진 <불후의 명곡> 특집이 너무 강력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 아닐까 싶다.

(사진; 서울신문)

이선희 편만을 예로 들어 보자. 박정현, 윤민수&신용재, 더 원, 울랄라 세션, 장미여관, 홍경민, 바다 등 그 각각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슈퍼스타k>, <나는 가수다> 등은 물론, <불후의 명곡>에서도 몇 승을 거뜬히 거머쥐며 그들 자신이 전설의 역사를 썼던 가수들이, 이선희 라는 전설을 기리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더구나 전설의 자리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은 임창정까지 그 대열에 합류했다. 거기에 마치 그 예전 시절의 이선희를 복기하는 듯한 신인 가수 벤에, 그간 섹시 컨셉에 가려졌던 가창력과 퍼포먼스를 선보인 걸스데이도 결코 선배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이미자 편은 어땠을까? 역시나 그간 <불후의 명곡>을 통해 빛났던 기라성같은 가수들이 총망라되었었다. 왁스, 소냐, 거미, 알리 등 당대의 디바들이 자신이 이미자 선배님을 기리는 그 자리에 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노래를 불렀으며, 그들 못지않은 가창력의 정동하, 조장혁, 이세준이 자웅을 겨루었다. 울랄라 세션과, b1a4의 무대도 약방의 감초다. 

물론 늘 <불후의 명곡>을 보면 훌륭한 가수들에 의해 멋진 편곡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노래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그렇듯이, 제 아무리 향기로운 냄새로 무디어 지듯이, 늘 일정 수준 이상의 내용을 선보이고 있는 두 프로그램이지만, 거기에 길들여진 시청자들에게는 그것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뻔하게 느껴지게 되는 한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두 프로그램만이 아니라, 늘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시청자들을 상대하는 모든 프로그램들의 생로병사의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그 생로병사의 과정을 당기느냐, 늦추느냐는 그것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서, <불후의 명곡>은 그간 아껴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어떻게 이 사람들이 그간 전설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싶었던 이미자와, 이선희. 한국 가요사에 있어 굵은 고딕체로 그 이름을 남기고도 남을 두 사람의 전설 무대는 그 존재만으로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불후의 명곡>은 그저 전설을 모셨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전설의 이름값에 걸맞는 특집을 제대로 꾸려냈다. 

이미자와 이선희 편에 출연한 가수들의 면면을 보면, 가장 이선희스러운, 이미자스러운 노래를 잘 소화해 낼 것같은 가수들의 총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리상자 대신 이세준의 가녀린 목소리를 살리 솔로 무대라던가, 이선희와 닮은 보이스를 가진 벤의 기용, 윤민수와 신용재의 콜라보레이션에, 그 등장만으로도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 박정현, 임창정처럼, 전설의 색깔에 맞춰, 가수들의 특징을 살려 절묘하게 재배치해낸 기획의 승리이기도 하다. 

윤민수·신용재·벤, ’불후의명곡’ 올킬 ’음원차트 싹쓸이’
(사진; 뉴스 24)

또한 이제는 모두를 들었다 놨다 하며 원숙미를 보이는 신동엽의 진행이라던가, 그에 못지않게 안정감있는 진행을 보이고 있는 대기실의 정재형, 문희준, 은지원의 조화도 <불후의 명곡>을 그저 음악을 듣는 프로그램 이상의 예능적 재미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많은 관심을 끌며 시작되었던 <나는 가수다>는 가수간의 서바이벌이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사되어 갔다. 반면 아이돌 가요 무대에서, 예능 프로그램으로, 전설에 대한 축제의 장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불후의 명곡>은 여전히 순항중이다. 이미자, 이선희 편처럼, 여전히 우리는 건재하다며 존재감을 뽐내며. 물론, 1985년부터 월요일 밤을 묵묵히 지켜온 <가요무대>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긴 하다. 그 시절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대를 지키는 고정 시청자 층을 가진 <가요무대>처럼, <불후의 명곡>도 오래도록, 가수들에게 좋은 무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시청자들에게는 모처럼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오래 그 자리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4. 6. 10:59

4월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능 전쟁의 첫 테이프를 4월 4일 밤 10시 <미스터 피터팬>이 끊었다. 

<미스터 피터팬>은 영원한 피터팬을 꿈꾸는 철부지 중년 스타들을 담은 신개념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내걸었다. 

영화 <후크>에서 네버랜드를 떠나 어른이 되어버린 피터 배닝은 피터팬이었던 시절의 자신을 잃고 세속의 어른으로 살아간다. 그러다, 자신의 아이들이 후크 선장에게 납치된 걸 구하기 위해 네버랜드로 가면서, 그 시절의 피터팬으로서의 자신의 기억을 되찾아 간다.


그렇게 영화 <후크>처럼 <미스터 피터팬>은 신동엽, 윤종신, 한재석, 김경호, 정만식 등 중년의 남자 다섯 명을 주인공으로 한다. 그들은 연예인이라지만 대부분의 시간 일을 하고, 기껏 여가가 나면 친구들과 함께 술 마시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것을 잃어버린 또래 남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중년의 스타들은 서먹서먹했던 것도 잠시 함께 할 아지트를 꾸미며 그 시절 자신들이 즐기던 음악 등을 통해 공감대를 쌓아간다. 그리고, 영화에서 처럼 팅커벨 최희가 나타나, 어린 시절의 추억 상자를 열어 보이며 그들도 피터팬이었던 시절의 기억을 살려내기 시작한다. 

상자 겉면의 고두심 등의 당대 스타들을 추억하면서 시작된 추억 여행은, 상자 속에서 등장한 딱지, 팽이 등을 돌려보며 절정에 이르른다. 팽이 줄 감는 것을 어려워 하는 것도 잠시 그 시절의 감각을 살려내며 중년의 남자들은 서로의 장기를 신기해 하며, 그것에 질세라 자신들도 해보며 피터팬이 되어간다. 

그렇게 피터팬이 된 중년의 스타들이 그들의 청춘을 되돌릴 방법으로 제시된 것은, 풀잎 피리 불기, 싱프로나이즈드 스위밍, 철봉묘기, RC카 등의 동호회였다. 그리고 그것들 중 다섯 명의 중년들이 선택한 첫번 째 피터팬이 되는 길은 바로, RC카, 자신들이 몰았던 첫 차를 추억하며, 어린 아들과 함께 나눌 기억에 설레이며 다섯 남자들은 RC카를 몰기(?)위해 달려간다. 

<미스터 피터팬>의 면면은 신선하다. 
이미 수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신동엽이지만 늘 스튜디오에서만 진행만 하던 그에게 리얼 버라이어티란 따라다니는 카메라에 당혹스러워 하고, 설치된 카메라와 대화를 시도할 정도로 낯선 장르이다. 그런 익숙하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 신동엽스러운 재치가 여전한 그의 모습은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토크쇼를 통해 걸쭉한 입담과 독특한 캐릭터를 선보였던 김경호나 정만식의 합류는 절묘하다. 지방색이 뚜렷한 사투리로 통하지만, 화장품 냉장고와 거기에 담긴 화장품, 화초를 가지고 나타난 김경호와, 연장같은 칼에, 양은 냄비를 들고 나타나, 김경호 등이 즐거워하는 음악에는 문외한이라 소외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정만식의 대비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볼거리가 되었다. 전혀 예능에 어울리지 않은 여전한 중년의 꽃미남 하지만, 팽이부터 시작해서 운전까지 그 무엇하나 거침없이 해내는 한재석의 반전 매력도 기대된다. 어디를 가도 윤종신인 윤종신의 캐릭터는 진부하지만,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는 프로그램과 동료들에게 어울려 들어가는 윤종신 특유의 친화력, 그리고 그간 예능의 경험들이, <미스터 피터팬>에 해가 될 듯이 보이지는 않는다. 

<미스터 피터팬>이라는 새로운 작명을 들고 나타났지만, 중년 남자들의 리얼 버라이어티라,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프로그램이 있다. 그렇다. <남자의 자격>이다. 평균 나이 40세를 넘긴, 역시나 중년의 남자들이 미처 다하지 못했던 101가지의 미션들 중 동호회의 성격을 띤 것들이 특화되어 <미스터 피터팬>으로 등장한다. 허긴 그렇게 따지고 보면, 그 중, 인간다운 삶을 위한 슬로우 라이프는 그간 <인간의 조건>을 통해 새롭게 우러내어 지기도 했었다. 또한 그렇게 따지자면, 언젠가, <미스터 피터팬>의 소재가 고갈될 그날, 그리고 멤버들의 리액션이 뻔해지는 그날 여성판 <미스, 미즈 피터팬 아니 웬디>가 등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KBS2 파일럿 '미스터 피터팬' 방송 화면 캡처
(사진; 텐아시아)

무엇보다 <미스터 피터팬>은 지금 우리 사회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다양한 동호회의 활동등을 눈썰미 좋게 받아들여, 그것을 예능 프로그램화 살려냈다는 데 의의가 있겠다. 이미 첫 방송에서도 보여졌듯이 철봉이나 풀잎 피리처럼 기상천외한 동호회 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 이 프로그램의 소재는 무궁무진해 보인다. 

하지만, 초반에는 신선한 동호회들을 소개하는 화제성으로 갈 수 있겠지만, 결국 프로그램의 관건은 제작진의 만듬새이다. 첫 회, 어린 시절 사진을 배경으로 자신이 어린 시절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말해주는 멤버 각자의 소개에서 부터 시작하여, 먹방의 정만식, 예상 외의 능력자 한재석 처럼, 개별 캐릭터를 재빨리 파악하고, 그것들을 맛깔나게 전달하는 모양새가 섬세하다. 그들과 어우러진 신동엽의 예의 19금 캐릭터나, 윤종신의 뻔한 설정도 진부해 지지 않았다. <미스터 피터팬>의 다음을 기대하게 만든다. 


by meditator 2014. 4. 5. 09:55

<쓰리 데이즈>는 암살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동휘 분)과 그를 지키는 경호관(한태경 분)의 이야기라고 서두를 떼었다. 지지율이 급감하다 못해 이제는 탄핵 위기에 몰린 대통령이라, 그의 정치적 포지셔닝은 분명 드라마적 요소가 극명한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대통령이 주인공이라고 했을 때, 청와대라는 특정한 공간을 벗어나기는 힘들어 보이는 대통령이 박진감넘치는 스릴러의 주인공의 한 축으로는 너무 정적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고, 경호관인 한태경이 종횡무진 액션 배우로 거듭나고 있는 것과 달리, 또 다른 축인 대통령은 역시나 운신의 폭이 적었다. 청수대로 여행을 가고, 특검을 만나러 간 잠행 길에 사고를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늘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대통령의 특성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대통령이 달라졌다. 자신을 돕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태경에게 더는 경호관이 아니라며 그를 제지하고 직접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그리고 그는 김도진을 찾아가 말한다. 다시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액션 스릴러 등의 복합 장르물을 내걸고 있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 진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심리이다. 때로는 설명적이다 싶게, 자신들이 어떤 행동에 이르게 된 입장을 드라마는 나열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드라마적 장치가 미흡해서가 아니다. 2014년의 <쓰리데이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로 다른 입장, 그래서 극명하게 대립되게 되는 그 서로가 서있는 자리의 차이, 또 그래서 서로가 함께 하게 되는 그 과정을 <쓰리데이즈>는 주목한다. 기꺼이 드라마가 늘어지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하고자 하는 말을 숨기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이 그저 여느 장르 드라마와 비교할 수 없게 만드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의 한 특성이다. 

(사진; osen)

9회 말, 기밀 서류를 비밀리에 꺼내오기 위해 비밀리에 윤보원과 함께 재신 그룹에 잠입했던 한태경은 모니터를 보다 자신이 비밀리에 그곳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뛰쳐 나간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그 누구보다도 믿었던 동료 이차영(소이현 분)이 재신 그룹 회장 김도진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경호실장의 암살 음모조차 단번에 간파해 낼 정도로 냉정한 이성을 가졌던 한태경이지만, 자신이 믿었던 동료 이차영의 배신(?)에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런 한태경을 보며 이차영은 고통스러운 눈물을 삼킨다. 

그리고 10회, <쓰리데이즈>는 장황하게 이차영의 배신을 끌고가지 않는다. 한태경의 주변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김도진 선언의 첫 번 째 예라도 되는 듯이, 대통령 기자 회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모험 끝에 어렵게 신규진 비서실장의 비밀 서류를 손에 넣은 이차영을 차로 밀어버린다. 사고롤 사경을 헤매는 이차영, 그녀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한태경을 배경으로 그간 이차영의 사연이 드러난다. 

법무팀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던 서류가 잘못되었음을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이차영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 없는 대통령의 위치를 알게 된다. 자신이 제대로 직무를 수행했다면 대통령을 그렇게 고립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이차영은 자신이 그 서류를 찾아오겠다고 각오를 밝힌다. 그리고 동료 한태경을 속이면서, 그리고 결국 이철규 소좌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무위로 만들면서까지 신규진의 개인 척 이중 스파이 노릇을 했다. 

앞서 <쓰리데이즈>가 골몰하고 있는 것이 심리라고 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직업적 사명감과 소명 의식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모든 어떤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회가 굴러나간다. 하지만, 과연 그 일을 하며 자기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오히려 대다수가 그 일의 목적이 '돈'이라고 자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십상이지 않을까. 

하지만, 김은희 작가는, 바로 그 '직업'과 '일'의 의미를 논한다. 당신이 하루하루 그저 살아가는 그 '일'과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사회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대통령이든, 일개 경호관이든! <쓰리데이즈>는 정치 드라마가 아니다. 정치가 직업인 사람들의 일 이야기이다. 사람을 지키는 일이 직업인 경호관처럼. 그런데 그 직업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정치가 달라지고, 나라가 뒤짚어 지는 것인 되는 것이다. 

<쓰리데이즈>가 방영되기 전까지 경호관이란 직업은 그저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다. 항상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 그런데 이 드라마를 통해 보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직업적 소명 의식이란게 만만치 않다. 만류하는 대통령에게 이차영은 말한다. 자기도 경호관이라고. 하는 일이 법무팀장이란 영역일 뿐이지, 본질은대통령을 지켜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재신 그룹의, 신규진의 스파이가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다. 

그런 이차영의 선택은, 10회 마지막의 이동휘의 선택으로 치환된다. 
이차영의 선택은 그 수를 읽는 김도진에 의해 실패로 끝이 난다. 그런 이차영을 목격한 한태경은 신규진의 방을 엎으며 대통령에게 원망을 쏟아붓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왜 그렇게 무기력하냐고. 왜 일개 경호관에게 그 모든 짐을 지웠냐고. 하물며 한태경 자신이 도울 수 조차 없도록 만들고. 

그런 한태경에게 대통령 이동휘는 말한다. 자신은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대통령이라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대통령이기에, 그들과 똑같아 질 수 없다고! 까짓 대한민국에서 법과 질서가 얼마나 우스워질 수 있는 단어라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드라마 속 고지식한 대통령은 거기에 매달린다. 대통령으로서의 자신의 소명을 쥐고 놓지 않는다. 

그러던 대통령이 마지막 김도진을 찾아가 딜을 한다. 팔콘의 개가 되겠다고. 대신 탄핵을 면하게 해달라고. 

(사진; tv리포트)

대통령이 그런 과정에 이른 것을 설명하는 장면은, 드라마가 끝나고 덧붙여진 에필로그이다. 대통령 관저의 한 사무실을 가득 메운 채 열렬하게 정책에 대해 토론하던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 신규진, 그리고 다른 비서실장들, 그리고 그의 옆을 거닐며 그를 지키던 함봉수 비서실장과, 그의 부름에 아이처럼 달려오는 한태경. 그의 주변을 메웠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더 이상 그들을,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동휘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힘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한태경이나, 이차영같은 젊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또한 김도진 일당이 다시 한번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몰아넣는 시도를 막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니까. 

10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어쩌면 이제 좀 뻔해져 보이기도 한다. 깜짝 쇼인 듯 하다가, 바로 다음 회가 되면, 사실은 이랬어 하는 것이, 결국은 장황한 설명조로 끝나는 드라마적 구조가 때론 지루하기도 하다. 하지만, 행위 그 자체보다, 그것에 이르는 의도가 중요하다고 방점을 찍은 작가의 입장이니 그것도 처분에 맡깉 수 밖에.
겨우 윤보원과 한태경만 함께 했을 뿐, 10회에서 보여지듯이, 아직도 뜻을 같이 할만한 사람들은 저마다 속내가 복잡하다. 대통령에게 까지 악다구니를 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저돌적인 한태경과 달리,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아들처럼 그를 바라보던, 그래서 그런 그의 희생을 막고싶은 이동휘의 속내는 더더욱 헤아릴 길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그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에, 그들의 그 소명이 함께 하는 물줄기는 합쳐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각각의 물줄기가 거친 물살이 되어 비극을 막아내는 그 감동을 위해 조금 더 인내하는 수 밖에. 이것이 <쓰리데이즈> 의 개가 된 자의 숙명이다. 


by meditator 2014. 4. 4. 09:39

그저 드라마로서도 <쓰리데이즈>는 참 재미있다. 

북에서 내려온 리철규 소좌를 자신의 기자 회견장에 세우는 배수의 진을 친 대통령(손현주 분), 하지만, 그런 대통령의 시도는 오히려, 이제 그와, 그를 도운 경호관들조차 사기꾼 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자충수가 되어 옮아매어 진다. 더구나, 그 올가미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그 누구보다도 한태경(박유천 분)이 믿었던 한태경의 동료이자, 청와대 법무팀방인 이차영이다.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그래서 매회 작가와 제작진에게 뒤통수를 맞으면서도 기꺼이 내 뒤통수가 멍이 들도록 거기에 머리를 들이밀게 만드는 재미를 <쓰리데이즈>는 선사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9회를 통해 대통령과 한태경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대사는, 드라마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한번쯤은 새겨들어야 할 명언들이다. 

‘쓰리데이즈’ 박유천, 장동직 무사히 빼돌리는데 ‘성공’

이동휘; 그래야 옳은 거잖아요.
이제 탄핵을 받으면 대통령 관저를 비우라는 통보를 하고 난 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온 정권인데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는 신규진 비서실장(윤제문 분)의 원망섞인 힐난에, 이동휘 대통령은 딱 한 마디로 대답한다. 하지만 그래야 옳은 거지 않냐고? 그런 이동휘의 답에 신규진 비서실장은 반문한다. 그런 사실이 우리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되냐고? 경제가 좋아지냐고, 정치가 달라지냐고? 사람들은 그걸 몰라도 살아간다고. 

아니 오히려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살아가고 싶어한다. 골치 아프게 과거의 진실들을 알아서 자기 사는데 머리 아프기만 하다고 생각하며 외면한다. 이동휘 대통령의 사실이지 않냐는 묵직한 한 마디는 그래서 뭉클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외면하고 살아가는 삶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들을 내보이는 것같아서. 

드라마 속 양진리 사건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며 그 결결이 잊고 살았던 진실들이 그 대사 한 마디에 울컥 솟아올라 가슴을 친다. 멀게는 '과거사 진실 위원회'가 밝혔냈던 친일파 인명 사전에 올랐던 사람들의 진실에서 부터, 뒤늦게서야 밝혀졌던 제주도 4.3 사건 등,그리고 가깝게는 지금도 우리 사회 어디에선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진실을 밝히려 애쓰고 있는 제주도에서부터, 쌍용자동차, 그리고 평택, 밀양 송전탑 현장에까지 우리가 잊고 사는 또 다른 양진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드라마 속 신규진 비서실장은 노골적으로 재신과 손을 잡고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앞장서는 협잡꾼이지만, 사실 현실의 우리들은 또 한 사람의 신규진이 되어 누군가의 진실을 외면하고 살아간다. 사는데 보탬이 되지 않으니깐. 

그래서 이동휘의 수식어가 붙지 않은 한 마디는, 그 한 마디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듣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부끄럽게 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좋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누구도 선뜻 하기 힘든 직언을 우리들에게 해주어서, 그렇게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부끄러운 이 시간이, 마치 고해 성사를 대신 해주는 것처럼 시원하기도 하다. 

(사진; obs)

한태경; 저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사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의 행보는 쉽지 않다. 재신 김도진 회장(최원영 분)의 예언대로, 대통령은 그가 진실을 밝히려 하면 할 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사람이 죽어간다. 9회에서도 그를 돕고자 기자 회견장에 나선 리철규 소좌가 죽었다. 
그리고 힘들게 그를 기자회견장까지 데리고 온 한태경은 그의 살인 누명까지 쓰게 되었다. 그런 한태경을 보고 대통령은 후회한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이 자신의 아들만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는데, 의지할 곳이 없었던 대통령은 이제 겨우 3년차 된, 자신을 위해 죽기엔 너무 어린 경호관과 일을 도모하게 된 것이 무겁다. 
하지만 그런 대통령에게 한태경은 말한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이라고. 

그저 누군가를 지켜야 하는 직업에서 시작하여,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출발점이었고, 억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이 추진체였다면, 이제 9회에 들어, 한태경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선택으로 이 일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서 김도진이 한태경에게 한태경에게 이동휘에게와 마찬가지로 네가 무슨 일을 하려 하면 할 수록 네 주변의 사람들이 죽어갈 거라는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당신이 얼마나 미친 사람인지 세상이 알게 하겠다고 자신있게 대꾸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 세대가 저지른 과거가 과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오늘을 사는 세대의 임무로 발현되는 과정, 그저 직업 정신이 투철한 한 청년이 자각된 역사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모습을 <쓰리데이즈>는 주인공 한태경을 통해 생생히 그려낸다. 그리고 김도진 일당의 2014년 사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런 한태경 세대의 결심은 양진리를 되풀이 하지 않는, 즉 역사적 과오을 되풀이 하지 않는 진정한 진보가 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팍팍하다. 이동휘 대통령이 친 배수의 진은 오히려 그의 자작극으로 그를 옭아매고, 진실을 향해 뛰어든 한태경의 용기는, 자기 아버지의 죄를 덮으려고 살인조차 저지르는 파렴치범으로 매도된다. 
하지만 그래서, 더 <쓰리데이즈>를 응원하게 된다. 현실은, 한태경이 만난 검찰처럼, 그리고 그에게 뻔하게 각색된 스토리의 질문을 던지는 언론의 그것이지만, 우리가 만나는 드라마 <쓰리데이즈>에서만큼은, 그런 바늘 구멍하나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을 뚫고 진실을 밝히려 하는 주인공들이 승리할 테니까. 그렇게 라도 우리도 왜곡된 현실의 숨통을 튈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조금은 덜 부끄럽게 사는 용기를 얻어 가질 테니까 말이다. 좋은 드라마다.  

그리고 이 좋은 드라마의 훌륭한 대사들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이동휘 역의 손현주와, 한태경 역의 박유천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진정성어린 연기가, 대사를 그저 대사가 아닌, 진실이 되어 가슴에 와닿게 해준다. 두 사람이 인터뷰를 통해 밝혔던 진정성이란 각오가 그저 입에 발린 말이 아니었음을 매회 두 사람의 연기를 통해 확인하고 감동받아 행복하다.


by meditator 2014. 4. 3. 01:51

sbs의 주중 미니 시리즈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동일한 스릴러 장르물이다. 

또한 두 드라마 똑같이 시작과 더불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쓰리데이즈>가 대통령의 저격 사건으로 서두를 열었다면, <신의 선물>은 김수현(이보영 분)의 딸 샛별(김유빈 분)이가 납치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둘다 16부작 드라마로 중반을 넘긴 두 드라마의 진행 상황은 전혀 다르다. 

<쓰리데이즈>가 대통령 저격 사건으로 시작하여 과거 양진리 사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대통령과 한태경, 그리고 그들의 반대편에 김도진과, 국정원, 여당의 실세들의 명확한 전선이 형성되었다. 결전이 임박한 것이다. 
반면, 이제 10회를 마친 <신의 선물-14일>의 경우, 이제서야 샛별이의 사건이 과거 기동찬의 형 기동호가 저질렀다고 믿어졌던 기동찬이 사랑했던 여인 수정이의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사건이 밝혀진 것과 달리 오히려, 누가 샛별이의 범인일까는 더 오리무중이 되었다. 9회에서 10회 초반에 이르기까지 기동찬까지 수현이 의심할 정도로, 여전히, 아니 오히려 회를 거듭하면 할 수록, 모든 사람들이 의심스럽다. 

장르물에서 모든 사람들이 범인의 혐의를 받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설정이다. 그만큼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장면 장면 그 누구도 범인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신의 선물-14일>은 10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황이 반복되면서, 이런 장르적 묘미에, 제작진이 너무 빠져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우려가 들기 시작한다. 

사실 시청자들은 처음 기동찬이 수현과 함께 등장했을 때, 그리고 그가 수현과 함께 물에서 살아나와 2주 전의 과거로 돌아갔을 때 이미 그의 형의 범죄와 샛별이 납치 살해 사건 사이에 관계가 있을 거라는 예측을 가졌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니 당연히 그럴 밖에. 
그런데 드라마는, 그 당연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무려 10회라는 시간을 보낸다. 물론 그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은 아닌다. 처음 부녀자 연쇄 살인범 차봉섭(강성진 분)을 잡았고, 이어서 장문수(오태경 분)를 잡았다. 하지만 그들을 잡으면 조금은 분명해 질 것 같은 사건의 윤곽은 마치 그저 양파 껍질만을 벗겨낸 듯 여전히 수많은 속살을 숨긴 채 시청자 앞에 던져진다. 샛별이의 엄마 수현이 내 딸은요? 하며 절규하듯, 시청자들도, 회를 거듭할 수록 도무지 윤곽조차 알 수 없는 범죄, 혹은 범인의 윤곽에 슬슬 지쳐 가기 시작한다. 마치 제작진들이 자기 들만 맛있는 걸 숨겨놓고 나눠주지 않는 것같이 약도 오르면서. 

(사진; osen)

오히려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 수록,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던 것이 수현의 주변으로 오면서 수현 주변의 인물들 모두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수현의 남편(김태우 분), 그리고 그 남편과 내연의 관계에 있었던 수현의 후배 작가 주민아(김진희 분), 그리고 딸 샛별이가 좋아하는 가수 스네이크(노민우 분)에, 수현의 납치 현장에 찾아가 증거물을 숨긴 수현의 옛애인 현우진(정겨운 분), 기동찬의 집에 뜬금없이 나타난 노인(신구 분)까지 모든 사람들이 샛별이의 사건, 그리고 과거 수정이의 살해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이 드러나면서 그들 모두가 의심스러워진다. 
그런데,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도무지 그것이 수정이의, 그리고 샛별이의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으니, 그저 시청자들은 수현이 못지 않게 답답함이 증가된다. 이제 드라마가 2/3의 지점을 돌 즈음이 되었으면, 대강 윤곽이 드러날 만도 하련만 여전히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매회 새로운 떡밥을 하나씩 던지면서 요건 몰랐지? 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사건이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면서, 오히려 샛별이 모녀의 부산스러운 행보는 부각된다. 
딸을 살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왔다는 엄마는 딸을 방치하는 것만 같고, 엄마를 똑닮은 딸은 갈 수 없는 나이임에도 스네이크의 콘서트장행을 감행하는 무모한 짓을 벌인다. 딸을 방치하며 사건을 해결하러 다니는 엄마나, 그런 엄마의 손아귀를 벗어나 제 나이 또래에 어울리지 않는 사고를 치는 딸내미나, 시청자들이 그들에게 연민이나, 공감을 하기 보다, 왜 저러지? 심지어 저럴 시간에 딸을 돌보지, 혹은 쟤가 더 문제야 라는 부정적 인식을 매회 쌓아가고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그들의 보디가드 기동찬이 매씬마다 원맨쇼에 가까운 진기명기 연기력을 보이고, 그것도 모자란 듯 직접 기타를 치며 '마법의 성'을 불러도, 비호감으로 전락한 두 여주인공들에게서 떠나가려는 마음이 쉽게 돌아오질 않는다. 

<신의 선물-14>일이 던진 패는 만만치 않다. 대통령까지 관련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사형제도라는 형행 제도의 문제점도 걸려있다. 신구가 분한 기동찬네 집에 등장한 노인이 사실은 대기업 회장이며, 그와 대통령은 한때 밀월 관계였으나 이제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이라 하니 정재계의 커넥션 문제도 끼어 있는 듯하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인권 변호사로 명망을 날리지만, 윤리적으로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직업적으로도 역시나 문제가 있어보이는 한지훈(김태우 분)의 이중적 면모도 만만치 않다. 이들이 사건이 밝혀지면 마치 목걸이에 구슬이 꿰어지듯 한 줄에 쭈욱 얽힐 거 같긴 한데, 도무지 드라마는 그런 결론에 냄새만 피울 뿐 10부에 이르도록 무엇하나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 없다. 마치 장기판에서 기동성 있는 차만 줄창 왔다 갔다 하고, 포 등 다른 무기들은 그저 한 발자국만 들락날락 하는 형국이다. 

가지고 있는 패를 숨기고, 위기를 조장하려다 보니, 능동적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뛰어든 여주인공과 그 딸내미가 민폐가 되어버리고, 나쁜 놈인 것 같은 사람들은 어른거리기만 할 뿐이다.  그러는 동안 매회 끈질기게 따라오던 시청자들은 드디어, 10회에 이르러서야 겨우 윤곽이 희끄무레하게 밝혀질락말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인은 전혀 감도 잡지 못하는 <신의 선물-14일>의 긴 호흡에 지쳐 나가떨어지게 되어버렸다. 저렇게 벼르다 마지막에 제작진이 이 사람이 범인이야 이걸 몰랐지? 이런 사건이었어, 하면 오히려 보던 사람들이 이까짓걸 이제야 알려줘 하면서 분노하게 될 정도로. 수현과 기동찬은 몰라도, 적어도 시청자들은 대강 돌아가는 사건의 정체라도 눈치채도록 해야 장르 드라마의 재미를 놓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신의 선물-14일>은 너무 꼭꼭 숨어 술래가 찾다 해가 져서 집에 가버리게 만들듯, 숨겨진 패에 대한 애착이 크다. 숨바꼭질의 재미는 찾고, 찾아지는 과정의 쪼이는 맛이다. 

부디 남은 회차 동안이라도, 시청자들과의 숨바꼭질 대신, 시청자가 지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호흡으로 드라마를 끌어가 주길 바란다. 


by meditator 2014. 4. 2. 02:29

<밀회>에 빠져들고 계신가요? 이 드라마를 보면 가슴이 떨리시나요? 혜원(김희애 분)과 선재(유아인 분)의 사랑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꼭 움켜 쥐고 계신가요?

그런데 혹시 얼마 전에 종영한 <따뜻한 말 한디>를 보셨나요? 아니 바로 지난 주에 종영한 <세 번 결혼한 여자>는요?

<밀회>는 40대 여인과 20대 남자의 사랑이야기입니다. 40대의 혜원은 서한 예술 재단 기획실장으로 권력을 쥔 쪽이죠. 선재는 공익 근무를 하며 킥배달을 하는 피아노 천재로 남편의 부탁을 받고 재능있는 피아노 지망생을 찾던 혜원의 눈에 띤 간택받는 입장인거죠. 선재를 만나 함께 연주를 하던 혜원은, 그리고 선재는 음악을 통한 교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음악을 통해 교감을 이루는 사랑이라니요, 아름답지 않습니까? 제인 캠피온의 영화 <피아노>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지 않나요?

그런데 만약, 여기서 등장하는 혜원과 선재의 성이 반대라면요?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이며 선재를 스카웃하려는 혜원이 40대의 미중년 남자였다면 어땠을까요? 그에게 선택을 당하는 피아노의 천재가 꽃다운 스무 살의 처자였다면요? 그들이 피아노를 통해 교감을 하고, 스무 살의 아름다운 아가씨가 자기 보다 스물 살이 많은 남자 선생님에게 대뜸 사랑한다며 키스를 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도 그런 설정이었다면, 제 아무리 개연성 있는 설정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그려낸 정성주 작가에, 영화 보다도 더 몽환적인 화면을 만들어 내는 안판석 피디라도, '불륜'이라는 명제를 벗어나기 힘들지 않았을까요? 왜 나이많은 남자와 어린 여자가 만나면 불륜이 되고, 어린 남자와 나이 많은 여자가 만나면 사랑처럼 보이는 걸까요?

(사진; 스포츠 한국)

앞서 말했던 <따뜻한 말 한 마디>를 보자구요. 
거기 주인공들 중 류재학(지진희 분)과 나은진(한혜진 분)도 사랑에 빠졌어요. 이 사람들 혜원과 선재가 나눈 피아노를 통한 교감이나, 키쓰는 커녕, 손이나 한번 제대로 잡아보았나요? 호텔에 들어갔다가 그냥 나왔다지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드라마가 하는 20회 내내 불륜이란 분홍 글씨가 찍힌 채 혹독한 댓가를 치뤘습니다. 잠자리를 하지 않았다니, 잠자리를 하지 않아서, 진짜 사랑을 했다고, 류재학의 아내 송미경(김지수 분)은 더 분노했었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수(이지아 분)와 결혼한 준구(하석진 분)는 결혼 전 만나던 다미(장혜진 분)와의 관계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한 혹은 충동적인 행위들은 은수와의 결혼에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지요. 

경우가 다르다구요?
<따뜻한 말 한 마디>에서 나은진은 모르겠지만 류재학은 분명히 사랑에 빠졌었어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에서 다미는 자신의 목숨과도 바꿀 만큼 준구를 사랑하지요. 하지만 두 드라마는 두 커플의 사랑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요. 은진과, 재학이 저지른 결과에만 몰두하며, 그들이 가져온 가정 파괴에 주목하지요.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준구나 다미는 거의 파렴치범 수준입니다. 

반면, <밀회>는 혜원과 선재의 사랑 그 자체에 주목합니다. 
그 사랑의 가치를 부각시키기 위해 드라마는 작동합니다. 예술 재단과 그것을 움직이는 가진 자들의 개처럼 살아가는 혜원, 그리고 예술적 재능을 가졌지만 현실이 그것을 받쳐주지 않아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살아가던 선재, 그들에게 찾아온 사랑은 그저 사랑이 아니라, 억압적 현실에 비춘 한 줄기 삶의 희망같은 것처럼 드라마는 묘사해냅니다. 선재는 혜원을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실제 스승은 혜원의 남편이지만, 선재는 아니라고 합니다. 진흙 속에서 뒹굴던 자신을 알아봐 준 당신이 자신의 진짜 스승이라고 합니다. 선재의 사랑은 흡사 아기 오리들이 처음 시각적으로 마주한 대상을 따라다니는 '각인'과도 같은 현상입니다. 
자신의 꿈을 병으로 포기한 채 결혼조차도 정략적으로 선택하며 마름으로 살아가는 혜원에게 자신과 같은 병을 가진, 불우한 환경에서 고사되어 가는 선재는 또 다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불륜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짓눌려 가던 자아의 회복이요, 자기애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사람들의 머리는 참 합리적(?)입니다.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자신들이 보고싶은 것만 봅니다. 드라마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을 그려내기에 앞장섭니다. 여성들이 주시청층인 10시 대의 드라마들은 그래서 누군가의 남편들의 사랑은 불륜으로 정의내리고, 자신들과 같은 여성의 불륜은 사랑이라 이름붙입니다. 더구나 그 어린 남자애랑 사랑에 빠지는 혜원, 아니 김희애는 그 나이에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심지어, 예술 재단 이사장의 뒤를 봐주고, 회장님의 여자를 대줘도, 그녀는 여전히 우아함을 잃지 않습니다. 드라마는 보는 여성들의 꿈속의 자아이자 욕망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재는 나이는 어리지만, 여성인 혜원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태도는 여전히 우리 사회 남성과 여성의 성적 관계의 틀을 유지합니다. 사랑에 수동적인 여성과 그에 대해 저돌적으로 접근하는 남성, 대신 이전의 남성들이 그들의 날개를 경제적인 것으로 포장했다면, 선재는 대신 나이로 치장합니다. 속된 말로, 나이가 벼슬입니다. 나이어린 백마 탄 왕자가 조만간 늙을 일만 남은 여자 앞에 나타나 당신을 온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한다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우선 그 하나는 '공평하게' 나의 사랑이 불륜만이 아니라 사랑의 이름으로 불리워지길 원한다면, 남의 사랑도 그저 불륜으로 낙인 찍지 말고 사랑으로 다시 보아줘야 하는 마음의 자세겠지요. 어쨋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마흔 살 먹은 여자의 불륜도, 마흔 살 넘은 남자의 그것도 사랑일 수도 있는 거지요. 남자들이 하면 나쁜 짓이고, 우아한 여자가 하면 봐주는 건 너무 비겁한 태도입니다.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마지막 회 준구와 다미를 맺어준 김수현 작가님의 깊은 속내가 그것이었을까요?

또 하나는, 그것보다는 좀 더 본질적으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제도가 점점 담아기 힘들어 지는 남자와 여자들의 욕망에 대한 태도입니다. 여전히 결혼이라는 제도의 틀 속에 놓여진 사람들의 새로운 사랑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제 아무리 철부지 같은 남편이라도 남편이 있는 혜원의 사랑은 불륜입니다. 류재학의 사랑이 불륜인 것처럼요. 하지만, 무수히 양산되는 드라마 속 불륜들처럼, 어쩌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남녀 간의 사랑을 담기엔 결혼이란 제도가 너무 경직되거나, 오래되어버린 문물제도가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뭐 그런 지점도 한번쯤은 짚어보자구요. 그러면 그 낡은 제도에 목매여 사는 사람들이 너무 초라해 지는 건 아니냐구요? 낡고 이제는 쓸모가 덜해도 여전히 누군가와 평생 믿음과 신뢰로 관계를 꾸려간다는 건 꼭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지요. 그런 행복을 맛보지 못한 혜원의 사랑이기에, 더 안쓰러운 것도 있잖아요. 


by meditator 2014. 4. 1. 11:02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종영되었다.

애초에 제목을 세번 결혼하는 여자로 삼았던 만큼, 극중 주인공이었던 오은수(이지아 분)가 과연 세 번째 결혼을 누구와 할 것인가가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우선은 고부간의 갈등으로 인해 이혼을 했지만 헤어진 이후에도 애틋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었던 전남편 정태원(송창의 분)과의 해후가 가장 설득력 있어 보였다. 하지만, 두번 째 결혼 대상이었던 김준구(하석진 분)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면서, 아이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여론이 생기면서, 결국은 아이로 인해 준구와 다시 살지 않겠냐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통속적인 가능성을 차치하고, 여주인공 은수가 선택한 세 번 째 결혼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결혼이었다. 즉 자기 자신만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사진; 엑스포츠 뉴스)

<세번 결혼한 여자>를 문학 장르로 치자면, 겉으로는 남녀 간의 사랑과 이혼을 다룬 '순수 애정 소설'같지만, 오히려, 결론에 이르러 봤을 때, 작가 김수현이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전하고자 하는 '목적 문학'에 가까운 작품으로 보여진다. 

여주인공 오은수는 마치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여주인공 노라처럼, 자신을 속박하던 시집살이의 굴레로 부터,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부 관계로 부터 자유를 찾은 여성이다.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전남편 정태원의 입을 빌어, 그리고 준구 이모의 입을 빌어, 세상의 시각을 전한다. 자신을 포기하라고, 그러면 또 다른 행복이 찾아올 거라고, 너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라고. 하지만 여주인공 은수는 그런 세간의 관습에 답한다. 이것이 나라고. 앞으로 어떤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나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을 아이를 위해 포기하느니, 차라리 후회를 택하겠다고, 뼈를 깍는 아픔을 겪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인생의 풍파를 겪은 나이의 노작가 답게, 물론 오은수의 선택을 마냥 해피엔딩으로만 그리지 않았다. 오은수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기 위해, 그녀가 낳은 두 번째 아이를 포기해야만 하는 댓가를 치뤘다. 작가는 마치 그것이 자신을 선택한 댓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삶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오은수의 선택이 이 시대에 분명 의미있는 선택으로, 삶의 한 유형으로 받아들여지길 김수현 작가는 강하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오은수 만이 아니다. 그녀의 언니 오현수(엄지원 분)가 선택한 삶도 마찬가지다.  15년을 짝사랑 했던 사람과 함께 살아가지만, 그것이 당연히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삶도 또 다른 작가가 말하고 싶은 삶의 유형이다. 마지막 회, 은수는 말한다. 정작 언니처럼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야말로 결혼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동생의 정의에 대해 언니 현수는 말한다. 결혼을 한다면 안광모(조한선 분)의 어머니와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해서 피곤해서 싫다고. 이것을 통해 작가 김수현은, 우리 사회에서 사랑과 결혼은 결코 하나의 순차적 과정이 아닐 수도 있으면, 결혼이란 것은 그저 사회적 제도로, 이제는 이 사회 여성들의 삶에 질곡으로 자리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강변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드라마들이, 특히나 주말 온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보여준 작가의 시선은 파격적이다. 작가의 바로 전 작품,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현수 역을 맡았던 엄지원이 분했던 안소영 역을 통해 결혼하지 않고 사는 삶의 가능성을 내비쳤지만, 작품의 전체적 기조가 대가족 제도의 행복을 주제로 삼는 한에서 그 대안적 삶의 존재는 대가족이란 울타리 안에서 용해되고 말았었다. 하지만 이제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작가 김수현은 보다 적극적으로 삶의 또 다른 대안으로서 '싱글'의 위치를 보다 부각시킨다. 

하지만 한계 역시 분명하다. <무자식 상팔자>에서도 싱글이지만 가족 속에 어우러져 그 싱글의 삶이 무디어 졌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의 은수 역시, 독립적 싱글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계적 확대 가족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은수는 독립적이라 하지만, 그녀의 삶은 그녀의 친정 부모와, 언니라는 모계적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다. 언니인 현수와 광모의 삶도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현수 가족의 그림자는 짙다. 그런 한에서, <세번 결혼하는 여자>가 대안으로 내세운 '싱글'은 제한적이다.

또한 대부분의 목적 의식을 내세운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자신의 주제를 완성하기 위해, 작품성의 매끄러움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듯이, <세번 결혼하는 여자> 역시 오은수라는 똑부러지는 삶의 여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 캐릭터들을 훼손했다. 

이혼을 했음에도 한결같은 오은수 바라기였던 전남편 태원은 갑자기 새로 결혼한 채원(손여은 분)이 가정 폭력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자 태도를 돌변한다. 심지어, 은수를 찾아가 함께 하는 행복 운운하는 오지랖까지 펴는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세번결혼하는여자’ 손여은, 송창의 아이 임신에 ‘행복한 입덧’

오은수를 제외한 또래의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사이코에 가까운 행동을 보이던 채원은 남편의 사랑을 찾자 공주가 되었고, 알콜 중독에 헤매던 다미 역시 준구의 사랑 속에 사랑스러운 천사가 되었다. 은수가 독립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동안, 그녀 주변의 여성들은 가장 의존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얻는다는 결론은, 여주인공의 선택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마치, 작가가 저런 의존적 인물은 저런데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여주인공 같은 사람은 아픔을 겪더라도 독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묘한 '선민 사상'을 가진듯이 보여 드라마적 일관성을 놓친 듯이 보였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삶이 저렇게 아롱이 다롱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지막회, 행복을 찾은 채원과 다미의 캐릭터는, 그간 그들이 드라마 내내 보여주었던 돌출적 캐리터의 결론으로는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보다 아쉬운 것은, 여성 캐릭터가 독립적인데 반해, 드라마 내내 일관되게 한심해 보였던 남성 캐릭터들이다. 마치 작가가 '쯧쯧쯧' 하며 바라보듯이, 그 캐릭터를 연기했던 배우들이 불쌍해 보일만큼, 수동적인 남성 캐릭터의 존재는, 비록 작가가 바라보는 이 시대의 대다수 남성이 그렇다 하더라도, 영웅 드라마의 감정 과잉의 영웅만큼이나, 단편적인 캐릭터로 일관된다. 충동적인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듯이 보였던 준구가 마지막 회 다미와 함께 행복해 하는 모습은 그가 그간 보였던 불성실을 사랑으로, 혹은 삶의 아이러니로  설명하기엔 역부족이다. 

분명 김수현 작가가 <세번 결혼하는 여자>를 통해 결혼과 이혼만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이 시대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오은수의 삶을 선택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리를 서는 듯한 스토리는,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설득은 되지 않는 껄끄러운 선동문으로 남는다. 


by meditator 2014. 3. 31. 01:47

3월 29일 방영된 <인간의 조건>, 여섯 남자 멤버의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 

마지막 소회를 밝히는 자리에서 김준현은 말한다. 처음엔 미션이 주어지면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하며 당황했었는데, 어느 지점을 경과하면서, 어떤 미션이 주어지더라도, 오늘 하루 요렇게 요렇게 보내면 되겠다는 깜냥이 생겼었다고. 그런 김준현의 말에 정태호가 덧붙인다. 그래서 우리가 그만하게 되는거야! 라고. 

여섯 멤버들이 회고한 시간처럼 파일럿 방송으로 '핸드폰, 컴퓨터, 텔레비젼 없이 살기' 이래, 화제가 되었던 '원산지 음식만 먹고 살기', '쓰레기 없이 살기' 이래, 마지막 '최소한의 물건으로만 살기' 까지  인간의 조건, 문명 사회에서 보다 나은 인간적 삶을 지향하며 여섯 남자들이 한 집에 모여 살며 여러가지 미션을 수행하여 왔다. 

하지만, 깜짝 미션의 등장, 그 미션으로 인한 멤버들의 '멘붕', 그리고 혼돈 속에서 미션을 받아들이고, 수행하는 메뉴얼의 형식을 답습하다, 그것의 한계를 게스트로 넘어 보려고 했으나, 그 조차도 여의치 않자 결국 기존의 멤버를 1기로 치며, 멤버 교체의 단호한 결정에 이르게 되었다. 언제인가 부터 <인간의 조건> 멤버들은 그 어떤 미션을 해도, 함께 모여 밥먹고 놀다 잠들고, 뒹굴거리는 것이 화면을 채워가곤 했으니까.

멤버 본인들은 말하기 부끄러워 했지만, 작년 연말 시상식에서 '실험 정신상'을 받을 만큼 <인간의 조건>이라는 포맷이 가진 예능으로서의 건강성이나, 독창성은 독보적이다. 하지만 결국 멤버 교체라는 강수를 두게 될 만큼 프로그램은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무엇때문일까?


무엇보다, 인간다운 미션이라는 범주의 한계가 있겠다. 핸드폰, 텔레비젼, 컴퓨터 없이 살기, 쓰레기 없이 살기라는 강수를 넘어설 화제를 불러 일으킬 미션이 더 이상 없다는 판단이 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멤버들이 새로운 미션에 대비하여 스스로 추측하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집없이 살기 등의 미션은 아직 해보지도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찾아보면 얼마든지 인간다운 삶을 고민해볼 미션의 여지는 남아있다라는 생각은 든다. 

물론 <인간의 조건>이 가지는 프로그램적 특성이 크기는 하지만, 매년 '무도 가요제'등을다른 버전으로 활용하는 <무한도전>이나, 똑같이 여행가고, 놀이하는 방송이지만, 몇년 째 계속되고 있는 <1박2일> 앞에서 미션의 한계를 운운하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젠 어떤 미션을 해도 새롭지 않는 그 진부해진 방송 내용의 한계가 아닐까.

그렇다면 앞서 지적했듯이, 이제는 어떤 미션을 들이대도 능수능란하게(?) 해치워버리게 된 멤버들의 문제일까? 아마도 제작진이 생각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여기에 방점이 찍히는 듯 하다. 

하지만 오히려 익숙해진 멤버들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제작진의 책임이 크지 않을까? 더구나, 같은 멤버 김준호가 <인간의 조건>에 비해, 새로 시작한 <1박2일>에서 훨씬 활약이 큰 것을 보면, 누가 하느냐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 누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케이블 방송 <삼촌 로망스>의 양상국도, <인간의 조건> 양상국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 박성호, 김준호, 김준현, 정태호, 양상국, 허경환까지, 각자 많은 가능성을 가진 우수한 멤버들을 데리고, 파일럿 방송을 했던 나영석 피디이상 그들의 능력을 끌어내지 못한 것이 오늘날 <인간의 조건> 멤버 교체의 가장 결정적 원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여성판 <인간의 조건>이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서, 신선한 인물들의 공급으로 지금의 지지부진한 상황을 극복해 나가겠다고 생각한 듯 한데, 그것은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크다. 단 2회만 한 여성 멤버들의 신선함이라는 것이, 그저 이벤트 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즉, 그들은 기존의 남자 멤버들이 존속하는 한에서, 가끔 먹는 특식으로서의 신선함이었다는 것이다. 남자 멤버들의 초반 화제성 지속 기간만큼 그들이 화제성을 유지해 줄지 벌써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구나 29일 방송에서 정태호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조건>을 하면서 남은 것이 미션을 통한 인간다운 삶보다는 마치 친형제와도 같은 멤버 상호간의 관계라는 정의처럼, 그간 이들 멤버에 대한 정으로 본방 사수를 했던 <인간의 조건> 시청자층이 기존 멤버가 싹 물갈이 된 상태에서 기존 멤버가 하던 미션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은 새 멤버의 <인간의 조건>을 여전히 충성도 높게 보아줄 지도 미정이다. 

오히려 지금 <인간의 조건>에 진짜 필요한 것은 어떤 미션을 해도, 늘 똑같은 미션같아 보이는 제작 스타일의 문제가 아닐까, <1박2일> 시즌3의 서울 특집처럼, 그간 여러 번 갔던 서울이라도 전혀 다른 감상을 주었던 그런 변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 누가 와도, 깜짝 쇼의 기간을 넘어서는 시청률의 충성도를 유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미션에 대한 보다 진지한 고민과 연구에서 비롯된 변화만이 지금의 <인간의 조건>이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넘어설 희망이 될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30. 12:16

음어집을 외우지 못해 컨닝 페이퍼를 만들던 풋내기 경호관, 당선된 대통령이 나를 위해 죽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대통령이 제가 모실 첫 대통령이라며 주먹을 앙다짐하던 새내기 경호관 한태경(박유천 분), 이제 그는 대통령(이동휘 분)이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 되어 대통령의 나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란 말을 실천하게 되었으며, 그를 우습게 보고 살려보내주었던 재신 그룹 회장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인물로 성장해 버렸다.


그렇게 성장해 가는, 아니 이미 부쩍 성장한 한태경이지만, 7회,8회를 거치며 그를 인도하는 건 이미 죽은 그의 아비들이다. 그의 아버지 한기준, 그리고 또 다른 아비 함봉수가 그에게 지시등이 되어 나타난다. 

(사진; 채널예스)

7회, 경호관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김도진이 있는 재신 호텔 스위트 룸까지 쳐들어 갔지만 눈앞에서 아버지의 기밀문서 98이 타버리는 것을 막지 못해 회한에 쌓여 소줏잔을 앞에 높고 앉아있는 한태경 앞에 경호실장 함봉수가 앉는다.
대통령을 암살하다 한태경의 손에 죽은 함봉수이지만, 지금 그의 앞에 앉은 함봉수는 그가 죽여야 할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경호관이 된 이래 경호관으로서의 그의 등대가 되어주었던 함봉수이다. 그런 함봉수가 말한다.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지만 자신을 쏘아 죽이던 그날처럼 다시 그런 순간을 맞이한다면 결코 망설이지 말라고 손을 내밀어 준다. 그리고 이제 세상에 그 누구하나 믿을 사람이 없는 한태경은 그 어느때보다도 애절하게 자신이 죽인 함봉수 경호실장의 손을 잡는다. 

장례식장에서 장례도 치루지 못한 함봉수 실장의 처지가 거론되자 냉정한 동료들과 달리 한태경은 그건 단 한 번의 실수라고 눌러 못박는다. 비록 동료 경호관들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한태경에게 함봉수 경호실장은, 그가 본능처럼 경호관으로서의 감을 되살려 낼 때마다, 그와 함께 등장해 그의 길을 밝혀준다. 비록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게 여전히 함봉수는 스승이다. 경호관으로서 그의 아비다. 그래서 그가 그 누구보다도 의지한 그의 아비가, 누군가에게 이용만 당하다 동료들에게조차 배려받지 못하는 개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 한태경은 더 견딜 수 없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한태경은 대통령의 입을 통해 아버지가 16년 전 사건의 진실을 알고 그때부터 줄곧 혼자서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고군분투하셨다는 사실을 전해듣고도 혼돈스러워한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비밀문서 98의 실체를 접하면서 아버지가 미처 밝히지 못한 채 죽은 그날의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그런 그의 행보에 유도등이 되는건, 그처럼 사건을 밝히고자 애썼던 아버지의 지난 모습이다. 

하지만 친아버지건, 정신적 아버지건, 그리고 상징적인 아버지 대통령까지, 그 아비들은 자신이 저지른 오류에 짓눌린 인생들이다. 98년 사건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함봉수는 그리도 냉철하던 경호관으로서의 이성을 저버린 채 그 시절 상관이던 참모총장의 마수에 이용당해 버렸고, 아버지 한기준은 사건의 내막을 모른채 다수의 사람들이 죽어간 사건의 자금 심부름꾼이 되어버렸다. 팔콘의 개라 자처하며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 앞잡이 노릇을 하던 이동휘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젊은 경호관 한태경이 떨쳐 일어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의도하건 의도치 않건 역사적, 사회적 과오를 범한 아버지들은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를 반성하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잘못된 방향이었지만 함봉수의 의도와, 아버지 한기준의 의도는 다르지 않다. 원치 않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주고자 한 것이다. 이동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한태경은, 시인 서정주가 뒤늦게 그리고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나의 아비는 노비였다 라며 자조하던 것과 달리, 아비들의 과거를 밟으며, 그들이 미처 밝히지 못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경호관의 경험을 상기할 때마다 등장하는 함봉수, 그리고 이제 과거의 진실을 마주하고자 나선 한태경에 한 걸음 앞서 홀로 움직이던 한기준을 보여주는 <쓰리데이즈>는 상징적이다. 
단지 앞으로 살아갈 세대에 대한 독려가 아니라, 여전히 끝나지 않은 아비 세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아비로써 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을 진중하게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법과 질서를 지키겠다고 하는 이동휘 대통령은 그래서 현실에 없는 가상의 인물이 아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되어 살아가는 바로 이 시대, 어른들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은 주저앉아서는 안되는 기성 세대와, 그런 어른들의 독려를 받은 젊은 세대가 힘을 합쳐야 겨우 또 역사의 한 고비를 넘을 수 있다는 게 <쓰리데이즈>가 힘겹게 내뱉고 있는 이야기다. 


by meditator 2014. 3. 28. 10:36

1회에서 5회를 거치며 상승세를 보이던 <쓰리데이즈>의 시청률이 7회 11.3%(닐슨)로 하향 곡선을 그었다. 전회 12.9%로 동시간대 1위를 차지했던 거에 비해 1.7% 하락한 수치이다. 동시간대 경쟁작인 <감격시대>가 1위를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감격시대> 역시 전회 12.1%에 비해 0.6% 하락한 상태에서  <쓰리데이즈>가 보다 하락폭이 컸기때문에, <쓰리데이즈>의 시청자들이 다른 드라마로 채널을 돌렸다고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보다는 6회에서 7회에 걸쳐 전개된 내용에서 <쓰리데이즈>의 하향 요인을 찾는 것이 정확하리라 본다. 굳이 한 회의 방송분에 따른 시청률을 분석해 보고자 하는데 그 이유는, <쓰리데이즈>의 시청률 하락 현상이 마치 우리 사회 정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반영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서 이다. 


(사진; 메트로)



<쓰리데이즈>가  정치 드라마였어?
5회 중반에서 6회 중반에 걸쳐 <쓰리데이즈>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의 축을 지나 본격적으로 98년 양진리 사건을 둘러싼 정치 세력간의 입장 차이를 조명하는데 주력했다. 
재신 그룹이라는 자본가가 정치에 어떻게 개입하고 있으며, 그와 함께 손을 잡은 여당 대표와 합참의장이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덮기 위해 현재의 대통령을 압살하려는 음모를 장황하게 설명해 나간다. 6회 마지막 합참의장이 건물에서 떨어져 죽는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7회, 드라마는 그 사건의 범인으로 추정되는 신규진 비서실장이 합참의장을 살해하는 사건에 집중하는 대신에, 그와 벌인 정치적 입장 차이를 보인 설전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그 이전에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자신과 동일시했던 대통령과의 입장 차이를 장황하게 보여줌으로써, 정치적 동지였던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길을 걷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애쓴다. 

그 장황했던 정치적 이견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장면은, 결국 <쓰리데이즈>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미스터리를 푸는 장르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치적 담론을 이 작품의 주제로 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드라마의 의도에 대해 여러가지 반응이 있지만, 가장 즉자적으로 나타난 반응 중 하나는 <쓰리데이즈>가 정치드라마였냐?는 반문이었다. 이 반문이 내포한 뉘앙스는 부정적이다. 그저 대통령을 저격한 범인을 찾는 재미로 드라마를 보아왔는데 골치아픈 이야기를 한다는 속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저격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다보면 당연히 정치적 내용이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을 텐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드라마를 통해 설명이 되기 시작하니 뜨악한 반응이 나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얼마나 '정치'에 대해 피로감 혹은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는 것도 고달프고, 매일 접하는 정치판도 시끄러운데, 굳이 드라마를 통해 그런 것을 또 복기해야 하냐는 볼멘 입장인 것이다. 

'나꼼수'를 통해 지난 총선 당시 정치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김어준씨는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당신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고민과 문제들이 결국은 정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신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된 존재로 규정되어버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사는 것도 힘들고 고달픈데 그런 거창한 문제까지 신경을 써야 되느냐는 것이 하나의 흐름이다. 그래서, 신문도 끊고, 뉴스도 포털에 나온 단신만 거들떠 봐도 감지덕지한 상황에서, 뉴스도, 다큐도 아닌 드라마에서 정치 이야기를 정색하고 논하니, 채널부터 돌리고 보는 식이 되는 것이다. 

(사진; 메트로)


정치 이야기도 하기 나름?
<쓰리데이즈>가 6회에서 7회에 걸쳐 폭로하고자  했던 정치적 속살은 묘하게도 지금까지 몇번의 선거를 통해 반복되었던 야당의 정권 비판과도 닮은 면이 있다. 드라마는 친절하게 반복 설명하면서 이동휘 대통령과 그들이 98년 당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다시 그것을 밝히려는 이동휘 대통령을 주저앉히고자 하는 지를 덧붙인다. 하지만 굳이 반복하고 덧붙이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아'하면, '어' 하고 안다. 벌써 그런 세월을 살아온 게 몇 년인데, 몰라서 이러고 있는게 아닌데, 드라마도, 야당도 뻔한 이야기를 반복하며 가르치려 든다. 

<쓰리데이즈>는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바로 잡으려는 옮은 어른과,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넘으려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이른바 '건전한' 역사적 시각을 다룬 드라마이다. 많은 젊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고, 시대와 자신의 삶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으면 좋겠는 드라마이다. 하지만, 좋은 주제와, 건강한 의식을 가진 드라마라고 해도, 그것만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마치 학창 시절 그 좋았던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시간이 지겨웠던 것처럼, 정치가 남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사실은 이런 거야를 곧이 곧대로 가르치려 드는 드라마에 채널을 고정하며 견딜 시청자가 얼마나 될까? 더구나 트렌디한 젊은이들에게, 자기 삶의 문제에 빠져있는 젊은이들에게 장광설이라니!

그 좋은 주제 의식을 드라마적 재미로 살리기 위해 한태경이라는 경호관의 신분을 지닌, 하지만 과거사의 책임을 지닌 아버지를 가진 젊은이와, 진실을 밝히려는 대통령을 극중 인물로 합류시켰지만, 그들이 드라마의 중심 스토리 밖에 빠져있고, 지금처럼 장황하게 주변 인물들의 입을 통해 주제에 접근하는 식이라면 인내심의 한계치를 넘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김어준의 <나꼼수>로 돌아가보자. 그렇다면 그때 당시 그렇게 원자화되고 개인주의화된 사람들에게 어떻게 정치 팟캐스트 <나꼼수>가 인기를 끌었을까? 재미가 있어서다. 그리고 듣다보면 비록 방송이라도 명확하게 딱 꼬집어 주는 사안들이 속시원하고, 선동적인 걸 뻔히 알면서도 끌리게 되는 것이다. <나꼼수>가 정치사에 있어서 어떤 평가를 받는가를 차치하고, 당시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붐을 이룬 것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멧 데이먼의 영화 '본시리즈'도 있다. 영화는 주구장창 싸움박질만 하는데도, 우리는 그 영화를 통해 미국이라는, 이 시대 절대 권력의 속살을 소름끼치게 절감할 수 있었다. 옳은 이야기를 하는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옳은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쓰리데이즈>도, 현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가르치려 들지 말고, 설명하려 들지 말고, 드라마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면 보여주어야 한다. '쟤네들이 이렇게 나뻐', '쟤네들한테 이렇게 당했네' 만 중언부언하지 말고, 그렇게 나쁜 얘들한테 우리는 이렇게 맞서싸우고 있어,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도 있어 를 보여줘야 보는 사람들도 신이 나서 맞장구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7회에 이르른 <쓰리데이즈>는 중간중간의 장황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덕을 더 많이 가진, 그리고 앞으로도 더 많은 훌륭한 담론의 가능성을 지닌 드라마이다. <쓰리데이즈>가 성공적인 드라마로 남아 이런 시도가 앞으로도 계속 더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장르물에도 불구하고, 기껏 어렵게 획득한 대중적 관심을, 주제에 대한 확신만으로,  안이한 전개 방식으로 놓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에서 몇 자 덧붙여 보게 된다. 


by meditator 2014. 3. 27.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