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ies in Lavender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말로 번역된 '라벤더의 연인'이라는 제목이 있지만, 어쩐지 대놓고 연인이라는 제목보다는 이 영화에는 원제가 어울리는 듯하다)

영국의 작은 마을 황혼의 삶을 안온하게 살아가고 있는 두 자매 쟈넷(매기 스미스 분)과 우슬라(주디 덴치 분)의 집 앞 해변에 한 젊은 남자(다니엘 브륄 분)가 폭풍우에 휩쓸려 쓰러진 채 발견된다. 기억을 잃은 이 남자는 두 자매의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자매 중 우슬라는 활기를 넘어 이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를 사랑하게 된다. 젊은 청년을 사랑하는 할머니라, 얼토당토 말도 되지 않는 설정이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할머니가 되어서도 여전히 소녀같은 감성을 지닌 우슬라가,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그리고 자신들의 삶에 청량제가 되어주는 이 젊은이를 사랑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영화를 보면 사랑은 결국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나이를 불문하고, 그 사람과 내가 조우하게 되는 그 감정의 어느 지점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영화 속에서는 일흔 살의 할머니도 앳된 젊은이를 사랑하는데 마흔 무렵의 사랑이 뭐 어떻겠는가. <밀회>는 대담하게 마흔 무렵의 사랑을 내세운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마자, 선재(유아인 분)가 보여지는 것도 잠시, 화면은 줄곧 정신없는 스케줄에 빽빽하게 돌아가는 혜원(김희애 분)의 일상을 담는다. 예술 재단의 기획실장으로 마사지를 받는 이사장 곁에서 오늘의 일정을 프레젠테이션하고, 당장 있을 연주회는 나 몰라라 젊은 애인과 호텔 방에 머무는 아트 센터 대표를 찾아가 온갖 모멸 섞인 투정에 뺨 싸다귀까지맞으면서도 일정을 순조롭게 진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자기 몫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내뱉는 남편의 지청구까지 사무적으로 능수능란하게 해결해 내는 능력자이다. 하지만 친구이자 상사인 영우(김혜은 분)의 독기어린 말처럼, 서한 재단 이사장의 마작 게임까지 불려다니는 실세이지만, 결국 서한 재단과 혈연으로 얽혀 있지 않아, 자신의 것이라고는 확실하게 없는 고달픈 '마름' 신세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상에서 만난 자신과 같은 병을 앓는 청년에게 간곡하게 치료를 권해주는 슬픈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다. 

이렇게 드라마 <밀회>는 언뜻 보면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듯한 여성 혜원의 삶에 숨겨진 틈을 열어보이며 이 여성이 충분히 자신의 삶에서 흔들릴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기에 공들인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이해 관계에 충실한 위선자들의 사회 속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혹은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빠듯하게 살아가는 혜원의 모습은, 그리고 그 속에 갇혀진 그녀의 또 다른 삶의 욕망은, 연주회 리허설을 엿보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고 마는 천재 청년 선재의 숨겨진 욕망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이물감이 없다는 것을 단 1회만에 <밀회>는 설득해 내고 있다. 그렇게 드라마는 혜원을 중심으로 그려냄으로써, 이 드라마가 중년의 삶에 밀려 들어온 사랑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출거라는 걸 밝힌다. 마치 파도에 휩쓸려 할머니들 집 앞 해변에 나타난 젊은 청년처럼, 혜원의 삶의 울타리 안에 선재란 청년이 던져진다. 

그렇다면 사랑하기 나쁘지 않은 나이 중년의 조건이 되는 건 무엇일까. 역시나 <밀회>는 그에 앞서 종영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주인공들처럼 중년의 나이임에도 전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있지 않다. 오히려 첫 장면부터 그 누구보다도 정력적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마흔을 넘은 나이가 전혀 사랑하는데 문제가 될 나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꽃보다 누나>를 통해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 김희애가 만들어낸 혜원은 더 이상 적역이 없다 싶을 만큼 우아하고 아름다운 중년이 그것이다. 드라마는 속옷 차림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는 몸매를 자랑하는 혜원이 된 김희애의 젊음을 충분히 부각하며, 중년이란 나이를 잊게 만들고자 분투한다. 거기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일찌기 치맛바람 강남 엄마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부담스럽지 않은 중년의 사랑으로 인기를 얻었던 전작 <아내의 자격>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녀의 사랑이 무리가 없을 거란 기대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사진; osen)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밀회>는 이른바 멜로 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휘황찬란하게 눈요기가 되는 재벌가에, 그들 사이의 암투에, 그에 못지 않은 음대를 중심으로 한 입시 비리, 거기에 한 술 더 얹어, 고급스런 클래식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드라마는, 맛깔나는 이야깃거리와, 눈과 귀가 즐거워진다. 멜로에, 치정에,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까지, 이만하면 고품격 멜로다 하고 내놓을만 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모와 조카 같은 혜원과 선재의 사랑을 얼마나 공감가게 그려낼 것인가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제 아무리 중년의 사랑이라지만, <아내의 자격>에서 동년배의 사랑을 넘어,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젊은 청년과의 사랑까지 우리 사회에서 어디까지용인 될 수 있는가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덧붙이자면, 처음 이야기를 꺼냈던 라벤더의 연인의 우슬라 할머니는 천재 청년을 고이(?) 보내준다. 그리고 청년의 첫 데뷔 연주를 보고 나온 할머니는 언니에게 말한다. 우리는 여기 까지라고. 물론 꼭 혜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가만이 이 드라마의 관건은 아닐 것이다. 선재와의 사랑을 통한 껍데기같은 삶을 벗어던지는 혜원의 자아 찾기, 그것의 지향점이 어디가 될 지, 그것을 얼마나 공감가게 그려낼 지가 아마도 <밀회>의 본질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by meditator 2014. 3. 18. 02:03

공교롭게도 kbs2의 대표적 예능 두 편에서 금연을 실천 중이다. <인간의 조건>과 <1박2일>이 그것이다.

지난 주부터 금연을 다루고 있는 <1박2일>의 경우, 이번 미션이 꼭 필요한 20가지 물건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게스트 박성관을 포함해 일곱 멤버 중 담배를 피는 김준현, 김준호, 양상국이 담배를 포기해야 해서 불가피하게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금연을 하게 되었다.
그에 반해, <1박2일>은 차태현을 제외한 그래서 대신 합류한 홍경민, 김주혁, 김종민, 김준호, 데프콘, 정준영 등이 담배를 피기 때문에 아예 작정하고 금연 섬이 증도로 여행을 떠나면서 금연을 주제로 내걸었다. 

피치 못한 선택이었든, 작정하고 내세운 주제였든 <인간의 조건>과 <1박2일>은 4박5일이라는 시간과 1박2일 동안 멤버들의 금연을 다룬다. 


	1박2일 방송 화면 캡처, 가위로 담배를 자르고 있는 사진
(사진; 1박2일; 조선일보)

삶에 밀착한 그리고 <1박2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기간을 금연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은 외압에 의해 금연을 하게 된 멤버들의 모습이 시시각각으로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삶에 꼭 필요한 물건을 택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담배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의 거부감, 그리고 당장 담배를 빼앗기고 난 후의 공허감과 분노,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자신이 의존하던 담배가 없어 보여지는 아노미 상태들이 고스란히 담긴다.
<인간의 조건>에 비해 짧은 시간이지만, 어쩔 수 없이 20가지 삶의 물품을 위해 포기하는 심리적 포기의 절차도 없이 다짜고짜 금연을 강권당한 <1박2일>의 멤버들의 반응은 보다 예능적이다. 마지막으로 담배 한 모금을 피기 위해 질주한다던가, 담배 한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 갖가지 꼼수를 피우는 모습이라던가, 그것을 지키지 못해 입수를 하고, 재판을 통해 흡연을 단죄하는 과정 자체가 그들은 절박한데 우리는 웃긴 전형적인 코미디의 모습을 지닌다. 

말 그래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묘미는 '리얼리티'이듯이, 즐겨하던 담배를 졸지에 빼앗긴 멤버들의 외압에 의한 금연 만큼 실감나는 상황은 없다. 담배를 피고 싶어하고, 어떻게라도 한 모금이라도 피려고 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그들이 절박할 수록, 그 절박함이 '리얼'하게 공감되기에 더 재미있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조건>이나, <1박2일>이나 그 어느 때보다 자신들이 의존하던 니코틴 성분이 떨어져 의욕도 없고, 무기력한 멤버들의 모습이 비춰지는데, 그것이 무능이나, 나태함이 아니라, 절박함으로 여겨져 수긍하게 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게임이라도 해서 흡연 욕구를 잊으려는 멤버들의 절박함이 안쓰럽기도 하고, 이기면 담배 한 가치를 달라고 애원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그까짓 담배가 뭐라고 저러는가 싶어 안쓰러운데 우스운 상황이 날 것 그대로 전해져 온다. 

그런데 문득, 과연 <인간의 조건>과 <1박2일>의 4박5일, 1박2일을 통해 금연을 일상에서도 실천하게 된 멤버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던져지는 것이다. 물론 단 12시간만 담배를 피지 않아도 몸에 니코틴이 사라지는 신기한 경험과, 운동을 하면 담배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교훈이 누군가의 금연 의욕에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조건>이나, <1박2일>의 금연 프로그램이라는게, 전혀 자의적이지 않았으며, 그 과정이 강권적이었다는데서 그것이 자발적 금연으로까지 이어질까 회의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조건>에서는 선택의 과정이 있었으며, 미션 자체가 대리 체험이라는 방식이기에 <1박2일>과 같이 분류하기는 어패가 있을 수 있다. 

'금연'을 처음 예능 프로그램으로 도입한 것은 <남자의 자격>이었다. 죽기 전에 해야 할 101가지 과제 중 아니 101가지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금연을 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남자의 자격>에서 금연은 지금 <인간의 조건>이나 <1박2일>의 금연과는 달랐다. 다짜고짜 금연을 해! 라는 외적 강권이 아니라, 평균 연령 40세를 넘은 멤버들의 건강 검진을 통해, 금연이 얼마나 그들에게 절실한 과제인가 공감을 통해 담배를 끊을 결심을 유도했다. 물론 그 과정에 지금 <인간의 조건>이나, <1박2일>에서 보여지는 제작진과 출연진 사이에 담배를 둘러싼 술래잡기 식 해프닝도 있었고, 역시나 몰래 담배를 핀 이윤석의 한겨울 입수 식의 '단죄'도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담배에 의존해 온 멤버들의 습관을 고치기 위해, 금연침도 맞고, 향후에도 금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가지 장치들이 조심스레 마련되었었다. 

(사진; 인간의 조건; osen)

그런 <남자의 자격>식의 금연에 비교하자면, <인간의 조건>과 <1박2일>의 금연 프로그램은 금연의 과정이 타율적일 뿐만 아니라, 금연에 대한 배려는 적고, 금연 과정의 괴로움이나 고통, 발버둥을 예능적 대상으로만 삼는 가학성에 치중된 듯이 보인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이제 담배를 피는 건 나쁜 일이다. 담뱃값에 수백 가지의 화학 성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암 등 각종 질병을 유발한다는 문구가 새겨질 만큼 담배가 나쁘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전히 담배를 '담배인삼공사', 이제는 이름도 멋들어 지게 'kt&g'를 통해 공공적으로 판매하고 있는 상황에서, 담배가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기호품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또한 사실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짜고짜 즐기던 기호품을 빼앗긴 멤버들의 모습은 흡사 문을 잃어버린 채 우왕좌왕하는 실험실 쥐를 연상케 되는 불편함이 한편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타율에 의해 자유 의지가 강탈된 상황을 보며 즐기는 가학성의 껄쩍지근함이랄까. 

물론 피지 못하게 선택해야 할 물품에도 들지 못하는 담배 없이 4박5일을 견딘, 혹은 격하게 운동을 하며 1박2일을 버틴 멤버들은 혼돈 속에서 결국 담배 없이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유호진 피디의 말대로 금연이란 것이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결국 담배를 끊어야 하는 것이기에, 때로는 그 어떤 설득보다 단칼에 끊는 과정이 더 중요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룻밤이 지나도록 여전히 호시탐탐 담배를 피울 계기를 찾는 멤버들의 모습에서 마치 게임이 나쁘니까 게임 그만해 라고 야단치는 부모님과, 그것을 피해 어떻게든 게임을 해보려고 전전긍긍하는 타율적 금기식의 훈육 방식을 보는 듯한 불편함이 남는다. 

중독된 게임이든, 화학 성분의 흡연 습관이든 분명 나쁜 것이다. 하지만 나쁜다고 해서 무조건 단죄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금연이라는 주제는 나쁘지 않았지만, <남자의 자격>에 비해 다짜고짜 던져진 과제에 우왕좌왕하는 하는 과정을 시청자가 즐기게만 만드는 <1박2일>의 그것은 조금 더 멤버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가 아쉬운 과정이었다. 


by meditator 2014. 3. 17. 11:03

드라마의 재방송이란 어떤 의미일까?

주말 혹은 일요일 한 나절 무료하게 거실을 뒹굴다 손에 잡힌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돌리다 어쩌다 눈을 맞추게 되는 그래서 시간 때우기 식으로 보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아니 그 조차도 이젠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젊은 층들에게는 별 의미가 닿지 않는 시간대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주말과 일요일, 약속을 차치하고라도 자리를 지키며 텔레비젼 앞을 사수해야 할 이유가 생길 지도 모른다. 본방 보다 더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재방송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바로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방송이 그것이다. 

<쓰리데이즈>는 5,6일 본방에 이어 9일 1시 5분부터 시작된 재방송을 회 별로 종결 없이, 광고도 없이, 1,2회를 연달아 방송하는 연방을 했다. 본방 방영 당시, 1회가 드라마의 도입부라 친절한 설명을 위해 극의 흐름이 늘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2회는 그에 비해 장르극으로서의 박진감이 살아났다는 평가를 받았던 <쓰리데이즈>는 일반적으로 드라마들이 재방 시간을 위해 편의적으로 그래서 때로는 흐름이 끊길 정도로 장면을 들어내는 성의없는 편집을 하는 것과 달리, 연방을 위한 1,2회의 톤을 맞춘 편집을 해냄으로써, 재방 그 자체로 마치 한 편의 완결된 스토리를 가진 영화와도 같았다는 호의적 평가를 얻었다.

(사진; 쓰리데이즈의 한태경; 스포츠 월드)

그런 성의를 다한 재방송 덕분인지 그 다음 주 상승세를 이어간 쓰리데이즈는 결국 13일에 동시간대 시청률 1위의 쾌거를 달성했다. 그런 <쓰리데이즈>를 벤치마킹이라도 하듯이 같은 장르물임에도 불구하고, <쓰리데이즈>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10%에 못미치는 시청률에 고전하고 있던 <신의 선물>도 15일 3,4회를 연방으로 방송하기에 이른다.

물론 연방이 모든 드라마에게 유리한 것은 아니다. 중간에 광고도 없이 한 호흡으로 드라마를 끌고 간다는 것은 자칫 드라마가 별 내용이 없거나, 지루해질 경우 오히려 이어진 다음 회까지 시청자들을 끌고가기는 커녕, 중간에 이탈하는 숫자를 배가시키는 위험성을 가지기도 한다. 즉, 그런 의미에서 드라마의 '연방'이란 일정 정도 제작진의 입장에서 드라마의 내용 자체로 시청자들을 설득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반영이기도 하다. 실제로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경우, 장르물을 좋아하거나, 드라마를 즐기는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방영이 되기도 전부터 화제가 되었던 기대작들이었으며, 매회, 드라마의 수준과 퍼즐같은 내용을 두고 수많은 리뷰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던, 단지 그에 비해 대중적 관심만이 부족한 그런 드라마들이었기에 연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구나 장르물의 경우, 추리에 추리를 거듭해야 하는 특성 때문에 중간 유입이 어려운 난점을 가지고 있는데, <쓰리데이즈>의 경우, 재방송 연방을 통해 극을 사건 중심으로 보다 명확하게 편집해 냄으로써, 중간 유입층의 증대를 가져왔다. 또한 지금까지 지난 회의 설명이나, 앞으로의 사건 전개를 위한 포석으로 상대적으로 늘어진 홀수 차와, 그에 반해, 사건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상대적으로 스릴 넘치는 짝수 회차를 함께 이어붙여, 한 편의 완결된 이야기 구조를 가짐으로써, 본방을 본 사람들 조차 재방이 본 것을 또 본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맛을 가진 작품으로 신선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여,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드라마란 입소문을 만드는데 일조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 신의 선물; 한겨레 신문)

또한, <쓰리데이즈>나, <신의 선물>의 경우, 장르물의 특성상 남여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급박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와중에, 섣부른 감정 양산을 오히려 드라마의 독이 되는 상황에서 본방에서 어설프게 끼어든 남녀 주인공 사이의 발라드 ost가 재방에서는 가차없이 삭제된 처럼, 이미 본방을 통해 방영되었지만, 다양한 사이트를 통해 올라왔던 시청자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 노력하는 제작진의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그저 보는 시청자층에서, 함께 만들어 가는 시청자층으로 시청자들을 적극적으로 견인해 내는 자세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본방을 통해 드러난 문제점들이 해결되어짐을 보임으로써 드라마적 완성도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줘 시청자들의 호의적 반응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렇게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의 재편집된 연방으로써의 재방은, 방송 트렌드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시도이다. 그저 시간 때우기 용 재방이 아니라, 재방이 그 자체로 새로운 재미를 부여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등장한 것은, 방송가에서는 보기 드문 시도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본방 시간조차 맞추기 빠듯한 제작 환경에서, 그리고 안이하게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트렌디한 작품들이 반복 제작되고 있는 상황에서, 용기있게 장르극을 편성하고, 또 그 장르극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위해, 본방에 이은, 재편집된 연방이라는 시도는 장르극의 발전을 위해 노력의 일환으로 고맙기 까지 하다. 부디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좋은 성과를 거둬서, 그에 뒤이은 야심찬 시도를 하는 드라마들이 많이 제작되기 바란다. 


by meditator 2014. 3. 16. 16:25
제목부터 생소했다. 근대 가요사라, 근대라는 말에서 쉽게 머리에 떠올려지는 건, 우리 역사의 근대, 그러니까,구한말에서 부터 시작해서 6.25 전쟁전이랄까, 그 시기가 떠올려 졌다. 하지만, <근대가요사 방자전>의 시점은 우리나라에 가요가 도입된 그 시점부터 거슬러 올라가니, 방송에서의 표현대로, 이미자, 남진 세대를 고대, 그리고, 90년대 이후를 현대로 잡고, 그 중간 세대, 좀 더 정확하게는 이선희가 등장하기 시작한 80년대 중반에서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91년도 사이의 지점을 말한다. <가요 무대>를 통해 고정 시청자 층을 확보하고 있는 세대와, <응답하라> 시리즈를 통해 재발견되는 90년대 음악들 사이의 풍성했으나, 이제는 <불후의 명곡>을 통해서나 가끔 들을 수 있었던 시대의 것들이 주인공이다. 

물론 이미 kbs의 <콘서트 7080>이 있다.  엄밀하게 70년대의 음악과, 80년대의 음악들은 이른바 70년대의 음악들을 '통기타 세대'라 통칭하여 부르는 것처럼, 음악적 부류에 있어 궤도를 달리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거기서 <근대 가요사 방자전>은 70년대 음악과 도맷금으로 합류되어지는 음악이 아닌 '젊음의 행진', '대학 가요제' '강변 가요제'로 대변되는 시절의 음악만을 집중적으로 다루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되돌아 보면 프로그램의 mc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고 앉은 발라드의 변진섭, 댄스의 김완선, 소방차의 정원관을 비롯하여,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젊은 가수들의 멘토로, 그리고 여전히 그 자신의 음악적 위엄을 자랑하는 이승철, 올 봄 새로운 앨범으로 기지개를 펴겠다는 이선희 등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의 면면 만으로도 풍성함을 넘어, 화려한 면모일진대, 90년대 음악이 '레전드'로 대접받는 상황에서, 그들의 음악을 배려하는 자리가옹색하다 못해 이벤트 성이 아니고서는 존재치 않았던 상황에서, 그 시대의 이야기와 음악을 길어올리겠다는 의도는 그 시도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며 현명한 선택이다. 더구나, 공중파가 아닌, tvn에서, 그것도 금요일 시간대에, <꽃보다 할배>에 이어, <근대 가요사 방자전>의 편성은, 그저 젊은이들의 방송이 아니라, 보다 폭넓은 시청자층을 '수거'해 가겠다는 tvn의 야심차고 영리한 전략의 일환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첫 방송을 마친 <근대 가요사 방자전>은 과연 애초에 의도한 그 시대의 공감대를 회복하는데 성공했을까?
80년대의 대표적 개그맨으로 평가되는 주병진을 중심으로, 박미선, 변진섭, 정원관, 김완선 등이 한 자리에 앉아 그 시대의 대표적 방송 연예 잡지 [tv가이드]를 화제에 올리며, 자신들의 데뷔 시절, 전성기를 통해 mc진을 소개하는 방식은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후일담'으로서의 프로그램의 성격이 분명해 진다. 군대 다녀온 남자들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술자리 군대 이야기처럼, 그 세대를 통과한 그 누구라면 익숙하게 고개를 들이밀 그런 공감 혹은 이제와 이야기 할 수 있어 새삼 솔깃해 지는 그런 이야기들인 것이다. 
더구나, '근대 가요 톱10'을 통해 그 자리에 mc로 자리한 변진섭이 무려 10위의 곡중에서 '희망 사항', '너에게로 또 다시', 그리고 '숙녀에게' 까지 세 곡을 올린 해의 가요 들 면면을 살펴보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풀어낼 이야기가 생각보다 풍성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근대 가요사 방자전>은 과거에 고착된 자신들의 위치를 면구스럽다는 듯이, '지금, 그리고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는 코너를 통해 현재와 과거 자신들의 활동 시기의 접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지금 못지 않은 부산 역에 내리면 3000 여명의 팬들이 기다렸다는 그 시대의 아이돌 소방차의 시절을 확인하는 놀라움과 달리, 선배라고 해서, 이제 와, 굳이 후배 개그맨들이나, 아이돌 그룹 들의 순위를 매겨 보는 것은 그저 선배연하는 의미 이상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더구나 아직 그 존개감이 검증되지도 않은 이 시대의 수많은 아이돌 그룹 중 유일하게 exo를 내세워 이미 레전드라 이름지을 수 있는 선배 사이에 끼워넣기 식의, 그 순위의 공정성 여부도 불명확한 상황에서. 오히려 그 코너에서 보다, 다른 코너에서 중간 중간, 그 시대의 이선희를 음색과 가창력에서 지금의 에일리에 비교하는 사례들이, 더 지금과 인터넷이 없던 그 시절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이었다. 

(사진; bnt뉴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선배 가수와 후배 가수가 한 자리에 모여 공감을 찾고 쌓아가는 <비틀즈 코드>와 비슷하다. 단지 <비틀즈 코드>와 다른 점이라면, 그 시점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젊은 세대에 맞춰지는 것과 달리, <근대 가요사 방자전>은 mc 진이 그 시대 사람인 만큼 그 시대의 시각에서 지금을 평가한다는 것을 달리할 뿐이다. 하지만 이미 첫 회에서 부터 덜컹거렸듯이, 과거의 인물들이 지금의 이야기를 하는 건,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성이 필요하다. 

첫 방송을 한 <근대 가요사 방자전>은 주병진을 가운데 자리 잡게 하고 메인 mc인양 하지만, 기실 방송을 이끌어 가는 것은 박미선이요, 거기에 살을 붙이는 건 정원관, 정원관이 보낸 토스를 받아 한 방씩 쳐주는 건 변진섭에, 잽을 날려주는 건 김완선이었다. 아직도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주병진은 중심이 되어 방송을 끌어간다기 보다는, 그 시대의 상징적 존재로 거들 뿐이었다. 앞으로 김태원의 합류가 예정될 이 프로그램의 mc의 면면은 그 시대 각장르를 대변할 사람들이다. 또한 구성 양식으로 보자면, <썰전> 의 후반부 '예능 심판자'의 그것과 유사하다. 결국 이 프로그램의 관건도 예능 심판자의 그것과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크다. 과연 흘러간 그 시대의 이야기를 어느 만큼, 적나라하게 '심판'할 수 있느냐인 것이다. 그저 그런 자기들끼리 우리는 그때 좋았지 라는 식이라면 익숙하지만 새로운 그 무엇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요, 친근한 이야기 속에서도 신선한 그 무엇을 전해준다면, 진짜 주병진의 방송 복귀작으로 남을 것이다. 


by meditator 2014. 3. 15. 11:26

대통령 이동휘 역을 맡은 손현주 씨가 인터뷰에서 당부했었다. 4회까지 봐달라고. 

손현주라는 배우가 결코 식언을 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드라마 <쓰리데이즈>는 4회에 이르러 증명한다. 4회에 이르러 이 드라마는 그간 3회 까지 진행되어진 이야기들이, 그저 본 게임에 앞선 에필로그였음을, 진짜 이야기는 이제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의 장엄한 팡파레가 울려퍼지듯이 웅장하게 펼쳐보인다. 

그렇다고  <쓰리데이즈>가 3회까지 펼쳐놓은 이야기들이 결코 소박하지는 않았다. 1회 서민의 생활을 살피기 위해 시장으로 나섰던 대통령이 다짜고짜 밀가루 세례를 맞는가 싶더니, 세 발의 총성과 함께 대통령이 사라졌다. 대통령 암살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긴가 싶더니, 불현듯 암살범이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시 다른 각도로 펼쳐진다. 암살 위험을 피해 도망간 것으로 여겨졌던 대통령은 음어의 비밀과 함께 피치못할 이유로 단 한 명의 수행원을 대동한 채 청주역에서 특별 검사를 만나려 했단다. 

그리고 드디어 4회, 3회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장황하게, 때로는 번잡스럽게 진행되었던 이야기들은 응집력을 가지고 한 곳으로 모아진다. emp탄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고를 만난 대통령은 의도하던 만남을 이루지 못했고, 특별 검사는 주식 조작 과정에 개입한 대통령의 비리를 조사하던 과정에서 발견한 탄핵감의 과오를 만천하에 밝힌다. 3회까지 몰두했던 대통령의 암살은 또 다른 거대한 음모 혹은 사건의 발화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다. 


3회 까지의 과정에서 절대악은 경호실장이었다. 사실을 밝힌 한태경에게 대뜸 총구를 들이밀은, 당당하게 자신의 거쳐였던 경호관저 2층에서 대통령을 겨누었던 그의 존재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4회에 들어, 그가 대통령을 죽이려 했던 98년의 사건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한태경의 아버지를 비롯한 자신의 측근들에게 진실을 가릴까 두렵다는 토로를 했던, 정신이 혼돈한 과정에서도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고 되뇌이는 대통령의 말에서, 우리가 그간 알아왔던 드라마적 진실이 시험대에 오른다. 

대통령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밝히고자 하는 사실이 진짜 진실이라면, 사명감을 가지고 폭로에 앞장선 특검의 진실은 무엇이며,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며 암살에 앞장선 경호실장의 진실은 또 어떤 것인가 의문을 남긴다. 만약 순조롭게 암살이 진행되어다면, 특검의 발표대로 모든 혐의를 뒤집어 쓴 당사자가 되어버린 대통령을 만드는 거대한 세력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다. 한 개인의 사명감에서 시작된 암살 시도가 대통령조차도 필요에 따라 제거해 버리려 하는 거대한 국가 전복 음모로 변모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국가적 음모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기에 드라마 <쓰리데이즈>가 그저 여느 블록버스터 급 장르물과 다르게 전율을 느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스포츠 한국)

하지만 <쓰리데이즈>의 매력은 단지 회를 거듭하며 스케일을 키워가는 블록버스터급 이야기의 스케일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안에서 놓치지 않는 고뇌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싸워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있다. 3회의 단 한 장면 등장했던 대통령이 기차 안에서 신참 경호원 한태경과 만들어 내는 훈훈한 장면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듯이, 거창한 이데올로기와, 막연한 불의가 아닌, 진실을 향해 순수하게 나아가는 인간의 본성,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인간미가 거대한 악의 세력에 대항하는 힘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심어준다. 결코 자기 자신 대신 누군가를 총알받이로 만들 대통령이 아니란 비서실장의 단언처럼, 긴박했던 사건들 속에서, 오래 뇌리에 남는 것은, 유언처럼 되새기게 되는 대통령의 나직한 하지만 단호한 진실을 밝히겠다는 선언이다. <싸인>, <유령>을 이어, <쓰리데이즈>까지 이어지는 이제는 '갓은희'라 칭송받는 작가 김은희의 세계관이기도 하다. 

<쓰리데이즈>는 또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아버지 세대의 과오로 인해 펼쳐진 사태에 휘말려 들어간 우직한 경호관 한태경과 그의 주변 인물들의 고군분투기다. 아버지 세대의 과오를 알고, 그것을 시정하려는 누군가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 사이에 던져진 아들 세대의 고뇌와 결정은, 곧,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실천적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재미는 있지만, 결국 보고 나면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괴로운 드라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단 4회 만에 기꺼이 <쓰리데이즈>가 요구하는 고행을 기꺼이 감내하게 만드는 드라마, 그것이 이제 비로소 시작된 <쓰리데이즈>의 힘이다. 


by meditator 2014. 3. 14. 02:07

<제왕의 딸, 수백향>이 애초에 기획했던 120부에서 줄어든 108부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드라마 시작 전에 논란이 되었듯이 백제 무령왕의 공주로 추측되는 인물 수백향을 역사 속에서 건져 올려 드라마화시켰던 <제왕의 딸, 수백향>은 역사 속에 그려진 일본으로 간 공주 수백향이 아니라, 픽션으로서의 출생의 비밀을 가진 수백향의 이야기를 그려내었다. 
굳이 역사적 사실을 뒤틀어 가면서까지 왕자에 이어, 공주에 이르는 이중의 출생의 비밀을 꼬아 놓은 드라마를 만들 이유가,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 층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을까 라는 질문에, <제왕의 딸, 수백향>은 대단원의 막을 내릴 즈음에야 그 답을 던진다. 

자신의 진짜 친딸 수백향이 설난(서현진 분)임를 알게 된 무령대왕(이재룡 분)은 하지만,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것도 잠시 병으로 인해 목숨이 경각에 이른다. 
움직이기도 힘든 몸을 이끌고, 자신에게 왕좌를 내주어야 했던 동성왕의 영전 앞에 이르른 무령왕은 백제를 평화롭고 풍성하게 만든 자신의 치세를 칭송하는 신하 내숙(정성모 분)에게 되묻는다. 진짜 자신이 백제의 주인이 맞냐고? 
그러면서 오히려 무령대왕은 진짜 주인은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내숙 당신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자신을 앞에 내세우고, 그 뒤에서 온갖 협잡을 마다하지 않으며 백제를 흔들리지 않도록 애쓴 당신이야말로 진짜 백제의 주인이 아니겠냐고. 내숙 당신은 아마도 필요했다면 나 조차도 충분히 이용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사진; tv리포트)

무령 대왕의 그 말은 내숙이 진짜 주인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개인의 행복을 포기한 채 백제의 군주로 살아야 했던 그의 회한을 내비친 말이다.  무령 대왕은 덧붙인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다음 생에 군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그리고 군주의 길을 잘 해내면, 다음 생엔 그 복으로 필부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라고. 한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절대 권력 군주를 <제왕의 딸, 수백향>은 대를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가 진행되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공주가 되려던 설희의 음모와, 그런 설희의 음모에 맞서서 자신의 길을 지키려 했던 굳굳한 소녀 설난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 드라마의 처음과 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령대왕의 역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왕좌의 길에 들어서기 위해 자신과 정적이 되고 만 집안의 딸인 채화(명세빈 분)를 잃어야만 했던 남자, 백제 왕족 사이의 정쟁을 막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야만 했던 아버지, 왕가의 혈통을 흐트러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동성대왕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며 그를 왕재로 길러내기 위해 애썼던 군주, 그런 무령 대왕을 그리기 위해 <제왕의 딸, 수백향>은 역사 속 수백향을 윤색시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원수라 칭해지는, 사랑했던 딸을 겨우 만났지만 그 아이를 다시 떠나보내야만 하는, 원수의 자식 앞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무령 대왕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 회한이 깊어보인다. 

그의 의붓 아들 명농의 길도 다르지 않다. 설난은 그가 무령 대왕의 친 아들이 아니라 더 이상 태자의 길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도 잠시, 무령 대왕에 의해, 철저하게 왕재로 길러진, 그래서 한시도 백성을 생각하는 군주의 마음가짐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를 지레 포기하고 만다. 무령 대왕이 자신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에 분노하는 것도 잠시, 마음으로부터 존경해왔던 무령대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게 태자로 키워진 명농의 길 역시 무령대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설난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지만 왕좌의 주인인 그는 백제가 우선이다.

그것은 결국, 우리 시대에 대한 반문이다. 권력과 권위의 향배는 늘 개인이나, 그가 선호하는 집단의 이해 관계를 넘지 못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세상에서, <제왕이 딸, 수백향>은 자신을 포기하고 고행의 길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진짜 군주, 지도자의 길이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일 드라마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난하게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이합 집산으로 세월을 보냈던 <제왕의 딸, 수백향>이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주제 의식이기도 하다. 


by meditator 2014. 3. 14. 00:57

장르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요즘 처럼 행복한 시절이 또 어디 있겠는가. 장르극이라고 한다면 미드(미국 드라마)나 일드(일본 드라마)를 다운받아보거나, 그게 아니라면 케이블을 찾아 헤매야 하는 처지일 터인데, 요즘은 당당하게 월화수목 장르극을 공중파에서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3월 들어 새로이 시작한 sbs의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가 그것이다. 보통 한 방송사에서, 그것도 월화 수목 드라마를 연달아 장르물을 편성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용감하게 sbs는 <신의 선물>에 이어, <쓰리데이즈>를 편성했다. 두 드라마는 비록 아직 시청률 면에서는 발군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 못하지만, 젊은 시청자 층을 중심으로 웰메이드라는 이른 평가를 받으며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선전 중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물이라고 해도 두 드라마의 궤적은 다르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 두 드라마의 장르물로서 따로 또 같은 묘미를 찾아보자.



1. 사건의 단초- 내 피붙이의 죽음을 파헤치는 주인공들
<신의 선물>에서 수현의 하나 밖에 없는 딸 샛별이가 연쇄 살인범에게 납치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쓰리데이즈>의 경호관 한태경의 아버지는 정체을 알 수 없는 트럭에 쫓기다 교통사고가 나서 죽음에 이르렀다.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의 두 주인공들은 누군가의 엄마로, 누군가의 아들로, 자신들의 피붙이가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그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두 드라마의 방식은 다르다.

<신의 선물>의 엄마 수현은 자신이 세심하게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딸이 죽은 강가에 몸을 던지지만, 그건 엄마에게 딸이 죽음에 이르른 2주 전으로 시간을 거스르는 '타임 슬립'의 계기가 된다. 엄마 수현은 딸이 죽기 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딸이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반면 <쓰리데이즈>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한태경의 아버지 한기준이 사고를 당한 날로부터 3일 간의 사건을 그려낸다.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 사건이 일어나고 3일, 그리고 그 후의 3일 까지의 3일 단위의 날짜들이 전쟁의 서막, 결전, 심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긴박하게 전개된다. 

딸을 잃을 지도 모를 엄마의 절박함, 순식간에 아버지를 잃은 경호관의 슬픔이, 장르극이라는 특정 분야를 넘어, 보편적 감성으로서의 공감을 호소하며 시청자들을 유인한다. 

2. 사건의 확산- 피붙이의 죽음을 넘어선 미궁 속으로 
하지만 내 혈육의 죽음을 파헤치고자 시작한 두 주인공들의 행보는 개인적 해원을 넘어 더 큰 범죄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된다. 

과거로 돌아 온 수현은 주변 사람들에게 미래에서 일어날 일을 이야기해 보지만 마이동풍이다. 그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엄마 수현이 선택한 방법은 샛별이을 데리고 도망치는 일이다. 하지만, 샛별이와의 도망도, 엄마가 버린 아이의 물건이 돌아오듯 결국 다시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 결국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범인이 샛별이를 제물로 삼기 전에 앞장서 연쇄 살인범을 잡는 것이다. 

<쓰리데이즈>의 한태경은 아버지의 죽음이 경찰의 조사대로 그저 졸음 운전에 의한 우연한 교통 사고로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와 발견한 흐트러진 집, 방금 누군가 빼내 간 듯한 기밀 문서, 그리고 자신의 집을 다녀간 대령의 죽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대령이 바로 시장에서 대통령에게 밀가루를 던지라 지시했던 인물로 밝혀지며, 필연적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게 되고, 죽어가던 대령이 암시한 대통령의 암살 음모에 끼어들게 된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암살 음모를 밝히려 뛰어든 태경은 암살자의 신분을 알게 되는 바람에 오히려 암살 음모의 조력자로 쫒기는 처지에 까지 놓이게 된다. 

딸이 죽기 까지 2주라는 시간에 쫓기는 엄마,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쫓기는 경호관, 두 주인공들이 시간과, 사람 들에 쫓기면 쫓길 수록 장르극으로서의 두 드라마의 재미는 배가된다. 


3. 장르극의 묘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가는 사건들
두 시간 짜리 영화라면 몰라도 16부작 정도의 긴 호흡의 드라마를 장르극으로 끌고 간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다. 그래서 케이블 등에서 방영되는 장르극 들은 대부분 전체적인 긴 호흡의 중심이 되는 줄거리에, 각 회차 별 해결이 되는 짤막한 사건들을 얹어서 감으로써, 그 문제점을 해결한다. <신의 선물>과 <쓰리데이즈>는 그런 장르극의 호흡에서 오는 문제점을 각각 자신만의 드라마적 묘미를 통해 해결해 나가고자 한다.

<신의 선물>에서 엄마 수현은 적극적으로 부녀자 연쇄 살인 사건에 개입한 결과 범인을 알아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추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다, 건물에서 떨어지는 범인의 손을 맞잡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4회 마지막 엄마 수현은 그가 죽어야 자신의 딸이 살아난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의 손을 놓는다. 그렇다면, 이미 4회를 통해 엄마가 그토록 애닳아 하던 사건이 해결되는 것일까? 하지만 4회에 이르러 오히려 드라마는 복잡해 진다. 엄마 수현이 개입한 사건들에게 제 아무리 엄마가 애를 써도 결국 피해자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결국 어쩌면 샛별이의 죽음도 막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불길한 복선이 드리우고,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타임 슬립 하기 전 굴뚝같이 믿었던 범인이 사실은 범인이 아닐 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오히려 엄마 수현이 사건에 개입하면서, 샛별이의 납치 사건은 그 이전에 알려진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그려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전혀 다른 얼굴이 비춰지기 시작하며 드라마는 다른 궤도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쓰리데이즈>는 전체적으로 한태경의 아버지의 죽음과 대통령의 암살 음모라는 두개의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2회 만에, 대통령의 암살범을 밝히는 배짱을 보인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꼬이고 돌아서 범인을 밝히는 것과 달리, 범인이 누군지를 밝히고, 오히려 주인공이 암살범의 조력자로 몰리며 쫓고 쫒기는 역할의 방향이 역전된다. 뿐만 아니라, 단 2회에 불과했는데도, 2회 동안 시청자들이 보았던 것을 의심하고 다시 돌이켜 복습하게 만드는 집중력을 발휘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미 2회에서 시장통 밀가루 해프닝의 목적이었던 대령의 음어 쪽지 전달이, 사실은 다른 메시지였다는 것을 3회에 드러냄으로써 드라마는 또 다른 행선지를 밝힌다. 대통령은 사라지고 없는데, 대통령이 나타날 지도 모를 청주역에 암살범과, 경호관들과, 그리고 한태경이 모이는 기막힌 퍼즐의 한 조각이 맞춰진다. 하지만, 겨우 몇 회지만 시청자들은 안다. 이것이 또 다른 퍼즐의 시작이라는 것을. 이렇게 한 회, 한 회 친절하게도 공개되는 퍼즐들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쓰리데이즈>의 충실한 '닥본' 시청자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4. 장르극의 재미 그 이상의 주제 의식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가 대단한 것은 우리나라 공중파 드라마에서 보기 드물게 장르극을 뚝심있게 밀어붙인 것만이 아니다. 

1회에서 양심적 변호사로 나오는 아버지와 그 못지 않게 의협심이 강한 어머니로 등장한 주인공 부부의 이율배잔적인 삶의 행태와, 대통령의 사형제도를 내세운 강성 정치적 공세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드라마가 그저 엄마가 살해된 딸의 죽음을 막는 단순한 사건에 머물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우리 사회 엘리트 지식인이자, 중산층인 엄마가, 딸의 사건을 파헤지면서 조우하게 된 진실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의 선물>의 잠재력이다. 

<쓰리데이즈>는 한 발 더 나아간다.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던 경호실장은 그것을 밝힌 경호관에게 선언한다. 대통령은 지켜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한 나라의 수반의 존재를 부정하고 들어가는, 그렇게 부정을 당하는 대통령이 주변 사람들 몰래 자신의 임기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하려던 일은 또 무엇이었는지,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지점이 어디인지 그것 역시 백척간두의 그것 마냥 아득하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복선은 3회 대통령 이동휘가 집어든 책 [높고 푸른 사다리]라는 공지영의 책이 대신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지킬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의 삶에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라는 책의 소개문이 어쩌면 이 드라마가 던지는 질문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신의 선물>이나 <쓰리데이즈>는 드라마의 형식적 측면에서도 근자에 우리 나라 드라마가 해왔던 시도를 한 발 더 뛰어넘은 용기를 낸 작품들일 뿐만 아니라, 그 주제 의식에 있어서도 공중파 드라마로서는 보기 드물게 묵직한 정치 사회적, 심지어는 철학적 수준의 질문들을 던지는 좋은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분명 이 드라마를 편성하는 측에서도, 이 드라마들이 그간 sbs를 끌어왔던 트렌디한 드라마들에 시청률로 버금가리란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처럼, 이 두 드라마는 여느 통속적 드라마들이 받는 시청률 운운의 평가만으로는 아쉽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면 감사하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그게 미흡하더라도, 2014년 대한민국 드라마 사의 한 획을 그을 소중한 드라마들임에는 분명할 것이라 지레 설레발을 떨어본다. 




by meditator 2014. 3. 13. 02:12

다시 공자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야겠다.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마흔은 불혹(不惑)이라고, 공자님이 말씀하신 불혹의 마흔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는 나이이다. 세상을 살 만큼 살아 세상 일에 이치를 터득한 나이, 그래서 더 이상 흔들릴 필요가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중년들 사이에 우스개 소리로 요즘의 나이는 예전 세대의 나이에서 한 십 여년은 빼야 현실감이 있다는 말처럼, 이제 우리 시대의 마흔은 더 이상 세상 이치에 흔들리지 않는 중후한 나이가 아니다. 그리고 드라마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는 바로 그런 전혀 중후하지 않은, 그래서 하염없이 세상에 흔들리고 그래서 더 살아볼만한 마흔먹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11일 종영된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여주인공들은 마흔 무렵의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답게 저마다의 행복을 얻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혼 후 생활고와 작가를 향한 꿈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정완(유진 분)은 시나리오 작가를 거쳐 드라마 작가의 꿈을 이루게 되었고, 기꺼이 그녀를 위해 결혼도 미루며 외조를 해주는 든든한 애인도 얻었다. 혹독한 시집살이와 가부장적인 남편 그늘에서 숨막혀 하던 지현(최정윤 분)은 잠시 첫사랑에게서 혼란을 느꼈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정을 되찾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셋 중에서 가장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루었지만 친구 정완이 사랑하는 사람을 낚아채려 할 만큼 결혼에 맹목적이었던 선미(김유미 분)도 결혼할 사람을 찾게 되었다. 대부분 환타지로 마무리되는 우리나라 드라마답게 세 주인공은 한껏 행복에 겨워 드라마를 마무리한다. 굳이 그녀들의 환타지적 행복에 발을 걸기에는 그간 마흔에도 여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이 드라마가 지향하는 바가 너무도 분명했었다. 

(사진; 서울 경제)

결국은 어쩔 수 없는 환타지적 결말보다는, 그간 이 드라마가 과정 중에서 보여주고 노력했던 마흔 무렵의 삶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 이혼도 불사했지만 아직은 그 무엇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작가 지망생에, 현실은 마트 아르바이트 사원인 정완, 친구들이 보기에는 부잣집에 시집 가서 치맛바람 날리며 자식들 공부 시키느라 여념이 없는 이른바 '강남 엄마'지만, 그 그늘에선 학대에 가까운 시집 살이에,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조차 숨기며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했던 과거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지현, 그리고 세 사람 중 가장 사회적으로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자기 중심적인 스타일로 인해, 사업적으로도, 우정면에서도, 연애면에서도 자기 사람을 얻지 못한 채 나이들어 가는 선미의 삶이 그것이다. 

결혼을 해도, 혹은 이혼을 해도, 홀로 살아도, 드라마가 그려낸 마흔 무렵의 삶은 '불혹'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안정'이라는 단어를 받아들이기에, 그녀들의 삶은 불완전했고, 그 불완전함을 수긍하기엔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그녀들은 젊었다. 이제는 그만하면 살만큼 살았다며 세상에서 물러나기엔 그녀들의 꿈은 여전히 팔팔하고, 사랑은 나비처럼 주변에서 팔랑거리며 그녀들을 유혹한다. 뿐만 아니라, 안정된 삶을 살기에 그녀들이 처한 조건은 너무도 불안정적이다. 사업적으로 성공한 듯 보이던 선미의 인테이러 사무실도, 안정적으로 보이던 지현의 결혼도 그 어느 것도 그들 삶의 안정성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몸소 보여준다. 

그래서 그 불안정한 흐름에 휘말린 그녀들은 자신의 삶을 새로이 선택하고 도전할 수 밖에 없다. 작가라는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어쩌면 불가능할 지도 모를 결혼에 도전하고, 가혹한 시어머니와 근엄한 남편이 만든 세계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 도전이 스무 살의 도전과는 같지 않다. 이제 막 드라마 작가의 꿈이 도래해도, 첫사랑이 눈 앞에 나타나 유혹해도 그녀들을 흔들지 않는 또 다른 좌표가 있다. 결국 지현을 가정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것, 정완이 흔들리면서도 그 중심을 잡게 만드는 그것, 그리고 결국 선미의 외로움을 보상해 주는, 그녀들의 피붙이이다. 

마흔 무렵의 그녀들은 이혼한 싱글맘으로써 딸린 혹같은 아이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젊은 날 자신처럼 원치않는 임신을 하게 된 사춘기 딸 때문에 좌절하고, 예상치도 못하게 들어선 아이때문에 혼돈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에게 딸린 혹들을 거부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더 아름답고 풍성한 마흔을 가꿀 수 있게 된다고 드라마는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것이 스무살, 서른 살 무렵의 풋내기 여성들과는 다른, 마흔 무렵의 여성들이 사는 또 다른 맛이라고. 

덕분에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의 정완은 아들과 함께,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와 결혼을 약속하고, 지현은 자신이 속해야 하는 곳이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선미는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연하남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불안정하고 혼돈스러웠던 그들은 성숙한 엄마로써 행복을 쟁취한다. 그리고 이제 진짜 불혹(不惑)의 삶을 즐기게 된다. 

이런 <우리가 사랑할 수 있으까>의 세계관은 jtbc라는 종편 방송국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 사회 중산층의 고뇌와 로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흔들리고 헤매여도 결국은 경제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다시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환타지, 그것의 충실한 실현이다. 


by meditator 2014. 3. 12. 01:43

한참 인기를 끌었던 <수상한 그녀>는 칠순의 말순 할매(나문희 분)가 우연히 청춘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고 스무 살 시절로 돌아간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단지 영정 사진을 찍고 나왔을 뿐인데, 말순 할매는 행색은 그대로이지만 얼굴과 몸이 꽃다운 젊은 처자(심은경 분)가 되어버렸다. 할매인줄 알았떤 자신이 젊은이가 된 사실을 우연히 마주친 앞 사람의 선글라스와 차창에 비친 모습으로 알게 된 할매는 기절초풍을 한다. 하지만 영화는 할매의 혼란을 그리 길게 끌지 않는다. 할매는 곧 자신의 '회춘'이 평생을 아들 하나 바라고 살았던 자신의 일편단심에 대한 '신의 선물'이라 여기고 젊음을 즐길 시동을 건다. 덕분에 영화는, 혼돈도 잠시 유쾌하게 할매의 젊음 탐방기로 접어들게 된다. 


타임 슬립물에서 빠질 수 없는 클리셰라 한다면 바로 이 부분, 타임슬립을 한 주인공, 과거 자신이 살았던 시점과, 현재의 시간을 거스른 시점 사이의 혼돈을 느끼는 상황일 것이다. 그것을 통해, 보는 사람들 역시 주인공의 혼란과 혼돈을 공유하고, 달라진 상황에 적응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낼 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계륵이기도 하다. 분명 꼭 짚고 설명하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긴 하지만, 그 설명이 작품의 만드는 사람들의 호들갑과 보는 사람들의 경악이 일치되지 않는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의 선물> 2회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샛별이가 죽은 장소로 가 자살을 시도했던 엄마 수현(이보영 분)은 아이가 죽기 2주일 전으로 돌아간다. 물 속에서 빠져나온 수현은 아이가 갇혔던 장소에 아이의 흔적이 없는 것과 전화를 통해 들려온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돌아온 집에서 깜짝 파티로 자신의 생일을 축하 해 주는 가족들을 통해 자신이 사건이 나기 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샛별이가 죽고, 자신이 죽으려 했던 사실을 악몽으로 받아들이려 했던 수현은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자신이 타임슬립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미래에 있을 샛별이의 죽음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사진; tv리포트)

주변 사람들에게 2주 후에 샛별이가 납치 당해서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리려 하고, 그게 안되니 샛별이를 데리고 도망가려 하고, 함께 죽을 뻔했던 기동찬(조승우 분)을 만나게 되고, 그와 아웅다웅하며 결국은 과거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하는 과정은 분명 <신의 선물>에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젠 어느 덧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400년을 살았다 해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시청자들에게 구구저절 장황하게 타임슬립의 파생적 문제점을 설명하는 과정은 가급적이면 짧으면 짧을 수록 좋았다. <신의 선물>을 보는 시청자들은 엉마인 수현만큼이나 과연 누가 샛별이를 죽였을 것인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엄마가 다시 물에서 살아나왔을때, 창고에 샛별이의 흔적이 없었을 때,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가 전화를 통해 흘러나왔을 때 이미 엄마 수현에게 시간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빨리 범인을 찾기 위한 기회로 돌아가길 바라는데, 드라마는 여전히 타임슬립의 혼돈과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답답해 진다. 

장르물의 관건은 속도이다. 여기서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그저 빠르게 진행시키는 의미에서의 속도만이 아니다. 긴박감을 줄 때는 주되, 시청자들의 사건 이해를 위해서는 풀어주는 강약 조절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의 선물> 3회는 필요한 건 알지만 초반의 타임 슬립의 혼돈에서 수현이 스스로 범인을 찾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시간까지의 나열식의 장황함이 마음 급한 시청자들로 하여금 딴 짓을 하게 만든다. 

물론 3회의 <신의 선물>이 장황함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결국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된 엄마 수현은, 결국 자신과 같은 처지의 기동찬과 함께 범인을 찾으려 한다. 잠시 재벌의 엄청난 재산에 현혹되었던 기동찬도 자신의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형의 사형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고, 그리고 잠시잠깐이었지만 샛별과의 조우를 떠올리며 수현의 수사에 합류한다. 그러면서 드라마는 다시 장르극의 긴박감이 살아나고, 해골 무늬 티셔츠를 입은 두번 째 피해자를 찾기 위한 혼돈스런 숨바꼭질을 시청자의 느슨해진 관심을 조이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 빗속에서 피해자를 찾기 위해 나선 수현의 목을 범인인 듯한 사람이 조여올 때 장르극으로서의 <신의 선물>의 묘미는 극대화된다. 

장르극의 딜레마다.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장르극에 있어, 방영 시간 내내 범인을 쫓을 수도 없고, 설명과 혼돈의 시간이 필요한데, 과연 그 배분과 깊이를 어떻게 해야 범인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이 된다. 그런 면에서<신의 선물>은 충직하게, 다큐멘터리 식으로 그 과정을 세세하게 짚어가고자 한다. 하지만, 엄마 수현이 과거에서 돌아와 남편 한지훈(김태우 분)이나 첫사랑 현우진(정겨운 분)들에게 미래의 사건을 토로할 때, 그저 두 사람 사이의 시간의 격차만이 아니라, 아내를 믿을 수 없는 남편, 그녀를 믿어주려 해도 믿어지지 않는 첫사랑,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하게 빚어지는 감정적 괴리감에 주목했다면 어땠을까. 사건의 용의자로써 남편, 혹은 첫사랑과의 감정적 이반이었다면, 수현이 벌인 혼돈의 시간이 타임 슬립물의 통과 의례가 아니라, 또 다른 실마리로 받아들여졌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동찬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을 거슬러 헤매는 기동찬 대신에, 형의 사형과 재벌 회장의 돈 사이에서 고뇌하는 기동찬에 촛점을 맞추면 어땟을까. 잃어버린 아이를 향해 질주하는 엄마, 거의 모노드라마처럼 연기의 묘미를 선보이며 독주를 하는 기동찬, 그들의 폭주 사이에 쉼표가 어디가 될 것인가에 따라 드라마의 묘미는 달라질 듯하다. 

하지만 이런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신의 선물>은 유괴되어 살해된 아이를 찾는 엄마의 타임슬립물이라는 장르적 선택에서 이미 비교 우위의 드라마이다. 치정과 막장, 로맨스가 아니고서는 드라마를 논하기 힘든 우리 드라마 시장에서, 보기 드문 반가운 시도이기도 하다. 어쩌면 굳이 장황한 3회의 리뷰 조차도, <신의 선물>에 보다 많은 관심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노심초사가 빚어낸 과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크다. <신의 선물>이 마지막까지 웰메이드 드라마로 남아, 장르극의 안착에 기여하길 바라는 맘이다. 


by meditator 2014. 3. 11. 08:49

2013년 10월 <마귀-파발을 달리다>를 통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소식을 전하던 파발꾼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길어올린 바 있던 드라마 스페셜이 이번에는, 죽은 자를 위해 소리내어 울 수 없는 양반을 대신해 울어주던 노비 곡비(哭婢)를 내세운다. 


곡비 단금(황미선 분)의 딸 연심(김유정 분)은 남을 위해 평생 울며 살아야 하는 그래서 정작 자신의 피붙이가 죽었을 때는, 진짜 울어야 할 때는 눈물이 말라 붙어 나오지도 않는 삶을 살아야 하는 곡비의 삶을 거부한다. 하지만 어미 단금은 그나마 그거라도 하면 연심이 평생 밥을 굶지는 않겠다는 신념 하나로 연심에게 곡비를 강요한다. 딸린 자식 때문에 곡비 일을 마다하지 않는 어미가 싫은 연심은 울음을 파느니, 차라리 웃음을 파는 기생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노비의 신분인 곡비는 기생에게조차 내처지는 미천한 신분일 뿐이다. 


하지만 거짓 울음을 울며 살고 싶지 않다는 연심의 결심은 몇 날 며칠을 기생집 청루각 앞에서 버티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실행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청루각 수기생 도화(임지은 분)의 아들인 양반 서출 윤수(서준영 분)와 조우하게 된다. 

<드라마 스페셜-곡비>의 얼개는 명징하다. 조선 시대 양반 중심의 사회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존재하지만 그 존재의 뜻이나 의지는 상관없이 조선이라는 계급 사회가 규정하는 존재로만 살아야 하는, 그래서 그런 존재로 인해 슬픔이 배태된 존재들을 조우시킨다. 울고 싶지 않지만 울어야 사는 곡비, 웃고 싶지 않지만 웃어야 사는 기생, 그리고 양반이라지만 어미를 기생으로 두는 바람에 그 누구도 그를 인정해 주지 않는 서출들이 <곡비> 를 통해 얽혀들게 된다. 

차라리 웃음을 팔겠다는 연심은 수기생 도화와 윤수의 악연을 알게 되며 웃음을 팔고 살아야 하는 기생의 고달픈 삶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꺽지 않았던 그녀는 아파서 곡비를 할 수 없는 어미 때문에 윤수의 집으로 끌려와 곡비를 강요당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죽은 형 대신에 이제는 상주로 나설 수 있는 윤수와 마주치게 되고. 이제야 비로소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게 되었다며 곡비를 부탁하는 윤수에게 연심은 당신이 바라던 것이 겨우 양반이었냐며 조소한다. 


하지만 결국 연심은 윤수 형의 영전 앞에서 울음을 토한다. 자신처럼 곡비가 되고 싶었다던 하지만 뱃속의 자기를 먹여 살리기 위해 곡비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던 어미의 사연을 듣고, 그 누구보다 처절하게 울음을 토한다. 

역사는 해석하는 자의 몫이다. 양반들 대신에 울음을 울어주야 하는 노비 곡비의 삶을 거부하는 연심은 태어날 때부터 신분의 족쇄가 강요되는 조선 사회적 인물(?)이라기 보다는 자아를 내세운 근대적 인간상이다. 더구나, 서출인 윤수에게 당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이냐라며 다그치고, 울음을 강요하는 문중의 양반들을 호통치며 자기 직업의 진정한 면모를 강조하며 토해내는 연심의 울음은 더더구나 '모던(modern)하다. 과연 역사적 현실로써 그 시대에 노비가 자신의 주어진 신분을 벗어나는 것이 '도망'이나, '죽음'이 아니고서는 가능한가를 질문해야 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양반들 앞에서 죽은 자식을 위해 진정한 울음조차 내지 못하는 위선을 호통치는 연심의 장면은 상상력을 넘어선 어불성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에 되살려지는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신분적 억압에 자신을 다해 저항하는 연심의 그 모습은 감동이 된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는 노비의 모습은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찾아헤매는 우리 시대의 역사적 자기 계발서와도 같다. 그런 모던한 의식의 연장 선상에서 <곡비>의 감동은 전해져 온다. 

역사적 사실과 해석의 위태로운 경계에 선 사극 <곡비>를 살려낸 것은 후반부에 들어선 배우들의 연기이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랴~' 라며 난봉가를 그 어떤 노래보다 구슬프게 불러대는 아직 소녀같은 하지만 그래서 그 누구보다 처연해 보이는 김유정의 연기는 울기 싫어 차라리 웃음을 팔겠다는 연심이 그 자체였다. 언제나 사극에서 그 발군의 매력이 돋보이는 서준영의 서출 연기도 안정적이었으며, 그를 뒷받침하는 기생 어미 임지은의 연기는 몇 장면에 지나지 않았어도 존재감이 두드러졌고, 곡비 어미 황미선의 연기는 처연했다. 

하지만 2014년에 들어서 새롭게 선보이는 드라마 스페셜 단막극 시리즈는 어딘가 어설프다. <곡비>의 초반 연심이 된 김유정은 극에 녹아들어 보이지 않았으며, 사극에서 안정적이던 서준영의 감정은 어색했다. 중반 이후 그들의 연기가 같은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런 불협화음들은 비단 <곡비>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토리가 상투적이거나, 맺음새가 어색하거나, 어딘가 한 가지 이상의 단점들을 몇 회 동안의 드라마 스페셜이 노정하고 있는 중이다. 과연 그것이 배태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몇 년 동안 반복된 드라마 스페셜의 인력과 소재의 고갈 때문인지, 그게 아니라면 7000 여 만원 정도에 불과한 제작비 때문인지, 만족도가 크지 않다. 물론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드라마 스페셜이 습작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요일 밤과 월요일의 경계에 선 시간까지 드라마 스페셜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습작을 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많은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애써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만 더 신선하고, 완결성 높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by meditator 2014. 3. 10. 08:47